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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5:51:29

민주화 운동/대한민국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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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항쟁 / 전국
6.29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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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과 범위
2.1. 민주화운동의 정의2.2. 민주화 운동의 범주
2.2.1. 반독재 민주화 운동2.2.2. 노동·농민·빈민 운동2.2.3. 민주화(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 운동2.2.4. 그 외
3. 역사
3.1. 1960년대: 민주화의 시작과 시련3.2. 1970년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암흑기
3.2.1. 유신 이전의 민주화운동3.2.2. 제4공화국의 성립과 초기 반유신투쟁3.2.3. 긴조시대와 반유신투쟁3.2.4. 종교계의 반유신 민주화운동3.2.5. 지식인-언론출판계의 반유신 민주화운동3.2.6. 문화예술운동과 인권운동의 태동3.2.7. 유신의 종언
3.3. 1980년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절정
3.3.1. 12.12 사태3.3.2. 5.18 민주화운동3.3.3. 더욱 치열해진 민주화운동3.3.4. 투쟁과 탄압3.3.5. 6월 항쟁과 민주화
4. 의의5. 특징6. 전망
6.1. 긍정적 의견
7. 북한의 민주화 운동8. 어록9. 기타
9.1. 기념사업 및 추모사업9.2. 민주화운동 사적지9.3. 민주화 운동 자녀 보상법안 추진
10. 관련 인물11. 관련 단체12. 관련 문서13. 참고 자료 및 연구 자료
13.1. 도서 자료13.2. 보고서 및 논문13.3. 자료집13.4. 영상 자료13.5. 인터넷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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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8년 MBC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개표방송에서 다뤄진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1]
본 문서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는 문서이다.

2. 명칭과 범위

2.1. 민주화운동의 정의

요컨대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자율을 확대시키고,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수호하고,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운동, 냉전체제·진영논리를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확보하려는 운동이나 통일운동, 민중의 생존권과 더 나은 삶을 위한 투쟁은 어느 것이나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한국민주화운동사> 총론 中[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제2조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시행령에선 민주화운동을 대통령령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해당하는 운동 목록은 3·15 의거, 4·19 혁명, 6·3 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유신헌법 반대운동,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및 6·10항쟁 및 행정안전부장관이 관계 기관 및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고시하는 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2.2. 민주화 운동의 범주

민주화 운동의 범위는 비단 민주화 운동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 말한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일반적인 사회 운동도 '민주화 운동'이라 볼 수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 외에도 사회적 민주주의, 경제적 민주주의, 일상적 민주주의 등을 위하여 진행되는 운동들도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의 범주는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2.2.1. 반독재 민주화 운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 운동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힌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표방해왔으나, 정치적 민주주의는 꽤 오랫동안 무시당해왔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역대 정권은 시대적과제였던 반공과 경제발전을 내세우며 개인의 권리를 제약했고 민주화 요구를 탄압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맞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학생, 지식인,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구성되었고, 이들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그러면서 국민들도 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이들까지 참여하면서 4.19 혁명, 부마민주항쟁,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 등이 발생했다. 이러한 운동의 발전으로 인해 1987년 대한민국은 정치적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2.2.2. 노동·농민·빈민 운동

노동자, 농민, 빈민의 생존권 문제는 굉장히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이다. 하지만 사회의 기본계층을 이루는 이 사람들은 독재정권과 산업화 아래에서 기본적인 권리들을 보장 받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노동조건에서 일했고, 농민들은 저곡가와 도시화로 고통받았으며, 빈민들은 저소득과 철거문제로 어려움에 빠져있었다. 이런 비인간적 조건에 맞서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조직해 '민주노조'를 지향했으며, 농민들은 농민단체나 운동가들과 함께 행동했고, 빈민들도 다른 민중들과의 연대를 시행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사회운동은 1970년대부터 시작되어 1980년 중후반 때까지 이어지다가 민주화 이후 폭발적인 성장과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특히 6월 항쟁 직후 노동자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 이들의 운동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2.2.3. 민주화(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 운동

1987년에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계속 운동이 이어졌다.[3] 그러나 1996년 연세대 사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로 기존의 주류였던 학생 운동권이 힘을 잃어가면서 대신해서 2000년대 이후 자연스럽게 시민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대중의 민주주의 의식이 조금씩 상승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2.2.4. 그 외

과거사청산·진상규명 운동 : 과거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근현대사 속에서 터졌던 폭력, 억압의 구조와 그 피해를 이해함으로서 민주주의 단계를 성숙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반부패·청렴운동 :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저항이나 청렴에 대한 요구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일어났을 땐 국민을 무시한 정권에 투쟁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는 국민을 무시한 정권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퇴진시키고, 민주적 절차에 따라 새로운 대통령( 문재인 정부)을 선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3. 역사

파일:한국민주화운동사.png

편집시 주의사항
- 위 하위문서는 통시적으로, 다방면에 걸쳐 서술해 놓았기에 개별 사건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관련 항목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 이 항목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언급된 사건들은 <한국민주화운동사>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및 수록된 것들을 우선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 3.15 의거, 4.19 혁명, 6.3 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유신헌법 반대운동, 부마항쟁,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및 6.10 민주 항쟁은 대통령령으로 공인된 민주화 운동이며, 이를 부정하거나 왜곡하는 행위는 법적 처벌될 수 있습니다. IP로 편집시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3.1. 1960년대: 민주화의 시작과 시련

3.1.1. 4.19 혁명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4.19 혁명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1.2. 제2공화국의 수립과 장면 내각

파일:허정(정치인).jpg
파일:attachment/Unseok2.png
과도정부 수반 허정 제2공화국 총리 장면
4.19 혁명의 승리 이후 국민들이 요구한 것은 새로운 선거와 선거사범 처벌, 부정축재자 처벌의 민주개혁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집권한 허정 과도정부는 3개월 내에 선거를 치르고 정권을 이양하겠다면서 수습에 나섰다. 그리하여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고, 부정선거와 관련된 사범들이 구속되었으며, 부정축재자의 자금도 회수되었다.. 하지만 허정 과도정부는 구속된 선거사범을 처벌하고 부정축재자에게 추징금을 거두는 것에 소극적으로 나왔다. 또 새로 구성된 내각도 이승만 정부에서 활동하던 자들이 대부분인지라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그럼에도 허정 과도정부는 3개월 간의 역할을 잘 해내었고, 사람들의 기대는 새로 구성되는 정부로 쏠렸다.

한편 국회에서는 개헌이 한창이었다. 개헌 후에 총선을 치를 것인가, 국회 해산 후 선거를 하여 개헌을 할 것인가에 대하 논란이 있었으나[4] 국회는 개헌 후에 선거를 하기로 결정했다.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내각책임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만들어졌고 압도적인 지지로 국회를 통과했다. 이 헌법을 바탕으로 1960년 7월 경에 치러진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대부분의 의석을 차지했다. 그렇게 구성된 의회에서는 장면을 총리로 한 장면 내각을 탄생시켰다. 대통령으로는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은 이승만 정권 때의 악법들을 폐지하거나 개정하였고, 지방선거를 실시하는 등 여러 민주적인 개혁에 나섰다. 하지만 창당 때부터 이어져왔던 계파 갈등이 계속 이어지면서 진통을 겪어야 했다. 게다가 선거사범과 부정축재자 처벌도 지지부진했다. 1960년 10월 초에 있었던 재판에서는 부정선거, 발포, 부정축재 등으로 기소된 사람들 대부분이 약한 형벌을 선고받았다. 이런 일은 국민들의 공분을 불렀고, 결국 10월 11일에는 분노한 4월 혁명 부상자들이 의회에 난입하는 사태가 터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의회는 '혁명입법'이라고 불리는 여러 법안들을 통과시키는데 나섰고 헌법도 개정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수사와 처벌은 여전히 미진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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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활운동을 벌이고 있는 서울대 국민계몽대
파일:합법화 투쟁에 나선 교원노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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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화 투쟁에 나선 교원노조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
한편 4.19 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어느 정도의 자유를 되찾으면서 사회 운동도 활발해졌다. 그 당시 사회운동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학생 주도의 자치조직들을 만들었다. 이승만 독재정권 동안 관제데모에 시달린 학생들은 더 이상 정부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자치학생회는 지금의 총학생회 역할을 하였는데, 제2공화국 동안 벌어진 주요한 사회 운동들에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거나 운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학생조직을 전국적으로 모으려는 시도도 있어서 1960년 7월에는 '대한민국대학생총연합회(대총련)'가 결성되었다. 또 '대한민국학생자치연합회'가 조직되어 대총련과 대립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학생들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협조한 어용교사와 어용교수들을 규탄하는 시위와 동맹휴학에 나섰으며, 실력이 없는데도 교원 직을 맡고 있는 무능교원들도 비판했다.[5] 더 나아가 모교의 부정부패와 비민주적 운영[6]까지 성토하며 시정할 것을 요구했다.[7] 이외에도 학외의 민주화운동에도 나서서 ' 국민계몽대' 등의 조직을 만들어 농촌 각지에서 계몽운동[8]을 벌였으며, 도시에서는 ' 신생활운동'을 일으켜서 '자립경제'를 주장하며 사치품과 양담배 불매운동, 커피 안 마시기 운동, 관용차 부정사용척결운동, 한미행정협정[9] 체결운동 등을 벌였다.

노동운동도 고개를 들었다. 그동안 헌법에 의하여 노동자들은 자신들 본연의 권리들을 지니고 있었으나 이승만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10] 또 노동조합도 '대한노총[11]'이라는 어용노조에 종속되어 있어서 제 힘을 펼치지 못했다. 이에 1950년대 후반부터 노동조합의 개혁을 요구하는 세력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을 결성했으나 그 힘이 미미했다. 그러던 차에 4월 혁명이 터지고 이승만이 물러나자 이 개혁적 성향의 노동조합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은 협의를 거쳐 1960년 11월 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합회(한국노련)'을 결성했다. 이렇게 결성된 한국노련은 예전의 대한노총처럼 마냥 어용적인 단체가 아닌 보다 진취적인 노동운동 단체였다.[12][13] 중앙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 지방에서는 각 노조 별로 노동조합을 개편하고자 하는 운동이 활발해졌다. 또 노동조합이 없었던 곳에서도 노동조합을 결성하기 시작했다.[14] 이로 인해 노동쟁의 또한 증가하여 1959년 95건었던 노동쟁의 건수는 1960년 227건으로 늘었다. 대부분 어용노조, 부당해고, 열악한 노동환경, 부당한 대우에 대한 저항이 그 원인이었다.

노동운동 중에서 특히 교사들이 활동이 두드러졌다.[15] 교사들은 4.19 혁명 당시 학생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고 그들 나름대로의 교육 민주화에 대한 열망도 있었다. 그래서 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를 '교원노동조합(교원노조)'이라고 한다. 교원노조의 시작은 혁명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은 대구에서였다. 그 후 서울 등 여러 지방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고 점차 서로 합쳐졌다. 그리하여 1960년 7월이 되자 전국의 교원노조들은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의 이름 아래 어느정도 전국적인 조직망을 마련하고 대의원 회의를 열 수 있었다. 이 연합은 교육의 민주화를 지향하고, 교사들의 권익을 보장하려 했다. 그런데 허정 과도정부와 제2공화국은 이를 곱게 보지 않았고 이후 교원노조는 긴 시간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나서야 했다.[16] 연좌시위, 성토대회, 시위농성, 단식투쟁, 수업강행, 상경투쟁, 법정투쟁 등의 수많은 투쟁이 있었지만 결국 제2공화국이 끝나는 날까지 교원노조는 신고필증을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교원노조는 합법화 투쟁뿐만 아니라 교육 민주화를 위한 활동에도 나서서 사친회비와 잡부금 폐지, 학원 내 부정부패 척결, 어용교사 배척, 교과서 자유판매, 학생 예술문화 활동 활성화 등을 부르짖었다.

4.19 혁명 전에 있었던 각종 학살사건이나 암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1960년 5월에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던 면장 박영보가 지역 주민들에 대해 살해당해 불태워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신문에서는 각지에서 발생한 학살사건을 일제히 보도했고, 국회에서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에 나섰다. 피학살자 유족들도 힘을 합쳐 여기저기서 '피학살자유족회''를 결성했다.[17] 그리고 힘을 합쳐 1960년 10월 '전국피학살자유족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사건을 조사하거나 유해를 발굴했으며, 학살에 참여한 경찰과 군인을 고발했다. 또 학살당한 사람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내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해왔다. 학생들과 유가족들은 피학살자유족회를 조직하고 진상규명 단체를 조직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호소했다. 한편 1949년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던 김구를 추모하며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그리하여 진상규명투쟁위원회가 조직되고 검찰이 이를 수사하기도 했다.
파일: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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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시위대 밥 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
통일운동도 물꼬를 텄다. 이승만 독재정권은 집권 내내 '북진통일'을 주장해왔고, 이에 반하는 주장들을 처벌해왔다. 이로 인해 '평화통일'을 외치던 조봉암이 사형되는 등 혁신계는 타격을 입어야 했다. 하지만 4.19 혁명 이후 이승만은 물러갔고, 통일 논의를 제한하던 법령들이 폐지되거나 개정되면서 통일 논의는 힘을 얻었다. 혁신계는 물론이고 학생들과 시민들까지 동참하여 남북의 통일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그리하여 '중립화통일론'[18]과 '남북협상론'[19]이 신박한 통일방안으로 떠올랐다.[20] 이러한 논의에 힘입어 다양한 통일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다.[21] 이 중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이 유명했다. 진보적 단체, 혁신계 정당, 사회단체를 망라한 이 조직은 통일에 대한 논의와 통일운동에 전개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1961년으로 접어들면서 민족통일연맹이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했고 이를 북한 학생들이 동의하면서 또 한바탕 정부의 제지와 지지층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22][23]

이렇게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사회 각계 각층의 요구에 장면 내각은 잘 대처하지 못했다. 개혁의 속도도 매우 느렸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목소리를 억누르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장면 내각은 최근 들어 발생하는 통일운동 등에 위험을 느껴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이라는 2개의 법안을 제정하려고 했다.[24] 사실 집회와 시위를 규제하는 법안은 4월 혁명 이후에 제정된 바가 있었으나 그저 신고제로 되어 있는 간결한 법안이었다. 헌데 그런 법안을 더욱 보강하여 집회와 시위를 더욱 규제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각계의 비판에 직면했다. 혁신계는 물론이고 보수 성향의 정치인과 신문들까지도 이 두 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놓지 않았다. 특히 혁신계와 사회운동세력은 장면 내각의 이러한 행보가 자신들을 탄압하려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합심하여 '악법반대 전국청년단체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 2대악법 반대투쟁'에 나섰다. 혁신계 정당과 통일운동단체들도 '반민주악법 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했다. 이후 이들의 주도로 반대시위가 거세게 일어나 1961년 3월부터 4월까지 계속 이어졌다. 여기서 시위대는 장면 내각의 극단적 반공주의를 매섭게 질타했다. 이 중에 1961년 3월 22일에 열린 '반민주악법대성토 대강연회'가 매우 컸는데, 여기에 참가한 군중은 1만 5000여 명 정도였고 혁신계 정치인 등이 참여했다. 결국 이러한 저항으로 장면 내각은 두 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국가보안법만 강화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렇게 활성화된 각계의 사회운동은 수많은 활동을 펼쳤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정부에 잘 전달되지 못했다. 게다가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 또한 짧았다. 4.19 혁명이 터진 지 1년 후에 발생한 군사정변으로 인해 거의 모든 사회운동이 된서리를 맞고 만 것이다.

3.1.3. 5.16 군사정변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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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4230_3577_2447.jpg
박정희와 쿠데타 군인들 재판을 받는 조용수와 민족일보 임원들
1961년 5월 16일 새벽 일단의 군인들이 한강 인도교를 건너 각 공공기관을 점령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들은 새벽 5시에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은인자중하던 군인들이 마침내 '군사혁명'을 일으켰다고 밝히고는 혁명공약[25]을 발표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병들이었다.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계엄령을 선포했다. 충분히 진압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을텐데도 제2공화국은 대응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고, 결국 장면 내각이 총사퇴함으로써 쿠데타는 성공한다.

쿠데타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로 개편하여 군정을 실시했다. 군정 초기 동안 군부는 정보 기관인 ' 중앙정보부'를 조직했고, '반공법'[26] 등을 만들었다. 이후 쿠데타 세력은 강압적인 통제를 시작했다. 정치인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신문과 잡지는 폐간되었다. 군부는 ' 혁명재판'이라는 것을 열고, '반공'을 내세워 사회운동가들도 처벌했다.[27] 이 때 혁신계 정당, 사회운동단체, 통일운동단체 등은 크나큰 타격을 입는다. 민족일보를 발행했던 조용수와 사회당 간부 최백근은 간첩 혐의로 몰려 사형당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중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진상규명운동의 경우에는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고 유족회가 세운 추모비는 박살이 났다. 노동운동도 침묵을 강요받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통합되었다.

제2공화국 동안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던 선거사범들을 처형하고, 부정축재자들을 연행해서 부정축재액을 환수했다. 또 부정부패와 관련된 공무원들을 해임하고 정치깡패들을 조리돌림시켰다.[28] 또 댄스홀, 다방, 찻집, 술집, 윤락가 등을 폐쇄시키고 사치품을 불태웠다. 학생들의 신생활운동과 비슷하게 '재건국민운동'이라는 걸 시행하기도 했으며 농민들의 고리채를 낮추기도 했다. 소위 '구악'을 일소하려고 드는 쿠데타 세력에 국민들은 처음에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 4대 의혹 사건을 비롯해 새로 권력을 진 쿠데타 세력과 관련된 비리가 터졌고, 이를 두고 누군가는 "구악을 뺨친 신악"이라며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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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연장 반대시위 1963년 대통령 선거 포스터
1961년에 시작된 군정은 2년 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군정에 대해 비판적으로 나왔다. 쿠데타 세력도 처음 약속한대로 민정 이양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민정 이양' 준비는 조금 이상했다. 새로운 정당 설립이 막후에서 시작되고, 새 헌법이 비밀리에 초안이 잡혔다. 이미 1961년부터 쿠데타 세력은 민정 이양 이후에도 자신들이 집권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29] 그에 맞춰 1962년 새로운 헌법이 통과됐다. 이 헌법은 단원제 의회와 대통령제를 골자로 했다. 1963년부터 정치활동이 어느 정도 다시 허용되면서, 쿠데타 세력은 군복을 벗고 정치에 참여하고자 했다. 특히 쿠데타 세력의 최고 격인 박정희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는 야당 정치인들의 반발을 맞이해야 했다. 그런가하면 쿠데타 세력도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가 파벌싸움으로 인해 흔들렸다.[30] 이에 박정희는 민정을 불참하겠다는 처음의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박정희는 군정을 부득이하게 연장할 수 없게 되었다면서 몽니를 부렸다. 그는 일단 자신의 민정 참여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군인들을 반혁명세력으로 몰아 쫓아냈다. 그리고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이 민정 이양을 반대하고 군정 연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마지 못한 듯 1963년 3월 16일 군정 연장에 대한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의 이런 태도에 야당 정치인을 비롯해 학생, 시민, 언론도 군정 연장을 반대하며 저항했다.[31] 미국도 반대를 표시한터라 박정희는 군정 연장 성명을 슬그머니 철회한다. 박정희는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는 말과 함께 군복을 벗고는 자신이 만든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63년 10월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전 대통령 윤보선과 대립했다. 윤보선은 박정희에게 사상이 불순하다며 사상논쟁을 한바탕 벌였지만 이는 자신에게 역효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근소한 표차로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3.1.4. 한일협정 반대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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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회담의 주역, 김종필 오히라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이드냐
민족사는 바야흐로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전환기에 섰다. 4월 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세, 반매판, 반봉건에 있으며, 민족 민주의 참된 길로 나아가기 위한 도정이었으나, 5월 군부 '쿠데타'는 이러한 민족 민주 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 탄압의 시작이었다... 국제 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민족의 치떨리는 원수 일본 제국주의를 수입, 대미 의존적 반신불수인 한국 경제를 2중 예속의 철쇄로 속박하는 것이 조국의 근대화로 가는 첩경이라고 기만하는 반민족적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 우리는 외세 의존의 모든 사상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전국민의 희생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매판 자본의 타도 없이는, 외세 의존과 그 주구 매판 자본을 지지하는 정치 질서의 철폐 없이는, 민족 자립으로 가는 어떠한 길도 폐색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굴욕적 한일 회담의 즉시 중단을 엄숙히 요구한다.
한일 굴욕 회담 반대 학생 총연합회의 발표문

일제강점기에서 빠져나온 후 한일관계는 매우 나빴다. 일본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감정은 매우 적대적이었고, 이로 인해 한국과 일본 간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1950년대 들어 한일 간의 회담이 있었으나 번번이 파행이었고, 장면 내각 때는 잘 진행되는 듯 했으나 국민의 반발과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러던 한일회담이 군정에서부터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국이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라며 압박을 넣기도 했고, 박정희 자신도 정권의 부족한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고 느껴서였다. 일본도 한일회담에 호의적이어서 1961년 10월부터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다. 회담은 1964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한일회담의 강행은 국민들의 불만을 샀다. 국민들은 아직도 일본에 대한 적대감정이 남아 있었고, 회담에서 진행되는 논의에서 나온 합의도 만족스러워 하지 않았다. 협상 과정도 불투명하니 그 전모를 알 수 없었고, 일본에게서 받아 온다던 '청구권'에 대해서도 경제 종속의 위험성이 우려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 아래에서 국민들은 한국 측의 외교 태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했다. 거기에 5.16 군사정변과 군정에 대한 불만까지 쌓이면서 1964년부터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이 발생했다.

1964년에 들어서 한일회담은 거의 끝을 보였다. 그 해 3월 양국의 각료들이 회담을 연다는 소식이 들리자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설이 나돌았다. 야당과 지식인, 학생, 시민, 재야는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를 만들었다. 범국민투위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일회담을 비판하고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는 유세를 벌였다. 이 유세에 국민들이 호응하며 가는 곳마다 수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3월 24일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32] 학생들은 "민족반역적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고 결의하며 한일회담을 반대했다. 이들은 "제2의 이완용을 즉시 소환하라", "조국은 너희 일인의 것이 아님을 알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을 달래보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3월 25일부터는 시위가 전국의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번져 군중의 수가 4만으로 늘었다. 박정희가 특별담화를 발표한 26일에는 전국 11개 도시에서 6만 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27일에는 지방 군소도시에서도 시위가 번졌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박정희 정부는 김종필을 소환했고 학생들을 만나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비공식적으로 공개해 학생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자 시위는 수그러드는 듯 했다.

하지만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 뒤이은 박정희 정부의 부정부패 사건들과 학원사찰 사건[33] 때문이었다. 특히 학원사찰과 관련하여 학생들의 공분을 샀는데, 이로 인해 4월 17일부터 시위가 재개되었고, 4월 19일에는 4.19 4주기를 맞이하여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열띠게 일어났다. 시위는 24일까지 계속 되었고, 대학 총장들의 설득으로 시위는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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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굴욕외교반대' 피켓을 든 여학생 태극기와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선 시민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놓았다... 너, 시체여! 너는 그리하여 일대의 천재요, 절대의 졸작이었다. 구악을 신악으로 개악하여, 세대를 교체하고... 부정불하, 부정축재, 매판자본 육성으로 빠찡고에 새나라에 최루탄 등등... 안개 속으로 가거라! 시체여! 돌아가거라! 이제 안개가 걷히면 맑고 찬란한 아침이 오리니 그때 너도 머언 하늘에서 복받쳐 오르는 기쁨에 흐느끼리라... 그것은 목메이도록, 뜨거운 조국과 너의 최후의 악수인 것을! 우리는 안다.
1964년 5월 20일 김지하가 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조사(弔辭)

3월과 4월에 걸친 학생들의 시위에 박정희 정권은 주춤했으나 한일회담을 계속 진행했다. 개각으로 인해 김종필은 물러났지만 그와 가까운 정일권이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주장하며 회담을 밀어붙였다 그리하여 5월 말에 한일각료회담을, 6월에 본회담을 열기도 한일 양국이 협의했다. 이 소식을 들은 범국민투위는 시국강연회를 열어 정부를 거세게 비판했다. 학생들도 시위에 나서서 5월 20일에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집회를 준비했다. 1964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34] 이 날의 시위에는 15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장례식을 마치고 거리로 나가 경찰과 부딪혔다. 박정희 정권는 이 시위에 맞서서 강경하게 대응했다. 경찰들은 학생들을 연행하고 폭행한다는 명목으로 캠퍼스에 난입했고, 무장군인들은 법원에 들어가 주동자에게 영장을 발부하라며 난동을 부렸다. 또 그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었던 학생을 잡아가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대응은 학생들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곧 군인들의 법원 난입을 성토하는 시위가 발생했고, 박정희의 퇴진까지 요구했다.

5월 20일의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들이 당국의 탄압을 맞자 각 대학의 학생회가 그 뒤를 이었다. 전국의 학생회는 '난국타개 학생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박정희 정권에 대한 투쟁에 나섰다. 이들은 각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고, 대표들은 집단으로 단식투쟁을 감행했다. 이것은 당시 시위 문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투쟁 방식이었다. 학생들은 이에 동조해 단식투쟁을 함께 하기도 했고, 자신들도 새로운 시위 문화를 창조해냈다. 화형식, 투쟁가, 마당극 등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6월이 되면서 학생들은 시위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다. 6월 2일에도 대대적인 시위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어났다. 6월 3일이 되자 반대시위는 절정에 달했다. 서울대에서 시작된 단식에는 이미 400여 명이 참여하고 있었고, 서울에서만 1만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박정희와 김종필을 규탄하며 거리에 나왔다. 이 날은 비가 오고 있었지만 학생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시위를 계속 했다. 서울대 농대생들의 상경으로 시작된 시위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의 궐기를 가져왔다. 학생들은 여기저기에서 경찰과 충돌하며 세종로로 모여들었다. 중앙청이 있던 세종로에는 1만여 명의 군중이 운집해 있었다. 이들은 저지선을 치고 있는 경찰과 군인들을 향해 투석을 했고, 군경은 최루탄 발사로 대응했다. 그러나 학생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서 시위대는 3차 저지선까지 돌파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청와대를 포위한 채로 군경과의 대치에 들어갔다. 이 날의 시위는 마치 4.19를 방불케 했다.

이 대대적인 시위에 놀란 정부는 이 날 밤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군인들이 투입되어 거리에 몰려 있던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자정 무렵 시위대는 완전히 해산했고, 1200여 명의 학생,시민들이 체포되어 91명이 구속되었다. 이후에도 지방에서 시위가 계속 되긴 했으나 학교에는 휴교령이 떨어지고 정국은 얼어붙었다. 정부는 비상계엄 하에서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퇴학시키거나 정학시켰고, 일부는 내란죄로 기소했다. 또 학칙을 개정하여 학생들을 옭아매고, '학원보호법'이라는 걸 만들려고 시도했다. 박정희 정권은 언론을 싫어하여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고도 했다. 이 일련의 탄압들은 곧 여론의 비난을 사 전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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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으며 침묵시위를 하는 대학생들 학생시위 도중 도랑에 빠졌다 건져진 태극기

비상계엄의 선포로 인하여 전국을 뒤흔들었던 한일회담에 대한 저항은 '일단은' 봉쇄되었다. 하지만 한일회담이 계속 이행되는 한 불씨는 꺼지지 않을 것이었다. 한일회담은 비상계엄 때문에 무기한으로 연기되었으나 1964년 12월부터 미국의 개입을 통해 재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65년 2월 15일에 한일 양국은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에 합의했다. 합의된 협정을 가조인하기 위해 일본 외상이 방한을 했는데 이에 반발하여 범국민투위의 주도로 여러 번 시위가 일어났으나 그 때마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가조인도 2월 20일 이루어졌다. 그리고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쟁점인 평화선 문제까지도 한일 간의 타협으로 마무리되면서 4월 3일 한일회담은 마침내 타결되었다. 한일회담의 타결을 앞두고 3월 말부터 시작된 대학생들의 시위는 타결 이후 더욱 거세져 4월 13일 대규모 가두시위로 나타났다. 경찰이 강경하게 진압했지만 시위는 16일까지 이어졌다. 16일의 시위도 격렬했는데, 13일 시위에서 경찰의 폭력으로 입원한 동국대생 김중배가 15일 밤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이 날의 시위를 진압하고자 정부는 공군 정찰기와 헬리콥터까지 투입했다. 정부는 학생들의 시위를 막고자 학교에 휴교령과 조기방학을 내렸다. 한편 4월 17일에는 '한일회담반대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는데 4만여 명의 인파가 참여해 역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들 시위의 목표는 '한일협정 가조인 무효'였다.

한일협정 가조인을 완료한 한일 양국은 이제 정식 조인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이제 투쟁은 한일협정 조인 저지를 위한 것이 되었다. 5월 초부터 범국민투위의 주도로 궐기대회가 각 지방에서 열렸다. 한일협정 조인을 반대했던 학생들은 한일협정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알고 부당한 개입을 멈추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이런 저항에도 조인 과정은 착착 이행되었고, 6월에는 정식 조인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에 조인 저지를 위한 투쟁도 절박해졌다. 5월 29일 범국민투위는 '대일매국외교성토 민중시위대회'를 개최했는데 1만여 명이 모여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학생들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21일까지 전국 13개 대학에서 800여 명이 단식투쟁을 벌였다. 6월 21일에는 대학생과 고등학생 1만여 명이 학교별로 한일협정 반대를 외쳤다. 6월 22일에도 시위는 이어졌지만 군인과 경찰의 진압으로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이 날에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가두시위에 실패한 학생들은 교정 내에서 성토대회를 열었다.

마지막으로는 한일협정 비준이 남아 있자 반대운동의 모든 역량이 이를 저지하는데 동원되었다. 협정조인 다음 날인 6월 23일에는 전국 각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이 중 이화여대에서는 최초의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고 경찰에 의해 진압되자 100여 명이 100시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6월 말에도 대학생들의 시위와 단식농성은 멈추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이 방학을 모든 대학에 내려 시위를 중단시키려 했지만 학생들은 '한일협정비준반대 각대학연합체(한비연)'을 조직해 맞섰다. 허나 방학이라서 그런지 제 역량을 다 발휘하지는 못하고 7월까지는 야당 정치인의 드센 반대가 있었다. 7월 30일이 되자 한비연은 성명을 발표하고 실력투쟁에 나서겠다고 천명했다. 8월 14일 비준동의안을 여당이 단독으로 처리해버리자 학생시위는 되살아났다. 학생들은 비준의 무효화를 외치며 박정희 정권은 물론이고 여당과 야당 온건파까지 규탄했다. 이 시위는 8월 23일 개강 이후로는 점점 커져갔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시위를 엄단하겠다며 강경하게 나왔지만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를 매일 이어갔다. 결국 군인들이 각 학교마다 투입되어 학생들을 때려잡고 연행했다. 박정희도 직접 나서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여 학생들을 맹비난하고 ' 위수령'을 선포했다.[35] 그리하여 서울에 군인들이 진주하여 치안을 담당하게 됐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간간이 이어지는 학생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시위학생들에 대한 가혹한 처리를 진행했다. 이러한 탄압에 결국 학생시위는 힘을 잃었고, 한일협정 반대운동도 종말을 고했다. 학생은 물론이고 학생시위에 우호적이었던 교수들도 사표를 내는 형식으로 쫓겨났다. 야당 정치인들이나 사회 원로들도 곤혹을 치러야 했다. 반대시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의 경우에는 국가전복혐의를 적용받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한일협정은 1965년 12월 18일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결국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실패한 채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 운동은 민족주의를 고양시키고 민주화운동의 성장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3.1.5. 6.8 부정선거 규탄투쟁과 3선개헌 반대투쟁

한일협정 반대시위 이후 1965년부터 1966년까지 대규모 시위는 거의 없었다. 다만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과 관련하여 이를 비판하는 집회가 있었다. 야당과 학생,시민들은 사카린 밀수와 관련된 삼성 재벌과 박정희 정권을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다. 대표적으로 장준하가 박정희를 보고 '밀수 왕초'라고 부르며 날카롭게 비판했다. 학생들도 교내에서 성토대회와 규탄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밀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얼어붙은 학원가에 자유화를 요구했다. 지난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인해 제적된 학생들이 학교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다 1967년이 왔다. 1967년 6월 8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과 여당은 한 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정권과 여당은 이 기세를 몰아 한 달 후에 있을 총선에서도 승리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야당이 선거를 위해 1967년 2월에 합당을 한 것이었다.[36] 이는 공화당의 선거 승리에 있어서 큰 방해물이었다. 정권과 여당은 이번 총선에서 개헌선인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얻어 당시 헌법에 있던 3선금지 조항을 없애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자기들이 생각해보아도 얻을 수 있는 의석은 개헌선을 넘기 어려웠다. 이에 정권과 여당은 1960년의 이승만 정권처럼 총선 승리를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했다. 그리하여 선거법에 있었던 국무위원의 후보 지지 연설 금지 조항을 폐지했다.[37]

박정희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공화당 후보들을 지원하는 연설을 했다. 각 지역의 주민들 앞에서 그는 그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겠다며 떠들었다. 국무위원들과 공무원들도 동원되어 공화당 후보들을 총력으로 지원했다. 어디에서나 금권유세, 관권유세가 판을 쳤다. 경찰과 정보기관은 여당 후보를 비호하고 야당 후보를 핍박했다. 곳곳에서 야당 후보들이 구속되거나 위협을 받았고 야당 선거운동원이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런가하면 공화당도 국민들에게 막걸리와 고무신을 마구 퍼주었다.[38] 돈봉투도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쌀과 밀가루도 배포되는 등 온갖 부정이 선거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다만 정도의 많은 차이만 있었을 뿐 야당들도 조직적으로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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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이 폭로한 6.8 부정선거 백서 투개표 중의 부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1967년 6월 9일자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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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선거는 쿠데타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은 선거 다음 날인 6월 9일부터 시작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신민당원들과 시민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까지 참여하며 규모는 더욱 커졌다. 특히 야당의 분노가 강했다. 야당은 6.8 부정선거가 3.15 부정선거보다 더 심했다고 주장하며 규탄시위를 통한 강력한 투쟁을 예고했다. 6월 12일부터 야당은 장외투쟁에 들어갔고, 전국의 당원들이 학생, 시민과 합세하여 "부정선거 다시하라"고 외쳤다. 당원들은 '민주주의의 상여'를 메고 거리를 행진했고, '6.8 선거는 쿠데타'라고 외쳤다. 학생들도 거국적인 투쟁에 동참했다. 처음에는 학내 시위로 시작된 학생들의 투쟁은 점차 집회와 시위로 확대되어 갔다. 6월 12일에 서울지역의 각 대학들이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나서 6.8 선거를 규탄하고 경찰과 대립했다. 정부와 학교 측은 휴교령과 조기방학을 내려 시위를 잠재우려 했고, 본보기로 몇몇 선거구의 부정을 인정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고, 야당도 여전히 투쟁의지를 불태웠다. 야당은 6월 19일 당사 앞에서 규탄대회와 함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6월 21일에는 학생들이 '부정부패일소 전국학생투쟁위원회' 결성해 선거무효화를 위한 투쟁을 선도했다. 6.8 부정선거를 향한 분노는 7월에도 계속 되어 서울지역 대학생 외에도 지방의 대학생과 고등학생까지 참여했다.

격렬한 투쟁과 마주한 박정희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박정희 정권은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여러가지 시국사건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동백림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이었다. 예술인, 교수, 학생 등 194명이 연루된 동백림 사건은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보도되었다. 이들은 주로 유학하거나 외국에 주재 중인 사람들이었는데 북한과의 접촉은 있었으나 실제로 간첩행위를 하지 않은 경우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이를 '간첩 행위'로 부풀린 것이었다. 또 박정희 정권은 이 동백림 사건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영향을 미친 민족주의비교연구회와 연결하려 했다. 한편 통일혁명당 사건은 북한의 지령을 받은 사람들이 대학생과 지식인을 포섭해 국가를 전복시키려 했다는 대형 공안사건으로 보도되었다. 물론 일부 주요인물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활동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진보적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이로 인해 또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러한 시국사건들의 발생은 6.8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다. 이 의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사건 이후인 1967년 8월부터는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한 시위가 발생하기는 했으나 활발하지는 못했다. 11월 말에는 야당도 투쟁을 멈추고 국회에 돌아오면서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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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는 시위대 3선개헌 반대연설로 연행되는 김대중
박정희 씨여! 당신은 지금 입으로는 점잖은 소리 무어라고 무어라고 하지만 당신 내심으로는 헌법 고쳐가지고 71년 이후에도 영원히 해먹겠다는 시커먼 배짱가지고 있는 것 사실 아니오? 3선 개헌은 무엇이냐?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 독재국가로 이 나라의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여! 3선 독재가 통과되는 날에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하는 조문은 장사지내는 날이다 이 말이여!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 좌익독재뿐만 아니라 우익독재도 똑같은 적이오... 국민 여러분이여! 국체의 변혁을 꿈꾸는 3선 개헌을 분쇄합시다. 국민 여러분이여! 민주주의를 이 땅에 꽃피워 가지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광된 조국을 남겨줍시다.
1969년 김대중의 3선 개헌 반대 연설 中 #

6.8 부정선거 반대투쟁을 잘 견뎌낸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곧바로 헌법의 3선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일에 착수했다. 먼저 박정희 정권은 3선개헌을 반대하는 세력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 첫번째 타겟이 바로 공화당 내부의 김종필 지지세력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종필 지지세력이 당 내에서 '국민복지회'를 만들어서 김종필을 대선후보로 만들려고 했다며 김종필 지지세력을 공화당에서 축출했다. 김종필은 힘을 잃었고 결국 정계를 은퇴했다. 김종필을 거세한 박정희 정권은 개헌에 대한 논의를 조금씩 흘렸다. 정치적 안정과 근대화를 위해서는 박정희가 계속 대통령을 하는 게 낫다는 것이 개헌 지지 세력의 논리였다.

공화당을 정리한 박정희 정권은 개헌 작업에 들어갔고, 개헌 논의를 알게 된 야당은 개헌에 대한 반대투쟁에 들어갈 것을 밝혔다. 하지만 1968년 동안은 전당대회 등의 당내 문제에 의하여 강력한 투쟁을 하지는 못했다. 1968년은 북한의 여러 도발[39] 이 있는데다가 1967년의 여러 공안사건들의 여파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얼어있던 편이었다. 학생들도 3선개헌을 반대하고 대응을 하려 했지만 여전히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3선개헌에 대한 본격적인 반대운동은 1969년 중순부터 시작된다.

3선개헌 반대운동 역시 6.8 부정선거 규탄투쟁처럼 학생들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1969년 6월 12일부터 각 대학은 개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3선개헌 = 반민주적 행위'라는 인식 하에서 집회, 농성, 성토대회, 선언문 발표 등의 다양한 투쟁을 벌였다. 야당도 매섭게 3선개헌을 질타했다. 이같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3선개헌 반대운동은 더욱 더 커져갔다. 교내나 교문 주변에서만 시위를 하던 대학생들은 6월 27일부터는 교외로 나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또 '3선개헌반대 시국대회'를 열어 6월 30일부터 매일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40] 7월 2일이 되자 학생들은 "4.19는 통탄한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나왔고, 서울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날은 고등학생들도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해 3선개헌 반대를 외쳤다. 또 경찰서 정보과 경찰들이 학생들에 의해 포위되어 이들을 구출하겠다며 달려든 경찰들과 학생들 간의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7월 3일부터는 시내 대학들에 휴교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휴교령으로만 시위를 멈출 순 없었다. 휴교 상태에도 대학생들의 시위는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41] 7월 3일에는 대학생들이 각 대학별 시위가 아니라 서로 합세하며 시위를 했다. 7월 7일까지 시위가 계속 이어지자 고등학교에 조기방학이 내려졌다. 이제 고등학생들도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대학생들의 투쟁을 고등학생들이 계속 이어나가 7월 초의 3선개헌 반대운동을 이어갔다. 7월 중순이 되며 시위가 일단 소강상태에 있자 박정희 정권은 이 때를 틈타 반대운동을 벌인 학생들에게 징계를 내렸다. 이후 신민당과 재야가 1968년에 이미 조직한 단체 '3선개헌반대 범국민투위(범투위)'가 전면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범투위는 "자유민주체제를 파괴하려는 3선개헌을 분쇄하는 헌정수호 대열에 국민이 참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범투위는 8월 16일부터 개헌반대를 외치며 전국적인 유세에 나섰다. 이 유세에서 범투위는 국민들의 투쟁을 호소했고, 각계 각층에서 이를 지지해주었다. 한편 범투위에 참여하던 야당은 개헌을 지지하는 야당 의원 일부의 의원직을 박탈하고자 자진 해산하기까지 했다. 8~9월이 되자 방학이 끝나면서 대학가의 시위는 이전의 시위보다 더욱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학생들은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며 개헌 반대와 호헌을 외쳤다. 이번에도 학교에 무기휴교가 떨어졌다. 하지만 고려대를 시작으로 한 반대운동은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대학들을 휩쓸었다. 휴교가 떨어진 학교의 학생들은 학교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 모든 반대운동을 끝내 무시하고, 공화당은 9월 9일 개헌안을 국회 본의회에 사정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전원 항의하여 본회의장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공화당 의원들은 9월 14일 새벽 2시 30분 국회의사당 제3별관에 모여서 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농성을 하고 있던 신민당 의원들은 이 소식을 뒤늦게 듣고 제3별관에 들어갔으나 이미 개헌안은 통과된 후였다. 곧 개헌안 통과를 규탄하는 집회와 시위가 우후죽순 대학가에서 열렸다. 일부 학생들은 단식을 하거나 심지어는 삭발을 하며 개헌을 반대했다.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여하는 등 시위가 격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다시 휴교령을 선포했다. 그리곤 더 이상의 3선개헌 반대운동이 벌어지지 못하도록 개헌안과 함께 통과된 국민투표법을 적용해 운동 그 자체를 금지시켰다. 이후 3선개헌 반대운동은 국민투표법에서 그나마 자유롭던 신민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공화당의 찬성운동에 비하면 그 힘이 너무나 약했으며 무엇보다 경제개발의 혜택을 본 대다수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해 결국 1969년 10월 17일의 투표에서는 77.1%의 투표율과 65.1%의 찬성으로 개헌안은 결국 확정되고야 말았다.

3.2. 1970년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암흑기

3.2.1. 유신 이전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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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철폐투쟁에 나선 대학생들 사법 파동을 보도한 신문기사

3선개헌 이후 박정희 정권은 점차 사회를 통제하러 들기 시작했다. 한일협정 반대투쟁과 3선개헌 반대투쟁 등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위기의식과 1960년대 후반 들어 발생한 안보위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주민등록증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반공주의도 더욱 강화되었다. 그와 함께 학원가에서는 반공교육과 교련교육을 더욱 늘렸는데, 특히 교련을 고교필수과목과 대학 정규과목으로 지정하고 그 대상도 남녀 학생 전원으로 확대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교련 강화는 학원 병영화"라며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고 나섰다. 1970년 11월 3일 서울 5개 대학 총학생회는 공동선언을 발표하여 교련 강화가 대학의 비판정신과 자율성을 침해하려는 행위라며 규탄했다. 이에 정부는 정책을 수정했지만 원안과 별로 다를 게 없었기에 기만에 지나지 않았다.

교련에 반대하는 첫 시위는 1970년 12월 2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주도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교련을 반대하는 시위와 성명 발표에 나섰다. 대학생들이 반발할 때마다 정부는 개선안을 내놓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고,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 12월 즈음에 나온 개선안은 교련 수업이 전체 대학 수업의 20%나 차지하게 했고,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부 교련을 이수하도록 정했다. 여기에 1971년 2월 이 방안이 그대로 통과됨으로써 파장은 더욱 커졌다. 이에 1971년 신학기 초부터 학생들의 격렬한 교련철폐투쟁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정부의 교련강화가 집권을 연장시키기 위한 방책 중 하나이며, 그 해에 있을 선거 동안 학생들의 발을 묶어놓으려는 의도가 있다고 여겼다.[42] 3월 23일, 전국의 12개 대학교 학생회 대표자들은 전국대학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여 교련강화에 대한 최후통첩을 발표했고, 반대시위는 4월 경 절정에 달했다. 전국의 대학교 학생들이 교련을 반대하며 시위을 감행했다. 정부는 시위를 막고자 강경한 조치를 취했고, 공안사건도 터트렸다. 시위는 4월 말이 되어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다음은 선거였다. 1971년 4월 27일에는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통령이었던 박정희 신민당 후보 김대중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선거를 대비하고자 학생들은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43] 등 여러 단체를 결성했고, 재야에서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들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공명선거를 지향하며 선거를 참관하였다. 그리하여 민주수호국민협의회에서 인가를 받은 전국의 학생들이 수십 명 혹은 수백 명 무리지어 선거참관인단을 구성해 투표소로 갔다. 여야 간의 치열했던 선거전은 박정희의 승리로 끝났는데, 학생들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선거를 비판했다. 그러자 정부는 선거가 끝나고 휴업령, 징계 등으로 학생들을 억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시위와 저항은 계속 이어졌고, 1971년 6월 학생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전국학생연맹'으로 개편했다.

박정희 정권의 사회통제 시도에 학생들만 반발한 것은 아니었다. 공안당국은 언론의 기사나 기고문 또는 문학작품의 글귀를 문제삼아 필화를 일으키곤 했는데,[44] 이는 지식인 계층의 불만을 샀다. 언론계에서는 1971년 5월 '언론자유수호투쟁'을 일으켜 정부의 간섭을 비판했다.[45] 대학교수들은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하라며 '대학자주화 선언'을 여기저기에서 발표했고, 병원의 인턴 레지던트들은 신분보장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일괄 사표를 내기도 했다. 마침내 1971년 7월에는 판사들도 사법 파동을 일으켜 사법부의 독립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판사들은 공안사건을 가볍게 처리한 판사들이 불이익을 받자 이에 반발하며 사표를 쓰며 저항했다. 이런 지식인들의 저항에 정부는 진화에 들어가거나 무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선거가 끝나면서 대학가에서는 다시 교련반대투쟁이 불붙었다. 학생들은 교련 반대와 부정부패 규탄을 내세우며 시위를 벌였는데,[46]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그런가하면 종교계에서도 부정부패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학생시위를 분쇄하기 위해 1971년 10월 위수령을 선포하고 교련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징집시켜버렸다. 이 일로 대학은 한동안 문을 닫았고, 수많은 학생들이 군대로 끌려가거나 제적당했다. 그 후 12월 6일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후 박정희 정권은 10.2 항명 파동을 계기로 김성곤을 비롯한 반대세력을 민주공화당에서 축출하고, 7.4 남북 공동 성명을 통해 남북화해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듯 하더니 결국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고야 만다.

3.2.2. 제4공화국의 성립과 초기 반유신투쟁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새로운 헌법을 마음대로 통과시키고는, 계엄령 하에서 국민투표를 치러 확정하였다. 이 헌법에서는 대통령에게 거의 모든 권한을 양도하였으며, 삼권분립은 깡그리 무시했다. 게다가 선거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치르는 간선제였으며, 국회의 경우에는 대통령의 명령만 있으면 해산도 가능했다. 심지어 긴급조치권도 대통령한테 주어서 국민의 기본권도 마음대로 제약할 수 있게 해놨다. 이렇게 되어버리니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크게 경직되어 버렸고 정국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민주화운동도 큰 타격을 받아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러자 학생들은 학교 내에 비밀조직을 만들어 반유신운동에 나섰다. 이에 유신정권은 이들 조직들을 적발하여 공안사건으로 만들어 학생들과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고려대 NH회 사건 야생화 사건이다. 고려대학교에서 발생한 이 사건들은 비밀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던 학생들을 공안당국이 대규모 공안사건으로 비화시키면서 문제가 되었다. 또한 전남대학교에서는 김남주를 비롯한 일단의 학생들이 반유신 지하신문인 「함성」(400여 부)[47]과 「고발」(100여 부)[48]을 발행하여 배포하다가 처벌되었다. 성직자들도 학생들의 반유신 대열에 참가했는데, 이 일로 1973년에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이 터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변호사들이 뛰어들어 민주화운동가들을 위한 변호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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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0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발생한 시위 1973년 겨울에 벌어진 반유신 가두시위
보라! 권력을 쥔 부정의 무리가 생존의 권리를 요구하는 민중의 몸 위에 무시무시한 정보통치의 쇠사슬을 무겁게 씌우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유린되고 자유는 압살되고 도덕은 타락하여 퇴폐와 불신이 우리를 깊은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미 흔적마저 찾아 볼 수 없는 자유의 사각지대에서 우리는 민족을 외면한 현 정권의 정보,파쇼통치를 목격한다... 학우여! 자유와 정의, 그리고 진리는 대학의 생명이다...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절대로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항거하는 우리의 투쟁은 더없이 뜨거운 정의의 불꽃이며 더없이 힘찬 민중의 아우성이며 더없이 고귀한 민족생존의 활로이다. 우리의 외침을 억누를 자 그 누구냐?
1973년 10월 2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가 발표한 「선언문」

그러던 중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지면서 반유신운동은 점차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일국의 야당 정치인을 향한 정보기관의 납치에 학생들은 물론이고 국내외의 분노가 커졌다. 사건의 피해자였던 김대중은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발족시켜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10월부터 시위에 나섰다. 10월 2일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 500여 명은 학내의 4.19 기념탑에 집결하여 유신헌법이 민주주의를 말살한다며 몇 시간 동안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유신 이후 최초의 학생시위였다. 여기에 서울대 법대와 상대도 시위에 나섰고 많은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이 시위는 비록 언론에 크게 보도되지 못했지만 이후의 대학생들의 유신반대시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정부는 학생들은 물론이고 대학교수마저 탄압하여 최종길 법대 교수가 의문사하는 일이 터졌다.

11월이 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반유신투쟁에 돌입했다. 서울대학교의 시위는 경북대학교로 불똥이 튀었고, 11월 내내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중앙대학교 등 수많은 대학교의 시위로 이어졌다. 동맹휴학도 벌어져서 대학은 거의 마비상태였다. 11월 21일부터 11월 30일까지 20여 대학에서 거의 매일 수백에서 수천의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유신헌법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였다. 평소에는 시위가 잘 일어나지 않던 학교에서도 이번에는 대규모로 시위가 벌어지는 등 그 기세가 매우 거셌다. 가두시위와 단식투쟁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런 학생들의 적극적인 투쟁에 대학들은 조기방학으로 시위를 막아보려 했으나, 12월에도 학생들의 시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의 대학생들도 학내외에서 거리로 진출해 시위에 나섰고,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열띠게 참여했다. 이런 학생들의 시위에 교수들도 점차 학생들에 동조적인 태도를 보였고, 정부도 시위를 잠재우고자 일시적인 유화책으로 학생들을 달래었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물꼬를 튼 반유신운동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어 언론계와 재야로 이어졌다. 기자들은 앞서 자신들이 1971년에 요구했던 언론자유를 이행할 것을 다시 주장했고, 재야에서는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1971년 선거 때 만들었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활동을 재개했다. 그와 더불어 1973년 12월 24일부터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대대적인 서명운동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다. 이 공개적인 투쟁은 각지의 재야 인사들과 민주화운동가,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의 지원 하에 전국적으로 퍼져갔다.[49] 민주화운동가들은 물론이고 문인들과 일반 시민들도 개헌을 요구하며 서명을 했다. 공화당에서도 정구영 예춘호가 탈당하여 민주화운동 세력과 궤를 같이 했다. 대통령 박정희와 총리 김종필은 이 개헌운동이 불순분자들의 과대망상증이라면서 맹비난했지만, 서명운동은 계속 퍼져나갔다.

3.2.3. 긴조시대[50]와 반유신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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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발표를 보도한 신문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바야흐로 민권승리의 새날이 밝아오고 있다. 공포와 착취, 결핍과 빈곤에서 허덕이던 민중은 잊 절망과 압제의 쇠사슬을 끊고 또다시 거리로 나섰다... 5년 전의 3선 개헌으로부터 노골화된 영구집권의 야욕은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하는 한편 이에 항의하는 학생, 지식인, 종교인 등 수많은 애국인사를 체포, 구금, 고문, 투옥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비판할 수 없는 정치, 이것은 과연 한국적 민주주의인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내걸고 시작된 남북대화로써 그 동안 우리는 통일의 문앞에 다가서기는 커녕 오히려 민족의 영구분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자유 평등이 보장되는 진정한 민주주의 승리만이 통일이 지름길임을 모르는가? 보라!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상태를 강요하는 저들 깡패집단을... (중략) ....이러한 파멸상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저들의 발 밑에서 속고 빼앗기고 고통당하는 제민족세력이 민생, 민권, 민족의 기치 아래 속속 모여들고 있다... 이에 우리는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집단을 분쇄하기 위한 숭고한 민족, 민주 전열의 선두에 서서 우리의 육신을 살라 바치고자 한다.
「민족・민주・민중 선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1974년 4월 3일

서명운동의 확산을 막고자, 유신정권은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 제2호를 동시에 발표하였다. 여기에 따르면 유신헌법을 거부하는 사람은 무조건 처벌할 수 있었으니, 긴급조치의 목적은 서명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 일로 서명운동을 이끌던 장준하 백기완이 10년이 넘는 형량을 받고 투옥되었다. 결국 서명운동은 없던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51] 또 긴급조치를 반대하는 활동을 했던 학생들과 종교인들도 처벌당했다. 유신정권이 발표한 이 긴급조치는 이후로 9차까지 이어지는 긴급조치 선포의 첫 장에 불과했다. 이 때부터 긴급조치가 마구 내려졌던 유신정권 아래의 대한민국을 사람들은 긴조시대(긴급조치 시대)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첫 긴급조치로 무너질 민주화운동 세력은 아니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 세력은 다시금 반유신운동에 들어갔다. 대학생들은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민주화운동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각 지역의 대학끼리 연합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서울대-전남대-경북대의 대략적인 연결구도가 형성되었다. 수많은 대학생들의 시도와 노력 끝에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과, 대학 재학생, 복학생, 종교대학 학생 등을 끌어모아 1974년 2월에는 전국의 대학들을 거의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 조직은 유신반대투쟁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전국의 대학을 연결한 느슨한 연대 수준이었다. 조직이 완료되자 학생들은 이름은 붙이지 않은 상태로[52] 각지에서의 투쟁을 논의하였다. 이에 따라 1974년 3월부터 이 전국적인 조직은 각지에서 투쟁을 시작했으나 별로 큰 반향을 거두진 못했다.

유신정권은 이 조직과 민주화운동 세력이 불순단체 아래에서 지령을 받고 활동한다면서 유례없는 대규모 공안사건을 발표했다. 그리고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했다. 이 일로 1024명이 붙잡혀 조사를 받았고, 그 중 180명이 구속 및 기소되었다. 공안당국은 여기에 제2차 인민혁명당 사건(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을 조작하여 관련자들과 엮었다. 이로써 이들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순단체에서 국가전복을 모의한 빨갱이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조사관들은 무지막지한 고문을 자행했고, 관련자들은 공안당국이 미리 정해놓은 시나리오대로 끼워 맞춰졌다. 이러한 폭력과 날조는 재판에서도 이어졌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형, 무기징역, 유기징역 등 무거운 형벌을 선고받았다. 이 중 인혁당 사건과 관련된 8명은 1975년 4월 8일 상고가 기각당해, 다음 날인 4월 9일 모두 처형당하고 말았다.

감옥과 법정 밖에서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중심으로 구속자 석방운동이 벌어졌다. 9월부터 간간하게 발생하던 시위도 10월부터는 조직적으로 발생했다. 학생들은 "긴급조치 위반 구속학생을 석방하라"고 외치면서 가두시위, 서명운동, 모금운동 등을 벌였다.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한국신학대학교에서 시위와 수업거부가 발생했고, 10월 중순 들어서는 전국의 대학으로 퍼졌다. 여기에 대해 정부는 대학정상화 운운하며 문교부의 학사 운영 개입을 시사했지만, 시위를 막을 순 없었다. 10월 30일에는 성균관대 학생들의 시위에서 "박정희는 민족 앞에 영광스럽게 퇴진하라"는 플래카드가 휘날렸다. 전국 72개 대학 중 44개 대학이 문을 닫은 상태에서도 학생들은 11월이 되어서도 무리를 지어 시위를 벌였고 경찰과 충돌했다. 한편 학생시위에 우호적이던 서울대학교 백낙청 교수가 이즈음 파면되는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을 계기로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도 구속자 석방과 파면 철회를 요구하게 됐다. 그런가하면 10월 말부터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어 11월에 활발해져 광주에서는 휴교령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1974년 12월 25일, 재야 운동가들은 조직적인 반유신운동을 위하여 '민족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립했다. 여기에 야당 정치인, 언론인, 교수, 문인,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국민회의는 성장하였다. 유신정권은 국민회의의 성장을 막고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불이익을 공공연하게 벌였다. 한편,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김영삼이 총재가 되어서 적극적인 반유신 정치활동을 벌였고,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가두시위와 농성을 벌였다. 이러한 활동 속에서 국민회의는 유신헌법을 질타하며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그러자 대통령 박정희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를 제안하며 유신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임을 묻자고 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 세력은 이 제안을 기만행위로 봤다. 그래서 신민당과 국민회의는 국민투표를 거부했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국민투표 거부운동을 벌였지만, 끝내 유신정권은 국민투표를 감행하고 승리하여 유신개헌은 민의의 합의에 의한것으로 자평하는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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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에 항거하여 할복한 김상진 명동성당에서 열린 인권회복 기도회에 참석한 민주화 인사들
민주주의란 나무는 를 먹고 살아간다고 한다... 우리는 숭고한 피를 흩뿌려 이 땅에 영원한 민주주의의 푸른 잎사귀가 번성하도록 할 용기를 그대들은 주저하고 있는가! 들으라! 우리는 유신헌법의 잔인한 폭력성을, 합법을 가장한 유신헌법의 모든 부조리와 악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비민주적 허위성을 고발한다. 우리는 유신헌법의 자기중심적 이기성을 고발한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과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며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김상진이 할복하기 직전 발표한 「양심선언문」

민청학련 사건의 타격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1975년 봄부터 다시 열띤 반유신시위가 대학가에 퍼졌다. 시작은 긴급조치로 인해 구속된 후 석방된 학생들이나 교수들의 복직과 복교 문제였다. 정부는 복직과 복교를 금했으나 학교와 학생들은 여기에 대항하며 시위를 벌였다. 곧 학생들은 대규모 집회를 열고 강경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언론자유실천선언과 미석방 구속학생 문제, 그리고 반유신시위까지 더해지며 4월 경 유신반대시위는 다시금 절정으로 치달았다. 서울대학교,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등의 대학에서 열띤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중 고려대학교의 반유신시위가 가장 격렬했다. 유신정권 초기의 여러 공안사건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여전히 학생들의 비밀서클과 동아리 활동이 활발한 곳이 고려대학교였기 때문이었다.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수천여 명이 집결하여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매번 매섭게 시위를 벌였고, 이에 1975년 4월 8일 유신정권은 고려대학교를 대놓고 저격하며 긴급조치 제5호를 선포하기에 이른다.[53] 이로 인해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정부의 탄압에 항거하여,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대에 다니고 있던 김상진은 이 날 열린 시국성토대회에서 유신정권을 비판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생명까지 바치겠노라 말하면서 칼로 할복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곧 숨졌다.

마침내 유신정권은 민주화운동 세력을 압살하기 위해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제9호를 선포했다. 이 긴급조치는 그 동안 선포되었던 긴급조치보다 더욱 더 강경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긴급조치는 이후 유신정권이 끝나는 1979년 10월 말까지 유지되었다.[54] 그리고 사회통제를 더욱 강화하여, 학도호국단을 부활시키고 민방위를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또한 학생시위에 우호적인 교수들을 방해하는 새로운 임용제도를 도입했으며, 주민등록제도 강화했다. 또한 이 시기 베트남 전쟁에서 월남의 패망과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지면서 반공주의 기조를 더욱 강조하였다.

하지만 강력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요구는 이전보다 미약할지언정 여전히 줄기차게 이어졌다.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 최초의 반유신시위는 앞서 할복한 김상진의 추도집회였다. 1975년 5월 22일,[55]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김상진의 죽음을 추모함과 동시에 유신정권을 반대하며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와해되었다. 또 서울 지역의 대학생들이 천주교와 관계를 맺고 김상진 추도와 반유신 활동을 펼쳤지만 얼마 가지 않아 모두 체포되기도 했다. 폭압적인 통제가 심해지면서, 학생들의 민주화 활동은 지하로 향했다. 1975년 6월부터 중앙대학교의 <시론정보>에서 시작하여, 이화여자대학교의 <새벽>, 서강대학교의 <제3호 자유서강> 등 여러 지하유인물이 전국의 여러 대학 안에 배포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반정부 시위나 대학 간의 연합시위를 도모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학생들의 투쟁이 끝나지 않자 유신정권은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같은 공안사건을 만들어 이들의 역량을 꺾으려 들었다.

한편 재야와 정치권에서도 민주화운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허나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민주화운동가 장준하가 등산을 갔다가 의문사당하거나, 김영삼 박정희와의 영수회담 이후 태도가 유화적으로 변했다거나, 김옥선 신민당 의원이 반유신 발언을 했다가 제명당하거나, 재야 인사들이 구속되는 등 많은 굴곡을 겪어야 했다. 이에 단호히 맞서기 위해, 재야 인사와 정치인들은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 모여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였다.[56] 여기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은 민주주의 남북통일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신정권은 이것을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반정부활동이라면서 참가자 18명을 기소했고, 그 중 9명이 투옥되었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참여[57]한 이 사건은 커다란 파장을 가져와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3.2.4. 종교계의 반유신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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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지식인-언론출판계의 반유신 민주화운동

지식인들은 유신정권의 꼬투리 잡기에 수난을 심하게 당해야 했다. 시인 양성우는 시 <겨울공화국>, <노예수첩>, <우리는 열 번이고 책을 던졌다> 등으로 감옥살이를 했고, 고은 조태일은 그의 시를 출판하려다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다. 언론인 리영희는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를 썼다고 반공법으로 처벌받았다. 백낙청도 리영희에게 창작과 비평의 지면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이외에도 수많은 문학인과 언론인들이 곤욕을 치렀고 몇몇 잡지들은 휴간당해야 했다. 이에 반발하여 해직된 대학교수 13명이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하여 유신정권의 경직된 어용교육을 비판하였다. 해직교수들은 1978년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여 맞서 싸웠다.

3.2.6. 문화예술운동과 인권운동의 태동

3.2.7. 유신의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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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9월 14일 고려대학생들의 반유신 집회 제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의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58]

긴급조치 9호의 여파로 그 이전에 비해 학생운동은 보다 침체되는 분위기였으나 1976년 하반기부터 점차 되살아났다. 그 해 10월에는 서울대학교의 축제기간에 맞춰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12월에는 서울대학교 법대생들이 치밀한 준비를 통한 시위를 전개했다. 물론 두 시위는 경찰에 의해 신속하게 제압당했으나 곧바로 1977년의 반유신운동으로 이어졌다. 1977년 4월부터 전국 곳곳의 대학에서 반정부시위가 일어나거나 반정부 성향의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이 시위들도 교내에 대기하던 경찰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깨졌지만 시위의 확산은 고무적인 것이었다. 또 대대적인 시위는 아닐지라도 반유신 유인물의 배포는 학생은 물론이고 일반 시민들까지 주동이 되어 나섰다. 그런 역량으로 1977년 10월 7일 서울대학교에서 학생 400여 명이 농성에 나섰고, 13일에는 연세대학교가 구국선언서를 발표하여 25일에는 긴급조치 9호 선포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였다. 10월 31일 이화여대, 11월 11일 서울대에서는 각각 25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고, 서강대학교에서는 3차에 걸친 반유신시위가 펼쳐졌다.

이러한 반유신 투쟁 속에서 유신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은 멀어져갔다. 유신 시절의 비민주성과 부정부패 사건에 더불어 2차 오일쇼크와 함께 찾아온 경제 침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978년 12월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의 득표율이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을 앞서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이같은 민심의 이반과 함께 이후 1979년 5월에는 김영삼이 신민당의 총재가 되어 강력한 대정부 활동에 나서면서 유신정권은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8년 초반기 대학가에서는 유인물 배포를 통한 반유신 운동이 이루어졌다. 이 운동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선을 전후로 한 5,6월 달에 가두시위로 달아올랐다. 학생들은 '학생민주선언'을 발표하며 시위에 나섰는데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전남대학교 등이 대표적이었다.

6월 26일에는 광화문 연합시위가 민주인사들과 대학생들에 의해 강행되어[59] 4시간 가까이 경찰과 대치하며 광화문 인근 지역을 휩쓸었다. 29일에는 '전대학민주학생총연맹' 명의의 유인물들이 각 대학에 퍼지는가 하면, 7월 초에는 부산대학교 조선대학교에서는 페인트까지 사용되어 '유신철폐'라는 글씨를 여기저기 써놓기도 했다. 이후 9월에도 각 대학에서 유인물 살포와 가두시위가 이어졌고, 10월 17일에는 2차로 광화문 연합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안타깝게도 정부의 강력한 대처로 무산됐다.[60] 그럼에도 시위는 서울권의 대학을 넘어 경북대학교에 이르기까지 1978년 말까지 계속 발생했다. 1979년 초반에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점점 극에 달해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반대하는 시위 밖에는 별로 대규모 시위가 없었고 유인물 배포가 주를 이뤘다. 유신정권은 긴급조치 9호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온 학생들에게 병역통지를 보내는 등[61] 민주화운동가들과 학생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가한 탓이었다.

한편, 재야세력에서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을 계승하고 정부의 탄압에 저항하고자 1977년 3월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하였다. 여기에서는 "민주주의 실현과 민족의 자주권 및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진지한 노력만이 유일한 민족적 구원의 길"이라고 명시하며 민주화운동 세력과 민중 간의 연대가 필요함을 주장했다.[62] 1978년에는 반정부운동 세력을 한데 모으고자 '민주주의국민연합'이 350여 명의 이름과 함께 발족하였다. 유신정권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탈퇴를 강요 및 협박하며 압박을 가했지만 이 단체는 유신을 비판하고 민주정부의 수립을 끝까지 주장했다. 1979년 3월에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민주통일국민연합)'이 결성되어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을 공동의장으로 하여 유신이 끝날 때까지 반정부 투쟁을 지속하였다. 이런 투쟁 속에서 유신정권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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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 여공들 김영삼 의원 제명을 보도한 기사

유신정권의 몰락의 첫 신호탄은 바로 YH 사건이었다. 무역회사 YH의 부당한 공장폐쇄에 항의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로 몰려가 농성을 벌인 것이다.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여공들의 농성을 지지하였고 경찰의 진입을 막으려 애썼다. 8월 9일부터 시작된 농성은 이틀 정도를 버텼으나 3일째인 8월 11일 경찰 1000여 명이 강제 해산을 시도하면서 무참히 깨져버렸다. 경찰은 해산을 강행하며 가혹행위와 폭력을 자행했고 이 일로 여공 김경숙이 사망하고[63] 여공과 신민당원 등 수십여 명이 심한 부상을 당했다. 한 나라의 야당 당사에 공권력이 난입한 초유의 사태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야당, 민주화운동 세력, 학생운동 세력, 재야 세력은 이 사건에 크게 분노했다. 8월 말 민주인사들은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의 대응을 비판하면서 조국의 민주화를 주장하였다.

학생들의 시위도 이를 계기로 활성화됐다. 9월 3일 강원대학교 학생들의 교내시위와 농성을 시작으로 9월 4일 대구광역시 지역 3개 대학( 경북대, 계명대, 영남대)에서 각각 시위를 벌여 합동으로 연합시위를 시도하였다. 이 시위에서 경북대학교 영남대학교의 시위대는 경찰에 의해 저지당했으나, 계명대학교 시위대는 2.28의거기념탑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이 시위 도중에는 대구 시내에 YH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이후 서울지역 대학교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서울대학교, 경희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시위와 집회가 발생하고 유인물이 뿌려졌다. 이러한 형태의 시위는 10월 초중반까지 이어졌다.

정계에서는 야당의 반발과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연일 시끄러웠다. 선명야당을 표방한 바 있는 김영삼 총재는 YH 사건의 폭력적 대응을 비난하며 9월 10일 "박 정권 타도를 위한 범국민적 항쟁"을 선언했다. 특히 9월 15일에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유신정권은 그런 김영삼의 행동이 사대주의적이라며 그의 총재직을 박탈했고, 10월 8일에는 끝내 그를 국회의원 직에서 제명하기에 이른다. 이에 맞서 신민당 의원 전원과 민주통일당 의원 3명이 국회의원 사퇴서를 제출하면서 국정은 더욱 요동쳤다.

특히 이런 사태에 김영삼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부산 마산에서 큰 반발이 일었고, 결국 김영삼 제명에 대한 반발, 경제 위기에 대한 불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등으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발생했다. 시작은 부산에서부터였다. 부산은 김영삼의 지역구가 위치해 있었고, 1979년의 경제 위기의 피해를 직접적으로 절감하고 있었으며, 더욱이 '양서협동조합'[64]같은 사회단체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역량 아래에서 10월 중순 부산대학교에서 시위가 계획되었다. 10월 15일의 시위는 부득이하게 실패했지만[65], 16일에는 성공적으로 시위가 발생했다. 부산대학생 정광민의 주도로 모인 2000여 명의 학생들은 경찰과 대치하다가 학교 담장을 무너뜨리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3진으로 갈라진 학생 시위대는 부산역과 시청 쪽으로 향했다. 경찰이 검문과 검색을 하며 막아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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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시내를 가로지르는 시위대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계엄군

3.3. 1980년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절정

3.3.1. 12.12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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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신군부 주요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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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5일, 서울역 부근의 시위대

3.3.2.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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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80년 5월 21일.gif 파일:시민군.gif
파일:시민궐기대회.jpg 파일:계엄군에게 진압당한 시민군.jpg

3.3.3. 더욱 치열해진 민주화운동

3.3.4. 투쟁과 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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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5.3 민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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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건대항쟁

1985년도부터 대학가들이 민주화운동을 하였다.

3.3.5. 6월 항쟁과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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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학생의 죽음. 대학생들의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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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격당한 이한열 열사

4. 의의

1950년대까지만 해도 영미권 국가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서구 국가들은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성립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1951년 영국의 더 타임즈 신문은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자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한국의 폐허에서 건강한 민주주의가 생겨나길 기대하는 것 보다 더 합리적이다.[66]라고 평할 정도로 절망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이건 비단 서구권 측의 억측이었던 것만은 아니고, 아시아 스스로도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채택할 국민 의식이나 사회 기반이 마련되어 있는 국가가 거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지도자였던 리콴유와 대한민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94년 포린어페어스 논쟁은 이를 잘 보여주는 예시. 리관유는 여기서 서구 민주주의 제도는 아시아의 가치관에 반하는 제도이며, 가족주의를 중시하는 아시아에서 개인주의를 표방하는 서구의 민주주의는 전혀 맞지 않을뿐더러 도덕 붕괴와 무질서의 원인이 될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이중 한국은 높은 교육열과 유교적 민본정치에 더불어 짓밟혀온 전근대 대규모 전쟁을 거치며 자라난 주권 의식과 소멸된 신분제 등이 맞물려 민주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위의 사례에서도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리콴유의 의견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야말로 아시아를 포함한 모든 국가들이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제도이고, 이미 한국이나 중국에서 과거제도를 통해 기회의 평등을 보장했다고 밝혔다. 김대중은 왜 리콴유와 논쟁했나

물론 대한민국도 여타 국가들과 똑같이 독재 정권의 압제가 있었지만[67] 이들은 민중의 목숨을 건 끊임없는 투쟁과 저항에 부딪혀 결국 무너졌고[68], 그렇게 국민이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한 끝에 오늘날 한국은 아시아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69]를 이뤄냈다. 또다른 민주주의 국가로는 대만이 있는데, 이쪽은 정권이 바뀌며 위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민주화가 추진된 거라 독재 정치로 가려는 군사 정권을 아래에서부터 뒤엎고 민주주의로 되돌려놓은 한국과는 다른 경우다.

게다가 타국의 반정부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에서 나타난 수평 폭력이나 약탈 등의 몇몇 사례들과 달리, 한국에서는 민중의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지 않았고 오롯이 정권과 집행 기관으로만 향하였으며, 따라서 민주화 세력과 결정적으로 주체가 된 민중들이 분노에 눈이 멀어 혹은 계획적으로 양민을 해치거나 약탈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어떤 양민도 민주화 세력과 민중들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그렇기에 온 국민이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 받아들였지 반감을 가지지는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훗날 한국에서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큰 위기가 닥쳤을 때도 소수의 혼란을 틈탄 일탈이야 있겠지만, 과거 민중들이 그랬듯 위기 시의 자체적인 높은 시민의식으로 인하여 법과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기는 어렵고 혼란이 금방 회복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5. 특징

가장 큰 특징은 국민이 스스로 이루어낸 민주주의라는 것. 상술한 대로 현재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민주주의가 사실상 외부로부터 주입된 거라 정권의 입맛에 맞게 왜곡되는 등 본질을 잃어버린 경우가 많고, 국민들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제대로 함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독재나 장기 집권을 가리기 위한 껍데기로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한국은 민중이 끊임없는 투쟁과 저항을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세력을 계속해서 몰아낸 끝에 민주주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이념과 가치관이 정치 뿐만 아니라 사회 곳곳에 뿌리를 내려 훨씬 견고하고 발전된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고 있으며 정권교체도 잦다.

아시아에서 이 정도 수준의 민주주의를 세운 나라는 대만 정도인데, 이쪽은 민중 항쟁이 없던 건 아니지만 민주주의를 정착시킨 결정적 원동력은 아니었다. 독재자인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로부터의 독재 체제의 유지가 힘들다는 판단 하에 중국국민당이 결국 민주화 대세를 거스르지 못했고, 일본처럼 위에서부터의 민주주의를 차근차근 도입하는 식으로 진행되어 정권교체까지 이어지며 달성된 것이지, 대만은 국민이 민주화를 이루지는 못했다. 국민이 만든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건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도와 자부심이 매우 높고, 어떤 것보다도 민주주의에 반하는 사안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특히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레르기 수준[70][71]이다. 독재 정권을 스스로 박살낸 역사 덕분에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문제는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경향도 강하고, 정치 및 사회 시스템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감시도 많다.

6. 전망

6.1. 긍정적 의견

대한민국 사회는 이미 민주주의가 정치를 넘어서 사회 곳곳에 뿌리깊게 자리잡았고 국민들도 이를 매우 당연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이제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세력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 악명높은 전두환의 신군부 정권도 민주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할 수는 없어 간선제 꼼수를 쓰는 등 갖은 우회 방법을 동원했지만, 속내가 다 들통나고 결국 6월 항쟁이라는 철퇴를 맞으며 끌려내려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놓고 독재는 어림도 없는 일. 2018년 공개되어 친위 쿠데타 계획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던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의 실현이 불가능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화려한 휴가,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등 작품성을 떠나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는 영화나 예술 작품들도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등 각종 매체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교육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대학에서도 민주주의 관련 교양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중요성과 의의를 심어주고 있다. 그리고 이후로도 집권정부 부패한 실체가 드러나자, 역사 속 이야기 같던 민중 운동이 다시 일어나 끝내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 파면을 이끌어내기도 했다.[72]

또한 꼭 이런 대규모 시위가 있지 않더라도 인기를 잃은 정부와 집권여당은 여러차례 투표를 통해 심판되어왔고, 평화적이며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민주화 이후 4번이나 일어나는 등 대한민국은 이미 완전한 민주주의가 정착되어있다. 즉 '나는 전두환을 싫어하니까 독재 해도 되네?' 이게 안된다는 말이다.[73]

이런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수준이라 많은 국가들에서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의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아시아 국가들에서 그런 경향이 강한 편인데, 홍콩 우산 시위 2020년 태국 민주화 운동 등 아시아 각국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운동에서도 주최자들이 직접 한국을 언급할 만큼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다른 국가 국민들에게는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인 셈.

때문에 아시아 어떤 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 SNS 등을 통해 한국 정부와 국민들을 언급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5.18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여러 국가에서 개사되어 민주화 운동에 사용되기도 한다. 민주화 운동에 미지근한 일본에서도 박근혜 퇴진 운동을 보면서 온 국민이 힘을 모아 대통령을 향해 물러나라고 할 수 있는 한국이 부럽다고 하는 반응이 일부 있었으며, 아베 신조 모리토모 스캔들과 연이어 터지는 실정 때문에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 참가자들이 한국을 본받아 잘못된 것을 바로잡자고 하기도 했다.[74]

앞으로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과제는 과연 이것이 제3세계 민주화 운동의 표본이 될 것이냐 말 것이냐는 것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령 중국은 남북이 통일이 될 경우 바로 한중국경을 통해 마주하게 될 한국의 민주주의를 상당히 경계[75]하고 있으며, 북한 정권 역시 한국의 민주주의를 굉장히 두려워 하기에 내부단속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민주주의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 기준으로 봐도 수준 높기 때문에 권위주의 국가들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는 실정이다.[76]

7. 북한의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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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지린성 북한 노동자 폭동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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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북한 내 반체제 정당조직 발각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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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2024년 북한 내 반체제 세력 출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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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대, 프룬제 군사대학 쿠데타 모의 사건, 6군단 반란사건, 창평 정치범수용소 학살 사건 등 북한에서도 반란과 그에 대한 시도들은 있었으나, 현재까지 북한의 민주화 운동은 부정적인 의견을 넘어 절망적이라고 보는 편이 압도적이었다. 70년이나 지속되고 있는 김씨 일가의 세습 독재 통치와 이를 위한 우상화 세뇌교육, 계층 분할 및 연좌제를 통한 권력 유지 강화를 통해 어떠한 민주화 운동 시도도 일어날 수 없도록 만든 환경이어서 전문가들 역시 북한 내부에서의 민주화 운동 가능성은 0%로 보고 있다. #

다만 김정은 정권 이후, 이른바 상위 계층의 탈북이 늘고 있으며 이중 인텔리 계층의 탈북 역시 늘어나고 있어서 상당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사항[77]이기도 하다. 북한에 만연한 부조리와 이율 배반 때문에 느낀 자괴감과 배신감이 상당수[78][79]이고, 더욱이 북한으로 몰래 들어간 한국의 영화 드라마, 여기에 예능이나 보도 관련 프로를 통해 남한의 실상을 깨닫고 심지어 남한의 상품들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남한의 발전상을 알게 되면서 북한이 그간 선전해온 '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 ' 지상락원'이나 ' 세상에 부럼없어라'와 같은 구호들이 자신들과 인민들을 우롱해온 속임수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북한 정권을 불신하게 되고, 고난의 행군 이후 장마당이 생기면서 더더욱 이러한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들과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전문가들 가운데서도 북한 내부의 민주화 운동 가능성에는 고개를 젓는 이들이 많으면서도 외부에서의 정보 유입을 통한 동요의 가능성에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의견이 상당히 높다는 점은 주목해 볼 만하다고 본다. 특히 북한에서 인텔리 계급으로 생활하다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경우 지식인들을 공략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는 편이 많다. 이들로 하여금 남한과 외부 세계와 관련된 정보에 노출시켜 북한 내부의 모순에 대항하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수 들리고 있다.[80]

민주화 가능성이 0에 가깝다는 북한 지역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2024년 중국에 일하는 북한 출신 노동자들이 북한 정권으로부터 근무지에서 감시당하는데다 세금 명목으로 갈취까지 당하다가 결국 폭발까지 했으며, 이는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 폭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 하겠다는 모습으로 보여졌다.

그리고 북한 지역 내에서는 고등학교 교사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을 창당하고, 시민들에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한 것이 2024년 1월 26일 TV조선의 보도로 인해 밝혀졌다. 발생 년도가 2022년인 것을 감안하면 1년 동안 북한 정권이 잡지 못 했고, 단속된 인원이 수 십명이라는 것, 조선로동당과 대척된 것을 보면 로동신문 조선중앙텔레비죤이 숨기고 은닉한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북한 주민 주도의 민주화운동 역시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개월도 안 돼서 또 민주화 운동 조직이 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비록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이 잡혀가고, 성공하지는 못 했다고 하지만,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기고, 독립운동을 한 덕에 임시정부가 한국 정부로 개편되었는 것과 깉이 이 사건들이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일가 조선로동당을 붕괴시킬 단초가 될 가능성이 높다. 북한 지역의 민주화가 프라하의 봄 동유럽 혁명처럼 임계점을 넘기면 민주화운동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즉, 철권 통치와 억압이 구멍이 생기는 것이고 당장 민주화운동 후 남북통일을 하고 민주주의 이식이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기존 자유조선, 북한인민해방전선, 무궁화 무장청년단이 비밀결사, 국외 활동 위주와 달리 국내에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고, 더 이상 폐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 어록

민주는 사람이다.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민주화운동기념관 벽면과 전시실 입구에 적혀 있는 글귀
이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싸워서 얻은 것입니다.
게브하르트 히일셔, 전 Süddeutsche Zeitung(쥐트도이체 차이퉁) 기자
5.18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향한 길고 긴 투쟁의 일부분입니다. 앞 세대가 자유선거를 확립하고 민주주의을 꽃피우려고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지금 젊은 세대가 배우고 진심으로 감사하길 바랍니다.
노먼 소프, 전 아시아월스트리트저널 기자.

9. 기타

9.1. 기념사업 및 추모사업

9.2. 민주화운동 사적지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서 오월길을 광주시와 5.18 기념재단이 운영 중이다. 오월길은 크게 5개의 길(오월인권길, 오월민중길, 오월의향길, 오월예술길, 오월남도길)로 이루어있고, 전체19개의 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한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자체 조사를 통하여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전국의 사적지를 파악해 민주로드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 이 사이트에서는 민주화운동 사적지를 지역별, 사건별로 묶어 일종의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각 사적지의 위치와 그곳에 얽힌 민주화운동 이야기도 수록해놓고 있어 매우 편리하다. 또한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을 대상으로 현장탐방도 진행하고 있다.

9.3. 민주화 운동 자녀 보상법안 추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021년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운동가들의 자녀에 교육과 취업에 지원을 주자는 법안이 발의되었다. # 철회되었으나, 2022년에 다시 추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10. 관련 인물

11. 관련 단체

12. 관련 문서

13. 참고 자료 및 연구 자료

13.1. 도서 자료

민주화운동에 관한 입문서로는 <다시쓰는 한국현대사(박세길 저)>, <고쳐 쓴 한국현대사(강만길 저)>, <바로보는 우리역사(역사학연구소 편)>, <한국 현대사 산책> 1940~80년대편, <한국현대사 이야기주머니> 등을 꼽을 수 있다.
파일:207069261g.jpg 파일:file_20130802104652.jpg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산하의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2008년부터 3년에 걸쳐 발행한 <한국민주화운동사>(전3권)이 민주화운동을 다룬 저서들 중에는 가장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 책에는 반독재 민주화운동 외에도 노동운동, 농민운동, 인권운동, 종교계의 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의 민주화운동들이 정리되어 있다. 민주화운동을 연구하거나 알아보고 싶은 분들은 이 책을 일독하시길 권장한다. 본 문서도 이 책의 도움을 상당히 받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전권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1권 2권 3권[82]

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기획하고 있는 '지역민주화운동사 연구총서'도 볼 만하다. 각 지방의 민주화운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쓴 책인데 현재까지 <충북민주화운동사>, <전북민주화운동사>, <제주민주화운동사>, <대전,충남 민주화운동사>, <경기민주화운동사> 이렇게 5권이 출판되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편찬한 <민주화운동사 연표>도 유용하다. 이 책에는 시대연도별로 민주화운동이 수록되어 있고, 연표마다 중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도 따로 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다. 이 책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민주화운동 중 굵직한 사건들을 다룬 '역사다시보기' 시리즈도 있다. 이 중 일부는 개정판으로 다시 나오기도 했다. 이 시리즈에서 다룬 사건들은 모두 한국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건들이기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파악하는데 용의할 것이다. 모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민주화운동이 벌어진 사적지를 찾고 싶다면, <그날 그들은 그곳에서 - 다시 가본 민주화운동 역사의 현장>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현장들을 방문하는 기행록과 인터뷰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가능하다.

13.2. 보고서 및 논문

13.3. 자료집

13.4. 영상 자료

13.5. 인터넷 자료


[1] 이 영상에서는 1960년 2월 28일 대구학생의거, 1960년 3월 15일 3.15 부정선거,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1979년 10월 16일 부마민주항쟁, 1980년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사망 사건, 1987년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1987년 6월 12일, 15일, 18일 시위, 1987년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영결식, 2002년 여중생 장갑차 압사 사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시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2016년 박근혜 퇴진 범국민행동 순서대로 등장한다. [2] <한국민주화운동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8, 15쪽 [3] 법적으로 민주화 운동이라 공인받은 내용은 아니나, 민주주의의 기본 의의가 침해받을 경우 그에 대응하는 반발 및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활동이라는 취지에서 일종의 민주화 운동이라 부를 수 있다. [4] 일부 시민과 지식인들은 자유당 의원들이 남아 있는 국회를 해산할 것을 주장하며 시위를 하기도 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비민주적이고 관료적인 자들이 남아 있는 국회가 아닌, 국민들의 새 민의를 받드는 국회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5] 이런 운동은 중,고등학교에서 활발하게 벌어졌으며, 곧 대학가로 옮겨붙어 거세게 일어났다. [6] 공금 횡령, 교직원 해임, 잡부금 징수, 기성회비 징수, 과도한 등록금 징수, 대학 사유화, 독단적 학교 운영 등 [7] 수많은 학교에서 투쟁이 발생했는데 이 중 연세대학교에서 일어난 투쟁이 대표적이다. 이 투쟁은 1960년 5월에 시작하여 그 해 12월까지 벌어졌다. 학생과 교수들의 학원 민주화 요구를 총장 백낙준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8] 주로 민주선거의 개념에 대해 교육하고 4월 혁명의 정신에 대해 알리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9] 이 문제는 주한미군의 범죄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0] 그래도 생존권 투쟁으로 여러 방직공장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극심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지만. [11] 현재의 한국노동조합총연맹 [12] 이 단체에는 개혁파이자 전국노협의 지도자였던 김말룡이 의장이 되었다. [13] 다만 여기서도 한계는 있어서 옛 이승만 정부에 협조했던 이들을 청산하지 못했다. [14] 특히 금융업 등의 사무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많이 결성되었다. [15] 참고로 이 노동운동의 흐름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역사와 비슷한데 전교조의 뿌리가 바로 이 때 교사들의 노동운동이었다. [16] 이 당시 교원노조는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오랜 문제였던 임금인상조차 문제제기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17] 특히 경상도 지역의 피학살자유족회가 가장 활발했다. 그 이유는 타 지역에서는 남북한 양쪽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이 있었는 반면, 경상도 지역은 경찰과 군인들에 의한 일방적 학살이 대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18] 한국을 스위스처럼 영세중립화하여 통일하자는 방안 [19]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 내부의 논의로 통일하자는 방안 [20] 진보적 성향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중립화통일론을 보다 지지하는 경향을 보였다. 남북협상론은 혁신계 중에서도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21] 대표적인 단체들로는 학생들이 조직한 '민족통일연맹', 청년들이 조직한 '민족민주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 경북 지역의 혁신계가 중심이 된 '경북 민족통일연맹, 영세중립화론자들이 조직한 '한국 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등이 있다. [22] 이 남북학생회담의 예정 날짜는 5월 말이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23] 남북 학생들의 회담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회담이 정치적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에서였다. 한편 혁신계 인사들과 학생들은 이 회담을 지지하며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고 외쳤다. [24] 사실 민주당은 반공주의에 있어서는 옛 자유당 못지않았다. [25] 혁명공약에는 반공, 부정부패 일소, 경제 재건, 정권 이양 등이 들어 있었다. [26] 박정희 정권 동안 민주화운동가들을 기소할 때 들었던 법안이 국가보안법 아니면 이 법이었다. [27] 1961년 5월에만 2000여 명이 용공 혐의로 체포되었다. [28] 정치깡패 이정재가 포박된 채로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고 쓰인 푯말을 목에 걸고 서울 거리를 지나는 사진으로 유명하다. [29] 김종필이 작성한 '8.15 계획서'에 따르면 군인들이 예편하여 민간인 신분으로 선거에 나가 승리해 민정을 장악한다는 계획이 마련되어 있었다. [30] 이 파벌싸움은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돕던 김종필에 반발하는 군인들에 의해서였다. [31] 대표적인 것이 '백조그릴 사건'이다. 1963년 3월 22일 김영삼을 비롯한 야당 정치인들은 서울 종로에 백조그릴에 모여서 시위를 준비하고, 당일 거리로 나가 군정 연장을 항의했으나 군인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32] 이 시위는 서울대 내의 학생 동아리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중심이 되었다. [33]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벌이던 야당 의원과 학생들의 집에 괴소포가 배달되는 일이 있었다. 거기에는 시위를 격려하는 글과 100달러 지폐가 있었고 발신은 재일교포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학생들은 이를 폭로했고, 정부를 비판했다. [34] 박정희는 5.16 이후에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며 '민족적 민주주의'를 강조했었는데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35]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고 계엄령보다 급이 낮은 위수령을 선포한 원인은 계엄령을 1년만에 다시 선포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36] 당시 주요 야당은 민중당 신한당이었는데 신민당으로 통합했다. [37] 선관위는 이 행위가 위헌이라고 말했으나 이후 말을 바꿔 대통령은 가능하다고 했다. [38] 이로 인해 6.8 선거의 별명이 '막걸리 선거', '고무신 선거'일 정도였다. [39] 1.21 사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40] 경찰은 이들을 진압하고자 신종 장비인 '페퍼포그(시위진압용 가스분사기)'를 6월 30일부터 사용했다. [41]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벌어진 시위에서 12개 대학 3만 32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42] 1971년 3월에 실시된 부산대학교에서의 재학생 여론조사 결과 90% 이상의 대학생이, 서울대학교 법대는 95%가, 고려대학교는 87%가 교련에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43] 이 단체는 교련반대시위 도중에 결성되었다. [44] 대표적인 사건을 몇 개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김지하 시인은 자신의 시 < 오적>과 <비어>로 인해 두 번이나 구속되었으며, 시를 실어주었던 장준하의 「 사상계」는 등록을 취소당하고 겨우 등록취소처분을 받을 수 있었다.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도 사상계와 똑같은 일을 겪었고, 문학평론가 임중빈은 「다리」에 '사회 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라는 글을 실었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45] 하지만 이 저항은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박정희 정권은 언론인들의 저항을 짓누르고자 1971년 12월 프레스카드제를 실시하였다. 언론인들의 저항은 나중에 1974년 들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통해 다시 타오른다. [46] 이 때 정부는 군인들을 동원해서 1971년 10월 5일 고려대학교의 학생 몇 명을 수도방위사령부로 불법 납치하기까지 했다. 물론 대학의 항의로 학생들은 당일 풀려났지만. 참고로 당시 수도방위사령관은 윤필용이었다. [47] 이 신문은 최초의 반유신 지하신문이기도 하다. [48] 이 신문은 유신체제를 극히 불안한 수탈과 억압의 체계로 규정하고, 학생들에게 4.19 혁명을 일깨우며 투쟁할 것을 요구했다. [49]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김수환, 함석헌, 천관우, 장준하, 계훈제, 백기완, 법정, 김재준, 박두진, 이호철, 백낙준, 김동길, 안병무, 홍남순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었다. [50] 긴조시대는 긴급조치가 내려지던 유신 시절의 대한민국을 말한다. [51] 긴급조치가 선포되자 서명운동을 이끌던 인사들은 서명한 사람들이 정부의 탄압을 받을까 우려하여 서명명단을 전부 태워버렸다... [52] 학생들은 이름을 붙이면 유신정권이 반국가단체로 몰아갈 것을 염려했다. 하지만... [53] 긴급조치 발표 당시 고려대학교만 따로 휴교 조치를 명시해놓았다. [54] 참고로 이 긴급조치 9호 인해 구속된 사람만 1387명이고, 판결은 1289건, 피해자는 974명에 달했다. [55] 날짜 때문에 이 시위는 '오둘둘 시위'라고 불려졌다. [56]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안병무, 서남동, 이우정, 정일형, 함세웅 등이었다. [57] 전직 대통령(윤보선), 야당 정치인이자 박정희의 라이벌(김대중), 저명한 재야운동가(함석헌)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다. [58] 참고로 박근혜 옆에 있는 인물은 비서실장 김계원이다. [59] 놀라운 것은 이 시위가 날짜를 예고하고 벌였다는 것이다. 유신정권의 폭압성을 고려했을 때 이 시위의 성공은 유신정권에게 꽤나 타격이었다. 물론 언론탄압으로 인해 신문에는 안 실렸지만. [60] 이 시위를 대비하면서 학생 측에서는 버스 환기통(!)에 유인물을 올려서 공중으로 날려보내는 신박한 방법을 써서 힘도 안 들이고 선전 활동을 했다고 한다. [61] 당시 병역법에서는 수형자로 분류되던 긴급조치 9호 위반자들은 보충역으로 편입되어야 했으나 유신정권은 이들을 현역(...)으로 보내 더 오랫동안 사회와 격리시키고자 했다. 이런 식의 학생운동 탄압은 이후 전두환 정부 아래 더욱 잔인해져 녹화사업으로까지 발전한다. [62] 이후 재야 인사들의 시국선언은 이후에도 여러 번 이어졌다. [63] 경찰은 그녀가 추락사했다고 발표했지만 그녀의 죽음에는 국가폭력의 개입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64] 이 단체는 부산 지역의 종교단체와 민주화운동 세력의 영향 아래 세워진 단체로 지역의 민주화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름부터가 '양서(良書)'라는 '양질의 좋은 도서'를 의미했기에, 이 협동조합은 서점을 운영하고 조합원들끼리 책과 정보를 교환하며 시국을 의논하는 단체였다. 이후 대구, 광주, 마산, 울산, 수원, 서울 등에도 퍼져 협동조합이 조직되었다. 그랬기에 이 단체는 이후 부마항쟁의 배후로 몰려 해산당하고 만다. [65] 유인물로 학생들의 이목을 끄는데는 성공했는데 시간이 문제였다. 원래 시간보다 30분이 지나도 사람이 모이지 않자 주동자들은 시위를 실패로 여기고 학교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들이 빠져나가고 10여 분이 지나서야(...) 학생들이 꾸역꾸역 모여든 것이다. 결국 주동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다가 시망하고 말았다. [66] 한국에서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라고 알려져 있다. [67] 문민독재 군사독재 [68] 문민독재는 4.19 혁명으로 군사독재는 6월 항쟁으로 무너졌다. [69] 2008년에서 2014년까지는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되었으며, 2018년 민주주의 지수에서 8.00점으로 아시아 1위, 세계 21위를 기록했다. 현재 아시아 국가들 중 오로지 민중의 힘으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는 사실상 한국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단한 거다. 그나마 한국과 함께 인정받는 일본 민주주의도 GHQ가 국가 정상화를 위해 강제로 도입한 것이고 자민당 막부 소리를 듣는 등 비민주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 일본 국민들도 민주주의를 스스로 얻어낸 게 아니라서 이런 문제에 관심이나 고민이 별로 없는 편이다.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되는 8.01점에서 단 0.01점이 모자라 "결함있는 민주주의"로 분류되었다. 이후 2020년, 8.01점으로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되었다. [70] 국제 사안에 대해 국가적 스탠스를 잘 드러내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가 유독 미얀마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71] 2018년 공개된 기무사 계엄령 문건에 대해서도 실현, 성공 가능성이 전무했다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도 쿠데타에 대한 PTSD의 일종이라 봐도 무방하다. [72] 대규모 민중이 폭력 없는 평화적 시위를 통해 정권을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6월 민주항쟁과 상당히 유사하다. [73] 신한국당 김영삼 -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 한나라당 이명박, 새누리당 박근혜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 국민의힘 윤석열. [74] 다만 아베 신조는 2022년 7월 8일 야마가미 데쓰야에게 피살되었다. [75] 물론 한국이 통일되면 미국의 영항권에 직접 노출되기에 이것을 더 두려워하는 이유도 있지만, 한국의 고도화된 민주주의의 영향력 역시 무시 못할 불안요소이다. 중국 공산당에게 있어서 일당독재 체제와 정권은 양보는 물론이요 타협의 대상이 전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의 민주주의 유입을 차단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공산주의 붕괴는 곧 중국 공산당 정권의 종말을 뜻하기 때문이다. [76] 박근혜 탄핵 정국 당시 북한에서 관련 뉴스를 내보냈다가 '부패한 지도자를 끌어내리는 분노한 민중'이라는 진상을 알고 하루만에 황급히 지워버린 일도 있다. 탈북하여 남한에서 생활하는 탈북자들도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와 촛불시위를 통해 절대권력을 용납하지 않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주성하 기자 역시 대북 라디오 방송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자세히 설명하며 이를 북한이 나아가야 할 모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77] 더구나 이들 가운데는 말 그대로 충성스럽게 당을 위해 헌신하고 열성적으로 섬겨 그야말로 ' 절대로 북한을 떠나지 않을 것 같던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78] 간부 출신의 탈북자가 밝힌 탈북 동기에 따르면 누구보다 열정적이며 헌신적으로 당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 열과 성을 다했어도 돌아온 결과는 견제와 질시, 그리고 뇌물이 만연해 자신의 댓가가 다른 이에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북한이란 사회가 가진 모순을 보고 이 나라(북한)에 미련을 버리고 탈북했노라고 증언했다. [79] 특히 해외로 파견된 외화벌이나 일꾼들, 그리고 외교관 출신 탈북자들은 해외에서 생활하면서 북한의 실상을 매우 자세히 알게 된 이후, 더더욱 탈북에 대한 열망, 그리고 북한의 민주화에 대한 필요성을 절절하게 깨닫게 된다고 한다. [80] 실제 한국의 민주화 운동 역시 모두 학교, 특히 대학생들이 주도해 일어났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4.19 혁명은 그 시발점이 고등학교였지만 이 시기 고등학생은 우리나라 중위연령대이고, 충분히 지식인층이라 할 수 있었다. 정치계 기득권층들이 노무현 고졸 대통령이라고 폄하하지만, 사실 그 당시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낮은 학력도 아니다.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내는 목소리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이 집권하면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지식인 계층이다. 때문에 이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당연히 우민화 정책을 들고나오는 것이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가 우민화 정책을 시행한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81] 설립년도가 94년이므로 정치적 민주화운동에는 관련이 약하다. [82] 그러나 3권은 글씨가 깨져서 못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