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박종철(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박종철 朴鍾哲 | Park Jong Chul |
|
|
|
<colbgcolor=#f5f5f5,#2d2f34> 출생 | 1965년 4월 1일[1] |
부산직할시
서구
아미동 (현 부산광역시 서구 아미동) |
|
사망 | 1987년 1월 14일 (향년 21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71길 37 민주인권기념관) |
|
사인 | 물고문 중 질식사[2] |
본관 | 밀양 박씨[3] |
본적 | 경상남도 양산군 정관면[4] |
거주지 | 부산직할시 영도구 청학1동[5][6] |
학력 |
토성국민학교 (졸업) 영남제일중학교 (졸업)[7] 혜광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 언어학 84 / 명예학사) |
종교 | 불교[8] |
직업 | 학생운동가 |
부모 | 아버지 박정기[9], 어머니 정차순[10] |
형제자매 | 형 박종부, 누나 박은숙 |
인척 | 조부 박영복, 조모 정금순[11], 삼촌 박월길, 고모 박정애 |
[clearfix]
1. 개요
"종철이를 살려내라!"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후 학생운동의 구호.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사망한 후 학생운동의 구호.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이 사망한 후 한 말.[12]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아들이 사망한 후 한 말.[12]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학생운동가, 열사. 이한열과 더불어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인물이다.
2. 생애
1965년 4월 1일 부산직할시 서구 아미동에서 아버지 박정기와 어머니 정차순의 2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박종부와 누나 박은숙이 있다.부산 토성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13]와 부산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3년에 1년 재수해서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했다.[14]
고교 시절 단짝이었으며 함께 서울대학교 84학번으로 재수해 입학한 김치하에 따르면 "얼굴이 하얗게 뽀얗고 피부가 맨들맨들한데 두꺼운 안경을 낀, 그 당시로서는 귀티 나는 친구"라고 한다. 더불어 회고하기를 "아주 성실하고 차분한 사람이었으며, 한번 자리에 앉으면 진득하게 공부하는 친구였다.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가족들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종종 마음이 담긴 편지를 보내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 최인호 역시 그의 첫인상에 대해 "외모나 인상이 순진하고 해맑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동기들보다 정치의식이 상당히 높았다"고 설명했다. 1987년 1월 14일 이후 31년, 박종철을 기억하는 두 친구의 이야기.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당시 농성지원 가두시위에서 체포되어 5일 구류를 살았고 여름 방학에는 공활(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참가했다가 4월 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가두시위에서 체포, 구속되었고 7월 15일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다음은 박종철이 옥중에서 부모님께 쓴 편지들 중 하나다.
아버지, 어머니.
더운 날씨에 비는 오지 않고, 높은 하늘은 틀린 일기예보를 조롱이나 하는 듯이 연일 쨍쨍 내리쬐는군요.
꽤 더운 편이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치 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먹고 잘 놀아서 피둥피둥 찐 살을 빼느라고 사우나탕, 헬스클럽 다니면서 땀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복더위에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찬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들에 비하면 저는 신선 놀음입니다.
가족들의 그런 태도는 여기 갇혀 있는 저에게는 진정으로 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딴 가족들은 면회 오면 어떻게든 꿋꿋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아 주고 바깥 소식들을 전해주고들 하는데, 허구헌날 판사님 앞에 고개 숙여라, 판사가 무슨 내 할아버지라도 됩니까.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구속시켰습니까. 저들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저들 편한 대로만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 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구속되어 있는 사실을 왜 쉬쉬합니까. 한 명에게라도 더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알리십시오. 내가 왜 구속되었는가를, 저들의 폭력성을, 우리들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고발하십시오. 그럴 용기가 없으면 마음 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 주십시오.
엄마 아버지의 막내아들은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만 줄입니다.
1986년 7월 8일
더운 날씨에 비는 오지 않고, 높은 하늘은 틀린 일기예보를 조롱이나 하는 듯이 연일 쨍쨍 내리쬐는군요.
꽤 더운 편이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합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비치 파라솔 밑에서 선글라스 끼고 한가하게 피서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먹고 잘 놀아서 피둥피둥 찐 살을 빼느라고 사우나탕, 헬스클럽 다니면서 땀 흘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삼복더위에 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먼지와 기름 냄새로 가득찬 무더운 작업장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노동자들에 비하면 저는 신선 놀음입니다.
가족들의 그런 태도는 여기 갇혀 있는 저에게는 진정으로 위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딴 가족들은 면회 오면 어떻게든 꿋꿋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용기를 복돋아 주고 바깥 소식들을 전해주고들 하는데, 허구헌날 판사님 앞에 고개 숙여라, 판사가 무슨 내 할아버지라도 됩니까.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이 구속되어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입니까.
누가 우리를 구속시켰습니까. 저들을 미워합시다. 그리고 저들이 저들 편한 대로만 만들어 놓은 이 땅의 부당한 사회구조를 미워합시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 속으로 진실하게 믿는 용기가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구속되어 있는 사실을 왜 쉬쉬합니까. 한 명에게라도 더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알리십시오. 내가 왜 구속되었는가를, 저들의 폭력성을, 우리들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고발하십시오. 그럴 용기가 없으면 마음 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 주십시오.
엄마 아버지의 막내아들은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이만 줄입니다.
1986년 7월 8일
2학기 개강을 앞두고 철이는
서울로 올라갔다. 아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함께 활동하던 여러 명의 선후배들이 ‘5·3 인천항쟁’으로 구속되고 없었다. 철이는
법대 친구와 토론하며 새로운 이론들을 익혔다. 이때 읽은 책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국가와 혁명> 복사본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출간되지 않는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읽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철이가 마지막으로
부산에 내려왔을 때, 누나 은숙은 일본어를 공부하는 동생을 보고 의심했다.
“니 공산주의 서적 볼라고 일어 공부하는 거 아이가?”
“그래, 맞다. 와? 니 어머니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돈, 승차권, 목도리 아낌없이 주던 '자선사업가' 박종철“니 공산주의 서적 볼라고 일어 공부하는 거 아이가?”
“그래, 맞다. 와? 니 어머니한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출소 후에도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언어학과 3학년으로 학생회장 직분을 맡았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자정 경 하숙집 앞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불법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다가 사망했는데 이에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을 늘어놓아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15] 자세한 내용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참조.
3. 기타
- 1997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추모비와 흉상이 건립되었고 2004년에는 혜광고등학교에도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본래 혜광고 교정에도 흉상을 세우려고 했지만 혜광고에서 반대하여 추모비 만으로 타협했다고 한다.
- 1989년 박종철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동아리 선후배들이 주축이 되어 '박종철출판사'를 설립했다. 박종철출판사 페이스북과 최인호(영어 강사) 항목 참고. 박종철출판사에서 발간하던 박종철 평전이 절판되면서 PDF로 무료 공개했다. 다운로드 링크
- 2001년 2월 26일 서울대학교는 박종철 열사에게 명예 학사학위증을 수여했다.
- 2018년 3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요양원에 있었던 박종철의 아버지(89)를 만나 31년 만에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현직 검찰총장이 과거사에 대해 직접 사과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아버지는 검찰의 사과를 받은 지 4달 뒤 2018년 7월 28일 아들 곁으로 떠났다.
- 유골을 산골하였기 때문에 박종철의 묘소는 가묘로, 여기에 실제 안장된 사람은 박종철의 아버지다. 1987년 1월 16일 아침에 벽제화장장(현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 후 임진강에 산골하였다. 1989년 초혼장을 치른 후 산골한 곳의 흙을 관에 담아서 가묘를 만들었는데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역[16]에 이 가묘가 있다.
- 생전 종교가 불교였다. 대공분실에 친형 박종부와 스님이 추모하러 같이 온 것도 그렇고 사후 31년만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스님들이 모인 걸 보면 불교가 확실하다.[17]
- 2019년 7월 3일 인터넷 쇼핑몰 무신사가 자사의 발목양말을 소개하는 카드뉴스 형식의 인스타그램 광고에서 "속건성. 책상을 탁쳤더니 억하고 말라서"라는 문구를 넣어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무신사는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광고를 삭제하고 사과문을 게시했고 박종철기념사업회에 후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4. 대중매체에서
- 2010년 SBS 드라마 < 자이언트> 53화에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그의 죽음 이후 이강모의 형 이성모는 조필연과 "전두환 정권도 끝"이라고 말한다.
- 최규식의 만화 <100도>에서 주인공 영호의 대학 선배로 나오며 친구 동수와 함께 대학 민주화 운동의 중심 인물이면서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주는 분위기 메이커로 비중있게 묘사된다. 영호의 체포 등 여러 악재가 반복되는 상황에서 끝까지 민주화 운동을 지키려 했으며 실제 역사처럼 체포되어 고문 치사로 사망한다. 이후 그의 죽음을 계기로 대학 동기,후배들은 물론 영호 어머니 같은 대중들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총학생회장이 된 친구 동수의 주도로 민주화 운동이 비폭력 운동으로 변화되는 등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다.
- 2017년 개봉한 영화 < 1987>에서는 배우 여진구가 연기했다. 공교롭게도 박처원 역을 맡은 김윤석이 박종철 열사의 혜광고등학교 2년 후배이다. 그래서 김윤석이 "영화 속이긴 하지만, 내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5. 같이 보기
[1]
조기입학으로
1971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2]
정확한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다. 욕조의 턱 부분에 목이 눌려서 질식사한 것이므로
익사가 아니다.
[3]
규정공파 26세손,
혁거세 70세손 종○(鍾○) 항렬.
[4]
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5]
현 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1동
[6]
본적과 주소는 사체검안서에서 공개되었다.
[7]
원래 동대신동 서여고 자리에 있었으나 열사가 졸업한 지 3년 후인
1983년 장림으로 이전하였다.
[8]
[함께 쓰는 화두-'한국불교'] ② 1987년 박종철 열사와 불교. 부모님도 독실한 불교 신자다.
[9]
1928년
10월 29일 ~
2018년
7월 28일 (향년 89세)
[10]
1933년
1월 1일 ~
2024년
4월 17일 (향년 91세)
[11]
1947년에 복막염으로 별세.
[12]
이 말은
6월 민주 항쟁 시위단의 플래카드에도 쓰였다.
[13]
現
부산영남중학교
[14]
1~2월생이 아닌데도 1년 조기 입학한 경우라 결과적으로는 또래들과 같은 학번이 된 셈이다.
[15]
이 대사는 영화
1987에서
박처원 처장을 맡은
김윤석이 했는데 김윤석은 "내가 이 대사를 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가 박종철 열사의
혜광고등학교 2년 후배이며 1987년 당시 실제 대학생으로서 이 얼토당토않은 변명거리가 신문지 헤드라인으로 도배된 걸 생생하게 기억하는 세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중에선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어?" 로 나오는데 김윤석이 연기하다가 너무 화가 치밀고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고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가 "어?"였다고 한다. 그래도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하는 일이고, 이왕 배역을 맡는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시대와 인물의 고증에 충실해야 하니 열심히 했는데 연기에 들어가자 분노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것이다.
[16]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사망한 민주열사들의 묘들이 있는 곳이다.
전태일,
조영래의 묘지도 이곳에 있다. 박종철이 부산 출신이라 영남권 민주열사들이 잠들어있는 양산 솥발산 공원묘원에 안장될 수도 있었지만 상징성이 높은 인물이라 본가에서 멀리 있는 모란공원으로 간 모양이다.
[17]
속세의 불자들이 사망했을 때 스님들이 장례를 주도하는 일이라던지, 조문하고 경을 외우는 일이 드물긴 하지만 은사스님의 영향력이 큰 청년 불자거나 속세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들의 경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