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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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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집권 이후로는 좌파 진영의 인사로 분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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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코뮌
La Commune de Paris
Commune of Paris
파일:적기.svg
깃발
1871년 3월 18일 ~ 5월 28일
성립 이전 진압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
{{{#!wiki style="margin:-16px -11px" 국가 코뮌의 라 마르세예즈
수도 파리
언어 프랑스어
국교 없음( 국가 무신론)
정치 체제 코뮌
국가 이념 자코뱅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표기 프랑스어: Commune de Paris
한국어(표준어): 파리 코뮌
한국어(문화어): 빠리 콤뮨
영어: Paris commune
}}}
파일:파리코뮌.jpg
코뮌이 설치한 파리 시내의 바리케이드.

1. 개요2. 배경3. 역사
3.1. 탄생3.2. 파리 코뮌의 정책3.3. 진압3.4. 진압 이후
4. 영향5. 문화유산 파괴6. 여담

[clearfix]

1. 개요

"코뮌이 이런저런 미숙함은 있었지만 코뮌의 가장 큰 업적은 코뮌이 존속했다는 것 자체였다. 그것이 자라나는 토양은 근대 사회 자체다. 아무리 살육을 한다 해도 그것을 짓밟아 없앨 수는 없다. 이를 짓밟아 없애고자 한다면, 정부들은 자기 자신의 기생적 존속 조건인,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제를 짓밟아 없애야 할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자유지상주의 마르크스주의 운동. 70일 간 존속한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이며 프랑스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공산주의 정권이다. 자코뱅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 다양한 이념으로 구성되어 여성 참정권 보장, 노동 시간 제한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진보적인 정책을 펼쳤다.

2. 배경

예나 지금이나 혁명의 도시였던 파리는 강력한 시민 봉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파리 코뮌도 엄밀하게 따지면 기존 정부가 세금값을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나타난 이 혁명 정부만 일컫는 게 아니라 1789년의 그 대혁명 당시 중요한 정치적 격변마다 시민들이 쇠꼬챙이, 창, 부엌칼, 사냥용 머스킷 등등으로 무장하고 파리 시청 오텔드빌(Hôtel de Ville)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도 파리 코뮌이었으며 더 광의로 파리 시민봉기 전통 그 자체로 보면 그 이전으로는 16세기 위그노 전쟁의 파리 신성동맹, 이후로는 현대의 노란 조끼 운동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1871년의 혁명 정부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파리 코뮌'이란 단어 자체는 보통명사로서 프랑스 혁명사에서도 늘상 등장하니 헷갈리지 말자.

프랑스 제2제정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너무나도 한심한 대처를 보여주자 결국 나폴레옹 3세는 폐위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아돌프 티에르를 수반으로 새로 들어선 공화정부도 나폴레옹 3세 못지않은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굴욕적인 사태가 지속되었다. 신생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빌헬름 1세의 즉위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이루어졌으니 말 다했다... 거기다가 새로운 국민의회가 자리를 잡은 도시가 하필이면 또 앙시앵 레짐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였다. 전쟁 직후에는 보르도에 수립되었으나 임시정부가 완전히 구성된 후 베르사유로 옮겼다고 한다.

파리가 대혁명이 일어났던 바로 그 도시인 만큼 파리 시민들은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안 그래도 전쟁의 굴욕적인 패배로 불만에 차 있던 시민들은 이런 일로 인해 더더욱 분노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쌓여가던 불만이 폭발한 것은 의용군인 국민위병의 처리 문제였는데, 안 그래도 불신을 받던 임시정부가 프랑스군의 예비군 역할을 하던 의용군을 무작정 무장해제시키려 하자 파리 시민들과 의용군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었다.

3. 역사

3.1. 탄생

어제까지는 이름조차 없었으나 곧 만천하에 그 이름을 날릴 이 미천한 프롤레타리아트ㅡ국민 방위대 중앙 위원회 성원들ㅡ가 정의와 권리에 대한 깊은 애정과 프랑스와 공화정에 대한 끝없는 헌신으로 충만하여 침략당한 조국과 위협받는 자유를 구하러 단호히 일어섰다.
우리 나라는 다시 일어서고, 부흥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프랑스 혁명의 코뮌 전통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
코뮌은 모든 정치 체제의 토대다. 코뮌은 자치를 보유해야 한다. 즉 코뮌의 독특한 특성과 전통과 필요를 인정하는 자치 행정, 자치 정부를 가져야 한다.
<3월 18일 혁명> 中, 《파리 코뮌 공보》 1871년 3월 20일 자

3월 18일, 티에르는 국민위병이 보유하고 있는 대포를 탈취하고자 정규군을 파견했다. 군인들은 대포가 있었던 몽마르트르에 도착하여 대포를 차지했지만 곧 분노한 시민들과 국민위병들이 몰려들었다. 군중들이 모여들자 정부군 여단장은 발포를 명령했지만 군인들이 시민들과 손을 잡으면서 정부의 진압 작전은 실패했다. 이 일로 정국의 주도권은 파리 시민들에게로 넘어갔다.

곧 3월 26일 코뮌 평의원 선거가 파리에서 치러졌고, 84명의 평의원이 선출되면서 코뮌 평의회가 출범했다. 평의원들은 대다수가 자코뱅 공화주의 성향의 인물이었고, 블랑키주의자, 프루동주의자, 아나키스트 등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3월 28일 파리 시청 앞 광장에서 파리 코뮌의 성립을 선언했다. 이튿날부터 파리 코뮌은 10개의 위원회[1]를 구성하고 자치 정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3.2. 파리 코뮌의 정책

파리와 프랑스는 지금 진행되는 혁명의 성격, 원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당하는 이 비탄, 고통, 불행의 책임이 프랑스를 배신하고 파리를 외국에 내준 후... 이 위대한 도시의 파멸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있는 것을 당연하다.
코뮌은 파리 주민들의 열망과 바람을 확인하고 명확히 할 의무가 있다... 파리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인민의 권리, 자유롭고 정상적인 사회 발전에 부합하는 유일한 통치 형태인 공화정을 인정하고 공고히 할 것[2]을 요구한다... 모든 프랑스인이 인간, 시민, 노동자로서 능력과 자질을 완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코뮌의 절대적 자치를 요구한다....
보라, 무기를 든 파리는 용맹과 평온을 지키고... 열정과 활력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파리는 만인의 자유와 영광에 헌신하고자 무기를 들었을 뿐이다... 우리는 투쟁할 의무, 승리할 의무가 있다.
<프랑스 인민에게 고함> 中, 《파리 코뮌 공보》 1871년 4월 20일자
파일:파리코뮌의 구성원들.jpg
방돔 광장에 모여 있는 파리 코뮌 의원, 군인,[3] 시민들

다양한 스펙트럼의 좌익으로 구성된 파리 코뮌 정부는 상당히 진보적인 활동을 벌였다. 먼저 정치적 주체를 인민으로 설정했고 인민 주권을 표방했다. 그래서 코뮌 평의회의 의원들은 지역구 시민들의 찬반에 따라 직위를 유지하거나 상실했다. 또한 이런 구조하에서 다양한 사회주의 정책들을 펼쳤다.

코뮌 정부는 노동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많이 시행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공장을 접수하도록 했으며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공장을 운영하여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도왔다.[4] 또 노동 시간을 하루 최대 10시간으로 제한했고[5] 최저임금제[6] 야간 노동 금지 등의 파격적인 조치도 발표했다. 이외에도 주택 임대료를 조정하고 빈곤층을 구제했으며 공창제를 폐지하고 도박을 금지시켰다.

교육에서는 교회와 교육을 분리했다. 당시 가톨릭의 영향으로 학교에서는 종교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는데 코뮌 정부는 교육에서 종교를 거세하여 세속주의 교육을 실시했다. 그런가 하면 초등 과정에서 의무교육를 무료로 시행했으며 직업학교를 설립하여 직업교육도 강화했다. 교육 내용도 실용 교양을 겸비하도록 했다. 또 예술 교육에도 신경을 써서 예술가들을 지원해 주었다. 당시 코뮌의 지원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예술가가 귀스타브 쿠르베다. 그는 코뮌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다가 코뮌 진압 이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코뮌 정부는 여성 외국인의 권리 신장에도 신경을 썼다. 파리 코뮌은 여성들과 외국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고 이들이 코뮌 정부 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최초의 여성 대중 운동 조직여성 동맹을 결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코뮌은 자유로운 결혼을 인정했으며 독신 여성들과 그 자녀들에 대한 연금 지원도 실시했다. 놀라운 것은 법률혼뿐 아니라 사실혼인 경우에도 이 정책이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또 독일 출신 노동자를 노동부 장관으로 기용하기도 했는데 독일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2등 국가였고 불과 몇 달 전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했던 나라임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나게 파격적인 인사였다. 한국으로 예를 들면 중국인을 고용노동부 장관으로 임명한 셈이었다.

그밖에 코뮌 정부는 ' 권위주의에 대한 공격'이라는 명목으로 나폴레옹 1세 당시 세워진 방돔탐 등 여러 권위적인 건물과 기념물, 문화유산들을 정책적으로 파괴하기도 했다.[7]

3.3. 진압

파일:파리코뮌 진압 직후의 파리.jpg 파일:사살된 코뮌 관련자들.jpg
진압 작전 후 폐허가 된 파리 시내[8] 사살된 코뮌 관련자들

초기에는 코뮌 측의 병력이 훨씬 우세했으나 2주일만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베르사유의 제3공화국 정부는 (충성심이 의심스럽던) 파리에서 철수시킨 정규군 대신 지방에서 징집한 군대를 집결시키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교섭해 독일이 조기 석방한 40만 명의 프랑스군 포로들을 바로 전력으로 편입했다.[9] 코뮌과 정부 간의 협상도 있었으나 결국 4월 2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 코뮌 측은 훈련 부족과 기율 결핍으로 패배를 거듭했다. 특히 명확한 지휘 계통의 부재와 다양한 정파들 간의 상호 불신으로 인해 전투는 코뮌군의 계속된 패배로 이어졌다.

당시 코뮌군의 훌륭한 지휘관이었던 로셀은 군사위원회 의장직을 그만두면서 사임서에 이렇게 썼다.
"코뮌 의원 동지들, 모두들 토론은 하나 아무도 따르지 않는 지휘의 책임을 내가 계속하여 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코뮌이 토론은 하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 만일 내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최소한의 군사력이 있다면 나는 적을 칠 수 있다..... 포병위원회의 엉터리가 포병대 조직을 막았고, 중앙위원회의 머뭇거림이 집행을 지연시키고, 대장들의 사소한 선입견이 군대 동원을 마비시키고 있다...."

결국 5월 21일 밤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 시내로 돌입하여 28일 오후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피의 1주일이 시작되었다. 코뮌 중앙위원회와 공안위원회는 정부군에게 "그대들도 프롤레타리아다. 군사 전제주의에 복종하지 마라. 불복종이 그대들의 의무다!"라고 호소했으나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베르사유의 티에르 정부는 지방에서는 관용을 베풀더라도 파리를 점거한 역도들만은 반드시 응징하여 피의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에 불타고 있었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 직후의 국방상 위기 사태를 교훈 삼아 보더라도, 프랑스의 신정부가 좌파 폭도들에게 맞서 충분히 결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유럽 열강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파리 코뮌의 절망한 과격파들은 막나가기 시작했다. 코뮌 과격파는 포고를 내려서 총알이 발사된 건물의 거주민들을 모조리 처형하라는 막장 지시를 하고 만다. 이에 눈이 뒤집힌 정부군도 코뮌에 가담한 자들을 자비 없이 응징하기 시작했다. 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엘리 르클뤼는 "코뮌은 태풍에 유린당해 부유하는 불운한 해파리와 같았다. 우리의 작은 생명들은 이 엄청난 사건들에게 삼켜졌다."라고 표현했다. 당시 정부군에 복무했던 쥘리앵 폴리어리는 자르댕 뒤 뤽상부르에 도달했을때 어떤 여인이 적기를 게양하는 걸 목격하자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가 개머리판으로 여인을 죽도로 두들겨팬 다음에 건물에서 끌어내리다가 1층에 도달하기도 전에 쏴 죽여버린 일을 회고했다.

궁지에 몰린 코뮌은 정부군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자르댕 뒤 뤽상부르의 화약고를 자폭시켰고 덕분에 더 이상 정부군에게 맞포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윽고 코뮌은 정부군에게 “진압을 계속하면 팡테옹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어리석은 위협 덕분에 진압군의 공세는 팡테옹과 그 주변 바리케이드들에 집중되었는데, 코뮌군은 참패했고 이날 팡테옹에서만 700명의 코뮌군 포로들이 총살되었다.

코뮌 측에게 불리한 요인으로 나폴레옹 3세 치세에 진행된 파리 시가지 개조 사업도 있었다. 본래 파리 시는 좁은 골목길들이 뒤엉킨 도시였고, 프랑스 혁명 시기부터 시민들은 이런 골목길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해서 '해방구'를 만들고 저항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 3세 때 파리 시에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을 벌였고, 이로 인해 도시 구획이 정비되고 넓은 가도들이 들어섰다. 이 때문에 더 이상 바리케이트를 설치해서 저항하기가 어려웠고, 코뮌 측에게도 그대로 적용된 것.

코뮌은 몽마르트르 언덕과 센 강 서안을 잃었고 정부군은 센강 동안을 향해 접근하여 라 로퀫 감옥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여기엔 파리 대주교 조르주 다부아를 비롯한 많은 인질들이 잡혀 있었는데, 정부군의 포격과 코뮌군의 참패로 엄청난 희생자들이 발생하자 흥분한 군중은 보복을 요구했고 이에 코뮌은 몇몇 장교들을 스파이로 몰아 처형했다. 이어 코뮌 측은 약식 군사재판을 열어 다부아 대주교를 비롯해 대부분 가톨릭 성직자들로 이루어진 인질들을 총살했다. 또 튈르리 궁[10], 루브르, 팔레 루아얄과 중세 시절부터 건축된 각종 정부, 법원 청사 건물 등 수많은 역사적인 건물들을 고의로 불태우면서 끝까지 항전했다. 베르사유 정부군도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한 포로를 즉결 처형하는 등 처절하게 보복했다. 보복은 보복을 일으켰고 그 강도를 계속 더해갔다.[11]

이때 죽은 사람의 숫자는 대략 3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 1871년의 파리 인구는 175만 명 정도였다. 2019년의 파리 시내 인구가 220만 명이니 2019년 기준으로 봐도 1% 이상이다. 1871년 당시 파리 인구로 치면 거의 2%에 가까운 대학살이었다. 프랑스 혁명을 전공한 노명식에 따르면 피의 주간에 사망한 코뮌파 포함 사망자의 수치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고 한다. 관련 연구들의 평균치에 따르면 즉결재판에서 처형된 자의 수는 적게 잡아도 최소 2만 명 이상이고, 많이 잡으면 2만 5,000명 이하라고 하지만 이때 즉결재판으로 처형된 희생자들의 명단조차 없기에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파리 코뮌 시기에 희생된 자의 수는 즉결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전사한 자들과 '피의 주간' 이후에 마구잡이로 무차별 학살된 자들을 포함시키면 그 수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학살극 이후 파리 코뮌 정부는 마침내 해체되었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3.4. 진압 이후

진압된 이후에도 보복이 이어져서 4만여 명이 법정에 끌려나왔으며 이 중 13,450명이 재판을 받아야 했다. 이 중 사형 270명, 강제노동 410명, 요새 금고형 3,989명, 유형 3,507명이었다. 1875년 군부가 의회에 보고한 통계에 따르면 투옥된 자가 43,522명이고 이 중 7,213명이 예비심에서 석방되었으며 나머지 36,309명이 기소되었다. 이중 기소 무효가 23,727명, 무죄 판결이 2,445명이었으며 결국 유죄판결을 받은 수는 10,137명이었다. 이중 사형이 93명, 무기가 251명, 유형이 4,586명, 나머지는 전부 금고형이었다고 한다. 일부 코뮌 참여자들은 프랑스를 빠져나와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티에르를 대통령으로 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은 다시 명맥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1876년 총선에서 강성 보수 왕당파가 참패하면서 중도 보수 공화파가 승리를 거두었고 공화파가 정치위기를 극복한 이후 코뮌 가담자에 대한 사면령이 1879년과 1880년에 내려지면서 일부 코뮌 가담자들은 의회 정치에 참여하며 정계에 진입하였다. 이후 파리 코뮌의 주 이념이었던 급진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 정계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함에 따라 프랑스 정계에도 강력한 영향을 남겼다. 비록 당대에는 실패했지만, 후대에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남긴 셈이다.

4. 영향

비록 코뮌은 실패로 끝났지만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시도는 이후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훗날 러시아 혁명을 통해 세계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을 세우는 데 성공한 블라디미르 레닌부터 파리 코뮌을 사회주의 혁명의 예행 연습이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으며[12] 이후 전세계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운동의 본보기/반면교사가 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사에 비춰보면 파리 코뮌은 그간 프랑스 혁명을 이룬 상퀼로트들의 최후의 폭력을 동반한 혁명이라고도 할 수있다. 역사가 데이빗 톰슨에 의하면 파리 코뮌은 1789년 이래의 프랑스 혁명적 전통의 매듭 중 가장 큰 것으로서, 파리 코뮌이 문명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야만적으로 끝나자 이후 폭력의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가 평화적 타결로 혁명을 이어가는 이유가 파리 코뮌에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뷰리라는 역사가는 파리 코뮌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향으로 우선 파리 코뮌을 통해 혁명의 중점이 파리에서 벗어났다는 점을 들었다. 이전까지 프랑스의 정치적 중심은 파리였으며 프랑스 혁명을 시작으로 모든 혁명은 파리에서 시작되고 지방의 반발은 파리의 중심을 차지한 혁명세력에게 짓눌렸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파리를 차지했는데도 지방에 밀려서 패배'했다. 파리의 절대 우위가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결말은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폭력이 불안정과 사회적 위기에 늘 동반된다는 생각을 버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실패로 조직화된 사회주의의 성장을 다시 지연시켰다는 면도 있었다. 물론 이후 프랑스에서도 사회주의는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졌지만 주류가 되기는 힘들었다. 마지막으로 파리 코뮌이 해체되면서 국민위병 부대도 해체, 19세기 내내 정부와 별개로 민중을 대변했던 힘이 소멸됐다는 점도 지적했다. 파리 코뮌을 통해 제2제국으로부터 제3공화국의 실현이 한층 더 빨라졌다는 것이다.

전세계 좌익에서 널리 불리는 인터내셔널가가 이 사건으로 인해 탄생했다. 인터내셔널가의 탄생에 대해 알아보려면 해당 문서 참조.

2000년 피터 왓킨스가 감독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코뮌이 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파리 코뮌 당시 벨기에에 있었다. 그는 파리 코뮌에 대해 동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후일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자 정부군이 파리에 들어오며 끔찍한 전투와 학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절규했고 <참혹한 해(L'Année terrible)>라는 시집을 1872년 출판한다. 그 중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는 다음과 같다. 원문
<길거리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죄 있는 피와 죄 없는 피로 붉게 물든 디딤돌 사이 바리케이드 위에서
12세의 소년이 친구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 자식, 너희도 놈들과 한패지?
소년은 대답했다.
우리들은 친구입니다.
좋아.
장교는 말했다.
너희는 총살감이다, 차례를 기다려라.
한 소년이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시계를 전해 주고 오겠다고 말했다.
장교는 의심의 눈초리로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건 핑계지? 도망치려고 그러지?
아닙니다. 틀림없이 돌아오겠습니다.
좋아, 도중에 도망치고 싶으면 도망쳐.
장교는 소년을 풀어 주었고 소년은 곧 돌아왔다.
소년은 벽에 등을 기대어 선 채 떳떳하게 외쳤다.
나는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처형은 수치를 부른다. 그래서 사관은 놓아주었다.

아이여, 나는 알 수 없다. 선도, 악도, 영웅도, 도둑도.
모두를 끌어넣어 흘러가게 하는 회오리 속에서,
무엇이 너를 이 전투에 끌어들였는지, 하지만 나는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마음이야 말로 가장 기품 있는 마음이었음을

5. 문화유산 파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파리 코뮌 기간 동안 파리를 상징하는 각종 유서 깊은 역사적 건축물들과 문화유산들이 대거 파괴되었다. 파리 코뮌이 진압되고 나서 도시가 거의 잿더미로 변해 있었던 것은 정부의 과도 진압이라기보다는 코뮈니스트들이 스스로 벌인 엄청난 방화 때문이었다.

파리 시내에 있던 여러 유서 깊은 성당, 궁전, 의회, 정부, 법원, 오페라하우스 건물 등이 방화로 소실되었다. 코뮤니스트들은 역사적, 종교적 건축물에 의도적으로 방화했으며 석유와 액체 타르 등을 써서 방화한 덕분에 많은 건물들이 속수무책으로 불타 버리고 말았다.

파리에서 가장 유서 깊은 궁전인 튈르리 궁전도 이때 코뮤니스트들의 방화로 완전히 전소되었으며 루브르 궁전에도 방화가 시도되었으나 화재가 조기 진압되어 나중에 복구되었다. 그러나 튈르리 궁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현재 튈르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16세기에 지어져 네오 르네상스 스타일로 유명한 파리 시청도 이때 방화로 전소되었다가 나중에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6. 여담



[1] 위원회의 종류는 다음과 같았는데 재무, 군사, 사법, 보안, 식량 공급, 노동, 공업, 교환, 외무, 공공사업, 교육이었다. 이들 10개의 위원회들은 동일한 권력을 가졌고 각 위원회의 위원들이 업무를 담당하며 정책을 시행했다. [2] 이후 공화정은 바뀌지 않고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공산주의 정권은 돌아오지 않았다. [3] 중간중간 파리 방어전에 투입된 이후 그대로 주둔하다가 가담한 프랑스 해군 육전대 수병들도 보인다. [4] 흔히 노동자 자가경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시도는 노동자들이 직접 노동조합을 통해서 산업을 운영하는 산업 민주주의 체제였고 파리 코뮌 이후에는 네스토르 마흐노의 우크라이나 자유지구, CNT-FAI의 스페인 내전 당시 자가경영과 같은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시도하는 체제였다. 즉 국가 자본가도 아닌 노동자들 자신들이 직접 산업에 의견을 낼 수 있는 체제였다. 이후 이 이론은 유고슬라비아 요시프 브로즈 티토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5] 8시간 노동이 꽤나 보편화된 21세기에는 10시간이 뭐냐는 이들도 있겠지만 저 당시엔 10시간은 고사하고 적어도 18시간의 노동, 심하면 20시간 이상의 고노동도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이를 절반 가까이 줄인 것이다. [6] 러시아의 얘기지만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에 나오길 여성들이 18시간의 노동을 해도 고작 30수, 즉 1프랑 10수 대략 50,000원 가량의 돈만을 받았다고 나올 정도로 당시 자본주의 임금 제도는 정말로 노예와도 같았다. [7] 물론 당시 입장에서의 나폴레옹 시기 기념물은 건립된지 반세기도 안된것들이 많았기에, 당시 인식은 그냥 노후건물이긴 했다. 이 경우 약 한세기 후의 중국 문화대혁명같이 학술가치 풍부한 중요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때려부순것과는 다르게 최소한의 변명거리는 있으나, 코뮈니스트들도 팡테옹을 방패막이로 쓰는 등 지금 시각으로 보면 경악할 만한 반달 행위를 많이 저지른 것은 사실이다. [8] 시내가 폐허로 변한 것은 정부군의 진압에 의한 것이 아니고 전세가 불리해지자 코뮈니스트들이 의도적으로 방화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9] 독일 역시 공산주의에 기겁하는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코뮌을 진압하는 제3공화국 정부에 협조해줬다. [10] 튈르리 궁은 완전히 파괴되어 복원을 못하고 그 터가 튈르리 공원으로 흡수되었다. [11] 이 끔찍한 학살극 앞에서 신문 《파리 주르날》(Paris Journal)은 이렇게 호소했다. "죽이는 일은 이제 그만두자! 살인범이나 방화범이라 해도 더 이상 죽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놈들의 사면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형의 집행을 유예하고자 하는 것이다." [12] 레닌은 소련 체제가 두 달을 버티자 파리 코뮌보다 오래 지속됐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13] 사실 이건 폐허 당시 파리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좋아한 것도 있지만 경쟁자였던 프랑스의 수도의 폐허를 보고 고소함을 느끼려는 의도도 다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14] 다만 프랑스 코뮌은 스탈린주의 정당인 프랑스 공산당이 집권 정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