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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2:39:24

튈르리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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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ïn_by_Henri_Vidal,_Tuileries_Garden,_Paris_October_2013_-_panoramio.jpg
Palais des Tuileries
1. 개요2. 소개

1. 개요

현재 파리 1구의 루브르 샹젤리제 사이에 있던 옛 왕궁.

프랑스 혁명 직후 루이 16세 부부의 정궁으로 잠시 사용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정권[1]이 여러 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프랑스 군주들의 정궁으로 계속 애용되다 프랑스에서 군주제가 완전히 사라진 1871년 파리 코뮌으로 방화되어 사라진 궁전이다.

2. 소개

파일:Panorama_de_Paris_(Des_Tuileries_à_la_Grande_Galerie_du_Louvre),_dessin,_BnF_Destailleur_Paris_t1,_27_–_Gallica_2013_(adjusted).jpg
훼손되기 이전의 튈르리 궁의 전경을 묘사한 삽화.
1564년 앙리 2세 왕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처음 공사를 시작하여 약 200년 동안 지어졌고, 특히 앙리 4세 센강 연변에 ‘물가의 장랑’이라 불리는 그랑드 갈르리를 증축하여 튈르리 궁전과 루브르 궁전을 연결시켰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루이 14세 때부터 오랫동안 거주해 온 베르사유 궁전에서 강제로 나오게 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가 머물렀던 곳으로 1792년 8월 10일 봉기 당시 튈르리 궁에서 루이 16세를 지키며 786명의 스위스 근위대가 전원 전사한 것을 기려 부르봉 왕정복고 시절인 1821~24년 스위스 루체른 덴마크 작가 루카스 아혼이 빈사의 사자상을 조각했다.

이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이곳을 황궁으로 지정하고 기거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왕정 복고 후에 역대 국왕들은 기존에 정궁이었던 베르사유 궁전이 있었음에도 계속 튈르리 궁에서 지냈다.[2] 나폴레옹 3세 때 북쪽으로 또 하나의 회랑으로 연결했다.

하지만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방화로 파손되어 1882년에 철거되었고, 이후 2000년대 복원 논의가 있었지만 이미 철거된 지 한 세기가 넘게 지났기에 유서깊고 역사적 가치가 높은 궁전임에도 흐지부지된 상태다. 파손된 공간은 튈르리 정원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1] 나폴레옹(프랑스 제1제국) - 루이 18세/ 샤를 10세(부르봉 왕정복고) - 루이필리프 1세(7월 왕정) - 나폴레옹 3세(프랑스 제2제국). [2] 나머지 군주들은 신체제 사람이거나 신체제와 타협한 인물이라 그렇다쳐도, 완전한 구체제의 상징인 루이 18세, 샤를 10세조차 본인들이 태어나고 자란 베르사유 궁전에 가지 않고 본인들의 불구대천지원수 나폴레옹이 사용하던 튈르리 궁에 기거한 이유는 프랑스 혁명 당시 베르사유 궁전이 혁명으로 인해 습격당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