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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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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역사
2.1. 춘추시대 초기
2.1.1. 주나라의 동천2.1.2. 정나라의 반기
2.2. 춘추시대 중기: 양강 체제의 정립
2.2.1. 제환공의 패업2.2.2. 진문공의 패업2.2.3. 효산 전투(崤之戰)와 목공의 서융제패2.2.4. 장왕이 떨쳐 일어나다2.2.5. 오나라의 등장2.2.6. 1차 미병 그리고 언릉 전투2.2.7. 내우외환2.2.8. 진도공의 패업2.2.9. 2차 미병
2.3. 춘추시대 후기: 양강 체제의 붕괴
2.3.1. 오吳-초楚의 강회 쟁탈전2.3.2. 초나라의 몰락2.3.3. 육경의 내전2.3.4. 오월쟁패2.3.5. 삼가분진
3. 전투 양상4. 국가
4.1. 주요 국가4.2. 기타 소국4.3. 각국의 작위4.4. 기타 이민족
5. 중국 춘추 시대의 인물6. 관련 창작물7. 관련 항목

[clearfix]

1. 개요

춘추시대(, Spring and Autumn period)는 서주(西周)가 이민족의 공격으로 수도를 호경(鎬京)[1]에서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천도한 시점부터 전국시대의 성립 이전까지의 시대를 말한다. 공자(孔子)가 저술한 역사서 《 춘추(春秋)》에서 명칭이 유래됐다.

춘추시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서주(西周)로 따로 칭하는데, 원래는 수도인 호경을 중심으로 하여, 천자가 직접 관할하는 왕기(王畿)가 형성되어 있었다. 왕기는 관중의 험한 요새적 지형과 웬만한 제후국들의 봉토를 앞서는 영토의 크기 덕분에 원만하게 제후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경이 이민족에 함락되고 유왕(幽王)이 살해되자 평왕(平王)을 새로 옹립해 낙양(洛陽)으로 천도했다. 낙양과 그 주변 몇 개의 으로 통치 기반이 축소된 주나라는 제후들을 컨트롤할 힘을 잃었다. 대신 패자(霸者/覇者)라는 개념이 생겨 힘 있는 제후가 천자를 대신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현재 흔히 쓰는 왕도, 패도 같은 용어도 이 시대의 정치 체제와 관련이 있다.

패자란 제후(諸侯)를 모아 회맹(會盟)을 가져 맹주(盟主)가 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권위가 떨어진 왕실에게 매년마다 조회 조공을 바치고, 천자를 대신하여 제후들을 감독, 통제하는 역할을 충실히 지켜야했다.

그렇지만 제후들은 패자국에게 중재의 대가로 매년마다 공물을 바쳐야하는 협약이 있었고 패자의 권력은 천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렇게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천자를 높이고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이데올로기는 점차 유명무실해져갔다.

이후 각 제후들 간의 세력 다툼이 격화되고 세력을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금기가 깨지면서[2] 춘추시대가 막을 내린다. 그나마 천자의 권위가 살아있고 무력을 쓴다 하더라도 명분의 탈을 쓴 패도(覇道)의 시대인 이전까지와 달리 모든 수가 허용되고 무력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강도(强道)의 시대인 전국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춘추시대의 강국으로는 제(齊)나라, 진(晉)나라, 초(楚)나라, 진(秦)나라, 오(吳)나라, 월(越)나라 등이 있다. 특히 제(齊)나라의 환공과 진(晉)나라의 문공을 필두로 강력한 제후들을 춘추오패라고 부른다.

2. 상세 역사

2.1. 춘추시대 초기

2.1.1. 주나라의 동천

기원전 771년, 신후와 견융족 연합군에게 수도인 호경(종주)이 약탈된 후, 주나라 천자는 진문후, 정나라의 태자 굴돌, 진양공[3], 위무공의 도움을 받아 왕성(성주)[4]로 천도한다.[5]

이민족에게 수도가 약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수도를 지킬 힘이 없어 동쪽으로 천도함으로써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게다가 주나라는 본거지를 잃음으로써 전처럼 육사(六師)를 유지한 여력도 없어졌기에 전처럼 제후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위를 가질 수도 없었다. 이로 인해 춘추시대 동안 주나라는 제나라와 진晉나라 같은 강대국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연명하게 된다.

2.1.2. 정나라의 반기

정나라의 시조는 주선왕의 동생[6]인 정백 우(鄭伯 友) 즉 정환공이다. 주유왕 당시 정치가 혼란하자 정환공은 자신의 나라를 옮기기로 결심하고 주나라 태사의 조언을 따라 괵虢과 회鄶 사이의 땅으로 옮기기로 한다. 왕에게 허락을 받고 나라를 옮기니 그곳이 신정(新鄭)이다.

기원전 771년, 주나라의 사도 직책을 맡고있던 정환공은 견융의 침입 때 주유왕을 지키다 죽고 태자인 굴돌이 뒤를 이으니 그가 정무공이다. 정무공은 동괵과 회鄶를 합병한다.

기원전 743년, 정무공이 죽고 장남 오생(寤生)이 뒤를 이으니 그가 정장공이다. 무공과 장공은 주나라의 경사를 맡았는데 정나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한 주평왕은 기원전 720년, 정장공의 업무를 괵공과 나누어 맡도록 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공이 왕을 원망하자 평왕은 그런 일 없다면서 정나라와 인질을 교환한다. 본래 천자와 제후가 인질을 교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주나라의 권위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보여주는 사건 중 하나이다.

같은 해 평왕이 죽고 태자는 이미 죽었기에 평왕의 장손이 뒤를 이어 즉위하니 그가 주환왕이다. 환왕은 즉위하고 괵공에게 정사를 맡기려 했다. 이에 정장공은 주나라 왕실 땅의 곡식을 무단으로 빼앗아감으로서 보복한다. 기원전 717년, 정장공이 입조하나 추수한 곡식을 약탈한 것에 분노한 환왕은 그를 예로써 맞이하지 않았고 장공은 분노하여 돌아간다. 주나라와 정나라의 갈등이 갈수록 고조되었고 환왕은 마침내 정장공을 경사 직분을 빼았자 장공은 더이상 천자에게 조근을 가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707년 가을, 왕이 직접 제후[7]를 거느리고 정나라 정벌에 나서 수갈[8]에서 맞붙었지만 대패하고 만다. 심지어 환왕은 전투 중 어깨에 화살을 맞았을 정도로 치욕스런 패배였고 이 전투로 주나라가 이빨빠진 호랑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천자와의 대립 말고도 정장공은 제, 노, 송, 위 등 중원 국가들의 일에 개입하며 훗날 소패(小覇)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그러나 기원전 701년, 춘추 초기를 주름잡은 간웅 정장공이 사망하고 정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게 된다. 장공 사후 기원전 701년부터 기원전 680년까지 장공의 네 아들이 군주의 자리를 다투는 혼란기가 지속되었고 기원전 680년, 정여공이 공자 영을 죽이고 복위에 성공하면서 마침내 분쟁이 마무리되지만[9] 이미 제齊와 초楚의 국력은 정나라보다 훨씬 강력한 상황이었다.

정나라의 위치는 강성할 때는 사방으로 치고나가기 좋았지만 약할 때는 사방의 강국들로부터 침략을 받는 위치였다. 약소국으로 전락한 정나라는 춘추시대 내내 진晉과 초楚의 전쟁터가 되었고 진이 침략하면 진에 붙고 초가 보복하러 오면 초에 붙는 박쥐 같은 행보를 이어나가게 된다.

2.2. 춘추시대 중기: 양강 체제의 정립

2.2.1. 제환공의 패업

정 장공의 사후에도 중원은 계속하여 열국의 각축이 일어났다. 이때 등장한 것이 제 환공 관중이다. 환공의 이름은 소백으로 제 양공의 이복동생이다. 양공이 즉위하여 폭정을 펼치자 공자 규[10]와 공자 소백은 각각 노魯와 거莒로 도망친다.[11] 연칭과 관지보가 양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사촌동생 공손무지를 옹립하나 공손무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시해된다. 공자 규와 공자 소백 중 먼저 도착하는 쪽이 군주가 되는 상황에서 소백이 먼저 도착하여 보위에 올랐다. 보위에 오른 소백 즉 제환공은 원한을 접어두고 포숙의 조언에 따라 관중을 등용한다.

이 무렵 초나라가 북진하여 식息을 멸하고 채蔡와 정鄭을 정벌하며 황하 유역의 제후국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북쪽에서는 적狄이 기원전 661년에는 형邢을 정벌하고 기원전 660년에는 위衛를 침략하여 위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이때 제나라가 개입하여 기원전 659년에는 형나라를 위해 이의夷儀에, 기원전 658년에 위나라를 위해 초구楚丘에 성을 쌓고 봉건하니 이를 계절존망이라 한다.

북쪽이 정리된 중원 연합군은 마침내 초나라를 공격한다. 우선 초나라에 복종하는 채나라를 정벌한 뒤 소릉에서 초나라군과 대치한다. 초나라에선 굴완을 보내 제나라의 관중과 담판을 짓도록 하고 양 세력의 대치는 초나라가 한발 물러나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기로 하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12]

기원전 655년, 환공은 수지首止에 제후를 모아 회합하고 이어서 제후들과 왕태자 정鄭이 회합함으로써 주나라 왕실의 안정을 도모한다. 태자의 어머니가 소자 대帶를 총애했기 때문에 주 혜왕이 태자를 폐하고 왕자 대를 태자로 삼으려 했고 제 환공이 나서서 태자와 회합을 가짐으로서 태자 정이 후계자라는 사실을 천하에 보인 것이다.

얼마 후, 주 혜왕이 죽었음에도 태자는 동생의 세력이 두려워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제나라에 도움을 청한다. 제 환공이 제후를 모아 회합을 열어 태자의 지위를 안정시킨다. 태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주 양왕이다.

기원전 651년, 환공은 규구에서 다시 한번 제후를 불러모아 회맹을 여니 이것이 그 유명한 규구지맹이다. 이때 주나라의 재宰 주공이 먼저 돌아가는 길에 회맹에 참여하러 가던 진 헌공을 만나 '제나라는 덕을 쌓는 데 힘쓰지 않고 북쪽으로는 산융,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정벌하고 이번엔 서쪽에서 회맹을 주관하는 등 원정만 하고 있으나 서쪽의 진晉은 정벌하지 못할 것이니 귀찮게 회합에 참여하지 말고 내부 단속에 힘쓰시오'라고 조언한다. 진 헌공은 이를 따라 그대로 말머리를 돌린다. 진 헌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그의 유언대로 해제가 뒤를 이으나 대부 이극한테 참살당하고 해제의 동생 탁자마저 이극한테 죽는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 제 환공은 습붕을 보내 공자 이오를 즉위시켜 진나라를 안정시킨다.

기원전 643년, 제 환공이 사망한다. 환공은 정실 부인이 셋이나 있었으나 그들로부터는 아들을 얻지 못했고 대신 여섯 명의 총첩들로부터 여섯 아들을 얻었다. 환공과 관중이 공자 소(公子昭)를 송양공에게 부탁하여 태자로 삼았으나 환공이 사망한 뒤 공자 무휴의 세력이 관리를 살해하고 무휴를 옹립했고 공자 소는 송나라로 도망간다. 이에 양공이 공자 소를 지원하여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공자 소를 옹립하니 그가 제효공이다.

환공의 패업은 환공과 관중이라는 두 인재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달성한 것이지 시스템을 개편하여 강국이 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두 인재가 사망하자 이전의 상황으로 회귀하게 되었고 춘추시대 내내 국력은 강력했으나 다시는 패업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효공을 세워 제나라의 혼란을 안정시킨 송양공은 자신이 제환공의 패업을 계승할 꿈을 품는다. 하지만 인신공양을 하는 등[13] 포악한 행동을 일삼아 제후들의 인망을 잃었고 초나라와 홍수에서 일전을 치르나 대패한다. 양공 본인도 부상을 입어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환공이 죽은 지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중원의 연합은 붕괴되었고 초나라의 북상이 재개되었다.

2.2.2. 진문공의 패업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진문공(晉文公)이다. 진문공은 진헌공의 아들로, 이름은 중이(重耳)이다. 본래 진헌공의 후계자는 태자 신생(申生)이었는데, 진헌공이 여희(驪姬)를 총애해 여희가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여, 신생을 자살로 몰아갔다.

당시 중이와 중이의 동생인 이오(훗날 진혜공)은 수도가 아니라 바깥에 나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이 본인들마저 죽이려 하자, 모두 외국으로 달아났다.

중이는 적(翟)나라로 달아나 십여 년간 있다가, 동생인 이오가 진(秦)의 도움을 받아 즉위하고 본인을 죽이려 자객을 보내니 적나라를 떠나 제(齊)나라로 달아났다. 당시 제나라의 국군은 그 유명한 환공으로, 환공은 공족의 딸을 중이에게 주고 극진한 예우로 대우했다. 중이는 제나라에서 편히 지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잃어버리는데, 이에 측근인 호언, 조최 등이 중이를 술에 취하게 한 후 수레에 태워 제나라를 떠난다.

중이는 조(曹), 위(衛)를 거쳐 송(宋)에 도착해 송양공의 지원을 받아 초(楚)나라로 가고, 초성왕의 도움을 받아 진(秦)으로 간다. 당시 진(秦)은 본인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진(晉)의 혜공이 즉위하기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뿐더러, 혜공이 죽기 전 진(秦)에 인질로 있던 혜공의 아들마저 말없이 도망쳐 매우 화낸 상태였기에 중이를 새롭게 진(晉)의 국군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진(秦) 목공의 도움을 받아 중이가 진(晉)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문공이다. 당시 초나라는 제나라도 주춤하겠다 미친 기세로 북진하며, 송나라를 격파하고[14] 조(曹), 위(衛), 정(鄭) 등 중원의 국가를 압박하던 와중이었다.

기원전 632년, 마침내 晉을 비롯해 秦과 齊가 참여한 북방 제후군과 초나라가 성복에서 크게 한판 붙는다. 자세한 내용은 성복 전투를 참고.

초나라를 대파한 후 진문공은 천토에서 회맹을 주도하니, 이것이 바로 천토회맹이다. 문공의 패업 이후로 중국사에서는 환문(제환공과 진문공)의 행동이라는 것이 천자를 보좌한다는 일종의 관용어가 되었다.

패업을 이룬 지 4년 만인 628년, 진문공은 사망한다. 죽었을 때 나이에 대한 기록이 좌전과 사기가 다른데, 사기에서는 60대 노인으로 나오는 반면 좌전에서는 만 43세에 불과했다. 전한 시대에 편찬된 사기보다 늦어도 전국시대에 완성된 좌전을 더 신뢰한다면, 19년간 방랑하며 고생한 것에 비해 일찍 죽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헌공, 문공이 다져놓은 진나라의 기반은 튼튼했다. 관중과 환공의 죽음으로 끝나버린 제나라의 패업과는 달리, 춘추시대 내내 진나라는 북방의 패자로 반楚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15]

2.2.3. 효산 전투(崤之戰)와 목공의 서융제패

2.2.4. 장왕이 떨쳐 일어나다

성복 전투 이후 초나라의 상승세는 꺾였지만 초나라는 여전히 중원을 포기하지 않아서 진(秦)과 연합해 진(晉)을 공격하기도 하였기에 조돈이 제, 송, 위, 진, 정, 허, 조 등과 동맹을 맺는 등 진과 초의 대립은 이어졌다.

그래도 초목왕 시기에는 중원보다는 장강 일대의 국가들을 정벌하였기에 직접적은 충돌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기원전 614년, 초장왕이 즉위하자 달라진다.

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며 아버지인 목왕이 급사하였기에 초반에 투극이 반란을 일으켜 납치되기도 하는 등 초나라의 정세는 불안정했고 거기다가 정세가 안정되자 장왕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기만 한다. 그러다가 3년째 되는 해에 오거와 소종의 간언으로 국정을 돌보기 시작한다.

장왕은 먼저 3년 동안 신하들의 행적을 통해 간신을 내쳤으며 같은 해에 용나라를 정벌하고 기원전 608년에는 송나라를 공격했으며 기원전 606년에는 융나라를 정벌한다. 그리고 장왕은 주나라 근처를 지나다가 군대를 사열했는데 이때 나온 고사가 문정(問鼎)이다.

문정 고사에서 보듯 이 시기의 초나라의 야망과 국력은 크게 올라가 있었고 실제로 성복 전투로 인해 꺾여져 있던 초나라의 기세는 기원전 597년에 벌어진 필 전투의 대승으로 다시 올라가 있었다. 다만 아직 주나라 중심의 질서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초장왕도 패자 정도에서 만족하고 그 이상의 자리를 노리지 않은 것이었다.

한편 필 전투 이후 장왕은 노, 송, 정 등을 복속시켜 초나라의 패권을 세웠다.

다만 장왕 시대에도 초나라는 부침이 없지는 않았는데 재상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하희라는 여인을 두고 벌어진 스캔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전의 제환공은 비참하게 죽고 진문공은 오래 재위하지 못한 것에 비해서 장왕은 23년이라는 짧지는 않은 재위기간과 안락하게 사망하여 춘추오패 중에서는 가장 끝이 좋았다.

이렇게 장왕이 세워높은 패권은 그 아들인 초공왕 때 언릉 전투에서의 패배로 흔들리며 초강왕 시기에는 패권을 완전히 잃는다.[16]

2.2.5. 오나라의 등장

오나라는 고공단보의 장남인 태백과 차남인 중옹이 세운 나라로 대대로 중옹의 후손이 맡아 다스렸는데 수몽 대에 이르러서 오나라는 강성해지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초장왕 시기 초나라가 강해졌지만 진나라는 필 전투에서 참배하는 등 초나라의 성장세를 막을 수 없었다. 이때 초나라에서 망명한 굴무라는 자가 당시 진나라 군주인 경공에게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오나라를 키워줄 것을 건의했고 이를 받아들인 경공이 굴무를 오나라에 출사시켰는데 굴무로 인해서 오나라는 중원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강해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수몽은 초나라 다음으로 왕호를 사용하게 된다.

수몽 시기에 오나라는 초나라와 자주 싸웠는데 대체로 오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또한 수몽 시기에 중원의 제후국들과 3차례 회맹하는 등 중원과의 관계도 가까워진다.

수몽은 재위 25년 만인 기원전 561년에 사망했는데 죽으면서 네 명의 아들에게 차례대로 돌아가며 계승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한다.

수몽 사후 수몽의 아들들인 제번, 여제, 여매는 유언대로 순서대로 왕위를 이어나갔으나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예전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특히 여매 사후 왕위에 올라야 할 계찰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 왕위를 거절하여 여매 사후 오나라는 왕위 분쟁을 겪는다.

2.2.6. 1차 미병 그리고 언릉 전투

2.2.7. 내우외환

2.2.8. 진도공의 패업

진나라는 문공 사후에도 패자의 자리를 지켜나갔지만 손자대인 영공의 폭정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경공 시기에는 많이 회복되었지만 그 또한 초장왕과의 필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경공 사후에 즉위한 여공이 폭군이었던 까닭에 다시 진나라의 사정은 나빠진다. 물론 여공 시기에 언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진나라의 체면을 살리긴 했지만 무고한 대신을 살해하였다가 이에 반발을 사 살해당한다.[17] 그리고 이렇게 죽은 여공 다음으로 즉위한 사람이 도공이다.

도공은 즉위 후 무능한 신하들을 축출하였고 정나라와 싸워 이겼으며 서융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제후들과 회맹을 하는 등 많은 일을 벌였다. 실제로 이 시기에는 진(陳)과 정은 진나라의 편에 섰는데 이 두 나라가 진, 초 양국 사이에서 더 강한 쪽에 빌붙은 것을 감안하면 이 시기에는 어느 쪽이 우세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도 이 시기의 초나라는 공왕의 치세로 장왕이 이룬 패업이 흔들리기 시작한 시대였다.

다만 도공 입장에선 안타깝게도 도공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해 29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했는데 도공 사후의 진나라 군주들은 그에 미치는 능력을 보이지 못했고 때문에 도공 사후 진나라의 권력은 본격적으로 유력 가문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한다.

2.2.9. 2차 미병

2.3. 춘추시대 후기: 양강 체제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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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분진 이후 춘추시대 말기의 판세

2.3.1. 오吳-초楚의 강회 쟁탈전

오나라는 여매 다음으로 그의 동생인 계찰이 왕위를 이어야 했으나 계찰은 왕위에 대한 미련이 없어 나라를 떠났고 이에 여매는 아들인 료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러나 형제상속으로 왕위를 이어왔던 만큼 다음 왕위는 제번의 아들인 공자 광에게 돌아가야 했으므로 이는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오왕 료의 치세에도 초나라와의 전쟁은 이어졌다. 기원전 525년에 벌어진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기원전 519년에 벌어진 전투에서는 초나라와 7개국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기원전 518년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15년에 오왕 료는 초나라와의 전쟁 도중 공자 광과 오자서의 음모로 살해당하고 공자 광이 오나라의 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오왕 합려다.

2.3.2. 초나라의 몰락

오자서는 초나라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초나라의 명문가였다. 필 전투에서 활약한 오삼이 같은 집안 출신이며 그의 할아버지 오거는 초나라의 명신이었으며 아버지인 오사는 태자 건의 스승이었다. 그런데 오사 대에 이르러 오자서의 가문은 몰락하고 만다.

그 이유는 비무기 때문인데 당시 진(秦)은 공주를 초나라에 보내 태자 건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간신 비무기가 공주가 아름다우니 공주는 왕이 취하고 태자에게는 다른 여자를 주자고 건의하였고 평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한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며 비무기는 태자가 이 일로 보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평왕에게 태자를 헐뜯었고 동시에 오사와 그 두 아들에게도 마수가 뻗친다.

결국 태자 건이 먼저 도망쳤으며, 오사와 큰아들 오상은 처형당했으며 오자서는 간신히 살아남아 도망친다. 이후 어찌저찌 정나라에서 태자 건과 오자서가 만났고 정나라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태자 건은 오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나라를 먹어치워 초나라에게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이는 들통나 태자 건은 아내와 함께 처형당하고 오자서는 그의 자식들만 데리고 이번에는 오나라로 망명한다.

오나라로 망명한 오자서는 초나라에 대한 복수를 위해 당시 오나라 정세를 파악하고 야심도 능력도 충분하지만 입지가 약한 공자 광에게 붙는게 낫다고 판단해 그의 사람이 되었고 계략을 써 오왕 료를 죽이고 그가 왕이 되게 하는 데 협조한다.

이렇게 해서 즉위한 공자 광,즉 합려는 오자서의 기대대로 선대 왕들이 그랬듯 계속해서 초나라를 공격했고 결국 기원전 506년, 초나라는 수도를 점령당하는 대치욕을 겪는다. 거기다가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서 그의 시신에 채찍질을 하였으며 당시 초나라 왕인 소왕은 수나라로 달아날 정도로 굴욕을 겪었다.

물론 이대로 무너질 초나라는 아니었다. 공자 신이 본토에서 합려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며 이 때문에 합려는 시간을 질질 끌었으며 신포서가 진(秦)으로부터 간신히 구원병을 얻어내는데 성공했으며 오나라 내에서도 합려의 동생인 부개가 반란을 일으켜 오나라도 더 전쟁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오군은 대승을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오자서가 계획했던 것보다는 작은 결과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초나라 역시도 이 과정에서 수도가 큰 피해를 입어 기존의 수도인 영에서 약으로 천도하게 되며 소왕은 남은 기간 동안 약소국들과의 전쟁만 이어나가게 된다.

2.3.3. 육경의 내전

진도공 사후 평공이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정을 일삼았으며 그의 다음 군주인 소공의 재위는 짧았기에 이후 진(晉)의 실권은 육경이 쥐게 된다.

당시 진(晉)의 유력 가문들은 문공의 공신들로 구성된 난씨, 극씨, 호씨, 선씨, 서씨, 조씨, 위씨, 한씨, 사씨, 범씨, 순씨, 중항씨, 지씨, 기씨, 양설씨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이미 이들의 권력다툼은 이전부터 있어왔지만[18] 진나라 군주의 권력이 유명무실해지자 그 다툼의 수준은 격화되어갔다.

기원전 514년, 기씨와 양설씨가 멸해졌다. 이때가 경공 시기의 일이고 기원전 493년에는 범씨와 중항씨가 멸해졌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진나라는 사실상 위씨, 지씨, 조씨, 한씨 네 개의 가문에 의해 분할된 상태가 된다.

그리고 진출공 시기에는 네 가문 중 가장 강했던 지씨가 진나라의 실권을 쥐었으며 지씨의 종주인 지양자는 타 가문들에게 땅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한씨와 위씨는 응했지만 조씨가 반발하여 지씨와 조씨 간의 전쟁이 벌어진다.

이 당시 조씨의 종주는 조양자였는데 그는 이미 이런 일을 단단히 준비하였으므로 지양자는 조씨의 본거지인 한단을 포위하였음에도 3년동안 승부를 보지 못했다. 이에 그는 수공으로 결판을 지으려고 했는데 이때 조양자는 은밀히 위씨와 한씨에게 힘을 합쳐 지씨를 멸하고 그 영토를 나눠갖자고 제안했고 위씨와 한씨가 이에 응해 결굴 지씨는 위,조,한 3가문의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씨가 멸족되었으며 동시에 3개 가문이 지씨의 영토를 나눠가져 육경들 간의 내전은 종결되게 되었으나 이 일로 진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2.3.4. 오월쟁패

오나라 밑에는 월나라가 있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치고받던 나라로 합려는 월왕 윤상이 죽자 이 기회를 노려 침공하였으나 구천과 범려의 계략에 빠져 오히려 패배하고 사망하였다.

합려의 뒤를 이은 이는 부차로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이를 갈았으며 마침내 즉위한 지 3년째 되는 해 자만한 구천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고 구천은 부차에게 항복하게 된다. 이때 오자서는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구천의 뇌물을 받은 백비는 정 반대의 주장을 펼쳤고 이에 부차는 백비의 주장대로 구천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대신 오나라로 끌고 가서 온갖 굴욕을 준다.

이렇게 오나라로 끌려간 구천은 4년이 지나서야 겨우 월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후 십수년간 오나라에 대한 복수의 칼만 갈게 된다.

한편 월나라를 격파한 부차는 중원의 일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허나 특별한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이 과정에서 백비의 모함을 듣고 오자서를 죽였으며 얼마 못가 다시 힘을 회복한 월나라의 도전을 받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473년, 오나라는 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부차는 자결한다.

그러나 이렇게 오나라를 멸망시킨 월나라의 전성기도 길지 못했다. 구천은 부차와는 달리 중원의 정세에 별 관심이 없었고 그 또한 오래 못가 사망하였으며 그를 뛰어넘는 월나라 군주는 없었기에 훗날 초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2.3.5. 삼가분진

지씨의 멸족 후 3개 가문은 진나라를 나눠갖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세 가문은 제후를 칭하지는 않았기에 진(晉)이 공식적으로 분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기원전 403년, 세 가문은 주나라의 위열왕에게 자신들을 정식 제후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위열왕이 승낙함에 따라 세 가문은 모두 진나라에게서 결별하여 각자의 나라를 세우게 되었으며 진에게는 익과 곡옥이라는 두 지역만이 남게 되었다. 이로서 춘추시대는 사실상 종결되었다.

3. 전투 양상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싸운다는 개념은 없었고[19] 국가 연합단위의 전투에서도 대량의 보병으로 죽고 죽이는 형식의 전투가 아닌, 전차를 이용한 전차전의 형태였다.

주력이 전차였으므로 전차의 수가 곧 그 나라의 전력을 의미했다. 천자를 뜻하는 만승지국, 제후를 뜻하는 천승지국 등의 단어는 병거(兵車) 만개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 천개를 동원할 수 있는 나라라는 뜻으로 승(乘)은 병거를 세는 단위이다.

값비싼 과 마부를 데리고 전차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지배층인 , 제후, , 대부, 밖에 없었고 따라서 전투의 규모도 작을 수밖에 없었다. 전투는 반나절 정도의 단판 싸움으로 승패가 갈렸다. 북방의 패주와 남방의 패주가 정면으로 붙은 성복 전투 필 전투 같은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전차가 주력이었으므로 기습, 매복은 힘들었으며[20] 양군이 평지에서 만나 싸울 날짜를 잡고 싸우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전쟁의 양상은 행정체계의 발전과 국가 단위의 변법으로 이전까지 세금만 내던 야인(野人)들을 국가의 행정 내로 끌어들이고 보병 위주의 물량전, 장기전으로 변화하게 된다.

4. 국가

중국 전체의 인구는 춘추시대 전기에 1800~2000만 명이다가 후기에는 2500만 명 정도로 증가하였고, 한·조·위의 세 집안이 분진(分晉)하여 전국시대에 접어들었을 때는 3000만 명을 넘어섰다.

최대 인구 대국은 진(晉)나라로 약 5백만으로 추정되며, 다음은 제나라 3백만, 초나라 250만,[21] 진(秦)나라 2백만, 오나라 전성기 150만명 순이다. 그 외 제후국을 합치면 약 400만 명이라고 한다. #

4.1. 주요 국가


14개국

4.2. 기타 소국


총 122개 국가

4.3. 각국의 작위

__ 표시는 동성 제후국
벼슬 국가명
공작 (宋)
후작 (齊), (魯), (晉), (衛), (蔡), (陳), 고죽(孤竹)
백작 (鄭), (燕), (曹), (秦)
자작 (楚), (吳), (越)
남작 (許)

이론적으로는 서주의 체제가 오등작이지만, 실제 사용된 용례를 보면 공-후-백-자-남이 명확히 구분되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4.4. 기타 이민족


총 15개 민족

5. 중국 춘추 시대의 인물

6. 관련 창작물

7. 관련 항목



[1] 장안(長安), 오늘날의 시안(西安) 일대 [2] 전씨가 제나라의 군주가 된 일, 한(韓), 위(魏), 조(趙) 세 가문이 군주인 진나라를 분할한 일,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일 등이 예시이다. [3] 진양공은 이 공으로 제후로 임명된다. [4] 낙양 근처 [5] 청화대학장전국죽간 계년에서는 서주의 멸망과 동천에 대해 전혀 다른 역사를 보여준다. 이는 사마천의 사기와 다른 기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자료에서는 유왕이 포사를 취하고 백반을 낳은 뒤 먼저 서신에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서 낳았던 자식인 평왕을 내쫓았다. 평왕이 서신으로 도망치자 유왕이 군사를 일으켜 그곳을 포위했다. 서신 사람들은 평왕을 내주지 않고 증나라 사람들이 서융에 항복하여 유왕을 공격하니 유왕과 백반은 그때 패사했다. 이로써 주나라는 멸망했다. 방군과 제정들이 유왕의 동생 여신을 괵에서 옹립하니 그가 휴혜왕이었다. 휴혜왕이 즉위한 지 21년 만에 진 문후 구가 그를 괵에서 살해했다. 주에 왕이 없게 된 지 9년째 방군, 제후들이 주에 조근하지 않았다. 이에 진 문후가 평왕을 소악에서 맞이하여 경사에서 평왕이 즉위했고, 3년이 지나 동쪽으로 옮겨 성주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기록에 따르면 유왕의 패사와 주의 동천까지 33년의 시간이 경과되어야 하며 따라서 주의 동천은 기존의 기원전 771년이 아니라 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738년의 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6] 사기 십이제후연표에 의하면 동모제(同母弟) 즉 친동생이고 정세가에 의하면 서제(庶弟) 즉 이복동생이다. [7] 좌전에 의하면 채蔡, 위衛, 진陳이 천자 측으로 참전했다. [8] 정나라의 수도인 신정 남쪽에 있다. [9] 정여공과 공자 영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인 정소공과 공자 미는 이미 죽은 상황이었다. [10] 양공의 이복동생, 공자 소백의 이복형 [11] 이때 관중과 소홀이 공자 규를 보좌했고 포숙아가 공자 소백을 보좌했다. [12] 이때 포숙아는 초나라의 죄는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왕을 자칭한 것인데 왜 그 얘기는 하지 않았냐고 관중을 나무란다. 이에 관중은 초나라가 왕을 자칭한지 3대가 되었기에 그걸 나무라면 초나라와 전면전을 해야 할 것이고 그리하면 초나라를 꺾더라도 아군의 피해가 컸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13] 그것도 무려 한 나라의 군주를. 증나라 군주가 회맹에 늦게 참석했다고 인신공양해버렸고 이에 조나라 군주가 반발했지만 무력침공으로 응했다. 허나 송나라는 제나라 같은 강국이 아니었기에 아무 소득없이 귀환했다. [14] 그 유명한 송양지인 고사가 여기서 유례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진문공이 송(宋)나라를 방문하기 이전이고, 진문공과 송양공이 만났을 때 송양공은 초나라와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골골대던 상황이었다. [15] 다만 진나라도 외형상으로는 그랬지만 내적으로는 진문공의 손자대인 진영공 시기부터 삐걱대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폭정(진영공)-요절(진성공)-부흥(진경공)-폭정(진여공)-부흥(진도공)-실정(진평공)-요절(진소공) 순으로 이어지다가 진소공 이후 진나라 군주의 실권은 사실상 소멸된다. 그래도 여기까지 걸린 기간이 100년은 되긴 하지만. [16] 이후 초나라는 한동안 왕위 계승 분쟁을 겪었고 초평왕이 이를 안정시켰으나 그 또한 간신 비무기에 휘둘리며 암군이 되었고 결국 초소왕 시기에는 오나라에 의해 수도가 함락당하는 치욕을 겪었고 초소왕 다음인 초혜왕 시기에야 비로소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17] 이것이 진나라의 문제점 중에 하나였는데 진나라는 패권국이긴 했지만 정나라나 노나라처럼 몇몇 유력 가문의 기세가 센 나라였고 때문에 이들을 제어할 수 있는 군주가 있으면 나라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그러지 못하면 유력 가문들에 의해 나라가 좌우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영공과 여공의 실정으로 인해 점점 권력이 유력 가문들로 넘어오게 된다. [18] 이미 도공 이전에 여러 가문이 축출당했다. [19] 가문과 혈통의 보존을 중요시하며 천명과 선조를 중히 여겨 패한 제후의 일가를 멸족시키는 것을 금기시했고, 가문 계승을 위해 자타 안 가리고 몰락한 가문이나 유랑하는 귀족을 데려다 가독을 계승하게 하기도 했다. 오히려 춘추시대 첫 번째 패자인 제환공은 망할 뻔한 나라를 몇 개씩이나 구해주어 칭송을 들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국가의 멸망은 주로 장강 이남의 국가들에서 많이 일어났다. 물론 장강 이북이라고 멸망전이 없던건 아니었지만... [20]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효산 전투가 그 예. [21] 땅에 비하면 적은 인구인데 이는 당시까지 초나라가 있는 장강 이남은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땅이기 때문이다. [22] 원래 이름은 당(唐). [23] 국가 맞다. 수경주(水經注), 춘추(春秋) 등에 국가로 기록되어 있다. [24] 또는 郇 [25] 또는 보(甫) [26] 소주(小周) 또는 주읍(周邑)라고도 했다. 주공단의 후손이 다스린 나라다. [27] 연나라 동북쪽에 존재하던 이민족으로 유목민 동호의 조상으로 알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