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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0:29:30

형벌 부대

죄인부대에서 넘어옴
1. 개요2. 소련군
2.1. 실제 통계2.2. 구성원2.3. 종류
2.3.1. 일반 형벌부대2.3.2. 공군 형벌부대2.3.3. 지뢰제거부대2.3.4. 전차병2.3.5. 예외
2.4. 1943년/대전기 이후
3. 독일군4. 러시아군5. 우크라이나군6. 기타7. 매체의 형벌 부대

1. 개요

죄수나 범죄를 저지른 병사로 구성된 부대를 말한다. 이런 분야에서는 소련의 "슈트라프바트"가 유명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아득한 옛날부터 구성하였다.

2. 소련군

штрафбат (штрафной батальон) / Penal Battalion
슈트라프바트 (슈트라프노이 바탈리온)

2차 세계대전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편성한 형벌부대.

형벌 부대의 개념은 1877~78년 러시아-터키 전쟁 때 처음 등장했다. 당시의 형벌부대는 범죄를 저지른 군인들의 속죄 수단이 아니라 이미 범죄를 지은 범죄자들에게 형을 전시 보병으로써 대체복무시키는 것이었고, 형벌부대 배치 순간부터 범죄자가 아니라 정규 군인으로서 합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봤자 러시아군 보병의 삶은 다른 나라의 교도소 복역에 거의 필적하는 고통의 시간이었고, 오히려 유형지가 더 편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러시아 제국의 변경 유형지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노동을 제외하면 일체의 간섭이 없었고, 주류를 포함한 각종 보급품도 필요한 만큼은 지급되었기 때문에 유형과 병역이 별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흔히 '좀 빡센 근무로 징벌을 대체하는' 정도의 형벌부대가 아니라 대놓고 죽으라고 내모는 자살집단으로써의 형벌부대는 실질적으로 1942년 7월 스탈린 227호 명령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비겁자나 탈주자를 엄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골자가 되는 이 악명높은 명령서에는 형벌 부대의 편성에 관한 항목이 있었다. 이 형벌 부대는 3개의 형벌 중대와 1개의 독전대(감시부대)를 묶어 하나의 형벌 대대를 구성하도록 지시하고 있었으며, 최초의 형벌부대는 42년 8월 22일 스탈린그라드에서 편성되었다.

그래서 소련의 형벌부대는 그 전의 러시아에 있던 부대와는 달리 말 그대로 인민의 에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징벌효과를 얻기 위한 특수 수단이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총살에 쓸 탄약도 아끼고, 잘하면 적도 죽일 수 있다![1] 스탈린에게는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동시에 없애는 제도라는 점에서 과거의 형벌부대와는 현격히 다른 존재다.

2.1. 실제 통계

우선 종전까지 형벌부대 복무를 경험한 사람은 소련군 병력의 1.4%에 달한다고 하며, 약 50만 정도의 숫자 중 전사자는 약 17만 정도라고 한다. 이 정도면 전체 인원의 34%가 사망한 것으로, 비상식적으로 높은 소모율을 보이고 있다.[2] 그러나 독소전쟁에서의 소련군이 동원한 인원이 3,400만명이고 전사자 1,100만명으로 사망률은 32%라서 소련군 전체의 사망률과 비교하면 큰 차이는 없다.

독소전에서의 천문학적인 소련군 사상자는 41~43년 초까지 독일군의 기습과 여러 크고 작은 실책, 끝나지 않은 군 체계 정비로 인해 주요 곡창지대와 군수시설을 잃고 우랄 산맥 너머로 간신히 옮긴 시설들로 병기를 생산하고 식량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 싸웠기에 높은 손실을 보일 수 밖에 없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소련의 상황이 어느 정도 개선된 1943년의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소련군 사망률은 10% 수준까지 감소했다. 따라서 더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시기별로 형벌부대와 소련군 타 부대와의 사상률을 비교해야할 것이다.

여하튼 일반적인 통념대로 다 죽는 건 아니라지만, 사망률이 높았던 것은 분명하고 중상자들까지 생각한다면 형벌부대에 들어간 이상 몸 성히 나오기는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스탈린 정권 시절에 굴라크에서 수감되다가 사망한 사람이 160만명에 달하는 이유다. 물론 평시에도 많이 가혹하기는 했으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처럼 사람을 닥치는대로 죽이는 곳까지는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이유가 수감자들이 징집되어서 전투중에 많이 죽어나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다 형벌부대로 징집된것은 아니고 다른부대로 징집된 경우도 많았는데 여기서도 죽은 사람이 많다는 점은 동일하다.

2.2. 구성원

이름만 본다면 죄수 중에서도 매우 중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인상을 받기 쉬운데, 물론 중범죄자도 형벌부대에 들어왔던것은 맞지만 1930~40년대 스탈린 대숙청으로 별 시덥지 않거나 억울한 이유로 끌려간 사람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종교를 가지거나 기도를 했다는 이유[3]로 형벌부대에 끌려간 경우도 있었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기의 특성상 흉악범이나 잡범과 같이 사법처리된 죄수보다는 정치범들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또 단순히 직장에 지각했던 자들도 있었다. 당시 대숙청 기간엔 특별한 이유 없이 직장에 지각하면 태업이랍시고 20분당 1년의 징역 수준으로 처벌받는게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역 NKVD에 떨어진 체포 할당량으로 인해 채우지 못할 경우 정당한 사유가 있는데도 체포되거나, 드물게 통근 버스를 통째로 납치해서 사보타지 혐의로 형량을 부과한 후, 통근 버스 납치 때문에 발생한 지각 시간을 기준으로 추가 형량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예시 중 하나로 러시아군 장성이자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알렉산드르 레베드의 아버지는 두 번 5분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형벌부대로 강등되었다고 한다.[4]

그 외에 수용소에 갇혀있던 인민의 적들, 그리고 소련 형법 58조 B항이라는 조국에 대한 배신을 위반하여 총살을 선고받았다가 형벌부대 복무로 형이 대체된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포로로 잡혔다 구출되거나 탈출한 병사들로 포위 상태에서 부대 편제를 해체하고 개별적으로 탈출한 경우는 원칙적으로 이 형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받는 경우가 많았다. 덕분에 최후까지 저항하는 소련군도 많았지만, 이런 점들은 전쟁 말기까지 독일 국방군에 투항하는 소련군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즉 '넌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죽을 운명이니 기왕이면 그 몸뚱아리를 나라를 위해 쓰고 죽어라' 이런 사람들이였다고 보면 된다. 정확히는 죽지 않고 죗값을 치르면 좋겠지만,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일로 취급한다는 뜻. T-34 조종수로 투입한 것도 설계 특성상 격파시, 생환율이 매우 낮은 T-34 전차 조종수가 전반적으로 모자랐기에 형벌부대원을 우선 배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5] 1944년 말까지 거기서도 살아남으면 전역하여 남은 기간은 국토 재건 중노동에 투입되거나, 운이 좋으면 사면을 받고 일반 부대로 편입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죄인에 대해서도 "죗값을 죽음 대신 애국으로 갚도록 살려주겠다."라는 최소한 인도적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어차피 죽어야 했을 운명이니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사람을 가볍게 굴렸다는 것도 문제고, 더 큰 문제는 경범죄나 무고한 사람조차 강제로 끌려갈 수 있는 부대였다. 끌려가면 거기서 인생은 끝나는 것이었다. NKVD 앞에는 할당량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죄없는 사람들을 끌어가는 일도 흔했다. 예조프의 죄보단 양을 우선시한 NKVD 체제와 그를 빚어낸 스탈린의 대숙청이 만들어낸 참극이었다.

2.3. 종류

2.3.1. 일반 형벌부대

일반 형벌부대는 형벌부대의 대다수를 구성하며, 전투부대로 사용되었지만, 그 운용법은 나치군의 집행유예부대와 매우 가까웠다.

주요 임무가 공격시에는 적의 강력한 방어선을 때리는 선봉을 맡고, 후퇴시에는 최후미를 맡아서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 아군의 후퇴 시간을 버는 등, 성공하더라도 희생이 다대한 임무가 대다수이다. 적의 진형이나 주둔중인 점령지의 방어력을 테스트할 때도 동원되었고, 이 모든 과정에서 형벌부대의 피해는 정규군보다 더 가볍게 취급되었다.

만약 형벌 부대가 그 지역의 독일군을 격퇴하고 승리할 경우 정규군이 후속으로 투입되며, 형벌 부대는 후방으로 빠져서 휴식도 제대로 안주고 다시 새로운 전장으로 재투입된다. 전장의 공로는 후속 투입되는 정규군의 것이 되었으며, 형벌부대의 전공은 기록되기는 하지만 상당히 축소되거나 그대로 가더라도 형벌부대의 전공이라 하여 낮게 취급된다. 생존자들의 경우에는 형량이 감소되거나 특별 배급이 주어지는 식의 현지에서의 사소한 보상은 있었다. 다만 보통은 생존율 자체가 낮았으며, 휴식도 없이 반복적으로 격전에 투입되니 살아남을 확률이 바닥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당연하게도 이런 공격을 맨정신으로는 할 수 없으므로 이들은 평상시 후방에서 대기하다, 작전이 시작되면 보드카를 잔뜩 먹이거나 한 뒤 감시하에 전방으로 이동시켰고, 후방엔 중무장한 독전대를 진지까지 가설해서 배치한 뒤에, 무기 지급 후 강제로 투입하고 후퇴하려는 낌새가 있다면 조준사격으로 사살했다.

2.3.2. 공군 형벌부대

공군 형벌부대는 적기와의 근접 교전 가능성이 높은 지상 공격기 Il-2가 제일 많았지만, 원칙적으로는 후방기총사수가 탑승하는 모든 폭격기에 기관총 사수로 배치되어 복무했다.[6] 당연하게도 공군 형벌부대원들은 낙하산도 받지 못했고 관련 교육은 당연히 없었다. 따라서 비행기가 격추되면 조종사는 탈출하지만, 형벌부대원은 불타는 비행기와 운명을 함께했다. 게다가, 적 전투기가 폭격기를 공격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집중사격을 해서 제거하는 사람이 후방기총사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출격해서 살아돌아오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다른 부대와는 달리 사실상 감시자라고 할 수 있는 조종사를 빼고는 혼자서 가망없는 전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전투의지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심하면 물귀신 정신을 발휘해서 나도 죽고 조종사도 같이 죽자! 식으로 전투를 일부러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효율성이 극악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기총사수가 죽거나 전투를 포기한 상태에서는 기총이 축 처지기 때문에[7] 멀리서도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공산당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공모했고, 그 결과 기총에 용수철 장치를 달아 기총사수가 죽어도 똑바로 후방을 조준하도록 장치했는데, 이 방법을 고안한 자는 레닌 훈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사기진작의 목적으로 공군 형벌부대의 형기는 사실상 형기가 정해지지 않은 다른 형벌부대와는 달리 징역 10년(평균)이었으며, 비행 한번에 1년씩 감형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부대원들이 빠른 감형을 노리고 앞다퉈 출격을 요청하는 경우도 생겼고, 출격했을 때도 좀 더 적극적으로 적기의 공격을 방어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형벌부대 병사는 10회의 비행을 채우기 전에 희생되었으며 겨우겨우 9회까지 채우더라도 군의관이 "동무의 육체, 정신상태로는 더이상의 비행 임무가 불가능함"이라고 판정을 내려버리면 지휘관이 육군의 형벌부대로 강제 전출한다. 이렇게 되면 1년의 형기가 더 남은 상태가 되고 이들의 운명은 지뢰제거부대행이다.

2.3.3. 지뢰제거부대

지뢰제거부대는 사실상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지뢰밭에 들어가 지뢰들을 제거하고 죽는 부대였다고 한다.

지뢰를 터뜨리고 죽기보다는 재주껏 지뢰를 해체하는 것이 임무였으나, 이들에게는 충분한 지뢰탐지장비나 제거장비가 지급되지 못했다. 더군다나, 독일군의 끈질긴 방해 때문에, 여기서 살아남을 확률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상황이 나아지면서 이들에게도 각종 지뢰제거장비 및 지뢰제거전차가 지급되면서 생환율이 많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독일군의 공격으로 인해서 생환율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대가 형벌부대의 종착지라고 알고 있지만, 실제 형벌부대의 종착지는 T-34 조종수였다고 한다.[8]

2.3.4. 전차병

형벌부대의 최종 종착지로써, 타 부대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형벌부대원들[9] 대부분은 전차병으로 배속되는데, 제일 먼저 배속되는 위치는 경전차 조종수였다고 한다.[10][11]

그리고 경전차 조종수로써 무사히 살아남으면 T-34 조종수로 배속되었고, T-34 조종수로써 공을 많이 세우면 경전차 전차장이나 장갑차 차장으로 배속했다고 한다. 전차장으로 배속되면 더 이상 형벌부대원으로 취급하지 않고, 일반 부대원과 동급의 취급을 해주었다. 그렇지만, T-34의 조종수는 필요 인력이 늘 부족해서 경전차 전차장으로 배속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전차가 유럽 전선의 소련군 전차 부대에서 사라지게 된 이후에는 이렇게 진급되는 루트가 막혀버려서 T-34의 승무원이 사실상 형벌부대의 최종 종착지가 되었다고 한다.

T-34는 정규군에 배속되기 때문에 형벌부대에 맞지 않는 게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애시당초 형벌부대 자체는 정규군 지휘를 받고, 편제상으로도 일단 정규군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죽을 확률이 높은 임무를 배정받는 부대라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죽이려고 만든 부대는 또 아니었다. 형벌부대라 해도 살아서 임무를 수행하면 나쁠 게 없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T-34는 전차의 특성상 손실률이 엄청나게 높았고[12] 조종수는 기본적으로 전차에서 탈출하기 힘든 편인데 T-34는 설계상 결함으로 인해 생존률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13]

즉, 다른 승무원들과 달리 조종수에게 있어서는 격파=전사자 등록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살아남을 방법은 딱 하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탄 전차가 격파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나마 독소전 후기로 가면서 독일은 자원부족에 절대적으로 시달리게 되어 적 전차를 격파하기보다는 무력화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기 시작해서[14][15][16] 생존율이 많이 올라갔다고 한다. 평균적으로 약 2배 가까이 생존율이 올라갔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설계상의 결함 때문에 생존율은 많이 낮았다고 한다.

IS 시리즈 같은 중전차에는 형벌부대가 전혀 배치되지 않았다고 한다. 루마니아 같은 동유럽 추축국들 포로들 중에 전향한 군인들 중 전차병 출신들은 경전차나 장갑차에 배치되기도 했지만,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엄청난 학대를 받아서 포병이나 자주포에 배속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17]

2.3.5. 예외

형벌부대에도 예외는 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대숙청시 사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강제노동소에서 복역하고 있었는데, 형을 정지시킨 다음 형벌부대에 보내지 않고 소장의 계급과 제9기계화군단장의 직책을 수여받았다.

이 때 로코솝스키는 많은 공을 세워서 나중에 게오르기 주코프의 배려로 스탈린의 승인 하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승전 기념식에서 주코프와 나란히 말을 타고 사열식을 지휘하는 사형수가 되었고 최종적으로 원수 계급까지 진급한 최고의 전쟁영웅 중 한 명이 되었다. 로코솝스키가 숙청되었던 이유는 폴란드계라서 당시 소련에 적대적이었던 폴란드의 간첩으로 의심받아서 였으나, 사실 명분이 그렇지 실제 죄상은 자바이칼 군관구에서 건설자재 횡령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적백내전 때부터 전공을 세워 장성까지 진급한 예외중의 예외고, 일반 형벌 부대원이 형기를 무사히 마칠 확률은 매우 적었다. 서류상으로 공군 형벌부대는 확실히 형기가 줄어들고, 육군 형벌부대도 복무기간이 있다고 했으며 소련 정부는 그들에게 사면을 약속했지만,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껏 지키려 해도 사면 증명서를 보내놓고 보니 당사자가 이미 죽은 지 오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수 많은 사선을 넘은 끝에 생존자 전원이 일제히 사면 증명서를 받아 정규부대로 개편된 사례도 없지 않다. 심지어 행정착오로 인해서 형벌부대에 갈 필요도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형벌부대를 만들어놓고 그 부대가 있었다는 것을 NKVD 당국조차 잊어버린 경우조차 있다고 하며, 이 경우는 대부분 행정착오를 그냥 덮어버리기 위해 전원을 명예 제대시켰다.

다만 이것도 좋은 것은 아닌게 어찌되었건 이들은 법적으로 범죄자로 기록이 남았다. 즉 이들은 졸지에 '용서받은 범죄자'가 되어버린 것이다.[18] 이외에도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자대배치를 기다리던 소위 후보생들이 행정착오로 뜬금없이 형벌 부대에 끌려나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NKVD가 나중에서야 이걸 알아채고 황급히 그들을 복귀시키려 했지만 이미 후보생은 대부분이 전사한 상태였다.

2.4. 1943년/대전기 이후

전황이 상대적으로 양호해진 1943년 이후에도 여전히 원래 임무를 수행했다. 대부분의 형벌부대 출신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처럼 마구잡이로 내모는 일만 줄었다뿐 여전히 총알받이였다고. 게다가 독일군의 저항도 엄청나서 해체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피를 보았다. 다만 T-34 조종수 등 이전에 비해서 조금 덜 위험하고 그나마 중요한 일을 하는 임무로 바뀌어간 것만은 사실이다. 어차피 형벌부대를 운용하는 것은 죽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임무를 완수하면 좋지만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임무를 배정하기 위해서 였다.

이후 1944년 11월 전장이 독일 본토로 옮겨지고 전황 역시 소련군의 절대 우세로 바뀌자 소련의 남자 부족사태로 인해 형벌부대의 존재가치는 완전하게 사라져서 결국 해체되었다. 상기했던 것 처럼 운 좋게 살아남아 일반 부대로 배속되거나 사면받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때까지 형기를 마치지 못한 형벌부대원 및 형벌부대 해체 이후 체포된 처벌 대상자는 보통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다시 끌려가서 전후 복구를 위한 중노동에 투입되었다가 형량을 채운 뒤에야 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후 소련의 멸망이 진지하게 대두되던 대조국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소련군의 형벌 부대는 크게 재개편되어 국군교도소 같은 범죄를 일으킨 병사를 수감하고 교화시키는 형태로 변화했다.

3. 독일군

독일 국방군의 형벌부대는 일반적으로 소련군의 "스트라프바트"와 어원이 같은 "슈트라프바탈룐"(Strafbattallon)이라고 하며 동부전선의 "제500 집행유예부대"(Bewährungsbataillone 500)와 아프리카 군단의 "제999 집행유예부대"(Bewährungstruppe 999)가 유명하다. 제999 집행유예부대는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또한 무장친위대는 같은 목적으로 "제500 SS공수대대"(SS-Fallschirmjäger-Bataillon 500)를 창설했으며, 제500 SS공수대대는 1944년 5월 25일 유고슬라비아 빨치산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지휘소를 급습해 그를 생포하는 임무인 '기사의 도약' 작전에 투입되어, 간발의 차이로 티토는 놓쳤지만 공수대대원 874명 중 576명이 전사하고 48명이 부상당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티토의 육군 원수 예복 등 상징적인 노획품 등을 획득한 것에 만족한 히틀러가 작전 참여자들의 계급과 서훈을 모두 회복시켜 주었고 제600 SS공수대대로 재편성되었으며, 새로운 대원들을 충원받은 후 오토 스코르체니의 지휘 하에 1944년 10월 15일 헝가리 판처파우스트 작전, 12월 아르덴 대공세 당시 그라이프 작전 등의 특수작전에 계속 투입되었다.

처벌 목적의 형벌부대는 아니지만, 친위대 제36무장척탄병사단의 구성원들은 가관이었는데, 사단장부터가 제2차 대전 한참 전부터 아동 성폭행강간 미수 전과가 있는 미친 놈이었고, 징계경력이 있는 SS 병사, 부사관들을 골라 뽑아 기간병을 맡긴 채 죄수들 중에서도 법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받아들여 창설된 부대이니만큼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부대였다. 여기서 다시 형벌부대에서조차 포기한 종자들을 끌어모아 확대개편하는 것으로 화룡점정. 디를레방어 사단의 전투력은 개판 그 자체라, 바르샤바 봉기 땐 장교 16명을 포함하여 881명으로 시작한 부대가 시가전에서 대차게 갈려나가 2500에 이르는 병력을 추가로 증원받으면서 싸워 봉기가 끝날 즈음에는 손실이 2733명에 이르렀다. 초기 병력의 무려 315%.

독일군은 군법을 어긴 장병들 중 그 정도가 과하지 않거나 그간 모범적인 군생활을 했거나 용맹하다고 인정된 자들을 대상으로 형의 집행을 유예해주는 대신 이 부대로 전출시켰다.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위험한 임무에 우선 투입되었으며, 이 때는 전공을 세우면 죄를 사면해주고 원소속부대로 복귀시켜 주었다고 한다. 일단 이때까지는 독일군이 잘나가던 시절이었으므로 전공을 세우기도 쉽고, 다시 원대복귀하기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중노동형벌보다 좀 더 강력한 처벌 정도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탈주병이 속출했으며, 독일군 수뇌부는 각 군에 야전헌병대(Feldjägerkorps)를 조직하여, 탈주병뿐만 아니라 자기 부대로부터 낙오[19]된 장병들도 모두 사형을 선고하여 형벌부대로 보냈고,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즉결처분하였다. 게다가 보내진 형벌부대도 앞서 언급한 부대가 아닌 급조한 부대였고, 이런 곳에 일단 떨어지면 다시 원대복귀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다. 거기다가 독일군은 전세가 기운 말기로 가면 육군(Heer)뿐만 아니라 소속이 다른 여러 잡탕 부대들, 즉 공군 공수부대, 공군 야전사단, 해군 육전대, 무장 친위대, 나중에는 국민돌격대 히틀러 유겐트, 심지어는 경찰 소방관[20]까지 해서 모두 소련군에 맞서 참전했으며, 탈주병 용의자들을 원소속부대로 되돌려줄 행정처리는 불가능했으니 그냥 이런 급조 형벌부대에서 싸우다 종전 때까지 운좋으면 살아남거나 아예 형벌부대도 아닌 정규 편제로 들어가는 것이고, 운 나쁘면 그냥 형벌부대 편성도 못 받고 처형당하기도 했다.

1945년 4월에 다다라서 독일군이 항복 직전에 미쳐 돌아갈때는 형벌부대도 필요없고 히틀러의 명령으로 헌병대나 무장친위대가 후방을 돌아다니면서 낙오병을 체포했다. 사실 이때는 독일 국내에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소련군이 독일군 부대를 섬멸시킬 때 도주한 병력이었는데, 탈주병도 있었겠지만 자기 부대체계가 소멸하자 어쩔 수 없이 상급부대를 찾아 헤메던 장병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탈주병으로 몰아서 히틀러가 직접 "자기부대를 찾고 있다는 놈들은 탈주병으로 간주해 모조리 처단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모조리 즉결처분되었다. 이때 사살당한 이들이 꽤 되었고, 이런 명령을 내리거나 실행한 자들은 연합국 전범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더라도 서독- 동독 정부하에서 처벌되었다. 기소된 이들은 명령불복종은 곧 범죄였기 때문에 이런 명령을 어쩔수 없이 실행했다고 자신들을 변호했는데, 이 때문에 후에 성립된 독일 연방군에서는 군법에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는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명문화되었다. 이런 야전헌병대(Feldjäger)는 가장 악질적인 나치로 독소전을 독일군 입장에서 다루는 매체에서는 빠지지 않고 일종의 클리셰처럼 자주 나온다. 전투라고는 겪어본 적도 없는 후방 찌끄레기에 불과한 골수 나치 헌병들이 용감하게 전투임무를 수행하며 비록 나치 독일군이지만 직접적인 범죄에는 가담하지 않은 주인공들을 탈주자나 패배주의자로 몰아 죽이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 특전대 zbv"는 독일군 형벌부대를 소재로 하고 있다. 단, 여기서 나오는 부대의 이름은 Kampfgrouppe zbV(zur besonderen Verwendung, 직역하면 특별임무를 위한 부대)인데, 실제로는 형벌부대를 묘사한 것이다.

영화 스탈린그라드에도 형벌 부대가 등장한다. 주인공 육군 공병소대원들이 소련군의 포위망에서 벗어나는 도중 한 병사가 부상을 당한다. 대원들은 그를 병원에 데려오는데, 그 중 흥분한 병사가 의무병에게 총을 겨눠 진료를 지시하도록 협박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상당한 대원은 죽고, 소대장 폰 비츨란트 소위를 포함한 나머지 소대원들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형벌 부대로 끌려간다. 이후 소대원들은 지뢰 지대 개척 작업, 즉 작대기와 지뢰 탐지기를 활용한 작업인데, 이러한 가장 위험한 지뢰 개척 작업에 투입되고, 빵 몇 조각을 얻으려고 형벌 부대의 경비병[21]에게 애걸하는 전임 소대장의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이후 독일군의 상황이 급박해지자 전선 사수를 위해 형벌 부대가 동원된다. 전선에 투입된 소대원들은 전선 사수 이후 계급이 환원되었으나, 스탈린그라드의 절망적인 상황 때문에 탈출을 결심한다.

독일 드라마 포화 속의 우정[22]에서도 형벌 부대가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전투 중 탈주하여 숨어있다가 잡혀 사형을 선고받은 주인공 빌헬름이 500 집행유예부대에 소속되어, 늪지에서 시체를 수습한다거나 전투 중에 아무런 보호 없이 지뢰를 매설하러 파견되는 등, 일부러 죽이기 위해 주어지는 임무를 수행하며 구르는 형벌부대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형벌부대에서 구르는 빌헬름의 모습은 실제로 탈영했다가 붙잡혀 형벌부대에 넘겨졌던 "루트비히 바우만" 이라는 독일 병사를 모티브로 하고 있으며, 이 사람은 형벌부대에서 끝내 살아남아 전후 평화운동가로서 활동하였으며, 2018년 7월 5일부로 죽었다. #

한국에서 짤방으로 유명해진 만화인 버티고 코믹스 " 요한의 타이거''에서는 주인공 전차장 요한 클라이스트가 '이 씨발 쓰레기들아!!!'라고 외치면서 MG34를 난사해대는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이 짤방은 사실 탈영한 동료 전차병들이 SS 헌병에 붙잡혀 즉결처형당하려는 판에 나타난 요한이 군사경찰들을 기습해 쓸어버리는 장면이다.

잭 히긴스의 소설과 이를 원작으로 한 1976년작 영화 <The Eagle Has Landed>에서도 형벌 부대가 등장한다. 독일 공군 공수부대의 쿠르트 슈타이너 중령[23] 크레타 섬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공훈을 세웠으나, SS가 폴란드 유대인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에 항의하다가[24]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소속과 계급, 훈장을 박탈당한다. 이후 슈타이너의 부대는 채널 제도의 올더니 섬으로 유배되어 사상률이 높은 임무인 인간 어뢰를 이용한 게릴라 작전을 떠맡으며 소모되었다. 슈타이너와 부하들은 얼마 후 국방군 정보국 막스 라들 육군 산악중령[25]에 의해 윈스턴 처칠 납치 작전에 참여하면서 계급과 명예를 돌려받지만, 결국 영국 땅에서 대부분 죽고 만다. 소설판에서는 크릭스마리네 S보트가 부상자라서 슈타이너 중령이 탈출시킨 유일한 생존자 폰 노이만 중위를 무사히 생환시키나, 영화판에서는 이 S보트가 좌초해 모두 죽은 듯한 암시를 줬다. 또한 슈타이너 역시 영화판에서는 죽었고, 소설판에서는 처음엔 죽었다가 속편에서 영국군이 후송해 살려 포로로 잡았다는 설정으로 바뀐다.

4. 러시아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 소규모 작전이나 조지아를 일방적으로 유린하는 등 독소전 같은 위기감을 못 느껴서 운용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첫 공세가 돈좌된 이후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높은 급여를 준다는 광고로 모병하는 한편 반발이 적은 비도시에서 징병[26]된 사회적 약자[27]들을 잃어도 아깝지 않은 비숙련병으로 분류, 무기와 장구류를 아무렇게나 쥐어준 뒤 형벌부대처럼 써먹었다.

즉, 비숙련병들을 최전선으로 돌격시켜 적의 방어 지점과 규모가 파악되면 후방의 정규군들이 포격과 공습으로 쓸어버린다. 그 후 또다른 비숙련병들을 그 뭉개진 적진에 축차투입해 점령시키거나 여전히 저항하고 있으면 후방 정규군이 원거리 공격 후 또 축차투입.. 같은 걸 반복하는 식이다. 게다가 적전도주에 대비해 이들 뒤에는 정규군이나 체첸군이 독전대로 버티고 있는데, 당연히 양 제대간 사이가 좋을 리 없어 22년 4월에 부랴트인 징집병들과 체첸 독전대간의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

하지만 비숙련병이라도 그 수는 제한되어 있고 너무 빼가다간 반발도 거세지기에 결국 정부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던 바그너 그룹이 각 교도소를 방문, 6개월 복무시 목돈과 함께 사면받을 수 있다는 당근으로 살인 및 폭행범 같은 중범죄자 4만여명을 모병, 진짜 형벌부대를 조직해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보냈다고 한다. 허나 이들 역시 몇 주 수준의 군사훈련과 제대로 된 무장, 방어구 없이 축차투입으로 갈아넣어지다 보니 전황을 확 뒤집을만큼 엄청난 효과가 있기는 커녕[28] 죄수 처리와 우크라이나보다 큰 체급을 바탕으로 소모전을 지속하는 의미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지옥에서 6개월간 어찌어찌 살아남아 제대해도 그동안 겪은 전장의 참혹함이 계속 떠오르고, 전과 기록이나 편견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도 않아서 폐인이 되거나 재범을 일으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 또 사회 여론도 사회악인 죄수들이 전장에서 죽든말든 개의치 않지만 형량에 상관없이 면죄부와 함께 길거리에 풀어준 건 문제라며 논쟁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2023년 들어서는 이러한 모병이 총알받이 취급임이 교도소에 퍼져서 사면에 욕심낼만한 흉악범조차 꺼리고 전장에서는 자신을 사지로 내모는 지휘관에 불만이 쌓여 망치로 구타해 죽인 뒤 혹은 후방으로는 교도대가 있으니 발상의 전환으로 투항 형식으로 적전도주한 사례들까지 발생하자 결국 교도소 모병이 중단되었다. 하지만 전선에는 여전히 고기방패가 필요했고, 바그너의 반란까지 있자 점차 문제 있는 병사와 죄수들이 혼재된 슈투룸 Z (Z 돌격대)라는 형벌부대로 대체했다.[29]



2023년 3월 27일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강습부대 생존자들이 푸틴에게 고한다는 영상에서 자기들 뒤에 독전대를 세워놓고 형벌부대 취급해 지휘관을 포함해 22명이 숨지고 34명이 다쳤다고 해 정예조차 고기방패 취급할 정도로 인력부족이 심각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러한 것들을 일체 부인 중이다.

5. 우크라이나군



상술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2년이 경과하자 우크라이나 군 역시 인력난에 시달렸고, 이에 24년 5월 가석방을 미끼로 3년 이하 형기에 흉악범과 부패사범, 안보사범 등이 제외된 죄수 3천여명 정도를 전선에 투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형벌부대는 제24기계화여단, 제47기계화여단, 제93기계화여단 등 여러 부대에서 독립대대로 배속되었으며, 기갑부대의 지원 하에 실전을 치루고 있다.

6. 기타

형벌 부대가 오늘날의 선진국들에서도 드문 일은 아니다. 미군에서도 안전한 외국이나 본토에 주둔하고 있던 군인이 사고를 쳤는데, 그 사고가 심각하지 않을 경우 처벌하거나 불명예 전역을 시키는[30] 대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보내는 일이 있었다. 또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 죄가 무겁지 않은 상황일 경우 형사처벌 대신 군대에 보내져서 최우선으로 전쟁터에 투입하는 일도 있었다. 에디 슬로빅의 예시를 보면 2차 대전부터 이런 사례가 있었던 듯 하며[31] 모병제인 현재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고 한국에서도 방영된 "머나먼 정글"(Tour of duty)에서도 징병제 시절인 1960년대 소대원 1명이 민간인 시절 차를 훔치다가 기소되지 않고 이렇게 입대 처리되어 베트남으로 파병되는 것으로 나온다. Pawn Stars의 등장인물인 리처드 해리슨도 젊을 시절에 자동차를 훔쳤다가 사법거래를 통해 미국 해군에서 20년간 복무했을 정도다. 미군에서는 군대 밖에서 마피아하는 인간들이 군대 내에서 똑같이 뭉친다던가, 심지어는 OCS에 지원해서 장교로 임관하는 사례까지 공론화된 적이 있었다.

독일군이나 포악하고 잔인한 전체주의 체제 하의 군대였고 소련군은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려는 목적에 의해 상당히 비인간적으로 굴려져서 유명해졌을 뿐, 형벌 부대라는 아이디어 그 자체는 의외로 역사가 오래된 군대의 일부다. 인권을 존중한다는 프랑스나 미국[32]에서도 비슷한 부대가 있었고, 심지어 고대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명장으로 유명했던 오기가 오자병법에서 형벌부대를 추천하고 있다. 관직에 있다가 과실로 쫓겨나 다시 공명을 얻고자 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부대, 전에 지키던 성을 버리고 달아나 그 불명예를 씻고자 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형벌부대에 해당한다. 오기는 이들을 정예부대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33] 그리고 다른 정예부대로는 담력과 기백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부대, 적극적으로 용맹과 충성심을 보이려는 자들로 한 부대, 발빠르고 잘 달리는 사람으로 구성되는 부대 등이 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월나라의 대결에서 월왕 구천은 전쟁터에 노역부로 끌고온 사형수에게 너희들이 자살하면 유족들에게 후한 보상을 해준다고 독려하여 자살 부대를 조직하여 이들로 하여금 오군앞에서 집단 자살 퍼포먼스를 하도록 했다.[34] 그 신기한 광경에 오군이 어안이 벙벙해진 틈을 타서 월군이 기습, 오왕 합려가 전사했다. 이 때문에 아들 부차는 이를 갈고, 와신상담의 고사가 생겨났다.

고대 진나라에서도 진시황 사후 호해 통치 시절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나라가 막장이라 병력이 없자 진압군 사령관 장한이 여산에서 노역을 하던 죄수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해서 반군들을 즈려밞는다.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강제노역하던 죄수들에게 이 싸움을 잘 치르면 자유로 만들어준다고 하자 죄수들이 야수로 돌변하여[35] 실전에서 전승, 오광의 반군들을 개박살을 냈다.[36] 덧붙여 이 죄수들은 살인, 강간, 강도 같은 중범죄자들이 아니라[37] 단순 절도범 같은 경범죄자에 가까운 사람들이나, 세금을 못내거나 노역에 늦어서 끌려온 억울한 사람들이 다수여서, 장한도 이들을 "야 지금 함곡관 동쪽은 반란군으로 말도 아니다? 니들 집에 어떻게 갈래? 나랑 같이 반란 진압하고 자유인이 되어 집으로 가지 않을래?"라고 손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진나라 법에서 지각은 사형이라 어찌 보면 여기 끌려온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장한 밑에 계속 있었다면 그 끝은 신안대학살이다.

한무제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편성한 원정대에도 사면을 미끼로 죄수들을 많이 기용했다. 통일왕조 진나라도 각지에서 반란군이 잇따르자 죄수부대를 편성했고, 관우 또한 죄를 짓고 쫓겨다니다가 사면을 받기 위해 황건적 진압부대에 자원하려고 했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에도 죄수부대가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형벌부대처럼 운용한 것은 아니고 주로 강제노역을 시켰다고 한다. 연안파로서 평양방위 사령관을 맡았던 무정 김일성에게 평양 함락의 책임을 추궁당해 강등당하고 이 죄수부대에서 노역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에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에서 총알받이 겸 미끼로 먼저 보내는 선두그룹이 국민당군 패잔병으로 구성된 사실상의 형벌부대였다는 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당시 중공군 병력의 2/3는 투항 후 전향한 국부군이었고, 포로 상당수가 반공포로 석방 사건 때 대만으로 가길 희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이런 부대가 존재하지 않지만, 비공식적으로 죄수를 대상으로 북파공작원을 모집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684부대원이 이렇게 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지만,[38] 실제로 이들은 그저 무작정 상경한 농촌청년들이나 '중앙정보부 관련자의 감언이설에 포섭된' 사회 하층민들 및 무연고자들이 대부분이라 전과자가 아니다. 실미도 부대처럼 북파공작 임무를 위해 육군에서 편성했던 선갑도 부대는 실미도와 달리 실제 죄수를 모집하였다. # 한국 전쟁 중에는 전쟁 초 북한이 점령한 지역에서 좌익 활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한국군에 입대해서 수복 후 처벌을 면한 경우가 일부 있다고 한다.[39]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형수 1200여명을 시리아 내전에 파병했다고 한다.

미얀마군은 아예 교도소에서 흉악범죄자들을 일부러 석방시켜서 자신들의 앞잡이로 써먹고 있다.[40]

범선 시대의 영국에서도 해군에서 몇 년 동안 복무하면 죄를 사면해 주겠다고 하여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을 징병해서 수병으로 부린 일이 많았다. 사실 해군은 복무 환경이 워낙 힘들고 위험해서 자원자가 매우 적다 보니까 이런 식으로 죄수들을 징병하는 식으로도 운영했었다. 그나마 이런 방식으로도 수병들이 부족하면, 아예 함대가 항구 도시에 들어가서는 장교가 호각 소리를 부는 것으로 신호로 해서 눈이 보이는 대로 성인 남자들을 마구잡이로 배로 끌고 와서 강제로 수병으로 복무하게 하는 이른바 ' 프레스 갱'이라는 방식도 사용했다. 이게 너무 심해서 항구도시나 그 인근 마을에서는 아예 프레스 갱에 대비하기 위한 자경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부대 구성원의 특징 상 일반 부대와는 격을 달리하는 작전에 투입되며, 심할 경우, 자폭병으로 사용되기도 해서 이런 경우 사실상 군무이탈 말고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7. 매체의 형벌 부대



[1] 덤으로 총살에 쓸 탄환을 적을 쏘는데 돌릴 수도 있다. [2] 일반적으로 전사자 및 부상자 비율인 전상율이 10%만 넘어가도 심한 타격으로 보고 30%를 넘어가면 부대를 해체 후 다시 개편해야 하는 심각한 손실로 본다. 그런데 형벌 부대는 전상자가 아니라 전사자 비율이 30%를 넘겼다. [3] 소련은 국가 무신론, 반종교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엔 이 정도도 매우 심각한 반체제 행위에 해당했다. [4] 레베드는 러시아의 정치가로 러시아 연방군 중장 출신이며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영웅이었다. 옐친 치하에서 안전보장이사회 서기를 하다가 충돌하여 해임되었고, 이후 크라노야르스크 지방지사를 하다가 2002년 석연치 않은 헬리콥터 추락사고로 사망했는데, 푸틴의 음모라는 설도 있다. [5] 다만 T-34도 성능 자체는 평범한 중형전차에 되려 몇몇 부분들은 적군 전차들보다 유리한 부분들이 있어서, 전차 에이스가 되어 말뚝박는 사례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독소전 후반쯤에는 그냥 많이 만들어서 T-34의 재고량이 엄청 늘어났기에 형벌부대원뿐 아니라 다른 전차병들도 그냥 탔다. 나중엔 전차는 넘치는데 숙련된 전차병은 적었을 정도였다고. [6] 왜냐하면 Il-2 초기형은 후방 기총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초기의 형벌 부대가 투입될 만한 곳이 폭격기밖에 없었다. Il-2 승무원이 많이 늘기 시작한 것은 어디까지나 야전 개조 또는 정식으로 복좌형이 양산되기 시작한 뒤의 일이다. [7] 사수가 총을 잡은 채로 방향전환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무게중심이 지지대보다 앞으로 가도록 배치되기 때문에 힘이 빠지면 저절로 아래로 총구가 내려간다. [8] T-34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설계상의 문제점으로 피격되고 난 뒤에 조종수가 나오기 매우 힘들어서 생존율이 낮았었다. [9] 꼭 타 부대에서 복무한 형벌부대만 온 것은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바로 전차병으로 직행하는 경우도 꽤나 많았다. [10] 때때로 경전차 조종수 말고도 장갑차 조종수를 거치기도 했고, 바로 T-34 조종수로 배치되기도 했다. [11] 조종수 말고도 포수나 탄약수, 무전수로도 배치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포수와 무전수는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만 됐기에 배치되는 경우가 적었고, 탄약수는 아무나 뽑아 넣어도 큰 문제가 없기에 탄약수는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탄약수/포수/무전수의 생환율은 조종수에 비하면 많이 높았다. [12] T-34는 항상 최일선에 서야 했고 조준기 정밀도가 떨어져서 중장거리 사격이 매우 힘들었다. [13] 조종수용 해치가 있었는데 일단 여기로 나가기도 힘들 뿐더러 이게 차체 정면이라는 아주 안 좋은 위치에 있어서 독일군의 대전차포에 조종수의 머리와 함께 뚫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 부분이 장갑이 얇은 약점부위는 아니다. 이 부분의 장갑은 T-34의 전면장갑과 거의 동일하며 기종에 따라서는 이 부분이 조금 더 두꺼운 경우도 있다. 게다가 적과 조우중이 아닐때는 시야 확보를 위해 해치를 자주 열고 다녔는데 매복한 독일군의 기관총, 개인화기, 혹은 37mm 대전차포같은 T-34의 전면장갑을 뚫지 못하는 소구경 화포에 피격되는 일도 허다했다. 이 경우에도 보통 조종수는 즉사. [14] Cooper가 쓴 2차대전 기록인 death trap과는 상충되는 내용이다. 출처표기 바람. 일반적으로 공세 중의 손실 전차는 많은 경우 재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독일군은 전차가 불타오를 때까지 사격을 했다고 한다. 전차가 불타오르면 고열로 장갑판이 연화되어서 스크랩하는 수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통되어 격파되어도 원래는 금지되었지만 급하면 부품이나 멀쩡한 부분을 떼서 재활용하거나 손상된 부분을 수리하고 구멍을 메꾼 다음 멀쩡하게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을 독일군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15] 전차는 격파하는 것보다는 무력화시키는게 훨씬 더 수월하다. 전차를 격파하려면 확실히 파괴시켜야 하지만, 무력화시키려면 궤도만 파괴해도 충분하므로. 그리고 궤도를 파괴하는데는 훌륭한 포수라면 포탄 한발로도 충분하다. [16] 독일 입장에서 계속 전선이 밀리는데 폭풍처럼 밀려오는 어마어마한 물량의 전차들을 일일이 하나씩 한가하게 격파시키는 것은 그야말로 사치에 가까웠고 전선의 상황도 하나씩 격파시키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17] 소련으로 전향한 추축국 군인들은 소련군 내에서도 이미지가 굉장히 좋지 않았고, 때로는 이유 없는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18] 당연히 이들 전과자는 인민에게 피해를 준 사람으로 분류하여 적극 배척하는 공산국가 소련에서 이후 사회적으로 상당한 불이익을 받았다. 물론 이건 형벌부대에서 풀려난 혹은 형벌부대 해체 이후 강제노역을 하다가 형량을 채우고 사회로 복귀한 다른 소련군들도 마찬가지였다. [19] 이 경우는 모두가 처형이나 형벌부대행이 된 게 아니고, 원 소속 지휘관 등의 보증이 있거나 낙오했어도 제발로 인근 아군 부대에 자진 합류해 보고한 경우, 교전지역 인근이라 적과 싸우다 원 부대와 멀어질 여지가 많거나 이를 입증할 증거인 노획품이나 잡아온 포로, 다른 아군의 증언 등이 있는 경우, 중~대대 이상급 인원이 집단으로 뒤쳐져 낙오라고 하기 애매한 경우 등은 해당되지 않았다. [20] 당시 독일에서는 소방도 소방경찰이라는 경찰 조직이었다. [21] 그는 폰 비츨란트 소위 휘하의 옛 소대원이었는데, 소대장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소련군에게 총을 쏘다가 다른 소대원에게 얻어맞은 녀석이다. [22] 한국 정식발매명이고 원제는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다, [23] 영화판은 대령이며 배역은 마이클 케인이다. [24] SS 대장에게 권총을 빼들고 대들었다! [25] 영화판은 대령으로 배우는 로버트 듀발이다. [26] 러시아 사회가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이 이하로 갈수록 쩌리 취급이다 보니 가능한 일. [27] 예컨데 빈민이나 소수민족 등. [28] 전문가들도 이런 인력 축차투입 전술의 효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29] 하지만 이걸로도 부족했는지 23년 말부터 인도와 네팔 같은 개도국 빈민들까지 취업사기로 전장에 끌고 와 고기방패로 소모시켰다. 연합뉴스 [30] 한국군이 징병제라 중대한 과사실로 인한 불명예전역만 아니면 안 맞는 인간을 억지로 보내서 또 저렇게 되는군 수준의 취급을 받아 별 문제가 안 되는 것과 달리, 미군에서의 불명예 전역은 단순 복무 부적격자조차 훈련소에서 걸러내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면 심각한 페널티가 된다. [31] 다만 슬로빅은 본인이 원해서 간 게 아니라 절도 전과가 있어서 원래 징집대상이 아니었다가 미군이 유럽전선에 본격 투입되면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말 그대로 무수히 죽어나가자 가기 싫다는 사람도 별수없이 끌고간 것이다. [32]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이 남군 포로들 중 전향자를 모병한 부대가 있었다. 독일군에서 복무한 것으로 유명해진 프랑스인 기 사예르도 단순한 전쟁 포로인데다, 독일계 프랑스인이라서 억지로 징집된 점이 참작되어, 프랑스군으로 재입대하는 것으로 전범 재판에 넘겨지는 것을 면제받은 바 있다. [33] 당시 일반 부대가 강제징집당했거나 급여를 받고 복무하는 모병제였던 것을 감안하면, 강제로 시켜서 하는 사람이나 단순히 먹고 살려고 들어온 사람으로 이루어진 부대와 비교했을 때 '다시 공명을 얻고자 하는' 확고한 동기가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는 분명 정예부대로 분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징병/모병된 일반병들에게도 '내 나라를 지킨다'는 동기부여가 가능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매우 최근의 일이다. [34] 다른 방법이 없었나 싶었겠지만, 당시 합려는 마침 월왕 윤상이 죽어 구천이 상중일 때 쳐들어온 거다. 그러니까 전쟁준비고 뭐고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외침을 받았다 보니, 저런 쇼킹한 발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35] 죄수들에겐 그럴 이유가 있다. 1: 당시 진나라 법이 군공에 따라 작위를 주었으므로, 군공을 세우고 살아남으면 죄수 신분에서 벗어나는 것을 넘어 확실히 보상을 받는다. 2: 설령 전사해도 전사자도 대우받기에 유족들에게 대우받는 혜택이라도 있다. 3: 어차피 여산에서 노역하는 막장 인생이고 더 나아질 길은 이것밖에 없다. 4: 앞선 혜택들은 어쨌든 진나라가 살아야 가능하기에 저걸 위해서라도 미친듯이 싸울 수 밖에 없다. [36] 아무리 그래도 막 급조한 형벌 부대가 개박살을 내는게 말이 되냐 싶겠지만, 전국시대 말부터 진나라의 생산력은 넘쳐났고 끝내는 초한전쟁에서 한나라가 이기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다. 또 지휘관들도 진승, 오광 측은 정말 아무것도 없던 신세에서 지휘관이 돼서 아는 것이 없고 병사들도 진나라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만 빼면 저 형벌 부대와 다를게 없는 신세였다. [37] 진나라 법체계에서 이런 중범죄자들은 그냥 닥치고 사형이었다. [38] 당시 언론보도가 군 특수범 난동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것의 영향이다. 684 부대의 실체를 은폐하려는 일종의 공작. [39] 일례로 빨치산 토벌 때 활약한 '사찰유격대'는 빨치산 중에서 항복한 이들로 만든 부대다. 덕분에 '일단은' 처벌은 받지 않았는데 그래도 위험하다 여겨졌는지 체포하여 처벌만 안 했을 뿐 계속해서 감시받고 수상하면 경찰서에 불려갔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탄압받았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사람도 있다. [40] 이들은 소수민족 탄압 등에 이용되며 소수민족들을 잔인하게 살인하거나 소수민족 여성이나 아이들을 강간하는데 이용된다. 2021년 쿠데타 이후로는 시위 진압 등에도 투입된다고 한다. [41] 다만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한 우모자 보호령의 군대의 사신은 범죄자가 아닌 오히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만 후보로 뽑아 정예부대로 사용한다고 한다. [42] 다만, 못 볼 걸 너무 많이 봐온 병사들 중 일부는 자발적으로 재사회화를 받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