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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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모폰 명예의 전당은 예술적 탁월함, 혁신, 혹은 상상력을 통해 클래식 음악 녹음에 기여한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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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호세 카레라스 José Carrer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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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주제프 마리아 카레라스 이 콜 Josep Maria Carreras i Coll |
출생 | 1946년 12월 5일 ([age(1946-12-05)]세) |
스페인국 바르셀로나 | |
국적 |
스페인국(1946~1975)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1975~현재) |
직업 | 성악가, 자선 활동가[1] |
활동 | 1954년~현재 |
신체 | 170cm |
학력 | 바르셀로나 대학교(화학 / 중퇴)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요셉 |
가족 | 아버지 주제프 카레라스 이 솔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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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쓰리 테너'로서 유명세를 떨쳤다.백혈병 투병으로부터 복귀한 후 쓰리 테너 콘서트의 초기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태초에 세 명의 테너가 뭉칠 수 있게 한 장본인이며, 사실상 쓰리 테너의 구심점이었다.
동향 출신의 소프라노 몽셰라 카바예와 이탈리아 로비고[2] 출신의 성악가 카티아 리치아렐리[3]와는 환상적인 궁합을 보여주기도 했고, 필립스와 EMI, 도이치 그라모폰에서도 많은 음반을 남겼다. 이외에도 그리스 출신의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와도 여러 편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호세 카레라스/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음악적 성향
기본적으로 리릭 테너로 분류되는 목소리지만 음색 자체는 스핀토 만큼이나 어둡다. 그러한 속성이 목소리를 너무 쨍하지 않도록 하여 화려하고 풍부한 음색을 만든다. 오래 전부터 평론가들은 이러한 그의 목소리를 ‘ 벨벳 같다’라고 표현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한 음색에 독자적인 해석을 더한 열정적이고 호소력 짙은 노래와 연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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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리릭 테너로서의 성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랑의 묘약 중 ‘Una furtiva lagrima’ |
20세기 극후반, 기량이 쇠퇴한 이후 쓰리 테너로의 활동으로 인해 3인 중 가장 실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카레라스의 전성기는 70년대 초중반~중후반으로 상당히 짧지만, 그 기간동안은 잠시지만 세 명 중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설명할 조기 기량 쇠퇴 이후의 후반기 활동으로 인해 그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가지는 사람들마저도 젊은 시절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위대한 테너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은 누구보다 뛰어났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음반이 76년에 녹음된 토스카이다. 또, 77년에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녹음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는 3옥타브 미 플랫을 안정적으로 내는 모습까지도 볼 수 있다. (아래 영상의 10분 36초)
일반적으로 그의 기량이 쇠퇴한 것은 백혈병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뿐만은 아니다. 카레라스는 카라얀의 지도 하에 목소리에 무리를 줄 수 있는 배역을 너무도 많이, 그리고 자주 맡았다. 무리해서 크고 강력한 소리를 내려 한 것이 그의 목을 조기에 해쳤다. 그러나 잃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스핀토 역할을 위해 목을 해쳤지만, 그 결과 잠시동안(목을 해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목이 완전히 다치기 전까지) 그의 풍부하고 화려하고 또 서정적인 음색과 드라마틱한 퍼포먼스가 결합하여 다시 보지 못할 해석으로 스핀토 역들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러한 행위는 성악가의 경력에 치명적이기에 아무도 하지 않지만, 카레라스는 그렇게 해서 짧은 몇 년간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최고의 노래를 할 수 있었다. 비록 목소리에 무리가 오게 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이 시기의 카레라스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리리코-스핀토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76년~77년에 녹음된 그의 카바라도시는 진정 최초이자 최후로 남을 전설적인 해석이다. 그중에서도 아래 두 곡은 정말 최고의 녹음이니 꼭 들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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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녹음된 토스카 중 ‘Recondita armonia’ |
1977년 녹음된 토스카 중 ‘
E lucevan le stelle’ (4분 36초부터) |
대표적으로 초기 베르디 작품들과 카르멘의 돈 호세,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라 보엠의 로돌포는 그가 누구보다 가장 잘 연기했다고 알려진 배역들이다. 아래 영상은 그가 1977년에 부른 라 보엠의 ‘Che gelida manina’이다. 역시 조회수는 저조하지만 그의 전성기 시절 최고의 기량을 볼 수 있다.
백혈병 치료 이후 성량이 줄면서 기량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금을 울리는 호소력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가를 적시게 했다. 특히 복귀 이후 그는 포르티시모에서 부드럽게 피아니시모를 표현하는 해석을 자주 선보이곤 했다. 당장 밑의 50주년 바르셀로나 앵콜을 뒤 관객들을 향해 불러주는 노래 마지막 부분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또, 투병 전에도 다른 테너들이 카르멘의 ‘La fleur que tu m'avais jetée’에서 기량을 과시하기 위해 피아니시모의 고음을 포르티시모로 표현할 때, 그는 동요하지 않고 비제가 의도한 대로 오페라의 맥락에 맞는 표현을 하여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피아니시모 표현은 그의 미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섬세한 감정 연기에서 빛을 발한다. 그가 쓰러지기 직전에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했던 카르멘(1986년 공연)은 그의 연기와 연주의 진면목을 여실히 볼 수 있는 명반이다. 로맨틱하면서도 비굴한 음색을 요구하는 카르멘의 돈 호세와 같이 불쌍한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을 경우, 그의 목소리의 진가가 멋지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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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중 ‘La fleur que tu m'avais jetée’ |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인데, 카레라스는 성악 훈련을 시작할 때 바리톤으로 시작했었다. 그래서인지 극고음에서 파바로티와 같은 편안함을 주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부분이 클라이막스의 고음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딱히 단점으로 보지는 않는 편이다. 적어도 전성기 동안에는 그랬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오페라 공연보다는 주로 연주회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2년 일본에서의 베르디의 에르나니 공연을 마지막으로 오페라에는 출연하지 않던 중 무려 12년 만인 2014년에 그에게 헌정된 오페라 크리스티안 콜로노비츠의 '엘 후에즈'에 출연하였다. 다음 링크에서 전체 공연 실황을 감상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sRcHBJXLFY&t=5398s 초연 후에도 2017년까지 주연으로 출연했으며 이후에는 일본, 호주 등에서 비공개 리사이틀을 주로 다니거나, 지역 행사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4. 내한
외국 성악가로서는 드물게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은 편[4]인지 자주 내한해서 콘서트를 가지는 편이었다.국내 연주를 자주 왔던 몇 안 되는 성악가로, 한국 출신 성악도들에게도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파바로티와 도밍고의 내한 횟수가 7회 이하인 것에 비해 카레라스는 15회 이상이다.
1993년 2월에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MBC 초청 독창회를 가졌다. 당시 우리나라 가장 많았던 4000여개의 좌석을 가진 공연장에서 전원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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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독창회 - 본 공연 |
1993년 독창회 - 앵콜 및 커튼콜 |
다만, 2014년 내한 연주회에서는 11월 23일자 세종문화회관 공연을 준비하던 중, 급성 후두염과 감기로 인해 공연을 취소했는데, 언론에서 자극적인 기사로 이를 비난하며 빈축을 사기도 했다. 당시 공연 포스터 자체가 "전설을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식으로 홍보했기에 관객들은 아쉬움이 컸을 것이다. 전날에도 공연 시작 직전 안내 멘트로 건강 문제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추후에 일요일 공연을 예매한 관객들에게는 티켓값의 110%를 환불해 주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2017년 3월 4일 예술의 전당에서 한국에서의 마지막 공연이 펼쳐졌다. 이 공연에서는 무려 6곡의 앵콜 이후에도 4번 이상의 커튼콜까지 선보였다. 1부에서는 아끼듯이 노래를 불렀으나 2부에서는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열창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의 전성기 시절 쩌렁쩌렁한 고음을 들을 수 있는 공연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세계를 호령했던 가수답게 모든 순간들에서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그의 오랜 애창곡 <Core 'ngrato>는 정말 잘 표현해주었다. 2014년 공연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컨디션 관리를 잘 했고, 한국 관람객들의 열띤 호응과 박수와 함께 성황리에 무대를 마무리했다. 2부 후반에선 매 노래와 커튼콜마다 전원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날 공연은 2500여석 좌석 가운데 2400여석이 넘는 관중이 있었고, 2100여석의 일반판매석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장비 등으로 인해 관람이 여의치 않은 자리와 초대석 일부를 제외하면 가득 찼다.
5. 여담
- 하이엔드 주얼리 및 시계 브랜드인 Chopard의 공동 회장 캐롤라인 슈펠레와 오랜 기간 친분을 유지하며 그에 따라 쇼파드는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의 후원사로 오랜 시간 활동해왔다. 실제로 쇼파드에서는 카레라스의 이름을 건 주얼리와 시계 컬렉션을 출시하여 수익금을 재단에 기부하기도 했다.
- 매 연주회마다 앵콜 중 한 곡은 무대 뒷쪽 좌석 방향으로 돌아서서 그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위해 한 곡을 불러주는 좋은 매너로 호평을 받는다.
- 독창회 앵콜 때 자주 부르는 노래가 몇십 년째 유지되어 오고 있다. 대표적으로 <Core n’grato>, <Torna a Surriento> 등은 빠지지 않는 그의 애창곡이다.
- 2001년 <José Carreras Around the World> 앨범에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한국어로 부른 음반이 수록되어 있다.
- 공연 시 전례 없는 개런티를 받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는 카레라스와 더불어 쓰리 테너 모두에 해당되는데, 실제로 2014년 독창회의 경우 최고가 티켓 값이 44만원에 달해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파바로티가 15억원, 도밍고가 14억원, 카레라스가 8억원의 개런티를 받았으며, 쓰리 테너 공연 때에는 각자 10억원의 개런티를 받았다. 보통 저 당시에 잘나가는 테너들은 1억 내외의 개런티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했던 그들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당시 한국 3대 테너 공연 최고가는 25만원으로 당시 역대 최고 표값이었다. 놀라운 점은 같은 공연의 시카고, 일본 등 외국의 티켓 값과 비교하면 매우 저렴했다는 것이다. 최고가 티켓 기준 일본은 69만원, 미국은 75만원 수준이었다. 참고로 2000년대에 들어 조수미가 1억원 정도의 개런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