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1. 국호가 고려(高麗)일 때
순서 | 묘호 | 시호 | 휘(이름) | 재위 기간 | 생몰년도 | 능호 | 비고 |
- | - | - |
이성계 (李成桂) |
1392년
7월 17일 1393년 11월 23일 |
1335년
11월 4일 1408년 6월 18일 |
- |
1.2.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변경한 후
순서 | 묘호 | 시호 | 휘(이름) | 재위 기간 | 생몰년도 | 능호 | 비고 |
01 |
태조 (太祖) |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A]성문신무정의광덕대왕 (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大王) |
이성계 (李成桂) |
1392년
8월 4일 1398년 10월 14일 |
1335년
11월 4일 1408년 6월 18일 |
건원릉 (健元陵) |
|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A]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
이단 (李旦)[D] |
||||||
02 | - |
온인순효대왕 (溫仁順孝大王) |
이방과 (李芳果) |
1398년
9월 5일 1400년 11월 28일 |
1357년
7월 26일 1419년 10월 15일 |
후릉 (厚陵) |
영안군 |
정종 (定宗) |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공정왕(恭靖王)[B] |
이경 (李曔)[D] |
|||||
03 |
태종 (太宗) |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A]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공정왕(恭定王)[B] |
이방원 (李芳遠) |
1400년
11월 28일 1418년 9월 9일 |
1367년
6월 21일 1422년 6월 11일 |
헌릉 (獻陵) |
정안공 |
04 |
세종 (世宗) |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장헌왕(莊憲王)[B] |
이도 (李祹) |
1418년
9월 9일 1450년 3월 30일 |
1397년
5월 7일 1450년 3월 30일 |
영릉 (英陵) |
충녕대군 |
05 |
문종 (文宗) |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 (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공순왕(恭順王)[B] |
이향 (李珦) |
1450년
3월 30일 1452년 6월 1일 |
1414년
11월 15일 1452년 6월 1일 |
현릉 (顯陵) |
|
06 | - |
(恭懿溫文大王) 노산군(魯山君) |
이홍위 (李弘暐)[13] |
1452년
6월 1일 1455년 6월 25일 |
1441년
8월 9일 1458년 1월 9일 |
- 노산군묘(魯山君墓) |
|
단종 (端宗) |
공의온문[A]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 (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 |
장릉 (莊陵) |
|||||
07 |
세조 (世祖) |
승천체도열문영무[A]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혜장왕(惠莊王)[B] |
이유 (李瑈) |
1455년
6월 25일 1468년 9월 22일 |
1417년
11월 2일 1468년 9월 23일 |
광릉 (光陵) |
진평대군 함평대군 진양대군 수양대군 |
08 |
예종 (睿宗) |
흠문성무의인소효대왕 (欽文聖武懿仁昭孝大王) 양도왕(襄悼王)[B] |
이황 (李晄) |
1468년
9월 22일 1469년 12월 31일 |
1450년
1월 14일 1469년 12월 31일 |
창릉 (昌陵) |
해양대군 |
09 |
성종 (成宗) |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 (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강정왕(康靖王)[B] |
이혈 (李娎) |
1469년
11월 28일 1494년 12월 24일 |
1457년
8월 19일 1495년 1월 20일 |
선릉 (宣陵) |
잘산군·자을산군 |
10 | - |
(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 연산군(燕山君) |
이융 (李漋) |
1494년
12월 29일 1506년 9월 2일 |
1476년
11월 22일 1506년 11월 20일 |
- 연산군묘 (燕山君墓) |
|
11 |
중종 (中宗) |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공희왕(恭僖王)[B] |
이역 (李懌) |
1506년
9월 2일 1544년 11월 15일 |
1488년
4월 16일 1544년 11월 29일 |
정릉 (靖陵) |
진성대군 |
12 |
인종 (仁宗) |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영정왕(榮靖王)[B] |
이억명 (李億命)[22] |
1544년
11월 20일 1545년 8월 7일 |
1515년
3월 10일 1545년 8월 7일 |
효릉 (孝陵) |
|
이호 (李峼) |
|||||||
13 |
명종 (明宗) |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공헌왕(恭憲王)[B] |
이환 (李峘) |
1545년
8월 12일 1567년 8월 2일 |
1534년
7월 3일 1567년 8월 2일 |
강릉 (康陵) |
경원대군 |
14 |
선종 (宣宗) |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A]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 소경왕(昭敬王)[B] |
이균 (李鈞) |
1567년
8월 7일 1608년 3월 16일 |
1552년
12월 6일 1608년 3월 16일 |
목릉 (穆陵) |
하성군 |
선조 (宣祖) |
이연 (李昖) |
||||||
15 | - |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광해군(光海君) |
이혼 (李琿) |
1608년
3월 16일 1623년 4월 11일 |
1575년
6월 4일 1641년 8월 7일 |
- 광해군묘 (光海君墓) |
광해군 |
16 |
열조 (烈祖) |
개천조운정기선덕[A]헌문정무인명순효대왕 (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定武仁明純孝大王) |
이종 (李倧) |
1623년
3월 13일 1649년 5월 8일 |
1595년
11월 17일 1649년 5월 8일 |
장릉 (長陵) |
능양군 |
인조 (仁祖) |
개천조운정기선덕[A]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장목왕(莊穆王)[E] |
||||||
17 |
효종 (孝宗) |
흠천달도광의홍렬[A]선문장무신성현인명의정덕대왕 (欽天達道光毅弘烈宣文章武神聖顯仁明義正德大王) 충선왕(忠宣王)[E] |
이호 (李淏) |
1649년
5월 13일 1659년 5월 4일 |
1619년
5월 22일 1659년 5월 4일 |
영릉 (寧陵) |
봉림대군 |
18 |
현종 (顯宗) |
소휴연경돈덕수성[A]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 (昭休衍慶敦德綏成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 장각왕(莊恪王)[E] |
이연 (李棩) |
1659년
5월 9일 1674년 8월 18일 |
1641년
2월 4일[34] 1674년 8월 18일 |
숭릉 (崇陵) |
|
19 |
숙종 (肅宗) |
현의광륜예성영렬유모영운홍인준덕배천합도계휴독경정중협극신의대훈[A]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 (顯義光倫睿聖英烈裕謨永運洪仁峻德配天合道啓休篤慶正中恊極神毅大勳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 희순왕(僖順王)[E] |
이광 (李爌)[37] |
1674년
8월 23일 1720년 6월 8일 |
1661년
8월 15일 1720년 6월 8일 |
명릉 (明陵) |
|
이순 (李焞) |
|||||||
20 |
경종 (景宗) |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 (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각공왕(恪恭王)[E] |
이운 (李昀) |
1720년
6월 13일 1724년 8월 25일 |
1688년
10월 28일 1724년 8월 25일 |
의릉 (懿陵) |
|
21 |
영종 (英宗 |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순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A]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純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
이금 (李昑) |
1724년
8월 30일 1776년 3월 5일 |
1694년
9월 13일 1776년 3월 5일 |
원릉 (元陵) |
연잉군 |
영조 (英祖) |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A]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 (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장순왕(莊順王)[E] |
||||||
22 |
정종 (正宗) |
경천명도홍덕현모[A]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 |
이산/이성 (李祘) |
1776년
3월 10일 1800년 6월 28일 |
1752년
9월 22일 1800년 6월 28일 |
건릉 (健陵) |
|
정조 (正祖) |
경천명도홍덕현모[A]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 (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 |
||||||
23 |
순종 (純宗) |
연덕현도경인순희[A]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 (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 |
이공 (李玜) |
1800년
7월 4일 1834년 11월 13일 |
1790년
6월 18일 1834년 11월 13일 |
인릉 (仁陵) |
|
순조 (純祖) |
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A]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 (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 |
||||||
24 |
헌종 (憲宗) |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A]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 |
이환 (李烉) |
1834년
11월 18일 1849년 6월 6일 |
1827년
7월 18일 1849년 6월 6일 |
경릉 (景陵) |
|
체건계극중정광대지성광덕홍운장화[A]경문위무명인철효성황제 (體健繼極中正光大至聖廣德弘運章化經文緯武明仁哲孝成皇帝) |
|||||||
25 |
철종 (哲宗) |
희륜정극수덕순성[A]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 (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 |
이원범 (李元範) |
1849년
6월 9일 1863년 음력 12월 8일 |
1831년
6월 17일 1863년 음력 12월 8일 |
예릉 (睿陵) |
덕완군 |
희륜정극수덕순성흠명광도돈원창화[A]문현무성헌인영효장황제 (熙倫正極粹德純聖欽明光道敦元彰化文顯武成獻仁英孝章皇帝) |
이변 (李昪)[D] |
||||||
26 |
고종 (高宗) |
통천융운조극돈윤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립기지화신렬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A]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文憲武章仁翼貞孝太皇帝) |
이명복 (李明福) |
1864년
1월 21일 1907년 7월 20일 |
1852년
9월 8일 1919년 1월 21일 |
홍릉 (洪陵) |
익성군 |
이형 (李㷩) |
|||||||
27 |
순종 (純宗) |
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 |
이척 (李坧) |
1907년
7월 20일 1910년 8월 29일 |
1874년
3월 25일 1926년 4월 26일 |
유릉 (裕陵) |
- 명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묘호 뒤에 배치하여 군주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사용하였다.[60] 조선 조정에서 올린 시호는 명나라에서 내려준 시호 뒤에 붙여 사용하였다. 인조 때부터 청나라에서 받은 시호는 조선 조정이 받기는 하였으나 명나라에서 내려준 시호와 달리 실제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고려때처럼 자국에서 올린 시호의 맨 뒤 두글자(대왕)를 대표 시호로 사용했다.[61]
- 대한제국 선포 및 수립 이후 고종은 자신으로부터 4대조 위의 군주들과 개국 시조를 황제(皇帝)로 추존하였다. 실제로 왕위에 오른 정조, 순조, 헌종, 철종과 국왕으로 추존되었던 효장세자(진종), 사도세자(장조), 효명세자(문조) 그리고 개국 시조인 태조(고황제)가 황제로 추존되었고, 이에 따라 중국에서 내려준 추존 황제들의 시호는 모두 폐지되었다.
- 순종은 실제로 조선 국왕이 아닌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다만 조선 왕조의 법통과 명맥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제27대 조선왕으로도 분류하기도 한다.
-
한국 역사에 관심이 깊은 사람 외에도 대부분의 한국인 성인들은 조선의 왕명(
묘호 앞글자)을 이어놓은 암기법을 전부 숙지하고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이들 외에 별도로 추존된 국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생소하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62] - 6.25 전쟁 직후인 1954년. 부산 용두산 대화재라는 한국 역사상 최악의 문화적 대참사가 벌어지면서 당대까지 전해지던 실제 조선 국왕의 어진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불행하게도 이때 소실된 어진은 사진촬영이나 복사 조차 해놓지 않았기에 복원이 불가능했다. 오늘날 실제 용안이 온전하게 전해지는 임금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과 추존국왕 원종을 더해 총 7명이다. 그 외에 선조는 추정 어진이 전해지고 있으며, 숙종과 순조, 헌종, 문조는 불에 탄 추정 어진을 통해 얼굴이나 옷 등의 신체 일부분이 식별 가능한 상태이다.
1.3. 비정통 추대자
지지파 | 봉호 | 휘(이름) | 생몰년도 | 재위 기간 | 비고 |
이괄 세력 |
흥안군 (興安君) |
이제(李瑅) | ? ~ 1624년 2월 21일 | 1624년(7일) | 한양을 점령한 이괄에 의해 추대. |
이인좌 세력 |
밀풍군 (密豊君) |
이탄(李坦) | 1698년 ~ 1729년 | 1728년 3월 15일 ~ 1728년 3월 24일(10일) | 지지파가 왕위에 추대하고자만 함. |
1.4. 대리청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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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 | 숙종조 | 영조조 | 순조조 | |
왕세자 향 (문종) |
왕세자 운 (경종) |
왕세자 훤 (장조) |
왕세손 산 (정조) |
왕세자 영 (문조) |
|
}}}}}}}}} |
2. 계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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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 ||||||
│ | |||||||
익조 | |||||||
│ | |||||||
도조 | |||||||
│ | |||||||
환조 | |||||||
│ | |||||||
초대 태조 고황제 |
|||||||
├ | ─ | ┬ | ─ | ┐ | |||
제2대 정종 |
제3대 태종 |
||||||
┌ | ─ | ┤ | |||||
제4대 세종 |
|||||||
┌ | ─ | ┤ | |||||
제5대 문종 |
제7대 세조 |
||||||
│ | ├ | ─ | ┐ | ||||
제6대 단종 |
덕종 |
제8대 예종 |
|||||
│ | |||||||
제9대 성종 |
|||||||
┌ | ─ | ┤ | |||||
제10대 연산군 |
제11대 중종 |
||||||
│ | ├ | ─ | ┬ | ─ | ┐ | ||
폐세자 이고 |
제12대 인종 |
제13대 명종 |
덕흥대원군 | ||||
│ | │ | ||||||
제14대 선조 |
|||||||
┌ | ─ | ┬ | ─ | ┤ | |||
제15대 광해군 |
원종 | 흥안군 | |||||
│ | │ | ||||||
폐세자 이지 |
제16대 인조 |
||||||
┌ | ─ | ─ | ─ | ┼ | ─ | ┐ | |
제17대 효종 |
|||||||
│ | │ | │ | |||||
경안군 |
제18대 현종 |
복녕군 | |||||
│ | │ | │ | |||||
임창군 |
제19대 숙종 |
의원군 | |||||
│ | ┌ | ─ | ┤ | │ | |||
밀풍군 |
제20대 경종 |
제21대 영조 |
안흥군 | ||||
┌ | ─ | ┤ | │ | ||||
진종 소황제 | 장조 의황제 | 이진익 | |||||
┌ | ─ | ┬ | ─ | ┤ | │ | ||
제22대 정조 선황제 |
은언군 | 이병원 | |||||
┌ | ─ | ┤ | │ | │ | |||
제23대 순조 숙황제 |
전계대원군 | 남연군 | |||||
│ | │ | │ | |||||
문조 익황제 |
제25대 철종 장황제 |
흥선대원왕 | |||||
│ | │ | ||||||
제24대 헌종 성황제 |
제26대 고종 태황제 |
||||||
┌ | ─ | ┤ | |||||
제27대 순종 효황제 |
|||||||
[범례] 실제 혈통 기준 · 세로선(│): 부자 관계 · 가로선(─): 형제 관계 | }}}}}}}}}}}} |
- 이름인 '휘(諱)' 만 기재되어 있으며 성씨는 모두 이(李)[63]입니다.
- 즉위한 뒤 피휘를 위해 이름을 개명해 바꾸었으면 빗금 뒤에 바꾼 이름을 적습니다.
- 문서가 존재하는 인물은 기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특정 사건을 위해 문서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기재된 인물은 해당 사건으로 연결합니다.
- 양자로 들어간 관계면 친자 관계에서는 취소선을 긋고, 양자 관계에서는 바탕색을 깔지 않습니다. 그 자녀 관계는 양자 관계 하에 편입합니다.
- 적자인 경우에는 진한 색으로, 서자인 경우에는 연한 색으로 차이를 두어 표시합니다.
2.1. 태조 이전
- 전주 이씨의 시조로 칭해지는 사공 이한(李翰)은 《선원록》의 초창본인 이자춘 신도비에 누락되고 후에 첨부된 것인데, '인천 이씨 이한'의 신상자료를 그대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선왕실 시조 이한'의 실재 여부는 다소 불투명하다.
- 역시 조선왕조실록의 서두에 이한이 김인위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김인위는 태종 무열왕의 11세손이므로 이를 따른다면 모든 조선 국왕은 신라 왕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위에서 나오듯 조선왕실 시조 이한의 존재여부는 확실치 않으므로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조선 세조의 왕후 정희왕후의 외조부가 경원 이씨 가문인데, 이 경원 이씨 가문은 고려 후기에 이정/이의/이오 세 가지 계통만 남았다. 그런데 이정/이의는 김인위의 외손자이고, 이오의 손자는 모두 ( 부분적으로 신라 왕실의 피가 흐르는) 고려 왕실의 종실 여성과 혼인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셋 중 누구의 후손인지와 관련 없이 조선 예종부터는 부분적으로 옛 신라 왕가의 혈통이 흐르게 된다. 이문화의 아버지인 이심이 외자라는 점을 고려하면, 세대마다 1글자 이름-2글자 이름을 번갈아 사용한 이정 계통으로 추정된다.
용부 | |||||||
|
|
린(인) | 거 | ||||
양무 | |||||||
1. 안사 | |||||||
2. 행리 | |||||||
3. 춘 | |||||||
4. 자흥 | 5. 자춘 | 나해 | |||||
원계 | 1. 성계/단 | 화 | |||||
천우 |
세자 책봉은 됐으나 왕이 되기 전에 죽은 경우는 †, 세자에서 폐위된 경우는 기울임체
2.2. 조선 전기
1. 성계/단 | 방우† | 복근 | |||||
2. 방과/경 | |||||||
방의 | |||||||
방간 | |||||||
3. 방원 | 제 | 흔[66] | 순[67] | 윤의[68] | 귀달 | 진[69] | 순신 |
보 | 채[70] | ||||||
4. 도 | 5. 향 | 6. 홍위 | |||||
7. 유 | 장† | 정 | |||||
9. 혈 | 10. 융 | 황 | |||||
11. 역 | 12. 억/호 | ||||||
13. 환 | 부† | ||||||
14. 균/연 | |||||||
초 |
|
||||||
8. 황 |
|
||||||
용 | |||||||
구 | 준 | ||||||
|
|||||||
|
|||||||
임 | 현 | ||||||
염 | |||||||
종 | |||||||
방연 | |||||||
방번 | 여 | ||||||
방석 | 유 |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참모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첫째 왕후 한씨 소생 아들들의 큰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고, 특히 조선 건국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자신의 이복동생인 방번[71]과 방석을 제거하였고, 자신의 동복형인 이방과를 왕위에 올리고, 몇년 안있어 곧바로 본인이 왕위에 오른다.
태종 이방원은 본인의 이 후대는 장남에게 물려주고자 세자에게 많은 힘을 키워주려 했으나 세자는 기행적인 행동들[72]을 보임에 따라 총명했던 셋째 충녕대군이 세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세종은 장남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그 장남이 문종으로 즉위하나 어린 단종만을 남기고 2년 만에 죽게 되었고, 단종은 계유정난으로 인한 무서움 등으로 결국 욕심 많은 삼촌이었던 수양대군에게 반강제적으로 왕위를 내주게 된다.
세조가 된 수양대군도 원래 장남에게 왕위를 물러주려 하였으나 장남 의경세자가 어린 자식들만 남기고 이른 나이(18세)에 죽게 되자 둘째 아들 황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고, 그가 예종으로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예종(19세)도 얼마 못가 죽게 되고, 이후 왕위는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차남 자을산군에게 돌아가게 된다. 성종은 조선 왕조를 태평성대의 반석 위에 올리는데 성공을 거두나 그의 뒤를 이은 세자 융, 즉 연산군은 그야말로 파국적인 정국운영(각종 사화와 채홍사 파견)을 하면서 결국 반정이 일어나서 조선왕조 최초로 신하에 의해 왕이 바뀌는 첫 사례가 되고 만다.
반정세력들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그가 중종이 된다. 중종은 여러 정치적인 혼란을 야기한 채 세자 호에게 왕위를 물러주고 그가 인종이 되나 즉위한 지 8개월만에 병으로 죽게 되었고, 이복동생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라 명종이 된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 문정왕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면서 제대로 된 친정을 펼치기 어려웠다. 이후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명종이 친정을 할 상황이 되었으나 명종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순회세자가 이미 죽은 상황이었고, 결국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한 채 죽게 된다. 이른바 왕후의 자식들로 이어져오던 조선왕조의 직계는 여기서 끊기게 되었고, 이후 왕위는 명종이 생전에 어느 정도 점찍어두었던 중종의 7남 덕흥군의 제삼자, 즉 이복조카인 하성군에게 돌아가게 된다. 하성군 즉 선조는 조선왕조 최초의 방계출신 임금이 된다.
2.3. 조선 후기
14. 균/연 | 진 | ||||||
15. 혼 | 지 | ||||||
부 | 16. 종 | 왕† | 석견/회 | 혼 | 탄 | ||
17. 호 | 18. 연 | 19. 광/순 | 20. 윤 | ||||
21. 금 | 행† | 22. 산(셩) | 양† | ||||
23. 공 | 영† | 24. 환 | |||||
26. 명복/재황/형/희 | |||||||
25. 원범/변 | |||||||
훤† |
|
||||||
인 | 해동/광 |
|
|||||
진 | 채중/구 | 최응 | 재긍 | ||||
희하 | |||||||
하응 | 재선 | ||||||
재면/희 | |||||||
|
|||||||
|
|||||||
전 | 요 | 유[73] | 혁 | 숙 | 진익 | 병원 |
|
제 | |||||||
의 |
최초의 방계 군주 선조의 재위기는 순탄치 않았다. 물론 자신의 권위는 여러모로 확대한 상황이었지만 적장자가 없는 바람에 세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뤘고 그러다가 조선왕조 미증유의 큰 위기였던 임진왜란을 겪게 되면서 급하게 서자이자 둘째인 광해군을 피난 중에 세자로 삼게 된다. 하지만 전쟁 이후 적자가 되는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선조 사후 간신히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여러 실책들을 저지르게 되면서 반정을 맞게 되었다. 선조의 다섯 번째 아들인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반정을 통해 인조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조선 왕조는 이후 멸망 때까지 인조의 후손들로 전부 왕위를 잇게 된다.
인조도 할아버지 선조와 마찬가지로 미증유의 위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 심양으로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 청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세자와 봉림대군이 같이 돌아오는데 세자는 의문의 병으로 죽게 되고 차남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왕위에 오른다. 이후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로 왕위에 오르고, 숙종 또한 현종의 외아들(3대 독자)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특히 숙종은 왕이었던 아버지와 왕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정말 완벽한 정통성을 지니면서 강력한 왕권(환국 정치)을 휘둘렀으나 정 비 사이에선 적자를 낳지는 못했고, 자신이 사약까지 내려보낸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와 무수리 출신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왕위를 두고 다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세자가 경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자식을 갖지 못해 왕세제로 연잉군을 삼았고, 경종이 젊은 나이에 죽자 왕세제 연잉군이 영조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영조 역시 아버지 숙종과 마찬가지로 중전으로부터 적자를 낳지 못한다. 그래서 서장자인 효장세자를 세자로 삼았으나 젊은 나이(11세)에 요절하였고, 이후 43살이라는 불혹 늦은 나이에 늦둥이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게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이 아들을 곧바로 세자로 삼고 각종 교육을 시키는데 이를 버티지 못한 세자가 결국 각종 비행[74]을 일삼게 된다. 결국 영조는 이 세자를 죽이고, 사도세자라 하였고, 이후 세자의 적장자(세손)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며 왕세손으로 삼는다. 그 왕세손이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조 역시 좋은 정치(탕평,초계문신)를 펼쳤으나 중전으로부터 적자를 얻지는 못했고, 결국 승은후궁 의빈 성씨의 서장자를 세자로 삼았으나 곧바로 병( 홍역)으로 죽었고, 이후 다시금 둘째 아들을 세자로 삼고 세자가 순조로 왕위에 오른다. 순조의 경우 어려서 왕위(11세)에 올라 혈통상 증조모할머니가 되는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친정시기에는 외척 세력의 세도정치에 휘말리게 되면서 왕권을 강화시키지 못해 자신의 외아들인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키고 이를 기점으로 다시금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으나 세자가 3년만에 일찍 죽게 되면서 그 가능성은 없어지게 되었고, 곧바로 순조가 죽게 되면서 어린 손자가 왕위를 잇게 되니 그가 헌종이다. 하지만 헌종은 조선 역사상 정말 너무나 어린 나이(8세)에 왕위에 올랐고, 이후에 후사를 전혀 보질 못하고 23세에 요절하게 되면서 정조계의 직계 자손은 여기서 끊기게 되었다.
안동 김씨 세도 세력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로 강화도령으로 살고 있던 원범을 왕위에 올린다. 원범의 경우 숙종 - 영조 - 사도세자 - 은언군 - 전계군으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서자 릴레이의 방점을 찍은 사람이다. 하지만 안동 김씨 세도 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휘두르기 위한 인물로 끌고온 바지사장 케이스였고,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왕위에 올린 셈이 되었다.[75] 결국 철종은 본인의 한계[76]를 느끼게 되면서 술을 마시거나 기생들과 주야로 주구장창 놀아다 보니 몸을 상하게 되었고, 결국 성장한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게 되면서 이 역시 효종계의 직계 자손은 여기서 끊기게 되었다.
또 다시 직계 왕통이 끊기게 된 조선 왕조는 미리 흥선군과 왕위 관련한 밀약을 맺고 있었던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의 지목에 따라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에게 돌아가게 된다. 명복의 경우 할아버지 남연군이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된 케이스였는데 실상은 인평대군쪽 방계 종친계열이라서 그야말로 그동안의 조선 왕조 계보와는 거리가 멀어도 정말 멀다.
이후는 대한제국/황사 참조.
3. 전주 이씨 분파
4. 묘호가 개정 / 추존된 군주
해당 국왕 | 개정/추존 시기 | 추존 이유 |
목왕 → 목조 | 태종 때 | |
익왕 → 익조 | 태종 때 | |
도왕 → 도조 | 태종 때 | |
환왕 → 환조 | 태종 때 | |
공정왕 → 정종 | 숙종 때 | 정종의 업적과 정통성 인정 |
노산군 → 노산대군 → 단종 | 숙종 때 | 단종의 신원 복권과 정통성 인정 |
선종 → 선조 | 광해군 때 | 종계변무[77], 구국 |
열조 → 인조 | 효종 때 | 효종의 정통성 공고화[78] , 구국[79] |
영종 → 영조 | 고종 때 | 조선의 중흥[80] |
정종 → 정조 선황제 | 고종 때 | 대한제국 선포[F] |
( 장종 → 장조 의황제) | 고종 때(**) | 대한제국 선포[F] |
순종 → 순조 | 철종 때 | 정학(正學) 사수[83], 홍경래의 난 진압 |
( 익종 → 문조 익황제) | 고종 때(**) | 대한제국 선포[F] |
다른 동아시아 왕조들과 비교해보면, 조선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조(祖)'를 많이 남발했다. 다른 왕조에서는 '~조'는 기껏 1명 ~ 3명의 진짜 진짜 업적이 높은 군주에게나 붙는 묘호이며, 조선처럼 '~조'가 많은 왕조는 중국의 전연과 후진, 베트남의 찐씨 정권 등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85] 그나마 마지막 셋은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올린 것이라 남발한 경우에는 속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인의 시작점은 아버지를 '세조(世祖)'로 올린 예종이다. 세조의 경우는 신종으로 확정하기 전에 예종이 세조로 하자고 뒤집은 것인데, 신하들이 제시한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 셋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하고 '세조'를 강력하게 밀어붙여 세조로 결국 채택되었다. 보통 묘호를 정할때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한 묘호를 1안으로 올리고 하나만 딱 만들어 놓으면 국왕한테 통보하는 형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버리는 카드를 한두개 끼워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신하들은 신종으로 하기로 정하고 예종에게 결재를 받으러 간 것인데 예종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묘호의 원칙은 '덕이 있으면 종, 나라를 세우거나 중흥하는 등의 공을 세우면 조'이다. 한자의 의미도 '조(祖)'는 시조를 뜻하고 '종(宗)'은 시조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쉽게 말해 임금으로서의 뛰어난 업적이 있거나 훌륭한 국왕이라고 해서 '조(祖)'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왕조가 원래 모시던 시조(보통 나라를 건국한 창립자)거나 아니면 이 국왕으로 바꿔야할 만큼 왕통이 끊겨져 나갔다가 다시 돌아온 경우에 주어지는 것이 '조'인 것이다. 즉, 족보에서의 '시조', '중시조'와 개념이 똑같다.
다른 왕조의 사례를 보면 한국사에서는 앞의 왕조인 고려에선 추존왕 제외하고 실제로 국왕을 재위했던 사람 중에서는 오직 태조 왕건 한 사람만 '~조'가 붙으며, 이런 조종 묘호 시스템의 원조인 중국에서 찾아보면 한나라, 명나라, 원나라( 몽골 제국)는 두 명[86], 심지어 당나라나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등은 중국 왕조치고 오래 지속된 나라들인데도 창업 군주 딱 한 사람만 '~조' 자 묘호를 받았다.
즉, 예종의 사례로 돌아가 보면 예종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이어져오는 적장자 왕통은 한 번 끊겼으며, 세조로부터 다시 왕통을 이어나가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위 찬탈자와 찬탈자의 아들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 위해선 어느 정도 이러한 작업이 필요하긴 했고, 당시 신하들도 거의 대부분 계유정난의 관계자(찬탈자)들이다보니 여기에 암묵적으로 동조하거나 묵인했다. 문제는 이러한 안좋은 선례를 억지로 남기다보니 이후 '세조 때도 했었는데 우리 아버지는 못할게 뭐냐'는 식으로 온갖 방식의 추존이 우후죽순 생겨난 것이다. 실제로 이 점을 이해하고 다시 조선의 추존 사례를 보면 대부분 왜 이러한 추존이 발생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당장 인종 역시 중종의 묘호를 원래 중조라고 올리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그친 바가 있다.
대표적으로 광해군과 효종을 들 수가 있는데, 각각 아버지 선조와 인조를 '조'로 올리거나 처음부터 줘버린다. 효종조 쯤되면 '조(祖) 격상'이 단순한 정통성 강화 용도로 악용되는 수준까지 와버리는데 선조는 광해군이 본인의 존호를 늘릴대로 늘린 것도 그렇고 왜란 이후 떨어진 왕실의 권위와 방계승통한 아버지의 정통성을 드높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지,[87] 광해군은 '선종'을 올리고 불과 1주일만에 '선조'로 추숭해버렸으며, 인조는 아예 찬탈자라는 프레임을 지우기 위해 세조의 선례를 따르자고 임금과 신하끼리 암묵적으로 합의가 되었는지 신하들이 올린 첫 안건부터가 '열조'였다. 효종은 '열조'라는 묘호 자체에 좋은 묘호가 아니라고 태클을 건 것이지 효종이나 당대 신하들이나 '인조'에게 '조'를 부여하는 것 자체는 합의가 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선 해당 임금이 아니고 그 밑의 후손들이 정통성 자체가 흔들려서 올린 경우까지 등장한다. 영조와 순조가 대표적인데, 둘 모두 후기에 집권한 고종과 철종이 워낙 이전 임금들과 촌수 차이(무려 '17촌' 이상씩 차이난다)가 많이 나니까 정통성 강화를 위해 올려버렸다.[88] 그나마 찬탈자 프레임이 두려워 '우리 아버지는 왕조를 재창조하신 분이시다' 논리로 진행된 '세조'와 '인조'의 경우와는 다르게 이건 당시 정말로 왕권을 끌어올릴 필요성도 있었고, 조선 후기에 직계 왕통이 워낙 자주 단절되다보니 어느 정도는 필요성이 있는 부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조, 장조(사도세자), 문조(효명세자)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국왕에서 황제로 바로 재추존된 경우이다. 이는 동아시아 왕조 전통상 새로 국가가 건국되면 건국 시조의 4~5대조까지는 '조'(祖)로 추숭하는게 일반적이기 때문에 조선만의 특별난 경우는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13년만에 단명해서 조선의 부드러운 연장선으로 인식되고, 그에 따라 고종이 워낙 대한제국의 건국자보다는 망국의 군주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렇지[89] 당시 기준에서 나라의 격을 제후국에서 황제국으로 높이면서 새롭게 개편한 것은 맞기 때문에 이는 합당한 '추숭(追崇)'이다.
인터넷 상이나 언론 상에서도 '조와 종의 차이가 뭐냐'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원칙대로라면 위에서 말한 '계승하면 종(宗), (재)창조하면 조(祖)' 원칙이 맞지만, 조선의 경우에는 정통성이 약한 임금이 써먹었던 카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를 비약하여 조, 종의 차이를 구분하겠답시고 온갖 해괴한 분류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조는 영 못한 국왕에게 주는 묘호'라거나, '정통이면 종, 방계면 조', '왕이 될 사람이 아닌데 왕이 된 사람이 조', '서자는 무조건 조' 등의 기준을 내세우는 사례가 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혹시 '조(祖)'와 '종(宗)'의 차이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링크를 남겼다. 참고하기 바람.
5. 추존 군주
묘호 | 시호 | 휘(이름) | 생몰년도 | 능호 | 추증인 | 비고 |
- |
목왕 (穆王) |
이안사 (李安社) |
생년 미상 1274년 |
덕릉 (德陵) |
태조 | |
목조 (穆祖) |
인문성목대왕 (仁文聖穆大王) |
태종 | ||||
- |
익왕 (翼王) |
이행리 (李行里) |
생몰년 미상 |
지릉 (智陵) |
태조 | |
익조 (翼祖) |
강혜성익대왕 (康惠聖翼大王) |
태종 | ||||
- |
도왕 (度王) |
이춘 (李椿) |
생년 미상 1342년 음력 7월 24일 |
의릉 (義陵) |
태조 | |
도조 (度祖) |
공의성도대왕 (恭毅聖度大王) |
태종 | ||||
- |
환왕 (桓王) |
이자춘 (李子春) |
1315년
1월 20일 1361년 6월 3일 |
정릉 (定陵) |
태조 | |
환조 (桓祖) |
연무성환대왕 (淵武聖桓大王) |
태종 | ||||
덕종 (德宗) |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 (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 회간왕(懷簡王)[B] |
이장 (李暲) |
1438년
10월 3일 1457년 9월 20일 |
경릉 (敬陵) |
성종 |
도원군 의경세자 |
원종 (元宗) |
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 (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공량왕(恭良王)[B] |
이부 (李琈) |
1580년
6월 22일 1619년 12월 29일 |
장릉 (章陵) |
인조 |
정원군 |
진종 (眞宗) |
온량예명철문효장대왕 (溫良睿明哲文孝章大王) |
이행 (李緈) |
1719년
4월 4일 1728년 12월 16일 |
영릉 (永陵) |
정조 | 효장세자 |
온량예명철문효장소황제 (溫良睿明哲文孝章昭皇帝) |
순종 | |||||
장종 (莊宗) |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A]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范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 |
이훤 (李愃) |
1735년
1월 21일 1762년 윤(음) 5월 21일 |
융릉 (隆陵) |
고종 |
사도세자 장헌세자 |
장조 (莊祖) |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륜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A]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范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 |
|||||
익종 (翼宗) |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A]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 |
이영 (李旲) |
1809년
8월 9일 1830년 5월 6일 |
수릉 (綏陵) |
헌종 |
효명세자 |
문조 (文祖) |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A]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
고종 |
6. 추존왕 (비왕족)
묘호 | 시호 | 휘(이름) | 생몰년도 | 능호 | 추증인 |
- | 감소고우무안왕(敢昭告于武安王)[100] |
관우 (關羽)[101] |
? ~ 219 | - | 숙종 |
- | 단군(檀君) | 단군왕검 | ? ~ ? | 단군릉(檀君陵) | 고종 |
- | 기자(箕子) | 자서여 | ? ~ ? | 기자릉(箕子陵) | |
- | 동명왕(東明王) | 고주몽 | ? ~ ? | 동명왕릉(東明王陵) |
7. 추존 존령
군주로 추존되지 않았으나 위패가 종묘에 모셔지고 역대 군주들이 제사(제향)를 지낸 왕실의 직계 선조들이다.묘호(墓號) | 신위명 | 휘 | 추중인 | 비고 |
조경묘(肇慶廟) |
시조고신라사공신위 (始祖考新羅司空神位) |
이한(李翰) | 영조 | 신라시대의 인물 |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 |
시조고선공존령 (始祖考先公尊靈) |
고종 | ||
- |
시조비경주김씨신위 (始祖妣慶州金氏神位) |
김씨(金氏) | 영조 | 시조 이한의 부인 |
준경묘(濬慶墓) |
선조고고려장군존령 (先祖考高麗將軍尊靈) |
이양무(李陽茂) | 고종 | 태조의 5대조 |
영경묘(永慶墓) |
선조비이씨존령 (先祖妣李氏尊靈) |
이씨(李氏) | 고종 | 5대조 이양무의 부인 |
[A]
존호
[B]
명 제후로서의 시호.
[C]
대한제국 수립 후 폐지.
[A]
[D]
피휘 때문에 새로 지은 이름.
[B]
[D]
[A]
[B]
[B]
[B]
[A]
[13]
증조부인 태종
이방원과 더불어
훙서 시점까지 유이하게 2자 이름을 가진 왕.
실록에 따르면, 단종이 태어나기 전, 이미 문종의 두 아들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기에 오래 살라는 의미로 세종이 2자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A]
[A]
[B]
[B]
[B]
[A]
[B]
[B]
[22]
태어나기 전에 쉽게 죽을 운명이라 하여,
중종과 인종의 어머니,
장경왕후에 의해 '억세게 살라'는 의미로 억이라 이름을 지어줬지만 훗날 항렬자에 맞춰 '호'로 개명했다. 그러나
인종은 즉위한 지 겨우 8개월 만에 병으로 일찍 요절해 버리고 만다.
[B]
[A]
[B]
[A]
[A]
[A]
[E]
청 제후로서의 시호.
[A]
[E]
[A]
[E]
[34]
조선
국왕 역대 사상 첫
외국(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왕이다.
[A]
[E]
[37]
본명은 '광(爌)'이었으나 대사헌 조복양이
수양제의 휘(양광)와 음이 같다고 지적해서 공모를 통해 '순'으로 바꿨다고 한다.
[E]
[A]
[A]
[E]
[A]
[E]
[C]
[A]
[A]
[E]
[C]
[A]
[A]
[E]
[C]
[A]
[A]
[E]
[C]
[A]
[D]
[A]
[60]
《
세종장헌대왕실록》, 《
문종공순대왕실록》
[61]
명나라 멸망 이전 《
선조소경대왕실록》, 명나라 멸망 이후 《
인조대왕실록》
[62]
이는 실질적인 학업적 측면에서 추존국왕을 숙지할 필요성이 적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추존국왕은 문자 그대로 추존된 것으로서 대체로 자신의 아들이 즉위했을 때 예법상 아버지도 추존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추존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 진종의 경우에도 명목상 정조의 양부가 되어서 추존이 된 경우이다.
[63]
전주 이씨(全州 李氏)다.
[64]
족보에서 퇴출당함.
[65]
족보에서 퇴출당함.
무신정권 1대 집권자이자
고려 강종의 장인.
[66]
장평도정
[67]
부림령
[68]
유제도정
[69]
완원군
[70]
의성군
[71]
단, 방번은 당시 왕세자가 아니었고 그의 성정 또한 유약했기에 방번만큼은
이방원이 살려주려고 했으나 방원의 바로 위의 형인
방간이 "역적의 뿌리는 남기면 후환이 된다."는 명분 아래
동생과 상의도 없이 길거리에서 무참히 살해했다. 추후 이러한 갈등이 점차 촉발되어
제2차 왕자의 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72]
큰아버지
정종의 기생을 겁탈해
임신시키거나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궁궐에서 술먹고 사냥하러 가는 등의 기행을 보여주어
폐세자까지 가게 된다.
[73]
복녕군. 참고로 동생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은
경신환국의 일환인 '삼복의 옥'에 휘말려서 모두 역모로 유배가거나 사사당했다. 훗날 신원복권.
[74]
궁녀와 내시를 100명에 이르도록 죽이고, 궁궐 후원에 무덤 파고 궁궐에 기생과 비구니, 무당을 불러 술잔치를 하는 등의 차마 입에 언급하기 어려운 끔찍한 짓을 행동하게 된다.
[75]
다만 이와는 별개로 철종이 왕위에 오른 것에는 문제가 없다. 철종보다 더 가까운 왕족이 없었기 때문. 굳이 따져봐도 은언군가 종손 익평군과 철종의 이복 형 영평군 정도인데 이들도 똑같이 헌종하고 7촌이라...
[76]
안동 김씨 세도의 꼭두각시
[77]
왜란을 극복했다는 것은 좋으나 당대 사람들에게도 선조는 상당히 욕을 먹었고, 구국 사유 하나 때문이 아니라 사실상
종계변무가 정말 가장 결정적이다.
[78]
효종때 신하들이 '
한소열제도 열조를 묘호로 쓰므로 상당히 좋은거다.'라고 했는데 효종이 '말에서 떨어져서 죽은.
남량의 초대 군주 독발오고의 묘호도 열조인데 우리 아빠보고 열조를 쓰라고?' 식으로 우겨서 주제에 걸맞지 않게 가장 좋은 묘호로 꼽히는 인조로 바꾸었다.
[79]
실제론 아니지만두번의 호란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고하여 격상되었다.
[80]
긴 시간동안 나라를 안정시켰다하여 격상되었다. 사실 영조가 50년 동안 왕위에 있는 동안 장수했는데, 장수(長壽)의 의미 자체가 전근대에는 아주 좋았다.
[F]
대한제국 황제가 된 고종의 법적 아버지였던 효명세자(익종)부터 법적 증조부의 생부였던 사도세자(장종)까지를 조로 추숭하였다. 법적 고조부인 효장세자(진종)는 황제로 추존은 되었으나(시호: 소황제昭皇帝) 묘호를 조로 추숭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당시 순조는 이미 묘호가 조로 끝났다.
[F]
[83]
사악한 학문인
천주교로부터 나라를 지켰다고 하여 격상되었다.
[F]
[85]
묘호가 있는 군주 중에서 종이 없고, 전부 조 밖에 없다.
[86]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다른 한 사람은 각각
광무제,
영락제,
쿠빌라이 칸인데, 이 쪽 역사를 안다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세 사람은 사실상 나라를 새로 세운 거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심지어 영락제는 가정제가 묘호를 고치기 전에는 태종이었다.
[87]
다만 선조 당대에는 방계 승통이 왕권에 문제되는 일은 없었다. 흔히 선조의 방계 콤플렉스 같은 요소들이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를 발목 잡은 것은 오히려 임진왜란 피난 당시 보여준 여러 추태들이 문제였다.
[88]
간혹 《실록》에 적힌 이유를 들어 '그냥 나라를 오래 다스렸다' 거나, '
홍경래의 난을 진압했다'는 별 시덥잖은 이유로 조 격상을 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그저 표면상의 이유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잘못 이해한 것이다. 해당 이유들은 정통성이 약해서 올려줬다고 곧이곧대로 적을 순 없으니까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다.
[89]
명목상으로야 순종 때 망했지만, 고종이 세상을 떠나거나 자의로 퇴위하여 계승한 것이 아니라 강제로 퇴위당하고서 계승한 것이고,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했던 등 그 실질을 볼 때 고종 때 나라가 망했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나무위키상의 '분류:고종(대한제국)'에는 '분류:망국의 군주'도 포함되어 있는 반면 '분류:창업군주[102]'는 들어 있지 않은데, 아무래도 구한말 당시의 명목상의 논리보다는, 유저들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현대 한국에서의 실질적인 논리가 더욱 크게 작용했다고 보인다.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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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C]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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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참고.
[101]
기자를 제외한
조선의 비왕족 추존 국왕 중 유일한 해외인물이자, 왕이었던 적 조차 없는 인물로 꽤 이례적인 경우이다.
[102]
즉 대한제국을 창건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