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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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와
그의 시대는 공산당의 승리 이후의 악몽에 비하면 그 이하였고, 사명을 최후까지 이룩할 자원과 역량이 부족한 통치자와 체제 탓에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하기에는 그 이상이었다."
조너선 펜비
조너선 펜비
장제스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무능력하며 봉건적 사고를 답습한 군벌이라는 등의 부정적 평가가 주류였다.[1], 이는 국공내전의 패배의 원인을 장제스에게 찾거나 장제스를 몰아낸 중국 공산당의 공산혁명 신화 만들기로 인한 영향이 크다. 그런 이유로 학계 및 민간에도 장제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등의 사건으로 인해 중국 공산당의 신화가 파괴되었고 학계에서도 중화민국 시기의 사건은 중화민국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관이 일본에서 대두되면서 1970년대부터 중화민국과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1996년 레이 황은 지적하길 장제스는 비윤리적이고 전근대적인 수단으로라도 근대 국가를 강제로 만들어냈어야 했다고 말했으며 2003년 영국의 저널리스트 조너선 펜비가 장제스 평전에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장제스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을 시도, 장제스의 단점들에 대해 혹독히 비판하면서도 장제스가 없었을 중국의 파멸적인 결과를 지적하고[2] 장제스의 정권이 결국 최초의 근대 국가의 기구들을 중국에 제공했으며 마오쩌둥의 정권과 달리 최소한의 정상적인 정권이었다고 규정함으로 매우 전향적인 재평가를 시작했다. 국민 혁명군 장교 출신의 학자 레이 황, 영국 학자 라나 미터, 미국 외교관 출신의 제이 테일러 등의 연구자들이 장제스에 대해 매우 전향적인 재평가를 하게 되면서 "무능한 장제스" 사관은 학계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제스와 적대한 중국 조차도 장제스의 항일 일대기에 대해 재평가하며[3] 장제스의 위상이 올라갔다. 다만 이러한 학설들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 매우 늦었기 때문에 긍정적 평가가 대중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상당히 최근이었다.
또한 시안 사건이 터지던 당시의 미국 대사인 넬슨 존슨은 장제스의 정적들조차 중국 전체를 규합할 만한 카리스마를 지닌 사람은 장제스 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마지못해 지지를 보냈다고 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물론 장제스의 정권과 치세는 수많은 한계와 비판의 요소가 많으나 청조 붕괴 이후의 시대적 상황이 마치 전적으로 그의 잘못인 양 덤터기를 쓴 비판이 많으며 장제스가 거둔 공에 대해선 사료 부족 내지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4] 스틸웰이나 시어도어 화이트같이 중국 사정에 무지하고 인종차별적 관점으로 무장했던 관계자들의 편견에 찬 매도가 정설인 양 무비판적으로 인용되었다. 그리고 장제스가 독재자라고 비판함과 동시에 장제스가 철권 통치를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공존하는 기묘한 양상을 보인다. 장제스 문서의 평가 단락에서는 장제스와 장제스 정권의 공과 과에 대해서 될 수 있는 한 살펴보고자 한다.
2. 정치 분야
2.1. 긍정적 평가
장제스가 중국과 중국 인민을 위해 신경쓰지 않았다고 의심할 근거는 없다. (중략) 만약 장제스가 독재자처럼 행동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군신관계를 제외하면 자신의 시스템을 계속 작동시킬 수 있는 다른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레이 황
레이 황
2.1.1. 대외 업적
불평등조약을 해소하고 조계지를 회수했으며 중화민국을 4대 연합국의 하나로 인정받게 했고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자리를 획득했으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원에 앞장섰다.2.1.2. 중국 통일
일반적으로는 현대 중국 통일의 주역으로 언급되는 사람은 마오쩌둥이지만[5], 실제 그 형태를 미리 확립한 사람은 장제스였다.장제스는 위안스카이 시절부터 남방에 대한 통치력은 행사도 못 해본 북양정부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는 안정적 정권을 유지했다. 안직전쟁이니 직봉전쟁이니 우두머리 자리부터 수두룩하게 갈려나가고 그것도 모자라서 호국 전쟁이다, 호법 전쟁이다 하여 아예 중앙에 대한 독립을 선포해버리는 일에 거의 손놓고 협상이나 했던 북양 정부와 달리 장제스의 난징 국민 정부는 반장전쟁 마무리 이후에는 1931년 말의 하야 사태를 제외하면 장제스 + 기타 유력 인사들과의 합작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굴러갔고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 정부, 광동파의 광저우 국민 정부 등의 도전자는 물론, 차이팅카이의 푸젠 정부 같은 독립 세력들을 아주 간단히 물리쳤다.
물론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난징 국민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던 군벌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장제스의 국민 정부 시절에도 성스차이가 지배하던 신장 지역 등에 대한 통제권은 없었고 장강 하류의 국민 정부 중심지에서 외곽으로 나갈수록 정부 통제력은 약해졌으므로 따로 노는 지역은 많긴 했다. 그러나 국민 정부 시대에는 산시성 먼로주의 운운한 옌시산이나 박쥐처럼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를 오간 성스차이, 잘 쳐서 3당 운운하며 독립 시도한 차이팅카이 등이 최고 수위지만[6] 북양 정부 시대에 남방 군벌들은 중앙을 무시하고, 다들 독립 정권 세우고 연성 자치론 운운하며 최소한의 연결 고리도 없었다. 장제스 시대에는 다들 국민당 밑에 있다는 큰 틀은 유지했고 최대 위협인 반장 전쟁에서도 유지되었다. 그리고 나라가 어떻게 되기나 말거나 자기들만 먹고 살겠다고 백성들 쥐어짜서 전쟁질만 한 군벌들과 달리 장제스 시대엔 최초로 편견회의를 통한 군축과 군벌 통제가 시작되었다.[7] 물론 이것에 반발한 결과가 반장 전쟁이지만 장제스는 반장 전쟁에서 이겼고 최대 경쟁자 펑위샹의 기반을 무너뜨렸으며 이후 초공작전 등을 빌미로 지속적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권위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일 전쟁에서 장제스가 기반 다 털리고 가장 적대적인 쓰촨, 윈난 군벌들과 동거를 하게 되었는데, 오히려 이 때 장제스의 권위가 그 어떠한 때보다 증대되었단 점에서 '군벌도 통제 못한 장제스'와 같은 담론은 당시 국민 정부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오해에 불과하다.
2.1.3. 마오쩌둥보단 유순했던 통치
장제스는 독재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국공내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는 설명은 올바르지 않다.장제스는 후한민, 왕징웨이 등과 합작의 방식을 추구했고 반란을 도모했던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국공내전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완전히 축출하지 못했으며 특히 북벌 완료 직후부터 반장 운동을 한 리쭝런은 부총통에 선출되기까지 이르었다. 루쉰, 라오서 등의 좌익 문필가, 지식인들은 장제스 정권 시절부터 비판을 쏟아냈지만 그들 대부분은 실질적인 처분을 받지 않았으며 덩옌다의 불법적인 처형만이 결국 장제스를 비판할 몇 안되는 수단에 불과했다. 장제스에 대한 수많은 비난은 '그래도 되는' 사회 분위기 덕이었다.
한편 대중에 대한 장제스의 지지 역시 확고한 편이었으며, 항일의 영도자로서의 지위는 절대적이었다. 중일전쟁 이 끝나자마자 일본군 점령 하의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 등 대도시에서 다들 뛰쳐나와서 외친 구호는 '장제스 위원장 만세'였다. 국민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1950년대까지도 유지되어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장제스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돌면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예컨대 6.25 전쟁 중에 장제스가 미군과 호응하여 하이난을 점령하고 린뱌오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져서 중국 전체가 요동쳤고 만주 지역에서 공산당기 소각, 마오쩌둥 초상화 파괴 등의 반공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8] 물론 공산당이 중국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2.1.4. 문화재 보존
정치, 경제 분야에 가려서 그리 주목받지는 않지만, 장제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문화재 보존이다. 일찍이 중국 전통문화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국부천대 당시 장제스는 베이징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유물 29만여 점과 자금성에 있던 사고전서 문연각본을 대만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으로 옮겼다.[9] 또한, 중국 전역 각지에 소재한 유물들을 엄선하여 총 60만 8천여 점의 유물들을 국립고궁박물원으로 옮겼다.이때 장제스가 대만으로 옮긴 중국 전통 문화재는 덕분에 중국 대륙에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 때 홍위병들의 반달리즘을 피할 수 있었다. 1966년엔 중국공산당의 문화대혁명 반달리즘에 대항하여 중화문화보존위원회를 만들었다.
2.2. 부정적 평가
2.2.1. 독재, 선군정치
아무리 장제스의 통치가 마오쩌둥보다 유순했다고 한들, 그 역시 독재자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1929년 중국국민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의 대표 81.2%를 장제스의 당중앙이 일방적으로 뽑는 방식으로 진행해 반대파의 영향력을 애초에 차단해버렸고, 그 덕에 왕징웨이와 천궁보를 위시한 개조파가 내세운 국민당내 민주주의 요구가 제대로 먹혀들어가 민중들 사이에서 개조파의 인기가 치솟기도 했다. 북벌이 끝난 이후에도 장제스는 거의 10년간 훈정을 계속하며 민주화를 실현하지 않았고 국공내전기에 겨우 실시한 헌정 역시 민심을 돌리기 위한 술책일 뿐 실제로는 헌정이라는 이름의 훈정이 계속되었으며, 이마저도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으로 무의미해졌다.그리고 장제스는 일개 군 사령관에 불과했지만 정치에 간섭하여 4.12 상하이 쿠데타로 국민당을 분열시켜 북벌에 제동을 걸었고 북벌군끼리 총부리를 들이대기 직전까지 만들었으며, 이후 린썬 등을 바지사장으로 세우고 군사위원회 위원장 직위에서 국민정부의 모든 권력을 통제했다. 사실, 장제스가 국민정부의 실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신의 계파인 황포파를 위시한 군부의 지지 덕분이었다. 이로 인해 장제스가 이끈 국민정부는 당이 군을 이끄는 것이 아닌, 군이 당을 이끄는 것과 다름없어진 것. 또한 후한민, 왕징웨이와 합작했다지만, 장제스는 후한민이 그에게 반대 의견을 드러내자마자 감금시켜버렸고, 왕징웨이에게는 그의 명망만 이용했을 뿐 실권을 주지 않은 것으로 두 합작 모두 명목상일 뿐임을 드러냈다.
2.2.2. 공포정치
남의사, CC단 등이 기존의 통설마냥 중국판 게슈타포같은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런 친위대 성향의 단체들이 벌인 행각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장제스는 반공의 기치 아래 자신에게 반대하는 대중, 지식인, 예술가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했던 것은 분명하며, 소위 반체제 인사라 칭해지는 인물들에 대한 고문과 폭력 등 반인륜적 행위가 자행되었던 것 또한 장제스 정권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덕분에 자신의 스승인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한다면서도 정작 국부천대 이후 죽는 날까지 계엄령을 수십년간 펼쳐[10] 실제론 쑨원이 추구한 삼민주의와 반대되는 행보를 걸었다. 이 동안 민주화 인사들을 향해 각종 백색테러(白色恐怖)가 벌어졌으며, 계엄 통치하에 3당 훈정을 표방해 청년당, 민주사회당 같은 관제 야당을 제외한 야당은 사실상 불인정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대만 계엄령 문서 참고하십시오.
끝까지 본성인을 차별하고 핍박하여 사실상의 식민통치자로서 정국을 이끌어나가고 중화 민족주의를 더 중시하여 본성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의사는 철저히 무시와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민주화 이후 대만 정치 양극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오죽하면 많은 본성인들과 민주화 인사들이 장제스의 국민당 통치시기보다 대만일치시기를 더 높게 평가할 정도다.[11]
2.2.2.1. 대만인 학살
자세한 내용은 백색 공포 문서 참고하십시오.20세기 대만사 최악의 비극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한 2.28 사건 등 굵직굵직한 학살 사건 일부도 장제스 집권 당시 벌어졌다. 중국국민당은 오늘날까지 자신들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은 인정하면서도 장제스가 이 사건에 개입한 것은 철저하게 부정한다.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으며, 당시 이 학살을 장제스가 조장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더라도[12] 최소한 국가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도의적인 책임을 피할 길은 없다.
2.2.3. 부패 방치, 민심 이반
장제스의 국민당이 중국 대륙에서 국공내전 초기만 해도 압도적 우위를 점했음에도 결국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패해 대만으로 쫓겨난건, 당시 대륙 인민들을 착취하는 국민당 수하들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대중의 민심이 떠났기 때문이었다.이 점에서 장제스는 정권 장악 능력도 부족했다고 볼 수 있고, 대만으로 쫓겨나서도 현실성 없는 중국 탈환만 내세우며 대만 본성인의 마음을 얻는 데도 실패하였다.
3. 경제 분야
국민당 일당독재 하 南京國民政府(남경국민정부)의 정치적 성격에 관해서 평가가 다양한 데 비하면 경제적 성취에 관한 근래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한세 대학교 강명희 교수, <남경 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 경제 건설>(2006년).
한세 대학교 강명희 교수, <남경 정부 시기 국가 주도하 국민 경제 건설>(2006년).
세간의 통설과는 달리, 장제스 정권의 업적이라 평가되는 분야 중 하나다.
일각에서 황금 10년이라 부르기도 하는 1927년 ~ 1937년 시절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은 관세 자주화, 통화 일원화, 국내 통행세 철폐, 조세 개혁, 조계 회수 등 경제 성장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성공했다. 또한 이 시기에 중국의 공업화가 이루어졌으며, 저장을 비롯한 국민당 직할지의 농민 생활환경이 개선되었다. 이 때문에 1936년 런던 채권 시장에서는 중국 국채의 이자가 일본 국채의 이자보다 더 저렴한 조건으로 발행되었었다.[13] 이런 개혁들을 바탕으로 장제스의 난징 정권은 위안스카이의 중화제국 이래 가장 풍족한 재정을 보유했다.
다만 이 시기가 세계적으론 그 유명한 대공황 시기다 보니 한때는 이때 국민당이 한 것이라고 고작 '경제 불황을 유지시킨 것 뿐'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이나 제국주의 열강 침투의 주구였다는 공산당식 사관이 우세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오늘날 들어 국민당이 한계 속에서도 할 수 있는건 했다는 재평가가 나오는 것. 국내의 경제정책 만으로 완전한 경제회복을 달성하는 것은 당시 세계의 어떤 정부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3.1. 긍정적 평가
3.1.1. 안정적인 농업 정책
국민당과 장제스 정권은 가난과 핍박에 허덕이는 농촌 문제가 중국의 불안정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고 농촌의 모순이 낳는 불만이 공산당의 세력 확장에 기여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어서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토지 개혁을 비롯한, 농촌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대책을 강구한 바가 있었다.하지만 일련의 개혁이 추진된 20년대 ~ 30년대의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의 권력은 취약했다. 개혁을 위해 지방에 파견된 국민당 관리들을 군벌들이 추방하거나 해치는 일도 허다했으며, 장제스가 제대로 통치할 수 있는 곳은 난징, 상하이를 비롯한 동부 해안가 일부 대도시와 장시성 일대 정도였는데 그 장시성에서조차 지주들이 국민당 관리들을 저격하기도 했다.
그래도 국민당이 지배하던 장시성 지역에서만큼은 제한적이나마 몇몇 성공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소작료 납부를 제한한 감조 정책과 관습적인 소작농의 권리 보호 및 지주들의 불법적인 착취를 법으로 금지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단속하려고 노력한 것이었다. 국민당의 개혁은 농민과 지주의 눈치를 동시에 보느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할 온건한 개혁이었으며 지주들의 편법 행위가 근절되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지만 1990년대 이후로는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이를 고평가하는 연구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마오쩌둥의 공산당도 국민당의 감조 정책을 중일 전쟁 기간 중에 채택하여 그걸로 재미를 봤다.
또한 중앙에서 개혁을 하려 해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없어 탁상공론에 그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1928년 현조직법을 발표하여 촌락의 행정 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해 근대적 교육을 받은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구장에 임명함으로써 농촌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이로 인해 농촌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으며 지주 세력의 영향력도 상당히 축소되었다. 하지만 지주들은 구장 및의 향진장의 90%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며 여전히 농촌의 왕초로 군림하고 있었고 국민당이 임명한 현 관리들의 추진 사업에 번번이 딴지를 걸었고 토지 등기법이나 경찰 행정 등은 이들의 방해로 잘 시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농촌 통제력을 강화하려고 보갑제까지 부활시켰으나 1937년까지도 국민당이 경찰도 파견하지 못하는 현들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농촌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향진들이 국민당에 의해 통제되면서 농촌과 국가의 연결성 및 통제력이 매우 강화되었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다.
반장파들이 대거 실각한 1933년부턴 농촌 진흥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여러 합작사의 건설과 농업 기술자들을 투입하여 농촌에 근대적인 농업 기술을 보급하고 농촌의 생산성을 향상하려는 시도였다. 이들은 농촌 금융, 합작사의 강화, 농산물 유통망 설립, 가연잡세 등의 폐지를 비롯한 비근본적인 개혁과 개량에 치중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고리 대금업에 허덕이던 농촌을 구제하기 위한 금융 기관의 설립과 합작사를 통한 상하이 자본가들의 농촌 투자를 촉진시킨 공을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소모적인 곳에 활용되던 농촌 자금은 상하이 금융 자본의 개입과 국민당의 노력으로 농촌 생산성 재고로 흘러가게 되었고 근대적 금융 질서의 확립과 농촌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또한 종자 개량, 기술 개량 등으로 국민당 직할령의 고치 생산과 비단 품질은 증가하기 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제사 공장 들이 들어섰으며 근대 품종 보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국민당이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품 작물에 대한 통제를 시도함으로 인해 농민들의 손해를 야기했으며 이 때문에 상당수 양잠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였다는 부작용 역시 존재했다.
1931년부턴 합작사 운동이 활발히 이뤄졌는데 농민의 생산 활동 원조와 이득 증진에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합작사 운동은 국민당의 지배 영역 전체에 확산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었으며 운영의 문제가 많아 상당한 양의 자금이 회수되지 못해 국가 재정에 타격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합작사 운동이 집중적으로 전개된 동부 해안가 농촌 지대는 중일 전쟁 때 일본군이 쳐들어와서 개발살을 내버리면서 도루묵이 되고 만다.
흔히 장제스의 농업 정책은 공산당과 같은 급진적 토지 개혁을 하지 않아 폄하되지만, 1930년 6월 30일 제정된 장제스의 토지법은 소작농과 자영농을 보호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물건이다.[14] 그리고 장제스의 농업 정책으로 부강해진 국민 정부는 초공 작전에서 공산당에 궤멸적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중국 지주들이 총칼로 땅을 넓힌 것도 아니고 펄 벅의 소설 대지에서 묘사되듯이 자수성가한 농민 출신들도 상당했다. 자신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연스레 토지를 넓힌 것이다. 급진적 토지 개혁으로 지주들을 무작정 몰락시킨다고 그것이 농촌의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며 오히려 악화시킨다. 공산당의 무자비한 토지 개혁의 결과 중국의 농촌 생산량은 30% 폭락했고 합작사 이후 더 폭락했고 오히려 공산화 이후에 생산량과 영양 섭취량이 국민당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 없어졌다.
서구 학계에선 공산당의 토지 개혁이 민심을 얻기는 했으나 그 민심이 공산당 승리에 결정적 기여는 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초공 작전에서 국민당의 우세가 확정시되는 순간 농민들은 망설임없이 국민당 지지로 선회해버렸다는 것이다. 또 마오쩌둥은 옌안까지 후퇴한 다음에 공산당 급진파들에게 당신들이 급진적 토지 개혁을 했기 때문에 중농, 부농들의 지지를 상실하여 그들이 장제스에게 붙었다고 질타하며 장제스의 온건 토지 개혁을 벤치마킹했다.
3.1.2. 획기적인 공업 정책
국민당의 공업 정책은 1919년, 쑨원이 발표한 건국방략의 실업 계획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건국 방략의 실업 계획에서 쑨원은 외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기술을 도입하며 다음에 국가와 개인 경영의 절충안인 절제 자본이란 형식의 경제 개발을 내세운 바가 있다. 쑨원은 16곳의 항구와 15곳의 어업항, 내하, 연안 개항장 건설, 운하 건설, 철토 유통망 확립 등을 우선 과제로 보았으며 석탄 개발, 시멘트 공장 건설, 제철소 건설 등을 중요하게 보았다. 그리고 총 6단계에 걸쳐 식품, 의복, 건축, 교통 기관, 인쇄 공업 등을 건설하여 중, 경공업을 망라한 다양한 공업을 활성화하고 철도와 도로를 확충하였으며 이를 위해 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은 꽤나 선구적이었다. 장제스와 국민 정부도 쑨원의 구상을 계승하여 이에 입각한 경제 발전을 추구하게 된다.북벌로 형식적이나마 통일을 이룬 장제스는 공업화에 앞서 재정 금융 정상화를 비롯한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정부에 안정적 재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나 장제스 이전에 이걸 제대로 한 인물이 없는 게 중국이었다. 어쨌거나 1928년 전국 경제 회의, 전국 재정 회의가 개최되어 국민 정부는 전국 통계 위원회, 전국 예산 위원회, 국가 은행을 설립하고 화폐 통일[15] 등에 착수했으며 국가와 지방의 재정 수입 획분, 관세 자주권 확보, 수입세 인상, 이금 철폐, 통세 개설, 군비 감축[16] 등이 이루어졌다. 또한 중화학 공업과 에너지 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군대 현대화 계획도 이 시기에 잡혔다. 장제스가 처음으로 집중한 산업은 강철, 세사, 기계 제조, 화학 공업이었는데 이를 위해서 2억 위안이 필요했으나 당시 정부의 재정 규모가 4억 3천만 위안에 불과하여 도무지 조달할 수가 없었다. 1929년에 국민당의 경제 개발 계획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반장 군벌들이나 국민당의 반장 계파들이 잇달아 패퇴하면서 점차 경제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1929년 국민당 제3차 전국 대표 대회의는 민생주의에 입각하여 전국의 재정 행정을 통일하고 국가 행정 경비와 성의 행정 경비를 확정, 국세와 지방세를 획분하고 폐제 통일 원칙을 제기하였으며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경제 개발을 하고 이를 중앙이 보조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는데 여기서 결정된 사항들은 국민 정부에 의해 추진되게 된다. 또 이 시기의 <훈정시기경제건설실시강요방침안>은 이후 난징 십년의 청사진이 되었다. 여기서 국민당은 교통 개발 - 기본 공업 개발 - 치하, 개항, 수리, 관개, 간척, 이민을 국가의 물질 건설의 순서로 내세웠고 지방에선 지방 교통 사업 - 농림, 목축, 황무지 개간, 수리 - 도시 개량, 공용 위생 건설을 순서로 내세웠다. 또한 이를 위해 세수의 반을 물질 건설 비용으로 지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일련의 계획들이 실행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 우선 국민 정부는 수입의 절대 다수를 내전과 외채 상환에 쏟아붓고 있어 공업화에 돈을 들일 여유가 전혀 없었고 대공황이 중국을 덮치면서 중국의 경제가 막대한 타격을 입었으며 농촌의 재생산 구조가 붕괴되면서 경공업 기반의 중국의 공업까지 무너졌고 최대 공업 지대인 만주가 일본에게 넘어갔으며 이후 상하이 사변과 러허 사변 등의 일본의 침략 행위 때문에 중국의 타격은 막심했다. 설상가상으로 자연 재해가 겹치면서 국민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고 그야말로 중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기존 경제 세력들이 큰 타격을 입은 1930년대 역설적으로 국민 정부의 경제 통제 정책이 먹힐 절호의 기회였다. 대공황의 아수라장에 중국에선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환멸이 잇달았고 일본의 침략 행위 때문에 국방 경제 건설에 대한 요구가 드높았다. 국민당은 1935년 대공황 극복을 위한 은행 개혁에 착수했고 1935년 11월 폐재 개혁을 단행하여 개판이 된 물가를 안정화하고 개인 저축을 증가시키는데 성공했다. 폐재 개혁으로 국내 자본 유통이 정상화되면서 공업에 대한 투자도 재개되었다. 1936년에 가면 국민 정부의 채권의 신용이 회복되었고 이를 토대로 산업을 건설할 수 있었다.
흔히 난징 10년이라 불리던 시기인 1927~1937년까지 장제스는 온갖 군벌들,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면서도 중국이 트럭, 비행기 등 중공업품을 자체생산할 수 있게 만들었다.[17] 또한 쿵샹시의 조언에 따라 양쯔강 수력발전소를 건립해 전력생산에 나서기도 했고, 전국 도로망과 철로를 꾸준히 건설해 사회간접자본을 발전시켰다.[18]
장제스 정권은 내우외환 속에서도 중일전쟁 이전 10년의 기간동안 연평균 경제성장률 6%를 달성하며 꾸준히 산업화를 진행했다. 당시 미국 사절단이 "중국이 광대한 변화를 겪고있다"며 고평가할 정도.[19]
3.1.3. 대만의 공업화
국부천대로 대만으로 도주한 이후에 대만을 공업화시켜 선진국으로의 성장으로 기틀을 닦았다.3.2. 한계
장제스가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나를 맞았다. 그리고 귀찮다는 의사가 분명한 표정으로 중국에는 식인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개가 사람을 뜯어먹는 사진을 보여주자 다리를 떨기 시작하더니 신경질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시어도어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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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계획은 위대했고 성과도 엄청났으나 장제스의 능력만으로 정리하긴 상황이 너무 막장이었고 피땀흘려 이룬 성과는 일본의 중일전쟁과 공산당의 국공내전으로 다 날려먹었다.
소위 황금 10년이라 불리는 중화민국 번영기를 구가했던 장제스였지만 그럼에도 청나라 말기부터 내려오던 기근과 피폐한 농촌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건 장제스의 방법론 문제인데 국민당을 지지하는 향신과 중산층 세력들을 척지고 무리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국민당의 기반을 크게 흔드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장제스가 내세웠던 것이 상품 작물 재배 및 농업 기술 발전, 인프라 개발을 비롯한 온건한 방법으로 농민 소득을 확충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토지 개혁과 달리 눈에 확 보이는 정책이 아니므로 쉽게 고평가받을 수 없고 1931년의 대공황의 타격이 중화민국 전체의 상황인 것처럼 호도가 되면서 1936년 시점에서 중화민국 농촌 경제가 최고점을 찍었던 사실은 잊혀져 버렸다. 이쯤되면 재수도 더럽게 없다. 게다가 장제스가 발전시켜놓은 농촌과 도시는 일본군이 다 때려부숴버림으로 장제스와 중국인들은 국공 내전 시기에 정책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거기에 장제스 자신이 패배의 원인을 민생에 신경쓰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한탄하는 기록들이 발견되면서 결국 장제스는 지주와 자본가 눈치를 보면서 농민들 삶을 등한시해버린 지도자라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1980년대 이후로는 사료가 발굴되면서 재평가돼서 그런 단순한 평가는 사라지고 있다.
또한 공산당의 준동과 장제스의 전임 지도자들이 맘대로 빌려쓴 빚과 사사건건 들고 일어나는 군벌들이 방해물이 되었다. 1930년대엔 국가 수입의 70%를 채무 상환과 군사비에 쓰고 있었다. 빨리 경제 개발에 예산을 돌려도 모자랄 판에 엄청난 양의 돈이 공산당과 군벌 토벌에 들어갔으니 더 막장... 그렇다고 돈을 안 쓰면 얘들이 총 들고 장제스 잡겠다고 달려올테니 거기 돈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장제스도 인간이므로 그가 완벽한 정책만 펼쳤을 리도 없고 실책도 있다. 재정과 행정력의 부재로 중국 곳곳의 자연 재해와 기근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예 정책 실패도 있는데 경제 대공황 시절의 쿵샹시 주도의 경제 정책은 엄청난 타격을 가져왔다.[20]
중일전쟁 때 박살난 경제를 제때 수습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 실책이며 이는 국공내전 패배의 단초를 가져왔다. 중일전쟁으로 장강 삼각주 일대의 경제적 기반을 상실당하면서 금은본위제가 붕괴된 마당에 재정 적자를 이유로 화폐를 마구 찍어냈는데, 1936년 화폐 발행량의 100여 배를 넘는 1,890억 원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찍어냈다. 그 바람에 일본군이 계획한 중국 법폐를 대량 위조하여 중국 내 경제 혼란을 일으키려 한 계획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일본 위폐 작전 책임자는 중국은 실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나라다라는 비아냥급의 찬사를 남겼고, 일본의 계획은 쇼카쿠급 항공모함 1척의 건조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났다. 일단 중일전쟁 시기의 인플레이션은 훗날의 비난과 달리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주요 수입원과 물자 생산 라인이 죄다 파괴되거나 적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21] 부양해야 하는 인구는 증가해버려서[22], 문자 그대로 병사들 먹일 식량을 구할 수가 없어 전략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도 없을 정도로 열악해진 중화민국에서 초인플레이션은 당연히 이건 해결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 대혼란을 조기에 극복하지 못했고,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2차 내전의 포문을 열어버린 것은 결국 장제스 정권의 몰락을 앞당기는 방아쇠로 작용하고 말았다. 장제스는 전쟁이 빨라도 1946년 ~ 1947년까진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고 이기는 방식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이 차례로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었지 원자탄과 소련군을 콤보로 처맞은 일본이 영토를 한꺼번에 토해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국민당은 피점령지의 치안과 경제 회복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결국 혼란을 야기했는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행정력 복원과 경제재건이 필요했지만 장제스는 당명과제인 전후복구를 해서 지지기반을 먼저 다지는 대신 내전을 재개하는 길을 선택했다. 당초에 막강한 군사력으로 국공내전에서 우위를 차지할것으로 보였지만 중일전쟁으로 황폐화가 극심했던 중국 경제는 물가상승과 물자부족으로 파탄이 나고 말았다. 이는 지지층의 이반을 불러일으켜 결국 극도로 불안정했던 국민당 천하는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만다. 특히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실행한 금원권 개혁의 실패는 국공 내전에서 그의 패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국부천대 이후 뒤늦게 장제스는 공산당을 잡겠다고 토지개혁 및 물가 문제 등 경제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놓은 것을 후회하면서 대만에서의 경제성장에 주력했고 이는 어느정도 실효를 거두었지만, 대만섬 자체가 중국 본토와 비교하면 너무도 작았기 때문에 1950년대 말 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중공의 경제침체에도 권토중래를 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리고 국민당 정권의 부패는 심각했는데 특히 장제스의 인척인 공씨, 송씨 등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이들 4대 가족은 중국 공업력이 요단강 건넌 이후 중일 전쟁 수행을 위한 공업력과 자본 확충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이들의 세운 공도 많긴 하지만 이들이 너무도 부패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쿵샹시의 가문은 '양자공사'를 통해서 양쯔강을 통한 수운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고 중일 전쟁 중에도 막대한 돈을 뿌리며 미국까지 자식들을 신혼 여행 보내는 짓으로 구설수에 올랐다.[23] 쑹씨 가문은 미국의 원조 물자를 빼돌려서 막대한 치부를 했다. 또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점령지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경제 안정화를 위해 실시한 화폐 개혁에 있어서 이들이 끼어들어 환율 장사를 하는 바람에 만주와 중국 동해안 지역에 막대한 빈곤을 초래하였다.[24]
3.2.1. 채권 경제의 한계와 경제적 실패
장제스는 대공황시기 투자자들에게 채권을 팔아 재원을 조달했다. 하지만 1933년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하고 서부 주들의 정치적인 요구에 의해 높은 가격에 은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기존 화폐를 신뢰하지않고 은을 보유하던 상하이의 자본가들은 국민당의 채권을 구매하지않고도 미국에 은을 팔아 확실한 수입을 벌게 되었다. 그러자 1934년 1월부터 8월까지 1억 7천만 달러의 은이 중국을 빠져나가자 중국경제가 대참사에 빠지고 장제스의 군비증강도 둔화되었다.4. 군사 분야
4.1. 북벌 시절
장제스는 훗날의 초라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쑨원 밑에서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소련군 군사 고문들과 혁명군을 이끌던 시점에서는 청렴하고 규율이 잘 잡힌 군대의 대명사로 중국인들 사이에서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특히 광둥 군벌 천중밍과 대결하던 시점에선 농민과 노동자들이 앞을 다투어 국민당 군대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철도 노동자들이 국민당 수송을 돕는 등 훗날의 부패할 대로 부패한 국민당과는 가히 천지차이었다.문제는 장제스가 소련 고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빠른 세력 확장과 중국 통일을 위해 군벌들을 급격히 흡수하면서 시작되었다. 바이충시, 리쭝런, 탕셩즈, 탄옌카이 등의 군벌들이 이때 국민당에 합류했는데 황푸 군관 학교에서 키운 병사들과 달리 이들의 기량이 영 좋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제스의 군사 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은 이렇게 급속도로 확장시키면 군사들의 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우려를 표했지만 장제스는 질보다 양을 중시했기 때문에 그의 우려는 무시되었다. 이후 장제스는 여러 군벌들과의 이합집산, 매수, 담판, 획책을 통해서 북벌을 수행했는데 당시 중국의 군벌들은 수많은 소규모 군벌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봉건제와 같은 형식으로 한 군벌이 약해질 것 같으면 그 휘하 군벌들이 우르르 상대방에 붙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장제스는 이러한 상황을 기가 막히게 잘 이용하여 자신을 치려는 자들의 수족을 매수해 조지는 방법을 자주 취했다. 장제스와 맞섰던 천중밍, 장쭝창, 쑨촨팡, 우페이푸, 장쭤린, 장쉐량, 펑위샹, 옌시산, 차이팅카이, 천지탕, 바이충시, 리쭝런 등이 이런 장제스의 계략에 걸려서 하나같이 피를 봤다.
특히 광둥 군벌인 천지탕은 점쟁이에게 장제스와 싸우면 한쪽이 배신으로 날개가 꺾여서 망할 것이란 점괘를 듣고 신나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이 시작되자마자 그의 휘하의 공군 지휘관들이 전부 다 전투기를 몰고 난징으로 몰고 가서 장제스에게 붙었고 육군 지휘관들도 전부 다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하거나 홍콩으로 토셨다. 점괘에서 말한 날개가 꺾여 작살나는 건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국 천지탕은 홍콩으로 달아나야했다.
4.2. 1930년대 초반
장제스는 이러한 계략을 통해 위안스카이 사후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을 마침내 통일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으나...장제스가 빠른 통일을 위해 썼던 방법이 그의 목을 죄게 되었다.통일 이후 300만에서 최대 1천만에 달했던 국민당군은 대다수가 장쉐량,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등 군벌 출신의 오합지졸들이었다. 1929년의 '편견 회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고 더불어 군벌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최되었다. 당연히 군벌들이 반발하여 회의는 흐지부지되었고 이 반발은 반장 전쟁이라는 대규모 내전으로 번졌다.
반장 전쟁을 진압한 후에도 19로군, 천지탕, 리쭝런, 바이충시 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고 공산당의 대장정 중에도 지방 군벌들의 태업 행위가 장제스를 방해했으며 마침내는 시안 사건이라는 쿠데타까지 당했다. 이런 문제는 2차 국공 내전의 패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 외에도 펑위샹, 왕징웨이 등은 장제스를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광시 군벌 리쭝런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옌시산(염석산, 閻錫山)은 "산시(山西)성 먼로주의"를 선포하고 반독립 정권을 구축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북벌 이후의 편견 회의로 군벌들을 정리하려 했고 초공 작전을 구실로 군벌군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군벌들을 약화시켰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지방 군벌들의 영역에 대장정 중인 마오쩌둥을 잡는다는 구실로 중앙군을 몰고 눌러앉아 지방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장제스는 이렇게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켰지만 이에 비례하여 군벌들은 장제스를 더욱 믿지 않게 되었고 적개심을 품게 되었단 것이다. 이는 시안 사건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백만 대군이 있다고 해서 이들이 현대식 무기로 잘 무장한 군대는 아니었고, 오히려 어제까지만 해도 비적질을 하던 도둑떼도 섞여 있고 제대로 된 무장도 못 갖춘 일이 허다했다. 중국의 공업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이들을 잘 무장시킬 수도 없고 훈련이나 규율은 개판이었다.
장제스는 중국의 헬게이트 상황을 타개할 좋은 청사진을 내놓아왔는데 군사 분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해 소련, 미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최신식 무기와 공장, 군사 고문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유럽식 중앙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플라잉 타이거즈로 대표되는 미국의 도움으로 그럴듯한 공군을 창설하는데 성공했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과 히틀러의 지원으로 독일식 중앙 사단을 양성했으며 상하이 지역에 강력한 토치카 방어선을 꾸려서 중일 전쟁 이후 2차 상하이 전투의 우쑹 상륙 작전에서 일본군을 개발살내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도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뛰어난 고문을 파견하는 한편 막대한 차관과 무기를 제공하여 장제스를 도왔다.[25]
외국의 도움을 활용한 장제스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고작 2년도 못되었다. 1935년이 되어서야 장제스는 군비를 증강할 수 있었는데 일본은 1937년에 쳐들어왔다.
4.3. 중일전쟁
"
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년간 장제스는 20세기 역사에서 대단히 무능했던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리고 이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를 좀 더 호의적인 시각으로 볼 이유가 있다.
엄청난 악조건 속에서 나라를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분투한 유능한 지도자로 말이다. 최근의 전기 작가들, 특히 전직 미국 외교관 제이 테일러 같은 사람들은 장제스의 결점보다는 그의 훌륭한 자질을 강조하고 그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환경, 특히 재앙에 가까운 일본의 침략 직후에 분투했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26][27]
리처드 번스타인
리처드 번스타인
독소전쟁 시기 소련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었다면, 중일전쟁 시기 중국에는 장제스가 있었다. 중일전쟁은 장제스가 눈부신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장제스의 실책은 전쟁 초반 중국군 주력을 상하이에서 날려버린 일 정도에 국한되어 있고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면서 항일 항전 의지를 불살랐다. 장제스의 라이벌이었던 왕징웨이 등이 일본에 붙어버리고 자신들의 기반을 고수하려는 이기적인 군벌들의 뒤통수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의 공이었다.
우선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맞서싸울 수 있는 기본적인 전투력을 마련했던 것은 독일, 소련의 도움을 받은 장제스의 군사 정책 덕분이었으며 만주를 거저 주워먹듯이 했던 일본이 상하이에서 수 만 단위의 사상자를 내며 고전했던 것도 장제스가 항전 의지를 보이고 장제스가 미리 상하이를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자신의 권력 기반인 독일식 사단과 중앙군을 아낌없이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상하이 함락 이후 화북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강요했을 때 주화파인 왕징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 강경파 군벌들까지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낙담했을 때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침략자에 맞서 굴복하는 것은 인민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부하고 일본에 맞서기로 결정한 것이 바로 장제스다.
상하이에서 장제스는 중국군의 주력 80만명을 날려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덕분에 중국 경제의 중핵인 중국 동해안과 화북, 화중을 날려야 했다. 그러나 충칭으로 정부를 옮기면서도 장제스는 중국군이 일본군에 포위 섬멸되어 털리는 일을 막아냈고 결국 충칭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항전을 지휘했다.
장제스가 중일전쟁에서 저평가를 받는 데에는 공산당과 일본뿐만 아니라 스틸웰의 모함도 큰 역할을 했다. 스틸웰은 장제스가 군벌만 내세우고 공산당 토벌에만 주력했으며 물자를 쌓아놓고 방관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장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중국군은 밀리면서도 타이얼좡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창사에선 세차례나 일본군 공세를 격퇴했다. 우한 점령 이후에는 바로 난징 등지에 반격을 시도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일본군이 충칭을 먹지 못한 이후는 중국군이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치열한 저항을 해서이지 중국군은 맛이 갔는데 일본군이 등신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우한 점령 이후 중국 전선은 충칭, 뤄양 등지를 일본군이 찔러보고 중국군이 깊숙히 그들을 유인하여 기습하여 격퇴하는 일의 무한 반복이었다.
중일전쟁의 중국군에 해가 된 것은 장제스가 아니라 스틸웰이었다.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 이전에 일본군의 공세를 눈치채고 대비를 주장한 것도 장제스였고 허약한 일본군이 반격할리 없다고 그걸 씹고 장제스의 예비대를 버마로 보내버린 것이 스틸웰이다. 스틸웰의 훼방만 아니었어도 장제스의 반격 작전은 늦어도 1944년에 시작됐다. 이후 장제스는 마침내 베이징, 난징, 톈진, 상하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을 다시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중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중국이 세계 대전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UN 상임이사국 진출에 한 몫 했다.
다만, 독재자들히 흔히 그렇듯이[28] 장제스 또한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이상한 판단을 내린 경우가 적지 않다. 이치고 작전쯤 가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장제스가 휘하 장병들에게 후퇴 없이 결사항전을 할 것을 명해서 피해를 키운 경우도 있었고 2차 국공내전에서 그의 판단은 이해가 안갈 수준이다. 자세한 내용 후술.
4.4. 국공내전
"총사령관이 저지른 거대한 규모의 실패는 비슷한 규모의 성공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조너선 펜비
조너선 펜비
근대 중국의 국부이자,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장제스는 여기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면서 대륙을 날려먹었다. 중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UN 상임이사국 지위까지 얻은 장제스는 이제 최후의 숙적인 공산당을 회치기 위해 준비 중이었는데 장제스의 그동안의 문제점들의 포텐이 다 터졌다. 부정부패로 인한 경제 위기, 장제스가 그간 애용해왔던 인생은 한방 전술에 따라 대책도 없이 공산당이 있던 만주를 쳤던 것이며 군벌들간의 불화이며 기강이 형편없는 군사들이 당하면서 줄줄이 포위 섬멸되거나 마오쩌둥 편에 붙었다.
이로 인해 장제스는 대륙의 지배자에서 대만 섬으로 피눈물 흘리며 달아나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장제스의 운이 없던 것도 없던 것이지만 장제스 본인이 지은 실책도 만만치 않다.
자세한 내용은 국공내전 문서의 국민당의 패배원인 항목 참조.
5. 중국의 평가
"장제스는 자신의 신념에 투철한 용기있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마오쩌둥
마오쩌둥
장제스와 적대했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당연히 악평 천국이었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했을 때,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사에서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장제스의 이름 앞에 " 국민당 반동파의 두목이자 중국 인민의 공적(国民党反动派的头子、中国人民的公敌)"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으며, 대륙에서 만들어진 창작물들에선 대부분 악역으로 나온다.
물론 공산당 인사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지 민간에서는 난징 10년의 번영을 기억한 탓인지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로 민생이 나락까지 떨어진 1950년대엔 장제스 정권이 나았다는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나와서 기겁한 마오쩌둥이 반우파 투쟁을 벌여 지식인들을 때려잡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도 아닌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은 외국인들에게 난징 시절의 경제적,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향수를 떠들어 주위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만약 일반 인민이 그딴 소리했다간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고 맞아 죽을 발언들이었으니...
그래도 중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니만큼 알게 모르게 야심만만하고 비범한 기질을 지닌 당대의 호걸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다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국력 차이가 압도적으로 기울어지고 나서는 역으로 장제스 재평가에 중공 정부로서도 큰 부담이 없어져서 지금에서는 공산당 역시 장제스를 재평가하고 있다. 예전에는 공산당의 정적이었던 장제스를 보았다면, 현재는 중국사의 정통성을 가진 정권의 입장에서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던 장제스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비단 장제스 뿐만 아니라 국민당에 대한 평가가 역시 후한 편인데, 최근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국정제에서 검정제로 바뀌면서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중일 전쟁 단원을 가르칠 때 국민당 정권이 항일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고, 과거 중국의 영화에서는 중일 전쟁에서 팔로군을 위시한 공산당의 역할만 강조되었다면 2010년에 나온 영화 첩혈고성이나 2011년에 개봉한 진링의 13소녀에선 용맹했던 국민당군의 중일전쟁 때의 활약도 조명되었다.[29]
사실 장제스 집권기 동안 중국 국민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야당은 관제야당만 허용되는 등 대만이 정치제도로 본다면 중국과 크게 다를바없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국가였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중국내 고위인사들이나 경제전문가들이 개혁개방 이후로 경제정책을 짜면서[30] 대만과 싱가포르의 경제정책을 많이 참고했다.[31] 사실 이런점에서 보았을 때 21세기 중국은 마오쩌둥이 꿈꾸던 중국[32]보다는 오히려 장제스가 꿈꾸던 중국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
국부천대 전 수도였던 난징에는 지금도 총통부가 보존되어 있고 장제스의 집무실도 장제스의 초상화와 청천백일기와 함께 멀끔히 전시되어 있다. 난징 총통부 문서 참고.
2차 대전 이후 중국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던 후난성 즈장 항일 전쟁 기념관에서는 항일 전쟁 영웅으로 장제스의 사진과 청천백일기가 그럴듯하게 전시되고 있다. 덤으로 미국인이 주축이 되었던 플라잉 타이거즈 기념물도 있다.
중국(대륙)인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인물이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고 저장성 닝보에 있는 그의 생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33] 사실 마오쩌둥에 맞섰던 인물이기에, 그를 높이면 그를 이겼던 마오쩌둥이 더 부각되는 효과도 있고. 장제스 평전의 저자인 조너선 펜비가 중국을 방문하여 장제스 생가의 안내인에게 장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대학원생이라던 안내인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던 중대한 사람"라고 대답하더니 머뭇거리다가 "마오 주석처럼요."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오늘날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보면 얼마나 장제스에 대한 전향적인 평가인지 생각해볼 만한 일화이다.
한편 장제스가 재평가되는 데에는 대만의 범록연맹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존재한다. 90년대 이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이나 하나의 중국에는 동의했지만, 90년대 이후 중화민국이 민주화되고 대만에서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민주진보당 등의 범록 연맹이 유력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200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공산당이 그토록 적대해왔던 중국국민당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국민당에서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인 장제스를 중국 대륙에서도 재평가함으로써 하나의 중국에 반대하는 범록연맹을 현재의 중국 국민당과 함께 견제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사실 중국사에서는 새 왕조가 집권하면 전임 왕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왔다. 이는 장개석 또한 마찬가지로 자신의 북벌로 전복된 북양정부의 수장들에게 나중에 여러가지 직위를 추증하거나 수여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중국 역시 현임 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전임 정권에 향수를 품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 대만의 평가
"역사에서 결코 일시적인 성공과 실패로 영웅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난세의 효웅들 가운데도, 일찍이 승리한 적이 있고 일시적으로 세력을 얻기도 하였으나 국가와 인민에게
심각한
재난을 안겨줌으로서 결국 만인의 욕을 듣는 결말을 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찍이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고 실패하기도 했지만, 심지어 그것이 심각한 실패라고 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도리어 국가를 위해 인민을 위해 진정한 공헌을 하고, 인민에게 환영받고 세상 사람들의 찬양을 받았다. 장제스는 의심할 바 없이 후자에 속한다."
랴오부더[34]
대륙 통치기와 달리 대만 통치 시기에는 내전도 없고 타이완에 별 다른 세력도 없어 치안도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비교적 통치체제가 안정적으로 굴러갔다. 그래서 중국 대륙에 있을 때보다 더욱 강력한 철권통치가 시행되었다.랴오부더[34]
미국과 소련의 경험을 본받아 장제스와 장징궈가 진두지휘한 총통부-국가 안전 회의(NSC)-국가안전국(NSB) - 국방부 군사정보국/법무부 조사국/내정부 경정서/국민당 총정치부 직통 체계는 반체제 세력에 대하여 미국의 CIA처럼 응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연히 언론의 자유는 보장되지도 않았고, 중공과 평화회담, 민주주의, 민생 등에 대해 요구하면 당장 투옥되었다.
아울러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국가에서 총력전을 명분으로 중국국민당과 중국 청년당과 중국 민주 사회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을 모조리 탄압했으며, '공비의 반란을 토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발효했다. 전국적인 총선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중화민국 사법원의 대법관들을 움직여서 헌법 재판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국회 격인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총선거를 중지했다. 당시의 중화민국 헌법에 따르면, 국민 대회에서 총통을 간접 선거로 선출했다. 1940년대에 중국 대륙의 선거구에서 남녀노소 인민들의 투표로 선출한 국민 대회와 입법원과 감찰원의 국회 의원들은 종신직으로 일했으니,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장제스는 한평생 총통을 할 수가 있었다. 당연히 중앙 정부의 선거 제도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보궐' 선거였다. 대만에 무협지가 많이 나왔던 이유도, 수많은 문인들이 독재에 염증을 느껴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무협지를 썼기 때문이다.[35]
또한 그는 본성인을 차별하고 본성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의사는 철저히 무시와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민주화 이후 대만 정치 양극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중화 민족주의를 우선시한 결과 민주화 이후 범람연맹은 상당한 친중공 성향으로 기울었고, 민주화 운동 진영은 대만 독립 운동에 기울었다.
타이완에서는 그의 행적을 어느쪽에 관심을 보이냐에 대해서 달라진다. 경제 성장을 위시로 한 업적을 강조하는 쪽[36]은 일제의 잔재를 뿌리치고 공산주의의 손에서 대만을 수호하며 경제를 활성화시켰다면서 치켜세우는 반면, 독재 정치의 폐해를 강조하는 쪽[37]은 계엄령을 내리며 공포 정치를 단행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26년간이나 혼자서 다해먹은 독재자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다만 국공내전에서 패배당한 뼈아픈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서 토지개혁 등 분배정책은 철저하게 진행했고 국영기업과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정책을 진행했는데 이는 큰 성과를 거두었고 대만의 고도성장이 진행되면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만은 연 평균 8%대의 고도성장이 진행되었다. 다만 똑같이 경제성장을 지향했기는 했지만 장제스의 대만 경제 정책은 중소 기업 다수였던 특성도 있고, 대륙에서 물가통제에 실패한 뼈아픈 경험으로 인해 대만통치 시에는 고금리 정책을 펴는 등 안정을 더 강조했다. 그래서 국가주도의 경제개발은 비슷하지만 비교적 안정 지향이었던 장제스, 비교적 성장 지향적이었던 박정희의 경제 정책은 차이가 있지만 고도성장을 이룩하였던 점에서 많은 비교-연구 대상이 되기도 한다.[38]
다른 한편으로는 대만으로 쫓겨간 이후 이미 국력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대만 정체성을 끝까지 무시하고 하나의 중국, 중화민국 정통론에 기반한 반공 외교를 밀어붙여 외교 관계가 줄줄이 소멸, 고립을 자초했다는 비판도 있다. 또한 계엄령 기간 동안의 대만이 항상 프리덤 하우스의 (측정기간 이후로) 자유에 관련된 수치에서 꾸준히 최하위 점수를 받은 점을 보면, 대륙보다야 상대적으로는 덜하다고 해도 결국 민주주의를 저버린 철권통치였다는 점도 그가 비판받는 요지 중 하나다.
장제스 동상에 계란을 던지는 대만인 |
한편 장제스가 비판받는 현상에는 대만의 탈중국화 및 독자성 강화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과 대만을 별개로 생각한다면 장제스가 중국에서 이룬 업적[40]들은 사실 중국과는 구분되는 대만에서는 큰 의미가 없고, 대만에서 장제스가 이룬 업적으로 거론되는 것들, 예를 들어 대만의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 발전은 본성인을 공공연히 차별하고 학살한 '침략자'로서 달성했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이유 때문에 양안관계에서 희한하게도 장제스는 현대 들어와선 오히려 대륙에서 더 높게 평가받고, 대만에선 격하되어가고 있다. 대륙에서야 냉전기의 살벌한 체제대립도 실질적으로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고, 그 시대 국공대립의 당사자들이 늙어 죽으면서 오히려 현대와서 민족주의, 경제성장, 항일 투쟁 같은 점은 갈수록 오히려 공산당이 은연중에 장제스의 계획이나 비전 등을 참조한 면도 부각되는 반면, 대만에서 장제스에 대한 추종은 전적으로 중화민국 정통사관에서 근거하는데 문제는 이 중화민국 정통사관 자체가 현대 대만에서는 급격하게 위축되어가고 있다. 대만과 중국이 완전히 별개라는 입장에서 보면, 지금 시대의 대만인들에게 있어서 장제스가 중국 본토에서 항일을 열심히 했네 이런것은 큰 의미도 없이 그냥 사람많이 죽인 독재자라는것.
특히 장제스는 대만 계엄령을 내린 후 대만 내 본성인들과 원주민들 문화를 탄압하고 본토 중국화시킴으로써 원주민 문화와 토착 객가인(본성인) 문화가 말살되기도 하였고, 현재까지도 완전히 복원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학술적으로 '문화적 제노사이드'라고 하는데 비슷한 사례는 한반도 일제강점기 때 조선어 탄압과 창씨개명도 문화적 제노사이드로 분류된다. 일제의 대만 통치는 한반도보다 훨씬 온건한 반면, 냉전 시기 독재 강도는 대한민국 역대 독재정권보다 더 권위주의적이였기 때문에[41] 대만 본성인들 입장에서는 장제스가 되려 일제보다 더 폭압적인 식민자로 느껴질 수 있다. 장제스가 이러한 정책을 편 이유는 대륙수복에 대한 집착 때문이였는데, 그러려면 '대만인'이라는 정체성을 최대한 없애고 '중국인'(중화민국 국민)정체성을 강하게 심어줘야 했기 때문.
국부천대 이전 여전히 대륙에 살던 '중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공산당 치하 대륙을 해방과 수복의 대상으로 보던 세대는 실시간으로 늙어 죽어가는 반면 젊은 대만인은 엄연히 실질적인 '외국'으로 인식하고 자랐던 중국 대륙 본토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가지기 힘들다. 현대 대만의 국민당도 이런 세대 변화에 따라서 젊은 당원들은 이런 시시콜콜하면서도 대중 유권자에겐 별로 와닿지도 않는 정통성 문제보다 당장의 경제문제나 상대 민진당의 실책 같은 점을 강조하는 편이다.
따라서 장제스의 현대 역사적 위상은 냉전 당시 장제스를 국부로 추앙하고 떠받들던 (혹은 그러도록 강요당했던) 대만인들은 중정기념당도 '민주주의 기념관'으로 뜯어고치는 등 오히려 갈수록 격하하는 반면 항일 민족주의자로서 장제스를 부각하는 중국공산당이 긍정하는 희한한 변화를 겪고있는 중이다.
7. 총평
역사는 반드시 평결이 선언되도록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인생 내내 그의 능력과 양심에서 최선을 다해 의무를 다하기 위해 분투한 사람은 평결에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다.
호르티 미클로시
호르티 미클로시
공산당의 마오쩌둥에게 패했기 때문에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자라는 오해를 샀지만 장제스와 그의 시대는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다. 당시 장제스가 중국을 운영했던 시기는 매우 험난한 시대였다. 안으로는 신해혁명 이래 군벌들의 난립으로 분리된 중국을 통합시키고 공산당의 도전을 격파해야했으며 바깥으로는 각국과의 외교 관계를 조율해 청나라 이후로 침체된 중국의 위상을 재정립시키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야만 했다. 흔히 장제스의 시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당시 국민정부가 자신의 정권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막아내기에도 벅찼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공산당의 공격에 맞서자마자 국민당 내부의 문제를 해결해야했으며 그 다음으로는 곧바로 일본의 침략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냐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1937년 일본의 파상 공세 앞에서 중국이 어떤 길을 나아가야 하냐를 결정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2차 상하이 사변, 허베이, 왕징웨이 괴뢰 정권, 버마 함락으로 인한 외부와의 고립, 엄청난 인플레이션, 공산당과의 불편한 협력 등의 난제가 있었고 그 난제들로 인한 혼란을 개선시키기도 전에 중일 전쟁에서 승리를 맞이하면서 공산당과의 관계를 청산해야만 했다. 이러한 난제를 결국에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결국 작은 섬에 웅거하는 결말을 맞았지만, 자본주의적으로 부강해진 중국이라는 청사진만큼은 수십 년이 지난[42] 21세기 중국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43] 어찌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지도자라고도 할 수 있다.[44]
장제스의 청사진은 결국 그걸 실행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중단되었으나[45] 그러한 청사진은 충칭에서 8년의 장기 항전을 이루고 타이완의 기적이라고 할만한 고도의 경제 성장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장제스는 쑨원이 계획하던 혁명의 청사진을 완성함으로서 청나라를 대체할 새로운 국민 국가를 창설해냈으며 내셔널리즘을 통해 하나의 중국의 기원을 닦았고, 바깥으로는 중국을 상임이사국으로 만들고 일본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서 현대 중국의 개척자라는 표현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업적을 이루었다. 어떻게 보면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을 가리켜 평가한 공칠과삼은 마오쩌둥이 아니라 오히려 장제스에게 어울리는 평가라고 봐야 한다. 마오쩌둥도 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는 공을 완전히 깎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과가 큰 데에 비해[46] 장제스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오늘날 장제스가 비판받고 마오쩌둥이 여전히 신격화되고 있지만, 그것은 역사상에서 그가 걸어간 길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체제의 차이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마오쩌둥이 레닌의 건국 역할과 스탈린의 대조국 전쟁 승전의 역할을 동시에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이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진다. 반면 민주주의가 정착된 대만에서는 장제스에 대한 비판이 자유로우며, 또한 장제스는 해석하기에 따라 대만에 기여한 게 별로 없이 학살과 탄압만 반복해온 독재자로도 볼 수 있다. 더불어 대만에서는 양안통일과 대만 독립이라는 정치적 난제까지 겹쳐, 장제스가 역사 속에서도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통치 대부분의 기간을 독재로 일관하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다. 1937년 12월에 중화민국 헌법 반포를 준비하고 있었고 중일 전쟁 기간에도 각지의 의견을 모은 국민 참정회가 존재했으며 1947년의 입법원 선거는 전국에서 실시되었다는 점을 들어 장제스 개인이 민주주의에 무심한 인물은 아니었다고 옹호하는 시각도 있으나 2.28 사건, 백색 공포를 비롯해 국민과 반대파를 폭력으로 탄압하고 학살한 과오는 결코 지울 수 없다. #
[1]
그러나 군벌과 봉건적 사고를 타파한 것은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정권이 아니라 장제스와
중국국민당 정권이었다.
중공은 오히려 다른 형태로 악습을 키워나가고 지금 현재진행형이다.
[2]
군벌들로 분할된 중국, 일본의 침략에서 지도력을 행사할 권위의 부재 등등... 끝도 없이 많다.
[3]
사실 중국의 장제스 재평가는 서양의 장제스 재평가보다 그 시기가 앞선다.
[4]
대표적인 것이 장제스 정권의 개혁 정책과 난징 10년의 경제 성장과 근대화,
중일전쟁 중의 분투다.
[5]
실제 그의 시대에 티벳 병합 등 오늘날 중국 영토가 최종 확정된다.
[6]
물론 1936년의
2차 양광사변을 비롯한 반란 시도는 있었지만 이들은 국민당이나 국민 정부를 부정하진 않았다.
[7]
물론
천중밍이 연성자치론을 주장한 것은 국민당의 무리한 북벌이 광둥인들의 삶을 파괴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8]
물론 여기엔 공산당의 상상을 초월하는 막장 경제 정책과 공포독재가 배후에 있었지만.
[9]
다만 이는 대만으로 쫓겨나는 와중에 이거라도 챙기지 않으면 중화민국의 정통성이 땅에 떨어질 것이 뻔히 보여서 그런 점이 컸다.
[10]
계엄령은 국부천대가 이루어진 1949년부터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의 집권기간 중인 1987년까지 38년간 이루어졌으며, 장제스는 26년차인 1975년에 사망했다.
[11]
일본 역시 압제자긴 했으나 장제스가 2.28 사건을 일으킨 것과 같은 본성인을 향한 학살은 저지르진 않았다.
[12]
범록연맹 측에서는 장제스가 학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범람연맹 측에서는 국민당 차원의 잘못은 있으나 장제스는 이 일에 대해 몰랐을 확률이 높다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
[13]
간단히 설명하자면 중국이 일본보다 돈을 더 잘 갚을 수 있는 나라라고 평가받았다는 뜻.
[14]
다만 중원대전, 양광사변 등의 내전과 중일전쟁의 발발로 시행되지 못하여 이후에 장제스가 더욱 까이는 단초를 제공했다.
[15]
당시 중국은 지방마다 화폐가 달랐다. 안타깝게도 장제스마저 화폐 통일은 이루지 못하고 공산당 정부가 들어서서야 통일이 이루어졌다.
[16]
하지만 자기 기반 줄인다는데 반발한 군벌들이 난동을 부리면서 중국 전역을 휩쓴
반장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17]
차량과 비행기 등은 독일과 합자회사의 형태로 생산했다.
[18]
이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건설되었다는 한계가 있다.
[19]
출처: 조너선 펜비 저, <장제스 평전>
[20]
당대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중국과 미국간의 은본위 문제가 얽힌 것도 있다. 관련해서 쑹쯔원과 쿵샹시의 대립은 정책상의 문제로 시작되었다. 혹자는
금본위제도가 안정적이었다면 중국 경제가 그렇게 파탄나지 않았다고도 본다.
[21]
공업력의 90% 이상 상실. 전쟁 전과 비교해서 철강 생산량 1%.
[22]
일본 점령지에서 황폐한 충칭으로 5천만 ~ 9천만의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23]
이 때문에 빡친 장제스가 쿵샹시를 잘라버리고 사이 좋지 않은 처남인
쑹쯔원을 다시 재정 부장에 앉혔다.
[24]
다만 이들의 부정부패를 국공내전의 패배의 원인을 찾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다. 왜냐하면 이들의 부패와 국민당 정권의 몰락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 당대 공산당의 프로파간다로 사용된 적은 있다.
[25]
사실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이전까지 소련은 장제스와 국민당이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는 외국이었다.
[26]
각각 레닌과 쑨원의 뒤를 이은 스탈린과 장제스는 비슷한 시기에 집권하여 경제 개발의 초석을 닦았고, 중일전쟁에서 장제스는 중국에서 스탈린과 같이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승리하여 각각 자신들이 통치하는
나
라를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당대에는 욕을 먹고 격하되었을지언정 결국은 역사에 의해 재평가를 어느정도 받게 된다.
[27]
단 차이점이 있다면 스탈린의 독재는 장제스의 독재보다 훨씬 강압적이였다. 또한 장제스에 비하면 스탈린의 통치 환경이 더 조건이 좋았다. 소련 내의 스탈린의 정적들은 적었던 반면 중국 내의 장제스의 정적들은 중국공산당과 잔존 군벌 등 강력한 세력들이 남아있었다. 스탈린이 지금도 "당시에는 필요악이었지만,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는 극단적인 평을 받는 것에 비해 장제스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이 더 우세하다. 다만 스탈린의 경우에도 비록 중앙에서는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졌으나, 지방에서는 부패를 일삼고 중앙의 통제를 받지않는 세력이 허다했고(이를 해결하려다 반대파 숙청과 합쳐저 대폭발을 일으킨 것이 대숙청이다.), 독일군은 적어도 소련이 맞서야 했던 육군과 공군에서는 일본군과 차원이 다른 상대임을 고려해야 한다.
[28]
가령 1940년의 스탈린이나, 유럽 전선 막바지의 히틀러처럼
[29]
이는 한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남한과 북한 사이의 긴장감에 극에 달하던 시절에는
금지어 취급을 받다가 남북간 차이가 넘사벽으로 벌어진 지금에서야 재평가되는 모습과 흡사하다. 물론 김일성, 박헌영 같은 일부 인사는 여전히 욕만 먹지만 이는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문제로 인해서이다. 다른 사회주의 인사들은 비중은 작지만 독립운동 행적이 역사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다.
[30]
물론 1980년대 후반 이후로 대만도 민주화 되었지만 개혁개방 시작 시점에서는 대만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당독재국가였으니까.
[31]
물론 환경의 차이는 있기 때문에 그대로 본뜬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도 지역별로 다른 경제모델이 적용되고 있는것도 이 때문이고.
[32]
마오쩌둥은 지금의 중국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덩샤오핑을 죽기 전까지 계속 견제했다.
[33]
물론 복원된 것이다. 원판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개박살났다.
[34]
중국의 작가이다.
[35]
대만 성인 영화 관련 다큐에 의하면 대만에서는 "
반공,
반일만 한다면 어느 정도 검열은 통과했다."고 한다. 그래서
BDSM에 가까운 이야기도 역시 반공 영화로 탈바꿈해서 상영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영역은 아니지만 대만 영화 중 상당수가 "국내 상영용"과 "해외 수출용"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36]
주로
범람연맹 지지자
[37]
주로
범록연맹 지지자
[38]
특히 장제스와 박정희를 비교할 때 가장 대표적인 요소는 당시 인프라다. 타이완은 국공내전의 피해를 입지 않았던 곳이므로 20세기 초반에 건설된 산업 시설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성장에 신경쓸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은 6.25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쑥대밭이 되어서 산업 인프라를 재건하는 것부터 집중해야 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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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일어났던 적도 있을 정도면 말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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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통일과
중일전쟁 승리,
하나의 중국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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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3당훈정 드립치며 야당 자체도 허용하지 않았고 사실상 의회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했다. 반공을 내세우면서도 쑨커의 소련식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국민당 일당체제를 유지했다. 국민당에 반대하는 언론들도 금지되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그들과 대립하는 민주당계 야당을 탄압했을지언정 아예 금지하지는 않았고, 탄압을 많이 받으면서도 반독재 언론들이 활동은 했다. 게다가 한반도 일제 강점기와 달리 대만일치시기는 훨씬 온건한 통치였기에 일제 시대 때도 유지는 되었던 대만인들의 토착 문화가 장제스 시기에 말살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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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동안 중국은 인구 규모에 비해 매우 제한된 정치적 영향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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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제스 평전 - 현대 중국의 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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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궤멸 직전에 터진 일본의 침공과 장쉐량의 시안 사건, 미국에서 참모장으로 파견된 스틸웰의 내부 트롤링, 2차 국공내전 직전 측근
다이리의 허무한 죽음과 전쟁 초기 마셜과 트루먼의 중재로 만주로의 진격이 좌절되는 등 운도 따르지 않았다. 물론 이 기간동안 부정적 평가 문단에 서술된 본인의 실책도 적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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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헌법 반포가 1947년 1월 1일. 중화민국의 타이베이 천도가 1949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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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하나만 봐도 5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중국의 문화적 역량의 실추의 원인으로 꼽힐 정도로 큰 실책이다.
대약진 운동도 물론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