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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1:24:01

최영의

오야마 마스타츠에서 넘어옴
<colbgcolor=#000><colcolor=#fff> 최영의
崔永宜 | Choi Yeong-Eui
파일:external/1.bp.blogspot.com/sosai-oyama.jpg
귀화 후
성명
오야마 마스타츠
大山 倍達 | おおやまますたつ
Ōyama Masutatsu
이명 최배달(崔倍達)[1]
마스 오야마[2]
Mas Oyama
출생 1923년 6월 4일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 125-18[3]
(現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용지면 와룡리)
사망 1994년 4월 26일 (향년 70세)
일본 도쿄도 주오구
본관 전주 최씨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4]
직업 무도가
활동 1953년 ~ 1994년
신체 173cm, 85kg[5]
학력 와세다대학 (체육학과 / 중퇴)
배우자 오야마 치야코 (1926년 12월 10일 ~ 2006년 6월 6일)
홍순호 (1947년 / 1948년 ~ )
자녀 3남 3녀[6]
삼녀 오야마 키쿠코 (1971년생)[7]
장남 최광범 (1974년생)[8]
차남 최광수 (1976년생)[9]
삼남 최광화 (1982년생)

1. 개요2. 이름3. 일대기
3.1. 소년기3.2. 20대3.3. 30대3.4. 40대3.5. 40대 이후
4. 격투 관련5. 국적 관련6. 카지와라 잇키와의 애증7. 어록8. 기타9.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clearfix]

1. 개요

수요기획 - 전설의 승부사 최배달

한국계 일본인 무도가. 극진공수도의 창시자.[10]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에서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고, 태어난 시기가 1920년대 일제강점기인 바람에, 큰 형(최일운)이 일본의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할 때(전 우석대 총장), 일본에 있는 항공정비학교[11]에 입학했다가 타쿠쇼쿠대학에 진학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징집[12]되었다가 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치야코(智弥子)[13]라는 일본인과 결혼한 후에 일본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이후 무도가로서 성장하여 극진공수도가로 유명해졌는데, 이에 그를 모델로 한 격투만화 《 공수도 바보 일대》가 창작되고 히트하면서 대중적인 인기를 더하게 된다.

1964년 실전무도를 주창하며 극진회관을 설립,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14] 무도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해있다. 극진공수도를 넘어 공수도계 전체의 위상을 끌어올린 사람 중 한명이기도 하다.

2. 이름

한국에서는 본명인 최영의 대신 최배달(崔倍達)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지만, 이는 일본명 오야마 마스타츠란 이름으로 바꾸기 전에 일본에서 사용하던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에선 '최배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적이 없고 귀화 전 이름인 최영의로 활동했다. 그러다 고우영 대야망에서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바람의 파이터 등 다른 작품에까지 영향을 준 듯하다. 바람의 파이터는 최영의를 영웅화하고자 사실과 다르게 묘사한 내용이 상당히 많으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최배달은 최영의를 모델로 한 가상의 인물'인데, 본인 이름을 쓰지 않고 가명 대신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후술되어 있듯 최배달도 그의 활동명 중 하나이다.

최영의의 일본 이름 오야마 마스타츠는 최배달이라는 활동명을 일본어 본명으로 채택한 것이다. 마스타츠(倍達)는 고대에 한반도나 한민족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쓰이는 '배달'을 한자로 표기할 때 쓰는 '倍達'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 그리고 실제 1985년 최영의 본인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지만[15] '배달의 민족' 할 때 그 배달을 뜻하는 것이 맞다. 본인이 고향을 떠나 평생의 반 이상을 외지에서 보냈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라와 고향을 생각하는 의미에서 (고향의 대산과) 배달 민족의 배달을 따서 '배달(마스타츠)'이라고 지었다고 밝혔다. 성으로 지은 오야마(大山) 역시 자신의 원래 성인 최(崔, 높을 최)를 파자하고(山 + 隹) '높다'는 원래 뜻을 살려 대산(大山)이라 지은 듯하지만[16] 일본에서 신세를 지던 '오야마 시게루'(후에 최영의의 제자가 된다.) 집안의 성을 이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마스타츠는 일본인들이 듣기에는 어색한 이름이었으므로[17] 주변 일본인들이 개명하라고 많이 권유도 하였다고 하나, 본인은 죽을 때까지 그 이름을 썼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이 원래 한국에 있을 때 이름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18]

일본에 있을 때 다양한 활동명을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최배달', '최맹호(猛虎)' 등의 한국식 이름을 썼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뒤에는 오야마 마스타츠, 大山猛虎(오야마 모코), 大山虎雄(오야마 도라오) 등을 썼다. 모두 호랑이, 배달과 관련 있는 이름들이다.

영어권에서는 약칭인 마스 오야마(Mas Oyama)로 많이 알려져 있다.

3. 일대기

3.1. 소년기

최영의는 일제강점기였던 1923년 7월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現 김제시 용지면 와룡리)에서 아버지 최승현과 어머니 김부용 사이 6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농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최영의는 어린 시절엔 공부엔 관심이 없고 골목대장을 하는 등의 문제아였다고 한다.[19] 이에 아버지 최승현은 사고뭉치 아들 최영의를 경성의 경성영창(중)학교로 입학시켰다.

최영의의 부모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경성영창학교는 서양식 기독교 학교였기에 최영의는 서양식 신식 교육과 서적에 큰 자극을 받게 된다. 이 시절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힘없는 정의는 무능이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라는 구절을 평생 수 없이 인용하게 된다. 이 시기에 같은 기독교 단체가 설립한 YMCA의 복싱 클럽에서 복싱을 익혀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보디빌더 와카키 다케마루의 '괴력법'을 읽고 감명 받아 홀로 웨이트 트레이닝을 연구하기 시작했다.[20]

그러나 경성영창학교에서마저 퇴학을 당하고 아버지와의 골이 더 깊어진 최영의는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부친의 반대에도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난다.[21] 그리고 일본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들른 부산에서 최영의의 스승이자 친우였던 강유류 가라테의 조영주를 만나게 되고 최영의가 야마나시 소년 항공기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가라테를 지도해주게 된다. 항공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송도관 가라테와 강도관 유도[22]를 배워 각 초단을 사사하고 대동류 합기유술을 수련하기도 한다. 이후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차출된다.

3.2. 20대

전쟁이 끝난 후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체육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와중에 당시 그가 의지할 사람은 같은 조선인인 조영주 뿐이었다. 이때 일본의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도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고, 민단 소속의 조영주[23]는 최영의를 조총련과의 투쟁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조영주는 최영의를 민단의 청년조직인 재일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의 간부, 훈련부장, 건설대대장 등으로 끌어 올렸고[24], 최영의는 이때 강유류(剛柔流 고주류) 가라테 초대 사범인 야마구치 고겐을 만나 사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조선인과의 싸움을 통해 실전 가라테의 기반을 쌓게 된 것이다. 때문인지 최영의는 이 시절의 이야기를 절대 무용담처럼 늘어놓지 않았는데, 훗날 당시 친교를 쌓은 무도가들의 입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려진 행보다. 민단을 나와 무도가의 길만 걷기로 맹세한데는 오륜서를 읽은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최영의는 길에서 남자의 항문 경찰봉을 밀어넣는 미군을 때려 눕힌 것을 시작으로 미군과도 잦은 싸움을 벌이곤 했다. 최영의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후 당시 미군에 대한 일종의 원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최영의는 이런저런 싸움이 더해져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고, 곤란에 처한 최영의에게 스승 조영주와 야마구치 고겐은 입산수도를 제안한다. 최영의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3년을 목표로 삼고 같은 조영주의 제자인 야시로와 함께 야마나기 현의 미노부 산에서 1946년 무렵 1차 입산수도를 시작한다. 판잣집에서 각종 수련도구를 가지고 살았는데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의 저자 요시카와 에이지가 후원을 해주었다고 한다.[25] 그러나 얼마 못가 야시로는 외로움과 격한 수련을 이기지 못하고 어느 날 밤 사라져버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최영의도 회의감에 빠졌으나 조영주가 편지로 그를 격려하였고 하산의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한쪽 눈썹을 미는 걸 제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는 수련을 계속하던 차 요시카와 에이지가 더 이상 후원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오고 최영의는 14개월만에 하산하게 된다.

하산 몇개 월 후인 1947년(쇼와22년) 교토에서 개최 된 전후 최초의 전일본공수도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우승 후 첫 입산수도 당시 약속한 3년을 채우기 위해 1948년 4월 치바 현의 기요즈미 산으로 들어가 1년 8개월간 입산수도를 마치고 내려온다. 이때 최영의는 기존 가라테의 슨도메 룰에 의문을 품고 있었던지라, 가라테 관계자들에게 직접 타격제를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현대 가라테는 무도도 격투기도 아닌 가라테 댄스다.' 같은 발언들로 인해 일부 가라테 유파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최영의는 일본 각지의 유명 도장들을 찾아가 일명 도장깨기를 신청한다. 그리고 최영의에게 패배하고 도장을 그만두는 인원들이 많아지면서 그의 이름이 일본 무도계에서 알려지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의 도전이 들어왔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도전 신청과 무도계의 비난에 난감해 하던 최영의는 영화 쿠오 바디스의 소와 주인공이 싸우는 장면에 영감을 받아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를 때려 잡기로 결심한다. 여담으로 이 소 잡은 일화가 원체 유명하다보니 실체 논란이 있기도 한데, 최영의 본인도 후술되어있듯 가족들에게 직접 말했고, 최영의의 제자 겸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가 최영의의 30대 시절[26] 일화를 '사나이의 성좌'에서 그린 적도 있는걸 보면 아예 없던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때 최영의는 사기를 당해 돈이 쪼들려 푼돈이나마 만져보려고 젊은 시절 했던 소 잡는 이벤트를 다시 시도했는데, 소가 도대체 덤비지를 않고 죽어라 도망만 다녀서 대결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관객들은 사기라며 돌을 던지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카지와라는 이때 수모를 당하는 최영의의 낙담한 얼굴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차라리 소뿔에 받혀서 쓰러지기라도 했다면 적어도 저런 모욕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런 저런 사항을 고려해서 정리하자면, 최영의가 소를 어찌저찌 잡아서 소뿔을 후드려팬건 맞아보이지만, 여느 유명 무술인들의 일화와 마찬가지로 현재로선 영상처럼[27] 확실한 근거 자료가 남아있진 않아 과장이 있을 수도 있긴 하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애초에 최영의의 진짜 평가받아야 할 업적은 이런 일화성 이야기의 진위나 사실유무보다는 무술계에 남겨놓은 유산들일 것이다. 최영의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당시 가라테 계에서 파격적이었던 풀 컨텍트 방식의 대련체계 도입과 거대 일파 성립, 이를 기반으로 한 인재 배출 등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지, 제대로 된 영상 자료 하나도 찾기 힘들었던 시대의 무용담을 신화처럼 떠받드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소 잡는 이벤트는 마케팅 용도로 최영의가 미국 무술가의 사기스러운 마케팅을 벤치 마킹했기 때문에 실패해도 중년의 나이까지 계속 활용했다는 주장도 있다. 훗날 새로 찍은 쇼는 영상으로 찍어 tv광고로도 활용했다고. 당시엔 자신의 체육관 부흥에 도움이 되었지만 훗날 사기 무술 마케팅 예시 중 하나로 비판을 받게 되는 자충수도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3.3. 30대

해외의 격투기들을 체험한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의 공수도 도장인 대산도장(大山道場)을 열었지만 이 최초의 도장은 부지 사기사건을 당하며 문을 닫았다. 그전까지는 미국에서 모은 재산으로 꽤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사기 사건 이후에는 전기도 끊긴 초라한 달동네에서 생활하며 힘든 시절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듣고 알음알음 찾아오는 젊은이들 때문에 다시 도장을 열었고, 이때 영문으로 쓴 가라테 기술서 'What is Karate?' 'This is Karate'를 출판했는데 이것이 해외에서 히트를 치면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덕분에 일본인 제자들 뿐 아니라 해외에서 온 외국인 제자들까지 모여들면서 도장은 날로 번창했다. 일본에서는 그냥저냥한 수준의 인지도였던 최영의가 오히려 해외에서 먼저 인지도를 얻은 셈. 젊은 시절 미국 등 세계에서 싸우고 다녔던 덕분에 입소문 덕도 좀 보았을 듯하다.

이 당시의 도장 풍경은 변두리의 허름한 도장에 다양한 인종의 덩치들이 우글우글 몰려 거의 싸움 수준의 무지막지한 수련을 하는 살벌하고도 이색적인 모습이었다고 한다.

3.4. 40대

파일:external/www.donga.com/200906110366_1.jpg

1971년 일본의 유명 스포츠 만화가인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가 원작을 맡은 만화 공수도 바보 일대(空手バカ一代)의 대히트로 최영의는 단순히 격투기 관련 인물만이 아닌 일반 대중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본 내에서 초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이때 최영의는 상당한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극진공수를 단순한 무술도장 수준을 넘어서 사실상 거대기업 수준으로 성장시켰고, 최영의의 영향력도 어마어마하게 커지게 되었다. 허나 이렇게 극진공수도가 성장하면서 자연히 이런저런 잡음도 생기게 되는데.. 최영의가 살아있었을 때는 총수로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큰 문제가 없었지만, 최영의 사후 극진이 파벌 싸움 등으로 분열되는 과정을 보면 이때 잡음을 짐작할 수 있을 듯.

한편, 극진의 사업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공이 있는 카지와라 잇키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나, 본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 카지와라 잇키와 최영의 사이의 관계는 여러모로 애증이 뒤얽힌 복잡한 사이가 되어버린다. 기타 자세한 것은 카지와라 잇키와 그의 만화 인간흉기 항목으로.

공수도 바보 일대(한국명 무한의 파이터)는 지금도 일본에서 격투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의 만화지만 작가가 멋대로 최영의의 출생 배경에 대한 설명은 빼면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옹호를 집어넣거나[28] 실제 수련이나 대련 과정과는 관계없이 판타지적인 내용을 마구잡이로 그려넣어 왜곡이 많다는 비판도 받는다. 심지어 총알을 잡는 묘사까지 그려넣는 바람에 최영의 스스로가 관련 질문을 받으면 매우 난처해 했다고. 사족으로, 이후 한국에서도 바람의 파이터 대야망 같은 만화책들이 유행하며 최영의라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된다. 재미는 그나마 바람의 파이터가 좀 더 좋은 편인데 이것도 현실성은 저 멀리 가있고 사실과는 전혀 다른 판타지스러운 내용이 많으니 주의. 만화니까 허구성이 어느정도 첨가되는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그래도 엄연히 실존인물이 모티브인데 너무 나갔다는 평도 있다. 나중에 오야마의 실제 생애를 다룬 자서전 등이 발간되어 그가 한반도 태생이며 작가의 왜곡에 의해 판타지적으로 과장된 부분들도 있음이 알려졌으나 여전히 극진회관의 대스승으로 존중받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도 잘못 알려진 일화들을 실제라고 믿는 경우도 존재한다.

어쨌든 이 만화의 영향으로 이후 일본매체 등에서 다뤄지는 격투기 바보 캐릭터는 최영의가 모티브인 경우가 압도적이 되었고[29], 가상의 실전 공수 유파는 극진회관을 모티브로 삼는 경우가 많게 된다. 만화 바키의 ' 오로치 돗포' 같은 경우는 아예 대놓고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다가 후반부로 가면 강력한 주먹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하나야마 카오루를 이용해 최영의의 명언을 인용하고 있다.[30][31]

3.5. 40대 이후

40대 이후로는 제자들을 키우는데 매진하여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격투가 기질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하루에 최소 10명 이상과 대련 연습을 계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본인 몸을 혹사시키다 보니 말년에는 관절염 등으로 늘 아팠다고 한다. 정형외과 의사인 장남 최광범도 증언했듯[32] 밖에선 절대무술가 이미지가 있으니 진통제를 먹고 극진공수도 시범을 보이면서 정정하게 돌아다녔지만 집에 오면 항상 골골했다고 한다. 그래도 평생 현역을 추구했는지 사망 4~5년 전까지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폐암에 걸려 치료를 받다 호흡부전으로 1994년 도쿄도 주오구에 있는 세이루카국제병원에서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4. 격투 관련

상기한 일대기에도 적혀있듯 그의 무용담은 팩트와 과장이 섞여있는 편인데 핵심만 말하자면, 현대 무술에서 중요하게 평가할 건 육체 단련의 중요성과 당시 가라테계에서 파격적이었던 풀 컨택트 방식의 대련체계 도입, 이를 기반으로 한 무도계 일파 성립과 인재 배출 등이지, 지금으로선 확실히 검증할 수도 없는 갑론을박성 무용담이 아니다.

결론적으로는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이미지처럼 절대강자는 아니었지만 한 유파의 창시자이자 한일 양국의 시대적 아이콘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실력을 폄하할수는 없다. 특히나 스포츠나 무예의 경우일수록 현대적인 문명과 지원의 혜택을 받을 세대일수록 훨씬 더 출중한 능력을 발휘한다. 일단 최영의의 명망은 확실히 낮다고 보긴 어려운데, 전 세계를 돌며 여러 사람들을 가르쳤고 그 제자 중에는 일회성 이벤트로 가르쳤긴 하지만 숀 코너리 요르단 국왕 일가도 있고, 장관도 몇 명 있었던 듯하다. 이게 이후 그가 더 유명해지는데 도움이 된 측면도 있고.

사실 일본에는 최영의처럼 신격화, 영웅화된 무술인, 격투가들이 꽤 많다. 미야모토 무사시( 니텐이치류 창시), 가노 지고로( 유도 창시), 마에다 미츠요(유도 전파, 브라질리언 주짓수), 다케다 소가쿠( 대동류합기유술), 우에시바 모리헤이( 아이키도 창시), 후나고시 기친(쇼토칸 가라테 창시)부터 시작해서 미후네 규조(유도 10단), 시오다 고조(아이키도 유파 양신관 창시), 사쿠라바 카즈시( 종합격투기, 그레이시 가문 격파), 기무라 마사히코(유도), 역도산( 스모, 프로레슬링), 사와무라 다다시( 킥복싱), 고바야시 마사토( 킥복싱, K-1MAX 챔피언), 이노우에 나오야( 권투), 오카미 유신( MMA, UFC 아시아 최다승 )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술인, 격투가들이 영웅화된 바 있다.

다만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거대한 일파를 이루고 있는 무도가는 드물 뿐더러, 종합격투기 Pride와 더불어 일본 격투기의 양대 산맥이자 세계 입식격투기의 최고봉이었던 K-1의 출발이 극진공수도[33]인걸 생각해 보면 창시자인 최영의의 영향력 또한 결코 무시할 순 없다. 킥복싱 또한 실전공수 vs 무에타이 기획에서 시작하기도 했고 지금도 실전무술하면 극진공수도가 떠오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태극권의 진노인과 붙었다는 얘기가 꽤 유명하나 이는 루머가 현실이 돼버린 케이스다. 최영의가 태극권 고수가 있다는 소리에 대결을 하러 갔지만, 70세가 넘으신 분이라 대결은 못하고 일주일간 머물면서 서로의 무술을 보여주고 헤어진 케이스인데 그 이야기가 와전되어 흔히 무협소설의 은거 고수 VS 철부지 최영의의 대결이었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이 부분이야 딱히 그의 실력과 연관된 부분이 아니므로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영의 무적 전설에서 한가지 고려해야 할 부분은 최영의가 세계를 돌며 강자들과 대결했던 당시에는 거의 '무명인물'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그가 대결을 할 수 있었던 상대도 당대의 진정한 최강자들인 복싱 헤비급이나 프로레슬링 챔피언이 아니라 어느 정도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아마추어 수준인 상대들이 대부분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UFC 챔피언이 일개 무술가가 도전한다고 곧이곧대로 싸워줄 리가 없다. 게다가 최영의 본인이 밝힌 바로도 정말 강한 상대는 눈 찌르기나 불알깨기 등의 치사한 수법으로 겨우겨우 이긴 경우도 있다고 한다.[34] 그 예로 미국에서는 프로레슬러와 대결하다 도저히 뭐가 안 통해서 치사하게 반칙 써서 이겼다거나 10대 청소년에게 싸우다가 몇번 나가떨어지자 방심한 틈을 타 기습으로 이겼던 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이긴 건 이긴 거라지만 덕분에 열 받은 관객들의 린치를 피해 도망다니기도 했다고. 일설에는 4~5번 패배했다는 말도 있다. 카포에라를 쓰는 브라질 출신의 노동자와 봉술을 쓰는 요르단 국왕의 보디가드와 10대 브라질 유술 견습생 등이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UFC 챔피언도 패배 기록이 있는 마당에 컨디션이나 운 등도 중요하게 좌우하는 실전 무대에서 무패 신화가 더 거짓말 같긴 하지만.

자서전을 통해 프로 복서나 레슬러들을 상대로 싸웠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기록에 없는 선수들이라고 한다. 프로레슬링은 그렇다 쳐도[35] 복싱의 경우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라도 19세기 선수들까지 연감으로 정리되었는데, 최영의와 싸웠다는 선수들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참고로 이소룡도 아마추어 복싱 경력을 찾아볼 수 있다.[36] 때문에 비판론자들은 특유의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긴 했지만 과도한 신격화는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영의의 일생 최대 라이벌로 알려진 '톰 라이스'[37]의 경우 바람의 파이터의 작가 방학기가 무작정 월드클래스급의 복서 출신으로 살인 주먹으로 유명했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론 하와이, 뉴욕 등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프로 레슬러였으며[38], 그와 경기를 치른 바도 있는 루 테즈[39]는 톰 라이스가 풋볼 선수 출신 선수였긴 했지만 아마추어 레슬링이나 유도, 가라테 등을 수련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으며 최영의와 톰 라이스가 겨루었다는 이야기 또한 금시초문이라 밝혔다. 물론 이 부분은 그가 몰랐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 방학기의 만화에서는 역도산과 최영의 사이의 감정의 골이 생긴 계기도 역도산 본인이 패배했던 톰 라이스를 최영의가 이겼기에 자존심이 상해서라는 식으로 설명하지만 역도산과 톰 라이스는 총 16번이나 경기했으며 5승 5패 5무의 전적을 사이좋게 나눠 가지고 있다. 남은 하나는? 이때의 프로레슬링은 지금처럼 WWE와 같은 메이저 단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각 지방 단체들이 순회하며 흥행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역도산, 최영의, 엔도 고기치 등이 이 즈음 미국에서 활동했으며,[40] 시대특성상 워크를 깨고 시멘트 매치[41]로 돌입하는 상황은 잦았으나 만화 등에서 묘사되듯이 지하에서 목숨 걸고 살인 경기를 펼치는(…) 상황은 없었으며, 규모만 작았다 뿐이지 오늘날과 같이 워크가 존재했다. 다만, 초기 프로레슬링은 서커스단과 함께 순회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과 함께 경기 중간중간 격파 시범 등의 기예를 선보였을 가능성은 있으며 비슷한 이야기를 자서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영의 본인의 말에 의하면 톰 라이스와 붙었다가 한대 맞았는데 나중에 보니 치아가 나갔다고.

참고로 의외라면 의외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실전 레슬링 무도와 같은 개념은 동시대에 남아시아에서 만연하게 퍼져있었다. 관련 얘기는 안토니오 이노키 문서에 가면 있을 것이다. 이곳도 동북아쪽과 비슷하게 서구열강에게 찢기면서 반서구적인 감정과 더불어서 민족심의 고취를 목적으로 이런 식의 맨몸격투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다만 동아시아와 다른 점은 동아시아는 오랫동안 폐쇄적으로 이어진 무술들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면 남아시아는 기존의 전통무술보다는 지금의 무규칙 격투기와 프로레슬링 비슷한 포멧으로 경기장에서 말 그대로 무규칙으로 누구 하나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것에 초첨이 맞춰진 곳이였다.

다만 최영의가 그렇다고 평범한 범인이었냐 하면 그건 또 결코 아닌 것이, 일단 그는 육중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100m를 11초대에 주파할 수 있었고, 150~160kg의 고중량 벤치프레스를 수십회씩 수행했다고 한다. 또 단청의 서까래를 세 개의 손가락으로 잡고 배꼽이 닿을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었으며, 한 손 새끼손가락 하나만으로 턱걸이를 15개 해보였다고. 나중에는 자극이 되지 않아 여자나 11살짜리 사내아이를 2명씩을 올라앉게 한 상태에서 수십회를 했다고 한다. 다 떠나 생전 사진만 봐도 심지어 나이가 들었음에도 피지컬과 안광에서 뿜어져나오는 기운이 범인의 수준은 아니다.

실제 2011년 2월 13일 방영된 SBS스페셜 '무림고수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편에 최영의가 자식들에게 말했다는 '소를 때려잡는 조건'이 나왔다.
1) 100 m를 11초에 뛸 수 있을 것.
2) 벤치 프레스 150~160 kg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을 것.
3) 단청을 손가락 세 개로 잡아끌어 배에 붙일 수 있을 것.
4) 한 손 새끼손가락으로 턱걸이 15개를 할 수 있을 것.
5) 엄지와 검지만으로 동전을 구부릴 수 있을 것.

이걸 다 할 수 있을 때 주먹으로 소를 때리면 소가 즉사할 수 있다고 한다. 이에 기가 막힌 아들들이 "그러면 아버지는 저 조건이 가능하십니까?"라고 묻자 "가능하니까 소를 때려잡았겠지"라고 대답했다. 동영상 5분 12초부터.[42]

하지만 과학계나 무술계에선 최영의가 생전 마르고 닳도록 수차례 반복 마케팅한 소잡기 쇼를 믿는 분위기가 아니다. 당시에 팽배하던 무술 마케팅의 일환으로 보는게 주류[43]. 실제로 이 소잡기 쇼도 미국의 한 무술단체 무술인의 쇼(이쪽도 연출 조작)를 벤치 마킹한것.

가능성을 따져보자면 개별적으론 몇개씩 가능한 사람이 제법 있을 것이다. 가령 2~4번을 같이 하는 크로스핏터[44], 5번을 하는 동호인 스트롱맨[45][46] , 1번을 하는 고등부 도대회급 육상선수 등처럼 말이다. 그러나 2~5번을 전부 할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를 뒤져봐도 꽤나 적은 숫자일 것이며 1~5번을 다 하는 인간은 극소수일 정도이다. 게다가 저건 최영의 시절의 조건이라는거고, 수련 환경이 개선된 오늘날로 보면 상대 조건은 더 올라갈 수도 있다. 물론 진지하게 따져보면 소를 때려잡는 거랑 저런 조건들이 무조건 일치해야 되는건 아니고, 설령 저게 된다고 해도 무술 수련 등을 또 해야 되는지라 맹신할 필요는 없지만, 그냥 소를 때려잡으려면 대단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최영의가 판단했다는 정도로만 참고하면 되겠다.

실제 최영의가 높게 평가받을만한 부분은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이나 방법도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대에 근력운동을 통해 근력과 파워를 강하게 만드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도 있다. 산 속에서 굶주리며 혼자 수련을 한 에피소드는 만화에서 과장한 것이고, 실제로는 닭꼬치를 몇십 개씩 먹어가면서 영양 보충과 근력 단련에 힘썼다고 한다.

최영의의 저서들을 살펴보면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가 '무도의 원류를 따져보면 결국은 투쟁의 기술이다. 실전에서 써먹을 수 없는 무도는 과 다른 게 없다'이다. 또한 내공이나 의 존재같이 애매한 추상적인 개념은 죄다 집어 치우고 격투기 기술을 역학적,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공수도 서적들을 다수 발간했다. 그리고 이런 점이 서양에서도 합리적으로 인정을 받아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된다.

물론 타고난 점도 좀 있었던걸로 보이는데, 공수도를 배우기 전에도 맨손으로 싸워서 한 번에 7명까지 쓰러트릴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47] 이렇게 무술과 격투기를 하기 좋은 피지컬을 타고난 것에 더해 스스로도 가라테 밖에 모르는 바보, 가라테에 미쳐있다고 할 만큼 연습매니아였으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라테 유파를 창시하고 가라테의 대가가 되었을 것이다.

5. 국적 관련

후술되어있듯 최영의 아들들이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등의 이유로 최영의가 1968년 일본에 귀화했지만 한국 국적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중국적자라고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애당초 한국의 경우 2010년 5월 3일까지는 자동으로 바티칸 국적이 부여되는 추기경을 제외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복수국적을 허용하지 않았던 나라였으며 이는 당시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최영의는 귀화 후 한국 대사관에 국적 상실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국적 말소 처리가 되지 않았다.[48] 사실 최영의뿐 아니라 외국에 귀화한 한국인들 중에도 잘 몰라서 혹은 귀찮아서 국적상실 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국적상실 신고는 당사자가 직접 해야 하기 때문에 안 할 경우 한국 정부에서도 파악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참고로 최영의의 한국 태생 아들들은 전부 한국 국적이다. 물론 실제로는 최영의가 일본에 귀화한 순간 한국의 국적법상 한국 국적은 자동상실되었다고 봐야 한다.[49] 단지 과거 행정체계가 미비해 생긴 일종의 오류로 인해 의도치 않게 이중국적자처럼 되었다고 보면 된다.

본인은 상기된 1985년 KBS 인터뷰에서 일본 국적을 취득한 이유에 대해, "당시 한국 국적으로는 공산 국가에 들어갈 수 없었을 뿐더러 일본과 다른 나라를 자주 왕래해야 했습니다. 일본에서 외국인의 출입국 단계는 굉장히 복잡했습니다. 그 모든 단계를 간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생각해 일본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라고 밝혔다. 실제 저 당시는 한국이 해외여행자유화가 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한국국적자로 해외를 나가는게 매우 힘들었다. 설령 어찌 허가를 받아 해외를 나간다치더라도 일본에 비해 비자받기도 어려웠다.

물론 국적 여부를 떠나 최영의 본인도 상기했듯 일본인들에겐 생소한 마스타츠(倍達)라는 특이한 이름을 고집한 것이나 후계자로 재일 한국인 문장규[50]를 선택한 점, 본인 스스로 한국계에 대한 자부심이 남아있다는 인터뷰 내용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정체성은 상당히 뚜렷한 인물이긴 했다. 한국어야 죽을 때까지 잘했다. #

6. 카지와라 잇키와의 애증

태평양 전쟁의 패전 건도 있어서 당시 미국인과 대결하여 승리한 최영의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 때 마침 만화가 카지와라 잇키가 최영의에게 접근하여 둘은 친분을 나누었다. 꼴마초였던 카지와라는 최영의의 무용담에 감복하여 친하게 지냈고 그 인연으로 최영의를 작중 등장인물로 두 번 써보았다. 이게 반응이 좋았을 뿐 아니라 당시 격투기붐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카지와라는 최영의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매거진 편집부에서는 토론이 일었으나 이미 논픽션 작품을 다룬 적도 있으니 실존인물이 소재라도 안될 것은 없다는 이유로 연재가 결정되었다. 작화를 맡은 건 이미 작중에서 최영의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 '무지개를 부르는 주먹'을 그린 츠노다 지로였다. 제목은 공수도 바보 일대.

이 만화가 대히트하면서 최영의 개인의 유명세에 비해 정작 도장 자체는 그냥저냥한 수준이었던 극진공수도 도장에도 입문 희망자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최영의와 친분을 맺고 도장을 들락거리던 카지와라를 따르는 사람들도 꽤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작화 담당인 츠노다 지로가 오컬트에 흥미를 가져 연재를 끝내고 싶어했다. 사실 이미 그 시점에서 최영의의 에피소드는 다 써먹은지라 만화는 점점 더 황당무계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최영의는 이런 황당무계한 내용에 대해서 난색을 표했다고 하는데 사실 허황된 내용 중에 반절은 최영의의 저서에서 차용해 온 것이고 나머지 반절은 카지와라의 창작이었으니 최영의 측도 마냥 억울하다고만 호소할 수도 없긴 했다.

어쨌거나 츠노다의 강한 희망으로 츠노다는 작화 담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당시 매거진은 내일의 죠가 연재가 끝나서 더 이상 히트작을 종료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작화 담당을 카게마루 죠야로 교체하고 연재를 계속했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최영의의 에피소드는 이미 다 써먹었던 탓에 문하생이었던 아시하라 히데유키를 중심으로 작품을 계속했다. 당시 극진공수도는 해외 진출을 주장하는 아시하라파와 보수적인 최영의파로 갈려 있었을 뿐더러 카지와라가 아시하라편을 드니 최영의측에서는 이에 상당한 불만을 표했다.

여기에 최영의와 카지와라가 반반씩 출자하여 만든 영화 '지상 최강의 가라테'의 수익 분배 문제까지 터지자 두 사람은 결별한다. 최영의는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화를 그렸던 츠노다를 포섭해서 카지와라를 뺀 상태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 갓핸드를 그리게 했다. 이에 분노한 카지와라는 편집부에 압력을 넣었고 당시 작품 자체도 크게 히트하진 못했기 때문에 갓핸드는 고작 9주만에 끝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카지와라는 계속해서 츠노다를 괴롭혔고 이에 츠노다는 자기 작품에서 카지와라를 헐뜯는 말을 집어넣었다가 걸려서 카지와라에게 납치당해 사과장을 쓰는 사건(츠노다 지로 사과장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후 일본에 방문한 격투가 윌리 윌리엄스 안토니오 이노키의 매치에서 마침내 최영의가 문하생들과 카지와라를 습격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실제로 습격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카지와라는 최영의에게 사과를 요구하였고 최영의가 묵살하여 의형제까지 맺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말았다.

그러나 말년엔 화해의 기운이 돌기도 했는데, 카지와라가 병으로 쓰러지자 누군가가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고 그것을 받은 카지와라는 최영의가 보낸 편지라고 확신하였다. 그 후 카지와라는 병 때문에 은퇴하기로 하고 마지막이자 자전적 작품이기도 한 남자의 성좌에서 심혈을 기울여 최영의를 묘사했고 이것을 최영의도 마음에 들어했지만, 카지와라가 1987년 병으로 죽는 바람에 생전 직접적인 화해는 하지 못했다.

7. 어록

최영의는 생전 연설을 즐긴 달변가였다. 덕분에 어록들도 많이 남겼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상냥한 게 무도(武道)다.
강한 인간 보다는 약한 인간의 편, 다수 보다는 소수의 편이 되는게 나의 죽기 전까지의 신념입니다.
実践なければ証明されず、証明なければ信用されず、信用なければ尊敬されない。
실천이 없으면 증명할 수 없고, 증명이 없으면 신용받을 수 없고, 신용이 없으면 존경받을 수 없다.[51]
頭は低く 目は高く 口慎んで 心広く 孝を原点とし 他を益する。
머리는 낮게, 눈은 높게, 말을 조심하며, 마음을 넓게 하고, 효(孝)를 원점으로 타인을 이롭게 한다. - 극진의 정신
金を失うことは小さい事である。信用を失うことは大きい事である。勇気を失うことは自分を失う事である。
돈을 잃은 것은 작은 것을 잃은 것이다. 신용을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고, 용기를 잃은 것은 모든 걸 잃는 것이다.
자신이 두려울 때는 상대도 마찬가지로 두렵다. 상대는 신이 아니다.
반복이 힘이다.
侍は刀を常に磨いてさやの中におさめておく。抜かない。抜かないところに侍の価値がある。
사무라이는 늘 검술을 연마하지만 그럼에도 쉽게 검을 뽑지 않는다. 뽑지 않는 쪽에 사무라이의 가치가 있다.
가난해도 좋다, 단지 하나의 목표에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그런 인간은 정말로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런 인간은 진정으로 숭고하게 보인다.
강함보단 따뜻한 인간성을 품은 사람, 같은 일을 하더라도 따뜻하게 인간적으로 받아주는 사람이 더 좋다, 그것은 강함보다 한 차원 더 높다.
右手がダメになったら左手を使え。手がダメになったら右足を使え。右足がダメになったら左足を使え。それがダメになったら頭を使えよ。それでもダメだったら呪ってでも倒せ。
오른손이 안 되면 왼손을 사용하라. 왼손도 안 되면 오른발을 사용하라. 오른발도 안 되면 왼발을 사용하라. 그것마저 안 된다면 머리를 사용하라. 그런데 그것마저 안 되면 저주를 해서라도 쓰러트려라. 그것이 극진이다.

8. 기타

9.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

일단 최영의란 인물 자체가 평생을 무도에 정진하였고 기존의 슨도메 룰에 반발해 풀컨택트 가라테를 지향하는 극진공수도를 창시했다는 점에서 영원한 도전자이자 저항아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한 만큼 수많은 미디어에서 최영의를 모티브로 하는 무술인 캐릭터들이 등장했다. 중국무술을 쓰는 많은 캐릭터가 이소룡의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듯 진지하게 극진공수도에 정진하는 무도가 캐릭터라면 어떠한 형태로든 최영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들 정도이다.


[1] 일본에서 일시적으로 사용했던 이름. [2] 영미권에서 알려진 이름. [3] 호남선 와룡역 바로 앞에 있으며, 건물은 철거되었고 터만 남았다. # [4] 1968년 귀화. [5] 최영의 본인이 주병진쇼에서 한 말에 의하면 80kg대를 유지하다 말년엔 90kg대가 되었다고 한다. [6] 한국 태생의 세 아들과 일본 태생의 세 딸이 있다. [7] 2019년 1997년생인 그녀의 아들이 마약 때문에 검찰에 체포된 적 있다. [8] 2021년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큰아들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극진공수도 차원에서 여러모로 합작 활동을 하고 있다. 최광범의 장남, 즉 최영의의 장손 역시 운동 쪽 재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업적으로 운동을 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최영의의 장손인만큼 못해도 태권도 4단까지는 취득시키고 싶다고... [9] 2021년 현재 주짓수 선수이다. 만 45세라는 나이에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10] 여담으로 극진회관을 열 당시엔 아직 한국 국적이었다. [11] 현재는 일본 항공 고등학교. [12] 이 내용은 최영의의 저작들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내용도 책마다 징용이었다느니 지원했다느니 학도병이었다느니 서로 엇갈린다. 실제로는 치바항공대에서는 신풍공격대가 출격한 일이 없다. 철저하게 증언을 바탕으로 과거사를 재구성한 고지마 가즈시(小島一志)와 츠카모토 요시코(塚本佳子)의 조사에 의하면, 최영의는 치바현 다테야마에 있는 건설현장 함바의 노동자로, 특공대원이 아니라 징용공이었다고 한다. (최영의의 셋째형 최영범의 진술에 의하면, 전쟁통에 가미가제 부대에 끌려갈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평발이라는 이유로 겨우 빠질 수 있었다고 한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지원이 더 거시기하니 징용공이 깔끔하긴 하다. [13] 배우였던 후지마키 준(藤巻潤, 전격전대 체인지맨 이부키 장관 역)의 누나로 2006년 사망. [14] 사실 인터넷이 활성화된 21세기 들어서는 한국에서 더 대접해주는 측면도 있다. 혐한들에겐 자이니치라고 조롱을 당하기도 한다. 다만 이건 키보드워리어 한정으로, 일본 무술계에선 여전히 존경받는 인사다. [15] 다만 시대가 시대다 보니 지금 와서 보면 상당히 국뽕을 강요하는 듯한 요지의 질문도 많긴 하다. 어찌됐든 최배달 본인은 한국계 자부심을 솔직하게 표출하긴 했다. [16] 당시 창씨개명하는 한국인들 중 완벽하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였고, 대부분 원래 이름의 한자를 그대로 쓰거나 파자하는 식으로 지었다. [17] 이름의 특이함 때문에 일본인들은 대개 그가 외지인(특히 조선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18] 한국명 '최영의', 민족명 '최배달' 같은 식으로 구분한다. [19] 이 시절 머슴에게 무술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책마다 그에 대한 묘사가 각기 달라 기술하지 않는다. [20] 후에 조영주의 소개로 와카키 다케마루와 직접 만나 팔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과는 최영의 패. 여러가지 웨이트 트레이닝 지식도 전수 받았다고 한다. [21] 셋째형 최영범 말에 의하면, 당시 본인이 아버지 몰래 돈을 빼돌려 동생의 등록금과 수업료를 챙겨줬다 들켜서 불호령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최영의는 청년 시절부터 힘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좀 더 큰 힘을 얻고자 일본대학에 가길 원했다고 한다. 그런 동생이 이후 유명한 무도가가 되어 돌아올 줄은 몰랐다고. [22] 후에 강도관 유도는 4단까지 따낸다. [23] 후에 민단 단장을 역임. [24] 이때 최배달은 경호 업무를 맡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시기 같이 활동한 인물 중엔 이후 정치깡패가 되는 정건영도 있었다. [25] 참고로 최영의는 당시 하숙집 딸 후지마키 치야코와 결혼하여 이미 유부남이었고, 산에 있을때 치야코는 첫째 딸을 출산한다. [26] 최영의가 사기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재산을 몽땅 날리고 가난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사기사건 이전에는 미국에서 제법 돈을 벌어서 당시 기준으로 꽤 호화주택에서 살았다고 한다. [27] 유튜브 등지에 돌아다니는 최영의가 소뿔 후려치는 영상은 이후에 만들어진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28] 태평양전쟁에 병사로 징집된 시절에 미군을 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 비행기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라며 경례하는 장면이 1권에 있었다. 그 때문에 1권을 보고 불쏘시개 취급한 사람도 꽤 많다. [29] 물론 애초에 이 만화가 나온 계기 자체가 최영의가 젊은 시절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러 격투가들과 실전을 겨룬 팩트가 있기 때문이긴 하다. 그걸 제자였던 작가가 멋대로 감정이입해서 판타지를 창조했을 뿐. 실제 이 만화 전에도 상기되어있듯 최영의는 이미 해외에서 제자들이 올 정도로 업계에선 나름 알아주는 인물이었고, 이런 이력 때문인지 미국 수사기관에 초빙되기도 하였다. 사실 최영의는 2차 대전 이후 주일미군들에게 가라테를 훈련시킨 경력도 있었는데 이 인연으로 성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0] 총 2번 언급되었는데, 대강 "타격계 가라테의 아버지. 최영의는 예로부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체중x스피드x악력=파괴력' 이다." 라면서 하나야마의 강펀치의 이론을 설명하는 식. [31]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모델도 최영의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정확하겐 류의 모델은 최영의가 아니라 그의 제자이자 '극진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소에노 요시지다. [32] 아내를 2명 두었는데 상기한 일본인 아내가 낳은 딸이 3명 있고, 50대 이후 결혼한 한국인 아내가 낳은 아들이 3명(최광범, 최광수, 최광화) 있다. [33] 정확하게는 극진회 아시하라 도장 출신의 이시이 카즈요시(石井和義)가 1980년 독립해서 설립한 정도회관. [34] 이런 점에서 보면 최영의가 했던 싸움이 UFC보다 더 실전스럽긴 하다. [35] 프로레슬링 또한 NWA 산하의 어지간한 지방단체의 경기들은 대부분 기록되며, 최영의의 최대의 라이벌이라던 톰 라이스는 물론 당시 최영의와 함께 미국에서 활동한 엔도 고키치의 경력 또한 상세히 남아있다. 톰 라이스의 경우 역도산과 경기한 기록은 전부 남았으나 최영의와 경기를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36] 홍콩의 고등학교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한 적이 있다. [37] 1914년 몬타나 출신, 1996년에 사망했으며, 루 테즈, 보보 브라질을 비롯한 당대의 레슬러들과 겨룬 선수이기는 하나 일방적으로 열세여서 무조건 3류 레슬러라 폄하받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1류 프로레슬러는 아니었다. 물론 기록이 전부는 아니고 실전과 레슬링도 엄연한 차이는 있겠지만. [38] 주병진 쇼에 출연한 최영의의 말에 의하면 복서였다가 레슬러로 전향했다고 한다. [39] '철인'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마추어 레슬링 출신의 실력파 프로레슬러로, STF, 파워 밤, 루 테즈 프레스 등 여러 기술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40] 이 당시 일본에서 시장 초기 개척을 위해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운동선수들이 다수 있었으며, 최영의 또한 이 붐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크다. [41] 프로레슬링의 정해진 각본을 깨고 선수들이 실전으로 싸우는 상황. 현대 WWE 등을 통해 체계화되기 이전의 프로레슬링에선 꽤 잦은 일이었으며 덕분에 당시에는 그런 상황에서도 상대를 제압해야 하는 실전 강자들이 탑 프로레슬러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42] 일부에선 나열된 단련들을 차력과 연관짓기도 하는데, 차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5번 정도나 차력과 연관 지을 수 있을 뿐, 나머지는 그냥 트레이닝이다. 달리기, 벤치프레스와 같은 웨이트, 턱걸이와 같은 기계체조식 일반적인 트레이닝은 다른 무술에서도 중요시하는 부분. 다만 저 5번도 단지 차력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4번과 연관지으면 주먹으로 때리는 무도가에게 필요한 악력과 근력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43]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전인 2000년까지도 이런 조작무술쇼는 흔했다. 인터넷과 유튜브등의 서비스가 대중화되면서 실체가 까발려지게 되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최영의 소잡기 쇼이다 [44] 다만 손가락 부위는 헬스로 단련하는 주요 분야는 아닌지라 약간 별개긴 하다. [45] 다만 5번의 경우는 좀 논린이 있긴 한 모양. 일단 21세기 세계 최강의 스트롱 맨들도 5번을 할 수 있는자는 없다는 의견이 있다. 동전을 구부리는 스트롱맨들은 전부 이빨로 구부리는거지 손가락으로 그정도 힘을 내지는 못한다. 최영의도 공개적으로 동전을 구부러뜨린 적은 없고, 누가 시키면 알러지난다고 피하거나 구부러진 동전만 보여줬을 뿐이라는 의견이 있다. 다만 주화 동전을 손가락 두개로 반으로 접는 등의 묘기를 지인들 앞에서 자주 벌였다는 말도 있는거 보면( 역도산도 한번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검증이 필요한 부분. 남들이 부탁하면 생각보다 쉽게 보여준 모습과는 달리 실제 몸에 무리가 가는 묘기였는지, 정말 친밀한 주위 사람에게는 "동전접기를 하고 나면 몸에 무리가 가서 다음날 몸에 두드러기(담마진)가 생긴다."라고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는 말도 있다. [46] 혹은 최영의가 구부리던 품질과 균일성이 떨어지고 가운데 구멍이 있으며 더 얇은 옛날 일본동전으로는 가능해도 스트롱만이 구부리는 현대 동전으로는 힘들 수 있다 [47] 최영의의 아들들도 보면 누가 최배달 아들 아니랄까봐 죄다 등빨과 피지컬이 장난이 아니다. 심지어 둘째 아들은 현역 주짓수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48] 국적 이탈·상실 반드시 신고 제때 안하면 불이익 당해요. [49] 국가법령정보센터 국적법 제 15조 1~2항. [50] 일본에서는 마쓰이 쇼케이(松井章奎)라는 통명을 썼고, 문장규(文章圭)는 본명이다. 재일 한국인 2세이며, 남평 문씨 34세손이다. [51] 자신의 강함을 몸으로 실천하고 증명하여 신용을 얻은 최영의가 했던 말이자 극진의 이념. 다만 이건 증명이 아닌 철학적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52] 실제로는 일반적인 킥복싱이 아닌 90년대 초반까지 격투기로 불리던 한국식 킥복싱으로 링크 항목에 언급된 윤익암 관장의 삼산체육관을 다녔다. 참고로 윤익암 관장은 젊은 시절 극진 오픈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으며 1993년 최영의가 한국에 들어와 '주병진 쇼' 등에 출연할 수 있게 초청을 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무에타이 도입 전까지 윤익암 관장의 삼산체육관에서는 주먹으로 안면타격만 금지한 극진식 대련을 '체력대련'이란 이름으로 매일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53] 현재 의정부 본 정형외과 원장으로 전문의 취득후 군의관으로 병역의무를 마쳤다. 큰동생 최광수도 장교로 의무복무했다. [54] 요즈음 같으면 최영의가 첫부인에게 재산분할을 해 주고 재혼을 했겠지만, 당시에는 이혼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부정적이었으므로, 이런 방법을 권유했을 것으로 보인다. [55]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무비자 여행이 없었다. [56] 극진회관 관장은 마쓰이 쇼케이(마쓰이 쇼케이는 통명으로, 본명은 문장규이다.), 극진관 관장은 로야마 하쓰오(1982년에 귀화했으며, 귀화 전 한국명은 노초웅이다.). 물론 한국계임을 엄청 어필하는건 아니고 이미 국제화되어서 제자들은 다양한 국적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57] 김경훈이 이때 도입을 주도했다. 다만 김경훈은 이후 불미스런 일로 인해 극진회관으로부터 제명당했다.(...) [58] 주연은 치바 신이치. [59] 단 패자부활전 당시 스기하라의 차력과 공명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최영의의 자아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 [60] 최영의의 유명한 어록인 ‘현대 가라데는 댄스에 불과하다’라는 대사를 그대로 읊으며 가라데 시합장에 난입하여 선수들을 때려눕힌다 [61] 공수도가 아니라 태권도를 사용하긴 하지만 최영의와 태권도의 관계(?)나, 무엇보다 최달달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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