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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0:58:30

사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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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회성과 인간관계3. 사회성 향상을 위한 생각과 처세술4. 예외5. 관련 오해
5.1. MBTI와 사회 부적응 관련5.2. 신빙성과 실효성 관련
6. 사회성 부족7. 관련 문헌, 교양서8. 기술 및 예시9. 관련 문서

1. 개요

사회성()의 학술적인 정의는 "사회적 성숙, 타인과 원만하게 상호작용하는 능력, 다양한 사람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1]을 말하며, 사회적 능력(social competence)과 사회적 기술(social skill)로 나뉜다. 다른 의미로는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으로서 'Sociability'를 의미한다.

현실적인 정의로는 " 타인으로부터 배척받지 않고 상호존중하며 공존하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뜻한다. 사회성은 불문율, 예절, 호감을 주는 기술에 대한 지식, 비호감을 주는 언행에 대한 지식 등 지식적인 부분 외에도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눈치, 좋은 의도를 가지는 인성과 성품 등 수많은 요소를 포함한다.

집단주의적인 사람들도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사회성이 떨어질 때가 있고, 집단주의 사회가 사회성이 덜 중요할 수도 있다. 사실 집단주의에서는 집단에 의해 강제로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개인주의로 갈수록 개인들 마음에 달린 문제이다.

언급했다시피 사회성은 상식(사회적 지식)을 배웠다고 그냥 향상되는 게 아니지만, 상식이 있어야지 이를 기반으로 변칙적인 상황 속에서 판단을 한 다음에 결정하는 식으로 사회성이 향상될 수 있기에 사회적 상식은 사회성의 기본 틀이 될 수 있다. 사회성과 사회상식을 같은 의미로 보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원래 사회상식은 말 그대로 '지식'이고 사회성은 행동(실력)과 같은 거라 두 단어의 의미는 좀 다르다. 다만, 연관성에 상식이란 말의 의미가 행동 등을 일컫는 의미도 있다 보니 한 가지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사회 관련 생활을 비롯한 센스, 대화법 같은 실력 등 같은 걸 한꺼번에 말할 땐 상식 말고 개념, 사회성, 사회생활, 사회화 등등 여러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다른 의미에서 볼 땐 맞는 말이니 굳이 다른 개념이라고 따질 필요는 없다.

[2]과는 다르며 사교적이라 해서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친화력도 이와 비슷하게, 낯선 사람과 관계를 맺기 쉬운 기술이 외집단에 미치는 피해가 없다고도 못한다.[3] 자의이든 강제이든 집단에게 체득한 사회성이 실은 그동안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지도 모르고 사용했던, 유대라는 상징으로 사회성을 포장하려는 반사교적 행위일 수 있으면서도 사교성이 없다는 것을 문제라고 여겨서 '사회성=사교성'이라고 배운 사람들로 인해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친구여도 많이 만들수록 사회성은 알아서 올라간다라는 선입견이 잘못된 사회적 지식을 낳는 곡해가 되고 극단적으로, 뭐가 나쁜 건지도 모른 채 민폐를 끼쳐도 "내 주변이 좋으면 그걸로 됐지."라며 사회적 기술로 편입시키는 사고방식을 강제할 수 있다.

2. 사회성과 인간관계

사회성이 낮은 것과 친구가 없다는 것은 다르다. 타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심지어 다수에게 피해를 많이 주는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협소하다거나 친구가 꼭 없는 것도 아니다. 위험한 수준이 아니라면 유유상종인 친구들은 있기 마련이며, 교묘한 사회기술이 없더라도 외모, 부(富), 사회적 권력 등을 갖춘 사람은 인기를 끌기 마련이다. 만만한 사람이나 집단 밖의 사람들에게 계속 부정적 영향을 주고 직접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어도, 이 사람이 교묘한 인간관계 기술을 갖추고 있으면 집단 내에서 그 행동에 공개적으로 비난받는 경우는 드물며, 오히려 다수파의 중심에 서서 타인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학창 시절의 일진, 국가에서는 나쁜 정치인, 직장에서는 뒷담화의 근원 같은 간신배 같은 경우다. 이런 사람은 처세술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타인과 진정한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능력이 높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즉 이런 사람들은 진짜 친구(서로 마음이 통하는 그런 사람)는 없고 가짜 친구들(필요할 때만 본인한테 찾아오는 사람)이랑 잘 어울리는 타입이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인성과는 다르다.

권석만(1997)은 미숙한 인간관계를 '소외형'과 '반목형'으로 나누었다. 소외형은 미숙한 사회기술로 인해 은따를 당하는 경우를 말한다. 학교폭력과 달리 누가 주동해서 "A와 아무도 말 섞지 마."라고 시키는 등 격렬한 갈등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또 소외형은 인간관계를 거부하는 유형은 아니다. 다른 사람과 친밀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상당한 욕구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반목형은 다툼과 대립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사람이다. 타인의 행동에 쉽게 감정이 상하고,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 적을 많이 만들게 된다.[4] 소외형과 반목형에 동시에 해당하면 어느 집단에서든 쉽게 배척당하지만 사회 기술도 우수하고 분란도 일으키지 않을 때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주변에서 성격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호감이나 혐오감을 얻는 것은 이성보다는 감성과 직감에 의해 결정된다. 논리적으로 "이러하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넌 날 싫어하면 안 돼."라고 설득할 수는 없다. "제발 절 좋아해 주시고 배척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애원한다고 혐오하지 않게 바꿀 수도 없다. 매우 성실하고 유능하고 배려하는 사람인데 극심한 혐오감을 불러오는 경우도 있고, 매우 어수룩한 말투에다 느긋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호감을 사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혐오감을 주는 언어적, 비언어적 요소들을 모두 피함으로써 호감을 살 수 있다. 이런 사회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뿐더러 평생 소외당하고 차별당하기 쉽다. 비언어적 단서가 서양에서보다 더 중요한 동양에서 사회적 의사소통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미숙한 인간관계 유형에서 소외형인 경우가 많다.

사회성은 그 집단이 지배하는 나이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5] 또한 소속되어야 하는 나이대에 맞는 사회기조가 특발적이더라도, 이러한 평균치를 기본 소양으로 판단하여 동집단을 따라가지 않는 사람을 사회 부적응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더러 있어서 관계 형성에 문제가 없는 사람이 현재 나이대에 걸맞은 접점(예: 대졸, 군필, 기혼, 후손 등)과 동떨어져 있다면, '평균치와 멀다 → 경험 부족으로 동집단과 어울리지 못한다 → 고로 사회성 부족이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6] 자신이 속한 세대가 무엇인지와, 평가가 어떻냐에 따라 하단에 별첨된 기술 및 예시와는 다르게 흘러갈 수 있으며 이 때문에 태생부터 지니는 것이라 여기듯 공부를 해야 이해할 만큼 불규칙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먼저 상대와 대인관계, 인맥, 인연을 맺는 이유는 다양하다. 과거 사람이란 평생 혼자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없는, 생존을 위해 거쳐가야 하는 진화적 산물에 이르러 현재는 기본적으로 혼자서 생활하는 게 가능한 만큼 그 고리는 느슨해졌지만, 아직도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여러모로 유의미한 경우가 많다. 집단 내 다양성을 통한 서로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타인의 의도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호적인 인간관계와 업무가 병행될 경우, 기억력 감퇴를 방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모르는 부분을 에멘탈 치즈의 구멍 메우듯 서로 메꿔가며 일하는 것도 가능하다.

타인과 교류를 통한 점진적인 증진, 나이듦에 관한 이해, 한 개인의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일 역시 인간관계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 관점, 공격적인 태도는 자신에 대한 평판을 해칠 수 있기에,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만큼 자기 현실과 자신이 가진 태도, 상황에 대한 냉철한 자기평가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관계는 인생에서 살면서 정말 극소수다. 혹은 신뢰할 만한 인물조차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회생활 하면서 손을 잡는 건 거의 다 자신의 이해타산이 엮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신뢰인 신용이라 함은 자신이 상대에게 이득을 취하게 할 능력이 있는가인데, 그나마 위같은 환상을 대체할 거래 관계마저 깨진다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용할 수 없는 인물[7]과는 손을 잡지 않는 게 당연하다. 이 신용이라는 것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 인간관계이며 신뢰와도 연결된다. 이득이 없는 관계는 언제든 손절 칠 수 있다. 사람은 언제든지 배신하고 그게 본인이라고 해서 다르진 않다. 남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겠다고 무리하게 기를 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기 위한 순수한 인간관계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를 부정하든지 현실을 순응시키든지를 막론하고 존중해줘야 한다. 본인이 점차 나이를 먹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성을 기르고 사람 간 관계를 맺는 목적은 허구한 날 부정적인 것들[8]을 겪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도움되면서 오래 가는 인연, 인맥, 자원, 친구를 만들어 공허함을 달래 줄 욕망으로 인해서이다.[9] 명심하자.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자 관계적 동물이다. 설령 부정적인 것들에 익숙해지더라도 이를 바람직한 사회/인류의 지향점으로 삼으면 안 되고, 인간, 인연 자체를 외로움, 허전함, 공허함의 만병통치약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태어나서 대인관계, 인연 없이 평생을 살다 죽은 사람은 지구상에 아무도 없다.

3. 사회성 향상을 위한 생각과 처세술


인지심리학 김경일 교수의 세바시 대담.

'사회성이 부족하다'라는 말은 ' 처세술이 부족하다'의 완곡표현이 되기도 한다. 감정노동이 미숙하거나, 똥군기에 맞춰 주지 않거나, 상사의 비위를 맞추지 못할 때 주로 나온다. 기업의 비리에 대해 내부고발을 한 사람들이나 독재정권 시절에 정권을 비판하고 일을 그만 둔 판사들, 군법에 어긋나는 병영부조리를 원칙대로 신고하는 사병이나 간부 등이 듣는 소리가 바로 이런 경우. 합법적이거나 정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 집단이 닫힌 사회라면 '사회성이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처세술이란 타인의 비위를 맞추고 이득을 얻거나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기술에 가깝다. 타인과 완만하고 친밀하게 지내는 기술인 사회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고 타인이 저지른 불의를 눈감아 주는 것이 과연 친하게 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는지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구분하고 넘어가야 한다.

적당히 넘어가는 것과 진심으로 친한 것, 이 사람도 싫지만 이 사람이 그 사람보다 덜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어울리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케이스들도 간혹 있다. 인간관계나 처세술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중에는 이런 케이스를 구별 못하는 것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도 의외로 많이 존재한다.

사회성, 눈치는 누군가에게 바랄 수 없는, 스스로가 파악해야 하는 요소이다. 장소, 상황, 분위기, 맥락에 따라 변하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관심가는 주제가 나왔거나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해서 그 호감이 자신에게도 적용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건 특정인물과의 관계를 넘어서서 불특정한 사람들이 바라봤을 때 그들이 느끼는 객관적인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무조건적인 친근감이나 조건반사적인 적대감보다는 거리감을 두고 여러 사람의 입장에서 자신이 가진 태도와 상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말조심해야 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보다 애초에 그 상황을 만들지 않도록 할 대상을 구분하기 위한 장기적 관점에서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고 이해하는 법을 길러야 한다. 실제로 사회적 활동이 좋은 사람은 가급적 표면상 사람 간 대우의 차이를 드러내지 않는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으며, 양자관계를 넘어서서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관계를 고려하여 다각적으로 판단한다.

사회성은 인간의 정서발달과 연관되어 있기에, 나이가 들어서도 후천적으로 향상될 수 있다. 사회적 활동은 근대사회 이전까지 생존과 무관한 요소였으나, 현대 한국사회의 경우, 정규교육 이수를 위해 성인이 될 때까지 중고등 교육을 마쳐야 한다. 이후 대학생, 사회로 진입한 성인은 생활비나 개인의 독립과정에서 근로소득이 필요하여 근로자로 일하고 경력을 쌓게 된다. 이 과정에서 회사에 귀속되어 자기 필요와 무관하게 다른 직원과 교류하게 된다. 현대인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인파에 둘러쌓여 있어도 고독을 느끼는 존재이며, 상대방과 대화하더라도 서로에게 집중하기보다 휴대전화를 보거나, 아무도 만나지 않는 상태에서도 인터넷으로 실제로 만난 적 없는 누군가와 교류한다고 여길 수도 있다.

앞으로도 사람들과 교류하며 계속 배워나간다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본인이 사회성을 향상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성이라도 잘 가꾸어야 한다. 사회성, 인성 전부 다 말아먹는다면 끝장이다.

4. 예외

5. 관련 오해

사회성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남이 평가하는 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만나다보면 누구는 나를 사회성 좋게 평가하는데 누구는 나를 사회성 나쁘다고 평가하는 극과 극의 다른 평가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회성이 좋다 나쁘다 라는 기준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좋은 평가를 받지는 않는다. 그리고 남에게 들어도 모르는 케이스도 많다.[13] 사회성이 높은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회 부적응인 면모를 발견하거나 뭉치는 것만 잘하지 실속은 따라하기만 하는 문외한일 수 있고, 사회성이 좋다고 티낼 에너지가 아까워 사회성이 없게 된 걸 수 있다.[14]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고 나쁘게 만들 수 있다. 단지 문화적 영향 때문에 사람을 평가할 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것이다. 누구에게나 사회적 결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 만일 있다면, 내가 이 사람과 어울리면서 얻게 될 평판의 인플레이션을 위한 하이에나들의 칭호질이다.

타인이 보기에 사회성이 좋다는 걸 증명해 낼 필요가 없는 상태를 지향하고 또 이를 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사회성에 해당한다. 고등수학을 심도 있게 배우는 것보다 사칙연산을 마스터하는 것이, 사칙연산만 잘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어려운 것도 잘 푸는지는 굳이 확인 안 해봐도 되겠지'란 신뢰를 얻을 수 있고 이로 인하여 고등수학을 풀 수 있을 잠재력으로 그 능력은 거짓 증진된다.[15] 즉 인간관계에서의 사회성도 실제로는 완벽히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능력을 통해 사회성을 짐작하는 과정 또한 심사 기준이 되며 이는 외집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개개인마다 지정된 사회적 능력이 실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사회성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평가 기준이 들쑥날쑥해지는 것도 이에 근거할 수 있고 '조직 내 사회성이 나쁜 사람이 어째서 우두머리로 장식할 수가 있는가?'와 '피해를 끼치는 것이 왜 재치가 되는가?'에 대한 현상도 해석할 수 있다. 이는 한 가지만 특화되어도 제3자에게는 모든 기술이 균등하다고 보아 '나보다 사회성이 좋아 보인다 = 내가 아는 사회 지식을 압도한다'란 오해와도 겹친다.[16] 어느 문제든 상관 없이 이것에 잘못 걸리면 자주 확인(심사)을 받게 되고 그만큼 결점도 자주 보이며 이러한 평가의 적합성은 외집단도 알 길이 없어 고립된다.

이것은 어떤 이가 호감을 줄 만한 끼를 따라했어도 그 사회적 평가는 이를 마친 대상에게 가하는 엄격함에 따라 달라지는 변수를 제공한다. '저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건가?' 싶은 의문 역시, 실은 그만큼 '사소한 것'이기에 되려 신경을 쓰는 것이 사회성 부족이라고 생각하여 넘기다가 재심사로 인해 평가자마다 다른 사소함의 기준에 혼란을 느껴 이후 부적응자를 바라보는 관찰자가 인식하는 기본의 기준까지도 침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가십이 사회 지식으로 바뀌는 비중 차이도 관여하는데, 사회성과는 관련 없는 정보일지라도 그 가십이 심사의 정확도를 위해 보통이라면 틀리라고 만든 문제였어도 엄격함이 적용된 대상에게는 맞춰야 하는 것으로 본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정보라고 집착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임을 알게 해주는 무가치성은 사회성이 좋다고 해서 이를 모른다고 평가된(심사에 떨어진) 사람보다 월등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설령 독자연구와 관련됐다고 한들 이를 알아야 한다고 악용하려 드는 사람에게 사회 부적응자가 되지 않기 위한 전략[17]으로서 그 정보의 가치는 무익하지 않다. 또 이를 사회적 평가에 부합하지 않다고 여길 사람에게는, 본인이 반응 안 해도 될 잡지식이 사회성과 관련이 있는지를 따지려는 것에서부터 사회성 부족으로 판단할 수 있고 이의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하여 무가치한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제거하기보단 일단은 아는 것이, 몰라도 되는 것에 대한 앎을 진짜로 몰라도 되는 것이라도 지켜서 집단에 튀는 것과 비교하여 중간이라도 유지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18] 내가 경험하지 않은 무지가 타인의 사회적 경험을 부정할 근거가 될 수 없다. 증명 불가능한 경험이 '몰라도 될 근거'가 된다면 이 역시 상대도 자신을 부정하려는 무경험을 증명할 수가 없으니 물고 늘어지면 그만이고, 또 먼저 시작한 만큼 자존심 문제로까지 뻗어가니 굳이 들춰서 위협을 가한 측을 보복할 것이다.

사회 시스템은 일종의 변검으로서 가면을 쓸 필요가 없는 사이에서 본성이 나오기도 한다. 상대의 사회성이 좋다고 당신의 지위와 상관없이 불쾌하지 않게 대해줄 거란 근거가 되지 않으며, 후술할 여러 사례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가족이거나 이웃일 수도 있고 그 가면조차도 거짓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본성을 드러내는 게 터부시되는 건 아니다. 가식 없이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은 기분 전환상 필요하다. 이때 사생활을 퍼트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에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까지 멀리하려는 안정 욕구가 더 커서 적이 아닌 내 주변에 개인사를 공유하는 지뢰가 옆에 있는지 검증하여 각자의 속사정이 흘러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 최우선이며 손절 대신 계도한다면 해 보되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낫다. 사실 넌 왜 그렇게 사회성이 없냐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는데, 본인이 여러 부적절한 태도를 보이며 적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좀 적응력이 떨어진다 싶은 사람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부모가 그러한 타입일 경우 자식에게 그러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게 내가 사회성이 떨어진다기보단 그런 사람과 섞여 당연한 것처럼 닮아가 평균치를 깎이는 바람에 외관상 어울리기 싫은 비슷한 사람끼리만 남은 것이고 이를 보는 사람은 직설로 답하는 성향을 결국 누워서 침 뱉는 걸로 보인다. 사회성은 끼를 생산할 능력이 아닌 저 사람을 곁에 둬도 '손해는 보지 않겠다'라는 신뢰를 증명하는 능력을 정의라 하여도 대충은 들어 맞는다.[19]

중장년이어도 타인의 표정, 느낌을 생각 못하거나,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사람도 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심한 편이다. 5, 60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드는 나이이고 여러가지 경험으로 인해 현상을 파악할 수 있다며 고취된 자신을 믿는 것이 더 안정적이기에 좀처럼 타인의 입장이나 눈치를 보는 일이 줄어든다. 동년배들끼리는 잘 지내는데 청년과는 못 지낸다면 '사회성' 부족이 아니라 세대 차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연령대와 말하거나 생활한다면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과의 사고관 차이 자체가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경우는 당연히 생기기 마련이다.[20] 상대방과의 나이 차가 있는 것이 아니면서 본인이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아도 사회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사회성은 정신질환의 영향을 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관계에서 요구되는 지식'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에 이를 경험에 의해 알든가 남에게 들어서 알든가 하여 고쳐 나가는 방법도 있다.

인맥이 넓을수록 사회성이 좋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폐가 있는데, 대중매체의 발달로 인간관계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은 인맥의 넓이보다 그 깊이를 탐하게 되었다. 생산성이 낮은 인맥은 유지비용 대비 지극히 낮은 결집성을 나타내고, 과거와 달리 친구나 지인이 많다고 더는 인생의 보험으로 작용하지 않고 타인보다는 나 자신을 보험(자기개발)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가꾸는 게 더 현명하다는 인식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유불급인 인맥의 불필요성을 설파해 줄 중간다리가 없으니 주류가 되지 않는 건 당연하며 외모, 재력같이 선천적 우월성으로 인맥이 다가오는 걸 마치 본인이 사회성이 좋다고 착각[21]하여 아싸를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회 부적응자라는 선입견을 고착시키게 만든 것도, 조금만 틔면 부적응으로 적대시하는 박해를 현대에 다다라 개성(돈)을 창조하는 재치였다는 태세전환에 해탈이 와 자연스레 원인 규명에서 멀어진 것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인식 박제가 쉬운 커뮤니티의 존재 또한 상기된 원리 중 하나로 작용하는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현상으로 인해서다.[22] 물론 기회주의로만 봤을 땐 인맥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야겠지만, 상대가 나를 인맥이라고 여기기 위해서는 그만한 능력이 요구되므로 두루 갖추면서 줄타기 할 필요가 있고 이를 알릴 최소한의 협조성을 만족해야 한다.[23]

남들과 어울리지 않으면 성급하게 사회성이 문제 있다는 고정관념도, 개인이 아닌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경우 개개인의 신념에 따라 다수를 배척하는 현상에 의한 원인도 있다. 사회성으로 인간을 판단하기 전에 그 사회가 적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인지 먼저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범죄자들에게서 배척받는 사람이 사회성이 문제가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시대에 맞게 편승하여 사장할 수도 있는 집단적 합의이기에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24] 또한, 길잡이 삼아 특정 문헌을 읽으라고 지정해도 배웠다고 자만하는 근자감으로 인해 이미지에 먹칠할 우려가 있다. 이는 여기라고 예외는 아니며 괜히 어중간한 사회성을 보이는 게 가짜 사회성 부족보다도 배척받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당신이 정말로 사회성이 바닥인데 대화를 걸어 준다는 건 어쨌든 이미 아우라[25]를 식별하고 상대가 헛소리로 기분을 곱창낼 수 있다는 걸 각오한다는 것이니 화를 내기도 전에 대화를 멈추겠지만, 구분하기 애매한 사람은 알아가는 과정에 뒤통수를 얻어 맞아 정상인의 평균치를 깎아 먹기에 괜히 이러한 행보를 보인다면 인간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꽂히게 할 수 있으며 다른 외형 요소로 판별법을 우회하도록 만들게 된다. 사회성은 떠먹여 준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정수에 맞게 꾸려나가는 건 본인의 의지에 달렸으며 문서 내 지향점을 얻어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만이 추후 본 게임에서도 무수한 주제의식 속 갈피를 추론할 수 있는 뼈대가 완성된다. 이러한 방향을 정해주는 것은 동화(同化)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다수의 사회, 소수의 사회, 높으신 분들의 사회, 일반인들의 사회 등은 요구되는 사회성이 모두 다를 수도 있다. 이상적인 사회성과 현실적인 사회성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도덕성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제로는 낮은 편일 수도 있어서 진짜 착하게 살면 오히려 밑에서 배척받거나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사실 착하거나 모범적인 것도 아래보다 위에서 더 잘 통할 확률이 높다. 편견과 달리 부모를 가진 아이들은 의식주를 제공받는 고아보다 범죄자가 될 확률이 5배나 높게 나온 적[26]도 있으며 어금니 아빠처럼 구성원이 서로 교체되기 쉬워서 당연할 수도 있으나 중산층과 하류층은 범죄자일 확률 차이가 적다.[27] 이렇듯 예외에 예외를 무는 꼬리 물기의 반복이라 사회적 평가의 기준이 불완전하며 지식보다는 체득, 체득보다는 환경에 좌우되는 개념이기 때문에 공부보다는 실전에 써먹어야 하는 사회성이 체감상 더 어려운 편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인 사회성만 지키면 터치 안 하는 환경에 살다 보니 상대방의 의도를 확대해석하는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아 적당히 어울려도 관계는 유지된다는 낙관적 성향이 발현하게 되고, 실리를 무시한 겉치레식 말장난이 모든 환경에 적응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공부가 본인 기준 최소한의 지식으로 형성된 기술로도 충분한 사회성보다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고 이는 가능한 많은 지식을 몸 담아 대응하려는 신중한 성향과 비교해도 그리 이상할 게 아니다. 정답은 없다. 사람들은 정답이고 싶은 것을 흉내 낼 뿐이다. 사회 부적응의 요인이 된 것들돌이켜 보면 주류가 담합해서 문제로 보이게 선동한 것에 가깝다. 규칙에 예속되지 말고 환경에 맞게 사회성을 변형시키는 센스를 연마해 나중에 문제가 터져도 자기 선에서 처리가 가능하고 오해의 여지를 줄일 수만 있다면 이 이상 지탄받을 이유는 없다.

사회성을 좋은 정신상태의 척도로 삼을 수 없다. 익명에서는 사회성이 의미가 없고 가정 내 폭군이라도 외부에선 알 수가 없으니 사회성이 좋아 보이는(실제로도 좋은) 사람일지라도 멘탈 관리를 위해 애먼 사람에게 감정을 배설하고 있을지, 정신상태를 유지할 에너지를 바깥에 몰빵하고 실제로는 쓰레기집에서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5.1. MBTI와 사회 부적응 관련

MBTI가 인간관계에서 16가지 유형으로 상대와 자신을 이해하는 성격분석론으로 급부상한 이래, MBTI를 실제 사회와 비교하여 확증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일단 MBTI에 따라 자신과 남의 성격을 외향과 내향, 직관 등으로 바로 굳혀버리는 믿음은 스스로가 가진 정신적 변화나 새로운 시도, 다른 가능성을 오히려 막을 수 있으며 자신과 맞는 성격 유형이 사회성이 없다고 해서 본인이 사회 부적응자라는 근거도 없다.

사회 부적응자와 장애인의 정의는 다 다르지만, 본인 눈에 거슬리는가로 즉석에서 구분짓는 건 비슷하다. 다만 자업자득이라며 책임을 몰아줄 수 있는 사회 부적응자를 조롱하는 게 도덕 지향적 사회에서 권장된다. 마치 공적으로는 사회성 부족(사회 부적응자), 이외에는 부적응자(장애인)로 부르는 등 상황에 따라 기존 장애인의 멸칭을 대신하며, 장애인처럼 보이는 범주에 들어간다면 공공영역에서의 사회 부적응자로 상향할 수 있다. 이때 사회성과 정상인은 불가분의 관계로 정의(오해)되며, 자신이 보기엔 장애인이라고 생각되면 부적응자가 되는, 장애인과 부적응자로 보이는 특징 중 하나라도 걸리면 사회성 부족 → (부정적인)장애인 대우를 받을 만한 인간이라는 기적의 논리가 탄생한다.[28] 이는 용모가 촌스럽다(=덜떨어짐 → 장애 티)면 과거사까지 사회성 부족으로 끼워 맞추는 것도 위 같은 사고방식과 연관된다. 여기서 확증과 별개로, MBTI와 같은 심리조사를 통해 단순 사회 부적응자를 벗어나 긍정적으로 작용할 만한 개성이라는 장애인의 얌전한 대체어로 해석될 소스를 제공했다.

인터넷 중독이나 다른 이유로 사회에서 단절되고 그 기간이 상당히 길어질 경우, 사회적 고립은 개인에게 심리와 정서상 위험한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또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올바르지 못한 언어습관, 과격한 표현들의 사용은 경우에 따라 반사회성을 부추긴다. 이는 사회활동 시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거나 잘못된 행동의 충동성을 야기할 수도 있다. 때문에 본 문서도 인터넷에 속하고 열람하기까지의 경과를 따져본다면 나도 사회 부적응자여서라는 염려를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과 많이 대화해보라'고 얼버무리고 남들에게 약점이 까발려져 조리돌림 당하는 것보다는 이 문서를 통해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문제를 탐구해보는 게 더 나으며 장기적으로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들끼리 뭉친 과격 집단을 조롱했던 본인이 같이 엮여 피해를 볼 확률이 낮아진다.[29] 사회성의 정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위 오해가 틀리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성은 단순히 남들과 따라가기 위해 모방하는 게 아닌 그 모방이 상대의 심리에 근거하여 맥락상 옳은 과정인지를 증명해내는 동시에 무슨 의도로 대화를 꺼낸 것인가를 추론하는 과정을 단축시키는 것이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핵심이다. 되짚어보면, 제대로 가르칠 때 못 알아듣는 쪽에서는 사회 부적응자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개선의 효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그 핵심을 알려주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30] 부적응자와 어울려주는 사람은 안타깝지만 같은 짝인 경우가 많으며 이는 사회성을 좋게 만드는 지식까지는 위 논리대로 실천해봤자 공유될 수 없기도 하다는 의미다.[31] 세상에는 부적응자와 상종하기 싫다면서 막상 상위에 속하도록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노력이 욕받이에만 기울어진 채로 사회성이 좋다고 자뻑하는 사람들이 넘친다. 약육강식이라지만 정작 본인이 약자가 될 시의 포지션을 배운 이는 드물다.[32] 이는 그러한 성찰을 되돌아보는 자기 지침서를 겸한다.

진실되게 관계를 맺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일부 문단에서 서술하는 방식에 거부감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먼저 헌신하면 상대도 보답을 해줄거라는 순수함이 통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그런 도박을 할 만큼 믿음을 돈 이상의 가치로 두는 건 동화에서나 다루어야 될 정도로 자기 밑천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정 운운하는 건 사회적으로 불리한 자기 공개로서 그런 알량한 믿음으로 세상을 판단하면 인격이 피폐해질 수 있다. 본인의 권리는 각자가 알아서 챙겨야지 세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고 그것이 자신으로 하여금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율을 시켜주며 결정적으로 배신을 당했을 때 상처를 덜 받는다. 이는 사람에서 오는 상처를 극단적인 환경에서 역치를 올려 웬만한 상황에선 무난하게 넘어가도록 경험자로서의 마음가짐을 투영시켜 도우고자 할 숙명이다. 군생질서를 위해 장애인을 나누는 기준처럼, 사회성 좋은 척 연기하여 생사람 잡는 짓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을 상회한다. 그러니 사회 부적응자라는 소리를 들어도 주눅들지 않기를 바란다.

5.2. 신빙성과 실효성 관련

결론부터 말하면, 본인의 사회적 능력이 이 문서에 언급되는 것과 관련이 멀다는 이유로 좋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간혹 '여기서 기웃거릴 정도면 얼마나 사회성이 떨어지는 거냐?'로 시작해, '왜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냐? 이런 데에다 끄적일 정도면 굳이 안 겪어도 될 만한 상황인데 사회에 적응하질 못하니 억지로 알게 된 거 아니냐? 그러니까 사회성이 없는거다' 식으로, 내가 이 문서 및 하위 예시에 해당하는 상황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하여 문서 전체를 싸잡아 신빙성 없는 뇌내망상으로 치부하기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 현실에서 알려주지 않는 사회성을 음지에서라도 배우고자 하는 노력이 되려 사회성 없는 티를 낸다는 것이다.

사회성은 저절로 습득하는 거지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지만, 늦게나마 본인의 사회적 헛점을 깨닫고 후에 있을 상황을 대처하기 위해서라면 이거라도 인용하는 게 좋다. 비단 위키뿐만이 아닌 어느 매체에서나 그렇듯,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주제는 그것이 사회현상일지라도 휘발성이 강해 맥락을 이해하기도 전에 흥미성 위주의 오락으로 소비되곤 하나 여기서 열거한 경험적 서술마저 세세하다는 이유만으로 통째로 취사선택한들 그릇된 인간 판별법으로 변질될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면, 결국 신빙성을 따지기 이전, 현상을 앎으로서 대응할 수 있는 갈피를 체득하려는 사회 초입 구간에서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하여 습득하고 적용하는 통찰력을 후천적으로 길들이기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된다.[33] 본인이 보기에 신빙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와 관련된 정보를 활용하는 사람을 제재할 수도 없다. 현실에서는 서열을 무시할 수 없고[34], 실은 상황에 맞게 했는데 본인이 아는 선에서만 신빙성이 없어 보인 걸수도 있기 때문이다. 평가하는 측은 극히 일부의 현상만으로 사회성을 판단한다. 순응도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들은 그것에 출처가 없더라도 이를 앎으로서 가치를 매기며 불확실하더라도 현상을 추론할 근거가 될 수 있다.

상대(특히 성인)의 사회성을 길들여주겠다고 시간을 허비할 사람은 없다. 각자 알아서 맞추는 것이며 실효성에 관해서 따지려는 개개인 또한 입장은 같으며 그 역할을 자원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현실에서 보다 더 신빙성 있는 정보가 제공되는 걸 부적응자가 알도록 계도할 수 없다. 사회 지식의 갈증이 그쪽 분야에 무능하다는 의미로 간주해 우열을 정하는 것을 현실에서 공감해 준다면 결국 본인도 그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등급을 나누는 건 무의미하고[35] 실제 효과가 있느냐를 구분짓는 건 대중심리와도 충돌한다.[36] 어릴 때 안 배우고 뭐했나 싶은 사회 부적응자에게 반감을 가지는 건 자유다. 근데 이것이 극단주의로 빠져선 사회성 좋은 인간만 빼고 모조리 도태시키면 서로를 존중해주는 무탈한 분위기가 생겨날 것이란 발상은, 당장엔 실효성이 있겠지만 인적 자원의 효용으로서는 낭비다. 인문학적 국격은 사회에 걸맞은 우열을 나눈다고 지켜낼 수 있는 게 아니다.[37] 사회적 저평가가 완료된 상태에서 신빙성 있는 것만 줍줍한들 부적응자라는 타이틀(=기억)은 유지되니 뒤늦게 수정하는 것도 별 도움이 안 된다. 다 알 만한 내용이라 그 누구도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는 알려줬겠지'라는 가정을 앞세워, 이미 배워놓고도 실천 안 하는 멍청이로 조롱받아도 이상할 게 없다는 인식을 재생산하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그렇기에 여기서의 균형은, 기회의 총량을 늘려 스스로가 비교할 수 있는 정보를 먼저 접하도록 돕는 대안적 환경을 꾸리는 것이 신빙성 대비 실효성 차원에서도 유리하며, 이를 통해 직접 나와서 배워보라기 이전 스스로가 차라리 '나와서 배우는 게 낫겠다'라고 느낄 수준의 기반이 마련되어야지 타인에게 피해를 최소화하는 사리분별력도 안정적으로 기를 수 있다.

피해를 덜 끼치는 방법이 있다면 갈아야 한다. 다수가 표본이 됨에 따라 후속 세대에까지 영향을 끼치도록 이미지를 더럽힐 필요는 없으며 그 필요악은 소수가 대표로 경험적 지식을 수용하고 정립해 수록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개선할 방도는 남겨놓는 것이 여기서 꼬집을 수 있을 문제 중 '신빙성 없는 정보가 사람을 망친다'라는 우려 때문에 쉬쉬하는 것보다, 그나마 덜 망가진 사람임을 스스로가 증명해내는 의욕을 갖추도록 도울 수맥을 남기는 것이 울타리를 치는 입장에서도, 상대가 사회 부적응자임을 증명할 시 이를 보는 사람에겐 '이런 거나 신경 쓸 정도로 사회성 외엔 내세울 게 없는 건가?'라며 의도치 않은 자기 공개로 부적응자를 욕하는 쪽도 사회 부적응자가 될 수 있다는 명예 실추 가능성을 방지할 목적과 수고를 들이지 않고 진성 부적응자를 조롱할 명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이(理)를 정돈할 자원을 충당할 수 있으니 본인들에게도 이득이다. 자신의 사회성을 증명할 독립된 조직을 찾아가라고 조언해도 이미 내부 평가가 진행된 이상 그 존재를 부정하는 쪽으로 저의를 해석할 가능성이 높고, 경쟁자의 시선에는 '사회적으로 완벽하면 모든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는 풋내기의 자찬이자 어울림의 자격만을 집착하고픈 외부와의 단절을 고하는 부적응의 신호로서 사회적 결점을 드러내는 역할만 할 뿐이다. 또한 사회 부적응자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적 변수 속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할 인적 자원에 포함시킬지의 선택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론이라도 사회를 접해보는 게 당장의 인간관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서로 간의 능률을 높이도록 배려하고 더 나아가, 집단주의에 치중된 접근법을 개선하기 위해 본인의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지 구별해내는 자기객관화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사회성을 증진시킬 조력자는 없다고 단념하되 희생양들의 반면교사라도 인용해서 본인의 행동에 문제가 있는지를 따져서 교정을 시도하는 것이, 사회 구성원이 언급할 때까지 상태가 심각해지는 걸 모른 채로 자만하는 것보다는 낫다. 사회에서 겪을 수 있을 예시의 축적은 제아무리 시덥지 않아 보여도 알고는 있다면 피차 불손을 들이밀 의도로 사용하려는 상대에게 방어하는 기술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는 본인이 부적응자가 아니어도, '무슨 태도를 취해야지 중립을 정제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다수에게 새로운 특징이 제시되어도 평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모의할 수 있으며 외집단을 거친 내집단의 재평가에 대비하기 위한 처세에서도 고점을 따내기 유리하다.

사회성은 신빙성에 따라 고평가되지 않는다. 사회에서의 신빙성의 정의는 그것을 신빙성이라 일컷는 조직의 의사에 의해 굴러가며 그에 만족한다면 아무리 헛소리라도 신빙성이 있다고 평가한다. 이것은 본인에게는 금시초문인 정보들이 타 조직에선 지식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저 사람이 얼마나 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가?'라는 사회적 능력을 평가해 그 출처가 정의된다는 의미다. 즉 사회 부적응자가 제시하는 신빙성 있는 정보란 굳이 남이 알 필요가 없을 것으로 상대는 예상한다. 애초에 이들에게 정보는 언제 발설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아싸 화법으로 묻혀 유기된 지식으로 변질되고 만다.[38] 이 때문에, 조롱당할 게 무서워 출처를 명확히 따지는 것보다는 경험적 지식으로 무해함을 쌓는 것이 사회성이 좋아 보인다면 차라리 그쪽이 나으며 그 다음 본인의 능력으로 입지를 쌓아 신빙성을 증명할 수 있는, 사회적으로 유효한 단계로 나아가야지 집단 간 협력적 실효를 기대할 수 있다.

'말을 못 알아 들음 → 사회 부적응자'가 아닌, 부적응자로 보이니까 말도 못 알아 먹겠거니 하여 대화해 보지도 않고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미리 판을 깔고 간 게 아니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어차피 본인 뜻대로 사회 부적응자는 안 바뀐다며 제거하려드니 당사자에게 신빙성을 확인해 볼 기회는 없다. 그럼 여기서 신빙성을 따진다 한들 본인에게 뭐가 이득인가? 부적응자였던 적이 없는 것을 증명하려면 부적응자의 특징이 사실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사회성 부족처럼 보이는 걸 실제 행위로 끼워 맞춘다면 정확한 근거여도 부적응의 유무를 분별할 수 없다. 즉 지적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다시 말해, 사회 부적응자와 섞이지 않게 등급 순도를 유지할 정보가 없었다는 뜻이 되므로 본인도 부적응자, 알고 있었어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을 공개하는 것 역시 '부적응자와 어울렸다 → 부적응자였던 시절이 있었다'로 위 명제에 위배되며 결국 정보에 신빙성을 신경 쓴다는 의미는 본인이 그러한 신빙성을 알 만한 환경을 접했다는 얘기가 되므로 자승자박만 되어버린다.[39]

사회 부적응자의 특징도 따지고 보면 평생 살면서 한 번도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일상에서 겹치는 것들이다.[40] 이 역시 순결성의 아집을 통해 그 누구보다 신빙성에 목을 메야 하므로 내집단의 카더라식 정보도 부적응자를 가르는 기준과 같이, 자신이 부정하는 정보와 부정당하는 측이 보는 상대의 정보 역시 양측 근거가 부정되니 '누가 먼저 부적응자의 기준을 다수와 부합하도록 선동하려는지를 내기하는 꽁트'로 주제가 새게 되며 이는 '내가 보기엔 너는 부적응자이니 해선 안 되고 나는 부적응자가 아니니 해도 되는 것'으로, 특징에 맞아서 부적응자가 되는 게 아니고 그렇게 보이니 특징과 엮어서 부적응자가 되는 논리로 변한다. 이때 몰아주고자 할 자원으로부터 그 특징에 신빙성이 없다고 할 시 '과몰입도 부적응에서 오는 특유의 집념이니 본인 스스로가 사회성 부족을 보여주는 일종의 열폭'으로 덮는 게 가능하므로 이 역시 신빙성 없는 정보로 부적응자를 판단하는 건 마찬가지인 셈이다. "사회 부적응자가 실제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건 사실이지 않은가?"에 대한 신빙성이 만족돼도 그것은 당사자에게 따질 일이지, 특징에 부합한다 하여 이와 무관한 사람을 배척해 사회 적격자로 등극하는 건 다른 문제다.

사회 부적응자를 같은 인간으로 취급해야 하는 것이 의아하다면, 소각이 아닌 재활용으로 본인의 사회성을 증명할 수 있는 분리수거의 일종으로 그 현안을 전환해보면 된다. 애시당초 부적응자가 사회 암덩어리라고 해서 살처분이나 강제 입원을 시키자는 주장은 인터넷에서나 할 줄 알지 밖에서는 함부로 꺼낼 수 없다.[41] 병패를 적극 방치하여 본인들 격 떨어지지 않게 부적응자를 조기 분리 및 사회에 나오지 못 하도록 사회 시스템을 조성하는 온건(?)한 방식을 주장하는 것도, 결국 이를 주변 사람에게 마음 놓고 꺼낼 만한 것인지는 그 격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선 안 하느니만 못 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유전학을 통해 개량해봤자 환경이 따라주지 않으면 물리적 야만에 걸맞은 사회성으로 오염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치와 히틀러처럼 자신들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본연의 우월감으로 하여금 신빙성을 증명할 게 아닌, 그 신빙성을 설파하도록 자원을 정갈하는 쪽이 본인 입으로 사회성이 좋다고 광고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문제를 풀 수 있는 것과 이를 상대에게 가르쳐서 직접 풀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능력을 지닌 것중 개념(사회 기술)의 이해도를 증명할 기회가 많은 사람은 후자이기에.

6. 사회성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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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헌, 교양서

8. 기술 및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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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관련 문서



[1] 임수진, 「미래 인재를 위한 ‘사회성’ 개념 및 구성요소의 재정립: 사회성 함양을 위한 대학 교양무용수업」, 한국연구재단, 2022, p.9. [2] 남과 사귀기를 좋아하거나 쉽게 관계를 맺는(≈친화력) 성질. [3]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사교성이 떨어질 순 있어도 자기 힘으로 1인분을 끝내면 사회성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항으로 비유하면, '사교성 = 크기 / 사회성 = 여과기'로 나타낼 수 있으며 사회가 보는 능력은 그 수질에 따라 차후 거래 유무가 결정된다. [4] 다만 반목형의 경우 자신이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타인의 행동에 의해 감정이 상하는 것은 엄연히 타인의 잘못이다. [5] 어린이가 성인들 사이에서 엉뚱한 말을 해도 부모가 아닌 그 애를 지목하여 사회성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6] 이들에게는 한두 명과 깊게 사귀는 것보다 수십, 수백 명과 연관되는 공통점을 맞춰주는 것을 인품으로 여기며 이를 따라가지 않으면 큰일나는 줄 안다. 심지어 상대의 사회성이 부족한 이유를 본인도 모르는데 남들이 다 따라하니 '그런가 보다'하며, 집단 현상을 근거로 삶의 방향이 다른 것을 비교해 사회성이 부족해보이는 걸 말미암아 사회성이 뒤떨어진다고 본다. # 그리고 이게 극단적으로 흐르면 전체주의가 된다. [7] 빚을 갚지 못하거나, 일할 능력이 없거나, 사회생활에 하자가 있거나 등. [8] 반복적인 읽씹, 무응답, 무반응, 거절, 혐오, 협박, 폭행, 폭력, 배척, 욕설, 절교, 강퇴, 파문 등. [9] 교우/동료/연애/결혼관계를 구태여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해당한다. [10] 만약 본인이 정신질환을 가졌어도 상황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메타인지가 가능하다면 최소한 이 문서의 내용들을 인용해도 나쁘지 않다. [11] 직장을 그만두거나 떠났을 때는 남남인 케이스가 많다. 어떠한 조건이나 지위에 따른 만남은 적당히 마음의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다. 결국 이 사람과 오랫동안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 적당히 상대방과 거리를 두거나,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일단 겉으로는 그렇다고 말로만 수긍하여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12] 전체주의적 마인드가 팽배한 조직에선 열정 페이를 개개인에게 강요하는 건 근로기준법상 걸고 넘어질 게 많지만 이를 쉬쉬하여 사문화(死文化)시킬 수 있는 것에 비해, 그렇지 않은 문화권에서는 잔업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에게 사회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되려 이상한 취급 당하며 대부분 문제라고 인식한다. [13] 이것은 어쩌면 사물, 상황을 인지, 인식하고 분석하는 능력에 관련된 문제일 수도 있다. [14]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만큼의 돈과 노력이 필요하다. 절약 재테크에 몰빵해 인간관계가 끊긴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 경우 원래 사회성이 없었다기 보단 이를 증명해 줄 자원이 떠나가 남들이 알 방법이 없기에 사회성이 없어 보이는 것에 가깝다. [15] 다른 경우로, 서점에서 대화법과 관련된 책을 훑어보는 것이 사회성이 좋아서 보이는 것과는 어색하다고 판단해 사회성 부족으로 오해하기 쉽다. [16] 각각 10문제를 풀어서 오답이 없는 사람과 1,000문제에서 10개를 틀린 사람 중 겉으로는 만점을 받은 사람의 사회성이 좋다고 하겠지만, 1,000개의 경험을 알려줄 수 있는 외부인의 존재로 보아 후자의 인간관계가 더 넓(었)음을 예상할 수도 있고 이에 전자가 같은 상황일 시 모두 맞춘다는 보장도 없다. 도리어 사회적 틈을 지적하는 평가자의 상부상조를 개인의 욕구로 활용해 영향력을 감시자로 보완하는 쪽으로 그 기준을 악용할 수 있다. [17] 적어도 '내가(이 사람 말대로) 진짜 사회성 부족인가?'라는 의문을 초월해 상대방이 입으로 밝히기 꺼릴 얼토당토아니한 사유는 아닌지를 미리 앞서 판단해 볼 수 있을 자료가 되며, 평소에 본인도 하면서 나한테만 아닌 척 배째는 건지 알 수도 있다. [18] '상식은 살면서 다 알게 될테니 알려 줄 필요가 없다 → 상식이라고 생각되니 지워도 상관 없다'는, 본인에겐 성립돼도 그건 본인과 그 주변 한정이지 이를 모두가 아는 사회적 지식이라고 아는 사람이 본인보다 앞서 은폐해 '무지해도 될 것'도 몰라서 같이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이 싸다는 상황까지 막을 수 없다. 부적응자도 식별 가능하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시도가 부적응같다는 이유로 없애자는 것은 사회 부적응자에서 정상인으로 재평가받기를 원하는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다. 혐오표현을 피하는 것이 그만큼 해당 표현법이 무엇인지를 최대한 많이 알고 있어야지 가능한 것처럼, '혐오와 무관하다 → 혐오표현을 모른다'가 아닌 '문제 될 것을 알고 이를 피해 원래부터 무관했던 척 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 [19]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현실 감각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로 증명할 수 있다. 끼가 좋아도 남한테 잘 속아넘어간다는 건 자신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기에 사람마다 배척하는 기준이 다른 것도 이러한 안정 욕구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20] 젊은 사람은 이를 두고 요즘 말로 꼰대, 틀딱이라 비난하고 나이든 사람들은 버르장머리없는 요즘 것들이라 하면서 비난해 갈등에 빠지는 경우가 흔하다. 사회적으로도 최근 연령 간 세대격차가 커지는 상황이라 더 와닿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많다. [21] 실제로는 욕구발산이나 합의금을 타먹기 위해 맞춰주는 것에 가깝다. 당신이 싸가지 없게 틱틱거리며 상대 기분을 잡치는 행위를 받아준다고 해서 _서로의_ 사회성이 좋다고 착각하여 다른 시점에서도 똑같이 대우해줄 거란 건 욕심이다. [22] 우월성으로 형성된 인맥은, 그 우월성이 사라져도 대체 가능한(후천적일 수 있는) 우월성이 없으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23] 다만 그 협조성이 친구 초대, 부계정을 통한 코드 생성 셔틀 역할뿐이라면 능력을 증명 해 줄 인맥으로 보여질지는 애매하다. [24] 예시로 아동학대를 하는 부모에게 타인이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 것은 과거엔 당연했고, 따르지 않는 이들은 사회 부적응자 취급을 받았지만 현재로선 아니다. [25] 사회 생활을 해보면 멀리서도 사회성이 어느 수준인지 대강 판단할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26] https://www.scourt.go.kr/portal/news/NewsViewAction.work?seqnum=5&gubun=719&searchOption=&searchWord= [27] http://www.newsdaily.kr/news/articleView.html?idxno=80835 [28] 당연하지만, 장애인(=사회 부적응자)처럼 보인다고 하여 실제 장애인 등록이 되지 않는다. [29] 과격 집단에게 자생된 지식을 추가로 학습해야 한다는 것은 곧 그 상종하기도 싫다는 사회 부적응자에게 걸려들지 않도록 표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는 뜻이다. [30] 사람들과 대화해보라는 의미도 파고들면 책임 회피에 가깝다. 정작 본인과 대화를 시도할 시 거부반응을 보이고 떠넘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급보다 아래인 사람들에게 먼저 배우라고 해도, 그 사람들 역시 같은 마음으로 급이 낮은 사람들에게 먼저 배우라고 말할 것을 예상할 수 있으며 이때 얻어 낸 핵심은 사회 부적응자의 밀도가 짙어진 환경으로 오염돼 평가자 입장에선 같은 급끼리는 악화만 된다고 보는 편견이 만들어진다. 뭐 본인들도 공짜로 배운 건 아닐테니 지식을 공유해 달라고 부탁해도 알아서 배우라는 점에서는 엄수하는 게 일반적이나, 상황을 뒤집어서 본인과 같은 급들이 평가할 때, 그 정보가 '알려준다'라고 할 수준으로 납득할 만한 신빙성을 보장받는다는 근거는 없다. [31] 사회 부적응은, 이미 나같이 불만인 사람을 만나 경고를 받았음에도 나를 만나기까지 변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되고 이러한 배움(자세)의 무성의함을 이유로 말을 해도 못 알아먹는 인간으로 (본인은 말을 하지도, 하는 방법도 알지 못해도) 확증할 만한 흔적으로 본다. 결국 아무도 제대로 된 사회적 기술을 가르치지도 않았으면서 '의지박약인 이상 가르치는 의미가 없으니 밑바닥까지 떨어트려야 고쳐지는 인간'으로 부적응자를 정의한다. 이때 더 발전하면, 이 상황을 고의로 노린 거 아니냐며 불신감을 느끼고 '못 알아들음'에 관하여도, 본인이 이를 인정하면 내면에 있을 피해의식적 작태와 졸지에 풍족된 유전자의 한계치로 꾸밈당했다는 가능성조차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 되므로 이내 부정(포기)하려고 든다. [32] 따지자면 약자가 사회 부적응자로 보이도록 자처했다기보단 사회화 이전 관계를 확장하는 단계에서 그 길잡이를 맡는 멘토의 유무가 본인과 똑같이 있었다고 생각하여 "나도 이해한 사회성을 너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순전히 노력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이다."라고 조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33] 예를 들면 사기로 비유할 수 있겠다. 사기를 한 번도 안 당해 본 사람이 사기 수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처럼, '상식만 지키면 될 뿐인데 이에 당한 멍청한 인간들의 조언(사회적 지식)은 쓸데가 없다'고 자만해도 그 상식이 역이용된다면 무지 상태에서도 과연 안전할 수 있을까? 경험에 따라 해당 조언이 꼭 필요한 사람이 있으며 그저 당신은 운이 좋아서 걸려들지 않은 것뿐이다. 유난 떤다고 넘길 게 아니라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막상 속이려 들 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는 이를 아는 상태로 역공할 수 있는 편이 차라리 낫다. [34] 여기서 신빙성 부재에 대한 의문을 구하는 것과도 충돌한다. 굳이 그런 것까지 알아야지 정상인으로 취급하는 상위 인물을 배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 철학같은 지식은 단순히 몰라도 취향 차이라는 이유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무지가 곧 결점이 되는 사회적 지식은 그 자체로 의심군으로 지목될 위험성이 있으며 본인이 거부한다고 이들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필드에서 모른다는 건 이들의 세계관에선 이미 늦었다는 걸 공언하는 것과 같다. 이때 본인의 사회적 지식과 시대착오적이라는 이유로 나온다 한들, 과연 근거 요구에 불응한 사회 부적응자인 미꾸라지로부터 빠져나온 사실이 당신의 사회성이 좋다는 것을 증명할 신빙성 있는 선택이었음을 제3자가 보았을 때, 자본과 사회적 능력을 증명하는 실효의 불가분 관계를 무시할 만큼 합리적인지 아니면 모두 다 같은 상황인데 지 혼자 짜치는 비협조적 변명으로 들릴지는 알아서 고려해 보자. [35] 여기에서의 갈증은 달리 말하면, 본인이 사회성이 없으니 이를 탐닉하려는 열등감으로서 그 자체로 사회 부적응에서 오는 것이기도 한다는 건데 막상 이를 무시하면 자기 보호 측면에서는 안전하지 않다. 신뢰만으로는 위험하고 이를 보완할 지식을 알려는 시도가 사회 부적응이라는 모순을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법조인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가서 "법이란 살면서 누구나 다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건데 그동안 넌 뭐했길래 상담하러 가냐? 법에 대해 무지한 티 좀 내지 마라."라고 따지는 것과 비슷하다. 법에 대해 공부하는 걸 들키면 법에 무지한 것이니 무시당하지 않게 배우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도 이상하며 이를 사회 지식에 대입해도 차이가 없다. 굳이 알 만한 환경이 아니면 그 중요성은 부적응의 우매함으로 본인의 무지에 있어서도 만만해진다. [36] 우호적인 사람이 사회성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데 동의할 것인가? 자신과 연관된 사람이 사회성이 없으면 '사회 부적응자는 같은 급끼리만 어울린다'는 일상이론에 따라 당신은 조직에서 나가야 하는가? 그럼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본인이 사회 부적응자라고 판단되면 모두를 위해 손절하는 것은 타당한가? 사회성 좋은 조직을 꾸리기 위해 사회 부적응자를 선별 및 유배하는 것이 아닌, 비록 부적응자일지라도 조직과 화합할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사람이 사회성의 정의에 더 부합할 것이며 이를 헐뜯는 건 본인의 명성에도 좋을 게 없다. [37] 혹여나 이것이 가능한 공간을 조성하여도 그 정보의 출처가 논란이 된다면, 결국 사회적 성공 유무에 따라 신빙성이 천편일률적으로 오염되는 한계상 정보를 신뢰한 사람 모두 사회성 부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38] 사회학적 선점 우위를 점한 사람의 입장에서 이러한 오용은, 의문을 좌지우지할 특혜를 얻어 내 사회적 지위로 누계시키기 위한 지식 파편화를 조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갈대로 수정된 사실은, 피해가 발생해도 방관한 입장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근거를 들어 면피가 가능하도록 아웅할 수 있다. [39] 독립 영역으로부터 생길 예정된 갈등을 막기 위해서는 현재진행형인 독립된 정보를 알아야지 분리가 가능한 고로 사회성이란 부적응자와 상종을 하지 않 만큼 자연스레 향상된다는 조건도, 하지 않 만큼이나 모순된다. [40] 간단하다. 특징을 지어야 부적응자를 양산하고 본인의 사회성 부족을 자칭 정상인에게 면책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속한 부적응자는 정상인의 사회성 부족을 질타할 수 없도록 메타에 깔려있고 그쪽 의견을 신빙성 있다고 하는 게 본인에게 이득이면, 무임승차를 당했다는 컨셉질의 분업화로 부적응자가 아니면서 그 급을 나누는 정보가 질적으로 상향 평가되게 작용한다. [41] 더 거칠게 말해, 홀로코스트 역시 사회성이 부족한 수전노에다가 배후자본설에서 나오는 대로 판단된 유대인들을 핵심으로 하여 그 외에 당대 독일 사회에 실제로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사회 부적응자들은 갱생의 여지가 없으니 전부 노예로 평생 동안 부려먹히다가 죽어야만 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단정한 것 때문에 자행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전인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멸시를 받을지언정 진짜로 떼죽음 당해 마땅하다며 실행을 한 사람이 왜 없었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