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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7:54

불멸의 이순신/시대 구현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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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표적인 오류3. 자잘한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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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멸의 이순신 속의 시대 구현 오류를 다룬 문서.

아래는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오류들이다. 제작 시스템적 한계나 드라마의 예산적 한계도 있고, 쌓인 노하우도 적고, 이런저런 재현을 납득이 갈만하게 해줄 전문가도 공짜로 일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제작 과정에서 천 사람이 한 마디 씩만 해도 천 가지가 되는 수많은 피드백(혹은 불평)을 최대한 수용하려 노력한 흔적도 보이기 때문에 개선된 점도 많다. 그리고 아래에 나온 오류들 중에서 일부는 이후 다시 보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전문가의 말을 빌려 몇몇 미스를 인정하며 짚고 넘어가기도 했다. 또한 드라마를 제작하던 1990년대 말 ~ 2000년대 초에는 아직 이순신 관련 연구가 부실하여 취득할 수 있던 정보의 양이 2020년대인 지금보다 훨씬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자문을 맡은 사람들의 편향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고, 그때에는 정설로 통하던 학설들이 새로운 발견이나 연구로 인해 오류로 밝혀진 경우도 있을 것이므로 현대인 천재론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다만 드라마적 허용을 감안해도 심각한 오류를 저지른 다소 좋지 않은 사례들은 앞으로 영원히 까일 것으로 보인다. 원균 맹장론은 말할 것도 없고, 거북선 침몰 사건 등 심각한 오류가 여럿 있었다. 오죽하면 김명민의 연기만으로 모든 걸 다 덮었다라는 평이 나오기도 한다.

종영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 재현을 철저하게 무시해서 전설이 된 작품"이라는 뼈있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2. 대표적인 오류

3. 자잘한 오류

3.1. 옥에 티



[1] 덧붙여 거북선을 두 번째로 만들어 진수하기 직전에 이순신이 사고로 목숨을 잃은 병사들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면서 축문을 읽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의 발성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일단 유세차(維歲次)라는 발음부터 제대로 못 냈고, 영상에 보이듯 장중하게 끌면서 읽어야 하는데 배우 자신이 제사에 참석한 경험이 한 번도 없는지 이 부분이 전혀 안 되어 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성악을 불러야 하는데 배에 힘을 전혀 안 주고 대중가요 부르듯이 대강대강 넘겨버린 격. [2] 명량 해협의 폭이 3백 미터가 채 되지 않는데, 1453년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750미터짜리 만을 쇠사슬로 틀어막은 사실이 있다. [3] 이순신이 파직당하기 전의 직책은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였으므로 교체된 원균 또한 전라좌수사 직을 겸임했다. 칠천량 해전 당시 경상우수사는 배설이 맡았다. [4] 일본과는 달리 조선은 지휘체계가 세분화 되어 있어 총사령관이 갑자기 지휘불능이 된다고 해도 일본의 경우처럼 바로 퇴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군사들의 사기와 승리의 기세에 크게 영향이 가므로 결코 좋은 일은 아니다. [5] 현역 복무 시절 총검술을 배웠던 엑스트라들이 총을 드니 자연스럽게 연기했던 모양이다. 돌려 쳐 동작은 개머리판으로 적의 안면부(혹은 상체)를 가격하여 내상을 입히는 동작이다. 그런데 화승총은 개머리판이 없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조총은 개머리판이 없는 산탄총처럼 손잡이만 있는것을 뺨이나 가슴에 견착하고 쏜다. [6] 화약이 터지는 곳에 우레탄 덩어리를 배치해 같이 터지게 했다. [7] 부산포 해전에서 잘 표현하였다. [8] 이미 4화 노량해전에서 구현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안 나왔다. 단순히 밤에 불지르면 눈에 잘 띄니 이렇게 한 거 같긴 하다 포탄이 폭발하긴 하나 사실 야간에 우레탄 백날 튀어봤자 하나도 안 보이니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 [9] 실제로 대장군전을 획득한 구키 요시타카가 있다보니 현대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10] 이후 선조와 대신들이 피난 가고 한양이 혼란스런 와중에 공회빈 윤씨의 시신이 사라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나중에 한성으로 돌아온 선조가 시신을 찾도록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11] 딱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지만, 요컨대 대한민국의 외교부 장관이 대표, 외교부 차관이 부대표를 맡은 외교 사절단이 미국에 파견됐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 외교부 장관, 외교부 차관이라고 부르거나 대표, 부대표라고 하지, 한 쪽은 장관, 한 쪽은 부대표라고 일컫지는 않을 것이다. [12] 이것도 그냥 형식상. 또는 문서상 높은 것이 아니라, 각종 의전에서 정사가 더 높다는 것을 여러모로 볼 수 있다. 가령 정사를 다른 말로 상사(使)라고 부르기도 했고, 에도까지 오가는 행렬 내내 정사와 그 수행원들이 가장 선두에 섰다. [13] 임진왜란이 끝나고 불과 9년 뒤에 파견된 통신사의 일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통신사가 들고 온 외교 문서를 받은 일본은 답서를 써서 통신사 측에 들려 보내야 했다. 그런데 국교가 정상화된 이후 첫 통신사다 보니 각종 외교 의전이나 절차나 형식 등등을 처음부터 다시 마련해야 했고(계속 바뀌었는지라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1636년 4차 사행이 되어서야 대부분의 것들이 일단 자리를 잡는다), 그러다 보니 답서에 년도를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도 문제가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명의 연호를 쓸 것이냐 일본 자신들의 연호를 쓸 것이냐였는데, 명의 연호를 쓰자니 일본이 명의 조공국이 아닌 상태에서 명 연호를 쓸 수는 없었고 일본 연호를 쓰자니 통신사 측이 반발할 것이 뻔했기 때문. 결국 잠시 고민하던 일본은 간지를 써서 주었고 통신사도 문제 없이 받아들였는데, 일본 연호가 거의 쓰이지 않는 허울이었다면 명의 연호를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했지 일본 연호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14] 임진왜란 개전 초기에 조선이 맥을 못 추고 무너진 건 조총이라는 무기를 잘 몰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총병들을 몇 부대로 나누고 순서대로 총을 쏘도록 해 장전이 오래 걸린다는 약점을 보완하는 전술 때문이었다. [15] 이 "수백 건" 가운데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만 들자면 중종 대의 정막개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반역 모의가 있음을 사전에 알고 고변한 공을 인정받아 정 3품 상호군에 제수되었는데, 장영실도 대호군까지 올랐을지언정 상호군에는 임명되지 못했다. 다만 반역 모의를 고변해 고위 관직에 오르는 것을 허락한다면 이후에 거짓 고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데다 정막개 자신의 성격이 워낙 개차반이라 결국 관직을 박탈당하긴 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건 "천것에게 고위직을 주면 안 됩니다" 가 아니라 "역적 모의를 고변한 공으로 고위직에 앉혀서는 앞으로 비슷한 사례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였다는 것. 다시 말해 이런 우려는 천민이라도 공을 세우면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뒤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16] 작중에서 이순신을 "무군지죄(無君之罪)를 저지른 죄인" 어쩌고 하는 장면이 몇 번 나오는데, 이거야말로 임금을 무시한 죄다. 회수를 정말로 하고 싶다면, 광해군이나 그에게 인사권을 위임한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서 군관 누구누구 등은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어서 저러저러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으니 파직하소서... 해야 한다. [17] 권준은 칠천량 이후 충청 수사로 임명되어 한양 수호를 임명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 전투부터는 참가한 적이 없었지만 여기서는 선조에 대한 분노로 복직을 거부하는 권준을 이순신이 직접 설득해 데려가는 것으로 나온다. 또한 충청 수영은 삼도 수군 통제영 휘하로 편제되어 있어서 지휘를 받긴 하지만 칠천량 이후에도 해전에 참가했다고 묘사한 것은 오류. [18] 배우의 사정으로 캐릭터가 중간에 통째로 증발했다. [19] 따라서 명량 해전 이후 흩어졌던 함선들을 긁어모으는 것이 아니라 일일이 건조를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명군 도독 진린의 환영연 직후 진린이 부관에게 '함대 재건 속도를 볼 때 허리띠를 졸라매고 뛴 것이 분명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나 사로병진 작전 당시 조선 수군을 그렇게 빨리 재건할 수 있느냐는 명군 지휘관의 물음에 이순신이 '흩어진 배들을 모으면 된다' 가 아니라 '군사들과 백성들의 열의가 때로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대목 등이 그렇다. [20] 그래서 배 선두에 2문 설치하는게 최대치였다. [21] 와키자카와 가토가 궁도를 하면서 잡담하는 장면인데, 일본 활은 긴 방향을 위로 가게 잡아야 하는데 구조를 이해를 못한 것인지 긴 방향을 아래로 가게 해서 마치 박격포(...) 쏘듯 곡사로 과녁을 향해 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인다.대관절 어떻게 조준하는지 궁금할 지경 [22] 고증을 더욱 치밀하게 하자면 "풍신수길, "소서행장" 이라고 하는 것도 틀렸고, "평수길", "평행장" 이라고 불러야 한다. 조선에서는 일본 측에 성씨가 藤, 源, 平, 橘 넷이 전부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고, 1617년 조선통신사가 남긴 기록에도 당시 조선에 '平調興' 이라고 알려졌던 일본인 柳川調興을 만나고 나서 柳川이 성씨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調興의 별호(別號)이다' 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록에도 풍신수길이라고 나오는 기사는 3건에 불과한 반면 평수길로 나오는 것은 85건에 달한다. [23] 조산보 만호 시절의 이순신 또한 작중에서 만호 나으리라고 불렸다. [24] 이순신이 옥포해전 승리로 가선대부까지 올라간 뒤 통제사로 제수되었기 때문에 '통제사 대감' 이 맞지만 다들 통제사 영감이라고 한다. 물론 파직 후 복직했을 때에는 선조가 정헌대부 품계는 빼고 통제사 관직만 돌려줬기 때문에 '통제사 영감'이 맞긴 하다. 간혹 정3품 품계명이 '절충장군' 이기 때문에 정3품까지를 '장군' 으로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무 근거도 없는 소리다. 이렇게 치면 '조선 국왕' 은 '전하' 가 아니라 '국왕' 으로 불러야 한다. [25] 사실 빼도 아무 문제가 안 되는데, 단종 이야기 자체가 한산도 해전이나 명량 해전 등 굵직한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 나온 게 아니라 극중의 가상 인물인 청향이 윤두수에게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들을 아껴줄 것을 부탁하며 꺼낸 것이기 때문이다. [26] 병조판서로 전라 감영을 방문하여 권율에게 지휘권을 부여할 때도 모르는 척 한다. 이 때는 여러 장수들이 모인 자리이므로 그럴 수도 있어 보이나, 류성룡과의 대화는 공적인 대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1 대화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아무리 봐도 이상해 보인다. [27] 안위의 책임은 아니지만, 이 전공 때문에 오히려 이순신은 선조에게 공격을 받았다. 이순신은 안위의 전공을 선조에게 보고하였는데, 정보의 혼선으로 안위의 전공이 사실이 아니라는 잘못된 보고가 올라 오자 선조는 '이순신이 전공을 탐하여 허위로 보고해서 조정을 속였다'며 비난했다. 이후에 안위의 전공이 사실임이 밝혀지자 이번엔 '이순신이 부하 장수의 전공을 가로챘다'며 말을 바꾼다. 근데, 정보 혼선이라고 보기에는 이순신을 까내리기 위해 육하 원칙도 무시한 반론을 통해 정치적 단합을 하였음을 인증한 대표적 인물이 다름아닌 이원익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조가 안위에게 상을 주지도 않았다. [28] 멀리 갈 것 없이 비슷한 시기에서 예를 하나만 들면, 선조는 원균에게 공신 작위를 내리는 일을 강력히 밀어붙였으나 이에 따르는 신하는 하나도 없는 실정이었다. 즉 극중에서처럼 왕명을 거부해야 한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원씨에게 공신 작위는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선무공신 1등에 종 1품 숭록대부의 품계가 내려졌는데, 이는 선조에게 동조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왕명이라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으므로 정말 최소한으로 붙여 준 것이다. [29]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 것으로 볼 수도 있긴 한데, 극중의 묘사만 보면 삼고초려를 하니 그냥 곧바로 현감이 된 듯한 모양새다. 또 실존 인물 어영담은 포작 일 따위를 한 적이 없다. [30] 실제로 절이도 해전은 잠깐 묘사되었기 때문에 화면에 김완이 비치지 않았고, 앞선 네 번의 공격도 내레이션으로만 나왔다. [31] 흔히 갑옷설은 일본에서 그려진 조선역해전도나, "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 묘사하는 조선군은 단단한 가죽갑옷에 유럽인과 같은 철모를 쓰고 있다고 한다." 라고 하는데, 조선군 갑옷설의 대표적인 근거 사료의 저자인 프로이스는 조선에 넘어온 적도 없고, 조선에서 전해온 소식을 들었을 뿐이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믿는다면 탄금대 전투의 조선군은 7만명이고 2차 평양성 전투도 일본군이 승리했으니 후퇴했을 뿐이다. 고로 조선군 갑옷 문제는 상당수 역덕후들의 '희망' 때문에 감정적으로 기록을 취사 선택한 감이 크다. 오히려 사극에서 포졸복은 조선 후기를 베이스로 하면 옳다. 조선 후기의 숱한 풍속화, 행차도, 전투도 모두가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럼 전기는 다르지 않냐고 할 수 있는데, 전기는 남은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32] 조선 전기의 군복 재현은 대왕 세종 문서 참고. [33] 문제는 대왕 세종의 배경인 조선 초기는 두정갑이 조선 중기 이후만큼 보편화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찰갑 계열 갑옷을 착용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 배경 사극에서 갑옷 재현을 제대로 하자면, 두정갑이 나오긴 하되 대체로 찰갑이 가장 많이 나오고 여기에 경번갑도 섞여 있는 식이 되어야 한다. [34] 사실 두석린갑 자체가 실전용이 아닌 의장용이었으므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 후기 배경 사극에서도 군사훈련 같이 실전이 아닐 때만 두석린갑을 입고 반란 진압 같은 실전에서는 두정갑을 입는 게 옳다. 실제로 조선 후기가 배경이면서 두석린갑이 나오는 사극인 이산의 경우 군사훈련 장면에서 두석린갑이 나오는 건 맞지만, 정순왕후와 최석주가 이끄는 반란군이 두석린갑을 입고 나오는 건 틀렸다. [35] 세월이 흘러 대왕 세종 대마도 정벌 장면에서는 반대로 당시 일본이 무로마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시대 갑옷이 나오는 시대 구현 오류를 범했다. 소 사다모리가 가신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소 사다모리 옆에 전국시대 인물인 가토 기요마사의 갑주가 있고, 전투 장면에서는 소 사다모리가 무로마치 시대 갑옷이 아니라 전국시대 갑옷인 도세이구소쿠를 착용하였다. 대마도 병사들도 전국시대 아시가루들이 쓰던 삿갓형 투구인 진가사를 썼다. [36] 이순신이 전리품으로 조총을 입수해 군졸들이 분해, 연구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긴 했는데 그게 끝이었다. 굳이 조총을 연구할 것도 없이 승자총통 같이 소형무기도 있긴 했다.안 나왔지만 [37] 임진년에 벌어진 몇몇 해전을 보면 적함의 하단을 노리라는 지시가 몇 번 나오기는 하는데, 갈수록 빈도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아예 사라져 버린다. [38] 패장이라고 고함을 빽빽 지르는 건 기본에 뺨따구를 때리거나 빠가야로 드립까지 친다. [39] 당시 기준으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영지가 3만석으로 도도 다카토라 2만석, 가토 요시아키 1만 5천석, 미치유키 3천석보다 더 많았으나 임진왜란 이후 도도의 영지가 32만석으로 크게 커진다. [40] 가령 임진왜란 이후 파견된 최초의 통신사가 일본의 조총과 검을 구입하고자 했다는 기록이 있다. [41] 일본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칼질에 능할 수밖에도 없지만, 군공을 세워서 출세를 하던게 당시 일본의 실정이기도 했다. [42] 물론 신체조건은 조선군이 대체로 더 좋은 편이었고 드물게 편곤 등의 무기로 일본군을 상대로 무쌍을 찍은 병졸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43] CG상으로는 거의 포위상태에 가깝다. [44] 만약 그게 가능했다 하더라도, 전라우수군과 경상우수군이 잘 숨어 있다가 일본 수군 매복선단을 통과시킨 다음 다시 매복을 하였다는 것이 되므로, 이순신이나 송희립이 당황할 이유가 없음은 마찬가지가 된다. [45] 수조규식에도 타수가 배를 부려 주위를 돌며 선회하면서 각 면에 장착된 화기를 적에게 일제 사격한다(舵手制船旋回周轉,使各面所藏火器向的齊放)라는 문구가 나온다. [46] 경상 우수영은 한백록, 우치적, 기효근, 1597년 이후부터 이영남 외에 전혀 보이지 않으며, 전라 우수영은 한 술 더 떠서 이억기와 황세득 외에 나오는 인물이 없다. [47] 극본 작가인 윤선주가 감성팔이를 잘 한다니 이쪽에 맞추어서 해석하면, 이 장면은 나대용이 수군에 자원하면서 한때 마찰을 빚었던 무의공과 나대용이 감동적으로 재회하는 장면이다. 다만 이런 구도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더라도 접수 일은 군관이 하고, 무의공은 옆에서 뒷짐이나 지면서 적당히 무게를 잡아도 되고 접수가 잘 되고 있나 잠깐 시찰을 왔다는 등으로 설정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극중에서 충무공은 임진왜란 발발 이전부터 여기저기 순시하는 모습이 많이도 나오는데, 무의공은 순시를 하면 안 된다는 법도 없지 않은가. [48] 일단 두석린갑은 의장용이지 실전용이 아니며 조선 후기에 비로소 생겨났다는 사실에는 잠시 눈을 감고 작중에서의 묘사만 보자고 하면, 칠천량 이전까지 경상 우수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모두 전라 좌수사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두석린갑을 입고 나왔었다. 그런데 명량 이후부터 이순신 이외의 수사들이 만호, 부사급보다는 격이 높지만 두석린갑보다 격이 낮아 보이는 두정갑을 입고 나오니 일관성이 없다. [49] 불멸의 이순신 세트장을 보면 조선 배(판옥선) 하나, 일본 배(아타케부네) 하나 만들어놓고 거기서 줄창 촬영했다. 그러니 판옥선과 아타케부네만 나올 수밖에. [50] 불멸의 이순신에서 군함 세트장은 용도별로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해변에 정박되어 있거나 바다 위를 항해하는 군함의 모습을 찍기 위한 것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군함을 탄 수군들의 모습을 자세히 찍기 위한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판옥선, 거북선, 아타케부네, 세키부네 모두 만들어졌지만 후자는 유독 세키부네만 빠져 있었다.(거북선의 경우 윗부분이 철판으로 밀폐된 덕에 KBS 사옥 안의 실내 세트장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51] 따라서 본작에서 왜군이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총통을 쓰는 모습도 육상전 한정으로만 나와야 했다. 부산포 해전 장면에서 왜군이 총통을 쓴 건 실제 역사에 맞는 내용이므로 왜군이 해상전에서 총통을 쓰는 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부산포 해전은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해상전이었던 반면 왜군의 입장에서는 육상전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해상전(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노량 해전 등)과 동일선상에 놓기 힘들다. [52] 1636년 통신사 종사관으로 파견되었던 황호 같은 경우도 일본의 전함을 보고 '만듦새가 경쾌하고 정묘하기는 하나 튼튼하지는 못하여 우리 배가 들이받으면 부술 만 했다' 라고 기록해 놓았다. [53]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앉히기는 싫으나 딱히 대안도 없으니 병력을 분산시켜서 다 털리자는 것이다. [54] 류성룡의 문집인 서애집을 보면 윤두수의 부음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사람은 오늘날 쉽게 얻을 수 없다. 지나간 임진년 무렵에 만약 다른 사람에게 그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면 우리들은 이미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요사이도 자못 공평한 의론을 주장했는데 갑자기 이 지경이 된 것도 운수이니 어찌하겠는가."라고 안타까워했다는 글이 남아 있다. 출처 [55] 비슷한 경우의 사극이 전세계적으로 많긴 하다. 중화권 사극에서 한족이 아닌 몽골계, 퉁구스계, 한국계, 일본인 등 이민족 황인 캐릭터가 중국어를 쓰는 것과 영미권 사극에서 비영어권 백인 캐릭터가 영어를 쓰는 게 대표적이다. [56] 46화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요도도노에게 '그는 나의 주군이자 그대의 숙부이신 노부나가 공께서도 매우 아끼셨지...' 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대본 작가의 입장에서는 '오다 장군' 이라는 식으로 쓰자니 어색하여 '노부나가 공' 이라고 했겠지만, '기요마사 공', '유키나가 공' 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재현이라는 점에서 다소 아쉬운 대목. [57] 막판에 히데요시에게 항명하고 도쿠가와한테 붙는 듯한 모습이 나온다. 그 다음 씬에서는 히데요시가 피를 토하며 사망. [58]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일본군 총사령관. [59] 오대로의 일원 [60] 오대로의 일원 [61]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시마즈가의 당주 [62]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의 1인자이자 종오위 하 사도노카미 [63] 도도 다카토라뿐만 아니라 위에서 설명했듯이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당시 일본에서 참전한 높은 위치에 있던 무장이었다. 정유재란 당시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오와리 24만석이었는데 반해 도도 다카토라는 이요 7만석에 불과했고, 비록 나이는 도도 다카토라가 더 많았지만 석고와 지위는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더 우위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도 다카토라는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의 1인자였고,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1인자였다. [64] 명실상부한 시코쿠의 패자 [65] 89화에서 기존의 지휘관들이 사직서를 내고 새로운 지휘관들이 부임해 오는 자리에서 등장하기는 했다. 문제는 '녹도 만호 송여종입니다!' 가 첫 대사이자 마지막 대사라, 엑스트라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66] 진린이 합류한 시접이 명량 해전 이후였기 때문에 굉장히 인상깊게 생각했을뿐더러, 이순신 역시 진린을 크게 대접하고 수급 40개를 진린에게 그대로 주는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이순신에게 합류하기 이전에 진린이 어땠냐면, 맘에 안든다고 한 조선 관리를 말에 매달아놓고 질질 끌고 돌아다녀서 거의 죽일 뻔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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