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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9:47:22

박재홍/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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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현대 유니콘스 시절4. KIA 타이거즈 시절
4.1. 박재홍의 해명
5. SK 와이번스 시절
5.1. 2005 시즌
5.1.1. FA
5.2. 2006~2010 시즌5.3. 2011 시즌5.4. 2012 시즌
6. 은퇴7. 연도별 주요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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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재홍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고3이던 1991년에서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투수로 활약했던 영상[1]

광주일고 시절부터 맹활약을 펼친후 1992년 프로야구 신인 1차지명에서 연고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2] 연세대학교로 진학한다. 90년대만 해도 프로야구에서 고졸신인은 매우 드물었고,[3] 대부분 대학교로 진학하던 시대. 또는 실업 야구에 뛰고 프로에 데뷔한 선수들이 있던 시대였다. 고교 시절에는 투타 양쪽에서 모두 훌륭한 재능을 보였으나 대학 진학 후에는 "타자"로 완전히 정착했다. 연세대 시절 김충남 감독[4]의 가르침을 받으며 뛰다가 졸업 후 실업 야구팀인 현대 피닉스와 입단 계약을 맺는다.[5][6]
파일: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 박재홍.jpg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 박재홍[7]

이후 1995년 말 현대그룹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면서 현대 유니콘스가 출범한 후 최상덕이 해태로 트레이드 되는 조건으로 박재홍의 지명권을 현대로 넘겼고, 당시 신인 야수 최대 계약금이었던 4억 3000만원을 받고 입단한다.[8] 놀라운 점은 같은 해 입단한 고졸신인 박진만과 키스톤을 이룰 뻔했다는 것.[9] 지금 보면 이상해 보이지만 원래 연세대 시절까지는 내야수였고[10] 프로에 와서 외야수로 전환하였다.[11]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대에 입단하게 되면서 박재홍은 호남 야구팬들에게 배신자, 공공의 적으로 찍히게 되어 무수한 비난을 받았다.

사실 현대에서 고액의 계약금으로 "유망주"를 묶어둔 것이며, 재정이 열약한 해태 타이거즈의 사정상 위약금을 대납할 능력도 없었다. 그렇다고 후술할 롯데 자이언츠의 방식처럼 4억 3000만원 상당의 다른 선수를 내줄수도 없으므로[12] 울며 겨자 먹기 최상덕을 데려온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13] 당시 박재홍과 똑같은 처지였던 문동환도 롯데가 전준호를 5억과 트레이드, 유니콘스로부터 받아온 5억을 문동환 계약금으로 쓰고 문동환이 현대 피닉스에 위약금 5억을 내는 복잡한 방식을 통해서야 롯데로 갔다. 즉, 박재홍은 해태에 가기 싫어한 것이 아니었고 자금을 기반으로 한 현대의 인질극에 걸린 것이라 굳이 따지자면 피해자 포지션이다.[14] 그 사실이 인천 야구팬들에게는 상식적이었지만 인터넷이 제대로 발달 되지 않았고 SNS, 스마트폰도 없었던 90년대 특성 상 정보 전달 속도가 느렸던 탓에 광주 지역 팬들에게는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어 20년 넘는 세월 동안 정설로 박혀있었고 이는 광주 야구팬들과 박재홍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고 말았다.

3. 현대 유니콘스 시절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수상자 (1996 ~ 1998)
파일:30-30을 달성한 리틀쿠바.jpg
파일:30-30을 달성한 박재홍.jpg
파일:박재홍의 30-30 달성을 알리는 신문.jpg
30-30을 달성한 박재홍

히스토리 18 박재홍, '최초 30-30 클럽' 역사의 문을 열었을 때
1996년 데뷔 첫해에 홈런왕[15], 타점왕[16], 그리고 대한민국 최초 30-30 클럽 가입으로 만장일치 신인왕에 올랐다.[17] 1996년 당시 각 언론 매체에서 박재홍을 언급할 때마다 ' 괴물 신인'이라는 말을 수식어로 썼을 정도로 엄청난 신인이었다. 그가 30-30 클럽에 가입하는 30번째 홈런을 친 날, KBS 9시 스포츠 뉴스에서는 스포츠 뉴스가 시작됨을 알리는 시그널이 나간 후, 아나운서가 인사를 하기 전에 박재홍의 30번째 홈런 장면부터 내보냈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인사를 하며 박재홍이 30-30 클럽에 가입했음을 알렸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대기록이었던 것이다. 1993년에 양준혁이 거기에 필적할만한 신인최초 타격왕을 비롯한 3관왕을 차지했지만 그 해에는 이종범, 김경원 등의 신인들이 함께 활약해 독보적이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6년에 류현진이 좀 더 비슷한 수준의 독보적 활약을 하였다.
파일:1996 MVP 구대성과 1996 신인왕 박재홍.jpg
이 때 박재홍이 신인상과 리그 MVP를 동시에 수상할지의 여부에 이목이 집중되었다.[18] 당시 박재홍은 사상 첫 30-30 클럽에 신인으로 홈런왕, 타점왕까지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18승 3패 24세이브 ERA 1.88 WHIP 0.76 139이닝 183탈삼진으로 탈삼진(3위)을 제외한 투수부문 4관왕(다승, 평균자책, 승률, 구원)을 독식한 한화 구대성의 임팩트가 더 부각되어 사상 첫 신인 MVP는 무산되었다.[19][20] 참고로 이건 마무리 투수가 세운 기록이다. 또 박재홍이 MVP 수상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박재홍이 신인답지 않게 건방지다."는 소문이 기자들[21]로부터 왜곡인 된체 흘러나오기도 하는데, 이런 평가는 선수 생활 내내 박재홍의 발목을 잡게 된다.

이 성과가 바다 건너에도 전해졌는지 1년차가 끝난 뒤 스프링캠프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 스카우트가 김재박 감독에게 영입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임대"라도 안되냐고 부탁하기도 했다.[22]

쾌조의 순항을 벌어던 중 부정타격 시비에 휘말려 " 슬럼프"에 빠지게 되는데 문제의 제기는 바로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인 김성근에 의해서였다. 김성근과의 악연이 어찌 보면 신인 때부터 시작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박재홍이 타석에 들어설 때 홈플레이트와 워낙 가까운 지점에 붙어 있었는데 왼발이 타석 앞쪽 라인을 넘어서서 타격을 하는 것 같으니 규정 위반이 아니냐는 지적을 했다. 당시 박재홍은 워낙 바싹 달라붙어서 치기는 했지만 타석의 선을 넘지는 않았다. 김성근 감독은 현대와의 경기 도중 선수들을 덕아웃으로 철수시키면서까지 항의를 했을 정도였다.[23] KBO에서 큰 문제가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리기는 했지만 논란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덕분에 3할대였던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는 슬럼프가 오면서 박재홍의 타격이 결정적이던 팀 성적도 전반기 1위에서 후반기에 4위까지 떨어진다.[24]

이들 기록은 입단 초기에 "현대 피닉스" 입단 파문으로 인해 겨울에 운동을 혼자 개인훈련만 하고, 전지훈련도 가지 못한 상태에서 나왔다는 점에서도 놀랍다. 신인 시즌 30-30은 세계 프로야구 사상 최초이며 2012년 MLB에서 마이크 트라웃이 30-30을 기록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 이 트라웃도 2012년 신인왕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메이저리그 데뷔는 이미 2011년에 몇 경기를 치른 상태였기 때문에 데뷔를 했다. 첫 데뷔 시즌만 놓고 보았을 때는 국내, 미국, 일본, 대만 리그 중에서는 박재홍이 현재로선 최초로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원래, 현대 코칭스텝들은 상술했듯이 박재홍을 "내야수"로 쓰려다가 주력도 나쁘지 않고 투수 출신이라 어깨도 좋아서 외야로 돌렸다. [25] 그리고 1번타자, 즉 리드오프로 쓰려고 했다. 실제로 그의 프로 데뷔전이었던 1996년 4월 13일 인천 LG전 당시 그의 타순은 1번타자였다. 그러나 리드 오프치고는 홈런을 잘치고 장타력이 좋아 전통적인 1번타자와는 거리가 있는 맹활약을 펼치자 자연스레 클린업 트리오으로 고정이 되었다. 참고로 박재홍이 중심타선으로 가면서 현대는 또 리드오프 부재에 시달렸고, 김인호 윤덕규로 돌려막다가 전준호를 영입하면서 겨우 해결된다.[26]

1997년에는 허리부상으로 한 달을 넘게 결장[27], 시즌 전경기보다 무려 30경기나 적은 96경기에 출장했음에도 .326에 27홈런 - 22도루 69타점을 기록[28], 부상 없이 출전했으면 32홈런을 날린 이승엽, 30홈런의 이종범과 함께 재미있는 홈런 레이스를 벌일 뻔했다[29]. 서술한대로 박재홍 커리어상 가장 높은 타율과 ops를 기록한 때도 이 해로, 2년차 징크스를 보기 좋게 비웃었다.

1998년에는 두 번째 30-30 달성과 함께 인천 연고팀 첫 우승을 팬들에게 안기며 박진만과 함께 도원야구장 아이돌로 등극했다. 홈런 4위, 도루 2위를 기록했는데, 도루 실패가 많아서 그렇지 도루를 2~3개만 더 기록했다면 "도루왕"에도 등극할 뻔 했다.[30] 더욱이 당해 한국시리즈에서 타선에서 가장 활약한 선수는 박재홍이었다. 한국시리즈 경기 전에 부상[31]으로 못 나올 줄 알았는데, 허벅지와 발목에 테이핑까지 하면서 지명타자[32]로 출전, 4차전 잠실 야구장 좌측 풀대 대형 홈런을 친 것이 화제가 되어 펄펄 날았다. 기록을 30-40으로 좁힌다면 이것을 달성한 타자는 1997년의 이종범과 1998년의 박재홍 뿐이다. 그리고 시즌 후인 12월에는 방콕 아시안게임[33]에 참가해 금메달을 획득함과 동시에 그토록 말 많던 병역 혜택도 받게 된다.

99년도는 리그가 갑자기 양대리그로 분류가 되어 24홈런 17도루로 숨고르기를 한[34] 1999년 이후 2000년에는 구단에 의해 인천을 떠나 연고지를 임시로 수원야구장으로 옮겼는데 이 때 세 번째 30-30은 물론 3할 타율-30개 이상 홈런-30개 이상 도루-100개 이상 타점-100점 이상 득점이라는[35]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달성했다. 세 번째 30-30은 박재홍 본인에게도 마지막 커리어이자 현재까지도 많은 선수들이 넘지 못한 유일한 기록이다.[36]

이후로도 현대의 중심 타선의 한 축을 계속 맡았지만, 2001년부터 갖가지 잔부상으로 인해 갑자기 장타력이 증발하면서 홈런 생산이 줄어버렸고, 이후 은퇴할 때까지 30-30 클럽은커녕 20홈런을 치는 시즌도 만들지 못했다. 물론 이 시절 이후에도 꾸준히 3할 타율에 두 자릿수 홈런이나 도루, OPS 0.8~0.9 이상을 기록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였지만, 그의 전성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박재홍이라는 이름값에는 뭔가 조금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 어찌되었든 2002년도 올스타전에 참가하여 현대 유니콘스 소속으로 올스타전 MVP를 얻고 준플레이오프까지 현대에서 활약[37]했고, 2003년 시즌을 앞둔 스토브리그 때 정성훈+현금 10억 원으로 중심 타선을 강화하려는 김성한 감독의 요청에 의해 고향 팀인 KIA 타이거즈로 야심차게 트레이드되었다.

이때 KIA가 박재홍을 데려온 이유는 2002년 당시 KIA 타선의 약점 중 하나였던 확실한 "4번 타자의 부재"라는 틈을 메꾸기 위해서였다. 2002년을 보면 용병인 뉴선이나 펨버튼은 제몫을 하지 못했고, 포스트시즌에 4번을 쳤던 홍세완은 타팀 4번들에 비해 무게감이 떨어졌던 편이며 거기에 그 악랄하기로 유명한 무등구장에서 뛰던 유격수였기 때문에 수비 부담도 많아 있었기에 마냥 4번에 박아둘 순 없었다. 그래서 김성한 감독은 제2의 이종범으로 평가받던 연세대 출신 3루수 이현곤[38]을 믿고 1군 레귤러가 되기 시작했던 정성훈을 내주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박재홍을 데려왔지만, 결과는 뒤에 나오듯 썩 좋지 못했다.[39]

4.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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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드 첫 해였던 2003년엔 "타율 3할 3리, 19홈런 - 14도루 타점 66개 OPS 0.903"으로 괜찮은 활약을 펼쳤으며, 이것도 시즌 초반 햄스트링 부상으로 25경기 날려먹으면서 기록했던 성적이었으니 풀시즌을 나왔으면 25홈런 - 20도루 90타점 정도에 준하는 기록이었다.

덕분에 2004년에도 어느 정도 기대를 받았으나, 2004년에는 시즌 초부터 무리하게 주루하다 " 햄스트링" 부상이 재발했고[40] 시즌 도중 손가락 부상 등 잔부상에 시달린 끝에 결국 1996년 데뷔 이후 73경기 출장에 그치는 등 시즌을 날려먹었고, FA 취득시기와 관련해서 프런트 및 코칭스태프와 갈등을 빚으며 데뷔 후 사상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부상으로 정상적인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FA 취득년차에 맞춰 출장을 고집하여 성적은 성적대로 깎아먹으면서 팀 분위기도 상당히 망쳤기에 시즌 중에 이미 눈 밖에 났다.

하지만 당시 김성한 감독이 FA 일수를 채워주기로 약속하고, 부상도 심한 부상이 아닌 손바닥 부상 정도라서 타격은 좀 힘들지만 엔트리에서 빼지 않고 대주자라도 출장시키며 일수를 채워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김성한 감독이 구단과의 불화로 해임되고, 유남호 대행체제로 바뀐 뒤 박재홍을 1군에 올리지 않으며 그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 결국 등록일수를 채우지 못하며 FA 자격도 1년 뒤로 미뤄지는 등 박재홍과 KIA 구단 간 갈등은 이미 심각해지게 되었다.

박재홍이 유남호 대행을 만나려 해도 만나주지 않았고 "9월 확대엔트리" 때도 넣어주지 않았다. 이때 상황과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엇갈리는 부분이 있는데, 박재홍이 자신을 트레이드시켜주지 않는다고 정재공 단장에게 술잔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반면, 박재홍이 울면서 읍소했는데도 유남호 감독대행이 문전박대했다는 기사도 확인되며 결국 정재공 단장도 이를 거들어 팀케미에 해가 되는 선수로 낙인찍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어쨌거나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시 타이거즈팬들에게 박재홍의 이미지는 신인때 처럼 더욱더 안 좋은 쪽으로 굳어졌다.[41][42] 하지만 해태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된 KIA의 선수 대응 방식도 문제가 있었던 셈. 또 박재홍을 위한 쉴드를 쳐주자면 고교-대학 라이벌 김종국과의 대립이 많아[43]서 한 때 광주내에 야구 팬들은 누굴 응원해야할지 고민했다고 허나, 박재홍이 해태로의 드래프트를 거절했다고 알려지자 다들 김종국으로 선회했다. 이 후에 박재홍이 KIA에 왔을때도 그냥 말도 나누지 않았다.[44] 그나마 현대에서 함께 뛰던 친구이자 자신의 백업이던 장정석과 함께한 면은 있다. 다만, 학교는 서로 달랐다. 장정석(중앙대)-박재홍(연세대)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선수단에 "비협조적" 이었다는 이미지 탓에 먹지도 않은 빵 때문에 평생 붙어다닐 별명도 얻으면서 박재홍의 KIA 시절은 본인에게나 KIA에게나 흑역사만 되고 말았다.

4.1. 박재홍의 해명

박재홍은 2022년 스톡킹에 출연해 2004년 시즌에 있었던 일에 대해 하나씩 설명했다.

먼저, 국토대장정에 대해 비판했다. 김성한 감독의 제안으로 김성한 감독의 고향인 군산을 출발해서 KIA의 연고지인 광주광역시까지 걸어서 이동하는 훈련을 했다. 김성한은 팀 케미스트리 강화, 선수단 화합을 위해 했다고 하나 박재홍은 '그걸 왜 했나 모르겠다. 몇몇 선수들은 종료 후 무릎, 햄스트링 부상[45]을 입었다.' 고 밝혔다. 김성한이 스톡킹 박재홍 방송편 이후에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여 '요즘 국토대장정에 대해 다시 말이 나오는데 내 눈이 이 들어와도 내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성한은 당초 지리산 종주를 하려고 했으나 음식물 공급이 어렵다는 프런트의 말에 결국 군산-광주 코스로 변경했다. 사실 이건 박재홍이 말이 맞는 게 운동선수는 몸이 생명인지라[46] 일반인보다 더 관리를 해 줘야 한다. 외국 팀에서는 선수들이 비시즌에 취미로 다른 운동을 하는 것도 부상 당할 위험이 있다며 금지 시키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것 때문. 실제 사례도 있다. 하물며 국토대장정을 시킨다는 것도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이전에 타구단들도 해병대 캠프 입소와 같은 방식으로 따라했던, 지옥훈련의 대명사로 알려진 김성근의 오대산에 있던 혹한기 훈련에서도 부상이 속출했고 따라했던 구단들도 마찬가지였던지라 극기훈련을 아예 없애버린 이후에 벌어진 일이니 말이다. 결국 김성한의 저 발언은 김성한의 구세대적 인식만 드러내면서 김성한이 왜 성적이 좋음에도 프로 감독직을 못 맡았는지를 알려주는 결과를 낳았다.

"빵형 캐릭터"를 얻게된 기사에 대해서도 박재홍은 '기자들이 알아서 추측을 한 건지 누구한테 듣고 글을 쓴 건지 모르는데 하여튼 맘대로 쓴 기사다'라고 했으며 SK 이적 후 팬들이 브래드 피트에 박재홍 얼굴을 합성한 사진[47]을 후배인 조동화가 보여줘서 알았다고 한다.

상기 문단에 서술된 FA 갈등 때도, 박재홍은 손바닥 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김성한 감독이 '수비와 주루는 가능하니까 그 두 개만 해라'고 해서 한 달 동안 뛰었으나 결국 수술을 받았다. 박재홍은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지시였고 박재홍 본인도 FA 욕심을 부렸다고 밝혔다. 시즌 도중에 김성한이 경질되고 유남호가 부임했는데 박재홍은 FA약속을 믿고 있다가 유남호를 찾아가서 '전임 감독이 약속한 내용을 지켜달라. 전임 감독과 끝난 사안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남호는 ' 나는 그런 약속 모른다'고 "퇴짜"를 놓았고 그 다음날에 언론에는 '구단에서 FA기간을 안 채워준다고 박재홍이 깽판을 쳤다'고 기사가 나갔다. 시즌이 끝나고 정재공 단장이 식사 자리를 마련하였으나 서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정재공 단장이 먼저 박재홍의 머리를 때렸고 '왜 때리냐?'고 묻자 '때리면 안돼?'라고 하면서 또 때렸다고 한다. 박재홍은 열이 받아서 '때리지 말라'고 말하면서 술잔을 던졌다고 한다.

이런 안 좋은일들이 2004년 한 해에 다 있었고 이로 인해 KIA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으로 보여진다.

왜 본인에 불리한 기사가 나가도 해명을 하지 않았는지 진행자 정용검이 묻자 내 이야기는 아예 기자들이 들어주지도 않았다고 술회했다. 박재홍은 '야구장에서는 야구만'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이런 문제 때문에 기자들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았던 선수였다.

5.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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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04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당시 SK 와이번스의 불펜투수 김희걸[48]과 1:1 트레이드되어 선수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했던 인천으로 되돌아왔다. SK로 온 이유는 아무래도 현대 유니콘스에서 뛰던 김경기의 선례처럼 SK가 인천 야구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SK 프런트의 마케팅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란 해석이 다수.

5.1. 2005 시즌

SK로 온 뒤에는 정근우가 리드오프로 자리잡기 전까지[49] 주로 1번 타자 겸 중견수를 맡았고, 그해 3할 타율과 18홈런 22도루, 4할대 출루율을 기록하고 타율 7위, 출루율 6위, OPS 6위, 도루 7위, 볼넷 4위로 타격 기록 순위권에 들었고 WAR 5.51을 찍어주며 타자 WAR 토종선수 1위(전체 타자 3위, 투-타 리그 합 6위)를 기록하는 등 나름 성공적인 시즌[50]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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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27일 인천 삼성전에서 홈스틸에 성공한 뒤
거기에 2005년 8월 27일 인천 삼성전에서는 대망의 홈스틸도 선보였다. 영상 보러가기

5.1.1. FA

2005년 시즌이 끝나고 대망의 FA신분을 얻어 자신만만하게 "4년 35억"을 요구하였으나, SK는 "25억"을 제시, 양자간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아 결국 협상결렬로 FA 시장에 나왔고, 장성호와 함께 대형 FA 투톱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현실은 참혹했다.

FA 시장 개막전 머니게임을 예고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처음부터 타겟이 1루수 장성호 하나 뿐이었고,[51] 장성호가 KIA 타이거즈에 잔류하자마자 FA 시장에서 곧바로 철수하였으며[52], 전년도에 트레이드 시도를 하였던 LG 트윈스는 기존 FA 영입 사례 중 홍현우, 진필중 등이 모두 실패한 사례가 있는데다가 FA시장이 열리기 바로 직전 장문석 마해영을 바꾸는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며 지상과제였던 팀 장타력 부족을 해결했다는 판단하에[53] 박재홍 영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친정팀인 현대 유니콘스에서 박재홍을 재영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거지가 꼴이 되어 자금 사정이 녹록지 않았던 데다가 어디까지나 박재홍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인 동갑내기 송지만이 다른 팀으로 이적했을 경우 그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송지만이 잔류[54]를 선택하며 현실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박재홍은 FA 미아가 되어 원 소속팀 SK와 협상을 시작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4년 30억"의 조건으로 계약을 완료하였다.

5.2. 2006~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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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는 2할 5푼대의 타율에 그쳤으나 WAR 4.80을[55] 찍어주면서 2년 연속 팀 내 WAR 1위에 올랐고 18개의 홈런을 치기도 하는 등 팀의 중심타선으로 활약했지만 팀은 투수진의 연이은 부상과 용병 농사 실패 등으로 인해 6위에 그치며 포스트시즌 진출[56]에 실패.

2007년 김성근이 SK 감독으로 부임한 후 기존 수비위치였던 중견수 대신 우익수로 나오는 비중이 늘기 시작했고, 플래툰 시스템으로 돌려지다가 2군으로 내려가기도 했으나[57], 그해 7월 8일 롯데전에서 대타로 나와 개인 통산 250호 홈런을 치기도 했다. 영상 보러가기

2008년에는 리즈 시절 막바지 였던 타율 0.318로 전성기 이후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했고 19홈런(5위), 출루율 0.420(2위), 장타율 0.538(3위)로 타격 관련 분야에서 순위권에 들기도 했다. 이 시즌 외야수 골든글러브가 유력하며 8년 만에 골든글러브 수상[58]을 노려봤으나, 아쉽게도 골든글러브는 올림픽 버프 + 중견수 + "도루 2위" 버프를 받은 두산의 이종욱이 차지하며 아깝게도 수상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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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자축하는 박재홍
2007년-2008년 2년 연속 SK의 한국시리즈 우승에도 일조하기도 했다.

2009년 4월 23일 문학 롯데전에서 8회초 SK 구원투수 채병용이 던진 공에 롯데 조성환 광대뼈를 맞아 실려나가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된 가운데 8회말 롯데 구원투수 김일엽의 초구가 박재홍의 "무릎"[59]쪽으로 날아왔다. 야구팬들은 당시 김일엽이 박재홍에게 던진 공을 변화구로 보고 있으며, 구종은 다소 의견이 갈린다. 박재홍 본인이 직접 지상파 OBS 다큐멘터리 불타는 그라운드에서 야구팬들의 의견을 반박하며 김일엽의 구종을 직구라 증언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사건 직후에 기사들을 보면 김일엽의 공은 '변화구'라는 기사들이 나왔었고 실제로 경기 당시 측정된 구속도 120킬로대에 원바운드로 날아갔다. 타팀 관계자들이 왜 저러냐는 식으로 인터뷰한 기사도 나온다.

여간 저 상황 이후 박재홍이 곧바로 마운드로 걸어가면서 양팀 선수들이 벤치 클리어링을 벌였으며, 이 때 공필성 롯데 코치와 말싸움을 벌였다. 이 사건으로 롯데팬들에게 가루가 될 정도로 까였으며 다음 맞대결이었던 사직구장 주중 3연전 중 5월 6일 경기에선 그가 타석에 들어서자 장난감 칼을 든 꼴리건이 그라운드에 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 사태는 엑스꼴리버 혹은 꼴리검 사건으로 이후에도 간만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이후 2016년 6월 8일 베이스볼 투나잇의 마이 리틀 텔레비전 버전인 '엠스플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이 사건을 다룬 적이 있었는데, 난입한 꼴리건보다 오히려 사직구장 관중들의 야유가 더 신경썼었다고 한다. 그리고 소심하게 달려오면서 휘두르는 칼의 움직임이 너무 빨라서 애초에 진짜 칼이 아님을 눈치챘었고, 멀찍이서 던지고 달아난 꼴리건과는 다르게 정작 본인은 더 가까이 와주길 바라고 있었다고.

이후에도 롯데 자이언츠 구단과는 상관없는 악플러들까지 몰려들어 같은 SK 소속의 윤길현, 채병용, 김성근 감독 등과 세트로 묶여 엄청나게 까이면서[60] 죽고 싶었다는 말을 하는 등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고 인터뷰[61]에서 밝혔다.

8월 20일 롯데와의 사직 원정경기 연장 10회초 1사 만루 상황에서 대타로 들어서 롯데 팬들의 엄청난 야유를 뚫고 3루 강습 안타를 날려 결승타점을 기록하며 사직구장 전체를 침묵시켰다.

2009 시즌 내내 롯데 팬들은 사직구장에서 박재홍이 타석에 섰다 하면 야유를 퍼부었고 사직경기에서 SK가 이긴 후 구단 버스에 소주병을 던져 구단버스 유리를 깨는 등 그야말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지만, 그 해 9월 SK가 삼성과의 문학 2연전을 싹쓸이하며 삼성의 13년만의 포스트시즌 탈락과 더불어 롯데의 2년 연속 가을야구를 도와주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벌어지리라 누가 알았을까?

이처럼 다사다난한 2009년이었으나 마지막까지 그에겐 순탄치 못했는데, SK는 시즌 막판 연승행진으로 1위 KIA를 턱밑까지 추격했으나 너무나 아쉬운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에 그쳤고, 두산과 5차전(우취 포함 6차전)의 격전을 치른 끝에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김광현, 송은범, 박경완이 없는, 차 포 마를 뗀 상황에서 벌떼불펜의 힘으로 버티며 한국시리즈에서도 2승3패로 몰린 끝에 3승3패 동률, 더 나아가 7차전 6회까지 5대1로 리드를 잡은 상황이었다. 시프트, 작전, 한박자 빠른 투수교체 등 김성근의 온갖 쥐어짜내기가 시전되는 와중에 수비 실수 하나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승호와 카도쿠라가 연달아 흔들리며 5대4로 쫓기는 상황이 됐고, 최경환의 우중간 타구를 컷트하지 못해 3루타를 만들어준다. 이후 2루에 동점주자를 둔 상황에 다름아닌 우익수 박재홍이 김원섭의 애매한 타구를 잡으려다가 뒤로 흘려버리는 참사를 저지른다[62]. 결국 3루에 묶어둘 수 있던 주자를 허망하게 들여보내며 5대5 동점을 허용하고 말았는데, 후속 정우람이 3루에 주자를 두고 추가점을 허용하지 않은걸 고려하면 두고두고 아쉬운 수비 하나였다. 이 일 때문인지 이후로 박재홍은 외야수 자리에서 밀려나 대타, 지명타자로 기용되는 경우가 늘어가기 시작했다.

2009 시즌이 끝나고 또 다시 FA 자격을 얻었고, 원 소속팀과의 협상 마지막 날인 11월 12일 밤에 극적으로 계약금 4억 원, 연봉 4억 원에 SK에 잔류, 2010시즌에도 문학 야구장에서 뛰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하락세를 피하진 못했다. 타율이 무려 6푼이나 추락한 0.220으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300-300 클럽을 바라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선수였지만, 나이 탓인지 도루가 많이 줄어서 힘들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5타수 2안타 2볼넷 1타점 1득점, 타율&장타율 .400, 출루율 .571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으로 우승했다.

5.3. 2011 시즌

선발 출장 경기 중에 팀이 진 경기를 찾아보면,
일자 상대 팀 성적
4월 23일 롯데 2타수 무안타
4월 29일 <colbgcolor=#131230> 두산 4타수 무안타
5월 7일 KIA 4타수 1홈런
5월 8일 KIA 3타수 무안타
5월 10일 삼성 1타수 무안타
5월 14일 두산 4타수 무안타
6월 4일 KIA 2타수 무안타
6월 5일 KIA 3타수 무안타
6월 9일 넥센 2타수 1안타
6월 10일 두산 4타수 무안타
6월 28일 한화 3타수 1안타
6월 29일 한화 4타수 무안타
7월 1일 넥센 2타수 2안타
7월 12일 LG 3타수 무안타
7월 17일 LG 3타수 무안타
8월 11일 두산 3타수 무안타

47타수 5안타 타율 0.106. 특히 두산과의 4판에서는 아예 무안타.

물론 패전 기록이지만 대타 성공률이나 기타 등등 모든것이 부족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는 8월 까지 홈런도 하나 없는 조동화보다 장타율이 떨어질 정도다.

"자신이 김강민 땜빵이냐" 하는 소리를 했다가 김성근 감독의 경질 직전에 1군에서 말소되었고 일부 팬들에게 비난을 들었다. 박재홍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구단 내부에 있던 발언으로 내부 징계로 끝날 수 있는 일을 기자들에게 공개시켜 일부 팬들에게 공격당하게 한 김성근 감독의 처분도 적절치 못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1할대 타율을 기록한 박재홍에게 구단에서는 은퇴나 하라고 코치 연수를 제의했으나 박재홍이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따라 다른 팀으로 이적하거나 FA 미아가 될 기로에 놓였으나 FA 보상선수, 2차 드래프트 등으로 외야수 자원들이 유출되자 SK에서 코치 연수 제안을 번복하여 현역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실망한 일부 팬들 사이에선 운빨 하나는 제대로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5.4. 2012 시즌

2012년 시즌 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신임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시즌 초를 2군에서 쭉 보냈고, 특별한 성과도 없었기에 모든 사람이 이제 박재홍은 은퇴하고 선수협 회장에 집중할 때라고 생각한 시즌이었다. 심지어는 팬들까지.

하지만 이만수 감독의 풀스윙 타격 지론과 궁합이 맞는 여러 사례 중의 하나가 되어 "불꽃"을 태웠다. 김성근 감독의 후임으로 내부승격한 이만수 감독은 김성근의 다운스윙과 다르게 레벨스윙, 어퍼스윙 메이저리그식 스윙과 함께 자신있게 쳐라 로이스터식 노피어 스윙 지론으로 젊은 선수를 독려했는데, 의외로 김성근 감독의 수제자같은 이미지인 최정이 이후 거포타자가 된 이후 이만수 감독님이 거포로 거듭나게 해줬다고 고마워하는 등 한동민, 최정 같은 거포 타자들로 팀 체질이 변했다. 이후 김용희 - 힐만 감독 체제에서 이 기조가 굳어졌고 이후 미국야구 유행이던 발사각 이론에 맞는 뻥야구 2018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4월 26일 1군에 복귀하고서 4월 27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선발 우익수이자 7번 타자로 출장하여 4타수 2안타(2루타 1개 포함) 1득점을 기록하면서 팀이 4:7로 승리하는 데 나름대로의 몫을 했다.

4월 28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경기에는 선발 우익수이자 5번 타자로 출전, 팀이 스코어 1:3으로 앞서던 3회말 1사 2, 3루에서 상대 선발 브라이언 고든을 상대로 쐐기를 박는 쓰리런 홈런을 포함해 4타수 2안타 3타점 2득점으로 맹활약하며 팀의 8:5 승리를 견인했고, 팬들은 감격했다. 이날 홈런은 개인통산 296호였다.

4월 29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홈 경기에서 2회말 안타로 출루한 후 조인성의 안타와 이어서 터진 실책으로 홈을 밟으면서 개인통산 1,000 득점(역대 7번째) 고지에 오르면서 개인통산 1,000 타점-1,000 득점의 대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기록의 보유자는 당시 장종훈, 양준혁, 송지만으로 박재홍을 포함해 한국프로야구에서 단 4명 뿐[63]이었다. 박재홍은 이날 대기록을 작성했던 한편 4타수 2안타(2루타 1개 포함) 1득점으로 활약했지만 팀은 9:4로 패하고 말았다.

5월 4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홈 경기에서 스코어 3:3으로 팽팽하게 맞서던 8회 최대성의 빠른 공을 통타, 결승 투런 홈런을 날려 팀의 5:3 승리를 견인하였고, 300홈런에 단 세 개 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5월 18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솔로홈런을 쳤다. 개인통산 298호 였다.

5월 31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개인통산 299호 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부상이 도졌는지 6월 들어 2군행. 홈런 한 개가 아쉬운 상황이다.

그리고 10월 3일 잠실 LG전에서 벤자민 주키치 상대로 드디어 300홈런 달성에 성공했다.

10월 6일 문학구장에서의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8회 대타로 나와 안타를 치며 장종훈, 양준혁, 송지만, 장성호에 이어서 프로통산 5번째로 3000루타를 기록하였다. 동시에 만 39세 29일의 나이로 송지만이 가지고 있던 최고령 3000루타 타이틀(만 37세 5개월 18일)도 갈아치웠다.[64]

하지만 시즌 후 지속적으로 프런트로부터 2년 연속으로 은퇴 후 코치연수를 종용당했고, 박재홍은 현역 생활 연장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1월 26일 SK는 보류선수 명단에서 박재홍을 제외하며 자유계약선수로 풀어버리면서 선수경력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SK에서 방출당한 후에도 현역을 이어 가겠다고 밝혀 왔으나, 결국 더 이상 이어 나가지 못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65] 2013년 1월 25일 선수협 주관으로 은퇴식을 연다는 기사가 나왔다. 호타준족의 상징이자 황금 92 학번의 기수 중 한 명,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타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66]

그래도 나름대로 SK 와이번스 프런트의 배려로 4월 20일 문학 야구장에서 은퇴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나 이 날 경기가 우천취소되면서 은퇴식이 5월로 연기되었다.

6. 은퇴

{{{#!wiki style="margin: -10px" <tablebordercolor=#ce0e2d><tablebgcolor=#ce0e2d> 파일:SSG 랜더스 엠블럼.svg SSG 랜더스
역대 은퇴식
(SK 시절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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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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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이름 활약 기간 날짜 비고
1호 김성래 2000년 2000년 8월 13일 인천 연고팀 사상 최초 은퇴식
2호 김경기 2000년 ~ 2001년 2002년 4월 9일 문학 야구장 개장 후 첫 홈 개막전
3호 최태원 2000년 ~ 2003년 2004년 4월 4일
4호 김기태 2002년 ~ 2005년 2006년 4월 8일
5, 6호 조웅천 2001년 ~ 2009년 2010년 3월 28일 합동 은퇴식
정경배 2002년 ~ 2009년
7호 김재현 2005년 ~ 2010년 2011년 10월 1일
8호 김원형 2000년 ~ 2011년 2012년 4월 8일
9호 박재홍 2005년 ~ 2012년 2013년 5월 18일
10호 박경완 2003년 ~ 2013년 2014년 4월 5일 영구 결번
11호 전병두 2008년 ~ 2016년 2016년 10월 8일 구단 최초 은퇴 경기
12호 박재상 2001년 ~ 2017년 2017년 9월 9일 구단 최초 원 클럽 플레이어 은퇴식
SK 와이번스 출신 선수 첫 은퇴식
13호 조동화 2000년 ~ 2018년 2018년 9월 8일
14호 윤희상 2004년 ~ 2020년 2020년 10월 30일 은퇴 경기
SK 와이번스 체제 마지막 은퇴식
15호 박정권 2004년 ~ 2019년 2021년 10월 2일 SSG 랜더스 체제 첫 은퇴식
16호 채병용 2001년 ~ 2019년 2021년 10월 3일
17호
(비공식)
제이미 로맥 2017년 ~ 2021년 2021년 11월 3일 언택트 은퇴 기념 행사로 대체
18호 김태훈 2009년 ~ 2023년 2023년 10월 17일
추신수 2021년 ~ 2024년 2025년 예정
김강민 2001년 ~ 2023년 2025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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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재홍 2013년 5월 18일 은퇴식.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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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식날 팬들의 모습[67]

경기 개시 전 우익수 시구

경기 종료 후 은퇴식

SK 프런트와 좋지 않은 감정을 남기고 "무적" 상태에서 은퇴를 선언하기는 했지만, 은퇴 기자회견 후 프런트에서 시즌 개막 후 은퇴식을 치르자고 제의한 데 대해서는 동의해 SK 구단차원에서의 은퇴식이 성사되기에 이른다. 비록 박재홍의 은퇴 과정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현대 - SK"에서 활동하며 "인천야구"의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선수였기 때문에 상징성은 충분했다. 다만 앞서 구단에서 제시했던 코치 연수의 경우 박재홍이 이미 " 해설위원"으로 데뷔하게 되어 사실상 힘들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전 시즌에 은퇴를 선언한 선수들의 은퇴식이 개막전 다음날에 열리는 것을 고려하면, 박재홍의 은퇴식은 3월 31일 문학 LG전에서 열릴 것이 유력했다. 하지만 해설위원으로 변신한 박재홍이 " MBC 스포츠플러스에서 경기를 중계할 때 은퇴식을 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프런트에 요청함에 따라 은퇴식은 4월 말로 연기되었다. 결국 확정된 일정은 4월 20일 고향 연고팀이자 애증의 관계였던 KIA 타이거즈와의 문학 홈경기 때 실시하는 것으로 공지되었다.

이 은퇴식 공지 과정에서 SK 프런트는 엄청난 삽질을 했는데, 안 그래도 원정 관중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 KIA전인 상황에서 이미 예매가 시작되고 하루가 지나서 공지를 올린 것이다. 공지가 올라온 시점에서 응원지정석은 완전히 매진된 상태였다. 레전드 은퇴식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팬들의 은퇴식 예매를 순전히 운에 맡겨버린 초특급 병크. 이외에도 영구결번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불만까지 나오는 등 여러모로 은퇴식 기획에 있어 미숙함을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다행히도 당일 경기가 우천취소되면서 은퇴식은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다. 프런트의 발표에 따르면 일단은 5월 중순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며, 이 경우 5월 18일 롯데전에서 은퇴식이 실시된다.

결국, 5월 18일 롯데전에서 은퇴식이 진행되었다. 은퇴식이 예정되어있던 날이라 성적 외적 문제로 발길을 끊었던 SK 팬들까지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문학구장을 찾았다. 이날 박재홍은 경기시작 전부터 유니폼을 입고 싸인회를 가졌고, 시구까지 맡았다. 이날 박재홍은 마운드가 아닌, SK 시절 주 포지션이었던 우익수 위치에서 홈으로 송구하는 시구를 선보였다. 경기는 접전으로 이어졌고 리틀쿠바 박재홍의 등번호 62번을 물려받은 동미니칸 한동민이 좌월 솔로 홈런을 쏘아올리기도 했다.

역사에 남을 대선수의 은퇴식이니만큼 승리를 기원했지만 쏟아지는 비 탓에 SK가 스코어 6:5로 지고 있던 상황에서 강우콜드로 경기가 끝나버렸다.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결국 은퇴식은 진행되었고, 대다수의 관중들은 경기장을 떠나고 남아있던 팬들은 지붕이 있는 4층 포수 뒤 관중석과 응원 지정석에 모여 은퇴식을 함께 했다.[68] 그렇게 은퇴식이 진행되던 도중 이만수 감독이 그라운드에 들어서고, 은퇴식 진행자였던 문학구장 장내 아나운서 김우중 아나운서가 SK의 영원한 감독 이만수라고 소개를 하자 그렇잖아도 성적이 부진하고 숱한 실언으로 인해 논란이 많던 이만수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SK 팬들의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현장에 간 사람들 말로는 진짜로 자발적으로 야유가 흘러나왔다고 한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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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의 이미지가 더 강했지만 인천 연고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답게 은퇴 후 현역 시절 입었던 유니폼과 베이스 및 기념구가 인천 SSG 랜더스필드 안에 있던 L's 갤러리[70] 레전드 플레이어 존에 진열되어 2021년 박물관이 폐관될 때까지 전시됐었다.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svg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일간스포츠 선정 프로야구 40주년 기념 포지션별 올스타
2022. 01. 03. 일간스포츠 발표

OF

OF

OF

SS

2B

3B

1B

C

SP

SP

SP

SP

SP

CP

CP

2022년 일간스포츠에서 선정한 일간스포츠 선정 프로야구 40주년 올스타 외야수 부문에 뽑혔다. 이후 동년 KBO에서 선정한 프로야구 40주년 레전드 올스타 40인에도 뽑혔다.

7.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WAR
1996 현대 126 481 .295 142
(5위)
29
(5위)
4 30
(1위)
108
(1위)
75
(4위)
36
(4위)
60 .559
(3위)
.369 0.928 7.27
1997 96 331 .326
(4위)
108 16 0 27
(4위)
69 77 22 68 .619
(3위)
.442
(3위)
1.061 6.48
1998 119 428 .266 114 25 2 30
(4위)
84 86
(4위)
43
(2위)
75 .544 .373 0.917 3.73
1999 129 482 .295 142 27 1 24 98 101 17 85 .504 .397 0.901 4.10
2000 132 489 .309 151 31
(5위)
5
(1위)
32 115
(1위)
101
(2위)
30
(3위)
71 .589 .388 0.977 5.26
2001 127 489 .284 139 20 3 18 80 75 7 76 .448 .377 0.825 3.00
2002 112 432 .278 120 24 0 15 67 57 12 45 .438 .343 0.781 3.10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WAR
2003 KIA 108 392 .301 118 15 5
(4위)
19 80 75 14 61 .510 .393 0.903 3.76
2004 73 186 .253 47 9 1 7 29 29 7 35 .425 .366 0.791 0.9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WAR
2005 SK 109 421 .304 128 21 1 18 63 76
(4위)
22 69 .487 .400 0.887 5.24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OPS WAR
2006 SK 124 452 .259 117 22 1 18 73 61 22
(5위)
69 .431 .353 0.784 3.46
2007 115 347 .280 97 19 1 17 54 53 10 45 .487 .356 0.843 2.93
2008 112 396 .318 126 26 2 19
(5위)
72 66 5 72 .538
(3위)
.420
(2위)
0.958 4.80
2009 113 315 .270 85 12 0 12 46 53 15 55 .422 .371 0.793 1.48
2010 82 191 .220 42 7 0 8 27 22 1 24 .306 .382 0.688 -0.01
2011 74 161 .186 30 8 0 1 12 11 4 15 .250 .255 0.505 -0.35
2012 46 104 .250 26 5 0 5 18 16 0 15 .442 .342 0.784 0.65
KBO 통산
(17시즌)
1797 6097 .284 1732 316 26 300 1081 1012 267 940 .492 .376 0.868 55.89

[1] 일고 동기인 김종국(야구) 유격수, 상대팀인 장충고 3번타자가 적토마 이병규다. [2] 고졸연고 자유계약을 통해 즉전감으로 영입할 수 있음에도 당시 해태 프런트는 박재홍에게 대학 진학을 권유하고 1차 지명을 했다. 박재홍 위원이 직접 밝힌 바로는 "우리 때는 다 대학갔어" 라며 일부러 거부한 게 아니라고 했다. [3] 프로야구 초창기 시절에는 88년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한 문희수 정도가 고작이었다. 여기에 1992년 신인왕을 차지한 롯데 염종석, 같은 해 입단한 빙그레 정민철이 드물게 고졸신인으로 활약했다. [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대표팀을 맡은바 있다. 전부 순수 아마추어 선수들로 구성한 대회에서 각각 2위와 8위를 기록하였다. [5] 일명 현대 피닉스 사태로, 현대그룹이 프로구단 창단이 어렵게 되자 제 2리그인 실업 야구단인 피닉스를 창단하여 고교야구, 대학야구의 아마추어 유망주들을 거액의 계약금으로 휩쓸었다. 참고로 현대 피닉스와 계약하고 활동하지 않은 선수로는 대학 동기이자 나중에 같은 팀에서 뛰게 되는 임선동도 있다. [6] 박재홍은 현대 피닉스와 계약한 이유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들었다. 당시에는 프로선수의 올림픽 참가가 불가능했고 상무 야구단 역시 프로 선수의 입단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여기서 메달을 따고 병역 특례를 노렸다는 것. 1990년대까지 프로야구에서 대졸 신인이 고졸 신인보다 많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병역문제였고,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부터 프로 선수도 국제대회 출전을 통한 병역특례 기회가 생기면서 고졸 신인이 더 많아졌다. 다만 어찌된 일인지 박재홍은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을 선발하기도 전인 1996년 초에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다(올림픽 대표 최종 선발은 1996년 6월 20일, 올림픽은 1996년 7월 19일부터 개최). [7] 오른쪽은 당시 구단주 대행을 역임하던 이내흔 현대건설 사장이다. 입단 동기이자 고졸 후배인 박진만과 유니폼이 다른 이유는 박재홍이 해태와 현대 프런트와의 박재홍의 지명을 놓고 크게 말이 많아서 늦게 합류를 했다. [8] 종전 신인 야수 최대 계약금은 전년도에 LG와 계약한 심재학의 2억 3000만원이었다가 박재홍과 같은 해 현대에 입단한 박진만이 2억 8000만원으로 경신했고, 그러다가 박재홍이 또 경신한 것이다. 박재홍의 기록도 1년 뒤인 1997년 이병규가 LG와 4억 4000만원에 계약하며 경신된다. [9] 태평양에서 현대로 바뀔 때 주전 2루수였던 김성갑이 은퇴했으니 그 자리를 박재홍으로 대체할 계획이었다. [10] 위 영상에 나와 있듯이 고교 시절에는 투수로도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원래 타자로서의 재능이 더 출중했고 대학에서는 문동환, 임선동 등이 있기에 굳이 그가 투수로 나올 필요가 없었다. [11] 외야 전향 과정에 관해서는 사회인야구 클리닉 프로그램인 쉘 힐릭스 클리닉에 코치로 참가한 박재홍 본인이 "외야수 출신인데 왜 내야 코치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원래 내야수였고, 내야수로 입단했는데, 팀 훈련 당시 자연스레 내야로 들어가던 와중에 한 고참선수가 '너 외야로 나가'라고 지시하면서 얼떨결에 외야수로 뛰게 됐다고 증언했다. 해당 고참이 누군지에 대해 증언하지 않았고, 다소 농담 섞인 개그 에피소드로 추정된다. [12] 4억 3천만 받고 내줄 만한 선수가 야수로는 홍현우, 이종범이며 투수로는 조계현, 이강철, 이대진 급이 나온다!!(조계현이 97시즌 종료 후 삼성과 4억에 트레이드된다.) 현대가 " 문동환의 지명권"을 갖고 롯데에게 했던 요구를 생각하면, 박재홍의 지명권으로 2루수, 3루수 모두 뛸 수 있는 홍현우를 데려오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현대는 2루수가 약점이어서 어떻게든 2루수를 데려오려 했기 때문.(현대는 2년 뒤인 1998년 초에 OB에서 방출된 2루수 이명수를 데려와서 그 해 우승하고, 그 당시에도 나이가 좀 많았던 이명수를 대체하고 세대교체를 할 목적으로 1998년 시즌 중에 LG에서 데려온 박종호를 2루수로 잘 써먹는다.) 상기했듯 박재홍도 처음에는 "2루수"로 프로인생을 시작할 뻔했고. 그렇지만 아무리 괴물 신인이더라도 신인 상대로 이 정도 출혈은 생각하기 어렵다. [13] 최상덕은 1994년에 선발 불펜 가리지 않고 나와 13승을 거두었지만, 1995년에는 0승 4패 ERA 8.28의 성적을 거둬 굉장히 부진했던데다 당시 한화 이글스 4번타자인 장종훈의 타구를 얼굴에 맞아 부상을 당해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고, 그 후유증으로 당분간 제대로 된 성적을 기대할 수 없었다. 구단 사정이 어려웠던 해태는 당장 연봉 많이 나가는 선수를 데려올 수 없었고, 지금은 연봉 많이 안 나가는+회복된 뒤에는 에이스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최상덕을 데려온 것이다. 이렇게 해태에 온 최상덕은 이적 첫 해 팔꿈치 부상까지 당해 드러누웠지만, 몸이 회복된 1998년부터 타이거즈에서 기대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고, 해태의 마지막 에이스-초창기 KIA의 에이스가 된다. [14] 물론 돈 많이 받았으니 마냥 피해자라고 보긴 무리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그 돈을 받은 댓가로 고향 팬들에게 선수생활 내내 당해야했던 무수한 핍박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피해자라 할 수 있다. [15] 30홈런, 2위 양준혁 28홈런, 3위 이종범 25홈런 [16] 108타점, 2위 양준혁 87타점, 3위 이종범 이승엽 임수혁 76타점 [17] 2024년 현재까지도 유일한 만장일치 신인왕이다. 타격 3관왕의 양준혁도, 리그 MVP-투수 트리플 크라운의 류현진도, 각종 신인 타자 기록을 갈아치운 이정후도 만장일치 신인왕은 아니었다. 다만, 이정후가 신인상을 받을때에는 당시 인터넷 기사에서도 많은 댓글이 나왔는데 기자들의 친목으로 분명 본인들이 지지하는 성향의 팀 선수에게 투표 할 것 이므로 네티즌들 댓글에 "절대로 팀 인기에 불리한 이정후는 만장일치가 안된다" 라는 소리가 있었는데 확실하게 틀어 맞췄다. 거기다가 즉, 이정후를 제외한 후보자 둘은 받을만한 성적도 아니였다는 평이다. 정현은 4년차 였고 김원중의 경우 데뷔 6년차에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것과 7승 8패 였다. 그나마 팀 인기빨로 신인상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한것. [18] 2006년 류현진이 MVP를 수상할 때, MVP를 이대호와 류현진 중 누가 타야 할 지가 문제되었을 뿐, 류현진이 MVP와 신인상을 동시에 수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논란거리가 아니었음을 떠올려 보자. [19] 그해 탈삼진 1위는 롯데의 주형광의 221개였는데, 다승 부문도 구대성과 공동 수상했다. [20] 또한 그 당시만 해도 신인에게 둘 다 줄 수 없다는 신인에 대한 보수적인 인식이 매우 강했던 시절이었다. 이 점은 3년 전 양준혁이 신인으로 타격왕을 비롯해 3개 부문을 수상하고도 MVP를 놓친 것에서 나타난 바 있다. 그래서 팀내 대선배인 김성래가 정규리그 MVP를 받았다. [21] 기자 본인들에게 건방지다는 얘기다. [22] 당시에는 한-미간 포스팅 시스템 제도가 없었고, 당연히 FA 제도도 도입되기 전이었다. 그나마 선동열이 임대 방식을 거쳐 일본 구단인 주니치로 이적한 게 KBO 출신 선수가 해외 리그로 이적한 유일한 사례였다. 거기에 임대료를 받아 돈도 그렇게 없는 구단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의 연봉에 도움이 컸다고 한다. [23] 사실 김성근 감독은 지도자 생활 내내 이런 방식으로 상대팀 선수의 신경을 긁어서 경기를 자기 팀 쪽으로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전략을 잘 써먹었다. 당장 96년 플레이오프 때에도 마운드 운운했던 전력도 있었고. 막상 자기네들이 설레발 치다가 리버스 스윕 당했다. [24] 시작은 악연이었으나 이후 김성근과 박재홍은 2007년에 SK에서 만나 2011년까지 한솥밥을 먹으며 SK 왕조시대를 이끌었기에 사람 일 모른다는 말이 맞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25] 도원야구장에서 KBO 시범경기에서 우익수로 출장힌여 포수 김동기 캐치볼을 하다가 91m 우익수 폴대 앞에서 던진 공이 포수 훨씬 뒤의 백스톱을 맞춰버린적도 있었다. 더불어 관중들은 드디어 프로야구 원년 초창기 양승관 이후에 제대로 된 우익수가 왔다며 환호. 인천 프로야구의 원조 슈퍼스타였던 양승관도 꽤나 강견이었는데 도원야구장 홈플레이트에서 던진 공이 공설운동장 주경기장으로 넘어갔다는 후덜덜한 일화가 전해진다. [26] 당시 윤덕규는 노쇠화했고, 김인호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물빠따 태평양 출신 타자답게 커리어 내내 타율 0.250를 넘겨본적이 거의 없었다. [27] 당시, 126 경기 체제. [28] OPS는 1.061, wRC+는 무려 193.7(스탯티즈 기준)을 기록했다. 타점이 빈약해 보이겠지만 이해에 현대 선수들이 꽤나 부상자가 있었다. 그나마 규정타석에는 실패하고 121경기에 출장한 이숭용과 테이블세터에서 개고생한 이적생 전준호를 빼면 거의 시체였다. [29] 실제로 8월 29일까지 박재홍은 26홈런을 기록, 그 시점에서 홈런 단독 1위였다. 30일 이종범이 홈런 2개를 기록하며 역전. 그런데 이종범은 유격수 최초로 30-30 클럽을 가입했다. 그런데 이전에 이종범은 전 시즌 20-20 클럽에도 가입한 이력이 있다. 거기에 2년 연속 도루왕 까지 획득. [30] 1위인 정수근과는 단 1개 차이였다. 덧붙여 박재홍은 30홈런을 기록하면서 덧붙여 도루시도가 가장 많은 주자였다. 성공률이 낮아서 정수근한테 도루왕을 내준 것이다. 홈런왕과 도루왕을 동시에 달성한 선수는 이웃나라 아키야마 코지가 최초로 했고 시간이 꽤 흐른 이후에 야마다 테츠토가 달성했다. [31] 이미 스포츠 신문으로는 발목 부상이 심각하다는 식으로 나왔었다. [32] 대신 외야수 자리는 백업 김인호와 이숭용이 번갈아서 출전했다. [33]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했지만 여기에는 프로선수들 까지 나가니 애들이 뛰는곳에 성인이 난입하여 난장판을 만들고 갔다는 우스갯 소리도 있었다. [34] 만약 도루까지 20개를 채웠다면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무려 5년 연속 20-20 클럽 가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35] 3할 타율-30홈런-100타점은 프로야구 타자라면 누구나 세우고 싶어하는 대기록이자 중심타자의 기준이 되는 기록이다. 이 분야의 끝판왕이 있다면 발전이 없다는 얘기를 듣던 MLB의 어느 레전드. 그런데 그 레전드는 물론 현세대 톱클래스 리빙 레전드로 불리는 선수마저도 한 시즌에 3할-30홈런-100타점-100득점을 하면서 30도루 이상까지도 한 적은 없다. 박재홍의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전년도의 홍현우가 도전했으나 득점 1개 차이로 실패하였다. [36] 2015년 NC의 에릭 테임즈가 15년 만에 30-30 클럽에 가입하였지만, 이는 외국인 선수의 기록이다. 토종 30-30은 이후 2024년 8월 15일 기아 타이거즈의 김도영이 기록하게된다. 박재홍과 김도영의 공통점은 타이거즈 선후배 이외에는 없다. 21년전 박재홍도 고향팀인 타이거즈에서 뛰었는데 20-20 클럽을 가입 할 수 있었지만, 하필 선수시절 달고 다녔던 그놈의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무산 된 적이 있었다. [37] 박진만 심정수의 수비 실책으로 사실상 경기력은 LG에게 완패했다. [38] 조용준 강철민이 그의 동기이다. [39] 광주일고 선후배 지간이기도 한 이현곤 정성훈 KIA 타이거즈의 차세대 핫코너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이었으며, KIA 입장에서는 이미 1루수 장성호, 2루수 김종국, 유격수 홍세완이 정해진 상황에서 이현곤 정성훈 중 둘 중 하나를 정리해서 내야진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정성훈이 트레이드되었고, 트레이드된 뒤 현대에서 잠재력이 폭발한 뒤 후에 FA 대박까지 두 차례나 이루었으며, 이현곤은 지병인 갑상선 항진증 유리몸 기질로 인해 타격왕이 된 2007년 한 해를 제외하곤 매년 부상으로 골골대다가 FA가 되면서 2013년 NC 다이노스로 이적한 뒤 거기서 은퇴했다. 게다가 김종국은 수비는 좋았지만 공격에서는 아마시절만 못했고(아마시절에는 나무배트는 알루미늄으로 사용하던 시기라 아마추어 선수들이 프로에 정착하면 명성과는 달리 많이 애먹기도 했었다.), 04년 직후 노쇠화가 오면서 출장이 줄어든다. 홍세완은 그 무시무시한 무등구장주옥같은 열악한 환경에 무릎이 망가지는 바람에 이른 나이에 은퇴했다. 그 와중에 공수에서 꾸준했던 선수는 장성호 뿐이었으나, 그 장성호마저 2007년을 기점으로 잔부상과 플래툰 출장 + 최희섭의 국내 복귀 등으로 인해 하락세가 찾아오고 말았다. 이후 KIA는 이 트레이드 이후 16년이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정성훈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으나 이때는 이미 정성훈의 전성기는 다 지나간 이후라 평범한 성적만을 남기고 은퇴하게 된다. [40] 당시 열악했던 무등 야구장의 시설 뿐 아니라 당시 감독이었던 김성한이 04시즌 전 비시즌에 선수단의 정신을 다잡겠다면서 실시한 국토대장정이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으리라 추측된다. [41] 설상가상으로 트레이드 상대인 김희걸이 기아에서 활동하던 5년반동안 불만 지르고 삼성으로 트레이드 된 점도 박재홍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는데 한 몫을 했다. [42] 물론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비교적 평가가 나아진 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당시 속사정(정재공 단장이 계속 모욕적인 언사를 하며 손찌검을 했고 열 받아서 술잔을 던졌다고.)도 알려지고 함께 먹튀로 평가받던 마해영(마해영은 FA로 KIA에 4년 28억으로 이적), 진필중(두산으로 이적한 손혁, 김창희를 대신하여 트레이드로 8억을 주고 KIA로 모셔온 것 활동한건 1년 이라는 시즌 이지만 이후 그냥 그러한 성적을 찍고 그해 귀신같이 시즌이 끝나고 LG로 4년 40억으로 FA 이적을 했다.)과 같은 선수들의 임팩트에 비해 그래도 박재홍은 한 시즌이라도 밥값은 했다라는 평가. 거기에 이용규(이용규는 원래 LG에서 데뷔했지만 LG에서 거하게 먹튀짓 하던 홍현우를 보낼때 같이 KIA로 딸려 보냈다. FA때 한화로 이적했다.)와 같이 팀을 떠난 후 팬들과 대놓고 대립한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타이거즈와 상성이 안맞았던 선수 정도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아졌다. 만약 이라고 덧붙이면 2010년대 중반의 챔피언스 필드의 등장 + 2003년의 박재홍 이였다면 분명히 시너지 효과는 좋았을 평이라고 했을것이다. 2000년 초중반만 하더라도 현 2020년대와는 달리 프로야구 초창기 80년대와 중흥기인 90년대와 똑같이 투승타타에만 너무 고집된 야구관이 컸고 거기에 잔부상 때문에 박재홍이나 송지만의 경우 현역시절에 저평가 받는 소리가 많았다. 이들이 은퇴를 하고 비로소 스탯티즈 인터넷이 활발하게 되면서 같은게 발달되어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43] 해태 시절 똥군기 같은 문화는 이종범이 국내로 리턴 한 후 없앴다고 하지만, 비일비재 하듯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2015년 이해에 원산폭격 하는 사진짤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아무래도 후자가 맞는 말인듯 하다. 그런 문화에 지속되어 생활은 한 김종국 vs 그런거 싫어하는 박재홍의 대립이였다. 위에 언급하듯이 박재홍은 정재공 단장에게 맞았다는 것이 나오면서 다소 억울하던 부분이 밝혀진것. [44] 다만 이후를 보면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등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이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나이 먹고 성격이 바뀐 걸수도 있지만. [45] 투수 김진우가 엄청난 부진을 겪었는데 이게 김성한 감독 시절에 있었던거다. [46] 운동이 곧 생업인 직업 특성상 몸을 많이 쓰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각종 부상이 따라올 수 밖에 없다. 이런 부상들 때문에 운동 선수들은 예술체육요원이 안되더라도 징병 검사에서 현역 부적격인 4급 이하 판정을 받는 경우가 많다. [47] 브래드 피트는 영화 트로이 에서 아킬레우스 역을 맡았다. [48] 2014년 김건한으로 개명. [49] 정근우는 당해년도 입단한 신인이어서 아직 성장이 늦었고 2년차인 2006년부터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각성한다. [50] 리그가 10년전 자신이 데뷔한 투고타저 시대와 비슷했다. 그러나, 아직도 기자들에게 미운정이 박힌건지 골든글러브랑 인연은 없었다. [51] 그 때까지만 해도 이대호는 몸집이 크면서 정확도는 낮은 걸리는 슬러거에 불과했다. 그리고 2006년 새해 이대호는 신임 감독이자 롯데 3기 시절 복귀 한 강병철 감독의 요청으로 통도사에 들어가서 식이요법 훈련 그리고 불경을 외우며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이대호는 체중 감량을 성공하였다. 2006년 시즌 트리플크라운 수상 직전이었다. [52] 이후 롯데는 20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장성호를 트레이드로 영입하게 된다. [53] 하지만 마해영은 LG로 이적했지만 노쇠화가 찾아오고 고액 연봉자인지라 페이롤만 제대로 깎아먹는 등 팀에 제대로 도움을 주지 못했고 2군에만 있다가 김재박 감독에 의해 방출되었다. [54] 3년 18억원 즉, 구단에서는 돈이 없기 때문에 연봉으로만 매년 6억씩 주겠다고 언질을 한거다. 게다가 구단이 언제 없어질지 모를판에 송지만은 아무것도 모르고 도장을 찍었지만 2008년 현대가 망하고 우리 히어로즈 창단이 되면서 이 FA 계약이 모두 무효가 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장석이 이런식으로 머리를 굴려 초창기 팀의 선수들 연봉을 죄다 깎아먹은 전례가 있었다. [55] 당해 김태균, 이병규보다도 높은 WAR을 기록했다. [56] 이해의 수확은 위에 언급 되었듯이 정근우가 국내 2루수들 중 1위를 찍고 단숨에 몇년간 리그의 2루수의 1인자가 되었다. [57] 이 때 김재현과 박재홍이 플레툰 시스템에 따라 주전에서 밀려나고 전임 조범현 감독 시절부터 1군에서 백업으로 나오던 SK 창단 초창기 멤버들인 김강민, 박재상, 조동화 등이 주전으로 등장한다. [58] 2000년 30-30 클럽을 가입하던 해였다. [59] 선수시절 내내 부상이 된 원흉이기 때문에 박재홍에게 예민하게 신경이 쓰일수 밖에 없었다. [60] 윤길현이야 전 시즌에 KIA 최경환에게 빈볼을 집어던지고 욕설을 하면서 인성 논란이 빚어졌고, 채병용은 07년에 김재걸에게 빈볼을, 한국시리즈에서는 김동주 안경현에게 빈볼을 날려서 이미지가 영 좋지 않았다. 김성근 감독이야 말이 필요가 없는 수준. [61] 거포로 각성되기 전인 만년 2군 유망주 시절의 박병호도 한때 넥센으로 트레이드 되기 전까지 말이다. [62] 1996년 한국시리즈 6차전 김인호의 수비 플레이가 생각나는 장면. [63] 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승엽, 그리고 2012년에 2천안타를 친 장성호 이렇게 2명이 이 기록을 달성하며 1000-1000 대열에 합류하여 2015년 현재, 1000-1000 기록의 보유자는 총 6명이다. [64] 두 선수는 입단 동기이지만 전반적으로 초반에 보여준 퍼포먼스는 확실히 박재홍이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이후로 박재홍이 플레툰으로 나왔고, 성적이 하락세를 탄 것과 달리 송지만은 이후에도 꾸준히 선수풀이 약한 히어로즈에서 2할대 중후반을 치면서 주전으로 나왔다. 그래서 먼저 달성할 수 있던 것이다. [65] 사실 마땅히 박재홍을 영입할만한 팀도 없었다. 전력이 약하던 그 한화도 베테랑 정리를 시전하며 장성호를 롯데로 트레이드 시키고, 강동우는 점차 출장을 줄이다가 13시즌이 끝나고 은퇴시켰다. 노쇠화가 뚜렷한 박재홍의 10~12시즌 성적은 그 고동진보다도 못했다. [66] 황금세대 92학번 중 2013 시즌에 현역으로 뛰는 선수는 송지만 단 한 명 뿐이었지만 송지만도 다음해에 은퇴하면서 이제 황금세대 모두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7] 박재홍의 은퇴식 날이었던 2013년 5월 19일, 문학구장에서 찍힌 사진이다. 빵형이라는 별명 답게 사진속의 두 남자는 바게트를 들고 있다. [68] 현장 분위기는 꽤나 엄숙했고 일부 팬들은 비와 함께 눈물을 펑펑 흘렸다. 현장 후기에 따르면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마지막으로 박재홍의 응원가를 부른다는 생각에 박재홍의 응원가를 부르던 그 순간 눈물을 참지 못했다고. 은퇴식 막바지에 연안부두를 틀면서부터는 나이가 꽤 드신 도원아재들마저 우는 모습을 보였다. [69] 이듬해에는 박경완의 은퇴식이 있었는데, 다행히 장내 아나운서가 이만수 종신감독 운운하는 소리를 안 해서 잘 넘어갔다. [70] 전신팀인 SK 와이번스부터 이어진 구단 역사관으로 인천야구의 변천사와 SK 와이번스 히스토리, 레전드 플레이어존 및 우승 트로피 등이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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