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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2:26:04

명나라-여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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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명나라-여진족 관계2.2. 명나라- 후금 관계2.3. 청나라와 오삼계
3. 관련 사건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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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여진족의 관계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역사적 관계

2.1. 명나라-여진족 관계

파일:명나라 조선 국경.png

명나라는 원나라를 몰아내고 여진 및 우량카이의 지배를 위해 요동도지휘사사, 대녕도지휘사사를 만주 지역에 설치했으며, 성조 영락제 시기 누르간도지휘사사를 설치하여 기미제와 위소제로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을 관리, 통제했다.[1] 실제로는 요동도사만이 명나라 직속령으로써 군사 기능을 할 수 있었고, 대녕도사나 누르칸도사는 책봉의 기구로만 적용하여 곧 축소되었다.[2] 4군 6진 개척 이후에도 초기 명나라와 조선은 여진족때문에 서로 간의 국경을 좁히지 못했다가 전기 이후에야 국토를 접하게 된다.

명나라는 요동 요서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여진족들은 누르하치에 의한 통일 이전, 여러 부족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명나라에 우호적인 부족들은 채집한 인삼을 명나라에 비싼 가격에 수출할 수 있었고,[3] 명나라에 적대적인 부족들은 예방 전쟁 차원에서 명군과 조선군의 협공을 받았다.

명나라의 주적은 북쪽의 몽골이었지만 여진족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명나라 군대는 적군의 수급을 가져올 때 몽골족의 수급은 1급, 여진족과 티베트족의 수급은 2급, 남방의 소수민족 왜구는 3급, 한족 반란군은 4급으로 나누어 포상했을 정도로 여진족을 크게 경계했다.

2.2. 명나라- 후금 관계

친명파 여진족의 수장이던 누르하치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군의 오발 사고로 사망하자 이를 명나라가 계획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반명 운동을 준비하며 세력을 키웠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과 명나라가 여진족에 대한 예방전쟁을 벌이지 못한 틈을 이용하여 여진어를 사용하는 각 부족들을 통일하기 시작했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부족이 친명파 부족이었던 예허부(엽혁부)를 제외한 나머지 여진 부족들을 전부 통일하고, 마지막 통일을 위해서 예허부를 공격하자 명나라는 조선의 동맹군 및 예허부 포함 170,000명에 이르는 대군을 파견하여 누르하치를 정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장수들은 서로 공을 탐내서 협조하지 않고 각개 공격을 하다 사르후 대전 등에서 대패했으며 이를 계기로 여진족들의 위상 및 세력은 급격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사르후 대전 대패 이후 명나라는 웅정필이란 장수에게 군대를 주어 후금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웅정필은 위충현에게 모함을 당해 파직당하고 여진족들은 이를 계기로 다시 영토를 급속히 확장하였다. 판단 미스를 파악한 명나라 조정은 웅정필을 복직시켰으나 웅정필은 이번에는 여진족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웅정필이 처형당한 이후, 원숭환이 성벽과 대포를 이용하여 영원 대전영금 대전에서 후금군의 진격을 막았으나 전임자와 비슷하게 기사의 변 이후 모함을 당해 처형당했다. 명나라는 압도적인 경제력과 국력을 가지고도 후금군에게 어이없이 송금 대전 등에서 대패를 반복했고, 후금은 한족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으면서 국력을 신장시켰다.

2.3. 청나라와 오삼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으로 고쳤으며, 청나라와 대립하던 명나라는 1644년에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당해 멸망했다. 이자성의 군대가 오삼계의 친지들을 사로잡아 위협하자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했다. 오삼계와 청나라의 연합군은 일편석 대전에서 순군을 대파하고, 이자성이 건국한 대순을 멸망시키면서 북경에 입경했다. 이후 청나라에 대항해 남명이 들어섰지만, 남명 역시 내분으로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 정성공이 세운 동녕 왕국, 즉 동녕국은 1683년까지 존재하다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3. 관련 사건

4. 같이 보기



[1] 종종 보여지는 명나라 초기부터 만주와 연해주, 사할린까지 이르는 전역이 명나라의 영토였다는 광대한 명나라 지도는 이 명목적인 관할권을 모두 다 명나라의 직속 영토로 싸잡아넣은 지도이다. [2] 만주 지역에 한족들이 대거 이주하는 시점은 청나라 조정에서 1870년대 간쑤성 산시성 대기근으로 인한 부담을 덜고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한족들을 대량으로 이주시킨 틈관동이 기원이다. [3] 당시 여진족들은 주로 반농반렵 생활을 했고, 몽골처럼 명나라에 정기적으로 대규모 마시장을 여는 상황도 아니라서 산에서 채집하는 산삼 외에는 경쟁력 있는 수출 상품이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