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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01:40:10

고려-여진 관계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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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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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금 추존 황제 완안함보 관련 이야기거리 및 논란2.2. 여진족 해적2.3. 윤관의 여진정벌2.4. 금나라 멸망 전후

1. 개요

고려 여진, 그리고 훗날 여진족들이 세운 금나라의 관계.

2. 상세

고려 시대에는 고려 거란 사이에 끼어서 고려나 거란의 제후국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려는 외왕내제를 하기 위해 명분상이라도 제후국이 필요했는데, 여진의 여러 나라들[1] 탐라국, 그리고 일본이 비슷한 역할을 했다. 탐라인들은 고려에서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과거 제도에서도 빈공과에 응시해야 했다. 다만 어떨 때는 또 고려의 일부처럼 대하기도 하고 고려 시대의 제주도 인식은 이랬다 저랬다 왔다갔다 해서 애매한 편이다.

발해 멸망 후 여진의 여러 나라와 부족들은 고려에 복속되기도 했는데 물론 요나라 서희로 대표되는 고려의 합의에 의해 영역을 통째로 빼앗긴 시절도 있었지만 그 직전인 983년 고려가 먼저 압록강까지 치고 올라가려다가 여진에게 참패를 당하는 등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2.1. 금 추존 황제 완안함보 관련 이야기거리 및 논란

이 중에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신라인 내지 고려인을 조상으로 삼고 고려에게 숙이고 들어갈 때마다 '아 우리 생각해 보니까 옛날에는 잘 지냈져 그져' 하면서 족보를 읊는(...) 이들도 있었다. 문헌에 따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데 대충 한반도 방면에서 왔다는 뉘앙스로 적어 놓은 듯 하다.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인 금사와 고려역사를 기록한 정사인 고려사 모두에 금나라의 시조가 한반도(신라 내지 고려)에서 왔다고 쓰여 있다. 금사가 원나라 시기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실제 금 황제가 한인이 완안의 시조를 중국의 전설의 오제중 하나의 후손이라고 말하자, 조정의 신하가 금 시조는 고려에서 건너왔다고 대답했고, 황제도 그게 맞다고 대답하기도 하는 등 적어도 금 시조 한반도인 설은 당대 금 시기에도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하지만 여진족 내에서 성공을 이룬 일부가 한반도 출신이었다는 것일 뿐 여진족의 민족 구성이 뒤바뀌었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여진족은 여러 반농반렵 부족의 집합체였고 특별한 종교나 이데올로기로 뭉친 민족 집단도 아니라 민족 관념이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서, 만주족 같은 경우도 영문 위키 청나라 문서에서는 원래 있던 여진족이 아닌 인공적으로 탄생한 민족으로 보며 팔기만주씨족통보에서도 조선·몽골·한족 등 본래의 여진족이라는 민족과는 다른 인간들이 만주족 취급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사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도 고구려인은 무덤지기 같은 천한 일을 하다 몰락할 것을 염려하면서도 자신이 약취한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은 무덤지기나 하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뭔가 근현대에 정립된 민족 개념(과거에는 삼한 민족끼리는 동질의식이 있어서 차별 등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 추측했다.)과는 다른 경우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그러한 일을 맡는 사람들은 아예 고구려인인 구민들과는 사회에서의 격차도 컸다. # #

2.2. 여진족 해적

여진족이 유명했던 또 다른 분야는 의외로 해적질인데, 특히 한반도의 동해 방면에서 악명이 높았다. 한반도 북쪽의 이민족은 다 말 타고 뛰어다닌다고 생각한다면 다소 충격일 수 있겠지만, 의외로 읍루 시절부터 해적질을 벌여온 탓에 옥저 사람들이 산에 가서 숨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는 판국이다.

고려 시대 지방 행정 제도에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행정 구역인 양계 중 동계가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이 여진족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추론도 있다. 심지어 이웃에 있던 우산국은 1018년 여진족 해적의 침입을 받고는 사실상 나라로써 사형 선고를 받고야 말았다. 그전까지는 고려의 속국 수준으로나마 근근히 살아가는 형편이었는데 이 공격 한 번에 그렇게 되어버린 것.

이 해적질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에는 일본의 규슈지역까지 원정을 나갔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들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러다 고려와 접촉한 후 이들이 이 족속을 '도이(刀伊)'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된다. ' 되놈'이라고 할 때의 그 '되'가 맞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외'를 '오ㅣ[oj\]'라고 이중모음으로 읽었다가, 후대에 발음이 단모음화되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해적질당한 사건을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라고 부르게 된다. 그 스탠스는 가히 여진판 왜구.

사실 여진족들의 활동 지역인 만주에는 평야 지대도 있었지만 숲과 큰 강도 있었다. 여진족들이 거주하던 지역 가운데 하나인 아무르 강만 해도 폭이 454,800㎢에 달한다. 때문에 초원에서 방목만 하는 다른 유목민족들과는 생활방식이 크게 달랐고 어업 역시 여진족들의 주업 중 하나였다. 즉, 원래도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민족이었던 것.

병자호란 때에도 예전 생각은 못하고 몽골이랑 비슷하겠거니 하고 강화도에서 안심하고 있다가 함락당하고 말았다. 물론 김경징 등의 삽질도 컸고 모문룡의 수하였던 공유덕, 상가희, 경중명 등이 청에 항복하여 명의 수군 기술이 그대로 넘어간 것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역시 동여진 해적과 숱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1009년에 현종이 즉위 하자마자 등주에 75척의 과선을 배치하여 여진족 해적들의 노략질에 대비토록 하였다. 하지만 1011년 6월 동여진 해적이 100여척의 배를 이끌고 경주에 쳐들어왔다. 1011년 1월 2차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고, 1018년에는 동여진 해적으로부터 일본인들을 구출했는데 이때 일본측의 기록인 소우기(小右記)에는 고려의 군함이 거대하여 해적선을 전복시켰고 그 안에는 온갗 무기들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사실상 현종은 거란뿐만 아니라 여진과도 전쟁을 수행한 것.

이후 금나라 북송과 전쟁할때 송흠종이 고려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이를 거절하였고 대신 여진과의 싸움에 잔뼈가 굵은 고려는 송에게 "걔네 물에서도 잘싸우더라"라는 나름의 조언(...)을 해주긴 했다.

2.3. 윤관의 여진정벌

고려 전기에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섬기며 조공 했으나 힘이 강성해지자 고려에 위협이 되었다. 고려 측에서는 윤관의 지도하에 동북 9성을 세우기도 했지만 겨우 2년 만에 반환해야 했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동북 9성을 '고려의 영토 확장'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종 아버지의 유지를 따른다는 이유로 무리해서 여진족을 공격했고, 결국 동북 9성을 차지한 지 2년 만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참패( 갈라수 전투)하게 된다. 또한 동북 9성으로 인한 재정 부족이 날로 심해지자 고려는 결국 동북 9성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동북 9성의 책임자인 윤관은 중앙에 복귀하지 못하고 파직당하는 등 국가 사업으로서는 완전한 실패였다.

즉, 영토든 뭐든 이렇다 할 소득이 없었다는 것.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여진은 이후 금나라로 발전하면서 요나라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며 중국대륙의 북쪽을 집어 삼키기까지 하는데도 고려를 단 한 차례도 침공하지 않았다. 2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금나라도 고려 군사력을 만만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아예 근거가 없지는 않다.

여진족이 급속도로 흥기하여 금나라를 세워 화북을 정복하자 고려는 이런 금나라를 보고 매우 놀란다. 여진족은 이전까지만 해도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부르며 윤관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고려 쪽으로 기와 한 장 던지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진은 고려의 제후국에서 금나라를 세울 때까지 성장한 뒤 이전 거란이나 이후 몽골과 달리 고려와 굳이 전쟁을 하려고까지 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북중국을 제압했으므로 여요전쟁 때보다는 더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오히려 고려 측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존재한 요의 영토였던 보주(현 의주군) 등을 회복하겠다고 했을 때 완안아골타우리 정신 없으니까 당신들이 알아서 접수하시오라고 이야기만 했다.

금나라를 세운 후 충돌을 피하고자 고려가 금을 명목상 상국으로 대접해줬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요에 비하면 그래도 분쟁을 피하려던 시기였다.

2.4. 금나라 멸망 전후

금나라 후기, 몽골 부족들이 통일해 대제국을 세우고 금나라가 몽골에게 털리면서 쇠약해질 무렵에 거란 유민들이 독립하고 몽골이 요서를 점령하면서 금나라는 영토가 2개로 나뉘어졌다. 몽골군과 요동의 거란에 의해 단절되면서 만주 지역의 금나라와 중원의 금나라는 다른 정체성을 띄게 되었고, 만주의 금나라는 금나라 부흥군에서 동하로 분리독립했다. 이 시기에 동하뿐 아니라 여진계 호족 혹은 금나라 호족들도 여러 세력들로 나뉘어졌으며, 이들 중 몇몇 고려를 침공한 집단들을 빼면 처음에 고려를 돕거나 고려의 도움을 받았지만 나중에 이들을 침략해서 노략질을 하거나 저고여 피살 사건 등을 일으켜 몽골과 고려 사이를 이간질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하와 남은 여진족 호족들은 1230년대에 몽골에게 점령되어 패망했고 1233년 동하가 몽골에게 멸망하면서 몽골과 접하게 되었다. 1234년에도 중원의 금나라 역시 몽골에게 멸망하면서 금나라와의 관계는 끝이 난다. 물론 금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중원에 가지 않은 여진족들은 만주에 남아있기도 했다. 이들은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고려와의 무역 등의 왕래와 분쟁이 여전히 유지되기도 했다.


[1] 철리국, 흑수국, 불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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