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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5 11:49:16

명나라-몽골 관계

명나라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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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북원2.2. 영락제의 몽골 원정2.3. 토목보의 변2.4. 북로남왜2.5. 여진족의 발흥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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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 몽골 관계에 대해 다루는 문서이다. 명말 여진족이 발흥하기 이전까지 명나라의 주적은 몽골이었다. 명나라가 건국된 시점부터 멸망할 때까지 몽골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명나라 북방변경을 공격했다. 여기서 다루는 몽골은 명나라에서 보통 달단(韃靼)이라고 칭하던 부족들을 총집합하여 가리키는 것으로, 오이라트부터 우량카이 등 다양한 부족들과 명나라의 관계를 다룬다.[1]

2. 역사

2.1. 북원

1368년 금릉에서 명나라의 건국을 선포한 주원장은 북벌을 선포하여 같은 해 9월 14일에 대도를 점령한다. 당시 원나라 황제였던 원 혜종은 만리장성 너머 상도로 도망쳤지만 이듬해(1369) 명나라 상우춘이 상도를 공격하자 다시 응창으로 도망가게 된다. 당시 원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코케테무르 또한 중국의 서북쪽에서 끈질기게 저항하고 있었다. 1370년 주원장은 서달에게 서북쪽의 공격을, 이문충 풍승에게 응창의 공격을 명했다. 이 과정에서 코케테무르는 만리장성 너머 카라코룸으로 패주하였다. 한편, 응창의 원 황실은 원 혜종이 병사하면서 그의 아들이었던 태자 아유시리다라가 수성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아유시리다라 또한 명나라의 매서운 공격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수십의 기병만을 이끈 채 카라코룸으로 패주한다.[2] 응창 함락 과정에서 아유시리다라의 아들이었던 마이딜리발라가 명나라군에게 생포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3] 이후 카라코룸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몽골은 원 소종을 중심으로 재정비를 하기 시작했다. 만리장성 이남의 영토를 잃었을 뿐, 여전히 서쪽으로 알타이 산맥부터 동쪽으로 만주까지 거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던 북원이었다. 주원장은 항복을 권유했지만 원 소종은 이를 거부했다.

1372년 명나라는 서달을 대장군으로 삼고 다시 대대적으로 몽골에 대한 원정을 명한다. 이 때 동원한 병력은 15만명으로 아예 북원을 끝장내기 위한 것이었다. 몽골은 코케테무르를 주축으로 이에 대항했다. 여기서 크게 패한 명나라군은 이후 몽골에 소극적인 방향으로 접근했고, 북원은 산서성 북부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다. 이 때 원 소종은 상당히 자신감이 있었는지 음력 1373년 2월에 공민왕에게 쿠빌라이 칸의 자손으로써 함께 명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조서를 내리기도 했다.[4]
2월 을해 북원(北元)에서 파도첩목아(波都帖木兒, 바투테무르) 및 어산불화(於山不花, 에센부카)를 보내 조서에서 이르기를, “근래에 병란(兵亂)으로 인해 북쪽으로 피난해 왔지만, 지금은 곽확첩목아(廓擴帖木兒, 코케테무르)를 재상으로 삼아 〈나라를〉 거의 다시 일으켰다. 국왕도 원 세조(世祖)의 손자이니 마땅히 다시 천하를 바로 잡는 일을 힘써 돕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처음에 두 사람이 〈고려에〉 들어왔을 때 왕이 사람을 보내 살해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에 억류하여 〈북원으로〉 돌려보내고, 경사(京師)로 잡아서 보낼 것을 세 방책으로 의견을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돌려보내자고 하였다.
고려사 권44 세가 공민왕 22년 2월

이 시기동안 북원과 명나라의 뺏고 뺏기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북원은 나하추와 힘을 합쳐 명나라를 계속 압박하였고, 고려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명나라는 명나라대로 이들의 공격을 저지하고, 고려와 몽골의 협력을 막고자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진 쪽은 몽골이었다. 1375년 원나라 최후의 명장인 코케테무르가 죽고, 1378년 원 소종이 붕어했다. 원 소종을 이어 천원제가 원 황제의 지위를 이어받았지만, 명나라는 1380년 당시 몽골의 본거지였던 카라코룸을 대대적으로 약탈했고, 1381년 다시 한번 몽골 원정을 진행했다. 1382년 1월에는 명나라의 윈난 정복 과정에서 윈난성의 지도자였던 몽골족 바자르오르미가 자살했고, 1387년 북원의 든든한 우군이었던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했다. 북원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과 같았다.

1388년 3월 주원장은 남옥에게 15만 대군을 맡기고 북원의 정벌을 명령했다. 남옥은 북원의 황제 천원제가 부이르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이르호로 빠르게 진군했다. 그후 어둠과 모래폭풍을 틈타 몽골군을 기습하면서 천원제의 차남 지보노와 그의 식솔 3천, 남녀 7만 등을 획득하고 다시 명나라로 돌아갔다.[5] 천원제는 옥새와 태자 천보노를 챙기고 승상 시레문 포함 수십 명의 인원과 함께 카라코룸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카라코룸에 도착하기도 전에 투울강에서 이수데르에게 습격당해 살해되고 만다. 이수데르는 천원제의 맞아들을 죽이고, 옥새를 차지한 다음 스스로 몽골의 대칸이라고 선포했다. 차남 또한 명나라로 끌려간 뒤에 류큐로 유배되었기 때문에 쿠빌라이 칸의 황통은 천원제의 대에서 단절된다. 이 때부터 명나라는 몽골을 원이라 부르지 않고 달단이라 기록했다.[6]

이수데르는 오이라트의 강한 지지를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100여년 전 오이라트의 지지를 받던 아리크부카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 칸 이후로 큰 영향력을 갖지 못하던 오이라트는 이 때를 기점으로 다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오이라트는 4부족연맹이라는 집단을 형성하여 영향력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7] 오이라트의 성장은 몽골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 둘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니굴세그치 칸 치세 무렵 부터였다. 그는 오이라트 출신이었던 고오하이의 말을 듣고 올제이투 비자라는 여자를 흠모하게 되었다.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녀의 남편이었던 황족 카르고초크를 살해했다. 올제이투 비자는 복수를 위해 고오하이를 모함했고, 고오하이는 가죽이 벗겨져 죽게 되었다. 니굴세그치 칸은 곧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의 아들이었던 마하무드[8]에게 자신의 딸 사무르 공주와 혼인을 시켰다. 니굴세그치 칸의 대책없는 행동에 분개한 우게치 카스하는 명나라의 지원을 받고 칸을 시해했다. 이 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니굴세그치 칸의 차남 부냐시리 티무르 제국으로 망명한다. 이후 우게치 카스하는 니굴세그치 칸의 장남이었던 토코칸 칸을 옹립하고 오이라트 위주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코칸 칸 역시 오이라트에게 휘둘릴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서쪽의 오이라트, 동쪽의 몽골 대립 구도가 펼쳐지게 된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황족과 고위관리들, 몽골부족들이 명나라에 투항하고 있었다.

2.2. 영락제의 몽골 원정

1402년부터 이야기의 흐름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바로 영락제 정난의 변으로 건문제를 퇴위시키고 1402년 명나라의 황제로 즉위한 것이다. 영락제가 즉위하기 몇개월 전 토코칸 칸은 이미 굴리치라는 자에게 시해당한 후였다. 굴리치는 오루크테무르 칸이라는 이름으로 대칸 자리에 올랐다. 굴리치 역시 오이라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서로 죽어라 싸우고 있었다.[9] 영락제는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루크테무르 칸과 통교하기는 했지만 몽골의 힘이 너무 커지는 것을 원하진 않았다. 그래서 몽골 서쪽 오이라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지지기반이 좋지 않았던 오루크테무르 칸은 사방 곳곳에 온갖 어그로를 끌었는데, 오이라트는 말할 것도 없고, 우량카이 족과 명나라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향을 염탐하다 걸린데다, 하미 칸국의 칸을 독살해서 보복을 받은 적이 있으며, 명나라를 몰래 공격하려다가 걸리기도 하였다. 1405년에는 티무르제국으로 망명해 있던 부냐시리가 티무르의 명나라 원정길에 함께해서 오루크테무르 칸을 몰아내려고 하기도 했다. 1408년 당시 몽골의 재상이었던 아룩타이와 갈등하던 그는 아룩타이에게 암살당한다. 그가 죽자 티무르 사후 이미 몽골 초원으로 돌아와 있던 부냐시리가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올제이테무르 칸이다.

이전부터 꾸준히 조공을 요구하던 영락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로 즉위한 올제이테무르 칸에게 급사중 곽기를 보내 똑같은 요구를 했으나, 올제이테무르 칸은 곽기를 살해하는 것으로 답했다. 사신을 살해한 것에 분노한 영락제는 1409년 7월 구복(丘福)을 정로대장군으로 삼아 10만 대군의 병력을 출병시켰다. 하지만 구복의 부대는 케룰렌 강 일대에서 오히려 몽골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영락제는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하기로 한다. 그 전에 몽골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오이라트의 마하무드와 에세크, 바투 볼라드에게 각각 순녕왕(順寧王), 현의왕(賢義王), 안락왕(安樂王)의 직책을 주었다. 이들을 초원의 지배자로 인정해 올제이테무르 칸과의 갈등을 유도한 것이다. 실제로 마하무드는 오이라트 군대를 이끌어 카라코룸을 공격하고 몽골을 케룰렌 강 동쪽으로 쫓아냈다. 1410년 2월 1일, “대(大)로써 소(小)를 격파하고, 순(順)으로 역(逆)을 취하고, 치(治)로써 난(亂)을 공격한다.”라는 내용의 친정 조서를 반포하고 곧바로 친정을 시작했다. 명나라의 말도 안되는 병력에 기겁한 올제이테무르 칸은 오논강으로 도망갔다. 계속되는 명나라와의 교전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올제이테무르 칸은 바이칼 호 너머로 도망쳤고, 무리한 원정에 부담을 느낀 영락제는 1410년 7월 17일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영락제의 1차 몽골 원정이 끝나게 된다. 아룩타이는 1410년 12월 영락제에게 군신관계를 요청하고 화령왕(和寧王)[10]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돌파구를 찾던 올제이테무르 칸은 1412년 모굴리스탄 칸국으로 향했으나 했으나 케룰렌 강변에서 마하무드에게 습격을 받아 사망한다. 올제이테무르 칸을 살해한 마하무드는 그가 가지고 있던 국새를 가지고 영락제에게 투항했다.

명나라에 투항한 마하무드는 실질적인 몽골초원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즈음 자신을 타이시[11]라 칭했다. 몽골의 세력이 약화하자 이젠 오히려 오이라트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델베그 칸이라는 꼭두각시 칸을 세운 오이라트는 주변으로 빠르게 확장했다. 아룩타이는 델베그 칸을 인정하지 않고, 이들의 확장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아룩타이가 장성 부근까지 내려오면서 영락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영락제는 오이라트에 대한 지원을 거두고 다시 몽골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몽골의 세력을 키워 자신이 속한 오이라트의 세력을 약화시키겠다는 영락제의 속셈을 간파한 마하무드는 명나라에서 온 사신을 가두었다. 긴장이 점점 고조되자 오이라트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아룩타이를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1414년 2월 6일 영락제는 친히 오이라트를 정벌하겠다는 조서를 반포했다. 이번 원정은 1차 원정과 달리 화포를 적극 사용했다. 화포에 익숙하지 않은 오이라트 기병들은 명군의 공격에 속속 무너졌다. 1414년 8월 1일 영락제가 북경으로 돌아오면서 2차 몽골 원정도 명나라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오이라트는 이듬해 명나라에 말을 바치면서 사죄했다.

영락제의 2차 몽골 원정으로 마하무드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 1415년 아다이가 반란을 일으켜 델베크 간과 오이라트 지지자들의 상당수를 제거했다. 이어서 마하무드는 아룩타이에게 살해된다. 얼마 뒤 마하무드의 뒤를 이어 오이라트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바하마는 오이라다이를 새로운 대칸으로 추대하였다. 이 당시 몽골 초원은 오이라트가 지지하는 서쪽의 에세크 칸과 몽골족&아룩타이가 지지하는 동쪽의 아다이 칸으로 양분되었다. 오이라다이의 통치 영역은 몽골초원 서쪽의 1/3에 불과했고, 동쪽의 아다이 칸이 더 유력한 상황이었다. 어느정도 세력을 회복한 아룩타이는 다시 명나라 변경을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영락제는 바하마를 순녕왕에 책봉하고, 오이라트를 다시 지원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421년 7월 9일 한창 북경 천도 작업을 하고 있었던 영락제는 다시 한번 몽골에 대한 친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대신들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영락제는 친정을 강행했고, 1422년 3월 18일, 아룩타이가 흥화를 점령하면서 명의 수장 왕환을 살해한 것을 계기로 3차 원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룩타이는 이미 북쪽으로 멀리 도망간 상태였다. 이에 영락제와 참모진은 아룩타이와 협력관계인 우량카이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우량카이와의 전투에서 수령 수십명의 목을 베고, 10여만 마리의 가축을 포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1422년 9월 8일 북경으로 돌아갔다. 아룩타이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작한 원정이었지만 정작 잡아야 할 아룩타이는 잡지 못하고 엉뚱한 우량카이를 공격했기 때문에 당시에도 비판이 많은 원정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아룩타이가 또다시 변경을 침탈한다는 소식을 듣자 7월 24일 4차 원정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미 아룩타이는 오이라트와의 싸움에서 패한 뒤 숨어있던 상태였다. 돌아가던 중에 몽골 왕자 에센토곤의 투항을 받은 것 말고는 별다른 소득없이 원정을 마쳤다. 마지막 5차 원정은 에센토곤의 권유로 시작되었다. 1424년 4월 3일 친정을 시작한 그는 또다시 아룩타이가 멀리 도망갔다는 소식을 접하고 좌절했다. 아무리 수색해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자 결국 회군했고, 회군 도중 영락제가 병사하면서 영락제의 대몽골 원정은 끝을 맺는다.

2.3. 토목보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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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룩타이는 이후 다시 초원으로 돌아와 활동을 개시했다. 아다이 칸을 사실상 꼭두각시로 만들고, 스스로 타이시로 임명한 그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1425년 에세크 칸이 사망한 이후 오이라트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아룩타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이라트 지도부를 공격했다. 그리고 마하무드의 아내 사무르 공주와 아들 바하마를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아룩타이는 바하마를 토곤이라 이름짓고 노예로 부렸다. 보다못한 사무르 공주의 간청으로 토곤은 오이라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토곤은 아룩타이에게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몽골족에 대해 끊임없는 공격을 가했다. 그 결과, 1430년에 이르면 몽골은 대다수의 영토를 잃게 된다. 몽골의 힘이 약해지자 오이라트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고, 1433년에 타이순 칸을 옹립했다. 1434년 토곤과 타이순 칸의 공격으로 아다이 칸과 아룩타이는 패주했고, 1434년에 아룩타이가, 1438년에 아다이 칸이 살해되면서 마침내 오이라트가 몽골초원 전체를 장악하게 되었다. 토곤은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칭기즈 칸 이후로 칸의 자리는 몽골족, 특히 보르지긴 가문의 사람만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타이시의 자리에 만족해야 했다. 대신 꼭두각시 칸 위에서 오이라트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몽골 통일 후 1년이 지나 토곤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에센이 타이시의 자리를 물려받아 오이라트 전체를 이끌게 된다. 오이라트가 칭기즈 칸의 후손인 몽골을 박살내자 명나라는 안도했다. 하지만 에센의 오이라트는 명나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장을 보이는데 서쪽으로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동쪽, 남쪽으로 오늘날의 신장 대부분, 동쪽으로 만주의 여진족까지 정복하면서 원나라 이후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영락제의 친정 이후로 엄청난 재정적 압박감을 느꼈던 명나라는 에센이 활동하고 있는 동안 북쪽정벌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 방어에 치중하는데 오늘날 만리장성이 이 때 대부분 완성된 것이다. 명나라는 유목민족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국경 지역에 조공무역 형태의 마시(馬市)를 열었는데, 이 마시라는 것에서 다시 명나라와 오이라트의 갈등이 격화된다. 에센은 마시에서 최대한이 이득을 얻기 위해 말의 수를 조작하고, 밀무역을 하였다. 이에 반발해서 당시 명나라 실권자였던 환관 왕진은 말의 값을 1/5로 낮추고, 조공단의 수를 제한했다. 에센은 이에 분노했고, 병력 2만명을 이끌고 산서성 대동을 공격했다. 왕진은 이에 대응하여 당시 황제였던 정통제에게 친정을 요청했다. 1449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없던 23살의 젊은 황제는 도합 50만의 대군을 이끌고 친정을 개시했다. 하지만 선발대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것을 목격한 왕진은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회군을 하기로 한다. 왕진은 돌아가는 경로에 자신의 고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고향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빙 돌아 가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빙 돌아가던 중에 에센의 군대에게 발견되면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근처의 토목보로 도망간 황제 일행은 그곳에서 음식, 물도 공급받지 못한 채로 에센의 군대와 싸우다 결국 전멸의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황제를 에센의 군대에게 빼앗기게 된다.

명나라는 말그대로 비상에 빠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중 당시 병부시랑 우겸의 지도로 간신히 정신을 차리게 된다. 우겸은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다른 신하들의 의견에 반대하고, 북경 사수를 주장했다. 그리고 정통제의 동생 주기옥을 새로운 황제로 등극시킨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한 에센은 정통제를 협상아이템으로 사용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에센은 명나라에 정통제를 다시 돌려보내겠다고 전달했지만, 이미 새 황제가 자리잡은 명나라는 에센의 제안을 거절했다. 에센은 몽골 초원 통일에 관심이 있었지, 명나라 황제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여러 복잡한 역학 관계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했다. 정통제는 그와중에 접대를 받으면서 밥만 축내는 에센에게 있어서 굉장히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정통제를 명나라가 받지 않겠다고 한 것에 분노한 에센은 북경을 포위했으나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하고 회군하게 된다. 며칠 후 에센은 정통제를 명나라로 돌려보냈고, 명나라는 그에게 상황(上皇)이라는 지위를 주어 남궁에 거처하게 했다. 이후 경태제가 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자, 정통제를 위시한 신하들이 1457년 탈문의 변을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정통제를 다시 황제 자리에 앉혔다.

2.4. 북로남왜

오이라트의 몰락은 역설적이게도 오이라트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에센 시대에서 시작되었다. 에센은 타이순 칸에게 자신의 동생을 시집보내고, 그의 아들을 칸으로 세울 것을 계획했다. 이에 반발한 타이순 칸이 1452년 에센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에센은 타이순 칸에 이어 아크바르진 칸을 새로운 칸으로 옹립했다. 그리고 기세를 몰아 몽골 황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진행했는데, 어머니가 오이라트 출신이 아닌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 황족 제거에 이어 몽골 황족에 대한 기록들도 모두 불태웠다. 1453년 에센은 아크바르진 칸마저 살해한 후, 마침내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오르고, 첨원(添元)이라는 연호를 선포했다. 그동안 몽골족만 오를 수 있었던 대칸의 자리를 오이라트가 차지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몽골 이후 북방민족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고, 명나라 황제를 사로잡은 것에 자신감을 얻어 이러한 행동을 벌인 것으로 보이나, 에센의 이러한 행동은 오이라트를 제외한 수많은 북방민족의 반발을 일으켰다. 1년 뒤 에센은 자신의 부하였던 알라크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에센의 죽음 이후 오이라트는 다시 세력이 크게 약화되기 시작한다.

에센이 살해당한 뒤 몽골 황족 모리하이가 알라크를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그는 우케크트 칸 몰론 칸을 차례로 옹립하고 살해하는 등 독단적인 행동을 벌이다가 1468년 살해됐다. 몰론 칸 사후 몽골 지배층 사이의 권력분쟁이 일어나면서 한동안 대칸이 없는 공위시대가 이어졌다. 1475년 만돌 칸이 대칸에 오르고 오이라트를 제외한 나머지 몽골 세력들을 어느정도 정리했으나, 1478년 바얀 뭉케 볼후 지농과의 불화로 그에게 살해된다. 바얀 뭉케도 얼마 못 가 피살되었고, 만돌 칸의 아내였던 만두하이가 바얀 뭉케의 아들을 새 대칸으로 즉위시키니, 그가 곧 다얀 칸이다.

2.5. 여진족의 발흥

3. 기타



[1] 수역주자록(殊域周咨錄) 권16에 따르면 달단의 범위는 서쪽의 오이라트부터 동쪽의 우량카이족을 총칭한다. [2] 아직 만리장성 아래로 몽골족들을 완전히 축출한 것은 아니다. 운남지역의 몽골족 세력과 서북지역에서 티무르 제국 차가타이 칸국, 모굴 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관서 지역의 몽골족들의 준동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마이딜리발라는 이후 1374년 다시 몽골로 송환되었다. 이후의 생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4] 당연하지만 당시 공민왕은 한창 반원개혁 중이었기 때문에 원나라의 뜻에 함께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아래 기록처럼 아예 사신이 고려에 입국하자 죽여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5] 여담으로 이 시기 몽골부족들은 의외로 명나라에 쉽게 항복했다고 한다. 이미 원나라 시기를 거치면서 정주생활에 익숙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6] 이 이후의 몽골의 역사도 북원의 역사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 [7] 4부족 연맹의 구성 부족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8] 무함마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9] 실제 명사에도 나오는 표현이다. "...당시에 귀력적과 와랄(瓦剌)이 서로 원수가 되어 죽이려고 하여 여러 차례 북방 변경을 왕래했는데..." (명사 권327 열전 제215 외국 8) [10] 화령은 카라코룸을 가리킨다. [11] 중국의 태사라는 관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