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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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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긍정적 평가
2.1. 싱가포르의 국부2.2. 인도적인 독재
3. 부정적 평가
3.1. 권위주의적 통치3.2. 경제 성장의 허와 실3.3. 우생학에 기반한 인구 정책3.4. 언론 탄압과 인터넷 검열

1. 개요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리콴유를 평가하는 문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며 싱가포르를 동남아시아 제일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키는데 기여한 지도자이지만 재임 기간 중 권위주의적 개발독재 정치 체제를 확립하고 언론 통제와 검열 등 사회 탄압이 이뤄졌다는 점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박정희와 비슷한 포지션을 갖고 있다.

2. 긍정적 평가

2.1. 싱가포르의 국부

역사상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일부 지도자들의 능력과 그들이 이끄는 국가의 국력 간에는 전혀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헨리 키신저

독립 후 싱가포르의 모든 실권을 갖는 초대 싱가포르 총리가 된 리콴유는 우선 순위를 정하여 국가개발에 힘을 쏟았다. 특히나 제일 중요시 여긴 것은 군대 양성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원래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에 병합되어 안전을 확보한 뒤 자치권이 확보된 하나의 독립된 자치주로 살아가기를 원했었다. 특히 이 과정 가운데 화교가 축출당하면서 싱가포르가 다른 나라에 집어삼켜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될 당시에 말레이시아 정치인 가운데에는 싱가포르가 합병되길 원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는데, 이들의 생각은 중국인들을 내쫓고 말레이인만 있는 싱가포르를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인부터 중국계인 리콴유는 이런 식의 합병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이후에도 이러한 움직임은 끊임없이 있었고 인도네시아도 호시탐탐 싱가포르를 노렸기 때문에 리콴유는 군대 양성에 열을 올렸다. 사실상 주변국들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은 데다가 이전에 주둔해 있던 군대는 대다수가 말레이시아로 옮겨가고 남아있는 군대도 말레이 민족의 특색이 강했던터라 여러모로 싱가포르의 정체성을 갖춘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로 1967년에 국가예산 당 국방비 비율이 7%였던 것이 1972년에는 무려 38%를 차지했을 정도였으며, 이 돈의 대부분은 싱가포르군의 무기 체제 개선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1967년에 리콴유는 징병제를 도입하여, 모든 남성 시민에게 군 복무를 의무화했다. 이는 군사력을 빠르게 확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동남아사아의 치열한 경쟁에서 국가 방어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

다만 군대가 바로 만든다고 되는게 아닌지라 일정 기간동안 영국군의 보호 아래에 있었으며[1], 이후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을 현대화 하며 육성하는데 리콴유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영국과 밀접하면서도 영국과는 다른 그 시절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스라엘군을 택한 것은 비슷한 상황(중동의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빠르게 군대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국식 군제를 따르면 최소한 20년이 걸릴 만한 일이었지만 이를 빠르게 전격적으로 도입하여 단시간 내 동남아시아 최강 군사력을 가진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리콴유는 동시에 서양의 최신 무기와 군사 장비를 도입하고 리콴유 자신의 장기인 외교를 통해 안보를 다루는 외교적 동맹을 통해 국가 안보를 보장하고자 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다국적 군사 훈련을 통해 싱가포르의 국방력을 높였다.

리콴유는 싱가포르에 새로운 교육정책을 도입하여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현재도 싱가포르는 대한민국, 홍콩 못지않게 교육열이 높은 나라인데 이는 중국인 특유의 습성과 더불어 리콴유의 피나는 노력이 있던 탓이다. 이를 위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이 가운데 중요하게 작용한 것이 있다. 바로 리콴유를 지배한 법칙인 '모든 것은 상위 10%가 중요하다'였다.

그는 모두가 잘해서 모두가 복지를 누리고 다같이 잘사는 방법은 자원이 많거나 역사가 깊은 나라에나 가능하지 싱가포르에는 택도 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그런 이유로 리콴유는 학력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최대한 분리하는 대신 교육을 상위 10%에 집중투자하는 방법으로 경쟁에 불을 붙였다.

모든 시험과 관문에서 상위 10%만 더 좋은 대학과 더 좋은 직장에 진학하는 체제가 강한데 어느정도냐면 리콴유는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 전국모의고사를 보면 전체 평균에는 관심도 없었고 오직 상위 10%가 어느정도의 절대적 성과를 올렸는가만 관심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 기준에 맞추어 교육체제를 정비하여 1957년에 52%였던 싱가포르의 문해율이 1990년에는 90%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대학도 열심히 손봤으며, 그 덕분에 싱가포르 국립대학은 아시아 1위대학이자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안에 꼽는 명문대가 되었다.

동시에 실용주의 교육 체제를 싱가포르에 도입한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교육을 실용적인 목적에 맞춰 개혁했다. 그는 과학, 기술, 공학, 수학(STEM) 분야에 중점을 두고, 이를 통해 산업화와 경제 성장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했다. 그리고 기술 교육과 직업 훈련에 목적을 두어 리콴유는 교육이 단순한 학문적 지식 전달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이 직업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을 학교 전반에 도입하여 이를 교육에 중점으로 여겼다. 이를 통해 싱가포르의 산업 기반을 강화하고,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경제발전에 항상 골몰했다. 싱가포르는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잘나가는 항구이자 태평양과 인도양의 거점으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밝혔다시피 말레이시아에서 축출당한 시점에 이미 싱가포르는 교역항으로의 이점을 잃어버렸다고 판단했다. 왜냐면 주변에 대체 항구들이 즐비했고, 특히나 싱가포르를 내쫓으면서 이미 말레이시아는 다른 항구( 조호르바루)를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키워놓을 계획을 수립 중에 있었고 인도네시아 또한 싱가포르보다 더 좋은 위치를 주장하며 물류 교역의 중심지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

단순히 물류의 거점만 내세우며 살기에 싱가포르가 가진 장점이라고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중한 것이 산업화였다.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을 거친 후에 물건을 파는 것이 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다른 나라에 비해 근면하고 신뢰도 높은 국민성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고 인종 통합에 골치를 썩으며 정부의 부패에 휘둘리던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빌빌대는 동안 싱가포르는 리콴유의 독선적이지만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품을 되파는 무역의 거점이 되어 경제성장을 시작했다.

이러한 중개무역에만 집착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의 허브로 위치하는 것과 관광산업 또한 밥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여 현재의 싱가포르는 홍콩, 도쿄와 더불어 금융의 중심지이자 조그만한 섬나라 치고는 말도 안되는 관광 인지도를 지닌 나라로 성장했다.[2] 그 결과 싱가포르의 GDP는 1960년에 7.1억 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1990년에 361.4억 달러가 되어 30년 만에 51배나 증가했고 3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4%를 기록했다. 물론 1인당 GDP도 비슷한 시기에 428달러에서 11862달러로 28배 가까이 증가하여 리콴유는 집권기간 동안 고국을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증진시킨 세계의 유일한 지도자로 간주된다.[3]

싱가포르는 이미 1968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기긴 했으나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70년대에야 시작되는데,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한(1071달러) 1971년으로부터 10년 후인 1981년에는 세계 평균(2594달러)의 2배를 넘긴 5596달러를 기록, 싱가포르는 1980년대 초에 선진국이라고 부를 만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1960년으로부터 1990년까지 기대수명은 65세에서 74세로, 전화 보급율은 3%에서 38%로, 관광객 수는 10만 명에서 53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런 업적들로 인해 중국 덩샤오핑은 22,000명이 넘는 관리들을 싱가포르에 파견해 싱가포르의 경제 성장을 배우고자 했으며, 르완다 폴 카가메의 정책도 리콴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외환 보유고를 관리하기 위해 1981년에 싱가포르 정부 투자 공사를 설립했는데, 이렇게 마련한 기금을 통해 1997-98년에 있던 아시아 금융 위기 동안 싱가포르는 통화를 보호하며 안정적인 환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리콴유는 "국민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국가 발전에는 민주주의보다 규율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다른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상상초월의 방법들을 생각했는데 사실 2010년대에 들어 얘기한다면 돌 맞을만한 얘기들이었다. 싱가포르의 통제질서와 벌금제도, 태형제도는 오늘날에도 유명하지만[4] 사실 이정도는 리콴유가 재임 기간 동안 추진했던 정책에 비하면 굉장히 양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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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인도적인 독재

리콴유단 한명의 정적도 죽이지 않은 매우 온건한 독재자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독재자와 비교할 때 거의 대부분 직접적인 비교가 힘들다. 리콴유 정도의 온건한 독재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5][6][7]

리콴유는 수많은 독재자들이 자행한 자신을 반대하는 자국민을 학살한다거나 정적을 잡아서 누명을 씌워 죽이는 등의 짓은 전혀 하지 않았다. 리콴유는 그들보다는 훨씬 더 온건하게 독재를 한 것이다.

싱가포르 선거구를 획정하고 선거 실무를 담당하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독립된 헌법기관이 아니라 총리실 직속 기관이다. 이로 인해 선거구 획정을 여당에 유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야당으로부터 받고 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선거 제도는 소선거구제 중선거구제를 혼합해서 채택하고 있으나, 중선거구에서 후보 개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투표하며, 1위를 기록한 정당이 해당 선거구의 의석을 모두 가져가는 승자독식 방식이다. 따라서 결과만 보면 사실상 소선거구제나 다름없는 셈으로 일반적인 중선거구제와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중선거구에서는 싱가포르 법상 소수민족인 후보자를 반드시 1명 이상을 출마시켜야 한다. 그런데 소수민족 정치인들은 야당에 들어가면 무슨 정치보복을 당할 지 모르기 때문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절대다수가 여당인 인민행동당에만 들어간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야당은 중선거구에서는 소수민족 후보자를 아예 구하지 못해서 인민행동당이 무투표 당선이 되는 일이 흔하다.[8] 명목상으로는 소수민족 할당제지만 실질적으로는 여당인 인민행동당에 매우 유리한 제도라는 말이다.

자신의 정당인 인민행동당이 아닌 지역구에는 정부가 건설해서 저렴하게 판매하거나 임대하는 공공임대주택의 건설을 무기한 연기하거나 해당 지역의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등의 정치보복을 한다. 이렇게 되면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는 인민행동당을 뽑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 놓은, 여당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정치 제도와 그의 정치보복이 크게 비난받기는 하지만 다른 독재자들보다는 훨씬 온건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정적들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부정적인 발언을 하는 이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해서 수십억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려 파산하게 만든다. 싱가포르는 파산 상태에서는 선거에 출마할 수 없기 때문에 정적의 정치생명을 이렇게 끊는 것이다. 당연히 그의 정적탄압이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이것도 전술했듯이 다른 독재자들보다는 훨씬 온건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하술하겠지만 반대파에 대한 고문은 확실히 존재했는데 그 잔혹성은 당대의 타 독재국가들과 비교하면 없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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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부정적 평가

3.1. 권위주의적 통치

만일 간디가 싱가포르의 리콴유 정부에 대항하는 대중적인 불복종 운동을 이끌었다면, 그는 이 아시아인 수상이 이전의 서구 수상보다 더 가혹한 지배자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틀림없이 감옥의 높은 장벽 뒤로 간단히 사라졌을 것이다.
T.J.S 조지[9]
내가 한 모든 것이 옳았다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한 모든 것은 명예로운 목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재판 없이 동료들을 가두는 나쁜 짓을 해야 했습니다.
리콴유, 2010년 뉴욕 타임즈의 세스 마이단스(Seth Mydans)와 한 인터뷰 중

리콴유가 총리로 재직하던 당시의 지지율.
연도 지지율
1968년 86.7%
1972년 74.1%
1976년 77.7%
1980년 64.8%
1988년 63.2%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20세기 중반부터 싱가포르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1965년부터 1981년까지의 싱가포르는[10] 야당의 존재를 허용했음에도 싱가포르 의회의 모든 의석을 인민행동당 한 당이 독차지하여 이 시기의 싱가포르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나 다를 바 없었다. 1981년에 있던 보궐선거에서야 야당이 한 선거구에서 승리해 의석을 차지했고[11] 그리고 1984년에 있던 총선에서야 싱가포르의 야당은 79석의 의석 중 무려(?) 2석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의회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싱가포르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렇다 할 부정선거 의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야당에 대한 우회적인 탄압은 상당히 자주 이뤄졌기에 야당이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을 비판하거나 위협하기 어려웠다. 덤으로 리콴유는 이후에도 타 정당이 당선된 국회의원 지역구에는 예산을 깎기까지 했다.

인도의 언론인 T.J.S 조지가 1973년에 저술한 리콴유 전기에 의하면,[12] 리콴유의 인권 탄압은 '당시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아시아의 나라들 중 싱가포르만큼 분노를 자아낸 데는 없다'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단의 내용들은 이 책에 소개된 리콴유 집권 초기에 있었던 인권탄압 목록들이다.

당시 싱가포르의 정치범들은 가족들과 변호사와의 면회, 독서를 사실상 금지당한 채 독방에 감금당하거나 고문까지 당했고,[13] 심지어 의사가 이들을 치료하는 것도 허용되지 못했으며, 석방된 후에도 경찰의 감시 하에 직업 활동과 외출에도 제한을 받은 것은 물론, 해외 출국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시민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1년 12월에 엠네스티가 파견한 영국 국적의 여성 조사관 에스트렐라 카레라스(Estrella Carreras)는 출국 후에 싱가포르 당국에 의해 재입국이 금지되는 등 리콴유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외국인들은 언론인, 교수 가릴 것 없이 외국으로 추방시켰다.

그리고 리콴유는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진 치안유지법(Internal Security Act)과 사회안전법(Preservation of Public Security Ordinance)을 오히려 식민지 시절보다도 강화시켜,[14] 정적들과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영장 없이 임의로 체포하고 재판 없이 무기한 감금했으며, 이러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15]

1968년부터는 아예 노동자의 파업을 법적으로 금지했으며, 1969년 4월 중순부터 12월까지는 리콴유가 직접 지시를 내려 싱가포르의 개정된 헌법을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1970년에 리콴유는 교수들 앞에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외국인 교수들에 대해 '철새들이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며 비난하고 '강의 내용이 싱가포르의 국정 방침과 일치하지 않으면 정치학과, 사회학과, 철학과를 폐쇄하겠다'는 위협까지 가했다. 리콴유에게 반대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은 대학교에서 쫓겨났다.[16]

덤으로 리콴유는 '군사화된 생활 방식에 의한 국가 건설의 잠재력'에 매력을 느끼고는 싱가포르인들을 군대 및 경찰간부 훈련단, 싱가포르 소년단, 대학 분견대, 교련단 등 여러 획일적인 조직들에 가입시켰는데, 실제로 당시 싱가포르는 훈련과 가두 행렬이 일상화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 싱가포르의 '전시민의 군인화'는 '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파파도풀로스의 그리스'를 연상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T.J.S 조지의 리콴유 전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내용들을 더하자면, 리콴유 시기 싱가포르에서는 정치범들이 자백하는 모습이 TV에 공개적으로 중계되었으며, 이 책의 출판 이후 시점인 1978년자 엠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싱가포르는 UN 회원국임에도 인권 조약에 서명하거나 비준하지 않았다고 한다.

덤으로 사회적으로도 엄격한 통제가 가해져 '소위 히피족이 싱가포르인의 정신을 부패시키고 싱가포르 사회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명목으로 남성의 장발을 금지시키고 이를 외국인 관광객에게까지 적용해 머리가 윗옷 칼라를 넘으면 싱가포르 입국을 제한하거나 비행기가 싱가포르를 경유하기만 할 뿐이라도 강제로 머리를 자르게 했으며, 만약 이들이 장발을 그대로 놔둔 채 싱가포르를 떠나면 몇 달 동안 재입국을 못하게 했다.[17] 게다가 사기업에서조차 장발족에 대한 차별 대우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여교사들마저 어깨 밑으로 내려가는 머리와 파마가 금지되었고, 문화부장관은 정부의 두발 정책에 반대하는 대학생에 대한 징집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적어도 1973년부터는 시위를 막기 위해 밖에서 10인 이상이 모이는 것까지 금지시켰으며, 오늘날에도 싱가포르에서는 도심 공원 한 곳에서만 시위가 가능하다. 이 곳에서 경찰의 허가를 받은 시위가 허용된 것이 2000년 9월이었고, 자유로운 시위는 무려 2008년 9월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1987년 5월 21일과 6월 20일에 ' 마르크스주의 국가를 건설할 목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이용해[18] 공산주의 통일전선 전술을 사용하여 싱가포르의 기존 사회 및 정치 체제를 전복하려고 한다'는 이유로 22명을 재판없이 구속했으며 1987년 말까지 이들 중 사회복지사 빈센트 쳉 킴 추안(钟金全)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했다. 그러나 1988년 4월에 석방된 수감자 9명은 언론 성명서를 통해 당시 적용된 모든 혐의가 조작이며 당시 싱가포르 당국으로부터 고문[19]을 당했다고 폭로한다. 이에 싱가포르 정부는 수감자들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며 고문을 폭로한 9명 중 8명을 다시 구금하고는 언론 성명서에서 주장한 모든 내용을 부인하겠다는 선언에 서명하게 한 후 다시 석방시켰다. 심지어 당시 수감자들을 변호한 변호사 2명과 언론 성명서의 초안을 작성하고 배포하는 것에 동참한 1명을 구금하기까지 했다. 한 수감자가 이런 조치에 항소하자 1988년 12월 8일에 싱가포르 항소 법원은 싱가포르 법원이 치안유지법에 기반한 구금의 실질적인 근거를 검토할 권한이 있음을 시사해야 한다며 4명의 구금자를 석방하도록 명령했으나 싱가포르 당국은 이에 반발하며 즉시 4명의 구금자를 다시 구금한 것도 모자라 아예 헌법과 치안유지법을 수정하여 이 사건의 사법적 조사와 상소를 사실상 막아버리며 싱가포르에서 독립적인 사법 심사가 일어나는 것을 원천 봉쇄한다. 해외에서는 물론 일부 고위 지도층조차 당시 수감된 사람들이 진짜 내란 선동을 도모했다는 것에 의심을 품었다고 한다.

이러던 판이었으니,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매년마다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리콴유가 집권한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은 약 4.69였다.[20] 참고로 전두환 시기 대한민국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약 4.86이었으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시기 필리핀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리콴유보다도 높은 약 4.64였다. 리콴유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가 이 둘과는 달리 자신의 반대파에게 누명을 씌우거나 자국민을 상대로 학살을 저지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기도 하는데, 리콴유 집권기의 싱가포르에 엄연히 정치범이 있었고 심지어 리콴유 자신조차도 그들 중 일부는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투옥하기도 했음을 인정한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반대파에게 누명을 씌운 적이 없다고 우기는 것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 주장이다. 그나마 자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학살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해 줄 만 하지만 인구 5백만의 도시국가에서 인구 4천만, 또는 1억의 대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필적하는 학살사건을 일으키지는 않았다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게 여길만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리콴유는 개인적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타입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자체는 칭찬할 일이지만, 독재와 개인의 청렴성은 무관하기 때문에 충분한 방어의 근거는 되지 않는다. 돈을 사용함에 있어 청렴하지 못함은 사람의 부패를 가늠하는 여러 기준 중 한가지일 뿐이기 때문이다.[21]

현재 싱가포르에서 이권이 따르는 국영기업이나 관변단체의 수장, 또는 정부 요직들은 상당부분 리콴유 일가나 그 측근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장 싱가포르 최대의 기업으로 싱가포르 여러 대기업의 지주회사이자 전 세계 여러곳에 투자를 하고 있는 국영기업 ' 테마섹 홀딩스'의 CEO가 그의 며느리이자 리셴룽 총리의 부인인 호칭(何晶) 여사다. 물론 이들은 효율적으로 자신의 기업들을 이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도자의 친인척이 국가 공기업 사장으로 있는 것이 적절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한국에서도 리콴유의 통치를 독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리콴유 옹호자들이나, 독재임을 인정하면서도 우호적으로 보는 옹호자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경제기반은 부유하되 자유와는 동떨어진 사회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독재정치에도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사회안정을 이룩했다는 점 때문에 주변국 독재자들에게도 나름대로 영감을 주기도 했고,[22] 특히 중국도 싱가포르가 일당독재체제 아래에서 사회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점 때문에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펼칠때 싱가포르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했다. 실제로 덩샤오핑과 리콴유는 사적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고, 이후로도 리콴유과 장쩌민, 후진타오와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사실 말레이시아는 1957년부터 2018년까지는 야당세력이 싱가포르에 비해 강했기는 했지만 어쟀거나 국민전선(BN)이 권력을 독식했던 국가였고 비록 말레이계 우대정책 때문에 갈라섰다고는 하지만 막상 이후의 경제정책들을 보면 반공주의 등 리콴유 시절의 싱가포르와 정치적인 성향면에서 비슷한 면이 많았다. 또한 인도네시아도 1998년에 민주화 되었지만 수하르토 집권기때는 독재국가였다.[23]

3.2. 경제 성장의 허와 실

'싱가포르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 70살 먹은 노인들도 알바에 나서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식의 얘기가 나올 만큼 싱가포르는 복지 제도가 아주 미약하다. 다만 주택제도만큼은 거의 사회주의에 가깝게 장기임대를 보장하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CPF(중앙연금준비기금)제도라는게 존재하는데 자신의 소득중 일정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축하는 개념이다. 즉 일종의 국민연금 제도로,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돈으로 노후를 편하게 보내도록 하자는게 기본 취지이고 싱가포르 정부에서는 이 CPF로 조성된 재원을 운용하여 매년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하지만 내 돈을 내 마음대로 못쓰게 하니 반발이 없을 수가 없다.

이를 바탕으로 연금보험/의료보험으로 전용한다. 문제는 정말 싱가포르는 집/연금/의료 빼고는 어떠한 복지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저 세개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이고 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안전망 측면에서는 부실한 것이 맞다.

하지만 이는 싱가포르 내에는 사회적 안전망이 얼마나 사람들을 도태시키는지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있고 리콴유가 특히나 이런 것을 매우 두려워했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복지가 개선되길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철저한 엘리트주의로 상위 10%들의 능력에게 모든걸 투자해서 성장해온 나라가 싱가포르다. 따라서 계층 간 소득격차가 극심하기 때문에 지니계수는 칠레, 멕시코와 비슷한 수준으로 심각하고 빈곤율도 자그마치 28%나 된다.

그런데, 싱가포르도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한 나라이다보니 싱가포르인들은 연금재원이 장래에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고 그에 대한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이 저출산이 심한 이유 중의 하나는 큰 빈부격차로서, 이를 통해 보면 싱가포르의 문제는 2010년대의 한국과 별반 다를 바 없다.[24]

그렇지만 오늘날 싱가포르는 관광/물류 위주가 아닌 2차 산업 기반의 견고하고 건전한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세계 20위 내에 드는 1인당 GDP, 2000년대 중후반까지 7% 이상의 성장률을 유지했던 행정적 역량 등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아울러 효율적으로 운용되는 공기업 역량과, 아시아 최대의 공업단지인 주롱공업단지, 싱가포르를 관광국가로 변모시키기 위해서 국가주도하에 조성된 다양한 테마시설과 국가차원의 마케팅능력도 있다는 평가도 있다.

말레이시아 역시 규모만 놓고보면 작은 나라가 아닌데 인도양을 걸쳐 물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연히 국토 최남단에 있는 테마섹(싱가포르)을 이용하는 것이 제일 옳았다. 말레이시아 전체가 못살아서 그렇지 축출 당시에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도시중 하나였다. 하지만 싱가포르 축출 이후 말레이시아에서는 탄중팔레파스를 주요 거점 항구로 키웠고 한국으로 치면 부산과 같은 위치로 만들었다.

물론 싱가포르의 경제력이 증가하면서 싱가포르에 인접하면서 동시에 탄중팔레파스와의 거리도 가까운 조호르바루가 부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수많은 인도네시아의 항구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가 물류 교역의 거점으로 큰 것은 그 나라의 인프라가 만든 힘이고 그 인프라를 만든 노력은 리콴유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국내의 보수언론과 경제지들은 "가난한 어촌을 세계적 선진국으로 키웠다"면서 리콴유의 독재를 옹호하는 면이 있는데, 이는 터무니없이 과장된 이야기이다. 물론 독자적인 생존 가능성조차 불투명했던 초미니 도시국가가 홀로서기에 성공하고, 이후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나름 튼튼한 경제구조 구축이 가능한 발전궤도에 올라서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에는 리콴유의 역량이 상당부분 기여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독립 이전부터 '가난한 어촌'이 아니었다. 싱가포르는 유라시아 대륙의 최남단으로 태평양(의 부속해인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가르는 말레이반도의 끝자락이자 두 대양을 잇는 통로인 말라카 해협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지도에 대문짝만하게 <교통의 요충지>라고 직접 써 놔도 이보다 더 쉽게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아볼수는 없는 위치이다. 다만 해협 중간의 말라카( 믈라카)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정말 어촌으로 전락했던 시기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해협식민지의 일부로 삼은 이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물류와 교역의 중심지인 중개무역항이자 영국 해군 동양함대의 근거지인 군항으로 집중개발하면서 다시 번영가도에 오르게 되었다. 2차대전 당시 동남아시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던 일본군 남방작전의 최우선 목표가 싱가포르 점령이었고, 싱가포르 전투의 패배에 당시 영국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이 "영국 역사상 가장 참담한 패배"라고까지 한탄했다는 것에서 2차대전 당시 이 도시가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잘 알 수 있다. 제국주의 시기부터 2차대전 당시까지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고, 사실 리콴유 본인이나 싱가포르인들이 별로 원치 않았는데도 억지로 독립해야 했던 이유 자체가 이 도시에 집중된 인적 역량과 자본력이 너무 커서 말레이시아 전체의 정국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

이러한 싱가포르의 번영상은 경제 지표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리콴유의 집권 직후인 196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428$(2023년 환율로 4,439$)를 기록했는데, 이는 당대 아시아에서 잘 살았다고 잘못 알려진 필리핀[25]보다도 훨씬 높고 한창 성장가도를 달려 60년대 고속성장기에 진입하기 시작한 일본[26]과도 별로 차이가 없었으며 홍콩[27]과도 사실상 완전히 똑같다. 게다가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1960년 세계은행이 추산한 세계 1인당 GDP 평균[28]과 비교해도 그렇게까지 낮지는 않았고, 심지어 스페인[29] 포르투갈[30]보다도 높았다! 즉 싱가포르는 당대에도 이스라엘[31], 일본 정도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는 가장 잘 사는 국가 중 하나였던 셈이며, 세계 평균에 대입해 보면 오늘날 기준으로는 아르헨티나, 말레이시아, 멕시코급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32] 물론 이것이 세계 최고의 부국인 21세기의 싱가포르에 비교하면 좀 많이 초라해보일수는 있다. (세계 평균밖에는 안 되니까...) 하지만 이는 당시의 빈국들은 21세기 현재의 빈국들보다 훨씬 가난했고, 특히 동아시아 국가들의 본격적인 경제 성장이 이뤄지기 이전이라 유럽+아메리카(특히 북미)의 서구 국가들에 비해 아시아 국가들이 전반적으로 가난했던 시대상을 감안하여 생각할 문제이다.[33] 결론은 리콴유의 역량을 딱히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34] '싱가포르가 물류 교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것은 인프라의 힘이고, 그 인프라를 구축한 노력은 리콴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냐?' 고 하는데 실제로 그 인프라를 구축한 건 영국이다. 물론 있는 인프라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에도 큰 노력이 필요하므로 리콴유의 공적도 무시될수는 없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경제적 번영이 싱가포르의 입지가 가진 압도적 유리함과, 그로 인한 선점효과 없이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3.3. 우생학에 기반한 인구 정책

우리는 한 달에 200달러도 못 벌고 많은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시킬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두 명 이상을 갖지 말라고 격려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지금 우리 사회를 육체적, 지적, 문화적으로 빈혈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추세를 바로잡기 위한 첫 번째 잠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후회할 것이다.
리콴유가 1969년에 남긴 말.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높은 출산율이 개발도상국 경제에 부작용을 줄 것이라며 저출산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정책은 우생학 성향을 갖고 있었다.[35]

리콴유는 1970년부터 'Stop at Two' 캠페인을 개최해 둘째를 낳은 여성에게 불임 수술을 받을 것을 권유했고, 셋째와 넷째 자녀는 교육 과정에서도 차별을 받았으며, 자녀가 셋 이상인 부모도 혜택이 준 데다가 둘째 이상을 출사한 공무원들에게는 출산 휴가를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고,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병원에서 청구하는 비용도 의도적으로 상승시키기까지 했다. 물론 리콴유는 불임 수술을 받은 여성들에게는 1만 달러의 보조금을 주는 나름의 당근 전략도 내세웠다.

불임 수술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행해졌는데, 리콴유는 이 정책들이 '무책임한 사회적 불량자들'이 더 많은 자녀를 낳으면 정부가 제공하는 더 많은 사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이 정책으로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972년의 3.04에서 1975년의 2.07로 대폭 낮아졌지만, 이후에도 리콴유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결혼하고 출산할 가능성이 낮다'는 추세를 더 심각하게 여기고 '대졸 남성이 교육 수준이 낮은 아내를 선호한다'는 것을 우려한 리콴유는[36] 1983년부터 '남자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자기보다 지적인 여성들과 결혼을 해야 한다'는 취지로 싱가포르 남성들에게 대졸 여성들과 결혼할 것을 장려했고, 리콴유 본인도, 그리고 아들인 리셴룽 총리도 굉장한 엘리트와 결혼했다. 또한 대졸 여성에게 자녀를 3~4명 이상을 낳을 것을 권장하며 이 기준을 충족하면 주거와 교육에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는 어느 한 개인의 지성을 교육으로 극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어렵다는 사고에 근거해 결국 유전자를 잘 만나야한다는 이론에 입각하여 진행한 것이었으나, 이 정책이 싱가포르 내에서도 큰 비판을 받자 1985년에 이 정책에서 특히 논란이 된 부분들은 폐기되거나 수정되었고, 1986년에 이 캠페인은 취소되었다.[37]

이 정책은 훗날 저출산의 요인으로 평가받는 교육열을 건드리기 보다는 오히려 장려하는 정책이었기에 인적자원 투자의 효용성은 높인 대신 저출산 해결 정책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었던 데다가 정부가 가정이 해야 할 일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가족주의적 철학을 동아시아가 서구에 앞선 부분으로 평가하여 가정의 부담을 정부가 제대로 덜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는 한계점이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이 제도는 전술한 것처럼 오히려 대졸 이상의 여성, 다자녀를 둔 고학력 어머니들 사이에서 반발을 일으켰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들은 리콴유 재임 당시 꽤나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아시아에서 엘리트들의 집약도로만 놓고 보면 손꼽을 만한 나라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리콴유의 정책을 무시할 수 없다.

이후 바로 다음 해인 1987년에 리콴유는 'Have Three or More(당신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캠페인을 실시하며 세번째 자녀를 둔 부모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고 셋째 아이의 병원비도 낮추는 등 규제를 완화하며 출산율을 늘리고자 했고, 이에 따라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986년의 1.43에서 1988년의 1.96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이후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낮아져 2019년 기준으로 싱가포르의 출산율은 1.14에 불과하다. 싱가포르 출산율에 대한 참고자료

3.4. 언론 탄압과 인터넷 검열

싱가포르의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당한다.

정부가 무상으로 보급하는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되고 있으며, 리콴유 일가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게시물과 댓글이 올라오면 바로 조사나온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SNS도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조사만 나오면 모르겠는데, 싱가포르의 많은 기업이 이 일가 소유이기 때문에, 만약 이 일가를 나쁘게 말했다가 찍히면, 본인 일자리를 잃거나 혹은 허위사실 유포 또는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한다.

여기에 언론기관에 대한 통제도 심해서 형식상 언론의 자유가 있으나 실제로는 없다. 다만 예전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들과 북한, 중국처럼 무식하게 자기 욕했다고 잡아가서 때리고 고문하지는 않고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하는 방법을 쓴다. 여기에 독재국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법부의 독립성은 말뿐이며, 대부분 정부에 유리한 판결을 내기 때문에 거의 100% 패소한다. 그러니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란 실제로는 없는 셈이다.

패소한 자가 돈 안내고 배쨀까봐, 아예 언론사들은 미리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 두고, 만약 정부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여 승소하면 그대로 이 보증금은 날아가고 다시 거액의 보증금을 채워야 한다. 안넣고 배째면 등록 취소. 또 사실 많은 언론기관이 국영 투자업체 테마섹 홀딩스가 대주주라 이런 과정을 안 거치고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적 보도를 걸러낼 수 있다.

그리하여 실제로 싱가포르의 언론자유지수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80여개 국 중에서 129위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잘 사는 선진국치고는 꽤나 낮은 수치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렇게 리콴유 일가가 지배하는 싱가포르를 잘사는 북한이라고 혹평, 비난하기도 한다.

외부사이트 접속자체가 불가능한 북한이나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같은 대중적인 인터넷 사이트, 서비스도 거침없이 차단하는 중국과 달리 싱가포르에선 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언론매체에서도 외국의 민주화운동 관련 뉴스가 자주 보도되는 편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소국인데다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서방과 같이 행동을 하므로, 서방은 중국, 베트남, 북한과는 달리 싱가포르의 정치 체제나 반민주적인 행태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중국, 북한과 달리 유튜브나 트위터를 막지 않는다.[38] 그러니까..

1) 서방권 전반은 싱가포르의 정치 체제에 큰 관심이 없기 때문에 딱히 외부 인터넷이 위험하지 않다.

2) 반정부적인 주장을 올려봤자 나라가 좁기 때문에 금방 추적되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싱가포르에서는 중국, 북한 등과는 달리 구글, 유튜브를 자유롭게 쓸 수 있지만, 싱가포르인들은 이런 데다가 정부 비판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극히 조심스러워 한다.

이렇게 싱가포르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통제와 각종 소송 등을 통해서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의 언론까지 교묘하게 입을 막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명예훼손은 자국 언론의 입을 틀어막는 전가의 보도로 쓰인다.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에서 리콴유 사후 독재자라고 비판한 동영상을 올린 학생이 바로 체포되었다. 링크 그는 이 일로 2015년 5월에 4주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며, 출감 후 또 다시 리콴유를 비방하는 동영상을 올려 2016년 9월에 이번엔 6주 징역형과 2,000 싱가포르 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출감 후 2017년 미국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해 받아들여졌다. 링크[39]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콴유가 수없이 많은 여러가지를 금지시키고 못하게 막았는데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막아내지 못한 것도 있었는데... 다름아닌 마작이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에게 어지간한 것들은 강요하고 금지할 수 있어도 마작은 금지할 수 없었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마작을 때려잡지 못한 건 비단 리콴유만이 아니었는데, 마오쩌둥 역시 문화대혁명때 마작을 때려잡으려 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중화권(특히 화베이권)은 마작 없이는 하루도 못 살 정도로 마작사랑이 매우 대단하며 심지어 장제스도 중국인답게 마작을 너무 좋아했다(...)

T.S.J. 조지가 쓴 리콴유 전기에 의하면, 리콴유 시기에 싱가포르의 라디오, TV 뉴스는 교육 계획을 다룬 별개의 코너가 있던 것 외에는 항상 정부의 발표를 인용한 것만 방송할 수 있었으며, 싱가포르의 모든 언론사와 언론인은 매년 정부로부터 받는 면허를 갱신해야 활동을 할 수 있었고, 치안판사에게는 신문사에 직접 들어가 조사를 할 수 있다는 특별 권한이 주어졌다.[40] 심지어 리콴유의 출판 담당 비서가 편집자들에게 직접 어떤 책을 출판할 수 있는가 없는가 여부까지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법에 의하면 검열을 받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출판물은 '초대장이나 명함, 계산서 서두나 편지지 서두'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리콴유는 지방 신문 기자들이 자신의 공개 연설을 취재할 수 없게 하는 등 자신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까지 통제를 가했으며, 외신 특파원들은 리콴유에게 호의적인 성향의 기자들만 선발되어 싱가포르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심지어 한 뉴욕 타임즈와 이코노미스트 소속 미국인 특파원은 원래 리콴유 정권에 호의적이었음에도 상술한 영국인 엠네스티 조사관 추방 문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거주지가 도청되고 언론인들의 모임에서 쫓겨난 후 싱가포르에서 추방되었다.


[1] 원래는 영속적으로 영국군의 보호를 받길 원했으나 1970년대 영국의 경제가 파탄나면서 이 또한 굉장히 어려워졌다. [2] 비록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일본이 앞장 섰으나 1997년 아시아 금용위기 이후 싱가포르, 홍콩이 일본의 1인당 GDP를 앞섰다. 현재도 그러고 있다. [3] 이를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전체 GDP는 72.4억 달러에서 834.6억 달러로, 1인당 GDP는 4,364달러에서 27,394달러로 증가한 셈이다. [4] 그의 자서전인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자신이 선생님에게 맞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이런 모습이 현재의 싱가포르 태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5] 그 예로 독재자 문서의 특성문단에서 리콴유는 독재자의 특성 중 대부분이 해당이 되지 않는 능력과 인품을 모두 갖춘 극소수의 독재자에 해당한다. [6] 독재자치고는 적은 사람을 죽였다는 박정희도 집권할 동안 반대파를 40~50명 가까이 죽였고, 심지어는 해외에서 정적 암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 폴 카가메도 최소 8명의 언론인을 죽이거나 '실종'시키기도 했으며, 사람 죽이는 것을 기피한 독재자로 유명한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역시 사형제는 폐지하는 대신 반대파들을 열악한 수용소에 가둬 죽음으로 몰고 갔다. 니야조프 역시 사실상 죽인 거나 다름없다. [7] 오르반 빅토르도 독재자로 간주한다면 '단 한 명의 정적도 죽이지 않은 독재자'에 들어간다. [8] 다만 현재는 리콴유가 사망한 한 후인 2015년 총선거부터 모든 선거구에 야당이 출마하면서 인민행동당이 무투표 당선이 되는 일은 없어졌다. [9] Thayil Jacob Sony George, 1928~, 리콴유의 전기를 저술한 적이 있는 인도의 언론인. 이 사람도 싱가포르 당국에 의해 추방되었다. [10] 이 시기에 국회의원 선거를 총 4번(1968년, 1972년, 1976년, 1980년) 치렀다. [11] 당시에 이 안손 선거구에서의 선거에서 우승한 후보는 노동당 소속의 J.B. 제야렛남(Joshua Benjamin Jeyaretnam, 1926~2008)이었다. [12] 한국에서는 1988년에 남도문화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13]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고문의 폭력성은 덜했다고는 하지만, 환각제를 투여당한 정치범들도 있었다고 한다. [14] 참고로 식민지 시절에는 사회안전법이 상당히 온건하게 적용되었다고 한다. [15] 실제로 리콴유 집권 시기에 재판 없이 구금된 사람들은 1,600명 이상이었고,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에서 수감된 정치범 수는 915명에 달했다고 한다. [16] 고촉통 총리 시기에도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 1845년에 창간된 싱가포르의 최대 신문사)에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대학 교수가 공금 횡령 혐의로 학교에서 쫓겨났는데, 그 '공금 횡령'이라는 게 실제로는 '복사기 불법 사용'을 과장해서 발표한 것이었다고 한다. [17] 이 때문에 클리프 리처드 레드 제플린, 비 지스처럼 장발을 가진 외국인 가수들은 예정된 싱가포르 공연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18] 당시 수감자 대부분이 가톨릭 평신도들이었으며 야당인 노동당을 비밀리에 도왔다고 한다. [19] 휴식없이 서 있는 채로 가혹하고 끊임없는 심문, TV에서 공개적으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라고 자백하라고 강요하기, 가족과 친구들을 인질삼아 협박하기, 잠 안 재우기, 얼굴 등의 신체를 3일 동안 구타하기, 몸에 찬물을 끼얹은 후 에어컨이 강하게 틀어진 방에 70시간 동안 감금하기 등. [20] 정확히는 1972년부터 1980년까지는 평균이 5(PR 5+CL 5)였고,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평균이 4.5(PR 4+CL 5), 1989년과 1990년은 평균이 4(PR 4+CL 4)였다. [21] 다른 국가에서 악명이 높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사적으로는 청렴했던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자기 아이들에게 특혜를 주지 않았고, 스탈린의 어머니는 아들이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도 이전부터 살던 조지아의 허름한 옛집에서 계속 살다가 타계했다. 마오쩌둥 또한 자신의 후광만으로 자녀들이 높은 정치인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었고 마오의 자녀들은 모두 정치와 관련없는 직업에 종사했다. [22] 물론 비단 리콴유만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다만 스탈린 격하 이전에는 스탈린이 가혹한 독재정치를 펼쳤음에도 소련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점 때문에 세계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상당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 [23] 실제로 리콴유는 수하르토와 서로 절친한 관계였다. 실제로 리콴유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경제 성장은 수하르토 씨의 정책, 안정성과 경제에 대한 초점 덕분'이라고 여겼으며, 수하르토도 리콴유를 '명확하게 말하고 신뢰할 수 있고 판단력을 높이 평가하는 친구'로 호의적으로 평가했고, 덤으로 수하르토 치하의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 개발을 위한 공동 프로젝트에도 여러 번 참여하기도 했다. 리콴유가 화교 후손이었던 것에 반해 수하르토가 화교를 탄압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흥미로운 점이다. [24] 저출산 고령화 문제는 빈부차 문제와 다른 것이 비교적 빈부격차 문제가 적은 서유럽 주요 선진국들도 거의 다 저출산 문제를 겪고 있고 그래서 이민 받아들이는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출산율 높은 국가들은 대체로 개발도상국이고 빈부격차 심한 편인 국가들이다. 인식 정서 문제가 더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5] 264$, 2023년 환율로 2,738$ [26] 475$, 2023년 환율로 4,927$ [27] 429$, 2023년 환율로 4,450$ [28] 452$, 2023년 환율로 4,688$ [29] 396$, 2023년 환율로 4,108$ [30] 360$, 2023년 환율로 3,734$ [31] 1,229$, 2023년 환율로는 12,748$ [32] 반면 당시 한국의 포지션은 오늘날 기준으로 놓고 보면 방글라데시, 인도 수준으로 최빈국까지는 아니여도 명백한 후진국들이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 시기 공식환율이 실질환율의 2배 가치였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33] 당시 아시아 국가 중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가장 잘 살던 일본조차 세계 평균을 겨우 넘기는 수준인 것을 넘어 2024년 기준으로는 인도네시아 수준(약 5000달러)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애초에 영국, 프랑스도 2024년 기준으로는 세계 평균 수준(약 15000달러)이던 시절이었으니... [34] 하다못해 박정희의 대한민국조차 이승만 정부의 교육 정책 덕에 경제 수준에 비하면 인적 수준이 굉장히 높았으며, 동시기 후진국 중에서도 논외급인 중국을 제외하면 기술력이 가장 뛰어난 국가였다. [35] 사실 리콴유는 "사람의 지능은 유전의 영향이 80%고 양육의 영향이 20%다"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36] 중국계가 75% 이상이어서 유교적 가치가 강한 70 - 80년대의 싱가포르는 고학력 남성이 저학력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37] 다만 적어도 이 정책은 단순 우생학적인 배경으로만 실시한 것은 아니고, 보통 자식들의 교육은 어머니가 담당하니 자식들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의도도 들어있었다. 완전 동일한 예는 아니지만 유대인들은 비슷한 이유로 어머니가 유대인이여야 선천적 유대인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자식 교육은 보통 어머니가 담당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38] 오히려 싱가포르는 베트남하고 비슷한 편이다. 중국이나 북한 같은 막장 독재국가는 최소한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 분위기나 시민들의 자유는 노태우 시기 한국과 비슷한 편. [39] 다만 이쪽은 여러 인종과 종교들이 용광로처럼 섞인 싱가포르에서 종교 비하적 영상들을 올려온 전적이 있었기에 '인종차별 발언'도 체포 사유에 들어갔다. 참고로 이 자는 미국에 가서는 무려 소아성애자를 옹호하는(!) 영상들을 올려오다가 2020년에는 아동 음란물 소지 및 유포 혐의가 발각되어 구속당했다. [40] 참고로 싱가포르의 공식 대변인은 싱가포르의 TV 뉴스를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TV 프로그램'이라고 자평했는데, 이는 당시 싱가포르 뉴스가 서로 다른 7개의 언어로 방송되는 언어적 다양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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