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승부조작을 한 사건에 대한 내용은 히혼의 수치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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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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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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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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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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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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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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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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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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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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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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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기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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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오스트리아 장악! 빈의 나치들은 열광[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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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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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로 입성하는 독일 국방군[2] |
2. 기원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동프랑크 왕국부터 독일 왕국, 신성 로마 제국까지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같은 서게르만계 민족으로 같은 독일 문화권이었으니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이뤄야 한다는 관념은 신성 로마 제국 시기부터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자 독일 내셔널리즘 운동으로 나타났다. 신성 로마 제국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실질적으로 해체되었지만 느슨한 국가연합의 형식으로 남았으니 아직까지는 단일국가였으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이름만 남은 제국의 해체[5]로 더 이상 "통일된 독일인의 국가"가 없자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한 1848년 혁명이 일어났다.그러나 19세기의 독일 정치 지형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 제국과 호엔촐레른 왕조의 프로이센 왕국이라는 두 강국과 나머지 다수의 중소국들이 연립한 형태였다. 양대 강국은 모두 자국 중심의 독일 통일을 원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순수 독일계 나라가 아닌 여러 이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를 거느린 다민족국가였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는 이들 영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가히 살아 있는 역사이자 유럽 최고의 명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도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갑툭튀한 왕실인 호엔촐레른 가문의 아래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통일에 대한 정치적 관념은 다민족 연합국가인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대독일주의와 단일한 독일인만으로 이루어진 국민국가를 건설하자는 소독일주의로 나뉘었으며 여기에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 안에서도 여러 의견이 갈렸다.
소독일주의자들은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의 해산과 함께 통일 운동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프로이센 왕국 중심의 북독일 연방과 바이에른 중심의 남독일 연방은 1870년에 발발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연합한 뒤 정치 협상을 거쳐서 통일 독일을 만들기로 합의해 1871년 소독일주의에 기초한 독일 민족의 통일 국가인 독일 제국이 탄생했다( 독일 통일).[6]
그러나 소독일주의의 승리로 독일 제국이 들어선 후에도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 지역의 통합에 대한 담론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양쪽 모두 독일 내셔널리즘에 입각해 궁극적으로는 언젠간 오스트리아의 독일어권 지역이 통일 독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관념이 상당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함께 패망하면서 이런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종전 후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완전히 분해되어 다른 민족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전부 독립해 버리고 독일어권의 일부 지역만 남아[7]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라는 소국이 되었다. 그간 오스트리아의 독일 통합에 걸림돌이 되었던 다민족적인 요소가 사라져 버린 만큼 오스트리아에서는 독일과의 통합으로 게르만 민족의 통합된 나라를 만드는 것이 큰 이슈로 떠올랐다. 때마침 불어닥친 민족자결주의 열풍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했고 결국 새로 들어선 오스트리아 공화국 의회는 독일과 통합을 의결했다. 그러나 독일이 강국으로 다시 일어서길 원치 않았던 협상국들이 이를 승인하지 않으면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일은 일차적으로 좌절되었다. 그렇게 전간기가 흘러가고 양국이 각자 국경을 맞댄 이웃나라로 지내는 동안 북쪽의 독일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과 대공황의 여파로 직격탄을 맞은 와중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게 되었다.
3. 발단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독일인들이 집중되었던 오스트리아 일부에서는 방대한 영토, 특히 상공업이 발달한 보헤미아 왕국( 체코, 즉 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잃어 나타난 경제적 곤란함을 벗어나야 한다는 위기감과 전통적인 통일 독일 관념이 결합해 다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통합시켜야 한다는 관념이 나타났다.[8] 하지만 협상국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단일한 국가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였고 1919년의 생제르맹 조약과 1922년의 제네바 의정서로 독-오 합병은 20년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1920년대 오스트리아 정계는 기독교 사회당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라는 2대 정당이 차지했다. 그러나 대공황기에 기사당 출신 수상인 쇼버가 독일과의 관세동맹을 통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으나 독일의 동의 및 독일과의 통일을 향하는 첫걸음으로 인식한 국내의 통일된 지지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포기했으며 "저자세 외교"라고 비판한 사민당과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 기사당과의 알력은 나치당의 대두를 허락했다.
그렇게 등장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1932년의 지방선거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뒀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우익 집단인 호국단의 쿠데타 실패로 기존의 보수층들을 흡수하면서 성장했는데 1933년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를 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독일과의 통일을 과격하게 주장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고 테러 행위가 빈발했다. 이에 대응하여 기사당 출신의 수상인 엥겔베르트 돌푸스는 독일과의 통일을 반대하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외교적 후원과 호국단과의 연합을 통한 권위주의 체제를 실시하여 사민당과 나치당을 해산했다.
1934년 돌푸스가 수상관저에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원들에게 습격을 받아 사망하고 나치당의 쿠데타가 일어났다가 후임 총리가 된 기사당의 쿠르트 슈슈니크 장관이 이를 진압하면서 오스트리아 안에서는 독일과의 통일 논의가 급락했다. 게다가 무솔리니는 4개 사단을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선에 전개시켜서 독일의 행동을 견제했고 나아가 히틀러를 매도했다.[9]
그러나 1935년에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독일이 국제적 지위를 개선했고 다시 1936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궁지에 몰린 무솔리니를 히틀러가 지지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다시 개선되었다. 또한 1936년에 독일-오스트리아 협정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보장하면서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사면과 정치 활동의 재개를 보장받았다.[10]
4. 전개
1938년에 이르러 히틀러는 자신의 산장으로 2월 12일 슈슈니크를 초빙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했다. 슈슈니크가 도저히 수용하지 못할 제안이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데는 동의했다.[11]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독일에 합병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독일의 외교를 적극 지지할 나라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고 무솔리니가 1934년처럼 나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이 정도 선에서 합의를 본 것으로 끝내려고 했으며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보낸 공개적인 지시에서도 "슈슈니크와의 합의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는 어떠한 마찰도 해소되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허나 위의 생각과는 달리 아래인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말단들은 독일과의 통합이 다가왔다고 여기고 과격한 폭력 활동에 돌입했다. 국내의 치안 불안에 말려든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제안하여[12] 독일과의 합의를 무시하면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국민투표 제안이 히틀러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것을 안 히틀러는 격노해 "이건 사기투표이니 독일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민투표의 중지와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총리직 이양을 요구하는 한편 3월 10일에 오스트리아 제압 작전을 지시했다. 3월 12일에 독일 국방군을 월경시켜 무력으로 오스트리아 국토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이 정보는 오스트리아에 누설되어 오스트리아 정부에 충격을 주었다. 3월 10일 오후 4시 슈슈니크는 국민투표의 중지와 총리에서 사퇴할 것임을, 즉 '굴복'의 뜻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슈슈니크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임 총리로 추천했지만 정작 오스트리아 대통령 빌헬름 미크라스가 승인을 꺼렸다. 그러나 '굴복' 방송에 힘이 난 각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은 빈, 린츠, 그라츠, 인스브루크 등의 지방 정부의 시설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걸었다. 다시 독일은 아직 내무장관이었던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파병 요청"을 강요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오후 9시 45분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끝내 12일이 되기 조금 전 미크라스는 마침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독일 육군은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으나 그 과정이 근대 육군의 교과서라던 예전의 명성은 못 찾을 어설픈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조급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와 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3일 만에 작전안을 짜서 움직여야 했으며 보급과 행군 모두 착오의 연속이었다.[13]
그러나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14] 미크라스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했다. 여론을 못 이겨 미크라스가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자이스잉크바르트는 3월 13일 빈에서 히틀러와 만나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3월 14일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린츠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입성하는 히틀러 일행 | 빈에서 열병식을 하는 독일군 |
좌측 사진은 1938년 3월 빈을 방문하는 히틀러 일행의 사진으로 나치 고관들과 경호원들이지 일반 독일군이 아니다.[15] 오른쪽 사진은 오스트리아 합병을 기념하여 히틀러 앞에서 열병식을 하는 독일 국방군 10사단이다.
|
1938년 3월 15일, 빈의 헬덴 광장에서 연설하는 히틀러 |
위 영상에서 히틀러의 연설의 내용은 이렇다.
"
독일과
국가의 지도자(총통) 및 수상으로서 나는 독일 역사에게 이제 나의 고국이 독일국에 들어왔음을 선언하노라. 독일 민족의 가장 오래된 동쪽 지방이 이 시점으로부터 독일국의 가장 새로운 요새가 되었다, 일부 외신들은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잔혹한 방법으로 합병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독일과의 합병이 당연했다는 것을 말했을 것이다. 나의 정치적인 투쟁은 국민들의 사랑으로 쟁취한 것이다. 내가 그러한 국민들의 사랑을 직접 경험한 것은 국경을 넘어 들어왔을 때였다. 우리는 군림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해방자로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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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에 입성, 오스트리아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 히틀러 |
이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접수한 가운데 형식적인 법 절차로 나치당 감독 아래 4월 10일 국민투표를 했다. 이 투표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과 찬성 기표란을 크게 만들어 투표지부터 병합 찬성에 유리하게 만들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투표소를 경비하는 독일군 앞에서 공개투표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결과는 97% 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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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 쪽의 동그라미를 가운데에 크고 아름답게 그린 불공정한 투표용지 |
Volksabstimmung und Großdeutscher Reichstag 국민투표와 대독일 국회의사당. Stimmzettel 투표용지. Bist du mit der am 13. März 1938 vollzogenen 귀하는 1938년 3월 13일에 실시된 Wiedervereinigung Österreichs mit dem Deutschen Reich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재 통일에[16] einverstanden und stimmst du für die Liste unseres Führers Adolf Hitler? 동의하고 우리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후보자 명단을 지지하는가?
Ja / N e i n
그렇다 / 아 니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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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 후 국경표지판을 떼어내고 차단기를 철거하는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 관계자들이다.
5.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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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와 엄청난 환영을 받는 히틀러 |
사실 가톨릭 전통주의자들과 불법화되어 지하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일부를 빼면 오스트리아 주민 다수가 독일과의 통일을 지지했다. 가톨릭 전통주의자들 측에서는 오스트리아 고유의 가톨릭 정체성이 훼손되는 것 때문에 반대했으며, 좌파 측에서는 나치 정권의 영향력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좌파 인사 중 병합 당시 투옥 중이었던 사회민주당 정치인 카를 레너조차도 나치는 싫지만 통일 자체는 필요하다고 발언한 적이 있을 정도로 병합 찬성 의견은 오스트리아 국내에서 이미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17]
극소수 마르크스주의자, 유대인[18], 오스트리아 애국주의자[19]는 합병에 반대했으나 그 수는 극히 미미했다.
한편 독일은 이 오스트리아 합병을 통해서 같은 추축 동맹국인 이탈리아와 실질적으로 국경을 맞닿게 되었으며, 병합한 오스트리아 지역을 통해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등과 국경을 접하게 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지역을 통해 이들 나라들을 침공하게 된다.
6. 무효화
이 합병은 2차 대전 이후 없던 것이 되었는데 연합국은 1943년 모스크바 선언에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무효로 선언했다. 주민들의 의견이 어떻든 승전국인 연합국 측에서 무효라고 정한 이상 2차 대전의 패전 이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된 상태는 유지될 수 없었다. 연합국의 승전과 함께 안슐루스는 그 자체가 흑역사화된 셈이다.그렇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4개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었다. 어쨌든 이 시점까지 자발적인 병합 유지는 가능했으나 이후 오스트리아가 스스로 독일과의 통일 영구 금지, 영세중립국 지위 유지를 조건으로 제시하여 완전히 불가능해졌고 대신 그 대가로 오스트리아는 1955년 주권을 회복하였다. 또 이런 이유로 인해 오스트리아에서는 비나치화( 탈나치화)도 대충 넘어갔다.[20] 이러고도 나중에 뻔뻔하게 악당 역할은 독일한테 전부 떠넘기고 1938년 3월 독일과 합병 당시 촬영됐던 합병에 열광하는 국민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들이나 영상들이 전부 나치 독일에서 만든 조작 사진 내지는 나치당 선전 영화의 한 장면이거나 강제로 동원된 것인 마냥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첫번째 피해자'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오스트리아 피해자론'[21]을 주장했다.[22]
재미있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는 1943년 연합국이 전후처리를 논의하던 중에 처음 등장한 개념이다. 연합국이 전쟁의 전말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못 했고 도덕적인 책임 문제를 제대로 따질 생각이 없었음을 잘 보여준다. 연합국은 독일의 전후처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컸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약소국으로 전락한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일단 독일로부터 떼어놓기는 하는데 여기까지 분단시켜 곧 도래할 것이 명백했던 냉전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 특수한 지위의 국가'로 분류하고 중립국화하기 위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고안했다. 스탈린은 오스트리아도 전쟁의 주범이란 입장이었지만 오스트리아를 중립화하는 방안에는 동의했기 때문에 사실상 묵인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는 이 개념이 명시적으로 거론되었는데 정작 오스트리아는 괴벨스의 선전에 잔뜩 절어 있었고 '모스크바'라는 단어가 주는 볼셰비키적 어감 때문에 소식을 들은 반응은 떨떠름했다.
이러한 피해자론은 뭇 나치 피해자들에게 격분을 샀고 현재까지도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비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 나치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훗날 오스트리아에서 쿠르트 발트하임 전 대통령의 나치 독일군 복무 이력과 이로 인한 논란 역시 여기에서 기인된 문제들중 하나다.[23]
7. 현대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그리고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중도우파 정당 국민당과 연정을 수립했던 극우 정당 자유당에는 독일과의 통일을 주장하는 당원들이 상당수 있다. 자유당의 기원이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오스트리아 현지에서는 주류 여론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극우 진영 내부의 주장에 머물러 있다.여기에 독일은 EU의 원년멤버였고 오스트리아도 1995년 EU에 가입하였으며 솅겐 협정으로 인해 서로 국경은 열려 있고 이동, 취업, 거주의 자유가 인정되기 때문에 이제는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같은 서방 진영 국가들[24]이 합병을 허락해 준다고 해도 합병하나 안 하나 실질적으로 크게 변하는 것은 없어졌다.
8. 어록
"지금 생각해 보니, 운명이 나의 출생지를
린츠[25]로 택한 것은 신의 섭리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작은 마을은 두 개의 독일의 경계에 위치해 있어[26] 이 땅을 결합시키는 것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으라는 신의 지시였으니 말이다."
- 아돌프 히틀러, ' 나의 투쟁' 中
- 아돌프 히틀러, ' 나의 투쟁' 中
독일국민과 독일국의 총통이자 총리로써 내 조국 오스트리아의 독일국 합병을 선언하는 바이다!
- 1938년 3월 15일 헬덴 광장 연설
- 1938년 3월 15일 헬덴 광장 연설
9. 기타
-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오스트리아 병합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오딜로 글로보츠닉은 합병 이후 폴란드 총독부의 친위대 경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폴란드 유대인 200만 명을 학살하였다.
- 뮤지컬 및 영화로 만들어져 대성공한 미국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 독일 영화 보리수는 이 사건이 배경이다. 주인공 게오르크 루트비히 폰 트랍 소령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U보트 에이스였으나 나치에는 반대했다.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에게 합병된 뒤 오스트리아 전 현직 군인 들을 독일 국방군에 입대시켰고 트랍 소령에게도 독일 해군의 요직을 제의했지만, 나치에 반대했던 트랍 소령은 후처와 사망한 전처 슬하의 자식들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 찰리 채플린이 감독 겸 주연을 맡은 영화 위대한 독재자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주요 인명과 지명은 대부분 가명으로 처리되었지만 누가 누구인지 바로 눈치챌 수 있는 수준이며 실제 역사와 달리 독일군의 진주 과정을 합병이 아니라 침략처럼 묘사했다.
- 오스트리아군은 대체로 산악사단(Gebirgsdivision)으로 바뀌어 독일 국방군에 편입했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다시 분리되긴 했지만 이때 편입된 오스트리아군 부대 편제 자체는 그대로 독일군에 남아 있다. 그리하여 독일군 산악사단의 문장은 오스트리아의 국장인 에델바이스다.
- 이 사건으로 대대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거주하던 신성 로마 제국 최후의 제후 리히텐슈타인 공가가 리히텐슈타인으로 영구 이주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리히텐슈타인의 국방, 주변국과의 관계를 제외한 외교는 스위스가 대행하게 되었다.
- 여러 국가들이 나치 독일의 영토욕을 우려했고, 프랑스와 영국은 입으로만 나치 독일을 비난하면서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사실상 묵인했지만 국제연맹에서 실제로 오스트리아 병합을 비판한 국가는 멕시코밖에 없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가 나치 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되자 이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1956년에 빈의 에아체아초크 칼 플라츠(Erzherzog-Karl-Platz) 광장이 멕시코플라츠 (Mexikoplatz, 멕시코 광장) 광장으로 개칭되었다.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모두 예선을 통과했기 때문에 두 팀 모두 이 대회에 출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회 몇 달 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상대였던 스웨덴은 부전승으로 8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대표팀 선수들을 강제로 독일 대표팀에 편입시켰는데 오스트리아 출신 선수들은 남의 나라를 위해 뛰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경기 중에 대놓고 태업을 했다. 그 결과 독일은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첫경기 1:1, 재경기 2:4로 패배하며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27]
- 이 사건으로부터 44년 뒤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서 조별리그 같은 팀인 서독과 오스트리아는 서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오스트리아가 서독에게 0:1로 져주기 게임을 시전하여 알제리를 떨어트렸는데 이 사건을 오스트리아 병합에 빗대어 안슐루스로 비꼬기도 한다.
- 한편으로는 독일 민족의 통합을 내세웠던 오스트리아 합병이지만 무솔리니가 이를 묵인해 주는 대가[28]로 1차 대전 후 이탈리아로 넘어갔던 쥐트티롤[29] 지방에 대해서 히틀러는 어떠한 영유권도 주장하지 않게 되었으며 쥐트티롤의 독일계의 흔적은 파시즘 치하 21년간 철저히 금지되었다. 이에 대한 히틀러의 대응은 기껏해야 이주를 받아 주는 것뿐이었다.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나치 독일이 이탈리아를 공격하면서 독일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독일 패전으로 도루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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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이 신문 제목인 'THE SUN'은
그 유명한 영국의 찌라시가 아니라
미국
볼티모어에서 발행되는 정론지로 해당 기사는 1938년 3월 12일 1면 모습이다. 참고로 이어지는 기사들은, 영국은 대충격! 오늘 각의 소집 예정,
슈슈니크 사임,
자이스잉크바르트가 정부수반에 지명, 슈슈니크가 독일에 굴복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돕자는 프랑스의 제안을 거절 등등으로 대부분이 안슐루스와 그 여파에 관한 기사들이다.
[2]
브리티시 파테의 영상이다. 영상 초반의 음악은
히틀러 유겐트의 단가인
전진하라 전진하라.
[3]
안슐루스라고 읽는다. 옛 철자법으로는 Anschluß
[4]
합병을 뜻하는 다른 단어는 아네크티룽(Annektierung)이란 것이 있다. 이는 영단어 Annexation에 대응된다.
[5]
빈 회의와
신성 동맹으로
독일 연방은 부활하였다.
[6]
소독일주의에 의거해 탄생한 독일 제국도 단순히 독일 민족으로만 이루어진 건 아니었던 게 프로이센 영토에 폴란드인과 소르브인 등 비독일계 민족이 살고 있었다. 단지 그 비율이 오스트리아보단 낮았을 뿐.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독일을 만들고자 외교적으로 전력을 다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7]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독일권은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수데텐란트와
쥐트티롤도 있었으므로, 독일권 지역 모두가 새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아니었다.
[8]
이는 오스트리아만이 아니라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에는 오스트리아와의 통일을 암시하는 조문이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 제2조(영토) 국토는 독일 각 주(州)의 영토로써 성립한다.
만일 다른 지역의 인민으로서 그 자결권에 의하여 병합을 원할 때에는 국가법률에 의하여 이를 국가에 편입할 수 있다.
[9]
당시 돌푸스와 그의 가족들은 무솔리니의 초청을 받아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가족들이 먼저 이탈리아로 출발했는데, 돌푸스가 출발하기 전에 암살당하자 무솔리니는 자신이 초대한 가족들에게 가장의 부고를 알려야 했다. 무솔리니는 여행하러 온 타국에서 가장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탄에 빠진 돌푸스의 유족들을 보아야만 하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10]
이는 1938년에 무솔리니가 슈슈니크를 방관하는 계기였다.
[11]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내무장관으로 밀어준 자이스잉크바르트는 폭력 노선을 주장하던 다른 오스트리아 나치당 지도부와 달리 협상을 통해 문제를 풀어가려던 온건파였기 때문에 슈슈니크 입장에서 나쁜 제안은 아니었으며 슈슈니크와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성향이 비슷한 데다 조국전선 시절 한솥밥을 먹기도 해서 꽤 친한 사이였다.
[12]
나치당 지지율이 높은 젊은 층의 투표 참여를 막기 위해서 투표 연령을 높이고 나아가서 슈슈티크 본인이 법무장관으로 학살했던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려고 하기도 했다. 슈슈니크는 1936년에 비밀리에 불법 정당이었던 사회민주당 인사들을 초청해서 안슐루스 반대에 협조하는 대가로 사회민주당을 합법화하는 거래를 추진했다.
[13]
차량들이 오스트리아의 민간 주유소에서 돈을 주고
가솔린을 조달함은 기본이었고 행군 상황도 개판이라 사단장이 예하 부대의 현 위치를 못 파악하였으며 선봉은 오스트리아 영내에 있는데 후방지원 부대는
병합작업을 진행하는 그 순간에도 오스트리아 국경을 못 넘고 있었다. 이 꼴을 본
이탈리아 왕국의 오스트리아 주재무관이 "
독일군의 행군 군기는 극히 열악하다." 는 지당한 말을 했다. 만약 오스트리아 주민과 오스트리아군의 저항이 격렬했다면
병합이 완전히 물 건너가는 정도가 아니라 히틀러의 권력조차 무너질 가능성이 컸다.
[14]
이와 같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열렬환 환영에 대해 독일군은 '꽃의 전쟁’(블루멘크리그: Blumenkrieg)이라고 불렀다. 당시 이러한 열렬한 환영은 나치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도 어리둥절해했다고 한다.
[15]
여담으로 사진에 나와있는 차량들은
메르세데스-벤츠 320 CABRIOLET B로 당시 기준으로도 굉장한 고가의 승용차다.
[16]
원래 하나였던 것이 다시 합치기 때문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역사 참조) 재통일이라는 단어를 쓴다. 따라서
1990년의 동서독 통일도 독일에선 재통일이라고 부른다.
[17]
다만 카를 레너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국가로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합을 원한 것이지 독재 정권 하에서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18]
한때 카를 레너의 동료이자 유대인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오토 바우어 등.
[19]
독일 민족으로서가 아닌 오스트리아 제국 및 합스부르크 황가라는 독자적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끼던 이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트랩 대령이 예시다.
[20]
물론 진짜
네오나치가 대놓고 나대는 수준은 아니지만 독일에서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수준의
페기다 같은 유사 네오 나치 급 정치극단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에서는 정치판에서도 활동이 가능한 수준이고 네오 나치들도 당당히 거리에서 드러내는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다.
[21]
독일어: Opferthese, 영어:
Austria victim theory.
[22]
오스트리아의 이러한 행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이 오스트리아에게 돌아왔을 때 전쟁 수행에 협조했던 헝가리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묘하다. 자세한 이야기는
트리아농 조약 참조.
[23]
그러나 독일도
68혁명이전까지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전 서독 총리처럼 나치당 활동 이력이 있었던 나치당원 출신이 전후에도 정부수반을 역임하는 등 국내적으로 논란이 없지만은 않았다.
[24]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싸웠거나 나치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던 나라들이다.
[25]
실제 출생지는
브라우나우암인이지만 유년기부터 어린 시절을 린츠에서 보냈다.
[26]
린츠는 독일과 좀 떨어져 있다. 그래도 48km 정도라 아주 먼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브라우나우암인이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에 있는 마을인데 어쩌면 브라우나우암인을 말하려다 린츠로 헷갈린 것일 수도 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대도시 중 하나였던 린츠를 작은 마을이라고 표현한 것도 브라우나우암인과 헷갈린 것이라면 설명이 가능하다.
[27]
이것이
2018년 이전까지 독일 축구 역사상 유일한 월드컵 1라운드 탈락이었다. 그러다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에 0:2로 패배하면서 사상 첫 조별리그 탈락이자 80년 만의 1라운드 탈락이라는 기록을 쓰게 되었다. 조별리그 제도는
1950년 대회부터 도입되었다.
[28]
이 일을 히틀러는 굉장히 고맙게 생각했던 듯한데 무솔리니가 건재할 때는 물론이고 무솔리니가 쫒겨나서 몸뚱이만 남았어도 안슐루스를 자주 언급하면서 극진히 대접해 줬다.
[29]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 1절에 나오는 독일의 범위에서 에치 강이 의미하는 것이 쥐트티롤 지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