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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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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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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섭 <너에게로 또 다시>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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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 내 사랑 내 곁에> (19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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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훈 <보이지 않는 사랑> (1992년) |
<colbgcolor=#000><colcolor=#fff> 김현식 金賢植 | Kim Hyun-s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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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8년 1월 7일[1] |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1가 | |
사망 | 1990년 11월 1일 (향년 32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1동 렉스아파트 16동 101호[2] | |
묘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 메모리얼 파크[3]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적 | 충청남도 홍성군[4] |
신체 | 171cm[5], 71kg[6] |
가족 | 아버지 김종춘[7], 어머니 류진희(1935년), 누나 김혜령, 남동생 김현수(1964년생), 사촌 양국정 |
자녀 | 아들 김완제[8][9] |
학력 |
서울수유국민학교 (졸업) 보성중학교 (졸업) 명지고등학교 (중퇴)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 |
소속 밴드 |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10], 신촌블루스 |
종교 | 무종교 |
별명 | 사랑의 가객(歌客)[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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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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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특히 방황, 좌절, 여러가지 좀 나쁜 경험이 많은 편이다. 처음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쯤에서 나의 방황도, 좌절도 끝을 내야할 것 같다…
김현식의 생전 인터뷰 중에서[A]
대한민국의
가수.김현식의 생전 인터뷰 중에서[A]
유재하, 이문세, 김광석, 조용필, 변진섭, 전영록, 들국화, 산울림 등과 더불어 국내 대중음악의 과도기인 1980년대를 빛낸 가수였다. 김종진의 증언에 따르면 가수를 넘어 아티스트적으로도 고민을 많이 했던 인물로, 뮤지션의 삶은 단순히 연주나 노래 잘하는 것을 떠나 '고뇌'하는 것이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는 창작자로서의 고통을 표현한 것으로 이런 기조에 힘입어 동아기획에 소속된 언더그라운드 출신 뮤지션들과 함께 당대 한국 음악의 방향성을 좀 더 전진시키고자 노력했고 실제 대중적으로도 흥행에 성공하며 한국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서울 삼청국민학교[13]로 전학을 올 때까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시골 생활[14]이 너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파란 하늘 아주 깜깜했던 밤, 별이 유난히도 많았던 밤, 정말 아름답던 추억이다.
김현식의 생전 인터뷰 중에서[A]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할아버지 역시
충청남도
홍성군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또 외할아버지 역시 만석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1964년생)이 있다.
1964년에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16] 2학년 때 외가인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죽향초 동창의 말에 의하면 이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5학년 때[17] 서울에 있는 재동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재동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당연한 소리지만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18]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1970년에는 보성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김현식의 생전 인터뷰 중에서[A]
그는 보성중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다. 사촌형인 양국정이 기타를 가르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부터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19]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20] 고교 낙방으로 인해 좌절을 하여 술, 담배를 조금씩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전교 3등으로 입학했고[21]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선배의 트럼펫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하자 이에 대들어 뒤엉켜 싸운 사건으로 밴드부에서 탈퇴를 당하게 된다.[22] 이로 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 초에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23]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24] 바로 이 당시에 사촌형 양국정의 소개로 종로에서 당시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에서 일하던 한 DJ를 찾아가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DJ는 바로 당시 20대 중반이던 개그맨 전유성이었다. 전유성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어린 김현식이 부른 노래에 감탄하며 "넌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아까워. 그야말로 가수로 나가면 전설이 될 거다!"라며 적극적으로 가수가 되길 권유했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 때 나이를 5~6살은 올려 소개[25]했다고[26]. 이 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이 때 이장희의 남동생 이승희[27]를 만나게 된다.
2.2. 가수 활동
음악. 음악을 시작할 때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던 시절, 배가 고파야 노래가 더 잘 되었던 것 같다.
김현식의 생전 인터뷰 중에서[A]
김현식의 생전 인터뷰 중에서[A]
1981년 KBS 가요대상(1981년 12월 30일 방송)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부르고 있는 모습, 말년에 보기 힘든 가성 영역을 들을 수 있다.
이후 1978년 정식적인 데뷔를 준비하나, 대마초 흡연 혐의[29][30]로 몇달 간의 옥살이를 거치며 데뷔가 미뤄지게 된다. 이후 똑같이 대마초 경력 때문에 가수 활동이 막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던 이장희의 주선으로 1집 앨범 녹음을 완료했으나 대마초 사건 직후의 상황임을 우려한 레코드사의 판단으로 앨범 발매가 계속 미뤄지다가 출소 이후 6주간의 훈련소 생활을 마친 1980년[31] 자신의 이름을 내건 데뷔 앨범 봄여름가을겨울/당신의 모습을 내지만 처절하게 실패한다.[32] 이를 비관한 김현식은 또 다시 방황하지만 우연히 들른 신촌 옷가게의 여인에게 반해 1982년 결혼, 자신의 분신이라 부르며 사랑하던 아들 완제를 얻으며 구원을 받는 듯했다. 처자식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고모가 준 돈으로 피자가게를 열었는데[33] 잘 되는가 싶더니 프랜차이즈의 공습에 밀려 1년 만에 문을 닫고 투자금도 날린 후 다시 밤무대 활동에 전념한다.[34] TV에 출연한 김현식을 눈여겨 봤던 김영 사장에 의해 동아기획에 스카우트되어 1984년 심혈을 기울여 2집 <사랑했어요>를 발매, 좋은 반응을 얻으며 가수로 자리잡는데 성공한다. 이 때는 '김현식과 돌개바람'이라는 6인조 밴드 체제로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기였는데 '돌개바람'에는 김현식 외에도 남녀 싱어가 한 명씩 더 있었다.[35]
그 후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36]과 함께 제작한 3집은 수록곡 < 비처럼 음악처럼>이 히트하며 3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음악적으로도 호평을 받는다.[37] 그러나 방송 출연만은 녹록지 않아서 촬영 도중 PD와의 의견 충돌로[38] 촬영장을 박차고 나오는 등[39]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는 전국적 인지도 형성에 걸림돌이 되었고, 흥행한 2집과 3집 관련 TV 출연 영상이 적은 이유가 되었다[40]. 이 무렵 이혼(or 별거)을 하며 아들과도 떨어져 지내게 된다.[41] 신촌블루스의 멤버로서 1집 앨범 준비 중이던 1987년 10월 전인권, 허성욱[42] 등과 함께 다시 대마초 흡연 및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동아기획 김영 사장이 선처를 부탁해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된다.[43]
1988년 2월에 김현식은 63빌딩에서 재기 콘서트를 열고 팬들을 실망시킨 데 대한 사죄의 뜻으로 삭발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이때 김현식은 관중석을 꽉 채운 600여명의 팬들을 보니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며, 그 때의 콘서트는 잊혀지질 않는다고 회고했다. 음악 활동에 대한 열의를 다시 불태우며 밤샘 녹음 끝에 그 해 9월 4집 앨범을 발표한다.
1989년에 첫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다. 이후 같은 타이틀로 1991년 1월 20일에 몇몇 수록곡 구성을 바꿔서 다시 한 번 발매한다. (91년 재발매 앨범에서는 사랑했어요[44]와 봄여름가을겨울[45]을 재녹음했다.)
1989년 9월 28일 발매된 영화 '비오는 날 수채화' OST에 참여해 동명의 곡을 권인하, 강인원(작곡자 겸 프로듀서)과 같이 부른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강인원이 공동 작업을 제안하자 재미있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원래는 권인하와의 듀엣곡으로 예정되었으나 김현식의 저음 부분이 곡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원작자인 강인원이 다시 녹음해 트리오곡이 됐다고 한다. 김현식 사망 20주기 다큐멘터리에서는 강인원이 다른 이유도 설명하는데, 이미 이즈음에 목이 많이 상한 김현식이 4소절을 부르고는 더 부르지 못했었다고 한다. 당시 강인원은 김현식과 권인하의 듀엣곡을 계획했는데 도저히 이 상태로 듀엣곡을 만들 수 없자 자신이 들어가 트리오로 만들었다고 한다. 종합해보면 곡의 분위기적 문제 + 김현식의 건강 문제가 섞여서 트리오곡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지명도와는 달리 김현식의 솔로 가창 분량이 권인하에 비해 턱없이 적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김현식은 예상 외의 인기몰이를 하던 곡 홍보를 위해 사망 몇 달 전까지도 전국을 누비며 여러 차례 방송에 출연해 라이브 공연을 펼친다. 나빠지는 몸상태 때문에 적은 솔로 분량마저 강인원과 같이 불러야 했지만[47] 곳곳에서 터지는 김현식만의 애드립은 라이브 영상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이 곡의 묘미다. 강인원에 따르면 아픈 김현식을 부려먹는 것 같아 홍보를 조기에 마쳤다고 한다. 그 거리 그 벤취라는 솔로곡도 불렀다.[48]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정이 많고[49], 말은 거칠어도 꽤나 섬세했었다고 한다. 다만 가수 활동 중 폭력을 휘두른 일이 많았다던지, 위에서도 보이듯 자주 일탈했다던지 하는 일화를 보면 괴팍할 때는 상당히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2020년대의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요절한 덕분에 이런 부분이 묻혔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과거에는 그런 연예인의 사생활이 잘 드러나지 않았기에 엄청난 인기에 누가 되지는 않았다. 대마초 문제도 그 때엔 역시 가수를 넘어 많은 연예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대중들 역시 크게 신경쓰지 않던 분위기였다. 여하튼 혹자는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라 얘기하기도 하지만, 요절한 존재에 대한 주변인들의 회고가 전반적으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그를 따르는 음악인들이 많았던 것을 보면 사람 자체는 매우 매력적이었던 모양. 당장 쌍코피 터졌다는 장기호는 꾸준히 김현식을 칭송했고, 같은 밴드 멤버였던 김종진 등은 자신들은 딱히 맞은 적이 없다고 하는 등 항상 폭력을 휘두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평소엔 좋은 사람이지만 화가 나면 감당하기 어려운 타입이었는 듯 하다. 설령 망자와 선배에 대해 립서비스가 섞여서 과하게 보면 쉴드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당사자들이 문제 삼지 않는 것을 현대에 와서 이러니저러니 할 부분은 못된다.
친한 후배인 유재하가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도 대성통곡하면서 한동안 술에 매달리며[50] 슬퍼했던 걸 보면[51] 정이 있는 사람이긴 하다. 문제는 슬픔을 잊는다고 쳐도 술이 너무 과했던 것. 오죽하면 4집을 낼 당시 친구이던 이문세나 함춘호 같은 지인들은 "아니,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왜 술을 먹어?"라고 걱정했음에도 그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술을 들이켜 댔다. 술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골초였던 것도 수명 단축에 한몫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어머니가 2010년 사망 20주기 다큐멘터리에 나와 아래와 같은 발언을 남겼다.
내가 가장 후회되는 게 현식이 그 놈을 밧줄로 묶어다가 알콜중독 치료시설에 보내든지 해서라도 술 못 마시게 해야 했던 거예요... 술을 물 대신 마시고 밥 대신 마셔대니 그렇게 빨리도 가지....
1989년 OST 앨범 영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5집 앨범을[52] 발표할 당시 의사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라고 경고할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53][54] 병원에 몇 차례 치료차 입원했지만, 그는 음반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병원을 탈출하여 녹음과 공연을 이어가는 강행군을 지속했으며 통증이 심해질 땐 독한 술을 마시면서 버텼다.
하루는 신촌블루스 방송공연을 준비하던 아침, 객원보컬로 활동한 한영애가 김현식에게서 술냄새가 나는걸 알고 "현식아, 아침부터 술을 마셔?? 방송공연 연습하는데!"라며 다다다 쏘아붙이자 김현식이 한영애를 멀거니 쳐다보다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몸이 떨려서 마이크가 입에 닿질 않아, 누나..."라고 했을 정도로 얼굴이 붓고 복수가 가득 찬 아픈 상태에서도 펑퍼짐한 옷으로 복수가 찬 배를 가리고 공연을 이어갔다. 이에 한영애는 쏘아붙인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55]
병원에 입원하기 전 김현식은 자신의 집에서 술과 담배로 오랜시간을 밥도 먹지 않고 지냈다. 마지막 6집 앨범을 낼 때에는 그를 이전부터 아끼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을 만나서 "언젠가 술 먹다가 죽고자 했는데..."라는 식의 말을 할 정도였고 후에는 간경변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입원한 서울스튜디오 근처 동부이촌동 금강아산병원에서도 자주 탈출을 하여 지방까지도 공연을 다녔고[56] 술을 마시고 앨범 녹음을 했다. 녹음할 때 "형, 술을 그만 좀 마셔요"라는 후배에게 술을 안 마시면 아파서 소리가 안 나와서 마셔야 한다고 얘기했을 만큼 고통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생명을 소진하며 노래하였다. 그래도 그에겐 언제나 기타가 들려 있었고 병실에서도 항상 노랫소리가 끊임이 없었다고 한다. 작고하던 그 해 여름, 김현식과 같은 병실에 입원한 환자에게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15곡 정도를 불러준 적이 있는데, 그 환자가 그 노래들을 휴대용 카세트에 녹음해놨다가 김현식이 작고한 지 7년 뒤인 1997년 동아기획에 전달하였고, 이후 김영이 반주를 추가하여 2002년 정식 앨범으로 나오게 되었다.
김현식의 음악 장르가 다양한데, 그 중 사랑했어요를 트로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나 한국적 크로스오버 발라드라고 하는게 오히려 적합하다. 멜로디 라인이나 악기 구성등 전반적 곡의 흐름이 우리가 아는 트로트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2.3.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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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의 영정 사진. 2집의 앨범 재킷이 이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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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2일 동아일보 14면 가수 金賢植씨 사망 |
그대 빈 들에 / 비 오는 사람이지 / 술도 집도 없이 배고픈 사람
세상이 모두 다 내 것 같을 때 / 나는 저 태양을 / 두려워하지 않았네
세상이 모두 어둠으로 덮일 때 / 나는 또 어둠을 걸었네
이젠 떠나야 할 / 시간이 되었나 봐
이젠 잊어야 할 / 시간이 되었나 봐
아 아무도 없는 이 밤에 / 누굴 기다리나 / 무엇을 찾아 헤매나
김현식이 죽기 3일 전인 1990년 10월 30일 마지막으로 작사·작곡·녹음한 〈 그대 빈들에〉 [57]
세상이 모두 다 내 것 같을 때 / 나는 저 태양을 / 두려워하지 않았네
세상이 모두 어둠으로 덮일 때 / 나는 또 어둠을 걸었네
이젠 떠나야 할 / 시간이 되었나 봐
이젠 잊어야 할 / 시간이 되었나 봐
아 아무도 없는 이 밤에 / 누굴 기다리나 / 무엇을 찾아 헤매나
김현식이 죽기 3일 전인 1990년 10월 30일 마지막으로 작사·작곡·녹음한 〈 그대 빈들에〉 [57]
1990년 11월 1일[58] 오후 5시 20분경, 김현식은 32세라는 이른 나이에 자신의 자택인 서울특별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아파트에서 간경화로 인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누나인 김혜령이 임종을 지켰고,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전날 각혈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 그리 빨리 뜰 줄은 몰랐으며 당일 불과 2시간 전인 오후 3시경에 김현식이 전화로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얘기해서 전혀 짐작도 못했다고 한다.[59]
다음 날 그의 누나에게 "갔어요."라고 한 마디로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2010년 김현식 2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에 나온 김영 사장이 회상하길, 전화를 받고 믿기지 않아서 "그럴 리가 없어! 어제 겨우 두 시간 전에 현식이가 나한테 밝게 전화하면서 내일이라도 녹음 들어간다고 했다고! 그런데 현식이가 죽었단 말이야?!"라면서 소리쳤을 정도로 충격받았다고 한다.
김혜령은 선배였던 한영애를 찾아가 "언니... 현식이 갔어요."라고 말한 얘기에 한영애는 "스튜디오 왔다 갔다고요? 근데 그게 왜요?"라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니...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갔다구요, 저 하늘로..."라고 다시 얘기했는데, 이때 온몸에 힘이 풀리며 쓰러졌다고 한다.
김현식이 아끼던 김장훈도 어머니를 통해서 사망소식을 들었는데, 어머니가 담담하게 "현식이 형이 하늘나라로 갔다" 라고 소식을 전해주자 그저 "네"라고만 짧게 답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현실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냥 단순히 대답한 것이었다고. 결국, 슬픔에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사후 그는 벽제 화장터[60]에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야탑3동[61]에 위치한 남서울공원묘지(현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된다.[62] 그의 묘비에는 1집 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의 가사와 할머니란 가사가 적혀있다.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를 제외한 실질적 유작인 5집 앨범 '넋두리' 앨범이 바로 이때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 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다. 김영 사장이 포기하자는 말에도 각혈을 하면서 죽어갈 때까지 엄청난 유작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3. 사후 음악활동
AI기술로 복원된 목소리로 한성대학교의 응원가 낙산의 함성을 불렀다. 여담으로, 이는 민간에서 진행한 세계 최초의 합법적 사후 공연이라고 한다.4. 후일담
그의 유작이 된 6집 < 내 사랑 내 곁에>는 100만장이 넘게 팔리는 대박을 거둬들였으며 가요톱텐 1991년 12월 25일 방송분에서 골든컵을 탄 김정수의 <당신>과 같이 공동 수상을 했다. 다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은 그의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했다.[63]1991년 골든디스크 대상을 차지했고 어머니와 아들 완제군이 수상을 했다. 원래 이 때 신인 시절의 김장훈이 무대에 설 예정이었는데, 이에 대해 소속사 측에서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난(실제 사촌인 것은 아니다) 김장훈을 내세우면 대박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하지만 김장훈은 그를 팔아먹으며 인기를 노린다는 부분을 영 내키지 않아 했고, 그래서인지 아예 생방송을 펑크내버렸다. 결국 위에 서술된대로 김현식의 아들인 김완제가 대리 수상을 하게 됐고 이 일로 김장훈은 한동안 방송금지를 당했다고.[64]
김장훈이 펑크낸 1991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장필순이 대신 '내 사랑 내 곁에'를 부르던 장면.[65]
대만에서도 리메이크된 바 있으며 대만에서 리메이크해 부른 가수가 바로 한국인 가수 장호철이다. 그는 개그맨 김한국과 초등학교 시절 친구라서 같이 90년대 중순 국내 방송에 나왔는데, 아버지가 중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어릴 적부터 그에게도 배우게 해서 중국어를 상당히 잘했다고 한다. 그 보기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에 가서 이 가수가 중국어로 짜장면 달라고 하면 화교인 사장이 반가워하며 한가득 짜장면을 줘서 어린 김한국이나 다른 친구들도 실컷 배부르게 먹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 찾아보면 담영린(알란 탐)이 광동어로 리메이크한 노래만 나온다.
그 밖에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계 화교인 강육항(姜育恒)도 리메이크했다.
AI 음악 프로젝트 다시 한번, 주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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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터틀맨 |
PART 2 김현식 |
2022년 11월 4일, 가객 김현식의 32주기 특집을 겸하여 히든싱어7 12화의 원조가수로 출연한다.[67]
5. 추모
자세한 내용은 김현식/추모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여담
- 김현식 2집 커버. 가수로서 정체성은 블루스, 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록밴드들의 스타일이자 주류였던 백두산, 시나위 등의 가죽바지, 장발 같은 스테레오타입 록커와는 거리가 먼 보이스와 비주얼로 2집 때부터 크게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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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굉장한
미성이었다.[68] 그러나 이후에는 음색을 바꾸려는 본인의 노력과, 평소에 즐겨 하던 술담배의 영향이 겹쳐 굵은 목소리 + 쇳소리가 나는
허스키창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무릎팍도사 김건모 편에서도 잠시 비교용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6집 <내 사랑 내 곁에>의 음색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로 1집에서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미성이었다. 1집의 타이틀 <봄 여름 가을 겨울>, 2집의 <사랑했어요>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보컬은 특유의 미성과 가성의 능숙한 사용으로 쭉쭉 뻗어올라가는 고음을 보여준다. 2집을 내기 전인 1984년 3월, 7인치 LP판 싱글을 낸 적이 있는데 '사나이 노래' 라는 타이틀을 냈었다. 1집과는 달리 굉장히 굵지만 허스키와는 거리가 먼 창법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다만 상업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먼 실험성이 돋보였던 앨범인지라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고가에 거래되는 음반이 되어버렸다.[69]
김현식이 다른 시기에 녹음한 같은 노래들을 비교해 보면 이해할 수 있다. 1집 때, 3집 때, 말년 때.
이후 목소리가 상당히 바뀐 3집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들어보면 미성이 상당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거칠거칠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목소리가 바뀐 것은 4집 이후로[70] 특히 유작인 < 내 사랑 내 곁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의 인식이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정됐다고 할 수 있다.[71][72]
- 김현식은 음악 여행을 겸하여 국내 사찰들의 종소리를 들으러 다녔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소리에 대해 연구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일간스포츠 연예부 기자 출신인 육상효 씨가 편집, 저술한 『사랑의 가객, 김현식』의 51쪽엔 생전 김현식이 했다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종소리는 종마다 다른 특질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어떤 종은 타종과 함께 소리를 계속 펼쳐가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펼친 소리를 다시 동그랗게 오므리고,또 어떤 종은 처음부터 일정한 파장을 가지고 울린다는 얘기도 했다. 몸도 안 좋은데 종소리를 왜 그렇게 듣느냐는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그(김현식)는 그냥 씁쓸히 웃었다. 들리는 것은 부를 수도 있다고. 그러고는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얼버무렸다."
- 데뷔 때부터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를 보였다. 봄여름가을겨울, 사랑 사랑 사랑, 사랑했어요, 추억만들기 등의 노래가 그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다. 라이브나 녹음에서 노래 하다가 음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에 대해 이해가 뛰어나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라디오 스타에서 김종진이 그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그냥 자기 멋대로 부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상당히 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 번 화가 나면 상당히 무서워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73]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이자 리더였던
장기호[74]는
뮤직비디오를 야외에서 추운 겨울날 너무 오랫동안 찍자 김현식이 짜증을 내며 "야! 악기 싸!"라고 하면서 가려고 하자 삿대질과 잔소리에 질책하듯 말리다가 김현식에게 죽빵을 맞고 쌍코피난 적이 있다고 한다.[75] 또한 한때 그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날 정도로 절친했던 김장훈[76] 역시 조금이라도 잘못한 게 있으면 굉장히 많이 맞았다고. 이건 폭력에만 대한 이야기이고 안 때린 후배들에게도 군기가 굉장히 강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나마
유재하만이 김현식에게 단 한 번의 군기도 안 잡혔었다고 한다.[77][78]
물론 김현식이 활동하던 80년대에는 대한민국 사회의 폭력적인 경향이 매우 강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79] 또한 제아무리 1980년대였더라도 김현식의 폭력이 정말 심각했었더라면 뉴스에 보도되는 등 논란이 컸었을 것이며[80] 당시엔 조금 성깔 있는 선배 음악가 형 정도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당장 당사자들도 웃으며 회상하듯 이야기한 것이 많았고 그가 베푼 미담도 많이 덧붙여서 이야기했다. 당장 위의 일화에 엮인 봄여름가을겨울 멤버 두 사람은 방송 내내 김현식을 칭송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어찌 됐건 당사자인 후배들 입장에선 "존경하는 선배의 괴팍한 일면" 정도로 받아들였단 의미. 또한 성격이 좀 괴팍할 뿐 인품 자체는 좋은 편이라고 하며, 또한 정이 많은 성격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일화로는 자신이 동생들을 데려다주다가 아예 타고 다니라며 무려 자동차를 줬다고 한다. 위의 김종진과 전태관 뿐 아니라 수많은 가수들이 김현식이 자신들에게 베푼 미담들을 밝히고, 도움을 받았던 사례들을 얘기했다. 가수 정경화는 후배를 잘 이끌어주고 많은 격려와 도움을 주었다고 밝혔으며 비오는날의 수채화를 같이 부른 권인하는 김현식을 대인이라고 부르며 그의 베품과 후배들에 대한 사랑을 담은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즉, 단순히 폭력으로 후배들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잘 대해주되 종종 혼내는 상황에서 폭력을 썼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건의 당사자들을 포함해 그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 모두 그리워하고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하는데다 수많은 좋은 일화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성깔은 있어도 기본적인 성품은 상당히 좋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현식이 정말 화와 폭력만 많은 사람이었다면 그의 음악이 아무리 좋았다한들 좋은 기억만이 남지 않고 또 그가 이렇게 좋은 가수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야구 감독 김응용과 비슷한 유형인 셈.[81]
- 방송이나 공연 펑크를 자주 내 매니저나 공연 관계자들이 자주 골치아파했었다고 한다. 김종진이 라스에서 말하길 컨디션이 안 좋으면 그냥 없어지는 사람이라고. 위에서 언급한 토토즐 특집 뿐 아니라 다른 공연에서도 컨디션이 나쁘거나 무대 세팅이 제대로 안 되어있으면 통보 없이 없어지는 일이 잦았다. 이 때 김현식의 대타로 자주 올라갔던 사람이 이승철인데, 이승철의 현 부인이 김현식이 펑크 낸 공연에서 이승철이 대타로 올라왔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고 전해진다.
- 1992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이 개봉했지만 흥행이나 평은 그리 안 좋았다. 김형철[82]이 김현식을 맡았지만 이젠 잊힌 영화가 되어버렸다.
- 작곡가 이영훈과도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김현식이 마지막 앨범 작업을 할 때 이영훈이 소식을 듣고 김현식에게 줄 노래 10곡 정도를 만들어놨었는데 아쉽게도 녹음 작업에 들어가기 전 김현식이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만약 김현식이 조금 더 오래 살아있었다면 정규 7집 앨범은 이영훈이 프로듀싱을 맡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영훈 본인도 2006년 <옛사랑> 발매 기념 인터뷰 때 김현식과의 작업을 끝내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 1996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머나먼 나라 초반부에서 김현식이 자주 언급되었다. 초반부는 배경이 1990년도였는데, 극중 한수( 김민종)가 김현식의 광팬이어서 운하( 김희선)를 데리고 김현식 콘서트에 갔고[83], 또한 한수는 김현식이랑 악수한 손을 영광으로 여겨 붕대를 감고 다녔다. 물론 김현식이 사망한 날 꽐라가 된채 노래방에서 <언제나 그대 내 곁에>만 20번 이상 부르는 것도 모자라, 집에 돌아온 후 울면서 깽판을 부리기도 했다. 드라마 오프닝 자체가 <언제나 그대 내 곁에> 리메이크 버전이고, 훗날 김민종도 따로 리메이크 버전을 불렀다.
- 아들 김완제 역시 아버지가 엄하고 무서우며 고집이 셌다고 한다. 어릴 때를 떠올리는 김완제.
- 이승철이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는 가수라고 한다.[84] 라디오 스타에서 밝히기를 생전 인연도 있었고, 김중만과 함께 6집 자켓촬영을 하러 갔을 때 부산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한다.
- 김장훈과도 인연이 깊은데 김현식의 어머니와 김장훈의 어머니 두 분이 친자매처럼 친했고 이로 인해 김장훈과도 절친했었다. 오죽하면 성이 같고 둘 다 불같은 성격이라 김장훈은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날 정도였었다. 이 덕분에 김장훈은 음악적인 부분에서 김현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 일명 '밥퍼목사'로 유명한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와는 10대 때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였다고 한다.( 관련 영상) 그래서 최목사의 일대기를 담은 뮤지컬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에서도 그의 친구이자 사랑의 메신저로 김현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기사)
- 2019년 9월 그의 노래를 뮤지컬 넘버로 편곡하여 <사랑했어요>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개봉하였다. 인터파크 공연 정보
- 여기서 죽향초등학교 시절 사진을 볼 수 있다. 동창의 말에 따르면 김현식의 집에는 커피와 통기타 같은 신식 문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 히든싱어 원조가수 후보로 매 시즌 올라와 있고 많은 시청자들이 바라고 있지만 난항이 많다. 실제 부르는 모창자와 헷갈리게 만들 만한 디지털 소스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그 김광석보다도 6년이나 사망이 빠르기 때문. 그러다가 2022년 방영된 시즌 7에서 원조가수 후보로 올라왔고, 시즌 7의 마지막 가수로 11월 4일에 방송되었다. 그만큼 디지털 기술이 발전한 것이 반영된 듯 하다.
- 동생 김현수는 김현식이 한창 활동할 때 미성년자의 모습이었던 걸로 보아 나이 차이가 상당하며, 생전에 많이 챙긴 아버지 같은 형이었다 밝혔다.
7. 디스코그래피
자세한 내용은 김현식/음반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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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 | 싸이 | 브라운 아이즈 | 비 | 다이나믹 듀오 |
[1]
음력 1957년 12월 30일생.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 등에는 호적 상 생일인
1958년
1월 7일생으로 되어 있다. 활동 당시에도
1958년
1월 7일으로 소개됐었다.
[2]
1974년
삼익주택에서 지은 아파트였으며, 현재는 재건축으로 그 자리에
래미안 첼리투스가 들어서 있다.
[3]
과거에는 남서울 공원묘지라 불렸었다.
[4]
부친의 출생지. 김현식의 할아버지는 홍성에서 알아주는
유지였다고 한다.
[5]
네이버, 구글 등 웹사이트에서 180cm로 기재되어 있는데 영상 자료나 사진을 보면 실제로는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키가 작은 것이 콤플렉스라 늘 무대에서 제일 앞에 나와 있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김현식 키는
권인하보다 약간 작은 걸로 보이는데, 권인하의 키는 172~173cm 정도다.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중 하나인
김종진(175cm)은 김현식이 우리 중에 키가 제일 작았다고
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적이 있다. 다만 1958년생임을 감안하면 171cm는 절대 단신이 아니고 오히려 평균보다 큰 키였다. 평균 키가 큰 집단인 연예계에 속해 있어서 단신 콤플렉스가 생긴 듯하다.
[6]
여담으로 원래는 마른 몸이었다. 김현식 앨범 라이벌 중 하나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면 알수 있듯이 원래는 마른 체형이였다. 다만 , 잦은 술 담배로 인해 건강이 악화 되면서 체중도 왔다갔다 한 걸로 알고 있다. 최고로 올라갔을 때는 80kg 초반대까지도 올라간 걸로 밝혔다.(자서전 중에서.) 평소 기본 체중은 50kg 초중반대(약 50~54kg)였으나 잦은 술 담배와 건강 악화로 인해 체중도 달라진 듯 싶다.
[7]
1969년도에 별세.
[8]
1982년
12월 3일 생으로, 아버지처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로 초창기 김현식과 똑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
[9]
김현식 추모 콘서트를 미끼로 사기 행각을 해 기소 당한 바 있다.
1
2 이후 채무 변제를 위해 김현식의 잔여 저작권을 전부 처분 했다 전해진다.
[10]
봄여름가을겨울 뿐만 아니라 김현식의 마약 사건 이후 갈라져 나온
사랑과 평화-
빛과 소금과도 관련이 있기는 하다. 빛과 소금과 봄여름가을겨울은 함께 유재하, 김현식, 전태관을 추모하기도 했다.
[11]
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이 별명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김현식에게 주어진 수식어가 '가객(歌客)'이거든요. '객(客)'이라는 건 손님인데, 손님이라는 것은 문 밖, 들어오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하면 언더그라운드의 개념인 거죠. 김현식은 가객,
조용필은 가왕(歌王). 땅 위에 조용필이 최고였다면 땅 밑에서는 김현식이 으뜸이었다는 것이죠." (SBS 스페셜)
[A]
김현식 사후 1996년 7집 Self Portrait의 1번 트랙으로 등재된 생전 인터뷰에서의 언급이다.
#
[13]
지금의 재동초등학교이다.
[14]
초등학교 2학년떄부터 5학년때까지 지냈던 옥천군
[A]
김현식 사후 1996년 7집 Self Portrait의 1번 트랙으로 등재된 생전 인터뷰에서의 언급이다.
[16]
참고로 입학식 날 행사가 다 끝나고 김현식이 안 보이자 어머니가 찾으러 다녔는데, 김현식은 같은 학교 6학년 형들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7]
동문의 인터뷰
참고
[18]
두 사람은 1970년대 초반 무렵 종로 인근에서 같이 음악을 할 때 처음 안면을 텄다.
[19]
본래 꿈은 아이스하키 선수였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
[20]
당시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서울특별시에서 시행 전이라 전기고에 낙방하면 후기고에 지원했다.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는 1974년부터 시행됐다.
[21]
명지고를 택한 이유도 밴드부가 유명했기 때문에 명지고를 택했다고 한다.
[22]
김현식은 싸움을 아주 잘했다고 한다. 몸 체질 자체가 통뼈이고 두꺼워서 불주먹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23]
여담으로 1972년(당시 중3) 기타만 들고
인천 작약도로 친구인 김동환과 같이 음악 여행을 떠났고 3년 뒤에 둘이 다시 음악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24]
상당히 방황을 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동네 " 건달 " 김현식이라고 불렸다 한다. 이 시기에 기타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인생의 전환점이라 볼 수 있는 시기이다.
[25]
1952~1953년생으로 올려 소개했다.
[26]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면 언더 가수로 받아주지 않았다. 이 때부터 어린 나이를 높게 소개 하다 보니 잦은 술 담배를 하여서 건강이 악화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27]
2000년 3월 10일 암 투병 중 사망하였다.
[A]
김현식 사후 1996년 7집 Self Portrait의 1번 트랙으로 등재된 생전 인터뷰에서의 언급이다.
[29]
원래 1960년대까지는 불법이 아니었고 시골 등지에서 담배를 대신해 대마초를 많이 피웠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이 정권을 반대하는 진보 성향의 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그들이 즐기던 대마초를 불법으로 지정했다. 이 때 잡혀간 사람이
박정희를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해줄 것을 부탁받았다가 거절한 가수
신중현. 미국에서도 히피 문화를 탄압하기 위해 그들이 피우던 대마초를
헤로인과 동급의 강성마약으로 지정해 금지시켰다.
[30]
영화 '쎄시봉'에서 70년대 대마초 관련 사회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31]
1981년으로 보기도 한다. 1980년 발매 레코드가 실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32]
대중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언더 쪽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아 거의 전설처럼 군림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함께 활동하게 된 김종진과 전태관도 이 때 처음 김현식을 알게 되었는데, 1집 앨범을 테이프로 사서 듣곤 완전히 뻑갔었다고.
[33]
김현식은 이 때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 회고했다.
[34]
이 무렵(1983년) '봄여름가을겨울'과 '오늘을 즐겁게'라는 외국곡 (원곡은 Foxy의 Let's Be Bad Tonight)을 그룹싸운드 뿌리와 함께 부르는 젊음의 행진 출연분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
[35]
그 중 남성 싱어는 바로
세월이 가면을 부른 가수
최호섭이었다.
[36]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박성식, 최태완(공연에만 참여).
[37]
3번에 걸친 대한민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에서 3번 다 10위권에 들었다.
[38]
당시엔 PD가 가수에게 반말하는 게 기본일 정도로 방송국과 가수의 관계는 철저한 갑을관계였다고 한다.
[39]
토토즐에서 김현식 특집으로 30분간 단독공연을 할 수 있도록 해줬는데, 촬영장에 가보니 세팅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환경에서 추위에 떠는 멤버들을 보고 김현식이 화가 나 펑크낸 것이었다고 한다. 라스 김현식 특집에서 전태관이 말하길 김현식이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쯤 "야, 악기 싸. 추운데 이게 뭔 고생하는 거냐? 악기 싸. 가자." 라면서 악기를 챙기기 시작하자, 멤버들이 장기호에게 김현식을 말려보라고 부탁했는데 한 성격 하던 장기호가 "형 뭐하는 거야? 스태프들 다 기다리는데!" 라고 화를 내며 대들었고 결국 김현식에게 얻어맞아 그대로 K.O 당했다고 한다. 이 때 땜빵으로 1집을 갓 발매한
부활이 출연해서 대박이 났다고 한다.
[40]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것으로는 1984년 12월 KBS 가사 대상 시상식 '바람인 줄 알았는데',
# 1985년 청소년록콘서트 '비오는 어느 저녁', 1986년 봄여름가을겨울 결성 후 첫 콘서트 홍보를 위한 연예가중계 영상(변덕쟁이, 눈 내리던 겨울밤 전성기 라이브를 짧게나마 들을 수 있다.), 1988년 골든디스크 시상식 '비처럼 음악처럼' 네 개다. 그리고 그마저도 84년도와 88년도 라이브는 립싱크와 핸드싱크 공연이였다.
[41]
이혼 사유는 주벽과 지나친 자유분방함이라고. 다만 이혼 후에는 아내와는 다시 친하게 지냈고 죽기 1년 전에는 다시 한 집에 살았다 한다.
[42]
들국화의
키보디스트로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36세에 요절했다.
[43]
김현식 20주기 다큐멘터리에서 김현식의 어머니가 아들의 탈선을 막기 위해 신고했다고 밝혔는데 이 사건은 김현식의 비극적 운명의 시작이 되었다.
[44]
6집 수록곡과 동일. 89년 앨범은 2집 음원으로 수록
[45]
1집에 수록된 음원과는 다른 느낌. 89년 음반에는 미수록.
[46]
리더 엄인호는 김현식에게 달라던 곡을 주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한다. 투병의 와중에도 5집과 6집을 준비 중이던 김현식은 극심한 창작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엄인호의 곡이 김현식의 목소리를 입고 그럴싸하게 나오면 엄인호에게도, 팬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을 테니.
[47]
자신도 권인하처럼 건강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만 목이 아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며 담담하게 인터뷰하는 영상이 남아 있다. 실제로 라이브 영상을 보면 김현식이 부르는 파트에서 강인원과 서로 가까이 붙어 같이 부르는 모습이 있다.
[48]
5집 수록 시엔 재녹음.
[49]
기획사에서 보수를 받으면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느라 반이나 집에 가져갈까 싶을 정도였고, 길가다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으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주는 사람이었다.
[50]
가수로 데뷔하기 전부터 음주 자체는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재하의 죽음 이후 술에 의지하는 빈도가 급격히 많아지게 되었다.
[51]
본인 피셜 유재하와는 좋은 술 친구였고, 그와 동시기를 살았던 가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현식은 후배들을 구타와 욕설로 군기를 잡으며 끌고 가는 스타일이었는데 유재하는 항상 그 군기에서 열외였다고 한다.
[52]
타이틀 곡으로
넋두리가 수록되어있고 김현식이 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앨범이다.
[53]
어느 정도로 심하냐면 간경화에 폐까지 전이되어 의사도 더 이상 손 쓸 수가 없어 치료를 포기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가수 권인하가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TV 프로그램과 김현식 20주기 특집 다큐멘터리에서 증언하길, 사망하기 10일 전쯤에
두시의 데이트 공개방송을 할 때 원래 처음에 비처럼 음악처럼을 불러야 할 차례인데 '비가 내리고' 한 소절을 부르다 실신하고 각혈도 심하게 했고 본인도 못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노래를 한 곡도 못 부르고 끝냈다. 끝나고 같이 있었던 권인하가 "형, 빨리 병원으로 가."라고 말하는 데 김현식이 "야, 나 괜찮아. 나 녹음실 갈 거야..."라고 말했다. 죽을 때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은 못 버린 셈.
[54]
술을 떠나서도 간이 안 좋은 사람이 88년 2월 재기 콘서트 이후 사망 시점까지 2년 10개월의 기간 동안 유작 앨범 포함 3장의 정규앨범, 2장의 객원보컬 참여 앨범, 1장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녹음한 건 엄청난 강행군이었다.
[55]
한영애는 인터뷰에서 김현식을 볼 때마다 항상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거나, 녹음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만을 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현식이 죽은 뒤 몇 차례 꿈에서 김현식을 본 적이 있는데, 꿈 속에서도 늘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만 나왔다고 한다.
[56]
말리는 어머니께 "무대 위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 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콘서트인 1990년 7월 1일 비오는 날 수채화 대구 공연실황과 그의 마지막 공중파 방송인 1990년 7월 14일 쇼 토요특급 방송 자료가 일부 영상으로 남아있는데, 힘겨워 보이는 몸짓과 절규하듯 갈라지는 목소리에 병세가 악화된 것이 잘 느껴진다. 이후 안타깝게도 그는 극도로 악화된 건강 탓에 결국 7월을 이후로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했다.
[57]
생전 김현식과 각별한 사이였던
동아기획의 사장 김영은 김현식이 제일 애착이 가는 곡이 "그대 빈 들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면서 그 이유로 음악의 가사를 꼽았다. 김영 사장은 이 마지막 유작이 된 곡의 가사에 김현식 자신의 전체적인 반성, 회환,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담긴 가사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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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공교롭게도 김현식이 그렇게나 아끼던
후배
유재하의 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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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하의 회상 등을 살펴보면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일부러 밝게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망하기 얼마 전 권인하의 집에 전화했는데 권인하는 그 때 스케줄 때문에 받지 못했다. 권인하의 아내가 김현식으로부터 전해달라고 들은 말은 "제수씨, 인하한테 잘 먹고 잘 살아라고 전해줘요." 였다고. 이 외에 김종진에게 자신의 아들 김완제를 부탁한다고 하는 등, 타계 직전에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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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명칭
서울시립승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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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분당구 야탑3동. 1991년에 중원구에서 분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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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2010년 사망한
박용하도 묻혀있다. 두 사람 모두 32세로 사망했던지라 이 사실을 언론에서 몇 번 보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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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가요 프로그램에서 또 다른 공동 1위 수상은
SBS 가요 20 1995년 8월 20일 방송분에서
R.ef의 고요 속의 외침,
솔리드의
이 밤의 끝을 잡고가 공동 수상을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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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는 김장훈이
디시인사이드와의 인터뷰에서 해명을 한 적이 있는데, 계속 안한다고 거부했기 때문에 본인은 엄밀히 말하면 펑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단지 사무실과 방송국이 막다른 곳까지 본인을 몰고갔기 때문에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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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훈도 나중에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른 적이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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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영의 데뷔 앨범 수록곡으로, 김현식이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994년 9월에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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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압사 사고로 JTBC의 모든 방송이 방영을 중단하였음에도 히든싱어 김현식 특집은 해당 날짜에 방영된다. 이유인즉슨, 생전 삶과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사랑의 가객 김현식의 음악을 통해 사람들을 위로하겠다는 취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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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상당히 변한 3집 때도 3옥타브 레(D5) 까지의 고음을 깨끗하게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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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 소주 광고로 쓰였던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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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스키함에 더불어 1984년 발표곡 '사나이 노래' 의 굵은 목소리 위주로 창법을 변경했다. 그러나 4집 시절에도 변덕쟁이 라이브, 우리네 인생 등은 3집 목소리로 부르지만 술과 담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서인지 허스키함이 더욱 가미되어 있다. 특히 느린 템포의 곡에 있어 목소리를 굵게 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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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내 사랑 내 곁에의 목소리는 김현식의 몸상태도 고려해야 한다. 죽기 직전인 최악의 몸상태로 녹음을 한 노래였기에 고의적으로 허스키한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다. 녹음된 노래에서도 곡을 다듬었음에도 음이탈이나 심하게 갈라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몇몇 부분은 절규로 느껴질 정도의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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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식으로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이 본인 사후 본인의 스테레오타입으로 고정된 케이스는 또 있다.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입었던 노란 트레이닝복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 쪽은 이소룡의 말년의 몸상태와는 무관하게 단순히 이소룡이 맡은 배역의 콘셉트였으므로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와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힘든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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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중음악계로 치면 김현식과 동갑인
프린스와 비슷해보인다. 다른 점은 김현식은 80년대 대한민국답게 주먹을 쓰는 일이 많았지만, 프린스는 말로써 굉장히 무섭게 혼내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백밴드를 때려서 내쫓았던
제임스 브라운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현식이 자신의 밴드를 내쫓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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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에서 자문위원단장으로 나온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에는
베이시스트로 활동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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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스타에서
김종진 &
전태관이 이 일을 언급했다.
그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김종진과 전태관. 여담으로 김종진과 전태관 본인들은 김현식에게 맞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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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연히 둘은 사촌지간은 아니다. 이런 소문이 날 정도로 둘이 그만큼 친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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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음악을 제대로 배우지 않고 그저 개인이 가진 '끼'와 '삘'로 음악을 하던 가수가 대다수였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이 중엔 악보를 볼 줄도 모르는 가수도 있었다. 그런 시절에 등장한 유재하는 대중음악계에서 보기 드문 '정통 음대 출신 후배 음악가'라는 위치에 있어서 음악계 선배들이 유독 아꼈었는데, 그중에서도 김현식은 특히나 유재하를 아꼈다고 한다. 김종진이나 전태관 등 김현식과 노래를 같이했던 이들은 '현식이형은 후배들을 엄하고 무섭게 이끄는 스타일이었는데, 오직 재하만 그 구타와 집합의 대상에서 항상 열외였다.'고 회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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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유재하의 1집은 당시 흥행은 떨어졌지만 음악계 선배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원로 가수들에게 평가가 굉장히 좋았는데 김현식뿐 아니라 조용필, 이문세 등이 높은 평가를 했으며 당시 한국 대중 음악에서는 보지 못했던 오케스트라를 활용한 세련된 사운드와 신파조와 정반대의 절제된 보컬은 후배들에게 새로운 장르의 영감을 마련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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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교실 이데아가 나오기 전 시점까지 대한민국의 학교는 지금 학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체벌이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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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박철순의
최동원 구타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박철순은 대학 시절, 즉 1970년대에 최동원을 군기를 잡는답시고 야구배트로 허리를 구타하였는데, 그 강도가 허리에 피멍이 들고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매우 심각한 폭행 사건으로 받아들여져 뉴스에도 보도되었고 현재까지도 박철순 최악의 흑역사로 남아있으며, 이후 최동원이 허리 부상 여파로 커리어가 짧게 끝났음을 생각한다면 이 사건 역시 그의 단명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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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쪽도 폭력과 군기로 유명한 등 굉장히 무서운 인물이었지만 실제로는 선수들을 아끼는 면모를 보였다. 당장 선동열과 이종범이 가수로 데뷔하자 직접적으로는 엄청난 갈굼을 했지만 그들 모르게 앨범을 10장이나 구매하였다. 참고로 그 앨범의 판매량은 20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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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블루스의 객원 보컬로서 김현식과 한 무대에 자주 올랐으며 뒤에 영화
노랑머리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2007년 4월 3일 급성 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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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이 노래 부르는 장면은
당연히 과거 영상으로 대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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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K4
에피소드 7에서 심사위원 이승철이 직접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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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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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롤링쿼츠의 보컬
자영은 1회 김현식 가요제에서 2위를 수상했으며, 싱어송라이터
유후 U-who는 2회 김현식 가요제에 블루글래스 명의로 참가하여 2위를 수상했다. 재밌는 점은 두 명 모두 '사랑 사랑 사랑'을 선곡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