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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7:24:02

들국화(밴드)

파일:들국화 로고.svg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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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들국화의 주요 수상 및 선정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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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lguk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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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news20.busan.com/20110223000096_0.jpg
<colbgcolor=#fff><colcolor=#000> 결성 1983년 10월
활동 1985년 ~ 1987년
1995년[1]
2012년 ~ 2013년
장르 , 포크 록
멤버 <colcolor=#000><colbgcolor=#fff> 해체 직전 전인권 (보컬)
최성원 (베이스)
주찬권 (드럼)[2]
전 멤버 최구희 (기타)
조덕환 (기타)[3]
손진태 (기타)
허성욱 (키보드)[4]

1. 개요2. 역사
2.1. 활동 당시2.2. 2집 발표와 해산2.3. 1990년대 ~ 2000년대2.4. 2012년, 기적 같은 재결성과 주찬권의 죽음2.5. 이후
3. 위상과 업적4. 앨범
4.1. 정규 앨범4.2. 비 정규 앨범
4.2.1. 전인권, 허성욱 컴필레이션 앨범 1979~1987 추억 들국화
5. 수상6. 기타

[Clearfix]

1. 개요

1983년 보컬 전인권, 키보드 허성욱 듀오에 베이스 최성원이 합류하여 결성되었다. 1980년대 국내 최고의 위상을 자랑한 록밴드로 손꼽힌다. 사실상 신중현 사단이 만든 록 태동기를 지나 한국식 록 스피릿을 본격적으로 심은 밴드라고 할 수 있다.

1984년 경 최성원이 잠시 빠지고 기타 조덕환이 가입하였고, 얼마 안 가 다시 최성원이 합류하여 이 4명과[5] 후에 정식멤버로 가입하게 되는 드럼 주찬권과 기타 최구희가 세션맨으로 참여하여 1집 앨범을 냈다 이때 만든 1집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대성공을 거두었다.[6] 1집 앨범 발표 직후 주찬권은 정식 멤버로 가입하여 들국화는 4인조가 된다.

1985년에는 기타 최구희와 역시 세션멤버로 있던 손진태[7] 까지 정식멤버로 가입하여 6인조 구성으로 2집을 발매했다. 하지만 2집의 부진 후 해체하게 되었고, 1990년대 중반 전인권 외에 모든 멤버를 교체하여 들국화 3을 냈지만, 평가도 좋지 않았고 주목도 받지 못했다. 이후 2012년 드디어 재결성을 했지만, 2013년 10월 들국화의 드러머 주찬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해산 상태에 이르렀다. 2013년 12월 신곡+셀프 커버 형식의 4집 ' 들국화'를 발매했다.

2. 역사

2.1. 활동 당시

< 최성원 인터뷰>
''원래 존 레논은 인권이가 좋아했었고 나는 폴 매카트니를 좋아한 것은 사실이에요. 1집의 커버를 비틀즈의 Let It Be처럼 만든 것도 인권이의 아이디어입니다.
''

앨범 발매 이전에 방송이 아닌 소극장이나 라이브 카페 같은 곳에서 라이브를 하면서 실력을 다지기 시작했으며, 1985년 1집 들국화를 발표하면서 엄청난 인기와 함께 한국 록의 전설이 되었다. 한국인의 정서를 외국의 록 형식에 잘 담아냈다고 평가받는다.

대한민국 락그룹의 원형격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멤버들은 원래 락커라기보다는 포크송 가수에 가까웠다. 밴드 내 역할분담 역시 4명의 파트가 확실한 게 아니라 보컬과 연주를 번갈아가면서 했다는 점에서 밴드보다는 크루에 좀 더 가까웠다. 이것은 포크 음악가들 문화의 영향이기도 했다.

재미 있는 점은 서양에서도 이런 크루가 밴드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락음악이 현대 대중 음악으로 발전해왔다는 것. 한국의 경우 1980년대에 똑같은 모습이 들국화에서 보였고 그게 결국 한국 락의 직접 시조격이 되었다. 백두산 김도균이 들국화를 평할 때 '락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 밴드'라고 했는데 이는 이러한 부분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1집 음반 안에 라이브 콘서트 할인권과 전국 순회 콘서트 일정표를 넣을 정도로 철저하게 라이브 활동을 고집하였다.

1집의 화려한 애드립을 포함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는 모두 세션으로 참여했던 최구희의 솜씨다. 최성원은 조덕환의 기타실력으로는 앨범을 레코딩하기엔 부족하여 1집에서 '축복합니다'의 간주 정도만 시켰다고 밝혔다. 최성원 인터뷰 이것은 곧 조덕환의 탈퇴로 이어진다.

1집 발매와 동시에 주찬권이 정식멤버로 가입하였고 4명의 멤버에 세션 기타리스트를 포함한 5인조로 진행된 전국 순회 콘서트는 말 그대로 인기 폭발하였다.

2.2. 2집 발표와 해산

파일:external/db.kookje.co.kr/L20120524.22028201901i1.jpg
왼쪽부터 손진태, 허성욱, 최성원, 주찬권, 전인권, 최구희

1집에 참여한 신중현과 뮤직파워,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괴짜들을 거친 당대 탑 클라스의 기타리스트 최구희와 역시 1집의 드러머이며 믿음 소망 사랑 출신의 기타, 드럼, 키보드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멀티플레이어 주찬권[8] 그리고 세컨드 기타리스트로 이미 라이브 앨범 레코딩에 세션으로 참여했고 허성욱의 친구이기도 한 손진태 이렇게 세 명의 새로운 멤버와 함께 2집 녹음에 돌입했다. 새로 가입한 최구희가 두 곡, 주찬권도 한곡을 크레딧에 올린 2집은, 전인권과 최성원의 음악적, 음악외적 견해차이가 불거지면서 1집과 비교하면 어정쩡한 결과물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흘러 재평가를 받긴 했지만, 1986년에 발매한 2집은 6인조라는 최강의 멤버구성에도 불구하고 아쉽지만 당시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어쨌든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전설적인 하드록 밴드의 기타리스트와 드러머의 영입, 또한 두 명의 기타리스트를 좌우로 포진시켰다는 것은 팬들로 하여금 들국화가 앞으로 본격적인 락밴드로 발전할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9]

'매일 그대와' 같은 어쿠스틱한 넘버들도 무시할수 없지만, 들국화의 진면목은 역시 '그것만이 내 세상', '행진' 같은 강렬한 밴드 음악에 있었다. 실제 이 당시 라이브에서는 Led Zepplin, Styx 등의 록 넘버들을 앵콜 곡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2집은 이런 기대와 달리 포크락그룹을 연상시키던 1집보다도 훨씬 말랑말랑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최성원>
"1집 같은 경우는 참 오랫 동안 준비한 것이었죠. 반면 2집에서는 새로 영입한 멤버들과 모든 포커스를 맞출 시간도 충분치 않았어요. 공연을 줄이고 음반에 집중하면 좀 나았을지도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여건이 되지 않았어요. 2집을 녹음하면서 이미 멤버 간에 균열이 생겼어요.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2집 앨범을 좋아하는데…"


결국 들국화는 1987년 해산을 선언하고 전국 순회 고별 콘서트를 끝으로 모든 활동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 멤버로는 결국 다시 모이지 못했다. 전인권은 들국화 해산 직후 김현식, 허성욱과 함께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로 구속되면서 1년간 아무 활동을 하지 못했다.

해산 이후에 전인권은 허성욱과 함께 '추억 들국화' 음반을 발표하여 인기를 끌었다. 기타리스트 최구희는 '괴짜들'을 재결성하여 활동하고 한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는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10]

손진태는 한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고 곧 이어 김현철, 함춘호, 조동익과 함께 '야사'라는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후 손진태는 1990년대 들어서 A급 기타 세션맨으로 맹활약했다.

다른 멤버들도 여러 가지로 음악계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최성원은 나중에 솔로로도 활동하여 ' 제주도의 푸른 밤'이라는 명곡을 남기기도 했다. 음반제작자 겸 프로듀서로도 유명한데, 최성원이 발굴한 가장 대표적 가수가 바로 이적과 김진표. 패닉 1, 2집이 최성원 제작이다. 드러머 주찬권은 이런 저런 드럼 세션에 한때는 신중현 밴드의 드러머로 뛰기도 했으며 무려 6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였다.

전인권은 1988년 솔로 1집을 발표, 타이틀 곡 사랑한 후에와 돌고 돌고 돌고를 히트시키며 솔로로 성공적인 출발을 하였다. 이듬 해인 1989년 2집 '언제나 영화처럼'을 발표하고 콘서트 위주로 활발히 활동했다.

2.3. 1990년대 ~ 2000년대

워낙 80년대에 이름 날렸던 밴드이다보니 들국화의 재결성 이야기는 꾸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1995년 다시 가요계에 복귀한 전인권이 주도하여 3집 앨범을 냈다. 이전 앨범들에 비해 전인권의 보컬이나 밴드의 사운드가 록 정통의 색깔에 충실한 음반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타이틀 곡 '우리'를 비롯해 수록곡들이 팬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들국화 음악의 한축을 담당했던 최성원을 비롯해 주찬권, 허성욱 등 원년 멤버들이 아무도 참여하지 않아 앨범의 퀄리티와 별개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11] 1997년에는 허성욱이 토론토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990년대 후반 무렵부터 나머지 멤버들이 모여서 종종 공연을 갖기도 했다.[12] 특히 2001년 2월 신해철, 박완규, YB, 크라잉넛 등이 참여한 'Tribute to 들국화' 헌정 앨범이 발매되고 이들과 함께 세종문화회관에서 조인트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전인권은 2003년 3집 '다시 이제부터'로 14년만에 가요계에 신보를 냈고 이전과 달리 광고[13] 및 예능 출연을 통해 활발히 활동하면서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2004년에는 정규 4집 '전인권과 안 싸우는 사람들' 을 발매해 여러 방송과 콘서트 무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했으며, 특히 이 앨범의 걱정말아요 그대는 팬들 사이에서 꾸준히 사랑받다가 2015년 응답하라 1988의 수록곡으로 삽입되어 대중적으로 다시 한번 빛을 보게 되었다. 이에 더불어 최성원, 주찬권 등 들국화 기존 멤버들의 솔로 활동도 다시 활발해졌다. 주찬권은 2004년 성남에 라이브카페를 세우고 라이브 공연을 위주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2007년, 전인권이 다시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 5번째 구속이었으며, 전인권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가게 되고 출연금지까지 받게 되었다. 출소 이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모로핀에 중독되어 결국 2010년부터 1년 반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처럼 전인권의 건강이 심각할 정도로 나빠지면서, 들국화의 재결합은 물 건너간 것처럼 여겨졌고 어느 순간부터 전인권의 근황조차 거의 들려오지 않아 많은 팬들이 우려하는 상황이 되었다.[14]

그런데...

2.4. 2012년, 기적 같은 재결성과 주찬권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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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전인권, 최성원, 주찬권 세 멤버가 모여 공식적으로 재결성 기자회견을 가졌다! 특히 전인권은 건강이 심각했던 2000년대 후반경의 모습과 달리 매우 단정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언론에 등장해 많은 팬들과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2012년 8월 MBC 놀러와 출연을 시작으로, 윤도현의 MUST와 콘서트 7080, 불후의 명곡 등 각종 음악 프로그램에 연달아 출연하고 여러 락페스티벌에 출연하는 등 진정한 전설의 귀환을 알렸다. 전인권은 휴식기를 가지는 동안 목상태가 많이 회복되어, 이전보다 훨씬 청량한 사운드를 들려주었으며 원숙미까지 더해져 1980년대와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의 전성기 목상태로 완전히 회귀했다는 평을 받았다.

2013년 초부터 전국투어 콘서트를 하고, 여러 락페 등을 돌며 새 앨범 발매 계획을 알렸다. 팬들에게 축제처럼 즐길 앨범이라며 앨범 발매에 대한 기대를 한 껏 높혔고, 록씬에서도 들국화의 새 앨범에 대한 기대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10월 20일, 드러머 주찬권이 자택에서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 근 30년만에 재결합에 성공, 열심히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순간 일어난 비극적인 죽음이라 들국화 멤버들과 팬들은 통한을 감추지 못했다. 주찬권 회고 영상 빈소에는 윤도현, 김C, 김장훈, 박완규, 바비킴, 배철수, 권인하, 김그림, 신대철, 유현상 등이 조문했으며 발인식에는 최성원과 전인권이 참석하여 마지막 길을 지켰다.

2개월 뒤인 2013년 12월 3일, 신곡인 '걷고, 걷고' 가 먼저 선공개되었고 6일 뒤인 9일 정규 4집 앨범 들국화가 발매되었다. 주찬권은 불행 중 다행으로 생전 드럼 파트 녹음을 마친 상태였고 이 외의 세션 멤버로는 하찌, 함춘호, 한상원, 정원영, 김광민 등 국내 음악계에서 내로라하는 인원들이 참여했다. 2CD로 구성되어 있는데, 1CD에는 타이틀 걷고, 걷고를 포함한 신곡이 들어있으며 2CD에는 리메이크 곡들이 들어있다.[15] 마침 앨범 발매일이 주찬권의 49재여서 49재 추모식에 최성원과 전인권을 비롯한 팬들이 참석하였고 주찬권의 영전에 4집 앨범을 바쳤다.

4집 앨범을 발매 이후 전국 투어 콘서트와 방송 출연 등 활발히 활동할 계획이었으나, 주찬권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이런 계획은 백지화되었고 앨범 발매 외에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대신 유재석, 유희열, 황정민, 장기하, 정찬 등이 '응답하라 들국화' 시리즈를 통해 4집 앨범에 대한 홍보를 맡는 기획은 진행했다.

2.5. 이후

주찬권의 죽음과 4집 앨범 발매 이후 들국화는 다시 해체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인권은 자신의 이름을 필두로 한 전인권 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위에 서술된 것처럼 2016년 자신의 4집 타이틀 곡 걱정말아요 그대의 재히트로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활발한 방송활동과 공연활동을 하고 있다. 최성원은 다시 제주도로 낙향해 2016년 9월까지 라디오 '제주도의 푸른 밤 최성원입니다' 의 DJ를 맡았다. 2017년 아이유가 자신의 리메이크 앨범에 제주도의 푸른 밤을 수록했는데, 이 때 아이유가 직접 최성원에게 전화를 걸어 리메이크 허락을 구했다고 한다.

전인권은 뉴스룸에 출연해 "들국화의 재결합은 없다." 라며 향후 재결합 가능성을 확실히 부인하였다. 이는 최성원과의 불화가 큰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3. 위상과 업적

현재의 한국 록 음악을 정립한 밴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에 있어 이들이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신중현, 유재하, 김현식, 조용필, 산울림, 송골매, 김수철, 서태지와 아이들[16] 등과 함께 한국 대중 음악사의 판도를 뒤바꿔놓은 그룹. 그들의 음악세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곡으로는 ' 그것만이 내 세상\'과 ' 행진\'이 있다. 암울하고 어두웠던 지난 날들을 받아들이고 담담하게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표현한 명곡들이라 할 수 있겠다.

여러모로 한국 록이 '무엇을' '어떻게' 노래해야 하는지를 정의한 그룹이다. 기존 한국 음악의 소위 '뽕삘'(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이라 불리던 것에서 벗어나, 해방 후 새로운 형식의 한국 감성으로 각광받던 포크 음악을 잘 계승하면서도 정형화된 록 음악의 형태를 도입했고, 민주화 운동 시기 빼놓을 수 없었던, 저항 정신도 갖춘 완전체라고 보면 된다.

물론 해외의 록 마니아나 요즘의 록 청자들이 들으면 당장 서구의 7080 로커들 같은 하드함이나 혁신성은 부족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의 음악적 기반이 포크 음악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어서 그렇지, 당장 각 멤버들의 연주력이나 보컬 능력, 곡의 구조나 요소들을 보면 순수하게 '록 밴드'로서만 평가하여도 충분히 평균 이상이며, 거기에 '80년대 한국 음악가'라는 가치가 더해져 전설적인 밴드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사실 이른바 '민족적' 뮤지션들 중 상당수는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평가가 상당히 미묘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당장 동아시아 삼국에서만 봐도 일본의 ' 핫피 엔도'나 중국의 ' 최건' 같은 뮤지션들은 높은 평가를 받지만, 현대의 젊은 청자들은 그 평가에 대해 상당히 의구심을 갖고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나 록이라는 범주를 넘어서 그들이 자국의 음악 시장에 미친 영향과 그 역사를 본다면, 그들이 왜 전설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 꽃밭의 꽃은 평범해 보이지만 사막의 꽃은 유독 아름다운 법이니까.

들국화의 경우, 한국 음악 시장에서 록씬은 이미 이전부터 들국화 전성기 당시까지 신중현, 산울림, 송골매, 김현식 등의 걸출한 뮤지션이 있었고, 포크 계에도 세시봉 4인방, 한대수, 양병집, 김민기, 조동진, 이장희, 정태춘, 어떤날 등등 상당한 거장들(다른 장르까지 따져보면 훨씬 많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해방 후 새로이 태어나는 한국적인 음악, 즉 '현대의 한국음악'이 서서히 형성되었는데, 들국화는 당시 그 '현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이루고 있던 큰 두 갈래인 록과 포크를 모두 포괄하는 아티스트였고, 때문에 두 갈래로 나뉘어져있던 그 '현대의 한국 대중음악'을 직접 완성했고 볼 수 있다.

비틀즈가 기존의 로큰롤에 포크음악의 감수성과 인도음악 등 제3세계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퓨전시킴으로써 기존 록음악의 표현언어를 확장시키고, 비틀즈만의 색깔을 가진 음악세계를 창조했 듯이, 한국에서는 들국화가 그러한 장르적 융합을 통한 독특한 음악을 이루어냈다. 들국화의 음악은 록이면서 동시에 포크이기도 했고, 연주력이나 선율도 훌륭했으며 시대적 상황까지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기원을 쫓아가면 결국에는 '한국적인 음악'이라는 결론[17]에 이르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과도기 속에서 마침내 완성된 '현대 한국음악의 감성'이 '록'이라는 일종의 장르 형태로 완성되어 등장한 최초의 사례가 들국화라는 것. 또한 당시의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대상 또한 확고해지면서 6070에서의 포크 음악 속 '저항정신'이 세대교체를 거치며 록 음악으로 이전되었고 당시 록씬의 핵심이었던 들국화는 시대상과 민중들의 바램까지 반영되어 있는 밴드였다.

젊은 청자들이 들국화를 들으며 흔히 생각하곤 하는 "이게 왜 '록'이지?"하는 궁금증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들국화는 록 음악이 한국적으로 변형된 결과물이라기보단, '한국 음악'이라는 존재가 록의 형태로 표현됐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며, 그렇기에 훨씬 부드럽고 대중친화적인 형태로 접근한 것이다. 비틀즈가 뒤로 갈수록 정형화된 록의 형태를 벗어나 '탈 장르화된 총체적인 음악'에 접근했음에도 여전히 록 밴드로 취급받듯이, 들국화의 음악 또한 그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최성원, 전인권, 허성욱 초창기 멤버 셋의 출발이 포크였을 뿐, 당대의 내로라하는 하드락밴드 출신의 드러머 주찬권과 기타 최구희가 합류하여 들려주는 사운드를 들어본다면 '이게 왜 락이냐'라는 물음은 애초에 나올 수가 없다. 드럼소리만 듣는 사람이 어딨냐? (다만 들국화의 활동 시기시가 전 세계적으로 메탈 음악이 유행했던 때임을 감안해 보면 그런 부분에서는 상당히 유한 음악을 들려줬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해방 후 받아들여진 서구의 대중음악들이 서서히 한국화 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현대의 한국음악'이 서서히 형성되어갔고, 들국화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며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들국화 이후 '현대 한국의 대중음악'이라는 큰 틀 아래 여러 장르 간의 공통된 특징이 발현되기 시작했고, 동시에 1980년대 격동의 시대상까지 반영되었으며,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상징이자 신시대, 이른바 현대 한국 음악의 시작을 고하는 아티스트가 된 것이 바로 들국화라고 말할 수 있다.

4. 앨범

4.1. 정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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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3들국화.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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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9.01

1986.09.01

1995.04.01

2013.12.06

4.2. 비 정규 앨범

4.2.1. 전인권, 허성욱 컴필레이션 앨범 1979~1987 추억 들국화

파일:external/image.melon.co.kr/4825_org.jpg
1979~1987 추억 들국화
1987.07.20

5. 수상

6. 기타

이외에도 '매일 그대와, '내가 찾는 아이', '제발', '아침이 밝아 올때까지' 등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곡들. 행진은 전인권의 곡이고 나머지 곡들 대부분은 최성원의 손을 거쳤다.

실제로 이 밴드가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리더는 최성원이었고 심지어 조덕환은 연주 못하고 노래도 못한다고 쫓겨날뻔 한 적도 있을 정도. 그러나 들국화 1집 이후 히트곡은 행진이었고, 전인권의 카리스마적인 보컬에 의해 밴드의 균형이 바뀌면서 해체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비틀스와 매우 비슷한 길을 겪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들국화의 명곡들이 배경음악으로 나와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극 중에서 대중문화와는 담 쌓고 사는 최택이 들국화의 팬이라는 언급이 자주 나온다.

콘서트 7080에서 전인권이 밝히길 '들국화'란 밴드 이름은 택시 타고 가다가 택시기사님께 의견 청취를 듣고 정했다고 하며 코스모스, 들장미 등을 제치고 기사님께서 들국화가 괜찮다고 하셨다고. 그 들국화란 이름도 마침 허성욱이 씹던 해태제과의 껌 이름이었다.

[1] 다만 1995년의 활동은 들국화로서의 활동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들국화 3 문서 참조. [2] 2013년 10월 20일 오후 5시경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였다. 향년 58세. 사인은 심장마비로 인한 돌연사이다. [3] 2016년 11월 14일 새벽 4시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십이지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4세. [4]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향년 36세. [5] 당시 멤버들의 학력이 상당히 특이한데, 보컬 전인권은 고등학교 중퇴, 최성원과 조덕환은 고려대 졸업, 허성욱은 추계예술학교 졸업으로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6] 1집 레코딩 당시 최구희와 주찬권은 리허설을 끝낸 후 본격적인 녹음에 들어가려 했는데, 당시 녹음을 맡았던 서울스튜디오 최세영 기사가 녹음 다 끝났으니 이제 나오라고 했다고 한다. 즉, 1집의 일렉기타와 드럼 녹음은 리허설이 그대로 레코딩으로 나와버렸다. [7] 합류 순서로나 나이로나 막내다. 내가 찾는 아이에서도 허성욱이 멤버들 이름을 부를 때 다른 이들은 모두 다 이라고 부르는데 손진태만 유일하게 '진태'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8] 그는 한때 고교생 최구희의 기타 스승이기도 했다! [9] 이 당시는 전세계가 하드록, 헤비메탈의 전성기이기도 했고, 라이브에서 가끔 선보였던 최구희와 손진태의 트윈기타 플레이는 경쟁력이 충분했다. [10] 10년에 한번 정도 세상에 나와 연주도 하고 레코딩도 하지만 대부분 비상업적인 활동이다. [11] 이 때문에 들국화의 올드 팬들은 3집을 들국화의 앨범을 치지 않은 경우도 상당수다. [12]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참여하지 않은 조덕환과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생활 중이었던 최구희는 참여하지 않았다. [13] 스카이라이프 CF에서 남긴 "인권이 라이프!"라는 대사가 유명한다. [14] 참고로 전인권의 정신병원 입원은 헤어져살던 그의 아내와 들국화 팬클럽 임원들 몇 명이 주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15] 들국화의 1~2집 수록곡을 포함해 전인권의 솔로곡인 '사랑한 후에', '걱정말아요 그대', '다시 이제부터' 와 최성원의 솔로곡 제주도의 푸른 밤, '이별이란 내게 없는거야' 가 들국화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어 수록됐다. [16] 참고로 서태지는 들국화의 열성팬이기도 하다. 인생 명반을 꼽을 때 들국화 1집을 꼽을 정도. 서태지는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 출신인데 음악 스타일이 다른 들국화 1집을 인생 명반으로 꼽은 것을 보아 얼마나 저 앨범이 명반인 지 알 수 있다. [17] 해외 음악의 영향을 아예 받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합쳐져 해외에서는 찾기 힘든 독특한 형식이 되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