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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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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3. 진평왕 시기4. 선덕여왕 시기5. 진덕여왕 시기6. 태종 무열왕 시기7. 문무왕 시기

1. 개요

김유신의 행적에 대한 대부분의 기록은 고려 중기 김부식이 주도해 편찬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안에서도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본기, 김유신 개인의 생애를 서술하는 열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시대를 다루는 본기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됐다는 평가를 받지만 김유신이란 개인을 글의 주인공으로서 서술하는 열전의 경우 현손 김장청이 쓴 김유신행록 10권 내용에서 터무니없는 내용은 빼고[1] 3권으로 요약한 것으로 김부식이 과장을 거르고 줄인 내용이라고 쓰고 있음에도 본판이 행록이라 여전히 과장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같은 삼국사기 안에서도 백제본기, 신라본기와 교차검증을 해 봐도 안 들어맞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라 하는데 원래 본기에 적을 수 없는 열전 또는 본기에 적기에는 분량이 너무 신하 위주일 때는 당연히 열전에만 적는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의 김유신전에서 전공 부분을 모두 왜곡으로 볼만한 증거는 아직 없다. 다만 김유신 열전 기록 가운데 주로 초반부의 삼국유사 신이편 찍고 여동생 시집보내는 부분 같은 것은 열전에 쓸 내용이 맞지만 김유신의 행동으로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국가간의 전쟁 기록이라는 점이다. 국가의 전쟁 기록이 개인에게만 걸려 있다고 본편에 안 쓰고 열전에만 쓰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문제가 있다. 실제로 김유신 열전을 보면 진덕여왕 때 백제를 침공해서 2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본기에는 없다. 이 때문에 본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열전에만 기록된 부분을 그대로 믿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김유신을 제대로 파악하고 평가하려면 반드시 유관 사료를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점검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은 열전의 원전이었을 현손 김장청이 쓴 김유신행록이 쓰인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열전에 김유신의 후손 김암(金巖)이 일본에 779년 사신으로 갔다온 사실이 기술되어 있으므로[2] 김유신행록의 저술 시점은 8세기 말을 상한으로 하며 흥덕왕 10년(835)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증한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정작 열전에는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두 시점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3] 혜공왕 대인 770년에 일어난 김융(金融)의 모반 사건 이후 김유신 후손 가문은 큰 타격을 받았다. 간신히 779년에 김융은 억울하게 죽었다고 인정되어 복권되긴 했으나 9년간 역적 취급을 받은 셈으로, 김장청을 비롯한 가야계 후손들은 신라 정계에서 점차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이에 가문의 위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나라의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던 조상 김유신의 능력과 역할을 의도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많은 전쟁 가운데 승리한 사실만을 가려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을 고전시킨 백제 장군 계백과의 싸움이 신라본기에는 보이는 반면 김유신 열전에는 실리지 않은 것도 그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아들인 장수왕이 찬양하기 위해 작성한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4]

이런 삼국사기 열전 기록의 객관적이지 못한 관점을 주 근거로 김유신의 생애 전반에 대해서도 패전을 숨기고 작은 승리의 과장으로 점철되었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도 존재하는데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의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가 있었다. 그러나 김유신이 생존했던 당대에 이미 중국과 일본 등 신라 바깥까지 김유신의 명성은 당대 동아시아 세계에 걸쳐 널리 알려져 있었고[5] 김유신의 적이기도 했던 이들의 이러한 반응은 신라에 사는 후손의 과장으로만 만들어질 수만은 없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패전한 사실이 당연히 있었을법한데도 이를 전혀 열전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열전이 지닌 사료상의 명백한 한계이며 고려 중기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춰 유교적 시각으로 재정리되기까지 했으니 이런 점들을 고려하고 사료 비판은 철저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지만 열전이 비록 객관적이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목적으로 작성된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서 찬양을 걷어내고 역사적 사실을 추출할 수 있듯이 후손의 과장이 들어갔다고 해도 무작정 덮어놓고 무가치한 사료라고 폄훼하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본기나 기타 기록으로 충분히 교차 검증과 설명이 가능한 공적은 가려낼 필요가 있다.

2019년 중국에서 최근에 공개된 금석문 사료인 '풍사훈묘지명(馮師訓墓誌銘)'의 내용에 따르면 당나라가 백제 정벌군 편성 직전인 659년부터 이미 소정방에게 당나라 내부에서 '계림도대총관' 직위까지 수여했음이 밝혀지면서 당나라는 이 때부터 백제와 함께 신라까지 기습할 준비를 해왔음을 증명하는 당대의 자료가 나타났다. 이 발견은 최근 김유신 열전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유행이 일던 추세와 반대로 김유신 열전의 정확성이 검증된 사례가 되었다.

날짜는 전부 음력이다.

2. 출생

법흥왕 19년인 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여 진골로 편입된 금관국(금관가야) 구형왕의 증손자로, 조부는 김무력[6], 아버지는 김서현, 어머니는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 만명부인이다. 만명부인은 중매도 서지 않고 김서현과 선을 넘었다가[7] 열전에 따르면 서현이 만노군(현 충청북도 진천군) 태수로 떠날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인 숙흘종에게 들켜서 별채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문에 벼락이 쳐서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릴 때 몰래 빠져나와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부부 둘 다 태몽을 꾸었고, 만명이 20달을 품은 끝에 김유신이 태어났다.[8]

김유신 열전에서 만명부인은 황금 갑주로 완전무장한 소년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품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고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이후 태어난 아기의 등에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7개의 점이 있어 칠요(七曜)의 정기를 품었다고 여겼다 한다. 김유신의 이름은 아래와 같은 이유로 지었다고 한다.
내가 경진(庚辰)일 밤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로써 이름을 지어야 하오. 그렇지만 <예기(禮記)>에 따르면 날짜로써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9]고 하던데, '경(庚)' 자는 '유(庾)' 자와 서로 비슷하며 '진(辰)'과 '신(信)'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옛 현인 중에 유신(庾信, 512~580)[10]이라는 이름도 있으니 어찌 그렇게 이름 짓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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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상}}}

김유신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의 가문은 조부 김무력, 아버지 김서현 시절 일찍부터 유학을 중시하고 유교적 왕도정치를 추구하는 성향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금관국 계통 3대의 이름을 보면 전원 음과 훈을 모두 감안한 한문식 이름인데, 당시 다른 대부분의 신라 귀족들의 이름은 한자를 단지 음차해 순수하게 신라 고유어식 이름을 짓거나[11] 불교적 이름을 짓던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이런 면에서는 진지왕 이후 왕위에서 멀어진 김춘추 집안 역시 가족 이름을 한문식으로 지은 것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김유신 장군의 태몽과 탄생 설화에서는 "탄생하면서부터 용모가 비범하고 기골이 장대하였다. 등을 보니 사마귀가 칠성처럼 박혀 있어서 기이했고, 임신 기간이 20개월이라는 모든 점으로 보아 보통 사람과는 다르기에 훌륭한 인물인 영웅이 태어난 것이다."라는 설화도 있다.

출생지인 충청북도 진천군에는 현재 김유신의 사당인 길상사(충청북도 기념물 1호)와 김유신의 탄생지와 태실(사적 제414호)이 관련 유적으로 남아있다.

3. 진평왕 시기

태어난 뒤 유년기 시절 어느 즈음에 왕경으로 온 것으로 추정된다. 609년(15세)에 정식으로 화랑이 되었고 그를 따르는 낭도 무리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칭했다. 이 용화(龍華)는 불교 미륵 신앙에서 미래의 이상세계를 불러올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에 내려온다는 데서 따 온 것이며, 화랑단의 이름을 용화향도로 지은 것을 어린 시절의 김유신이 현실의 부조리를 개혁하고 이상사회를 지향하고자 생각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611년(17세) 중악[12] 석굴에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비니 난승(難勝)이라는 노인이 찾아왔고 김유신이 간청해 비법을 전수받았다.

612년(18세) 보검을 들고 열박산(咽薄山)에[13] 들어가 천관(天官)에게[14] 비니 3일째 되는 밤에 보검에 신이 허(虛)수와 각(角)수 두 별자리의 빛을 비추어 영기를 내렸다.[15][16] 또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때 검술을 익혀, 화랑의 지도자격 지위로 추정되는 국선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스파이 백석이 김유신이 이끄는 화랑도 무리에 낭도로 잠입했다가 3명의 여신의 도움으로 이를 간파하는 설화적 일화를 남기고 있는데, 10대 후반~20대 시기----의 행적에 뚜렷한 기록이 많지 않지만 화랑으로 수련하면서 활발히 활동했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629년(35세) 8월 대장군 용춘, 아버지 김서현과 함께 낭비성 전투에 참전했는데[17] 고구려군의 역습을 받아 아군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듣건대, '옷깃을 바루면 갑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18]고 하니 내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다!"[19]

본인이 직접 나서서 세 번 적진을 들어갔다 나오며 적장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오는 전공을 세웠다. 이에 사기가 오른 신라군이 낭비성을 공격했고 성은 결국 항복했다. 고구려 본기에서도 김유신에게 성이 함락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엄연히 군대를 지휘하는 귀족 자제의 신분인 그가 솔선수범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굉장히 위험한 역할을 도맡아 병사들에게 동기부여를 잔뜩 넣어준 것인데 훗날 김유신의 지시로 비령자(丕寧子), 반굴, 관창 등이 비슷한 작전을 앞장서 수행해 목숨을 잃고 그 대가로 지지부진하던 정세에 지친 병사의 사기를 끌어올린 것으로 봐서는 젊을 적 자신의 경험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면 알겠지만 김유신 열전에는 화랑이던 18세 때 이후 낭비성 전투에 참전하는 35세 때까지의 일대기가 전해져오는 기록이 거의 없는 편이다.[20] 특히 김유신은 비록 비주류에 속하는 가야 계통의 귀족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진흥왕의 동생인 김숙흘종의 외손자라서 엄연히 신라 왕가와 가까운 인척에 해당하는 인물임에도 낭비성 전투 때까지는 뚜렷한 행적이나 군공이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0대 중반에 '데뷔전'을 치렀다는 이야기인데 위에 상술되었듯 삼국유사에 남은 각종 설화가 김유신의 이 공백기 기록을 메꿔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역시 속단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즉 의외로 김유신도 나름대로 후대의 강감찬이나 권율처럼 대기만성형 인물이었다고 볼 여지도 있는 셈.

4. 선덕여왕 시기

642년(48세) 7월 백제 의자왕이 친정하여 미후를 비롯한 신라 서쪽 40여 성을 함락시키더니 8월 장군 윤충이 1만을 이끌고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대야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21] 부부가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를 원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을 자처했다.[22] 그러나 고구려는 김춘추를 붙잡아 가뒀고 그의 구원 요청으로 대장군 김유신이 1만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자 신라군의 움직임을 감지한 보장왕이 김춘추를 풀어주면서 사태는 일단락된다. 고구려 본기에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이 신라의 사신이 원군을 청했다는 기록만 있는데 이 때의 상황에 대해 열전에서 김유신은 김춘추가 60일이 지나도 고구려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미 해를 입은 것이니 원수를 갚을 것이라 맹세했고 이후 기간이 지나도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3천의 병사를 준비하고 기일을 잡았다는 것으로 행적에 상세한 차이가 있다.

김춘추가 돌아온 뒤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23] 군주(軍主)가 되었다. 백제의 동진 방어선 대야성을 잃었으므로 압량주와 김유신이 방어선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압량주는 위치상 경주와 가까운 지역으로 근기(近畿) 지방(신라의 수도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김유신은 對백제 전선 사령관이자 수도권 방위사령관에 해당한다.[24]

644년(50세) 9월 알천의 후임으로 대장군이 되어[25] 백제의 7개 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이 때 점령한 성은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인데 지금의 고령군, 의령군, 구미시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26] 2년 전 빼앗긴 대야성 인접 지역들을 일부 탈환하면서 급한 불을 끈 것이다. 하지만 643년에 고구려, 백제의 협공을 당하던 신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백제군을 겨우 철군시켜 전쟁을 중단시킨 상태에서 신라가 먼저 도발한 꼴이 되었기에 이후 신라는 다시 백제의 침공을 당하게 된다.

645년(51세) 정월에 복귀했지만 왕을 알현하거나 가족을 만나기 전에 백제가 정전 상태에서 신라에게 선제공격을 당한데 분노해서 반격해왔고 다시 전선으로 나가 백제군을 물리치고 수급 2천을 베는 전공을 세웠다. 3월에 복귀하여 왕은 알현했지만 가족은 만나지 못했는데 백제군이 다시 공격해왔다. 김유신은 이번에도 집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전선으로 이동했는데 열전에서는 우리 집의 우물 물맛이 예전과 그대로라는 유명한 일화가 나온다. 이후 전황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열전에서는 김유신의 부대가 접근하자 백제군이 물러갔다고 적고 있다. 5월 신라는 당나라의 원군 요청으로 병사 3만을 북진시켰고 백제는 이 틈에 7개 성을 재점령한다. 백제 본기에는 직후 김유신이 재침공했다고 적혀 있고 이후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언급이 없는데 신당서에는 백제가 이후 10여 성을 더 점령했다고 나오기에 김유신이 오히려 참패를 당했을 정황이 있다.

647년(53세) 정월 대신(大臣)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자 왕[27]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 비담의 난). 반란군은 경주 인근 명활성에 주둔하고 김유신이 주도하는 근왕군은 월성에 주둔한 상태로 10일간 공방전을 벌였는데 그러다 큰 별 하나가 월성에 떨어지자 비담은 "내가 듣기로 떨어지는 별 아래에는 반드시 피 흘림이 있다 했다. 이는 틀림없이 여주가 패할 징조다!"면서 병졸들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이에 선덕여왕이 몹시 두려워하자 김유신이 나서서,
길함과 흉함은 정해진 게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28] 옛날에 주왕 붉은 새가 있었음에도 망했고 노나라 기린을 얻었음에도 쇠하였는데, 고종[29] 장끼가 우는데도 흥했고 정공은 용(들)이 싸웠지만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니 덕이 요사함에 이김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의 변괴라는 건 두려워 할 것이 아니니,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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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 김유신 상}}}

라고 말하며 진정시키고는 불 붙은 허수아비에 달아 날려 별이 다시 떠오른 것처럼 연출하고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떴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이후 장졸들을 독려하여 몰아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났으며 이를 추격하여 비담을 참수하고 그 9족을 멸했다. 한편 본기에는 비담 등이 반역을 일으켰으나 실패했으며 연루되어 죽은 자가 30명이라는 내용뿐이고 상기의 구체적인 전황은 김유신 열전의 기록이다.

5. 진덕여왕 시기

647년(53세) 정월 8일, 아직 비담의 난이 진행 중에 선덕여왕이 승하하였으므로 진덕여왕이 즉위하고 비담의 난에 대한 사후처리가 있었다. 10월에 백제 장군 의직이 보기(步騎) 3천으로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3 성을 공격해, 김유신이 보기 1만으로[30] 구원했지만 오히려 위기에 빠졌다. 이때 김유신이 휘하의 비령자(丕寧子)라는 인물에게 지시, 비령자는 불리한 전황에서 앞장서 분전했고, 비령자의 아들 거진(擧眞), 가노(家奴) 합절(合節)과 함께 싸우다 전사했다. 귀족 지휘관의 솔선수범에 용기를 얻은 신라 군사들이 앞다투어 진격해 수급 3천을 취했다. 백제본기에서는 백제군이 다 죽고 의직 혼자 겨우 살아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열전에서는[31] 비령자의 분전을 김유신이 명령했기 때문인 것으로 적어 놨다. 또한 합절이라는 인물은 열전에만 기록이 있다.

648년(54세) 3월 백제 장군 의직이 서부전선을 침범해 요거(腰車) 등 10개 성을 빼앗아갔다. 압독주(押督州)[32] 도독(都督) 김유신이 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협격하자 백제군이 패주했다. 백제본기에서는 4월에 옥문곡(玉門谷)에서 두번 싸워 김유신에게 크게 패했다고 적고 있다. 여기까지는 본기 기록.

압량주 군주(押粱州軍主) 유신이 백제와 결전을 치를만하다 판단해 대량성(大梁城, 대야성의 다른 표기)에서 백제군과 전투를 치렀다. 대야성은 이미 백제에 빼앗긴 상태였으므로 신라에서 먼저 백제를 침공한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미리 정보를 입수해 방비하고 있던 차였고, 신라군은 이기지 못해 도망치는 척하며 후퇴해 백제군을 옥문곡까지 끌어들여서 복병으로 물리쳐 1천 명을 포로로 잡거나 죽이고, 장수 8명을 포로로 만들었는데 이 장수들을 앞서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가 챙겨간 김품석, 고타소 부부의 유골과 교환했다. 기세를 몰아 악성(嶽城) 등 12개 성을 함락시키면서 적병 2만명의 수급을 베고, 9천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렸다. 그 공로로 이찬(伊飡),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에 임명되었다. 다시 진례(進禮) 등 9개 성을 공격하여 9천을 목베고, 6백을 사로잡았다. 이상이 열전 기록이다.[33]

649년(55세) 8월 백제 장군 은상이 정병 7천을 지휘하여 석토(石吐)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34]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진춘, 죽지, 천존 등이 맞서싸웠지만 열흘이 지나도록 어쩌지 못했다. 이에 김유신은 도살성(道薩城) 밑에 진을 세우고 진중에 원군이 온다는 거짓정보를 흘렸다. 은상의 첩자가 이를 은상에게 전했고 은상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들이쳐 장사 백명을 사로잡거나 죽이고 군졸 8980명을 베고 군마 만필과 수많은 병기를 노획했다. 확실히 대승이었는지 다음해 6월 당에 보낸 사신을 통해 승전 보고까지 올렸다. 물론 여기서 메인은 치당태평송을 지어 올리는 거였지만... 열전에서는 이것도 1년 전의 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여기에 회군 중 백제의 좌평(佐平) 정복(正福)이 1천명을 데리고 투항했는데 김유신이 대인배(?) 같이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었다는 대단히 쓸데없는 사족을 달아놨다.

648년과 649년에 벌어진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7세기 전반기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 양상은 백제의 선제 공격과 이에 대한 신라의 방어로 이어졌다. 이는 양국의 군사력 내지는 국력에서 백제가 우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648・649년 전쟁에서는 신라가 적극적으로 기획하여 백제를 선제 공격하기도 하고 크게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647년에서 648년 사이 신라측 사료에 기록된 백제의 피해들을 정리해 보면, 김유신 열전에는 총 42,600명, 신라본기에는 12,000여 명에 달한다. 기록상 과장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의자왕 즉위 이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분명하다.[35] 이에 신라가 642년 대야성전투의 패배를 설욕하였으며, 통일전쟁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36]

6. 태종 무열왕 시기

654년(60세), 마지막 성골 혈통인 진덕여왕이 사망한다. 열전에 따르면 이찬(伊飡) 알천과 논의하여 진골 출신의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본기에서는 원래 알천이 신하들에게 섭정으로 추천받았으나 알천이 자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춘추에게 양보한 것으로 나온다. 이 당시 알천은 삼국유사의 화백회의 기록을 토대로 김춘추, 김유신 세력과 권력의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록 그대로 이미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아 양보했을 수도 있고,[37][38] 혹은 섭정으로 추대된 것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 이미 권력구도상 차기 왕으로 김춘추가 오를 것은 거의 내정되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춘추는 알천의 양보를 유교적 선양 의식처럼 세 번 겸양하다가 마지못해 왕위에 올랐다.[39]

655년(61세) 정월 고구려, 백제, 말갈의 연합군이 신라의 북부 전선을 공격해 33개 성을 점령하였다. 신라 본기와 고구려 본기 기록으로는 1월인데 백제 본기 기록에는 8월에 30여 성이라 되어 있다. 신라가 당에 구원을 요청하자 당이 고구려를 친 것을 보면 고구려가 주도해 말갈과 백제를 끌여들인 침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취도 열전에 따르면 655년 백제가 조천성(助川城)에 쳐들어 오자 신라도 군사를 일으켜 출전하였으나 결판이 나지 않았고, 삼천당이라는 부대를 보냈다고 되어 있으며[40] 김흠운[41] 열전에 따르면 김흠운이 낭당대감에 임명되어 조천성을 공격하다가 전사했다고 되어있다.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655년 9월 김유신이 도비천성(刀比川城)[42]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위 기록들과 655년 9월 이전 김유신의 기록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655년 1월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이 신라의 북부 전선을 공격해서 수 개월 동안 싸워 조천성을 포함한 30여개의 성을 함락한 것으로 보이며, 김유신은 아마 1월 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압량주에서 북부 전선으로 이동하였으나 참패하여 30여 개의 성을 빼앗겼거나, 30여개의 성을 빼앗긴 후 지원군을 이끌고 북부전선으로 이동하였고 9월 도비천성만 간신히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유신이 백제의 좌평 임자의 종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급찬 관등의 신라인 조미압(租未押)을 통해 임자와 접촉해서 백제의 정보를 빼냈다고 한다.

10월 무열왕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딸인 지조(智照)와 혼인했다.

656년 압독주[43]의 군주 자리에 김인문이 대신 취임했다. 아마 초토화 된 북쪽 국경을 수비하러 갔었을 듯 하다.

660년(66세) 정월 상대등 금강(金剛)이 사망하여 김유신이 그 후임으로 귀족회의의 의장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가야계 비주류 귀족으로 시작한 김유신이 귀족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3월에 소정방이 수군과 육군 도합 13만을 이끌고 서해를 횡단해 백제 공략을 시작했다. 소정방은 7월 10일까지 신라군과 당군이 합류하여 함께 사비성을 치기를 원했고 무열왕은 김유신 등에게 5만 군사를 주어 호응했다. 이에 황산벌에서 백제 장군 계백 결사대 5천이[44] 험지를 선점하고 세 곳에 군영을 설치한채 신라군을 요격했다. 김유신의 신라군은 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네 번 싸웠지만 승리하지 못했고 병졸들의 힘만 소진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을 보냈지만 장렬히 전사했다. 이번엔 장군 김품일이 아들 관창을 보냈고 이번에도 사로잡혔다.[45] 계백은 어린 관창을 살려보냈지만 관창은 다시 돌격해왔고 결국 그 목을 말안장에 메어 돌려 보냈다. 김품일이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을 자랑스러워하자 신라군이 비분강개하였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 상영(常永) 등 2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백제 본기에는 계백의 군사 수, 네 번 싸워 이겼다는 것, 계백의 전사만을 기록하고 있다.[46]
이 날에 소정방(蘇定方)은 부총관(副摠管)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의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서 크게 깨뜨렸다. 김유신(金庾信) 등이 당(唐)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한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인 김문영(金文潁)을 군문(軍門)에서 목을 베려고 하였다. 김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大將軍)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한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고 하는데, 나는 죄가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라고 하였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섰는데,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뛰어나왔다. 소정방의 우장(右將)인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의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라고 하자 소정방이 곧 김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 7월 9일 소정방이 기벌포에 도착하다. #

7월 11일 김유신 등이 당나라 군영에 도착했을 때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늦게 합류했다는 이유로 신라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47]의 목을 베려 하였다. 김유신이 노하여, "반드시 먼저 당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며 군문에서 도끼를 들고 서자, 소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이 소정방을 설득해 소정방이 결국 김문영을 곧바로 풀어주었고 이 일은 불문에 부치게 된다.

7월 12일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포위하는데 소정방이 움직이지 않으려는걸 김유신이 설득해 공조가 이루어졌다. 13일 왕자 부여융이 항복하고, 18일 웅진성으로 피난한 의자왕도 나당연합군에 결국 항복했다.

본기에서 중요하게 기록된 황산벌 전투 등을 열전에서는 전부 생략하고 '신라군이 당군과 협력해서 백제를 멸망시켰다. 김유신의 공이 컸다' 정도로 때워버렸다.[48] 거기에 백제 처리의 전권을 위임 받은 소정방이 김유신, 김인문, 김양도(金良圖) 세 장군에게 백제 영토를 나눠주겠다고 하며 당에 붙으라 회유했는데 김유신이 그걸 차버린 다음 무열왕에게 당의 야욕을 경고했다고 적고 있다.

7. 문무왕 시기

661년(67세)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 말갈 장군 생해(生偕) 연합군이 술천성을 공격해왔지만 이기지 못하자 북한산성을 공격하여 포위했다. 북한산성은 20여일이나 버텼지만 함락되는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 고구려군이 퇴각했다. 고구려 본기에는 뇌음신이 말갈군을 이끌었다고 적고 있으며, 처음부터 북한산성을 공격했고, 열흘 동안 포위했다 적고 있다. 신라본기에서는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冬陁川)의 정성이 하늘에 닿은 것이라며 상을 내렸다고 기록했는데, 열전이나 삼국유사 태종춘추공조에서는 동타천이 아닌 김유신이 하늘에 기도하여 이런 이변이 일어났다고 바뀌어 있다.[49]

7월 17일 대장군직에 임명되어 문무왕의 친정에 따라나서 9월 27일 백제 부흥군의 옹산성을 항복시키긴 뒤, 웅현성을 쌓았다. 문무왕은 10월 29일 당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돌아갔는데, 문무왕의 책봉과 군량을 평양으로 수송하라는 칙사였다.

662년(68세) 정월 문무왕이 김유신을 비롯한 아홉 장수에게 수레 2천여 량에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여 석을 싣고 평양성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당군에 보급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도록 명령하였다. 18일 풍수촌(風樹村)에 머물렀는데 얼어붙은 험한 길을 가기 위해 군량을 전부 수레에서 소와 말에 옮겨 실었다. 23일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산양(蒜壤)에 이르렀다. 2월 1일 유신 등이 장새에 도착했는데 평양까지는 3만 6천보 남은 거리였다.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등 15인을 선행시켰는데, 날이 추워 사람과 말이 다수 동사했다. 6일 군량을 전달하고 소정방에게 은 5천 7백 푼, 가는 베 30필, 머리털 30량, 우황 19량을 선물했다. 군량을 받은 소정방은 곧 전투를 그만두고 돌아갔다. 유신 등은 당의 군사가 돌아가자 곧 회군하여 과천을 건넜는데, 추격해온 고구려군을 영격하여 수급 1만을 베고,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 잡았으며, 무수한 병장을 노획했다. 김유신과 김인문은 공을 인정받아 본피궁(本彼宮)의 재화(財貨), 전장(田莊), 노복(奴僕)의 절반을 나누어 받았다. 고구려 본기에는 소정방이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폭설 때문에 성과없이 돌아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50]

열전에서는 당나라의 보급요청에 조정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적국 깊숙한 곳까지 군량을 나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귀족 모두가 반대하던 와중에, 김유신이 스스로 군량수송 작전을 자청했다 적고 있으며, 문무왕은 위험한 일을 맡기는 것에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고 국경을 넘은 뒤에는 상벌을 뜻대로 해도 좋다는, 소위 편의종사권(便宜從事權)까지 내렸다고 적고 있다.[51] 보기감 열기는 이 보급원정 중 큰 공을 세워, 유신은 이 권한을 이용해 열기에게 임의로 급찬의 관등을 지급했고 원정이 끝난 뒤에는 문무왕에게 특별 요청해 사찬으로 삼도록 요청했다. 열기의 신분은 기록돼있지 않으나 이후의 대화를 미루어보면 사찬 관등을 지급받기 곤란한 낮은 신분으로 추정되고 있고, 김유신이 골품제로 대표되는 신라의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는 성향이었다는 근거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김유신의 보급을 받은 소정방군은 추위와 기아에 시달려서 금방 돌아갔다고 적혀있다.

663년(69세) 문무왕의 친정에 참가해 부여풍이 이끌던 백제부흥세력을 와해시켰다(백제-왜 연합 Vs 나당 연합). 백강 전투 등의 전투에서 패배한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주하고, 왕자 충승(忠勝), 충지(忠志) 등은 백성들과 함께 항복했다. 그러나 지수신만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저항했는데 결국 이기지 못해서 11월 4일 회군했다. 이후 논공행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열전에서는 이때 김유신이 토지 500결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664년(70세) 은퇴를 요청했지만 문무왕은 허락하지 않고 은퇴를 거부하는 의미로 지팡이 궤장(几杖)을 하사했다. 이 기간에 사비산성에서 백제 저항 운동이 있었고 진압되었는데, 열전에서는 이것도 김유신의 은밀한 모책 덕분이었다 적고 있다.

665년(71세) 본기에는 언급이 없고 열전에는 당 고종이 사신 양동벽(梁冬碧), 임지고(任智高) 등을 보내 문안하고 김유신을 봉상정경(奉常正卿) 평양군(平壤郡) 개국공(開國公)으로 책봉하고 식읍(食邑) 2천 호(戶)를 내렸다고 적고 있다.

666년(72세) 천존(天存)의 아들 한림(漢林)과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내마(奈麻)로서 당나라에서 지내는 숙위(宿衛)가 되었다. 열전은 한발 더 나가서 좌무위익부중랑장(左武衛翊府中郞將)이라는 뭔가 그럴 듯한 관직까지 받았다고 적고 있다.

667년(73세) 문무왕의 친정을 보좌했는데 이때 대각간직에 임명되어 있었다.

668년(74세) 6월 21일 신라군사조직의 구서당(九誓幢),의 수장인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에 임명되었다. 29일 본격적인 고구려 정벌이 시작되었지만 김유신은 통풍을 앓고 있어 참전은 못하고 왕이 수도에 머물게 했다. 고구려 정벌이 끝난 10월 22일에는 기존에 가장 높았던 대각간직 위의 태대각간직을 새로 만들어 거기에 임명되었다. 현대로 치면 미군의 존 조지프 퍼싱처럼 6성 장군인 대원수 직위를 받은 것과 같다.

열전에서는 668년 고구려 정벌 때 김흠순과 김인문이 말하길, 김유신이 같이 가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하니 왕이 세 사람은 나라의 보배라 혹 전부 변고를 당하면 어쩌냐며 만류한다. 결국 김유신은 두 사람에게 덕담을 해주고 수도에 남는다. 전쟁 후 태대각간 관직에 식읍 500호를 주고, 이어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궐에 오름에 있어서 몸을 굽히지 않도록 하였다. 그의 모든 보좌관들에게도 각각 위계 한 등급씩을 올려 주었다. 구석과 같은 특전을 받은 셈이다. 또한 당고종이 조서(詔書)를 내려 상찬했고 가문에서 이 조서를 보관 중이었는데 5대손 때 분실했다고 한다.

669년(75세) 5월 말 목장 174개소를 지었는데 이중 6곳이 주어졌다. 해당 관청(22곳)과 궁(10곳)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수였다.

670년부터 나당전쟁이 진행 중이었는데 백전노장이라지만 이 때는 나이를 먹은지라 나당전쟁의 전장 선봉에는 서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72년(78세) 아들 김원술이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해 돌아오자 분기탱천하곤 가문과 자신의 명예를 욕보이고 왕명까지 어겼다는 이유로 그를 쫓아냈다.

673년(79세) 7월 1일 사망했다. 열전에 따르면 사망 얼마 전인 673년 정월 황룡사와 도성 사이에 커다란 별이 떨어졌고, 때맞춰 지진까지 일어나자 왕이 걱정했는데, 김유신은 '이 변이는 신에게 있는 것이지 나라의 재앙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문무왕은 만약 그렇다면 더 걱정이라면서 담당 관서에 액땜을 할 것을 명했다. 또한 김유신의 집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무장한 병사들이 통곡하면서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 이야기를 들은 김유신은 '그들은 나를 지켜준 음병(陰兵)들이다. 내 운이 다한 것을 알고 떠났으니 나도 곧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이 일이 있은지 10여일 후에 자리에 눕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문병하러 방문한 문무왕에게 당부하는 말을 전했고, 며칠 뒤 자택에서 종을 시켜 문무왕에게 보내는 유서를 작성하게 한 뒤 숨을 거두었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의 고취수(鼓吹手)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주었다. 유신의 유해는 금산원(金山原)에 묻혔고, 왕명으로 그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며 수묘인을 두어 경주 김유신묘를 지키게 했다.

김유신 사후 150여년이 지난 흥덕왕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삼국사기 본기에 있는 기록은 아니라,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하)에서 나온 기록이다. 삼국유사에도 같은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는 흥덕왕이 아닌 경명왕 때 추존되었다고 되어있다. 기록상 신라에서, 아니 한국사 전체에서 당국의 국성(박씨, 신라 왕가 김씨, 석씨) 외 가문의 인물이 사후추존으로나마 왕이 된 사례는 김유신이 유일하다.


[1] 김유신행록 10권 분량 중 열전 3권에 실리지 못하고 빠진 내용들은 고려 유학자의 시점에서 지나치게 설화적인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현재 전하지는 않는다. 설화적인 내용을 가감없이 수록한 삼국유사에 있는 여러 김유신과 관련된 설화들이 빠진 나머지 분량에 들어있었던 내용 중 일부로 추정되고 있는데 역사학자 이기백 고구려 첩자 백석과 고구려 무당 환생 이야기, 김춘추와 여동생 문희를 결혼시키기 위해 화형쇼를 벌였던 것(본기에도 실려 있지만 태워 죽이려는 내용은 삼국유사에만 있다), 김유신의 영혼 미추 이사금과 대화하는 내용, 천관녀 이야기 등을 그런 사례로 추정했다. [2] 이 김암의 사신 파견 기록은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에도 실려있어 교차검증이 된다. [3] 주보돈, 「김유신의 정치지향 -연구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신라사학보》 11, 2007, 11쪽 [4] 주보돈, 김춘추와 그의 사람들 280쪽 [5] 648년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태종이 김유신의 이름을 들은바 있어 김유신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김춘추에게 먼저 물어보기도 했고 일본서기에서는 668년 신라 사신 김동암이 일본에 갔다가 귀국할 때 일본에서 김유신에게 줄 선물로 배 1척을 따로 준비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서 등씨가전(藤氏家傳)에서 등장한 평가를 보자면 '신라에는 김유신, 백제에는 성충, 고구려에는 연개소문, 당나라에 위징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서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고 하고 있다. [6] 진흥왕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전사시킨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7] 야합(野合)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결혼하기 전 성관계를 맺었다는 의미이다. [8] 임신 항목을 참고해보면 알 수 있듯 아이를 20달간 품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매우 희귀한 경우이므로 알맞게 재해석하면, 김유신을 10달 후에 낳고도 10달 정도 출생 신고를 못한 것을 설화적으로 윤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명은 김유신을 낳을 당시 애인을 따라서 무단가출한 미혼모였다. 게다가 김서현은 진골이라곤 하나 당시 진골중에서도 차별받던 가야계 진골이었으니 숙흘종이 김유신을 즉시 외손자로 인정해줄 리가 없다. 김서현과 만명의 사실혼이 인정받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9] 예기에는 이름 짓는 법도에 대해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나라 이름이나 달이나 날짜의 이름, 산이나 강의 이름 등으로는 사람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고 적혀 있다. [10] 남북조시대 · 북주에서 활약한 인물인데 김유신과 달리 문인으로 명성이 높았다. [11] 이 때문에 훗날이라면(물론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웬만해선 이름에 안 넣었을 노(奴) 독(毒), 시(尸) 같은 부정적인 훈을 가진 글자가 음차를 위해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금석문과 역사서도 편찬하던 6~7세기 당시 신라인들이 이 글자들의 훈을 몰랐을 리는 없고, 즉 한자는 음차 수단일 뿐이지 훈은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 [12] 경주시 단석산으로 비정된다고 한다. 삼국통일 이후의 중악은 대구광역시 팔공산이지만,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영토의 확대 과정에 따라 새로이 정한 것이라고 이기백은 이해하였다. [13] 현재의 울산시 백운산 [14] 별 중에 큰 별, 하늘의 별을 관리하는 관리 [15] 전쟁을 담당하는 별인 허성(虛星)과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인 각성(角星)의 빛이 보검에 드리웠다는 표현은 도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점에서 본 기록을 후대에 윤색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52] [16] 사실 이런 '소싯적의 비현실적 일화'는 당대의 영웅을 후대에 기록히면서 으레 붙는 부분이다. 가령 조선 태조 이성계만 해도 왕이 되기 전까지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화가 다수 보인다. [17] 직책은 본기에는 부장군(副將軍), 열전에는 중당당주(中幢幢主) [18] 이 말의 원 출처는 <송사> 직관지. 즉 어떤 일을 풀어가는 핵심이 되겠다는 의미다. [19] 열전에서는 아버지 김서현에게 한 말로 기록하고 있다. [20] 다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밑에서 올라가야 하는데, 이때에 밑에서 이런저런 것들을 국가에서 일일이 기록해주지도 않고, 후손도 자기 조상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기록할 때에 누락했을 수도 있다. 당장에 35세에서 10여년이 지난 대야성 점령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봐도 그저그런 기록들을 몽땅 누락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21] 김유신 입장에서는 여동생의 딸이므로 조카이기도 하다. [22] 개인적 원한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사위 김품석의 실책으로 요충지 대야성을 잃었으니 비담파나 알천파 등이 존재하던 당시 신라 정계에서 김춘추가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것이고 이를 수습하는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위험한 고구려행을 자처한 것이다. [23]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 [24] 對고구려 방위는 한강 유역의 신주(한주)가 주 방위 지역인데 경주에서 가장 먼 지역이다. [25] 열전에는 소판(蘇判), 상장군(上將軍) [26]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8쪽). [27] 당시 재위 중이던 선덕여왕, 당시 후계자로 내정된 것으로 보이는 진덕여왕을 모두 포함한 지칭으로 추정되고 있다. [28] 원문은 吉凶無常惟人所召. [29] 상나라의 제22대 왕인 양왕(襄王) 무정(武丁)을 말한다. [30] 백제 본기에는 백제군 숫자만, 신라 본기에는 신라군 숫자만 기록되어 있다. [31] 김유신, 비령자 열전 [32] 경산시. 압량주의 다른 이름 [33]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때 20여개의 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대야성도 탈환했다고 본다. [34] 백제군 숫자는 백제 본기 기록이다. [35] 박서영,「백제 의자왕대의 대외정책 -신라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백제연구』 [36] 이문기,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 [37] 실제로 654~655년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상대등 관련 여러 기록을 찾아보면 상대등직은 사망할 때까지 역임하는 종신직으로 추정되는데, 알천이 역임하던 상대등 직위를 655년 정월에 금강(金剛)이라는 인물이 맡기 때문이다. [38]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ㆍ임종공(林宗公)ㆍ술종공(述宗公)ㆍ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이다.】ㆍ염장공(廉長公)ㆍ유신공(庾信公) 등이 남산의 우지암(亐知巖)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 이때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이 자리로 뛰어들었다.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지만 알천공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이야기하면서 호랑이 꼬리를 잡고 땅에 매쳐서 죽였다. 알천공의 힘이 이처럼 세어서 맨 윗자리에 앉았지만, 그래도 모두들 유신공의 위엄에 마음으로 복종하고 있었다.-《삼국유사》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덕왕- 일명 화백회의에 바지사장 알천과 실질적인 실권자인 흑막 유신, 당장에 호림은 위서인 화랑세기에서 유신의 전대 풍월주임에도 뒷자리.... [39] 앞서 나온 것과 같이 선덕여왕 시기 대야성 함락으로 對백제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버렸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김유신은 對백제전선 사령관이는 압량주 도독으로 이후 史書에 나오는 백제와의 전쟁기록 및 그의 祖父 무력과 父 서현이 경기-충청일대 지방을 관할하였다라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이자, 近畿지방 방위사령관으로써 신라 주력군을 자신의 지휘권 아래에 두면서 실력자로 급성장하였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이후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이며 선덕여왕의 조카인 춘추를 즉위시킬 수 있었다. [40] 취도는 삼천당에 소속되어 싸우다가 전사했다. [41] 무열왕의 사위이자 요석공주의 남편. [42] 조천성과 같은 성이다. [43] 압량주(경산시)의 다른 이름이다. [44] 본기에는 사사(死士)라 적고 있다. 계백의 군사가 5천이었다는건 백제 본기 기록으로 신라의 기록에는 몇 명이었는지 기록이 없다. [45] 관창 열전에는 '저쪽은 많고 이쪽은 적었다(彼衆我寡)'라 하여 혼자 돌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고 별동대를 이끌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혼자 돌격하라고 하는 것은 그냥 개죽음이나 당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으니 그런 상황에서 사기가 오를리가 없다. [46] 황산벌 전투는 신라군이 몇 만이고, 백제군이 몇 천이기에, 신라군의 4번에 걸친 패전이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보일 수는 있지만, 사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13만 명이나 되는 당군이 숫자면에서도 그렇고, 당나라의 전쟁 목적에서도 그렇고 아무래도 연합군의 주력이었다. 신라군의 주 목적은 이들 당군에 대한 보급 담당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 신라는 대전 유성일대로 추측되는 탄현을 넘어서면 공주를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며, 미친척하면 부여로의 직공도 가능하다(영동 지역은 김서현이 태수로 있던 만노군으로 추측되는데, 신라는 비교적 오래전부터 이곳을 전략적으로 병참기지화시켜놨다). 이러한 상황에서 논산까지 내려갈 이유가 거의 없다 이렇게 보면 당시 신라군의 다수는 보급병으로 구성되어야 하였고 계백이 며칠이나 버틴 것도 아니라 하루를 겨우 버티다가 패배한 것이다(여기에 당시 낙동강 서안 일부는 아직까지 백제의 영역권으로 보이는데, 신라군도 이들에 대한 방비책을 마련하고 있어야 했다). 이에 비하여 비록 긴급하게 모은 백제군은 훈련상태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수도 인근의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기에 보급이나 기타 잡병들이 많을 이유가 없었다. [47] 훗날 김문영은 고구려 멸망전, 백제 부흥군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며 문무왕, 신문왕 때까지도 활약하여 효소왕 때는 상대등까지 오른다. [48] 이는 황산벌 전투에서 김유신이 결국은 이기긴 했지만 상당히 고전했는데, 열전의 원전인 행록은 광개토대왕릉비 용비어천가마냥 김유신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므로 부정적인 기록은 그냥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9] 다들 알다시피 하늘에 빌었더니 응답했다는 식의 내용은 당연히 사실 그대로라기보다는 천재지변이 일어나긴 했고,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당대인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에 대한 기록이라 보면 된다. 천재지변이 누가 빌어서 발생했는지는 별 의미가 없다. [50] 임용한의 해설 [51] 이는 본래는 왕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지만, 작전 중에는 왕의 승인 없이 재량껏 해도 된다고 전권을 위임한 것이다.


[52] 출처:「김유신(595~673)의 정신세계」, 『청계사학』 16·17, 598쪽 및 6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