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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5:45:00

태실



1. 개요2. 상세3. 조선왕실의 태실
3.1. 세계유산 등재시도

1. 개요

胎室. 왕실에서 자손이 출생한 뒤 나오는 를 보관하는 장소를 말한다.

2. 상세

태반 탯줄을 의미하는 태(胎)는 과거부터 태아의 생명력을 나타내는 상징성을 가지고 아이의 운명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줘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에서 대대로 보관해왔다. 태를 잘 보관했다가 좋은 땅에 묻으면 그 태의 주인도 좋은 기운을 받아 오래 살고 지혜로워질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런식으로 태반을 따로 보관 및 뭍는 풍습은 태반 문서에 서술되었듯 세계 각국에서 나타나는 풍습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태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태를 귀하게 여겨 명당을 찾아 보관하는 것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어서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편을 보면 " 신라 진평왕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아내 만명이 아이를 밴 지 스무 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 태를 현의 남쪽 15리에 묻었는데, 화하여 신(神)이 되었으므로 태령산이라 하였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두고 나라에서 봄가을에 향(香)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행하였다. 본조 태조 무인(戊寅)에 이르러 비로소 국제(國祭)를 정지하고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속칭 태산(胎山)이라 한다."라고 돼있다. 여기서 김유신의 태를 만노군(진천)의 높은 산에 묻었는데 그 산의 이름을 태령산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상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김유신의 태를 묻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부모가 태를 묻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 6세기 중반에 이미 이러한 장태(藏胎) 문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대의 귀족층이나, 어쩌면 왕실에서도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김유신 태실은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사적 제414호)에 지정돼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에 있다. 김유신 태실이 있는 산의 이름은 지금도 태령산(胎靈山)이고 이 산에는 태령산성(胎靈山城)이라는 작은 성곽도 있는데 태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담 역할로 산성을 쌓은 것인지, 아니면 그저 같은 시기에 만든 방어용 산성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만들어진 시기는 비슷하니 연관성은 있을 수 있다.

신라시대를 지나 고려시대에도 다수의 왕들이 태실을 만들었는데 고려사 등에 따르면 왕의 태실을 만들면서 해당 지역이 승격되는 사례가 많이 기록돼있어 이를 참조하면 최소 15명의 왕이 태실을 만들었을 것으로 확인된다. 고려 태조의 경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개성부(開城府)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대흥동(大興洞)에 해인(海印), 취운(聚雲), 법림(法林), 태안(泰安), 운곡(雲谷) 등의 옛터가 있는데, 태안이 바로 고려 태조의 태실이라고 돼있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태실을 관리하고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왕이나 세자의 자녀가 태어나면 조선 전기에는 태실도감(胎室都監)이, 임진왜란 이후 중후기에는 관상감(觀象監)에서 장태할 곳과 길일을 정해 보고를 올리는데 결정이 되면 그곳에 태실을 조성했다. 태실은 대체로 하삼도(충청,경상,전라)에 조성했는데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찾다보니 멀리까지 간 것이다. 그 정도로 태를 좋은 곳에 묻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고 성종은 태실을 만들기 위해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으니 경기도에서도 찾으라고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성종과 중종만 경기도에 태실이 있고 그 전이나 그 이후나 다른 왕들은 하삼도, 또는 강원도에 태실을 만들었다.

왕이나 세자의 자녀가 태어나면 태를 항아리에 담아 산실(産室)의 미리 점지해 놓은 길방(吉房)에 보관해 두고 출산 사흘째 되는 날 태를 꺼낸 뒤 물과 술(항온주)로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태를 담을 항아리에 동전 한 닢을 넣고 그 위에 태를 올린 다음 기름종이를 덮고 비단으로 봉한다. 그런 다음 태항아리보다 더 큰 외항아리에 태항아리를 넣고 빈 공간에 솜을 채워 태항아리가 움직이지 않게 한 다음 태 주인의 이름과 태어난 생년월일시를 기록해 길방에 보관하였다. 그 뒤 남자아기는 다섯 달 뒤, 여자아기는 석 달 안에 태항아리를 미리 확보한 명당으로 가져가 태실을 조성한 뒤 묻었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태를 모신다고 하여 안태(安胎)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안태사(安胎使)가 이 과정을 모두 책임졌다.

태실은 크게 아기태실(阿只胎室)과 가봉태실(加封胎室)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누구나 아기태실을 조성했다. 먼저 태실지의 땅을 파 석실을 조성한 뒤 돌로 만든 태함을 넣고 그 안에 태항아리와 태 주인의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기록한 태지석(胎誌石)을 넣은 뒤 봉하여 모래, 자갈, 회 등을 이용해 다져서 봉토(封土)했다. 그리고 그 위에 여러 석물(石物)을 조성하고 태실비를 세워 태 주인의 신분과 태어난 생년월일시, 태실을 조성한 날짜를 기록해두었다. 그러다 태실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태실의 격을 높이기 위해 아기태실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추가로 설치하는 의식, 가봉(加封)을 하는데 이런 태실을 가봉태실이라고 한다. 가봉태실이 된다 해서 아기태실 때 만들었던 것을 없애진 않고 그대로 두었다.

태실을 조성할 명당은 보통 높고 정결하면서 둥그런 산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산을 따로 태봉(胎峰)이라고 한다. 그리고 왕의 태실과 태봉의 산세를 따로 그림으로 그린 태봉도(胎封圖)도 제작했는데 현재 네 점( 사도세자, 순조, 헌종, 순종)이 전해지며 2022년에 순종 외의 태봉도 세 점이 일괄 보물에 지정됐다.

태실을 쓸 태봉의 후보지는 평상시에 미리 찾아놔야 하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는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를, 중후기에는 관상감에서 관원을 지방에 파견해 찾게 했는데 이들은 찾아낸 땅을 1~3등급지로 구분했다. 왕족이어도 신분은 다 다르므로 1등급에는 원자 원손, 2등급에는 대군 공주, 3등급에는 옹주의 태를 묻었다. 그리고 왕의 태실은 300보, 대군과 공주는 200보, 왕자와 옹주는 100보까지 제한거리를 두어 화재를 막기 위한 금표(禁標) 지역으로 설정했는데 태실이 조성되면 이 안에 있는 나무를 베는 일은 금지되고, 민가나 농경지가 있을 경우 보상하고 철거하였다. 1등급의 경우 태실을 지키는 군인이 파견됐고 또는 인근에 사찰이 있으면 면세, 잡역 면제 등의 혜택을 주고 사찰의 승려들이 그 역할을 대신 하게 했다. 예를 들면 정종의 태실은 김천에 조성되었는데 이를 지키고 관리하는 일을 직지사가 하였고 순조의 태실은 속리산에 조성되면서 법주사가 이런 일을 하였는데 이런 사찰들을 수호사찰이라 하였다. 이런 특수한 미션을 부여받은 사찰들은 왕실이 보호하므로 왕릉을 수호하는 능침사와 함께 숭유억불의 시대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태실을 가봉할 때에는 많은 석물이 필요하고 이때 석재를 구하고 옮기는 등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보통 흉년과 농번기는 피하고, 추수 이후에 하였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가면 갈수록 전국 곳곳에 너무 많은 태실이 있어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태실이 생기면서 땅을 뺏기기도 하고, 태실을 만들 때, 수리할 때 부역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원래는 즉위하자마자 가봉했던 것을 조선 중후기로 가면 이런저런 이유로 기본 몇 년씩 미루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재위 기간 중에 가봉을 못하는 사례들도 나타나는데 현종은 1659년에 즉위했으나 재위 기간 동안 흉년이 심해 가봉을 계속 미루다 결국 타이밍을 놓쳐 현종이 사망하고 7년 뒤인 1681년( 숙종 7년)에서야 가봉했다. 이런 문제를 인식한 왕이 영조였는데, 태실 하나를 만들기 위해 태봉을 하나씩 쓰고 주변 고을 전체가 동원되는 폐단을 막기 위해 1758년, 태봉윤음(胎峰綸音)을 반포하면서 이제부터는 부모가 같으면 자녀들은 하나의 태봉에만 묻도록 하였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찼는지 7년 뒤인 1765년에는 모두 궁궐 후원에 묻도록 하였다.

그 뒤 정조도 영조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문효세자가 태어났을 때 태를 후원에 묻으려 했는데 왕위를 이어야 할 원자만큼은 관례대로 태봉을 찾아 태실을 조성해야 한다는 조정 대신들의 만류로 결국 예천 용문사 뒤에 태실을 조성했다. 이어 태어난 순조의 태실은 충청북도 보은에 조성했는데 정조는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당부를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숙선옹주가 태어났을 때는 실제로 궁궐 후원에 태를 묻었다. 이와 별개로 정조는 1785년에 예천 명봉사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태실을 가봉했는데, 가봉은 원래 왕의 태실만 하는 것이어서 조선 전체를 봐도 세자의 태실을 가봉한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정조 입장에서는 할아버지 영조에서 손자인 자신에게 정권이 단계를 건너뛰어 넘어왔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태실을 가봉함으로써 그 중간 단계를 만들려고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런 정조는 정작 자신의 태실은 재위 기간내내 가봉하지 않았고 죽은 뒤 순조가 즉위하고서야 가봉했다.

보통 원자나 원손은 처음부터 왕이 될 것으로 예상해 1등급지에 태실을 만드므로 나중에 왕이 되면 그 자리에 그대로 가봉하면 되는데, 태어날 당시에는 왕권과 거리가 멀어 그런 자리에 태실을 만들지 않은 경우에는 즉위한 뒤에 더 좋은 곳을 찾아 옮겨가는 사례도 있다. 성종이 첫 사례인데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적차남으로 당시 서열 3위여서 사정이 그나마 괜찮았던 편이지만 그 뒤의 선조의 경우는 왕권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신분으로 태어난 경우라 일반인들처럼 살던 집에 태를 묻었다가 왕이 된 뒤에 길지를 찾아 태실을 새로 조성해 묻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혈통이 단절되고 꼬이면서 철종, 고종 같은 왕들이 나오는데 이런 경우에는 태실을 아예 만들지 않았다.

조선 전기의 태조, 정종, 태종은 태어날 당시에는 조선이 없었으므로(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정립된 안태 문화가 없었다. 그래도 태를 묻는 문화는 있었기 때문에 조선을 건국한 뒤 태조는 함경도에 있던 자신의 태를 옮겨 태실로 조성할만한 곳을 찾았고 태조 이후 여러 세대를 거쳐가는 과정에서 태실지를 1~3등급으로 나누는 방식, 가봉할 때 태실을 호화롭게 꾸며 격을 높이는 등의 관행이 생겨났다. 조선 왕실의 안태 문화는 성종 때 정립됐는데 경국대전이 편찬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태실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를 찾아다녔기 때문에 지명에 태(胎)가 들어가는 곳은 과거 누군가의 태실이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태봉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전국에 있는데 이 경우에도 그 산에는 누군가의 태실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전국 각지의 명당에 조성된 조선시대의 태실들은 일제강점기에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조선왕실을 관리하던 이왕직에서 전국 각지에 흩어진 태실들을 관리하기 어려우니 한 곳에 모아 보존하겠다는 명분으로 1929년, 전국의 조선왕실 태실 54곳에서 태항아리와 태지석을 파내 서삼릉에 모아 집단 태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때 태실뿐 아니라 왕자, 왕녀, 후궁 들의 분묘 45기도 한꺼번에 옮겼는데 이후 왕실 소유의 태실, 분묘 자리를 민간에 매각해버려 훼손은 물론이고 소유권 문제 등으로 지금까지도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1928년 8월, 이왕직의 의례를 전담하는 전사(典祀) 이원승(李源昇)과 유해종(劉海鍾)은 전국 각지의 태실을 순방해 기록을 남겼는데 그에 따르면 조선 왕실의 위세가 사라져 태실들이 관리되지 않은지 오래고 이미 여러 왕의 태실이 도굴당했으며(대표적으로 현종) 또 태실 자리가 명당이라고 해서 민간인의 시신이 암매장된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관리를 위해 한 곳에 모아야 한다는 명분은 그럴듯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태실을 그대로 옮겨올 수는 없기 때문에 이왕직은 태실에서 태항아리와 태지석만을 꺼내 봉상시(奉常寺)에 임시 보관했다가 1929년 4월, 서삼릉 태실 구역으로 옮겨 집단 태실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 1929년 3월 1일자 보도에는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전국 명당지에 산재되어 있던 태실의 파괴, 손실방지를 위하여 태항아리 39개를 경성으로 옮겨와 현재 종로구 내수동의 지방경찰청 부근에 봉안실을 마련하고 임시 보관 후 추위가 물러가면 서삼릉으로 이전한다.'라고 돼있다.

그리고 상태가 좋은 태실 하나를 전시 목적으로 당시 박물관 역할을 하던 창경원으로 옮겼는데 바로 성종 태실이다. 이에 대해 당시 매일신보 1928년 9월 10일자 보도가 있는데 '태봉에 암장시(暗葬屍)가 뒤를 이어 발견됨을 따라 이왕직에서는 황송함을 견디지 못하여 앞으로는 그 같은 일이 없게 하고자 신중히 협의한 결과 역대의 태봉 중에 가장 완전하며 가장 고귀하게 건설되었다는 광주(廣州)에 뫼신 성종의 태봉의 모든 설비를 그대로 옮겨다가 석물이고 건물이고 한결 같이 창덕궁 뒤 비원에다가 꾸며놓고 전문기사를 시켜 연구케 하는 중이라는데 새로이 건설되는 태봉은 성종태봉을 표본으로 경중히 뫼실 것이라 한다."라고 돼있다.

이왕직은 태실을 옮길 때 몇몇 태실의 태지석은 새로 만들어 넣었는데 태조, 정종, 태종, 문종, 순조, 헌종, 순종의 태지석이 이에 해당한다.[1] 초기 왕들의 경우 원래부터 태지석을 만들지 않았거나, 또는 이미 도굴돼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이며 이때 만든 태지석들에는 생년월일과 함께 태실의 위치, '昭和四年(1929년)'이라는 이장년도가 기록돼있다.[2]

태실에서 꺼내져 정상적으로 옮겨진 태지석은 세종, 세조, 예종, 성종, 중종, 인종, 명종, 선조, 숙종, 영조, 사도세자(장조), 정조의 것이 있고 이 중에 세종과 선조의 것이 눈에 띈다. 세종 태지석에는 태주의 생년월일과 신분 대신 '세종대왕 태실 1601년 3월 21일 개장(改藏)'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세종 태실이 정유재란 중에 파괴되면서 1601년(선조 34년)에 수리를 할 때 태지석을 새로 제작한 날짜를 기록한 것이다. 선조의 태지석에는 '지금 주상전하의 태(今主上殿下胎) 1570년 10월 21일 묻음(藏)'이라고 돼있다. 선조는 아기태실이 없었으므로 즉위 후 가봉태실을 만들 때 그 날짜를 기록한 것이다.

한편 태항아리에서 나온 동전을 보면 시대상도 알 수 있다. 동전은 4종류가 나왔는데 조선통보(1423년~), 개원통보(開元通寶, 621년~), 만력통보(萬歷通寶, 1576~1620년), 숭정통보(崇禎通寶, 1628~1644년)가 그것이다. 예종, 성종, 인종, 명종을 포함한 일부 태실의 태항아리에서는 조선통보가 나왔고 숙종, 영조, 사도세자, 정조, 헌종, 순종을 포함한 일부 태실의 태항아리에서는 개원통보가 나왔다. 나머지 두 동전은 왕자나 공주의 태항아리에서만 나왔다.

이렇게 태실에서 나와 서삼릉으로 옮겨진 태실 유물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교란된 것이 많으며 1996년에 서삼릉 태실을 발굴해 현재 태실 유물 대부분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3. 조선왕실의 태실

아기태실은 워낙 많기 때문에 여기서는 가봉태실과 일부 특이사항이 있는 태실만 정리했다. 원래 가봉태실은 왕으로 즉위한 후에 만드는 것이므로 조선왕실의 왕 27명, 즉 27개의 가봉태실이 있어야 하지만 정조와 헌종이 예외적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장조)와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태실을 가봉했기 때문에 2개가 더해져 총 29개의 가봉태실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연산군, 인조, 효종의 가봉태실은 위치가 확인되지 않으며 철종과 고종은 아예 기록 자체도 없기 때문에 5개가 빠져 현재 총 24개의 가봉태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가봉태실들은 1929년에 서삼릉으로 한꺼번에 옮겨진 뒤 방치됐는데 그 자리에 민간인의 무덤이 들어섰거나 석물이 옮겨지고 사라지는 등 원형이 훼손된 것이 많아 지금까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가봉태실은 10여개 남짓이다. 최근에는 조선왕실의 태실 문화에 대한 중요성이 인식됨에 따라 훼손된 태실들도 점진적으로 꾸준히 복원해가고 있다.
태조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지는 민간에 넘어가 지금은 어느 이름 모를 민간인의 묘가 들어섰다. 현재 태조 태실은 1993년에 금산군이 태실 석물들을 모아 근처에 복원한 것인데 원래의 위치가 아니다보니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승격에는 실패했다. 태조 태실지는 원래 위치를 알고 있고 석물도 남아있기 때문에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어 금산군이 토지소유주에게 충분한 보상안과 함께 태실을 복원해야 할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답보 상태에 있다. 만약 합의가 돼 원래 위치에 복원할 수 있다면 추후 보물 승격이 가능할 수도 있다.
정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직지사 대웅전 뒷편 태봉산 정상에 있는 원래의 태실지는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아 태실 석물들이 직지사 경내 여기저기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태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지는 민간에 넘어가 지금은 어느 이름 모를 민간인의 묘가 들어섰다. 인근에 태종 태실 조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태실 석물들이 남아있었는데 2015년에 성주군이 모두 수습해 현재 보관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태실과 관련한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세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지는 민간에 넘어가 지금은 어느 이름 모를 민간인의 묘가 들어섰다. 그래도 가봉태실비를 포함해 일부 태실 석물들은 상당수가 남아 있어 인근에 따로 모아뒀다.
중앙석물 분실 수십년 후 2024년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된 이건희 컬렉션 중 하나로 드러났다. 문서 여담 문단 참조.
문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은 훼손됐고 다만 1735년에 새로 만든 가봉태실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만이 명봉사 경내로 옮겨졌다. 그 후 6.25 전쟁 중 명봉사가 완전히 전소되는 등 시련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태실 석물들이 파손됐으나 가봉태실비는 다행히 큰 훼손 없이 지금도 남아있다. 2016년에 살릴 수 있는 석물들을 최대한 재사용해 문종 태실을 새로 복원하고 가봉태실비도 태실 앞에 옮겨놨다. 근처에 사도세자 태실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아기태실을 만들 때(1735년) 문종 태실을 수리한 바가 있다.
1698년(숙종 24년)에 단종이 복위되고 1784년(정조 8년)에 이르면 실록에 단종 태실이 세종 태실과 함께 곤양(昆陽) 소곡산(所谷山)에 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분명히 1458년에 파괴돼 사라진 단종 태실이 다시 만들었다거나, 옮겼다는 기록 없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 전후 꽤 긴 시간동안 조선왕실은 이곳을 단종 태실로서 관리를 했는데 문제는 일제강점기에 전국의 태실들을 서삼릉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단종 태실인줄 알았던 이곳 태실에서 뜬금없이 인성대군의 태지석이 나온 것이다. 단종 태실에 인성대군의 태지석을 잘못 넣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으므로 오히려 인성대군 태실을 후대 어느 시점에서 단종 태실로 잘못 알고 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실에서 인성대군의 태지석이 나온 만큼 현재 서삼릉 태실 권역에는 단종 대신 인성대군의 태실이 있다.
인성대군 태실을 단종 태실로 잘못 알았다하더라도 조선왕실에서는 이곳을 단종 태실로 받아들여 오랫동안 관리했고 다양한 기록들이 남아있기 때문에 현재 사천의 단종 태실은 문화재로 지정돼있다. 한편 이 태실 역시 서삼릉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민간에 넘어갔는데 태실 자리에는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 최연국(崔演國, 1886~1951)이 묻혀있으며 태실 석물들은 최연국의 무덤을 꾸미기 위해 사용된 상태이다.
세조의 가봉태실비는 지금도 남아있긴 하나 비문이 지워져 내용은 알아볼 수 없다. 다만 기록의 왕조답게 실록에 자세한 상황이 기록됐는데 1462년(세조 8년), 예조에서 성주 태실에 여러 대군과 군의 태실이 같이 있으니 전례를 따라 태실을 더 좋은 곳으로 옮겨 가봉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 세조는 윤허하지 않고 단지 구별을 위해 비 하나만을 세우라고 해서 비를 세웠는데 비문의 내용이 실록에 실려있으며 내용은 대강 이렇다. "세종대왕이 1439년(세종 21년)에 유사(有司)에 명해 땅을 점치게 해 성주 선석산에 여러 대군과 군의 태를 묻고 표석(標石)을 세웠는데 그곳에는 주상(세조)의 태도 있으며 표석에는 수양대군의 실(室)이라고 돼있다. 하늘의 명을 받들어 왕위에 오른 지 8년이 지났으므로 예관이 조종(祖宗)의 사례를 따라 태를 옮길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고 형제들과 태(胎)를 같이 했는데 뭐하러 그곳을 떠나겠는가? 라며 석물을 더하지 말고 단지 표석을 치우고 그 자리에 비를 하나 세우는 것으로 대신하라 라고 해 일을 덜게 했다." 이 뒤에는 세조의 문무(文武)에 대한 찬양과 함께 총명하고 겸손, 검약한 덕을 다 말할 수 없는데 이 사례 하나만 보더라도 빛이 나니 조선이 억만년동한 무강(無彊)하고 아름다울 것 같다는 식의 글이 이어진다. 사실 세조는 자신의 능( 광릉)을 조성할 때에도 석실 대신 회곽묘를 만들게 하는 등 전반적으로 과도한 의례를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고 비용을 쓰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에 이 역시 그러한 사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한편 세조의 이 행동은 약 300년 뒤 영조가 태봉윤음(胎峰綸音)을 반포할 때 다시 언급된다.
세조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으나 원래의 세조 태실은 별다른 훼손 없이 잘 보존돼 있다.
예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지는 민간에 넘어가 지금은 어느 이름 모를 민간인의 묘가 들어섰다. 태실 석물들은 그 후 인근 구이초등학교로 옮겨졌다가 1970년에 경기전으로 다시 옮겼으며 딱히 분실된 것은 없어 위치만 달라졌을 뿐 원형은 잘 유지돼있다.
성종 이전에는 태실을 하삼도에만 조성했는데 1476년(성종 7년)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이 태어나고 얼마 뒤 성종이 풍수학(風水學) 관원에게 하삼도에만 안태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기록이 있다. 이에 관원은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저 길지(吉地)를 찾다 보니 그렇게 됐다 답한다. 이에 성종은 일반인들은 모두 집 근처에다 묻는데 길지를 찾는 것도 좋지만 그런다고 해서 대길(大吉)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풍수의 설은 허탄해보인다며 안태할 땅을 경기도에서도 찾으라는 전교를 내린다. 다만 이것이 후대의 왕들에게도 지침으로 인식되진 못했는지 현재 경기도에 있는 왕의 태실은 성종과 그의 두 아들인 연산군(실전), 중종의 태실 밖에 없다. 또 성종 때부터는 왕녀들의 태실도 만들어졌는데 이전에는 왕, 왕자, 원손만 태실을 만들었었다. 이때까지 계속 오락가락하며 바뀌던 왕실의 장태 문화는 성종 시대에 대부분 확립 및 정형화됐고 큰 변동없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진다.
성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이와 별개로 태전동에 있던 성종 태실은 당시 원형이 온전하게 남은 왕의 태실이어서 연구 자료로 활용한다는 이유로 창경궁(당시 창경원)으로 옮겼고 지금도 춘당지 근처에 있다. 위치는 달라졌지만 창경궁에 있기 때문에 원형은 잘 보존돼 있다.
폐비 윤씨 태실은 조정에서 굳이 훼손하지 않은 덕분에 계속 남아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이후 태실지에 태실비와 일부 태실 석물들이 방치돼있다가 2016년에 문화재에 지정되면서 정비 사업을 벌여 현재는 복원된 상태이다. 한편 폐비 윤씨 태실 근처에는 문효세자 태실도 있어 이를 통해 용문사가 이들의 수호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축현리 산96-1에 있는 태실지에서 출토된 태함[5]이 연산군 태실의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연산군이 태어난 후 성종이 경기도에서 안태지를 찾으라는 전교를 내린 바 있고, 이곳 태실 석물 중 일부가 가봉태실에만 보이는 석물이라는 점, 이 태실지 바로 아래에 진성군(珍城君) 이해령(李海齡, 1595~1655)의 묘가 있는데 진성군은 선조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시기를 고려하면 아마도 연산군 태실이 파괴된 후 진성군이 그 빈 자리에 묘를 쓴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추정만 할 뿐이다.
연산군과 달리 연산군의 자녀들의 태실 관련 유물은 꽤 많이 남아있다. 태어난 년도를 기준으로 하면 연산군의 자녀들 중 세자빈녀 이수억(李壽億, 1491년), 원자 금돌이(金乭伊, 1497년), 왕자 이강수(李康壽, 1498년), 옹주 이복억(李福億, 1499년), 옹주 이복합(李福合, 1501년), 왕자 이돈수(李敦壽, 1501년), 대군 이인수(李仁壽, 1501년), 왕녀 이영수(李靈壽, 1502년), 왕녀 이정수(李貞壽, 1505년), 왕자 이태수(李泰壽, 1506년)의 태실 유물이 남아 있고 이 중 금돌이, 이인수, 이영수, 이복억, 이복합의 태실은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대부분은 태항아리, 태지석 등만 남아있고 태실은 방치돼 흔적만 남아있는데 원자 금돌이의 태실 만큼은 잘 보존돼 현재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상현리 태봉산에 있다.
중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 태실지는 잊혀진 상태로 방치됐다가 1982년에 어느 민간인이 이곳에 장례를 하려다 태함을 발견해 알려졌고 1987년에 태실 주변에 있던 석물들을 수습하고 부러진 가봉태실비도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다만 복원을 하긴 했으나 고증이 엉망인데 원래 땅 속에 묻혀있어야 할 태함이 밖에 나와 있고 태실비도 반대 방향으로 놓여있다. 한편 태지석을 통해 중종의 아명을 알 수 있는데 은금이(隱金伊)였다.
인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1999년에 발굴 조사가 이뤄졌고 2007년에 정비, 복원됐다. 현존하는 왕의 태실들 중 규모도 큰 편이고 보존 상태도 크게 나쁘지 않아 2022년 보물로 승격 지정됐다.
명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방치됐거나 훼손된 다른 태실들과 달리 원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석물들의 전반적인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또 왕의 태실들 중 규모가 가장 큰데 이런 점들이 인정받아 2018년 태실 중 최초로 보물에 지정됐다. 보물로 지정된 태실은 현재까지 2곳인데 그게 형제인 인종과 명종의 것이라는 점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한편 태지석을 통해 명종의 아명을 알 수 있는데 춘령(椿齡)이었다.
결론적으로 선조 태실을 만들기 위해 3개 지역(강원도, 황해도, 충청도)의 백성들이 동원된 것인데 그 당시에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실록에는 이 일을 두고 식자들이 개탄하고 있다, 또 태를 묻는 풍습이 신라와 고려시대부터 시작돼 이어지고 있는데 중국에는 예부터 없었던 것이며 길지를 고르기 위해 백성들의 무덤을 파헤치고 태봉은 최고로 깨끗한 자리여야 한다며 이렇게 하고 있으나 이는 의리에 어긋나는 일인데다 풍수지리를 따져봐도 근거가 없는 일이라 기록했다. 이이 석담일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운데 그들을 구제할 생각은 하지 않고 태경(胎經)에 현혹돼 태실을 옮겨다니며 삼도(三道)의 백성을 동원하는 것을 왜 아무도 지적하지 않냐는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태봉으로 쓸만한 봉우리가 몇 개 없을텐데 앞으로 계속 이렇게 태봉을 찾아 쓰다보면 나중에는 어디서 태봉을 찾겠냐며 이것은 지속될 수 없는 일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선조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지는 민간에 넘어가 지금은 어느 이름 모를 민간인의 묘가 들어섰고 태실 석물 일부만 그 주변에 남아있다. 태실은 사라졌지만 가봉태실비는 2개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오덕2리 마을 입구에 1개가, 태실 수호사찰인 오덕사(五德寺)에 1개가 남아있다. 마을에 있는 것은 태실을 처음 만들었던 1570년에 만든 태실비이고, 이때 만든 것이 많이 훼손되면서 1747년(영조 23년)에 새로 제작했는데 이것이 오덕사에 있다. 마을에 있는 태실비는 부여군 향토유적 112호, 오덕사에 있는 태실비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7호에 지정돼있다.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이 태실은 왕실이 관리하지 않아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출토 유물과 참고할만한 기록을 교차 검증해 광해군 태실로 확정했다. 지금도 광해군 태실지 주변에는 그 당시에 파괴한 석물들의 잔해가 있는데 그 중 아기태실비는 두 조각으로 파괴되긴 했으나 왕자경용아기씨태실(王子慶龍阿只氏胎室)이라는 글씨를 읽을 수 있다. 한편 광해군의 아기태실에서 도굴한 것으로 보이는 태지석에는 왕자 경용(慶龍)이라고 돼있는데 여기에는 왕자 경용이 1575년(선조 8년)에 태어났다고 기록했다. 아기태실비와 달리 가봉태실비는 완전히 파괴됐는데 주변에서 만력삼(萬曆三), 십일월일건(十一月日建)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파편 2개가 발견됐다. 만력삼 뒤의 숫자는 알 수 없으나 만력 30년~39년이라면 이는 1602년부터 1611년 사이에 해당한다. 여기까지 종합했을 때 1575년에 태어나 아기태실을 만들었고 1602년부터 1611년 사이에 가봉태실을 만들었을 사람은 광해군 밖에 없기 때문에 왕자 경용=광해군으로 볼 수 있게 되고 이 태실은 광해군 태실이 되는 것이다.
광해군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옮겨지지 않고 당대에 파괴된 상태 그대로 현재에도 원래 위치에 남아 있다. 다만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어느 시점에 도굴된 것으로 추정되며, 장물로 거래되다 1991년에 보물 제1065호에 지정돼 현재 용인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광해군 태실은 꽤 오랫동안 방치됐는데 2003년에는 누군가가 도굴하다 실패한 채로 흔적을 남기고 간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 후 2006년에 태실이 있는 연경동 일대가 택지개발지구에 지정됐고 아파트가 한참 올라가던 2013년에서야 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이 무렵에는 광해군이 주인공인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흥행하기도 했다. 태실 발굴 조사는 2018년에 완료됐고 2022년에 대구광역시 기념물에도 지정됐으나 아직 복원은 되지 않았다.
효종 본인의 태실은 전해지지 않으나 세 딸( 숙명공주, 숙정공주, 숙경공주)의 태실이 서삼릉에 있다.
현종은 재위 중에는 태실을 가봉하지 못했다. 1662년(현종 3년)의 실록에는 태실 가봉에 대한 논의가 기록돼있는데 영의정 정태화가 즉위 후 태실을 바로 가봉했어야 했는데 자신들이 고사(古事)를 잘 알지 못해 가봉하지 못한 것이 흠이 됐다고 한다. 이에 현종은 그게 옛날의 규칙인가 묻고는 추수 후에 하라고 하는데 그러고도 하지 못했으니 이 당시에는 왕의 태실을 당대에 가봉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정도로 여러 사정이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종 재위 중에는 가봉하지 못했고 1677년(숙종 3년)의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숙종과 좌의정 권대운이 가봉에 대해 논의한 내용이 나오는데 권대운은 현종 태실을 1674년(숙종 즉위년)부터 가봉하려 했으나 기근이 심해 못했다면서 지금이라도 빨리해야 하지만 올해도 기근이 심하니 내년에 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 숙종의 태실도 함께 가봉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동의했지만 실제로는 계속 미뤄지다 현종 태실만 1681년에 가봉하고 숙종 태실은 2년 후에 가봉했으니 이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짐작해볼 수 있다. 현종 태실을 가봉하면서 석물인 석란(石欄)을 북돋웠으며 이곳을 대흥현(大興縣)에서 대흥군으로 승격했다고 기록돼있다.
현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옮겨지지 않았는데 그 당시에도 이미 도굴되고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항아리와 태지석은 전해지지 않으며 태실 근처에서 발견된 아기태실비가 유일한 관련 유물로 남아있다. 아기태실비의 앞면에는 1641년에 태어난 원손의 아기태실이라고 돼있고 뒷면에는 순치 4년이라고 돼있어 1647년에 비를 건립(=태실 조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조에서 만든 태봉등록(胎封謄錄) 인조조(仁祖朝) 정해년(1647년) 6월 17일에 원손의 태를 안치하는 과정에서 잡물의 설치를 논하는 기록이 남아있어 교차검증이 되고 있다.
숙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지는 민간에 넘어가 지금은 어느 이름 모를 민간인의 묘가 들어섰고 태실 석물 파편들과 아기태실비, 가봉태실비가 그 주변에 남아있다. 비석 2개는 비교적 온전히 남아있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1호에 함께 지정됐다.
경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문제는 그 후 어느 시점에 분실 혹은 도굴을 당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삼릉 태실 중 유일하게 태실비가 없다. 경종 태실이 서삼릉으로 옮겨진 것은 기록에 있고 서삼릉 태실 명단에도 경종 태실이 있는데 태실비가 없을 뿐, 태실비가 있었을 자리는 남아있다. 이 정도 였으니 원래의 태실지에 있었을 석물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방치된 것은 당연한데 심지어 난간석은 면사무소의 장식으로 쓰였을 정도였다. 1976년에 흩어진 석물들을 수습, 복원했는데 크게 빠진 것은 없고 아기태실비와 가봉태실비도 남아 있다.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원래 위치에 원형을 유지한 채로 지금까지 있는 태실은 드물기 때문에 오히려 희귀한 케이스이다.
이 부분은 실록에는 간단하게 나왔지만 태봉등록(胎峰謄錄)에는 더 다양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영조가 태실 공사와 관련한 여러 제도를 축소하려고 하자 신하들은 다양한 이유로 석물의 크기를 줄이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다며 반대했다. 그 중 하나가 석재에 대한 것이었는데 백성들을 공사에 동원하는 기간이 너무 길다는 영조의 지적에 신하들은 공주(숙종) 가봉 때는 53일, 충주(경종) 가봉 때는 32일이 걸렸는데 공주가 충주 때보다 더 걸렸던 이유는 돌을 캐오는 곳이 멀어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번 청주 가봉 때는 그 점을 감안해서 할 테니 석물을 줄일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영조는 어차피 상당수의 석물은 땅 속에 묻히게 돼 보이지도 않는데 줄이는 것이 왜 의미가 없냐면서 위의 후릉 얘기를 하며 줄여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그리고 좋은 돌을 캐겠다고 멀리서 캐오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곳에서도 웬만큼 좋은 게 있다면 그걸 써야지 왜 최상품만 고집하냐고 나무랐다.
또 이전에는 태실을 설치할 때 왕의 태실은 주변 300보, 대군과 왕자는 200보까지 거리를 제한, 금표(禁標)를 설치하고 그 안에 있는 논밭은 사들이고 민가는 헐었었다. 영조는 이때 자신의 태실의 제한거리를 200보로 줄이는 게 어떻겠냐며 어차피 그것은 화재를 막기 위해 설정한 것이니 200보로도 충분할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신하들은 모든 일에는 등급이 있는데 왕의 태실을 200보로 줄이면 대군과 왕자의 태실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서 석물을 줄이는 것은 근검하다 생각하고 넘어가더라도 300보를 200보로 줄이는 것은 불가한다고 반대한다. 또 금표 안에 있는 논밭과 민가의 문제에 있어서는 산이 높으면 그 안에 그런 것이 있을 가능성이 낮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가피하게 해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하자 영조는 자신의 태실을 200보로 줄이자고 한 것은 사실 대군과 왕자들의 태실을 줄이고 싶어서 말했던 건데 그렇게까지 반대한다면 어쩔 수 없겠다며 현행을 유지하는 대신 거리를 측정할 때 융통성있게 처리하고 민가가 금표 안에 있다 해도 절대 철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1758년(영조 34년)에는 아예 승지를 불러 태봉윤음(胎峰綸音)을 반포했다. 내용은 대강 이렇다. "실록을 보니 세조가 잠저에 있을 때(진양대군) 태봉을 성주 선석산에 썼는데 그곳에 여러 왕자들의 태가 있어 즉위 후 예조에서 가봉을 권하자 세조는 비석만 하나 세우라고 하고 끝냈으니 아름답고 거룩한 일이다. 이걸 보니 요즘 태실을 태봉 하나에만 만들려 했던 것은 그릇된 것 같다. 하나의 태를 공유하는 동생을 형의 태봉 아래에 묻고 손아래 누이를 손위의 누이 태봉 아래에 묻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이다. 하물며 과거의 사례가 있는데 한 곳에 묻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요즘 하나의 태를 묻는 데 하나의 고을이 동원되고 있으니 폐단이 너무 크다. 이는 마땅히 조종(祖宗)의 제도를 본 받아야 할 것이니 앞으로는 태봉을 새로 정하지 말고 차례대로 이어서 묻고, 산등성이를 다 썼더라도 그 산 안의 다른 산등성이를 찾아야 한다. 또한 이어서 묻을 때는 거리를 2, 3보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동생의 태실을 형의 태실 아래에 쓰라는 것이다. 이미 만든 태실은 그냥 두고 앞으로는 여러 적자와 군주가 있더라도 원손과 두 군주는 같은 산을 이용하고 대군과 왕자 이하도 그렇게 해야 한다. 대(代)가 멀어지든 말든 상관없이 산등성이 하나를 써야 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도 부족했는지 1765년(영조 41년)에는 다시 한번 조치를 내렸는데 실록에 의하면 경복궁의 위장(衛將) 한 명이 옛 궁궐 주변에서 발견했다며 석함 하나를 바쳤다. 영조가 그것을 가져오라 하여 열어봤는데 누군가의 태함이었다. 그 태함에는 왕자의 태이며 을사년 5월 X일 인시(寅時)에 태어났다고 쓰여있었다. 영조는 이걸 보고는 "태종이 헌릉을 만들 때 사방석(四方石)이 너무 커 민폐가 크다 하여 양편석(兩片石)으로 고친 바 있다. 국조능지(國朝陵誌)에는 태함을 돌로 만들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1757년 이후 태함을 도자기로 대신하게 했다. 막중한 곳인 능(陵)도 고치는데 그 다음인 태실을 못 고칠 이유가 없다. 장태의 폐단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옛날에 만든 예법은 고치기 어렵지만 지금 얻은 이 석함을 보니 조선 중엽 이후에 만든 것이다. 이전에 만든 태실은 그냥 두고 지금부터는 장태할 때 궁궐 후원의 정결한 곳에 도자기 항아리에 담아 묻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 말은 이후에도 비교적 잘 지켜졌다.
영조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지는 민간에 넘어가 그 지역 만석꾼의 조상 묘가 들어섰다. 그 이후 그 집안의 재실 용도로 쓰일 성모재(誠慕齋)[8]라는 건물까지 산 아래에 지어졌는데 이후 가문이 몰락하면서 묘를 이장해 원래의 태실지는 현재 비어있다. 영조 태실은 1982년, 청원군 시절에 복원했는데 당시에는 원래 태실지의 위치를 알 수 없어 주변의 적당한 위치에 복원했다. 영조 태실은 가봉할 당시 모든 경위와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조선왕실의궤 '영조대왕태실난간조배의궤'가 제작됐고 이것이 보물 1901-11호에 지정됐다. 태실을 복원할 때도 이를 참조했다.
사도세자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원래의 태실지는 훼손됐고 문종처럼 사도세자의 가봉태실비도 명봉사 경내로 옮겨졌다. 명봉사는 사도세자의 가봉태실비 표면을 갈아내 사적비(寺蹟碑)로 바꿔버렸는데 다행히 새긴 글씨는 파악할 수 있어 원래의 태실지에 새로 복원했다. 이 비문에는 사도세자나 장조가 아닌, 당시 사도세자를 지칭했던 경모궁(景慕宮)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한편 정조는 사도세자 태실을 가봉하면서 태봉도(胎封圖)를 같이 제작했는데 이것이 2022년에 보물에 지정됐다. 이 그림에는 사도세자 태실과 주변의 산세, 명봉사, 문종 태실이 나타난다.
이유야 어떻든 본인의 태실을 가봉하지 않고 끝까지 미룬 것처럼 정조 역시 영조처럼 가봉의 폐단을 경계하고 조심스러워했다. 특히 영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1783년(정조 7년)에는 문효세자의 태를 후원에 묻으려 했는데 왕위계승자인 원자만큼은 무조건 1등급 태봉에 묻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따라 할 수 없이 경북 예천에 태실을 조성했다. 그러면서 2등급 이하는 앞으로 후원에 묻는 것으로 정리했다.
정조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원래의 태실지(정양리 산 210-1)에 석회 광산이 생기며 크게 훼손됐고 1936년에는 영월 화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산세 자체가 완전히 훼손됐다. 그 상태로 꽤 오랫동안 방치되다 1967년에서야 흩어진 석물들을 수습해 영월읍내 금강공원에 보관했고 1997년에 지금의 위치에 복원했다. 정조 태실은 원래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만 빼면 태실 자체는 크게 훼손된 부분 없이 잘 보존돼있다. 대한제국이 정조선황제로 추존(1899년)하기 전에 만든 태실이므로 가봉태실비에는 정조가 아니라 '정종(正宗)'이라고 돼있다. 근처에 정양사(正陽寺)라는 절이 있어 수호사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사라진 절이고 다만 바위에 새긴 글씨 몇 개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태실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영월 정양산성(사적 제446호)도 있다.
순조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그 후 방치됐거나 훼손된 다른 태실들과 달리 원래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석물들의 전반적인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순조 태실 역시 태봉도가 제작됐으며 2022년에 보물에 지정됐다. 이 그림에는 순조 태실, 주변의 산세, 법주사가 나타난다. 순조 태실의 수호사찰 역할을 한 법주사의 입구에는 현재 금표(禁標), 화소(火巢), 하마비(下馬碑), 봉교비(奉敎碑)가 남아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역할과 목적은 다르지만 결국 근처에 태실이 있음을 알리는 표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곳은 이런 것들이 다 사라졌거나 1~2개만 남아있으나 법주사는 이 모든 것이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곳이어서 큰 의미가 있다.
다만 헌종의 이런 지극한 효심에도 불구하고 현재 효명세자 태실은 포천의 국도와 영평천 사이 자투리 공간에 대충 방치돼있다. 태실의 원래 위치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 408-1로 추정되나 태실 관련 흔적은 남아있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에 서삼릉으로 옮겨지지 않은 것을 보아 꽤 이전에 도굴, 훼손됐을 것으로 보인다. 현 시점에서는 모텔 장식물로도 쓰이는 등 여기저기 흩어졌던 태실 석물을 군부대에 모아놨다가 현위치로 옮겼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다. 현재 석물들은 말 그대로 갖다 모아놓기만 한 상태이며 가봉태실비도 없으나 태실을 가봉할 때 '익종대왕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를 제작했기 때문에 관련 내용은 기록돼있다.
헌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원래 자리에 지금도 태실이 있긴 하나 난간 등 다수의 석물이 사라졌고 특히 아기태실비와 가봉태실비가 없는 상태이다. 근처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1970년대까지는 가봉태실비가 있었는데 그 무렵에 누군가가 비석을 뽑아 태실 근처에 있는 옥계저수지에 버렸다는 소문이 있어 2015년에 예산군이 저수지를 탐사했는데 실제로 가봉태실비의 아래 절반 부분과 사방석이 발견됐다. 찾지 못한 윗 부분에 태실비의 건립년도가 새겨졌을테지만 헌종은 가봉하면서 '성상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라는 의궤를 제작했고 태봉도도 제작했기 때문에 가봉년도는 1847년으로 확인이 된다. 헌종의 태봉도 역시 2022년에 보물에 지정됐으며 이 그림에는 헌종 태실, 주변의 산세가 나타난다. 헌종 태실은 2009년에 일부 석물을 수습해 대강 복원한 상태이다.
고종 본인의 태실은 전해지지 않으나 세 자녀( 덕혜옹주, 고종8남 이육, 고종9남 이우)의 태실이 서삼릉에 있다. 세 명 모두 창덕궁 후원에 묻은 태를 꺼내 옮겼다.
순종 태실은 일제강점기에 내부의 태항아리와 태지석이 서삼릉으로 옮겨졌는데 문제는 원래의 태실지가 현재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2000년대초에 순종 태실이 있던 산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옹기 공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태실은 물론이고 석물도 모두 사라진 상태인데 인근 논두렁에 화소(火巢) 표석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어 이곳에 순종 태실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순종의 경우 가봉은 못했지만 아기태실을 만들 때 태실도(胎室圖)를 제작했다. 이 그림에는 순종 태실, 주변의 산세, 정암사(淨巖寺), 서해 바다가 나타난다. 정암사는 태실의 수호사찰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3.1. 세계유산 등재시도

현재 '조선왕실의 태실'들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관련 정보는 세계유산 잠정목록 참조. 2025년 4개 지자체가 세계유산 추진 위원회를 설치해 잠정목록에 올리는 것이 목표다.
[1] 연산군의 세 딸 이영수, 이복억, 이복합, 영조의 딸 화유옹주, 철종의 원자 이융준, 고종의 8남, 9남, 덕혜옹주, 영친왕, 영친왕의 아들 이진, 이구의 태지석도 새로 제작했다. [2] 원래는 태주의 생년월일과 신분, 태를 묻은 때가 기록된다. [3] 세종대왕태실석난간수개의궤,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표석견립시의궤 [4] 백성들의 민가가 있는 곳 [5]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물 정원에 있다. [6] 2022년 8월 26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에서 보물로 승격 [7] 2018년 3월 26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1호에서 보물로 승격 [8] 1932년, 청주시 향토유적 제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