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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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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려 조선의 평가3. 근현대의 평가4. 현대의 평가
4.1. 기록4.2. 군사적 능력4.3. 삼국통일4.4. 민족주의적 관점4.5. 정사와 야사의 혼재4.6. 신라라는 국가에 대한 반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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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유신에 대한 평가를 다룬 문서.

2. 고려 조선의 평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648년 김춘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태종이 김유신의 이름을 들은바 있어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먼저 물어보기도 했고 일본서기에서는 668년 신라 사신 김동암이 일본에 갔다가 귀국할 때 일본에서 김유신에게 줄 선물로 배 1척을 따로 준비하기도 했다. 일본의 역사서 《등씨가전(藤氏家傳)》에서는 ' 위징, 연개소문, 성충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서 이름을 만리에 진동시켰다[1]'고 하고 있다. 당대에 명장이자 명신으로서 이름을 널리 떨쳤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의 김부식 을지문덕 장보고의 업적은 중국 서적이 없었으면 몰랐을 거라고 적은 반면, 김유신은 (글을 모를) 고려의 신분 낮은 어린아이들도 다 안다고 평했다. 이를 보면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 중엽까지도 김유신의 명성이 크게 남아 있었다 볼 수 있다. 당장에 윤관조차 김유신을 흠모하여 관련 책이나 기록을 자주 읽었다고 했으니 명성은 의심할 것이 없다. 또한 김유신이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를 신라(왕과 귀족 등)가 그를 쓸데없이 의심하거나 차별하지 않은 것에서 찾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위대한 업적과 무거운 인망이 고금에 비할 데 없다'거나, 임진왜란 발발 당시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위인으로 정몽주 김유신 두 사람을 꼽고, 이후에도 김양, 성충, 계백, 강감찬, 정몽주와 함께 전대 한국사의 충신의 대표격 6명 중 한 명으로 나오는 등 긍정적인 이미지로 일관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3. 근현대의 평가

일제강점기 무렵부터는 서양과 일본을 통해 현대적 개념으로 정립된 사학이 도입되었고, 일제라는 '외세'에 짓밟힌 당시 시대배경상 이를 사상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단재 신채호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이 발달했다. 김유신이 소속했던 7세기 중엽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외세인 당의 힘을 빌렸고 그 과정에서 김유신이 군사적으로 활약했던 주역이었다는 점 때문에 근현대 민족주의 사학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적으로 평가, 아래 단락의 현대의 평가 중 부정적 평가에 대한 시초가 되었다.

4. 현대의 평가

4.1. 기록

유신의 현손(玄孫)으로서 신라의 집사랑(執事郞)인 장청(長淸)이 행록(行錄)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만들어서 넣은 말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일부 삭제해 버리고 기록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전(傳)을 만들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김유신의 현손, 김창정.}}}
삼국사기 안에서도 김유신 열전의 경우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기록이 꽤 많이 나타나는데, 사실 이런 것들보다는 삼국사기 본기와 동떨어진 기록이나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기록이 많이 섞여있기 때문에 긍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특히 열전 648년 기록을 보면 백성들이 편하게 생활한지 오래되어 싸우기를 바랐다고 적고 있고, 유신이 이들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하여 무려 21개 성이나 함락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백성이 편하게 생활한지 오래되었다는데 그 동안에도 같은 삼국사기의 다른 부분을 보면 백제의 신라 침공이 연이어 있었고, 1년 전에는 내전까지 겪었던 신라의 백성이 편하게 생활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또 본기에서는 침공을 막아낸 것으로 기록되어있는데, 오히려 침공을 했다고 되어있어 열전의 내용은 본기와도 다소 차이가 있다. 황산벌 전투는 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으며 북한산성 전투는 아예 김유신의 공으로 왜곡까지 하고 있는 수준. 애초에 열전 자체가 객관성과는 담쌓은 행록에서, 그나마도 아주 말이 안 되는 부분은 책 몇 권 분량을 빼고 올렸다고 김부식이 따로 적어 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본기와 열전의 차이가 이렇게 심하게 난다.

그나마 <삼국사기>는 < 사기>의 사마천이 한 것과 같이 김부식이 나 홀로 집안에서 저술한 책이 아니라 왕의 명령에 따라서 고려의 지식인들이 각각의 파트를 담당해서 자료를 수집하여 편찬하고, 고위관직자들의 검토를 거쳐 왕이 최종적으로 읽어보고 승인하는 국책사업이라 본기와 열전이, 삼국의 본기끼리 조금씩 다른 부분이 존재하므로 자체적으로 최소한의 교차검증은 가능하다는 게 위안.

다만 확실하게 말하자면, 이런 앞뒤가 안 맞는 왜곡 이야기에서 주로 거론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김유신의 열전이지, 본기의 내용까지 전부 왜곡이라고 하는건 아니라는 것이다.
열전이 반쯤 김유신뽕에 물들어 있다보니 삼국사기 본기의 경우도 김부식이 김유신을 꽤 고평가했다는 점,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열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점을 들어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데, 김유신과 관련된 고구려, 백제, 신라 본기를 서로 비교해 봐도 고구려 본기 중 662년 신라가 당군에 군량을 보급하고 회군 중 고구려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만 빼면 서로 큰 차이가 없다. 개중에는 신라가 최후의 승자고 김유신이 신라에서 명성이 높았으며 김부식이 그를 고평가한 것을 들어 혹 기록이 조작된 것이 아닌가 우려하지만 그렇다면 같은 삼국사기 안에서 고구려 본기만 차이를 남겨둘 이유가 없다. 김부식이 조작하고자 했다면 고구려 본기도 똑같이 조작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았다. 본기와 열전의 내용이 서로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시대 중엽 당시에는 남아있던, 서로 다른 원전을 삼국사기의 파트별 편찬자들이 제각기 참고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사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김유신 열전이 과장되었다는 것만 알고 본기는 읽어보지도 않아서 본기 내용을 적어도 '김유신 열전 특유의 과장' 운운하는 사람들이 일부 존재하는데 까기 위한 거라도 일단은 사료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올바른 자세다.

한편 김유신 열전의 신뢰도와는 별개로, 이런 기록의 문제점은 삼국사기 집필의 난이도를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어린아이들도 그 위명을 알 정도로 유명하다는 김유신에 대한 기록마저 남아 있는 내용이 부실해서 거의 퓨전 판타지 수준의 미화가 들어간 행록을 검토해야 할 정도였으니 그보다 유명세가 못한 다른 인물 및 사건에 대한 사료는 얼마나 찾기 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안시성주에 대해 언급하면서 '안시성주는 대단한 호걸인데도 이름조차 알지 못하니 매우 애석하다'라며 이러한 난점을 따로 언급하며 아쉬워하는 대목이 있다.

4.2. 군사적 능력

들어가기 앞서 김유신의 당시 위치 및 역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가 본격적으로 신라의 방패 역할을 맡아 역임한 자리가 서라벌 바로 옆인 압독주(혹은 압량주,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의 군주로, 그 이전에 압독주에 대한 기사가 없기에 대야성(오늘날 경상남도 합천군) 일대를 상실한 신라가 비상조치로 만든 주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당시 김유신이 이끈 군사는 이곳의 주군이었던 것.

신라에겐 김유신이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의 보루이자 방패였다. 선덕여왕 말년 김유신은 백제ㆍ고구려ㆍ말갈과 전투를 치르면서 7개의 성을 함락하고 다시 탈환해 오는 등 군공 하나만큼은 신라에서 손에 꼽힐 만큼 출중한 명장이었고, 그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정예군 1만 명을 내준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유신은 이러한 신라 조정의 기대에 부응하듯 군을 이끌고 나아가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백제의 진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이미 대야성 전투로 서쪽 국경이 무너진 신라는 연거푸 백제에 밀리고 있었고 김유신은 압승이 아니라 매번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제 아무리 김유신이 매번 승리한다고 해도 싸움에서는 몰아냈을지언정 전쟁에서는 계속 밀려 전선은 점차 무너져 가고 있던 형세였으며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역시 진평왕 때부터 계속 신라의 북쪽 전선을 공략하고 있었던 데다 혹시 모를 일본의 침공에도 시시각각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으니 후방을 통째로 비워두고 백제 전선에 집중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2] 거기다 당과의 교역을 위해 필수적으로 지켜야 했던 한강 유역의 당항성 또한 백제와 고구려, 말갈의 연합 공격을 받았기에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신라는 세 나라에 비해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648・649년 역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2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며 수세에 몰렸던 신라를 반등시켰으나, 무열왕 즉위 직후 백제・고구려・말갈 연합군의 공격에 북쪽 국경 30여개의 성이 함락당할만큼 당시 신라는 김유신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왜국은 직접적으로 세 나라와 같이 참전하진 않았지만, 외교적으로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결국 김유신은 주변 3개국과 왜국에 의해 고립된 신라의 방패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생명을 연장해 줄 수는 있더라도 홀로 국가의 역량을 초월한 역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초인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김춘추와 진덕여왕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훗날 비굴하다고까지 평가받은 대당외교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즉 김유신은 당나라라는 거대 동맹국을 김춘추가 외교로 만들어낼 때까지 신라를 지켜낸 단단한 방패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훗날 백성들에게 신격화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훗날 고려 최영과 비슷하다.[3]

김유신 열전이 과장된 기록이 많다고 해서 심지어 김유신을 명장이 아님을 넘어 졸장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설령 열전을 다 빼고 본기 부분만 반영한다 해도 김유신이 열전 내용처럼 무패의 군신까지는 아닐지언정 대야성 전투로 서쪽 국경이 무너지고 수도권이 최전방이 되어 자신이 뚫리면 수도를 바로 공격당하는 중차대한 위기 상황에서 휘하에 있던 소수의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지휘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수없이 이기면서 적의 침공을 막아내고 역으로 침공하기도 했던 신라의 소방수이자 당대, 더 나아가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명장들 중 한 사람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10배나 적은 병력에 4차례나 패배했다고 졸장이라 평하는 경우도 의외로 꽤 있는데, 항목에 들어가면 알겠지만 적이 산성에 자리잡은 상태에서 하루만에 큰 피해 없이 섬멸한 것일 뿐이며 이 경우는 오히려 계백과 5천 결사대의 죽음을 결사한 각오와 분전이 대단한 것이라 봐야 한다. 황산벌 전투는 유명해서 각색이 많이 되었을 뿐 신라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 볼 여지는 없다. 반굴과 관창은 매체에서 왜곡시킨 것과 달리 자살돌격이 아니었으며 소수의 별동대를 이끌고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한 것을 사기 진작에 써먹었을 확률이 높다.

또한 평양성 전투(661년) 때 소정방에게 군량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을 두고서 쌀배달꾼이라고 폄하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 임무는 오히려 김유신의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군량은 상하기 쉬우면서 무거워 운반하기도 힘들며 적에게 공격 당하기도 쉽다. 따라서 군량 수송은 군사 작전 중에서도 최고 난이도의 작전이다. 심지어 한겨울에 눈보라가 몰아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고구려 한복판을 가로질러 군량을 당군에게 전달하고 지친 상태에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기어이 후퇴해 작전을 성공시킨 능력은 결코 폄하받을 이유가 없다. #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당대 사람들이 김유신에 대한 평을 부풀린 것, 그가 사후 왕으로 추존된 것을 보았을 때 졸장의 대우라고 보긴 힘들다. 오히려 난세에 신라를 구한 명장이었기에 그 내용이 더욱 부풀려질 수 있었던 것. 광개토대왕릉비 용비어천가에 과장된 내용이 많다고 해서 광개토대왕이나 이성계가 졸장이 아닌 것과 같다.

4.3. 삼국통일

김유신의 영향력이 적었다고 할 수 없는 이유는 김춘추 등이 외교적 성과를 내기 전까지 신라라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김유신이 총지휘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요충지인 대야성이 떨어진 이후 압독주(압량주) 군주가 되고부터인데, 이 압독주의 위치가 대 백제 전선의 새로운 요충지였고, 그 바로 뒤가 서라벌이었다. 당의 개입으로 한강 유역의 요충지인 당항성을 함락시켜 신라를 완전히 고립시킨다는 백제의 대전략은 어긋났지만 신라 서부에 대한 침공까지 그만둔건 아니었다. 김유신의 영향이 미미해 보이는 건 임진왜란 시기로 비유하면 김유신이 권율의 역할을 하고 이순신의 역할을 당이 했기 때문이다.[4] 고구려 기록에는 없지만 신라와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킨 후부터 당의 군량확보가 쉬워졌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반도 남북국시대가 형성된 제1원인은 당의 개입 때문이라는 점을 보면 과연 김유신의 신라의 생존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신라 내부로 보자면 외교로 당의 힘을 이끌어내 신라의 우군으로 활용한 태종 무열왕의 역할이 더 위이고 그동안 장수로서 백제 하나 처리하지 못한 김유신의 영향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5] 고구려 원정이나 이후 나당전쟁에서는 김유신은 고령으로 참전조차 하지 못한 채 전쟁이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으니 언급할 필요도 없다.[6]

4.4. 민족주의적 관점

남한의 민족주의자나 민족주의 사관에 경도된 북한에서는 김춘추와 함께 매국노로 세트로 비판받는데 이는 민족의 의미를 잘못 이해해서 생기는 문제다. 복식이나 언어 등이 유사하긴 했지만 따로 노는 건국신화만 봐도 알 수 있듯 고구려·백제와 신라는 그 정신적 계통이 상이하며, 계통이 비슷한(부여계) 고구려와 백제조차도 서로 왕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말갈이나 왜인 같은 이민족을 전쟁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삼국시대에 서로가 정말 민족적 동질성을 얼마나 느꼈을지는 꽤 의문인 부분이다.[7][8] 게다가 설령 삼국 간의 동류 의식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삼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통일되어야 하는 동질적인 한 집단으로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신라에 의해 통합된 이후에 민심을 안정시키고 원활한 통치를 하기 위해 시작한 프로파간다부터이며, 삼국통일(또는 일통삼한) 이전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 나라였던 적이 없으니 김유신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적국이었던 것. 한 나라로 1000년을 넘게 지내온 한국인들이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리는 오류다.

이런 시각에서 삼국통일전쟁을 바라본 신채호는 김유신을 "교활한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라고 비판적으로 평가하였다. 물론 역사 평가는 시대를 반영하는데, 신채호 선생이 살던 시기는 국가가 식민지가 된 암울한 시대였다. 그런 점에서 외세는 당나라, 매국노는 동족을 친 신라로 대입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멸망한 백제와 고구려의 감정이입이 되는 동시에 강대한 고구려의 향수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위기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쳐 나라를 구하고, 이후 국력에서 열세인 대국과의 싸움에서 끝내 국가를 지킨 쪽은 결국 신라였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애초에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에 심취한 신채호 선생 입장에서는 김유신은 민족의 반역자요, 계급제에 굴복한 반영웅이니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신채호는 김유신의 첩보, 교란 능력을 지극히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애당초 전쟁 중에 각국에서 온갖 공작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당시 조선이 일본의 그런 공작질에 시달리다 멸망당했다는 점에서 좋게 평가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았던 신라와 달리 멸망해 버린 조선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 더 나아가 발해였기에 잘못 된 평가일지 모르나 맹목적인 비판은 아니다.

4.5. 정사와 야사의 혼재

정사 삼국지 삼국지연의처럼 정사와 야사가 잘 구분되지 않은 탓에 열전에 수록되지 않은 내용인데도 열전 내용이라 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야사를 정사처럼 인식하기도 한다. 김유신 열전 자체가 문제점이 많은 건 맞지만 이런 것들은 올바른 역사인식이라고 할 수 없다.

보통 김유신에 대해 평할 때 수하를 희생시키는 걸 특기로 삼았다는 이미지가 짙게 배어있고 당장에 나무위키에서도 김유신 관련인물 문서에서 이런 시각이 굉장히 팽배한 편인데 이는 열전의 비령자와의 일화만 가지고 확대 해석했기 때문이다. 김유신 활동 시기만 해도 김유신과 관련없는 귀산, 추항, 찬덕, 해론, 죽죽 등이 비령자, 반굴, 관창과 비슷하게 전사했고, 본기 및 자신들의 열전에서도 재차 확인 가능한 부분이다. 게다가 김유신 본인도 젊을 적 629년 낭비성 전투, 661년의 고구려 보급원정 등 자기희생에 가까운 위험한 일을 자청해 수행하였고, 반대로 죽지 않고 전장에서 도망쳐 살아돌아온 아들 김원술은 비정하게 연을 끊어버린 것처럼 스스로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내로남불이라고 볼 여지도 없다.

또 열전에 기록된 전공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열전에도 없는 대표적인 야사인 천관녀와의 일화나 앞서 말한 수하들의 희생은 김유신과 연관시켜[9][10] 냉혹 비정하고 권력/출세 지향적인 인물이었다는건 철석같이 믿는 것도 문제인 부분이다. 김유신이 골품과는 상관 없이 능력만 보고 우대했다는 열기, 구근의 일화는[11] 언급조차 되지 않는걸 보면 사실 현대인들이 김유신이란 인물을 굉장히 편협하게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초에 당시 신라 귀족층의 몸을 사리지 않는 적극적인 임전과 전사는 김유신과 상관없이 당시 사회상에서 권장되는 일이었다.

4.6. 신라라는 국가에 대한 반발

당시 신라 지도층의 행적을 보면 처절하다 못해 굴욕적이기까지 한데 그 정점이 바로 치당태평송이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와 비교하며 까는 사람도 있다.[12] 또 신라가 당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서 북방 영토 대부분을 포기한 것도 협소한 영토가 콤플렉스인 현대 한국인들에겐 안좋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비단 현대인 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에서도 이러한 이유로 신라의 삼국통일의 한계성을 지적하거나 인정하지 않았다.[13] 변방 영토의 크기에 매몰되는 현대인과 달리 당시에는 정통성의 통합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시각에는 거의 한국판 카스트 제도로 보이는 폐쇄적 신분제도인 골품제로 유명한 것도 마이너스 요소. 한마디로 현대 한국인이 싫어할만한 요소들로 무장한 신라의 존속을 위해 싸우고 그 국가의 높으신 분이기까지 했으니 현대 한국인들이 싫어하는 경우가 꽤 있다.[14][15][16][17]

이런 식의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을 그대로 신라라는 나라에 투영하는 태도 때문이다.[18] 이런 시각이 간과하거나 외면하고 있는 점은 신라가 살기 위해 굴욕적인 행보를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저자세로 일관한 국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신라가 당나라와 필사적으로 벌인 전쟁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는 나당전쟁 이전 고구려 멸망까지의 상황은 잘 알려져 있으면서, 정작 이 긴 투쟁의 시대 결말이 되는 사건[19]인 나당전쟁이 오랫동안 간략한 설명에 그치고 그 의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20] 만약 신라가 당시 최강대국인 당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한 준비를 하고, 외교를 펼쳤는지 안다면 신라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바뀔 것이다.[21]

수나라는 당시 패배적인 상황에서 을지문덕에게 농락당한 것이고, 치당태평송은 적의 공세에 무너져 내리는 신라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22] 신라, 나아가 이후의 조선 왕조에 대한 감정적힌 폄하는 일제강점기와 주위의 최강대국이 득실한 상황에서 나온 열등감이 작용한 측면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치당태평송을 바쳤을지언정 당나라가 신라를 속국화하려 했을 때 신라는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당시 최강대국인 당나라와 당당하게 맞섰고, 결국 패배해 멸망한 고구려와 달리 당당히 승리했으며 그 후 수백 년 뒤까지 이어가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당장에 김유신부터가 소정방에게 도끼 들고 쳐들어가서 따졌던 것만 봐도 저자세로만 나왔다고 볼 수 있을지 의문.[23] 현대 한국의 상황만 보더라도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동맹이 절실한 동시에 경제적으로 중국에 기대야 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리고 미국 중국은 중립 외교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24] 그리고 일본만 보더라도 인구, 국토 모든 면에서 한국을 앞선다. 그래서 한일협정에 고압적으로 나서도 한국은 제압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북한 역시 핵실험을 해도 한국 혼자서는 뾰족한 방법도 없다. 실제로 한국 단독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7세기 신라도 다르지 않았다. 혼자 단독으로 상대해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당나라와의 동맹은 절실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비슷한 이유로 욕을 많이 먹는 태종 무열왕 문서에도 있는 내용이지만 신라와 당의 연합은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적 행동'[25]으로 폄하되지만, 중국을 부추겨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하거나 일본을 끌어들여 고구려[26]와 신라를 쳤던 백제의 외교 활동 등을 '살기 위한 몸부림'이나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치켜세우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이자 이중잣대이다. 물론 이는 전자의 경우 결국 두 나라를 멸망 시켰다는 결과가 있는것에 비해 후자의 경우 결과적으로 최종적인 성과가 없었다는 점에서 평가가 갈릴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반대로 민족적 행동이라는 상대적으로 최근의 시선을 그대로 1400년도 더 전의 과거에 대입시키려는 것도 고려할 부분이 많다.

백제 멸망 이후 백제부흥운동에 <당나라+신라 vs 백제유민+왜>의 대결로 이루어졌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고구려 역시도 국경을 맞대는 당나라와는 계속 갈등 관계였지만 백제, 신라, 왜와 직간접적으로 연대하였고 북방 부족과 국가들인 말갈, 돌궐, 토번국 등이 당나라에 같이 대항하는 세력이었다. 이후 고구려 후속 국가 발해만 해도 말갈족이 주류였다. 백제가 당나라와 결합해 고구려를 치고 백제가 왜와 연합해 신라를 치고 그걸 고구려가 구원하는 등 합종연횡은 계속됐고 외국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에 백제가 앞장섰지만 신라가 한강 유역 확보 후 <고구려+백제+왜> vs <신라+당> 연합으로 맞섰던 것을 고려하면 이런 외교적 합종연횡은 계속 이루어진 것이므로 어느 한 국가만이 특별히 외세를 끌어들인 것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 외세를 끌어들였다쳐도 당나라를 말갈, 돌궐, 왜나라랑 같은 선에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당시 당나라는 세계최강국이었고 말갈, 돌궐 등은 북방민족으로 당나라랑은 국력차이가 매우 컸기 때문도 있고 당나라의 원래 목적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신라도 집어삼길 생각으로 신라와 일시적 동맹을 맺은거라 나당전쟁에서 이겨서 망정이었지 만일 패배했더라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의 식민지로 전략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를 끌어들인것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말하기는 어렵다.

[1] 원문은 '당의 위징, 고려의 개금, 백제의 선중(善仲), 신라의 짐순(鴆淳)'인데, '선중'은 성충을 가리킨 것으로 굳어지고 있으나 '짐순'은 발음이 유사한 김흠순으로 보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같은 책에선 김유신을 '짐신(鴆信)'이라 표기한 바 있어(짐신에게 '배 한 척을 주었다'는 구절이, 김유신에게 '배 한 척을 주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 더더욱 해석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2] 당시 신라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일본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말갈의 공격에 무너지면 군사를 보내 영토를 얻으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좀 뒤늦긴 했지만 나중에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서 3만의 무시 못할 군세를 바다를 건너 백제 땅까지 보내 백강 전투에 파견하기까지 했는데, 그 위치를 생각해보면 왜가 신라의 후방을 공격할 잠재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음을 어림잡아 알 수 있다. 승하하면서 문무왕이 남긴 유언과 호국룡의 전설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국력(國力)은 예외로 두고서라도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의 기록을 생각하면 왜군이 울산에 상륙하여 그 곳을 점령해버릴 경우 경주 동남부 산지에 난 길을 통하여서 중심지역인 분지로 유입되는 것에 꽤 용이한 구조이다. 명활성의 축조이유가 이런 방비책의 일환이었으니 그 중요도를 여실히 알 수 있으며, 포항으로 상륙해서도 강을 따라서 올라올 수 있는 구조로 수도 월성의 위치는 왜군의 공격에 매우 취약한 곳이었다(이와는 반대로 서부와 북방으로는 여러 산지가 있어서 방어에 용이하였다.) [3] 다만 최영은 명장이었을지언정 능숙한 정치인은 아니었기에 김유신과 다른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4] 이순신의 존재로 인해 일본의 전략은 크게 어긋났지만 이미 내륙에 상륙한 일본군을 상대한건 조명 연합군과 다른 장수들이었다. [5]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관산성 전투에 이어 가야멸망전을 겪으며 백제는 당대 국가로서 대단히 치명적인 약점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대규모 철광의 부재이다. 21세기 현재까지 전라-충청 지역에서는 대규모 철맥이 발견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제군의 무장은 전성기의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고, 갸아와 강원 지역의 철맥을 갖고 있는 신라에게 절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왕~의자왕 때가 되면 상당 부분 정리되긴 하지만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는 30여 년간 그 피해를 수습하지 못했고, 그 국력 역시 신라나 고구려에게 일대일로 비하기 어려울 지경까지 축소되었다. 백제 멸망 후 그 인구수가 76만 호로서 고구려보다 많은 것으로 집계된 것을 근거로 백제의 국력이 건실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해당 통계는 백제의 웅진도독부가 5개 도독부로 나누어 세우려다가 최종적으로 통합하여 집계하면서 각 도독부의 전신 간 겹치는 구역이 중복집계되었을 공산이 크다. 아직 전토가 다 정복되지도 않은 고구려를 상대로 1개 도호부에 그 휘하에 9개나 되는 도독부를 세운 것을 본다면 당시 당이 점령한 고구려 지역의 인구 69만 호를 통치하려면 그 정도 행정력이 필요하다고 파악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6] 무열왕이 당태종 이세민과 나눈 이야기에서 신라는 백제라는 원수를 제거해 준다면 고구려 공격에 지원하겠다라는 의미에 가까웠다. 진평왕시기부터 羅濟간에 전쟁이 치열해졌고, 대야성 함락으로 서라벌까지 직공이 가능한 국가위급상황에서 신라에서 고구려까지 통합하는 삼한일통이라는 거창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상식적으로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당의 야욕이 신라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회유하겠다라는 신라인들의 고유지책이 아닐까 한다. [7] 단적으로 신라가 화평을 맺자고 했을 때 고구려는 영토를 내놓으라고 압박해 협정을 맺지 않았다. 신라가 고구려 국경과 맞대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와 동맹을 체결하면 남부는 안정화 시킬 수 있을 것 이다. 즉 위기의 몰린 신라가 갈 곳은 자신을 받아 줄 당나라 밖에 없었다. 고구려 역시 자국의 이득을 위해 신라를 외면 했는데 이것을 민족의 관점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국의 이득 중심임을 알 수 있다. [8] 반박하는 측에선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를 포함해서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이 신라와 힘을 합쳤으며, 신라에 큰 문제없이 동화되었고, 김춘추가 애초부터 당이 아니라 고구려를 찾아갔으며, 언어와 복식을 비롯한 문화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인해서 그래도 삼국이 오늘날만큼은 아니더라도 희미하게나마 고조선 이래로 민족적 동질성을 어느 정도 느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9] 비령자의 일화는 김유신, 비령자 열전 내용이지만 반굴과 관창은 김유신 열전에 없고, 반굴의 아들 김영윤 열전과 관창 자신의 열전에 있는데 이 중에 김유신이 명령한건 비령자 뿐이다. [10]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반굴과 관창에 관해서 김유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들이자 부관이었던 김흠순과 김품일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는데 본기에서 묘사하지 않은 비령자와 김유신의 일화를 실은 것이 김유신 미화에 가장 적극적일 열전이었다는 점을 보면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책임전가했다는 의혹이 터무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예시로 언급된 7인 중 김유신을 포함한 앞 세대는 자발적인 행위였던 반면 비령자부터는 타인의 명령을 받은 행동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11] 삼국사기 열기 열전에 나온다. [12] 그러나 현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이는 이런 어법은 신라 치당태평송만 그런 게 아니라 현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교류할 때 다들 하는 관행에 가까웠다. 삼국사기와 수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양왕 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후 화해를 요청할 때 스스로를 '요동 똥 땅의 신하(遼東糞土臣某)'라고 자칭하면서까지 사죄하는 문서를 보냈고, 위서에 전문이 실린 백제 개로왕 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할 때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 공주를 (북위에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할 수도 있다'라고까지 했다. 치당태평송이 결국 이후 역사를 바꾼 나당동맹과 직결되기 때문에 사대굴욕 외교의 유명한 사례로 알려져있긴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도 중국에 보내는 저런 표현들이 치당태평송의 구절들의 수위에 못지 않았다. 물론 전후사정을 보면 세 나라 모두 진심 따윈 없이 외교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말뿐인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일단 을지문덕때 싸웠던 수나라는 고구려보다 먼저 망했긴 했지만 그 뒤를 이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끝내 고구려는 져 멸망했지만 그렇게 기었던 신라는 끝내 삼국 중 유일한 승자가 되어 200년 이상 왕조를 더 이었다. 잊지 말자 강해서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거다. 역사 속에서 아무리 강한 대제국이라 해도 200년을 넘기지 못하는가 하면 약소국이라 해도 그 이상을 간 경우는 많다. [13] 고려 발해의 북방영역 대부분을 통합하지 못했으니 신라 통일과 영토적 한계성은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으며 고려의 통일은 거의 '신라가 통일했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면 고려의 통일도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간에 고려는 근본적으로 외세의 개입없이 자주적으로 통일을 했고, 북방의 발해유민들도 대거 받아들였으며, 북진정책을 국시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신라의 통일과는 차이가 존재하는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고려의 통일만이 진정한 통일이라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14] 물론 이 또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골품이 관직의 상한선을 결정하는 탓에 최치원과 같은 능력있는 6두품들이 6번째 관등 아찬위로 올라갈 수 없어서 좌절했다는 기록을 두고 현대인들은 골품제의 배타성, 폐쇄성에 대해 한탄하지만, 관점을 고대국가 수준으로 낮추어서 달리 바라보면 이는 피정복지나 병합된 국가 출신 인물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개방하였다는 뜻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금관가야 왕족 출신의 김유신은 진골에 편입되어 대우받았고 고위직에 올라 삼한일통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15] 또한 최치원을 비롯한 6두품들의 진급상한선인 아찬역시 찬찬히 놓고 보면 정말로 그렇게 낮은 직위인가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아찬은 신라에 9개밖에 없는 한개 주의 최고 지배자인 도독의 자리까지 임명될 수 있으며, 이들이 얻지 못하는 직위는 상대등이나 중시( 시중)처럼 유사시 왕권을 바라볼 수도 있는 최고위직 정도밖에 없었다. 당장 백제 16관등 중 최고위 관등이었던 좌평을 신라 관등에 편입할 때 이들이 받은 관등이 일길찬이었고 이를 승진시켜 아찬으로 대우하였다. [16] 또한 신라의 1~5위 관등 중 신라 초기부터 있었던 관등인 2, 3, 4위 이찬, 잡찬, 파진찬는 각각 신라 상대의 최고위 3개 씨족 박, 김, 석씨 씨족집단의 수장에게 주어졌던 것으로 추측되며 1위 이벌찬과 5위 대아찬은 이후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생각했을 때, 왕위계승권까지 주어지는 이러한 직위를 신하, 또는 외부인 출신들에게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여 폐쇄적이라는 인식은 지나친 감도 있을 것이며, 오히려 신라 초중기의 개방적 사회상 속에서 ( 탈해 이사금 시기에 왜인 출신 귀화자 호공 대보즉 왕 다음의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왕권 안정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라고 보는 것이 옳을 수 있다. [17] 다만 골품제는 영구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단에서 혈통이 멀어지면 내려가고는 했는데, 가령 신라 상대의 최고위 3개 씨족 중 하나였던 씨가 하대 신라 대에서는 5~6두품까지 내려갔다는 점, 또 피의 순수성을 강조한 나머지 성골이 거의 사멸되어 당대에 상상하기 힘든 여자를 왕위에 올린 뒤에야 진골에게 왕위가 돌아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렇게 오르는 것은 불가능해도 내려가기는 쉬운 혈통구조는 분명 폐쇄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당장 고구려만 봐도 외부 유이민계 집단 출신이지만 국가에 커다란 공을 세우고 왕족과 혼인하여 신분을 상승시킨 온달의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18] 비슷한 이유로 대중으로부터 자주 폄하되는 나라가 바로 조선이다. [19] 다만 이건 어느 정도 이견이 있는데, 진짜 결말은 천문령 전투 발해 건국이 진짜 결말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0] 사실 기벌포와 매소성에서 당군을 이기고 나서도 나당전쟁은 끝나지 않았는데, 토번의 공세에 당나라가 주력군을 수도 장안 인근의 관중일대로 '잠시' 이동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요서일대에 거주하던 거란이 당나라에 대항하고, 고구려유민과 말갈인들이 동모산에서 일어나게 되자, 동북방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당나라의 대외정책이 신라에 대한 추가공격을 포기하고 유화책으로 변하게 되었다. [21] 실제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현재 조선의 상황과 신라의 상황을 비교하면서 "신라때보다 왜 조선이 안 좋은 거냐?" 라는 식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22] 치당태평송을 보낼 때에 신라의 상황은 매우 암울하였는데, 선덕여왕때에 합천의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낙동강 중류지역을 백제와 경계로 두게 되었다.(이때 김유신이 압량주도독으로 백제전선 지휘관이자, 수도인근지역 방위를 책임지는 지휘관으로 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서 신라는 한강유역에 대한 통제력이 떨어지고, 중국과의 교섭통로마저 사라질 위기였다.(한강유역이 위험하다고 병력을 파견하다가 백제가 경주를 공격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는 상황이였고, 그것도 아니라면 상주일대만 공격해 교통로를 끊어 버리면 한강유역은 더이상 신라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도 못할 것이였다.) [23] 이러한 행위는 무례하게 보일 수 있으나 먼저 무례를 행한 건 소정방이지 김유신이 아니다. [24] 미국은 자국과 동맹국이라면 독재국가라 할 지라도 OK하지만 반미국가면 민주국가라 해도 NO를 외치며 중국은... 더 말할 것도 없다. [25] 당시의 개념상 삼국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에는 매우 어려운데,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와의 연관성(최소한 지배층 내에서 이러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신라는 이러한 내용도 없다. 사실 부여계란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와 백제는 삼국시대 수백년간 서로 멸망시키려고 치열하게 싸웠지 같은 동족이라고 친하게 지내고 그런 것이 거의 없었으니 연관성이 있어도 딱히 의미가 없었지만. 그리고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19세기 서구문물이 유입되는 구한말과 강점기시기에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이 논리대로라면 인천 상륙 작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바란 광주 시민들,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미국과 일본의 보호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도 외세가 도와준 반민족 매국노가 된다.(민족근대론은 확정되지 않은 이론이며 사실 근대에 생긴 민족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것과 한국인이 생각하는 민족과는 다른 개념이다. 즉 근대적인 민족이란 정의는 없었으나 그게 3국간 동질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실제로 백제와 고구려는 화친때마다 같은 뿌리임을 언급하였으며 신라 또한 백제와 고구려와 말이 통하는 수준의 동질성을 보여준다. 아직 밝혀진게 많이 없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지 근대민족론 하나로 그들간 동질성이 없었다. 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피터지게 싸웠다는 것이 같은 동질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것은 확대해석의 경향이 있다. 이 세계에는 같은 민족임에도 혹은 같은 뿌리를 두고도 분열하여 서로를 멸망시키려 한 일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26] 광개토왕릉비에 404년 백제의 지원을 통해 왜군이 고구려의 대방(황해도) 땅을 침공한 것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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