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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5:00:36

고베 연속 아동 살상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범인의 인적 사항과 생애3. 사건의 발단4. 사건의 경과
4.1. 첫 번째 사건4.2. 두 번째 사건4.3. 세 번째 사건4.4. 범인의 성명문4.5. 범인 검거 과정
4.5.1. 범인 특정4.5.2. 범인 체포 과정4.5.3. 범인 검거4.5.4. 체포 이후
5. 가해자 가족6. 피해자 유족7. 사건의 여파8. 범인의 근황9. 음모론?10. 창작물에서의 사카키바라 사건11. 관련 문서

1. 개요

神戸連続児童殺傷事件、酒鬼薔薇聖斗事件 / 고베 연속 아동 살상 사건, 사카키바라 세이토 사건
사건 당시의 뉴스 보도. 사건이 요약된 방송.
테레비 오사카에서 2022년 방영한 방송.
당시 사건 조사 과정 및 관련자들이 고베 연속 아동 살상 사건에 대해 돌아보는 방송으로 유족들의 모습도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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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방불명되었던 초등 6학년 남아 살해
스마 연쇄 살인 사건 현장 근처
- 고베신문, 1997년 5월 27일자 저녁 기사. 이날은 살해당한 준의 신원이 밝혀진 날이었다.
1997년 2월에서 5월까지 일본에서 토모가오카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당시 만 14세 남중생 3학년 아즈마 신이치로(東真一郎)가 아동을 상대로 저질렀던 연쇄 살인 사건. 공식 명칭은 '고베 아동 연속 살상 사건(神戸連続児童殺傷事件)'이지만 범인이 가명으로 사용한 酒鬼薔薇(사카키바라)[1]라는 이름 때문에 '사카키바라 사건' 또는 '사카키바라 세이토 사건'이라고 불리며 일본에서 소년법 적용 연령이 개정되는 데 큰 영향을 준 사건이기도 하다. #

'사카키바라 세이토(酒鬼薔薇聖斗)'라는 이름은 고양이를 살해하는 게 낙이었던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에 열심히 그린 자작 만화의 캐릭터에서 따왔다고 하기도 하고, 악행을 저지르던 나쁜 쪽의 자신에게 지은 이름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만화의 내용은 담력 시험을 하기 위해 한밤중 학교에 모인 학생들을 '사카키바라 세이토'가 기괴한 형태의 낫으로 차례차례 끔살한다는 B급 호러 영화 같은 전개라고 한다.

2. 범인의 인적 사항과 생애

<colbgcolor=#000><colcolor=#fff> 사카키바라 세이토
[ruby(酒,ruby=さか)][ruby(鬼,ruby=き)][ruby(薔,ruby=ば)][ruby(薇,ruby=ら)][ruby(聖,ruby=せい)][ruby(斗,ruby=と)]
파일:naver_com_20141011_112330.jpg
범죄를 저지른 만 14세 당시의 모습
본명 아즈마 신이치로 ([ruby(東,ruby=あずま)][ruby(真,ruby=しん)][ruby(一,ruby=いち)][ruby(郎,ruby=ろう)])
출생 1982년 7월 7일 ([age(1982-07-07)]세)
효고현 고베시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65cm (만 14세 기준)
가족 부모, 남동생 2명
범죄 유형 연쇄 살인
토막 살인
살인 미수
파일:D2D18CC2-B8B2-41D9-8264-CCBAAB1A783F.jpg
4세 때의 아즈마. 안고 있는 사람은 그의 조모.
[clearfix]
아즈마 신이치로는 1982년 7월 7일 효고현 고베시에서 상장 기업인 중공업 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와 가정주부인 어머니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평탄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는 잦은 업무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 적었고 들어오는 날마저도 늘상 가정에 무관심했으며, 어머니는 그가 5살 때부터 집단생활에서 부끄러울 일이 없도록 식사 후 책상 정리나 대소변 가리기 등을 잘 해낼 것을 요구하며 늘상 꾸짖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과한 꾸짖음에 의해 아즈마는 유치원 때부터 1년에 3번 정도 특별한 몸의 이상 없이 기운이 빠지거나 구토를 하는 증상에 시달렸고 무언가 잘못을 하고 나면 늘 울부짖으며 어머니한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부모에게 다리가 아프다고 했으나 병원에 데려가는 등의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고 소아 천식을 가진 셋째 동생을 향한 부모의 태도와의 확연한 차이에 자신보다는 동생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며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권법 도장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길에서 만난 고양이를 데려와 몰래 소중히 키우던 이때까지는 그래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아이였으나,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무렵 어머니의 꾸짖음에 눈의 초점을 맞추지 못한 채로 큰 소리로 울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방언을 빠르게 말한 적이 있어 병원을 찾아간 결과 가벼운 노이로제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러한 아즈마를 사랑으로 감싸주던 것은 자신의 할머니였으며 그가 꾸짖음에 버티지 못할 때면 할머니의 방으로 도망 오는 일도 자주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즈마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무렵인 1993년 할머니가 노환으로 사망하자 그는 죽음이라는 커다란 충격에 직면했다. 이후로도 종종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할머니의 등에 기대어 전신으로 따스함을 느끼던 그리운 추억을 회상하던 그는 문득 생전 할머니가 사용하던 안마기에 성기를 가져다 대고 사정을 해버렸다. 그 순간을 아즈마 신이치로는 이렇게 회상했다.
내 안의 '성(性)'과 '죽음(死)'이 '죄악감(罪悪感)'이라는 접착제로 결합된 순간이었다.
그러한 자위행위를 스스로 '모독의 의식(冒涜の儀式)'이라 명명한 그는 할머니가 생전 키우던 시바견도 노환으로 죽고 나자 남은 사료를 먹으려고 하는 길고양이에게 분노하며 커터칼로 고양이를 살해했다. 이후 그는 길에 개구리를 한 줄로 세워두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 살해하거나 다른 길고양이와 쥐, 비둘기, 벌레, 달팽이 등을 잡아서 해부하는 등 이상 행동을 저지르며 자신의 성적 취향과 가학성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근접하게 느끼지 않으면 성적으로 흥분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동물들을 죽이는 일에 질린 아즈마는 '자신과 같은 인간을 죽여보고 싶다. 그때 어떤 감촉이 들지 이 손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는 살인 충동에 휩싸였고 학교에서도 사소한 문제 행동을 일으켰다. 그 수많은 기행과 문제 행동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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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어머니와 함께 뇌 소아과 병원에서 카운셀링을 받았다. 어머니는 "다소 끈기가 없다고만 느껴 깊게 생각하지 않았으나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문제 행동을 연속해서 일으키고 거기다 집요한 성격과 물건을 불태우는 행위를 이상하게 여겨 아동 상담소에 털어놓았더니 병원에서 상담을 받아 보라는 조언을 듣고 방문했다", "뇌에 종양이 생기면 정서가 불안정해지고 집요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며 전문의의 진찰을 받았다. 이때 아즈마에게 내려진 진단은 주의력 결핍·다동성 장애( ADHD).

어머니는 아들의 자립성을 존중하고 과도한 간섭을 멈추며 칭찬으로 자랄 수 있도록 하라는 조언을 듣고 어릴 적 행했던 과도한 훈육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조사 때 경찰도 지적한 적이 있을 정도의 과잉 보호를 하기 시작했다. 아들이 저지르는 심각한 비행에도 꾸짖기보다는 오히려 아들에게 불리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학교 측에 과한 대응을 하는 등 아들을 감싸는 면이 있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첫 번째 사건을 벌이기 불과 5일 전인 1997년 2월 5일 아즈마는 자신의 학교에서 면식이 전혀 없던 어느 여학생을 자택까지 몰래 따라가는 사건을 일으켰다. 여학생은 자신과 같은 학교의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자택인 시영 주택 3층으로 도망쳤고 창문으로 살짝 내려다봤을 때 아즈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틀 뒤인 7일 저녁 세면대에서 옷을 갈아입으려던 중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도둑이 들었다고 생각하여 매우 크게 소리를 지르니 문이 세게 닫혔고 여학생은 서둘러 걸쇠로 문을 잠갔다. 그럼에도 밖에서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려 문 가운데 작은 렌즈로 밖을 들여다보니 그곳에는 이틀 전 자신을 쫓아오던 아즈마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3일 후인 10일(첫 번째 사건 발생일), 여학생은 방과 후 친구와 헤어지다 학교 3층에서 아즈마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시 친구를 불러 도망가던 아즈마를 불러 세웠다.[2] 학교에서 지정해서 착용해야 하는 신발에 아즈마의 이름이 쓰인 것을 보았고 이어서 선생님께 보고해 학급 앨범에서 얼굴을 확인한 뒤 자신을 따라오던 사람이 아즈마 신이치로임을 특정했다. 이 건으로 아즈마는 오후 5시경 어머니와 같이 학교에 불려 나갔는데 이때는 이미 그가 첫 번째 사건을 일으킨 이후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5월 13일, 세 번째 사건을 일으키기 불과 9일 전 아즈마는 다른 반 남학생을 죽기 직전까지 때리는 사고를 쳤다. 남학생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즈마와 친하게 지내 왔으나 그가 자신의 욕을 하고 다니자 아즈마는 손목시계를 찬 채 그를 구타하고 칼을 꺼내 "다음번에 또 그러면 그땐 뭘 할지 몰라"라고 협박하였고 남학생은 자신이 살해당할 것이라 여겨질 정도의 깊은 공포를 느끼고 경찰에 피해 신고를 하려 했으나 일을 크게 벌리지 않는 게 낫겠다는 주변의 의견에 신고를 포기하고 다음 날 바로 전학을 갔다.[3]

이 일이 있은 후 그를 면담한 교사가 "잘못했으면 그 아이가 죽을 수도 있었어"라는 말에 "사람의 목숨은 그렇게 소중한 건가요. 개미 바퀴벌레의 목숨과 같은 거 아닌가요"라고 대답하며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성명문에도 적혀 있던 야채, 즉 부수기 쉬운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극도의 사이코패스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학교에 등교를 하지 않게 된 아즈마 신이치로는 5월 16일부터 어머니와 함께 청소년 상담소에 다니기 시작했다. 사카키바라 사건을 일으킨 5월 27일에도 아즈마는 어머니와 상담소에 들렀다. 6월 5일, 9일, 11일(이날은 부모만 참가했다), 16일, 24일(상담소에서 가정 방문)에 걸쳐 체포되기 직전까지도 상담소를 다녔지만 결국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 채 아즈마는 체포되었다. 단, 상담소를 다니고 얼마간이 지났을 때 어머니에게 "나 그림 배울까? 미술 학교에 가도 괜찮을까?"라고 물어봤고 어머니는 "괜찮네. 선생님에게 여쭤보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전문 학교를 찾아볼게"라는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는 심하게 꾸짖었던 어머니도 적극적으로 아들의 교화와 장래를 밀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사건의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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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 사건 연쇄 발생 중!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어린이 여러분은 외출 시 주의하세요.
사건에 관련된 정보를 알고 계신 분은 경찰에 연락해 주세요."
범인 특정 전 경찰이 동네에 내건 경고판.

1997년 5월 27일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에 위치한 토모가오카 중학교 정문에서 검은 비닐봉지 안에 그 당시 초등학생 6학년 남학생[4]이었던 하세 준의 훼손된 머리가 절단된 채로 발견되었다. 피해자는 물론 피해자의 가족들 또한 주변에 전혀 원한을 살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피해자의 입안에서 한 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붉은색 펜으로 적힌 쪽지였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파일:사카키바라 사건 편지 1.jpg
さあ ゲームの始まりです
愚鈍な警察諸君
ボクを止めてみたまえ
ボクは殺しが愉快でたまらない
人の死が見たくて見たくてしょうがない
汚い野菜共には死の制裁を
積年の大怨に流血の裁きを
SHOOLL KILL
学校殺死の酒鬼薔薇
자, 게임이 시작됐습니다
우둔한 경찰 제군
나를 저지해 보시게
나는 살인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
사람이 죽는 게 보고 싶어 미치겠어
더러운 채소들에게는 죽음의 제재를
수년간에 걸친 큰 원한에 유혈의 심판을[5]
SHOOLL KILL[6]
학교 살인의 사카키바라[7]

4. 사건의 경과

4.1. 첫 번째 사건

1997년 2월 10일 오후 4시 35분 무렵 고베시 스마구 단지 옆 인도에서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 2명의 뒤에서 접근해 망치로 머리를 차례차례로 가격했고 그중 한 명은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전치 1주의 부상을 당했다.

피해 여학생 중 한 명이 범인은 블레이저 코트를 입고 학생 가방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피해자의 부친은 아즈마가 당시 다니고 있던 중학교에 연락해 학생들의 사진을 보여 달라고 했으나 학교 측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이유로 경찰 측을 통해 요청하라며 거부했다. 그러나 부친이 경찰에 신고한 후 경찰을 통해 다시 연락하였지만 재차 거부당하였고 나중에 '학교가 범인을 감싼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해당 학교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더구나 아즈마는 후에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망치로 내려친 순간 이성이나 양심을 잃어버렸다. 이 선을 넘은 다음에는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범인을 잡았더라면 나중에 벌어질 사건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니 학교 측의 안일한 대처에는 참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첫 번째 사건은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의 자세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다.

4.2. 두 번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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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피해자 야마시타 아야카(山下彩花)

1997년 3월 16일 오후 12시 25분, 고베시 스마구 류가다이에서 길을 걷고 있던 초등학교 4학년 야마시타 아야카(山下彩花, 1987 ~ 1997)에게 "손 씻을 곳 없니?"라고 물어 학교를 안내받은 뒤 손을 씻고 나서는 "답례를 하고 싶으니 이쪽을 봐줘"라고 말한 후 후두부를 1.5kg의 망치로 내리쳤다. 피해자는 도망쳤으나 뇌 좌측에 손상을 입어 1주일 후인 3월 23일에 결국 사망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0분 후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다른 여자아이의 복부를 13cm가량의 나이프로 찔러 위를 관통하는 전치 2주의 상처를 입혔지만 다행히 죽지 않았다. 등의 정맥 바로 직전에 칼이 멈추었으나 조금만 더 찔렸으면 목숨은 구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아즈마는 이후 태연히 집에 돌아온 뒤 기사화된 사건을 보며 어머니의 "근처에 있었던 아이라 안타깝다"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 일은 꿈이었나? 난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가? 어디부터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고 혼란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체포된 뒤의 진술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하여 한번 '사람을 죽여야만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 1단계로서 인간을 죽이기 쉬운 급소를 찾기 위한 실험을 하기로 하였다. 내가 다치지 않기 위하여 반격할 수 없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였다. 피해자에게는 어떤 원한 및 감정도 없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아즈마가 얻은 살인을 저질러도 잡히지 않는다는 확신이 사태를 더욱 더 악화시켰다.

4.3. 세 번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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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피해자 하세 준(土師淳)

1997년 5월 24일 오후 2시경 자전거를 타고 수차례 동네를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를 만한 적당한 사람을 찾던 아즈마는 타이노하타 초등학교 주변 도로에서 초등학교 6학년인 당시 만 11세의 하세 준(土師淳, 1986 ~ 1997)을 발견했다. 준은 아즈마의 동생과 친해 아즈마와도 안면이 있었고, 체격이 작았던 데다 지적 장애까지 있었던 탓에 그의 범행에 휘말리고 말았다.

아즈마는 하세 준과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진술했으나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즈마와 준은 함께 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즈마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뒤에서 몰래 준의 뺨을 꼬집는 등의 괴롭힘을 저질렀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교사의 인솔 아래에 준의 집을 방문해 사죄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아즈마의 모친은 평소 준이 아즈마에게 괴롭힘당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6학년이 되고 나서 친한 친구들과 반이 달라졌으니 분명 외로워서 그러는 거야“라며 준에게 사과 한마디 없이 자신의 아들만을 감싸고 돌았다고 한다. 지적 장애가 있는 준은 괴롭힘을 당했음에도 저항하거나 부모님에게 보고할 수 없었으며, 아즈마는 약자인 그를 대놓고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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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장소.

준은 아즈마의 동생과 친해진 뒤 종종 집에 놀러 왔는데 그때 준이 거북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즈마는 준에게 "산 너머에 거북이가 있다. 같이 보러 가자."고 말하며 동네 근처에 있는 산 정상의 TV 안테나 기지 풀숲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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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초콜릿 언덕이라고 불렸던 사건 현장으로 가는 길(현재 폐쇄).

이 탱크산이라는 곳의 지명은 '타츠노야마(竜の山)'였지만 탱크가 있는 산이라 '탱크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렸다. 아즈마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그에게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자신만의 성역'이기도 했다.

아즈마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탁구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등교를 거부하기 한 달 전인 1997년 4월 무렵부터 탁구에 흥미를 잃고 학교에 출석하는 대신 인적이 드문 이 산에 오르기 시작했고 정상 부근의 케이블 기지 위치를 파악하여 항상 그곳에서 책가방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잔 뒤 귀가하곤 했다. 그렇기에 산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고 피해자를 수월하게 유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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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시체 일부가 발견된 탱크산의 안테나 기지를 경찰이 수색하는 모습(마이니치 신문).

준의 "거북이는 어디 있어?"라는 물음에 아즈마는 지문이 남을 것을 우려해 장갑을 낀 상태로 왼팔을 준의 목에 두르고 뒤에서 준을 불시에 공격했다. 그러나 쉽게 죽을 것이라는 아즈마의 예상과 다르게 준은 울부짖고 소리를 지르며 강하게 저항했고 바닥으로 밀쳐져 다시금 목이 졸렸음에도 사망하지 않았기에 당황한 아즈마는 준을 다시 앞으로 눕히고 폭행을 가하며 온 힘을 다해 목을 졸랐다. 그래도 준의 저항이 멈추지 않자 아즈마는 순간 칼로 찔러 살해할까 했으나 칼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고 옆에 있는 돌로 구타해 살해할까도 했으나 흙에 박힌 돌이 빠지지 않아 실패하였다. 결국 몇 분 뒤에 자신의 운동화 끈을 풀어 목을 졸라 살해하였고, 준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소리가 멈춘 것을 확인하였다.

체포 뒤에 아즈마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그 만족감은 그때까지 내가 사람을 죽였을 때를 생각해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만족감보다 더욱 멋진 것이었습니다.

확실하게 저는 3월 16일 스마구 류가다이에서 두 명의 여자아이를 때리거나 칼로 찔렀고, 나중에 제가 망치로 때린 아이는 죽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그때는 한순간의 일이라 그다지 만족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준 군의 경우엔 죽이느라 시간이 꽤 걸렸기 때문에 그만큼 만족했던 것이었습니다. 준 군을 죽이고 얻은 만족감 또한 그다지 길게는 안 가서, 시체를 어디에다 숨겨야 할지 고민할 때쯤엔 만족감이 사라졌습니다.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고민하던 아즈마는 수풀이 우거진 안테나 기지 밑에 시체를 숨기려고 했지만, 입구에 자물쇠가 잠겨 있어 인근 철물점에서 훔친 쇠톱과 자물쇠를 이용해 안테나 기지의 자물쇠를 파손한 뒤 그곳 아래에 사체를 숨기고 유유히 산을 내려왔다.

아동 살인이라는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아즈마는 곧바로 친구와 만나 놀았고 저녁 6시쯤 귀가해 어머니가 TV 프로그램을 보며 박장대소를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 순간 왜인지 머리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역시 어머니는 돼지 새끼다. 저 녀석은 인간도 아냐, 어머니도 아냐'라고 생각하며 경멸에 찬 표정을 지었고 이후 어머니에게 하세 군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으나 별다른 반응 없이 "흐~음"이라는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당일 저녁 8시 50분, 준의 가족의 실종 신고로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날 밤이 늦도록 자는 대신 하루의 살인 행각을 뒤돌아보던 아즈마는 문득 '사람을 잘라 손에 전해지는 감각을 느끼고, 자른 후의 단면을 보고 싶다', '지금까지 고양이 수십 마리의 목을 잘라왔지만, 고양이는 칼 한 자루로도 해체할 수 있었으니 사람을 대상으로 해 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품고 내일 다시 탱크산에 올라가서 훔친 쇠톱으로 목을 잘라 보겠다는 다짐(?)과 함께 잠에 들었다.

다음 날 5월 25일, 아침 10시에 기상한 아즈마는 식사 후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에 집에서 쓰레기용 검은 비닐 두 장과 여분의 칼 세 자루를 챙겨 집을 나섰다. 그리고 살해 현장을 다시 찾아와 준의 시신을 비닐봉지 위에 두고, 목을 실톱으로 단숨에 좌우로 2번 잘라 단면을 드러냈다. 그리고 왼손으로 준의 이마 근처를 누르면서 목을 자르기 시작했다.[8] 이윽고 한 손은 시체의 이마를 누른 채로 시체의 목 부분을 수회에 걸쳐 쇠톱으로 절단한 뒤 머리카락을 붙잡고 머리를 몸에서 당겨 분리했고, 머리를 바닥에 놓고 정면에서 한동안 감상하며 '이 신비한 영상은 내가 만든 거야'라는 기묘한 성적 만족감으로 사정해 버리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아즈마 신이치로의 기괴한 사이코적 면모가 또 하나 드러나게 되는데, 바로 준의 잘린 목과 대화를 시도했다는 것이었다.
준(을 연기하는 아즈마): 잘도 날 죽였겠다! 얼마나 괴로웠는데!

아즈마: 네가 그때 그 장소에 있었던 게 잘못된 거잖아?

이 당시 시체의 눈은 반쯤 열린 상태였는데 아즈마는 시체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졸린 듯한 시체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용마의 칼이라고 자칭한 작은 칼로 양쪽 눈을 찌르고 2~3회가량 눈꺼풀을 찢어발겼다. 이어서 입을 양쪽 귀 부근까지 칼로 찢었고 한술 더 떠서 검은 비닐봉지에 고인 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시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나의 피는 더러워져 있으므로 순수한 아이의 피를 마시면 더러워진 피를 맑게 할 수 있다, 어린아이의 목숨을 앗아 가고, 기분 좋다고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감의 표현이다"고 진술했고 피에서는 금속을 핥는 듯한 맛이 났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프로파일링 과정에서는 이 말을 거짓말으로 추측했다.

살인의 흥분을 나중에 기억하기 위한 기념품이라며 혀를 잘라 가져가려고 했으나 사후 경직에 의해 입이 열리지 않아 포기했다. 그다음 비닐로 포장한 머리를 배낭에 넣고 탱크산 근처의 이리즈미의 연못(入角ノ池)이라 불리는 작은 연못에서 머리 부분이 보이게끔 비닐을 꺼내서 2, 3분간 들여다보았지만 크게 만족하지 못해 연못 뒤의 나무뿌리 구멍에 머리가 든 비닐 봉투를 숨기고 돌아갔다.

이후 조사에서,
"남자아이의 시체의 눈이나 얼굴을 보면서 목을 자르는 데 거부감은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별로 없었습니다. 내가 죽인 시체고, 말하자면 나의 작품이었으니까요."
라고 답했다.

5월 26일, 경찰은 공개수사를 실시하여 경찰, PTA, 소방관 등 150여 명을 동원해 수색하였다.

아즈마는 전날 귀가 후 인간의 시체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얼마나 변해 가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다시 연못으로 가서 비닐 봉투에서 꺼낸 머리를 5분 정도 관찰했다. 그러나 피부가 창백해져 있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기에 실망하고 연못에 범행에 사용한 쇠톱을 버린 뒤 귀가 후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집에 머리를 가지고 돌아가 물로 씻어낸다.

머리를 씻긴 이유에 대해 아즈마는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살해 현장이 특정되지 않기 위해 시체에 묻은 피와 흙, 풀잎 등을 제거하기 위해서. 또 하나는 경찰의 눈을 속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부탁이니 경찰의 눈에서 날 멀어지게 해 줘. 너의 첫 무대야'라는 의미를 담아 대야에 물을 받아 호스로 물을 뿌리며 마치 반려동물을 씻기듯이 꼼꼼하게 씻겼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흥분으로 인해 발기하였고, 머리카락을 말리고 빗으로 빗어주다 다시 한번 사정감을 느꼈다고 한다.

체포 후 조사에서 피해자의 머리를 절단할 때에는 혀를 잘라 가려고 했으면서 이 시점에서는 다시 혀를 자를 생각이 없었냐는 경찰의 질문에 아즈마는 "하세 군의 혀를 자르려고 한 것은 머리를 자를 때의 감동을 다시 회상하기 위함이지만, 이때는 시간이 너무 지나서 만약 혀를 자른다고 해도 그 혀를 보며 떠올리는 것은 머리를 씻길 때의 기억뿐이기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과연 일반인과는 다른 정신 상태의 대답을 꺼냈다.
5월 27일 오전 1시경,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부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창문을 통해 내려갈 계획을 세운 아즈마는 자택의 계단은 부모님 방 바로 옆이라 소리가 날 것을 우려하여 2층에서 다이렉트로 밖으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고 무거운 머리를 들고 내려가기 힘들 것을 상정해 책상에서 전기 코드 몇 줄을 꺼내 시신의 머리가 든 배낭에 묶고 서서히 아래로 옮겼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온 아즈마는 피해자의 머리가 든 배낭을 자전거 앞 바구니에 놓고 자신이 다니던 토모가오카 중학교까지 가져갔다. 자신이 다니는 중학교 앞 정문에 시체를 놓으면 범인이 재학생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 같았다는 중학생답기 짝이 없는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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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머리가 놓여진 토모가오카 중학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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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피해자의 머리를 옮긴 자리.

처음에는 중학교 정문 담 위에 머리 부분을 두어 보았으나 금방 떨어져 버려 하는 수 없이 정문 중앙에 두고 성명서를 입에 물렸다. 이 성명서는 준의 머리만으로는 혐의점을 전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아즈마가 범인의 인물상을 창조해 내기 위해 여러 책들에 나온 문장과 한자들을 엮어 직접 쓴 것으로, 글은 여러 번 고쳐 쓰는 대신 1시간 30분에 걸쳐 한 번에 써 내려갔다고 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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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게임이 시작됐습니다
우둔한 경찰 제군
나를 저지해 보시게
나는 살인이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어 [10]
사람이 죽는 게 보고 싶어 미치겠어
더러운 채소들에게는 죽음의 제재를
수년간에 걸친 큰 원한에 유혈의 심판을
SHOOLL KILL[11]
학교 살사의 사카키바라(学校殺死の酒鬼薔薇)

아즈마는 어둡고 컴컴한 한밤중에 교문 앞에서 자신이 쓴 성명문을 입에 물린 머리를 몇 분간 바라보며 성적 흥분이 최고조에 달해 성기에 아무 자극도 주지 않았음에도 몇 번이고 사정했다고 진술했다. 그 후 오전 6시 40분, 출근하던 수위가 머리를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하였고 조사과장은 며칠 전에 실종 신고가 들어온 준은 아니리라 생각했으나 머리의 신원이 밝혀지자 충격 속에서 탄식을 내뱉었다고 한다.

아즈마는 그날 저녁 집에서 TV를 보다가 경찰의 수사에 의해 본인이 숨겨 놓은 안테나 기지 밑에서 하세 준의 시체가 8시간 만에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시신의 발견이 솔직히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여 깜짝 놀랐다. 세 번째 살해는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사건으로 발전하여 연일 뉴스에 보도되고 있었던 것이다.

매스컴에선 범인을 체격이 큰 30대~40대, '검은색 블루버드(차 종류)를 탄 남자, 스마구가 아닌 다른 지구에 사는 사람이라는 보도를 송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경찰에 의해 어느 정도 의도된 누설이었다. 이 시간대에 비닐 봉투를 들고 배회하던 중년의 목격담 또한 실제로 있었으나 혐의는 없었다.

성명문에서 드러난 중2병미성숙한 문장으로 고베 스마 경찰서 생활 안전부 소년과는 애당초부터 호러 비디오 절도, 학교 내에서의 잦은 문제 행동과 폭력 등을 저질러 요주의 인물이었던 아즈마 신이치로에게 방향을 맞춰 수사했고 범인이 소년범이라고 가정된 이상 신상 명세의 문제 등으로 수사는 극비리로 진행되어야 했기 때문에 일부러 틀린 범인상이 매스컴에 보도되어도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즈마는 그 보도를 보며 자신이 완전히 수사망에서 벗어나 있다고 확신했고 6월 4일 고베 신문사 앞으로 두 번째 성명문을 보냈다(상세 내용 후술).[12]

아즈마는 이 당시 자신이 너무 우쭐댔다고 증언하였다. 편지를 더 보내면 필적 감정으로 들킬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를 염려했으면서도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수사에 더욱 혼선을 주기 위해 경찰이 착각하여 만들었던 '고등 교육을 받은 성인 남성' 범인상에 맞춰서 성명문을 썼다.[13] 실제로 성명문을 분석한 많은 전문가들이 범인상을 '엘리트, 고등 교육을 받은 남자'로 예상했다.

그러나 프로파일링의 대가로 손꼽히는 로버트 K. 레슬러가 일본에 가서 이 사건의 간단한 프로파일링을 했는데 그가 그린 범인상은 오히려 아즈마와 상당히 유사했다. 아즈마의 이 편지로 인해 경찰은 해당 작문 수준을 중학생으로 가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즈마가 재학 중이던 중학교에서 아즈마가 제출한 《징역 13년》이라는 작문의 필체가 성명문의 필체와 일치한다고 판단한 경찰은 마침내 심증을 굳히고 아즈마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4.4. 범인의 성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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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보낸 첫 번째 편지(앞쪽) 및 성명문(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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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성명문 전문.

그러던 중 고베 신문사에 두 번째 성명문과 첫 번째로 보내진 것과 내용이 같은 편지가 다시금 날아들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고베 신문사에게.

전에 밖에 나왔을 때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았는데, 아나운서가 내 이름을 잘못 읽어서 '鬼薔薇(오니바라)'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람의 이름을 잘못 읽는 짓은 더할 나위 없이 우롱하는 행위이다. 표지에 적혀 있는 문자는 암호도 수수께끼도 취음자[14]도 아니다. 거짓 없는 내 본명이다. 내가 존재한 순간부터 그 이름이 붙어 있었고, 하고 싶었던 일도 제대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나에게는 국적이 없다. 지금까지 남에게서 자신의 이름으로 불린 적도 없다. 만약 내가 태어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나 자신으로 있었다면, 일부러 절단한 머리를 중학교 정문에 방치하는 행동 따위는 취하지 않았겠지. 하려고만 마음먹었다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몰래 살인을 즐길 수도 있었을 테지. 내가 일부러 세상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투명한 존재로 남아있을 나를, 적어도 당신들의 공상 속에서라도 실재하는 인간으로서 인식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과 동시에 투명한 존재인 나를 만들어 낸 의무 교육과, 의무 교육을 탄생시킨 사회에 대한 복수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복수하는 것뿐이라면, 단지 지금까지 등에 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뿐이기에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단 한 명, 나와 같은 투명한 존재인 벗에게 상담을 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비참하지 않고 가치 있는 복수를 하고 싶은 거라면, 당신의 취미이기도 하고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 아직 목적이기도 한 살인을 섞어서 게임으로 즐기고, 당신의 취미를 살인에서 복수로 바꾸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당신만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마음이 움직여서 나는 이번 살인 게임을 개시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도 나는 왜 내가 살인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 가지고 태어난 자연스러운 천성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살인을 하고 싶을 때만큼은 일상의 증오에서 해방되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다른 이의 고통만이 나의 고통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이 종이에 쓴 글을 통해 대강은 이해해 주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만, 나는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남다른 집착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 이름이 잘못 읽히거나, 내 존재가 더럽혀지는 일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 경찰의 움직임을 보면, 어쩐지 속으로는 귀찮아하는 느낌이 있는데 그걸 숨기고 얼버무리려고 한다고밖에는 보이지 않는다.[15] 내 존재를 무마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이 게임에 목숨을 걸고 있다. 잡힌다면 아마 목 매달려 죽겠지. 그러니 경찰도 목숨을 걸라고까지는 안 하겠지만, 더 분노와 집념을 가지고 나를 추적해 주게. 이 뒤로 한 번이라도 내 이름을 잘못 읽는다거나, 또다시 빛바래게 만드려고 하는 일이 있다면, 한 주 사이에 야채 세 개를 부숴버릴 겁니다.[16] 내가 아이들밖에 죽일 수 없는 유치한 범죄자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나에게는 한 인간을 두 번 죽이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

P·S 머리 부분의 입에 물린 편지의 글자가, 비인지 뭔지로 번져 읽기 어려웠던 것 같아서 그것과 똑같은 내용의 편지도 함께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친절하게도, 입안에 있던 첫 번째 성명서가 비에 젖어 알아보기 힘들 것을 고려해 내용이 같은 한 통을 새로 써서 다시 보냈다. 첫 번째로 보낸 성명서의 봉투에 쓴 KILL을 KILLER로 바꾸어 보냈지만 SHOOLL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오탈자는 여전했다. 이 때문에 이 또한 범인의 의도적인 계획일 것이라거나, SCHOOL의 오타가 아니라 일반인들은 모르는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일 것이라는 등의 추측이 난무했으나 검거 후에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낸 오탈자로 본인이 시인했다.

이와 함께 편지봉투에는
내 이름은 [ruby(酒鬼薔薇, ruby=사카키바라)][ruby(聖斗, ruby=세이토)]. 밤하늘을 볼 때 생각하면 좋겠지.[17]
라고 적혀 있었다.

4.5. 범인 검거 과정

4.5.1. 범인 특정

범인이 보내온 두 장의 성명문에는 모두 학교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고 경찰은 이에 초점을 맞추어 범행 현장 인근, 즉 토모가오카 중학교 출신의 품행 불량자 중 특별히 용의점이 있을 만한 20대부터 30대 사이의 남성 4명을 조사했지만 이들 모두가 범행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히메지 시내 의학 병원에 카니발리즘으로 인해 상담을 받은 자가 있다고 해서 조사했으나 그 남성 역시 24세의 컴퓨터 기사로 사건과는 관련이 없었다.

다른 현에 '세이토(聖斗)'라는 이름을 가진 가게가 있었는데, 이 이름이 '사카키바라 세이토(酒鬼薔薇聖斗)'의 근원은 아닌가 하는 제보가 들어와 조사했지만 가게 주인 아들의 본명이라 헛발질을 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수사 본부에는 하루에 약 1000건 이상의 제보가 밀려들어 왔고 그중에는 당연하게 엉터리 제보도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경찰은 꽤 빠른 시일 내에 위에서도 설명한 스마구 내 요주의 인물이었던 토모가오카 중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사건 2주 전부터 등교를 거부하고 있던 아즈마 신이치로에게 수사의 초점을 맞추었다. 등교를 거부하게 된 계기인 학교 내 폭행 사건으로 인해 피해자의 아버지가 스마 경찰서까지 찾아오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정보를 파악하고 있던 인물이었다.[18]

경찰이 아즈마 신이치로를 범인으로 특정한 계기 중 하나는 직무 질문이었다. 직무 질문(職務質問)이란 한국 불심검문과 같은 말로, 일본에서 거동이나 행색이 수상해 보이는 사람에게 경찰이 다가가 신분증이나 행선지를 묻는 범죄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는 의무적으로 하는 검문인데 사건 발생 뒤 스마구 일대에 혼자서 걷는 남성이 있다면 무조건 직무 질문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조사 본부가 아즈마를 마크하기 전인 5월 30일 오전 11시 반 등교를 하지 않고 돌아다니던 아즈마와 마주쳐 검문을 했다. 이틀 뒤인 6월 1일, 경찰은 토모가오카 2번지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며 배회하던 아즈마를 마주쳐 다시 한번 검문했다. 이때 경찰은 아즈마의 허벅지와 흰색 신발 끝에서 직경 3mm 정도의 혈흔을 발견했다.

이때 사건에 대한 경찰의 직무 질문이 시작되자 아즈마는 "스쿨이라는 글자가 틀렸거나 본인도 쪽팔린 건 아나 보다 별로 사용되지 않는 말이 써 있었기 때문에 학교나 경찰에 원한이 있던 것 같아요", "준 군이 살해당해서 슬프기만 한 건 아니고 반은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준 군에게는 미안하고 잔혹하지만, 같은 반인 우리 동생이 당했다고 생각하면 무서웠으니까....", "5월 24일 저녁에 준 군의 어머니한테 우리 집에 오지 않았냐는 전화를 받아서 행방불명이 된 걸 알았어요. 준 군은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모르는 척을 하는데 장난감이나 과자를 주면 따라갈지도 모르겠네요"라고 대답했다. 자신에 대해 묻는 질문에 "중학교는 매일 다니고 있어요", "초등학교 때는 육상부였습니다"라는 대답을 했으나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이때 그는 이미 등교 자체를 하지 않았고 초등학교 때 동아리 활동은 공예부였다. 이 발언은 전부 메모되었으며 당시에는 유의미한 증거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그가 검거되자 비로소 주목을 받았다.

또 하나의 증거는 아즈마가 소녀를 망치로 가격해 살해한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 이후 3~4월경에 같은 반 학생에게 불러주는 것을 컴퓨터로 대신 쓸 것을 명령한 《징역 13년》이라는 작문이다. 프로파일러 로버트 K. 레슬러[19] 《FBI 심리분석관》과 로버트 D. 헤어의 《진단명: 사이코패스》 등 엽기 범죄를 다룬 범죄 심리학 서적에서 따온 문장들이 눈에 띄는데, 아즈마의 증언에 따르면 흥미가 가는 책을 서점에서 서서 읽으며 머리에 들어간 페이지를 기억한 후 순서를 바꿔서 썼다고 한다.
징역 13년

(懲役13年)

어느 시대에나… 같은 일은 되풀이된다. 멈추지 못하는 것은 멈출 수 없으며, 죽일 수 없는 것은 죽일 수 없다. 때로는 그것이 자신 안에 살고 있을 때도 있다… '마물'이다.[20]

(いつの世も…同じ事の繰り返しである。止めようのないものはとめられぬし、殺せようのないものは殺せない。時にはそれが、自分の中に住んでいることもある…「魔物」である。)

가정된 '뇌 속의 우주'의 이상향에서 무한으로 어두운, 그리고 썩은내가 깊이 진동하는 마음의 고독 한가운데… 죽은 자의 혼처럼 줄곧 서서, 허공을 응시하는 마물의 눈에는 대체 "무엇"이 보일 것인가. 나는 대강 예측하는 것조차 좀처럼 되지 않는다. '이해'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仮定された「脳内宇宙」の理想郷で、無限に暗くそして深い腐臭漂う心の独房の中…死霊の如く立ちつくし、虚空を見つめる魔物の目にはいったい"何"が見えているのであろうか。俺には、おおよそ予測することすらままならない。「理解」に苦しまざるをえないのである。)

마물은 나의 마음속에서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호소하고, 위기감을 부채질하며 마치 숙련된 인형술사가 음악에 맞춰 인형을 춤추게 하는 것처럼 나를 조종한다. 그것은 나 자신이었던 것에 씌인 귀신과 같은 '절대 영도의 광기'를 느끼게 만든다. 도저히 반론은커녕 저항조차 할 수 없다. 이렇게 나는 궁지에 몰려 간다. '내 자신 속'에…

(魔物は、俺の心の中から、外部からの攻撃を訴え、危機感をあおり、あたかも熟練された人形師が、音楽に合わせて人形に踊りをさせているかのように俺を操る。それには、自分だったモノの鬼神のごとき「絶対零度の狂気」を感じさせるのである。とうてい、反論こそすれ抵抗などできようはずもない。こうして俺は追いつめられてゆく。「自分の中」に…)

(후략)

과학 수사에 따른 필적 감정 결과 성명문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조사 본부는 특정한 글자들의 필체가 일치한다고 판단했고 이가 아즈마의 범행을 부정할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6월 중순 이후 언제 소년을 임의 동행하러 갈지에 대해 아주 은밀하고 철저히 타이밍을 잰 결과 가족들이 다 함께 집에 있을 주말에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4.5.2. 범인 체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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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감식하는 경시청 직원들(산케이 신문 출처).

경찰은 아즈마 신이치로가 아동 상담소에 다닌다는 사실과 가정 환경을 면밀히 조사하여 소년을 과보호하던 어머니에게 임의 동행을 요구할 경우 감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을 우려해 회사원인 아버지가 집에 있는 토요일 주말 오전 시간대로 향했다.

연속 묻지마 살인 사건에 대한 기자들의 보도로 과열이 돼있던 터라 살인범이 소년이라는 사실이 미리 알려지게 된다면 수사가 난항을 겪을 것이기에 이 사실은 경찰청 간부 15명만 알고 있을 만큼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21] 또한 언제 소년의 집을 방문할지에 대해서는 사건의 지휘를 맡고 있던 조사과장(범인의 정체를 언론에 처음 공개한 경찰)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제대로 임의 동행에 따를지, 소년이 순순히 자백을 할지, 또한 소년범이기 때문에 강력한 변호인단이 꾸려질 것이라는 우려 등을 생각하며 아침 7시경 소년과 형사를 포함한 베테랑 형사 2명이 아즈마의 집을 찾아갔다. 벨을 누르자 아즈마의 아버지가 나왔고 "아드님에 대한 임의 동행을 요구한다"는 형사의 말에 아버지는 "저희는 아들이 3명이나 있는데요...."라고 대답하자 "첫 번째 아드님입니다"라고 형사는 대답했다. 임의 동행 형식이기 때문에 거절당하면 강제로 데려가는 건 무리였지만[22] 별다른 저항 없던 아즈마를 성공적으로 스마 경찰서로 이동시킨 형사들은 어머니는 다른 형사와 함께 따로 경찰서로 동행했고 집에 남은 아버지를 제3의 팀이 맡아 탐문했다. 가족들은 아즈마가 잔혹한 살인 사건의 범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으나 당당히 동물 학대를 저지르는 행위로 유명했던 아즈마의 동창생과 교사들은 "범인은 아즈마"라고 다들 입을 모아 얘기하였다고 한다.

4.5.3. 범인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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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자인 아즈마의 집 앞에 진을 친 기자들(마이니치 신문).

1997년 6월 28일, 스마 경찰서는 사건의 범인으로 아즈마 신이치로를 임의 동행 형식으로 체포했다. 소년의 담당 변호사는 그를 체포 당일 처음 만난 인상으로서 "보통의 소년이라면 굳은 얼굴로 불안한 표정을 짓지만 애초부터 그런 모습은 없었다. 사건에 대해 인정도 부정도 하지않고 담담히 앉아있었다. '이 애는 우리가 그동안 담당한 소년 사건의 범인과는 다르다'"고 느꼈다고 하며 "그가 정말 범인일까. 소년 혼자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는건가?"하며 의문과 의심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에는 범행을 부인했지만 성명문과 신문사에 보낸 편지를 보여주며 "이게 네가 쓴 거라는 건 명확하다. 필적이 일치했어."라고 말하자 소년은 울면서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엄밀히 말하면 편지의 필적 감정 결과가 '간간이 비슷한 부분은 있지만 동일 인물이라고 확정하기엔 어렵다.'는 소견이어서 체포 영장을 발부할 수 없어 임의 동행을 한 것이다. 이 수사는 적법한 수사는 아니었지만 가택 수사 결과 천장 다락에서 잘린 머리를 두었을 때 새어 나온 핏자국과 범행에 쓰인 칼, 성명문을 적은 것과 일치하는 펜이 발견되어 결과적으로는 범인 검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범행을 자백하는 동안에도 소년이 용의자로 잡혔다는 것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탱크산에서 경찰들의 수색은 계속되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스마 경찰서의 과장에게 신문 기자가 "조사원들은 쉴 수 있는 걸까요"라고 묻자 과장은 "어렵겠다. 장기전이 될 것 같으니…."라고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태풍의 상륙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던 오후 7시 5분 아즈마 신이치로에게 살인, 시체 유기의 혐의로 수사 영장을 내렸다. 그리고 저녁 9시 기자 회견을 열고 범인은 스마구 거주 중인 중학교 3학년 A 소년입니다라고 용의자를 공개했다.[23]

4.5.4. 체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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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재판소로 향하는 버스 안의 소년 A(마이니치 신문).

7월경 아즈마는 조사받던 도중 하세 준의 절단된 머리를 선명하게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 기억나는 대로 지체 없이 선만으로 그린 그림의 엄청난 정확도에 경찰들은 더더욱 아즈마의 범행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24]

그리고 다음 날 구속되었다. 만 14세의 소년범이라는 이유로 이때는 신상 명세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알려지지 않았다. 7월 24일 오후 아즈마를 첫 번째, 두 번째 사건의 장소로 데려가 범행의 재연을 실행했다. 이날 경찰관은 아즈마의 부모에게 피해자 측에게 전화든 어떤 루트를 통해서든 사죄의 말을 건넬 것을 제안했다. 동시에 절단된 머리를 교문 벽 위에 두지 못한 것에 대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해서 화가 난다"라고 진술한 내용이 보도되었다.

28일에 걸친 수사 끝에 7월 25일 고베 지방 재판소에 송치되었고 8월 4일 첫 재판에서 정신과 의사의 감정을 결정했다. 10월 17일 고베 가정 재판소에 넘겨졌다. 1급 살인죄로 사형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아야 했지만 일본의 형사미성년자 연령은 만 16세 미만이었는데 아즈마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당시 만 15세였기 때문에 형사 처벌을 할 수 없었다.[25] 대신 그가 잔인한 공포 영화에 빠져 있었던 점[26], 유소년기부터 엄격한 꾸짖음을 받고 어머니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치지 못하여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작은 벌레, 6학년 때부터는 고양이를 해부하기 시작하고 중학교 1학년에 접어들자 사람으로의 공격성으로 발전하였던 심리적 배경이 중한 정신적 장애를 일으킨 점을 들어 정신과 의사가 주에 1번은 진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선도 및 정신 치료를 지시하며 의료 소년원에 송치하였다.

고베 지검의 검사는 "죽이는 대상이 동물에서 사람으로 변할 때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2월의 (망치) 사건에서는 양심과 갈등이 아직 남아있어 변해가는 도중이었다"고 설명하며 범행의 배경에는 사회와 단절된 자기중심적인 감정이 있는 반면 사건 당시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며 책임 능력을 물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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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A가 수감된 의료 소년원(마이니치 신문).
10월 20일, 아즈마는 도쿄 간토(関東) 의료 소년원에 수감되었다.

1999년 법원은 하세 준의 유족에게 1억 420만 엔의 위자료 지급을, 야마시타 아야카 유족에게 8000만 엔의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다. 첫 번째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소녀의 배상금도 포함해 도합 1억 9226만 엔(한화로 20억가량)을 지불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 일로 중공업 회사에 오랜 기간 재직하던 아즈마의 아버지는 퇴사하여 퇴직금 전부를 위자료에 지불하였음에도 법원이 명령한 금액에 턱없이 미치지 못해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도 어머니가 쓴 수기의 인세를 포함해 현재까지도 위자료를 지불하고 있다. 2019년 기준으로 하세 준의 유족에게는 4000만 엔, 야마시타 아야카 유족에게는 3300만 엔을 지불하였으나 아직도 지불할 돈이 잔뜩 남아 있는 실정이다.

2001년, 치료가 순조롭다고 판단되어 도호쿠 중등 소년원으로 이감 후 정신 의학과와 법무성 교관 등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팀이 아즈마를 진단했다. 아즈마가 워낙 일본을 뒤흔들었던 사건의 범인인지라 치료 당시에도 파격적인 조치들이 이루어진 것이다. 어머니와의 애착 관계가 매우 부족하다는 정신 감정 결과를 통해 병원에서 '다시 아기 때부터의 성장 과정을 밟게 하자'고 결론 내린 그들은 주치의를 아버지, 부주치의를 어머니로 설정하여 유사 가족을 만드는 전례 없던 치료를 행했다.

1년 차 정도까지는 진전을 보였으나 와중에도 소년원 내 공작 수업에서 재료로 쓰인 신문지에 실린 어린아이를 눈, 귀, 손과 발 등등으로 조각조각 잘라내 다시 종이에 붙이고는 '정신과 육체의 융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기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유사 가족 역할극을 하는 중에 '이상적인 어머니'라고 여긴 부주치의에게 마음을 쏟아서 다른 원생이 "남자나 밝히는 돼지 년"이라고 부주치의를 욕하는 소리를 듣자 발광하며 양손에 볼펜을 들고 그 원생의 두 눈을 찌르려고 하기도 했다.

소년원 동기에 따르면 아즈마는 "아무리 유족의 수기를 읽어도, 약을 먹어도 나을 수 없어. 난 성격이 이상하니까….", "투쟁과 파괴야말로 진실된 세상의 모습이지만, 소년원에서는 얌전히 있도록 조심해야 해"라고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또 당시 소년원 내에서 남자 청소년들이 여자 청소년들을 화장실로 끌고 가 매우 난폭하게 강간 치상 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 무리 가운데 아즈마도 있었다는 루머가 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로 보도된 것은 2002년 한 원생이 몰래 훔쳐본 교관의 노트에 의해 그가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란 것이 알려지며 소년원 내에서 괴롭힘을 당했던 사실이다. 이때 반나체 상태로 을 들어 자신의 성기를 찌르고 괴롭힌 아이들의 몸에도 새겨야 한다면서 난동을 부린 적도 있었다. 즉시 아즈마는 개별실에 감금되었지만 의미 불명의 괴성을 지르고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등의 기행을 저질렀고 이 소동으로 인해 고베 법원은 소년의 범죄적 성향이 교정되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2004년 말까지 소년원에 수용할 것을 명령했다.

그 후 2004년 3월 10일 9시 5분경 임시 퇴원 해 사회 복귀 과정이 시작되었고 이 사실을 유가족에게도 통보했다. 일본의 범죄 역사상 전례 없던 일이었다. 2005년 1월 1일 완전한 퇴원 허가를 받아 8년여간의 수감 생활을 끝냈다. 그는 2005년 5월 24일 변호사를 통해 피해자 가족에게 헌화하겠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2007년에는 자신에게 살해당한 야마시타 아야카의 부모에게 사죄 편지를 보냈으나 피해자 가족은 반성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배상에 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일본에서는 강력 사건이 아닌 경우라도 언론에 이름과 사진을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공표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사건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형사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신상 명세의 공개는 물론 어떠한 처벌조차 받지 않자 커다란 논란이 일었고 소년법의 개정이라는 큰 여파를 가져왔다. 사형수이자 신일본 문학상 수상자인 나가야마 노리오의 사형이 이 사건 직후 집행되었는데 이러한 논란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는 의견이 많았다. 참고로 2008년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을 일으킨 카토 토모히로가 아즈마 신이치로와 같은 1982년생인데 카토는 25세 때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2022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아즈마 역시 만일 미성년자가 아니었다면 진작 사형되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이 사건의 범인을 포함해 1982년생 중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이 연령대를 '분노의 세대(怒りの世代)'라고 부르고 있다.[27]

5. 가해자 가족[28]

아들이 저지른 끔찍한 일에 아즈마의 가족도 큰 고통을 받았다. 아즈마의 부모는 후일 수기를 출판하여 아들이 체포되던 6월 28일의 충격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토요일이어서 가족이 모두 집에 있었다.
아침 7시가 지났는데 갑자기 경찰이 방문하여, 아들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데려갔다. 경찰에 불러가 조사를 받고 오후 6시경 다시 집에 돌아왔는데 저녁에 다시 방문한 경찰관은 내게 "남은 아들 둘을 다른 집에 데려가실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둘을 근처에 사는 친척 집으로 옮겼다.
아들 둘이 나가자 경찰은 내게 가택 수색 영장을 내밀었다. 저녁 8시경이 넘어 그대로 틀어놓은 TV 속에서 범인 체포에 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체포된 용의자가 어린 소년이었기 때문에 이름은 보도하지 않았다. 그걸 보고 "제 아들 일입니까?"라고 집에 있던 경찰관에게 묻자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망연자실할 사이도 없이 현관 인터폰과 전화가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 경찰 말대로 겹문까지 잠갔지만 수많은 취재진이 집을 에워싼 채 계속 플래시가 터졌다.

밤이 깊어지자 가족은 변호사와 경찰의 도움으로 친척 집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우선 순찰차 두 대가 먼저 달려나가 매스컴의 주의를 끈 뒤 그다음 차에 가족이 탑승하여 집을 빠져나갔다. 그다음 가까운 파출소에서 경찰이 준비한 별도의 차로 갈아타고 미리 이야기해 둔 친척 집으로 향했다. 몸을 피한 친척 집에는 언론이 오지 않았지만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그대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아즈마의 아버지는 사건 발생 한 달 후에야 7월 18일 혼자서 외출하여 검찰청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고 돌아오던 길에서 남은 두 아들을 위해 축구공을 샀고 다음 날 아침 친척집 근처 공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했다. 아이들과 축구하는 것도 굳은 결심을 해야 할 수 있을 만큼 남겨진 가족의 상황은 끔찍했던 것.

이 무렵이 되자 친척 집에도 언론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인터폰을 여러 번 누르거나 귀에 거슬리도록 손잡이를 수없이 돌리기도 하고 난폭하게 문을 두드리기도 하였다. 기레기는 만국 공통 아버지는 친척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끝에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두 형제를 몇 달간 교외의 한 시설에서 생활하도록 했고 그 뒤에는 경찰의 설득하에 부인과 이혼하고 온 가족이 함께 개명한다. 이후 본인은 간사이의 어느 지방에서 살게 되었고, 일본에 있는 한 사건의 그림자가 계속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아즈마의 동생들을 해외로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체포 후 만 한 달이 갓 지난 8월 7일 두 형제는 출국한다. 형제들에게도 심적 부담은 상당했는지, 막내는 공항 찻집에서 마신 음료수를 바로 토해버렸다고 한다. 결국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가정이 사실상 해체되었다.
지금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내가 견디지 않으면 나머지 두 아들은 어떻게 되고, 유족에게는 누가 사과를 하겠습니까. 남은 두 아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지워서는 안 됩니다.

아즈마의 아버지는 죄책감과 함께 남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도 시달렸다. 자식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 정말이라면 유족들에게 사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인가 잘못되어 일어난 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담당 경찰관이 "아버님, 2월 10일과 3월 16일에 살해된 피해자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라는 말을 하자 자신이 피해자의 이름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찰관은 놀란 아버지에게 피해자의 이름을 알려준 후 이렇게 말했고
"사건 이후 매스컴에서 아들은 물론 가족에 대한 보도가 연일 대서특필되어서 괴로울 거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자식이 살해한 피해자들의 가족은 그 이상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끔찍한 비극을 견디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들은 가해자의 가족으로서 감히 고통을 호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어서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아들은 정당성만을 주장하며 자신이 한 행위의 책임을 짊어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걸 왜 깨닫지 못하는 걸까요.
아들에게 살 자격 같은 건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息子に、生きる資格などとうていありえません。)
만약 피해자 댁에 아들이 모습을 나타내서, 피해자 분들에게 "죽어서 갚아라"라고 그 자리에서 살해당한다고 한들 당연한 처사라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저를 죽게 해주세요. 저는 남편을 위해서는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습니다. 아들이 한 짓은 그 애를 낳고 키운 제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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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A', 이 아이를 낳고…...('少年 A', この子を生んで......) - 아버지와 어머니 회한의 수기(父と母 悔恨の手記)》( 문예춘추, 2001)[29]

위의 수기는 아즈마 신이치로의 어머니가 사건 5년 뒤인 2001년 발간한 수기이며, 대필 논란은 있지만 책 제목은 어머니가 직접 지었다. 발간 후 20년이 지난 2021년 시점에는 약 1억 엔에 달하는 인세가 나왔고 이 돈은 변호사 명의로 계좌를 만들어 피해자 유족들이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로 지불되고 있다.

해당 수기는 아즈마가 2015년에 발매한 《절가(絶歌)》와는 달리 아즈마의 담당 변호사와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출간하였다. 변호사에 따르면 거액의 배상금을 갚는 데는 이 길밖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 번째 희생자인 야마시타 아야카의 유족과는 직접 만나서 사죄를 하였으나 이를 거부한 하세 준의 유족에게는 "죽기 전에 한 번은 만나서 사죄를 하고 싶습니다", "직접 사죄를 드리지 못하는 이상 저는 앞으로도 (바닥에) 가라앉은 그대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며 누구보다도 가해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토로했다.

아즈마의 체포 후 면담, 그리고 가족들의 사정 청취 때마다 매스컴의 눈을 피해 도주를 도운 것은 아즈마의 담당 변호사 하시바 오사무(羽柴修弁, 1949~)로 20년 넘게 지금까지 아무 대가 없이 그들을 돕고 있다. 하시바 변호사가 말하길 사건 뒤 새로 마련한 가족들의 거처에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었을뿐더러 부모가 아즈마를 면회하러 도쿄의 간토 소년 의료원으로 향하는 신칸센을 탔을 때에는 부모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 "소년의 부모님이시죠?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하고 속삭이듯 다가온 기자가 있었다고. 그 이후의 과정들도 도청되어 퍼뜨려지곤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즈마와 그 가족들이 쓴 사죄의 편지는 하시바 변호사를 통해 피해자 유족들에게 전달되었다. 2015년까지의 아즈마의 편지는 상당히 개선되었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반성의 기미가 보였기 때문에 유족들은 가해자 가족의 부탁에 따라 1년에 1, 2번 정도 만남을 가지며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하려던 과정에 있었는데 아즈마가 무단으로 범행 과정을 담은 수기를 발간함으로써 그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었고 유족들도 완전히 돌아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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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A의 실명과 얼굴 사진을 공개한다'라고 적혀있다.
7월 9일, 신조사(新潮社)의 주간지 《FOCUS》(현재 휴간)에 아즈마 신이치로의 얼굴 사진과 실명이 게재되었고 7월 10일호에도 다시금 눈을 검은색으로 가린 얼굴 사진이 게재됐다. 잡지는 재판 이전에 발매되었으나 법무성은 '가정 재판소의 재판에 회부된 청소년범의 이름, 나이, 주소, 얼굴 등을 통해 그 사람이 해당 사건의 본인임을 알릴 수 있는 기사와 사진을 신문 및 출판물에 게재해서는 안 된다'는 일본 소년법 61조에 따라 판매 중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출판사 측은 이를 쌩까고거부하고 판매를 결행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문제의 주간지는 오히려 화제를 불러일으켜 즉시 완판되었다. 법적으로 중지 명령이 떨어진 잡지였기 때문에 일부 서점에서는 《FOCUS》의 판매를 철회하기도 하였으나 또 다른 서점에서는 문제없이 그대로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얼굴 사진을 게재한 출판사에 '판매 중지'를 요청한 효고현 변호사 협회에도 비난이 쇄도했다. 대부분 익명의 협박 또는 항의 전화였는데, 변호사 협회 회원 변호사의 자택에까지 걸려왔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인터넷에도 얼굴 사진과 이름 등이 유포되었고 아버지와 두 형제의 신원도 상세히 알려졌다. 참고로 이 사건은 인터넷에서 가해자와 그 가족이 공격당하게 된 가장 극초기의 사건이기도 하다. 모 인터넷 홈페이지에 '', '', ''라는 이름이 붉은색으로 나오는 범행 성명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건과 실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되었지만 조사 본부는 홈페이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당시 산케이 신문은 보도했다. 이 기사는 지금이라면 상식에 속하는 '프로바이더'라는 용어를 소개하면서 기사를 시작하고 있는데 90년대 후반은 인터넷이 지금처럼 보급되지 않은 인터넷 초창기였다. 이때부터 벌써 사건 직후에 가해자의 가족을 향한 근거 없는 무차별 공격이 가해지는 사례가 인터넷에서도 시작된 것이다.

가해자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개인 정보를 폭로하고 공격하는 인터넷 '규탄'도 바로 이 사건 때부터 시작되었다. 가해자가 체포되자 소년과 아버지 등 가족에 관한 정보가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그 가운데는 아버지가 근무하는 회사의 동료라고 밝힌 사람이 올린 글도 있었는데, 회사 이름이 정확하게 나왔다. 후일 사건 취재를 정리한 《생명의 소중함을 취재하며- 고베 연쇄 아동 살상 사건(命の重さを取材して-神戸連続児童殺傷事件)》(산케이 신문 오사카 본사 편집국[産經新聞大阪本社編集局], 1997)에는 가해자 가족과 관련한 미확인 정보가 인터넷에서 발견될 때마다 기자가 관계된 곳을 방문하여 진위를 확인하는 모습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범죄 보도 현장에서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터넷에 취재진이 휘둘리는 모습도 보인다.

소년의 가족과 같은 성씨를 가진 가족의 전화번호를 전부 취합해 게재한 홈페이지도 있었다. 이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얻었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사건과 전혀 관계 없는 집에 못된 장난전화와 아무 말 없는 협박 전화가 잇달아 걸려오기도 했다. 산케이 신문 취재반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가해 소년에 대한 정보가 2차 피해를 가져왔다.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당당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개중에는 범인의 이름과 사진을 감추는 매스컴에까지 신랄한 비난을 하기도 한다.
위에서 말한, 소년범의 사진과 설명이 들어간 주간지의 기사 역시 인터넷으로 퍼져나갔다. 출처가 이 주간지인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 인터넷 게시판과 홈페이지에 게재되자 접속이 폭주했다. 도가 지나치다는 비판의 글도 올라오자 소년범의 얼굴 사진은 일단 삭제되었지만 머지않아 다시 올라왔다. 경과를 지켜보던 산케이 신문 기자는 "아주 놀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의견을 전했다.

6. 피해자 유족

2024년 간사이 TV에서 방영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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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하세 준과 아버지 하세 마모루 씨의 모습.

한편 유족인 하세 준의 아버지 하세 마모루 씨는 사건 당시 부인에게서 "아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오후 7, 8시인데도 초등학생인 아들이 집에 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경찰에 신고를 했다.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일간 식사도 잠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아들을 찾아 헤매다 진이 빠져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굉장히 좋지 않은 상황에서 사건에 돌입하게 되었다고 얘기한 하세 마모루 씨 가족은 그로부터 3일 후 시신이 발견되었을 때 “토모가오카 중학교 쪽에서 경찰이 테이프를 붙이고 있어 소란스러우니 가 보는 게 좋겠다“는 전화를 받고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서 준의 아버지라고 얘기했더니 경찰이 지금 바로 스마 경찰서에 가달라고 하여 경찰서에 도착했을 시점에는 이미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교통사고입니까?"라고 묻자 " 사건입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경찰이 목을 가르키며 ”목 윗부분이 발견되었습니다(首から上が見つかりました)“라는 충격적인 대답을 들었다.

스마 경찰서 내에 마련된 시신이 안치된 공간에는 마모루 씨가 몸이 없는 시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지 않도록 배려한 경찰관들이 목 아래에 천을 둘러 몸이 온전한 것처럼 보이게 해 놓았고, 그 덕분에 간신히 아들의 시신과 대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피해자 유족들이 매스컴에게 받은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마모루 씨의 집 앞에서는 하루 종일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한밤중에도 플래시를 터뜨리며 소란을 일으키는 통에 마모루 씨는 참다못해 문 앞에 '민폐 행위를 중단하라'는 팻말을 세워놓을 정도에 이르렀다. 창문도 열지 못하고 외출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커튼을 쳐놓은 채 지냈던 그 시절을 하세 마모루 씨는 다시는 인생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털어놓았다.

세 번째 사건 이후, 아즈마의 모친의 수기에 의하면 아즈마의 모친은 준이 살해당한 사실을 몰랐고 준의 부모가 동요하는 것을 걱정해 몇 번이나 준의 자택에 찾아가 가사를 도와주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그러나 하세 마모루 씨가 출간한 《준, 그 이후(淳 それから)》에선 “대신 물건을 사다 준다며 A 씨가 몇 번이나 저희 집에 찾아왔는데 저희 아내에게 경찰에 대해 물어본 것도 지금 생각하면 기묘한 언동이었습니다. 어째서 그 전까지 크게 친하지도 않았던 저희 가족을 위해 자신들이 먼저 물건을 사는 걸 도왔던 걸까요. 정말로 그저 친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일까요.”라고 하며 그의 가족들이 사건을 예상하고 있었음을 의심했다.

가해자 가족이 보낸 편지에 대해서도 하세 씨 부부는 최초에 보고도 못 본 척했을 만큼의 분노를 느꼈으며, 문장은 전형적이고 너무나도 누군가에게 듣고 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저희는 그 편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졌습니다. 무심코 그 자리에서 찢어버릴까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두 번째 사건의 피해자에게 온 아즈마 가족이 쓴 편지가 주간지에 공개되었는데 하세 씨가 예상한 대로 편지의 내용은 한 글자, 한 문장 전부 같은 내용이었고 단지 달랐던 건 피해를 당한 아이의 이름과 봉투에 적힌 주소뿐이었다“고 대답했다.

이후 하세 씨는 아즈마와 그의 부모들을 상대로 손해 배상을 요구했는데, 이는 민사 소송을 일으키면 사건 기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일본 소년법은 소년의 신상 외에는 사건의 배경이나 범행의 자세한 내용, 법적인 심판 등 구체적인 내역에 대해서는 피해자 측에서도 알 수 없도록 비공개하는 방침을 내세우고 있었다. 하세 마모루 씨는 2008년 5월 30일 중의원 법무 위원회에서 "피해자 유족으로서 사건의 배경을 알고 싶은 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적어도 범인인 소년의 정신 감정서 정도는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겨 대리인을 통해 요구하였으나 그것조차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저희들은 심판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고 아무 발언도 할 수 없는 채 종결지어졌습니다. 유일하게 저희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신문이나 TV, 잡지 같은 매체뿐이었으며 그 정보의 신빙성조차 검증할 수 있는 수단도 없었습니다."라고 발언하며 피해자 유족이 심판에 참가할 수 있도록 호소하였으나 가해자인 아즈마가 재판에서 사실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결국 기록은 볼 수 없었다.

2004년 3월 10일 아즈마가 간토 의료 소년원에서 출소한 날, 재생 보호 위원회에서 마모루 씨에게 전화를 걸어 9시 5분경 아즈마가 퇴원한 사실을 알렸다. 귀가지가 아즈마가 살던 고베 지방이 아니라는 전화에 어디로 옮겨졌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마모루 씨가 2년 전부터 가해자의 정보 공개를 위해 법무부에 호소해 온 노력이 있었기에 커다란 진전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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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 준의 묘지.

하세 마모루 씨는 전국 범죄 피해자의 모임인 내일회(あすの会)의 간사(幹事)를 맡고 있으며 효고현 범죄 피해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롯코 친구회(六甲友の会)의 20년이 넘는 창립 멤버이다. 오랜 기간 계속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범인인 아즈마가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가 2004년 중의원 법무 위원회에서 인터뷰한 내용 중, '가해자 남성이 이런 직업이나 직종만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언론과 관계되었거나 얼굴이 TV에 나오는 직업, 또 하나 변호사만큼은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히며 “사건에 대해 그가 무언가를 매개체로 발언하여 보수(금전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만은 절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밝혔는데 아즈마 신이치로는 2015년 《절가(絶歌)》를 출판하며 유족들을 완전히 배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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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66세가 된 하세 마모루 씨(2024년 촬영).
유일하게 그와 이어져 있는 것이 편지라고 생각하며 그의 편지를 읽는다는 것은 극도로 노력이 필요하므로 정신적으로도 힘든 작업이에요. 그러니까 악의를 갖고 보지 않고 가능한 좋게 이해해 보자,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하세 마모루 씨.

그는 2024년 NHK와의 인터뷰에서 '27년이 지나도 아이를 향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답하며 범죄 피해자의 지원에 대한 중요성을 호소했다. 또한, 2022년 고베 가정 법원이 사건의 기록을 전부 폐기한 사건을 안타깝게 여기며 "사건 기록이란 어째서 목숨을 빼앗겻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답으로 근접한 것이며 가족에게 '살아온 증거'이기도 하다. 재판소는 범죄 피해자와 유족에게도 의견을 묻고 나서 기록 보존에 대한 앞길을 검토했으면 한다"고 이야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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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시타 아야카의 부친인 야마시타 켄지 씨.
또 다른 피해자인 야마시타 아야카의 유족 또한 몇십 년간 딸인 아야카를 기리고 있다. 어머니인 쿄코 씨는 아야카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찾아가 강연을 하고 딸을 추억하는 책을 내기도 했다. 가해자에 대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는지 정면으로 바라보길 바란다"고 얘기한 쿄코 씨는 2017년 6월 유방암으로 사망하였고 이제는 아버지인 켄지 씨만이 남게 되었다. 켄지 씨는 아야카의 초등학교에 나무를 심고 팻말에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이곳에 있어'라고 써넣고 돌보며 아야카를 그리워하고 있다.

양쪽 유족에게 아즈마가 보내온 편지는 수기를 출판하고 나서도 2018년까지 몇 년간이고 발송되었으나 어느 순간 완전히 끊겼다. 켄지 씨는 수기 출판 이후에는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편지를 계속 쓰고 보내 주었으면 한다는 뜻을 언론을 통해 내비쳤다. 아즈마의 변호사 또한 "제대로 살고 있다면 계속 편지를 보내야 한다. 그도 이제 39세니까... 하려고 하면 다시 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사죄의 뜻을 보일 것을 간접적으로 바랐으나 아직도 그에게선 어떠한 연락도 없다.

7. 사건의 여파

1999년에 발생한 교토 초등학생 살해 사건이 이 사건과 특징이 유사하여 일본 사회를 또다시 충격에 빠뜨렸다. 차이점이 있다면 교토 초등학생 살해 사건의 경우 범인이 오로지 피해 아동 한 명만을 노렸다는 점이다.


범행이 일어난 장소가 당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홈구장 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가까웠기에 스마 경찰서 명의의 안내문이 수시로 표시되었고, 6월 7일 다이에전[30] 종료 후 MVP였던 이치로가 인터뷰에서 "늦은 밤이니 조심히 돌아가 주세요"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

경향신문 1997년 6월 7일 자에서도 언급되었던 적이 있다. # 다만 사카키바라의 이름이 '사카키 바라세 이토'라는 기묘한 띄어쓰기로 나와 있다.[31]

한편 대한민국에서도 1999년 7월에 인터넷에서 사카키바라 사건을 접한 15살 김 모 군이 피아노 학원을 가던 초등학생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부상을 입히는 모방 범죄가 발생하기도 했다. # #2


2022년 10월 27일 고베 가정 법원이 사건 관련 기록 자료를 전부 파기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일본 형법상 소년범의 재판 기록은 가해자가 29세가 되었을 때 자동 파기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최고 재판소에서는 해당 사건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강한 사건의 재판 관련 기록은 사실상 영구 보존한다는 방침을 의무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베 가정 법원 측은 처리 시스템 조회 결과 2011년 2월 28일 자로 사건 관련 자료가 전부 폐기된 기록이 남았다고 밝혀 논란이 일었다. 폐기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엄청난 분량의 사건 기록 자료를 더 이상 오래 보관하고 있을 여유가 없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되며 2023년 4월 중으로 이유에 대해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유족들 또한 매우 유감이라는 의견을 비추며 언론과의 인터뷰를 가졌고 고베 가정 법원 측은 향후 대응을 최고 재판소에 맡긴다는 입장을 표했다. #

8. 범인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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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범행 당시. 우측은 최근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사건 이후 아즈마 신이치로와 그의 가족들은 이름을 바꾸고[32] 일본 지방의 모처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나머지 가족들은 아즈마와 절연 상태이며 그럼에도 그의 부모는 사건 후 3개월이 지난 1997년 9월에야 가능해진 면회를 위해 옥중에 있던 아즈마를 함께 찾아가서 "누가 뭐라 하든 너는 우리 가족이니까 다섯 가족이 열심히 살아보자"라는 부모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뜻을 내비쳤음에도 아즈마 본인은 눈에 눈물이 고인 채 난동을 피우며 "꺼져! 돼지 새끼들아!!"라고 외쳤다고 한다. 2004년 아즈마의 퇴원으로 가족이 재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에도 아즈마는 가족에게 일절의 연락을 끊은 채 혼자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즈마 신이치로의 퇴원 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건 이후 그는 고향인 고베를 떠나 도쿄, 가나가와, 아이치, 도쿠시마, 시즈오카 등등 전국을 옮겨 다니며 쥐 죽은 듯이 살고 있다. 출소 직후에는 담당 법조인과 양자 결연을 맺어 그의 집에서 거주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연락을 끊고 혼자 나와서 살고 있다. 시설 안에서 용접술을 배웠기에 잠시 용접공으로 일했으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며 거주지를 바꿔 살고 있다. 일본 네티즌에 의하면 아즈마 신이치로(東慎一郎)에서 니시오카 마코토(西岡誠)로 개명했으며 이 이름 또한 후에 바꿨을 거라고 추정되고 있다.

청첩장을 유족에게 보냈는데 거부당했다, 루마니아인과 결혼해서 딸을 낳고 가정을 이뤘다는 루머가 일본에서도 정설처럼 퍼지고 있으나 그의 수기를 출판해 준 오오타 출판(太田出版)의 편집자에 따르면 "누군가와 친해지는 걸 극도로 경계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사는 곳이나 취직한 회사에서 조금만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면 금방 퇴직하거나 주거지를 자주 옮겨 다닌다고 하며 이런 그의 특성상 결혼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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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6월 28일, 나는 내가 아니게 되었다.
양지의 세상에서 영구적으로 추방된 날.
그것은 별다를 것 없는 일상 한 컷 한 컷이
급격하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징성으로 이어지게 된 날.
소년 A, 그것이 나의 대명사가 되었다.

수기 《절가(絶歌)》에 적혀있는 소개말.

20년을 가까이 쥐 죽은 듯 살던 아즈마 신이치로는 돌연 2015년 6월 자신의 범행을 수기로 써서 출판했다. 출판 당시 아즈마는 유명 주간지 등에 수신인을 '전 소년 A'라 적힌 다갈색 봉투의 소포를 다 같이 보냈는데 그 봉투에는 수필을 쓰기 전 출판사 편집자와 대화한 내용과 홈페이지 개설을 알리는 주소가 덜렁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모든 시민들의 반응은 격노 그 자체. 모럴 없기로 정평이 난 그 2ch에서조차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책의 제목은 《절가(絶歌)》.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2015년 이전까지 아즈마가 하세 마모루 씨 유족에게 장문으로 보내온 편지에서 자신들에게만 밝혔던 내용들이 축약되어 그대로 공개되었다고 한다(특히 조부의 유품으로 자위행위를 했던 부분). 편지에서 밝힌 내용이 진심이라고 믿고 있던 유족들은 '이 정도까지 솔직하게 밝혔으면 이제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편지가 예문이라도 된 양 출판에서도 똑같은 구절을 이용했고, 출판물일수록 내용에 대한 과장의 정도나 각색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전까지 편지가 진심이라고 믿었던 유족들의 뒤통수를 거하게 친 셈이 되었다.

서문에 유가족에 대한 사죄의 뜻을 밝히는 척하였지만 피해자 유족들에게는 어떠한 동의도 없이 수기를 출간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아직 제대로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에[33] 유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고 격렬한 반발과 분노를 표출하며 출판사에 책 발간을 중지하는 항의서를 냈지만 발간 중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피해자 하세 준 군의 부친인 하세 마모루는 언론의 인터뷰에서 '내 아들이 (아즈마가 범행 당시 편지에 썼던 대로) 두 번 살해당한 기분'이라고 밝혔다. 야마시타 아야카의 유족들은 '사죄의 편지를 받으며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도 인간이 되지 않았구나'라며 참담한 심정을 표했으며 아야카의 어머니는 '더 이상 (아즈마와) 엮이고 싶지 않다'고 분노하며 그동안 받은 사죄의 편지들을 전부 찢어 버렸다. 이게 진심으로 사죄하는 사람의 행동일까?

물론 이후 재범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니 어느 정도 폭력성이 완화되는 등 최소한의 교정은 됐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수기의 서술은 살인을 하면 안 되는 이유 같은 건 지금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인을 한다면 자신이 (처벌을 받아) 괴로워지니 절대 하지 말라고 10대인 자신에게 알려주겠다는 내용이다. 결국 피해자의 고통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점이 여전히 사이코패스적인 자기중심성을 보여준다. 프로파일러 배상훈은 이를 피해자에 대한 조롱이라고 지적했다. 아즈마가 가진 성적 사디스트 기질이 치료를 받는다고 사라질 종류는 아니고, 어떤 식으로 또다시 촉발될지 모른다고 불안해하는 목소리도 크다. 실제로 아즈마가 수감 생활을 끝낸 후 거주하던 아다치구에서 고양이, 비둘기, 오리의 머리가 절단된 채 발견되는 사건이 여럿 일어났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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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찬반 논란이 매우 거셌으나 이런 부류의 책이 대개 그렇듯이 욕하면서도 보는 게 보통이라 발매 일주일 만에 증쇄되었고 초판이 10만 부 이상 팔려 아마존닷컴 도서 판매량 1위를 차지하고 도합 25만 부가 팔려나가 단기간에 범인에게 수천만 엔 이상 인세가 발생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범인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위로 이득을 얻는 것을 제한하는 ‘샘의 아들법[34]’을 일본에도 도입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도 나왔다. 다만 이 법이 통과되더라도 이미 피해 보상을 한 데다 법의 소급 적용은 도덕적으로 당연한 상식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만 적용되기 때문에 아즈마 본인에게는 소급 적용 되지 않는다.

아즈마는 이 책의 인세 일부를 유족에게 배상하고 싶다는 뜻을 표하였으나 당연하게도 아들딸이 살해당한 사건을 토대로, 그것도 무단으로 발매한 책에 대한 배상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유족들은 거부하였다. 아즈마의 대리인에게서 인세의 일부를 배상하고 싶은데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변호사에게 연락이 왔는데 기껏 몇십 년간 아즈마의 가족들을 대가 없이 돌보며 겨우 반성의 틀을 쌓아왔다고 생각했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심정을 느낀 하시바 변호사는 '알아서 생각하라'고 역정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이 책을 출판한 오오타 출판(太田出版)은 일본 국민과 유가족에게 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소년 범죄를 생각함에 있어 사회적 의미가 있다"고 출판 소감을 밝혔다.
2011년 아즈마가 어느 출판사에 책을 출간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고 당연하게도 사회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출간을 거절했으나 아즈마는 막무가내였기에 이 출판사에서 오오타 출판을 소개해 줬고 책의 출간을 도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출판사의 책들은 사지 않겠다는 의견이 많다.

일본 내에서도 인세가 가해자에게 돌아가는 해당 책을 사지 말자는 움직임이 커졌으며, 사이비 종교와 사회 문제 등에 대해 조사하는 키토 마사키(紀藤正樹) 변호사는 '소년 범죄에서 범인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는 건 장래의 갱생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을 근거로 이 출판은 그가 반성하지 않은 증거라 지탄하며 "정말 반성의 의지가 있다면 실명으로 출판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아카시시의 시장은 아카시 내의 서점에서 해당 서적을 판매하지 않도록 호도하는 성명문을 발표했으며 케이오 이노카시라선 지역을 중점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케이분도 서점(啓文堂書店)에서도 서적의 판매를 자중했다. 고베시의 도서관은 책을 구입하지 않기로 하였다.

옴진리교의 핵심 간부였던 조유 후미히로는 과거 본인이 낸 책의 인세를 전부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의 유족들에게 보낸 것을 예로 들며 아즈마의 출판에 대해 "과거의 교훈을 사회에 전달하는 의미치고는 (책 가격이 비싸서) 금전욕이 엿보인다. 본인이 받는 인세의 쓰임처도 본인 마음대로기 때문에 배상을 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고 코멘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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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가(絶歌)》를 출간하고 나서 탄력적인 판매량(?)에 들떴는지 그는 사회에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시도를 했는데 본인의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폰트, 사진, 그림, 내용 등 전부 아즈마 본인이 만든 것이며 메인 사진은 소년원 송치 당시 언론에서 유일하게 그의 모습을 촬영한 슬리퍼 신은 자신의 발 사진이다. 홈페이지 제목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투명함(存在の耐えられない透明さ)[35]이며 그가 직접 올린 프로필은 다음과 같다.
전(元) 소년 A/프로필
1982년 고베 출생.
1997년 고베 연속 아동 살상 사건(사카키바라 세이토 사건)을 일으켜 의료 소년원에 수감된다.
2004년 6년 5개월의 수용 생활을 마치고 사회 복귀.

키 165.5cm[36] 체중 54.3kg
시력 좌 0.03, 우 0.05
혈액형 A형
대동맥 심장부에 잡음 있음.
성격 유형 INFJ
과대망상증 있음.

■ 정보 발신에 대하여
저는 Twitter, Facebook, 기타 SNS는 일체 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전 소년A』의 정보는 당 홈페이지인 '존재의 참을 수 없는 투명함(存在の耐えられない透明さ)' 한 곳에만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제가 이 홈페이지 이외의 장소에 한 글자라도 무언가 글을 남겼을 때는 반드시 여기에 고지하겠으니 알아두시면 됩니다.

전 소년 A(元少年A)

책을 낸 것도 모자라 책 홍보를 위한 빌드업인지 홈페이지를 만들고 홈페이지 내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기괴한 그림, 본인의 나체를 찍은 역겹기 그지없는 사진, 달팽이[37]를 찍은 사진 등을 업로드해 놓았다. 거기다 뭔 유료 매거진 서비스라며 월 800엔을 받고 메일을 보내주는 서비스를 만들어 놓았는데 홈페이지 서버를 보유한 fc2 측에서 4일 만에 페이지를 없애 버렸다. 잘됐다

참고로 아즈마가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그림과 사진들을 보려면 아래를 클릭하면 되며 정신적 대미지(…)를 받을 수도 있다.

[ 홈페이지의 작품 사진(클릭 전 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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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네티즌들은 "미친 듯이 역겹다", "정보 발신이라니 무슨 정보를?", "자기 과시욕이 장난 아니다. 홈페이지까지 만들어놓고는 별 관종 새끼가 다 있네" 등 극도로 혐오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책을 사서 읽어본 사람들의 감상평 또한 "유족들에게 단 한마디도 사과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범행을 위인전처럼 미화하기 위한 자위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책이 발간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은 2016년 2월, 아즈마 신이치로의 근황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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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문춘에서 공개한 소년 A의 근황.

문춘에 따르면 취재는 약 120일 동안 상당히 끈질기게 이어졌는데 맨 처음엔 2015년 9월 가나가와현에 살고 있던 그를 처음 특정한 뒤 그 이후 위클리 맨션에서 더 좋은 먼슬리 맨션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과정까지 뒷조사를 하며 쫓아다녔고 2015년 도쿄 23구 내로 이사하여 이름을 바꿔 살던 주소지를 특정해 냈으며 겉으로 보기에 160cm로 추정되는 왜소한 키에 하얀 얼굴, 볼에는 살짝 탄 자국이 있는 이 남성이 20년 전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소년 A라고 소개했다.

아즈마는 도쿄 아다치구[38]의 한 단지에 2015년 겨울부터 2016년까지 수개월간 거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변 주민들은 "밤이 되면 자전거 안장에 구멍이 나있는 낡은 자전거를 타고 외출했다", "무언가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고 얘기했다. 그는 가끔 슈퍼에 가는 걸 빼면 히키코모리처럼 거의 집 안에서 나오지 않고 종종 집 앞에 아마존에서 배송된 박스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도쿄에 이사 오고 2~3개월간은 마치 닌자처럼 숨어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6년 1월 주간문춘의 기자 두 명에 의해 직격 취재를 당했고 기자가 명함과 편지를 건네자 아즈마는 처음에는 전혀 영문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순식간에 험악해져 자신의 자전거를 바닥에 내팽겨치며 "명함도 편지도 필요 없어!", "목숨 걸고 온 거냐?"라며 주머니에서 무언가 뒤지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기자가 꿋꿋히취재를 이어가자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도망치는 기자를 10분 동안 약 1km나 집요하게 쫓아갔다. 기자는 이때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며 갱생이 되기나 한 건지 의문이라는 의견을 표했다. 아즈마는 이후 즉시 몇 개월간 살던 아다치구의 단지를 떠났고 문춘에 나온 사진을 보고 네티즌들이 추정한 결과 그가 살던 곳은 아다치구의 UR 하나바타케 단지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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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몇 개월 뒤인 2016년 12월 정신 장애를 겪는 이들의 전시회에 들른 것이며 이후로는 출처가 불분명한 목격담은 있으나 그 이후의 정확한 근황을 알 수 없다. 참고로 위의 홈페이지는 문춘에게 사진을 찍히고 난 직후부터 업로드가 뚝 끊겼다가 언제부터인지 접속되지 않는 상태다.

이런 행동을 하고도 뉘우침이나 처벌이 없다는 점에서 식인은 안 했지만 사가와 잇세이하고도 유사하다.[39]

9. 음모론?

일단 첫 번째 초등학생 6학년 여학생 2명 및 4학년 학생 살인 미수 사건,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여학생 살인 사건은 유죄라는 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세 번째 범행.

이 사건을 두고 여러 가지 음모론이 존재한다. 먼저 고베 신문사로 보내진 장문의 편지에서 나타나는 문장 구사력과 어휘력은 상당한 수준이라서 당시 14세의 소년에다 학업 성적도 좋지 못했던 아즈마가 썼다기엔 큰 무리가 있다고 보인다는 점이다. 또한 준의 머리가 처음 발견되었던 5월 27일 학교 정문 앞에 검은색 닛산 블루버드가 정차하고 있었다는 트럭 운전 기사의 증언이 있었고 검은색 비닐 봉투를 들고 서성이던 20~40대 남성을 목격했다는 노부인과 신문 배달원의 증언이 있었다.[40] 또한 아즈마가 변호사와 대담 시 울먹이며 "나는 속았다, 당했다."라고 진술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범인의 편지가 네 필적이라는 증거가 나왔다'는 수사관의 거짓말에 속아 자백했던 일을 의미한다. 당시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던 아즈마는 수사관이 그렇게 다그친 뒤에야 울음을 터뜨리며 모든 범행을 자백했었다. 필적 감정 결과 자체는 '유사한 필체가 많이 보이지만 동일한 사람의 필적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였다. 블루버드 차량의 경우는 후에 오보로 밝혀졌다.

또한 준의 머리를 놓아둔 상황에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처음 경찰에 신고한 중학교 수위에 의하면 머리는 학교 정문 중앙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노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1시간 전 정문 앞에 머리는 놓여 있지 않았으며 6시 30분에 목격한 신문 배달부는 머리가 플레이트와 반대로 정문으로 향하고 좌측에 놓여 있었다고 증언한다. 아즈마는 머리를 맨 처음 학교 담 위에 올려놓았다가 상태가 안정적이지 못해 교문 앞에 놓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담의 높이는 2m로, 160cm 중반의 소년이던 아즈마가 무게 6kg짜리 머리를 올려놓는다는 건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는 설이 있었다.

이에 대해 아즈마는 머리의 끝부분을 잡고 양팔을 높이 뻗어 발뒤꿈치를 세워가며 담 위에 올려놓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역시 키가 닿지 않아 머리는 어정쩡한 위치에 올려졌고 그 모습을 멀리서 확인하려고 다시 본 순간 머리가 담 위에서 사라지고 바닥에 떨어져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중앙에 놓았다고 했다. 또 발견 1시간 전에 머리가 교문에 없었다고 증언한 목격자에 대한 경찰의 질문에는 "그 사람의 단순한 착각입니다. 왜냐면, 저희 부모님은 새벽 5시에는 일어나서 주방에 있기 때문에 도저히 그 시간에 나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세 군의 머리를 놓고온 시간은 늦어도 새벽 3시입니다."라고 반박했다.

이 사건은 아무런 물증도 범행 증인도 없이 오로지 아즈마의 자백만으로 범행이 인정되었다. 물론 아즈마가 자백한 곳에서 흉기가 나오기는 했는데 실제 흉기의 종류와 칼날의 길이 등이 아즈마가 자백한 사실과 달랐으며 시체에는 분홍색 시반이 나타났는데 이는 주로 독살이나 가스 유출 현장 혹은 시체가 추운 곳에 있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준은 질식사이므로 독살 등으로 분홍색 시반이 나타날 수 없으니 사체가 추운 곳에 있었다는 소리. 범행은 5월에 일어났으므로 사체를 냉동시켰다는 뜻인데, 아즈마가 냉동 시설을 이용할 수 없었으므로 자기 집 냉동고에 보관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자백에 따르면 준과 심한 격투 끝에 살해했다고 했으나 준의 시체 어디에도 격투의 흔적은 없었다.

부검 결과 범인은 왼손잡이로 추정되나 아즈마는 오른손잡이고 협박장의 필적도 아즈마의 필적과 동일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검찰은 믿을 수 없는 아즈마의 진술 및 추정 증거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기로 보면 2000년대 초반까지 소년 A 무죄설은 심도 깊게 다루어졌다. 특히 소년이 쓴 작문 《징역 13년》에서 나온 문구 상당수가 영미권의 책이나 영화에서 따온 것임에 비추어 보아 일련의 사건이 미국과 정치적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는 음모론도 있다. 대표적으로 극좌 조직 혁마르파는 사건 당시부터 자신들의 기관지에서 사건을 분석하면서 '소년 A는 무죄이며, 진범은 따로 있다'는 주장을 싣고 공개 집회를 벌이기까지 했다. 이 외에 진범이 실존하며 그 진범이 몇 건의 다른 살인 사건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괴문서도 암암리에 돌아다녔다. 또한 범인의 도전장에 뒷장이 있다는 음모론도 있다. 사진을 보면 스테이플러 자국이 있는데, 경찰이 중요하지 않은 앞장만 공개하고 정작 중요한 뒷장은 숨겼다는 설이다.

하지만 이 음모론의 대부분은 아즈마 본인의 명확한 범행 인정과 면밀한 조사,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반박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아주 낮다.

굳이 필적 감정과 자백을 강요하지 않았어도 부모가 입회한 가택 수사에서 범행과 관련된 물품들, 특히 아즈마가 준의 머리를 집 다락에 몰래 숨겼을 때 남았던 핏자국과 범행 도구들이 발견되었던 점, 아즈마가 범인이라고 밝혀지기 전에 제2의 도전장을 미디어에서 본 아즈마의 교사와 동급생들이 아즈마의 필체와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 아즈마 본인이 하세 준 사건 이전의 살상 사건을 주변에 자랑하듯 흘리고 다녔다는 점, 하세 준 살해 직후 친구들 두 명과 만났는데 아즈마의 옷과 흰 운동화가 흙 범벅이고 머리가 샤워를 한 듯 엄청나게 땀에 젖어 있었다 등 아즈마의 차림새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고 그 두 명이 증언했다. 도저히 중학생이 저지를 만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누명을 썼단 설이 제기되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이 강력하게 자신이 범인임을 주장하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아즈마 신이치로가 범인이라고 볼 증거가 충분하다.

중학생 소년이 쓰기에는 어려운 한자와 문장들이 성명문에 적혔다는 점도 누명설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아즈마 본인이 TV 영화, 책 속에서 본 단어, 문장을 거의 그대로 베껴 쓴 것들이라고 증언했다. 어려운 한자는 사전을 보며 적었다고 진술했는데 그 한자들은 ’愚弄, 追跡, 街えさせた, 辛んで‘등등이다.

편지 봉투에 쓴
내 이름은 [ruby(酒, ruby=사카)][ruby(鬼, ruby=키)][ruby(薔, ruby=바)][ruby(薇, ruby=라)][ruby(聖, ruby=세이)][ruby(斗, ruby=토)]. 밤하늘을 볼 때 생각하면 좋겠지.

라는 문장도 본인이 생각한 것이 아닌 '영화극장'을 보다 외국 영화에서 비슷한 대사가 나왔기에 따라 쓴 것이라고 진술했다.

또한, 아즈마는 중학교 시절 학교에서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아였다. 동네 길고양이들을 육교에 올라가 차도로 던진다든가 '해부'라는 명목하에 잡아 죽여서 씨를 말린 사실은 학교 안에도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학교에서도 칼을 가지고 다니며 여러 사람을 위협한 적이 있었다. 죽인 고양이들의 혀를 소금에 절여 병에 보관하여 친구들에게 자랑하듯 보여주고, 동물을 죽이기 위해 마트에서 온도계를 훔쳐 수은을 모았으며 친구를 폭행하는 등 일진 짓도 해서 해당 피해자가 소년과 마주치기 싫어 공포에 떨며 전학을 갈 정도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문제아로 교사들의 시선을 끌었던 아즈마는 중학교에 가서는 교사들도 손을 떼고 부모에게 상담받기를 종용할 정도였다. 실제로 부모는 아즈마를 데리고 뇌 검사까지 받았고, 제3의 살인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부모와 함께 상담을 다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현재 일본 사회에서는 아즈마의 단독 범행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 무엇보다 아즈마 본인이, 지능이나 사회성 등에 별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41] 지금까지 한 번도 무죄를 주장한 적이 없다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 사건의 범인임이 재판에서 인정된다면 남은 인생 반은 종 칠 것이 분명한데 무고하다면 굳이 범인이라고 우겼을까? 게다가 일본 검찰이 아무리 막장이라도 무죄가 의심되는데도 기소하는 일은 대중에 대한 파급력이 큰 성범죄나 성범죄 결합 살인죄가 아니고서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성범죄와 전혀 관련이 없는 그냥 묻지마 살인이었는데 과연 검사 커리어를 아예 포기할 각오를 하고[42] 기소할 만큼 생각이 없는 검사가 있을까?

2002년 5월 아즈마의 어머니가 아즈마와 면회한 자리에서 어머니는 "엄마가 네 입으로 확실하게 듣고 싶은 게 있어. 하세 군을 네가 죽였니? 하세 군을 죽인 게, 정말로 너야? 이 사건이 누명일 수도 있는 거야?"라고 물어봤을 때 그는 명확한 어조로 "(누명은) 사실이 아니야. 틀림없이 그래요. 내가 저질렀어요"라고 얘기했다.

10. 창작물에서의 사카키바라 사건

CLAMP는 《X》의 연재 중단 요인으로 고베 대지진과 이 사건을 들고 있다. 물론 CLAMP의 핑계일 수도 있지만 《X》에 나오는 잔혹한 표현[43] 들을 미뤄 보면 좀 사회적으로 안 좋은 시선을 받을 듯해서 연중했을 수도 있다.

야마다 후타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OVA판 《 마계전생》은 이 사건의 여파[44]로 외압을 받아 결국 제작이 중단되었다.

저널리스트 오쿠노 슈지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69년에 발생했던 유사 살인 사건을 추적해 《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를 집필하기도 했다.

일본의 록 밴드 the GazettE는 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14세의 나이프(十四歲のナイフ)》를 발표했다.

어나더》의 남주인공의 성이 사카키바라이며 작중에서도 이 사건이 언급된다.

간츠》의 니시 죠이치로의 모델이기도 하다.[45]

대한민국에서는 2004년 6월 22일과 29일에 《 실화극장 죄와 벌》 71~72화에서 이 사건의 내용을 재연 드라마 형식으로 방송했으며 아즈마는 '야마자키'라는 가명으로 처리되었다. 아즈마가 소년 치료 감호소에서 나온 뒤 "설마 네가 진짜로 그런 거니?"라고 묻는 어머니에게 말 대신 썩소로 대답한 그의 모습이….[46]

《먼나라 이웃나라 한국편》에선 메이와쿠 문화를 중시하는 일본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흉악 범죄가 일어난다는 일례로 '중학생이 초등학생을 살해한 사건' 정도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당시 한국에 준 충격은 대단했고 MBC 뉴스데스크는 이웃나라 연쇄 살인범의 체포에 잠시 속보를 내보낼 정도였다.

오리하라 이치의 소설 《 실종자》의 모티프가 되었다.

2015년 7월 30일 《 경찰청 사람들 2015》에 이 사건이 소개되었다.

이쿠하라 쿠니히코 감독이 자주 사용하는 "투명하다"라는 표현은 사카키바라 사건의 협박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 돌아가는 펭귄드럼》에서는 '투명해져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되는 시설 '어린이 브로일러'가 나오고 《 유리쿠마 아라시》에서도 몰개성한 보통 사람과 같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자주 사용된다.

펑크 밴드 긴난보이즈의 1집 수록곡 《SKOOL KILL》이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2022년 7월 14일, JTBC 세계 다크투어 6화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나름 자세히 조사를 한 것으로 보이나 한 가지 오류가 있다. 경찰이 소년에게 편지를 다시 써 보라고 지시했다는 부분인데, '경찰이 지시'한 게 아니라 아즈마 본인이 경찰 조사 중 '성명문의 내용을 다 기억하서 쓸 수 있다'고 자랑(?)하여 본인이 먼저 써 보였던 것이다.

11. 관련 문서


[1] 酒(술), 鬼(귀신), 薔薇(장미). 榊原라는, 흔한 성은 아니지만 실존하는 성과 발음이 같다. [2] 첫 번째 사건은 아즈마가 이 여학생에게 잡혀 불러 세워진 직후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이 에피소드는 2019년 2ch '사카키바라 세이토랑 같은 반이었는데 질문 있어?'라는 스레에서도 밝혀진 내용이라 잠시 화제를 일으켰다. [4] 빠른 생일이고, 한국과 일본은 초등학교를 만 6세에 들어가기 때문에 만 18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한국도 법정 공식 나이는 만 나이다. [5] '다년간의 대범한 유혈의 나'로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읽는다면 미야시타 아키라의 만화 《마라문의 가족(瑪羅門の家族)》에 나온 대사인 "다년간의 대범한 작렬의 나를(積年の大怨に灼熱の裁きを)!"의 인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실제로 범인이 나중에 잡혔을 때 그 만화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6] SCHOOL(스쿨)의 오타가 아니라 실제로 저렇게 적혀 있었다. KILL은 최초로 보낸 성명문에 적힌 표기로, 다시 쓴 두 번째 성명문에는 KILLER라고 고쳐져 있다. 처음에 KILL를 KILLER라고 착각해 잘못 적은 것이라 진술했다. [7] 酒鬼薔薇聖斗는 현재 '사카키바라 세이토 (さかきばらせいと)'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범인의 이름인가, 필명인가, 어떻게 읽는 것인가도 불분명하였다. SHOOLL KILL도 일부러 저렇게 적은 것인지 스펠링을 몰라서 적은 것인지 논란이 있었다. 쪽지가 젖어서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조악한 문장으로 작성되어 있고 글을 자를 대고 써 놓아 글씨가 엉망이어서 해석이 여러 방향으로 갈리는 경향이 있다. [8] 이때를 회상하며 아즈마는 '현실에서 인간의 목을 베고 있다고 생각하니, 흥미진진한 기분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9] 아즈마는 일부러 자신조차 알지 못하던 어느 정도 연로한 사람들이 쓰는 옛날 한자를 찾아 사용하여 범인의 나이대를 높였고 프로파일러들 사이에서 '젊은 사람이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가 있으므로 범인은 고령자일 것이다'라는 반응을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10] 이 부분을 일본 유학 경험이 있던 배우 이정현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두 번 낭독했다. 같이 있던 패널들도 이를 통해 아즈마의 광기를 간접적으로 느끼고는 소름 끼쳐 했다. [11] 'SCHOOL'부터 스펠링이 틀렸고 KILL조차 KILLER를 착각해서 잘못 쓴 글자다. [12] 이 글을 쓴 스케치북과 고급 한자를 쓰기 위해 참고한 서적은 이후에 불태웠다고 진술했다. [13] 아즈마가 설정한 거짓 범인상은 다음과 같다. '30대 남성, 무직. 학생 때 야구부에 소속되었고 아버지는 없음. 이전에는 교육 관련 직업에 종사했으나 해고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산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남성을 엄격하게 가르쳤기에 둘 사이의 따뜻한 유대감은 없음. 어렸을 때 심각하게 왕따를 당해 의무 교육을 원망하고 있다'. [14] 한자 본래의 뜻과는 관계없이 음을 빌려서 쓰는 한자. 한국으로 따지면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불란서(佛蘭西, 프랑스) 등이 해당된다. [15] 성명서를 프로파일링한 결과 범인은 경찰과 접촉한 적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따라서 이전부터 문제 행동으로 경찰과 접촉한 적이 있었던 아즈마 신이치로가 유력 용의자로 떠오르게 된 것. [16] 위에서 '더러운 채소 같은 인간들'이라고 표현한 걸 기억하자. [17] 경찰 조사 때 이 문장은 본인이 생각한 것이 아닌 '영화극장'을 보다 외국 영화에서 비슷한 대사가 나왔기에 따라 쓴 것이라고 진술했다. [18] 이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파악하여 조사 본부에 올린 건 생활 안전부 소년과 형사부였다. 이로 인해 3명의 조사원이 본부장 표창상(賞)을 받게 되었고, 그 3명 중 한 명은 형사부였다. [19] 공교롭게도 로버트 K. 레슬러는 바로 이 사건의 프로파일링을 담당하여, 범인의 인물상을 고등 교육을 받은 자에서 중학생으로 좁히는 데 기여하였다. [20] 《FBI 심리분석관》의 첫 장에서, 선량한 겉모습과 사악한 본성을 가진 사이코패스를 마물에 비유하는 인용문이 나온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물을 마음속과 마찬가지로 겉모습도 괴물처럼 생겼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완전히 반대다.' (후략) [21] 이호성 살인 사건 엠바고가 깨져, 범인인 이호성이 검거되기 전에 이호성이 자살했다. [22] 형사들은 처음부터 '경찰'이라는 소개 대신 '소년 보도소(補導所)'에서 왔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고 후에 이야기하였다. [23] 이 기자 회견의 시청률은 NHK 46.2%, 후지 테레비 17.9%를 기록했다. [24] 이 그림과 함께 그가 공상 속에서 만든 가상 친구 '에구리짱(エグリちゃん)'이라는 잔혹한 모습의 여자아이 그림도 그렸는데 조사관들은 그 속에서 그의 병적이며 내면의 깊은 암흑을 느꼈다고 한다. [25] 물론 이 사건 이후 소년법이 개정되어 바로 하향 조정 되었다. 일본의 소년법을 바꾼 사건이라 할 수 있다. [26] 하세 준을 죽인 당일 날도 탱크산을 내려온 직후 '비블로스'라는 매장에서 포르노와 호러 비디오를 훔쳤으며 가택 수사 당시 아즈마의 방 벽장은 만화, 소설, 비디오, 게임 CD 등의 공포물로 온통 빼곡했다. [27] 국내에서도 동년생인 범죄자는 어금니 아빠 살인사건 이영학, 강남역 살인사건 김성민, 부천 초등학생 토막 살인 사건 최경원 등이 있다. [28] 이 문단은 스즈키 노부모토의 <가해자 가족>을 참조하였다. [29] 저자 명의가 '소년 A의 부모'로 되어 있다. [30] 이날 시합은 9-5로 오릭스가 다이에를 꺾었다. [31] 당시 한총련 관련 사건에 묻혀서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국에서 이 사건이 보도된 것은 경향신문이 유일하다. [32] 아즈마의 부모는 경찰의 권유에 의해 이혼했다고 알려지며, 일본의 경우 여성은 이혼하면 원래 성으로 돌아가지만 남성은 똑같기 때문에 아버지 쪽이 '아즈마(東)'라는 성을 버렸다고 추정된다. 동생들도 개명과 함께 성을 친척 쪽으로 바꾸었다. [33] 수기 작성 과정에선 자신의 살해 과정과 피해자에 대한 묘사가 나올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유족들과 고인에게 엄청난 2차 가해이다. [34]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범죄 행위를 토대로 만든 지적 재산물을 판매할 경우 그 수익금을 피해자 배상을 위한 배상금으로 지급하도록 강제하는 법률이다. [35]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따라 한 것이다. [36] 소년원에서 몸은 단련했을지언정 키는 자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37] 홈페이지 메인에 있는 그림도 달팽이 그림이고 사진도 달팽이를 모아서 찍은 것들이 많다. 어렸을 적 해부하던 달팽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38] 1980년대 후반 그 악명높은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이 일어난 동네이기도 하다. [39] 아즈마는 홈페이지에서 사가와 잇세이를 언급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초반에 일어난 사가와의 파리 인육 사건을 언급하며 "제게 있어서 예술이란 '잃어버린 현재를 향한 구애'입니다. 그것을 제게 알려준 건 당신입니다"라고 경애를 표하는 구절을 썼다. [40] 다만 배달원은 소년의 머리를 '단지 마네킹을 갖고 한 끔찍한 장난'으로 생각해 신고하지 않았다. 사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기는 하다. [41] 지적 장애 자폐성 장애가 아니라도 평소에 호구 취급 받았다느니, 남의 말을 잘 믿는다느니 하는 등 진술이 나왔다면 재조사를 했을 것이다. [42] 처벌이라도 기대할 수 있으면 모르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43] 다른 건 그렇다 쳐도 히로인 모노우 코토리 참수가 지분이 클 것이다. [44] 작중 참수 키리시탄 아이들의 목을 보고 아마쿠사 시로 토키사다가 폭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45] 아즈마, 東 → 니시, 西, 신이치로, 真一郎 → 죠이치로, 丈一郎 [46] 실제로는 어머니의 "네가 누명을 썼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정말 그렇니?"라는 질문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럴 여지는 전혀 없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47] 미성년자 사이코패스의 끔찍한 아동 대상 살인과 시체 훼손 사건이라는 점이 상당히 유사하다. 인천 동춘동 초등학생 유괴 살인사건 발발 이후 사카키바라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48] 사카키바라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2년 후에 발생했다. 대낮에 벌어진 아동 대상 살인 사건이었고 범인이 현장에 남긴 '성명문'이 사카키바라 사건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일본 사회를 다시금 경악하게 만들었다. [49] 사건의 범인이 중학교 시절 인터넷에서 사카키바라 사건을 접하고 나서 아즈마 신이치로에게 경도되었다. 범인의 증언에 따르면 아즈마가 사건 당시 자신과 비슷한 나이였는데 그런 일(사카키바라 사건)을 저지른 것이 존경스러웠다고. [50] 범행을 저지르고 수사기관과 언론을 상대로 조롱하는 편지를 썼으며, 그 편지에 비슷한 문장을 사용했다는 점이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