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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2:06:24

사가와 잇세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사가와 잇세이
佐川一政 | Issei Sagawa
파일:external/www.mohae.kr/22cc326ed2f230ccefc4b6b0b3b687d8.jpg
<colbgcolor=#000><colcolor=#ffffff> 출생 1949년 4월 26일
연합군 점령하 일본 효고현 고베시
사망 2022년 11월 24일 (향년 73세)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45~150cm[1], 35kg
직업 前 작가, AV배우
2013~2022 무직[2]
가족관계 아버지 사가와 아키라(1914 ~ 2005)[3]
어머니(1923 ~ 2005)
동생 사가와 준(1950 ~ )
외삼촌 사가와 미츠오(1939 ~ 2024)[4]
외사촌 동생 사가와 히로미[5]
학력 와코대학 문학 학사
간세이가쿠인대학 문학연구과 영문학 석사
소르본 대학교 영문학 석사
소르본 대학교 비교문학 박사과정 중도 퇴학
저서 안개속(霧の中)[6]
만화 사가와 씨(まんが サガワさん)[절판]

1. 개요2. 생애
2.1. 범행 이전2.2. 범행2.3. 체포와 재판
2.3.1. 사건의 여파
2.4. 작가 및 방송인 활동2.5. 몰락2.6. 투병2.7. 사망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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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 중 한 명이며 무려 식인 범죄자였다. 피해자에 대한 사죄는커녕, 자신의 살인 행위를 출세의 소재로 이용해먹은 파렴치한 인물이다.

2. 생애

2.1. 범행 이전

파일:사가와 잇세이 어린 시절.png
▲ 유년시절 사진

1949년 4월 26일 사가와 아키라(佐川 明)(1914 ~ 2005)의 장남으로 고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구리타 공업의 사장이었기 때문에[8] 집은 매우 유복했지만 그의 집안이 선천적인 유전병이 있어서인지 그가 태어나기 전에 태어났던 누나는 생후 10일만에 사망했다. 누나가 사망한 후 아버지의 나이 35세[9]에 힘겹게 얻은 장남인지라 부모가 매우 애지중지 키웠는데 개월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미숙아로 태어난 상태라 더더욱 그랬다. 1년 뒤인 1950년에 남동생 사가와 준(佐川 純)이 태어났다.

워낙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데다 어렵게 본 장남인지라 부모의 학업의욕이 엄청났는데 그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공부는 열심히 해서 와코대학 문학과[10]를 졸업한 후 간세이가쿠인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파리 제3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범행 당시 비교문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사실 범행을 저지르기 훨씬 전인 이 시절에도 그는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적 도착증을 종종 드러내곤 하였으며 고등학생 시절에는 정신과 의사에게 인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자주 의논하기도 했지만 의사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와코대학 재학 시절인 1972년에는 인근에 살던 중년의 독일인 여성을 잡아먹을 목적으로 자택에 침입하였지만 여성은 수면 도중 기척을 느껴 잠에서 깼고 습격당하기 전에 매우 왜소했던 그를 큰 피해없이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당시 경찰 및 피해자 모두 그의 범행은 당연하게도 인육이 아닌 강간이 목적이었다고 생각했다. 체포된 그는 당시 구리타 공업의 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사가와 아키라가 지불한 합의금에 고소가 취하되었는데 그의 식인에 대한 환상 및 집착을 발견해 고칠 마지막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2.2. 범행

1981년 6월 11일 파리 제3대학교 박사과정 재학 중 학급 동료였던 네덜란드 유학생 르네 하르테벨트(Renée Hartevelt, 당시 25세, 1956~1981)[11]에게 독일 시 해석을 도와 달라고 부탁해 집으로 불러 저녁 식사를 함께 하고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일:external/img.club.pchome.net/pics_maya2007_1232624737.jpg
▲ 피해자 르네 하르테벨트의 생전 모습.

그의 키는 성인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10cm 이상 작은 정도인 145~150cm 정도에 몸무게는 성인 여성의 평균 체중보다도 적은 35kg밖에 되지 않아 남성치고 극단적으로 심각하게 왜소한 모습이라 컴플렉스가 있었고 장신의 백인 여성에 병적으로 집착하였기 때문에 키 178cm의 르네 하르테벨트 씨가 표적이 되었다.[12]

그는 그녀가 시를 읽던 중에 등 뒤에서 목에 소총을 쏴 그녀를 살해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을 저질렀다.[13] 백인 여성의 엉덩이가 먹고 싶었던 그는 시체를 먹기로 결심하고 시신의 둔부부터 깨물었는데 생각보다 엉덩이가 단단한 나머지 잠시 밖으로 나가서 도축용 칼을 구입해 돌아와 시신을 차례차례 토막내기 시작했다. 둔부의 살을 도려내서 날로 먹은 뒤 매우 맛있다고 스스로 만족스러워했고 가슴을 비롯한 여러 신체 부위를 요리해서 먹었는데 일부는 냉장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신체의 거의 모든 부위를 섭취했고 여러 부위의 섭취 과정과 맛에 대한 평가가 자서전에 끔찍할 정도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14]

6월 13일 남은 시신을 여행 가방 둘에 나눠 담아 불로뉴의 숲에 있는 연못에 유기하려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는 그의 무거운 여행가방을 트렁크에 옮겨 담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그 무게에 놀랐는지 뭔가 낌새가 이상하지만 설마 그럴까 싶었는지 "혹시 시체를 유기하려 근처 공원에 가시는 겁니까?"라는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목적한 공원에 도착한 그는 연못에 여행가방을 유기했지만 우연히 그 공원에서 조깅하던 두 명의 목격자에게 유기된 여행가방이 발견되었다. 이후 여행가방에서 나온 토막된 시체 조각을 수사의 시작으로 조사한 결과 그의 짐가방을 옮겨 주었던 택시기사의 증언으로 그를 추적하는 데 성공해 자택 수사를 진행했고 집안 여러 군데에서 조리돼 있던 인육과 피해자의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2.3. 체포와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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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그는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일본으로 도주하려고 시도했지만 이틀 후인 1981년 6월 15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범행 일체를 자백했고 정신 감정을 위해 병원으로 보내져 약 2년 동안 그 곳에서 머물다가 의사가 그가 1살 때 앓은 장염을 뇌염으로 오인해 심신상실이라는 판정을 내려 불구속기소 처분을 받았다.[15] 심신상실로 처벌을 받기엔 부적합하다는 프랑스 법정의 판결에 의해 그는 무죄가 선고되었고 교도소가 아닌 앙리 코란 정신병원에 무기한 입원 조치되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틈틈이 쓴 데뷔작 소설 "안개속"(霧の中)[16]이 출간되었는데 후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1984년에 국외 추방되었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도쿄도립 마츠자와 병원에 입원하였고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정상인이 맞다는 진단이 나왔다. 일본 경찰은 사가와를 재판에 회부할 방침이었지만 만악의 근원인 프랑스 경찰 측은 불기소처분된 사람의 수사자료는 제공할 수 없다며 수사자료의 인도를 거부하여 결국 처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약 2년이 채 안 된 1986년 8월 12일에 일본에서의 공식적인 처벌 및 기록이 남지 않은 채 깨끗이 퇴원하였다.

2.3.1. 사건의 여파

하여튼 이 식인 살인마가 전 세계에 끼친 여파는 생각보다 엄청나서 당시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에 일본인을 보고 기겁하는 외국인을 그리기도 했고, 이탈리아 여성과 결혼한 어느 한국 사업가가 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90년 초반에 아내와 결혼을 허락받고자 아내의 처가로 갔더니 아내의 할머니는 자신을 무섭게 쳐다보고 있고 할아버지는 사냥용 엽총과 허리춤에 단도를 차고 땀을 흥건히 흘리면서 계속 헛기침을 하다가 하는 말이 "자네... 설마 우리 손녀 잡아먹지 않을 거지?" 놀라서 대체 무슨 말인가 했더니만 바로 이 사건이 이탈리아에서 충공깽으로 다뤄지면서 아시아인은 서양의 어린아이와 젊은 여성의 생인육을 즐겨먹는 민족이라는 인식이 이탈리아 깡촌 시골마을에까지 자리잡았던 것이었다. 물론 당시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많이 보도되었으며 사설에서도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만행에 빗대었을 정도였다.

일부에선 가십거리로 떠든 일화밖에 없는데 전세계라는 것은 좀 그렇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아시아 황인이 백인 여성을 살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간에 인육을 섭취하기까지 한 실로 엄청난 사건이라[17] 당시 언론과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십거리로 떠올랐다.[18]

당시 한국의 사설을 보면 반일 감정과 결합되어 한국에서 더욱 가십거리가 된 면이 있는데 정리해 보면 당시 미국의 경제를 위협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던 경제2위 일본을 "유럽인들은 경제동물이라고 부른다"고 비하하는 내용으로 시작하며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 하나를 가지고 프랑스인들은 이제 일본인들을 "식인동물"이라 부를 것이라면서 일제강점기까지 언급하며 "일본인들은 야만적인 민족"으로 결론짓는 내용이다. 만약 미국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인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를 근거로 "한국인들은 살인머신"이란 칼럼을 미국이든 일본이든 싣는다면 차별과 혐오로 가득찬 저질 칼럼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 실제로 해당 사건 발생 직후 미국인에게 사과하는 일부 한국인들이 있었는데 오히려 개인주의가 정착된 미국에서는 이런 '한국식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여 왜 사과하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팩트만 보면 프랑스에서는 "일본인들은 식인동물"이라고 일본인들에 대한 차별을 행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범인조차 개인의 정신병으로 판결하여 강제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한 뒤 석방했으며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 당시 미국에서도 한국인들을 증오하고 차별했던 것이 아니라 심지어 피해 당사자인 희생자들 가족들마저 조승희도 희생자라면서 희생자 영결식에 같이 포함시켜 줬다.

이 사건으로 아시아인들이 서구에서 차별당했다는 과장된 도시전설이 있는데 정작 90년대 이탈리아의 축구 리그인 세리에 A에서 뛰던 미우라 카즈요시가 이 사건으로 차별을 당했다는 일화는 찾을 수 없다. 하물며 일본인도 아닌 한국인이 서구에서 "인육 먹은 아시아인"이라고 차별받았다는 것은 세계화가 덜 된 전근대 시대에나 그럴 듯한 괴담일 수도 있다. 이미 90년대라면 TV매체로 세계화된 만큼 서구에서도 이소룡, 성룡은 물론 코리안 특급 박찬호나 노모 히데오, 박세리, 차범근(차붐)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아시아인들이 무척 많았다. 따라서 개인적인 범죄 하나 가지고 인종을 싸잡아 차별하고 연좌제를 가하는 미개한 시절이라기엔 모순이 있다. 인육 사건이야 많지만 동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죽였으니 더욱 논란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 자체가 한국식 시각이며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가해자가 동양인 조승희라고 해서 더욱 논란이 되면 그것 자체가 인종차별이므로 서양에서는 금기시된다. 한국에서 외노자가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외노자를 싸잡아 성범죄자 취급한다면 인종차별로 비난받을 텐데 더욱 엄격한 서구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사건에 범죄심리학적 접근보다는 가해자의 '국적'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나라가 한국의 언론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차별당했다는 정체불명의 일화들도 출처가 대부분 한국이다. 만약 가해자의 국적이 일본이 아니라 태국이나 필리핀이었다면 한국에서도 국적에 별로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미 미국에는 1970~80년에 '밀워키의 식인귀'라는 별명으로 악명을 떨쳤던 제프리 다머가 존재했는데 무려 17명을 살해한 후 시간했으며 사체를 절단하고 그 인육을 먹기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백인종은 식인동물이라는 인종차별은 없었다. 정작 사가와 사건을 다룬 한국의 유튜버는 해외에서 아시아인들이 차별을 당했다는 일화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며 되레 '범죄자와 가족을 구분하는 서구권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연좌제를 한다'고 강조하며 그의 아버지의 사업이 망했다며 일본인들은 범인의 가족까지 차별하는 나쁜 민족이라는 식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사가와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유명인이 되었기 때문에 모순이 되며 자기 아들이 방송에 나와 저런다면 정상적인 부모들은 멘붕에 빠져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죄 없는 가족들이 얼굴을 못들고 다닐 정도로 차별당했다는데 정작 당사자인 사가와는 무려 방송 진행자로 나와 높은 시청률을 거두고 인기를 얻으면서 잘 나갔다. 재밌는 점이 서구는 가족과 범죄자를 구분한다는 주장과는 달리 당시 한국의 언론에서는 유럽에서는 아예 가족을 넘어 일본인을 식인동물로 여길 것이라고 조롱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당시 한국의 만평 중에는 서양인들이 일본인들을 보며 식인종처럼 비난하는 인종차별적인 만평도 있었는데 이 내용이 유럽인들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일본인이 사고 쳤으니 모든 일본인들은 차별을 당해도 싸다는 연좌제 끝판왕격인 시각을 드러냈다.

인육을 먹는 범죄는 병리학적 카니발리즘으로 구분되는데 사가와는 공식적으로는 1명을 살해했기 때문에 카니발리즘 유형으로는 한국의 인육 범죄자들보다도 떨어진다. 일례로 피해자들의 인육을 집단으로 시식한 지존파가 있으며 연쇄살인범인 유영철은 4명의 간을 먹었다고 하는데 "정신이 맑아지고, 먹고 나면 몸이 좋아진다"며 인육을 먹은 이유를 설명했다. 2017년에 붙잡힌 러시아 식인 부부는 1999년 이후 20명에 달하는 살인을 저지르면서 무려 18년 동안 인육을 먹어온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는데 당시 한국 언론에서는 새삼 한국의 인육 범죄를 조명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러시아 식인부부,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인육’ 먹은 지존파 사건 재조명 물론 수십명의 인육을 먹은 러시아 식인 부부가 외신에서 화제가 됐다고 해도 백인을 보고 기겁하는 아시아인들이나 백인 사위에게 "내 딸 잡아 먹지 않을 거지?"라며 땀을 뻘뻘 흘리는 유치한 장인어른 괴담은 없었다. 한국에서도 식인 부부의 국적이 러시아라서 그런지 사가와에 비해선 그냥 흔한 외국의 엽기 인육사건으로 여겼고 관심이 적었다. 사가와 사건은 내용만 보면 기사 단신으로 보도되고 묻혔을 사건일 수도 있는데 범행에 비하면 과도한 인지도를 갖게 된 배경에는 일본에서 체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마음껏 활개치고 다니면서 스스로 저서를 내 베스트셀러가 되고 생고기 맛을 평가하는 방송 진행자를 맡은 지분이 크다. 원래 베스트셀러 작가에 방송 진행자라면 '유명인'이라고 불리는데 더군다나 전직 인육 범죄자 출신 유명인이라면 더욱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카니발리즘의 특징이라면 한 번 인육을 먹은 사람은 계속 먹는다는 것인데[19] 사가와는 특이하게도 프랑스에서 치료가 잘 되었던 것인지 일단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의 카니발리즘을 하지 않고 범죄도 저지르지 않아 더 이상 감옥에 가는 일 없이 생을 마감했다. 한 번 호기심에 맛을 보고 싶었던 것인지 이후 다른 생고기에 심취하여 더 이상 사람을 먹는 일은 '공식적으로는' 없었다.

2.4. 작가 및 방송인 활동

사가와 잇세이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을 묘사한 자서전을 출판했는데 이게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1992년엔 일본의 방송인과 AV 제작자들이 그를 데려다 천박한 영상물을 찍어 팔기도 했다는 점이다. 음침한 지하에서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마약에 취하고 변태적인 성행위를 하는 클럽인데 그 장면 중 시체를 훼손하며 난교를 하는게 영화의 내용이며 영상으로 백인 AV 배우들이랑 상대하는 AMWF AV를 찍기도 했다. 이후 일본에서 여러 식당에 관한 리뷰를 잡지에 쓰는 저널리스트 활동도 했는데, 방송에서는 이런 점을 눈여겨 봤던지 그를 요리 방송에 초대해 생고기를 맛보며 평가를 하는 프로를 진행하기도 했다.[20] 그는 여성의 나체가 주된 그림들을 그려 돈을 벌었고 2000년대 이후엔 자신의 살인 및 식인 체험담을 여러 매체로 지겹도록 우려먹고도 모자랐는지 직접 <만화 사가와 씨>(まんが サガワさん)이라는 만화로 그려 팔아먹기까지 했다. 혐오주의[21]

사실 식인 살인사건은 세계 곳곳에서 터지지만 그런 살인마들은 사형이나 무기징역 같은 처벌을 받는 게 보통이고 살인범이 회고록이나 기타 그런 걸 낸다 해도 판매수익은 죄다 피해자 유족에게 가게 하는 법안이 만들어지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그때는 시대가 달랐다고는 해도 살인마, 그것도 식인 살인마의 자서전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TV에 나오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 웃으면서 떠들어 대고 광고에도 나오면서 스타처럼 취급받는 경우는 좀처럼 없어서 더더욱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검경(檢警)에서 정신질환으로 오인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책임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프랑스 정부가 일본 측에 관련 정보 제공을 거부한 진짜 이유는 장염을 뇌염으로 오진하여 정신이상자로 분류한 의사의 실수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처벌을 면했으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좋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반성하며 속죄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평생을 살아야 마땅할 터인데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며 오히려 고인드립까지 했으니 욕을 먹은 것이다.

한국에서 90년대에 지존파 인육 사건이 터졌을 때는 언론에서 모자이크를 하지 않았는데 범인 중 한 명인 김현양이 당시 인기배우였던 차인표를 닮아서 일부 여성들에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만약 풀려나 자서전이라도 냈다면 화제가 됐을 수도 있겠지만 사형으로 끝나서 더 이상 이슈가 될 수 없었던 반면 사가와 잇세이는 무기징역도 아니고 이슈가 한창이었을 때 사회에 나왔으니 화제가 될 수 있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설사 지존파가 풀려났다고 한들 지존파의 자서전을 내는 출판사 자체가 매장당할 가능성이 높으니 출판하기도 힘들 것이고 방송사에서도 절대 출연을 시키지 못할 것이다. 인육 범죄자가 방송에 출연하여 인기를 누린다는 것은 학폭 미투에서 지목된 연예인들의 퇴출 사례를 봐도 불가능하다. 직장조차 구하기 힘들 텐데 실제 지존파의 가족들조차 다들 이사 가고 심지어 사형집행 후 사체 인수도 거부하여 국가에서 장례를 치렀을 정도로 연좌제격인 차별을 두려워하며 연을 끊었지만 일본은 개인주의가 강한 나라라 표현의 자유라며 방송에 출연하고 책도 내며 범인이 목에 힘주고 다녔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물론 당시에는 일본에서 외국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자국 국적의 범죄자에 대한 인식이 21세기에 비해 매우 관대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는 주변의 시선을 전혀 신경 안 썼으니 잘 나갈 수 있었으나 정작 정상적인 부모들은 저런 자녀를 보면서 잘못 키웠다고 자책하거나 부끄러워했으니[22] 피해는 정상적인 어머니와 아버지가 고스란히 받았다.

해외에선 당연히 아주 신나게 깠고(특히 정신이상으로 놓아준 프랑스 경찰) 일본에서도 그의 범행을 알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어째서 그가 처벌받지 않는가'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그 같은 이가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길을 걸어다닌다는 사실에 일본 국민들은 경악했고 인터넷이 발달한 21세기에는 더더욱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그에게서 기인해 애인을 먹은 여자라는 도시전설이 나왔다. 남녀가 뒤바뀌긴 했지만 2012년 11월 한국에서 발표된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의 살인범이 자서전을 편찬해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여론의 주목을 받는 장면의 모티브는 그의 사례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감독은 실화 바탕이 아닌 살인의 추억을 감상한 후 살인 사건의 범인이 공소시효 만료 후 자신의 범행을 알린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 하에 만들게 되었다고 밝혔다. 잘생긴 사이코패스가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팬클럽까지 생긴 장면은 테드 번디의 일화에서, 영화의 배경이 되는 살인사건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에서 각각 모티브를 따 온 것으로 보인다.

2.5. 몰락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마냥 호의호식하며 지낸 건 또 아니었다.

물론 그의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르고 많은 정신나간 러브콜들을 받던 1986년부터 2000년까지는 꽤나 이름을 날리면서 벌이도 꽤 짭짤했던 모양이지만 2000년 이후에는 돈도 벌고 명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쓴 원고는 그 어떤 출판사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여러 출판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원고를 출간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의 쓴맛을 보고 글쓰기 및 그림을 그만두고 구직 활동에 나섰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흉악범인 그를 고용하려고 하는 기업은 어떤 곳도 없었다. 궂은 일을 하는 단기 아르바이트조차도 말이다. 운좋게도 그가 숨기지 않고 떳떳하게 본명을 밝히면서 면접을 보러 온 그의 당당함에 흥미를 느낀 프랑스어 학원 원장이 고용하려고 했지만 학원의 모든 관계자와 선생들이 들고 일어나 반대하여 출근도 못 해 보고 빛의 속도로 잘렸다.

거기다 인터넷이 발달한 21세기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처럼 흉악한 범죄를 일으켜도 처벌 하나 받지 않는 것도 모자라 뻔뻔하게 굴면서 살아 있는 사카키바라 사건의 가해자,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가해자들과 같은 살인마들이 현재도 무사히 생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살인범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의견들을 자주 접할 수 있을 정도라서 앞으로도 이렇다 할 회사에 취업은커녕 아르바이트조차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상술한 것처럼 그가 유명 연예인마냥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유명인사로서 어그로를 끌기까지 했기 때문에 평범한 범죄자들마냥 조용히 잊혀져서 평범하게 돈을 벌면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돈이 많은 부모 곁에서 호강하던 시절과 달리 어머니는 자살해 버렸고[23] 아버지는 사업이 몰락하여 2005년에 향년 90세로 폐인이 된 상태에서 뇌경색으로 죽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거의 잊혀진 상태로 일간지 칼럼니스트로 겨우겨우 스스로 벌어먹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자업자득임에도 자신의 식인을 자랑하듯 쓰는 악의 고백이란 책을 내 팔아먹기도 하고 정신이상 판정이 오류임이 판명난 뒤 네덜란드 및 프랑스, 미국에선 입국 금지를 당했는데 법적 처벌을 운 좋게 피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미국에 가고 싶은데 못 간다며 억울해 했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나머지 가족 및 친척들조차 그가 장례식에 오지 못하게 그냥 막아 버렸다. 일본에서는 아무리 명예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더라도 사람이 모자라다거나 사고를 자주 쳤다는 이유로 가족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막는 일은 없지만 절도, 폭력 같은 단순 잡범도, 중대한 피해를 입힌 과실범도 아닌 극악무도한 흉악범이었던 그의 전력을 생각하면 이해가 충분히 가는 부분이다.

그가 아버지와 각별한 사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버지의 사망 직후 사망한 사업가의 아들로서 채무자들에게 빚을 모두 갚느라 집과 재산을 모두 처분해야만 했고 서민 공공 아파트로 강제로 이사하면서 직장도 없이 근근이 살아갔다. 2009년에 미국 & 캐나다 잡지사인 Vice Magazine에서 그의 이후 인생에 대해 인터뷰[24]를 했는데 '최소한 교도소에선 옷, 밥, 잘 곳을 주지만, 살인자로 낙인찍혀서 사회에 내던져지는 건 정말 가혹한 처벌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나마 인터뷰 당시엔 자신의 글을 적어 보내줄 잡지사가 한 두 군데 정도는 있었던 모양이지만 전술했듯이 반성은커녕 잘 놀고 먹으며 추억을 되새김질했던 것 같은데 더 자극적이고 논란을 일으키는 것을 원하는 잡지사의 입장으론 이 인터뷰들이 단지 좀 더 자극적으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싶다.

악의 고백을 한국어로 번역한 수리(예명)라는 사람이 일본으로 가서 이 작자를 만났는데 2000년대 중순에 만나 본 그는 그럭저럭 평범한 서민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더라고 한다. VICE에서도 다큐멘터리로 다룬 바 있는데 거기 버젓이 나와서 잘난 듯이 인터뷰한 것을 보면 살인 및 식인에 대해 일절 죄책감을 갖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이 정도면 정말로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추정된다. 참고로 다큐에서 공개된 집 내부를 보면 방 한쪽에 여자 사진을 도배해 놨는데 대부분이 우에토 아야의 사진이며 그녀의 사진을 보며 정말 맘에 든다고 몇 번이고 말한다. 물론 그게 무슨 의도로 마음에 든다는 뜻인지는 본인만 알 것이다. 그런데도 그의 소원은 서양 여자에게 잡아먹히는 것이라고 했다.

한 번 감옥에 갔다 와 출소한 범죄자들은 뉴스나 매체에 알려지지 않더라도 누군가 한 명이라도 알게 되면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당사자는 물론이고 가족들까지도 평생 동네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25] 그나마 이것도 강도, 상해, 음주운전 등 그나마 반성하면 용서받을 기회가 조금은 있다고 평가되는 범죄자 한정이다. 저지른 범죄가 간첩 같은 국가반역죄나 아동 성범죄, 살인 같은 극악무도한 흉악범죄라면 일가친척 전체가 주소지를 떠나는 건 물론이고 지인들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숨어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된다.[26] 그런데 그냥 흉악범도 아니고 살인 범죄자가 뉘우치는 기색 하나 없이 길거리에 활보하는 것은 법적으로 처벌은 피해갔더라도 문명이 있는 사회에서 법적인 처벌을 받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혹독한 사회적 처벌이 집행된다.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의 핵심 살인범 4인방이 사건 이후에도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다. 게다가 살인범들은 사가와 잇세이와 달리 범행당시 미성년자였고 법적으로 처벌을 조금이나마 받긴 받았음에도 그랬다.[27]

게다가 그는 엔자이가 흔한 성범죄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니며 계획적으로 살인을 한 뒤 식인까지 한 흉악 범죄자다. 일본이 전과자들에게 유난히 가혹한 곳인 건 맞지만 다른 국가라고 해도 이런 자가 사회에서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뻔한 이야기며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버틴 범죄자들 중에 범죄 사실을 누가 밝혔다면 모를까 공소시효가 끝난 뒤에라도 죄를 자발적으로 자백한 자들이 누가 있나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다.

다만 그의 몰락을 단순히 혹독한 사회적 처벌이라고 하기엔 정작 사회적 처벌을 받았어야 할 당시에는 잘나갔다는 점에서 모순이 있다. 일본이 전과자들에게 유난히 가혹한 곳이라고 하면서 일본 사회가 가혹하다는 피해자 코스프레로 '배부른 투정'을 했는데 인육 먹은 살인범이 쓴 책이 히트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존중을 받고 생고기 먹는 방송의 진행자가 되고 AV 배우도 할 수 있는 나라가 '가혹한' 나라라면 가혹하지 않은 나라는 대체 어느 수준이란 말인가. 진짜 전과자에게 가혹한 나라라면 인터뷰를 실어 주는 언론조차 없어야 하며 인터뷰를 시도하는 언론조차 퇴출될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과자가 아니더라도 연예인이 학창 시절 학폭이나 왕따 구설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퇴출되기도 하며 광고계도 괜히 욕먹을까봐 신속히 손절한다. 조형기 조형기 음주운전 뺑소니 시신유기 사건이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전에는 인기를 얻기도 했으나 그 사건이 알려지면서 유튜브에서조차 악플에 시달리다가 퇴출되었다. 헌데 그는 조형기보다 훨씬 끔찍한 범죄를 쓴 책으로 유명해지고 방송까지 진출했는데 아무리 범죄자 인권에 관대하다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거의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더군다나 이런 곳에서는 살인범이 책을 내면 강제로 돈을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데 그는 범죄를 팔아서 고스란히 자신의 주머니에 돈을 넣으면서 부를 쌓았다. 사실 그때 벌어들인 돈만 잘 관리했어도 노후 걱정은 없었을 텐데 흥청망청 쓰다가 궁핍해진 것을 사회적 처벌로 그리됐다고 하기엔 잘 나가던 시절에 너무 돈을 많이 벌었다.

그래도 말년엔 아무도 안써주지 않았냐고 하지만 한국에서도 근황올림픽 등을 보면 과거에 잘나가던 유명인들이 궁핍하게 살고 있는 후일담이 자주 나오기도 한다. 신바람 이박사가 월세 걱정을 하고 있다는 근황도 나왔는데 더군다나 노래라도 잘해서 연말에 써 주기라도 하는 이박사와는 달리 그는 그냥 자극적인 범죄 썰을 팔아서 떡상했던 인물인지라 그냥 소재가 식상해져서 출판사에서 안 받은 것이지 갑자기 출판사가 정의롭고 양심적으로 변하여 악을 단죄하기 위해 거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만 먹고 범죄 썰 빼면 특별한 능력도 없고 그냥 내세울 게 인육 먹은 썰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거창한 사회적 처벌이 아니라도 어느 나라든지 궁핍하게 살 것이다.

일본에서 죄를 자발적으로 자백한 사람이 없으니 전과자에게 가혹한 국가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럼 반대로 성범죄자라고 자백했을 때 환영받을 수 있는 나라가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다. 조두순처럼 아들뻘 청년에게 망치테러를 당하고 유명 격투기 선수가 조두순을 위협하는 유튜브 영상이 떡상하는 수준의 차별은 아닐지라도 유튜브에서 외국의 몰카를 보면 지인이 전자발찌를 일부러 슬쩍 보였을 때 그걸 본 순간 상대방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는데 어느 나라든 비슷한 상황에서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 것은 만국 공통일 것이다. 심지어 막장들이 모인 미국 교도소에서조차 성범죄자는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는데 엽기 변태 인육 살인마가 사회에서 당당히 활동하면서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는 일본이 글로벌적인 기준에서 범죄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편이며 그나마 말년에는 일반적인 국가 수준으로 떨어진 것에 가깝다. 인육 살인마가 참회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인육 썰을 팔아 부와 명예를 얻으며 유명인이 된 사례가 일본 외에 없으며 해외에서 입국 금지 대상이다. 집조차 구하기 힘든 조두순에 비하면 그는 과도할 정도의 인권을 누렸다. 두 번 이사 실패한 조두순, 당분간 현 주거지 계속 거주(2022)

정리하자면 그의 몰락은 뒤늦게 늙어서 갑자기 사회적 처벌이 작동했다기보다는 내세울 게 '인육 먹은 썰'밖에 없는 사람이 나이만 먹고 썰도 이젠 재미 없어져서 안 팔려 몰락한 것에 가깝다. 그나마도 그가 젊은 시절엔 대학 나온 것만으로 내세울 게 있긴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일본도 고학력 사회가 되고 일본인 기준으로 그닥 특별히 좋은 대학 출신도 아닌 데다[28] 특별한 사회 경험도 없고 키도 150이 안 되고 얼굴도 못생기고 인육 먹은 썰밖에 없는 노인은 어느 나라를 가도 젊은 시절 돈을 벌어 놓지 않았다면 말년이 힘들 것이다. 그도 젊은 시절 한창 방송 출연으로 돈을 벌 때 건물이라도 사든지 미래를 대비했다면 다소 여유로울 수 있었는데 어디다 쓴 건지 딱히 돈도 없으니 말년에 빈털털이 상태에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를 가도 흔하지 않다.

한편 사가와 잇세이가 왜 빈털털이가 되었는지는 동생의 증언을 보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한데,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기본적인 사회성조차 결여된 사람인 듯 하다. 동생인 사가와 준은 첼로를 연주하는 취미가 있었고 집안에 100만 엔이 넘는 고가의 첼로를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사가와 잇세이가 훔쳐다 팔기도 했다고 하며, 부모님에게도 계속 손을 벌린건 물론, 집안의 미술품들을 훔쳐다 팔거나 심지어는 아버지 지갑에서 돈을 훔쳐 쓰기까지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2~30대 시절에 저질러도 사회성 없다고 욕먹고도 남을 짓을 돈벌이가 끊긴 50대에 들어서 저질렀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이정도였으니 젊었을 땐 미래에 대한 생각 없이 얼마나 방탕하게 살았을 지는 뻔한 일이다.

2.6. 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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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병상에서의 사진

하지만 숨통이 트인 것도 잠시, 64세였던 2013년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뇌경색으로 쓰러져 신경계에 영구 손상을 입은 채 죽는 순간까지 병원에서 링겔 꽂고 누워 있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그와 동생 사가와 준 모두 독신인 데다 자녀가 없어서 부양해 줄 사람이 없었던 탓에 그나마 그를 딱하게 여긴 동생이 고용해 준 간병인에 의해 보살핌을 받으면서 처절히 살아가고 있었다.

2.7. 사망

2022년 11월 24일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유족에 의해 12월 2일 뒤늦게 사망 소식이 알려졌다. 장례식은 가족끼리 진행했다고 한다. #

3. 기타

래퍼 비프리의 앨범 'Korean Dream'의 스킷인 "20130804"와 "20130806"은 각각 차와 사무실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동료들과 하는 내용이다.

리바이어던으로 이름을 알린 루시엔 캐스팅-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이 이 사람과 인터뷰한 영상으로 카니바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록밴드 Stranglers의 La folie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곡이다.

구글에 이 자의 이름이나 japanese cannibal 같은 단어를 검색해 보면 피해자의 시신 사진이 모자이크 처리 없이 나오니 주의 바란다.[29]

원한 해결 사무소 13권에 그를 모티브로 한 듯한 캐릭터가 나온다.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도망다니는 데 성공했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이후 자신의 범죄행각을 자서전이나 종편을 통해 자랑스레 떠벌리고 다닌 게 영락없는 사가와다. 물론 만화 특성상 원한해결사의 함정에 빠져서 살인을 저지르고 다시 현행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드라마에선 피해자의 딸에게 살해당한다.

네덜란드의 블랙메탈 / 블랙 앰비언트 원맨 밴드인 Gnaw Their Tongues 의 EP앨범 제목이기도 하다.
[1] 145cm로 가장 많이 알려졌지만 일본의 어떤 다큐 프로그램에는 151cm,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150.1cm로 나와 있다. [2] 2013년부터 2022년까지 뇌경색 투병으로 사실상 사회생활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여 연금을 받으면서 동생이 고용한 간병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3] 처가(잇세이에겐 외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와서 아내의 성을 따랐다. 본래 성씨는 모리모토(森本)였다. [4] 1960년대부터 가수이자 배우로 활동했다. [5] 사가와 미츠오의 딸이며 뮤직 아티스트다. [6] 한국어 번역판의 제목은 '악의 고백' [절판] [8] 다만 오너가 없는 기업이어서 사가와 잇세이가 살인범이 아니었어도 회사를 물려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9] 지금이야 결혼연령이 높아져서 35세에 아이를 갖는 건 평균 나이에 가깝지만 1949년 당시에는 10대 후반~20대 초중반에 아이를 갖는 게 당연했다. [10] 2023년 기준으로 편차치 35 수준의 최하위 대학 # 이지만 60년대에 대학 진학률은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삼류대학에 다니는 대학생이라도 대학에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충분히 엘리트 소리를 듣고 다녔다. 더욱이 그는 소르본 대학교 석사 출신 이었고 사건 당시 박사과정 중이었기 때문에 동년배 일본인 중에서는 고학력자가 맞다. [11] 이름 때문에 유대계 네덜란드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는데 확인된 적은 없다. 그런데 사실 꼭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지형적 특색을 이름에 가져다 쓰는 일은 성씨가 드물었던 과거에는 흔한 일이었기 때문에 이름만 가지고 유대계라고 단정짓기 어렵기도 하다. [12] 2021년 기준으로 일본인 남성 평균 신장이 171cm다. 사가와 잇세이는 1949년생임을 감안하더라도 당대 평균 키인 165~168cm에도 훨씬 못 미치는 반면 르네는 장신으로 유명한 네덜란드인이라지만 여성으로는 당대는 물론, 지금도 매우 큰 키였다. 현재 네덜란드 여성 평균키보다도 7cm 가량 더 크다. 비교하자면 종합격투기 UFC 여성 체급 중 가장 낮은 체급인 스트로급에서도 사가와는 단신에 속하지만 남성 체급 중 중량급에 속하는 웰터급에서도 르네는 꿀리지 않는다. UFC 헤비급에서도 이름을 날렸던 180cm 마크 헌트 선수와 거의 동일한 키이며 한국에서 주먹 최강 소리를 들으며 웰터급에서 활약했던 김동현을 이겼던 콜비 코빙턴이 178cm였고 코빙턴을 이긴 웰터급 챔피언 카마루 우스만 선수의 키가 183cm였다. 더군다나 80년대에는 평균키가 훨씬 낮았는데 당시 178cm이라면 꽤 장신이었다. [13] 참고로 이 사건 이전에 잇세이는 크루즈 배에서 어떤 정육점 주인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대화를 하면서 꽤 친해졌다고 한다. 이때 정육점 주인이 고기 자르는 법을 조금 가르쳐 줬다고 하는데 이걸 시체를 자르는 데 참고했고 심지어 그 정육점 주인에게 감사하다고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답장은 오지 않았다. 더 섬뜩한 것은 이 크루즈는 르네와 사가와가 함께 여행을 가서 탄 배였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르네는 친구와 즐겁게 여행을 왔는데 그 친구가 자기 모르게 자신을 죽이고 잡아먹을 계획을 세우는 섬뜩한 상황이다. [14]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울렁거림을 느낄 정도다. [15] 사실 위키백과 같은 외국 사이트에선 의사의 오진은 언급이 없고 대신 그의 아버지가 고급 변호사를 고용해 이런 판결이 받아들여졌다고 서술되어 있다. # # [16] 네이버 책 [17] 게다가 이러한 엽기적인 살인 후 식인은 사건 자체가 별로 흔하지 않기 때문에 더 주목받았다. [18] 사건 이후에도 수위가 센 외국 사이트 등에서는 당시 유출된 사가와 개인의 사진들과 피해여성의 시체 사진까지도 japanese cannibal 등의 이름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굉장히 혐오스러우니 주의. [19] 곰도 한 번 식인을 하여 맛을 알게 되면 또 반복하기 때문에 살처분한다. [20] 심지어 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스테이크 CF까지 일본 TV에서 방송되기까지 했다. [21] 전문 그림 작가를 고용한 게 아니라 사가와 본인이 직접 그린 거라 그림 퀄리티는 매우 낮지만 당시 행위의 묘사가 매우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내성이 없는 사람은 혐오감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이 트윗을 올린 사람은 일본의 유명 AV 남배우 시미켄으로, "굉장히 흥미로웠고, 사가와 씨가 안타까웠다. 나는 식변을 하는 성벽이 있다. 사가와 씨는 그것이 인육이었다. 똥은 어떻게든 되지만, 만약 자신이 그랬다면 성벽을 어떻게 억제했을까. 생각만 해도 섬뜩하다."는 트윗을 올렸다. [22] 살인하고 인육 먹었다고 자랑하는 아들을 보면서 부모가 당당해하면 더 무서울 수 있다. [23] 그러나 동생 사가와 준은 이후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자살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그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 역시 죽기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아버지와 사망시기가 우연히 겹친 것 뿐이라고 한다. # [24] Vice 잡지 인터뷰(영문) [25] 어디 외딴 일본 시골이라면 모를까 일본의 복잡한 도시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정반대일 수 있다. 더군다나 일본은 한국과 달리 전세제도가 없고 월세만 있으므로 금방 이웃이 바뀌기도 하므로 더욱 그렇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맨션이나 아파트에서 잠시 살았다가 이사가기도 하는데 대개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사라지며 다들 관심없다. 당장 한국도 어디 시골 동네 주민들이 아니고서야, 복잡한 도시의 아파트에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진짜 유명한 범죄자가 아니라면 관심이 있어도 알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2000년경 일본 비평책에는 일본은 개인주의가 강해 남에게 관심없고 자기밖에 모르고 이기적이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도 모른 척 하더라 등등 이런 식의 레파토리가 많았는데 알고 보니 이웃의 사소한 전과까지도 다 캐고 있으며 무슨 정보통으로 서로 연결이 된 것인지 삽시간에 모든 이웃이 다 알고 특정인을 콕 찝어 차별을 시작한다는 둥 갑자기 전체주의 끝판왕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26] 실제로 사회에서 떠들썩하게 거론된 사건들은 굳이 범인의 신상을 공개하지 않아도 검찰의 탐문 수사, 이후 재판 과정 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알 수 있다. 그나마 서양권은 범죄자와 가족을 구분하는 편이지만 동아시아권에서는 흉악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면 그 가족은 평생 숨어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의 범인 가토 도모히로의 동생이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사회적 배척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례가 있다. [27] 이것은 한국에서까지 꽤나 인지도를 얻을 정도로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특이한 사례다. 한국에서도 조두순은 워낙 악명이 높아 유명한 격투기 선수가 참교육하겠다며 출소한 후 그의 호송차에 깽판치는 방송도 하고 실제로 그의 집에 찾아간 청년이 망치테러를 가하는 등 극딜을 가한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모든 성범죄자들이 다 조두순 꼴 당하냐면 그렇지 않다. 일례로 한국에서 전자발찌 찬 편의점주가 포켓몬으로 초등학생 유인하여 성추행하다가 걸린 사건은 마을 주민들이 다 몰랐다. 네임드급의 범죄자가 아니고서야 얼굴도 못 들고 다닐 이유가 없다. 애초에 흉악범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감출 정도로 양심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대체 무슨 피해를 보길래 얼굴을 못 들고 다닐 정도냐고 물으면 명확한 답이 없다. 오히려 야쿠자들이 문신 드러내고 과시하면 평범한 이웃 주민들이 눈을 깔기도 하며 무서워서 피하는 것을 왕따를 가한다고 오인하기도 한다. 물론 이웃과 왕래가 많은 터줏대감격인 사람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면 스스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고 다니는 경우는 있지만 이것은 그냥 본인이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것이지, 딱히 이웃 주민들이 작당하여 혹독한 처벌로 응징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 사가와의 가족들이 심한 차별을 받았다는데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어떤 혹독한 처벌을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설명이 없다. 자기 아들이 유명한 범죄자인게 알려지면 그냥 본인이 쪽팔려서 이사가는 사례는 한국에도 있지만 딱히 이웃 주민에게 뭔가를 당해서 강제로 떠나는 것이 아니다. [28] 현재도 소르본 대학교는 명문이 맞으나 학사인 와코대학은 아는 사람만 아는 대학이었다. [29] 대부분 흑백 사진으로 뜨지만 기술적으로 컬러사진보다 흑백사진의 화질(인화지의 감광성분이 흑백 쪽이 더 빛에 예민하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도트, 픽셀에 해당한다.)이 더 좋기 때문에 오히려 컬러사진보다 더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