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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1 11:00:26

야마다 후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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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田風太郎 (やまだ ふうたろう)

1. 개요2. 생애3. 작품 목록
3.1. 미디어믹스된 작품

1. 개요

1922년 1월 4일 ~ 2001년 7월 28일.[1]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대중 소설가. 생애 120여 작품을 남겼다.

2. 생애

본명은 야마다 세이야(山田 誠也). 필명 후(風)타로는 중학생 시절 3명의 친구들과 서로 부르던 별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친구들끼리 서로서로 번개, 비, 구름, 바람(가제)이라고 불렀다고. 본래는 '가제타로'로 읽기를 바랬다고 한다. 전기(傳奇) 소설, 추리 소설, 역사 소설 등, 다수 장르에서 이름을 떨친 엔터테인먼트 소설가 중 하나다. 그의 이름을 딴 야마다 후타로상( 2001년 부터)이 있다.

효고현 야부시(養父市)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대로 의사 집안이었고, 아버지는 마을에서 하나 밖에 없는 '야마다 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가 5살 때 뇌졸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도 중학교 2학년 때 폐렴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숙부에게 생활비를 지원받아, 재수, 삼수를 거쳐 1944년 도쿄의학전문학교[2]의 의대생이 된다. 실은 1933년 11살 때 어머니가 숙부[3]와 재혼했다. 숙부이자 의붓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후 다른 여인과 재혼했다. 사춘기 시절은 이런 순탄치 않은 가정 사정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허무주의에 빠져 방황하는 시기로 독서만이 유일한 마음의 위안이었다. 기숙사 제도였던 학교에서도 불량학생이 되어 정학을 3번 먹고 기숙사에서 퇴출당하기도 하고, 책방에서 책을 훔쳤다가 경찰에 잡혀 유치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20살 때 징병검사를 받았지만 늑막염으로 3급(병종) 판정을 받고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갑종, 을종만이 일본군의 징집대상이었다.

일본 군부 통치하의 군국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답게 이 당시의 일기에는 에 대해 절대 포기하지 말고 싸워야한다는 군국주의 청년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항복 소식에 충격이 컸는지 꾸준하게 써오던 일기에는 공백으로 남아있다. 그는 이후 약 천 권의 전쟁기록물 등을 사 모아 읽으면서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이 뭐였는지를 연구하게 되고, 일본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하게 된다.
1946년 24살 때 전후 최초로 창간된 미스터리 잡지 보석(寶石)에 응모해, 편집장이었던 에도가와 란포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소설가로 데뷔했다. 처음에는 상금을 받아서 의학 서적을 살 생각으로 응모했고 소설가가 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취미삼아 글을 쓰다 보니 소설가가 더 편할 것 같아서 1950년에 도쿄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지만 의사가 되는 것은 포기했다고 한다. 요코미조 세이시와는 나이 차는 많이 나지만 술자리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 사이였다.

추리 소설과 시대 소설 작가로 활동하다가 이후 기상천외한 설정으로 버무려진 코우가인법첩, 마계전생 등 인법첩 시리즈로 시대를 풍미하는 인기 작가가 됐다. 특히 인법첩 시리즈의 경우 우리가 흔히 아는 닌자의 이미지를 최초로 정립한 시리즈로 1958년에 출간된 코우가인법첩이 그 시발점이다. 출판하자마자 1년 만에 300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성 닌자 쿠노이치의 경우 쿠노이치 인법첩에서 창조된 개념. 즉, 일본 서브컬처계에서 닌자물의 조상이라 부를 수 있다. 단순히 목을 조르는 정도의 무기로 사용되던 실이나 와이어 등의 도구가 베고 토막내는 무기화한 것도 이 사람의 업적. 흔히들 말하는 능력자 배틀물 계열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오락성을 중시한 황당무계한 설정과 누구나 읽기 쉬운 문체는 라이트 노벨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세가와 마사키의 작화로 다수의 작품이 만화화되었다. 카와지리 요시아키는 팬으로 그의 감독 작품인 애니메이션 영화 수병위인풍첩은 인법첩 시리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당시 야마다 후타로의 소설이 잘 팔린 이유 중의 하나는, 성인 대상의 AV 포르노 비디오 영상이 있던 시절도 아닌 1960~70년대에 온갖 에로틱한 섹스 장면를 글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수병위인풍첩만 봐도 대충 그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의 대본소 무협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대 소설은 다른 작가들이 주로 에도 시대를 다루는 것과 달리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메이지 시리즈'를 썼다. 이 시리즈의 성공으로 메이지 시대를 다룬 역사 · 시대 소설을 쓰는 작가가 늘어났다.

생애 24권의 일기장을 남겼고 그 가운데 일부는 <전중파 부전일기(戰中派不戰日記)>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출판한 적도 있다.[4] 태평양 전쟁에 비판적인 시각과, 전후 일본의 장래에 대한 생각들과 사생활을 솔직하게 적은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일본인의 국민성의 하나로 무책임이라는 것이 없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미국과의 전쟁( 태평양 전쟁)을 개전(開戰)한 일본 군부의 무책임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미국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을까 생각하면 육군 해군도 자신(自信)이 없었다. 자신도 없으면서 그냥저냥 개전해 버렸다. 이게 일반 국민이나 일반 군인이라면 그나마 이해한다. 그러나 국가의 존명을 쥔 수뇌부라면 너무나 무책임한 생각이었다. 즉, 일본인의 무책임성을 최악의 형태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른 나이에 부모를 잃고 자라서, 가족애가 컸다. 어린 자식들의 모습을 8밀리 소형 필름 카메라로 찍어서 영상을 남겼다.
소설이 써지지 않고,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이럴 때 고독을 실감한다.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아들과 딸을 보면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든다. 고독은 가정을 가진 사내한테는 독신자보다 더 뼈에 사무친다. 자식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부모는 그 보답을 받고 있다. 테이블 맞은 편의 그 작은 빨간 얼굴. 새하얀 얼굴을 나란히 하고 밥을 먹는 모습. 오후가 되면 아들과 딸이 "다녀왔습니다."라고 외치면서 집으로 들어온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3. 작품 목록

3.1. 미디어믹스된 작품



[1] 자신의 스승인 에도가와 란포의 기일과 같다. [2] 지금의 도쿄의과대학 [3] 아버지의 친동생으로, 형과 똑같이 의사였다. [4] BSアーカイブス 「山田風太郎が見た日本 未公開日記が語る戦後60年」 (2005年) [5] 이시카와 켄이 그린 영화를 기준으로 한 만화판과. 세가와 마사키가 그린 원작을 기준으로 한 주 ~인법마계전생~이 있다. 사실 이거 말고도 만화판이 더 있다. [6] 쿠노이치 홍기병, 검귀 라마불, 청춘탐정단, 닌자 카레하 토쿠로 [7] 일기를 쓴 당시는 만23세의 의대생으로 지병으로 병역에서 면제되어 전쟁에 참여하지 못해서 부전(不戰)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 작가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