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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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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보병사단
第七步兵師團
The 7th Infantry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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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常, ruby=상)][ruby(勝, ruby=승)][ruby(七, ruby=칠)][ruby(星, ruby=성)] [ruby(人, ruby=인)][ruby(和, ruby=화)][ruby(團, ruby=단)][ruby(結, ruby=결)]
창설일 1949년 1월 7일 (제7여단)
1949년 2월 1일 (수도여단)
1949년 5월 12일 (수도사단)
1949년 6월 20일 (제7보병사단)
상징명칭 상승칠성(常勝七星)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제2군단
경례구호 단결, 할 수 있습니다.[1]
규모 사단
역할 군사분계선 중부전선[2] 일대 경계작전
사단장 소장 김진호(학군 31기)
위치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상서면 신대리

1. 개요2. 역사3. 예하부대4. 출신 인물
4.1. 사단장4.2. 장교/부사관4.3. 병
5. 특징
5.1. 사단가
6. 전쟁 범죄7. 사건 사고
7.1. 허원근 일병 사건7.2. 기타 사건 사고
8. 부대 영상9. 여담

[clearfix]

1. 개요

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사단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제7보병사단 소개 영상[3]
대한민국 육군 제2군단 예하 보병 사단. 총 18회[4][5]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한 메이커 사단으로, 정식 명칭은 싸우면 항상 이긴다는 의미의 '상승칠성부대'이다. 경례구호는 단결, 할 수 있습니다.

칠성부대의 상징은 북두칠성이며, 북두칠성은 예로부터 우주를 다스리는 별, 동이족의 나라를 다스리는 별로 우리 민족이 숭상해 온 별자리로써, 그 중에서도 일곱 번째 별은 하늘의 법을 집행하는 '요광성'(瑤光星)이라 해 파군검봉(破軍劍棒), 즉 어떠한 적군도 격파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같은 의미에 따라 우리 조상들은 '선봉'의 군대 기(旗)와 지휘관의 칼·봉 등에 북두칠성을 그리거나 새겨넣었다. 조선시대 때 북두칠성이 그려진 깃발은 지휘관의 지휘기로서 '초요기'(招搖旗)라고 불렀고, 북두칠성이 금이나 은으로 상감된 칼(寅劍)을 쓰는 장수는 곧 하늘 칠성님의 장수로 여겼다. 푸른 바탕에 북두칠성이 그려진 휘장을 사용하고 있는 '칠성부대'는 이런 점에서 우리 민족을 지켜온 군의 정통성을 가장 정확히 계승하고 있는 '상승'의 부대임을 자부하고 있다.

1949년 6월 20일에 창설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총 28회의 전투에 참전하여 사살 2만 3천 명, 포로 6400여 명, 장비노획 2만 9천여 점의 전과를 올렸다. 특히 낙동강방어전을 수행하던 중, 영천대회전에서 적 2개 사단을 섬멸하여 6사단과 함께 대통령부대표창을 수상[6]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 이후 45회의 대침투작전을 수행, 무장공비 31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하였으며, 1963년부터 강원도 화천군 철원군 일대에 주둔했으며, 현재도 제15보병사단과 함께 화천군과 철원군 일부(옛 김화군 지역)[7]에 주둔하고 있다.

이상하게 사단장의 진급이 안 되는 곳이다. 현재까지 서정열 사단장 이후 중장 진급자가 나오지 않고 있으며 2023년 사단장 직을 수행하고 있는 김진호 소장(학군 31기) 역시 짬 소장[8]이다.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승격되었다.

2. 역사

파일:external/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MXA0UXp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SzE2Mi8wLzEzLmpwZw==&filename=%B1%EA%B9%DF1_1-soda_fashion.jpg
사단의 원래 마크

1949년 1월 7일, '제7여단'으로 창설되었고, 2월 1일 '수도여단'으로 개칭. 1949년 5월 12일 '(구)수도사단'[9]으로 승격한 뒤, 1949년 6월 20일 용산에서 이준식 대령을 초대 사단장으로, 1, 9, 19연대를 근간[10]으로 정식 창설되었다.
6.25 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후방에서 빨치산 소탕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50년대에 동두천과 포천 경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후방 3연대가 (구)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 중인 2사단 25연대가 예속되어 6월 15일까지 전방인 의정부로 이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 연대는 병영 문제로 제때 올라오지 못했고, 그 상태로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 남침을 맞이해 동두천 전투, 포천 전투를 치르게 된다. 그러나 전력의 격차[11] 예비대가 없어 동두천의 1연대, 포천의 9연대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의정부 전투에서조차 밀려나고 말았다. 북한군 주공이 동두천 포천지역에 집중되었고 북한군 전차 240여대중 150대가 7사단 방어지역으로 집중되어 대전차 방어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게 된다. 참고로 당시 사단장은 후일 영천 전투 현리 전투로 좋은 쪽과 안 좋은 쪽 양극단의 유명세를 날리게 된 유재흥 장군이다.

게다가 한강 방어선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1/3까지 줄어버리는 바람에 병력과 장비들을 아직 건재하던 다른 부대들에게 넘기고[12] 7월 5일 해산되었다가 전주에서 잔류병력을 기간으로 학도의용군, 지원병들을 모집하여 재편 중 북한군이 전라도에 진입하자 목총으로 제식훈련 중이었던 보충병들을 대구로 보내고, 한강 북쪽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서해안을 통해 기적적으로 귀환한 보병학교 교도대대를 중심으로 민부대를 만들어서 지연전을 담당한다. 왜 하필 '민부대'였냐면 당시 재편성을 맡은 지휘관이 민기식 대령이었기 때문이다.[13] 그 후 낙동강 전선 안강-기계 전투가 한창인 8월 20일 대구에서 사단 재창설 및 3, 5, 8연대[14]를 예속받고는 영천·신녕전투 시점에선 1군단 예비사단으로 8, 6사단에게 예하 부대들을 보내 도움을 주다 인천상륙작전을 전후로 상황이 역전되자 8사단과 함께 잔적들을 소탕하며 북진했다. 이후 서울 탈환하고 북진하는 과정에서 누가 먼저 평양 탈환작전을 치르고 평양에 입성할지를 두고 경쟁이 일었는데,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 선봉 입성을 미 해병대에게 뺏긴 트라우마가 있어 미 1기병사단과 평양 돌입을 다투는 국군 1사단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말해 결국 유재흥 2군단장을 거쳐 평양에 가장 근접한 황해도 수안까지 진격해있던 7사단에게 평양으로 방향 전환하라는 특명이 하달된다. 3연대장 이기건 중령 증언 이에 8연대 9중대가 차량화보병 상태로 신나게 달려 18일 오후 대동강을 도하해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그러나 1사단의 영역을 멋대로 침범한 것이었기에 이후 모란봉을 점령하고 북한군과 교전 중 1사단 11연대로부터 57mm 대전차포로 공격당하는 참사도 벌어졌다.

하여간 1사단의 영역을 멋대로 침범했기에 대외적으로는 1사단이 입성 부대로 지정되었지만 7사단 역시 대통령의 명령과 육본과 2군단의 지원 속에 평양에 입성한 건 사실이라 지금도 양 사단에선 각각 자신들이 평양을 최선두로 입성했다고 주장하며 7사단은 18일, 1사단은 19일에 각자 평양 최선두입성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자세한 건 평양 탈환작전 문서로. 이후 다른 부대들과 함께 계속 북진했으나 중공군이 가세하면서 개천과 비호산에서 분투하다 청천강 전투 2차전에서 8사단과 함께 전멸당하고 두 사단장이 빤스런하는 굴욕을 겪고 서부전선이 붕괴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게다가 유명한 참패인 현리 전투에서도 미10군단에 배속돼 3군단의 유일한 병참선인 오마치(=오미재) 고개 일대를 사수하다 중공군에게 밀려 퇴각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7사단장 김형일과 그 수뇌부는 퇴각하는 와중에도 중공군이 고개를 피탈했단 사실을 3군단에게 알리지 않아 3군단 와해의 단초를 제공했다. 물론 3군단도 오마치 고개의 중요성을 그 전부터 인지해 초병을 배치하려 했으나 문제는 그곳이 미10군단 예하의 7사단 영역이었고, 급기야 이를 알게 된 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는 무슨 깡으로 월권하냐며 아주 강경하게 막아 사실상 무주공산으로 만든 것도 이유다.

하여간 3군단장 유재흥은 이후 벌어진 군단 와해와 무질서한 패주[15]의 책임을 지고 후방으로 경질되지만, 7사단장 김형일은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가 워낙 별종인데다 앞서 초병 배치 건으로 이미 3군단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그런 상관을 무시하고 직접 옆 군단에게 알려야 할 의무나 깡이 없었기에 현리 전투의 패배를 다룬 글에서 크게 비난받지 않거나 아예 그 이름이 언급되는 일도 드물다.

이후 강원도 양구군에서 고지전을 치열하게 반복하다 1953년 7월 20일부터 종전 당일인 7월 27일까지 벌어진 한국전쟁의 마지막 전투, 425고지-406고지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해 주변의 백암산, 적근산, 삼천봉을 끼고 군사분계선을 38km 정도 끌어올려 철원 김화군 일부와 화천댐을 대한민국 영토로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정전협상 과정에서 군사분계선이 고지 한가운데를 관통해 # 이곳을 사수하던 장병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내려와야 했다.[16]

참고로 이영선 국방일보 기자에 따르면 영화 고지전 425고지-406고지 전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17]로 상당 부분이 각색되었는데, 일례로 악어중대는 3연대 1중대[18]이나 국군에 존재하지 않는 10사단 예속이다.[19] 또한 중공군 대신 북한군을 자주 상대한다. 게다가 현실에선 악착같이 사수하다 정전 협정 결과에 피눈물을 쏟으며 내려와야 했으나, 영화에선 정전 협정 때 한 명을 빼면 모두 사망한다.

6.25 전쟁 중 7사단이 참전한 전투는 다음과 같다.
휴전 이후 현재까지 중동부 전선을 담당하고 있으며, GOP 작전&근무환경은 제21보병사단과 함께 국내에서 손꼽히는 험지라 힘든 편이다. 특히 제8보병여단 우선에서 제21보병사단 좌선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극심한데, 제7보병사단이 절벽이나 다름없는 산비탈과 계곡을 까서 호러스러운 섹터를 만들었다면 제21보병사단쪽 섹터는 그보다는 좀 낫지만 섹터의 길이가 양구군 만큼 호러다. 참고로 원빈이 제7보병사단 우선 중에서도 최우선 구역에서 섹터 돌다가 무릎이 아작나서 의병 제대했다.[21]

칠성부대는 155마일 휴전선 경계부대 중 가장 좁은 방어정면을 가지고 있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가장 험준하고, 가장 중요한 축선에 부대가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또한 부대 전투력에 대한 신뢰의 증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967년 4월 12일에는 제7보병사단 관할의 DMZ 남방에서 40~60명 규모의 북한군 침투 병력과 2시간 동안 교전이 벌어졌고, 이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수백발 규모의 포격까지 동반되기도 했다. 이는 지금까지도 휴전 이래 최대 규모 침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 사단장은 본래 북한군 중좌이다가 다부동 전투 때 국군으로 귀순해 국군 장교가 된 정봉욱 소장이었는데, 그는 즉시 제7보병사단 휘하의 포병 연대를 동원하여 포격으로 침투하는 북한군을 격멸하고, 다음날 직접 사단 GP로 직접 올라가 방송을 통해 북한군 사단장 및 연대장 이름을 부르면서 만일 여기로 다시 침투하면 그때는 직접 북한군 진지에 포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호명한 북한군 지휘관들은 과거 그가 귀순하기 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 사건 이후 문책을 요구하는 미국 측에 의해 제3사관학교장으로 보직 변경을 당했다.

박정희가 사단장을 역임한 부대라서 5.16 쿠데타 당시 동원되었다는 오해도 있다. 그러나 쿠데타 당시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이었으며, 동원된 부대는 해병여단[22]과 공수특전단 및 수도권의 예비사단 중에서도 소수병력 약 3,000명이었다. 게다가 당시 제7보병사단은 휴전 이후 강원도 최전방에 계속 주둔하고 있는 상태로서 거리상으로도, 안보적으로도 쉽사리 동원시킬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시절 보급은 매우 열악해서 겨울에 동사자가 속출했다. 제7보병사단은 다른 사단과 달리 동사자가 적었다고 박정희가 상부에 표창을 받았다.

참고로 주둔지 대부분이 화천군에 있으나, 전방 GOP여단들은 옛 김화군 금성지역인 3개면[23]에 상당수가 주둔중이다. 현재 저 세 곳은 주소상으로는 철원군이나,[24] 지뢰가 산재한 민통선 지역이라 철원에서 직접 가는 길이 없기에 군의 협조 하에 화천군을 경유해야 갈 수 있는 월경지다.

기타 사항으로 24년 8월 기준, 동원전력사령부 예하 사단을 제외한[25] 현존하는 육군 사단들 중 예비역 육군대장(13명)을 가장 많이 배출[26]했으며, 6.25.전쟁 중 태극무공훈장 서훈도 많은 편이다.[27]

3. 예하부대

제7보병사단 예하부대
제3보병여단 제5보병여단 제8보병여단
포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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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단 신병교육대는 제7보병사단/신병교육대 참고


특이점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재창설될 때 단대호가 한 자릿수인 보병연대들을 모아 재창설됐고 이는 국방개혁 2.0 기본계획에 의거, 상비사단과 지역방위사단이 개편돼 예하 연대들이 각각 여단으로 격상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각 여단별로 별명이 하나씩 있다. 또한 전방 제5보병여단, 제8보병여단 GOP는 손에 꼽을 정도로 험준하고[28] 후방 제3보병여단도 짐승처럼 구르기에 우스갯소리로 전생에 7가지 죄를 지으면 7사단으로 오고, 여기에 엄청나게 악질적인 죄 하나를 더 저지르면 8여단으로 끌려간다는 얘기가 돌 정도다. 게다가 5여단에서 8여단 사이 접경 지역을 '신조차도 버릴 것 같은 땅'이라고 하는데, 이는 8여단은 이미 버린 땅이고 접경 지역은 버릴까 말까 고민하는 땅이라는 뜻이다.

3.1. 사단 직할대

3.2. 제3보병여단 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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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5보병여단 독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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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8보병여단 상승불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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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포병여단 박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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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신병교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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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신 인물

4.1. 사단장

역대 제7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주요 직위 기타
초대 이준식 예) 중장 육사 8기 육군사관학교장,
3사단장,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교육총감, 제5관구사령관
임정 광복군 총사령부 창설멤버
산서성, 하남성 일대 독립군 활동
02대 유재흥 예) 대장 군영 1기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제1야전군사령관 국방부장관
03대 민기식 예) 대장 군영 1기 제2군단장, 제1야전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00대 신상철 예) 소장 일본 육사 24기 공군본부 작전국장, 공군사관학교장, 공군본부 행정참모부장 월남 특명전권대사, 체신부장관,
스페인 특명전권대사, 제10대 국회의원,
을지·충무무공훈장, 보훈훈장 국선장∙천수장,
청조근정훈장, 수교훈장 광화장∙홍인장,
월남 킨칸훈장, 미 리존메릿 훈장,
스페인 그렌크르즈 훈장
07대 김형일 예) 소장 군영 1기 특무부대장, 제2군단장, 대한민국 육군참모차장,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 제 7대 ~ 9대 국회의원
08대 김용배 예) 대장 군영 1기 육군참모총장, 제2작전사령관
09대 이성가 예) 소장 남경군관학교 제3군단장, 제5군단장, 국방대학교 총장 주 멕시코대사, 주 터키대사,
주 오스트리아대사, 제 9대 국회의원
10대 임충식 예) 대장 육사 1기 합동참모의장 국방부장관
11대 김익렬 예) 중장 군영 1기 제1관구사령관, 제1군단장, 제2군단장, 국방대학원장
12대 박정희 예) 대장 육사 2기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위원장 대통령[34]
13대 하갑청 예) 준장 육사 2기 8대 육군특무부대장, 대한민국 육군본부 정훈감
14대 손희선 예) 소장 육사 2기 국방대학교 명예교수, 국가안전보장회의 상근위원 흥창물산 상임고문
15대 노재현 예) 대장 육사 3기 합동참모의장,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16대 고광도 예) 중장 육사 3기 2군단 부군단장, 초대 군수사령관, 대한민국 국방부 차관보, 육군참모차장 을지∙충무∙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국선장,
방위포장, 중화민국 운휘훈장
17대 정승화 예) 대장 육사 5기 육군참모총장
18대 정봉욱 예) 소장 특별임관 육군훈련소장, 육군3사관학교 초대 교장 인민군 연대장 출신.
다부동 전투에서 1개 포병대대를 이끌고 귀순.'''
19대 백남태 예) 소장 육사 5기 대한민국 육군본부정보참모차장, 대한민국 육군본부인사참모부장 삼성정밀화학(주) 전무이사,
재향군인회 사무총장,
충무∙화랑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
20대 이재전 예) 중장 육사 8기 한미참모본부 전략기획국장, 6군단장, 합동참모본부 본부장 대통령경호실 차장
전쟁기념사업회장
충무·화랑무공훈장 수훈
21대 차규헌 예) 대장 육사 8기 제2작전사령관 교통부장관
22대 김용금 예) 중장 육사 7기 7사단 포병사령관, 2포병여단 포병사령관, 합동참모회의 정보국장, 국방부 직할 777부대장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대한광업진흥공사 이사장
23대 하소곤 예) 소장 갑종 1기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신군부 12.12 군사반란 당시
수경사령부 접견실에서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강제예편.
24대 김해창 예) 소장 육사 10기 한국소방검정공사 사장
25대 노무식 예) 소장 갑종 20기 육군종합행정학교장 수자원공사 사장,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사무총장,
6.25참전유공자회 회장.
노무현 대통령의 종친 및 군복무 시절 대대장.
26대 배병노 예) 소장 호사 13기 육군보병학교장, 수도방위방패사업계획단장 한국중공업 감사
을지∙충무∙화랑무공훈장, 미 은성훈장
월남금성훈장, 보국훈장 천수장∙삼일장
27대 민태구 예) 소장 육사 13기 국방부 제1차관보, 국방부 기획관리실장 충청북도지사, 제14대 국회의원, 충무무공훈장, 보국훈장 천수장∙삼일장, 대통령표창
28대 정만길 예) 중장 육사 16기 대한민국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국방대학원장, 제5군단장
29대 민병선 예) 소장 갑종 117기 3군단 부군단장, 22보병사단 88여단장, 합동참모본부 계획조정실장 파월 맹호부대 해산진연대
3대대 10중대장
30대 김진선 예) 대장 육사 19기 수도방위사령관, 제2작전사령관
31대 정연우 예) 중장 갑종 157기 육군보병학교장, 대한민국 국방부 인사국장, 국방대학교 총장 충무무공훈장, 월남 엽성․금성무공훈장,
보국훈장 삼일장․천수장 수훈
32대 임종섭 예) 소장 육사 22기 대한민국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
33대 이남신 예) 대장 육사 23기 합동참모의장, 제3야전군사령관, 제8군단장
34대 김종환 예) 대장 육사 25기 합동참모의장, 제1야전군사령관, 제5군단장
35대 권영기 예) 대장 갑종 222기 제2작전사령관, 제3군단장
36대 박흥렬 예) 대장 육사 28기 육군참모총장, 육군참모차장, 제3군단장 대통령경호실장
37대 김홍영 예) 소장 육사 29기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38대 김용기 예) 소장 육사 30기 대한민국 국방부인사복지실장 하나회
39대 한홍전 예) 중장 육사 32기 육군인사사령관, 제1야전군사령부 부사령관 8연대장 역임, 한국국방연구원
40대 최종일 예) 중장 육사 34기 제1군단장, 국방정보본부 레바논 대사, 국가정보원 3차장
41대 이상현 예) 소장 육사 36기 한미연합사 작전처장, 3군사령부 참모장 괴산군 학군교장
42대 원홍규 예) 소장 3사 16기 육군3사관학교장, 대한민국 육군본부 감찰실장 악명이 높아 별도 항목이 있었으나 삭제됨
43대 구홍모 예) 중장 육사 40기 대한민국 육군참모차장, 수도방위사령관
44대 서정열 예) 소장 3사 20기 육군3사관학교장, 대한민국 육군본부 감찰실장
45대 김종철 예) 소장 육사 44기 국방대학교 총장 병무청장.
46대 박원호 소장 육사 46기 육군훈련소장, 육군보병학교장, 육군특수전사령관 직무대리
47대 손광제 소장 육사 48기 국가안보실 국가위기관리센터장
48대 김진호 소장 학군 31기 사단장

4.2. 장교/부사관

4.3.

5. 특징

5.1. 사단가

신라의 푸른 하늘 태극기 아래
이 몸을 함께 바친 젊은 용사들
조국을 사랑하는 일편단심
불이여 바위여라 태산이여라
싸우며 무찌르는 상승 7사단
장병이 기만인가 하나의 마음

창공에 길이 빛날 북두와 같이
천만대 이어나갈 민족의 터전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유업
무궁화 가지마다 아로 새겨져
벅차고 눈물겨운 투지의 피가
한 송이 꽃잎마다 향기로워라

파일:제7보병사단 부대마크.svg


(舊버전 군가)

6. 전쟁 범죄

7.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7.1. 허원근 일병 사건

허원근 일병 사건은 군 의문사 사건 중에서 대표적인 사건 중에 하나로 현재까지도 자살이냐 타살이냐 옥신각신하고 있다. 해당 항목으로.

7.2. 기타 사건 사고

8. 부대 영상



9. 여담



[1] 보병사단 중에선 가장 긴 경례구호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인지 짬이 좀 찬 병사나 간부들은 그냥 '단결'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2] 철원군( 김화군) ~ 화천군) [3] 2015년경 촬영된 것으로, 당시 GOP 소초와 능선 등을 볼 수 있다. 일부 병사들은 가명을 사용하였다. [4] 2018년과 2022년 국군의 날에 부대표창 수상 [5] : 7사단전우회 [6]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7] 행정구역상 철원군에 소속되어 있지만, 민통선과 GOP로 인하여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철원에서 직접 올 수 없는 월경지이기에, 화천군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이다. [8] 학군 31기는 육군사관학교 49기와 동기급이며 2024년 봄 인사에서 육군사관학교 49기 중장 1차 진급자가 3명(이승오, 서진하, 박재열) 배출됐다. 학군사관 2기수 후배인 한기성 소장(학군 33기)이 현재 제25보병사단장이다. [9] 현재의 수도사단(수기사)과는 다른 부대다. [10] 현재 해당 연대들은 전부 다른 사단으로 소속이 바뀌어 지금은 제1기계화보병여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9기계화보병여단( 제11기동사단), 제19보병여단( 제6보병사단)이 되었다. [11] 개전 당시 7사단은 보병연대 둘, 포병대대 하나와 각 직할대를 포함해 7,211명이 있었고, 반대로 북괴 측은 3사단, 4사단, 105기갑여단, 2개 전차대대 등 28,000명이 있었고, 대전차포와 로켓포로도 전차를 완파할 수 없어 결국 기관총과 소총만으로 보병들만 상대해야 하는 등 장비의 격차도 컸었다. [12] 이 과정에서 1연대와 '수도' 명칭을 (구)수도경비사령부에게 넘겨 지금의 수도사단(수기사)이 탄생되었다. [13] 이름 + 부대가 일본식을 따랐다는 말이 있는데 잘못된 말이다. 일본군의 경우 그런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따로 있다. 임무에 따라 여러 부대소속 장병을 임시로 모아 조합 편성해 파견하는 방식을 사용할 때는 숫자를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4] 3연대는 제1유격대대 일부를, 5연대는 민기식 부대를, 8연대는 독립유격대(=제2유격대대)를 각각 기간으로 하여 재편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현 체제를 이어와 육군 중 유일하게 한자릿수 보병연대/여단을 보유한 사단이 되었다. [15] 다만 현리전투 항목에도 적혀있듯, 불행중 다행으로 이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전후 공개된 중공군측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3군단을 '지워버리기' 위해 철저한 포위망을 짰는데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남하하는 바람에 인명 피해는 포위망에서 쌈싸먹히는 것에 비하면 적은 편이었다고 한다. [16] 그래서 이에 대한 불만도 있었으나 하루빨리 휴전하고픈 미군 측에서 압박해서 별 수 없었다. [17]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악어중대를 현존하는 특정 부대 소속으로 할 경우 생길 명예훼손 문제, 몰입도 등이 있었다. [18] 이는 초반부 방첩대 강 중위가 신임 중대장과 신병을 태우고 운전할 때 잠깐 언급된다. [19] 다만 20사단과 발음이 유사하고 M-1고지 전투 당시 이 사단의 피해가 막심하자 임무교대 후 후방으로 물러났었던 8, 5연대가 차례대로 불려나온 적이 있기에 이 전투도 참고한 듯 싶다. [20] 1951년 4월 인제-간성-원통-양양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전투로, 워낙 격전이 되자 3,5연대가 5사단에, 8연대는 3사단에 배속돼 싸웠다. [21] 당시 연대장이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원홍규 전 사단장과는 3사관학교 동기였다. [22] 김포에 주둔하던 해병대의 반란 가담은 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이었다. [23] 원남면, 원동면, 임남면. [24] 원래 김화군이라는 별개의 행정구역이지만 분단 후 관리를 위해 철원군에 편입된 결과다. [25] 이 사단들은 사단장부터가 준장인데다가, 상당한 한직이기 때문에 이 곳을 가는 순간 대장 진급은 사실상 불가하다고 봐야한다. [26] 반대로 가장 적게 배출한 곳은 1명 배출한 35사단과 52사단이다. [27] 춘천-홍천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재직 중 순직한 심일소령, 개천-비호산 전투에서 순직한 김옥상 일병, 백석산 전투에서 순직한 김용배( 당시 7사단장과는 동명이인이다.) 5연대장, 선우고지 전투에서 특공대였던 최득수 이등상사, 425고지-406고지 전투의 주역이었던 김한준 대위 등이 있다. [28] 이 때문에 GOP 담당 사단들 중 가장 좁은 범위를 담당하고 있다. [29] 반대로 제7전차대대는 제1보병사단에 예속됐다. [30] 보통 '이모님' 이라고 부른다. [31] 원래는 3위. 1위는 보충대, 2위는 항공대였으나 항공대가 다른곳에 통합되어 등수가 상승. [32] 1995년에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출처 다만 1980년대에도 같은 별명으로 불렸기 때문에 별명의 기원은 아님 [33] 육군 최초 창설 포병대대. 6.25전쟁 춘천대첩으로 유명한 포대 당시 6사단 소속 [34] 7사단에 상승칠성 이란 별칭을 붙였다. 똑같이 사단장을 역임했었던 5사단에도 상승열쇠라는 별칭을 붙였다. 참고로 박정희는 여기서 2차 사단장이라는 유례없는 군복무를 했으며 1차 사단장을 5사단장으로 지내다가 6군단 부군단장으로 영전했으나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7사단장이 되었다. [35] 정확히는 연대장 부임 후 얼마 안 가 부상이나 전사, 책임을 지고 계속 떠난다는 징크스가 있었다. [36] 현재는 보헤미안이라는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으나, 얼굴이나 이름보단 영화 봄날의 OST인 '봄날' 노래가 유명한 가수다. [37] 하하 친구로 잘 알려져있다. [38] 원래는 트럼팻 연주병이었으나 후에 변경했다. [39] 그런데 이건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생각이 다를 것이다. 새치기하는 간부들이 문제지, 그걸 줄 서라고 하는 손호준은 오히려 계급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질서를 지키라고 하는 정의로운 행동을 했으니 칭찬받아야 할 사안이 아닌가? 그러고 이미지가 안 좋아지다니 그야말로 적반하장이 따로 없는 군대 계급 문화의 적폐 중 하나였다. [40] 참고로 홍보 차원인지 아니면 악감정 때문인지 하필이면 사단 섹터 중 최고로 가파른 네발계단 소초에 배속되어 국방일보에도 실릴 정도였지만 그로부터 몇개월 만에 다리를 절며 일병 전역한 것을 보면 3교대 밀어내기와 급경사 속보 속에서 심신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악화된 모양. 사실 여기뿐만 아니라 일대 소초 근무자들도 저마다 자질구레한 무릎 질환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41] 1990년대 이후 군축에 의해 해체. [42] 보통 아침마다 수송부에서 하는 검차(차량점호)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특히 겨울) 차안에 그대로 꽂아두거나 그 해당차량에 자주 배차가 나는 운전병들이 가지고 있다시피 한다. [43] 대표적으로 대소변을 먹였다는 혐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