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51년 12월 25일 강원도 양구군 북방 어은산 일대의 중공군 63군 예하 204사단이 제7보병사단 3연대가 점령중인 1090(북)고지 일대에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시작되어 1952년 10월까지 이어진 고지전으로, 훗날 전투 시작일을 본떠 크리스마스 혹은 1090 고지 전투로 명명되었다.참고로 이 일대의 1090 고지는 남북으로 둘 가량이었으며, 전투가 집중된 고지는 최북단에 위치한 1090(북) 쪽이었다.[1]
또한 1090(북) 고지는 이 전투를 계기로 크리스마스 고지로 별칭되게 된다.
2. 전투 전 상황
1951년 가을에 벌어진 백석산 전투로 인해 전선은 어은산까지 북상했고, 그 결과 중공군 204사단 612연대는 어은산의 890고지, 1218고지, 984고지를 점령하고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있었다.하지만 이들의 주 진지인 1218고지로부터 500m 가량 남쪽에 위치한 1090(북) 고지 일대를 8사단과 임무교대해 되돌아온[2] 7사단이 점령하고 있었고, 이들과의 접경지인 내동-암동 계곡 부근에서 양측 수색대들이 계속 충돌하자 눈엣가시로 여겼고, 또한 휴전회담이 결렬될 경우를 대비해 12월 25일을 기점으로 한 공세를 준비한다.
한편 어은산 남쪽 백석산 일대를 점령중인 7사단 3연대는 1220고지에 CP를 개설하고, 좌측에 3대대, 중앙엔 2대대, 그리고 우측에 1대대를 배치 및 배속된 대전차대대를 예비대로 둔 뒤 부업(?)삼아 매복을 나가 포로 획득을 하려고도 했다.
3. 1차전 (1951.12.25 ~ 12.28)
이미지 출처 및 참고자료1 참고자료2 참고로 위 이미지에서 동그라미 처진 A, B가 후술할 무명고지들이다.
1951년 12월 25일 오후 5시 40분경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3] 20여 명의 중공군 정찰대가 거센 눈보라를 뚫고 1090(북) 고지 최북단 앞마당인 무명고지 B 쪽으로 접근해오다 격퇴된다. 이후 400여발의 공격준비사격이 일대에 퍼부어진 뒤 대대급 병력들이 최북단 무명고지들 및 1090(북) 고지 양쪽을 쌈싸먹듯 공격해와 무명고지 B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에 1대대장은 1090(남) 고지에 있던 1중대를 1090(북) 고지로 올려보내는 한편 1090(북) 고지의 3중대에게 날이 밝을 때까지 무명고지 A를 사수하라는 명령과 함께 대대 화력을 지원했다. 한편 파상공격을 가해오던 중공군은 저항이 거세자 자신들이 점령한 무명고지 B로 후퇴했고, 이에 1대대장은 중공군을 무명고지 B로부터 몰아내기 위한 역습을 준비시킨다.
12월 26일 자정, 3중대는 무명고지 B를 향해 돌격한다. 하지만 적들이 4차례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자 별 수 없이 철수했고, 뒤이어 1중대가 뛰어들어 오후 3시 30분 경 탈환에 성공한다. 하지만 오후 7시경에 공격준비사격 후 또다시 몰려오자 별 수 없이 3중대가 있는 곳으로 후퇴했다.
12월 27일 1대대장은 1,3중대에게 무명고지 B 탈환을 지시하나 적이 박격포와 수류탄으로 완강히 저항해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이에 1대대장은 병력을 철수시킨 뒤 중공군의 주 진지가 있는 1218 고지에 포격을 가해 적 박격포를 무력화하고 재차 돌격시켜 가까스로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적이 2개 중대를 다시 보내오자 또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28일 6시, 1,3중대가 재돌격 후 백병전을 벌여 9시 50분경 무명고지 B 탈환에 성공한다. 이에 적도 11시 40분경에 포격 후 재돌입을 감행하나 아군 3개 포병대대의 집중포격에 격퇴당한 뒤 2월 때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4. 2차전 (1952.2.11 ~ 2.13)
2월 11일 최북단 무명고지 B쪽으로 적들이 접근해오자 이곳을 점령중인 3연대 2중대의 전초 소대는 미 8군의 올가미 작전[4]에 의거, 이들을 유인격멸하기 위해 무명고지 A로 은근슬쩍 철수하여 무혈 점령토록 하였다. 그 뒤 적의 본대 접근을 기다리다 날이 저물었고, 자정이 가까워지자 7사단의 우측을 맡은 5연대의 중앙 내면계곡에서 20여명의 적들이 2대대의 경계진지에 접근하였으나, 성과가 시원치 않자 그대로 돌아갔다.2월 12일 새벽 1시 35분 2개 대대급의 중공군 무리가 암동계곡에 자리잡은 3연대 3대대의 경계선으로 침투해왔으나... 아무도 없었고, 대신 그곳을 지키던 경계조가 주진지로 철수하기 전 인계식 지뢰들을 곳곳에 설치해 놓은 상황이었다. 덕분에 자신들이 지뢰지대 겸 미끼 진지에 잘못 진입했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황급히 퇴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오후 9시 15분에 중대규모의 중공군들이 무명고지 A까지 공격해왔다. 이에 유인격멸작전에 흥분한 2중대는 적이 수류탄의 투척거리까지 돌입하자 중대와 대대 81밀리 박격포 화력을 기습적으로 쏟아부어 몰살하듯 격퇴시켰다.
2월 13일 새벽 2시 25분 중공군 1개 중대가 박격포의 지원 하에 무명고지 A로 재차 돌입하였으나, 이 또한 격퇴당했다. 그러자 무명고지 B를 점령중인 중공군 소대 무리는 진지공사로 알박기[5]를 시전하려 하였으나 18명으로 편성된 특공대가 접근하자 겁에 질려 앞다퉈 달아났고, 덕분에 11시경에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5. 3차전 (1952.10.13 ~ 10.14)
참고자료10월 13일 저녁 중공 204사단은 이 날 1090(북)고지를 향해 300여 발의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뒤 파상공세를 감행했고, 이에 3연대 9중대는 포격으로도 이들을 감당할 수 없자 고지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고지 정상을 탈취할 무렵 9중대가 있음직한 곳에 포탄 800여발을 쏟아붓는다.
오후 9시 10분경 2개 중대급 중공군들이 9중대를 향해 다가왔고, 이에 9중대장 이순호 대위는 1소대를 우선, 3소대를 정면, 2소대를 좌선에 배치해 사주 방어태세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교전 과정에서 정면의 3소대는 소대장이 후송될 정도로 위태로웠고, 급기야 중공군들이 남쪽 감제고지까지 점령해 포위망을 압축해오자 이순호 대위는 화기소대장에게 3소대를 맡긴 뒤 중대본부 및 화기소대 병력들과 함께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을 휘두르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는다.
하지만 이순호 대위는 부하들의 후송 제안을 완강히 거부하고 진지에 틀어박혀 수류탄 3박스[6] 가량을 투척하며 싸움을 이어가다 흉부에 총상을 입고 전사하고 만다. 그가 전사한 뒤에도 전투는 자정을 넘어 대략 2시간 30분 가량 더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9중대 병력은 거의 전멸되었다.
10월 14일 오전 3시 3연대 11중대가 이곳에 가세해 중공군들을 격멸하고 피탈된 9중대 진지를 회복하였다.
또한 교전 과정에서 전사한 이순호 대위는 사후 1계급 특진하였다. #
6. 여담
참고 자료- 당시 3연대장이었던 이소동 대령(1973년 증언 당시 중장)의 증언에 따르면 낮에는 아군이, 밤에는 적군이 점령할 정도로 뺏고 뺏기기를 반복해 판문점에서 점령 소유를 두고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적들이 몰려오면 일단 철수 후 TOT 진내사격으로 쓸어버린 뒤 재탈환하는 방식을 썼는데, 때문에 피아 가리지 않고 시신이 잔뜩 쌓였으며 최전선이라 처리하기도 곤란했다고 한다.
- 전투가 크리스마스 (1090(북)) 고지와 그 앞마당인 두 무명고지들 일대에 집중된 탓에 '1090 고지 부근 전투'라고도 부른다.
- 7사단은 1953년 5월 신생 사단인 20사단에게 전선을 인계한 뒤 재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물러났으나, 이후 6월에 벌어진 M-1고지 전투에서 20사단의 피해가 만만찮자 8, 5연대가 차례대로 불려나와 전선에 동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