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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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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 68 운동 (68 혁명)
Protests of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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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68 운동
68 혁명[1]
프랑스어 Mai 68[2]
Les événements de mai-juin 1968[3]
영어 Protest of 1968
독일어 68er-Bewegung[4]
네덜란드어 Protestjaar 1968[5]
Parijse studentenrevolte[6]
이탈리아어 Movimento del Sessantotto[7]
일본어 大学紛争[8]
大学闘争[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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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운동 당시의 여러 사진들[10]
<colcolor=#fff><colbgcolor=#333> 시기 1968년 3월 ~ 1968년 11월[11]
장소
원인
참여 인물 시위 주도 측 시위 진압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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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운동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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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콘벤디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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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쿠슈너[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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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 레비[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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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소바조[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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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새비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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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헤이든[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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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데이비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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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루이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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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두치케[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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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노 오네조르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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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슈카 피셔[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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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카판나[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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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피페르노[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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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로시†[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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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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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요시타카[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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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 아케히로[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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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세 나오키[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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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 나오토[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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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노부 후사코[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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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탈라만테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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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 라소타[33]
대학 교수 및 식자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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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사르트르[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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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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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르페브르[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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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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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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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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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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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마르쿠제[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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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리어리[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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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스포크[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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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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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촘스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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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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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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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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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엔첸스베르거[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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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네그리[50]
사회 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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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스 드브레[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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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누아 프라숑[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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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세기[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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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제스마르[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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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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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레타 스콧 킹[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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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 애버내시[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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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잭슨[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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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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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햄프턴[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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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루터[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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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르 차베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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랠프 네이더[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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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 호프먼[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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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루빈[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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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리[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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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컨슬러[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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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라 데이비스[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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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폰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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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테 클라르스펠트[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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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자코모 펠트리렐리[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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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크 알리[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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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블랙번[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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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74]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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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미테랑[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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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망데스 프랑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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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맥거번[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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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매카시[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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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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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린지[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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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브란트[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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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프 덴 우일[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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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둡체크[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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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아옌데[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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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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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드골[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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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퐁피두[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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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시라크[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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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푸셰[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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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페르피트[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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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로 애그뉴[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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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레이건[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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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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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뤼프케[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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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에이사쿠[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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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포 오르다스[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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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브레즈네프[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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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104]
행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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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파퐁[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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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드거 후버[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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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헬름스[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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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N. 미첼[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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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클라인딘스트[109]
대학 교수 및 식자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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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그라팽[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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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F. 버클리[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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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 랜드[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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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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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도르노[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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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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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스프링어[116]
참여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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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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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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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학생 연합(UN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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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회의(S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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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조정을 위한 학생 회의(SN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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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주의 대학생 연합(S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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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힘(PO)
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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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총연맹(C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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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민주 노동 동맹(CF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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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힘(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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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고등 교육 교원 노동조합(SNEs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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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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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자동차 노동조합(U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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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농민 조합(UFW)
민권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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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기독교 목회자 협회(SC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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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P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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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연대 기구 회의(OLAS)
신좌파 반전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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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날 위원회(V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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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종식 위원회(MO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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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더 마인호프(R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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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연대 캠페인(V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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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파 리뷰(NL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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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공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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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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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표당(B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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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국제당(Y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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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민당(Jus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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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 통일 사회당(PSU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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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행정 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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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 당국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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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센 자유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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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마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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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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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정부 및 치안 당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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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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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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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정보국(CIA)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연방수사국(FBI)
파일:캘리포니아 주기.svg
캘리포니아주 정부
파일:로스앤젤레스 시기.svg
로스앤젤레스시 당국
파일:뉴욕경찰기.png
뉴욕경찰국(NYPD)[117]
파일:로스앤젤레스 시기.svg
LA 경찰국(LA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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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警視庁)
정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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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공산당(P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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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L-CIO
파일:미국 국기.svg
공화당(GOP)
파일:미국 국기.svg
닉슨을 위한 민주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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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민주연합(CDU)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공산당(КПСС)
결과
  • 운동의 단기적 실패, 장기적인 요구 관철 성공
  • 시위대의 집권 실패[118]
  • 시위대의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성공[119]
  • 독재자 퇴진[120]
  • (일부)극좌 테러 집단화[121]
영향 20세기 후반 문화, 사회, 정치적 지형의 전면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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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로운 성생활, 포르노 합법화, 공창제, 토플리스 운동 등 성 해방 운동 촉진

1. 개요2. 배경
2.1.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세대 갈등2.2. 베이비 부머와 대학교 포화 현상2.3. 유럽의 전후 경기 침체2.4.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2.5. 사상적 배경: 비판 이론과 후기 구조주의
2.5.1. 사르트르의 앙가주망2.5.2. 마르쿠제의 유토피아론2.5.3. 마오쩌둥주의의 영향력
2.6. 과거사 청산 미진2.7. 문화적 배경: 브리티시 인베이전2.8. 베트남 전쟁
3. 전개
3.1. 포트 휴런 선언, 버클리 자유 발언 운동3.2. 학생 운동의 여명3.3.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건물 폭발 사건, 3.22 운동3.4.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루디 두치케의 피습3.5. 바리케이드의 밤3.6. 5~6월 총파업3.7. 민주당 전당 대회 폭력 사건3.8. 그 외 국가에서의 시위3.9. 1968년 6월과 11월: 선거에서의 패배3.10. 혁명 이후
3.10.1. 시카고 세븐 재판3.10.2. 미국의 상황
4. 특징
4.1. 대학생이 주축이 된 운동4.2.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
5. 결과 및 영향
5.1. 나라별 영향
5.1.1. 프랑스에 미친 영향5.1.2. 독일에 미친 영향5.1.3. 네덜란드에 미친 영향5.1.4. 캐나다에 미친 영향5.1.5. 오스트리아에 미친 영향5.1.6. 공산권에 미친 영향5.1.7. 일본에 미친 영향5.1.8. 한국에 미친 영향
5.2. 사상적 영향
5.2.1.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5.2.2. 페미니즘에 미친 영향
5.3. 문화적 영향
6. 평가
6.1. 보수주의자들의 평가6.2. 진보주의자들의 평가
7. 외부 링크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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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l est interdit d'interdire!
It’s forbidden to forbid!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시위대의 구호
1968년 프랑스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반정부 운동을 의미한다. 이 사건은 20세기 후반 서구권에서 일어난 사회 변동 중 가장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넓은 의미에서는 1960년대 초반에서[123] 1970년대 초반까지[124] 이어진 일련의 전 세계적 사회 운동을 의미하며, 보다 좁은 의미로는 1968년 5월~6월 사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일어난 대학생 주도 소요 사태를 가리킨다. 학술적으로는 후자의 의미로 쓰일 때도 많지만,[125] 대중적으로는 전자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사건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구미권의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중첩되어 일어났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폭발적인 성장과 이에 맞추지 못해 점차 표준화, 기계화되는 대학 서비스,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누적된 구좌파-신좌파 간 갈등, 성차별, 인종 차별, 양극화 등이 원인으로 제시되며, 베트남 전쟁은 청년 세대의 불만이 폭발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이미 미국에서는 1962년 포트 휴런 선언과 1964년 버클리 자유 운동, 1965년 와츠 폭동, 1967년 샌프란시스코 사랑의 여름 등으로 68 혁명의 전주가 시작된 바 있으며, 미국에서는 1968년 1월 구정공세를 계기로, 프랑스에서는 1968년 3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건물 폭파 사건과 다니엘 콘벤디트의 3.22 운동 조직을 계기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68 운동은 주로 미국, 프랑스, 독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일본 전학공투회의 운동, 이탈리아의 총파업,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 폴란드의 소요 사태 등도 이 사건의 직간접적 영향하에 놓여있다. 제3세계 국가인 멕시코에서도 "틀라텔롤코 학살 사건" 등 68 혁명의 영향을 받은 사건이 일어난 바 있다. 이렇듯 68 혁명은 전무후무하게 문화권과 국가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그 정치적 파장도 컸다.

그러나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던 기성세대는 68 운동에 동의하지 않았고 68 운동의 당사자들도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유주의, 아나키즘 등 여러 사상적 다양성 때문에 점차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1968년 11월에 열린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68 운동의 종식을 공약하는 리처드 닉슨이 승리하고, 1968년 6월에 열린 프랑스 총선에서도 드골파 정당이 압승을 거두며 68 운동은 실패로 돌아간다. 미국 한정으로 68 운동은 1972년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나 1972년 대선에서 이들의 지지를 받은 조지 맥거번이 참패하고 이후 정국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흘러가며 대학생 운동권은 자연스럽게 소멸하게 된다.

단기적으로 68 운동은 실패했으나, 장기적으로 그것은 서구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왔다. 학제 시스템의 개혁, 보수적 사회 분위기의 자유화, 성 해방론의 등장, 환경주의의 주요 정치 사상으로의 대두, 특히 유럽과 미국 사회를 수백 년간 지배해 온 기독교 이데올로기가 점차 붕괴하고 세속주의가 정착하는 등 그 여파는 엄청났다. 이를 두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68 운동의 유산을 해체하겠다는 정치가는 많지만, 그 정치가 본인조차도 68 혁명이 몰고 온 다양성의 가치가 없었다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했을 것"[126]이라고 간단명료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68 혁명이 서구 사회에 몰고 온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으며, 그 영향이 서구 사회가 긍정적 영향을 미쳤는지,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의만이 역사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2. 배경

2.1.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세대 갈등

>사람들은 우리를 끌어내리려고 하지
(나의 세대에 대해 떠들어대면서)
우리가 너무 몰려다닌다고
(나의 세대에 대해 떠들어대면서)

걔네가 하는 짓은 끔찍하게 무심해 보여
(나의 세대에 대해 떠들어대면서)
난 늙기 전에 죽어버리기를 원해
(나의 세대에 대해 떠들어대면서)

이건 나의 세대야
이게 나의 세대라고
당시 20대 사이에서 유행하던 더 후의 노래 < My Generation> 中

68 운동의 근본적인 원인은 기성세대(1870~1930년대생)와 신세대(1940년대생)의 세대 갈등이었다. 양차 대전과 대공황을 경험한 기성세대는 여전히 국가주의적 사고관, 기독교 윤리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사고방식 역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흔했다. 반면 전쟁 이후의 세대였던 베이비 부머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풍족한 경제적 배경에서 민주주의적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양차 대전과 나치즘과 파시즘의 발흥, 경제적 공황 등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파시즘과 경제적 궁핍은 역사 속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치, 제국주의, 식민주의 등 서구권의 과오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한편으로 좌익 청년의 경우 부모 세대와 달리 스탈린주의나 소련에 큰 동경을 품고 있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서구권은 전례 없는 경제적 호황을 맞았으며, 대중문화와 시민의식도 이에 맞추어 발전하였다. 따라서 1960년대 대학교에 진학한 베이비 부머 세대 역시 보다 진보적인 정책을 사회에 요구하였다. 반면, 여전히 대학 교수진과 기업 회장, 정치인 직위를 맡고 있던 기성세대는 이러한 베이비 부머 세대의 요구를 철없는 반란으로 간주하였다. 기성 세대는 교육 정책의 근본적 변화, 과거사 청산, 제국주의적 전쟁 중단 등 신세대의 요구를 자신이 살아온 양차 대전과 식민 제국 시대 역사에 대한 무시라고 생각했다. 이 두 세대는 그들이 살아온 세계와 배경이 천지 차이였기 때문에 각종 사회적 쟁점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 차이는 좁혀질 수 없었다. 즉, 이들 간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이 갈등은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 등을 둘러싼 여러 가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으로 1968년 갈등이 대규모 소요 사태의 형태로 폭발하게 되었다.

2.2. 베이비 부머와 대학교 포화 현상

파일:1968 낭테르.jpg
1968년의 낭테르 대학교
68 운동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전후 베이비 부머 세대의 성장에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 출산율이 비정상적으로 증가했고, 1960년대에는 이들이 20대가 되어 전례가 없는 대학교 진학 폭증 현상을 일으켰다. 한편 전후 호황을 배경으로 대학이 정원 수를 늘리면서 1960년대에는 대학이 캠퍼스를 확장하는 등 대대적인 대학 문호 확대의 경향성이 두드러졌다. 그 결과, 독일의 대학생 수는 1950년 11만 명에서 1965년 15년간 25만 7천 명으로 2.3배 증가했고, 프랑스의 대학생 수는 1946년 12만 3천 명에서 1961년 20만 2천 명, 1968년 51만 4천 명으로 22년간 4.2배 증가했다.

이러한 고등 교육의 성장과 더불어 질 역시 제고되어야 했으나, 급격한 대학교의 팽창은 질보다는 양을 우선시하게 만들었다. 대학교는 거대 캠퍼스를 신설하기 위해 수익에 급급했고, 기숙사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으며, 교수와 학생이 1대1로 면담할 수 있는 밀착형 교육보다는 표준화된 커리큘럼에 따르는 대형 수업이 늘어났다. 이로 인해 이미 존재했던 문제점인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수법, 무자비한 유급 제도 등은 1960년대 더욱 심각한 형태로 악화되었다. 또, 증가한 대학 진학자 희망생을 대학이 따라갈 수 없었기에 대학교의 문은 점점 높아졌고 고등학교는 입결이 올라간 대학교를 따라가기 위해 입시 위주 교육을 학생에게 강요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학생의 불만이 높아졌으나, 대학교는 관리방침을 바꿀 어떠한 의사도 보이지 않으며 대학생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학교는 성적순으로 학생을 줄 세우고 성적이 부진한 대학생을 유급 혹은 제적하는 전통적이고도 수직적인 학제 시스템을 고집했으며, 학생의 정치 활동과 성생활, 연애 활동, 사회 활동을 규제하였다. 또 기숙사 사감은 강압적인 정책으로 학생 개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했다. 대학생들은 이러한 학교의 보수성과 질적 저하에 반발하기 시작했고, 교수와 학교 측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 튀니지 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미셸 푸코는 "학생들이 교수를 전통적 계급 투쟁의 타도 대상으로 보는 것은 참으로 기묘하다"라고 표현했다.

2.3. 유럽의 전후 경기 침체

유럽에서는 전후 경기 침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서유럽 국가를 마셜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원조했고, 그 결과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등의 서유럽 국가들은 1945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점차 줄어들었고, 1960년대 제조업의 쇠퇴가 맞물려 서유럽 경제 성장은 한계를 맞이했다. 예를 들어 독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 연간 6~8%에 달하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으나 1960년대 중후반에 들어 한 자릿수대 초반으로 떨어졌고 실업률도 처음으로 3% 이상으로 올라갔다. 프랑스 역시 알제리 전쟁으로 증가한 정부 적자의 영향으로 경기 침체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의 민족민주당(NPD), 이탈리아의 사회 운동(MSI) 등 네오파시스트 단체들이 고개를 치켜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좌 공산주의 조직 활동도 활성화되며 사회적 불안정성이 극대화되었다.

경기 침체는 국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 노동자의 삶에 악영향을 미쳤다. 경기 침체로 인해 프랑스의 노동 인권은 계속 낮은 수준을 유지했는데, 프랑스의 임금 수준은 서유럽 국가에서 가장 낮았고 노동조합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45시간 노동제(주 5일 9시간 노동) 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영국 정부는 베이비 부머 세대의 증가로 인한 청년 실업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막 사회에 진출하는 청년층의 불만을 샀다.

이미 1967년부터 낭트를 중심으로 농민과 노동자, 청년층의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68 혁명은 1968년 한 번에 터진 것이 아니며 전후 경기 침체로 인한 소요 사태는 일부 노동자 도시에서 1960년대 초반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이 경기 침체는 1960년대 후반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 수행과 '위대한 사회'라 부르는 사회복지정책 유지를 위해 달러를 계속 찍어내면서 심화되었다.

2.4.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 운동이 혁명을 촉발한 하나의 원인이었다.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라는 원칙을 확립한 플래시 대 퍼거슨 판결을 뒤엎고 법적인 인종 분리를 금지한 브라운 대 교육 위원회 판결을 내리며 인종 평등의 원칙에 박차를 가했다. 이듬해인 1955년, 앨라배마의 한 백화점에서 제봉사로 일하고 있던 로자 파크스가 단순히 버스 앞 좌석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자, 흑인 사회는 동요하기 시작했으며,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끄는 시민운동 조직은 앨라배마주 정부를 무릎 꿇리고 버스 내 인종 분리를 금지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흑인뿐 아니라 인종 차별에 분개하고 있던 여러 청년 세대를 자극했다. 몇 년 안 가 킹 목사는 남부 기독교 목회자 협회(SCLC)를 창립했으며, 후일 68 혁명 운동권의 모태가 되는 남부 흑인 대학생 조직인 비폭력 조정 학생 위원회(SNCC) 창립에 기여하며, 68 혁명의 조직적 뿌리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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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의 마틴 루터 킹
흑인 민권 운동이 더욱 파급력이 있었던 것은 기성세대의 반발 때문이었다. 킹 목사의 비폭력 투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백인 기성세대는 킹 목사를 혐오했으며, 이는 1963년의 유명한 워싱턴 행진 이후 심화되었다. 반면 청년 세대는 킹 목사의 대의에 동조하며 사회 문제에 관한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의 갈등이 일어났다. 캘리포니아 대학교를 포함한 여러 대학교 이사회에서 학생의 정치 활동 금지를 명목으로 흑인 민권 운동 참여를 교칙으로 금지하자, 대학생들은 반발해 정치 활동 금지 교칙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미국 내 68 운동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한편 흑인 사회 역시 흑인 민권 운동으로 크게 자극되었다. 당시 북부에서 흑인은 극심한 경제적 차별에 놓여있었고, 남부에서는 인종 차별적 관행이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자연스레 일부 흑인 사이에서 경제적 평등을 위해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급진 사상에 물드는 경우가 나타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백인 기득권층과 이들의 "하수인"인 경찰, 공권력에 반발하는 정서가 두드러졌다. 1965년 LA의 와츠 폭동은 이를 잘 보여준다. 와츠 폭동은 백인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흑인 청년이 사망하자 흑인 밀집 지역인 와츠에서 일어난 대규모 경찰 타도, 인종 차별 반대 집회를 의미한다. 청년 세대 중 상당수가 와츠 폭동 당시 흑인 운동가들에 동조하면서 흑인과 백인 청년층 사이의 연대가 다시금 이루어졌다.

2.5. 사상적 배경: 비판 이론과 후기 구조주의

"구조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라는 구호와 달리, 구조는 바깥으로 나왔다.
철학자 자크 라캉의 68 혁명에 대한 평가
사상적으로는 195~60년대에 등장한 비판 이론과 (후기) 구조주의 사상이 68 혁명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대학생 좌파 사이의 이념은 언제나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일찍이 블라디미르 레닌은 청년층을 사회주의 혁명의 씨앗으로 보고 청년 세대의 공산주의 운동 참여를 장려한 바 있으며, 이 정서는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대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전후의 경제적 풍족으로 서유럽의 공산화가 점차 어려워졌다. 또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소련군의 전차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헝가리 대학생 시위대를 짓밟아 버린 것은 공산주의라는 큰 이상을 향한 서유럽 청년 세대의 동경을 완전히 박살 내고 말았다. 헝가리 혁명 이후 서유럽 청년 세대 사이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확산되었으며, 이를 대체할 이론으로 비판 이론과 구조주의 사상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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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도르노
독일의 비판 이론 혹은 프랑크푸르트학파는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사회 조사 연구소 회원들이 내세운 일련의 신마르크스주의적 사회사상을 의미한다. 발터 벤야민, 테오도어 아도르노, 막스 호르크하이머,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를 대표적 비판 이론학파의 기수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어찌하여 나치당과 파시스트 세력이 공산당보다 우선하여 집권할 수 있었는지 분석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발간된 명저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공저의 <계몽의 변증법>,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 비판>,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등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지적하는 것은 서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이성"이다. 비판 이론가들에 의하면, 서구 사회는 산업 혁명 시대에 과학적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이성을 추앙했는데, 이 이성은 점차적으로 기업과 체제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것으로만 사용되었다. 즉, 이성이 기존의 명철한 기능을 잃고, 수익 창출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비판 이론가들은 이를 "도구적 이성"이라 비판하고 이러한 도구적 이성으로 인해 유럽의 시민이 제대로 된 이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최대 이윤만을 추구하는 국가와 기업에 의해 표준화, 일체화되어 무의식적으로 나치즘을 추종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비판 이론가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도구적 이성의 폐혜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비판적 이성"의 개념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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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한편,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펼쳤다. 루이 알튀세르,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등을 기수로 하는 구조주의 철학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를 구조적인 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 이 중에서 68 혁명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알튀세르는 사회를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인간은 주체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짜여진 틀에 맞추어 사고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학교, 군대, 기업 등의 "사회 조직"은 그 조직에 맞추어 행동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며, 도덕 교육은 개개인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 결국 사람들은 사회에 진출하기 이전부터 교육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사회 시스템에 충성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기계가 되고 만다. 이때 그러한 미덕을 결정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같은 더 큰 사회적 구조이다. 알튀세르는 명철한 이성을 통해 이 사회 구조를 폭로하고,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념은 두 가지의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부분적으로 극복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를 노동자-자본가의 양극화된 구조로 보고,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통한 계급 혁명을 부르짖었다. 또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통한 경제 결정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비판 이론과 구조주의는 경제 결정론과 계급 혁명론을 부정하였으며, 소련과 같은 거대한 "관료형 사회주의" 역시 인간을 기계화시킬 수 있음을 폭로하였다. 즉, 구좌파와 신좌파의 단절이 일어난 셈.

둘째, 그것은 학교를 향한 학생들의 불만 사항을 구체화시켰다. 비판 이론 사상가와 구조주의 사상가들은 학교가 사실은 기득권 계급의 이익을 위한 도구이자, 학생들을 기계 속의 부품으로 전락시키는 취업 양성소로서의 기능만을 할 뿐임을 낱낱이 비판하며 베이비 부머 학생들의 "학교 비판"을 더욱 정교화했다.

2.5.1.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이때 특히 68 혁명의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장폴 사르트르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를 들 수 있다. 우선 장폴 사르트르 본인은 구조주의나 비판 이론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학교 비판과 맞물려 행동하는 지식인의 정신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영향을 주었다. 사르트르는 "앙가주망", 즉 "참여"의 정신을 주장했다. 사르트르는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을 비겁한 지식인이라고 비판하고, 사회 문제에 언제나 깨어있고 비판하며 다른 사람들을 계몽시키는 "행동형 지식인"의 이상을 제시하였다. 이는 정치적 활동을 규제하던 당대 학교 교칙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학생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2.5.2. 마르쿠제의 유토피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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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파의 아버지, 3M[127] 중 하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해방의 단계에서는 "어떻게 개인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된다. 그보다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더 유효하다. "어떻게 개인이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즉, 스스로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을 노예 상태에 머물도록 영속화하는 착취적 기제에 대한 의존과 재생산을 어떻게 열망과 만족을 통해 떨쳐낼 수 있는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해방에 대한 시론> 中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다른 비판 이론가들과 약간 다른 결의 철학자였다. 비판 이론가들은 대체로 급진적 혁명에 반대했으며, 오로지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기존 체제를 합리적, 변증법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비판적 이성"을 갖추어야만 사회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마르쿠제는 보다 낙관적인 방면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마르쿠제는 "위대한 거부"를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 이 위대한 거부는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거부이지만, 아도르노나 호르크하이머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부정과는 약간 다른 개념이다. 마르쿠제는 위대한 거부 뒤에는 언제나 불가능할 법한 이상향, 즉 유토피아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사회에 살아가는 핍박받는 사람이 꿈을 꿀 수 있고, 변증법적으로 구체제를 거부한 후 유토피아로 향해 나아가 더 나은 현재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하에서, 마르쿠제는 아도르노와 달리 폭력 혁명을 지지하면서 68 혁명에도 적극적 찬성의 스텐스를 취하게 되었다. 또한 학생들에게는 이상주의의 미덕을 설파하면서 평화주의, 반자본주의, 행동주의 등의 이상적 원칙이 학생 운동에 녹아들 수 있는데 영향을 주었다.

2.5.3. 마오쩌둥주의의 영향력

국내외적으로 68 운동에 마오주의가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1968년 혁명 도중 혁명의 중심이 된 소르본 대학교의 건물 곳곳에는 카를 마르크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체 게바라 등과 함께 마오쩌둥의 사진이 걸렸다.[128] 본진 프랑스에서 학생들은 "마오쩌둥"의 이름을 연호하기도 하고, 그의 책인 <모순론>을 돌려 읽는 등 마오주의의 영향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오쩌둥주의의 영향력이 다소 과대평가된 측면도 있는데, 마오주의가 68 운동 내내 영향을 미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마오주의의 영향력이 일부 조직을 제외하면 크지 않았고, 영국에서는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프랑스 내에서조차 JCR을 위시로 한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마오주의 조직에 맞먹는 영향력을 보여준 바 있다. 사실 당시 학생들에게 문화대혁명의 실상은 잘 알려지지 않은 채 "유교 성리학이라는 구습을 타파하기 위한 운동"만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오리엔탈리즘적인 환상도 더해져 마오주의의 실제 교리가 추앙받았다라기보다는 마오주의가 하나의 기호로서 추앙받은 것에 가깝다.

마오쩌둥주의가 그렇게나 68 혁명 당시 호응을 받은 것은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소련식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좌익 사상으로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중소 결렬을 더불어 소련과 중국의 사이가 틀어졌을 때이고, 마오쩌둥은 소련이 수정주의, 관료주의에 빠졌음을 지적하며 반수정주의를 부르짖었다. 68 혁명 당시 혁명 시위대의 목표 역시 관료주의적 좌파의 타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학생이 마오주의를 반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단순하게, 소련에 반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마오쩌둥은 하나의 대안과도 같았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보고 자란 혁명 세대에게 있어 소련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였고 그랬기에 소련에 맞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 마오쩌둥은 숭상받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는 파리 고등 사범 학교 철학/심리학과 교수 루이 알튀세르가 프랑스 지성계에 미치고 있던 영향력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마오주의를 프랑스에 가장 먼저 소개한 인물 중 하나로, 그의 저작인 <모순론>을 참조해 "과잉 결정론"을 필두로 한 여러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라는 두 권의 저작을 68 혁명 이전에 발표했는데, 이 두 책은 프랑스 68 운동의 마르크스주의 운동권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마오주의를 추구하던 조직원 대부분이 알튀세르가 교수로 있던 고등 사범 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출신이었다. 예를 들어 쿠바 방문 혐의로 감금되어 68 운동 내내 학생들에게 추앙받은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는 알튀세르 밑에서 수학했고, 청년 마르크스주의자 동맹의 베니 레비(Benny Lévy) 역시 알튀세르의 수제자 출신. 더 나아가, 알튀세르는 젊은 철학도들의 철학과 교수 임용 시험을 도와주는 지도 교수의 역할도 맡고 있었기에 그의 지성계에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당시 시위에 지성적 영향력을 미친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자크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알랭 바디우 등이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였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2.6. 과거사 청산 미진

청년 세대를 분노하게 만든 또 다른 것은 과거사 청산의 미진함이었다. 당시 서구 사회는 나치 청산이 이루어지기 전으로, 나치 독일 비시 프랑스의 부역자들은 여전히 정치, 경제 부문의 요직에 앉아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 전 서독 총리, 테오도르 오버랜더 전쟁 피해자-추방자 연방 장관, 한스 글롭케 연방총리청장, 라인하르트 겔렌 연방 정보국장, 헤르만 요제프 압스 당시 도이체방크 총재, 한스마르틴 슐라이어 독일 경제인 연합회장, 에른스트 폰 지멘스 지멘스 감독 위원회 의장, 1950년대 서독 최고 갑부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플리크 등이 있다. 이들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는 홀로코스트 등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 범죄에 대해 없었던 일로 취급하며 사회적 망각을 강요했다. 그리고 부역자보다 더한 친위대 출신 병사 및 장교들이 독일 정계의 비호를 받으며  무장친위대 상조협회에서 활동하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나치의 악독함을 교육받고 자란 청년 세대는 분명 학교에서는 나치는 나쁘다고 교육 받았은 것과는 다르게 정작 현실은 나치 인사들이 요직을 꿰차고 있는 내로남불 같은 상황에 반감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부모 세대의 "망각"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득권 세대의 전쟁 범죄 회피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의 세대 갈등을 부추겼다.

2.7. 문화적 배경: 브리티시 인베이전

한편, 전후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 문화적으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50년대의 대중문화는 대체로 보수적인 것으로 표상되곤 한다. 1955년 척 베리를 위시로 한 로큰롤 열풍이 불기도 했지만, 흑인 차별 등의 풍조로 인해 로큰롤은 일시적 유행에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1962년 비틀즈가 데뷔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비틀즈는 깔끔한 외모와 캐치한 음악으로 영국을 휩쓸었고, 2년 후인 1964년에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해 그야말로 미국을 "뒤집어 놓았다". 비틀즈의 성공은 로큰롤을 추구하는 다른 여러 그룹에도 영향을 주었다. 비틀즈의 뒤를 이어 애니멀스가 히트를 쳤으며, 킹크스, 롤링 스톤스 등 다른 그룹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이라 불리는 거대한 문화적 현상으로 일컬어진다.
1960년대 세대 갈등을 주제로 다룬 더 후의 <My Generation> 마리화나 복용을 주제로 다룬 비틀즈의 < Got to Get You Into My Life>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여러 면에서 청년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젊음을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을 부르짖었다. 대표적으로 더 후의 <My Generation>은 노골적으로 "더 늙기 전에 죽어버리고 싶다" 등의 과격한 가사를 내세우고 있다. 또 이전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성적, 쾌락주의적 요소가 대중문화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비틀즈의 < Revolver> 음반은 마약 복용의 몽환을 다룬 것으로 거의 최초의 사이키델릭 음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롤링 스톤스의 <Satisfaction>은 쾌락주의를 찬미했고, 킹크스의 <You Really Got Me>는 사랑을 주제로 빠른 비트와 경쾌한 기타 솔로 등으로 헤비메탈의 원형을 제시하였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에 대적하는 미국의 가수들은 영국의 청년 가수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미국의 포크 음악과 록 음악을 결합한 "포크 록"을 시도했으며 밥 딜런, 사이먼 앤 가펑클, 더 버즈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도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세대와 마찬가지로 마약 복용 찬양, 젊음, 기성세대 비난, 좌익/사회주의적 정치사상 표출 등으로 당대 청년 세대의 가려운 부분을 긁는 역할을 했다.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1960년대 후반의 반문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청년 세대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전후 호황기로 인한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거부하는 움직임에 추동력을 불어넣었다. 또한 68혁명 하면 빠질 수 없는 자유로운 성생활과 마약 복용 등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2.8. 베트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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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hey, LBJ[129], How many kids did you kill today?
이봐, 이봐, 존슨,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을 (베트남에서) 죽였나?
미국의 반전파 대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구호
어떤 놈들은 애국심으로 반짝이는 눈을 물려받았지.
어, 근데 그 사람들이 너를 전쟁터에 내보내잖아, 맙소사!
그놈들에게 "도대체 얼마를 더 원하는 거야?"라고 물으면,
그놈들은 이러지. "더! 더! 더! 많이!"
난 아냐, 난 아냐, 난 군 장성의 아들이 아니야.
난 아냐, 난 아냐, 난 운 좋은 놈이 아니야.
미국의 반전 가요 < Fortunate Son> (1970) 中
이런 광범위한 청년 세대의 열망과 분노를 끌어낸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베트남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아이젠하워 시기의 개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케네디 행정부 시절부터 응오딘지엠에 대한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은 서로 전쟁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본격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린든 B. 존슨이 집권하면서부터였다. 존슨 대통령은 미심쩍인 미군 함정과 북베트남군 사이의 교전 사건인 "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통킹만 결의안을 상원에서 단 2표의 반대표로 통과시키고 북베트남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여론이 나쁘지 않았다. 청년 세대들도 베트남과 전쟁을 해야 하는 당위성에 대해 납득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적군에 상대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성전을 거부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이 지나도록 전쟁이 계속 길어지고 전황이 지지부진하자, 과연 존슨 행정부가 전쟁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65년, 버클리 대학에서 제리 루빈이 "베트남의 날 위원회"를 창립한 것을 계기로 대학가에서 우후죽순 베트남 전쟁 반대 단체가 창립되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존슨 정부를 믿어보자는 여론도 컸으며, 1967년의 한 조사에서는 단 7%의 미국인만이 철수를 지지하는 반면, 46%는 확전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 1월 30일,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 종식을 호언장담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구정 공세가 일어났다. 전술적으로는 베트콩의 실패였지만, 시각적으로는 그들의 대승리였다. 베트콩 군인들이 사이공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고 미국 대사관까지 침입해 대사관 직원들에게 총을 쏘는 모습이 생중계되며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또 남베트남 경찰이 민간인으로 보이는 한 남성[130]을 즉결 처분하는 사진인 <사이공식 처형> 등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전쟁 수행 여론은 좌파 성향 대학생 사이에서 나락으로 치달았다. 1968년 연말까지 전쟁 철수 여론은 20%까지 상승했으며, 전쟁에서 미국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여론은 40%대로 급격히 떨어졌다.

미국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은 무엇보다 징병제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었는데, 미국 청년들은 이름도 모를 동남아시아의 국가를 위해 무의미하게 피를 흘리는 것을 혐오하였다. 또한 징병제라는 시스템은 인명을 표준화해 국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한다는 구조주의, 비판 이론의 주장과도 들어맞는 것이었다. 한편 베트남 전쟁과 직접적 연관이 없었던 유럽에서는 인도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측면에서의 반대가 두드러졌다.

3. 전개

3.1. 포트 휴런 선언, 버클리 자유 발언 운동

미국에서는 이미 1960년대부터 불만점이 표출되고 있었다. 대학생 운동가 톰 헤이든(Tom Hayden)은 1962년 노동운동가 월터 루터(Walter Ruther)와 힘을 합쳐 "민주적 사회를 위한 학생 연합"(SDS)를 창설했다. 헤이든은 1962년 6월 15일 미시간 주 포트 휴런에서 SDS의 설립을 알리는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를 "포트 휴런 선언"이라고 한다. 포트 휴런 선언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그것은 "점차 기계화, 관료화되고 있는 대학의 관행을 중단하고" "건설적인 토론과 학문을 추구하는 대학교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포트 휴런 선언은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고, 연설이 다루는 인종문제, 성차별 문제, 환경문제 등 주제의 광범위성으로 인해 "학교의 기계화"라는 주제도 특별히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1964년, 마리오 새비오(Mario Savio)라는 한 청년이 버클리 자유운동을 펼치면서 미국에서 대학교 문제가 점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새비오는 UC 버클리에 재학중인 철학과 3학년 생이었는데, 버클리 대학이 수익에만 눈이 멀어 기계화되고 있고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만을 창출하는 취업양성소로 전락하고 있다고 대학측을 비판했다. 새비오의 투쟁 목적은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발언권이었다. UC 버클리 대학 이사회는 마틴 루터 킹의 막대한 영향력을 우려해, 재학생들이 흑인 민권운동을 포함해 어떤 정치 운동에도 일체 발언권을 가질 수 없다는 교칙을 신설했다. 새비오는 이것을 대학생들을 침묵시키려는 시도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4학년 경제학과 재학생 잭 와인버그(Jack Weinberg)와 함께 버클리 자유발언운동(Free Speech Movement; FSM)이라는 단체를 창립했다. 새비오는 대학교 총장과의 면담을 요구해 정치적 발언권에 대한 제한 해제를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UC 버클리 측은 이를 심각한 교칙 위반으로 받아들이고, 새비오와 와인버그를 퇴학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이것은 역효과를 일으켰는데, 새비오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도 자유발언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대학교에서 퇴학 조치가 내려진 날, 새비오는 대학교 본관 건물을 나서면서 자신을 보려 집결한 3,000명의 UC 버클리 학생 앞에서 계단에 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남겼다.
만약 대학교가 기업이고, 대학교 이사회 임원이 회사 이사회 임원이고, 클라크 커(Clark Kerr) 대학 총장이 CEO고, 대학 교수는 공장의 노동자라면, 우리 대학생들은 기계에 들어가는 재료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인격을 갖춘 하나의 인간입니다. (중략) 때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체제가 너무 가증스러워져서, 묵묵히 체제에 참여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의 몸뚱이를 기계의 랜치, 톱니바퀴, 기어 위에 던져 기계의 작동을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 학생들이 자유롭지 않으면 그들의 기계 역시 작동할 수 없음을 똑똑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1964년 12월 2일, 마리오 새비오의 <기어 위의 몸뚱이> 연설 中
이 명연설은 대학교에 결집한 학생들을 너무 흥분시켜서, 거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충격을 받은 대학교 이사회 임원들은 팻 브라운[131]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주방위군 출동을 요청했다. 그 결과 3,000명의 성난 학생 시위대 중 수백명이 다치고 800명이 체포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버클리 대학은 더 큰 소요사태를 막기 위해 캠퍼스를 일시 폐쇄하는 결정까지 내렸다. 물론 학생 절대다수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새비오를 지지했고, 결국 대학 측이 굴복해 1965년 1월 3일 신임 총장이 캠퍼스 내에서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해도 좋다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했다. 그러나 마리오 새비오의 퇴학 처분은 끝내 철회되지 않았다.

버클리 자유발언운동은 미국과 유럽의 많은 학생들을 자극했다. 새비오 퇴학 사건 직후인 1965년 봄, 제리 루빈(Jerry Rubin)은 버클리 캠퍼스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기 위한 거의 최초의 신좌파 단체인 "베트남의 날 위원회"(Vietnam Day Committee; VDC)를 창립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대학교를 벗어나면 혁명의 단계까지 불만이 이르지 못했고, 여전히 엄격한 기독교 윤리가 지배하고 있던 유럽은 미국보다도 대학교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대학교 자유 운동은 1966년부터 프랑스, 독일 등의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고, 1968년 혁명의 전주곡으로 불릴 만한 여러 운동이 일어나는데 영향을 미쳤다.

3.2. 학생 운동의 여명

베트남 전쟁의 전황이 악화되어가던 1966년부터 전세계적으로 학생운동이 퍼져나갔다. 일본에서는 일본 신좌파가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고,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전세계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우익 세력과 청년 좌익 운동가의 충돌이 잦아졌다. 1966년,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의 재학생으로 학생회장 선거의 좌파 단일 후보였던 파올로 로시(Paolo Rossi)가 우익 파시스트 성향 학생에게 린치를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파시스트에 의한 첫번째 사망 사건이었다. 학생들은 자극받았고, 이탈리아 내에서 신좌파 운동이 들불 번지듯 일어났다. 이듬해인 1967년에는 베노 오네조르크(Benno Ohnesorg)가 팔라비 입국 반대 시위 도중 경찰의 총탄에 맞아 숨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독일 대학생들은 "오네조르크를 기억하라!"라며 전면적인 시위에 나섰다.

미국에서 시위는 히피라는 집단에 의해 격화되었다. 당시 히피 집단은 미국을 휩쓸던 반문화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자유로운 성생활, 마약 복용 찬미, 자유로운 예술 정신 등을 내세웠다. 이들은 캘리포니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특히 마리오 새비오에 의해 처음으로 학생 시위가 시작된 UC 버클리 캠퍼스는 히피들의 성지로 불렸다. 1967년 여름,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에 결집해 여름동안 서로 사랑을 나누고, 예술적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대규모 사회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이라고 부른다. 비록 사랑의 여름은 무분별한 마약 복용과 성병 확산 등의 부작용도 남겼지만 전반적으로 미국 1968년 학생 운동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1968년을 넘기자 시위는 더 격화되었다. 1968년 1월 30일, 베트남 전쟁의 종식이 머지 않았다는 린든 존슨 대통령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구정공세가 일어나면서 대학생 사이에서 베트남전에 대한 회의론은 거듭 확산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사회주의 성향 운동권이 영향을 미치고 있던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1967년 6월 베노 오네조르크 사망 사건 당시 마이크를 붙잡고 추모 연설을 해 일약 유명세를 탄 베를린 자유대 재학생 루디 두치케(Rudi Dutschke)가 독일의 반베트남 시위를 이끌었다. 1968년 2월 17일부터 18일까지 이틀간 서베를린에서 대학생 주도로 국제 베트남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두치케는 "제도를 꿰뚫는 대장정"을 해야한다고 연설했고, 18일 2만명의 반전 대학생들이 로자 룩셈부르크, 체 게바라, 마오쩌둥, 카를 마르크스의 초상화를 치켜 세운채 시내를 행진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났다. 1967년 11월부터 이탈리아 북부의 좌익 성향 대학생들은 사크로 쿠오레 가톨릭 대학교 철학과 4학년 재학생이었다가 재적당한 마리오 카파나(Mario Capanna)의 지휘 하에 가톨릭 대학교와 토리노 대학교를 점거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에 영향을 받은 로마의 대학생들은 3월 1일 로마대학교 건축학부 건물을 점거하고 베트남에서의 평화를 요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였다. 그 와중에 발레 줄리아 정원에서 경찰과 충돌해 수백명이 부상당하고 228명이 체포되었으며 10명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구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 기동대가 로마대학교 건물을 되찾기 위해 출동했지만, 이것은 학생들의 완강한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 경찰서 앞은 불길에 휩쌓였으며, 수세에 몰린 로마 경찰은 구금된 10명의 학생을 석방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타리크 알리가 이끄는 런던 소재 대학교 학생들이 베트남 전쟁 반대를 부르짖으며 행진하다가 브롬스그로브 공원에서 기마경찰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브롬스그로브 전투"라고 부르며, 68혁명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영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시위로 평가받고 있다. 영국에서 68혁명의 진원지는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였다. 런던 정경대는 1967년 3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수차례 학생 측에 점거되어, 학생운동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3.3.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건물 폭발 사건, 3.22 운동

이렇듯 서유럽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가 고조될 무렵인 1968년 3월 17일, 파리에서 대학생들의 반전집회가 열리던 도중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부의 건물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비록 사상자는 없었고 유리창만 박살나는 수준에 그쳤지만, 미국 회사를 향한 테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극단적 반응으로 비추어지기 충분했다. 파리 경찰청은 테러 사건의 주동자 8명을 긴급 체포했는데, 이중 한명이 소르본대학교 낭테르캠퍼스의 재학생이자 트로츠키주의 지하조직 "혁명적 공산주의 청년연합"(JCR) 회원인 자비에 랑글라드(Xavier Langlade)인 것으로 드러났다. 동문의 체포에 자극을 받은 낭테르 대학교 학생 600여명은 강의실을 점령하고 체포된 혁명 동지의 석방을 요구했다.

낭테르 대학교에서는 일찍이 1967년부터 투쟁이 시작된 바 있다. 1960년대 소르본대학교의 팽창으로 파리 북부 빈민가에 세워진 낭테르 캠퍼스는 빈부격차의 온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부유한 소수 대학생들이 편하게 통학할 동안, 대다수 학생들은 좁은 기숙사에서 마감도 제대로 안되어 질퍽한 진흙길을 밟으며 등교해야했고, 남학생과 여학생의 기숙사가 분리되어 사감이 학생 개개인의 연애까지 통제하며 불만이 극에 달해있었다. 이미 낭테르대는 설립 5년만에 재학생 수가 1만 4천명에 달하며 포화를 보였는데, 대학 측은 수업의 질을 고려하지 않아 학생들의 원성을 샀다. 이미 1967년 11월부터 마르크스주의 성향 조직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사회학과와 철학과[132]는 재학생들의 청강 보이콧에 직면했다. 그러던 와중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동료 재학생이 체포되었다니 학생들이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3월 22일, 이 학교의 철학과 3학년 재학생인 다니엘 콘벤디트(Daniel Cohn-Bendit), 일명 "빨갱이 대니"는 수감된 동문을 구출하고 더 나아가 낭테르 대학교 이사회를 압박하기 위해 142명의 동료 학생을 이끌고 "3.22 운동"(Mouvement du 22 Mars)을 창립한다. 콘벤디트가 이 단체의 대표이긴 했지만, 단체는 다소 아나키즘적인 방법으로 운영되었다. 핵심 목표는 베트남 전쟁의 종식 요구, 학생 생활 개선, 남녀 기숙사 출입 허가. 나머지는 학생 개개인의 자율에 맡겼다. 그러나 오히려 핵심 목표를 제외하면 행동 방침이 매우 자유로웠기에 3.22 운동은 낭테르대 학생 사이에서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고, 부활절을 거치면서 파리 시 당국도 기동대를 투입해 3.22 운동 단원들을 정밀타격하는 전략을 취했다.

3.4. 마틴 루터 킹의 암살, 루디 두치케의 피습

3.22 운동으로 반베트남 운동과 당국의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 시위를 격화시킨 몇가지의 사건이 일어났다. 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한 것이다. 킹 목사는 테네시에서 노동자의 파업을 격려하기 위해 멤피스에 방문한 차였는데, 당시 대선에 출마한 제3지대 극우 후보자 조지 월리스를 지지하는 한 백인우월주의자의 총에 맞고 운명을 달리했다. 마틴 루터 킹의 죽음은 68혁명 운동가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킹 목사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방향성으로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킹 목사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흑인 커뮤니티는 슬픔을 너머 분노에 빠졌고, 전국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유일하게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도시는 인디애나폴리스였는데 이곳에서는 로버트 F. 케네디가 흑인을 진정시키고 킹 목사를 추도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해 폭동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한편 독일에서도 1968년 4월 2일,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대형 백화점인 슈나이더 백화점과 카우프호프 백화점이 불에 타는 사건이 일어났다. 방화범은 혁명가들이었는데, 이들은 자본주의의 소비 체계를 무너트리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털어놓았다. 이로서 서유럽에서 시위의 양상은 폭력 투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4월 11일, 킹 목사가 암살당한 지 불과 일주일만에 독일 68혁명의 지도자였던 루디 두치케가 총격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다행히 루디 두치케는 목숨은 부지했지만, 후유증이 남았고 그는 11년 후 피습 사건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133] 범인은 뮌헨 출신의 노동자였는데 68혁명 운동가들이 표적으로 삼은 우익 언론 < 빌트>지의 애독자이자 네오나치인 것으로 드러났다.
슈프링어 그룹은 살인자이다 - 어제는 마틴 루터 킹을 쐈고 - 오늘은 루디 두치케를 쐈으며 - 내일은 우리를 쏠 것이다!
1968년 4월 독일 대학생들의 가두 슬로건
바로 다음날, 독일의 대학생들은 <빌트>, <데어 벨트(Der Welt)> 등 여러 우익 언론을 소유한 언론재벌 악셀 슈프링어(Axel Springer)의 회사 "슈프링어 그룹"의 본사를 공격했다. 경찰이 물대포를 쐈지만 학생 수가 너무 많아서 오히려 경찰들이 포위되었고 빌딩 전체가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일주일동안 독일 전역에서는 전국의 <빌트>지 지사가 공격당했을 뿐더러 신문 수송용 트럭도 테러를 당했다. 이 시위 동안 2명이 죽고, 400명이 부상당하고, 1,000명이 체포되었다. 몇주 후, 독일 의회는 긴급 치안 공백 상황에 국가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긴급조치법을 통과시켰다. 사회민주당 내 보수파의 협조로 법이 통과되자 분개한 학생들은 사회민주당의 깃발을 불태우면서 전국으로 쏟아져나왔고, 6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3.5. 바리케이드의 밤

5월 2일, 다니엘 콘벤디트를 중심으로 한 3.22 운동은 트로츠키주의자, 마오주의자, 무정부주의자의 조직 하에 "반제국주의의 날"을 제정한다. 다음날 운동가들은 낭테르대학교의 원형극장을 점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낭테르대학교 측에서는 대학교를 폐쇄하고 학생 출입을 막았으며, 콘벤디트를 화염병 제작 등의 소요 사태를 일으킨 혐의로 청문회에 회부했다. 다니엘 콘벤디트는 학우들에게 화염병 만드는 방법을 알려줬고 소르본대학교 학생들은 이것을 "빨갱이 다니의 칵테일"이라고 장난삼아 불렀다. 소르본 대학교 측에서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콘벤디트가 사회 혼란을 부추긴 주범이라고 여기고 그를 징계에 처하려고 했다. 콘벤디트가 청문회에 회부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낭테르 캠퍼스 학생과 소르본 본캠 학생, 그리고 인근 고등학생까지 소르본 대학교가 위치한 라탱 지구로 집결했고 그 수는 500명 이상에 이르렀다.

당시 학생 중 일부는 무력 투쟁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시위는 전반적으로 평화시위에 가까웠다. 시위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알랭 크리빈의 혁명적 공산주의자 청년연합(JCR;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폭파 사건으로 구속된 랑글라드가 소속된 그 조직)이 경찰과의 협상을 하자는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콘벤디트가 청문회를 마치고 교정을 나서자, 크리빈과 JCR 지도부는 함께 교정을 나서려고 했다. 여기서 경찰이 실수를 저지른다. 경찰은 통상적인 절차로 시위대의 신원을 확인하고자 콘벤디트와 크리빈, 그리고 JCR 지도부 전원을 경찰버스에 태워 경찰서로 연행한다. 온건파였던 JCR 지도부가 경찰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본 학생들은 경찰이 그들을 체포한 것이라고 오해했다. 시위대는 흥분했고 곧바로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 도중, 한 학생이 던진 보도블록이 경찰차 앞유리를 뚫고 망을 보던 경찰관의 머리를 가격했다. 경찰관은 중태에 빠져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이것은 시위 진압 경찰을 자극했다. 경찰은 폭동적 시위진압에 나서 학생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쳤고, 100명이 부상당했으며 총 574명(소르본 캠퍼스에서 300명, 라탱지구 길거리에서 274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지도부"라고 지목된 13명의 인물이 즉석 재판에 회부되었다. 4명은 2개월 구속이라는 형벌에 처해졌는데, 문제는 그 4명 중 한명이 소르본 대학교 기독교학생연합의 회장이자 비폭력 온건파의 수장이었던 장 클레망(Jean Clement)이었다는 점이다. 가장 온건하고 평화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학생마저 구속되는 모습을 본 소르본 대학교 재학생들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다.

낭테르 대학교에 이어, 라탱 지구에 위치한 소르본 대학교 본캠퍼스도 학생들의 소요 사태를 막기 위해 대학교를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소르본 대학교는 개교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캠퍼스를 폐쇄하고 강의를 휴강하며 학생의 출입을 막았다. 학생들의 요구는 소르본 대학교의 재개방과, 다니엘 콘벤디트를 포함한 혁명동지의 석방, 경찰 병력의 퇴진이었다. 경찰과 소르본대학교 측과 대학생 측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1968년 5월 9일, 소르본 대학교 본캠퍼스가 열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는 학생 운동권을 와해시키기 위해 소르본 대학교 측이 뿌린 헛소문이었음이 드러나자, 학생들은 격분했고, 5월 10일 일제히 라탱 지구로 행진했다.

한편 자크 라캉, 앙리 르페브르, 질 들뢰즈, 장폴 사르트르 등은 학생을 지지하는 의사를 밝히는 공동 성명서를 9일 발표한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공산당의 조르주 마르셰 서기장은 기관자 <뤼마니떼>를 통해 학생의 시위를 "지독하게 어리석은 소아병의 말로, 좌익 맹동 모험주의"라고 비난하는 칼럼을 싣는다. 알랭 프레피트 교육부장관은 SNEP(전국학생연합), SNEsup(교직원노조) 간부와 만나 타협을 시도하지만 이 타협은 프레피트의 강경한 태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5월 10일 밤에서 5월 11일 새벽, 라탱 지구로 행진한 수천명의 소르본 대학교 재학생들은 경찰을 저지하기 위해 소르본 대학교 앞에서 바리케이드를 쌓고 경찰과 대치했다. 르몽드지의 현장 특파원에 의하면 그 수는 "최소한 2만 명 이상"이었다. 소르본대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고 각목을 휘두르며 경찰에게 강경대항했으며, 2시 15분을 기점으로 경찰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해 수백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동맹휴학에 나선 파리 전역의 고등학생도 이날 소르본 대학교 시위대에 합류해 공동 투쟁에 나섰다. 수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경찰 측은 4시 경 라탱 지구에서 철수했다. 프레피트 장관 역시 콘벤디트와 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밝히며 백기투항했다. 이를 바리케이드의 밤(Nuit des barricades)이라 부른다.

11일, 뤼마니떼는 입장을 바꿔 억압을 중단하라(Halte à la répression)라는 구호를 1면에 내세웠다. 뤼마니떼를 포함해 전국 4대 일간지가 학생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그들을 동정하는 입장으로 전환했고, 특히 뤼마니떼는 그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다니엘 콘벤디트가 1면에 칼럼을 싣는 것을 허락했다. CGT 등의 노동조합 역시 경찰의 폭력에 분개하며 파업을 결정했고, 마르세유 대학교, 리옹 대학교 등 지역의 일부 대학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날 아프가니스탄에서 긴급 귀국한 조르주 퐁피두 총리는 시위대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시위대가 여론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3.6. 5~6월 총파업

5월 13일, 노동총연맹 CGT, 민주노동동맹 CFDT, 노동자의 힘 FO 등이 24시간의 공동 파업에 나선다. 이 날은 알제리에서 쿠데타 세력이 들고 일어나 4공화국을 전복시키고 드골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한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날로 프랑스 우파에게 뜻깊은 날이었는데, 그랬기에 노동조합은 파업의 적기가 찾아왔다고 선언했다. 약 70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이날 파업에 동참했다. 5월 14일 노동조합의 공동 파업은 해산되었지만, 청년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남부항공(쉬드 아비아시옹) 낭트 지부 노동조합은 작업장으로 복귀하지 않고 추가적인 파업을 시행하며 파업이 장기화되었다. 이들은 극좌 아나키즘 성향 노동조합인 "노동자의 힘"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5월 16일, 노동자의 힘에 이어 신좌파 성향 민주노동동맹 CFDT가 작업장의 "자주관리"를 구호로 내세우며 추가 파업을 결정한다.

노동총연맹 CGT도 얼마 안 가 추가 파업에 동참했다. 브누아 프라숑과 조르주 세기가 이끄는 CGT는 프랑스 최대 노동조합으로, 이 노조의 추가 파업 참여 결정은 사실상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을 의미했다. 1968년 5월 17일 프랑스 전체가 멈춰선다. 약 1,000만명, 즉 프랑스 인구의 1/4가 파업에 참여하였으며, 이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파업으로 기록되었다.

파업은 주류 정치권을 자극했다. 5월 19일, 전 총리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는 처음으로 의회 해산을 요구한다. 프랑스 총리는 중도진보 진영에서 지지를 받았으며, 드골이 물러나야한다고 생각한 진보 주류 정치권의 리더로 떠올랐다. 한편 민주좌파동맹(FGDS)의 전 대선후보 프랑수아 미테랑 역시 5월 28일 목소리를 높여 드골 퇴진을 주장했다. 그는 "과도정부"가 구성되어야하며, 조기 대선 및 의회선거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한편 공산당은 프랑수아 미테랑의 과도정부 설립에 반대하며 프롤레타리아 정부를 주장하는 논설을 5월 29일 발표했다.

5월 21일, 다니엘 콘벤디트는 루디 두치케의 대학인 베를린 자유대학교에 방문해 연설했다. 그는 두치케의 쾌유를 빌면서 자주관리와 급진적 혁명만이 구체제를 뒤엎을 수 있다는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 후 비행기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가 드골 정권과 키징어 정권이 전복될 때까지 계속 파업을 해야한다고 노동조합과 학생의 운동을 칭찬했다. 그후 국경을 건너 로테르담과 암스테르담에서 연설을 했고, 5월 말 파리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내무부는 콘벤디트의 입국을 불허하는 결정을 내렸다. 콘벤디트의 암살 위협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사실상 고조되는 파업의 위기에 콘벤디트가 기름을 부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콘벤디트는 알자르 로렌에서 혁명동지들과 함께 은밀히 국경을 넘어, 변장하고 아무도 모르게 파리에 잠입했다. 5월 28일, 콘벤디트는 소르본 대학 캠퍼스 중심의 원형 극장에서 깜짝 등장해 즉흥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드골 정권을 타도하고 "우리에게는 국경이 없다!"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남겼다. 프랑스 전체는 발칵 뒤집혔고, 경찰과 기자가 출동했으며 학생들은 콘벤디트를 둘러싸고 "우리가 콘벤디트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프랑스 전역의 모든 방송국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콘벤디트의 귀국 사실을 보도하는 긴급 뉴스 속보를 내보냈다.

5월 30일에서 6월 초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파업은 고조되었으며, 마르세유에서 10만이, 리옹에서 5만이, 그 외에도 오를레앙, 툴루즈, 낭트 등 프랑스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 경찰은 통제력을 상실했다. 리옹시에서 경찰 병력은 시위대에 포위되어 각개격파된 끝에 일부 기동대가 최후의 거점인 시청과 중앙경찰서를 보호하기 위해 진을 쳤고, 파리시의 경찰은 약탈을 막기 위해 루브르박물관을 방어했다. 프랑스 정부는 학생 시위대가 엘리제궁을 점거하고 프랑스 대통령의 핵버튼을 탈취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했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5월 28일 독일로 출국한 상태였다. 독일에 주둔한 프랑스 병력의 충성심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는 드골의 전략적 오판이었는데, 대부분의 프랑스인, 특히 혁명 시위대는 드골이 무서워서 독일로 도망쳤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5월 말 드골의 출국은 5월 28일 급작스러운 콘벤디트의 귀국과 대비되면서 더더욱 콘벤디트에 대한 드골의 항복 선언처럼 보이고 말았다. 드골은 급하게 5월 30일 귀국함과 동시에, 자신의 사임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의회를 해산하고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시위대의 압승이었다.

3.7. 민주당 전당 대회 폭력 사건

한편 미국에서는 1968년 8월 민주당의 전당대회로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68혁명 시위대는 베트남 전쟁 철수를 지지한 유진 매카시나 빈곤층의 후보를 자처하던 로버트 F. 케네디를 지지했다. 1968년 6월 5일,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면서 혁명 진영은 혼란에 빠졌다.[134] 여론은 분열되어있었는데 매카시를 계속 지지하는 측, 매카시만큼 반전파였던 진보주의자이자 케네디의 최측근이었던 조지 맥거번을 지지해야한다는 측, 기성 정치를 거부하고 민주당도 지지해서는 안된다는 측이 서로 대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당 당권파는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을 대선 후보로 사실상 낙점했다. 경선에서는 유진 매카시가 승리했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경선은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일부 주에서만 경선이 치러졌고, 경선은 지지자들의 여론을 파악하는 여론조사 정도로만 여겨졌다. 실질적인 대선 후보 선출은 각 주의 높으신 분들의 영향을 받는 대의원에 의해 이루어졌다. 험프리도 경선에 참여하긴 했지만, 겨우 2% 밖에 얻지 못했다. 그럼에도 민주당 당권파는 험프리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톰 헤이든과 레니 데이비스의 SDS, 제리 루빈과 애비 호프먼의 국제평화당, 데이비드 댈린저의 베트남 전쟁 종식위원회 등이 험프리의 대통령 후보 선출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시카고로 행진한다. 이들의 목표는 험프리 대선 후보 선출 거부와 베트남 전쟁 종식 메시지 전달.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은 이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경찰 병력을 시 전체에 풀었고, 통금 시간을 지정했다. 이에 대해 언론인 월터 크롱카이트는 "경찰국가에서의 전당대회"라고 비판했다.

1968년 8월 23일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민주당과 공화당 양비론을 주장하는 청년국제당은 "돼지를 대선 후보로!"라는 평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집회 장소인 링컨공원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악기를 연주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경찰이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며칠간 소요 사태가 이어졌다. 8월 23일 통금시간 이후 히피들은 시가 행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며 11대의 경찰차가 시위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얼마 후 톰 헤이든이 경찰차 훼손 혐의로 체포되자 시위대는 자극을 받았고, 8월 26일 그랜트 공원 언덕에서 경찰과 전투를 벌이며 수십명이 체포되거나 부상을 입었다.

대망의 8월 28일 전당대회날,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와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가들이 이끄는 시위대는 전당대회가 열리는 힐튼 호텔의 원형극장으로 행진했다. 경찰이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폭동적 시위진압을 했고, 수백명의 경찰과 시위대가 뒤엉켜 싸웠다. 이를 미시간 애비뉴의 전투라고 부르며 이 과정에서 공식적으로만 100여명의 시위대와 119명의 경찰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폭행하는 과정에서 힐튼호텔의 유리창을 부쉈고, 시위대를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했는데, 이는 전당대회를 취재하러 온 방송국에 의해 생중계되며 세계에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경찰이 쏜 최루탄은 심지어 휴버트 험프리가 머물고 있던 방의 창문을 깨고 날라들어 험프리가 급격히 피신하기까지 해야했다. 한편 힐튼 호텔 15층에 투숙하고 있던 유진 매카시와 조지 맥거번 측은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층 전체를 개방했는데, 경찰이 호텔에 진입하며 매카시와 맥거번 선거캠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날 밤, 민주당은 휴버트 험프리를 공식적인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그러나 전당대회 도중 맥거번 측을 지지한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상원의원이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비판하는 등 분열상이 드러났으며, 부통령 후보 지명 투표 때에는 대의원 1/3이 항의의 의미로 무효표를 던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8월 29일 유진 매카시는 시위대를 독려하기 위해 연설을 준비했지만 경찰의 저지로 할 수 없었다.

이 충돌은 1968년 일어난 미국 내 소요 사태 중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경찰의 과잉진압과 민주당의 혼란상으로 인해 민주당의 지지율은 험프리 후보 공천 후 무려 20%p나 하락했다.

3.8. 그 외 국가에서의 시위

미국과 프랑스에서 시작된 68운동은 세계의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우선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는 수백년간 국가를 지탱하고 있던 가톨릭, 개혁교회 보수세력이 주춤하였으며 요프 덴 우일을 위시로 한 신좌파 정치세력이 주류 정치권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일본에서도 전학공투회의를 위시로 한 신흥 좌익 세력이 힘을 얻었다. 멕시코의 틀라텔롤코 학살, 체코의 프라하의 봄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68운동의 영향을 받은 시위가 일어났다.

3.9. 1968년 6월과 11월: 선거에서의 패배

이러한 운동에도 불구하고, 국가별로 차이는 있지만 1968년 여름을 거치면서 혁명은 소강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일반적인 국민과 기성세대가 시위를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1968년 5월 30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파리시민 50만명이 결집해 프랑스 국가를 부르고 드골 장군을 지지하는 역시위를 벌였기 때문에 일반 대중 여론이 어느쪽을 지지하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미국에서도 국민 80%가 베트남 전쟁에서의 철수를 지지하지 않으며, 40% 이상의 국민이 베트남 전쟁을 오히려 확전시켜야한다는데에 동의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 1968년 6월 치러진 프랑스의 조기 총선에서 드골의 보수파가 압도적인 대승리를 거두는 결과가 나왔다. 조르주 퐁피두 총리가 이끄는 공화민주연합(UDR)은 113석을 더 획득해 487석 중 359석을 차지한 반면, 68혁명을 간접적으로 지지한 프랑수아 미테랑의 민주사회좌파연합(FGDS)은 의석의 반수 이상인 61석을 잃어 57석으로 추락했다. 발데크 로셰 서기장의 프랑스 공산당(PCF)도 34석만을 획득했다. 진영별로 보자면, 좌파 91석 대 우파 396석으로 보수파의 압승이었으며[135], 공산당이 혁명에 반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이 의회에서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투표율은 지난 총선에 비해 8%p 가량 높은 것으로 나왔다. 시위의 과격성과 1,000만명 이상이 참여한 파업이 역풍을 일으켜, 기성 보수층은 물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무관심층마저도 혁명에 반대하기 위해 보수정당을 찍는 현상을 일으킨 것.

1년 후, 샤를 드골 대통령은 자신의 신임투표격 성격으로 국민투표를 밀어부쳤다. 이 투표에서 드골이 근소하게 패배함에 따라, 드골은 1969년 대통령직을 자진하여 사퇴하게 된다. 이를 국민이 68혁명은 물론 드골마저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1969년 치러진 조기 대통령 선거에서 드골파의 2인자였던 조르주 퐁피두가 58%의 득표율로 압도적으로 당선되었음을 감안하면 크게 설득력이 있는 주장은 아니다. 2위 역시 중도보수파인 알랭 포에르 전 대통령 권한대행이다. 프랑스 공산당의 후보로 대독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자크 뒤클로는 21%를 얻는데 그치며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프랑스 역사에서 좌파 후보가 결선투표조차 진출하지 못한 것은 이때와 2002년 대선이 유이하다.[136]

미국에서는 1968년 대선을 앞두고 3명의 주요 후보가 다양한 정도로 68혁명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온건하게 반대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68혁명 시위대가 기를 쓰고 반대했던 휴버트 험프리였다. 가장 강경하게 반대한 것은 구 민주당 소속으로 민주당의 인종평등 정책을 비난하며 제3지대 독자출마를 선언한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리스였다. 월리스는 68혁명을 "인종 폭도" "공산주의자" "빨갱이" 등 거친 수사를 사용하며 비난했고, 인종분리정책의 지속, 베트남 전쟁 확전[137] 등을 공약했다. 한편 리처드 닉슨은 이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며 전국에 일어나고 있는 소요 사태를 비판하고 안전한 미국을 되찾겠다고 약속하였다.

68혁명 시위대는 뒤늦게 선거를 며칠 앞두고 험프리를 지지했고, 험프리의 지지율은 2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으로 급격하게 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 뿐이었고 선거 판세를 뒤집을 수는 없어서 결과적으로 닉슨이 43%의 득표를 얻어 42%의 험프리를 0.7% 차이로 근소하게 꺾고 당선되었다. 접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가장 강경하게 68혁명에 반대한 극우파 월리스가 13%를 얻고 보수적인 남부 5개 주를 석권했기에[138] 진영 구도상으로 보면 반혁명파가 58%를 얻은 것이었다. 게다가 험프리 지지 유권자 중 1/2 이상이 68혁명의 과격성에 반대했다.

각각 대통령으로 당선된 조르주 퐁피두와 리처드 닉슨은 노동자 권익 개선을 주장하며 노동자와 청년세대를 분열시켰고, 한편으로는 치안 안정 정책을 추진하며 68혁명을 근본적으로 약화시켰다. 프랑스에서는 1981년, 미국에서는 1993년이 되어서야 진보파가 집권했다.[139]

한편 다른 몇몇 나라에서는 68혁명 시위대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요프 덴 우일, 오스트리아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캐나다의 피에르 트뤼도, 독일의 빌리 브란트,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등이 그 예시이다. 그러나 정작 혁명의 진원지였던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혁명에 반대하는 후보자가 당선되었고 사회는 오히려 더욱 보수화되었다. 즉, 혁명은 부분적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3.10. 혁명 이후

3.10.1. 시카고 세븐 재판

닉슨 행정부는 1968년 민주당 전당대회 행진을 이끈 7명의 주도자(톰 헤이든, 레니 데이비스, 데이비드 댈린저, 제리 루빈, 애비 호프먼, 리 바이너, 존 프로인스)를 주의 경계를 넘어 내란을 꾀했다는 혐의로 기소했다. 이를 시카고 세븐 재판이라고 부르며, 2021년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재판을 맡은 줄리어스 호프먼은 고압적인 태도로 68혁명 시위대의 비난을 받았으며, 수백건의 법정모독죄로 피고인 7인과 윌리엄 컨슬러 변호사를 기소했다. 그러나 2심 결과, 호프먼 판사의 1심 재판이 뒤집혔고 7인은 모두 법정모독죄를 제외한 나머지 죄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닉슨 행정부의 재판을 통한 여론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3.10.2. 미국의 상황

1968년 혁명에 대해 또다르게 주목할만한 점은 미국에서는 1968년은 물론 1971년까지도 혁명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학생의 반발이 심해졌고, 무엇보다 미라이 학살과 같은 미군의 전쟁범죄가 널리 알려짐에 따라 1972년까지 베트남 철수 여론이 4년 사이 70%로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971년까지 대학생들은 시위를 지속했고, 유명한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최후의 대규모 집회는 1971년 5월의 메이데이 시위로 평가된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전쟁영웅 존 케리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 외교위원장의 허락으로 의회에서 베트남 전쟁을 타도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닉슨 행정부가 전쟁에서 이겨야한다는 자존심 때문에 청년을 사지로 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연설은 청년을 자극했고, 5월 1일부터 전국에서 수만명의 학생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벌였다. 메이데이 시위는 1968년의 그 어떤 시위보다도 전국적이고 대규모였다고 평가받는다. 리처드 클라인딘스크 법무차관은 이 시위를 조용하고 평화롭게 해산시켜야한다고 주장했고, 이전과 달리 단 한명의 사망자도 시위 도중에 나오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체포된 수만명의 시위대는 미식축구 경기장에 수용되었는데 미국 법무부가 이들을 먹여야한다며 인근의 모든 패스트푸드점에 햄버거를 주문해 미군 특수부대 헬리콥터가 맥도널드 햄버거를 싣고가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1년 후, 민주당은 강경한 반전 운동가 조지 맥거번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조지 맥거번은 당시 68혁명 시위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대학 캠퍼스의 분위기는 약 9 대 1의 비율로 맥거번이 우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학교를 나서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맥거번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여겼고, 대선 결과는 닉슨이 61%를 얻어 37%의 맥거번을 크게 앞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68혁명 시위대의 주장이 여전히 소수에 머무른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선거 직후, 미국 정치권의 관심사는 68혁명과 베트남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옮겨갔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혁명은 점차적으로 자연스럽게 소멸하게 된다.

4. 특징

4.1. 대학생이 주축이 된 운동

68운동의 특징은 바로 운동의 주축이 대학생이라는 점이다. 과거 대부분의 혁명(운동)은 부르주아지 혹은 노동자와 같이 특정 (경제) 계층이 중심이었다. 반면 68혁명은 초창기에는 대학생을 주축으로 하여 점차 다른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의 5월 혁명이 분수령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구좌파의 대표 계층인 노동자가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후 구좌파+신좌파 연합은 이탈리아로 이어진다.

이것은 시대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유럽과 미국은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전쟁 동안 이를 악물고 소위 '하면 된다'는 악바리 근성으로 살아온 기성세대와는 달리 풍족한 소비 생활과 문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당시 젊은이, 특히 대학생들은 먹고 사는 문제뿐 아니라 사회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140].

이 대학생들은 전체적으로 좌파이지만 스스로를 '신좌파'로 여기며 이전의 좌익/공산 계열을 '구좌파'로 구획짓고 비판 대상으로 삼았다.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권력을 혐오하기에[141] 대학생들은 저항의 움직임으로 곳곳에 자유대학을 세우면서 모두가 선생이고 학생이고자 하였다.

4.2.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

당시든 현재든 기독교가 정신적 문화의 중심이었던 서구 사회에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 68운동은 ‘금지함을 금지하라(Il est interdit d'interdire)’[142], ‘구속 없는 삶을 즐겨라’, ‘혁명을 생각할 때 섹스가 떠오른다’ 등 당시 슬로건에서 보이듯 기존 정치체제와 도덕 관습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이었다. 때문에 종교적이고 경건한 삶을 혐오하였으며,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래서 종교 인구가 급속도로 감소하였으며[143] 오늘날 유럽인들의 교회는 나이 든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이 시각은 21세기에도 이어져 실제로 유럽 성당들에 들어가 보면 신자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정 반대로 동양 종교, 그중에서도 힌두교, 티베트 불교,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고평가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보다 훨씬 전에도 불교에 관심을 갖는 서구인들은 있었지만 68운동 시기에 데시마루 다이센(弟子丸泰仙, 1914~1982)이란 일본 승려가 프랑스에 입국한 것을 계기로 유럽에 본격적으로 불교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5. 결과 및 영향

간단히 말하면 혁명은 단기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시위대의 요구가 많은 부분 관철되었다.

68혁명은 베트남 전쟁 틱꽝득 소신공양으로 시작해 프라하의 봄, 프랑스 5월 혁명으로 정점을 맞았지만 미국에서 진보파의 지도자이던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 프랑스 총선에서 드골파의 초압승,[144] 이탈리아 총선에서 기독교민주당 주도의 연립정권 승리, 소련군의 프라하 무력점령, 그해 말에 있었던 리처드 닉슨의 당선, 그해 크리스마스에 미국의 파워를 상징하는 사건인 아폴로 8호의 달 선회 비행과 함께 끝났다.[145] 조금 심하게 말하면 혁명은 끝나고 68년은 전세계 보수세력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미국은 68년 이후에도 학생운동 연합체 SDS(민주사회 학생연합)와 그 후신 웨더맨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고 69년에 정점을 찍었지만, 70년 이후 운동권 세력의 과격화로 급격히 쇠퇴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에 성공한 나라들이 많아졌고,[146] 1990년대에는 68혁명 세대가 주류 정계에 진출 및 집권하면서[147] 68운동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는 20세기 후반 문화, 사회, 정치적 지형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예컨대 성해방 운동, 남녀평등 운동, 구좌파와 신좌파의 단절, 대학교 개혁 운동, 서구식 세속주의의 정착, 아방가르드와 사이키델릭 예술 사조, 환경주의의 정치화, 후기 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등장, 래디컬 페미니즘과 상호교차성 페미니즘 이론의 등장, 뉴딜연합의 붕괴(미국) 등이 68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5.1. 나라별 영향

5.1.1. 프랑스에 미친 영향

이 혁명으로 결과적으로 샤를 드골 정권이 붕괴되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68년 의회를 해산하고 6월에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기성 세대들의 불안감으로 보수파가 압승하였지만, 이후에 샤를 드골이 자기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국민투표를 시행해먹었다가 투표에서 패배해 물러난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이것을 괜한 짓 해서 물러났다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단 대통령에 대한 신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안건의 국민투표에 자신의 신임을 결부시켜 정국을 돌파하는 수법 자체가 드골이 임기 내내 자주 써먹은 것이었고, 이 때문에 권위주의적 포퓰리즘 정권이라거나 신대통령제 정권이라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받아 왔었다.[148] 그리고 69년 4월의 '지방행정과 상원의회 개편을 위한 국민투표 시행 당시 드골은 프랑스 국민들의 신임 확인에 정말 목마른 상황이었다.[149] 68년 6월 총선에서 예상을 완전히 뒤집은 압승을 거두며 일단 급한 상황은 수습하는 데 성공했지만 68년 5월 위기(68운동) 당시 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몰렸던 상황은[150] 드골의 리더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드골로서는 위기의 완전한 수습을 위해 자신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신임을 재확인하여 영향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행된 국민투표에서 드골의 안건이 부결되었다는 것은 이전까지 드골이 국민투표를 자신에 대한 신임의 재확인 수단으로 애용해왔던 것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68년 총선에서 지나치게 급진과격화되는 대중운동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드골파에게 표가 쏠린 것과는 별개로 프랑스의 지도자로써 드골을 더이상 신임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프랑스 국민들의 선택이었던 것. 그리고 드골 역시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무리하게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은퇴를 결정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그러나 68운동 이후에도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 선거에서 51.7%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정권 교체를 이룰 때까지 향후 10년 넘게 보수 정당이 계속 집권했고, 심지어 오일 쇼크로 경제가 어려워졌을 때조차도 좌파 정당은 동거 정부를 구성하지 못했다. 다만 지방의회와 기초단체장은 좌파가 장악하긴 했다.[151] 하지만 정치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어도 그랑제꼴을 제외한 대학 평준화가 이루어지는 등 광범위한 개혁이 진행되었다.[152]

방송 등 미디어 업계도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공영방송이던 ORTF는 친정부 편향적인 보도로 비판을 받았고 사내에서도 파업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에 사측에서는 동년 10월에 상업광고를 개시하고 보도 부문의 편향성을 완화시키는 등 유화책을 동원했지만 잡음은 계속되었고, 결국 1975년 ORTF는 공중분해되는 결말을 맞았다.[153] 반대로 현재 프랑스 유력 일간지 중 하나인 '리베라시옹'이[154] 창간되고 샤를리 엡도의 전신인 ' 아라키리'(Hara-Kiri)가 만들어지는 데도 혁명의 영향이 지대했다.

프랑스에서는 68운동에 대해 기성 세대의 무조건적인 부정과 지독할 정도의 혼란만 존재했다는 의견과 진정으로 민주주의 자유를 추구할 수 있었던 새로운 혁명이었다는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5.1.2. 독일에 미친 영향

현대 독일에 대한 시선 중 '과거 청산을 철저히 이루어낸 나라'라는 평가는 68운동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인 부분에서도 철저하게 나치 군국주의 잔재를 청산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68혁명 이전에 1950년대에서 60년대까지 서독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소설 der Vorleser(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미하일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서독은 과거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과거에 나치에 협력했던 인물들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아 있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실제 68운동 이전의 서독은 제대로 된 과거 청산을 하지 못했다. 과거 나치당원이었던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어가 총리일 정도였다.

그리고 1968년 11월 7일, 마침내 문제의 그 사건이 터졌다. 베를린에서 기민당의 전당 대회가 한창 열리고 있던 와중에 당시 30세였던 베아테 클라르스펠트(Beate Klarsfeld)가 의장석에 앉아 있던 키징어 총리에게 몰래 다가가서 나치라고 소리치면서 뺨을 후려쳐 버린 것이다.[155] 키징어에게는 약간의 찰과상과 염증만 있었을 뿐 큰 부상은 없었고, 곧 그는 클라르스펠트에 대한 모든 사법적 조치를 취하했지만 그녀는 독일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총리를 폭행한 사건이 아니라 신세대들이 나치에 부역한 기성세대들에게 지니고 있는 강한 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68혁명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임을 보여준 전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68혁명 이후 키징어의 정치 인생도 사실상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독일의 과거 청산의 가장 상징적이며 시발점이 된 Kniefall von Warschau( 바르샤바에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고 사죄한 사건) 또한 전후 25년이 지난 1970년에나 이루어졌다. 68운동 이듬해인 1969년 총선에서 독일 사회민주당 기민련과의 연정을 끝낸 뒤 총선이 치러졌고 사민당이 단독 과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원내1당이 되면서 이루어낸 성과이다.[156]

물론 이는 서독에 한정된 이야기로, 정작 공산 국가였던 동독에는 68운동의 영향력이 거의 파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서독에서도 68운동이 완전한 혁명을 이뤄내지 못했다면서 과격 학생운동 세력이 바더 마인호프 그룹을 결성해 연방검찰총장, 경제인연합회장 등 요인 암살과 테러를 저지른 흑역사를 촉발하였다.

그러나 재통일 독일 전국에서 치러진 1998년 총선에서 언론/ 학교 등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해 각자의 에서 나름대로의 성취를 이룬 68운동 참여자들을 중심으로 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슈카 피셔세계 최초 연정 출범은 이 혁명의 주요 사상가 '루디 두취케'가 생전에 마르고 닳도록 강조했던 '제도를 통한 행진'( 사민/ 녹색 등 제도권 정치 참여 강조)의 결과물로서 68혁명의 최종적 승리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5.1.3. 네덜란드에 미친 영향

원조인 프랑스보다 68혁명의 영향을 훨씬 크게 받았다. 후대에 대마초 성매매를 공개적으로 허용하는 등 한국인 기준에서 방종과 혼란으로 보일 정도의 자유분방한 사회 분위기는 바로 이 사건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사실 네덜란드도 68혁명의 여파로 정권이 직접적으로 바뀌지는 않았고, 1970년대에 노동당이 선거에서 약진이 이어졌지만 다당제 특성상 보수와 중도파들이 합세한 정권이 1972년까지 유지되었는데 정권이 교체된 것은 1972년의 일이었다.

다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 둘이 처음부터 풀리진 않았는데, 네덜란드가 성매매와 공창제를 허용한 건 2000년대부터다. 1970년대 네덜란드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이었고 지금의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사우나로 위장한 성매매 업소가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대마초 허용이 68운동의 영향을 받았는지 확실하지 않은데, 대마초의 경우는 주로 대마초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진짜 마약을 판매하는 딜러들이었고 그 딜러들에게 대마초 구매자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지정된 가게에서 판매를 허용하고 지정된 커피숍과 툭트인 공원 같은 곳에서 대마초 흡연을 허용한 것이다.

군인의 장발이 허용된 것도 네덜란드가 최초다. 히피 패션인지 군인인지 모를 정도

5.1.4. 캐나다에 미친 영향

15대 총리인 피에르 트뤼도[157]가 이들의 지지를 받아 6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고 이후 그가 동성애 합법화와 낙태 허용, 다문화국가 선언을 하는 등 캐나다가 굉장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국가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다만 자유당은 68운동 이전에 이미 집권하던 상황으로, 좀 더 보수적인 레스터 피어슨 총리에서 좀 더 좌파적인 피에르 트뤼도 총리로 바뀌고 총선에서 이기게 한 정도의 제한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5.1.5. 오스트리아에 미친 영향

네덜란드,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68혁명이 성공한 나라 중 하나로 혁명의 영향으로 요제프 클라우스 총리가 실각하고 전후 최초로 좌파 성향의 총리인 브루노 크라이스키가 내각을 꾸렸다. 크라이스키는 무려 13년 동안 총리직을 맡으며 좌파의 초장기집권을 이끌었다.

그의 집권기 동안 여성 평등법과 임산부 출산 수당금 지급법, 소수민족 보호 등의 법률이 통과되었으며 동시에 의료보험이 확대되는 등의 사회복지제도 역시 확충되었다. 이를 통해 가톨릭 중심의 오스트리아 사회는 보다 현대적으로 변할 수 있었다.

5.1.6. 공산권에 미친 영향

한편,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 공산권에서 반소, 반독재 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1968년 이전에도 체코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졌으나[158] 곧 진압되었다.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헝가리에서 일어난 운동을 처음엔 용인하려 했고, 동 시기 폴란드에서 고무우카의 집권을 용인한 걸 보면 아예 헝가리에 군대를 보낼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159] 그러나 헝가리에서 WP(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구호가 나오자 바로 탄압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68운동의 영향으로 체코에서는 프라하의 봄을 비롯하여 친소 공산정권에 반기를 드는 사회운동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회운동은 동구권의 보수파인 소련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신좌파'의 또 다른 갈래로 보기도 한다.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행보에 대해 못마땅해하면서도 군사개입은 의외로 꺼렸지만, 자유화 조치가 시행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군사개입을 전면적으로 결정하면서 알렉산데르 둡체크 정권을 완전히 뒤엎고 체코슬로바키아를 보수화시켰다. 이렇게 둡체크의 '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소련의 탱크에 처절하게 짓밟혔고 이후 둡체크 후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서기장이 된 구스타브 후삭이 현상 유지(status quo)를 주장한 정상화(Normalization)가 1987년까지 지속됐다.

폴란드에서는 이러한 반소, 반독재 운동이 프라하의 봄처럼 국가적 개혁 분위기를 탄 것은 아니었고 일반적인 학생 운동의 규모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학생 시위대의 요구안을 일부 받아들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68운동은 80년대 초반 폴란드 레흐 바웬사의 자유 노조운동이나 헝가리의 온건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개혁, 그리고 소련 말기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의 벨벳 혁명의 시점이 됐다는 평이 있다.

그 밖에 멕시코,[160] 아르헨티나, 브라질,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키스탄, 심지어는 강철의 공산주의 제국 소련에서도 1월에 시위가 있었다고 하니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5.1.7. 일본에 미친 영향

일본 역시 프랑스의 5월 혁명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특히 전공투가 그 영향을 많이 받아 60년대 말 일본의 과격한 대학 운동을 주도했으며 일부는 적군파 등 테러리스트로 전향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과격하고 폭력적이었던 나머지 이는 오히려 향후 일본 정치의 보수화에 기여하기도 했다.[161]

다만 68운동이 일어나는 동안 일본공산당의 지지율이 높아지는 현상은 있었지만 당장 일본의 정치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고, 야당의 다당화 현상이 두드러지기만 했다. 비록 1960년대 후반부터 도쿄도지사, 오사카 부지사, 교토부지사, 아아치 현지사를 비롯한 상당수 지자체장을 혁신계가 차지하고, 1971년 참의원 선거부터 1980년 중 참의원 동시 선거 직전까지 약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자민당의 압도적인 우세가 희석되고 여야간 지지율 격차가 크게 줄어들어 여당과 야당 간 의석균형을 이루는 현상이 일어났지만(백중국회)이 일어났지만, 야당의 다당화 현상은 여전했기 때문에 이것이 정권교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5.1.8. 한국에 미친 영향

한국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시각이 주류이다. 애초에 68운동이 발발한 원인이 베트남 전쟁인데, 당시 한국은 베트남 전쟁 파병 규모만 32만 명에 달하며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보낸 상태였다. 따라서 한국은 베트남 전쟁 당시 사실상 대리전쟁 상태에 있었다. 1968년 이후 1.21 사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이 연이어 일어나 제2의 6.25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무장간첩 침투와 휴전선 교전이 잦았기 때문에 68혁명의 문화적인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지 못했다.[162]

따라서 이 시기 매카시즘에 가까운 반공 분위기가 강화되면서 68혁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즉 서방에서 68혁명의 바람이 불고 있을 때 한국에서는 매카시즘적인 반공주의적 분위기가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로 더 강화되면서 그러한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쉽게 말해 서방사회에서 68혁명이 일어날 때 한국은 "박살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극단적 반공주의적 분위기는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68운동은 나라가 그럭저럭 먹고 사는 궤도에 올랐을 때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촉발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당시 한국은 그럴 정치적·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다만 한국 언론에서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히피(Hippie) 문화에 대해 보도한 적은 제법 많다. 즉 한국 언론들도 감시와 제약 속에서 최소한 서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았던 것이다. 물론 정부는 당연하고 사회 분위기적으로도 히피 문화가 퇴폐적이고 반체제적인 유행으로 인식했기에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긴 했다. 그리하여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비롯한 히피 문화가 젊은층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려하자, 정권에서 적지로 전통성과 비효율성 운운하면서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는것이 1970년대에 일상적이었다.

68운동이 한국에 영향을 끼친 것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려 했던 1990년대 중반에 학생 운동 내 PD의 후신 분파들이 그 이론을 수입하고 슬로건과 이미지를 차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다만 68운동 자체와는 별도로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학생운동 및 이를 주도한 86세대와 68운동의 주체인 서구권의 68세대를 비교, 분석하는 사례들은 나오고 있으며[163], 6월 항쟁 이후 한국 언론에서도 68운동에 대한 재조명의 기사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68운동을 다루는 서적이나 TV 프로그램의 제작도 증가했다.

5.2. 사상적 영향

5.2.1. 지식인 사회에 미친 영향

68혁명은 서구 지식인 사회, 특히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러프하게 설명하자면, 68혁명 이전의 서구철학은 칸트 헤겔 중심의 합리주의 철학이 주류였으나, 68혁명을 기점으로 프로이트 니체의 영향을 받은 비합리주의 철학이 유행하게 된다. 비록 68혁명 이전에도 많은 학자들이 비합리주의 전통을 잇고 있었다곤 하나[164], 68혁명을 계기로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외친 비합리주의 철학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68혁명은 현대철학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으로 꼽힌다. 특히, 프랑스 철학에 미친 영향은 이루어 말할 수 없는 수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가 모두 68혁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영향을 미친 사람이고[165],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알랭 바디우 등 68혁명과 관계 있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이 많다. 68혁명 세대의 철학자들은 알튀세르,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를 개조하여 기존 철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비합리주의 철학을 전개했는데 이를 후기구조주의 혹은 탈근대주의라고 부른다.

이는 서양중심의 합리 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인간 중심주의, 서양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이 68혁명의 집중 타겟 대상이었는데, 탈근대주의 철학은 이를 정리하여 체계화하였고, 1980년대 이후 서구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사유 체계 성립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 인물을 언급하자면 역사학계에서는 가야트리 스피박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이매뉴얼 월러스틴, 사회학에서는 지그문트 바우만, 피에르 부르디외, 정치학에서는 자크 랑시에르, 이슈트반 메사로스, 에티엔 발리바르, 여성학에서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주디스 버틀러 등 어마어마한 라인업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보수주의로 전향한 철학자가 생기기도 했다. 로저 스크러턴이 대표적인 예.

또한 68혁명은 새로운 철학 사조의 등장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더러, 기존 철학의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가령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68혁명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68혁명의 영향력을 흡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카를 오토 아펠, 위르겐 하버마스 등 "2세대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들은 기존의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들이 정치사회 변혁이라는 68혁명의 의제를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의사소통 이론을 내세워, 자신들의 철학을 보강했다. 기존 동구권 철학 역시 큰 영향을 받았다. 게오르크 루카치의 후계 제자들인 부다페스트 학파( 아그네스 헬러, 죄르지 마르쿠스 등으로 대표됨)는 "인간적 마르크스주의"를 내세웠고 그러한 자신들의 방향점중 하나를 68혁명에서 찾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정치철학에서는 아나키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현대 아나코 코뮤니즘 철학의 기수인 자율주의 사상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68혁명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유럽 최대의 공산주의 정당이 건재했고 노동조합 역시 규모가 상당했음에도, 시위에 참여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공산당이나 조합과 상관 없는 자발적인 시민조직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68혁명에 참여했던 들뢰즈와 네그리 등의 철학자들은 이에 아이디어를 얻어, 공산주의 혁명은 어떠한 조직이나 전위당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인민들의 자발적인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동맹, 즉 다중(multitude)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현대 아나키즘 사상의 기초를 마련했다.

5.2.2. 페미니즘에 미친 영향

68혁명은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페미니즘의 역사 자체가 68혁명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라고 평가할 수 있을만큼,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은 68혁명 이후 큰 변동을 겪었다.

68혁명 이전의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법적인 투쟁 혹은 경제적인 투쟁을 중시하며, 법적/경제적 권리가 달성될 시 여성의 권리 역시 쟁취될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1950년대 이후 시몬 드 보부아르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여성학자들은 그러한 방식만으로는 여성 해방이 쟁취될 수 없으며 보다 개인적이고 생물학적, 문화적 요인에서 여성 차별이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흐름은 1960년대까지 이어져오다가, 1968년 혁명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를 "페미니즘의 두번째 물결"이라고 하기도 한다.

특히, 래디컬 페미니즘에 미친 영향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애초에 래디컬 페미니즘이라는 이론 자체가 68혁명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형성되었으며, 래디컬 페미니즘 3대 고전인 < 성의 변증법>, < 여성, 거세당하다>, < 성 정치학>이 모두 1968년 혁명 이후 3년도 안되는 기간 내에 출판되어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초기 래디컬 페미니즘은 성 해방주의, 가부장제 반대, 낙태 허용, 동성애 허용, 삽입 중심 섹스 반대[166], 남성 중심의 문화 변혁 등 68혁명 도중에 나온 의제들을 그대로 흡수하였다.

다만 우리가 아는 현재의 래디컬 페미니즘과 이때의 래디컬 페미니즘은 어느정도 다르다는 것을 주의해야한다. 1970년대 여성주의 성전쟁이라는 큰 사건을 통해 래디컬 페미니즘이 성적 해방을 중시한 성 긍정 페미니즘과 남성중심주의 타파를 중시한 안티 포르노 페미니즘으로 분열되었고, 이를 통해 래디컬 페미니즘이 초기의 담론에서 벗어나 보다 복합적이고 정교한 논리로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캐서린 맥키넌, 안드레아 드워킨으로 대표되는 "안티 포르노 페미니즘"[167]은 포르노 금지를 위해 68혁명 최대의 적수였던 극우 기독교 단체와 적극적으로 동맹을 맺는 등(...) 여러모로 래디컬 페미니즘에 큰 변혁을 불러왔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래디컬 페미니즘의 이런 변화를 비판하며 등장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도 68혁명의 큰 영향을 받았고[168], 래디컬 페미니즘 진영 역시 나름대로의 논의 전개를 통해 68혁명 정신을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왔기에, 여전히 페미니즘 계열에서 68혁명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자유주의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도 68혁명 이후 크게 변화했다. 배티 프리단의 사상적인 변동, 그리고 래디컬 페미니즘의 논의를 흡수해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발전시킨 앨리슨 재거, 줄리엣 미첼을 그 대표적인 예시로 들 수 있다.

5.3. 문화적 영향

비틀즈 존 레논은 이 때 영국, 미국의 반전 운동, 폴란드의 시위, 문화대혁명과 이 운동을 보고 느낀 점으로 폭력 혁명에 대해 유보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 Revolution'이라는 곡을 썼다. The Beatles 앨범에는 ' Revolution 1'이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었는데, 폭력 혁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가사 한 구절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후 오히려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Revolution을 개사해서 부르고 Power to the People( 인민에게 권력을)[169]과 같이 이전보다 급진적인 내용의 곡들을 발표한다.

롤링 스톤스의 보컬 믹 재거는 1968년 당시 런던의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거센 시위군중의 함성에 감명을 받아 Street Fighting Man이라는 곡을 쓰게 된다. #

영화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일본 영화, 프랑스 영화, 독일 영화, 영국 영화, 미국 영화부터 제3세계 영화의 새로운 조류 역시 이 운동을 기점으로 삼을 정도. 뉴 할리우드 참조.

세계 역대 올림픽 개막식의 선수들 입장을 보면 이 68혁명을 기점으로 딱딱하고 군사 퍼레이드 같던 개막식이 좀 더 자유분방해지는 걸 볼 수 있다.

현재의 프랑스 유권자들 중 70%는 68혁명이 프랑스의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기사 70%의 유권자라면 이들이 전부 좌파라고 보긴 어렵다. 기사 이는 좌우를 떠나 68혁명의 영향으로 전세계적으로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체제나 사회분위기가 완화하거나 해체되고 문화적으로 수직적인 면모에서 점차 수평적으로 바뀌며 소수자에 대한 인권, 동성애나 다양한 가족 형태와 성적 지향, 환경보호와 다양한 의견 존중, 개인의 자아 실현 등이 서구 사회에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잡은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는 역사적 판단을 바탕으로 얻어진 여론조사 결과라고 추측할 수 있다.

6. 평가

대체로 정치 성향에 따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린다. 친 히피 계열들은 거의 진보주의의 근본으로 여기고[170] 반대로 보수주의 계열은 좌익 폭동 정도로 취급한다.

6.1. 보수주의자들의 평가

보수파에게 ‘68년 5월’은 바로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으로,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경우 과거 68년 5월을 도덕과 권위, 국가 정체성 위기의 근원으로서 청산돼야 할 유산으로 지목한 적도 있었다. 영국 철학자 로저 스크루턴도 한 월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차를 불태우던 젊은이들은 책임감이 없었다”며 “도덕과 정신의 재앙이었다”고 평가했다. 사실 68운동 이전의 프랑스 사회 분위기는 세속주의를 추구하되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선을 넘지 못하게 하는 일명 '모랄 라이크(morale laïque)'[171]라는 형태를 따르고 있었으나 68운동 이후로는 이러한 최소한의 윤리 수준마저 무너졌다는 것이 '보수적 정교분리자'들의 견해이다.

당시의 과격했던 68운동은 68운동 자체가 태동할 수 있는 배경과 보호막을 제공했던 온건 자유주의자(liberal)를 공격해 타격을 줌으로서 커다란 공백을 만들고, 그 뒤 신좌파의 과격함에 질린 사람들이 가져온 반동과 함께 그 빈자리를 신보수주의가 메우게 되었다는 보수적 관점의 접근을 시도한 로버트 니스벳 같은 학자의 설명도 있다. # 즉, 달리 보자면 68운동은 잠재적 아군이었던 리버럴의 무덤임과 동시에 네오콘의 요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를 부추겨 80년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지적과 함께 히피와 마약 문화만을 남겼다는 냉소도 없지 않다. 실업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프랑스의 현 젊은이들에게 68세대가 보보스(BOBOSㆍ부르주아 보헤미안)라는 허울뿐인 자유주의자로 비쳐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172] 위르겐 하버마스 마루야마 마사오같은 온건 리버럴 성향 지식인들도 68운동의 과격성을 매우 비판했다.

68운동에는 명확한 비전도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일례로 미국의 도시 빈민 운동가 사울 알린스키는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과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173]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폭로(revelation)일 뿐 혁명(revolution)이 아니다"라고 68운동을 비판하였다. 한마디로 선진국 중산층 대학생의 불장난이라는 것. 거기다가 많은 수의 히피들이 80년대 이후 히피 문화가 죽어버리자 강경한 복음주의 성향 개신교 내지는 보수적 가톨릭으로 전향한 것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미국 교회들의 역사를 보면 정신적으로 방황한 채 떠도는 히피 무리들을 교화시켜 기독교 신자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국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궤적과 교훈이라는 68운동에 대해 고찰하는 칼럼을 실으면서 당시 흑인 인권운동가들이 백인 여성한테 '너 나랑 성관계 거부하면 인종차별주의자니까 받아들여라?'라고 강요한 것을 비판했다.

종교계에서도 진보적 신학자였던 베네딕토 16세를 반강제적으로 보수적인 인물로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실제로 68운동을 전후해서 유럽의 미사 참례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당시 운동을 주도하던 세대들 중에는 대놓고 " 예수에게 저주를!", "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인 책이다!"라며 대놓고 기독교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던 사람들도 많았다. 거기에 비트닉과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대안종교랍시고 힌두교 불교[174] 같은 동양 종교에 관심을 갖던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에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를 막론하고 기독교인들 중에는 안 그래도 몰락해 가던 유럽의 기독교가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6.2. 진보주의자들의 평가

진보적 입장에서 68년 5월은 정치혁명이라기보다 억압적이고 고루한 사회 관습을 뒤바꾼 문화혁명의 분수령으로 기억된다.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티에르는 호주의 일간 ‘에이지(The Age)’에서 “변화가 하루 밤새 일어나지 않았지만, 학교와 가정 직장 등에 걸쳐 프랑스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주장했다. ‘나의 68혁명’을 펴낸 가이스마르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혼 경력 등의 화려한 사생활에다 유대계 뿌리가 있는 사르코지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68혁명이 만들어 놓은 문화적 변화 덕분이었다”고 주장했다.[175]

68운동의 큰 의의 중 하나는 당시까지 입을 열 수 없었던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의 소수자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큰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68운동 당시 새로움, 평등한 연대를 부르짖으며 학생단체들이었지만 그 내부에서도 여전했던 성차별에 분노한 여성들은 자신들끼리 연대하여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했다. 대표적인 슬로건으로는 '내가 춤출 수 없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176]가 있다. 리버럴한 서양의 이미지는 이때부터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단히 줄이면 이는 거대한 학생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이 운동은 젊음의 해방구 내지는 분출구로서 그 역할을 한 시대의 조류였다. 그러나 아직도 고루한 사회관습을 바꾼 분수, 무질서와 파괴의 끔찍한 악몽이란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상기하다시피 첫째,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생생한 현대사인 데다 둘째, 이른바 문화혁명으로서 아직도 삶에 직접적인 영향과 그 흔적이 여실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연구와 판단이 매우 까다롭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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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집권 이후로는 좌파 진영의 인사로 분류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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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로 보수는 68 운동, 진보는 68 혁명으로 부른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도 학계와 저자마다 다르다. 어쨌든 이 문서에는 68 운동과 68 혁명 표기가 혼용되고 있다. [2] 마이 수아생트위트(68년 5월) [3] 레 제벤망 드 마이-쥐앵 밀 뇌프 상 수아생트위트(1968년 5월~6월의 사건) [4] 아흐트운트제히치거 베베궁(68년의 운동) [5] 프로터스트야르 다위전트 네헌혼더르트 아흐턴제스터흐 (1968년의 시위) [6] 파레이서 스투덴턴레볼터(파리 학생 운동) [7] 모비멘토 델 세산토토(68년의 운동) [8] 다이가쿠 훈소(대학 분쟁) [9] 다이가쿠 토소(대학 투쟁) [10] 왼쪽 위부터 샹젤리제 거리에서 연설하고 있는 다니엘 콘벤디트, 시카고 민주당 전당 대회를 앞두고 링컨 공원을 점거한 학생 시위대, 프라하의 봄 때 소련군 탱크를 탈취한 체코 시위대, 파리 시내에서 행진하고 있는 노동조합원, 경찰과 대치하는 일본 전공투단원, 멕시코 틀라텔롤코 광장에 집결한 학생 운동가들의 모습이다. [11] 학자별로 제시하는 시기가 다르다. 미국에 초점을 두자면 마리오 새비오의 버클리 자유 운동이 시작된 1964년을 기점으로,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소강 시점에 이른 1971년 5월 메이데이 시위 ~ 1972년 대선을 종식 시점으로 잡는다. 또 샌프란시스코의 " 사랑의 여름"을 68 혁명의 일환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다. 종합적으로 시기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지부 건물이 습격당한 1968년 3월에서 시작되어, 미국 대선과 프랑스 총선에서 보수파가 승리한 1968년 11월 종식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12] Daniel Cohn-Bendit. 낭테르 대학교 철학과 재학생. 낭테르 3.22 운동 회장, 이후 프랑스 내 학생 운동을 이끔. [13] Bernard Kouchner. 소르본 대학교 의과대 재학생. 프랑스 의과 대학 동맹 휴학 주도. [14] Benny Lévy(가명 피에르 빅토르 Pierre Victor). 에콜 노르말쉬페리외르 철학과 졸업(지도교수 루이 알튀세르), 장폴 사르트르의 조교로 활동. 청년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동맹(Union des jeunesses communistes marxistes-léninistes, 이후 좌파 노동자 Gauche prolétarienne) 당수. [15] Jacques Sauvageot. 디종 대학교 법학과 졸업. 프랑스 전국 학생 연합(UNEF) 회장. [16] Mario Savio.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철학과 제적. 버클리 자유 운동 회장. [17] Tom Hayden. 미시간 대학교 졸업.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회의(SDS) 회장으로 미국 내 학생 운동을 이끔. [18] Rennie Davis.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 회의(SDS) 공동 회장. [19] John Lewis. 비폭력 조정을 위한 학생회(SNCC) 지도자. [20] Rudi Dutschke. 베를린 자유 대학교 사회학과 재학생. 독일 사회주의 대학생 연합(SDS) 회장으로 독일 내 학생 운동을 이끔. 1968년 우익 반대자에 의해 피습당함, 11년 후 피습 후유증으로 요절. [21] Beno Ohnesorg. 베를린 자유 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재학생. 1967년 경찰 발포로 사망. [22] Joschka Fischer.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나 독일 내 청년 반베트남 운동을 주도함. [23] Mario Capanna. 밀라노 가톨릭 대학교 철학과 4학년 재학생. [24] Franco Piperno. 피사 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 창립자. [25] Paolo Rossi. 로마 사피엔차 대학교 재학생 및 학생회장 후보자. 1966년 우익 파시스트 학생의 린치로 인해 사망. [26] Peter Handke. 그라츠 대학교 법학과 재학생, 47 그룹 창립자. [27] 山本義隆. 도쿄 대학 전학공투회의 회장. [28] 秋田明大. 니혼 대학 전학공투회의 회장. [29] 猪瀨直樹. 신슈 대학 전학공투회의 회장. [30] 菅直人. 도쿄 공업 대학 재학생. 논섹트 래디컬 계열. [31] 重信房子. 메이지 대학 야간부 사학지리학과 재학생.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 중앙 위원. [32] Rafael Aguilar Talamantes.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 재학생. [33] Irena Lasota. 바르샤바 국립 대학교 철학과 재학생. [34] Jean-Paul Sartre. 특정 기관에 소속되지 않음. [35] Louis Althusser.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철학과 및 심리학과 교수, 교수 후보생 지도자. 그 자신은 68 혁명에 큰 지지를 보내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와 추종자들이 프랑스 68 혁명의 주도자로 활약했음. [36] Henri Lefebvre. 낭테르 대학교 철학과 교수. [37] Jacques Lacan. 에콜 프래티크 드 오트 에튀드 심리학 교수. 후일 68 운동의 과격 운동에 선을 그었으나 바리케이드의 밤 때 콘벤디트 지지 성명을 발표하는 등 실질적으로는 68 혁명을 참여했음. [38] Michel Foucault. 튀니스 대학교 철학과 교수. 68 혁명에 회의적 의견을 표했으나 뱅센 자유 대학 창립 등 실질적으로 68 혁명에 참여했음. [39] Gilles Deleuze. 리옹 대학교 철학과 교수. 68 혁명에 회의적 의견을 표했으나 뱅센 자유 대학 창립 등 실질적으로 68 혁명에 참여했음. [40] Jacques Derrida.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심리학 조교수. 68 혁명에 회의적 의견을 표했으나 뱅센 자유 대학 창립 등 실질적으로 68 혁명에 참여했음. [41] Herbert Marcuse. 정신 분석학자, 철학자.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 철학과 교수. 1968년 혁명에 적극적 지지 의사 타진. [42] Timothy Leary. 심리학자, 사회 운동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캠퍼스 심리학과 교수. LSD 등 환각제, 마약 복용 옹호 운동 주도. [43] Benjamin Spock. 정신 분석학자.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44] Susan Sontag. 작가. [45] Noam Chomsky. 언어학자, 철학자. 하버드 대학교 언어학과 교수. [46] Howard Zinn. 역사학자. 보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47] Günter Grass. 작가. [48] Heinrich Böll. 작가. [49] Hans Magnus Enzensberger. 작가. [50] Antonio Negri. 파도바 대학교 철학과 교수. [51] Régis Debray. 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출신 남미 혁명가. [52] Benoit Frachon. 노동 총연맹(CGT) 총재. [53] George Ségy. 노동 총연맹(CGT) 사무국장. [54] Alain Geismar. 전국 고등 교육 교원 조합(SNEsup) 회장. [55] Martin Luther King Jr. 흑인 민권 운동가, 남부 기독교 목회자 협의회(SCLC) 지도자. 1968년 4월 암살. [56] Coretta Scott King. 마틴 루터 킹의 미망인, 사회 운동가, 흑인 민권 운동가, 동성애 및 여성 권리 운동가. [57] Ralph Abernathy. 흑인 민권 운동가, 남부 기독교 목회자 협의회(SCLC) 회장. [58] Jesse Jackson. 흑인 민권 운동가, 일리노이 자유 운동 지도자. [59] Bobby Searle. 흑표당 당수. [60] Fred Hampton. 흑표당 부당수, 무지개 동맹(Rainbow Coalition) 회장. 1969년 12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총에 맞아 사망. [61] Walter Ruther. 전국 자동차 노동 조합(UAW) 회장. [62] Cesar Chavez. 전국 농부 조합(UFW) 회장. 히스패닉 권리 운동가. [63] Ralph Nader. 소비자 권리 보호 운동가. [64] Abbie Hoffman. 청년국제당(YIP / 이피) 지도자. [65] Jerry Rubin. 청년국제당(YIP / 이피) 지도자. [66] John Kerry.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참전 용사(VVAF) 회장. [67] William Kunstler.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 대회 사건으로 기소된 시카고 세븐(톰 헤이든 외 6인) 재판의 수석 변호사를 맡음. [68] Angela Davis. 1972년 대선 미국 공산당 부통령 후보,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철학자. [69] Jane Fonda. 배우, 좌익 사회 운동가. 1971년 북베트남 방문으로 "하노이 제인"이라는 멸칭으로 유명. [70] Beate Klarsfeld. 1966년 키징어 총리 구타 사건으로 유명. [71] Giangiacomo Feltrinelli. 파르티잔 행동 그룹(Gruppi di Azione Partigiana) 회장, 작가. [72] Tariq Ali. 옥스퍼드 대학교 총학생회장, 신좌파 리뷰(New Left Review) 기고자. [73] Robin Blackburn. 신좌파 리뷰(New Left Review) 편집장. [74] John Lennon. 비틀즈의 전 멤버, 음악가, 좌익 사회 운동가. [75] François Mitterrand. 1965년 대통령 선거 사회당 후보, 시위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으나 드골 정부를 비판하고 의회 해산을 요구함. [76] Pierre Mendès France. 전 프랑스 총리, 시위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으나 드골 정부를 비판하고 의회 해산을 요구함. [77] George McGovern. 사우스다코타주 상원 의원, 1972년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 히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음. [78] Eugene McCarthy. 미네소타주 상원 의원, 1968년 민주당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자. 대학생 시위자들에 의해 주로 지지받음. [79] Robert F. Kennedy. 뉴욕주 상원 의원, 1968년 민주당 대통령 선거 예비 후보자. 흑인 시위자들에 의해 주로 지지받음. 1968년 6월 시르한 시르한에 의해 피살당해 사망. [80] John Lindsay. 뉴욕 시장. [81] Willy Brandt. 독일 사회 민주당 당수. 학생 시위대에게 지지받음. [82] Joop den Uyl. 네덜란드 노동당 당수. 네덜란드 신좌파 운동에 의해 지지받음. [83] Alexander Dubček.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 프라하의 봄을 주도함. [84] Salvador Allende. OLAS 창립 발기인. [85] Charles de Gaulle. 프랑스 대통령. [86] George Pompidou. 드골 대통령직 사임 이후 프랑스 대통령으로 취임. [87] Jacques Chirac. 파리 시장. [88] Christian Fouchet. 드골 정권 교육부 장관(1961~1967), 이후 내무부 장관(1967~1968). [89] Alain Peyrefitte. 드골 정권 교육부 장관(1967~1968). [90] André Barjonet. 경제 이론가, 노동 총연맹(CGT) 회원. CGT의 68 혁명 지지에 반발해 CGT 내 노동조합 간부의 탈퇴 운동을 주도함. [91] Richard Nixon. 미국 대통령. [92] Spiro Agnew. 닉슨 정권 시기 미국 부통령. [93] Lyndon B. Johnson. 미국 대통령으로 베트남 전쟁의 실질적 책임자. [94] Hubert H. Humphrey. 존슨 정권 시기 미국 부통령, 1968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95] Richard Daley. 시카고 시장,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 사건 때 강경 대응을 주도. [96] George C. Wallace. 당시 남부 민주당원의 대표 주자로, 앨라배마 주지사로 인종 차별 철폐 반대, 베트남 전쟁 확전을 주장한 1968년 대선 제3지대 미국 독립당 후보자. [97] Ronald Reagan.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1969년 인민 공원 강경 진압 사건 주도. [98] George Meany. 전미 최대 노조 AFL-CIO 회장. [99] Kurt Georg Kissinger. 독일 총리, 나치당 부역 전적으로 논란. [100] Heinrich Lübke. 독일 연방 대통령, 나치당 학살 관여 의혹으로 심각한 비판을 받고 정계를 은퇴함. [101] 佐藤栄作. 일본 내각 총리대신. [102] Gustavo Díaz Ordaz. 멕시코 대통령. [103] Леони́д Бре́жнев. 소련 공산당 중앙 위원회 서기장. [104] Władysław Gomułka. 폴란드 통일 노동당 제1서기. [105] Maurice Papon. 파리 경찰국장으로 강경 무력 대응 지지. [106] John Edgar Hoover. 연방 조사국(FBI) 국장. 68 혁명 활동가에 대한 불법 도감청 및 사보타주 주도. 1972년 노환으로 사망. [107] Richard Helms. 중앙 정보국(CIA) 국장. 1972년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 지시에 불복하여 직위 사임. [108] John N. Mitchell. 닉슨 정권 법무 장관. 이후 워터게이트 사건 은폐 혐의로 구속, 징역 4년형 선고. [109] Richard Kleindienst. 닉슨 정권 법무부 차관, 존 미첼 장관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자 이후 법무 장관으로 취임해 68 혁명 진압 주도. [110] Pierre Grappin. 소르본 대학교 총장. [111] William F. Buckely. 우익 주간지 내셔널 리뷰(The National Review) 사주 및 주필. [112] Ayn Rand. 작가이자 소설가, 자유 지상주의 운동가. [113] Hanna Arendt. 철학자. [114] Theodor W. Adorno. 프랑크푸르트 사회 조사 연구소 회원. 초기 68 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비판으로 돌아섬, 1969년 혁명 운동가에 의한 가슴 노출 시위의 충격으로 뇌졸중으로 사망. [115] Jürgen Habermas. 프랑크푸르트 사회 조사 연구소 회원. 초기 68 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비판으로 돌아섬. [116] Axel Springer. 우익 일간지 빌트(Bild), 데어 벨트(Der Welt) 사주. [117] 뉴욕시 당국은 68 혁명을 지지했으나, 뉴욕 경찰국은 강경 진압을 지지해 68 혁명의 지지자인 존 린지 시장과 갈등을 빚었고 이는 연이은 경찰 파업을 일으켰다. [118] 미국( 리처드 닉슨), 프랑스( 조르주 퐁피두), 체코(프라하의 봄 진압), 멕시코( 제도혁명당 우위 유지), 브라질( 군사정권 유지), 이탈리아(기민당 우위 유지), 일본(자민당 우위 유지) 등. [119] 캐나다( 피에르 트뤼도), 네덜란드(요프 덴 우일), 오스트리아( 브루노 크라이스키), 독일( 빌리 브란트) 등. [120] 파키스탄( 아유브 칸의 사임) [121] 독일의 붉은 여단 등. [122] 빌 클린턴(미국), 요슈카 피셔(독일), 리오넬 조스팽(프랑스), 빔 코크(네덜란드), 장 크레티앵(캐나다), 간 나오토(일본 / 2010년대) 등. [123] 미국 SDS의 포트 휴런 선언 [124] 1971년 메이데이 반전 집회 [125] 특히 미국 현지에서는 자국의 대학생 운동을 가리켜 68 운동이라는 표현 대신 반베트남 운동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 [126] 정확히는 68 혁명을 공개 비난한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의 무분별한 성생활을 비꼰 것이다. [127] Marx, Mao, Marcuse [128] 이 대학교 캠퍼스에 걸린 사진의 인물은 국가마다 약간씩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독일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진을 거는 경우가 많았고 영국은 맨체스터에서 활동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주 걸렸으며 미국은 마오쩌둥이나 체 게바라가 걸리는 일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호치민의 사진과 베트콩 국기가 등장했다. [129] LBJ = Lyndon Baines Johnson(린든 베인스 존슨)의 약자 [130] 후일 드러난 바에 의하면 사실 이 남성은 베트콩의 비밀경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트콩의 경찰이라고 하더라도 재판을 거치지 않은 포로에 대한 즉결 처분은 제네바 조약에 대한 위반으로, 여전히 남베트남의 참담한 인권 유린 실상을 보여주는 것은 변함이 없다. [131] 1962년 주지사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을 꺾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그리고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낸 제리 브라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32] 당시 낭테르 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알튀세르와 더불어 프랑스 신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수로 꼽히는 앙리 르페브르였다. 르페브르는 낭테르에서의 투쟁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133] 그는 피습으로 일시적인 기억상실증과 실어증 등의 후유증을 겪었다. 그의 아내가 "레닌이 누구지?"라고 물었을 때 답하지 못했다. 그는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1년 후인 1979년 요절했다. [134] 당시 혁명을 주도했던 톰 헤이든이 직접 케네디의 관을 운구했다. [135] 의석 수가 아닌 정당 득표율로 따지면 우파 59% 대 좌파 41%이다. [136] 에마뉘엘 마크롱을 보수파로 치면 2022년 대선도 추가될 수 있다. 다만, 마크롱은 2017년 당선될때까지만 하더라도 중도 내지 중도진보 후보로 여겨졌다. [137] 그의 부통령 후보가 커티스 르메이였다. 여론조사에서 유권자들이 월리스에 대한 지지를 가장 꺼리는 이유가 인종주의가 아니라 르메이가 대통령직을 승계해 핵전쟁을 시작할 것에 대한 우려(...)일 정도였다. [138] 이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로스 페로, 로버트 M. 라폴레트 등과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제3지대 후보자의 기록이다. 양당제가 무척 강한 미국의 특성상 2개 이상의 주에서 승리한 제3지대 후보자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월리스가 그 중 하나에 들어간다. [139] 1977년 집권한 지미 카터는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우리들이 알고있는 것과 달리 사실은 남부 민주당 계열의 보수주의자였고 68혁명 시위를 지지했던 대부분의 청년세대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빌 클린턴은 엄밀히 따져보면 민주당의 우클릭을 통해 집권한 중도주의자에 가깝다. [140] 62년 미국 포트 휴런 선언에서는 "그럭저럭 배부르고 등따신 세상이지만 우리는 여기에 불만이 있다."고 선언하였다. [141] 미셸 푸코도 68의 영향을 받은 철학자 중 한 명이다. [142] 이는 68운동을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슬로건으로, 지금도 종종 쓰인다. [143] 다만 1980년대까지는 의외로 현상 유지를 하는 편이었다. 본격적으로 서구 기독교의 궤멸이니 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144] 485석중 394석을 우파(득표율 58.1%)가 차지했고 좌파는 단 91석(득표율 41.9%)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145] 타임지의 1968년 올해의 인물로 68년의 여러 혁명가들이 아닌 아폴로 8호의 우주비행사들이 선정된 것이 가장 상징적이다. 즉 보수파는 1968년 운동 자체를 없었던 일로 치부하고 싶었던 것. [146] 캐나다( 피에르 트뤼도), 네덜란드(요프 덴 우일), 오스트리아( 브루노 크라이스키), 독일( 빌리 브란트) 등 [147] 빌 클린턴(미국), 요슈카 피셔(독일), 리오넬 조스팽(프랑스), 빔 코크(네덜란드), 장 크레티앵(캐나다), 간 나오토(일본 / 2010년대) 등 [148] 간단히 말해 정상적으로 의회나 지자체를 설득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정책이나 안건을 받아들이게 하고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정책이나 안건을 시행할지 국민투표에 부치자는 제안을 하고 국민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국민이 자신을 신임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선언해 투표 결과와 자신의 신임을 결부시킨 것이다.

이 경우 일단 드골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전쟁 영웅 이미지를 가진 인기 많은 대통령이었기에 해당 정책이나 안건 자체에는 썩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골이 하자는 거니까 찬성을 찍겠다'라거나 더 심한 경우 '썩 마음에 드는 주장은 아니지만 이런 걸로 대통령을 무력화시키거나 물러나게 할 수는 없으니 할 수 없이 찬성을 찍는다'라는 형태로 자신이 주장한 안건을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단 국민투표를 거친 만큼 외형상으로는 민주적인 절차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개인의 인기와 영향력을 통해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무력화시키고 제한된 수준 이상의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탄압과 감시가 아닌 포퓰리즘에 기반한 독재라고 비판받았던 것이다.
[149] 총리였던 조르주 퐁피두가 68년 5월 위기의 수습을 전면에 나서 지휘하면서 드골의 입지가 약화되었던 측면도 있었다. 드골은 1968년 7월 퐁피두를 총리에서 해임하고 후임으로 모리스 쿠브 드뮈르빌을 임명하였다. [150] 격화된 대중운동으로 인하여 정부가 일부 주요 지방도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고, 시위대가 핵무기 지령실이 있는 대통령궁을 점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진지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서 드골이 서독에 주둔한 프랑스 육군 정예부대가 만약의 경우에도 자신의 명령에 따를지 확인하기 위해 국가적 비상사태의 와중에도 서독에 방문해야 할 정도였다. [151] 사실 1974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1차 선거에서 43.3%의 득표율로 여러모로 조건이 불리했음에도(퐁피두 대통령이 급사하여 선거가 갑작스레 치러졌다.) 상대 후보였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을 압도했지만 토론회에서 밀리고 보수층이 대거 결집하는 바람에 2차 선거에서 1.6%차로 석패했다. 1978년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에서도 2차 선거에서 보수층이 결집하면서 우파가 근소한 차이로 과반수를 점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152] 소르본 대학교가 파리 n 대학 형식으로 쪼개지면서 일반대(위니베르시테) 한정으로 어느 정도 서열이 완화되었다. 다만 특수대(그랑제콜)를 위시로 한 엘리트주의는 남아있는 편이다. 프랑스 대통령 및 총리의 절대 다수가 그랑제콜 출신이다. [153] 그 결과 TF1과 antenne2(현 France 2) 등으로 분리. [154] 그 유명한 장폴 사르트르가 주필을 맡았다. [155]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남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Serge Klarsfeld)와 함께 유명한 나치 전범 추적 전문가로 유명하다. 2015년 독일 연방정부로부터 나치 전범 추적 공로를 인정받아 연방 공로훈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 2012년 독일 연방 대통령 선거에서 요아힘 가우크에 맞서 좌파당 후보로 출마한 적도 있다. [156] 기민련/기사련-사민당 대연정 체제에서 사민당-자민당의 연립 정권으로 바뀌었다. [157] 현 23대 총리 쥐스탱 트뤼도의 아버지 [158] 1956년, 그러니까 스탈린이 죽은 지 3년 뒤 벌어졌다. [159] 다만 고무우카도 나중에 루이필리프처럼 기대에 못미치는 정치를 펼치고 이게 경기침체하고 겹쳐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져서 인민들에 의해 사실상 쫓겨나게 되었다. [160] 그런데 멕시코에서는 1968년 10월 2일에 틀랄텔롤코 참사가 벌어졌다. [161] 다만 서구권의 68혁명도 딱히 온건한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과격한 사회운동이나 강자에게 향하는 폭력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서구권 문화와 달리 순응적이고 안정지향적인 일본 문화의 성격과 무관하다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즉 정치 성향으로써 보수 진보 할 거 없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심리적 보수주의가 어느 정도 깔려 있었기 때문. [162] 북한 역시 베트남 전쟁에 호치민 정권을 돕기 위해 공군 조종사 등을 비공식적으로 파병했다가 한국의 파병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북한의 파병에도 한계가 있어서 한국의 파병 증원을 막기 위해 안보위협을 가하는 식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상술한 사건들이 그 사건들로, 1968년부터 이 문제 때문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규모도 미군 병력과 더불어 점차 축소되었으니 목적을 달성한 셈. [163] 86세대 중 일부는 혁명 당시 갓 태어나거나 유아기를 보냈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1969년생 이후는 68혁명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다. [164] 68혁명이 비합리주의의 전통을 갑자기 되살렸다고 하는 식의 평가는 완전히 틀린 평가이기에 주의해야한다. 68혁명의 의의는 그러한 철학적 사조를 대중과 학계에 유행시켰다는 것에 있다. [165] 포스트모던 철학의 고전인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은 저자들이 서문에서 68혁명을 철학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고 자평한 바 있다. [166] 다만 이는 초기 래디컬 페미니즘 내에서도 어느정도 입장이 갈렸다. [167] 사실 한국에서 알려진 페미니즘은 주로 이쪽인데,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무작정 검열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쪽의 정 반대라고 볼 수 있는 마광수, 장정일도 성해방주의 래디컬 페미니즘 계열로 분류된다. [168] 이들은 68혁명의 직접적 영향력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68혁명 세대의 철학, 특히 상술한 프랑스 탈근대 철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이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의 기수인 주디스 버틀러가 꾸준히 강조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탈서구-탈근대"라는 68혁명의 의제가 상호교차성 페미니즘과 굉장히 잘 들어 맞는 점이기도 하다. [169] '사람들에게 힘을'이라는 식으로 순화 번역하는 경우도 있는데, 존 레논의 성향과 가사의 전반적 내용으로 보면 위와 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욱 알맞다. [170] 예외로 히피의 대명사들 중 하나인 존 레논의 경우 Revolution 1에서 말했듯 급진적인 운동에 대하여 당시에는 반대했다. [171] 1960년대 초반까지의 프랑스 초등교육 역시 이러한 방침을 따르고 있었다. [172] 80년대 히피 문화에게 치명타를 날린 여피 문화를 본격적으로 널리 퍼뜨린 장본인도 유명한 히피 운동가 제리 루빈이었다. [173] 다만 사울 알린스키도 신좌파로 분류되긴 한다. [174] 때마침 당시에는 유럽과 미국에 티베트식과 일본식 선(禪)불교가 유입되고 있었다. [175]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진보주의 진영 내에서도 이견이 갈린다. 원래 프랑스 쪽은 68년 이전부터도 이미 정치인 섹스스캔들에는 상당히 너그러웠으며, 진보적 입장과는 정반대로 이게 과거 왕정에서 왕의 사생활은 묻지 않는다는 주의에서 이어져온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정치인 스캔들을 더 너그럽게 봐주기 시작한 가장 큰 계기는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사생아 스캔들이 더 크다. 그 경우엔 숨겨둔 딸이 들통나자 아예 자신의 사생아와 함께 국가행사나 가족행사에 같이 참석하기도 했다. 섹스 스캔들에 대해서는 상당히 너그러운 프랑스 기준으로도 상당히 충격적이었기에 수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176]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연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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