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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1979 · 1980 · 198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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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재적했던 선수를 이 항목에서 정리한다. 현역 선수단은 히로시마 도요 카프/선수단 항목 참고.2. 영구 결번 및 임시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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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도요 카프 영구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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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3 | No. 8 | No. 15 |
<rowcolor=#ffffff> 키누가사 사치오 | 야마모토 코지 | 쿠로다 히로키 |
3
키누가사 사치오 :
카네모토 토모아키 이전에 철인이라 일컬어졌던 남자. 2215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루 게릭이 가지고 있던 연속출장기록을 넘긴 기록으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도 이 부문만큼은 기누가사의 기록을 인정했다. 하지만 몇 년 뒤
칼 립켄 주니어가 갱신한다. 504홈런, 266도루, 2543안타, 통산타율 .270.
야마모토 코지와 호타준족의 콤비로 히로시마를 이끌었다.8
야마모토 코지 : 히로시마 프랜차이즈 최고의 레전드. 일명 미스터 아카헬. 536홈런, 231도루, 2339안타, 통산타율 .290의 강타자였다. 1980년대
카케후 마사유키와 함께 센트럴리그 홈런왕 경쟁을 했고, 시원한 장타력 뿐만 아니라 정상급의 외야수비능력까지 갖춘 선수였다. 현재
명구회 이사장이며, 베이징 올림픽 때 수비주루 코치였다.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는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15
쿠로다 히로키 : FA를 포기하고 히로시마에 남았으며, 메이저리그에서도 거액의 제시를 거절하고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히로시마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던 그야말로 미스터 히로시마. 물론 성적 역시 미일통산 203승을 거뒀으며, 승운이 지독하게 없었던 선수임을 감안하면 훨씬 고평가 되어도 될만한 투수였다. 2016년에 팀을 일본시리즈에 진출 시키고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구단에서는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계속 15번을 비워둔것과 같이, 은퇴가 결정 된 일본시리즈 종료 다음날 영구 결번으로 지정한다고 발표하였다.마에다 토모노리의 1번은 2018년 시즌이 끝나고 스즈키 세이야가, 노무라 켄지로의 7번은 2012년 시즌이 끝나고 3루수 유망주 도바야시 쇼타가 번호를 물려받았으며, 키타벳푸 마나부의 20번은 2002년까지 결번 처리가 되었다가
3. 출신 선수
3.1. 투수
-
하세가와 료헤이 (1950 - 1963, 감독 1966 - 1967)
카프 초기의 에이스. 1952년 "승률 3할 이하 팀 합병 정책" 에 따라 당시 하위권을 찍는 바람에 강제합병 위기에 처한 카프를 다른 팀원들과 분전해 극적으로 승률 3할로 이끈, 카프를 구한 영웅. 완전한 시민구단 체제였던 히로시마 카프 시대의 마지막 감독. -
아니야 소하치 (1964 - 1974, 1980 - 1981)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오키나와 출신 선수. -
소토코바 요시로 (1965 - 1979)
1975년 사와무라상 수상자. 통산 노히트 노런 2회, 퍼펙트 게임 1회를 기록했으며, 퍼펙트 게임까지 포함한 노히트노런 3회는 NPB 사상 최고 기록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단한 기록을 세운 투수도 통산 기록이 131승 136패로 승보다 패가 더 많다. -
가네시로 모토야스 (1971 - 1976)
후일 청보 핀토스 및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게 되는 투수 김기태(재일교포). 히로시마의 첫 우승이 결정된 경기인 1975년 10월 15일 VS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서 마무리 투수를 맡아 헹가레를 받은 언더핸드 스로 투수. -
이케가야 코지로 (1974 - 1985)
1976년 사와무라상 수상자. NPB 사상 최다 시즌 피 홈런 개수(48개, 1977년)를 보유하고 있다(...) -
키타벳푸 마나부 (1976 -1994)
정밀기계라는 별명답게 정교한 제구력을 가졌던 투수로 9이닝당 볼넷 허용률은 1.90에 불과했고, 홈플레이트 위에 빈 캔 3개를 두고 공 3개로 쓰러뜨렸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심판이었던 다나카 토시유키(田中俊幸)는 심판 판정에 자주 시비를 걸어오는 투수라 피곤했다는 증언을 했다. 통산 성적 213승 141패, 방어율 3.67. MVP 1회, 사와무라상 2회 등. 현역에서 물러난 후엔 TV 해설, 각종 쇼 프로그램에 참가했고 2019년과 2020년에는 유튜브 활동도 했지만 백혈병 투병으로 그만뒀고 2023년에 병세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
오노 유타카 (1977 - 1998)
큰 오노(大野)라 불리며 1970년대 말 ~ 1990년대 중후반을 풍미했던 좌완 에이스. 다르빗슈 유가 등장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2년 연속 시즌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1988, 1989) 투수였다. 이쪽도 선발-마무리 안 가리고 마구 굴려졌으며(148승-138세이브), 커리어의 막바지에 접어든 1997년 시즌에는 42세의 나이로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따내는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다만, 투수코치로 평은 좋지 않았다. - 야마네 카즈오 (1977 - 1986)
-
장명부 (1978 - 1982)
1979, 1980년 일본시리즈 우승 당시 주력 투수 중 한 명. -
에나츠 유타카 (1978 - 1980)
에나츠의 21구. 이거 하나로도 그의 히로시마 시절의 설명은 충분하다. -
카네다 토메히로 (1979 - 1981)
400승 투수인 재일교포 선수 카네다 마사이치의 동생. 롯데 등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뒤 커리어를 카프에서 마감했다. 아래 서술할 조카 카네이시의 입단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
카네이시 아키히토 (1979 - 1991)
400승 투수인 재일교포 선수 카네다 마사이치의 조카. 에이스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그래도 선발과 중간계투를 오가며 20여 년간 가늘고 긴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
카와구치 카즈히사 (1981 - 1994)
80년대 중후반~90년대 초반 카프의 주축 좌완 선발투수. 통산 2천 탈삼진을 달성하고 최다 탈삼진도 3번[1]이나 기록할 정도로 타자를 잘 공략하던 투수였다. 1994년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면서 카프의 FA 잔혹사의 시초가 된..인물이라기엔 FA 이적 시기엔 기량 하락이 완연했던 데다가 FA 선언도 돈 때문이 아니라 암 투병 중이던 장인의 치료와 간병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요미우리로 이적한지 얼마되지 않아 장인이 사망하면서 멘탈은 개발살났고 결국 요미우리 이적 후엔 4년간 고작 8승에 그치고 은퇴하면서 완벽히 먹튀가 되었다(...) 그래도 96년 대역전우승때 헹가레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은퇴 후엔 2011~2014년까지 요미우리 1군 투수종합코치를 역임했다. -
츠다 츠네미 (1982 - 1991)
불꽃의 스토퍼란 별명으로 유명했던 투수. 그러나 뇌종양에 걸려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아들인 타이키도 투수였자만 부상 때문에 대학 졸업을 끝으로 야구를 그만두고 평범하게 직장 다니면서 살고 있다. - 키토 마코토 (1984 - 2000)
- 나가토미 히로시 (1986 - 1994)
-
사사오카 신지 (1991 - 2007. 감독 2020 - 2022)
138승 - 106세이브를 기록한 카프의 마당쇠. 1991년 사와무라상 수상자로 선발, 중간계투, 마무리 등 보직에 상관없이 정상급의 실력을 보여줬으며, 만약 선발로만 뛰었다면 통산 200승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2019시즌 투수코치를 지내고 시즌 종료후 감독이 되었다. -
타카하시 켄 (1994 - 2008, 2010)
좌완 투수로 선발과 계투를 오가며 부실한 투수진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40세가 되는 해인 2009년에 마이너 계약을 통해 뉴욕 메츠에서 잠깐 중간계투로 뛰다가 방출되었고, 다음 해 일본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그는 1948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사첼 페이지, 1960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디오메데스 올리보 이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오랜만에 나온 40대 신인 선수였다. 당연히 이는 메츠 프랜차이즈 최고령 루키 기록이기도 한데, 이 기록의 이전 보유자는 36세의 루키였던 구대성이었다. - 요코야마 류지 (1995 - 2014)
-
야마우치 야스유키 (1995 - 2002)
1995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아이돌 그룹 핑크 레이디의 UFO라는 곡의 안무와 비슷한 동작을 끼워넣어 디셉션을 시도한 ' UFO 투구법'이라 불리는 변칙 투구법을 사용한 투수였다. 다만 신인왕 시즌 이후 부상과 기량 저하로 선발 투수로서의 기대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일찍 은퇴해버려 히로시마 암흑기 부실한 투수 뎁스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은퇴 후 오랜 기간 카프의 투수 코치로 활동했다. -
키쿠치하라 츠요시 (1996 - 2004, 2011 - 2013)
2002년 한 시즌 78경기 등판을 기록한 좌완 중간계투 투수. 이는 이나오 카즈히사와 타이를 이루는 당시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경기 등판물론 이나오는 선발과 중무리를 겸한 더욱 마구잡이 등판이었지만기록이었지만 이후 JFK(한신)의 후지카와 큐지나 쿠보타 등이 더더욱 미친 등판기록을 세우며 묻히게 된다.(...) 이 해의 대혹사로 결국 부상이 도져 2004년 오프에 오릭스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되는데, 그곳에서 또다시 71경기에 등판해 33홀드를 기록하며 홀드왕에 오르는 등 준수한 중간계투로 활약했다. -
타마키 시게오 (1996 - 2004)
일본계 브라질인으로, 사회인야구 미쓰비시 자동차 가와사키를 거쳐 드래프트로 입단했다. 중간계투진의 일원으로 뛰었다. -
펠릭스 페르도모 (1996 - 1999)
도미니카 카프 아카데미 출신 외국인 선수. 나름 투구와 타격 모두에 소질을 보여 중간계투와 대타로 모두 기용된 적이 있는 특이한 선수였지만, 둘 모두에서 시원찮은 성적만 거두었다. -
사와자키 토시카즈 (1997 - 2005)
1997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츠다의 등번호 14번을 이어받은 드래프트 1위의 기대주 우완 투수로 그 구로다 히로키보다도 한 순위 위로 지명된 거물 유망주였다. 하지만 카프의 전전해 신인왕인 야마우치처럼 이쪽도 부상과 기량 저하 테크를 그대로 밟아(...) 신인왕 시즌 외에는 두각을 보이지 못하고 빠르게 선수생활을 접었다. 히로시마의 투수진이 망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와자키 이후 카프 출신 신인왕은 2006년 소요기 에이신, 투수 신인왕은 2011년 노무라 유스케 이전까지 대가 끊긴다. -
코바야시 칸에이 (1998 - 2005)
카와카미 겐신. 다카하시 요시노부. 츠보이 토모치카와 함께 1998년 센트럴리그 신인왕 레이스에 가세한 구원 투수. 그 해 신인왕은 결국 카와카미가 차지했지만 요시노부, 츠보이와 함께 코바야시도 우수 신인으로서 연맹 특별 표창을 받았다. 하지만 그 해의 무리한 혹사 기용 이후 구위가 저하하면서 결국 이른 나이에 은퇴한다.위에도 신인 투수 혹사 → 부상, 기량 저하로 조기은퇴 테크를 탄 투수들이 여럿 보이는데 -
네이트 민치 (1998 - 2000)
203cm의 장신의 우완 투수. 3년간 카프에서 뛴 뒤 2001~2004년까지 치바 롯데 마린즈에서 뛰면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1회 획득했다(2001). NPB 생활 7년동안 단 두 시즌을 빼고 모두 한 시즌 180이닝 이상을 먹은 이닝 이터형 선발 투수로 카프에서 1번(1998), 롯데에서 1번(2002)씩 한 시즌 230이닝을 소화한 적이 있다.투수를 이렇게 굴리니 탈이 안 날리가 있나... - 오야마다 야스히로 (1999 - 2007)
-
오타케 칸 (2002 - 2013)
2000년대 카프 암흑기의 토종 우완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가 떠나고 마에다 켄타가 터지기 전까지 카프 토종 선발진의 유일한 간판으로 콜비 루이스와 함께 카프의 선발진을 이끌던 선수였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FA 이적했는데, 오타케가 노쇠화로 로테이션 투수는 커녕 1군도 간당간당한 먹튀가 된 반면 카프가 보상선수로 받아온 이치오카 류지가 주축 셋업맨으로 터지며 아직도 히로시마와 교진팬들 사이에서 명예 카프 선수 취급을 받는다.(...) -
나가카와 카츠히로 (2003 - 2019)
통산 165세이브를 기록해 구단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을 가진 우완 마무리 투수. 강력한 구위의 직구와 포크볼을 갖췄지만 고질적인 제구난을 갖춘 투수였다. - 케니 레이번 (2005)
-
마이크 로마노 (2005 - 2006)
SK 와이번스의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공헌을 한 외국인 투수 듀오. 원래는 히로시마에서 한솥밥을 먹은 적이 있다. -
사이토 유키 (2006 - 2014)
2번 항목 참조. - 이마이 케이스케 (2006 - 2017)
- 마에다 켄타 (2007 - 2015)
-
콜비 루이스 (2008 - 2009)
일본에 오기 전에는 망한 선발 투수였지만, 일본에서 기량을 갈고닦은 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깜짝 활약을 선보이며 수년간 텍사스 레인저스 선발 로테이션의 일각을 지켰다. -
이마무라 타케루 (2010 - 2021)
통산 115홀드로 구단 통산 최다 홀드 기록을 가진 우완 중간계투 투수. 드래프트 1위의 기대주였지만 당초 기대되었던 선발이 아닌 중간계투 자원으로 오랜 기간 활약하며 필승조의 한 자리를 지켰다. - 후쿠이 유야 (2011 - 2018)
-
브라이언 벌링턴 (2011 - 201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는 데이브 리틀필드의 안 좋은 의미로 전설적인 드래프트 전체 1픽 실패 사례였으나, 히로시마에서는 외국인 선발로 4년간 좋은 활약을 펼쳤다. - 데니스 사파테 (2011 - 2012)
- 듀엔트 히스 (2014 - 2015)
-
크리스 존슨 (2015 - 2020)
2015년 센트럴리그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2016년 NPB 외국인 투수 역대 두 번째의 사와무라상을 차지한 외국인 좌완 에이스. - 제이 잭슨 (2016 - 2018)
- 드류 앤더슨 (2022 - 2023)
3.2. 포수
-
타케시타 모토아키 (1958 - 1961)
비교적 일찍 은퇴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지만, 1985년 고시엔에 참가한 아들을 응원하러 가던 중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
우에다 토시하루 (1959 - 1961)
선수로써는 백업에만 머무르다 부상으로 고작 3년만에 은퇴했지만, 이후 지도자로 대성해 한큐 브레이브스 왕조를 이룩한다. -
미즈누마 시로 (1969 - 1982)
70년대 카프의 주전 포수. 1975년 카프의 첫 우승이 결정된 시합의 마무리를 맡고, 에나츠의 21구를 잡은 포수로 유명하다. -
미치하라 히로유키 (1972 - 1984)
1971년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했으나, 선수 시절 내내 미즈누마 시로에게 주전포수 자리에서 밀려 백업포수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다만 1975년 카프의 첫 우승이 결정된 시합에서 선발포수를 맡기도 했고, 1979년 2번째 우승 당시 마무리를 맡은 바 있다. 은퇴 후엔 카프 2군 코치, 기숙사장으로 일하는 중. -
김무종 (1972 - 1982)
일본에서는 1군 출장이 15경기에 불과한 무명 선수였지만, 해태 타이거즈에서 뛴 첫 시즌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크게 공헌하며 해태 왕조의 서막을 연 포수. -
타츠카와 미츠오 (1978 - 1992, 감독 1999 - 2000)
현역 시절 당시 준수한 수비력과 트래쉬 토크(일본어로 ささやき戦術)로 이름이 높았으며,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의 포수 이치카와 카즈마사[2]와 함께 선수와 심판을 농락하는(...) 트릭 플레이로도 이름이 높았다. 은퇴 후 카프의 감독에 부임하기도 했으나 2년 연속 5위만 찍고 사임했다. -
니시야마 슈지 (1989 - 2002)
1992년 은퇴한 타츠카와의 후임으로 90년대 카프의 주전 포수를 맡았으며, 1996년엔 카프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규정타석에 도달한 3할 타율 포수가 되기도 했다. - 쿠라 요시카즈 (1998 - 2016)
- 이시하라 요시유키 (2002 - 2020)
-
시라하마 유타 (2004-2022)
NPB 최고의 생존왕으로 불리는 선수. 왜 이 선수가 계속 살아남는지를 조명하는 특집 기사도 나올 정도였다. 통산 OPS는 .415. 그나마도 2018-2021 4시즌의 경우 2020년에 2경기 나온 것 외에는 2군에만 있었다가 2022년 선수단의 집단 코로나 감염 덕에 2년 만에 1군에 올라오긴 했지만 이전까지는 19년간 통산 90경기에 나와서 23안타를 쳤던 것이 1군 커리어의 전부였다. 아무리 로컬 보이(히로시마 고료 고교, 2003 봄 고시엔 대회에서 와쿠이 히데아키와 나루세 요시히사가 버틴 요코하마 고등학교를 꺾고 대회 우승)에 드래프트 1라운더(2003) 출신이고, 성격이 좋은지 베테랑으로서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2군에서 잘 해준다곤 하지만 성적이 너무 터무니없기 때문에 생존 능력 하나는 알아주는 수준. 참고로 고료 고교 동기로 고시엔 우승 배터리를 이룬 우완투수 니시무라 켄타로가 같은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 지명을 받았고 프로에서 세이브왕(2013)도 해볼 정도로 괜찮은 커리어를 남겼지만 2017년 시즌 후 부상으로 먼저 은퇴했으니, 이 선수의 생존력은 경탄스러울 정도. 하지만 2022년에는 드디어 방출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물론 어지간한 스타 선수들도 상당수가 은퇴하는 만 37세, 프로 19년차인게 함정. 거기다가 방출 후 전력분석원을 맡게 되며[3] 구단에 어찌어찌 남았다.
3.3. 내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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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시 카츠미 (1950 - 1956, 감독 1953 - 1965)
2차대전 이전인 1936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축 선수로 뛰던 스타 유격수였는데, 고향 히로시마에 신구단 카프가 창단되자 선수생명의 마지막을 고향팀에서 함께하기 위해 원년 멤버로 참여했다. 전성기는 좀 지난 채 금의환향했지만 초창기 듣보잡 선수들이 모인 카프에서는 거의 유일한 간판 스타였고 1953년부터 56년까지는 선수 겸 감독, 57년부터 65년까지는 전임 감독으로 눈물나는 팀을 이끌어갔던 초창기 카프의 핵심 인물. -
고바 타케시 (1958 - 1969, 감독 1975 - 1985)
카프에서 뛰던 현역 시절 도루왕을 2번 차지했고, 후에 감독으로서 카프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 아난 준로 (1956 - 1967, 감독 1986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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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누가사 사치오 (1965 - 1987)
아래 영구 결번 항목 참조. -
미무라 토시유키 (1967 - 1983, 감독 1994 - 1998)
카프의 첫 리그 우승 당시 주전 유격수. 감독으로서는 1990년대 강타선을 육성한 것으로 이름이 높으나, 투수진의 붕괴를 막지 못하면서 20년 비밀번호의 첫 스타트를 끊기도 했다. 2009년 심부전으로 사망. -
키야마 에이큐 (1973 - 1982)
김무종처럼 무명의 2군 선수였으나, 장명부가 동생처럼 아끼던 선수라 그를 따라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했다. -
게일 홉킨스 (1975 - 1976)
카프의 첫 우승 당시에 주전 1루수로 활약했던 외국인 선수. 1975년 10월 15일 카프의 첫 우승이 결정된 고라쿠엔 구장에서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서 우승을 확실히 결정짓는 3점 홈런을[4] 날렸고 이 홈런은 지금까지도 카프 전성기의 명장면으로 회고되고 있다. 은퇴 후에는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
타카하시 요시히코 (1975 - 1989)
1970년대 중반 ~ 1980년대 카프의 돌격대장 역할을 맡았던 호타준족의 스위치 히터 유격수. 도루왕 3회, 베스트나인 5회, 통산 477도루, 1826안타, 163홈런을 기록했다. 에나츠의 21구로 유명한 1979년 일본시리즈 MVP로 카프의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말년에는 롯데와 한신을 거쳐 은퇴했고 다이에, 롯데, 오릭스의 코치를 지냈다. 바비 발렌타인 롯데 감독 시절 이승엽을 지도하였다. 일본프로야구 기록인 최다연속경기(33경기) 안타기록을 가지고 있다. -
오사나이 타카시 (1976 - 1991)
1980년대 중후반 팀의 1루수, 외야수 준레귤러로써 준수한 장타력을 주무기로 활약했다. 후에 요코하마로 이적해 2년간 뛰다가 은퇴한 후 카프, 오릭스에서 타격코치로 일했다. 여담으로 베이스타즈 시절 응원가가 현재 베이스타즈 좌타자 전용 응원가로 쓰이는 중이다. -
코바야카와 다케히코 (1984 - 1996)
1984년 입단해 클린업 타선을 형성시켜 1984년 신인왕을 차지했고, 카프의 레전드 타자인 기누가사 사치오, 야마모토 코지의 후계자로서 많은 기대를 모았던 선수였다. 후에 야마모토가 은퇴한 이후 카프의 4번타자로서 활약했으나 1991년 노무라 켄지로, 마에다 도모노리같은 젊은 선수들의 활약에 출전 기회가 줄어들자,1996년 야쿠르트로 이적했다 -
쇼다 코우조 (1985 - 1998)
대한민국에서 여러 팀의 타격코치로 눈에 익은 그 분 맞다. 일본프로야구에서 2차대전 전후 유일한 무홈런 수위 타자 기록을 갖고 있다. 준족의 스위치 히터 2루수로 활약했다. -
웨이드 로돈 (1989 - 1990)
철인 키누가사 사치오의 은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데려온 3루수로 뛰어난 수비를 보여주며 1989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여담으로 카프는 이 선수를 데려오기 전에 랜디 존슨이란 이름의 내야수를 데려왔으나 발목 부상 때문에 떠나보냈고 그 대체자로 들여온 것이 로돈. -
노무라 켄지로 (1989 - 2005, 감독 2010 - 2014)
도루왕, 30-30 클럽, 통산 2000안타 등을 기록하며 90년대 내내 카프의 돌격대장 역할을 맡은 호타준족의 프랜차이즈 유격수. 2010년대 초반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리빌딩에도 수완을 보이며 이후 카프의 주력들이 될 선수들을 육성했다. -
에토 아키라 (1989 - 1999)
1990년대 카프에서 쟁쟁한 강타자들 사이에서도 4번을 맡았던 거포 3루수이자, 히로시마의 주축선수 FA 유출 잔혹사의 시발점. -
야마다 카즈토시 (1991 - 1995)
주니치 초창기때 내야 백업요원으로 우노 마사루의 총체적 난국급 수비를 두눈으로 봤고, 말년에 다시 주니치로 복귀해서 그대로 은퇴하면서 지도자로 전업한다. 선수와 코치 커리어를 호시노 센이치에 의해 시작할 정도로 호시노 키즈로 분류된다.참고로 해적전대 고카이쟈의 고카이 블루 역을 맡은 야마다 유우키가 아들인데 아들이 출생하자마자 히로시마로 트레이드 되었다. 현재는 히로시마 내야수비코치로 재직중. - 마치다 코지로 (1992 - 2004)
- 기무라 타쿠야(야구선수) (1995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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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로페즈 (1996 - 1997, 2000 - 2002)
1996, 1997년 2년 연속 센트럴리그 타점왕에 오른 강타자 1루수 용병이었다. - 히가시데 아키히로 (1999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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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이 타카히로 (1999 - 2007, 2015 - 2018)
팀의 중심 거포 → FA 이적으로 금지어행 → 친정팀으로 금의환향하며 은퇴라는 흥미로운 커리어를 보낸 오른손 강타자. 재일교포 선수로도 잘 알려져있다. 복귀 이후 팀의 핵타선화를 이끌었으며 2016년 클라이막스 파이널 스테이지 MVP를 달성했다.그후 일본시리즈 역적이 되어 니혼햄의 10년만에 우승하는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2018년 은퇴한 해에도 녹슬지 않는 실력을 자랑했다. -
에디 디아즈 (1999 - 2002)
2003년 SK 와이번스, 2004년 한화 이글스에서 뛴 적이 있는 내야수. -
쿠리하라 켄타 (2000 - 2015)
아라이 타카히로가 떠난 뒤 4번 타자를 맡은 오른손 강타자 1루수. -
앤디 시츠 (2003 - 2004)
강타자 유격수로, 라로카와 함께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장타형 키스톤 콤비를 꾸렸다. 2005년 한신 타이거즈로 이적해 2005~07년 3년 연속으로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한신 시절에는 1루 땅볼을 친 뒤 이승엽의 발을 밟아 벤클을 일으킨 것으로도 한국 팬들에게 약간의 악명이 있었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에이스이던 메이저리거 벤 시츠의 사촌. -
그렉 라로카 (2004 - 2005)
2004년 40홈런을 넘기며 아라키 마사히로와 함께[5] 2루수 베스트나인에 오른 거포 내야수. 특이 사항으로 2007년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한 시즌 28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해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최다 HBP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소요기 에이신 (2006 - 2017)
2루수 히가시데와 함께 2000년대 중후반 카프의 리드오프-키스톤 라인을 지탱한 유격수. 2006년 신인왕, 2010년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
스캇 시볼 (2008 - 2009)
KIA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그 특이한 이름(...)의 외국인 선수 맞다. 한국에서 방출된 뒤 카프에서도 별다른 기대 없이 싼 값에 줏어갔으나, 두 자릿수 홈런을 때리는 깜짝 활약을 보이며 2008년 한 해 동안 아라이 타카히로가 떠난 타선의 구멍을 메꾸는 데 성공한다. 일본에서의 시볼의 활약에 대한 장성호의 반응(...) -
신성현 (2009 - 2013)
덕수중 졸업 후 교토국제고로 유학, 2008년 드래프트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김무영과 함께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국적자로서는 최초로 일본프로야구 구단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단 한번도 1군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고 2013년 말 방출되었으며, 이후 고양 원더스를 거쳐 2015년 한화 이글스에 입단했다. -
브래드 엘드레드 (2012 - 2018)
아래의 짐 라이틀을 제치고 카프 프랜차이즈 사상 최장기간 재적한 외국인 선수. 미국에서는 위의 벌링턴과 함께 데이브 리틀필드 단장 시절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망주들 중 하나였다. 2m가 넘는 거구에서 뿜어져나오는 파워가 진퉁이라 2014년 홈런왕을 차지할 정도였지만, 워낙 큰 체구인데다 본 포지션은 1루수이지만 1루/코너 외야 소화가 가능한 마츠야마나 다른 외국인 선수들, 나중 가서는 1루밖에는 소화할 수 없는 프랜차이즈 스타 아라이와의 기용상 문제로 계속 외야수 알바를 뛰는 바람에 잔부상이 많아 풀타임 출장에 다소 무리가 있는 선수였다. 다만 인성과 성실성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 잔부상을 카프 구단측에서 지랫대로 삼아 연봉상승을 억제할 수 있었기에(...)[6] 오히려 가늘고 길게 재계약을 할 수 있었다. 일본 진출 초창기에는 삼진은 많고 볼넷은 적은 전형적인 공갈포였지만 2016년을 기점으로 30대 후반의 나이에 오히려 출루능력을 향상시키며 비율스탯을 개선하는데 성공해 2016~17년 카프 강타선 부활의 일원으로 활약했다.[7] 2018년 바티스타나 메히아 등 도미니카 카프 아카데미 출신의 더 값싼 옵션들이 생기자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으로 풀렸고 사실상 은퇴수순을 밟았다 . 비록 외국인이지만 역대 외국인들중 가장 오랜 기간동안 팀에 남아있었고 2014년 홈런왕 외에도 클린업과 하위타선을 오가며 나름 활약을 해주었던지라 홈 구장인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에서 은퇴식을 펼쳤다! - 케빈 크론
3.4. 외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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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카즈요시 (1961 - 1975)[8]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출신의 좌투좌타 로컬 보이 외야수. 선수 생활은 히로시마에서만 했으며 지도자 경력은 킨테츠, 롯데(1982~83년 감독), 난카이를 떠돌다 말년엔 카프에 복귀해서 카프 아카데미와 1군 타격코치를 끝으로 완전히 은퇴했다. 2016년 9월 17일에 요관암으로 사망했는데, 당시 히로시마가 25년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한 게 불과 일주일 전이라 분위기를 흐리고 싶어하지 않는 차원에서 사망 공지는 정규 시즌 종료 직후인 2016년 10월 3일에 발표됐다. - 미즈타니 지츠오 (1966 - 1982)
- 야마우치 카즈히로 (1968 -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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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코지 (1969 - 1986, 감독 1989 - 1993, 2001 - 2005)
아래 영구 결번 항목 참조. -
짐 라이틀 (1977 - 1982)
엘드레드 이전 카프 프랜차이즈 사상 최장기간 함께했던 외국인 선수. 1980년 일본시리즈 MVP, 베스트나인 1회, 골든글러브 4회를 차지한 공수겸장의 외야수였다. -
에이드리안 가렛트 (1977 - 1979)
1978년 카프의 외국인 선수로서는 최초로 40홈런을 친 거포 외야수. 동생인 웨인 가렛트도 형과 비슷한 시기에(1979~1980)에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선수로 뛰었다.[9] 2021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 야마사키 류조 (1977 - 1993)
-
나가시마 키요유키 (1980 - 1990)
NPB 최초로 등번호 0번을 단 선수로, 1984년 일본시리즈 MVP와 골든글러브 4회 수상을 달성한 준수한 수비력의 외야수였다.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에서도 선동열 감독의 초빙으로 타격코치를 역임하며 강봉규, 신명철의 20-20을 이뤄내는 성과를 보였다. -
릭 란셀로티 (1987 - 1988)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공갈포 용병. 일본에서의 등록명은 이름을 다르게 읽은 '리차드 란스'였다. 1987년에 39홈런을 치며 홈런왕을 차지했으나,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리그 최하위인 .218[10]의 타율을 기록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2번째의 최저타율 홈런왕 기록을 세웠다.[11][12] 다음 해에는 아예 1할대 타율을 찍는 완벽한 공갈포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 도중에 퇴출되었다. -
오가타 코이치 (1987 - 2009, 감독 2015 - 2019)
30홈런을 기대할 수 있는 장타력과 1995~1997 3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빠른 발을 겸비한 외야수였다. 감독으로서는 센트럴리그 3연패를 달성하며 리그에서는 절대강자의 모습을 보였으나 3연패 기간동안 단 한번도 일본시리즈를 제패하지는 못했고 결국 2019년에 최종성적 4위를 끝으로 감독직을 내려놓았다. -
마에다 토모노리 (1990 - 2013)
노모 히데오, 후루타 아츠야, 사사키 카즈히로, 신죠 츠요시등을 배출한 1989년 드래프트 최후의 생존자. 젊었을 적엔 3할 타율, 20-20, 골든글러브급 수비를 가진 정상급의 외야수였으나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만 2번 당하는 등 커리어 내내 부상에 시달리며 주루능력과 수비력이 빠른 속도로 감퇴했다. 그럼에도 타격에서 상당한 성적을 남겼고 무엇보다도 23년간의 현역생활을 모두 카프에서만 보냈다는 점에서 히로시마 암흑기 팬들에게는 구로다 히로키만큼이거나 그 이상으로 존경받았던 선수. - 아사이 이츠키 (1990 - 2006)
-
마티 브라운 (1992 - 1994, 감독 2006 - 2009)
화끈한 허슬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외국인 선수였다. 선수 은퇴 후 마이너리그 감독을 맡다가 카프의 감독으로 취임했는데, 그 성질머리는 어디 안 가서 심판 판정에 베이스를 뽑으며 항의한다는지[13] 하는 화끈한 액션을 보여주며 팬들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감독 시절 성적은 5-5-4-5를 찍으며 비밀번호 연장에 공헌했다.퇴장당한 경기에서의 승률은 높다 -
카네모토 토모아키 (1992 - 2002)
히로시마 시절이었던 2000년 30-30 클럽에 가입하는 등 타선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90년대 후반 카네모토-오가타-마에다의 외야진은 공수주를 겸비한 당대 일본 최고의 외야진으로 평가받았다.하지만 카네모토 빼면 다들 부상이 많아서 -
시마 시게노부 (1995 - 2011)
별명은 레드 고질라. 투수로 입단하였다가 타자로 전향하였다. 2004년 수위타자+최다안타 타이틀홀더. - 히로세 준 (2001 - 2016)
- 아마야 소이치로 (2002 - 2018)
-
마루 요시히로 (2008 - 2018)
뛰어난 출루능력과 호타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2010년대 카프 중흥의 핵심으로 활약한 중견수. 2017~2018 센트럴리그 MVP를 탈 정도로 맹활약했으나 18년 오프시즌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떠나 팀의 중심타자 FA 잔혹사의 계보를 이었다. - 아카마츠 마사토 (2008 - 2019)
- 스즈키 세이야 (2013 - 2021)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로빈슨 체코[14]( 보스턴 레드삭스 → LA 다저스)
- 알폰소 소리아노[15] ( 뉴욕 양키스 → 텍사스 레인저스 → 워싱턴 내셔널스 → 시카고 컵스 → 뉴욕 양키스)
- 티모 페레즈[16] ( 뉴욕 메츠 → 시카고 화이트삭스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 에스마일린 카리대 ( 시카고 컵스)
- 라몬 라미레즈[17] ( 뉴욕 메츠)
- 구로다 히로키 ( LA 다저스 → 뉴욕 양키스 → 일본 복귀 후 다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
- 콜비 루이스[18] ( 텍사스 레인저스)
- 타카하시 켄 ( 뉴욕 메츠)
- 마에다 겐타 ( LA 다저스 → 미네소타 트윈스)
- 라이언 브레시어 ( 보스턴 레드삭스)
- 스즈키 세이야 ( 시카고 컵스)
어째 출신 메이저리거도 일본인 선수보다 외국인 선수가 더 많다.
[1]
다만
센트럴리그가 1991년부터 최다탈삼진을 타이틀 시상 대상에 넣었기에 타이틀 수상은 1991년 단 1번.
[2]
대학동기가
하라보살이다.
[3]
주로
주니치 드래곤즈를 담당할 예정이라고 한다.
[4]
결승점은 그날 2번 타자였던
미무라 토시유키가 선제 1타점으로 기록하였다.
[5]
공동수상에 관한 자세한 사정은 항목 참조
[6]
보험용으로 싸게 데려온 선수도 아녔고 한때는 리그 최고 슬러거 중 한 명이었는데 일본 7년간 받은 통산 연봉이 500만 달러 언저리에 가장 연봉이 많았던 해도 110만 달러가 안 될 정도.
[7]
특히 2016년 일본시리즈때 타선, 특히 아라이가 삽질을 하던 와중에 혼자 닛폰햄 투수진을 공략했다. 하지만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나머지 불펜진과 타선의 공백을 메꾸는데 실패했고 그 결과 팀은 준우승 하는데에 그쳤다.
[8]
마지막 시즌은 코치 겸임.
[9]
하지만 형과 달리 동생은 특별한 활약은 보여주지 못하고 2년만에 방출되면서 그대로 은퇴했다.
[10]
114
삼진(60사사구)까지 당하며 최다
삼진도 기록했다. 그래도
출루율은 타율을 1할 이상 상회하는 .323에
OPS도 .859를 찍었으니 나름 뛰어난 생산력의 타자였다.
[11]
최초는 1974년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38홈런으로 홈런왕에 오른 클라렌스 존스(.226)였다. 이후 2011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228의 타율로 31홈런을 치며 홈런왕 자리에 올라 이 계보(?)를 이어간다.
[12]
여담으로 같은 해 수위타자를 차지한 팀 동료
쇼다 고조는 시즌 무홈런을 기록하며 완벽한 대칭을 보였다.
[13]
베이스만 뽑는게 아니라 가끔 모자를 집어 던질때도 있고 뜬금없이 신발이랑 모자를 벗어 가지런히 홈 플레이트 위에 올려놓는둥 여러가지 기행을 많이 선보였다.
[14]
도미니카 카프 아카데미를 거쳐간 선수 중 하나. 1995년 일본에서 평균자책점 2.74, 15승 8패, 166탈삼진의 훌륭한 성적을 거두며 1997년 보스턴에 입단하나, 보스턴에서의 2년간 메이저리그 출장은 단 5경기에 불과했다(...). 구단에서도 '미스테리 맨'
사이버 투수이라 불리며
먹튀인증을 철저히 했다.
[15]
역시 도미니카의 히로시마 카프 아카데미 출신으로 선수생활을 일본에서 시작했다. 당시에는
스위치 히터였으며, 1할대 초반을 찍고 퇴출되었다. 퇴출 후
뉴욕 양키스 스카우트에 눈에 들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까지 올라갔고, 거기서 포텐셜이 대폭발했다.
[16]
이쪽도 역시 카프 아카데미 출신의 도미니카 용병. 96년에서 99년까지 카프에서 뛰며 호타준족의
외야수로 쏠쏠한 활약을 했지만, 당시 자국인 선수만으로도 역대급 외야진을 구축했던 카프에서는 기회가 많지 않아 주로 주전 외야수들이 부상당했을 때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미국에서는
저니맨으로 여러 팀들을 오가며 외야 유틸리티, 백업으로 활동했다.
[17]
1981년생, 카프 아카데미 출신. 소리아노처럼 일본에서 아주 잠깐 뛴 뒤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뉴욕 양키스 행.
[18]
텍사스 레인저스 출신으로 어깨 부상과 부진을 겪으며 일본에 왔다가 강심장을 얻고 슬라이더를 익혀서 빅리그 친정팀으로 돌아가서 대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