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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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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해 해전
영어: Battle of the Philippine Sea
일본어: マリアナ沖海戦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panese_aircraft_carrier_Zuikaku_and_two_destroyers_under_attack.jpg
항공모함 호넷의 비행단에게 공격받는 일본 해군 항공모함 즈이카쿠
날짜
1944년 6월 19일 ~ 20일
장소
필리핀해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미국|]]
지휘관 [[틀:깃발|]][[틀:깃발|]][[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
[[틀:깃발|]][[틀:깃발|]][[마크 미처|]]
[[틀:깃발|]][[틀:깃발|]][[오자와 지사부로|
오자와 지사부로
]]
결과
미국 해군의 대승리
영향
일본 제국 해군 항공 전력의 궤멸
전력 정규항공모함 7척[1]
경항공모함 8척
전함 7척[2]
중순양함 8척
경순양함 13척
구축함 58척
잠수함 28척
항공기 956대
총원 96,618명
정규항공모함 3척[3]
경항공모함 4척
개조항공모함 2척
전함 5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27척
잠수함 24척
항공기 750여대
피해규모 전함 1척 손상
항공기 123대 손실[4]
109명 전사
정규항공모함 2척 침몰[5]
개조항공모함 1척 침몰
항공기 476대 손실[6]
2900여명 전사

1. 개요2. 전투 발발 전
2.1. 미군의 사정2.2. 일본군의 사정2.3. 맥아더의 어퍼컷과 일본군의 반응
3. 양군 전력
3.1. 일본군 전투서열3.2. 미군 전투서열
4. 전투 경과
4.1. 사이판 공격4.2. 일본 해군의 계획4.3. 미군의 계획4.4. 양자의 전력
4.4.1. 미 해군 방공망4.4.2. 항공기4.4.3. 조종사
4.5.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4.5.1. 괌 상공의 전초전4.5.2. 하늘의 칠면조 사냥4.5.3. 잠수함들의 활약4.5.4. 미군의 반격
5. 결과6. 평가7. 후일담

[clearfix]

1. 개요

필리핀해 해전(Battle of the Philippine Sea)은 태평양 전쟁 기간 중, 1944년 6월 19~20일 필리핀해 마리아나 제도 부근 해상에서 미국 해군 일본 해군 사이에 벌어진 해전이다. 일본에서는 마리아나 해전(マリアナ沖海戦)이라고도 부르며, 미국에서는 별칭으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Mariana Turkey Shooting)이라고도 부른다.

미군의 진공이 일본의 절대방위선[7]인 마리아나 제도에 도달하자, 일본군은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절치부심해서 재건한 함대항공력을 총동원해 미 함대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1944년 6월 19일에 미국 해군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 휘하 태평양 함대 소속 제58기동부대와 일본 해군의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휘하 제1기동함대가 필리핀과 마리아나 제도 사이의 해상에서 맞붙었다.

태평양 전쟁의 주요 해전사를 조망하는 시각에서 보면 과달카날 전역 산타크루즈 해전 이후 미국 해군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던 일본 해군의 항모부대가 다시 전면에 등장한 전투다. 역대 해전사로 확대해 보면 5번째로 벌어진 함대항공전이자 역대 최대 규모의 함대항공전이며 동력선이 해군의 주력 장비가 된 이후에 벌어진 해전들 중에서는 사상 3번째로 큰 규모의 해전이다.[8]

이 전투의 결과 일본 해군은 사실상 몰락해버렸고 미군은 일본 본토침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 전투 이후의 태평양 전쟁의 경과를 살펴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해군이 주야장천 생각하던 결전과 다를 바 없는 해전이었다.

중요성에 비해 국내에서는 의외로 지명도가 낮은 편이라 미국측이 붙인 별칭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Mariana Turkey Shoot)' 또는 일본측 명칭인 '마리아나 해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필리핀해 해전이라고 하면 필리핀 탈환전[9]에서 일어난 해전을 말한다. 문제가 있다면 일본에서 부르는 필리핀해 해전은 일본군 해군이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거지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54px-Battle_Philippine_sea_map-en.svg.png
(전투 당시 일본 해군과 미국 해군의 진로)

2. 전투 발발 전

2.1. 미군의 사정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고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의 소모전 이후로, 태평양전쟁은 줄곧 미군의 일방적이고도 착실한 공세 일변도였다. 과달카날 전투 이후로 쏟아져나온 미국의 물량은 이러한 미군의 공세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게다가 신병기들은 물량뿐만 아니라 품질과 성능에서도 일본군의 무기를 압도했다.

미군의 진격은 크게 두 갈래로 이뤄졌는데, 하나는 미 해군 함대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이 입안하고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실행을 총괄하던 중부태평양 돌파이고, 다른 하나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주장한 육군 위주의 뉴기니-민다나오 축선으로의 진격이었다. 전자는 중부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들을 하나하나 점령하여 이를 발판으로 남아있는 일본 함대의 활동을 제한하여 상륙군의 안전을 확보한 뒤, 대만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후자는 태평양 남서쪽에 띠처럼 이어진 섬들을 따라 북상하여 필리핀을 재탈환하고 미군이 일본에게 필리핀을 빼앗기기 전에 지어두었던 군사시설과 일본군이 새로 지어둔 군사시설을 확보하여 필리핀을 병참기지화시킨 뒤, 여기서 단번에 일본으로 진격하는 안이었다. 이 두 가지 안은 둘다 그럴듯한 명분과 실질적 이득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 절충점을 찾지 못했고, 결국 두 가지 안 모두 실행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그리고, 그 다툼의 와중에 어니스트 킹 제독은 미 육군항공대의 지지를 얻고자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제시하게 된다. 마리아나 제도는 미 해군 입장에서는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훌륭한 전진기지가 될 수 있었고 미 육군항공대 입장에서는 B-29의 안정적인 작전기지[10]가 될 수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1944년 6월을 예정으로 마리아나 제도 침공이 결정되었다.

마리아나 침공을 총 지휘할 현장 지휘관은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었다. 당시 그는 중부태평양해역군(뒤에 제5함대로 개명됨.)의 총지휘관이었으며 그의 휘하에는 강력하고도 거대한 고속항모기동부대, 상륙부대, 보급부대들이 있었다.

중부 태평양 돌파의 핵심 전력인 제58기동부대의 지휘관은 마크 미처 제독이었다. 사실 그는 스프루언스 제독과는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삽질과 보고 누락 및 은폐로 인해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스프루언스의 눈밖에 나버렸던 그는 한동안 수상기 기지 사령관 등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당시 이제 막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항공병과 안에서는 주요 인재였기 때문에 얼마 안 가 과달카날 등 주요 전장에 배치[11]되긴 했지만 항모기동부대 근처에는 얼씬도 못 했다. 그러나, 1943년 11월의 길버트제도 침공작전[12]에서 그 당시 막 몸집을 불린 항모기동부대의 소극적인 운용과 미숙함이 드러나자 윌리엄 홀시 제독을 비롯한 항공병과 제독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아서 항모기동부대에 복귀하게 되었다. 이른바 미처 샴푸로 불리는 미처제독 특유의 공세적인 항모운용[13]이 마셜제도 침공과 트럭환초 공격에서 진가를 발휘하자 스프루언스도 그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미처제독 말고도 제58기동부대에는 그 당시 미 해군안에서 쟁쟁한 인재들이 포진해 있었다. 전쟁 초기에 일본 해군의 등쌀에 기를 못 펴던 미해군 구축함대에 새로운 전술로 구축함대의 진가를 되살린 알레이 버크 제독이 미처 제독의 참모장으로 있었으며, 휘하 참모들과 항모 전단장 및 각 항모의 함장들 또한 유능한 인재들로 채워져 있었고, 항모들의 호위역인 고속전함부대는 과달카날 해전에서 승리한 윌리스 리 제독이 지휘하였다. 이들 휘하의 영관급 지휘관들도 유능함으로 따지면 순위권에 드는 인재들이었으며, 심지어 미처 제독 옆에는 일본군의 무선 감청 내용만 전문적으로 분석하여 보고하는 전담 장교가 붙어 있었다.

이렇게 덩치뿐만 아니라 실력까지 끌어올린 미해군 항모기동부대는 1944년 들어서 일본군의 외곽 방어선을 마구 뒤흔들어 놓는 대활약을 벌이게 되었다.

2.2. 일본군의 사정

과달카날 전역에서 패한 일본군은 양갈래로 다가오는 미군의 진공을 한 번에 다 막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를 위해 일선 부대를 보강하고 국지적으로나마 반격을 꾀하기도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와중에 손실은 계속 쌓여만 갔다. 게다가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전선 시찰을 나갔다가 해당 정보를 입수한 미 해군과 미 육군항공대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전선의 규모가 자신들의 능력을 초과했음을 깨달은 일본군은 1943년에 절대방위선을 정하고 방어를 강화하려 했지만 1944년 초에 이르자 결국 지금껏 누적된 피해를 제대로 보충하지 못하면서 미군과 전력차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 그래도 미군이 진격해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는 일본군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선도 빠르게 밀려나서 44년 2월 초에 마셜 제도가 사실상 미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일본군의 진주만이었던 트럭 환초는 2월 중순에 미 해군 항모전단의 공습에 박살나 버렸다.[14] 연합함대의 주력은 미군의 공격을 간신히 피했지만 중요 근거지였던 트럭 환초와 캐롤라인 제도 일대를 버리고 필리핀 동쪽, 서부 뉴기니 북쪽에 위치한 팔라우로 도망가야만 했다. 이미 43년 말에 동부 뉴기니 일대와 솔로몬 제도 일대가 대부분 연합군 손에 떨어져버린 상황에서 후방기지 트럭 환초마저 박살나자 이 일대를 담당하는 일선 전진기지였던 라바울 본영은 매일같이 미군의 공습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면서 기능을 잃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중국 동부와 동남아시아 지역을 여전히 차지하고 있었고 서태평양 지역의 제해권 역시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본토와 남방 자원 지대 사이의 해상 교통로는 미군 잠수함들의 통상파괴활동에 의해 크게 위축되었다. 이로 인해 본토의 물자 부족, 특히 식량 부족이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했으며 군수품 제작에 필요한 석유, 고무, 철광석, 구리, 주석의 유입도 급감했다. 본토에서 일선부대로 가는 군수품 보급 역시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는 연합함대를 위시한 일본 해군의 움직임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15]

하지만 일본군의 저항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격전을 거치면서 와해되어 버린 항모 전대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서 함대결전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연료나 낭비하며 연합함대 사령부의 호텔 노릇이나 하던 제1함대가 44년 2월 드디어 해대되고 3월에는 제1기동함대가 주력함대로 새로이 편성, 그 지휘관으로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이 임명된다. 그는 수상함 경력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전력에 관심이 커서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역이었던 항모 기동부대 제1항공함대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바 있을 정도였다. 연공서열만 아니었으면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에 일찌감치 항모 기동부대의 지휘관이 되었을 인물이었다. 또한 이 항모전대를 지원하기 위한 지상 발진 항공기 부대 신편 제1항공함대를 창설하였다. 이른바 Z계획에 의한 지상 발진 항공기 부대 편성은 항모 전대 재편성 이전부터 시작되었으며, 태평양 일대의 기지 항공대를 통합한 단일 지휘체계 아래 주요 거점에 배치하여 항모 전대와 함께 미군의 진격을 저지한다는 것이었다. 지휘관은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미 함대에 끈질긴 공격을 가해 호넷을 격침시킴으로서 미군 장교들 사이에 깊은 인상을 남긴 가쿠다 가쿠지 중장이었다.

야마모토의 후임자 고가 미네이치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지원 아래 제1기동함대를 주력으로 삼아 뉴기니 북쪽의 팔라우를 기점으로 미군의 공세에 대비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예상을 훨씬 앞지른 미군은 1944년 3월 말에 팔라우를 공격[16]하며 고가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핵심 참모들과 함께 팔라우를 탈출하려다가 탑승한 비행정이 폭풍우와 난기류를 피하지 못하고 추락해 비행정이 파괴되고, 본인을 비롯한 주요 참모들이 한꺼번에 실종되고 만다. 그 와중에 고가의 참모장이었던 후쿠도메 시게루가 추락한 세부섬 일대 게릴라들에게 포로로 잡히면서 이를 되찾으려는 일본군의 수색작업 가운데 고가가 입안했던 방어계획, 일명 新Z작전의 작전안이 담긴 서류가방을 분실했고, 이것이 세부섬 게릴라들의 손을 거쳐 미군 손에 들어갔다. 즉, 이 사건으로 일본군이 앞으로 어디서 뭘 할지를 미군이 전부 알아버린 것이다.

고가의 후임 도요다 소에무 제독 역시 위와 비슷한 계획을 수립했으나, 문제는 미군이 언제 어디서 들이닥칠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거다. 남으로는 동부 뉴기니 일대를 장악한 맥아더가 1944년 4월에 서부 뉴기니[17]의 거점이었던 홀랜디어(현재 명칭: 이리안자야)를 침공하면서 서부 뉴기니를 넘보기 시작했고, 동으로는 미 항모부대가 4월말까지 마리아나 제도[18]와 팔라우, 캐롤라인 제도를 폭격하고 맥아더의 홀랜디어 침공작전을 지원한 뒤 돌아가는 길에 트럭을 다시 공격하여 2월 중순의 폭격이 끝난 뒤에 충원되었던 항공대마저 무력화 시키는 등 중부태평양과 서남태평양 일대에서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를 쳤던 판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동년 5월에 연합함대의 주력을 모든 방면에서 대응 가능한 한편, 인근에 질 좋은 유전이 있어서 본토로부터의 연료 보급으로부터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타위타위[19]로 옮기게 된다. 이것이 직간접적으로 패착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2.3. 맥아더의 어퍼컷과 일본군의 반응

1944년 5월 말, 맥아더는 홀랜디어 북쪽 인근의 비약(Biak) 섬을 침공했다.

그러자 일본 해군의 시선은 일제히 팔라우와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우, 그리고 서부 뉴기니 일대로 집중되었다. 안 그래도 캐롤라인제도 부터 서부 뉴기니까지 미 항모부대가 한차례 휩쓸고 갔던 상황이어서 미 해군의 주력도 이 쪽으로 몰려올 것이라 예상하던 차에 서부 뉴기니 일대, 특히 비행장이 있는 비약을 잃게 되면 팔라우 일대에서 미 해군을 저지하는데 심각한 차질이 벌어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일본 해군은 이 해역에 잠수함들을 집중 배치하는 한편 비약 섬에 항공기를 증원하고 연함함대로 하여금 비약 섬에 지상병력(해군육전대)[20]을 증원하는 ' 혼작전'을 벌인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결과적으로 마리아나 제도에 대한 방어만 약화시키는데 일조하면서 최악의 한 수가 되었다.

이 해역에 일본군 잠수함들이 배치된 것을 알아차린 미군은 적극적인 대잠작전에 나서게 된다. 일본군은 전쟁 기간 내내 일정 패턴을 따라 잠수함을 배치시키곤 했다. 미군은 팔라우 일대에서의 일본군 잠수함 배치 패턴을 파악했고, 일선 대잠작전에 투입된 미군 구축함들은 일본군 잠수함의 위치를 손쉽게 알 수 있었다. 5월부터 7월까지 이뤄진 이 대잠작전에서 일본군이 이 일대에 투입한 잠수함 26척 중 총 17척이 손실되었다. 이 바람에 일본군 잠수함대는 완전히 무력화 되었고, 본 게임인 필리핀해 해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나 하지 못했다.[21] 이 작전 도중 미 해군 호위구축함 잉글랜드는 12일간 일본군 잠수함 6척을 격침시키고 대통령 표창까지 받게 되며 킹 제독은 이 소식에 '잉글랜드라는 이름은 미 해군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항공기 증원 역시 그대로 손실로 이어졌다. 5월에서 6월초에 비약 섬으로 증원된 항공기는 합계 220여대에 이르렀으나, 대부분 격전 와중에 손실되었다. 이 증원은 제1항공함대가 주력이었는데, 1항공함대는 안 그래도 원래 계획대로 준비되지 않았던데다 맥아더의 공세가 시작되기 전부터 미군의 공세에 대응하려 여기저기 분산 투입되면서 계속 손실만 쌓여가던 참이었다. 결국 필리핀해 해전 발발 시점에서 제1항공함대는 제1기동함대에 대해 제대로 된 지원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만일 이 항공기들이 비약 섬으로 향하지 않고 마리아나 제도로 배치되었다면 전투 발발 시점에서 지상기지들이 나름 대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1항공함대를 창설하던 당시 최초 목표는 1,500대의 대규모 편제였으나, 항공기 생산량이 일선의 소모율을 감당하지 못했다. 미 함대가 마리아나 제도에 들이 닥치던 당시 제1항공함대의 총 보유전력은 560대에 불과했고, 그 중 마리아나 제도에 배치된 건 136대에 불과했다. 이후 타 기지에서 증원[22]을 받아서 250대 가량의 일본기들이 지상기지를 거점으로 본 전투에 참가한다.

이로 인해 일본 해군/연합함대가 구상하던 미 해군과의 결전 계획은 본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어긋나 버렸다.

수상함들을 이용한 지상병력의 증원도 미군 잠수함의 감시로 인해 실패하고 만다. 이미 미군은 암호 해독을 통해 연합함대의 전반적인 움직임들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배치된 미군 잠수함들은 연합함대가 타위타위 및 그 일대에 들어서자 연합함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하여 미군 수뇌부에 보고하고 있었다. 이 잠수함들은 단순한 감시역으로 그치지 않고 여차하면 일본군 수상함정들을 공격하곤 했다. 비약 섬으로 향하던 일본 함대 역시 이들에 의해 낱낱이 감시당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반격에 나선 미군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이들 미군 잠수함들의 존재는 타위타위로 이동한 제1기동함대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타위타위에는 지상비행장이 전혀 없었으므로 모든 비행훈련이 항공모함에서 이뤄져야 했는데, 잠수함들 때문에 항공모함들은 도저히 출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맥아더의 공세에 일본 해군/연합함대가 남태평양에 시선을 뺏긴 사이 중부태평양을 가로질러서 미 해군의 진짜 주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3. 양군 전력

3.1. 일본군 전투서열

3.2. 미군 전투서열

4. 전투 경과

4.1. 사이판 공격

1944년 6월 6일 마셜 제도에서 미국의 제58기동부대가 출격하여 마리아나 침공 부대가 출발하던 11일 경에 마리아나 제도 인근에 도착했다. 58기동부대는 도착과 동시에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비행장들을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이 일대 일본군의 항공전력을 일소해 버리고 제공권을 장악했다. 미군의 주장에 따르면 이때 일본군이 입은 항공기 피해는 적어도 150대 정도란다. 이후 사이판 전투가 개시될 때까지 마리아나 제도의 일본군 지상 시설과 해상세력은 일소되었으며, 마리아나 제도 북쪽의 이오지마와 보닌 제도 역시 함대를 일부 보내서 무력화시키면서 일본군 항공전력의 증원을 막았다. 이로 인해 제1항공함대가 어찌저찌 끌어모은 지상기지의 항공기들은 대부분 무력화되었다.

일본군은 9일께 58 기동부대의 출격을 파악하고 계속해서 정찰기를 보내 58 기동부대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다. 13일에 마리아나 제도가 본격적으로 공격받자 연합함대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23]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예상하던 미 해군의 공격방향이었던 팔라우 동남부 해역보다도 훨씬 북동쪽, 거기에다 일본 본토와의 거리 역시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을 아직 방어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기습했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미 해군이 중부 태평양을 침공루트로 삼았음을 알게 된 연합함대는 비약 섬으로 보낸 함대를 부랴부랴 불러들였고, 제1기동함대의 출격을 명령했다. 물론 이들의 행적은 미군 잠수함들에게 계속 감시당하고 있었다.

18일께에 이르자 양 측의 정찰기들이 교전을 벌일 수준으로 근접했다. 그리고 운명의 19일이 밝아왔다.

4.2. 일본 해군의 계획

일본 해군에서도 몇 안 되는 유능하고 합리적인 지휘관 중 한 명이었던 오자와 제독은 일본 함재기의 유일한 장점인 항속 거리(100Km 이상 우위에 있었다)를 이용해 미 함재기의 항속 거리 밖에서 치고 빠지는 아웃레인지 공격을 구상했다. 더불어 신중한 스프루언스 제독이 상륙함대의 보호를 위해 상륙지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한다는 심중까지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러나 미군의 전력 규모에 대해서는 자신들처럼 항모 3척이 1개 전단을 이룬다고 생각하여 15척이 아닌 12척으로 실제보다 낮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미군 지휘관이 스프루언스 대장이었기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처럼 복수의 기동함대로 분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24] 공교롭게도 스프루언스 대장 또한 이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 함대가 분산되어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여 경항모 치토세, 치요다,[25] 즈이호 3척을 중심으로 그 호위로 이제까지 호텔 노릇이나 하던 잉여였던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 무사시를 배치한 C부대를 전방에 내세우고[26], 약 190KM 후방에 정규 항공모함인 다이호, 쇼카쿠, 즈이카쿠로 이루어진 핵심전력인 A부대[27]와 개조항모 히요, 준요, 그리고 경항공모함 류호로 이루어진 B부대[28]를 통합 운용했다. 이 배치를 한 이유는 전방 C부대의 전함과 순양함의 정찰기 세력을 적극 활용하여 미군을 먼저 찾는 한편, 미군이 공격해올 경우 C부대를 통해 미군의 공격력을 흡수하여 주력을 보호하기 위함이였다.[29]

만약 미군이 실제로 공격에 나설 경우 십중팔구 전방부대와 교전이 발생할 것이고 C부대가 미군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후방의 주력부대는 안전한 상태에서 58기동부대를 공격할 수 있을 것이며 설령 미군이 후방의 주력함대를 알아채고 공격대를 보내더라도 전방부대의 요격망을 뚫고 공격해야 하는 위험을 부담해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마주칠 전방부대의 요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거기에 괌에 있는 지상발진 항공대 또한 여유있게 미군 함대를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진형은 안 그래도 부족한 구축함들을 분산시키는 꼴이어서 대잠에 취약했고 이는 나중에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공세에 나설 때는 복수로 분산(했다고 생각)한 미군의 양동작전에 대비해, B부대의 함재기를 예비로 두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공격에 투입하기로 했다. 다만 이 때 자신의 함재기를 4파로 분리해 제파식으로 출격하게 했는데, 제파공격 자체는 한번에 지나치게 많은 공격기들이 달려나가 몇몇 표적만을 지나치게 집중공격하는 걸 막기 위한 지극히 상식적인 조치였다. 하지만, 숫적 열세와 조종사들의 기량 문제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실수가 되고 말았다.

한가지 참고할 것은 본 해전에서 오자와는 함대를 3개 부대로 갈랐지만 실질적으로는 통합하여 운용하였다는 것이다. 오자와는 휘하 부대가 독단적으로 공격에 나서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으며 3개 부대가 사실상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였다. 이는 상대방인 미 해군의 스프루언스 제독이 본 해전에서 오자와를 상대했던 방법과도 같으며, 또한 이때까지 연합함대가 구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 해군은 부대를 세분화하고 여러 방향에서 적을 공격하는 전법을 사용했다. 앞서 미군에 노획된 작전 문서에 담긴 방어 계획도 이런 식이었다.

또 하나 참고할 것은 오자와는 괌을 비롯한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를 자신들 함재기들의 작전 거점으로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항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미함대를 공격한 뒤에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에 착륙하여 연료와 무장을 보급받고 다시 미 함대를 공격한 뒤에 항모로 복귀하는 이른바 왕복폭격을 구상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오자와 휘하의 부대장 중 하나가 미 함대 발견 직후 이 생각으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오자와는 이러한 부하의 시도를 막았다. 오자와는 왕복폭격에 별 기대를 하지 않았으며, 공격에 나선 함재기들의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나 지상기지로 향하는 정도만 허락했다.

오자와는 마리아나 일대의 지상기지는 가쿠다 중장의 제1항공함대의 작전기지로 인식하였으며, 함재기로 공격에 나설 때 제1항공함대와 협력하에 함재기와 지상기지의 항공기들이 미 함대를 협공하는 걸 우선시하였다.

오자와가 선공에 나선 것은 초기 항모전의 상식인 '선빵이 최고다.'라는 사상이 한몫한 걸로 보인다. 오자와 역시 파일럿들의 기량문제를 완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일단 선공을 걸면 미군이 방어측이 되므로 기량차이는 극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해전에 돌입하기 전 정찰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오자와 기동부대가 미군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공격대를 띄운 시점에서 미군은 아직 오자와 기동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먼저 보고 먼저 쏜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 게다가 앞서 언급되었듯이 미군의 실제 규모는 파악하지 못한 채 숫적으로 그리 꿇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도 선제 공격을 결심하는데 한몫했다. 그래서 전투 초반에 오자와 기동부대의 참모진들은 꽤나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미군이 일본 함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는 못했지만 앞서 언급했듯 스프루언스 대장이 이때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일본군이 양동으로 수송함대를 공격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륙함대의 안전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에 공격적인 미처 제독을 통제하기 위해서 직접 지휘한다는 것이였다.

4.3. 미군의 계획

미군의 경우 전투 돌입 전까지 일본군과의 교전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갈등이 있었다.

마리아나 제도 공격의 총사령관인 스프루언스 제독은 오자와 제독의 예상대로 상륙지의 엄호를 위해 함대가 처음 자리잡은 위치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는 마리아나 제도 공격 전체를 책임진 입장에서 일본함대와의 전투보다 상륙함대의 엄호를 우선시했다.

반면 58기동부대의 지휘관인 미처 제독은 적극적으로 일본군을 찾아서 공격하려고 했다. 실제로 17일께에 무선감청과 잠수함의 감시를 통해 일본함대의 존재가 확인[30]되자 그는 휘하의 고속전함들로 하여금 일본함대와 야간전을 벌이고 동이 트면 함재기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속전함부대의 지휘관인 윌리스 리 제독이 극구 반대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그 자신이 경험한 미 해군의 야간전 능력이 일본군보다 한 수 아래였던 것과 고속전함부대 휘하 수상함들이 전쟁기간동안 대공 전투만 줄곧 치렀지 함정간 교전 경험이 없었던 것이 미처 제독의 구상을 반대한 이유였다.

스프루언스 제독은 상륙부대의 엄호가 우선임을 명확히하면서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려는 휘하 항모부대 지휘관들의 반발을 눌렀다. 앞서 입수된 일본군의 기본적인 작전 계획이 이전부터 일본 해군이 해왔던 분산공격이었던데다, 전투 개시 시점에서 그가 파악한 일본 함대의 위치가 제각각이었던 것이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프루언스는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일본함대가 전력을 분산하고 양동작전을 벌여서, 자신의 항모전단이 일본함대를 쫓아 상륙부대에서 멀어진 사이, 다른 일본 함대가 상륙부대를 위협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스프루언스는 일본 해군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이 파악한 오자와 함대의 규모는 '함재기 약 450대에 항모 9척을 중심으로한 약 50척 규모'였는데 실제로도 '함재기 436대에 항모 9척을 포함한 50척'이었다. 당시 일본 해군이 투입한 함재기 숫자는 당시 미 해군 함대가 보유한 전투기 숫자보다도 적었다. 따라서 스프루언스는 자신 휘하의 함재기들을 공격에 분산시키지 않고 오로지 일본 해군 항공대를 요격하는 데에 집중시켰다.

4.4. 양자의 전력

4.4.1. 미 해군 방공망

이 시기 미 해군은 함상전투기를 이용한 원거리 함대방공의 틀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각 함대, 함정에 꾸려진 전투정보실(CIC)는 전쟁 초에 비해 능력이 크게 개선된 대공 레이더를 이용해서 적기를 예전보다도 더 일찍 탐지할 수 있었고 대량으로 보급된 우수한 통신장비들에 힘입어 아군 기체들을 전장 상황에 맞게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으며 F6F 헬캣이라는 걸출한 함대 방공 전투기는 전간기에 살아남은 우수한 베테랑 조종사들과 그들의 경험으로 육성된 정예 신참 조종사들에 의해 운용되면서 일본 함대의 함재기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전투기에 의한 함대 방공의 효율성이 전쟁 초기보다 크게 높아져, 이 시기엔 당당히 함대 방공의 한 축이 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함대방공 체계인 대공포 역시 만만치 않아서, 대공레이더와 전투정보실의 통제하에 VT신관을 사용하는 127mm 양용포 → 2~4연장 40mm 대공포 → 20mm 기관포로 이어진 대공망[31]에는 사각이 없었다. 덧붙여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완성된 미 함대 특유의 함대원형진의 내공은 전혀 만만하지 않았다. 이렇게 완성된 미국 함대의 대공포화는 이미 태평양 전쟁 중반부터 그 흉악함을 과시하고 있어서, 미 함대 공격에 나선 일본기들의 규모가 적은 경우엔 오로지 대공포화에 의해서만 전멸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본 해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마지막으로 벌어진 함대항공전이었던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미 함대는 전투기에 의한 원거리 요격에 실패하여 항모 호넷을 잃었고]] 엔터프라이즈가 지옥문턱을 오갔긴 했지만, 미 함대의 대공포화에 오히려 일본측이 함재기를 더 많이 잃고선 재공격을 포기했었다.[32]

4.4.2. 항공기

미 함대는 이미 F4F 와일드캣이나 F2A 버팔로와는 급수가 다른 '지옥에서 온 고양이' F6F 헬캣으로 기종전환을 끝낸 상태였으나, 일본 함대는 전쟁 초기에 비하여 성능 개선이 그다지 이뤄지지도 못한 제로센을 아직도 주력 전투기로 굴리고 있었다. 헬캣은 와일드캣의 후계기로 나온 설계부터 다른 새로운 기체지만[33], 제로센은 말 그대로 개량만 실시한, 후계기가 아닌 기종명의 뒤에 개량됐다는 표지만 붙은 A6M 그대로였다.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의 경우 양측 모두 저마다 신형기를 위주로 배치했지만 일본군의 경우 구형기의 비중이 미군보다 상대적으로 높았으며 그렇다고 신형기의 성능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소모전의 여파로 본격화한 자원난과 일본 군수체계의 문제점 때문에 공장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아 불량품만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왔고, 때문에 구형기보다 못한 부분도 많은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수량이 부족해 구형 제로센을 전폭기라는 이름하에 폭탄을 장착하여 공격기로 투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량으로 보면 더 심했는데 당시 일본 제1기동함대가 보유한 전투기, 뇌격기, 급강하폭격기 등을 모두 합친 전체 함재기의 수량당시 미해군 제58기동부대의 전투기 보유수량 보다도 적었다. 전체 함재기 수량으로 비교하면 보면 435 대 915로, 미 해군이 일본 해군보다 2배는 더 많았다. 항모 이외의 수상함정에 실린 수상기들의 경우 일본함대가 미군함대보다 조금 더 많이 갖고 있었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찰뿐이었다. 그리고 이 수상기 또한 미군이 기술 부족으로 장비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카사블랑카급같은 호위항공모함이 함대마다 수십 척씩 따라다니며 보조 비행전력을 지원해주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번거로운 수상기와 그 운용을 위한 장비와 공간, 인력을 배치하는 것보다 대공포 한 문이라도 더 다는 것이 낫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마리아나 제도 및 항공기 행동범위 내 지상기지에 배치된 제1항공함대의 250대를 합쳐도 수적 열세는 여전했다. 거기에다 고정목표인 지상활주로에 배치된 특성상 자유롭게 움직이는 항모기동부대의 기습에 취약해서 자칫 무력화될 가능성이 높았고, 상술한 바와 같이 미군의 공격이 시작되자마자 이는 현실이 되어 함대간 전투가 벌어지던 시점에서 이들 지상기지의 항공전력은 크게 약해져 버렸다.

즉 일본은 제공권 장악은커녕 미 항공대와 비비기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인 수준까지 차이가 나고 있었다.

4.4.3. 조종사

일본군의 경우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의 초기 전투 등으로 기량을 쌓았던 베테랑 조종사들은 이미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역, 라바울 항공전 등을 거치면서 거의 다 소모된 상태였다. 특히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치명상을 입은 항모기동부대는 개조항공모함 준요를 제외한 전 함대를 일본 본토로 퇴각시키게 된다. 이후 항모기동부대는 재건에 매달렸지만,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항모기동부대 소속 항공대들을 항모에서 빼내어 지상기지에서의 작전에 투입[34]하는 바람에 또 다시 손실을 입고 함상 작전에 필요한 기량을 쌓지도 못했다.[35] 잃어버린 인원들을 대체할 조종사 양성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모르겠으나 당시 일본의 조종사 양성 기관은 적고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애초에 일본군은 단기결전, 함대결전 사상에 너무 심취하여 장기전 돌입시 소모될 파일럿들의 보충과 질적향상을 심도있게 고민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36]

그 때문에 이 전투에 참가한 일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조종사들 대부분은 실전경험도 없었고 해상작전에 필수적인 장거리 해상 항법도 미숙했다. 그 이전에 항모 작전에 필수적인 항모 이착함 기량조차 수준미달이었다. 실제로 전장까지 항해하던 중 어떻게든 약간이라도 조종사의 실력을 늘리기 위해 비행훈련을 실시했으나 몇 대 이륙하지도 않았는데 이륙에 실패해서 바닷물에 비행기를 처박거나 착함에 실패하여 비행갑판에 처박는 사고가 계속 발생하니 출격하기도 전에 소중한 비행기와 조종사를 대량으로 상실한다는 항의까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훈련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던 것만 봐도 그 당시 일본군 함재기 조종사의 실력은 바닥 그 자체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타위타위에 주둔하던 동안에는 미군 잠수함의 방해로 인해 비행훈련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본디 함재기의 이륙은 항모가 맞바람을 받고 달리는 과정 중에 이루어져야 하는데, 타위타위의 좁은 해역에서는 항모의 고속 항진이 불가능했고, 외해로 나가자니 요소요소에서 설치고 다니는 미군 잠수함이 무서웠기 때문. 설상가상으로 타위타위는 바람이 강하게 부는 해역도 아니었던 까닭에 일본 함재기 조종사들은 가만히 정박한 항모에서 바람의 도움도 없이 이착함 훈련을 해야했다. 이는 당연하게도 비전투손실의 증가로 이어졌다.

다만, 악화된 기량과는 별개로 전투에 나섰던 일본군 조종사들의 사기는 높았는데, 첫 실전이라는데에 따른 흥분과 미드웨이를 빼면 미 해군과의 전투에서 이렇다할 패배를 겪지 않은 '일본해군 최정예 항모기동부대의 함재기 조종사'라는 자부심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들을 상대하는 미군 조종사들은 넉넉히 갖춰진 양성기관에서 미드웨이, 과달카날, 라바울을 거친 태평양의 베테랑들과 진주만 공습 전부터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 영국 에이스 파일럿들과 함께 뛰었던 조종사들이 교육관으로 들어와 지도하는 비행학교에서, 충분한 비행시간을 가진 덕에 임멜만 턴[37]도 가볍게 소화해내는 평균 이상의 기량을 갖고 있었다. 똑같이 싸워왔지만 후진양성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가 있었던 것이다. 이멜만 턴의 과정 보기 단적인 예로, 이 해전에서 일본의 항공모함 히요를 격침시킬 때 미국은 두 기로 구성된 뇌격기 두팀을 좌우로 한팀씩 보내 한 기는 항공모함을 조준하고 다른 한 기로는 항공모함의 이동경로를 예측해 쏘는 교차식 공격을 사용했는데 이는 전쟁 초기 일본의 베테랑 뇌격대가 사용하던 방법과 거의 동일하다.

4.5.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4.5.1. 괌 상공의 전초전

미국 함대는 전날 스프루언스의 명령에 의해 일본 함대를 추격하지 못한데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참이었다.[38] 스프루언스는 마리아나 제도에 도착한 뒤로 괌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고, 19일 새벽에도 괌과 로타에 대한 폭격을 미처에게 제안했다. 미처는 괌에 대한 폭격 대신 괌을 전투기 감시하에 두겠다고 하였다.

스프루언스의 예감은 적중하여 미군은 19일 오전 5시 30분에 괌 상공에서 이날 최초의 격추 전과를 거둔다.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제1항공함대 사령관 가쿠다 중장은 미지상군의 공격을 받게된 사이판 대신에 아직은 미 육군이 발을 딛지 않았던 괌을 중심기지로 하여 미군에 대항하려 했지만 괌에 남아있던 전력은 약 80대라는 매우 초라한 것이었다. 이미 상술한 바와 같이 비약섬으로 간 전력은 돌아오지 못했고, 이오지마를 비롯한 보닌제도의 전력 역시 위에 언급한 대로 미 함대의 공격을 받아 무력화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무력화된 트럭에 남아 있던 소수의 전력만이 겨우 제때 괌으로 합류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걸 포함해서 겨우 80대였지만 그나마도 30대는 수리중이었다. 야프와 팔라우의 전력은 미군의 시선을 끌어서 전력을 분산시킬 속셈으로 남겨두었고, 여기서도 일본기들이 발진하여 미 함대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미군은 끝내 전력을 분산시키지 않았다.

19일 당일 일본군의 최초 공격은 괌에서 발진한 제로센에 의한 것이었다. 19일 새벽에 폭장을 한 제로센 5대가 발진하였고 이중 1대가 오전 5시 50분에 미군 구축함을 공격했으나 되려 격추당했다. 비슷한 시각에 일본군 급강하 폭격기 1대도 격추당했다.

이후 괌에서 부산한 항공기 움직임이 포착되자 미 함재 전투기들이 괌 상공으로 몰려갔다. 처음엔 괌 지상기지의 일본기들이 곧바로 도망가거나 착륙하여 격납고에 숨어버리고 미군은 물러가는 식의 눈치싸움이 벌어졌지만, 본격적으로 날이 밝아지고 야프에서 증원이 도착하자 제대로 공중전이 벌어져서 오전 8시 24분부터 약 10시까지 공중전이 이어졌다. 이 때 미 함대에서 아래와 같은 신호가 발신되었다.
"Hey, Rube!"

일본 함대의 1차 공격대가 포착되자 괌 상공의 미군 전투기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신호였다. 미 함대는 함재기들을 본격적으로 발진시키기 시작하여 전투기들을 일본 함재기들의 접근경로로 보냈다.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들은 함내에 남아 있다가 피격되어 유폭하는 것을 막기 위해, 간단한 폭장을 한 채 미 함대 동쪽 공역에서 대기하였다.

4.5.2. 하늘의 칠면조 사냥

의기양양하게 전투에 돌입한 일본군 함재기들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미군기들에게 학살당했다.

오전 10시 경에 58기동부대 소속 함선의 레이더가 240km 밖에서 일본 함대의 1차 공격대를 포착하여 약 200대의 전투기들을 출격시켰고, 이중 약 60대가 일본군과 접촉하여 요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 공격대의 일부는 이 요격을 뚫고 미 함대에 공격을 시도했지만, 미 전함 사우스다코타에 타격을 입혀 사상자를 낸 것 외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함재기 71대 중 42대가 격추당하고 29대만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오전 11시 경에는 레이더가 더 많은 109대의 2차 공격대[39]를 포착하고 97km 지점에서 70대 이상을 격추시킨다. 살아남은 나머지 공격대는 미 함대에 공격을 시도하나, 이번에도 소수의 사상자를 제외하면 역시 피해를 입지 않았다. 2차 공격대 109대 중 95대가 격추당하고 극소수만이 살아서 함대로 귀환하거나 괌, 로타로 도망갈 수 있었다.

3차 공격대는 47대로 구성되었으나, 목표 선정 과정에서 빚어진 혼선으로 인해 중간에서 세력이 갈라져 버렸다. 약 3분의 2는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가 그냥 귀환했고, 나머지는 미 함대를 포착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별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미 함대는 앞선 2차 공격대가 벌인 기만책[40]의 여파로 인해 전투기 투입에 신중해졌고, 그 덕분에 3차 공격대는 7대만이 격추당하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손실만 입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11시 경에 4차 공격대 84대가 출격했으나 목표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던 바람에 미 함대를 찾을 수 없었으며, 결국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눠져 20대는 함대로 귀환했고, 나머지는 괌으로 향했다. 괌으로 향하던 공격대 중 일부는 미 항모전단을 발견해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 공격 과정에서 살아남은 잔존기를 포함해서 괌으로 향하던 공격대들은 괌 상공에서 진을 치고 있던 미군 전투기들에 의해 전멸당했다. 한편, 함대로 귀환하던 그룹은 귀환 중간에 미군 정찰대들과 접촉하여 교전했다. 그런데 이 미군 '정찰대'는 정찰 임무를 띈 공격/폭격기와 호위 임무를 띈 전투기가 각 1대씩 1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정찰대 치고는 전투력이 상당했고, 결국 귀환하던 그룹의 절반이 격추당해 9대만이 함대로 귀환했다.

이 전투에서 벌어진 함대항공전의 양상은 이전까지 벌어졌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4차례에 걸쳐 투입된 일본 함대의 함재기들은 총 326대. 정찰에 동원한 기체까지 합치면 369대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빠졌다. 미국 함대로부터 크게 떨어진 지점(평균 100km 정도)에서부터 비행대대급 단위로 미리 길목을 막고 기다리고 있는 미군 함상전투기들에게 조직적인 요격을 반복해서 당했다.

필리핀해 해전 이전에도 미군 항모를 공격할 때 함재기의 요격을 받긴 했었다. 그러나 이 때는 미군이 보유한 레이더의 성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데다 이를 운용하는 병력들의 숙련도도 낮았다. 때문에, 일본군 비행기들은 적어도 미 함대가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저항에 부딪혔으며 고도와 위치 선점 등의 문제로 인해 미군 함재기들이 일본군 함재기들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 함대가 보낸 공격대들 중 겨우 1/8정도만이 미 함대 상공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미 함대에 확실한 피해는 입히지 못한 채 역으로 대공화망에 털려버렸다. 이들에 의한 미 함대의 피해는 항모 2척,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이 '사소한 피해'를 입은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에다 미 해군 함대는 앞서 공격했던 괌을 다시 공격했다. 낮 동안 미 함대 동쪽에서 대기중이던 급강하 폭격기들과 뇌격기들이 괌과 로타를 폭격했다. 이는 특이하게도 해당 부대의 자의적인 판단으로서, 무장도 달려 있는데 적의 공격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할 것 없이 기다리느니 괌을 공격하러 가자고 생각한 것이다. 대기하라는 지시를 무시하고 멋대로 공격을 간 것 때문에 견책당할 것이란 우려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폭격 성과가 좋아서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이후 4차 공격대를 쫓아온 전투기들이 4차 공격대를 때려잡았고, 일본 함대의 공격이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몰려온 미군기들이 괌과 로타를 다시 공격했다. 이로 인해 미 함대에게서 겨우 벗어나 괌으로 도망친 소수의 기체들 역시 죄다 고철이 되어 버렸다. 이 와중에 다른 기지에서 증원차 괌에 왔던 일본군 전투기들도 같이 휘말려서 섬멸당했다.

이 전투에서 보여진 일본군 조종사들의 기량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당시 참전한 미군 조종사의 보고에 따르면 공격기들은 미군 전투기가 뛰어들었다 하면 진형을 흐트러뜨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다니다가 격추당하고, 전투기들은 미군 전투기에 대항하고 아군 공격기를 보호하기는 커녕 도망치기 바빴다고 한다.[41]

기량만 문제가 되었다면 모르겠으나, 장비의 신뢰성 역시 일본군의 패배에 한 몫했다. 특히 무전기의 성능 및 신뢰성 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3차 및 4차 공격대의 분산은 이 무전기가 한몫했다. 또한 점차 열악해지기 시작한 본토의 공업능력은 항공기 자체의 신뢰성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미군에 의한 격추가 아닌 사고로 인해 상실된 기체 중 다수가 기체 이상에 의한 손실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전투에서 미 해군은 F6F 헬캣 포함 31대의 함재기를 잃는 데에 그쳤지만 일본 해군의 함재기 손실은 그 10배가 넘는 것으로 알려지자 미국 전역이 떠들썩해졌다. 400대라고도 하고, 386대라고도 하는 등 전과는 들쑥날쑥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훗날 교차검증에 의한 확인된 실제 전과는 일본군 공격부대 220대, 정찰기 19대 합쳐서 총 239대였지만, 그렇다고 쳐도 당일 일본 함대가 투입한 전력의 약 70%가 단 하루 만에 증발한 것이었다. 지상기지의 일본기들까지 합친 미군의 당일 전과는 257대였다. 여기에 미군에 의한 격추가 아닌 사고로 인해 일본군이 잃은 33대를 포함하면, 일본군은 단 하루 일어난 항공전에서 총 29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미 조종사들은 후에 이걸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Mariana Turkey Shoot)[42]이라 불렀다. 자료에 따라서는 인터뷰를 했더니 '마치 옛날 칠면조 사냥[43] 같았다'라고 한 것에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얄궂게도 이 전투에 참전한 일본군의 항공모함 중 쇼카쿠와 다이호는 각각 학, 봉황이라는 조류에서 이름을 따온지라 함께 칠면조 취급을 받은 격이다.

이렇게 항공전에서만 패했다면 본대는 도망쳐서 후일을 기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4.5.3. 잠수함들의 활약

하지만 전투 초장부터 몰래 숨어든 미 잠수함의 맹활약에 일본 해군은 대형 정규항모 쇼카쿠급 항공모함 다이호급 항공모함을 손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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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의 7번함인 SS-218 알바코어(Albacore)
19일 오전 8시 16분 제임스 블렌챠드 중령이 지휘하는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의 7번함 SS-218 알바코어(Albacore)호[44]가 2차 공격대를 발진시키던 오자와 제독의 항모전단을 발견하고 가장 가까운 다이호를 공격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알바코어의 사격 통제기가 고장났고, 때문에 육안으로 확인해서 어뢰를 발사해야만 했다. 총 6발의 어뢰 중 4발은 빗나갔고, 나머지 2발 중 1발은 막 이함하던 고마쓰 상사의 살신성인으로 막아냈으나,[45] 최후의 한 발이 명중하여 항공유 저장고 2개를 작살냈다. 피격 당시에는 대단한 피해가 아니라고 판단했으나, 폭발성 가스가 새고 있었다.

폭발성 가스에 대한 설은 2가지가 있다.

공식전사에서는 누설된 항공유의 기화를 폭발성 가스 발생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앞 문단에서 언급된 것처럼 항공유 저장소도 2개소가 파괴되었고, 폭발 사유 역시 파괴된 항공유 저장소에서 기화된 항공유의 폭발이었다는 것이 일본 당국의 공식적인 입장이자 현재의 정설이다. 이 당시의 항공유는 현재의 항공유와 같은 등유 중심의 혼합유가 아니라 순수 가솔린[46]이었다는 걸 알아두자.

두번째 설은 함정의 연료설, 이른바 '타라칸 원유'설이다.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블로그에 따르면 일본군도 나름대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한 개량을 한 덕분에 항공유 저장탱크와 관련배관은 각종 유출방지 및 파손방지 처리를 해놓아서 누출사고가 없었으나, 함정용 연료배관은 그런 조치가 없어서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평소에 중유같은 것은 누출되도 엄청난 화재가 아니라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아서 항공유 공급계통같이 촘촘하게 일정 구역을 봉쇄처리할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당시에 사용했던 함정용 연료가 제대로 정제된 경유나 중유가 아니라 이렇다 할 정제도 거치지 않은 원유에 가까운 것이라 휘발성 물질을 대거 함유하고 있었다는 거다. 이 문제의 연료는 북보르네오의 타라칸 유전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타라칸 유전의 석유는 품질이 아주 좋아 특별한 정제 없이도 보일러에서 잘 연소되었다. 미군 잠수함 때문에 연료의 해상수송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이러한 특성은 아주 유용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되레 독이 되었다는 게 타라칸 원유설의 요지이다. 타라칸 원유가 원인이라는 설은 현재는 소수설이지만, 1960년대 일본에서 발행된 소설 및 각종 문헌에서 타라칸 연료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꽤 오랫동안 정설 대접을 받았다.

원인이야 어쨌건 결국 폭발성 가스가 격납고에 퍼졌고 폭발성 가스를 뽑아내기 위해 환풍설비를 가동시켰는데, 담당 장교가 해당 구역 내의 환풍설비만으로 가스를 배 밖으로 뽑아내는 게 힘들자 격벽을 개방해 가스를 배 전체에 뿌리고 만다. 가스를 배 전체로 퍼뜨린 후 배 전체의 환풍설비를 사용하면 금방 다 배 밖으로 빼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결국 그 날 오후 5시 32분, 주 격납고의 발전기에서 불꽃이 튀면서 폭발성 가스가 인화, 폭발하며 격침되었다. 전체 승조원 2,150명 중 1,650명이 전사했다. 일본군 측의 작전 보고서에 의하면 항공유 유출 때문에 이미 처음부터 격납고 전체에 가스가 차 버렸으며, 어떻게든 빼내기 위해 열 수 있는 문은 모조리 다 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어서 부득이하게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격납고 측면 벽을 억지로 뜯어내기까지 했단다. 함 전체로 퍼뜨린 게 아니라 격납고 전체에 꽉 찬 휘발성 가스가 제대로 빠져나가질 않은 것. 아예 환기 기능이 제 구실을 못 했거나 그걸로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휘발유가 기화되어 있었던 거다. 애초에 피뢰 충격으로 항공유 저장고와 파이프라인이 파괴된 것도 진수 시점인 1943년 들어 점차 심해지기 시작한 숙련공 부족 사태로 인한 부실공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일본측의 분석이다. 즉, 평시에도 가장 중요한 군수지원이라는 후방 지원분야에서 써먹어야 할 숙련공을, 생길 만 하면 보병으로 징집 → 전장에서 갈아넣어버리는 상식적으로도 이해 못할 한심한 짓을 저지른 일본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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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 카발라 SS-244
허만 코슬러 소령이 지휘하는 또다른 가토급 잠수함 카발라(Cavalla)호는 정오 무렵에 쇼카쿠를 공격할 위치에 도달하는데 성공했고, 6발의 어뢰를 발사해 그 중 3~4발이 명중했다. 명중한 어뢰 중 1발이 주 격납고 부근의 전방 항공유 저장고에 적중하여 재급유를 받고 있던 함재기들이 폭발했다. 또한 새어나온 연료가 퍼지면서 대화재를 일으키고 탄약과 폭탄도 뻥뻥 터지며 쇼카쿠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함선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고, 화재를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한 함장은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곧 함 내에 쌓여 있던 폭발성 가스가 항공기용 폭탄의 폭발에 의해 인화, 폭발하여 쇼카쿠는 얍(Yap) 섬 북쪽 230km 해상에서 쪼개지면서 침몰했다. 1,263명의 인원이 쇼카쿠와 운명을 같이 했다. 일본군 구축함 우라카제와 기타 구축함들이 카발라 호에 100발이 넘는 폭뢰를 투하하였으나 과감하게 한 번도 내려가보지 않은 심도 120M까지 잠수하면서 무사히 탈출하였다. 또한 허만 코슬러 소령은 처음 초계에 나서는 함장이였기에 항모부대의 공격에 투입되지 않고 플라잉피시와의 교대를 위해 이동하던 중 일본의 급유대를 만나 추적하여 쇼카쿠를 공격해 첫 초계에서 항공모함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일본 함대의 항모 2척과 2,913명의 인원, 그리고 24대의 항공기가 추가로 사라졌다. 항공기만 따지면 함대 전체가 보유한 473대의 함재기/수상기 중 60%가 넘는 314대가 하루만에 증발해 버린 것이다.

4.5.4. 미군의 반격

그 다음날에는 미 해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20일 오후 3시 40분까지 미 해군은 일본 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날 4시 5분, 자세한 보고가 올라왔고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오자와의 아웃레인지 덕에 일본 해군 함대의 위치는 미 해군 함재기의 행동반경 끝자락에 간신히 걸려 있었고 곧 해가 질 것이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상황이었지만, 결국 공격이 실행되었다.

미 해군 함재기들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 오후 6시 30분에 일본 함대에 도달했다. 처음 발견한 것은 유조선을 포함한 보급함대였는데 연료가 부족한 일부 함재기들은 다른 목표 대신 이 함대를 공격하고 그대로 귀환했다. 유조선 2척이 큰 피해를 입고 나중에 배에 일부러 구멍을 내어 자침하였다. 나머지들은 계속 목표를 찾아 나섰는데,. 항모 히요는 벨로우드가 내보낸 어벤져 뇌격기 4기의 폭탄과 어뢰 공격을 받고 멈춰서 있다가 새어나온 항공유가 인화, 폭발로 침몰했다. 이 때 히요의 요코이 도시유키 함장은 배와 최후를 같이 하겠다며 선실에 혼자 남았는데, 폭발 때 선실이 부서지고 정신을 잃은 뒤 깔고 앉아 있던 나무상자 때문에 수면으로 떠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다른 버전도 있는데, 함장이 선실에 들어가서 죽음을 기다리다가 '가만, 내가 뭐하러 죽는 거지?'란 생각에 마음을 바꿔서 나무상자를 잡고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이렇게 살아남은 요코이는 이후 이렇다 한 처벌을 받지 않았고, 천수를 누리다 1969년에 죽었다.

다른 항공모함 즈이카쿠, 준요, 치요다, 전함 하루나[47]는 심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일몰 직전에 시작된 공격은 공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미 함재기들에게 연료부족과 야간착함이라는 이중고를 강요했다. 그냥 두었다가는 한밤중에 함재기들이 바다에 불시착하고 구조가 늦어지면서 많은 조종사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 마크 미처 제독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마디의 명령을 내린다.
"빛을 밝혀라!(Turn on the lights!)"
미처 제독의 명령에 따라 전 함대의 함선들은 탐조등을 하늘을 향해 켜고 조명탄을 발사하여 불꽃놀이 축제를 벌이는 것처럼 하늘을 수놓아 조종사들에게 함대의 위치를 알렸다. 호위기가 없는 텅텅 빈 항공모함이 야간 등화관제를 깨고 자기 위치를 광고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함대의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모든 구축함들도 대잠 임무를 해제하고 잠수함에 피격될 위험을 감수하며 조종사 구조에 전념했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불을 밝히는 시도 자체는 훌륭했지만 죄다 불을 밝힌 바람에 어떤 것이 항모고 어떤 것이 그 외의 함선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구축함이나 순양함에 착함을 시도하려다 불시착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일부는 비행 갑판에 충돌하기도 했고 대다수는 바다에 추락했다. 게다가 당일 밤 미함대 인근 해상에서는 번개마저 치고 있어서 귀환하던 조종사들이 번개 불빛에 현혹되기도 했다. 이 때 미 해군 함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함대 상공을 비췄음에도 불구하고 함재기 80대를 잃고 만다. 이런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미처 제독의 함대는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건 조종사들에게 목숨을 걸어 보답할 차례라는 일념하에 구조 활동을 벌였고, 가장 중요한 목표인 수많은 조종사들을 구할 수 있었다.

조종사 출신 참전용사 한 명[48]은 인터뷰에서 해당 장면이 언급되자 "구축함들이 우리를 찾아오러 나와서 탐조등을 비췄죠. '집은 저 쪽이야' 라면서... 그 광경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함대 전체가 목숨 걸고 자신들을 위해 위치를 노출한 것이니까. 멀쩡히 잘 있는 조종사도 폭탄과 함께 적함에 돌격시킨 일본과 상당히 대조되는 일이다. 마크 미처 제독을 포함한 58기동함대 수뇌부는 정규항모 1대의 항공대 파일럿 100여명이 값비싼 항공모함 그 자체와 함재기 100대, 조종사를 제외한 승무원 전원, 그리고 조종사들을 찾다가 잠수함 공격에 희생될지 모르는 여러 함정들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 해군이 태평양에서 승리한 이유는 단순히 엄청난 물량뿐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미 해군은 일본 해군에 비해 손실기를 금방 보충할 여유가 있었으므로 미 해군 함대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훨씬 적었다. 이 당시에도 그랬고, 현대에도 그렇듯 한 명의 조종사는 한 대의 전투기보다 언제나 훨씬 가치있는 존재이다. 게다가 그 조종사가 숙련되어 있다면 그 교육비용과 실전경험은 돈으로 따질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항공기는 다시 만들면 되지만, 조종사는 아니다. 조종사는 항공기를 잃어도 다른 기체로 옮겨탈 수 있지만, 조종사가 없으면 전투기는 그냥 자리만 차지하는 쇳덩어리 + 고가치의 고정표적에 불과하다. 마크 미처 제독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랬기에 필요한 순간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적극적인 구조 활동 덕분에 많은 조종사들이 집까지 찾아올 수 있었고, 불시착한 조종사들도 그 후 며칠간 대부분 구조되었다. 그 와중에 미국의 불침함은 1기를 제외한 모든 함재기가 성공적으로 귀환했으며 그 나머지 한 기도 파일럿 수색에 성공해 비행대가 전원 생존했다. Battle 360에 소개된 일화를 따르자면 파일럿 수색에 성공한 배글리급 구축함 패터슨(DD-392, USS Patterson)에서 통신을 보냈는데 "킬러 케인의 몸값은 아이스크림 갤런인가? (How much ice cream is Killer Kane worth?[49]"킬러 케인은 아이스크림 얼마 어치인가?" 정도다.])" 라고 협상을 시도했다. 킬러 케인의 본명은 윌리엄 R. 케인( William R. "Killer" Kane)[50] 중령으로 엔터프라이즈의 제10 전투비행단(VF-10) 단장이었다. 물론 구축함은 자신들의 공적을 자랑하기 위한 농담이었고, 항공모함으로서는 전투비행단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이었던 케인 중령 몸값(?)에 비해 요구사항이 매우 저렴하여 만족하였다. 또한 다른 조종사보다 직책이 훨씬 높아서 구축함 패터슨은 총 25갤런(95리터)의 아이스크림을 엔터프라이즈로 부터 받았다고 한다.

아이스크림이 언급된 이유는 당시 엔터프라이즈가 포함된 함대를 지휘하던 마크 미처 제독이 구조 작업을 독려하기 위해 파일럿을 구조하는 배에 아이스크림을 좀 더 배급하겠다고 선언했었기 때문이다. ( 비행대 리더 아이스크림 이야기, 미 해군의 아이스크림 공장 당시 구축함 승무원들의 급양환경이 심각하게 열악하여서 아이스크림 생산설비가 딸린 대형함과 함께 작전에 투입되면 어떻게든 아이스크림을 얻어내기 위해 혈안이 됐다고 한다. 플레처급 구축함 USS 키드(DD-661 USS Kidd)는 비슷하게 조종사의 몸값으로 아이스크림을 뜯어내는 행위로 유명한 배였고[51], 심지어 필리핀해 해전보다 더 전인 산호해 해전 당시는 CV-2 렉싱턴에서 치명타를 입어 침몰 중인 와중에 아이스크림만 빼내서 맛있게 나눠 먹는 에피소드도 있을 정도.[52] 이 에피소드도 그런 맥락에서 보면 구축함 승무원들의 절박함이 느껴진다.

5. 결과

격추 43대, 착함실패/불시착/오인 사격 등으로 87대, 합계 130대의 함재기를 잃었으나 함선 피해는 전무했던 미군에 비해 일본군의 피해는 압도적이었다. 전투 첫 날에는 항모 2척을 그 다음날에 항모 1척을 또 잃었다. 둘째 날까지 잃은 함재기/수상기는 합계 426대, 지상 항공기는 50여대를 손실하였다. 조종사를 비롯한 항공승무원은 445명을 잃었다. 대형 정규항모인 쇼카쿠 다이호, 정규항모에 버금가는 크기를 자랑하는 개조항모 히요가 가라앉아 버렸고 쇼가쿠의 동형함 즈이카쿠와 히요의 동형함 준요도 큰 피해를 입었다. 주력항모로 쓸만한 배가 모두 침몰하거나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 해군의 함대항공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일본 해군 항공대에 남은 조종사는 경항모 하나의 비행전대를 완편하는 데도 벅찰 수준이었다. 전함 야마토를 위시한 수상함 세력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항공 엄호가 없는 함대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는지는 일본 해군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머지 일본의 수상함 세력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완전히 발리게 된다.

거기에다 이 전투는 그저 일본 함대의 괴멸만을 초래하지 않았다. 일본함대가 사라지자 거칠게 없어진 미군은 사이판 전투를 위시로 하여 마리아나 제도를 장악해 버렸다. 이로 인해 1943년에 일본이 설정한 절대국방권이 박살났고, 그 여파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도조 히데키 내각이 무너졌다.

6. 평가

이 전투는 아래와 같은 이유로 미군이나 미국의 전사가들 사이에서 '일본 해군을 사실상 와해시킨 결정적인 전투' 또는 '일본 해군의 등뼈를 부러트린 전투'로 평가받는다.

겉모습만 보자면 독수리의 날처럼 단일 전투에서 압도적인 교환비를 올린 것으로 유명해진 몇몇 항공전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애초에 일방적인 전투가 될 소지가 다분했던 여타 항공전 사례들과 달리, 양쪽 모두 제대로 된 부대 편제를 유지한 상태로 각자의 주력끼리 정면으로 부딪히고서도 일방적인 교환비가 발생하고, 이 단일 항공전 하나로 양자간의 전략적인 추가 확 기울어지기까지 한 예는 매우 드물다. 이렇게 된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미군은 앞서 나온 바와 같이 일본군에 대해 질적[53]은 물론 양적 우위[54]를 모두 갖고 있었다. 이는 본 해전을 설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들어가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일단, 미 함대는 일본 함대를 정보력으로도 압도하였다. 실질적으로 교전을 실시한 기동부대간의 정찰만 보면 일본이 유리하게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 기동부대는 미 항모전단이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를 먼저 발견했고, 상대의 닿지 않는 거리에서 먼저 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여차하면 괌의 비행장으로부터 지상 주둔 항공병력의 지원을 받음과 동시에 함재기들이 이 비행장을 활용하여 보다 융통성있는 작전도 가능했다(마지막 부분은 실패였다).

하지만, 단순히 일선 부대들 간의 정찰을 떠나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해 대처하는 부분에선 미군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전투 개시 전에만 해도 일본 해군 수뇌부들은 미군의 공격시기와 공격지점을 헛짚고 있었다가 미 함대가 예상보다 일찍 마리아나 제도로 몰려오자 부랴부랴 전력을 수습하여 전투에 돌입했다. 자신들이 원하는 시기와 지점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준비할 수 없었다는 것에서 부터 이미 지고 들어간 싸움이었다.

반면, 미군의 경우 일찌감치 암호가 숭숭 뚫린데다, 결정적으로 3개월전 일어난 해군 을 사건, 연합함대 사령장관 코가 미네이치와 주요 참모들이 탑승한 수송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것도 모자라 그 수송기에 있던 일본 해군의 新 Z작전 계획을 통째로 입수해 일본군의 작전계획 전부를 얻어냈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해군이 어느 정도의 규모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디서 자신들과 맞붙으려는지 짐작하고 있었으며 덕분에 미 해군은 일본 해군 함대를 정박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었다. 스프루언스가 자신들의 원래 목적인 마리아나 제도 점령에 집중하면서 일본함대에 대해서는 요격전에만 임할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괌을 비롯한 지상 비행장들을 본 전투 발발 이전에 일찌감치 박살내 놓고, 전투 와중에도 수시로 두들겼던 것도 위에서 언급된 일본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55] 그럼에도 연합함대는 자기들의 작전이 미군에 전부 털렸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작전에 나갔다가 기다리고 있던 미 해군의 공격에 칠면조 사냥을 당하고 말았다.

위 문단의 마지막에서 또 다른 승패의 이유가 나온다. 바로 목적의식이다. 시간을 거슬러 미드웨이 해전을 살펴보면 당시 공격자의 입장이었던 일본군은 미드웨이 제도의 점령과 미해군 항모부대의 괴멸이라는 두 가지 목적 사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지 않은 채 전투에 돌입했다가, 일본 항모부대 섬멸이라는 하나만 노리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미군의 반격에 휘말려서 그 어떤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참패하고 말았다. 반면, 본 해전에서 공격자 입장이 된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우선 순위로 두고[56] 그에 따르는 부가적인 것들을 후순위로 돌림으로서 일본군 오자와 제독이 파놓은 함정에 걸리지 않고 자신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일본군의 방해를 물리쳤고, 끝내 마리아나 제도의 점령을 이뤄냈다.

따라서, 단순히 미 해군, 일본 해군의 장교단의 기량이나 기술 수준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는 없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자신이 목적한 바와 해야 할 일을 인식하지 못한 채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대응하다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머지않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일본 해군은 이 해전에서 참패하면서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달카날 전투 이후와는 다르게 항모기동부대를 재건하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항공기 손실은 어떤 식으로든 보충할 수 있었지만, 다이호, 쇼카쿠급과 같이 손실된 정규 항모의 보충은 당시 일본의 조선 능력과 보유 자원상 이미 한계에 부딪힌 상태였다.[57] 결정적으로, 항공기를 운용할 인력은 더이상 어찌해볼 방법이 없었다. 당시 작전에 참가한 함재기 조종사 및 승무원들은 대체로 전쟁 초기 중일전쟁과 영국과의 해전을 통해 경험을 풍부히 쌓았던 1항전과 2항전, 5항전에 소속되어 참전한 인원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기량이 악화되어 있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나마 그 당시에 일본에 남아있던 항공모함에서의 항공기 운용 경험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이 필리핀해 전투 단 한 번의 전투에 싹 쓸려나갔다. 게다가 제1기동함대 창설과정에서 그나마 그때까지 남아있던 항모 탑승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을 긁어모아서 중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으로 배치했는데, 이들 베테랑들의 손실도 매우 극심했다. 총 35명의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들 중 22명이 전사했고 몇몇은 목숨을 어찌 건졌으나 전선에 복귀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비록 아직 일본 해군의 수중에는 즈이카쿠를 비롯한 다수의 항모가 있었지만, 항공기도 그걸 운용할 사람도 없는 항모는 그저 덩치 큰 수송선에 불과했다. 이로서, 일본 해군 전력의 중핵이었던 항모기동부대는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이는 일본 해군의 활동 범위가 일본군 점령지 내 지상 비행장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범위 안으로 제한됨을 의미했고, 그런 탓에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미 해군과 직접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기껏해야 방어선 돌파만을 노리는 수준으로 비참하게 추락했으며, 그마저도 전 해군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미군 입장에서는 대일본전의 최대의 걸림돌이었던 일본의 연합함대 해군이 겨우 재건한 항모전대 주력을 격퇴함으로서 제공권과 제해권을 종전까지 영구 장악했기에 이 해전 이후에 펼친 작전을 매우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일본 해군이 껍데기만 남았기 때문에 앞으로 미 해군은 행동의 제약을 크게 덜었지만, 미 해군이 이걸 깨달은 것은 레이테 만 해전부터였다. 미 해군이 진작에 일본 해군의 사정을 알았다면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삽질이 조금은 덜했을지도 모른다.

지상기지의 항공기들과 항공모함이 주축이 된 기동부대는 절대방위선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방어전략의 필수적인 요소였는데 필리핀해 해전을 거치면서 죄다 날아가 버렸다. 이로 인해 절대방위선의 주요 거점인 마리아나 제도 상실이 거의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고,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항모부대의 괴멸과 마리아나 제도의 상실로 인해 일본군 상층부가 정했던 절대방위선은 박살나 버렸다. 미군의 손에 떨어진 마리아나 제도는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요긴한 전진기지이자 일본 본토를 신형 전략폭격기 B-29의 행동반경에 넣을 수 있는 항공기지로 안성맞춤이었고, 미군은 이를 십분 활용하게 된다.

본 해전 이후 전황이 급속도로 기울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주력이 박살나고 주요 거점을 미국에게 뺏긴 일본은 어떻게든 그냥 버티는 것 말고는 대규모 반격작전 같은 정상적인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연함함대 사령관 도요다 소에무 제독은 아래와 같이 훈시했는데
"이 한 번의 전투에 제국의 흥폐가 달렸다."[58]
그의 말대로 일본제국의 흥폐(興廃)[59]가 결정되어버렸다.

이 전투의 여파로 인해, 일본 본토가 본격적으로 공격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7. 후일담

실제 결과는 일본해군의 함대항공력을 박살낸 대전과였지만, 적어도 본 해전이 끝난 직후 미 해군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일단 전투의 전반적인 흐름이 미 해군이 미리 자리잡고 요격전 위주로 우주방어를 취한 탓에 해전 규모에 비해 대함전과가 미미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이 전투가 끝나고 미군 높으신 분들은 물론이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의 지휘하에 있던 제58기동부대 지휘관 마크 미처 제독까지도 요격전에만 전념하고 공세로 전환해 일본 함대 격파에 나서지 않은 스프루언스의 작전지도를 겁쟁이라며 마구 씹어댔다.[60] 특히 윌리엄 홀시 제독은 즈이카쿠를 살려서 보낸 것에 불만을 품고 있어서, 후일 레이테 만 해전 도중 즈이카쿠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가자 즈이카쿠가 포함된 오자와 함대는 항공대가 없는 깡통부대 내지는 미끼부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61] 즈이카쿠를 죽여버릴 기세로 즈이카쿠만 쫓아다니게 된다.[62]

하지만 전후 일본 측 자료가 공개되고 이를 바탕으로 해전을 복기한 결과 오히려 그 상황에서 요격전이 최선이었다는 결론이 나와 스프루언스의 작전 지도가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이 당시 일본 해군의 실질적인 전력은 항공대의 조종사였고 그 외의 모든 함정과 전투기 등은 간단히 말해서 조종사가 싸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수기재였던 상황이었는데, 간신히 남아있던 조종사들은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에서 씨가 말라버렸고 일본 해군은 안 그래도 부족한 조종사 전력을 이후에도 제대로 복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해군 내에서는 비교적 일찍 스프루언스의 공적이 인정되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서 그의 공적이 인정 받은 건 그의 사후에 니미츠 제독의 전기가 출간되고 나서다.[63]

이와 관련하여 윌리엄 홀시 제독이 후일 "내가 필리핀에 있고 스프루언스가 레이테에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이란 말을 남겼는데[64], 파괴하지 못한 전함 세력과 애매하게 살아난 항모전단이 각 지휘관의 특성과 애매하게 조합되어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홀시가 평생까임권을 얻는데 일조했으며, 스프루언스는 이 해전에서 공세적으로 나가지 않아 역시 생전에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조금 안타까운 부분.[65] 저렇게 된 배경에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너무 담백한 성격도 한몫 했다.[66]

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 일본군 조종사는[67][68] 훗날 "내 평생에 그렇게 많은 구라망[69]은 처음 봤다."면서 당시의 압도적인 전력차에 혀를 내둘렀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항공어뢰가 미 해군 항공대 뇌격기들의 주 대함 공격무장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되었다. 뇌격기 항목을 보면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하겠지만, 여기에는 미 해군으로서는 차마 대놓고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으니 미군의 항공어뢰는 전쟁 초중반에 신뢰성을 보장받지 못했기에 미 해군항공대에서 외면당하고 있었다.[70] 특히,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 뇌격기들을 전멸로 몰아넣은 주원인으로 어뢰가 지목[71]된 이후로 미군 뇌격기 조종사들은 어뢰의 사용을 기피했다. 문제의 항공어뢰는 전쟁 기간에 지속해서 개량되어 신뢰성을 높였지만, 일선 조종사들의 의구심을 떨칠 기회가 없었는데, 이러한 항공어뢰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씻어낸 것은 본 해전 이후였다.

한편 이 전투에서 구축함 유키카제도 참전했었으나 대잠작전 중 기뢰폭발로 손상을 입어 퇴각해야 했다. 물론 그 뒤에 벌어진 참상을 보면 정말 이 배가 남의 운을 빨아먹는 것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

이 해전에서 에식스급 항공모함 4번함 호넷이 제대로 데뷔한다. 60기 넘는 일본군 항공기를 격추하고 원수 쇼카쿠를 소파시키고 즈이카쿠를 대파시킨다.


[1] 엔터프라이즈, 에식스, 요크타운, 호넷, 와스프, 렉싱턴, 벙커힐 [2] 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사우스다코타, 인디애나, 앨라바마, 아이오와, 뉴저지 [3] 쇼카쿠, 즈이카쿠, 다이호 [4] 그나마 이중에서도 2/3가 아군의 오폭이거나 고난도인 야간 작전에서 착함에 실패해서 추락한 항공기다. 즉, 실제 전투 손실은 겨우 41대다. [5] 즈이카쿠만 생존했다. 이로서 일본 제국 해군이 해체 전까지 운용한 정규항공모함은 즈이카쿠가 유일하다. [6] 손실기 476대 중 무려 314대가 6월 19일 단 하루만에 손실되었다. [7] 태평양 전선 중반에 이르자 전선의 규모가 자신들의 역량을 벗어났다고 판단, 전선을 축소하고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설정했다. 태평양 지역의 경우 서부 뉴기니 - 캐롤라인 제도 - 마리아나 제도를 잇는 일련의 선이 여기에 해당된다. [8] 1위는 레이테 만 해전, 2위는 유틀란트 해전. [9] 과거에는 필리핀 방어전이라고도 불렸는데, 이건 일본 입장에서 본 것이고, 미국의 입장에서는 탈환전이 맞다. [10] 마리아나 제도 점령 이전에는 중국에서 B-29를 출격시켰지만 보급이 쉽지 않았고 작전기지가 일본군의 공격에 노출되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제대로 된 작전을 펼칠 수 없었다. [11] 과달카날 전역이 끝난 뒤 캑터스 비행단이 확대 개편되면서 신설된 솔로몬제도 항공사령관으로 배치되었고, 그가 재직하던 시절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암살계획이 진행되어 그 실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12] 타라와 전투가 이 작전 중 일어난 격전이다. [13] 강력한 거점을 상대로 거점의 방어가 취약한 시간대를 골라 먼저 전투기들을 보내서 적 항공기들을 우선 청소하자마자 공격기,폭격기들을 보내 지상의 대공화망과 활주로 같은 항공기 운용시설을 공격하여 적 거점의 방어력을 떨어트린 뒤에 지상의 기반시설들을 마지막으로 박살내는 방법이었다. 기존의 전투기,공격기가 혼재된 공격 방식보다 아군의 피해는 줄이면서 적 거점의 전투력, 특히, 항공세력을 제대로 거덜내버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14] 일본군은 200여대의 항공기와 22만톤에 달하는 함선 피해를 입었다. [15] 원래부터 일본 해군은 자국의 수송함대 보호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서 가용 수송선이 심각하게 줄어버린 다음에야 수송함대와 그 함대를 보호하는 체계를 관리하는 상설 부서가 생겼다고 한다. 한편 일본 잠수함대에게는 어뢰를 적 전투함을 격침하는 데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물론 이것도 결국은 일본의 열악한 생산보급능력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적의 수송함대를 공격하는 것이 후순위 임무로 규정돼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전선에서 미군와 일본군의 병참 차이는 가면 갈수록 더 벌어져갔다. [16] 일본군은 팔라우에서도 150여대의 항공기와 10만톤에 달하는 함선 피해를 입었다. 반면 미군 피해는 항공기 25대에 불과했다. [17] 현재의 인도네시아령 뉴기니섬으로, 뉴기니 섬 자체의 서부는 인도네시아가, 동부는 파푸아뉴기니(국가)가 거의 섬 면적의 절반씩 영유하고 있다. 이 곳은 본래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으나 인도네시아의 독립으로 인해 자연히 귀속되었지만, 지리/언어/문화적 차이로 인해 인도네시아 본국과 많은 갈등이 있었다. 태평양 전쟁 시점에선 맥아더 군은 1943년 섬의 동부지역을 장악했고 미군의 개구리 뛰기 전략이 실행되면서 맥아더의 필리핀 탈환 경로선 상에서 징검다리의 시작무대가 되었다. 1944년 전반기 동안 서부 뉴기니는 맥아더군의 작전 무대가 되었다. [18] 이때는 본격적인 침공을 위한 사전 정찰의 목적도 있었다. [19] 필리핀 영토이기는 하나 지리적으로는 오히려 서쪽의 보르네오 섬에 인접해 있다. 트럭 - 팔라우 - 타위타위로의 경로를 보면 당시 일본 해군이 얼마나 수세에 몰렸는지 알 수 있다. 팔라우만 해도 태평양으로 바로 튀어나갈 수는 있었으나 타위타위에 이르면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 둘러싸인 바다를 거쳐서 나와야 한다. [20] 육군은 일찌감치 증원을 포기했다. [21] 일본 해군의 점감요격작전 교리에 따르면 잠수함들은 아군 전방에 나서서 적 함대에 초기 타격을 가하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적 함대를 괴롭혀야 했단다. [22] 마리아나 제도로 직접 배치된 경우도 있고, 트럭, 야프, 이오지마 등에서 증원을 위해 대기하거나 장거리 출격한 경우도 있다. [23]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마셜제도 침공에서 사이판 전투 기간 사이에 미 항모기동부대는 취약 시간대를 골라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했으므로 사이판 전투 개시 직전의 함재기 공습도 일시적인 기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3일부터 시작된 함포사격은 지상군 상륙작전의 전단계였고, 미군이 사이판을 비롯한 마리아나 제도를 본격적으로 침공한다는 신호였다. [24] 사실 미드웨이 해전 당시는 스프루언스 제독의 선임자인 프랭크 '블랙잭' 플레처 제독이 지휘했고 플레처 제독이 개전하기 직전에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따로 행동하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스프루언스 제독이 따로 움직인 것이다. 즉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함대의 각개 행동은 스프루언스 제독의 단독 판단이 아니다. [25] 치토세와 치요다는 본래 수상기 모함으로 건조됐으나 43년 말 항모부족으로 인해 경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다. [26] 지휘관은 레이테 만 해전 당시 구리다 턴으로 유명한 구리다 다케오 중장 [27] 지휘관은 오자와 중장 본인 [28] 지휘관은 조지마 다카지 소장 [29] 같은 항공모함끼리의 대규모 전투이며 필리핀해 해전 이전에 벌어졌던 미드웨이 해전의 경우 이런 몸빵 전력을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제대로 배속해주지 않아서 항공모함이 선두에 나서버렸고 장갑이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항공모함이 미국 함재기들 공격력을 흡수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했었다. 결국 전함이나 순양함이 해야할 몸빵 노릇을 대신하던 항공모함 4척은 모두 격침돼버렸다. 오자와의 배치는 이러한 미드웨이 해전의 전훈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30] 정찰기에 의한 정확한 확인은 이뤄지지 않았다. 무선감청은 기술적인 문제로 정확도가 낮았고, 잠수함들은 행동의 제약 때문에 실시간 보고가 어려웠다. [31] 미군의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는 2차대전에서 가장 성공적인 해군 양용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고, 보포스 40mm 포 오리콘 20mm 기관포는 아직도 현역이다. [32]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약 180명의 파일럿, 항공승무원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이는 본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 일본 해군이 함대항공전을 피한 원인이 되었다. [33] 왜 설계부터 다른가 하면, 엔진부터 기존에 와일드캣이 쓰던 R-1800계 엔진과는 출력부터 다른 R-2800 엔진을 위해서 기체 설계를 완전히에 가까울 정도로 새로 만들다시피 했기 때문이다.(여기서 F6F 헬캣 문서에 들어가 보면 처음에는 1600마력 엔진용으로 만들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서 2000마력 엔진용으로 재설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경쟁기인 보우트 F4U 콜세어의 경우 처음 기체 설계부터 R-2800계 엔진용으로 만들어진 거고. [34] 이호 작전, 로호 작전 [35] 특히, 1943년 11월에 있었던 로호작전에서 당시 투입했던 항모항공대 전력의 70%를 잃어버린게 치명적이었다. [36] 파일럿 양성기관도 적은 데다 폐쇄적이고 비행이나 전투와 전혀 무관한 이유로 수시로 짤리는 탓에 배출되는 파일럿이 매우 적었다. 게다가 정작 일선에서 파일럿들의 발언권은 매우 약했다. [37] 임멜만 턴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1차 세계대전의 독일 공군 에이스였던 막스 임멜만이 고안해 낸 공중기동으로, 조종간과 러더를 이용해 비행방향을 매우 빠르게 바꿀 수 있는 기동으로 현재는 해머헤드 턴이라고도 불리는 상당한 고난도의 기동이다. 또 하나는 현대의 것을 말하는데, 위의 임멜만 턴에서 이름만 가져온 것으로 간단히 말해 비행하던 상태에서 루프(기수를 들어 크게 원을 그리며 1회전)후 루프의 정점에서 1/2만큼 롤(공중에서 수평방향으로 기체를 1회전)해 기체를 똑바로 세우는 기동이다. 이는 계기판을 볼 의식만 있으면 러더 조작이 필요없이 조종간만으로 간단히 할 수 있으며, 원래 임멜만 턴과는 달리 기초적인 수준의 기동이다. [38] 스프루언스의 통제도 있었거니와 바람도 불리해서 바람이 미함대에서 일본함대 방향으로 불고 있었기 때문에, 미 함대가 함재기를 발진시키려면 일본함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계속 변침해야 했던 것도 원인이었다. 그러나 일본 함대가 만반의 준비를 하며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추격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39] 출격 당시엔 130대였으나 기체 고장이나 함대 전방에 있던 C부대의 팀킬 등으로 인해 수량이 줄어들었다. 그 중 백미는 아래에 언급할 다이호의 격침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40] 2차 공격대 중 일부 기체가 레이더를 기만하기 위한 채프를 살포했고, 여기에 낚인 미군 전투기들은 그대로 허탕치고 말았다. [41]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에이스이며 ‘ 뵐케의 금언’ 이라는 기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명언을 남긴 오스발트 뵐케는 적기의 공격을 받으면 도망치지 말고 이에 대응해 공격해야 한다는 말을 남긴 바 있다. 항공전의 기본적인 역량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42] 해당 사건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위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The Great Mariana Turkey Shoot)"이란 표현도 널리 쓰인다. [43] 칠면조는 닭보다 4배는 크고 움직임도 느린 새다. 실력 있는 사냥꾼이라면 어렵지 않게 맞출 수 있다. [44] 왜 이름이 참치 종류냐면 미군은 원래 잠수함의 이름으로 수생동물의 이름을 주로 사용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노틸러스 역시 앵무조개라는 뜻이고, 노틸러스가 속한 나왈급 네임쉽 나왈도 일각고래라는 뜻이다. 그 외에도 블랙피쉬, 바브 등 수생동물들의 이름을 사용한 잠수함은 다양하다. 심지어 21세기 운용되는 끝판왕 시울프급은 대서양 울프피쉬(Atlantic wolffish)의 별칭이다. [45] 파일:attachment/IJNTaiho.jpg 전투기가 어뢰를 몸으로 막았다. 이 그림이 그것. [46] 참고로 휘발유는 영하 40도에서도 증발, 즉 유증기를 발생시킨다. 게다가 이 유증기는 공기보다 무거워 밀폐된 공간인 배 안에 가득 쌓이게 되는데, 이 폭발력이 실로 어마어마하다. 200리터 드럼 하나가 폭발을 해도 지상 수십미터 상공으로 드럼이 솟구치는데, 항공유가 잔뜩 저장된 항공모함의 유류저장시설에서 누유가 있었다면 정말로 배를 산산조각낼 정도의 큰 폭발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휘발유의 폭발은 단순히 화염의 문제만이 아니라 폭발시 압력 문제가 가장 크다. [47] 폭탄 두 발을 맞았고 이 중 하나가 주포탑 상부에 착탄하면서 하마터면 유폭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에 놓였으나, 함장의 신속한 탄약고 주수 지시 덕에 더 큰 피해로 이어지진 않았다. [48] 도널드 "플래시" 고든( Donald "Flash" Gordon), 전투기 에이스, 1920.7.17 ~ 2010.1.4 [49] 직역하면 [50] 당시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 내 제10 전투비행단 단장이었으며 해군 에이스였다. 해군십자장 수훈, 전후 경항공모함 사이판에 함장을 역임 [51] 함명 자체는 진주만 공습 당시 애리조나 호에서 전사한 아이작 키드 제독의 이름을 땄는데, 마침 유명한 해적인 캡틴 키드와 동일해서 해적 이미지가 자리잡았고 나중에는 유일하게 미 해군에서 졸리 로저 깃발과 해적마크를 그릴 수 있는 자격을 허가받았다. 이 일로 인해 생긴 별명이 "Pirate of pacific" 즉 태평양의 해적 패거리들 이었다. [52] 피격후 대폭발 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기에, 승조원들은 필사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며, 탈출을 감행한 셈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3918649 [53] 일단 항공기면에서도 미군은 F4F보다 스펙을 업시킨 F6F 제로센보다 기동력과 선회력이 좋았고 더욱이 방어력도 뛰어났다. 레이더면에서도 미국은 레이더를 더 발전시켜 일본 함재기 접근을 사전에 파악해 매복까지 할 수준에 도달했지만 일본군은 적에게 역탐지 된다며 레이더 연구 및 사용마저 금지시켰다. [54] 미국도 1942년에는 병력과 물자 부족에 허덕였지만 1943년 들어서는 자원입대한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마치고 실전에 투입되었고 1943년을 기점으로 그야말로 쇼 미더 머니급으로 군수품과 선박들이 폭발적으로 공급되었다. 반면 일본군은 공업화가 미국에 비해 딸렸고 인구면도 자원면에도 도저히 미국을 압도할 수가 없었다. [55] 본 해전 당시 스프루언스가 일부러 정찰 범위를 축소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함대의 위치가 정확하게 파악되는 순간 휘하 항모부대 지휘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일본함대를 치러 가자고 들고 일어나는 걸 미연에 막고 자신의 의도대로 전황을 끌고가려던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는 명확하지 않으므로 참고만 해야 한다. [56] 스프루언스 제독이 니미츠 제독에서 받은 명령은 '사이판, 티니안, 괌을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아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일본 함대를 격멸하라는 명령은 어디에도 없었다. [57] 일본의 조선소들은 본 해전 이전부터 남태평양에서의 소모전에서 피해를 입은 순양함급, 구축함급 함정들의 수리에만도 벅차하던 상황이어서 신규 함정의 건조는 그만큼 더뎌졌으며 전선을 유지할 병력이 모자라자 기술자나 대학생 같은 고급 인력들도 무차별적으로 징집하던 시기였다. [58]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라는 훈시를 한 이래 태평양 전쟁에서도 주요 격전때 마다 이와 비슷한 훈시가 있었다. [59]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 [60] 그러나 마크 미처 제독 본인도 그 때는 자신이 너무 과했다고 인정했다. [61] 이것은 이미 홀시가 부관들로부터 보고도 받은 상태였다. 단적인 예로 알레이 버크 제독(당시 대령)으로 마크 미처 제독의 부관이었다. 홀시가 즈이카쿠를 잡으러 간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 즈이카쿠가 미끼로 쓰인 것을 눈치채고 상관인 미처 제독에게 보고를 했으나, 미처는 홀시 성격상 그걸 올려봐야 듣지도 않을 것이라며 자러 가버렸다, [62] 이 때문에 홀시 제독은 나중에 사문회에 불려나가게 되는데, 거기서도 즈이카쿠를 잡으러 갔고 죽여버리는데 성공했다는 말로 그나마 다른 전대들로부터 인정은 받는다. 왜냐하면 즈이카쿠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주 원인인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항공모함들 중 최후로 살아남은 배였고, 홀시 제독은 진주만 공습 당시 예정에 맞춰서 들어왔으면 휘하에 있던 배들을 다 말아먹고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이던 허즈번드 킴멜 제독과 같은 강제퇴역절차를 밟아야 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63]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항목을 가보면 알겠지만 이같이 겉보기엔 낮은 전과와 막 나서서 떠벌리기 싫어하는 그의 성품이 맞물려서 훗날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원수 진급이 물건너 가버리고 만다. 속사정을 아는 미해군은 그에 대한 여러가지 예우를 원수계급에 준해서 해주는 꼼수를 써야했다, 스프루언스 제독을 예우해주기 위한 대표적인 꼼수가 있는데, 스프루언스는 대장으로 받는 봉급을 원수와 마찬가지로 종신토록 받을 수 있었다. [64] 스프루언스쪽은 반대로 홀시 제독이 레이테 만 해전에서 즈이카쿠를 잡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였으면 제 위치에 그냥 있었을 것"이라 했다. 실제로 마크 미처 제독의 참모장이었던 알레이 버크 제독은 즈이카쿠를 잡으려 가려던 홀시 제독에게 "즈이카쿠 저거 미끼 같은데, 버리죠?"라 했지만, 미처는 홀시에게 이를 전달하지 못한채 자러 가버렸다. [65] 실제로 니미츠 제독은 이 전투를 비롯하여 마리아나 제도 공략이 끝난 뒤 스프루언스가 여러모로 공격받자, 자신이 스프루언스에게 마리아나 제도 점령에 대해 엄격하게 명령을 내린 탓이라 생각하여 안타까워 했다. 이후 필리핀 공격에 나선 홀시에게는 어느 정도 재량권을 주는 듯이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 최종 결과와는 상관없이 홀시의 평생까임권 획득이었다. 심지어 니미츠보다도 위인 해군참모총장이자, 함대 총사령관을 겸직하고 있던 어니스트 킹 제독은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스프루언스, 자네는 (마리아나에서) 존나 잘했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건, 자네의 판단이 정확했네."(Spruance, you did a damn fine job there. No matter what other people tell you, your decision was correct.) [66] 이 부분에서는 프랭크 잭 플레처 제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67] 4차 공격대의 지휘관이었던 준요의 항공전대장 아베 젠지 대위이다. 그는 격추된 뒤 로타 섬에 불시착하여 종전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게 된다. 불시착한 뒤 한숨 돌려 항공전을 지켜볼 때 헬캣들이 미 항모전단 위는 물론이고 괌 상공, 일본 함대로 돌아가는 항로까지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걸 보고 그런 소감을 남겼다. [68] 젠지 대위가 미 함대를 공격할 때 미군도 레이더에 찍힌 수많은 항적들 중 그가 탄 기체의 항적이 어느 것인지 알게 되었다. 미 함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마구 통신을 날려댔기 때문에 삼각도법으로 무전 발신 위치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공격대 지휘관을 포착했으니 격추시키겠다는 부하의 보고에 그의 통신을 실시간으로 감청하던 미처 제독이 그가 (공격대를 지휘하기 위해 발신한 통신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어내었으므로) 이미 충분히 미군을 위해 봉사했다는 이유로 굳이 그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69] F4F 와일드캣 F6F 헬캣의 제조사인 그루먼사를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이 미군 함재전투기들을 통칭하던 단어이기도 하다. 정작 그루먼사와 전혀 상관 없는 보우트 사에서 제작한 F4U 콜세어도 구라망이라 불렸다. 당시 미군의 함재기는 대부분 그루먼사의 작품이었다. [70] 태평양 전쟁 개전초기 미군 항공어뢰의 경우, 투하 및 입수시 그 충격으로 인해 어뢰의 항주장치나 신관이 먹통이 되는 일이 잦았다. 차라리 뇌격기에 지상폭격용 폭탄을 달고 급강하 폭격을 하는 게 낫겠다고 주장하는 뇌격편대 편대장들도 많이 있었으며, 몇몇은 실제로 뇌격기에 지상용 폭탄을 달고 급강하 폭격을 했다. [71] 충격에 취약했던 항공어뢰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뇌격시 속도, 고도, 각도 조건이 너무 까다로웠던 게 컸다. 때문에 뇌격 행동에 들어간 미군 뇌격기들은 적 전투기들에게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