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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6 05:34:22

다이호(항공모함)

다이호급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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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장갑갑판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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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호급 항공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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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改)다이호급 항공모함


 
미드웨이 해전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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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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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이호.jpg
大鳳

1. 개요2. 제원3. 함생
3.1. 성능 및 건조3.2. 최후3.3. 평가
4. 매체에서의 항공모함 다이호

1. 개요

일본 제국 해군의 정규항공모함 다이호(大鳳, 대봉).

1941년 7월 10일 카와사키 조선에서 기공, 1943년 4월 7일 진수, 1944년 3월 7일 준공되었다. 함명은 타이호(大鳳, 대봉)로 명명되었으며 동형함이 없으므로 다이호급 항공모함이 아니라 다이호로 지칭하기도 한다.

함재기들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본 일본군이 현재 자신들이 보유한 항공모함들의 방어력에 불안을 느껴 건조를 시작한 장갑항모.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깨달은 아군 항모의 방어력 부족을 이유로 건조한 함이라고도 알려졌지만, 사실 이 함의 건조가 계획된 것은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1939년(마루4 계획에 의해)이다. 본래 1938년 구상되기로는 'W102'라는 155mm 6문을 탑재하는 27,000톤급 항모였다. 건조가 승인되는 과정에서 애초 800kg급 폭탄의 급강하폭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계획되었던 비행갑판은 예산문제로 인해 500kg급 폭탄에 대한 방어력으로 축소. 함재기 발함용 캐터펄트도 2기가 탑재될 예정이었지만 일본의 항모용 캐터펄트 개발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결국 캐터펄트 없이 완성되었다.

1941년에는 개량형인 개(改)다이호급 5척의 건조가 계획되고, 1945년부터 건조에 들어가 장기적으로 히류 소류는 스크랩, 아카기 카가는 연습함으로 돌리면서 이 장갑항모들이 일본의 주력항모 자리를 꿰찰 예정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으로 인해 한순간에 4척의 항모를 잃게 되고, 이 손실을 메꾸기 위해 생산성이 좋은 운류급 항공모함의 건조를 시작한다. 이로 인해 개량형 다이호급의 건조계획은 취소되고, 결국 다이호는 동형함이 없이 홀로 남게 되었다.

2. 제원

파일:다이호2.jpg
기본 제원
함선 이름 다이호 (大鳳)
제작 가와사키 중공업, 고베 조선소
운용국가 파일:해상자위대기.svg 일본 제국
구분 장갑항모
승무원 2,038명[1]
건조비 101,175,000¥
모항 마이즈루 항구
경력
설계년도 1939년 마루 4계획
기공년도 1941년 07월 10일
진수년도 1943년 04월 07일
준공년도 1944년 03월 07일
제적년도 1945년 08월 31일
침몰년도 1944년 06월 19일
함체 제원
배수량 29,300 t 계획
34,753 t 기준
37,268 t 만재
전장 260.60 m
전폭 33.6 m
흘수 9.6 m
비행 갑판 257.50 m × 30.00 m
엘레베이터 2기
기관 함본식 증기 터빈 4기
보일러 로호 함본식 보일러 8기
출력 160,000 shp (120,000 kW)
속력 33 knot
연료 중유 5,825 t
항속거리 10000 nmi (18 knot)
레이더 21호 전파 탐지기 2기
(13호 전파 탐지기 1기)
소나 수중청음기 2기, 수중탐신의 2기
장갑 제원
비행갑판 75 - 80 mm
현측 55 - 152 mm
무장 제원
대공 능력 10 cm 연장 고각포 6기 12문
25 mm 3연장 기관포 17기 51문
단장 기관포 25문
탑재 능력 항공어뢰 : 9세트 48개
항공폭탄 : 800 kg 72개, 500 kg 72개, 250 kg 144개, 60 kg 144개
휘발유 : 1,200 t (함재기 전용)
탑재 함재기 전투기 : 미쓰비시 A7M 렛푸 24기
공격기 : 아이치 B7A 류세이 25기
정찰기 : 나카지마 C6N 사이운 5기

3. 함생

3.1. 성능 및 건조

배수량은 일본의 쇼카쿠급과 비슷한 30,000t대였고, 실제로 다이호의 설계는 쇼카쿠급 항공모함에서 가장 많은 참고를 해서 설계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다이호의 가장 강력한 장점이 바로 방어력이라는 것이다. 추축국 최초의 장갑항공모함으로써 비행갑판에 20mm의 특수강판(DS강판)과 75mm의 CNC 강판을 부착하여 급강하폭격기의 500kg 폭탄 투하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확보했으며, 주요부분에 16mm 고장력강과 32mm CNC 강판 장갑재를 부착하여 수평방어를 맡기고, 160mm~55mm 두께의 CNC 강판 장갑재를 부착하여 수직 방어를 담당하도록 했다. 또한 개폐식 격납고를 채택하여 함재기를 갑판 아래에서 관리하는 비중을 늘렸다. 다만 갑판이 장갑화되면서 엘리베이터 수가 2개로 줄어들었다.[2]

연돌배치도 아일랜드형 연돌배치로 바꾸고 이에 따라 함교도 대형화되었다. 이는 비행갑판에 장갑을 깔면서 함선의 복원성을 위해 무게중심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아 기존의 일본 항모보다 함의 높이를 낮췄고,[3] 낮아진 함의 측면에다 기존의 하향굴절식 연돌을 달 경우 연돌에 바닷물이 들어갈 우려가 있었기 때문. 이로인해 연돌이 갑판 위로 올라가게 되었고, 함교와 연돌을 일체화하면서 함교의 크기도 자연스레 커지게 되었다.

다만 탑재기 수는 비슷한 배수량을 지닌 항모들에 비해 적은 편. 상술했듯이 무게중심과 함의 높이를 낮추기 위해서는 격납고 갑판을 2층으로 만들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다른 일본 항모의 경우 3층).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들의 수치가 제각기 천차만별이라 정확한 항공기 탑재량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상황.

설계시에는 5~60기를 상정했다는데, 이는 전쟁 말기에 투입된 신형 대형기의 운용이 기준이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실제로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75기를 탑재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 기록 역시 당시 쇼카쿠 즈이카쿠, 다이호에 실려있었던 601항공대의 225기를 정확히 1/3로 나눠 기록했을 뿐 실제로는 그보다 적었다는 설도 있다. 일단 건조 당시의 함재기 운용 계획상으로는 A7M 렛푸 24기, B7A 류세이 24기(+예비 1기), C6N 사이운 4기로 총 52기를 탑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31 페이지 참고).

또한 거주성도 향상되어, 해먹이 아닌 다층침대에서 취침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함내에 있던 신사에는[4] "불침 항공모함" 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 해군의 다이호의 방어력에 대한 기대와 자부심을 볼 수 있다.

3.2. 최후

취역후 이 항모는 오자와 지사부로 함대의 기함으로 첫 출전을 했지만 하필이면 첫 해전이 겨우겨우 복구한 일본 해군 항공세력을 도로 주저앉게 만들어버린 필리핀 해 해전. 첫날부터 항공모함의 존재 의미 그 자체인 일본군 함재기들은 조종사의 숙련도 부족과 고질적인 기체방어력 부족으로 인해 미군의 방공망에 제대로 박살났다. 공격에 나선 일본군 전투기들은 칠면조 신세가 되어 고양이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렸다. 결국 당시 다이호의 함재기 54기중 살아서 귀환한 것은 고작 4기 뿐.[5]

1944년 6월 19일 오전 8시 16분 미 해군 가토급 잠수함 알바코어(Albacore) 함[6]이 오자와 제독의 항모 전단을 발견하고, 가장 가까운 다이호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알바코어의 사격 통제기가 고장났고 육안으로 확인해서 어뢰를 발사해야만 했다. 총 6발의 어뢰 중 4발은 빗나갔고, 나머지 2발 중 한 발은 막 이함하던 고마츠 상등비행병조의 희생[7]으로 막아냈으나, 최후의 한 발이 명중하여 항공유 저장고 2개를 박살냈다. 피격 당시에는 별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적당히 점검하는 것으로 끝냈으나, 피해 통제 장교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항공유 탱크에서 항공유[8]가 새기 시작한 것을 늦게 파악하였다. 이 때문에 피격된지 몇 시간 뒤에는 눈이 아플 정도로 유증기가 누출되었다. 이로 인해 유증기를 흡입하여 실신한 승조원들이 속출했고, 불꽃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수리공구도 사용하지 못해 복구작업이 제대로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다. 환기장치를 풀가동 하였음에도 탱크에는 항공유가 너무 많이 남아있어서 유증기를 빼내기가 쉽지 않았고, 결국 피해 복구반이 엘리베이터를 내리고, 함선의 현창을 깨고 격납고 외벽까지 뜯어내는 대담한 조치를 실시하여 상황이 차츰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불운하게도 상황이 호전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항공대가 착함하러 돌아오기 시작했고,[9] 항공대를 수용하던 중 첫 번째 기체가 착함하는 순간 유증기가 인화되며 오후 2시 30분경 대폭발이 일어났다. 함교에 있던 고위간부가 폭발의 충격으로 갑판이 마치 엿처럼 휘어져 솟아오른 것을 보았다고 하며, 중순양함 하구로의 함교에서는 폭발과 함께 불기둥이 다이호의 측면 장갑을 뚫고 솟구치며 항공기와 승조원들이 휘말리며 날아가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승강기 주변이나 갑판에 있던 승조원들의 대부분이 폭발의 충격으로 튕겨나가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게다가 폭발로 인해 장갑갑판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나무를 입혀놓은 비행갑판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항해장이 함교 후방에 설치되어 있는 원격조작 소화장치를 작동시켰으나 화재는 진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이호는 속도가 줄어들며 정지되었고, 함교에 있던 지휘부는 기관부 인원이 폭발 당시 전멸했으리라고 판단하고 데미지 컨트롤을 포기한다. 다만 기관부가 폭발로 엉망이 된 것 맞지만 생존자가 있었으며 탈출에 성공한 인원도 있었다. 함이 정지된 이유는 폭발의 충격으로 윤활유를 공급하는 윤활유 펌프의 배관 연결부가 파손되어 기계가 불에 탔기 때문이다. 결국 함장은 일본 천황 부부의 사진을 안전하게 구축함으로 옮기고 퇴함 명령을 내렸으며, 오후 4시 28분 폭발성 가스가 다시 인화, 폭발하며 좌현으로 크게 기울며 선미부터 가라앉으며 침몰했다. 전체 승조원 2,150명 중 1,650명이 전사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쇼카쿠도 격침당했다.

다이호의 함장인 기쿠지 도모조 대좌는 다이호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려 했으나 결국 이소카제에 의해 구조된다. 하지만 제1 기동부대 601 항공사령관이자 다이호의 비행대장인 이리사 도모이에 소좌는 전사하였다.[10]

당연한 이야기지만 필리핀 해 해전은 일본 해군의 참패로 끝났고, 이 해전을 끝으로 일본 해군은 더 이상의 항공세력을 복구하지 못한 채 미 해군 괴멸을 목표로 한 공격을 포기해야만 했다.

3.3. 평가

다이호는 일본 정규항공모함 기술의 결정체였다. 시나노는 야마토급 전함의 설계를 변경해 건조한 정규항모였지만 일본이 상실한 해군 항공전력을 급히 복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건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결함이 많은 함선이었고, 결국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무리 공정을 진행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항해하던 중 아처피쉬의 어뢰 4발에 피격되며 단 한번도 실전에 투입되지 못한 채 침몰하고 말았다. 게다가 전함을 기반으로 개조한 함선이라 배수량에서 장갑의 비중이 컸고, 자연스럽게 항공모함으로서 성능은 다이호보다 크게 떨어졌다.[11].

그러나 다이호는 이론상으로 급소가 아닌 이상 어뢰 1발로 침몰할 항모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실전에서 어뢰 1발을 맞고 데미지 컨트롤에 실패해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침몰하고 말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4. 매체에서의 항공모함 다이호



[1] 계획했던 정원은 1,649명 [2] 일부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급강하 폭격으로 인해 격침당한 항공모함 4척의 전훈을 반영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1939년 마루 4계획에 의거해서 1940년에 개념과 설계가 완성되고, 41년 07월에 건조를 시작하여 43년에 진수하였으므로 장갑항모의 개념은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보는 쪽이 바람직하다. [3] 히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4] 당시 일본 대형함들은 함내에 신사가 있었다. [5] 필리핀 해 해전 당시 일본의 전체 항공기 498기 중 378기가 녹아내렸다. 이중 미군 전투기에 격추당한 것은 359기. 대공포화에 격추당한 것은 19기. [6] 이 전에 이미 텐류급 경순양함, 구축함 오오시오와 사자나미를 격침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알바코어도 결국 44년 11월에 초계중 기뢰 폭발로 인해 침몰하게 된다. [7] 어뢰를 이함중인 함재기로 막았다. 즉 그대로 기수를 해면으로 향하고 급강하해 어뢰에 다이빙한거다.당시 상황을 재현한 그림.파일:attachment/IJNTaiho.jpg [8] 이 시기 항공기들은 레시프로 항공기들이었기 때문에 연료가 차량용 휘발유에 가까운 휘발유 계열 연료였으며, 덕분에 불이 잘 붙었다. 현대 제트엔진용으로 사용되는 JP-8같은 연료와는 다르다. [9] 사실 불운했다고 보기에는 좀 애매하다. 정상인이라면 저 상황에서 착함을 허가했을 리가 없기 때문. 혼란한 상황이다 보니 비행갑판 하부의 기관부와 비행갑판 상부의 함상기 발착함 요원들과 지휘부 간에 소통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10] 그가 비행대장이었던 걸 감안하면 폭발 당시 비행갑판에서 착함을 지휘하던 도중 첫 폭발에 휘말려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1] 시나노는 작전 가능한 상태로 적재할 수 있는 항공기가 42기에 불과했다. 140여대에 달하는 탑재량은 함재기 운용을 포기하고 단순히 수송만 할 때나 가능한 수치였다. [12] 실제로 당시 전기용접을 제대로 할 수 있던 나라는 독일밖에 없었고, 그 미국조차도 상당히 애를 먹어 리버티십과 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 전쟁 말기에 들어서야 겨우 안정화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