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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 해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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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the Java Sea
(Battle of the Java Sea → Battle of Sunda Strait → Second Battle of the Java Sea)

1. 개요2. 배경3. 전력4. 전투과정
4.1. 랭글리 격침4.2. 혼전속의 자멸: 제1차 자바 해전4.3. 휴스턴과 퍼스, 끝까지 의무를 다하다: 순다 해협 해전4.4. 필사의 탈출: 제2차 자바 해전4.5. 잔여 세력의 탈출과 뒷 이야기
5. 결과6. 기타

1. 개요

태평양 전쟁 중인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일에 걸쳐 진행된 일본군 연합군간의 해전이다.

제1차 자바 해전(2월 27일)과 순다 해협 해전(2월 28일~3월 1일), 그리고 제2차 자바 해전(3월 1일)으로 구성되어 있고,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도 다 개별항목으로 존재하지만 순다 해협 해전이나 제2차 자바 해전 모두 제1차 자바 해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기에 본 위키에서는 하나의 항목으로 통합한다.

FM대로 직역하자면 자바 해 해전인데, 이는 영문에서 battle이 육전과 해전, 공중전을 구분하지 않기에 생기는 문제로 Battle of Java라고 하면 이 전투 직후 벌어진 일본군의 자바 섬 침공전투를 뜻하기에 영문으로는 꼭 Battle of the Java Sea라고 표기해야 한다. 한국어로 표기할 때야 어차피 해전이라는 명칭이 붙으면서 굳이 자바 라고 일일이 써넣지 않아도 다 알아듣지만. 어쨌든 주 전장은 자바 섬 북쪽 일대의 자바 해였다.

일본측에서는 이중 제1차 자바 해전에 한정하여, 수라바야 해전(スラバヤ沖海戦)으로 부른다.

2. 배경

당시 일본군은 남방작전을 진행하며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를 석권하는 중이었다. 2월 하순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공략하면서 수마트라 섬, 발리 섬, 셀레베스 섬 등지를 침략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중심지는 현재의 인도네시아가 그러하듯 자바 섬이었다.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는 ABDA 연합군 사령부가 존재하여 동남아시아 방위전을 총괄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는 이미 싱가포르 전투에서 100,000명에 가까운 병력과 장비 손실이 발생한 영국군과 진주만 공습에서 태평양 방면 해군력이 일시적으로 박살난 미군은 인도네시아 방면에 대규모의 병력을 보낼 수 없었으므로 ABDA 연합군 사령부는 사실상 네덜란드군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네덜란드는 나치 독일에게 본토를 상실한 상황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까지 잃을 수는 없었기에 남은 전력을 끌어모아 일본군을 격멸해서 방어전을 성공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육군의 경우에는 숫자만 많을 뿐 장비와 훈련도, 심지어 충성도조차 떨어져서 전혀 믿을 수가 없었던 식민지 현지민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숫자의 절반이 될 지경인지라 일본군이 자바 섬에 상륙할 경우 체계적인 방어전을 하기가 곤란했다. 따라서 연합군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송선단을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같은 이유에서 진행된 1월의 마카사르 해협 해전(일본측 발릭파판 해전)에서는 성공적으로 다수의 수송선을 격파했으나 이미 상륙이 진행된 후라 침공을 저지하는데 실패한 전례가 있었다. 불과 10여일 전에는 ABDA 연합함대가 발리 섬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가 패퇴하기도 했다.(연합국측 바둥 해협 해전/일본측 발리 섬 해전) 때문에 연합군으로서는 어떻게든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수송선단을 격파해야 했다.

반면, 지난 마카사르 해협 해전의 교훈으로 수송선단의 호위를 증강한 일본 해군은 분명히 튀어나올 연합군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 눈을 밝히는 중이었다. 일본군으로서도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자바 섬 공략을 위해서 수송선단을 무사히 호송하는 것이 중요했고, 또 일본 해군으로서는 지난 발릭파판에서의 호위 실패로 육군에게 신나게 까인 것을 어떻게든 만회해야 했다.

3. 전력

연합국은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4개국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 다음과 같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외에 항공전력은 매우 미약하여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를 보충하기 위한 전투기 셔틀 임무를 띠고 미국 항공모함(당시에는 이미 수상기모함으로 개조된 후) USS 랭글리가 구축함 2척(USS 휘플, 에드살)의 호위를 받으며 P-40 전투기 32기를 싣고 자바로 향하는 중이었다.

랭글리 및 그 호위함을 제외한 연합군 전력은 현지 사정에 밝은 네덜란드군이 지휘하기로 합의하여, 네덜란드군의 카렐 도어만 소장이 지휘를 맡았으나 영어를 할 줄 몰라 지휘과정에서 통역들이 달라붙어야 하는 등 여러 혼선이 발생했다.

한편, 일본군 호위함대는 제3전대와 제4수뢰전대로 이루어졌다.

전체적인 전력으로 보면 연합군측이 구축함은 5척 적지만 중순양함은 동등하고, 경순양함은 1척 많았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일본군은 항공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었고 연합군은 그러지 못했으며, 단일지휘체계의 일본군에 비해 연합군은 다국적 혼성함대로, 언어 자체도 영어 네덜란드어의 2종류이고, 영국식 영어 미국식 영어의 차이까지 감안하면 3종류의 언어를 쓰는 데다가 합동훈련 경험조차 없어 공동작전시 유기적인 전투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또 세부적으로 보자면 일본군 함정은 모두 정비를 제대로 받고 나왔지만 연합군 함정 중 USS 휴스턴은 기존의 전투 과정에서 공습으로 후방 주포탑 1기가 사용불능이 되는 바람에 주포 9문 중 3문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휴스턴은 노스햄프턴급 중순양함에 속해서 기본적인 전투력이 괜찮은 수준인데다가 개전 직전 최신식 레이더로 현대화 개수를 받은 상황이었기에 주포 3문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또 일본측 중순양함 2척이 모두 묘코급 중순양함인지라 8인치 10문을 탑재한 데 비해, 엑서터는 6문, 휴스턴은 상술했듯 사용이 불가한 주포 포함 9문, 사용불가 주포를 빼면 6문 총합 12문으로 화력의 열세에 놓여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경순양함도 연합군의 경우에는 호주의 퍼스만 영국의 리앤더급 경순양함의 개량형인 엠피온급 경순양함이 호주에 공여된 것이라 그나마 성능좋은 경순양함이었고, 네덜란드의 예산 절약형 염가형 경량 경순양함인 더 라위터르와 구식 경순양함인 자바는 성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에 일본군의 구식 경순양함인 센다이급 경순양함에 속하는 나카와 진츠에 비해서 우세한 점이 별로 없었다.

연합군 구축함의 경우에는 더 심각해서 미 해군의 경우에는 모조리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초기 때 만들어진 평갑판형 구축함 같은 물건들이라 주포도 4인치 급이었고, 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의 구축함도 미 해군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인 E급 구축함, J급 구축함, 어드미랄렌급 구축함이라서 일본군이 보유한 5인치 장포신 주포와 산소어뢰를 보유한 특형 구축함과 그 후속급 구축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4. 전투과정

4.1. 랭글리 격침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연합군에게 암운이 드리워졌다. 2월 27일, 일본군 정찰기가 자바로 항해중인 랭글리를 발견한 것이다. 발리 섬을 막 점령한 일본군은 즉시 랭글리를 격침시키기로 결정했고, 발리 섬에서 이륙한 1식 육상공격기들이 즉시 랭글리를 공격했다.

랭글리의 격침에는 헬프리히 제독의 이상한 명령이 원인을 제공했다. 헬프리히 제독은 자바 섬의 전투기 세력이 거의 소멸 직전이었던지라 월권 행위를 저지르면서 23일 랭글리에게 자바 섬으로 바로 달려오도록 명령을 내렸으나 26일에 갑자기 네덜란드 기뢰부설함과 동행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뢰부설함은 내버려두고 호위구축함들과 동행해서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런 어이없는 추가 명령이 없었다면 랭글리는 27일 오전 9시 30분에 자바 섬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에 대해, 헬프리히 제독의 입장에선 일본군이 신나게 공세를 하고 있는 와중에 우선적으로 급한 항공 전력 보충을 위해 랭글리를 호출했으나 명령을 내려놓고 생각해보니 일본 해군이 자바 섬 침공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 함대를 파견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일본 해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기뢰 매설을 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명령을 번복해서 내리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러면 랭글리는 누가 호위하지?' 기뢰를 매설한다면 랭글리를 호위할 구축함들이 행동반경에 제한이 걸려 효과적으로 엄호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다시 명령을 내려 기뢰 부설함은 놔두고, 구축함들과 오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발리 섬 점령이 이루어진지 얼마 안 지나서 함상공격용 폭탄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에 일본군의 공격은 모두 육상공격용 폭탄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랭글리는 더 이상 항공모함이 아닌 수상기모함이라 이미 개조 과정에서 항공갑판의 절반을 제거한 상황이었고, 자바 섬 방위를 위해 무리하게 전투기를 가득 싣고 있어서 함재기를 출격시켜 대응할 수 없었다. 애당초 갑판에까지 P-40을 잔뜩 주기시켜 놓아 설령 원래의 항공모함처럼 항공갑판이 온전하더라도 항공기의 자력 이함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랭글리는 공격받은지 2시간여만에 전원 퇴함명령이 내려졌고, 호위구축함에 의한 어뢰공격을 마지막으로 자침했다. 미국 해군 최초의 항공모함의 최후치고는 참 허망한 결말이었다. 랭글리의 격침은 어떻게든 자바 섬 방위력을 높이려던 연합군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일이었다. 물론 이후의 타임테이블을 보면 랭글리가 격침되지 않았더라도 제때 자바 섬에 전투기를 공급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4.2. 혼전속의 자멸: 제1차 자바 해전

한편, 연합군 함대는 2월 25일부터 지속적으로 출항과 초계, 귀항을 반복하며 일본군 수송선단을 찾았으나 탐색에 실패했다. 이후 2월 27일 새벽, 초계 항해에서 또 다시 일본군 함대를 찾지 못한 연합군 함대는 휴식과 정비를 위해 자바 섬 동단의 수라바야로 귀항하고자 했으나 같은 날 11시, 정찰기에 의한 일본군 함대 발견 보고를 받고 즉시 반전했다.

같은 날 17시, 수라바야 동북방 해역에서 조우하여 포화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측은 모두 서로에게 유리한 진형을 구축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후 일본군이 구축함을 통해 수뢰전을 시도했으나 연합군의 거센 포화에 일시 후퇴했고 뒤이어 접근에 성공하여 발사한 39발이 모두 빗나가거나 자폭 혹은 유실되었다. 거기다 어뢰의 자폭을 기뢰 폭발로 착각한 일본군은 적 기뢰지대에 접촉했다고 오인하고 소극적으로 변모한다.

그러던 중 90여분의 전투 끝에 드디어 제대로 된 명중탄 하나가 발생했다. 18시 35분, 엑서터가 8인치 포탄에 기관부가 직격되어 속도가 급감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전투력 발휘가 어려워지자 카렐 도르만 제독은 비테 드 윗의 호위하에 엑서터를 이탈시켜 수라바야로 입항하라고 지시했다.

카렐 도르만 제독의 엑서터 이탈 지시는 어째서인지 다른 아군함에 전해지지 않았다. 언어 및 사용단어의 차이, 공동작전 경험의 전무 등에 따른 지휘체계의 혼선이 혼전의 와중에 참극을 가져온 것이다. 엑서터가 진로를 바꿔 수라바야로 향하자 휴스턴과 퍼스는 이를 함대 일제 변침 및 퇴각이라고 오해하며 항로를 급변경, 엑서터를 뒤따르기 시작했고 졸지에 기함 더 라위터르가 혼자 함대 대열 선두에서 고립되는 위기에 처했다. 거기다가 그 와중에 일본군의 어뢰 하나가 구축함 코르테니어를 직격, 격침시키면서 연합군의 혼란은 가중되었고, 있지도 않은 일본군 잠수함에 대한 대응으로 대열이 흐트러졌다.

결국 카렐 도르만 제독은 전 함대 퇴각명령을 내렸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일본군이 맹추격하여 양측 구축함간에 치열한 포격전을 펼쳤다. 영국군 구축함 일렉트라는 분전 끝에 격침되었고, 일렉트라와 포화를 주고받은 일본군 아사구모도 대파되었다.

일렉트라의 분전으로 겨우 퇴각에 성공한 카렐 도르만 제독은 함대를 재정비한 후 야간에 일본군 수송선단을 기습하기로 하고, 연료가 부족한 미군 구축함 4척을 수라바야로 보낸 뒤 잔여 함정으로 자바 섬 북안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영국군 구축함 주피터가 침몰했다.

이는 네덜란드 육군이 해안지대에 설치한 기뢰에 접촉한 것으로 육군과 서로 정보 교환이 제대로 되지 않다보니 일어난 참극이었다. 더군다나 주피터 침몰 직후 카렐 도르만 제독은 기뢰 지대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관계로 주피터 침몰을 일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단정짓고 또 다시 회피기동에 함대 이동 등으로 시간을 날렸다. 이후 아군 격침함의 승조원들 구조 임무를 위해 마지막 남은 구축함 엔카운터를 현장에 남기고 더 라위터르, 휴스턴, 자바, 퍼스 4척만으로 일본군에 맞섰다.

2월 27일에서 28일로 넘어가는 시간대의 2차 교전은 일본군의 완승으로 끝났다. 일본군은 함포전으로 연합군의 주의를 끌며 근접해서 어뢰를 발사, 더 라위터르와 자바를 단번에 격침시켰다. 일본 해군의 야간전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고, 안 그래도 전력이 부족한 연합군이 이를 극복해내긴 힘들었다.

기함 더 라위터르의 격침으로 카렐 도르만 제독이 전사하면서 지휘부가 붕괴하자 생존한 휴스턴과 퍼스는 필사적으로 전장을 이탈하여 바타비아로 귀환했다. 한편, 일본군은 더 라위터르와 자바의 격침에 너무 신이 난 나머지 잔여 함정을 제대로 추격하지 못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4.3. 휴스턴과 퍼스, 끝까지 의무를 다하다: 순다 해협 해전

휴스턴과 퍼스는 자바 섬 서쪽을 돌아 호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인근에 있었던 네덜란드군 구축함 HNLMS 에버스텐이 일본군의 맹공에 힘 한 번 못쓰고 격침당하는 걸 지켜보며 전속력으로 도망간 뒤 일본군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2월 28일 23시경, 이들은 자바 섬 서단에 상륙하려는 일본군 수송선단을 발견했다. 비록 자바 섬 방위가 실패로 끝난 상황이긴 하지만 침공을 조금이라도 지연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이들은 특별한 명령없이 수송선단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어차피 일본군에게 들킨 이상 순다 해협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생각도 한 몫했다. 그러나 야간이어서 시야가 제한적이었던 탓에 미처 일본군 호위함대를 발견하지 못했다.

역설적이지만 해당 상황이 ABDA 연합군 사령부가 염두에 두었던 좋은 상황이었다. ABDA 연합군 해군이 일본군 수송선단을 격멸할 수만 있다면 자바 섬을 상당기간 수비함으로서 향후 전쟁 상황을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제1차 자바 해전이 바로 이런 것을 노리고 ABDA 연합군 해군이 출항했다가 일본군 함대와 교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밥상이 차려져도 젓가락과 숟가락이 있어야 먹는 법이다. 중순양함 1척과 경순양함 1척으로는 전력 자체가 충실하지도 못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중순양함 휴스턴은 후방 주포탑 1기가 사용 불능 상태였고, 설상가상으로 제1차 자바 해전을 치르면서 사용한 탄약도 보충할 수가 없어서 휴스턴과 퍼스는 둘 다 탄약이 극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또한 앞서의 해전 덕분에 장병들의 피로도도 매우 높았다. 사실상 전투 불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휴스턴과 퍼스의 돌격은 일본군에게도 기습이어서 잠시 동안 혼란이 있었으나 결국에는 중순양함 미쿠마와 모가미를 필두로 한 호위함대가 돌격하는 휴스턴과 퍼스를 향해 맹렬한 포화를 퍼부었고, 여기에 경순양함 나토리와 구축함 다수가 가세했다. 그 와중에도 휴스턴과 퍼스 두 함정은 전투의지를 잃지 않고, 포탄이 떨어지자 조명탄까지 적에게 직접 쏘아대면서 격렬히 저항했으나 먼저 퍼스가 3월 1일 1시 40분에 어뢰에 피격되어 격침되었고 1시 59분 휴스턴도 어뢰에 피격되어 기동불능에 빠졌으며 이후에도 악착같이 저항했으나 끝내 2시 6분에 격침되었다.[3]

사실 순다 해협 해전에서는 일본군의 대응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연합군 함선들을 늦게 발견하기도 하고 발견한 것에 놀라서 구축함 후부키같은 함선들이 대열을 이탈해 일본 수송선쪽으로 이동함으로서 적을 아군의 취약하고 중요한 목표물로 끌어들이는 실수를 하기도 했다.[4]

하지만 가장 큰 실수는 어뢰 오사였다. 순다 해협 해전 도중 일본 해군 순양함들은 휴스턴과 퍼스를 격침시키기 위해 포격과 함께 어뢰공격을 감행했다. 문제는 체계적으로 어뢰를 순서대로 발사한 것이 아니라 당황한 나머지 아무 함선이나 목표물로 생각되는 것에 대강 방향을 잡고 쏘는 바람에 산지사방에 질주하는 어뢰들이 난무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산소어뢰의 엄청난 사거리가 역설적으로 작용해서 빗나간 어뢰들이 중간에 멈추지 않고 전투해역 끝까지 고속질주하면서 날아간 것도 큰 일이었다.

결국 이 어뢰들 중 명중하지 못하고 빗나간 어뢰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일본 육군 수송선 사쿠라마루가 빗나간 어뢰에 피격되며 침몰한 것. 직접 격침시킨 건 사쿠라마루 1척뿐이었지만 다가오는 어뢰를 회피하느라 수송선 류조마루도 좌초되며 상륙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병원선 1척도 대파되었다.
심지어 무엇보다 16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이 탑승하고 있었던 신슈마루도 피격되고 말았다. 신슈마루 역시 가라앉기 시작했으나 수심이 앝았기에 해저에 착저했고 이마무라 중장은 기름이 유출된 바다에 뛰어들어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그나마 일본 해군이 수송선단 호위에 상당한 전력을 할애해주어 결과론적으로 수송선단이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고, 이마무라 중장 본인도 인격자였던지라 연합군에게 공격당한 걸로 하자고 하며 사죄하러 찾아온 해군 장교들을 용서했고 남방작전도 대승으로 끝나가는지라 조용하게 묻힐 수 있었다.[5]

이리하여 휴스턴과 퍼스는 스스로는 어떠한 함정이나 선박도 격침 및 손상시키지 못하고 침몰당했으나 일본군에게 혼란을 초래해서 팀킬을 유도하고, 부수적으로 어뢰를 비롯한 탄약 낭비를 일본군에게 강요하면서 간접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휴스턴과 퍼스가 정상적인 상태였더라도 일본군 호위함대와 싸우면서 동시에 수송선단을 공격할 경우에는 위에 언급한 수준의 성과가 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4. 필사의 탈출: 제2차 자바 해전

한편 2월 28일 오전, 일찌감치 전열에서 이탈한 영국군 중순양함 엑서터와 구축함 3척은 순다 해협을 통해 실론(현 스리랑카)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말레이 해전으로 프린스 오브 웨일스 리펄스를 잃은 영국군 입장에선 금쪽같은 중순양함 엑서터라도 어떻게든 살려야 일본군의 서진을 견제할 수 있었으므로 이들은 3월 1일 순다 해협을 통과하고자 했다.

사실 엑서터와 호위함들은 순다 해협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 생각해봐도 일본군 코 앞에 접근하는 셈이라 들키면 끝장나는 것이다. 하지만 ABDA 연합군 해군이 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제독인 팔리서 제독이 미국 제독인 글래스포드 제독의 제안인 롬복 해협 통과를 거부하고, 적의 허를 찔러서 탈출한답시고 순다 해협 통과를 관철시키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나 순다 해협에는 일본군이 득실득실했다.

제1차 자바 해전에 참가한 나치, 하구로 외에도 묘코와 아시가라가 가세한, 총 중순양함 4척이 엑서터와 호위함을 상대로 신나게 포탄을 퍼부었고, 연합군 함대는 전멸했다. 단 1척, 미군 구축함 포프가 악착같이 연막을 치며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포프마저 자바 섬 동쪽의 롬복 해협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다가 수상기에게 걸렸고 치토세에서 날린 10대의 수상기들의 공격으로 추진축이 망가지면서 퇴함 명령과 함께 자침되었고, 아시가라와 묘코의 포탄이 명중하면서 2시 20분 포프도 격침되었다.

4.5. 잔여 세력의 탈출과 뒷 이야기

미국 구축함 4척은 어뢰를 모조리 사용한 후인데다가 공급도 불가능해서 전력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글래스포드 제독의 명령하에 수심이 얕고 좁아서 구축함도 항해가 곤란한 발리 해협을 통해 야간에 강행 돌파를 한 후 일본군 구축함대에게 걸렸으나 어뢰를 쏘는 척하면서 고속으로 도주하여 호주로 후퇴함으로서 자바 해전에 참여한 함선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제2차 자바 해전에서 격침당한 미국 구축함 포프도 원래는 다른 미국 구축함을 따라서 탈출하려고 했으나 구축모함에게서 공급받은 마지막 어뢰가 남아있다는 이유로 억지로 엑서터 호위에 나섰다가 격침당했다.

이후에는 자카르타 외항이자 자바 섬 서부의 주요 항구인 탄종프리옥과 자바 섬 동부의 주요 항구인 수라바야에서 원양항해가 불가능한 선박을 침몰시키고, 항구 시설을 폭파하는 소개 작업과 함께 잠수함 및 초계함같은 원양항해가 가능한 선박의 탈출이 이어졌으며, 자바 섬 남부에 위치한 칠라찹은 다른 항구들이 함락당한 후 최후의 탈출 항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네덜란드의 패배를 알아챈 인도네시아 현지 주민의 반란이 시작된데다가 호위함선들이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항구에서 선원들이 탈주하는 바람에 멀쩡한 선박을 폭파해서 침몰시키는 덧없는 사태가 계속 발생했고 어떻게든 항구에서 출항했더라도 탈출 과정에서 많은 선박들이 일본 제국 해군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긴급한 철수 작전에서 많은 손해가 난 이유는 이미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능력도 없으면서 사수하려는 네덜란드의 고집이 가져온 비극이었다. 본국을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입장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사실상의 본국이나 마찬가지라 절대 사수하려는 네덜란드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지만 바로 이런 고집 덕분에 ABDA 연합함대가 아직 건재할 때 상선사관이나 후방근무자, 민간인, 수송선 등을 호주 등지로 미리 피난시키지 않은 것 때문에 나중에 와서야 긴급피난하면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고, 남은 인원들이 포로가 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더 큰 손해가 나고 만 것이다.

5. 결과

일본군의 완승이었다.

연합군은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5척을 단 3일만에 잃었다. 더군다나 이는 해전 도중 입은 피해만이었다. 해전 이전에 격침된 수상기모함 랭글리, 1차 자바 해전 중 아군 기뢰에 접촉, 침몰한 영국군 구축함 주피터, 2차 자바 해전에서 겨우 탈출하다가 류조의 함재기에게 격침된 미군 구축함 포프, 3월 1일 퍼스 공습 후 귀환하던 나구모 주이치의 기동부대와 조우하여 재수없이 격침된 미군 급유함 페코스까지, 2월 27일~3월 1일 단 3일에 걸쳐 동인도제도, 나아가 인도양-서태평양 일대의 연합군 해상전력이 사실상 괴멸했다.

반면 일본군은 제1차 자바 해전 도중 영국 구축함 일렉트라와 함포전을 벌인 아사구모가 대파된 것이 유일한 피해였다. 아사구모는 대파 후 본국으로 귀환, 요코스카항에서 수리되었다. 그 외에 순다 해협 도중 일본군이 격침시킨 쇼난마루 등 육군 수송함 다수라던가, 하구로에서 일사병으로 사망한 2명[6]이 피해 리스트에 추가된다.

이는 연합군 입장에서 작게 보면 자바 섬 방위작전의 실패였고, 넓게 보면 제해권의 완벽한 상실이었다. 이때문에 영국은 지중해 전역의 소강을 틈타 귀중한 전함과 항공모함을 일부 차출하여 동양함대를 편성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실론 해전으로 털린다. 미군과 호주군도 호주 서부 및 북부 해안, 뉴기니에 걸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해야 했다.

결국,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을 저지해야 할 연합세력의 붕괴로 이 때부터 미국 혼자서 일본 해군과 맞서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되었다.

6. 기타

이 전투에서 전사한 네덜란드군의 카렐 도르만 제독은 전후 네덜란드군의 함정에 네 차례나 네임쉽으로 명명된다. HNLMS 카렐 도어만 항목 참조.

배틀스테이션 시리즈에서도 이 해전이 등장한다. 미드웨이의 경우는 역사대로 ABDACOM이 몰락했으나 휴스턴은 대파된 상태로 워커가 있던 발리 섬 연안의 기지로 겨우 살아 돌아오며 기지에서 수리를 받아 이 다음편에서 잔존 영국함대와 조우하여 일본 함대의 기함인 공고급 전함 하루나를 격침시켜 복수에 성공한다. 퍼시픽의 경우는 일본 캠페인 한정으로만 등장하는터라 역사대로 연합군 함대는 플레이어의 일본 해군에 의해 얄짤없이 전멸당하고 만다.

이곳에 격침되었던 연합군 군함들의 상당수가 사라졌다고 한다. 실종된 군함은 영국 중순양함 엑서터, 구축함 인카운터, 미국 잠수함 퍼치, 네덜란드 경순양함 더 라위터르, 자바 등 5척이며 남아있는 군함들도 함체의 일부가 뜯겨나갔다고 한다. 고물업자에 의해서 고철로 팔려나간걸로 추정된다고 하며 이는 국제법 위반이기에 영국과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인니 근해 2차 대전 침몰 함정 무더기 '실종'…고철로 팔린 듯. 이후 이 인근 해역에서 중국 선박들이 이러한 침몰선들을 불법으로 훔쳐가다가 적발된 사례가 나왔으며 말레이시아측에서는 이 배후에 중국 의료 및 첨단기기 업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인들, 동남아 해저서 2차 대전 침몰선 수십척 불법인양 왜 첨단기기 업체가 뜬금없이 등장하냐면, 제2차 세계대전 말미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와, 그 뒤로 이루어진 수많은 핵무기 실험에 의해 지구 대기와 환경에는 기존에 없던 방사성 물질이 많이 퍼져나갔다. 일반적인 산업에는 큰 영향이 없지만 정밀한 계측을 요구하는 분야에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제조된 금속이 적절치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핵무기 개발 전에 건조되어 침몰한 함선에서 스크랩한 고철은 정밀 분야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는 것이다.

제1차 자바 해전에서 포화를 주고받은지 90분 후에야 명중탄이 생겼다. 이는 야전에서의 함포 명중률이 극악했다는 증거이다.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고 감으로 쏘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일본이 어뢰를 야전의 중심으로 삼아 몸빵함선이 탐조등으로 적을 비추고 다른 함정이 어뢰로 공격한다는 전술을 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미국은 레이더 기술을 발달시켜 눈 대신 레이더를 쓰는 것으로 극복한다.

그 외에도 장거리 사격시 탄약낭비가 심했다. 1942년 3월 22일에 연함함대 사령부가 조사한 결과 제1차 자바 해전에서는 8인치 주포탄 1,621발을 발사해서 5발을 명중시켰는데 그나마 엑서터에 맞춘 1발을 제외하면 불발탄이었다. 어뢰도 153발을 발사해서 3발을 명중시키는데 그쳤다. 제2차 자바 해전에서는 8인치 주포탄 1,459발을 쏴서 3발을 맞추었으며 그나마 의미있는 것은 엑서터에 처음 명중한 1발이었고, 나머지는 확인사살 수준이었다. 어뢰도 35발을 발사해서 2발을 명중시켰으나 역시 확인사살용이라 의미가 없었다. 이는 주간에서도 장거리 포격과 장거리 어뢰 발사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탄약낭비에 가까운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며, 일본 제국 해군은 이후에는 이러한 공격을 자제하고, 야전에서 접근전으로 나가게 된다.
[1] 영란전쟁 당시 수차례 영국 해군을 격파한 네덜란드의 명제독 미힐 더 라위터르의 이름을 땄다. [2] 이중, 우시오, 사자나미, 야마카제, 카와카제는 임시 배속이다. [3] 함장인 앨버트 H. 룩스를 포함, 여러 승무원들이 전사했다. [4] 원래 이런 경우에는 아군 수송선단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서 적을 엉뚱한 방향으로 유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 쉽지 이렇게 하면 자기만 죽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은 조금 이해할 만 하나 아군의 다른 호위 함대쪽으로 가지 않고 수송선단쪽으로 간 것은 명백하게 문제가 된다. [5] 이후 육군이 신슈마루를 인양하던 중 선체 내부에서 '93식'이라고 각인된 어뢰의 잔해가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은폐하기로 결정된 사건이었기에 이 잔해는 반나절 뒤에 다시 바다에 던져져 폐기되었다고 한다. [6] 격렬한 함포전 와중에 미친듯이 포탄을 나르다가 지쳐 죽었거나 혹은 사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