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SNK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2. 구 S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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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에서 카페, 토목건설업을 하던 카와사키 에이키치가 지인에게 고베시에 있던 전자관련 회사에 투자를 해달라는 상담을 받았다가 그 업체를 사들이게 된다. 1973년에 '신일본기획'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하고 사격 게임의 기계 장치 등을 제작하다가 1978년에 주식회사를 세운 후 바로 비디오 게임 제작에 뛰어들었다. 처음부터 자체 개발 뿐만 아니라 하청개발을 맡기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1] 1980년대에 알파 전자 공업과 협업을 하기 시작했으며 1991년까지는 ASO, 이카리 시리즈, 사이코 솔저 등의 슈팅 게임들을 주력으로 전개했다. 또한, 이 시절까지는 자체적으로 기판을 이리저리 찍었다. 이 과정에서 게임이라면 그냥 닥치는 대로 만들어내는 통에 온갖 장르의 게임들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스포츠 장르인 골드 메달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1991년, 캡콤에서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발매하면서 대전 격투 게임의 유행이 시작되었는데, 마침 SNK는 1988년 캡콤에서 퇴사한 스트리트 파이터의 디렉터 니시야마 타카시, 마츠모토 히로시를 영입하여[2] 대전 격투 게임을 준비 중이었고 스트리트 파이터 2가 발매된 같은 해에 아랑전설을 발매하며 대전 격투 게임 장르에 뛰어들었다. 이후 SNK는 용호의 권 시리즈,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 등 다른 양산형 대전 격투 게임들보다 더 깊이있거나 신선한 게임플레이, 개성있는 캐릭터, 짜임새 있는 스토리, 화끈한 연출로 무장한 명작 대전 격투 게임들을 연달아 발매하여 게이머들에게 높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1990년, SNK가 알파 전자 공업과 협업하여 '아케이드의 흥분을 그대로 가정에!!(アーケードの興奮をそのまま家庭へ!!)'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발표한 네오지오와 대전 격투 게임이라는 장르가 시너지를 일으켰고 '가정용 네오지오로 집에서 실력을 갈고 닦은 후 오락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대전'이라는 구조를 만들어 인기몰이를 노렸다.[3] 1993년에 사무라이 스피리츠, 1994년에 KOF 94가 게이머즈 대상 1위를 차지하고 '좋아하는 게임회사' 1위에 연속 2년 올랐는데, 이때가 SNK의 최전성기였다. KOF 시리즈 이후에도 풍운 시리즈, 월화의 검사 시리즈를 내면서 다양한 대전 격투 게임 IP를 창조하였다.
SNK가 1990년대 들어서 주 게임 장르를 대전 격투 게임 위주로 옮긴 것은 복싱 선수 출신인 창업자 카와사키 에이키치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4] 또한 업소용 치고는 가격도 쌌고 성능면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던 자체 플랫폼 네오지오 MVS를 중심으로 다른 개발사도 영입하는 서드 파티 방식까지 채용하여 업주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이 외에도 SNK는 텃밭인 에사카역을 중심으로 네오지오 랜드라는 게임센터, 볼링장을 중심으로 한 어뮤즈먼트 시설 네오지오 볼 등의 사업을 전국 규모로 벌였다.[5]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한국에도 네오지오 랜드(서울 송파, 신당, 부산 등)가 있었는데, 한국 지점은 당시 한국에서 SNK 게임을 배급한 빅코, 빅에이 그룹이 운영했다. 1995년에는 소규모 테마파크인 네오지오 월드의 1호점을 이바라키현 츠쿠바에 개장하기도 한다.
게임을 제작/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SNK 쪽이 6년이나 빨랐으며(SNK는 1978년, 캡콤은 1984년) 오히려 캡콤이 뜨기 전에는 SNK 쪽이 더 유명했다. 하지만 캡콤은 개발 라인을 갖추자마자 여러 인기 게임들을 연달아 발매하면서 급격히 성장하여 SNK와 대등한 위치에 섰고[6] 캡콤이 1990년대 초부터 발매한 여러 벨트스크롤 액션 게임과 대전 격투 게임들 모두가 막대한 성공을 이룩해내며 SNK와 캡콤의 차이가 크게 벌어진 것이다. 후발 주자로서 시작하여 빠르게 인기 게임 제작 회사로 성장했다는 것은 두 회사 모두 비슷하다.
1993년 결산(캡콤은 3월, SNK는 9월) 기준으로는 캡콤이 700억 엔, SNK가 434억 엔으로 거의 2배의 매출을 낸 시기가 있다. 다만 캡콤이 이정도 규모의 매출을 낸 것은 일부 타이틀의 성공으로 인한 일시적인 매출이었고 1995년부터 다시 절반에 가까운 수준으로 줄어버렸다. 반면 SNK는 매출 수준을 유지하면서 조금씩 성장했고 1995년~1997년 3년간은 SNK의 매출이 더 컸다.[7] 사원 수도 1990년대 초부터 두 회사 다 1,000명에 가까운 사원 수를 유지했다.[8]
일본의 게메스트 게임 센터 인기/인컴 집계를 봐도 SNK 게임이 캡콤 게임을 뛰어넘는다는 평을 받게 된 건 1993년부터이다. 다만, 캡콤은 1990년대 전후로 여러 콘솔 게임들이 밀리언셀러를 찍은지라 굳이 아케이드 게임 없이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갖춰나가고 있었고[9], 온갖 콘솔 게임기의 대형 서드파티로도 입지가 확보되어 있었다. SNK 역시 다양한 방법으로 가정용 게임 시장에서의 자리매김을 모색했으나 한 하드 기준으로 100만 장을 넘게 집계될 정도로 크게 성공한 타이틀은 없었다.[10]
오카모토 요시키의 이야기에 따르면, 1990년대 캡콤은 SNK와 ' 대전 격투 게임 치킨 게임'을 벌이느라 새 기술 개발을 뒤로 미루고 있었고 경영진이 스트리트 파이터 2의 흥행으로 번 막대한 돈을 부동산에 잘못 투자해서 도산할 뻔했다고 한다.[11] 결국 SNK가 먼저 고꾸라졌지만 캡콤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스트리트 파이터 3 시리즈가 기대한 만큼 성공하지 못하고 대신 바이오하자드가 성공하자 3D 게임 개발의 중요성을 깨달아 3D 기술 개발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해서 구사일생으로 회사가 살아났다고 한다. 캡콤이 왜 굳이 SNK와 치킨 게임을 벌였는가 하면, 둘 다 기판을 직접 만들면서 자사 기판으로 게임을 발매하는 수익 구조를 갖고 있었고, 그 수익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뒤쳐지면 망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당시의 SNK는 '아케이드 게임의 수명은 3개월이다'라는 이념 하에 서드 파티까지 끼워서 빠른 속도로 격투 게임을 뽑아내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캡콤의 3D 대전 격투 게임은 스타 글라디에이터, 사립 저스티스 학원 등의 실험적인 작품이었고[12] 주력 대전 격투 게임인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3D 버전은 스트리트 파이터 EX라는 이름으로 외주 제작하기도 했고, 2D를 유지하던 본편은 아예 명맥이 끊겼다가 2008년에야 3D 그래픽으로 제작되었으나 근본은 2D였다.
어찌됐건 SNK의 네오지오 게임이 1990년대 후반 기준으로 한국을 비롯해 중국, 남미 등지에 널리 보급된 상태에서 인지도를 충분히 올리긴 했으나 이렇게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1990년대 초에나 하이엔드 사양이었던 시스템을 카트리지 용량만 늘려가며 그대로 버텨오다 보니, 시간이 지나자 사양은 낮지만 덕분에 가격도 낮은 시스템으로 자리잡은 덕이 더 컸고, 그나마도 열악한 보안으로 인해[13] 복제 기판이 더 싼 값에 우수수 풀려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게임이 많이 풀린다 한들 SNK에 득될 것이 별로 없었다.[14] 여기에 주된 수입원이었던 일본의 아케이드 시장이 시간이 갈수록 하락일로를 걷는 것이 확연했음에도 가정용으로 출시한 게임이 크게 히트하진 못했고, 결국 계속 아케이드 게임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회사 도산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KOF 95가 발매된 1995년쯤 아케이드 시장에서 대전 격투 게임이 범람한 탓에 유행이 식음과 동시에 업계의 트렌드도 아케이드 기판에서 PC와 콘솔 위주의 3D 게임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자사에서 발매한 아케이드 사업 매출이 크게 줄어들면서 주력 사업이 흔들리기 시작한다.[15] 특히 1997년부터 1998년까지 2년 연속으로[16] SNK의 대형 프로젝트들이 연이어 참패했는데 이 대형 프로젝트를 실시하기 전에는 30~80만 장을 오가고 있던 자사 게임의 평균 판매량이 1998년이 되자 20만 장으로 급락한 상태였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하고 쌓이기만 하다가 1999년 11월에 경영위기에 처하게 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같은 해 오다이바 팔레트 타운에 네오지오 월드 도쿄베이사이드라는 소규모 테마파크[17]의 부진이 도산 위기에 시달리는 회사에 직격탄을 날렸다. 첫 해에는 많은 매출을 안겨주었지만 이듬해부터 매출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 주의할 점은 1995년에 먼저 개장했던 네오지오 월드 츠쿠바의 경우 도쿄 쪽과 달리 수 년간 운영을 계속해온 곳이다.[18] 구 SNK가 도산하면서 이 테마파크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또한 무리해서 네오지오 볼링장을 전국 체인으로 전개한 것도 부채를 만든 원인 중 하나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오다이바 자리에는 미술관[19], 츠쿠바 자리에는 다른 회사의 게임센터와 볼링장이 남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2000년 2월, SNK는 파칭코 슬롯머신 업체인 아루제[20]에 손을 벌려 주식 500만 주를 신규 발행하는 조건(제3자 할당 증자)으로 50억 엔 출자 및 30억 엔을 대출하여 긴급히 자금 80억 엔을 조달하였다. 이로써 SNK의 전체 주식 483만 주에서 17만 주 가량을 더 소유한(50.9%) 아루제가 SNK의 운영권을 전부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SNK가 보유하던 빚이 아루제가 부담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SNK의 단물만 빨아먹을 심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2000년 6월 오사카 본사를 제외한 나머지 지사를 모두 폐쇄해 SNK의 유능한 스태프들만 자신들의 회사와 타사로 빼돌렸다고 한다.[21] SNK는 2001년 4월 2일 SNK를 법원에 회사갱생절차(한국의 법정관리제도)를 신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루제의 지원을 받지 못해 회생안을 제출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며, 9월에는 법원에 대해 회사 재건을 단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며, 2001년 10월 22일 파산법원에서 무려 380억 엔(당시 환율 기준 한화 3,900억 원에 상당)의 부채를 안고 파산했다. 이 파산 규모는 현재까지 일본 게임 기업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이며 SNK의 1996년 3월 결산 기준 연간 매출에 맞먹는 금액이다.
사족으로 도산 직전의 SNK의 본사는 본진이었던 오사카부 스이타시 에사카역 부근으로 돌아오긴 했지만[A] 2000년~2001년에 잠시 도쿄 오다이바에 본사를 두었다. 도쿄 빅 사이트 인근인데, 당시 경영권을 가지고 있었던 아루제의 본사 빌딩이었고 네오지오 월드 도쿄베이 운영도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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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도산 직전 위 사진을 업로드한 것을 마지막으로 홈페이지 갱신을 중단했다.[24] |
도산 전 마지막으로 공개된 회사 정보에 따르면 1,000명이 넘었던 총 직원 수가 229명이 되었고 #, 도산 전후에 주요 인원이 플레이모어, 브레차 소프트, 딤프스 등으로 흩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차세대 아케이드 시스템 개발이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테스트 보드만 만들어지고 실제 소프트웨어 개발까지는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일명 'SNK 밀레니엄'이라 불리는 시스템으로, 드림캐스트 및 NAOMI와 동일하게 히타치의 SH-4 CPU를 사용한다. #
3. 플레이모어 설립
<rowcolor=#ffffff> 플레이모어 시절 로고 (2001 ~ 2002) |
상황이 이렇게 되자 SNK는 남은 개발진마저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SNK 사원들을 선 어뮤즈먼트, 브레차 소프트 등지로 분산시키고 지적재산권을 확보하기 위해 2001년 8월 1일 플레이모어를 설립한다. 구 SNK는 부도 직전까지 개발에 몰두했고, 그 중에는 아랑 마크 오브 더 울브스 후속작처럼 출시가 무산된 게임도 있었으나 더 킹 오브 파이터즈 2001처럼 분사화시킨 계열사와 협력사들을 통해 무사히 출시를 마친 게임도 있었다.
KOF 2001의 일본 내 유통은 SNK계열사인 선 어뮤즈먼트가, 한국 유통은 협력사인 이오리스, 해외 유통사 대응은 실개발 회사인 브레차 소프트가 직접 맡았다고 한다. 이오리스는 휘청거리던 SNK에게서 개발위탁을 받은 회사였고 이를 다시 하청을 줘서 SNK 출신들이 모인 브레차 소프트에서 개발을 진행했기 때문에 게임 제작에 관해 이오리스 개발진들은 프로듀서로 참여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다만 SNK는 도산 문제로 제작에서 손을 뗀 상태였고 실개발자들에게 하청을 준 건 결국 이오리스라서[25] 그들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이그니스와 이진주[26]. 그리고 이오리스 덕에 시리즈 중 2001, 2002는 그 당시 최초로 승리화면 텍스트가 한글로 지원되고 한국팀도 한국어 음성을 가지게 된다.
지적 재산 보호를 위해 카와사키 에이키치 회장이 설립해 두었던 회사 플레이모어가 SNK와 관련된 각종 지적 재산권들을 파산 법원의 공매 입찰을 통하여 낙찰받는데 성공한다. 이후에도 아루제와의 대립은 이어져서 저작권 침해 소송전으로 이어졌다.
3.1. 아루제와의 소송전
우선 2002년 플레이모어는 아루제가 출시한 파치슬롯 기기와 파치슬롯 관련 PS2 소프트 총 3종에 사용된 영상 소프트에 대해 29억원 상당의 저작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관련기사(일본어) SNK가 아루제의 자회사일 때 제작한 영상물에 대해 권리를 주장한 것인데, 아루제는 이를 영업방해로 치부하며 판매를 계속했고, 저작권 침해 외에도 손해배상 청구 등의 재판까지 발생하게 된다. 나중에는 SNK플레이모어의 파치슬롯 기기에 대해 아루제가 반대로 특허관련 소송을 거는 일까지 발생한다. 구체적인 결과가 밝혀지지 않는 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SNK플레이모어의 승리로 끝났다고 한다.1. 아루제의 파치슬롯 기기 크레이지 레이서(2001년 출시)에 당시 자회사인 SNK의 저작권과 상표권이 사용되었으나 플레이모어가 해당 권리를 가져온 후에 요청한 사용허가계약을 아루제가 거부했으며 속편인 크레이지 레이서 R(2002년 출시)에 대해서도 플레이모어의 저작권과 상표권을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내용으로 1억2000만엔 청구(2002년 2월 28일).
2. 이레구이(IRE-GUI)와 바쿠초(爆釣)의 상표권과 저작권이 플레이모어에 있으며 이를 아루제가 무단으로 파치슬롯 기기 바쿠초(爆釣)에 사용했다는 내용으로 24억엔 청구(2002년 3월 15일).[27]
3. 크레이지 레이서의 상표권과 저작권을 PS2 소프트 아루제 왕국 6에서 무단으로 사용했다는 내용으로 플레이모어가 3억2998만엔을 청구(2002년 4월 9일). 해당 소프트는 3종의 파치슬롯이 수록되어 있는데, 크레이지 레이서 R은 숨겨진 기종으로 수록되어 있어서 '저작권을 몰래 사용하려 했다'라는 식으로 문제가 더 커졌다.
→ 초기의 3건은 2004년 1월 플레이모어의 주장이 인정되었다.[28] 하지만 아루제는 승복하지 않았고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공소하겠다는 입장이었다.
4. 후속 PS2 소프트 아루제 왕국 7에 소송 진행 중이었던 기종 바쿠초가 수록되어 같은 이유로 SNK플레이모어가 아루제를 상대로 저작권 침해 소송.(2002년 8월 출시)
5. 소송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아루제가 IRE-GUI의 판매를 중지하지 않자 플레이모어가 형사 고소.
6. 소송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아루제가 IRE-GUI의 게임센터 버전을 출시하자 플레이모어가 형사 고소.
7. SNK플레이모어가 출시한 첫번째 파치슬롯 기기 메탈슬러그에 아루제가 보유한 특허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아루제가 SNK플레이모어에 대해 제조판매중지와 가처분을 신청.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메탈슬러그의 저작권 소송이 아니라 파치슬롯 기기의 특허권(특허 제3056742호)에 대한 소송이고, 이는 파치슬롯 기기의 구조에 관련된 내용이다. 알림 기능 시스템 등과 관련되어 있다.(배상금 33억엔4978만5천엔 청구)
→ 제조판매중지 신청은 2005년 9월에 기각, 같은 달에 아루제가 항고, 12월에 아루제가 항고를 취하. 특허권 침해 배상은 2007년 4월26일에 SNK플레이모어가 승소한다.
8. SNK플레이모어가 메탈슬러그 제조판매중지 신청에 대해 '영업방해가 목적'이라 주장하며 아루제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 제품 출시 2일만에 특허 침해 소송을 당했는데, 그 짧은 기간에 특허 침해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9. 아루제가 SNK플레이모어에 대해 명예훼손을 주장하여 SNK플레이모어가 가택 수사를 받게 됨. 아루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서적 '아루제 왕국의 어둠(アルゼ王国の闇)'을 SNK플레이모어가 파칭코 판매점 등에 배포했다는 주장.
10. 서적 '아루제 왕국의 어둠'의 저자 마츠오카 토시야스(松岡利康)가 명예훼손죄로 아루제에게 고소당함.
11. SNK플레이모어가 출시한 첫번째 파치슬롯 기기 메탈슬러그에 추가로 별도의 특허권 3건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아루제가 SNK플레이모어에 배상 청구 소송(2006년 12월 14일).
SNK 도산 후에는 지적 재산권의 관리, 계열사의 관리 및 통합, 게임의 개발과 유통 등, 관련된 모든 일들이 이 회사를 통해 이루어지면서 SNK의 후신으로 자리매김한다.
한국에서는 플레이모어가 구 SNK와 전혀 관계없는 파치슬롯 회사였다고 오인하여 SNK PLAYMORE가 구 SNK와 다른 회사라고 주장하는 팬들이 있다. 플레이모어가 구 SNK와 법적 연관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플레이모어가 파치슬롯 업체였던 것은 아니다. 구 SNK 도산의 직접적인 원인이 당시 SNK에서 변화를 꾀하려 파치슬롯 사업에 손을 대며 아루제와 협력을 빌미로 자회사가 되었다가 결국 자금 지원을 받지 못한 것 때문인데, 그런 상황에 카와사키 에이키치가 당시 파치슬롯 회사를 따로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이후 SNK PLAYMORE 이름을 달고 나오는 파치슬롯들도 대부분 하청을 통해 만들졌다. 다만 실제로 아루제 산하로 들어간 이후의 SNK가 파치슬롯 사업을 메인으로 했던 것은 사실로, 주로 아루제가 제작한 제품을 유통하거나 파치슬롯용 캐비닛을 제조/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2001년 3월 결산 기준으로 파치슬롯 사업 매출이 전체의 59.4%로 이것만으로 기존 아케이드 게임 수준의 매출을 냈으며 아케이드 게임은 12.9%에 불과했다.
3.2. SNK PLAYMORE 시절
<rowcolor=#ffffff> 구 로고 (2003 ~ 2014) | 신 로고 (2014 ~ 2016) |
처음에는 부도 위기에 있던 SNK와는 별도 법인임을 강조해야 해서인지 플레이모어의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2003년 7월에 SNK 플레이모어로 사명을 바꾸며 SNK의 후계자임을 강조했다.[29]
하지만 90년대 중후반에 수명이 다한 아케이드용 기판 네오지오의 자체적인 한계와 거기에 경험 부족한 제작진이 합쳐져서 하나의 작품만 제대로 제작해도 모자랄 판에 전성기 시절의 작품들을 깡그리 포섭하려 했다는 평가가 있다. 결국 SNK 플레이모어 명의를 사용하기 시작한 첫 해인 2003년에 나온 게임들은 최악이었다. 외주 개발인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로를 뺀 대전 격투 게임은 대전 감각이 깡그리 바뀌면서 팬들에게 큰 지탄을 받았다.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로는 유키엔터프라이즈가 하청하고 사무라이 스피리츠의 고유의 감각을 살려서 2003년 신작 중에 인기가 좋은 편.[30] 오히려 당시 기대작이었던 SVC CHAOS와 KOF 2003, 메탈슬러그 5는 평가가 매우 나빴다. 자세한 것은 SNK/2003년 문서 참고.
그래서 (구 SNK와 PLAYMORE, 그리고 지금의 SNK가 연속된 주체로 간주한다는 전제로) 2000년대 중반까지의 플레이모어 SNK는 SNK 역사 최악의 암흑기라고도 볼수 있다.
무엇보다도 사무라이 스피리츠를 제외한 2003년 SNK PLAYMORE의 작품에는 놀랍게도 메탈슬러그 4 못지 않은 무수한 Ctrl CV, 나사빠진 시스템, 정신나간 밸런스, 수많은 삭제요소 등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건 PLAYMORE가 SNK 말기의 무수한 인재 유출로 인해 게임제작에 필요한 노하우가 부족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무엇보다 부활한지 얼마 안된 회사가 제대로 된 상태일리가 없었다. 이미 1990년대 중후반에 수명이 다한 네오지오 기판에 경험 없는 제작진이 합쳐진 결과. 이 와중에 한 가지 작품만 제대로 제작해도 모자랄 판에 전성기 시절의 작품들을 싸그리 포섭하려 하니 실패는 어찌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다. 초창기에 이식한 몇몇 작품도 평가가 시궁창인데 그 절정이 가정용 PS2판 KOF 2002와 KOF NW(2002의 아토미스웨이브 기판 마이너 업데이트 버전)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뒤 2004년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로 스페셜을 끝으로 아케이드 네오지오판은 14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31]
이후 격투게임은 ATOMISWAVE나 타이토 Type X 등 타사의 아케이드 플랫폼으로 갈아타며 그나마 팬이 남아있는 KOF 시리즈와 사무라이 스피리츠 시리즈, 메탈슬러그 시리즈 위주로 제작하면서 과거작 우려먹기 및 파치슬롯이나 모바일 장르로 주력 장르를 전환한다. SNK를 용자의 반열에 들게 한 두근두근 마녀신판이나 Days of Memories 시리즈, SNK 걸즈 아일랜드[32]가 바로 이 시절 작품. 팬들은 "전자매춘이냐?", "여캐 그만 팔아먹어라!", "이거 만들 시간에 킹오파 좀 완성도 있게 만들어라!"라면서 성화였지만 이게 없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파산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플레이모어는 순수 게임 장르에서 철수한다'는 루머가 거의 매년 돌았다. 아케이드 시장의 쇠퇴와 플레이스테이션3, 엑스박스360 등의 HD 게임 세대가 되면서 SNK도 시대의 흐름에 밀려난 감이 크다.
SNK 도산 과정에서 아루제가 인재와 기술력을 대부분 유출시켜버린 탓에 구 SNK 시절과는 개발력 및 게임성이 많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실질적으로 도산 후 세워진 소규모 회사들 중 구 SNK를 계승한 건 주로 KOF 제작진, 그 중에서도 일부만 남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플레이모어가 된 이후에는 일부 게임들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게임의 퀄리티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33] 거기에 비슷한 시기 다른 제작사들이 엄청난 발전을 선보인 것에 반해 플레이모어는 이래저래 어려운 과정을 겪어 딱히 기술 개발을 할만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게임을 팔려면 기술 개발을 해야 되는데 개발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게임이 팔려야 하고 그런데 기술이 없으니 게임이 안 팔리고... 결국 구 SNK의 핵심 제작진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회사도 이 회사이고, 당시 오너도 구 SNK를 창업한 사람이이므로 실질적으로 두 회사는 같은 회사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구 SNK 시절과는 개발력 및 게임성이 많이 달라진 이유로 구 SNK가 제작한 게임만을 SNK로 쳐주는 팬들도 많다.
2011~2012년에는 다시 위기를 맞이했는데, KOF XIII이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지만, 제작방식이 3D모델링을 2D도트로 바꾸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 방식이라 시간이 오래 걸리게 되어 제작비가 대폭 올랐고, 그 와중에 경영진은 파칭코 사업에 집중하려고 했다가 제작진과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 KOF 13 제작진과 메탈슬러그 제작진의 대거 퇴사가 벌어졌는다고 하는데, 특히 메탈슬러그 시리즈의 핵심 개발진인 Akio의 퇴사 때문에 메탈슬러그의 정식 신작은 멈춰버리고 말았다.[34]
2012년에는 라이센스를 대여를 통해 타 업체에서 네오지오 X라는 콘솔과 휴대용 양방향 지원 게임기를 발표 및 발매했다. 상세는 문서 참조.
3.3. 중국 회사의 자회사로
2015년 8월 6일 중국 온라인 게임 기업인 37Games( 법인명 芜湖顺荣三七互娱网络科技股份有限公司)[35]가 출자한 조인트 벤처인 러도 밀레니엄(Ledo Millennium Co., Ltd)社를 통해 SNK 플레이모어의 지분 81.25%를 6350만 달러(한화 약 740억 정도)에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어째선지 팬들조차 너무 비싸게 판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지만, 메탈슬러그 디펜스의 성공이나 파칭코 사업도 하는만큼 저 정도는 충분히 받을만 하다. 이로서 SNK 플레이모어의 주인은 중국 기업이 됐다. 37Games는 SNK 플레이모어가 보유한 다수의 인기 IP, 더 킹 오브 파이터즈, 아랑전설, 메탈슬러그 등을 활용하여 게임, 애니메이션, TV 등의 다양한 미디어 사업을 전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37Games의 중국 선전증권거래소 경영공시를 통해 비상장기업이라 알기 어려웠던 SNK의 경영실적이 일부 공개됐다. 회계연도 2014년(2013년 8월 1일~2014년 7월 31일) 실적에 따르면 총자산이 4.69억 위안, 순자산이 1.48억 위안, 매출액이 3.04억 위안, 순이익이 1500만 위안이었고 회계연도 2015년중 8개월간 실적(2014년 8월 1일~2015년 3월 31일)은 총자산이 4.62억 위안, 순자산이 1.47억 위안, 매출액이 5897만 위안, 순손실이 106만 위안이었다고 한다. 사실 결산공고 자체는 매년 실시하기 때문에 유료로 입수할 수는 있었는데 회계연도 2014년 일본 기준으로 매출 58억 9,600만엔, 순이익 2억9,000만엔, 총자산 84억 4,690만엔 순자산 24억 6,100만엔이었다.
중국 기업에 인수되었지만, 당장에 인력을 모으는 일이나 해결된다면 모를까, 별달리 극적인 변화는 생기기 어려울 것으로 보았다. 그 정도로 사정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수년 내로 중국 관련 사업을 벌이기는 어려워보이고, 설령 활동이 가능하더라도 중국 전용 모바일 게임이나 중국 판권 관리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반응. 실제로 그와 비슷하게 흘러가긴 했다.
SNK와 아크 시스템 웍스와의 규모를 비교하자면 2016년 기준으로 자본금이 SNK는 17억엔, 아크는 1억엔이고 직원 수는 SNK가 123명, 아크는 113명.[36] SNK의 매출 규모는 연간 30억엔 규모이며, 아크시스템은 결산공고에 매출액을 공개하지 않아서 불명이지만 10~50억엔 규모로 추측된다. 2D 같은 3D 그래픽의 길티기어 Xrd로 세간에 충격을 선사한 아크가 규모면에서 SNK보다 그리 크지 않아 SNK가 비난받기도 한다. 2022년 기준으로는 둘 다 사원수 200명 가까이 되는 비슷한 규모로 성장하고 있다.
2015년 10월 9일 파칭코 사업에서 철수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마지막으로 출시된 파칭코인 비스트 버스터즈는 지원한다고. 중국 기업에 인수되면서 비디오 게임에 집중하기 위해 철수한다는 추측도 있었지만 실은 일본에서의 파칭코 사업 규제가 심해져서 수익이 안 나오게 되자 접게 된 것이다. 상술했듯 SNKP의 파치슬롯은 하청을 통해 제작돼오고 있었는데, 이러한 하청이 규제로 인해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개발 비용이 폭등해
2017년 1월 6일, 37Games는 자신이 갖고 있던 SNK 관련 주식을 Tianjin Digital Color Interactive Technology(법인명 天津卡乐互动科技有限公司)에게 팔았다. 그리고, 2017년 1월 13일 러도 인터랙티브는 Linked Worlds가 소유한 SNK의 지분 12.54%를 인수했다. 그래서 SNK는 형식 상 Tianjin Digital Color Interactive Technology의 소유가 되었다. 2017년 3월 21일 워롱 부동산 그룹이 인수해 워롱 부동산 그룹의 소속이 되었으나 # 사실 잘 들여다 보면 실질적인 경영진은 거의 변화가 없고 같은 계열/협력사들끼리 지분을 나눠가진 것이다.
4. 다시 SNK로
2016년 4월 25일 KOF XIV 관련 중대 발표가 있던 날 15년 만에 로고에서 Playmore를 떼버리고 SNK로 변경과 동시에 구SNK의 슬로건이었던 'The Future Is Now'를 슬로건으로 채택했다. 회사명은 한동안 SNK PLAYMORE를 유지했으나 2016년 12월 1일부터 사명도 SNK로 바꾸었다. 2018년 창사 4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창립자가 같다는 것을 이유로 구 SNK(신일본기획) 시절을 포함한 1978년부터를 역사로 인정하는 듯 싶다.
로고 변경 이후 최초 작품은 KOF XIV. 그래픽에 비해 게임성은 수작이라는 평도 있지만 전체적인 세간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또한 잘 나가던 메탈슬러그 디펜스를 방치하다시피 내버려두고 메탈슬러그 어택으로 과도한 여캐팔이를 하는가 하면, SNK 히로인즈 태그 팀 프렌지의 논란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구 IP의 처참한 활용과 발전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기술력에 팬들은 혀를 차고 있다.
사실 KOF XIII의 성공 이후 KOF XIV가 출시되기 전까지 이런 식의 과도한 상술은 자주 있었는데 SNK 팬들은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길 바라며 킹오파의 속편을 위한 원기옥을 모으는 중이라는 식으로 응원했었다.[37] 2015년 중국의 자회사로 넘어가 자본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된 지도 적지않은 시간이 경과했지만 여전히 방향을 잡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였다. 파칭코 산업에서 철수한 것 외에 위에 언급한 상술들은 별로 바뀐 부분 없이 너무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고 있어 팬들도 지쳤는데, 저질 그래픽과 더불어 최저 참가자에 1년만에 EVO에서 퇴출될 정도로 흥행부진에 시달린 KOF XIV과 간판만 SNK 히로인즈를 내걸고서 현실은 KOF XIV의 여캐팔이 재탕게임인 SNK 히로인즈 태그 팀 프렌지가 발표되자 우호적이었던 팬덤들마저 거의 등을 렸다. 해당 게임이 " SAMURAI SHODOWN을 위한 인질"이라면서 덤으로 사주겠다며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도 존재했지만 그 SAMURAI SHODOWN 조차 결과물이나 평가는 KOF XIV와 큰 차이가 없다.
신작이 나올 때마다 크게 흥행하지 못하고 그래픽에 대한 불만이 많아 구 SNK 부도 직후의 플레이모어 시절보다 훨씬 더 안좋아졌다는 평가가 많은 편이다. 실제로 신규 패키지 게임의 컨텐츠나 완성도 또한 1990년대 아케이드 게임 시절의 볼륨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다 보니 충성도가 높은 고령의 팬덤들을 제외하고는 2020년대의 게임 시장에선 크게 어필하지 못하는 부분도 한몫하고 있다.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타 회사의 대전 게임과 적극적인 콜라보레이션 행보를 보이는 중이다. 철권의 기스와 DOA의 마이를 시작해서, 파이팅 EX 레이어에 테리가 등장하고, 소울 칼리버 6에서도 게스트 캐릭터로 하오마루가 참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DOA에도 추가로 쿨라가 등장. 더 나아가서 슈퍼 스매시브라더스 얼티밋에 테리가 참전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4.1. 한국거래소 코스닥 기업공개( IPO)
어느 정도 회사가 정상화되었다고 판단했는지 기업공개( IPO) 작업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도쿄증권거래소가 아닌 한국 KRX 코스닥시장에 IPO 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고 한국 증권사들한테 RFP(제안요청서)를 받았다고 한다. 기사 한국 증시에 상장하는 것을 최종 결정하게 되면 한국거래소에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하고 2018년 말이나 2019년 초에 코스닥시장에 데뷔하게 된다.일본 증시가 아닌 한국 증시를 선택하려는 이유는 일본 증시에 비해 한국 증시가 게임 제작사의 IPO시 기업 가치를 더 크게 인정받고 자본조달을 더 크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깔린 계산이라고 한다. 마침 벤치마크로 2017년 2분기 세계 최대의 IPO였던 넷마블게임즈나 2017년 3분기 게임사 최대 IPO인 펄어비스 등을 선정했다고. 한 때 순수 일본 회사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중국 회사의 자회사과 되어서는 한국 증권가에 진출하고있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따로 없는 풍경.
상장주관사로 NH투자증권을 선정하고 공동 주간사로 미래에셋대우를 선정하였다. 2018년 ~ 2019년에 한국 증시에 상장을 목표로 한다. 기사
2018년 본격적으로 한국거래소 코스닥 상장을 추진하였다. 2018년 8월 13일 한국거래소에 상장예비심사를 청구하였고, 2018년 11월 8일 상장예심을 통과하였다. 2019년 5월 7일까지 한국거래소에 상장을 완료하면 된다.
상장예비심사를 통과한 후 자사의 기업가치( 시가총액)을 1조 원 초반대로 잡고 증권신고서를 제출, 공모주 청약을 시도하였다. 기사 그러나, 해외기업 한국 상장 관련해서 주는 보수가 짜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2018년 12월 7일 무리한 밸류에이션을 담보로 2,000억 원대의 공모를 시도한 SNK에 대해 한국 기관 투자자들이 수요예측을 참가하지 않아, 공모를 철회하였다. SNK의 상장 철회 인해, 한국의 한 유저가 계획하고 있었던 한국 대회가 무산되는 일도 벌어지기도 했다.
공모를 철회한 이후에도 SNK는 상장 의사를 꺾지 않았다. 2018년 12월 11일, 2019년 3월을 목표로 상장에 재도전하기로 했다. 기사 그러다가 2019년 1월 8일, 2019년 4월로 시기를 변경하여 재도전하기로 했다. 기사 상장 주관사인 NH투자증권에서도 SNK의 상장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하였다.
SNK 입장에서 사무라이 쇼다운: 롱월전설의 실적이 잡히는 2019년 1월의 실적을 바탕으로 한국 증시 상장을 성사 시키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전의 1조 원대의 밸류에이션을 기반으로 한 2,000억원 대 공모보다는 상당폭 공모 규모를 낮출 것이 확실시된다. 2019년 1월에 천보라는 기업이 1,000억 원을 공모에 성공하였고, 현대자동차그룹의 현대오토에버가 2019년 3월 1,400억 원 정도의 공모를 시도하고 있다. SNK의 2번째 상장 시도에서는 천보나 현대오토에버 수준으로 밸류에이션을 낮추고 공모규모를 줄여서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
2019년 4월 22일 결국 공모 규모를 한 차례 줄여서 공모가 40,400원, 공모금액 1,696억 8,000만 원으로 확정하고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 기업공개를 확정했다. 상장일은 2019년 5월 7일. 링크
2019년 5월 7일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에 기업공개 절차를 완료하고 상장되었다. SNK가 아닌 에스앤케이로 상장되었다. 하지만 SNK로 검색해도 주식 정보 앱등에 잘만 나온다. 아무래도 SNK라는 영어 명칭이 더 익숙해서인듯.
코스닥 공개 이후 기업의 지배 현황은 2017년 중국의 기사와 다르게 크게 변해 있었다. 코스닥 상장 이후 갈지휘 대표이사가 100% 소유한 ZUIKAKU, 중국 게임 개발회사인 퍼펙트 월드 엔터테인먼트 그리고 중국 투자 전문 회사 인펀드 홀딩스가 100% 소유하고 있는 론센 셋이 연합하여 절반 이상 소유하고 있고, 임원도 절반 이상이 중국인인, 사업장과 사원들만 일본인 회사가 되어 있었다. 사업의 내용도 게임 판매 매출액에 비해 과거 찬란했던 SNK 게임들의 IP 라이선스 판매 매출액이 전체 매출액의 2/3를 넘는다고. IP가 탄탄하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지만, 자사의 게임 수익이 라이선스 수익의 절반 밖에 안 되어서야 SNK는 과거의 영광만 보면서 살아가는 회사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세한 것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서 검색해서 볼 수 있다.
두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코스닥 시장에 상장은 했지만, 2개월만에 주가는 반토막나고 현재 최저가를 매일 새로 쓰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 기업의 한국 상장 후에 주가가 폭락한 사례는 종종 있었지만 첫날부터 하락한 경우는 드물다. 첫 날 공모가에서 약 17프로가 하락한 이후 끝 없는 하락을 자속하고 있는데 중국 기업이 일본의 IP를 헐값에 사들여 그 가치를 잘 모르는 한국에 상장해서 개미들에게 큰 피해를 준 경우다.
주주들의 분위기가 매우 암울하다. 첫 기사에서 보다시피 회사 규모에 안 맞게 4만원 수준으로 너무 높게 잡은 것도 원인이라고. 실제로 8월 초에 한 번 바닥 찍고 나서 만원대 중후반대를 왔다갔다 하다가 2020년 12,000원 밑으로 1년동안 하락을 지속하면서 무려 70프로 이상의 하락이 일어났다. 상장시 공모가 밴드도 지나치게 높은데다 그것도 상단으로 정한 이후 이런 하락을 보이는 것은 기업상장가치를 평가한 주관사의 도덕성에 의심을 가질 수 밖에는 없다.(대표 주관사 NH증권, 공동 주관사 미래에셋대우)
2020년 6월 2일 갑자기 상한가 22100+5100(30%)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유는 배당금을 시가배당 20%에 달하는 1주당 3332원으로 했다는 발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배당 이유는 코로나 바이러스때문에 모두 힘들어 하니 주주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물론 증권가에서는 이 말을 믿지 않고, 현재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ZUIGAKU를 바롯한 중국 대주주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보고 있다.
결국 배당금에 낚여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직후 SNK는 신주예약권을 발행해서 사람들의 뒤통수를 쳤다. 가장 큰 문제는 신주발행권 행사 가격을 1주(100KDR)당 1원이라는 역대급 헐값으로 책정한 것. 이는 게임사 전체는 물론, 대한민국 역대 주식 시장 전체를 통틀어서도 보기 드문 헐값이다. 이로 인하여 갈지휘를 비롯한 SNK의 중국인과 일본인 직원들은 단 하루만에 130,000배의 시세 차익을 챙기게 되었다. #SNK 단 하루만에 13만배 차익? ...中·日 ATM 된 코스닥 [38]
SNK 측은 SNK는 일본 기업이므로 일본법을 따르고 있으며, 현지 일본법상 문제 될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즉, 한국법에서는 소위 먹튀를 방지하기 위해서 스톡옵션에 각종 제약을 걸어놓았지만, 일본법은 그런 것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라 이 점을 노린 셈. 애시당초 일본 기업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아닌 한국 증시에 상장을 한 이유가 이것을 위해서였다는 지적도 있다. 결국 관련 기사가 난 직후 주가는 당연히 폭락, 12,000원대까지 떨어졌다.
2021년 11월 8일자로 한국거래소 코스닥시장본부는 SNK를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했다.
과거 상장에 도전할 당시 SNK는 기업공개(IPO) 기자 간담회에서 한국 시장에서 모범이 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했는데, 뭔가 반등이 있지 않는 한 SNK는 대한민국 주식 시장을 상대로 사기를 친 역대급 먹튀 외국 회사로 남을 전망이다. 한국 증권기사에서는 상장 후에 SNK의 행보를 분석하며, 상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과 임직원들이 곧바로 자사주를 매입했다는 점. 이듬해 스톡옵션 행사 권리로 13만배 차익을 벌어들인 행위들을 언급하며, 사실상 SNK가 상장시점부터 이런 부분을 계획하고 한국 시장에 접근한 것으로 분석하며 대표적인 외국 자본의 만행 예시로 언급하였다. #
4.2. 사우디아라비아 자본의 지분 인수
2020년 11월 26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의 미스크 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사우디의 게임 개발사 Electronic Gaming Development Company(일렉트로닉 게이밍 디벨롭먼트 컴퍼니)가 ZUIKAKU 측으로부터 SNK의 주식 33.3%를 획득해 SNK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39]실은 이전부터 사우디 자본 유입의 계기가 되었던 움직임이 있었는데 2017년 11월에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개최된 미스크 포럼에 갈지휘 회장이 초대되어 등단하였고 이 자리에서 미스크 재단과 협업계약 조인식을 열었다. 2017년에 미스크 재단의 자회사인 망가 프로덕션즈가 중동지역에서 디자인 콘테스트를 개최하였는데 이 조인식에서 발표한 대로 여기서 입선한 작품을 2018년에 KOF XIV의 사우디아라비아인 DLC캐릭터 나즈드의 베이스로 썼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스테이지도 추가하였다.[40]
SNK의 최대주주가 된 Electronic Gaming Development Company는 2021년 4월 8일 임시주주총회를 열어서 바드르 빈 하무드 알바드르, 필럽 얼, 제프 피터스의 3명을 사내이사로 추가 선임했으며 허철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또한 EGDE측은 보유하는 지분을 51% 이상으로 끌어올릴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경영 체제 자체가 사우디 쪽으로 완전히 옮겨간 것이 아니라 기존 갈지휘 회장을 중심으로 한 경영진을 EGDC가 자금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1]
이후 세가 출신의 마츠바라 켄지 CEO 등, 외부 유명 게임회사 출신의 인사를 대거 등용했다는 내용을 각종 인터뷰를 통해 알렸다. 특히 도쿄 스튜디오 쪽의 인력 보충이 눈에 띄었다.
4.3. 자진 상장폐지, EGDC의 자회사화
2021년 12월 17일, EGDC는 SNK의 지분을 전량(100%) 인수하여 EGDC의 완전 자회사가 되는 방식으로 자진상장폐지를 한다고 공시하였다. 2022년 4월 14일 오후 5시 28분 주권매매거리가 정지되었으며 # 2022년 2월 15일 시점으로 EGDC가 SNK 주식의 96.18%를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되어 자회사화가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EGDC 산하로 들어간 후에는 자사가 가진 IP를 RPG 장르나 오픈월드 액션게임으로 확대할것과 AAA 게임의 신작 발표 등 다수의 신작 게임을 개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24년 3월 12일, 아리카와 협력하여 자사 IP의 재생 및 부활 사업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주요 IP 외에 과거 묻혀진 타이틀의 경우 아리카에 위탁하여 하청 개발할 것으로 추측된다.
마츠바라 켄지 CEO는 대주주에게 '10년 안에 세계 게임 회사 중 10위 안에 들 수 있게 하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하는데, 유저들의 반응은 "과연 가능할까..."라는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42] Kotaku에서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사용하는 것과 르네상스 정부처럼 여성과 동성애를 탄압하며 종교적 사상을 강요하는 것[43] 중, 어느 쪽이 목적이든 SNK의 인수를 정당화하기는 힘들다"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그나마 오다 야스유키 SNK 프로듀서는 "정치적 기업이 아니므로 딱히 탄압받지는 않으며, 인수자들은 이전부터 팬이었으므로 무엇을 할지는 우리에게 달렸다"이라고 인터뷰했고, 당장 자금 사정부터 '중국 산하였던 시절보다는 나아졌다'는 점이 게임 내외로 보이기 때문에 더 두고 봐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빈 살만 왕세자는 이슬람 근본주의와 정면충돌하면서까지 여성인권을 향상시켜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행보도 있는 만큼, SNK의 인수는 아랍어 번역을 통한 게임 시장 및 문화 융성을 위한 수단일 가능성도 있다.
[1]
SNK 초창기의 유명작이었던 사스케 VS 커맨더와 뱅가드 시리즈의 경우, 실제 개발은
토세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2]
이런 식으로 SNK는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하여 히트작을 만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이렘 후배들을 유난히 챙겨서 스카웃한 후 라스트 리조트나 KOF 94를 만들게 하거나, 1994년 게임 개발 부문에서 철수하게 되어 갈 곳을 잃은
아이렘 출신의 직원이 독립해서 창업한
나스카 창업에 출자하여
메탈슬러그를 제작시킨 후 흡수합병한다.
[3]
MVS 기판으로 출시한 게임 중 유의미한 성적을 처음 냈던 것이 바로
아랑전설인데,
스트리트 파이터 2가
게메스트 인기/인컴 순위에서 반년 이상 1위(900P 이상 획득)를 큰 차이로 독식하고 있을 때, 1992년 3월호에 처음으로 차트인 하여 3위에 500P 정도를 획득했다. 스파2의 절반 정도 수준이긴 하더라도 이는 아랑전설 출시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봤을 때
남코의 드래곤 세이버,
캡콤의
3 원더스,
캡틴 코만도 정도의 게임만이 낼 수 있는 성적이었다. 먼저 출시한
킹 오브 더 몬스터즈 같은 게임은 13위에 133P 정도로 그쳤고 SNK는 히트작 수가
아이렘 보다도 적었던 시절이다.
파이널 파이트는 이들보다 한 단계 위의 성적을 냈고 오랜 시간 1위를 독식한 작품이지만 스파2의 성적에는 당연히 미치지 못했다.
[4]
카와사키는 원래 카페 사업 및 토목공사로 돈을 번 사람이다.
허드슨의 쿠도 형제와 오래전부터 절친이었기 때문에
PC 엔진 주변기기인 아케이드 카드 듀오를 이용한 전용타이틀인 아랑전설 2, 용호의 권 등을 이식하기도 했다. 한편 쿠도 형제는 자사인 허드슨이 코나미에게 인수합병당하자 허드슨을 퇴사하였고, 퇴사할 무렵 도산한 SNK의 카와사키 사장을 도와 SNK 재건에 힘을 보태주었다고 한다.
[5]
네오지오 랜드는 에사카에 있었던 1~3호점이 가장 유명했고 직영점 포함하여 전국 전개를 했는데, 하코다테(홋카이도), 아이치현(나고야 부근), 타키노야시로(효고), 니시다이지(나라) 등에도 점포가 있었다. 하지만 경영 상황이 좋지 않았는지 2000년 시점에서 몇 군데 문을 닫았다. 도산 후 에사카 쪽 점포는 자회사인 선 어뮤즈먼트로 양도되어 잠시나마 운영되다가 문을 닫았고 구 SNK 개발사옥에 있던 2호점 자리는 다른 점포가 사용하다가 SNK플레이모어 시절에 SNK 박물관(?)으로 기능한 후 이 자리도 2005년에 내어주게 되어 현재는 네오지오와 관련이 없는 곳이 되었다.
[6]
캡콤은 80년대까지는 일본에서 인기순위 5위 안에 들지 못하는 아케이드 회사였다가
파이널 파이트와
스트리트 파이터 2가 히트한 이후 1990년대 초에 완전한 업계 1위로 올랐다.
[7]
SNK가 최고 매출을 찍은 것은 1995년 9월 결산 기준으로 491억 엔. 이 당시 캡콤의 매출은 479억 엔(1995년 3월 결산). 참고로 캡콤이 당시 최고 매출을 찍은 것은 844억 엔(1994년 3월 결산). 2019년에 1,000억 엔을 찍었기에 현재도 이와 비슷한 수준. 한편 현재의 SNK는 최고 기록인 2019년 7월 기준으로 약 100억 엔이다.
[8]
SNK는 1993년 9월 시점에 734명, 1994년 9월 시점에 950명, 1997년 4월 30일 기준 1,091명. 캡콤은 2022년 3월 기준으로 3,206명, SNK는 2022년 8월 기준으로 215명.
[9]
나아가서 캡콤의 경우 1990년대 말
CPS3의 부진 및
대전 격투 게임 침체 이후 자체 제작 기판에서 손을 떼며 슬슬 아케이드 사업의 비중을 줄여나가는 것이 확연히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바이오하자드 시리즈,
귀무자 시리즈,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 등을 성공적으로 런칭하며 아케이드 시장 없이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10]
캡콤이 아케이드 게임 회사 인기 순위 1위에 오르기 전에 아케이드 시장에서 활약했던 것은
남코(현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세가,
데이터 이스트,
코나미,
타이토 등이 있었다. 이들 회사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아케이드 사업 비중이 확 줄었지만
데이터 이스트와
타이토 빼고는 여전히 모두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시기
게메스트가 매년 독자 투표로 정한 '좋아하는 개발사' 랭킹 1위를 보면 1989년에는
세가, 1990년에는 남코, 1991년~1992년에는 캡콤(2위는
데이터 이스트), 1993년~1994년에는 SNK(2위는 캡콤), 1995년~1998년에는 캡콤(2위는 SNK)이었다.
[11]
우습게도 SNK가 도산한 이유와 비슷하다. 결국 살아남았냐 살아남지 못했냐의 차이일 뿐으로, 당시의 부동산 투자는 개발자 입장에서는 쓸데없는 짓이지만 경영자 입장에서는 일종의 보험이자 분산투자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캡콤의 경우 이전에도 이후에도 몇 번이나 도산의 위기가 있었는데 주력 사업인 게임이 팔리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많았고, 그때마다 새로운 히트작의 등장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12]
1996년에
스타 글라디에이터, 1997년말에
사립 저스티스 학원을 냈고 1998년과 2000년에 각각 후속작을 낸다. SNK가 3D로 게임을 낸 것보다 1년 정도 빠르다. 이들이 출시된 시기의 3D 격투 게임 시장은 이미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의
세가,
철권 시리즈의
남코가 주도하게 되어 후발주자였던 캡콤이 끼어들기 힘든 상황이었다.
[13]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당시는 용량이 큰 것만으로도 복제 방지가 되던 시대였다. 캐릭터 데이터를 보관하는 방법도 예전에는 비슷한 동작은 몸을 분리해서 따로 저장했는데 1996년 언저리부터 비슷한 동작도 통째로 저장해서 용량을 넉넉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생겼다. 더 나중에는 아예 SNK 사내에서 사진 같은 더미 데이터를 넣어서 롬 카트리지의 용량을 높이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네오지오의 용량 증가는 일종의 보안 강화라고도 볼 수 있다.
[14]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스파 2 이후
CPS2로 갈아탄 캡콤 아케이드 게임들이 한국 오락실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은
CPS2에서 강화된 보안 시스템으로 인해 제 값 주고 사와야만 하는 상황이 되자 이를 감내하는 업주들이 거의 없어서였다.
[15]
아케이드 사업 쪽 매출 변화를 보면 1998년 3월기부터 199억 엔→145억 엔→93억 엔→81억 엔(2001년). SNK의 아케이드 산업 비중은 30~50% 정도였다. 어뮤즈먼트 시설 쪽 수입도 30% 정도 되었다. 참고로 2001년 3월 결산 때 파치슬롯 사업 매출은 188억 엔으로 1998년 3월 아케이드 매출과 맞먹을 정도이니 체질개선의 효과는 있었던 셈이다. 1997년 3월 결산 내용을 보면 주력인 아케이드 게임 사업이 54.8%, 가정용 게임 사업이 12.8%, 게임 센터 사업(오퍼레이션)이 31.5%. 이 중 해외가 전체의 27.4%를 차지했다. 1999년 3월 결산 내용과 비교할 경우 아케이드 43.2%, 가정용 23%, 오퍼레이션 33.2%, 해외가 전체의 31.0%, 2000년 3월 결산의 경우 아케이드와 가정용 둘 다 30%, 오퍼레이션 40% 정도(네오지오 월드 도쿄 베이사이드가 개장되어 매출의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대신에 미국 지사를 포함한 자회사들을 정리하느라 특수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2001년 3월에는 가정용 재고 처리 때문에 큰 손실이 발생하게 되는데 아마도
네오지오 포켓인 것으로 보인다. 어뮤즈먼트 쪽 매출 역시 117억 엔에서 49억 엔으로 크게 줄었다.
[16]
순서대로 신규 기판인
하이퍼 네오지오 64, 휴대용 게임기인
네오지오 포켓. 네오지오 포켓의 경우 기존 시장이 아닌 신규 시장 개척을 위해 추진한 프로젝트였는데 이마저 일본 지역에서 실패한 것이다. 상대가 무려
닌텐도의
게임보이였기 때문에 힘든 싸움이기도 했고, 다만 SNK USA의 경우 휴대용 기기 점유율이 2%이긴 했지만 그나마 흑자였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성공한 편으로 평가되지만 아루제가 네오지오 포켓 사업 자체를 철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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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당시 세가에서
오다이바 등지에 런칭하면서 잘 나가던 게임형 실내 테마파크인 조이폴리스를 롤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이폴리스 2호점(1996년 오다이바)이 나오며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전인 1995년에 이미 츠쿠바에 네오지오 월드 1호점이 있었기 때문에, 어뮤즈먼트 사업 자체를 흉내낸 것은 아니고 당시 오다이바가 한참 개발 중이라 여기가 앞으로 뜰 거라고 투자를 부추기는 움직임이 있긴 했다고 한다.
[18]
'밴드 오브 파이터즈'라고 실물 스케일로 제작된 SNK 캐릭터
애니매트로닉스들이 노래를 부르는 이벤트를 열기도 하였고 테마파크에 설치된 볼링장에는 SNK 캐릭터들이 나오는 네오지오 볼링 시스템을 썼다.
[19]
2022년 8월에 팔레트 타운 자체가 완전히 폐장되고 대관람차 등은 다 철거되었다. 재개발이 들어가 금융회사의 건물 및 초고층 주상복합을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20]
이전의 사명은 유니버설 엔터테인먼트 코퍼레이션으로 보통 유니버설이라고 말한다. 물론 유니버설이라고만 하지만 영화사 유니버설 픽처스와는 관계 없다.
유니버설 엔터테인먼트 문서 참조. 사실 Mr. Do의 리메이크 작품이 네오지오 기판으로 나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본 내에서도 평이 굉장히 안 좋은 회사로 유명하다.
[21]
이 내용은 SNK 측 당사자들의 주장이며 공정한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정황상 어느 정도 말이 된다. 신문 기사로 발표된 키타노 사장의 발표에 의하면, 아루제와 SNK 경영진 사이에 방침이 충돌하여 대립이 생겼고 이로 인해 정상적인 회생절차를 밟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아루제는 SNK 재건을 위해 개발 자회사 및 해외판매 자회사들을 해산시키고 SNK 직영점을 줄였으며 SNK에게 자신들의 파칭코 기기 판매대리업을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적자가 이어지자 SNK는 2001년 3월 9일에 특정조정을 신청했고 은행과 아루제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로 인해 3월 30일에 1차 부도처리를 내게 되고 아루제와의 대립이 시작된다. 아루제는 SNK에 대한 지원을 끊었고 SNK에게 공급하던 파칭코 상품을 정지시키고 SNK가 아루제 공장(코야마)에 맡겨두었던 해외용 부품을 출하하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방해를 했고, 정기주주총회에 참석한 아루제 관계자가 거의 대부분의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는 증언도 있다.
[A]
구 SNK 사옥 중 가장 잘 알려진 지상 7층의 빌딩(현재 ダイドー江坂ビル)은 도산 전에는 본사였던 적은 없고 R&D센터 빌딩이었다. 이곳이 완공된 후에도 기존 본사 건물을 1997년 신 본사 사옥이 완성될 때까지 사용했다. SNK플레이모어로 사명을 바꾸면서 2003년~2009년 사이 이 R&D 센터였던 건물에 입주하였고 이때 SNK 역사상 처음으로 본사로 등록하였다.
[23]
참고로 본사 이전 시기에 나왔던 작품이
KOF 2000이고 상황에 딱 맞게 Goodbye ESAKA라는 곡을 삽입했다.
[24]
이미지를 봐도 알 수 있듯 대다수가
대전 격투 게임 출신 캐릭터며, 게임 자체가 묻혀버린
쿨 쿨 툰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대전 격투 게임에도 등장한 바가 있는 캐릭터들이다.
[25]
브레차 소프트에 하청을 준 것이 이오리스이니 당연히 개발비 지원을 했다.
[26]
월간 아르카디아에 실린 인터뷰에 의하면 태권도를 쓰는 여성 캐릭터를 꼭 넣어달라고 했다고 했으며, 10주년 사이트에는 '한국팀의 아테나 같은 캐릭터'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디자인 자체는 디자이너가 한국에서 유행하는 영상물을 잔뜩 체크한 뒤 '특촬물이 한국에서도 통한다'라는 확신을 갖고 진행한 것이라고 한다.
[27]
IRE-GUI에는
테리 보가드와
시라누이 마이 등의 SNK 캐릭터도 등장하는데, ©SNK 2001라는 표기만 넣어두고 플레이모어 측의 사용 허가를 따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28]
아루제 측 주장은 SNK 사원이 해당 영상 소프트 개발 시 연수로 참여했을 뿐이었는데, SNK에서 자신들의 것으로 위장한 후 플레이모어 측에 넘어간 것처럼 했다는 것이고 소송을 건 것은 영업방해가 목적이라고 주장.
[29]
아루제와의 저작권 소송이 문제가 되었다는 의견이 있지만 아루제가 무단으로 SNK의 저작권을 사용하여 그것이 저작권 침해인지 아닌지가 재판의 목적이었지 저작권을 아루제가 일부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아니었다. 해당 재판 역시 2007년에야 마무리된 것으로 보이므로 2003년에 변경한 사명과는 관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
제작을 맡은 유키엔터프라이즈 자체가 원래 사무라이 스피리츠 제작팀이 독립해서 설립한 회사라고 한다. 참고로
딤프스는 SNK의 개발부서 임원과 관리직들이 세운 회사.
[31]
또한 4세대 게임기의 마지막 게임이기도 하다.
[32]
DoM은 어느 정도 기존 SNK 세계관을 평행세계스럽게 어레인지하면서 스토리 개연성이라도 갖췄지만 이건 그런거 없이 그냥 섹스셀링에만 요점을 둔 게임.
[33]
대표적으로 플레이모어 명의로 발매되지는 않았지만 99, 2000에 비해 사운드, 그래픽 퀄리티가 매우 떨어져 버리고, 한국 유통을
이오리스가 맡은
KOF 2001과,
메가 엔터프라이즈에서 유통에 참여하였지만 무수한
Ctrl CV 수준의 전작 짜깁기, 설정붕괴, 무리한 신캐릭터로의 교체, 답답한 레벨 디자인으로
메탈슬러그 시리즈 사상 최악의 졸작 중 하나로 평가받은
메탈슬러그 4가 대표적이었다. 그나마 플레이모어 시기 흥행이나 평가 양쪽에서 성공을 한 건
KOF 2002 밖에 없었다.
[34]
정작 본인이 밝히기로는 더이상 회사에서 오래 작업할 수 있는 몸상태가 아니라서 퇴사한 것이라고 한다.
[35]
전설의 게임
운명:무신의 후예의 제작사.
반지: 에이지 오브 링 역시
시대를 뛰어넘은 광고 센스를 보여준다.
[36]
참고로 SNK는 파치슬롯 사업을 중단하면서 직원 수가 감소하였기에 아크시스템과 직원 수는 별 차이 안 난다.
[37]
그 때문에 몇몇 커뮤니티에서는 이따위 상술에도 SNK니까 응원합시다식의 무조건적인 옹호에 반발해 무슨 인디게임 제작사 응원하는거냐는 비아냥도 나왔다.
[38]
원래는 1주당 0.1원이라는 정신 나간 가격으로 하려고 했으나, 기사가 나고 논란이 커지자 1주당 1원으로 했다. 여전히 역대급 헐값인 것은 변함 없다.
[39]
이 소식이 처음 알려졌을때는 EGDC가 SNK를 완전히 인수했다는것으로 잘못 퍼졌다.
[40]
여기까지는 단순한 콜라보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 ZUIKAKU 측의 부진을 생각하면 자금 원조를 구실로한 이벤트였을 가능성이 있다.
[41]
또한 기존 대주주인 Perfect World가 13.73%, ZUIKAKU가 4.36% 지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42]
단순 규모로만 따질 때, 시가 총액 100조 이상의 소니, 닌텐도 같은 플랫폼 기업이나 아예 사우디 왕가 이상의 규모인 마이크로소프트, 텐센트 같은 초거대 기업을 논외로 치더라도,
EA,
테이크투 인터랙티브를 비롯한 1~10위권의 게임 기업은 시가 총액 20~40조의 규모이며 대기업인 캡콤조차도 규모로 따지면 10위권 내는 커녕 50위권도 아슬아슬하다. 게임업계 10위권 진입은 빈 살만의 개인 자산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43]
사우디아라비아는
샤리아를 따르는데, KOF를 비롯한 SNK의 여캐릭터들 중에는 사우디 쪽에서 눈이 뒤집어질만한 인물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