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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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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성서 히브리어 שְׁמוֹת (Šəmōṯ, 슈모트; "이름들")[1]
고대 그리스어 Έξοδος (Éxodos)
라틴어 Liber Exodus
독일어 2. Buch Mose | Exodus | Schemot
영어 Book of Exodus
프랑스어 Livre de l'Exode
한국어 가톨릭: 탈출기(脫出記)
개신교, 정교회: 출애굽기(出埃及▽記)
기본 정보
전승되는 저자 모세
기록 연대 J, E, P BC 8세기[2] 또는 예루살렘 역사서Das Jerusalemer Geschichtswerk[3] BC 7세기 → 모세오경의 완결 BC 400년경[4]
B.C. 1550년~1200경(전통적 견해)
분량 40장
주요 인물 모세, 아론

1. 개요2. 제목 번역3. 줄거리
3.1. 파라오 하의 이스라엘 (1–14장)3.2. 하느님 하의 이스라엘 (15–40장)
4. 해석5. 역사적·신학적 연구
5.1. 연구의 이유5.2. 노예 살이 기간
5.2.1. 인구 증가
5.3. 가계의 저주5.4. 분노와 질투의 하느님5.5.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문제5.6.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문화적 연결성5.7. 출애굽기의 원천5.8. 탈출기의 시기 문제
5.8.1. 일반론5.8.2. 전기설과 후기설
5.9. 10가지 재앙 문제5.10. 이집트의 노예제5.11. 학계 담론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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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출애굽기 3장 14절 (공동번역 성서)[5]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출애굽기 20장 2~3절 (공동번역 성서)

성경의 2번째 권.

창세기의 뒤를 잇는 모세오경의 2번째 권이며, 이후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진다. 동시에 모세가 첫 등장하는 책이다. 이상의 다섯 기록은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므로 "모세오경"으로 부른다.

불가타 성경의 원제인 '엑소두스(Exodus)'는 '탈출'이라는 뜻으로, 이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탈출기라는 명칭을 쓴다. 2005년 이전에는 천주교에서도 출애급기(出埃及記)라고 썼으나, 2005년에 개정된 한국천주교주교회의판 성경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성경상 명칭인 Exodus를 그대로 직역한 탈출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 엑소도스(έξοδος)는 탈출이라는 뜻도 있지만, 샛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라는 뜻도 있어서 말 그대로 '하느님에게 이르는 새로운 길'이라는 중의적인 의미의 해석도 가능하다.

이 책은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 이집트(Egypt, 애굽)에서 탈출하는 과정, 곧 창세기 마지막에 이집트에 정착한 이스라엘인들이 노예가 되었다가 탈출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서 나갈 (出) 애굽이 되었다. 즉, 이집트 탈출기다. 이 내용은 쿠란에서도 나온다.[6]

에제키엘서 16장은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기원한 세력인 것처럼 묘사하며, 이사야서 19:18은 가나안인이나 가나안을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가나안어와 히브리어를 동일시하고, 역대기 상권 7:20-22은 이집트에 있어야 할 에프라임의 아들들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나안의 산간 지방에서 "내려와" 가나안의 불레셋의 도시 가드의 사람들과 분쟁이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이렇게 성서에는 다른 이야기와 모순되는, 고대의 전통을 보존하는 원형의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실제로, 현대 학계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세력 자체는 가나안에서 기원하였으며, 이집트 탈출이라는 전승은 그 가운데 일부 소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전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듯이 이스라엘 문화와 가나안 문화는 구분이 불가능한 수준이며, 이를 고려하여 현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고지에 있던 기존 백성들로부터 평화롭게 내부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 가나안의 농민들과 유목민들로 구성되었을 고지대의 초기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었던 농업 명절들인 어린 양의 탄생제인 과월절은 이집트 탈출, 곡식 수확제인 칠칠절은 시나이에서 율법을 준 사건, 과일 수확제인 초막절은 광야 방랑으로 그 의미가 변형되었고, 초기의 농업적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지는 않았지만 야훼의 이스라엘 구원과 이스라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지위를 기념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2. 제목 번역

한국 천주교에서는 구약성경 제2권(Liber Exodi)을 중국어 명칭인 ‘出埃及記’를 따라 ‘출애기’라고 불러왔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 최초(1959년)의 구약 성경인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7]의 번역본에도 ‘출애급기’로 되어 있었다. 반면에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초창기부터 ‘출애기’라고 일컬어 왔다. 그 유래를 알 수 없으나[8] 어쨌든 성경 속의 지명 ‘이집트’를 ‘애굽’이라고 부른 데서 시작된 듯하다. 1977년 공동번역 구약이 출판되면서 어찌된 셈인지 이 구약 제2권의 이름에 대해 개신교 측 용어인 ‘출애굽기’로 붙여졌고 1977년부터 무려 40년간 그렇게 불러왔다. 그러다가 1992년부터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구약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해서 2005년 신구약 새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는데, 가능한 한 현대적이고 정확한 번역을 지향하는 한국 천주교 성경은 'Exodus'란 명칭대로 ‘탈출기’로 제목을 붙였다.

3. 줄거리

3.1. 파라오 하의 이스라엘 (1–14장)

내용은 창세기 끝부분에서 이어진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집트 왕국에서 권력을 잡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형제 요셉의 보호 아래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일강 동쪽 삼각주 지방의 여러 도시에서 번영하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했고 가나안의 자기네 고향 땅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후 열두 형제의 자손들과 그들의 직계 가족은 야훼가 약속한 대로 커다란 민족으로 성장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그들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파라오[9]가 여러 명 바뀌었고 마침내 '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파라오가 등극하게 되었다.[10]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배반하고 이집트의 적과 내통하지 않을까 우려한 새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아 비돔과 라암셋의 왕도를 건설하는 데에 강제로 집단 동원했다. 이 위험한 이민 노동자 집단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두려워했던 파라오는 히브리인 신생아 남자 아기를 모두 나일강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정확히는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자가 아기를 낳거든 여자아이는 살려두고 남자아이는 죽이라"고 명했다. 그런데 마음씨 착한 히브리인인 나이 든 산파 십브라와, 조수인 젊은 산파 부아가 파라오의 명을 어기고 몰래 남자 아기들을 살려주었고, 파라오가 추궁하자 십브라가 "히브리 여자들이 너무 건강하고 힘이 좋아서 산파가 가기도 전에 아이를 잘 낳아 버리니 어쩔 수가 없더라구요. "고 둘러댔다. 야훼는 이 착한 산파들의 마음씨에 탄복하여 그들과 그 가족에게도 큰 은혜를 베풀어서, 히브리인들의 번성에 일조하게 된다.[11]

그런 위험한 순간에 한 레위 부부가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남편이 아므람, 아내가 요게벳이었다. 이미 딸 미리암과 아들 아론을 둔 이 부부는 갓 태어난 차남이 너무 귀여워서 처음 3개월은 숨어서 길렀다. 하지만 집요한 추적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역청을 바른 갈대 바구니에 담아 나일강 가로 떠내려가게 했다. 첫째 미리암은 어린 남동생이 걱정되어 어머니 몰래 갈대밭에 숨어 갈대 바구니를 따라 나섰다. 그렇게 갈대 바구니에 담겨 강물 위를 떠가던 남자아기는 파라오의 여러 왕녀들 중 시녀들과 목욕하러 나일강에 온 한 왕녀가 발견하였다. 왕녀는 갈대 바구니에서 우는 남자 아기를 가엾게 여겨 그를 양아들로 들이기로 했고 갈대 숲에 숨어있던 미리암은 아기를 돌봐줄 유모로 자신의 어머니를 추천했다. 이렇게 아기는 히브리인 친어머니를 유모로 알고 이집트 왕녀를 자신의 어머니로 두게 되었고 아기가 젖을 뗄 무렵 히브리 여인과 미리암은 아기를 왕녀에게 데리고 갔다. 왕녀는 이 남자아이에게 모세[12]란 이름을 지어주고 모세를 친아들처럼 돌봐주었다.

모세는 성장하면서 무술과 지혜가 뛰어난 젊은이로 자랐다. 다시 여러 해가 지나 40세의 어른이 된 모세는 공사장의 한 이집트인 감독이 히브리인 노예를 매질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며 그를 죽인 다음 그 시체를 모래 속에 감추었다. 그러나 나중에 두 히브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막으려 하자 그중 하나가 "네가 우리의 재판장이 되려고 하는가? 우리도 죽이려 하는가?"라는 말을 하자 탄로 났음을 알고 자기 행동의 결과를 두려워한 모세는 미디안 땅의 광야로 도망갔다.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드로란 유목민 족장과 만나게 된 모세는 이드로에게서 히브리인의 역사를 듣게 되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두며 다시 40년을 보냈다. 80세가 되던 해, 모세는 호렙 산 근처에서 히브리인들을 구출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13] 아론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가서 파라오에게 민족의 자유를 요구한다.[14] 파라오는 당연히 거부하고 히브리인 노예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조치로 대응했다.[15] 이로 인해 일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이 더욱 가중되자 히브리인들은 모세 형제를 까면서 화를 내고 원망했고 그들의 원망을 들은 모세는 한동안 상심하지만 야훼의 위로로 마음의 짐을 던다.

이렇게 파라오의 고집이 꺾일 기미가 안 보이자 야훼는 그 유명한 ' 10가지 재앙'을 내린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큰 틀에서 보자면 야훼가 모세와 히브리 사람들을 위해 이집트에 내렸다는 탈출기 속의 재앙은 이집트인들이 자기들의 신들로 인한 괴로움을 당하라는 것으로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 이집트의 신들은 무쓸모다'라는 것을 야훼가 일깨워 주려 한 것인데[16] 파라오는 야훼의 경고에 굽히지 않았으며[17] 그 대가도 고스란히 자신과 자신의 백성들이 치르게 만들었다는 것이 탈출기의 기본 줄거리.

최후의 재앙인 '초태생의 몰살'에 대해서 더 언급하자면 히브리인들의 초태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야훼는 모세 아론에게 지시하여 히브리인이 양을 잡아 자신들의 집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이집트인들의 초태생을 모두 죽이는 밤에 재앙이 히브리인들의 집은 넘어가도록 했고, 이것이 유월절의 유래가 되었다. [18] 야훼는 또한 히브리인들이 서둘러 이집트를 떠나도록 하기 위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잡은 양의 고기와 함께 식량으로 준비해 두라고 지시했다. 이것은 유태인들의 축제인 파스카(무교절, 無酵節)의 기원이 된다.

파라오는 자기 아들까지 죽자 체념하고 히브리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모두 내보낸다.

히브리인들은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광야 지대로 향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파라오가 정예 전차부대를 동원[19]하여 도망치는 히브리인들을 뒤쫓아 왔을 때 모세의 기적으로 홍해[20]가 갈라져[21]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 밑바닥의 마른 땅을 통과하여 광야에 도착했다. 거대한 절벽의 계곡처럼 갈라져 있던 바닷물은 히브리인들이 모두 건넌 직후 합쳐지면서 추격하던 이집트 사람들을 집어삼켰다고 한다.[22]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탈출기의 내용이다.

3.2. 하느님 하의 이스라엘 (15–40장)

뒤에는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는 장면[23]과 히브리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 사건, 성막을 만드는 것(정확히는 성막 만드는 법)으로 끝이 난다.

4. 해석

전반부에서는 노예로 얻어맞고 살지만 화려하고 풍요로운 이집트 지역을 떠나서, 팔레스타인 근처 광야 지역을 배경으로 힘겹게 사는 내용이 주로 나오며, 이에 따른 갈등이 번번히 등장한다. 잘 먹고 잘 사는 노예가 될 것이냐 가난한 자유민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랄까.

이집트 지역에 10가지 재앙이 내리는 장면 바다를 쩍 하고 가르는 장면이나[24] 고기를 달라 하니 엄청난 메추라기(원문은 자고새) 떼와 만나[25]가 나타나 포식하게 되는 장면, 물이 부족하자 바위를 때려 부수고 샘이 나온다든가[26][27][28], 십계명을 받기 위해 뇌우가 쏟아지는 산으로 모세가 올라가는 장면이 나오는 등 묘사적으로 볼거리가 풍부하다

하지만 20장 후로는 성전 건설이나 제사장 옷에 대한 규격이나 히브리인의 법에 관한 내용만 나와서, 일종의 법전이 되며 때문에 기독교도들도 읽기 매우 힘들어하는 부분이 된다. 이는 레위기까지 이어지고, 민수기 신명기에도 율법에 대한 내용이 재등장한다. 성경 통독을 한 번쯤 결심한 사람에게 첫 번째이자 최대 고비. 흔히들 이 부분에서 그만두거나, 탈출기를 다 배우고난 후 바로 마르코 복음으로 넘어간다.[29][30] 그러나 탈출기 이후에 나오는 율법에 관한 내용들은 이후의 구약들과 신약 성경을 읽는 데 분명 도움이 된다. 판관기에서 기드온의 에봇과 드라빔[31] 문제라든지, 복음서에서 회막이 갈라진 것의 함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처벌 문제에 대한 예수의 태도, 슬로보핫 여인들의 상속 과정에 터 잡은 예수의 족보에 대한 해석론 등 중요한 떡밥마다 구약 시대의 관념이 신약의 기록 당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압제자 파라오로부터 자유를 찾아 떠나는 내용이라는 점, 민주주의 사회에 건전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현대인들에게 거부감이 없는 데다가[32] 내용 자체가 상당히 드라마틱하며 몰입감을 주어 서구권에선 탈출기를 주제로 한 수많은 영화 ( 십계 등)와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다.

5. 역사적·신학적 연구

5.1. 연구의 이유

근대 역사학과 고고학의 발달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와 성경의 내용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어디까지나 종교적 경전이며 초현실적인 과장과 기적들로 가득한 탈출기를 가지고 뭔 역사 연구를 다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기 근동 문서는 죄다 이렇다. 이집트, 히타이트,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 어느 나라를 보든 역사서술법은 구약의 서술법과 비슷하다. 딱히 탈출기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 기록 중에 유명한 투트모세 3세 카르나크 신전 비문을 보면 "아문 신이 파라오의 군대의 앞에 서서 팔을 뻗어 그들을 돕는다"와 같은 식의 표현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당시 이 지역 사료들 자체가 반쯤은 초현실적으로 쓰여져 있기에, 구약 성경과 그 안에 있는 출애굽기 역시 학계에서 엄연한 고대 사료로 인정받는다. 한국의 경우에는 단군 신화를 들 수 있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었다고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나 문학적으로 해석해 보면 곰을 자신들의 조상신으로 섬겼던 부족과 호랑이를 자신들의 조상신으로 섬겼던 부족으로 해석한다. 고구려 주몽 설화나 신라 박혁거세 설화 등 자신들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과장하는 것은 당시에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자연 현상이나 현대인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신의 기적'으로 해석하였고, 그러한 신의 존재를 사실로 믿었으며, 이런 현상들에 대한 현대인의 신앙은 현대인 개개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역사를 기록했던 저자들에게는 우리에게 익숙한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해 후대에 전한다'는 관념 자체가 없었다. 고대 근동에서 역사 서술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이나 신의 위업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역사 기록 자체가 종교적 텍스트를 겸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목적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서의 개념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훨씬 후대인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부터다. 하지만 이조차도 현대적 관점의 역사서는 아니다.

이 대목에서 그럼 박씨전도 사료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으나, 박씨전은 저자가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는 상태에서 엄연히 소설로 쓴 것이고, 탈출기 같은 문서는 후대 히브리인에게 선조들의 역사로 알리기 위한 의도로 쓰여졌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정말 진지하게 역사적 목적으로 썼다는 말. 게다가 그 '소설' 박씨전 또한 병자호란이라는 엄연히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을 당대 조선인들이 '소설'을 쓸 정도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증언하고 있는, 사상사(思想史) · 문화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료다. 하물며 탈출기는 소설을 쓰겠다는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상, 문화사를 넘어서는 부분에까지 자료로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가 탈출기를 당대인처럼 받아들여야 한단 논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며 치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옳다.

그리고 이집트의 역사조차도 '모두' 유물이나 유적으로 교차 검증된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일대의 유물은 이집트 일대의 유물과는 보존 상황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애초에 '고대사'는 자료가 택도 없이 부족한 영역이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세월의 간극은 많은 사료들을 소실시킨 것 못지않게, 살아남은 사료들도 변형시켰다. 당연히 우리가 보는 원사료들은 다 사본들이고, 사본들은 필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특히 숫자와 관련된 것들은 가장 취약한 정보들이라 필사 과정에서 무수하게 변형되었다. 우리가 교양 수준에서 아는 부분만 교차 검증이 돼서 대중들에게 알려진 거지, 그보다 훨씬 많은 영역들은 아직도 논란거리다. 그 논란거리 중에 하나가 바로 탈출기이고.

고대 로마 중국처럼 잘나가고 대제국을 이뤘던 국가들에 대한 자료는 '그나마' 많이 남아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역시 부족한 부분이 많다.[33] 이집트 역시 한때 잘나갔던 국가이니만큼 그 시대 그 지역치고는 자료가 좀 남아있는 편이지만 많은 제한된 사료와 여러 가지 가능한 증거들을 총동원하여 '추측'해야만 한다.[34] 그리고 그 추측의 영역은 학계에서 갑론을박이 오가고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탈출기 또한 그런 영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락에서 말하는 건 신화적인 묘사를 이유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한 신뢰도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수천 년 전에 문명이 시작된 이집트 기록에 비하면, 탈출기는 그 기록의 분량과 검증에서 어마어마하게 뒤쳐질 수밖에 없다.

5.2. 노예 살이 기간

야훼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똑똑히 알아두어라. 네 자손이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종이 되어 얹혀살며 사백 년 동안 압제를 받을 것이다."(창세기 15장 13절, 공동번역)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35] 머무른 것은 사백삼십 년 동안이었다. 마침내 사백삼십 년이 끝나던 바로 그 날에 야훼의 군대는 모두 이집트 땅에서 빠져 나왔다.(출애굽기 12장 40-41절, 공동번역)

흔히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사는 동안 400년 간 노예살이를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해석은 성경 내부의 연대기와 맞지 않다.[36] 모세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레위(137세까지 생존)-고핫(그핫)(133세까지 생존)-아므람(137세까지 생존)-모세(80세에 출애굽)

즉 야곱 가족들이 이집트로 들어간 후 350년 후에 모세가 탄생했다는 것인데, 고핫은 레위와 함께 이집트로 들어갔었다. 고핫과 아므람이 죽기 직전에 자식을 낳았어도 350년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사마리아 오경과 마소라 사본보다 9세기 이전의 사본인 70인역 사본에 따르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430년 동안 거주한 것이 아니라 애굽과 가나안에 430년 동안 거주했다고 나와있다. 갈라디아서 3:17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때로부터 출애굽까지의 기간을 430년이라 기록했으며, 사해문서와 외경인 희년서는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의 언약을 맺은 때로부터 출애굽까지의 기간이 430년이라 기록하고, 현대의 유대인들 역시 이를 430년이라 믿는데, 이는 그들의 달력에서도 확인된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때로부터 야곱이 애굽에 들어간 때까지 약 215년[37]이 지났기에 이로부터 출애굽까지의 기간은 215년이 되며, 앞서 언급한 족보의 설명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또한, 400년 동안의 압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에게도 적용되기에 반드시 애굽에서의 종살이가 400년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는 없으며, 창세기 15장에서 이삭이 태어나기까지는 25년이 걸렸고 이삭이 태어나고 5년 정도는 비교적 평안했다고 치면 딱 400년이 된다. 이삭은 그랄의 거주민들에게 박해를 받았고, 야곱은 아람인인 삼촌을 위해 종살이를 했으며,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는 세겜 왕을 의식하며 생활했었다. 요셉은 정말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기도 했었다.

5.2.1. 인구 증가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생긴 두 아들까지 합쳐 이집트에 간 야곱 가문의 식구는 모두 칠십 명이 되었다.
창세기 46:27(공동번역)
이스라엘 백성은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가득 찰 만큼 무섭게 불어났다. (중략) 이것은 이십 세 이상으로 호적에 오른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 낸 돈이다. 그들은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카씩을 낸 셈이다.
출애굽기 1:7,38:26(공동번역)

성경에 따르면 야곱 일가가 애굽에 막 들어갔을 때에는 남자 인구가 70명이었지만 출애굽을 할 때에는 20세 이상의 남자의 숫자만 60만명 가량으로 늘어난다. 상위 문단에서 말하는 것처럼 히브리인들의 애굽 거주 기간이 215년이라고 한다면 그 기간동안에 약 1만배의 인구증가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매년 4.4퍼센트의 인구 증가가 있다면 이런 수치를 달성하게 되는데, 오늘날 하레디들의 출산율이 6~7 정도고 2009년에 75만명이었던 것이 2022년에 122만명으로 늘었으므로 매년 인구가 3.8퍼센트씩 증가했다는 셈이 된다. 성경에 따르면 그 때는 사람들이 100살 넘게 사는 것이 기본인 시대였으므로 여자들의 출산 능력도 남달라서 출산율을 8씩 찍었다고 치면 이론상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다. 한국만 해도 과거에는 출산율이 6이 넘었고, 고대인 기준으로도 히브리인들의 출산율은 괄목할 만한 수준이었음이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에 출산율이 8이 넘었었다는 해석은 일리가 있다.

5.3. 가계의 저주

야훼께서 그의 앞을 지나가시며 외치셨다. "나는 야훼다. 야훼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이다.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베푸는 신, 거슬러 반항하고 실수하는 죄를 용서해 주는 신이다. 그렇다고 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상이 거스르는 죄를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사 대까지 벌한다."
출애굽기 34장 6-7절( 공동번역성서)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장 20절(개역개정)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두 구절을 두고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는지 여부에 대해 논쟁이 있다. 한국의 장로회에서는 에스겔 18장 20절을 들어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주장을 이단시한다. 반면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측에서는, 모든 것을 조상 탓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사무엘기에 나오는 엘리, 다윗, 요압 가문의 저주와 실제로도 대대로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는 집안이 있는 것 등을 근거로 들어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고 주장하며, 에스겔 18장 20절은 죽은 이후 심판대 앞에서 하느님이 부모의 죄를 묻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참고로 정교회에서는 에스겔 18장 20절을 근거로 들어 원죄의 유전을 부정한다.

5.4. 분노와 질투의 하느님

나를 말리지 마라. 내가 진노를 내려 저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그리고 너에게서 큰 백성을 일으키리라.
출애굽기 32장 10절 (공동번역성서)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출애굽기 34장 14절 (공동번역성서)

신약성경에서 하느님에게서 주로 사랑의 속성이 강조되는 것과 달리, 출애굽기 등의 구약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분노와 질투 같은 속성이 자주 나타난다. 다만 기독교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하느님의 분노는 하느님의 공의를 드러낼만한 상황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죄 많은 인간이 다른 사람을 용서 못하고 혈기부리는 것과는 다르며, 하느님의 질투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창조 목적에서 벗어나 우상숭배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라는 점에서, 인간이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질투하는 것과는 다르다.

5.5.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문제

탈출기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스라엘 민족'(히브리인)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다. 즉, 탈출기는 히브리 즉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민족'은 과연 언제 형성된 것일까? 성경 외의 자료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최초로 언급되는 문헌은 기원전 13세기가 끝나기 직전 람세스 2세의 아들인 파라오 메르넵타가 가나안을 원정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비석의 내용에 따르면 이집트 원정군이 가나안에 침공하여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민족을 대량 학살했고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후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왕들이 엎드려 외친다: “자비를 베푸소서”
아홉 개의 활 아래 머리를 들 수 있는 자는 없다.
테헤누(Tehenu)에는 쇠락이, 하티에는 평화가 왔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후예는 이제 없다.

이 자랑에는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그 시기에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특정 민족 집단이 이미 가나안에 살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문제는 이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언제 이스라엘 민족이 되었냐 하는 것이다. 정말 이집트에서 이주해 온 집단인가? 아니면 가나안 토착 민족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러 집단이 섞인 것인가?

탈출기 속에는 여러 시대의 역사적, 지리적 사실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집트 탈출이 벌어졌을 단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가려내기가 어렵다. 고대에는 이집트로 가는 이민의 물결이 주기적으로 끝없이 계속되었다. 중기 청동기 시대에 힉소스족이 삼각주 지역을 지배한 구체적인 사실도 있다. 또한 람세스 시대의 이집트와 관련된 몇 가지 요소를 연상시키는 내용들이 성경에 등장하고[38], 이러한 내용들이 탈출기와 일정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집트 역사의 특정한 시대에 이집트 탈출이 일어났다고까지 콕 찍어 주는 것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할 '전기설과 후기설' 참고.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탈출기에 묘사된 기본적인 상황, 즉 야곱의 가족들이 정착한 것처럼 이민 집단이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내려와 이집트 동쪽 국경의 삼각주 지역에 정착한 현상은 고고학적인 발견과 역사기록 문서에 의해서 충분히 확인된다. 초기 역사 시대 이후 고대 세계에서, 가뭄과 기근 혹은 전쟁으로 생활이 견디기 어렵거나 힘들어질 때마다 가나안인들에게 이집트는 안전한 피난처로 생각되었다. [39] 고고학 연구 결과 청동기 시대에 가나안 남부 지방에서 이집트 삼각주 지역으로 이주한 셈족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대규모 집단을 이루어 이동했음이 밝혀졌으며, 그 집단마다 이주 동기 역시 다양했고 이주한 뒤 성공한 정도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서 이집트 공공 건축사업의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문제는 이 셈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집트학 학자인 도널드 레드퍼드는 힉소스 족이 이집트를 점령한 사실과 그들이 삼각주에서 무력에 의해서 추방된 대규모 사건들의 반향이 여러 세기 동안 전승되어 가나안 주민들의 공통적인 기억의 핵심이 되었다고 주장한다.[40] 이집트에 정착하여 삼각주의 지배권을 장악한 후 나중에 쫓겨나 고향 땅으로 되돌아온 이 가나안 출신 식민 통치자들에 관한 각종 이야기가, 후기 청동기 시대에 이집트가 가나안에 대한 통치의 고삐를 더욱 조일 당시 가나안인들의 단결과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적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민족적 정복설[41], 평화 이주설[42], 농민 반란설[43] 등이 제기되었는데, 최근에는 평화 이주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1200년)와 초기 철기 시대(기원전 1200~1000년)에 걸쳐 있다고 추정되는 고대 가나안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 팔레스타인 북쪽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향하는 산간 지대에서 고고학적 출토물이 나왔음이 확인된다. 고고학자들은 이 중앙 산간 지대에, 기원전 1250년 이후 갑자기 생긴, 성곽이 없는 몇백 개의 작은 마을들이 있었음을 밝혀냈다. 팔레스타인의 초기 청동기 시대에 중앙 산간 지대의 인구는 초기 청동기시대에는 1만 2,000명, 12세기는 5만 5,000명, 200년 후에는 7만 5,000명이나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인구가 대폭 늘어났던 현상을 해당 지역의 작은 유목민들이 정착한 것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결국 12세기경에 가나안 외부로부터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이들 중 일부가 이집트에서 나온 노예들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만들었다고 보인다.

평화적인 정착은 분명하나 이집트에서 탈출한 노예들이 주요 집단이라는 가설은 전혀 주류가 아니다. 진짜 주류의견은 가나안 외부에서 유입이라기 보다는 가나안 내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농민 반란설과 유사하게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 과정에서 가나안 저지대 도시국가들에서 이탈한 농민들이 당시 거의 비어있던 고지대에 정착했다는 가설이다. 고고학적으로 당시의 물질문화는 가나안 문화와의 연속성이 뚜렷한 반면 가나안 외부에서 대규모 인구유입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이집트에 가나안 중앙 고지대 까지 아무런 흔적없이 대규모 인구집단이 이동할수는 없다). 무엇보다 당시 가나안은 오랜기간 이집트에 복속된 일종의 속국과 같은 곳이었다. 비록 후기청동기 말의 쇠퇴로 위축된 부분이 있다하더리도 기원전 12세기는 물론 이스라엘 왕국성립 이후에도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강했기에 이집트를 탈출한 집단이 정착할 곳이 못 된다. 또한 윗문단에 언급된 '하비루'는 애초에 가나안 사람이라서, 좀더 이전 시기인 아마르나 문서에 가나안 도시 국가의 왕들이 파라오에게 보낸문서에 하비루들이 깽판쳐서 힘들다는 식으로 여러번 언급되어있다. 성서 전승을 존중하여 일부 이집트 출시 유이민 집단이 참여하여 출애굽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가설은 설득력 있지만 초기 이스라엘 정착지의 인적구성의 대부분은 가나안 내부에서 비롯되었을 수밖에 없다.

즉 전기설이든 후기설이든 가나안의 도시 군주 국가들에게서 억압받고 도망 나온 다양한 하층 민중들이 팔레스타인의 중앙 산악 지대에 거주할 때, 사회적 하층민에 있던 '하비루(Habiru)'[44]또는 이집트 노예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부터 탈출해 해방하여 나왔고, 광야와 가나안 남부의 사막 지역에서 그들의 신으로 야훼를 선택한 후에 이 두 집단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략 1,200년경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가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는 내부기원설만 채택되었다는 윗말과는 다르게 내부 기원설 + 외부 주민들이 합쳐졌다는 공생설이 주류이다.첫번째의 평화적 침투 또는 이주설 이나 두번째 설명의 내부기원설이나 둘중 하나만 채택하지 않고 둘다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기 1세기 알렉산드리아 그리스인 학자 아피온은 <유대인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마네토의 '이집트 역사'를 인용하면서, 과거 이집트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나병 환자들이었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출애굽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사서이자 스토아 철학자 카이레몬도 아피온과 비슷한 견해를 밝혔다. 이시스 여신이 꿈 속에서 당시 파라오 아메노피스에게 나타나 전쟁 중에 자신의 신전이 파괴된 것에 대해 꾸짖었고, 거룩한 서기관 프리토바우테스가 파라오가 이집트에서 오염된 사람들을 쫓아낸다면 더 이상 경고를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권했다고 서술했다. 이에 파라오는 25만 명의 병자를 모아서 추방시켰는데, 그들의 지도자 중에는 오사르세프(Osarseph, 모세)가 있었다고 한다.

유대인으로 고대 로마의 역사학자였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이에 대해서 직접 '아피온에 대하여 반박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반박하기도 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항목 참조.

5.6.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문화적 연결성

히브리인들이 정말 이집트 치하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면, 히브리인들의 문화에 자연히 이집트적 경향이 강하게 발견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어느 정도인지의 여부가 탈출 사건의 진실성을 말하는데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45]

일단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문화적 영향을 (강하냐 약하냐와는 별개로) 받았는가 받았지 않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확실하게 "받았다"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유대교에서 창조주와 인간이 맺은 계약의 증거로 여기는 할례를 보자.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의 풍속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 이집트인의 풍속을 배운 자는 예외로 하고 — 성기를 타고난 그대로 두는데, 이집트인은 할례를 한다.
(중략)
페니키아인 및 팔레스티나의 시리아인은 그 풍속을 이집트인으로부터 배웠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고, 테르모돈 및 파르테니오스 두 강변에 사는 시리아인 및 그들과 인접해 사는 마크로네스인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것을 콜키아인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하고 있다. 요컨대 세계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위의 민족들뿐이고, 게다가 그 방법도 명백히 이집트와 똑같다.

<역사> 2권 中

즉 헤로도토스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람들의 할례 풍습을 명백히 이집트에서 찾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과 페니키아는 상당히 많은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는 이웃이기도 하며, 지리적으로는 이스라엘을 시리아 지역과 세트로 묶기도 한다. 굳이 이런 민족적 근연 관계를 말하지 않더라도, 근동 지방의 할례 풍습이 이집트에서 나왔음은 (적어도 헤로도토스의 주장을 신뢰한다면) 부정할 수 없다.[46] 또한 일부 성 윤리 역시도 이집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성역 내에서는 여자와 관계를 갖지 못하며, 또한 여자와 관계한 뒤에 목욕을 하지 않은 자는 성역에 들어올 수 없다는 등의 계율을 정한 것도 이집트인이 처음이다. 왜냐하면 이집트인과 그리스인 이외의 민족은 거의 모두 성역 내에서 여자와 관계를 갖는가 하면, 관계를 한 뒤에 목욕도 하지 않고 성역에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도 딴 짐승들과 다름없다는 사고 방식에서 비롯된다. 그 주장에 따르면 모든 짐승과 새가 신전이나 경내에서 교미하고 있는 것을 늘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짐승들이라 해도 그러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러한 구실하에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좋다고 보지 않는다.

<역사> 2권 中

고대 근동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사회였는데(심지어 문란하다고 알려진 고대 그리스인의 눈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특이하게도 여기에 대해 매우 엄격한 편이다. 이를테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적지 않은 경우 신전의 신녀는 매춘부를 겸하기도 했고, 창세기의 유다 역시도 며느리가 신전 매춘부인 줄 알고 착각하여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47] 반면 이스라엘 왕국은 성적으로 굉장히 엄격했으며, 레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다.
누구든지 고름이 나왔을 경우에는 온몸을 물에 씻어야 한다. 그는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고름이 묻은 옷과 가죽은 모두 물에 빨아야 한다. 그것은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여인이 남자와 한자리에 들었으면, 두 사람은 목욕을 해야 한다. 그들은 저녁 때가 되어야 부정을 벗는다.
레위기 15장 16-18절[48]

또한 학자에 따라서는 이스라엘에 이집트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49] 특히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인명은 그 어원을 이집트어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비느하스(아론의 손자/개역개정판 표기 기준. [50])의 어원은 이집트 이름 Pa-nehasi에서 왔다는 게 중론이다.[51] 레위의 자손 므라리, 한참 후대인 사무엘서의 등장인물인 홉니 등의 이름도 이집트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며, '모세'는 매우 흔한 이집트식 이름이다.[52] 게다가 구약의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이집트인들이 하듯이 ...하면 안 된다"라며 제약을 거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직접적인 영향이었든 반면교사로서였든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53] 더욱이, (이하의 '전기설과 후기설'에서 살펴볼) 아케나톤의 일신교 개혁이 이스라엘의 종교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데 가나안을 포함하여 지중해 동부 해안지대는 모두 이집트의 영향을 당연하게도 강하게 받았다. 특히 가나안 지방은 이집트에 인접히여 고왕국 시대부터 영향을 받았고 오랜기간 속국과 같은 상태였어서 출애굽과는 상관없이 이집트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어야 정상이다.....

5.7. 출애굽기의 원천

출애굽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호세아서와 아모스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이중 호세아서에서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인용된다.

첫째, 호세아는 이집트에서의 탈출에 관해 이야기한다.
야훼께서 한 예언자를 시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데려내오시고 그 예언자[54]를 시켜 지켜주셨건만,
호세아 12장 14절 (공동번역성서)

둘째, 호세아는 광야에서의 체류를 긍정적으로 이야기한다.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었다. 내가 너희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너희를 다시 천막에서 살게 하리라.
호세아 12장 10절 (공동번역성서)

셋째, 야훼는 이미 이스라엘의 이집트 종살이 시절부터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라는 내용이다.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은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다. 너희에게 나 외에 어느 하느님이 있었느냐? 나말고 누가 너희를 구해 주었느냐? 그 메마른 땅 사막에서 내가 너희를 보살펴주었건만,
호세아 13장 4절-5절 (공동번역성서)

하지만 흥미롭게도 호세아가 한 발언에서 야훼의 시나이 현현은 물론 율법에 관한 암시는 찾아볼 수가 없다. 호세아서는 기원전 8세기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북이스라엘 왕국 시기에 해당한다. 반면 호세아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사야 예루살렘 출신이었다. 이사야는 남유다 왕국의 백성이었는데 이집트 탈출과 광야에서의 체류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광야에서의 체류 이야기 전승은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남유다 왕국의 마을이자 베들레헴 남쪽의 트코아 출신인 아모스는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 왕국의 수도 사마리아(도시)에서 활동했는데,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호세아 예언자가 활동하기 조금 이전 시대였다. 아모스 예언자도 이집트 탈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들어라. 내가 친히 이집트에서 데려내온 이 백성들아, 너희를 두고 하는 나 야훼의 말을 다들 들어라. 세상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내가 너희만을 골라내었건만 너희는 온갖 못할 짓을 다 하니 어찌 벌하지 않으랴?
아모스 3장 1절-2절 (공동번역성서)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왕국 백성들에게 더욱 의미가 있었던 주제[55]를 선택하여 이야기한다. 그는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순간인 이집트 탈출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그리고 아모스는 무엇보다도 북이스라엘 왕국을 이집트 탈출 이야기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이라는 맥락 안에 넣어 놓고자 한다. 실제로 다른 본문에서 그는 이집트 탈출과 광야에서의 체류를 모두 언급한다.
누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구해 내었느냐? 내가 아니었더냐? 나는 너희를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이끌어주었고 아모리족을 너희 앞에서 멸해 버렸다.
아모스 2장 10절 (공동번역성서)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제물과 곡식제물을 나에게 바친 일이 있었느냐?
아모스 5장 25절 (공동번역성서)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에 대한 명백한 암시를 찾으려면, 연대를 대략 측정할 수 있는 느헤미야[56]를 주목해야 한다.
몸소 시나이 산에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바른 관례와 어김없는 법령과 좋은 규정과 계명을 주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모세의 손을 거쳐 계명과 규정과 법을 내려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 13-14절
여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미 율법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모세라는 중재자를 통해 시나이산에서 그 법이 주어졌다는 이야기는 이보다 후대에 생긴 전승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결과적으로 이집트 탈출과 광야에서의 체류라는 고대 전승이 상대적으로 더욱 가까운 시기인 기원전 8세기 이후의 북이스라엘 왕국에서 나타났음을 알 수 있으며, 이보다 더 오래된 시기에서 전승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이집트 사료도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과 광야 체류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이집트의 몇몇 사료 덕분에 출애굽기 이야기 중 어떤 측면은 이집트 세계의 지식에 기반을 둔다고 확증할 수 있다. 덕분에 출애굽기와 이집트 사료 간에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출애굽기 이야기는 철저히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연대기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순수한 허구의 결과물도 아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의 아나스타시 IV, V, VI 파피루스는 기원전 1200년대에 이집트에서 살았던 셈족 공동체의 존재를 증언한다.

또한 역사적 고찰의 측면에서 볼 때, 모세에 관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사실 성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모세에 관한 정보는 극히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세는 애초부터 창작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세'라는 이름은 '~의 아들', '~로부터 태어난'이라는 뜻을 지닌 축약된 이집트 단어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이름은 '라의 아들'인 람세스, '토트의 아들'인 투트모세와 같은 파라오들의 이름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세가 정말로 허구적 인물이라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처럼 이집트식 이름을 그들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에게 직접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세부적인 내용 역시 모세가 순수하게 창작되기에는 어려운 인물임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모세의 아내는 이방 민족이었던 미디안 사람 치포라였다. 흥미롭게도 미디안 민족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였는데, 모세 자신이 다른 민족과의 혼인을 금지하는 법의 기원이 된다. 또한 모세가 마지막 순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문제가 있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숨을 거두는데, 성경 본문은 이 민감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어느 정도 제공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이 의혹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않는다. 이런 내용들은 출애굽기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모세가 허구적 인물이 아니라는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5.8. 탈출기의 시기 문제

5.8.1. 일반론

고고학과 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보면 그 당시 오랜 시간 동안 이집트에서 기상 이변에 따른 여러 재해들이 발생했고, 이것이 해충의 대량 발생이나 전염병 발발, 적조 현상 등의 '여호와의 징벌'로 기억되었던 것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 의해 모이고 모인 '이주의 기억'들이 구전되며 쌓이고 쌓이다가 모세라는 아이콘에 정리되어 하나의 이집트 탈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이야기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시기는 위에서도 살펴보았듯 바빌론 포로기(BC 6세기, 바빌론 유수)에서 페르시아 치하 시기(BC 5세기)로 짐작된다. 포로로 끌려가고, 강대한 외세의 압제[57]를 받아야 했던 민족 수난의 시기에 "우리 민족은 야훼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러한 문헌이 쓰여진 것은 자연스럽다. 성경에는 "주님이 이집트에서 친히 인도해 내신 우리 민족"과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

그 외에도 모세 휘하의 이집트 탈출 행렬을 추격하던 파라오의 아들이 갈대밭에서 탈출 행렬의 호위 병력들에게 기습을 당해 죽은 사건이 홍해로 와전되면서 모세가 바다를 가른 사건과 이집트의 장자들이 죽은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1 #2

5.8.2. 전기설과 후기설

유대인들의 출애굽, 즉 이집트 탈출의 연대에 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대별하면 BC 15세기설과 BC 13세기설 2가지가 있는데 각각 전기설, 후기설로 불린다. 다만,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 설은 1980년대 이후로는 통하지 않으며, 윗 문단의 내용처럼 출애굽이라고 특정할 만한 거대한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만 5.5문단에 적힌 것처럼 학자들은 후대에 이스라엘로 형성된 집단에 이집트로부터 이주해온 이들이 있었고, 이들의 전승이 출애굽기에 반영된 것으로 본다.

전기설 열왕기상 6장 1절에 묘사된 후대의 연대 계산에 의한 것으로, 아멘호테프 2세 치하설이 대표적이다. 열왕기상 6장 1절에는 솔로몬 왕이 '그의 치세 제4년', 즉 '이집트 탈출 후 제480년'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다. 솔로몬 직후 르호보암(남유다 왕국)과 여로보암(북이스라엘 왕국)에 의해 왕국이 분열된 시기가 아마도 BC 931년~930년경으로 추정되며, 열왕기상 11장 43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40년 동안 통치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역산하면 솔로몬은 BC 971~970년부터 BC 931~930년까지 통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솔로몬왕의 치세 제4년'은 BC 968~967년경이 되며, 만약 그것이 이집트 탈출 후 480년에 해당한다면 출애굽은 BC 1448~1447년경의 일이 된다.[58]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ㄱ. BC 1448~1447: 이집트 탈출
ㄴ. BC 971~970: 솔로몬 즉위
ㄷ. BC 968~967: 솔로몬 치세 제4년, 성전 건축 시작
ㄹ. BC 931~930: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 분열

ㄹ로부터 솔로몬의 40년 재위 기간을 고려하여 ㄴ을 상정할 수 있고, ㄴ 기준으로 4년째인 ㄷ과 ㄱ의 간극이 480년이라고 했으니 ㄱ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간혹 사사기 11:26에서 입다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거주한 지 300년이나 되었다고 말한 것이 전기설의 근거로 사용되곤 하지만, 이는 그리 좋은 근거는 아니다. 여호수아 24:9은 "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59]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입다는 사사기 11:25에서 " 이제 네가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 나은 것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툰 일이 있었느냐 싸운 일이 있었느냐"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호수아 13:25은 "그들이 차지한 지역은 야스엘과 길르앗의 모든 성읍과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 이르는 암몬 자손의 땅 반쪽과"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입다는 사사기 11:15에서 "그에게 이르되 입다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하였다. 또한, 열왕기상 23:13에 "모압 사람들의 우상인 그모스와 암몬 사람들의 혐오스러운 밀곰"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입다는 사사기 11:24에서 모압 족속의 주신인 그모스를 암몬 족속의 주신으로 언급하기까지 하였다. 그의 말에는 성서의 여러 기록들이나 역사적 사실들과 모순되는 것이 많으며, 그는 사사기 11:3에서 부랑아이자 불량배들과 도적들의 수장으로 묘사되는 사람이다. 그런 문맹인 그의 말인 300년이 절대성을 갖거나 좋은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60]

전기설의 정황적 근거를 살펴보면 이렇다. 이전에 요셉이 출세하고 유대인들이 대거 이주했을 때의 이집트 왕조가 제15왕조인 이민족 힉소스 왕조였으리라는 것. 그게 맞다면 이집트인들이 힉소스를 몰아낸 이후 남아 있는 유대인들을 힉소스에 대한 일종의 부역자로 간주했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61]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노예가 된 것 역시 일종의 보복 차원이었을지 모른다. 전기설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셈인데, 이 해석에 따르면 이집트 탈출 시기는 (위에서 살펴보았듯) 대략 투트모세 3세 내지 아멘호테프 2세가 된다. 두 파라오 모두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제18왕조의 파라오들이다.

전기설의 근거로는 아멘호테프 2세가 군사 원정을 통해 많은 수의 셈족 노예들을 데려왔다는 것이 있다. 아멘호테프 2세는 시리아-가나안 군사 원정 당시 , 무려 10만 명 이상의 전쟁 포로를 데려왔다고 하는데,[62] 이를 고려하면, 이들 중 일부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도망쳤을 수도 있다고 보아 출애굽이 그의 치세 동안에 발생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63][64]

전기설의 가장 주요한 근거는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에 기록된 '하비루(≒히브리)이다. 하비루/아피루들은 당시 가나안에서 반란, 전쟁들을 일으킨 것으로 기록되는데, 출애굽을 역사적으로 보는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은 대체로 후기설을 따르기에 이들을 유대인들과 동일시하지 않지만, 전기설에서는 이를 기원전 15세기에 출애굽해 기원전 14세기에 가나안에 정착한 히브리인들과 동일시한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기원전 1200년경 무렵, 기후 변화와 사회 변화로 인해 고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도시인들에게서 곡물을 사먹던 유목민들이 도시들이 쇠락하자 곡물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해서 정착 생활로 바꾸어 정착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65], 유목민이 주류였지만, 가나안의 도시 왕국들에서 이탈한 사회 하층민 계층("하비루 Habiru / 아피루 Apiru"는 사회적 하층민을 가리키는 명칭) 역시 초기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하비루가 초기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출애굽을 그의 시기로 특정할 수는 없으며,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이를 근거로 출애굽이 아멘호테프 2세의 치세 때 있었다는 주장(전기설)에 반대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사사기와 여호수아에서 자주 언급되듯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내에서 소수 세력으로 묘사되며, 가나안인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세력에 동화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또, 여호수아에서는 기브온의 주민들이 이스라엘에게 투항하여 이스라엘에 흡수되는 것 역시 묘사되기에 하비루를 이러한 가나안 토착민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애초에 특정 계층(하층민, 부랑자, 도적)을 가리키는 이름이 하비루이기에 하비루가 이스라엘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이들은 초기 이스라엘과 연합하거나 한데 어우러져 섞여 살던 가나안의 토착민들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전기설과 후기설 모두 파라오 메르넵타의 비문을 근거로 삼는다. 이 비문에서 '이스라엘'은 도시나 국가가 아닌 부족으로 표기되고 있다.[66] 이 말은 이 비문이 쓰여졌던 BC 13세기에는 이스라엘이 아직 가나안에 온전히 정착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점도 후기설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가 된다.[67] 전기설대로 BC 15세기에 출애굽이 이루어졌다면 애초에 국가를 이루었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전기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이 생긴 것은 한참 후였다는 점을 들면서, 메르넵타 시기에 이스라엘이 '국가'가 아닌 '부족'으로 표기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설명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이것이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 역시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베를린 비문[68] 속 '야슈르일'가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인 여수룬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69], 해당 비문 속 표기법[70]과 이집트의 군사 원정 등을 고려하여 해당 비문을 파라오 호렘헤브나 람세스 2세의 치세 동안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여기고 있고[71],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출현한 시기를 기원전 13세기 말 보다 더 이른 시기인 기원전 13세기 초(c. 1290 BC)로 보고 있다.[72] 물론, 이를 창세기 25:3과 민수기 24:21에서 언급된 "앗수르(야슈르)"를 가리켰을 것이라 보는 이들도 있지만, 해당 비문이 이스라엘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며, 만약 이것이 정말로 이스라엘을 가리켰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출현한 시기는 기원전 13세기 초가 되기에 출애굽이 역사적 사건이었다면 전기설의 주장대로 기원전 15-14세기의 사건이 된다. 이 때문에 해당 비문은 전기설의 근거로도 자주 사용된다. 전기설은 레데시예 사원(Temple of Redesiyeh)의 람세스 2세의 아버지 곧, 부왕인 세티 1세(기원전 1290–1279년)의 군사 원정 목록을 근거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해당 기록에서 므깃도와 가데스 사이의 땅이 아셀과 발음이 유사한 "i-ś-r"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아셀 지파와 동일시하는 학자들도 있다[73]. 그러나, 레데시예 사원이나 베를린 비문 속 지명은 족장 시대와 관련되었을 수도 있기에 출애굽과 관련하여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동양학자 마리오 리베라니(Mario Liverani)가 아브라함의 이름의 라함과 벳스안/벧산(Beth Shean)에서 발견된 세티 1세(기원전 1290-1279년)의 비석(c. 1289 BC)에서 언급되는 유목민족 부족인 라함(Raham) 사이의 연관성을 제안했던 것[74]처럼 족장 시대의 배경은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000-1500년)가 아니라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00-1200년)일 수도 있다[75]. 특히, 성서의 이야기적인 관점에서 성서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기 전 이미 저마다 세력을 형성해 자신의 후손들이 활동한 지역에서 동일하게 활동한 것(예: 유다의 손자 헤스론 - 대상 2:24, 에브라임의 아들들 - 대상 7:21)을 고려하면, 레데시예 사원의 'i-ś-r'은 족장 시대의 아셀의 세력을, 베를린 비문의 이스라엘은 족장 시대의 이스라엘을 가리켰을 수도 있다. 애초에 레데시예 사원의 'i-ś-r'이나 베를린 비문의 '야슈르일'이나 아직까지 논란 가운데 있고, 성서 속 지파나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확언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레데시예 사원의 'i-ś-r'을 아셀 지파로 식별하는 것에 대한 반대 역시 거센데, 이를 아셀로 식별하는 것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 때 가나안으로 이주한 바다 민족(Sea Peoples)인 웨쉐시/웨셰시(Weshesh)와 동일한 민족으로 식별기도 한다. 참고로, 학계에서는 초기 이스라엘에 여러 외국 세력들이 흡수되었고, 여기에는 단(바다 민족의 덴옌/다누나), 아셀, 잇사갈(바다 민족의 체케르/체커) 등이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설은 탈출기 1장 11절의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비돔과 라암셋(람세스) 성을 세웠다'라는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람세스 2세 치하 설이 대표적이다.[76] 1920년대 이후까지만 해도 위에서 언급한 열왕기상 6장 1절이나, 이집트의 카이로 남쪽 약 300km에 있는 '텔 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에 기록된 '하비루(≒히브리)의 활동, 영국의 J.가스댕에 의한 예리코의 발굴 조사 등을 들어 대체로 전기설(기원전 15세기설)을 신뢰하였으나, 전기설의 연대와 다르게 예리코가 기원전 16세기(기원전 1500년경)에 파괴되었다는 것과 하솔이 기원전 13세기(기원전 1230-1200년경)에 대규모 화재로 파괴되었다는 것 [77], 전기설과 후기설의 연대에 따른 기원전 15세기와 기원전 13세기에 이집트나 가나안 지역에서 그 어떠한 이주나 대규모 정착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정착 패턴을 바탕으로 봤을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내부에서 기원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을 고려하여 현대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출애굽의 역사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다.[78] 하지만, 성서 학자들 중 일부는 그래도 출애굽의 역사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후기설이 더 설득력 있다고 판단하여 후기설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후기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라암셋(람세스)'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볼 때 모세의 출생과 출애굽 사건이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그의 아들 람세스 2세 시대에 일어난 게 틀림없다고 주장한다.[79] 히브리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건설되었다는 라암셋(람세스) 성의 이름은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인데[80] 전기설이 주장하는 제18왕조 시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람세스'라는 이름을 따서 이런 성이 언급될 수는 없다.[81] 따라서 이집트 탈출은 제18왕조가 아니라 제19왕조 시대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세는 람세스 2세 시기인 BC 1290년 전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되며, 이에 대해 당시 이집트를 둘러싸고 있었던 국제관계의 정황상 람세스 2세가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떠나도록 허락한 것이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그러나 BC 13세기의 어느 해를 이집트 탈출의 기점으로 잡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가령 W.F.올브라이트는 BC 13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으나 T.J.미크는 BC 13세기 말로 추정하고 있다.[82]

후기설은 전기설의 근거인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 기록에 어긋난다는 약점이 있다. 단, 성경, 특히 구약에선 숫자를 정확히 명시하기보단 수비학적인 비유를 더 자주 썼던 관행이 있기에, 저 '480년'이라는 기간이 실제 기간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즉 480이라는 수는 성서에서 완전수로 여겨지는 12와 40의 곱인바, 12는 이스라엘 열두 부족을 의미하는 수[83]이고 40은 한 세대(30년)를 포괄하는, 온전한 한 시대를 의미한다.[84] 이 해석에 따르자면 이집트 탈출 이후 480년 만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는 성서 기록은 이스라엘 열두 부족에게, 노예 생활로부터 성전 건축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40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지 정확히 480년이라는 실제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 후기설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마냥 부정할 순 없는 이유다.

후기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바로 지명이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지명인 피람세스(라암셋), 비돔, 숙곳, 믹돌, 바알스본, 비하히롯, 얌수프(홍해[85])는 모두 이집트 제19왕조의 기록에서만 확인되지 그 이전의 시대의 기록에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제19왕조의 기록인 Papyrus Anastasi V(20:2-3)는 믹돌이 피람세스를 지은 세티 1세에 의해 건설되었다[86]고 기록하며, Papyrus Sllier IV에서는 '바알스본 Baˁal-Zephon [87]'이라는 장소를 언급하고, 또 다른 제19왕조의 기록인 Papyrus Anastasis III (2:11-3:4)[88]에서는 갈대바다(p Ȝ ṯwfy)에서 피람세스로 가는 길에 비하히롯(pr-ḥwt-ḥrt)이 위치해있다[89]고 기록한다. 하지만, 가데스 바네아라는 지명의 바네아가 파라오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넵타 존호인 "바-엔-레 메리-네체루 Ba-en-re Mery-netjeru"[90]의 "바-엔-레"가 음역된 것이며, 여호수아 15:9의 지명인 넵도아의 샘물이 히브리어 원어로 "마얀 메 넵토아 מַעְיַן מֵי נֶפְתּוֹחַ", 즉 메르넵타의 이름을 음역한 지명이라는 사실은 출애굽기의 배경이 람세스 2세 보다 더 후대였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참고로, 고센이라는 지명이 기원전 5세기의 아라비아 왕 게셈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있다.[91][92] 그들의 주장을 고려한다면, 지명을 근거로 본다면, 출애굽기의 배경은 람세스 시대인 제19-20왕조였음에 틀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후기설의 다른 주요 근거는 아바리스가 버려진 시기이다. 고센 땅의 셈족(이스라엘 족속 포함)의 도시인 아바리스[93]는 힉소스의 몰락 이후에도 완전히 버려지지 않고, 제18왕조[94] 동안에 번성했으며, 유목민의 인구와 도시 전체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가나안(셈족) 양식의 유물과 그들이 거주했던 흔적은 제2중간기 뿐 아니라 신왕국 시대(투트모세 시대)에서도 확인된다.[95][96] 제18왕조가 시작될 무렵,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도시의 왕궁과 절반 이상이나 되는 부분이 버려졌지만, 적지 않은 인구의 셈족 유목민들이 이집트를 떠나지 않고 남았으며, 그 이후 아바리스는 18왕조 동안에는 아예 버려지지도 않았고, 이집트 내 셈족의 도시와 이집트 밖 가나안의 셈족 도시들이 모두 번성하였다. 하지만 그랬던 아바리스는 제19왕조(기원전 1292-1189년)의 어느 순간에 완전히 버려졌다.[97][98] 일반적으로는 해당 도시가 버려져 피람세스의 주민들에 의해 무덤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파라오 람세스 2세가 그 옆의 신도시인 피람세스(라암셋)를 건축하기를 끝마친 시기 즘으로 추정되기에 이를 근거로 신도시가 구도시를 압도했기 때문에 구도시 곧 아바리스가 버려진 것으로 보기는 하지만,[99][100] 성서 학자들과 일부 이집트 학자들은 도시에 살던 셈족들이 도시를 버리고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으로 보며, 이를 출애굽과 연결시킨다.

후기설의 또 다른 근거와 장점은 람세스 2세가 이집트의 셈족 도시인 아바리스의 세트[101] 신전의 건립 4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비문(Year 400 Stela)과 이를 고려하여 이스라엘의 애굽 거주 기간이 430년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람세스 2세의 치세로부터 430-400년 전은 기원전 1700-1600년 사이로, 힉소스 왕조가 세워진 시절이기에 요셉을 힉소스 시대의 재상으로 보는 설에도 부합한다고 한다. 참고로, 이집트의 아바리스와 셈족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멘프레드 비탁은 출애굽의 파라오를 람세스 2세가 아니라 람세스 3세로 보고 있지만 430년에 대해서는 람세스 2세의 비문과 세트 신전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102] 이외에도 출애굽을 역사적으로 보는 보수적인 성서 학자들의 주장대로 출애굽을 힉소스 패퇴로 본다면, 힉소스 패퇴가 일어난 시기(기원전 1550-1500년 무렵)와 셈족(힉소스)이 삼각주 지역에 처음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기원전 1900-1800년 무렵) 사이의 기간이 약 400년 가까이 되기에 애굽에서 셈족, 곧, 히브리인들이 보낸 기간을 400년 정도였다고 볼 수 있다.

여하간 전기설과 후기설 모두 떡밥으로는 양질이라서 인기가 있다. 각각의 설을 대표하는 파라오인 아멘호테프 2세와 람세스 2세의 장자는 모두 일찍 죽었다는 것 역시 떡밥 중 하나. 물론 람세스 2세는 당시로서는 비정상적으로 장수하여 8~90대까지 살았기 때문에, 그 당시 평균 수명과 평균 결혼 연령을 생각해 보면 아들이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다고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103] 한편, 아멘호테프 2세의 다음대 파라오인 투트모세 4세는 그의 장자가 아니다. 보통은 장자가 파라오가 됨을 생각해 보면 뭔가 어마어마한 떡밥거리.[104]

물론 전기설의 치명적 단점은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테프 2세 때는 이집트 제18왕조의 최전성기로 므깃도 전투에서 광야와 가나안 지역에 대한 지배가 공고해진 때라 과연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으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도 있다. 후기설의 연대인 기원전 1260년대 이후부터 이집트가 가나안에 행사하던 영향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으며, 제18왕조의 파라오들과 같은 지위를 누리지는 못했었다. 게다가 이때 이후 19왕조 때인 메르넵타 때까지 이스라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난점이다.

이집트 탈출의 시기를 확정하는 것 자체는 오히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다. 위 '일반론'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성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몇몇 부족들이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로 탈출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다수의 이집트 문서들도 그러한 탈출을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들을 남겼다."[105][106] [107]그중 몇몇 드라마틱한 탈출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즉 출애굽기의 탈출 이야기는 오랜 시기에 걸친 수차례의 탈출과 관련된 기억이 나중에 이스라엘을 구성하게 된 여러 부족들에게 독립적으로 전승되다가 이후 하나의 탈출 사건으로 종합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따라서 전기설의 근거가 되는 시대적 정황과 후기설의 근거가 되는 정황이 탈출기에 공존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성경 내 파라오에 대해서 중요한 또 한 가지 사실은 출애굽기에 파라오가 2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모세가 성장기를 보내고 미디안으로 피신해 있던 기간 중에 재위한 선대 파라오와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할 때 재위한 후대 파라오이다. 이중에 선대 파라오는 모세가 감독관을 죽였다는 걸 알고 모세를 죽이려 했고 모세가 이 파라오가 죽기까지 오랜 세월 미디안에 있어야 했을 정도로 강경했던 인물인 반면 후대 파라오는 모세가 대화를 시도해 볼 만하다고 여길 정도로 선대 파라오보다 온건한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108] 때문에 이 두 파라오의 성격을 비교해 보는 것도 성경과 이집트사를 교차 비교하는 데 써볼 만한 요소이다. 전기설을 토대로 고려해 보면 모세가 감독관을 죽인 시점의 선대 파라오는 투트모세 2세, 후대 파라오는 투트모세 3세가 된다.[109] 후기설을 토대로 이점을 고려해 보면 이집트사에서도 강력한 위상을 구축하고 모세가 미디안에서 때를 기다리다 늙어버릴 정도로 재위 기간이 길었던 람세스 2세가 선대 파라오에 근접해 보인다. 특히나 람세스 2세는 토목 공사를 자주 벌인 걸로도 유명하기에 출애굽기 초반 모세가 탄생하던 무렵에 묘사된 파라오의 모습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후기 출애굽의 연대는 기원전 1260-1250년경이기에 선대 파라오는 세티 1세가 되며, 출애굽 당시의 파라오는 람세스 2세가 된다. 물론, 라암셋(피람세스)를 건축한 것은 세티 1세이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참고로, 오늘날 위에서 알아본 것과 같이 전기설과 후기설이 팽배하게 맞서는 것과 다르게 역사가 마네토, 멘데의 프톨레미(Ptolemy of Mendes), 요세푸스와 초대 교회 교부들인 에우세비우스, 히폴리투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타시아노, 데오빌루스는 출애굽과 힉소스 패퇴를 연결시켰으며[110], 출애굽의 파라오를 아흐모세 1세로 보았고, 현재 근동학계와 이집트학계의 대부분의 세속주의 학자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전기설과 후기설 모두 지지하지 않고 출애굽을 힉소스 패퇴와 동일한 사건이라 본다.[111] 곽민수 소장 역시 출애굽을 힉소스 패퇴에 대한 기억과 연결시켰다. 실제로, 이집트가 기록한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한 셈족 이동은 기원전 16세기의 힉소스 패퇴가 유일하며, 시나이 반도를 거쳐 가나안으로 돌아간 셈족 유목민 역시 힉소스인들이 유일하다.[112] 힉소스인들이 이스라엘인의 선조였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논쟁의 요소가 있으며,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의 경우, 기원전 8세기 이스라엘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가나안 저지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을 힉소스 패퇴에 대한 전승을 수입한 것으로 본다.[113] 물론, 이스라엘 핑켈슈타인은 람세스 시대인 제19-20왕조 동안에 수십 또는 그 이상의 규모의 셈족 노예들이 도망쳤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를 표했으며, 이것이 출애굽의 기원이 되었거나 힉소스 패퇴처럼 전승에 영향을 미쳤을 수는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열린 입장을 취하고 있다[114].

물론, 전기설, 후기설, 힉소스설 등을 제외하고도 여러 후보들이 있다. 파라오 아케나톤(기원전 1353–1349년)의 치세 때 있었다는 초대 교회 교부 에우세비우스와 후대의 프로이트의 주장, 람세스 1세(기원저 1292-1290년) 때 있었다는 아흐메드 오스만의 주장, 그리고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넵타(기원전 1213–1203년)의 치세 때 있었다는 아이작 아시모브의주장도 있다. 현재는 이스라엘 크놀 교수의 세트나크테(기원전 1189–1186년)의 치세 때에 있었다는 주장과 아바리스와 고대 이집트의 셈족 연구 최고 권위자인 멘프레드 비탁과 게리 A. 렌즈버그가 주장하는 람세스 3세(기원전 1186–1155년) 치세 설이 새롭게 등장했다.[115][116][117][118] 실제로, 람세스 3세의 메디넷 하부(Medinet Habu) 신전에서 이스라엘 출신의 노동자가 세운 집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람세스 3세 또는 람세스 4세의 치세 시절 당시 이스라엘인이 애굽에서 노예로서 있었음을 입증한다. 특히, 렌즈버그 교수는 후기설(기원전 13세기)의 주요 근거인 벧엘이 기원전 13세기에 파괴되었는지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되었는지는 아직까지 확고히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며, 라기스(Lachish)가 한 때 기원전 13세기에 파괴되었다고 여겨졌지만 후속 연구 결과로 인해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되었다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을 바탕으로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나아가 하솔의 파괴 시기 역시 기원전 12세기로 추정된다는 것과 여호수아서와 민수기에 언급되는 기브온(Gibeon), 아랏(Arad), 아이(Ai), 헤스본(Heshbon)을 포함한 대부분의 도시들이 기원전 12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곳들이며, 므깃도와 다아낙은 기원전 12세기에 파괴를 경험했다는 것을 근거로, 출애굽과 여호수아의 정복기의 배경을 기원전 13세기가 아니라 이보다 후대인 기원전 12세기, 곧 청동기 시대 붕괴(기원전 1200-1150년)였을 것이라 제시하였다.[119][120] 실제로,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세트나크테(기원전 1189–1186년)가 이집트에서 셈족 지도자 이르수(Irsu)와 그의 추종자들을 물리쳤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크놀 교수[121]에 의해서 출애굽과 동일시되기도 한다.[122] 물론, 이르수와 관련한 사건은 이집트가 아니라 가나안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것으로도 추정되는데,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는 학자들 만큼이나 많은 학자들이 이르수가 이집트의 정치적 혼란기 동안 이집트 제국의 영토인 가나안에서 패권을 잡은 군벌로 보고 있다[123].

참고로,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전기설과 후기설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과 달리 현대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달력을 따라 출애굽을 기원전 1310년의 사건으로 정의한다.[124][125][126]

5.9. 10가지 재앙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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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이집트의 노예제

탈출기 초반부의 이스라엘인들이 노예로 혹사당하는 부분이 과장되었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 속설에서는 당시 이집트에서의 피라미드 건설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뉴딜 정책의 일종이라 흔히 비유한다.

그러나 피라미드 뉴딜 정책설은 인터넷상에나 나오는 것이지, 학술적으로는 근거가 희박하다. 일단 고대 이집트는 화폐 경제가 아니라 분배 경제였기 때문에 20세기의 뉴딜 정책 같은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렵다.[127] 그리고 현재 이집트학 전공자들 중에서도 피라미드 건축 동원이 농한기에만 이루어졌다고 단정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mieroop 2011). 고대 국가의 왕권 개념에 대해 중요한 연구를 남긴 학자인 프랜시스 오클리 박사 역시도 피라미드 건설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메시지로 보지, 농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정책으로 보지는 않는다.

웹상에서는 고대 이집트를 마치 노동자들의 복지 천국인 양 서술하는 것이 널리 퍼져있는데[128], 이것은 신전이나 왕묘를 짓는 숙련공들과 일반 노역자들을 동일시하는 오류이다. 신전과 왕묘는 중대한 국가 프로젝트로, 그 인근에 마을을 짓고 상주하며 일하는 노동자들은 결코 하층민이 아니었다. 이들이 파업씩이나 했다고 선진적이었다고 놀라는 이들이 많지만[129]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대성당 짓는 고급 기술자들은 장인으로 좋은 대우를 받았다. 반면에 최근에 세티 1세 관련 연구서를 저술한 Nielson박사 등 많은 이집트사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일반 도시를 짓는데 동원된 하급 노역자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았으리라 볼 이유는 없다. 이집트에는 강제 노역이 없었다는 웹상의 주장과는 달리 이러한 강제 노역은 이집트에 엄연히 존재했으며, 주로 전쟁 포로들로 충당했다. 이집트 벽화만 해도 전쟁 포로들이 끌려오는 장면이 숱하게 묘사돼 있는데, 이들을 어디다 써먹었을 것 같은가?[130]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출애굽기엔 피라미드 건설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며, 히브리 노예가 피라미드 지었다는 건 출애굽기 텍스트와 이집트 왕자 등 현대 미디어 각색을 혼동한 오류이다. 사실 이집트 왕자도 피라미드가 나올 뿐, 피라미드 짓는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출애굽기 텍스트상 히브리인들이 건축한 것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도시였고 피라미드 이야기는 없다.[131] 따라서 애당초 피라미드 뉴딜이니 뭐니 하는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건 고왕국 시절에나 있었던 피라미드 건설 따위가 아니라 '벽돌' 제작이며, 이건 실제로 신왕국 시대에 아시아인 노예들에게 부과한 노동이다. 이러한 아시아인 노예들을 몽둥이와 채찍으로 때려가며 노동시켰다는 건, 무엇보다도 이집트인 자신들이 남긴 기록에 남아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아시아인 노예들에 히브리인이 포함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고왕국 시절의 피라미드 건설 현장 따위를 가져와서 뉴딜 드립을 치는 건 안하느니만 못한 반박이다.


3. 이집트에서 히브리인들의 종살이(탈출 1장;5장)

탈출기의 이 부분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있을 법한 일로 여겨질 수 있는 몇몇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탈출기 1장과 5장은 이집트에 거주하던 셈족계 주민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 전략적이거나 다른 이유로 - 나일 강의 삼각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군사적 목적의 성읍을 건설하는 일이 부과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실제로, 벽돌 제작에 종사하던 셈족이나 아시아 출신의 노예들을 묘사하는 이집트 벽화가 상당히 존재하다. 그리고 이 노예들이 셈족에 속한 것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집트 초상학(肖像學)이 일정한 주요 원칙에 따라 서로 다른 종족들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셈족에게는 언제나 턱수염이 붙어 있다. 그에 반해, 이집트인은 수염이 없거나 가짜 턱수염을 하고 있다. 셈족의 코와 눈 역시 분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성경이 전해 주는 이야기가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였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이상은 말할 수 없다. 그와 관련된 더 정확한 그거와 기록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벽돌 제작. 벽화는 투트모스 3세(Tutmosis III) 시대에 재상(宰相)을 지냈던 레크미르(Rekhmire)의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기원전 1460년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벽화에서 벽돌 제작의 여러 단계를 볼 수 있다. 윗칸 왼쪽에, 노예 두 명이 작은 마무들(고대 이집트의 벽화에서 원근법으로 대상을 표현하는 특별한 방법에 주목하라)로 둘러싸인 저수지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있다. 그 주변에서 다른 노예들이 찰흙을 개고 있고, 이어 그것을 나무틀에 넣어 직사각형 형태로 만들기 위해 바구니로 옮기고 있다. 이렇게 만든 직사각형 찰흙이 서서히 마르도록 태양 아래 놓아둔다(저수지 근처). 그 오른쪽에는 준비된 벽돌을 건설 작업에 쓰려고 옮기거나 사용하고 있다. 도구를 이용하여 쌓인 벽의 수직 형태를 확인하고 있는 노예는 아시아인이다. 그가 독특한 수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하는 자들은 몽둥이와 채찍으로 무장하고 있다. 벽화의 아랫칸은 또 다른 형태의 건설 작업, 즉 경사면이 있는 좀 더 정교한 건물의 건설 모습을 보여 준다. 건물의 잘린 돌과 벽돌 그리고 아마도 특별한 형태의 회반죽으로 건설되고 있는 듯하다.||

5.11. 학계 담론

이집트 탈출이라는 사건의 역사성에 관한 문제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중대한 난제는 우리가 가지고 이는 자료의 주요 원전 편집이 ㅡ 탈출기가 ㅡ 사건들이 저술되고 난 다음 몇 세기가 지나서 이루어졌다는 데서 유래한다. 탈출 기사에 반영된 '지리' 역시 한참 후대에 와서 중요하게 취급된 장소에 접근시킬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사실이 본문이 제공하는 자료의 정확성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 하더라도, 기사가 어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예단할 수는 없다. 이집트 탈출에 관련된 사건만큼이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회상은 궁극적인 문학 형태를 취하기 전에 백성들의 전승 안에서 오랫동안 지속하였다.

성경외적 문헌, 특히 이집트 문헌은 성경 기사를 확증해주거나 기사에 등장하는 이러저러한 인물들을 정확하게 확인해주는 어떤 자료도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건이 전개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시기에 주요 주민 집단이 시나이 반도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어떤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 한편, 기원전 16세기와 11세기 사이의 이집트에 관하여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셈족 가운데 한 집단이 팔레스티나를 향하여 도주했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에 부합하는 틀이 제시된다. 이 시기 동안 이집트는 시리아-팔레스티나 대부분을 장악했고 종으로 전락한 셈족 노동력을 활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탈출기의 역사적 핵심을 구성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여러 상황을 고려해볼 수 있다. 셈족이었던 힉소스족의 이집트 추방은 기원전 1550년경에 일어난 사건으로, 역사가들이 성경 기사와 접근시키는 데 주저하는 편이다. 1열왕 6,1은 이집트 탈출이 솔로몬 성전 건립을 480년 앞선다고 언급하며, 이는 탈출 연대를 기원전 1450년경으로 잡게 한다. 한편, 480이라는 수는 분명 후대의 신학적 산술의 결과로(아론과 차독 사이의 12사제에 40년을 곱한 수) 그 역사적 기초는 의심스럽다. 학자들 대부분은 탈출을 13세기의 사건으로 보고자 한다. 사실 바로 이 시기에 이집트 제19왕조는 (람세스 2세 치하에) 나일강 삼각주에 수도를 세우며 그곳에 건축을 위한 대공사를 실시한다. 이 시기의 이집트 본문들은 피톰과 라메세스 성읍들을 확인해준다(탈출 1,11). 나아가 이 연대추정은, 가나안에 살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집단과 맞서 (기원전 1220년까지) 이집트의 군주 메르네프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비문의 언급과 일치한다. 끝으로, (기원전 1187년까지의) 제19왕조 말에 이집트 조정에서 전해진 일화를 기초로 이보다 뒤늦은 시대가 고려될 수 있다. 타우스렛 여왕의 비호 아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베야라는 이름의 셈족 사람이 미래의 파라오 세트나케에 의해 권력에서 쫓겨나 이집트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베야를 모세와 동일시하는 근거는 광야로 도망하였다는 일화뿐만 아니라, '모세'라는 이름이 '···에 의해 태어난 자'를 뜻하는, 이집트어로는 흔한 접미사를 히브리어로 표기한 형태라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예를 들어 프타모시스는 '프타에 의해 태어난 자'를 의미한다).

우리는 위에서 고려한 여러 일자의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택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자문할 수 있다. 사실, 탈출기의 편집 작업에서 기초 역할을 했던 회상들은 훨씬 다양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 의해 묘사된 대로의 탈출이 특정한 한 사건이라기보다 오랜 전승 과정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Thomas Römer · Jean-Daniel Macchi · Christophe Nihan 등 공저, 《구약성경 입문》 (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132] 제1권 (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367-369쪽
작금의 논쟁에서 이스라엘의 역사가들은, 성경 본문이 성경 밖의 신뢰할만한 원전과 상관관계가 있는 경우에만 역사적인 사실들을 고려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철저한 극소주의의 입장, 이와는 달리 고고학과 금석학의 자료에 의해 직접 상반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성경은 늘 역사적인 현실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극대주의적 입장 사이에서 주저한다.
-Thomas Römer · Jean-Daniel Macchi · Christophe Nihan 등, 같은 책 71쪽
기본적으로 "성경외적 문헌, 특히 이집트 문헌은 성경 기사를 확증해주거나 기사에 등장하는 이러저러한 인물들을 정확하게 확인해주는 어떤 자료도 제공하지 않는다. 게다가 사건이 전개되었으리라 추정되는 시기에 주요 주민 집단이 시나이 반도를 통과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어떤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는다."[133] 그러나 출애굽기의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에는 신화적 모티프와 역사적 사건들이 혼합(mingled)되어 있으며,[134] 이스라엘을 형성한 집단 중 이집트 출신의 유이민들이 있었을 개연성은 회의적인 학자들도 부정하진 않는다.

따라서 이집트 탈출 사건의 진위 여부에 대한 담론은
1. 이집트 탈출 사건을 무엇으로 정의하냐의 여부. 예컨대 이집트에서 건너온 소규모 유이민 집단들의 점진적 팔레스티나 정착을 '이집트 탈출(Exodus)'로 부를 수 있는가'의 여부
2. 다른 교차 증거가 없을 경우, 성경의 서술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역사학적 명제를 판별해야 하는지에 관한 '성서주석학적 담론'
을 그 핵심으로 한다. 특히 일반인들은 1번을 눈여겨 봐야 하는데, 어떤 학자가 이집트 탈출을 긍정하고 다른 학자가 부정한다고 해도, '이집트 탈출'의 정의(definition)가 다를 뿐 둘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 곧, 전자의 학자는 '이집트 출신 유이민이 이스라엘 정체성의 주요 요인이었다'라는 의미에서 이집트 탈출을 긍정하고, 다른 학자는 '그런 유이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출애굽기의 서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란 의미에서 이집트 탈출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 곧, '역사'냐 '신화'냐의 슬로건 단어에 집착하기보다는 학자가 말하는 구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게 좋다.[135]

현재에 와서, 일부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이집트 탈출에 대한 성경 본문을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건을 묘사한 문서로 보는 학자들은 거의 없다.[136][137] 성경의 역사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맥시멀리스트 학자들도 성경 본문만으로는 이집트 탈출과 관련된 역사 서술에 필수적인 특정한 시간과 연대를 확정할수 없다고 인정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학자들은 "탈출기는 아무런 역사적 가치가 없다"는 미니멀리스트의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출애굽기의 성경 본문이 역사적 사실을 문자 그대로 반영한다'는 주장과 '전혀 반영하지 않는 후대의 창작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양 극단 사이 어디쯤에 있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 학계의 대다수 학자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이 대규모로 엑소더스를 하여 광야를 방랑했다는 이야기의 역사성은 입증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이스라엘인들의 대부분은 이집트 출신이 아닌 팔레스티나 토착민들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학자들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하는 이집트 탈출의 기억[138]은 상당한 진실성을 가지고 있어, 쉽게 부정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정보들은 탈출기의 내용이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입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초기 이스라엘을 구성한 이들 중 이집트에서 탈출해온 이들이 일부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139] 이러한 소수 집단이 이집트를 탈출했으며, 이들의 기억이 이후 성경 전승의 일부가 되었을 가능성은 회의적인 학자들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140]

그렇기에 오늘날의 학계 담론을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1. 출애굽기의 서술이 문자 그대로 있었으리라는 극단적 최대주의
2. '이집트 출신의 유이민 집단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요인이 되었으며 이것이 성경에 이집트 탈출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극단적 최소주의
사이의 그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발췌된 조르주 루가 말했듯이, 출애굽기의 서술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역사적이며 어림잡아 연대를 정할 수 있는 사건들의 존재는 거의 부정되지 않는다.
이집트 탈출의 전설은 순전히 역사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문학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둘의 분리할 수 없는 혼합물이며, 우리가 지금 '다큐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141]
-Carol A. Redmount, "Better Lives: Israel in and out of Egypt", in Michael D. Coogan (ed.), Oxford History of the Biblical World (Oxford, 1998).
어린 시절 감탄을 불러일으켰던 신성한 이야기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추억으로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중에 이집트로 내려간 요셉과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모세의 지휘 아래 이루어진 탈출, 발을 적시지 않고 홍해를 건넌 사건, 시나이산과 십계명, 약속의 땅 정복,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하고 제리코의 성벽을 나팔 소리로 무너뜨린 이야기 등이 있다. 위대한 서사시, 유대인 역사의 영웅 시대를 구성하는 이 일련의 이야기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역사적이며 어림잡아 연대를 정할 수 있는 사건들이 이 전설의 외투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학자는 오늘날 흔치 않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스라엘)에게서 기원한 일부 부족들이 이집트에 들어간 것과 요셉이 파라오의 왕실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은 힉소스 중간기(기원전 1684~1567년)에 아주 잘 들어맞을 것이다. 학자 대부분은 출애굽이 람세스 2세의 치세인 기원전 1260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시나이 사막에 오래 거주하는 동안 모세라는 이집트 이름을 지닌 천재적인 인물이 아직 다신교적 성향이 있는 이 부족들로 하여금 유일신을 숭배하도록 인도했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우주적인 신에 관한 계시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 신이 바로 야훼다. 훨씬 나중에 무함마드가 이와 비슷한 일을 하여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나안 정착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이 정착은 갑작스러운 정복이라기보다는 느리고 힘겹게 한 부족씩 이루어진 침투로서 거의 한 세기 동안 띄엄띄엄 이어진다.
-조르주 루(Georges Roux),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II》[142], 김유기 옮김 (서울: 한국문화사, 2013), 65-66쪽
고고학적 증거는 엑소더스 이야기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일어났음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에 사실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자주 지적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인들이 종살이와 탈출이라는 기원 설화를 완전히 지어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첫째로, 그것은 너무나도 볼품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지어낼 기회를 가진 그 누가 자기 조상들이 비천한 노예였다는 이야기를 날조해내겠는가? 이 이야기가 온전히 후대의 창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둘째 근거는, 악역의 아이덴티티이다. 이스라엘은 아람인, 아시리아인, 바빌로니아인, 페르시아인, 그리스인, 로마인 등등 수많은 외국 통치자들의 지배를 받아왔다. 엑소더스 이야기가 타국의 지배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그 이야기가 지어낸 것이라면 적어도 동시대 독자들에게 공감을 살만한 세력을 지배자로 선택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집트는 특이한 선택이다. 이집트 역시도 앞서 언급한 제국들의 침탈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시대 이집트의 국력에 대해 이사야서의 "부러진 갈대"라는 경멸적인 표현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스라엘이 존재하기도 이전인 초기 시대에 이집트는 가나안의 지배 세력이었다. (중략) 엑소더스 내러티브는 수 세기에 걸쳐 구전으로 전승된, 이집트의 가나안 지배 시절에 대한 문화적 기억을 보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또한 일부 셈족이 실제로 이집트에서 강제노역을 했다는 증거가 있다. 이집트에는 셈족 노역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종종 가나안으로 탈출 시도를 했다. 이는 출애굽기의 대서사시적 탈출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수도 있겠지만, 성서의 이야기에 대한 핵심 알맹이를 제시해주고 있다. 한번에 걸쳐 일어난 이스라엘인들의 대규모 이집트 탈출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셈족 노예들이 시나이 반도를 거쳐서 주기적으로 탈출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가나안에 도착한 이 난민들은 자연스럽게 해안가의 도시들이 아니라 인구가 희박한 산악지대에 정착했으며, 이미 그곳에 정착해서 성장하고 있었던, 스스로를 가나안인과는 다른 정체성으로 설정해가던 집단과 합류했을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었다.
-Joel S Baden, The Book of Exodus: A Biograph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9), pp. 5-7.

위의 주장들을 "이집트 탈출"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의견이 다르겠지만, 대체적으로 부분적인 개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정도 합의 된 관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6. 관련 문서


[1] 원문의 첫 문장 둘째 어절이다. "야곱을 따라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출 1:1, 공동번역)" [2] Richard Friedman attempted to pinpoint the composition of P in the court of King Hezekiah at the end of the eighth century . [3] 고전적인 4출전 모델(J, E, D, P의 4개 출전으로 오경을 크게 나누는 모델)의 문제점을 교정한 학설인 '뮌스터 오경 모델'에서 사용하는 용어. 문학적 경계 설정에서는 벨하우젠의 JE(=예호비스트 역사서)와 범위가 비슷한 개념이지만, 문학적 전사前史를 벨하우젠과는 다르게 본다. [4]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등의 《구약성경 개론》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한국어판 (분도출판사 2012)1013쪽 [5] 이 대목 이후 야훼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6] 이슬람교에서도 모세, 예수, 아브라함 등의 존재를 인정한다. 애초에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 뿌리는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이다. 물론 주된 내용으로 다루지는 않으며, 모세가 계명을 받거나,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거나, 이집트를 탈출하는 등의 정도만 언급되는 편. [7] 천주교 원주교구 소속. 말씀의 성모영보수녀회 창립자. [8] 애굽이란 명칭은 최초의 개신교 한국어 신약전서(구약의 번역은 더 늦게 이뤄졌다.)인 예수셩교젼셔(1887)에서부터 ᄋᆡ굽의 형태로 쓰였는데, 이집트의 한자 음역인 '애급(埃及)'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고전 그리스어인 '아이귑토스(Αἴγυπτος, Aígyptos)'의 어간을 직접 음차했다는 설도 있다. 또는 둘 다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예수셩교젼셔 번역에 참여한 장로회 선교사 존 로스는 그의 보고서에서 번역과정에 대해, 먼저 조선인들이 중국어 대표본 문리역 성경(1852)의 문장들을 한국어로 옮기면, 그것을 선교사가 그리스어 성경과 자구별로 대조하면서 교정했다고 기록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개신교 성경의 고유명사 표기는 문리역 성경의 埃及이 조선인들의 초벌번역에서 애급으로 옮겨진 다음, 선교사들의 교정을 거치며 그 음역의 원어 표현인 아이귑토스의 어간을 취한 애굽(귑이 아닌 굽이 되는 것은, 윕실론을 위가 아닌 우로 일관되게 표기하는 한국 개신교의 음역 관행과 일치하므로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으로 다듬어지는 식의 과정을 거쳤을 수 있다. [9] 보통 파라오의 음차어인 바로라고 많이 쓰는데, 애초에 왕이라는 뜻의 파라오 뒤에 왕을 또 붙인 잘못된 단어 사용례도 보인다. 심지어 왕 개인의 이름인 것처럼 나올 때도 있어 성경 읽다 "뭐야, 바로왕이 몇 백 년을 사네?" 같은 반응을 보일 때도 있다. [10] 여기서 요셉을 알지 못한다는 설정에 착안하여 요셉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힉소스인들이 이집트를 다스리던 시대라고 추정하며 이 대목은 힉소스인들의 정권이 몰락하고 토착민 파라오가 다시 나타난 시기(기원전 1550년경)로 추정하기도 한다. [11] 이 산파들의 이야기는 분량이나 내용 각색 등의 이유로 출애굽기를 다룬 창작물에선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온전히 출애굽기 그 자체를 다룬 창작물은 아니긴 하지만, 출애굽기의 서사를 따온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로버트 프랭클린이 이 포지션을 제대로 따왔다. [12] 히브리어로 '물에서 건져냈다'라는 의미. [13] 이때에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 '야훼'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14] 여기서 모세가 시범타로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킨다. 하지만 파라오는 코웃음치며 왕실 신관들에게 똑같은 기적을 시켜 응수한다. 물론 모세의 뱀이 신관들의 뱀을 집어삼켜 바로 참교육... [15] '앞으로는 벽돌 만들 때 쓰는 짚을 안 줄 거니까 늬들이 알아서 조달해'라고 말했다. [16] 사실 이런 식으로 신이 인간의 싸움에 개입해서 어느 편의 신이 더 강하냐를 놓고 승부가 영향을 받게 된다는 식의, "우리 신이 너희 신보다 더 강하니 항복하라"라는 서사는 동서양 막론하고 퍼져 있는 어떻게 생각하면 다소 주술적인 믿음이며,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절에도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스만 해도... 이러한 이유는 종교가 당시에는 국가나 민족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7] 파라오가 완고하게 변한 건, 야훼의 계획이라고 한다. (탈출기 10장 1~2절) 다만, 이 부분은 보수적인 신학자들도 야훼께서 '원'하신 게 아니라 그러도록 '허락'했을 뿐이고, 구약은 이 허락과 원의를 구분하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18] 유월절(Passover)의 유월의 뜻이 '넘어가다'라는 뜻이다. [19] 특별 전차만 600대를 동원하였고 이집트에 있는 모든 전차를 출격시켰다고 한다. [20] 경로상 홍해가 아니라 다른 호수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존재한다. 다만 위치는 해석에 따라 달라지므로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가령 국내 성경책 일부는 뒷부분에 지도가 있는 것들이 있는데 시나이산이 이집트 남부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대로 경로를 추적하면 홍해는 바다가 아닌 강이 된다. 성경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공격거리. 하지만 모세가 홍해를 건너서 반석을 갈랐다는 전승이 있는 지역은 사우디아라비아 쪽에도 있으므로 이렇게 보면 홍해는 바다가 맞다는 반박도 있기는 하다. [21] 파라오의 전차 부대는 야훼가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보내서 막아줬다고. [22] 파라오의 생사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23] 이때 야훼가 직접 십계명을 내려주었으나 모세가 백성들이 우상 숭배 하는 것을 보고 빡쳐서 파괴했고 결국 석판에 모세가 다시 받아적었다. [24] 모 패러디 만화에서는 지팡이 풍압으로 갈랐다고 나와있기도 하고, 기독교인들도 지팡이를 들자 바로 홍해가 갈라졌다고 알고 있는 경우도 많지만 실제 내용상으로는 사흘 밤새도록 바람, 정확히는 사막에서 불어온 뜨거운 거대 열풍이 불게 해서 갈라졌다. [25] 일종의 떡. 성경에서는 '희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같다고 적고 있다. [26] 정확히는 광야 생활에 지친 히브리 백성들이 물을 달라고 불평한 것이다. [27] 이미 백성들의 땡깡질을 수도 없이 겪은 모세는 이때 이성을 잃고 '그래 내가 늬들에게 물을 주랴?'라고 일갈하며 바위를 때렸고 거기서 물이 나왔다. 이것은 모세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 중 하나였는데 이 일로 야훼의 노여움을 사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고, 히브리 백성들도 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또 떠돌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이다. 여담으로 이집트에서 가나안까지는 도보로 일주일이면 가는 거리였다. [28] 위 지도만 봐도 시나이 반도의 광야에서 뺑뻉이를 잔뜩 돌았음을 알 수 있다. 정작 시나이 반도는 남한보다도 작은 땅이다. [29] 이전 문서에는 탈출기 다음에 바로 요한 묵시록으로 넘어간다고 되어있었으나 정상교회들은 탈출기 이후에 마르코로 넘어가는 경우가 일반적이고 요한복음이나 이사야서까지 나간 이후에 요한 묵시록을 읽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30] 그러나 이는 신학계 및 뜻있는 사람들이 매우 문제 삼는 부분. 이 부분들에는 이민족에 대한 처우에서 오늘날 감성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 있으나, '고용인 임금을 떼먹지 마라'라거나, '좋지 못한 행실로 남에게 원한을 품게 해 놓고 제단 앞에 오지 말고 그 문제부터 해결하고 오라'라거나, '교리를 자기 편할 대로 악용해서 사익 챙기지 말라'거나 하는, 현대의 기준에서도 선진적인 내용들이 의외로 있다. 특히 고용인의 임금을 아껴서 그 돈으로 헌금 많이 하는 파렴치한 행태는 이후 예언서들에서도 계속해서 질타하며 금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주님이 원하는 건 헌금의 돈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다. [31] 창세기에서 야곱의 일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토속 신. [32] 이 부분이 은근히 중요하다. 성경은 워낙 옛날에 작성된 글이기 때문에 현대 사회의 관념과 충돌하는 부분이 꽤 많다. 하다못해 유명한 창세기만 하더라도 창조설 자체가 현대의 진화론과 충돌하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출애굽기에는 이런 내용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 비교적 거부감에서 자유롭다. [33] 로마는 왕정시대 역사는 신화급 취급을 받고 중국은 공화 시기 이전의 기록은 매우 부실해 연대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34] 애초에 이집트도 잘나간 국가지만 역사 역시도 오래되어(이집트에 도시가 처음 건립된게 현재로부터 7300년 전이고 통일 이집트의 등장은 5100년 전이다.) 기간에 비해 남아있는 자료가 적다. [35] 사마리아 오경과 마소라 사본보다 9세기 이전의 사본인 70인역 사본에는 '이집트와 가나안에'라고 나와 있다. [36] 갈라디아서 3:17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때로부터 출애굽까지의 기간을 430년이라 기록했다. [37] 창세기 15장에서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는데, 25년 후에 이삭이 태어났고, 그 이후 60년 후에 야곱이 태어났고, 그 이후 130년 후에 야곱이 애굽으로 들어갔다. 즉 25+60+130=215년이다. [38] 가령 홍해와 동부 삼각주의 '시홀(Shihor)' 강, 이스라엘인들이 머물렀던 '비하히롯(Pi Hahiroth)'의 야영지 등 탈출기의 수많은 지명은 이집트 어휘로 보인다. [39] 사실 이집트가 꽤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이긴 했다. 창세기에서도 아브라함, 이사악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가는 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도 헤로데 대왕을 피해 어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잠깐 피난해 왔었다. [40]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마네토, 멘데의 프톨레미(Ptolemy of Mendes)와 같은 역사가들과 에우세비우스(Eusebius), 히폴리투스(Hippolytus), 클레멘트(Clement), 타티안(Tatian), 데오빌루스(Theophilus)와 같은 교부들은 힉소스 패퇴를 출애굽과 동일시했었다. 참고 # [41] 윌리암 팍스웰 올브라이트(W. F. Albright)의 주장 [42] 알브레이트 알트(Albrecht Alt)의 1925년 논문 (“Die Landnahme Der Israeliten in Palästina”) [43] 조지 멘덴홀(George Mendenhall)의 1962년 논문 “The Hebrew Conquest of Palestine” [44] '히브리'와의 발음 유사성이 주목받기도 한다. 그러나 하비루는 인두음이 없는 아카드어의 표기이기 때문에, 원래는 우가리트어와 이집트어 기록의 표기처럼 ʕ-p-r의 자음을 가질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히브리의 경우도 원래 구약의 표기는 이브리(עברי, 히브리어로 이브리/ʕibríː/, 아람어로 이브라이/ʕibraj/)였으나 인두음이 없는 그리스어에서 헤브라이오스( Ἑβραῖος)로 표기했던 것을 그대로 다른 언어들이 답습한 것이다. [45] 가령 그리스 문명만 해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음이 쉽게 확인된다. 그리스 문명은 에게(크레타→미케네) 문명을 그 뿌리로 하고 있고, 에게 문명은 이집트 문명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던 것. [46] 물론 이집트 탈출에 대한 기억이 없는 시리아인 등도 할례 풍습을 공유하므로 할례 그 자체가 탈출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나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끼친 문화적 영향에는 분명 강한 증거가 된다. [47] 창세기의 증언에 의하면 아브라함 가문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출신이다. [48] 참고로, 성경에서 말하는 '부정하다'는 '사악하다'라기보다는 '더럽다'에 가까운 의미다. 즉 더러우니까 씻고 오라는 의미. [49] Lawrence Boadt, Reading the Old Testament, p. 134. [50] 영미권 인명인 phineas의 어원이기도 하다. [51] Oxford Guide to the Bible [52] 파라오 중 '아모세', 투트모세' 등의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물론 성경에 따르면 모세는 애초에 이집트에서 길러진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이름 역시 이집트 공주가 이집트어로 붙인 것이므로 다소 경우가 다르긴 하다. [53] Boadt, p.134. [54] 모세를 상징한다. [55] 북이스라엘 왕국은 이집트 탈출 전승에, 남유다 왕국은 다윗 왕정 전승에 관심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56] 기원전 350년경 저술 [57]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자치를 허용하기는 했다. [58] 단 BC 1448~1447년의 이집트 파라오는 제18왕조 투트모세 3세이며, 전기설에서 대표적으로 밀고 있는 아멘호테프 2세는 그의 아들이다. 고대 문헌들이 다 그렇듯이 이 정도 오차는 그러려니(...) 하자. [59] 영어 원문: fight against = 대적하여 '싸우다/다투다 [60] 물론, 입다의 300년은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하나의 표현으로도 해석되기도 하며, 후기설에서는 후술할 솔로몬의 480년과 같은 방법으로 계산되어 해석되기도 한다. [61] 더욱이 힉소스인이라는 집단에는 지금의 유대인의 조상들 역시 끼어 있었을지 모른다는 학설도 있다고 한다. ( 참고) [62] Peter Der Manuelian, Studies in the Reign of Amenophis II, p.76. Hildesheimer Ägyptologische Beiträge 26, Gerstenbeg Verlag, Hildesheim, 1987. [63] Douglas Petrovich. "Amenhotep II and the Historicity of the Exodus Pharaoh". biblearchaeology.org. Associates for Biblical Research. [64] "Who Was the Pharaoh of the Exodus?". Armstrong Institute of Biblical Archaeology. [65] Finkelstein, I. 1994. The Emergence of Israel: A Phase in the Cyclic History of Canaan in the Third and Second Millennia BCE, in I. Finkelstein and N. Naaman (eds.), From Nomadism to Monarchy: Archaeological and Historical Aspects of Early Israel, Jerusalem: 150-178. [66] 메르넵타의 비문 속 이스라엘은 가나안 북부의 이스르엘 계곡이나 리비아 족속을 지칭하는 명칭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기에 이스라엘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67] Lawrence Boadt, Reading the Old Testament, p.134. [68] Berlin Pedestal Relief 또는 ÄM 21687로 불린다. [69] 야슈르-일은 야슈르-엘과 동일한 이름이며, 혹 전자가 후자로부터 파생된 지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뜻은 "엘께서는 의로우시다"로, "의로운"을 뜻하는 여수룬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70] 표기법 만을 고려한다면, 제18왕조 중엽의 기록으로 보이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가나안의 중부 고원 지대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들판이었으며, 눈에 띄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해당 지명과 해당 지명과 관련된 세력이 제18왕조의 초기-중기에 활동한 파라오들의 지명 목록에 유사한 지명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중 이집트어(Middle Egyptian)는 고전적인 문체로 규정되어, 서기 2세기부터 3세기경까지 기록 언어로 사용되어 갔기에 표기법 만으로는 시대를 특정하기 어렵다. 그저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넵타의 치세 때부터는 이스라엘이 확실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기에 그보다 이전 시대에 활동했던 파라오들 가운데에서 후보를 지목할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군사 원정이 실제로 이루어진 시기 등을 근거로 제18왕조 말기나 제19왕조 초기의 기록이었을 가능성이 학자들에 의해 가장 높게 여겨진다. 현대의 학자들은 제18왕조 말기의 호렘헤브나 제19왕조 초기의 람세스 2세의 기록으로 추정한다. [71] 베를린 비문은 호렘헤브나 람세스 2세의 치세 동안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후자인 람세스 2세 시절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진다. [72] 참고 # [73] Muller, Asien und Europa nach Altägyptischen Denkmälern (Leipzig, 1893), 237. [74] The stele reads: «The Apiru of Mount Yarumta, together with the Tayaru, attack the Raham tribe». J. B. Pritchard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 p. 255. Princeton, 1955. [75] 굳이 따지자면, 성서에서 족장 시대의 요셉이 "라암셋"이라는 지명을 언급하고, 왕궁이 고센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며, 이집트에서 전차가 상용화되었던 것을 고려하면, 족장 시대는 수도가 피람세스였던 기원전 13-12세기였던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이렇게 추정되기도 한다. [76] 애니메이션 영화 '이집트 왕자'는 후기설을 따른다. [77] 예리코와 하솔은 분명히 다른 시기에 파괴되었지만, 기원전 1500년에 파괴된 예리코는 재건되었는데, 아멘호테프 3세의 인장이 발견된 것은, 적어도 예리코가 후기 청동기 시대 / 신왕국 시대 동안에 성벽이 있는 도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odus Rediscovered: Conquest 하지만, 이것이 여리고가 기원전 13세기에 파괴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에 아직까지 여리고 전투의 역사성을 증명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78] 그래도 기원전 14-12세기의 하비루의 활동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관련되었다고 보는 것이 주류이며, 이들, 곧, 하비루들이 초기 이스라엘로 가나안 내부에서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현대 학계의 정설이다. [79] 어떤 이들은 람세스가 그저 라의 아들이라는 뜻이니 이는 제18왕조 때도 사용되던 라모세와 같은 이름이라 하며, 출애굽 속 라암셋/람세스가 피람세스가 아니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이집트어를 모르는 극도의 무지함에서 나오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라모세와 람세스는 아예 다른 이름 뜻을 가졌는데, 라모세는 "rꜥ-ms 라가 낳았다"를 의미하는 반면에 람세스는 "rꜥ-ms-sw 라가 그를 낳았다"를 의미한다. 게다가 성서 속 "라암셋 רַעַמְסֵֽס׃"은 마지막 뒤에 람세스와 동일하게 "ㅅ s"발음을 가지고 있지만, 라모세는 "ㅔ e" 발음으로 끝나 발음과 표기법 또한 다른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라암셋/람세스라는 이름의 도시가 제19왕조 때 처음 등장했으며, "라가 그를 낳았다"를 의미하는 람세스라는 이름 또한 제19왕조 때 처음 등장하였고, 성서 속 라암셋/람세스와 동일한 발음을 가진 이름은 라모세가 아니라 람세스 뿐이기에, 성서 속 라암셋/람세스는 제19왕조의 도시 피람세스가 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지명을 시대에 따라 업데이트 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제19왕조 이전에 라암셋이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80] 여담으로 이스라엘이 건국된 뒤에 이스라엘의 총리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이집트 대통령과 함께 대화하다가 피라미드를 보고 "저건 누가 지은 겁니까?"라고 나름 뼈 있는 농담을 던졌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다만 피라미드는 전기설보다도 훨씬 전인 고왕국 시대에나 축조되었고 그나마 후대에 지어진 건 거의 무너져 없어졌으므로 현존하는 피라미드는 유대인 노예랑 무관하다. [81] 즉 세티 1세가 그 부왕 람세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된다. [82] 람세스 2세의 장자가 죽은 시기를 근거로 한다면 BC 13세기 중엽이 된다. [83] 성서학자들은 이 12라는 숫자 역시 실제 열두 부족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상징적인 수라고 보는 경우가 많다. [84] 광야 생활 40년, 예수가 40일간 광야에서 보낸 일 등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상징적인 기간인 셈. [85] 홍해는 번역오류이며,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갈대바다이다. [86] 일단, 믹돌이 세티 1세의 치세 동안 만들어졌으며, 출애굽기에서 믹돌을 언급하기에 출애굽이 있었다면 적어도 세티 1세의 치세 이후였을 것이다. [87] '스본 zephon'은 '북쪽'을 뜻하는 셈어로, '바알스본'은 '북쪽의 바알'을 의미한다. [88] 메르넵타의 치세 동안 작성된 문서이다. [89] 갈대바다의 근처에 비하히롯의 잎과 녹지가 있었다고 한다. [90] "The Soul of Ra, Beloved of the Gods"라는 뜻이다. [91] Some Egyptologists have suggested a connection with the name gsm used in reference to a lake in Papyrus Anastasi IV, as the name appears to have been used as a toponym in the Wādī Ṭumīlāt. [92] 참고: Bietak, Manfred (2015). "On the Historicity of the Exodus: What Egyptology Today Can Contribute to Assessing the Biblical Account of the Sojourn in Egypt". In Levy, Thomas E.; Schneider, Thomas; Propp, William H. C. (eds.). Israel's Exodus in Transdisciplinary Perspective: Text, Archaeology, Culture, and Geoscience. Springer. p. 22. ISBN 978-3-319-04767-6. [93] 피람세스(라암셋)과 같은 도시라고 국내에는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둘 사이의 거리는 무려 2km 되며, 둘은 인접한 도시였을 뿐 완전히 다른 도시였다. 피람세스는 제19왕조의 람세스 1세 또는 세티 1세 때 처음 건축된 신도시였다. [94] 아흐모세 1세 ~ 호렘헤브 [95] 람세스 2세의 세트 신전 건립 400주년 기념 비문은 힉소스 시대 초기의 종교가 람세스 시대까지 존속되고 보존되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힉소스 잔당의 후예들이 람세스 시대까지 아바리스에서 삶을 이어나갔음 역시 보여준다. [96] Bietak, Manfred. "The Aftermath of the Hyksos in Avaris." Culture Contacts and the Making of Cultures: Papers in Homage to Itamar Even Zohar, by Rakefet Sela-Sheffy and Gideon Toury, Tel Aviv University- Unit of Culture Research, 2011, pp.19-65. [97] Manfred Bietak, Nicola Math, and Vera Müller, “Report on the excavations of a Hyksos Palace of Tell el Dabᶜa/Avaris.” Ägypten und Levante 22/23 (2013): 15-35. [98] 제18왕조 때(아멘호테프 2세)는 이집트 귀족의 왕궁 하나 정도만 버려졌지만 도시 전체 규모에 비교하면 1/10도 안된다. [99] Marc van de Mieroop, "A History of Ancient Egypt", 2021, p. 125. [100] 아바리스 도시 전체는 제19왕조 동안에 버려졌지만, 도시의 항구만은 지속적으로 유지되다가 제20왕조 이후 피람세스와 함께 버려졌다. 참고로, 아바리스로부터 2km 정도 떨어진 피람세스(라암셋)는 제20왕조 때까지 사용되다가 나일강의 물길이 바뀌어서 버려지게 되었다. [101] 세트는 셈족에 의해 그들의 폭풍의 신 바알-하닷과 동일시되었다. [102] Bietak, Manfred (2015). "On the Historicity of the Exodus: What Egyptology Today Can Contribute to Assessing the Biblical Account of the Sojourn in Egypt". In Levy, Thomas E.; Schneider, Thomas; Propp, William H. C. (eds.). Israel's Exodus in Transdisciplinary Perspective: Text, Archaeology, Culture, and Geoscience. Springer. pp. 17–37. ISBN 978-3-319-04768-3. [103] 람세스 2세가 죽을 당시, 젊었을 적에 낳은 자식들은 이미 죽은 상황이었고, 심지어 일부 손자들과 증손자들도 죽은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람세스 2세 항목 참고. [104] 실제로 투트모세 4세에게는 웨벤세누라고 하는 형이 있었기에 본래 투트모세 4세는 왕위를 물러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 투트모세 4세는 대스핑크스가 자기 위에 쌓인 모래를 치워 주면 이집트의 왕좌를 주겠다고 말한 꿈을 꾸었고 약속을 지켰다. 그러자 정말로 파라오가 되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투트모세 4세가 스핑크스를 발견한 건 그 스핑크스가 지어진 지 천 년도 더 된 시점이었다. 즉 당시 기준으로도 이미 고대 유적이었던 것. 만화 [105] ANET 259 [106] Boadt, p. 134 [107] 이집트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국가들, 나아가 대부분의 고대국가에서 하층민의 생활수준은 국가밖의 야인들보다 열악해 이러한 인력유출은 흔한 일이었고 이를막고 추가로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과제였다. [108] 이 구도는 열왕기에서 하닷과 여로보암의 이야기에도 나온다. 하닷은 다윗의 침공을 피해 이집트에 가서 다윗과 요압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고 여로보암은 솔로몬을 피해서 이집트에 가서 솔로몬이 죽을 때가지 기다렸다. 상대하기 벅찬 상대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상대할 만한 왕이 즉위한 이후에 다시 와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모세와 비슷하다. [109] 마침 전기설의 탈출 추정시기인 기원전 1447년경도 투트모세 3세 재위기다. 다만 위에서 설명했듯 아멘호테프 2세로 추측하는 경우도 많은 편. [110] 성서 학자들은 힉소스와 관련해서는 출애굽기 보다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에 주목하여, 히브리인 요셉이 이집트의 재상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봉사한 왕조가 같은 아시아 출신인 힉소스 왕조였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위에 나온 것처럼 힉소스 왕 중에 '야쿱-헤르'라는 왕이 있는데 야쿱은 요셉의 아버지 야곱과 매우 비슷한 이름이기도 하다. [111] Finkelstein, Israel; Silberman, Neil Asher (2002). The Bible Unearthed. Free Press. ISBN 978-0684869124. p. 68-69. [112] The Bible Unearthed, p. 62–63. [113] 참고로, 핑켈슈타인은 출애굽 전승은 기원전 7-6세기 사이 이집트와 유다 왕국의 관계 때문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뼈대가 되는 배경은 네카우 2세(성서의 느고 왕)의 치세 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114] [115] 게리 A. 렌즈버그는 메르넵타의 비문 속 이스라엘이 이집트 내 거주하는 이스라엘 족속을 의미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116] 비탁은 이와 달리 가나안의 이스라엘인들과 출애굽 이야기를 가지고 온 세력을 구분지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먼저 가나안에서 발전한 이후, 이들 중 일부 또는 후에 이스라엘 왕국으로 발전하는 세력의 조상이 되는 다른 세력, 그러니까 원이스라엘인들과 미디안인들의 유전자 풀 안에 있는 이들이 람세스 3세에 의해 이집트로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이들이 출애굽 전승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비탁은 파피루스 해리스에서 람세스 3세가 에돔 광야의 샤수(유목민)들을 포로로 데리고 왔다는 것과 세티 2세의 치세 동안 작성된 파피루스에서 세일 광야의 샤수들이 기근을 피해 평화적으로 이집트로 이주해 왔다는 것, 그리고 샤수들이 야훼 신앙을 따랐다는 것과 사사기 5:4과 하박국 3:3과 신명기 33:2에서 에돔과 세일산이 야훼의 성소로 언급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 에돔과 세일의 샤수들을 출애굽 전승과 관련된 원이스라엘의 유전자 풀 안에 있는 세력으로 주장하였으며, 이들은 에돔인이 아니라고 명확히 구분지었다. [117] These people should not be taken as Edomites, but as Shosu from Edom. As Yahweh is said to have risen in Seir in Edom (Deut. 33:2; Ju. 5:4; see also Habakuk 3:3) these pastoralists appear at the right time and from the right corner to be considered the gene pool of Midianites or Proto-Israelites. [118] Bietak, Manfred (2015). "On the Historicity of the Exodus: What Egyptology Today Can Contribute to Assessing the Biblical Account of the Sojourn in Egypt". In Thomas E. Levy; Thomas Schneider; William H.C. Propp (eds.). Israel's Exodus in Transdisciplinary Perspective: Text, Archaeology, Culture, and Geoscience. Springer. p. 20. ISBN 978-3-319-04768-3. [119] 이 시기는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철군한 시기로 정복 전쟁 이야기에서 애굽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간 이유를 설명하는 듯 하다. 이집트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면,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가 되기에 가나안으로 도피하는 것은 집을 가출해서 집 앞마당에서 자는 것과 비슷한 논리가 되니 말이다. [120] Gary Rendsburg, “The Date of the Exodus and the Conquest/Settlement: The Case for the 1100’s,” Vetus Testamentum 42 (1992), pp. 510-527. [121] 겐즈버그는 그의 아들인 람세스 3세 때 있었던 셈족들의 이탈 사건으로 보고 있지, 세트나크테의 치세 때 있었던 일을 출애굽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122] Knohl, I. (2019). Exodus: The History Behind the Story. [123] Goedicke, Hans (1979). "'Irsu, the Kharu' in Papryus Harris". Wiener Zeitschrift für die Kunde des Morgenlandes. 71: 1–17. JSTOR 23858901. [124] 유대인들의 달력에서 출애굽은 기원전 1310년의 사건이며, 아브라함은 이로부터 430년 전인 기원전 1740년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한다는 것을 근거로 요셉을 힉소스 왕조 직후 시대인 제18왕조 초기의 인물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이를 따르는 유대인들과 유대계 학자들도 있다. 당시의 이집트의 수도는 남쪽의 테베였지만, 고센 땅의 아바리스에 이집트의 왕궁이 있었고, 전차도 상용화되었기에 상당히 가능성 있는 가설이기도 하다. 참고: [125]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기원전 1310/1313년에 인접한 시기에 통치한 파라오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기원전 1279-1213년)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보고 있지만, 일부 유대인들은 세트나크테, 람세스 3세를 출애굽의 파라오로 보고 있다. [126] 물론, 유대인들의 달력에서는 남유다의 멸망을 실제 멸망 시기보다 1세기 정도 이후로 보며, 유대인들 역시 이를 인정하지만, 이 이전의 시대의 연대들에 대해서는 실제 역사적으로 검증된 것이 없기에 유대인들의 연대기가 옳을 수도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127] 애초에 현대의 뉴딜 정책조차 실효성에 대해선 여전히 논쟁중인 사항인데, 고대 사회에서 경기 활성화를 목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는 건 무리한 주장이다. [128] 이는 나무위키나 커뮤니티 들에서 한때 로마군의 복지 체계를 찬양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29] 사실 '월급 안 줘서 파업했다라는 문장도 어폐가 있는데, 고대 이집트는 화폐 경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은 월급이 아니라 생필품을 받았다. 따라서 그 지급이 늦어지면 밥을 못 먹는다. 따라서 당연히 일을 할 수가 없다 [130] 다만 이집트의 이런 '파업' 관행은 고대 이집트가 끝나고도 동로마 시절까지 이어지긴 했다. [131] 애당초 출애굽의 배경은 (BC 15세기이든 13세기이든) 신왕국 시대이고, 신왕국 시대에는 피라미드를 안 지었다. [132] 한국어 역서는 가톨릭 신학교 출반부에서 나왔으나, 원서인 《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는 가톨릭 유무와 무관하게 불어권(일부 독어권) 주석학자들이 공저자로 참여한 본격 주석학 개론서이다. [133] Thomas Römer · Jean-Daniel Macchi · Christophe Nihan 등, 같은 책 366-468쪽. 그 외에 한국 이집트학 연구소 소장인 곽민수 역시도 이집트 탈출에 관한 문헌사학적/고고학적 증거가 이집트에 없다고 말한다. # [134] 'Much of the Bible, especially in the early part, is traditional literature that took shape gradually over the centuries, and contains material that is much older than the final redaction. Collective memory has come into vogue somewhat in biblical studies in recent years, in part because of the influential work of Jan Assman, Moses the Egyptian." Some scholars have tried to salvage a measure of historicity from the Exodus story in this way. Ronald Hendel argues that "certain actions and policies of the Egyptian empire in Canaan may be discerned in the portrait of the Egyptian oppression. A devastating epidemic in the late fourteenth century, interpreted as an act of divine punishment, may be distantly recalled in the story of the Egyptian plagues. A historical figure named Moses may have been transformed into the savior and mediator of all Israel, perhaps generalized from the memory of a smaller group." Baruch Halpern finds echoes of the Hyksos in the story of the descent into Egypt, and notes that the brickmaking described in Exodus "reflects close knowledge of conditions under the XIXth Dynasty." But as Hendel readily admits, "historical events are the most difficult to isolate." "Each aspect of this complex tale may contain traces of historical events and persons, mingled together with mythic motifs, themes, and structures — the stuff that makes the past truly memorable." '[성경의 대부분은 특히 초기 부분의 경우 수세기에 걸쳐 점점 모양을 갖춘 전통 문학이며, 최종 편집보다 더 훨씬 오래된 원천들을 포함한다. '집단 기억'이 근래 성서학에서 다소 유행하고 있는데, 이는 어느정도는 얀 아스만(Jan Assman)의 영향력 있는 저작인 《이집트인 모세》Moses the Egyptian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은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성 측량을 인양하려고 한다. 로널드 헨델(Ronald Hendel)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집트의 억압에 관한 묘사로부터 이집트 제국이 가나안에서 한 어떤 행적과 정책들이 식별될 것이다. 천벌로 해석된 14세기 후반의 파괴적인 전염병은 훗날 이집트의 역병으로 회고되었다. 모세라는 이름의 역사적 인물은 ㅡ아마도 소그룹으로부터ㅡ 온 이스라엘의 구원자 및 중재자로 변형되었을 것이다." 바룩 할펀(Baruch Halpern)은 이집트로의 이주 이야기에서 힉소스의 메아리를 발견했고, 출애굽기에서 묘사된 벽돌 제작이 제19왕조 치하에 대한 면밀한 지식을 반영함을 알아냈다. 그러나 헨델이 기꺼이 인정하였듯이, "역사적 사건들은 분리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이 복합적 이야기의 각각의 국면들이 역사적 사건 및 인물들의 흔적을, 신화적 모티프 및 주제 및 구조ㅡ과거를 진실로 기억되게 하는 것ㅡ와 혼합된 채로 포함할 것이다."], John J. Collins, 《The Bible After Babel: Historical Criticism in a Postmodern Age》 [135] 예를들어서 아래의 발췌문에서 보듯 Roux는 출애굽기에서 "충분한 개연성이 있고 역사적이며 어림잡아 연대를 정할 수 있는 사건들이 이 전설의 외투 아래에 있다(Roux, 《La Mésopotamie》)"고 보지만 출애굽기의 서술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Roux. 같은 책)고 말한다. 반면 Collins는 "이집트 탈출 및 가나안 정복의 기본 이야기는 신화로서 가장 잘 이해된다 ... 실증적 관점의 역사에 해당하지 않는다"("the foundation stories of exodus and conquest are best understood as myths ... they cannot be taken as history in any positivistic sense.", Collins 같은 책)고 보지만 동시에 "역사적 사건 및 인물들의 흔적을, 신화적 모티프 및 주제 및 구조와 혼합된 채로 포함할 것이다"("contain traces of historical events and persons, mingled together with mythic motifs, themes, and structures", Collins 같은 책)고 본다. 이 둘은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오히려 일정한 합의의 틀을 제시한다. [136] Lester L. Grabbe, 류광현, 김성천 역, <고대 이스라엘 역사> (CLC, 2012), p. 155. [137] 오경의 최종 편집은 BC 400년경에 이뤄졌으며, 요시야 임금 이후의 신학적 사고를 반영한다. 물론 오경의 출전들은 그 이전으로 올라가며 일부 본문(예: 신명기 33장의 운문)에서는 후대의 세련된 유일신론과 비교할 때 매우 투박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은 '페르시아 치하 시대에 이전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회고한 기억'으로 읽는 게 '저자가 동시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 1차적인 문필적 이해'에 부합한다. [138] 시편, 예언서 등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언급, 초기 히브리인들의 이름에 무수히 나타나는 이집트어의 흔적 등. [139] Megan Bishop Moore and Brad E. Keller, Biblical History and Israel's Past: The Changing Study of the Bible and History (Cambridge, 2011), pp. 91-95 [140] Grabbe, p. 155. [141] 쉽게 말해 역사적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한(때로는 허구도 추가하는) 사극 드라마처럼 사실을 신학적으로 표현한 게 출애굽기라는 의미다. [142] 원제: 《La Mésopotamie》. 영어판(불어판보다 먼저 출판됨) 제목인 《Ancient Iraq》로도 유명하다. 한국어판은 1995년 프랑스어판의 번역이다. Roux (1914 ~ 1999)는 이 책을 학자들이 아닌 문외한이나 학생들을 위해 썼다고 겸손하게 말했으나 고대근동학자에겐 메소포타미아(여기선 '아시리아학'의 동의어. 곧 레반트를 포함한 광의의 메소포타미아를 다룸.)에 관한 대표작이자 권위작이며, 그는 학계의 리더 중 하나로 꼽힌다.("《Ancient Iraq》 was a major work, readable and authoritative, on the ancient history of the region formerly known as Mesopotamia ... His field researches, together with his Assyriological studies, placed him among the leaders in this sphere, in particular on the historical side, although with typical modesty he claimed to be only an amateur in Assyriology." #, by Harry Saggs) [143] 해당 장에서 출애굽기에 대한 구절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