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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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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화권에서 쓰인 작위의 개념과 그 서열은 유교 경전에서 주나라 때 시행되었다고 전하는 작위인 오등작 개념에 따른 것이다.

맹자》만장 하편 2장에선 주나라 때에는 천자(天子)-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5개 등급이 있었고(자와 남은 동급으로 설명), 자와 남보다 못한 세력은 제후에 부속되는 부용(附庸)이라 정의했다. 또한 제후가 내릴 수 있는 작위로써 군(君)- 경(卿)- 대부(大夫)-상사(上士)-중사(中士)-하사(下士) 6등급을 제시하고 있다.[1] 다른 유교의 경전에 따르면, 하나라에서는 공·후·백·자·남이 모두 있었고, 상나라 때 자와 남이 폐지되었다가, 주나라가 다시 자와 남을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라는 실존 자체를 의심받고 있고, 상나라 때 쓰인 문자인 갑골문에서 자와 남을 모두 칭호로 사용한 용례가 발견되어 실제와는 다름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춘추시대까지 후(侯)나 백(伯)을 섬기는 신하 중에는 자(子) 칭호를 사용한 유력자도 있었다. 실제 제후국들은 각자 독자적인 계급제도를 시행했는데, 크게 대부(大夫)와 사(士) 계급으로 구성되었으며, 계급별로 보통 상(上)·중(中)·하(下) 등급으로 나뉘었기에, 앞서 살펴본 《맹자》의 기록대로 사 계급에서만 3등급이 나뉘었던 것이 아니었다.[2] 또한 군(君)이나 경(卿)은 호칭의 일종이었지 작위로 쓰였던 것이 아니며, 특히 (卿)이란 표현은 별개의 계급이 아니라 보통 상대부(上大夫) 이상의 고관을 군주가 특별히 부른 존칭이었다.

즉, 실상은 여러 나라의 수장들이 사용했던 다양한 칭호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서열 관계가 정해진 것에 불과하다. 특히 주나라가 패권을 잃으면서 춘추시대가 개막되자, 각 나라가 존왕양이의 구호를 내세우며 주나라를 대신해 패권을 장악하려는 경쟁에 돌입하면서, 초나라처럼 원래는 주나라의 통치 질서 바깥에 있었던 나라들이 천자의 신하를 자처하거나, 허나라처럼 자신들의 선조가 천자에게 작위를 받은 것으로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심지어는 자국의 역사를 삼황오제 신화와 결부하여 정통성을 부여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는데,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유학자들이 각 나라 수장들의 칭호들을 주나라의 작위와 그 서열 관계로 정리하여 기록했고, 이것이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오등작의 실체이다.

비록 현실의 모습과는 다른 개념이긴 했으나, 유교가 공식적인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고, 하·상·주 3대 이전의 제도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유학자들의 복고주의 성향에 의해, 유교 경전에 주나라의 작위제도로 기록된 오등작을 실제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결국 후대에는 오등작에 기반한 작위제도가 시행되고, 일반적인 작위 서열로 인식되었다. 다만 실제 여러 나라에서 채택한 작위 제도는 그 일부에만 오등작 개념을 차용했을 뿐, 실제로 같은 작호(爵號)를 여러 등급으로 나눠두거나 왕작(王爵)이나 장군 칭호 등이 혼용되어 쓰였으며, 오등작 제도를 그대로 구현한 사례는 왕망 신나라가 유일하다.

2. 선진 시대

춘추전국시대에 각국에서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군현제를 시행하여 영토국가 단계로 발전하기 이전까지, 중원 지역의 나라들은 여러 도시국가들이 모인 도시연맹체에 가까운 형태였다. 가장 최하위 단계인 도시를 당대에는 '읍(邑)'이라 불렀고, 읍을 소유한 사람을 '군(君)'으로 호칭했다.

읍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집단은 주변의 공백지에 새로운 읍을 건설해나가는 방식으로 점차 그 영역을 확장해나갔는데, 이 과정은 보통 기존 읍의 주인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이 새로운 읍의 군으로 분봉(分封)되는 형태로 이뤄졌다. 이러한 형태로 도시연맹체들이 형성되었으며, 또한 연맹체들끼리 새로운 상위 단계의 연맹체를 형성해나갔는데, 상나라 때까지는 씨족 단위로 구성된 연맹체가 최고 단계의 정치체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 중 상나라가 중원에서 패권을 휘두르는 초강대국 지위를 누렸던 것이라 여겨진다. 상주혁명으로 중원의 패권을 주나라가 차지하게 되면서 주나라는 '천자(天子)'를 자처하여 중원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정당화했고, 이에 주나라가 중심이 되는 최고 단계의 연맹체를 구성해 국제질서를 주도했는데, 이것이 주나라 봉건제의 실상에 가깝다.

즉 주나라 때에 사용되었다고 전하는 오등작이란 실제 책봉의 형태로 임명된 제후들이 각자의 봉토를 다스리는 작위의 개념이었다기 보다는, 각 단계별 연맹체의 수장들이 사용했던 칭호들에 가까운 개념이었던 것이다. 다만 상나라 때까지 '후(侯)'는 씨족 단위의 연맹체 수장의 칭호였으나, 주나라 때에는 상주혁명에 동참한 세력이 아닐 경우에는 기존의 '후'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왕족이나 공신의 후손을 새로운 '후'로 책봉하여 그 지역을 복속시키게 했으므로, 사실 주나라 때의 '작위'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후' 정도만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제후들은 모두 '왕'을 자칭했고, 자신들의 일족이나 공적을 세운 신하들을 '후'로 책봉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본래 '군(君)'이란 표현은 읍을 소유한 사람에겐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었기에 우리말로 '임금'의 개념에 가까웠고 다른 정식 칭호가 있는 제후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었는데, 이처럼 제후국들이 '후'를 책봉하기 시작하자 정식으로 후로 책봉되지 못한 식읍의 소유자에 한정하는 칭호로 쓰이게 되었다.

아래는 주나라 때까지 사용된 칭호들을 정리한 것이다.

3. 진(秦)· 한(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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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상앙이 장병들이 세운 군공을 포상하고자 작위 제도를 제정했는데, 18등급의 법품(法品)과 2단계의 제후 작위로 구성되어 이를 합치면 20등급이 되므로 이를 20등작 제도라고 한다. 한나라 때까지 사용되었다가, 후한 말에 조조가 폐지했다. 등급의 숫자가 적을수록 낮고, 클수록 높은 계급이다.

법품 1~8 등급은 일반 평민도 받을 수 있는 작위로, '민작'(民爵)'과 '이작'(吏爵)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이민작(吏民爵)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다른 등급들이 폐지된 수나라 이후에도 명목상 이민작 등급은 살아남아 송나라 때까지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미 당나라 때 '고작'(古爵)으로 불릴 정도로 쇠퇴한 상황이었고 송나라 멸망 이후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이 8개 등급을 제외한 나머지를 별도로 12등작으로 부르기도 한다.

법품 9~18 등급은 봉록 600석 이상의 관리들에게만 수여하여 관작(官爵)으로 구분되었다. 관작은 진나라 때 관리들의 계급 서열 역할을 했었지만, 한나라에서는 봉록 등급을 의미하는 질(秩)의 격차가 곧 관직의 서열로 여겨졌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겨지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9등급인 오대부 이외의 다른 8개 등급은 군주에게 (卿)으로 예우받는 고위 등급이었는데, 후한 조조가 이 8개 등급을 혁파함으로써 사라졌다.

19~20 등급은 법품에는 해당하지 않고 한나라 때의 명칭을 기준으로 각각 관내후(關內侯)와 열후(列侯)로 불린 별개의 작위로써, 제후(諸侯)로 통칭하는 특별한 신분이었다. 열후로 책봉되면 식읍이 '국(國)'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를 봉국(封國)이라고 하며, 봉국의 이름을 따서 ○○후(侯)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관내후 이하는 식읍을 소유하더라도 후(侯)로 호칭되지 않고 기존의 관례대로 ○○군(君)으로 불렸다. 전한 때까지는 봉국에 대한 통치권의 유무로 열후와 관내후가 구분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8] 후한 때는 보통 식읍을 수여하면 곧바로 열후로 책봉했기에 관내후는 식읍을 갖지 않는 작위로서 인식되어 열후와 구분된 것으로 보인다.

군공에 따른 보상책이었던 만큼, 등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공유지를 배분하여 경작지와 주거지를 지급하는 경제적인 특전도 함께 마련되었다.[9] 또한 당시의 형벌체계와도 연동되어, 반역이나 살인같은 중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법품을 낮추는 것으로 형벌을 대신할 수 있었다.[10]

하지만 규정대로 공유지를 배분하기란 사실 진나라 시절부터 불가능했던 일로 파악되며, 한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에 더하여, 한무제가 벌인 각종 대외원정으로 인해 재정이 궁핍해지자 군사비 조달을 명목으로 매작하는 일도 잦아지면서, 경제적인 특전은 유명무실화되었다.[11] 한무제는 1~11 등급에 새로 무공작(武功爵)을 제정해 실제 군공을 세운 장병들에게 수여하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널리 쓰이진 못했다. 결국 전한 말기쯤에는 사람들이 18등급의 법품에는 별 가치를 두지 않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제후 작위로 구분되어있던 관내후와 열후의 가치가 고평가된다.
<colbgcolor=white,#505050>
구분
<colbgcolor=white,#505050>
등급
20등작
무공작
지급분[12]
× 무작자(無爵者)[13] 1
민작 1등급 공사(公士) 조사(造士) 1.5
2등급 상조(上造) 한여위(閒輿衛) 2
3등급 잠요(簪裊) 양사(良士) 3
4등급 불경(不更) 원융사(元戎士) 4
이작 5등급 대부(大夫) 관수(官首) 5
6등급 관대부(官大夫)[14] 병탁(秉鐸) 7
7등급 공대부(公大夫) 천부(千夫) 9
8등급 공승(公乗) 낙경(樂卿) 20
관작
[15]
9등급 오대부(五大夫) 집융(執戎) 25
10등급 좌서장(左庶長)[16] 정려서장(政戾庶長) 74
11등급 우서장(右庶長) 군위(軍衛) 76
12등급 좌경(左更) 78
13등급 중경(中更) 80
14등급 우경(右更) 82
15등급 소상조(少上造) 84
16등급 대량조(大良造) → 대상조(大上造)[17] 86
17등급 사거서장(駟車庶長) 88
18등급 대서장(大庶長)[18] 90
제후 19등급 내후(內侯) → 윤후(倫侯) → 관내후(關內侯)[19] 95
20등급 철후(徹侯) → 열후(列侯)[20] 105[21]

이 외에 이민족 수장들에게 수여한 솔중왕(率眾王)-귀의후(歸義侯)-읍군(邑君)-읍장(邑長) 순의 작위가 있었고, 전한 때에는 관례에 따라 왕(王)과 공(公) 칭호를 받는 제후들도 생겨났다. 자세한 내용은 이십등작 문서 참조. 왕망이 제후 등급과 왕을 폐지하고 유교 경전에 규정된 작위 등급에 따른 오등작을 시행하였으나, 신나라가 망하면서 환원되었다.

후한 때에는 식읍의 규모에 따라 열후가 현후(縣侯)-향후(鄕侯)-정후(亭侯) 순으로 구분되고, 후한 말에는 현후(縣侯)-도향후(都鄕侯)-향후(鄕侯)-도정후(都亭侯)-정후(亭侯) 순으로 한층 더 세분되었다. 다만 이는 열후로 책봉하면 관례상 새로운 봉국을 분리하면서 발생하는 폐단을 막고자 도입한 구분이었을 뿐 열후 계급 내 서열을 의미하지는 않았는데, 삼국시대 위나라 때부터는 열후 계급을 나눈 별도의 등급들로 규정되어 서열이 발생했다.

215년에 조조가 관내후 아래로 명호후(名號侯)[22]-관중후(關中侯)-관외후(關外侯) 3등급을 신설하고, 경(卿)급 관작 8개 등급을 혁파하여 오대부로 통일하면서, 공식적으로 20등작제는 폐지되었다.

4. 위진남북조시대

후한 말기 군웅할거 시대가 도래하면서, 군웅들은 자신의 막료나 동맹 측 인물을 황제에게 천거하는 형식으로 관직을 제멋대로 임명하는 일이 성행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열후마저 제멋대로 책봉하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세력이 미치는 영역 안에서만 지방관을 임명하거나 열후를 책봉한 것도 아니었다. 전한 중기 이후 열후는 명목상의 봉국 통치권만 있을 뿐 실제로는 보유한 식읍의 숫자만큼의 별도 급여를 받는 데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수여한 식읍을 봉국으로 개편하는 조치는 계속 이뤄져 왔었는데, 제멋대로 책봉된 식읍이 봉국으로 개편될 리는 당연히 없었다. 결국 이 무렵부터 열후의 식읍은 실제로 봉국으로 개편되지 않고, 그저 식읍의 숫자만큼 규정된 별도 급여를 받을 뿐인 명예 칭호가 되었는데, 학자들은 이런 형태를 '허봉(虛封)'이라 표현한다.

삼국시대부터 허봉은 일반적인 책봉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촉한는 대놓고 황족조차 지배권 바깥인 의 영역으로 식읍을 설정해 왕(王)으로 책봉했다. 위와 서진은 그래도 왕의 식읍은 보통 봉국으로 개편했고 봉국에 부임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공(公) 이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실제 봉국을 두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형태는 후대 왕조들에서도 공통적인데, 건국 초기나 군웅할거 시기 같은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책봉된 제후가 봉토를 실제로 분할받거나 그 지역에 부임하는 모습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

촉한과 오는 대체로 후한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듯, 상술한 허봉 이외에 딱히 후한 제도의 원칙에서 벗어난 책봉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다. 위와 서진의 경우 오등작을 도입하는 등 제도 자체를 고친 기록들이 나오는데, 이는 아래 문단에서 상세히 서술한다.

4.1. 위(魏)· 진(晉)

품계
도입시기
서진 시대 식읍 규모
봉국 (戶)
(軍)
<colbgcolor=white,#505050> [23] 왕(王)·공(公) 기원전 8년 [24]
제1품 왕(王)
공(公)
대국왕(大國王) 277년 1군 이상 2만 이상 3군[25]
차국왕(次國王) 1군(郡) 1만 이상 2군[26]
소국왕(小國王) 5천 내외 1군[27]
군공(郡公) 265년 3천 이상
군후(郡侯) 3,000
현왕(縣王) 224년 1현(縣)
오등작 현공(縣公) 264년 75리(里) 1,800 ×
대국후(大國侯) 70리 1,600
차국후(次國侯) 65리 1,400
대국백(大國伯) 60리 1,200
차국백(次國伯) 55리 1,000
대국자(大國子) 50리 800
차국자(次國子) 45리 600
대국남(大國男) 40리 400
차국남(次國男) 35리 200
제3품 현후(縣侯) 25년 ×
제4품 향공(鄕公) 폐지 222년
향후(鄕侯) 25년
제5품 정후(亭侯)
정백(亭伯) 폐지 222년
제6품 관내후(關內侯) 진나라
명호후(名號侯) 215년
제7품 관중후(關中侯)
관외후(關外侯)
× 오대부(五大夫) [28] 진나라
이민작(吏民爵) 8등급

조비가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한 뒤에 이왕삼각의 예에 따라 주나라 한나라 왕조의 후예는 공으로 책봉하여 빈객으로 예우했다. 221년에 황제 조비의 아들은 군공(郡公)으로 책봉하고, 조비의 형제들은 현공(縣公)으로 책봉했는데, 이듬해에 모두 왕으로 승격시키고 봉국도 군 단위로 고쳤다. 또한 작위를 계승하지 않는 왕의 아들은 향공으로, 왕세자의 아들은 향후로, 공의 아들은 정백으로 봉하도록 정했다. 따라서 222년에 군공과 현공은 소멸되어 더이상 신규 책봉은 이뤄지진 않았는데, 221년 당시 사후 추봉되었던 일부 황족에게 222년 이후 사후양자가 입적하면서 해당 작위가 다시 부활하는 특이한 사례가 남기는 했다. 224년에 왕의 봉국을 일괄적으로 현으로 축소했으나, 232년부터 다시 군 단위의 봉국이 수여하기도 했다. 232년 이후 황자들은 유년기에 명목상 현왕(縣王)으로 책봉되었다가 장성하면 정식으로 군왕(郡王)이 되었다. 정확한 시점을 확인할 수 없으나, 이민족 수장을 대상으로 작위와 별개로 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의 관직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264년에 사마소 오등작을 도입하여, 왕 아래로 현공·대국후·차국후·대국백·차국백·대국자·차국자·대국남·차국남 등이 제정되었고, 이 오등작 이상에 책봉된 경우에만 실제 봉국을 수여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대국·차국 등의 표기는 단순히 등급을 구분하기 위한 표현일 뿐, 실제 호칭할 때는 사용되지 않았다. 오등작 후와 기존 열후의 현후를 구분할 때, 오등작 후는 '○○후'로 표기하고 열후는 '현'을 명기하여 '○○현후'로 표기했다.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서진을 건국한 뒤인 265년에 현왕 위에 군공·군후를 제정하고, 향공·정백을 폐지했다. 277년에 군왕을 대국왕·차국왕·소국왕 3등급으로 구분했다. 서진은 황족들에겐 오등작 후 이상을 수여했고 공신들에겐 군공 이하를 수여했다. 왕의 봉국만 그 행정구역이 '국(國)'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외에는 이왕삼각의 예우를 받거나 개국공신으로 인정된 경우가 아니라면 행정구역을 봉국으로 개편하지 않고 단지 행정구역 장관의 직함만 바꿨다. 동진 때에는 기존의 오등작 위에 새로 ' 개국작(開國爵)'이란 개념을 만들어내어 '개국(開國)' 두 글자가 덧붙은 작위를 받는 경우에만 봉국을 설치했다. 기존의 오등작은 개국작 아래의 서열로 여겨져, 개국작-오등작-열후 이하 순으로 온갖 제후 칭호가 난립하는 난장판이 되었다.

4.2. 남조(南朝)

구분
작위
<colbgcolor=white,#505050> 구석 <colbgcolor=white,#505050> 왕(王)·공(公) 무품(無品)
[29]
무품
왕작 왕(王) 제1품
현왕(縣王) 폐지
개국작 군개국공(郡開國公) 제1품 제2품
현개국공(縣開國公)
현개국후(縣開國侯) 제2품 제3품
현개국백(縣開國伯) 제4품
현개국자(縣開國子) 제5품
현개국남(縣開國男) 제6품
오등작 현오등후(縣五等侯) 폐지
현오등백(縣五等伯)
현오등자(縣五等子)
현오등남(縣五等男)
열후
이하
현후(縣侯) 제3품 제7품
향후(鄕侯) 제4품 제8품
정후(亭侯) 제5품
관내후(關內侯) 제6품 폐지
명호후(名號侯)
관중후(關中侯) 제7품 제9품
관외후(關外侯)
이민작(吏民爵) 8등급
관제를 기록할 때는 보통 '개국군공(開國郡公)'·'오등현후(五等縣侯)' 등으로 표기했지만, 실제 수여하는 봉호는 위의 표와 같이 '○○군개국공'·'○○현오등후' 형태였다.

사마소의 사례를 따라, 육조시대 내내 찬탈자가 구석의 특전을 받아 공(公) 칭호를 받고 10군(郡)에 책봉되었다가, 왕(王)으로 승작하여 10군을 추가로 받는 일은 여전히 반복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찬탈자가 공(公) 칭호를 받으면 최고 작위인 왕(군왕)보다 위의 서열로 규정되었다.

송(宋)나라 동진의 제도를 대체로 이어받았으나, 제후의 봉국을 설치하는 관례를 완전히 폐기했다. 따라서 개국작은 그 식읍의 숫자만큼 규정된 별도 급여를 받을 뿐인 오등작 위의 서열이란 의미만 남게 되었다. 또한 이왕삼각의 예에 따른 예우를 받는 옛 왕조의 후예들도 이전처럼 별도의 격으로 두지 않고 법제화된 작위로 책봉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양(梁)나라 때는 현왕을 폐지하여 왕작이 군왕으로 통일되었고, 유명무실해진 오등작을 완전히 폐지했다. 열후(列侯)에서 기원한 현후를 탕목식후(湯沐食侯)로 고쳐 개국현후(開國縣侯)와 명시적으로 구별하였고 이를 목식후(沐食侯)로 약칭하기도 했는데, 실제로는 봉토로 설정된 탕목읍(湯沐邑)의 이름을 따와 '○○후(侯)'로 호칭한 것으로 보인다. 관내후와 명호후를 폐지했다는 명시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나, 관품이 규정되지 않고 책봉 사례도 발견되지 않는 점에 비춰볼 때 폐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비록 왕작이 군왕으로 통일되긴 하였으나 세부적으로 황족에게 수여하는 군왕은 그 세습 순서에 따라 정왕(正王)-사왕(嗣王)-번왕(蕃王) 3개 등급으로 나눴는데, 황제의 아들은 정왕으로, 정왕의 작위를 세습한 자를 사왕으로, 사왕의 작위를 세습한 자를 번왕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왕삼각의 예에 따라 군왕이 된 자는 정왕과 함께 제1품으로 취급했는데, 정왕만 관질을 시만석(視萬石)으로 규정하였으므로, 같은 제1품이라도 관질은 시중이천석(視中二千石)이 되어 차이가 발생하긴 했다. 사왕과 번왕은 제2품으로 동급이었지만, 식읍이나 의전에서 차등이 있었다.

황태자의 아들들은 개국현공(開國縣公)으로 봉해졌으며[30], 정왕을 세습하지 못하는 아들들은 개국현후에 책봉되었고, 그 이외의 종실에게는 그 항렬에 따라 탕목식후·향후·정후 등을 수여했다.

그밖에 정왕의 세자는 제3품으로, 사왕·번왕과 개국공(開國公)의 세자는 제4품으로, 개국후(開國侯)·개국백(開國伯)의 세자는 제5품으로, 개국자(開國子)·개국남(開國男)의 세자는 제6품으로 관품이 정해졌다.

4.3. 북조(北朝)

관품
<colbgcolor=white,#505050> 무품
(無品)
왕(王)[31] 왕(王)
군왕(郡王)
제1품 군개국공(郡開國公) 왕(王) 국공(國公)
종제1품 현개국공(縣開國公)
군공(郡公)
현공(縣公)
군개국공(郡開國公) 군개국공(郡開國公)
제2품 [32]
현개국후(縣開國侯)
군공(郡公)
현개국공(縣開國公)
현개국공(縣開國公)
종제2품 군후(郡侯)
현후(縣侯)
현공(縣公)
현개국후(縣開國侯)
현개국후(縣開國侯)
제3품 현개국백(縣開國伯) 현후(縣侯)
현개국백(縣開國伯)
현개국백(縣開國伯)
종제3품 군백(郡伯)
현백(縣伯)
현백(縣伯)
제4품 현개국자(縣開國子) 현개국자(縣開國子) 현개국자(縣開國子)
종제4품 현자(縣子) 현자(縣子)
제5품 현개국남(縣開國男) 현개국남(縣開國男) 현개국남(縣開國男)
종제5품 명호후(名號侯)
현남(縣男)
명호후(名號侯)
향개국남(鄕開國男)
현남(縣男)
향개국남(鄕開國男)
× 향남(鄕男) 향남(鄕男)
이민작(吏民爵) 8등급
관제를 기록할 때는 보통 '개국군공(開國郡公)'·'산후(散侯)'' 등으로 표기했지만, 실제 수여하는 봉호는 위의 표와 같이 '○○군개국공'·'○○현후' 형태였다. 북주에서 국왕(國王) 작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북조의 왕은 명목상 군(郡)이 식읍으로 설정되는 군왕(郡王)이었으며, 특수한 사정으로 봉토가 축소되어 현왕(縣王)이 출현한 사례가 일부 있었다.

북위에서는 도무제 황시(皇始) 원년(396)에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순의 오등작이 도입되었다가, 천사(天賜) 원년(404)에 왕(王)을 도입하고 백과 남을 폐지하였다. 이에 따라 왕은 대군(大郡)을 봉토로 하는 제1품으로, 공은 소군(小郡)을 봉토로 하는 제2품으로, 후는 대현(大縣)을 봉토로 하는 제3품으로, 자는 소현(小縣)을 봉토로 하는 제4품으로 규정되었는데, 모두 이름뿐인 허봉(虛封)이었다.

효문제 태화 16년(492)에 다시 작위 제도를 개편하면서 오등작 작위의 칭호 순으로 작위 계급이 새롭게 규정되어, 공 이하는 각 계급 내에서 우선 '개국(開國)' 두 글자가 붙는 개국작과 그렇지 않은 산작(散爵)으로 나뉘고, 다시 봉토 등급에 따라 군(郡)-현(縣)-향(鄕) 순의 서열이 구분되었다. 남조 왕조들의 경우처럼 개국작에만 식읍을 수여했는데, 산작을 받는 경우가 보통 아래 단계의 개국작에서 승작하는 경우였으므로, 개국작 등급까지 승진해야 식읍이 추가되는 개념인 것이다. 원칙적으로 열후 이하의 작위는 도입하지 않았으나, 화북지역의 기존 관례 때문인지 명호후(名號侯)와 이민작(吏民爵) 8등급은 어찌 살아남아 수여하는 사례가 발견된다.

북제에서는 관품 서열이 조정된 것 외엔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는데, 군왕의 등급에 관한 부분이 북위와 달랐다. 북위에서는 군왕이 황제의 아들인 친왕(親王)과 친왕에서 세습되는 번왕(蕃王)으로 구별되었는데, 번왕은 또 세습된 횟수에 따라 시번왕(始蕃王)·이번왕(二蕃王)·삼번왕(三蕃王)으로 구분되어, 모두 규정된 식읍에 차등이 주어졌다. 반면 북제는 황제의 아들이 친왕인 것은 같았으나 친왕을 세습하는 종실은 그냥 사왕(嗣王)으로만 구별했고, 공신들에게도 군왕을 수여하기도 해서 그 경우에는 서성왕(庶姓王)으로 구분해, 제각기 의전에 차등을 두었다.

북주에서는 정확한 시점은 알려지지 않으나, 산작과 명호후가 완전히 폐기되어 작위가 개국작으로 단일화되었다.적폐청산 개국 초기에는 황제가 아닌 천왕 칭호를 사용하면서, 왕작을 대신하는 개념으로 효민제 원년(557)에 옛 나라의 국호를 봉호로 삼는 국공(國公) 작위를 도입했다. 황족들을 포함하여 실질적으로 북주를 구성하는 유력자들인 무천진 출신 팔위주국대장군(八位柱國大將軍, 소위 '팔주국')이 국공으로 책봉되었다. 이후 북주에선 559년부터 황제 칭호를 다시 사용하다가, 무제 건덕(建德) 3년(574)에 왕작을 부활시키면서 국공으로 책봉된 황족들을 '국왕(國王)'으로 승격시키고, 방계 황족은 ' 군왕(郡王)'으로 책봉하기로 법제화했다. 국왕은 어디까지나 군왕과 구분하기 위해 쓰인 표현일 뿐 실제 봉호에는 '국'자를 표기하지 않았으나, 국공의 경우 개국작과 별개의 작위임을 강조하기 위해 '국'자를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후 북주를 계승한 수나라가 통일을 달성하여 남북조시대의 혼란기를 끝내면서, 이후의 중원 왕조들에선 북주의 작위 제도가 통용되었고 주변 국가의 제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중세 한자문화권 국가들에서 개국(開國)이란 표현이 붙는 '개국작'이 사용된 것은 바로 앞서 살펴본 위진남북조시대 난잡한 제도들의 유산인 셈이다.

5. 수(隋) ~ 금(金)

작위
<colbgcolor=white,#505050> 왕(王) 정1품 정1품·종1품 무품(無品)
군왕(郡王) 종1품 종1품 정1품
종1품
국공(國公)
군개국공(郡開國公) 정2품 정2품
종2품
현개국공(縣開國公) 종2품 ×
군개국후(郡開國侯) × 정3품 정3품
종3품
현개국후(縣開國侯) 정2품 종3품 ×
군개국백(郡開國伯) × 정4품
종4품
현개국백(縣開國伯) 정3품 정4품
군개국자(郡開國子) × 정5품
현개국자(縣開國子) 정4품 정5품
군개국남(郡開國男) × 종5품
현개국남(縣開國男) 정5품 종5품
고작(古爵) 관례상 수여 ×
관제를 기록할 때는 보통 '군공(郡公)'·'현후(縣侯)' 등으로 표기했지만, 실제 수여하는 봉호는 위의 표와 같이 '○○군개국공'·'○○현개국후' 형태였다.

북주 때부터 관제상 정1품 왕은 국왕(國王)으로 불렸는데, 실제로 봉호에는 '국'자를 생략해서 표기했다. 한편 남북조시대부터 조공책봉관계에 따른 국제질서가 형성되면서 외국의 군주에게 국내의 작위를 별도로 책봉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나라 중엽 때부터 외국의 군주에게 국내의 작위를 수여하는 일은 사라졌고 국왕을 그대로 책봉하는 관례가 정착하여, 외국의 군주를 책봉할 때만 '국왕'임을 명시했다. 그리고 송나라 때까지 관례상 나라의 경사 때 이민작을 수여하기는 했으나, 이미 고작(古爵)으로 부를만큼 쇠퇴한 상황이라 별 의미는 없었다.

원래 후한 시절에는 본래 공적을 세우면 식읍을 받아서 식읍이 일정 규모에 이르면 그에 따라 봉호가 승격되는 개념이었으나, 남북조시대부터 점차 식읍을 수여하기 위해 작위를 승격시키는 개념으로 바뀌어나갔고, 당나라 무렵부터는 산계에 따라 작위를 수여하면서 그에 따른 식읍을 받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고위직에 오르면 별다른 공적이 없이도 작위와 식읍을 받게 되는 부작용이 나타났고, 고위 작위와 식읍이 남발되어 그것이 그대로 세습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때문에 당나라 중엽부터 점차 세습을 제한하기 시작했으며, 송나라 때에는 아예 일부 작위만 특별히 세습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바뀌기도 했다.

또한 실제 공적을 세우는 신하들을 포상하기 위해 공신 칭호를 도입하고, 공신 칭호를 받는 신하에게 식읍 중 일부를 식실봉(食實封)으로 수여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식실봉을 지급받은 사람은 수여한 호(戶)에서 조용조(租庸調)를 직접 수취할 수 있었다. 전한 이전의 식읍처럼 독자적인 통치권이 부여된 수준은 아니었으나, 정해진 한도 내에서 부역까지 징발하는 권한이 주어진 것이므로 급여화된 식읍보다는 훨씬 가치가 높은 특전이었다. 그러나 공신 칭호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실제 공적과는 무관하게 남발되어 버렸다.

수나라 때부터 정1품 국왕 작위는 황자가 책봉된 경우인 친왕(親王)과 친왕의 작위를 세습한 경우인 사왕(嗣王) 등급으로 구분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당시까지는 품계나 식읍에서 차등을 두진 않은 것으로 보이나, 사왕은 왕부(王府)의 관속을 일부 둘 수 없는 등의 차이가 있었다. 607년에 수양제가 관제를 개편하면서 기존의 왕작·국공· 개국작을 모두 폐지하고 왕(王)·공(公)·후(侯) 3종만 남겼다.

당나라에서는 다시 북주의 작위 제도를 시행했는데, 수나라 때처럼 국왕을 친왕과 사왕 등급으로 구분했으나 사왕은 종1품으로 낮춰졌으며, 황태자의 아들은 군왕(郡王)으로 책봉했다. 사왕과 군왕은 원칙적으로 세습할 수 없고 그 적장자부터 국공(國公) 작위를 세습했으며, 그 외의 방계 황족들은 개국작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실제로는 황제의 특은(特恩) 따위를 구실로 사왕의 세습을 허용하거나 방계 황족을 군왕으로 책봉하기도 했으며, 종종 이성(異姓) 신하를 국공이나 군왕으로 책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작위에 책봉될 때 수여받는 식읍은 친왕이 10,000호(戶), 사왕·군왕이 5,000호, 국공이 3,000호, 군공(郡公)이 2,000호, 현공(縣公)이 1,500호, 현후(縣侯)가 1,000호, 현백(縣伯)이 700호, 현자(縣子)가 500호, 현남(縣男)이 300호였으며 이후 공과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또한 당나라 말엽에는 현공 작위가 사라졌으며, 이성왕이 국왕 작위까지 승작하거나 멋대로 작위를 세습하고, 본래 제도로 규정된 바 없는 개국작인 군후(郡侯)·군백(郡伯)·군자(郡子)·군남(郡男) 등이 출현하기도 했다.

송나라는 당나라의 제도를 이었으나 왕작의 일반적인 수여 범위가 외척으로 확대되었고, 작위의 세습을 원칙적으로 폐지했다.[33] 또한 현공·현후 대신 군후를 제정했고, 식읍은 국왕이 5,000호, 군왕·국공이 3,000호, 군후가 1,000호로 조정되었다. 식실봉(食實封)은 군후 이상만 받을 수 있도록 제한했으나, 이종 때부터는 식실봉 특권마저 폐지하고 식읍처럼 별도 급여로 지급하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황제가 특별히 개국작 형식에서 벗어난 작위를 추증한 사례도 있다.

요나라· 금나라의 왕작은 '국왕'이 명시되는 왕과 그렇지 않은 일반 왕 그리고 군왕 순으로 구분되었고, 다시 '국왕'은 가장 높은 서열인 두 개의 국호가 병기되는 왕과 그 아래의 1국의 국호만 쓰는 왕으로 구분되어, ○○국왕-○국왕-○왕-군왕 순으로 서열이 나뉘었다. 대표적으로 완안종간의 본래 작위는 양송국왕(梁宋國王)이었고, 소효목(蕭孝穆)의 작위는 제국왕(齊國王)이었으며, 소배압의 작위는 빈왕(豳王)이었다. 식읍은 국왕 이상은 10,000호, 일반 왕은 5,000호, 군왕·국공이 3,000호였고, 군공 이하는 당나라 때와 동일했다. 또한 봉호로 사용되는 국호에 따라 대국(大國)-차국(次國)-소국(小國) 3등급으로 서열이 지정되기도 했는데, 시기별로 변화가 있어서 일정하게 유지되지는 않았다. 1157년 해릉왕 때 국왕 등급이 폐지되면서 일반 왕으로 단일화되었고, 식읍도 왕은 10,000호, 군왕은 5,000호, 국공은 3,000호로 조정되었으나, 봉호에 따라 서열이 지정되는 점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6. 원(元)

원나라의 작위는 8종류로 개국작 형식이 완전히 폐지되었다.
왕작과 공작은 봉호가 국호(國號)인지 군(郡)급 지명인지에 따라 별개의 작위로 구분되었다. 따라서 군왕과 국공은 봉호에 그 지위를 명기하여 구분했다. 그 외 후·백은 군급 지명을, 자·남은 현(縣)급 지명을 봉호로 받았다. 군공 이하는 행정구역 단위를 생략하여 표기하기도 했다. 정1품 국왕 가운데 최고 등급인 금인수뉴 인장을 받는 경우에는 보통 국호가 1글자로 정해졌다.[34] 충선왕의 작위 중 하나였던 심양왕의 인장이 금인수뉴로 격상되자 ' 심왕'으로 개칭된 것이 그 예.

이전의 왕조들처럼 고려왕을 포함한 외국의 군주들은 '국왕'임을 명기했고, 모두 금인수뉴를 수여했다.[35]

7. 명(明)

황족과 이성(異姓) 신하에게 수여하는 작위가 각각 달랐고 황족만 왕(王)으로 책봉되었는데, 왕·공·후·백에는 모두 품계가 설정되지 않았다.
이전 왕조에서 국왕은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왔지만, 명나라에서는 친왕으로 단일화되었고 군왕도 별개의 작위로는 쓰이지 않게 되어 단순히 등급을 구분하기 위한 표현에 불과했으며 봉호에도 표기하지 않았다. 친왕은 이전의 국왕처럼 옛 나라의 국호를 봉호로 따왔기에 봉호가 1글자가 되었고, 군왕은 옛 군(郡)의 지명을 봉호로 따왔으므로 봉호가 2글자가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구분되었다. 군왕을 세습하지 못하는 황족들은 그 항렬에 따라 산계를 1품(2품계)씩 낮춰 초수(初授)하여 장군·중위 작위를 받았다. 황태자를 포함하여 모든 작위는 10세 때 책봉되는데, 친왕이나 군왕이 나이가 50살이 넘었음에도 적자가 없을 경우에는 서장자가 대신 세자나 장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이성인 외척·공신은 건국 초기에는 기존 원나라의 제도에 따라 군공(郡公)-군후(郡侯)-군백(郡伯)-현자(縣子)-현남(縣男) 5종류의 작위를 받았으나, 1370년에 공-후-백 3종류로 고쳤다. 공은 공자의 후손들이 세습하는 연성공(衍聖公)을 제외하면 봉호를 국호(國號)로 받아 '○국공' 형태로 수여했다. 후는 군(郡)급 지명을 봉호로 받아 '○○후'로, 백은 현(縣)급 지명을 봉호로 받아 '○○백'으로 쓰였다. 공신의 작위는 정식 후계자들에게 세습되었으나, 황실의 외척 자격으로 책봉된 작위는 세습할 수 없었다. 몇몇 공신은 왕작이 추봉되었으나, 그 후계자는 생전의 작위만 세습할 수 있었다. 다른 왕조와 달리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졌기에, 명나라가 망한 뒤에야 남명에서 유력 군벌을 대상으로 이성 왕작이 책봉된다.

8. 청(淸)

종실 황족의 작위는 입팔분공(入八分公)과 그에 포함되지 않는 불입팔분(不入八分)으로 나뉜다.

후금(後金) 시기에 '호쇼이(和碩) 버이러(貝勒)'는 기주(旗主) 신분으로 명나라의 왕(王)과 비견되는 칭호였으며, 8인 가운데 상위 4인은 '암바(大) 버이러'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선포하며 황제를 칭한 시점에 기존의 호쇼이 버이러가 호쇼이 친왕 및 도로이 기윤왕으로 개편되었고, 그보다 낮은 지위로 도로이 버이러 및 구사이 버이서가 신설되었다. 친왕 및 기윤왕에게는 각자 고유의 봉호를 수여했는데, 관념상의 한자 미칭인 존호로 지정되었으며, 입관(入關) 이전에는 대개 2글자로 작명했으나 그 이후로는 대체로 1글자 존호를 사용했다. 버이러에게 봉호가 지정된 경우는 보통 지명으로 정했으나, 한자 두 글자로 구성된 존호로 짓기도 했다.

1644년 이후 1등 장군이나 봉은장군 가운데 운기위(투와사라 하판)를 겸임시켜 다른 1등과 차등을 두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작위는 '세작(世爵)'으로 통칭되었지만, 원래 아버지보다 몇 단계 낮춘 작위를 받은 뒤에 본인의 공과에 따라 승강되는 개념이었다. 황족이라서 은봉(恩封)을 통해 입팔분공 작위를 받더라도 공적을 세우지 못하면 강등되었으며, 공적을 세워서 작위를 유지하거나 승진하더라도 아들 중 한 명에 한해 최종 작위에서 한 계급 낮추는 습봉(襲封)만 인정했다. 공적이 특출한 경우에 특정한 세대 수를 정하여 작위를 유지하는 습작을 한정적으로 허용하기도 했으나, 일부는 세대의 제한 없이 그 작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세습하는 특권인 '세습망체(世襲罔替)'가 부여되었는데, 세습망체 혜택을 받는 왕작은 '철모자왕(鐵帽子王)'이라고 불렀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황실 문서 참조.

현군(縣君) 이상의 남편은 액부(額駙)라고 불렀는데 칭호는 아내의 작호에 따랐다. 고륜공주(固倫公主)의 남편은 고륜액부(固倫額駙), 화석공주(和碩公主)의 남편은 화석액부(和碩額駙), 군주(郡主)의 남편은 군주액부(郡主額駙), 군군(郡君)의 남편은 군군액부(郡君額駙), 현주(縣主)의 남편은 현주액부(縣主額駙), 현군의 남편은 현군액부(縣君額駙)라고 부른 것이다. 청나라의 외명부 제도는 해당 문서 참조.

이번원(理藩院)에서 관장하는 '외번(外藩)'에도 입팔분공과 유사한 작위를 수여했다. 호쇼이 친왕 위로 칸(汗), 보국공 아래로 1~4등 타이지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동일하다. 또한 외번에서 사용되는 직위 가운데 '자사그(扎薩克)'는 기장(旗長)을 의미한다.
만주어 발음
한자 표기
몽골어 발음
호쇼이 ○친왕
(○친왕)
和碩○親王
(○親王)
호쇼이 ○ 친왕
(○ 친왕)
도로이 ○기윤왕
(○기윤왕)
多羅○郡王
(○郡王)
도로이 ○ 기윤왕
(○ 기윤왕)
도로이 버이러
(버이러)
多羅貝勒
(貝勒)
도로이 베이레
(베이레)
구사이 버이서
(버이서)
固山貝子
(貝子)
코슈니 베이스
(베이스)
커시 버 투와캬라 구룬 버 다리러 궁
(구룬 버 다리러 궁)
奉恩鎭國公
(鎭國公)
히시기흐 사히흐 울삿 투시예 공
(투시예 공)
커시 버 투와캬라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구룬 더 아이시라라 궁)
奉恩輔國公
(輔國公)
히시기흐 사히흐 울삿 투살락치 공
(투살락치 공)
타이지 台吉 (호히) 타이지

또한 순치제 때까지는 투항한 한족이 왕으로 책봉되기도 했다.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 정남왕(定南王) 공유덕, 의왕(義王) 손가망(孫可望) 등이 있었으나, 모두 삼번의 난을 거치면서 철번되었다. 외번 왕작 목록은 이성왕 문서 참조.

외척과 공신에게 수여하는 작위는 본래 팔기군의 지휘관 계급에서 출발했으며, 계급의 승진은 팔기에서의 지위가 곧 사회적 지위를 의미했던 청나라의 특성상 그 자체로 명예적 포상을 의미했기에, 입관(入關) 이후로는 점차 작위로 성격이 변했다. 공신 작위는 습작을 거듭할 수록 점차 낮추는 것이 원칙이지만, 공적을 세울 경우 일정한 세대 만큼 작위를 그대로 세습하는 특례를 부여했는데, 1651년부터 몇몇 작위는 철모자왕처럼 세습망체로 지정되기도 했다. 일부 공작은 사후 도로이 기윤왕으로 추봉되었으나, 그 후손들은 생전의 작위 세습만 인정되었다.
관품
천명 5년(1620)
천총 8년(1634)
순치 원년(1644)
건륭 16년(1751)
<colbgcolor=white,#505050> 무품
(無品)
궁(公)[37] 궁(公) 공(公)
호(侯) 후(侯)
버(伯) 백(伯)
정1품 총병(總兵) 구사([ruby(固山, ruby=고산)]) 어전([ruby(額眞, ruby=액진)]) 암바([ruby(昻邦, ruby=앙방)]) 장진([ruby(章京, ruby=장경)]) 징키니([ruby(精奇尼, ruby=정기니)]) 하판([ruby(哈番, ruby=합번)]) 자(子)
정2품 부장(副將) 머이런이([ruby(梅勒, ruby=매륵)]) 어전 머이런이([ruby(梅勒, ruby=매륵)]) 장진 아산이([ruby(阿思哈尼, ruby=아사합니)]) 하판 남(男)
정3품 참장(參將) 자란([ruby(甲喇, ruby=갑라)]) 어전[38] 자란이([ruby(甲喇, ruby=갑라)]) 장진 아다하([ruby(阿達哈, ruby=아달합)]) 하판 경거도위(輕車都尉)
유격(游擊)
정4품 비어(備御) 니루([ruby(牛錄, ruby=우록)]) 어전 니루([ruby(牛錄, ruby=우록)]) 장진 바이타라부러([ruby(拜他喇布勒, ruby=배타라포륵)]) 하판 기도위(騎都尉)
정5품 투와사라([ruby(拖沙喇, ruby=타사라)]) 하판 운기위(雲騎尉)
정7품 암바는 '[ruby(按班, ruby=안반)]', 머이런(이)는 '[ruby(美凌, ruby=미릉)]', 자란(이)는 '[ruby(扎蘭, ruby=찰란)]'으로도 표기된다. 은기위(恩騎尉)
만주어 어휘의 쓰임이 바뀌면서 지휘관을 의미하던 '어전'이 1634년에 장군(將軍)의 중국어 발음에 해당되는 '장진'으로 바뀌었고, 1647년에 관원(官員)을 의미하는 만주어인 '하판'으로 바뀌었다. 1736년에 건륭제가 만주어 음차 표기를 폐지하고 한문식 표기로 고정했으나 만주어 발음은 종전대로 유지되었다. 참고로 은기위의 만주어 발음은 '커싱거 하판'이다.

3품 이상은 같은 작위 내에서 서열을 세분화하고 급여에 차등을 두고자 등급을 3등으로 구분했으며, 4품 이하는 등급이 없다. 등급 표기는 등수를 먼저 표기하고 작위를 그 다음에 표기했으며, 특별히 봉호가 지정된 경우에는 등급과 작위 사이에 표기했는데, 예를 들어 "2등(二等) 과의공(果毅公)"처럼 표기된다. 1644년 이후로 1등 작위 또는 기도위를 받은 사람에게 운기위(투와사라 하판)를 겸임시켜 다른 1등과 차등을 두기도 했다. 운기위를 겸할 경우에는 작위 표기 뒤에 겸(兼)·우(又)·재(再) 등의 접속사와 함께 "어무 투와사라 하판" 또는 "1 운기위(一雲騎尉)"를 붙인다.

만주어 명칭의 한문식 표기로는 어전과 장진 시절에는 총병~비어로 옮겨졌으나, '하판'은 원래 등급에 따라 관품과 표기가 조금 달랐다. 하판을 한문식 표기로 옮기는 것이 이처럼 복잡한 만큼 건륭제의 한문식 표기가 정해진 뒤로는 하판은 건륭제 이전 시점이더라도 자~은기위로 옮기는 편이다.


[1] 고려에서 원 간섭기에 천자국의 제도로 여겨진 오등작을 대체하고자, 제후국의 격에 맞는 작위 제도로 봉군제를 제정한 것은, 여기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2] 나라에 따라서는 태(太)·장(長)·원(元) 등의 표현을 더하여 등급을 한층 더 세분화 한 사례도 있다. [3] 삼공(三公)으로 칭해진 최고 관직을 역임하면 천자에게 스승의 예우를 받았고, 송나라의 군주가 상나라의 후예 자격으로 천자에게 빈객의 예우를 받았기에, 이런 경우에 공(公)으로 높여 존칭했다. 송나라의 군주는 무조건 송공(宋公)으로 호칭하지 않았고, 높여 부를 필요가 없을 때는 그냥 송후(宋侯)라고 불렀다. [4] 당시 진나라가 세운 공적을 표창하는 의미로, 주 왕실 직할 신하들 중에서 특별히 왕실의 분가 격으로 예우한다는 의미의 특전이라 추정된다. 변방의 이민족 취급 받기 쉬운 입지 조건이었던 진나라가, 이 일로 방백의 지위를 누리면서 춘추시대부터 주요국 행세를 할 수 있던 가장 큰 배경이 되었다. [5] 어디까지나 왕을 임의로 격하시켜 부른 경우이기에 비하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춘추시대까지 왕(王)은 천자의 전용 칭호였고, 공(公)은 천자가 다른 사람을 특별히 높여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이었으며, 후(侯)는 천자에게 책봉을 받아야 하는 특수 칭호였다. 백(伯) 또한 천자나 제후의 종실이 사용하는 전용 칭호였으니, 초나라 왕을 자(子)로 호칭한 것이 사실 주나라 세계관에선 의도적으로 아주 낮춰 부른 경우는 아니긴(...) 하다. [6] 갑골문에는 '전(田)'이란 칭호도 발견되는데, 이를 남(男)을 간략히 표기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남(男)보다 낮은 등급의 칭호로 해석하기도 한다. [7] 역사 기록상에는 춘평군으로 기록되었으나 발견되는 청동제 무기 유물에는 춘평후(春平侯)로 명시된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유학자들이 제후가 후(侯)를 책봉하는 것을 부정시하여 일부러 군(君)으로 폄하해 기록하기도 했던 것 같다. [8] 진나라의 군현제 상에서 현(縣)은 기존 진나라 귀족들이 소유하던 식읍들 위에 설치된 행정구역이었기에, 열후의 봉국에 어느 정도 독자성이 인정되어도 현의 행정력과 사법권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양립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전한 때는 군국제의 여파로 열후나 공주의 봉국이 현의 통제를 넘어서는 수준의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했기에, 봉국은 현에서 독립된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인식되었다. 오초7국의 난을 거치고 추은령(推恩令)이 시행되면서, 봉국은 명목상으로만 열후나 공주의 통치를 받고 실질적으로는 황제가 임명한 지방관들이 통치하는 행정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열후나 공주를 새로 책봉하면 기존의 현에서 봉국을 독립시키는 관례는 그대로 남게 되었는데, 이는 후한에서 열후를 3단계로 구분하는 원인이 된다. [9] 당시에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농한기엔 향(鄕)에 거주하다가 농번기에는 그 해에 경작 가능한 전(田)에 배치되어 전 인근에 있는 거주구역인 리(里)에서 생활하였고,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평민이나 관리들은 다른 일가족이나 노예를 대신 보낼 수 있었다. 해마다 배치되는 전·리는 달랐기에, 주기적인 이동도 잦았다. 사유지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농법의 한계상 휴경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드넓은 경작지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면, 매년 경작 가능한 농경지와 그 인근에 있는 주거지를 더 많이 지급받는 혜택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 이십등작제에서 법품은 호(戶)에 수여하는 개념이었고, 법품으로 형벌을 대신할 경우에는 범법자의 소속 호의 법품에 구애되지는 않았다. 즉, 생판 남의 형벌을 면제해주기 위해 법품을 깎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살고 있는 현(縣)이 다를 경우는 혈족 같은 경우에 한정해서 예외적으로 인정되었고, 군(郡)을 초월하는 경우에는 사실상 인정되지 않았다. [11] 전한 중기 무렵부터 이런 공유지들은 군현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실상 향촌 사회의 유력자로 등장한 호족들이 통제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12] 장가산한간의 〈이년율령(二年律令)〉에서 파악된 공유지 배분 규정으로, 해당 수치 만큼 경작지와 주거지를 각각 지급했다. 지급 단위는 경작지의 경우 경(頃), 주거지의 경우 택(宅)이다. [13] 진나라 때 작성된 간독에서 실제 쓰인 단어로, 문자 그대로 작위가 없는 사람을 지칭한다. 달리 졸오(卒伍)라고 표현한 용례도 있다. 법품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경졸(更卒)로 지칭하여, 형벌로 인한 강등으로 보유하는 작위가 없게 된 사람인 사오(士伍)나 서인(庶人)과 구별하기도 했다. [14] 진나라 때 칠대부(七大夫)로도 쓰인 용례가 있다. 지급되는 경작지와 주거지의 수량과 연관이 있는 듯. [15] 《상군서(商君書)》에선 10등급은 객경(客卿), 11등급은 정경(正卿), 12등급은 좌서장, 13등급은 우서장, 14등급은 좌경, 15등급은 우경, 16등급은 소량조(少良造), 17등급은 대량조로 차이가 있다. 아마도 상앙이 최초로 이십등작을 도입한 당시에는 이렇게 쓰였다가 후에 개편된 것으로 추정된다. [16] '서장'(庶長)이 붙는 직위는 진나라 초기부터 상당한 고위직이었고, 전권을 휘두를 만큼의 권력이 주어지는 일도 흔했다. 그 흔적이 당대 최고위직이었던 '대서장'이 법품 중 최고위인 18등급의 명칭으로 규정된 것으로도 남아있다. 진목공 시절의 명신이었던 건숙 백리해의 직위가 각각 좌서장과 우서장이었고, 이는 흔히 후대의 좌승상과 우승상으로 치환되고 있다. 전국시대 불세출의 명장 백기가 처음 제수받은 직위이기도 하다. [17] 진나라 때 대량조로 불렀다가, 한나라 때 대상조로 바뀌었다. 대량조는 고대 진나라의 최고위직이었으며, 진군 총사령관의 직위였다. 하서를 평정한 공로로 상앙이, 그리고 그 유명한 백기가 이궐 전투에서 한·위 연합군 24만명을 몰살시키고 제수받았다. 대량조의 직위가 상국(상방)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대서장 직위가 상국이 되었다는 기록도 있어 불분명하다. 아마도 진나라 때에도 상방은 적당한 왕족이 맡는 사실상 명예직이었고 그런 상방을 보좌하는 승상이 왕이 직접 등용한 인재로 실질적인 최고 관직이었던 경우가 잦았기에, 이런 혼선이 발생한 듯하다. [18] 상앙의 변법 이전까지는 진나라의 최고위직이었다. [19] 진나라 때 내후로 규정되었다가, 통일 이후 윤후로 고쳤으며, 한나라 때 관내후로 바뀌었다. [20] 전한 초기까지 '徹'자는 '通'자로도 쓰였기에, 마찬가지로 통후(通侯)로 쓰인 용례도 있다. 진나라 때 작성된 간독 중에 통일 이후 철후를 고쳐 열후로 부르게 한 명령이 발견되는데, 전한 초기에도 철후라는 표현이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아 확실하게 지켜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한무제가 즉위하면서 피휘로 인해 열후로 명칭이 일원화되었다. [21] 주거지 한정. 경작지에 관한 규정은 발견되지 않았다. [22] 현재 쓰이는 표현대로 바꾸자면 '○○侯'라는 명칭이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손호가 귀명후(歸命侯)로 책봉된 것이다. [23] 이 신분은 이왕삼각의 특전에 따라 황제의 신하가 아닌 빈객의 지위로 설정되어 있거나, 조조 사마소처럼 구석의 특전을 받은 찬탈 예정인경우이다. [24] 이왕삼각에 따른 경우, 명목상 1군(郡) 또는 1현(縣)을 봉토로 설정했을 뿐 실제로는 탕목읍(湯沐邑)만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진류왕은 진류군(陳留郡)을 봉토로 받은 것이기에, 진류군이 진류국(陳留國)으로 개편되었지만, 정작 진류왕은 그 봉국 밖인 업성(鄴城)에 거주했다. 산양공도 산양현(山陽縣)을 봉국으로 하여 식읍 1만호를 받았으나, 현치(縣治) 밖에 별도로 탕목읍이 마련되어 그곳에 거주했다. 산양공의 탕목읍인 탁록성(濁鹿城)은 지금도 유적으로 남아있다. 구석의 특전을 받아 공의 존칭을 받게 된 경우는 좀 달랐는데, 조조는 위공(魏公)이 되었을 때 10군을 봉토로 받았고, 사마소는 그 전례에 따라 진공(晉公)으로 책봉되었을 때 10군을 받은 뒤 진왕(晉王)으로 승작했을 때 추가로 10군을 더 받았다. [25] 병력 약 5천명. [26] 병력 약 3천명. [27] 병력 1,100명. [28] 구품관인법의 제정으로 용도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관품 자체가 관작(官爵)을 대신하는 개념이기 때문. [29] 품계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백관 위의 최고 서열을 표현하는 의미로, 우리나라에서는 관례적으로 '무품'으로 부른다. 무품이라는 표현은 관직에 관품이 따로 지정되지 않은 경우나 관품 자체가 없는 일반 서민(庶民)과 혼동될 우려가 있기에, 다른 한자문화권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보통 '초품(超品)'으로 쓰는데, 초품의 경우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유한 산계보다 높은 관직에 임명된 경우를 가리키는 표현이라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 [30] 황태자가 황제에 오르지 못한 경우, 그 적장자는 군왕으로 책봉되었다. [31] 보통 군(郡)이 봉토로 설정되었음으로 군왕(郡王)으로 분류되긴 하지만, 북조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현왕(縣王)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왕(國王)' 작위가 생겨난 북주 이외에는 봉호에도 군왕임을 따로 표기하지는 않았다. [32] 개국현후(開國縣侯) 위로 개국군후(開國郡侯)를 수여한 적이 있으나 선무제 경명(景明) 원년(500)에 폐지되었다. [33] 후주의 후손인 숭의공(崇義公), 공자의 후손인 문선공(文宣公)→연성공(衍聖公), 조광윤의 후손인 안정군왕(安定郡王), 조윤양의 후손인 복왕(濮王), 조자칭의 후손인 수왕(秀王), 조희로의 후손인 영왕(榮王), 조여예의 후손인 기왕(沂王) 등에 예외적으로 습작이 허용되었다. 참고로 복왕·수왕·영왕·기왕 등을 4사왕(四嗣王)이라 통칭한다. [34] 흔히 '일자왕(一字王)'으로 불리며 '이자왕(二字王)'보다 높은 서열이란 통념은 사실 이와 같은 원나라만의 제도일 뿐, 다른 왕조들에선 그렇지 않았다. 요나라· 금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작호(爵號)에 2개의 국호가 병기된 국왕이 최고 서열이었다. [35] 원사》제왕표에는 심왕이 39번으로 고려왕이 41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서열 순서로 간주하여 고려왕이 심왕보다 아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39번까지는 봉토가 원나라 직할령에 위치한 왕들의 목록이고, 40번은 《원사》 편찬자들이 봉호를 확인하지 못한 왕위였으며, 고려왕 이후로 기록된 왕들은 모두 외국의 군주이다. 즉, 40번 이후로는 서열 순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고려왕과 심왕을 겸작한 충선왕은 고려왕을 우선하여 '고려심왕'으로 불렸다. [36] 버이러의 '러' 발음은 정확하겐 'ㄹ(r)' 발음이 아니라 'ᄙ( l)' 발음이다. 이 때문에 종종 '버이ᄙᅥ'를 대신하는 표기로 '버일러'로 옮기는 경우가 있다. [37] 초품공(超品公) 슈무루 양구리를 시작으로 1~3등 공이 봉작되었다. 이 가운데 초품공은 버이러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 슈무루 양구리는 사후 도로이 기윤왕(군왕)으로 추봉되었고, 차남인 타찬(塔瞻)이 초품공 작위를 세습했으나 이후 1등 공으로 강등되었으며, 그 자손들은 세습망체가 적용되어 1등 영성공(英誠公)을 세습했다. [38] 1~2등은 한문식 표기가 '1~2등 참장'으로 3등은 '유격'으로 옮겨지게 된다. 자란이 장진으로 바뀐 뒤에도 동일하다. [39] 1등 겸 어무 투와사라 하판인 경우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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