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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1954 · 2007 | |
리그 우승 (9회) |
1954 · 1974 · 1982 · 1988 · 1999 · 2004 · 2006 · 2010 · 2011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
시즌별 요약 | 2022 · 2023 · 2024 | |
경기장 | 1군 반테린 돔 나고야 · 2군 나고야 구장 | |
지방 홈구장 하마마츠 구장 · 토요하시 시민구장 · 나가라가와 구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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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선수 경력 | 와쿠이 히데아키/선수 경력 · 타카하시 히로토/선수 경력 · 나카지마 히로유키/선수 경력 | |
주요 인물 | 감독 이노우에 카즈키 · 선수회장 야나기 유야 · 투수 주장 오노 유다이 · 야수 주장 오오시마 요헤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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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대 주니치 드래곤즈에 재적했던 선수를 정리한 문서. 현역 선수단은 주니치 드래곤즈/선수단 항목 참고.2.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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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즈 영구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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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10 | No.15 |
핫토리 츠구히로 | 니시자와 미치오 |
-
10.
핫토리 츠구히로(服部受弘)(1939 - 1941, 1946 - 1955, 1957 - 1958)
주니치의 원년 에이스이자 1954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공헌자. 참고로 데뷔는 포수로 했다가 투수로 전향한 사례인데, 1941년 8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한(!!) 엄청난 경력을 가질 정도의 뛰어난 타격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투수 외에도 내/외야수 가리지 않고 뛰기도 했다. -
15.
니시자와 미치오(西沢道夫)(1937 - 1943, 1946, 1949 - 1958)
1954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던 강타자. 데뷔는 투수로서 했는데 어깨부상 이후 타자로 전업했다. 투수로서 20승을, 타자로서 수위타자와 40홈런을 차지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
한국 팬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그럴 만도 한게 저 두 선수가 활약한 시기가 1940~1950년대다.
3. 미스터 드래곤즈
Mr. Dragons ミスタードラゴン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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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 제2대 | 제3대 |
No.15 니시자와 미치오 | No.1 타카기 모리미치 | No.3 타츠나미 카즈요시 |
4. 출신 선수
4.1. 투수
-
스기시타 시게루 (1949 - 1960)
1954년 일본시리즈 우승 주역. 일본프로야구의 원조 포크볼 마스터이며, 주니치의 에이스 넘버를 20번으로 만든 이. -
반도 에이지 (1959 - 1969)
짧은 기간 주니치의 에이스로 활약한 뒤 예능인으로 지금까지도 왕성히 활동 중. 응원가 '불타라 드래곤즈!'를 처음 불렀다. 불타라 드래곤즈!를 부른 최초이자 유일한 OB로도 남아있다. -
미즈타니 히사노부 (1959 - 1974)
한국에서는 MBC 청룡 시절 코치를 맡았던 걸로 더 잘 알려진 인물. 주니치에선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뛰었고 한국에 오기 이전에도 주니치에서 여러 해 코치를 맡았다. -
곤도 히로시 (1961 - 1968)
선수 시절에는 주니치의 에이스이자 "곤도-곤도-비-곤도" 로 요약될 수 있는 혹사의 아이콘[1]. 은퇴 후에는 명 투수코치이자 1998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우승 감독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이때 요미우리 팬들은 엄청 이를 갈고 있는데 전반기때 에이스 노릇하면서 팀을 1위로 질주시켜놨던 조성민을 시즌아웃시킨 장본인이라서 그렇다. 그이후로 요미우리는 주니치에게도 밀려서 3위로 추락했다. -
돈 뉴컴 (1962)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와 함께 다저스의 1세대 흑인 선수이자 에이스 투수로 활약한 선수로 메이저리그 사상 첫 사이 영 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위의 두 다저스 팀메이트와 하술할 래리 도비와 함께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선발된 흑인 메이저리거로 기록에 남았다. 하지만 아래의 도비처럼 전성기가 지나고 찾아온 주니치에서는 큰 활약이 없었다. 특이하게도 주니치에서는 투수보다 1루수 출장이 훨씬 더 많았다. -
오가와 겐타로(1964 - 1970)
1967년 사와무라상을 수상하는 등 에이스로 활약한 언더핸드 스로 투수이나,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되었다. -
호시노 센이치 (1969 - 1982)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열혈남아이자 1974년 요미우리 V9 저지 시의 에이스.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장이었다. -
이나바 미츠오 (1971 - 1976)
낙차 큰 커브가 주 무기였던 오른손 투수로 입단 2년차인 1972년에 20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1976년 시즌이 끝나고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3:4 트레이드를 통해 한큐로 이적했다. 은퇴 후 친정팀과 닛폰햄에서 코치를 역임했고(1998-2001) 주니치 코치 1기 시절(1986-1997)엔 선동열을 지도하기도 했다. 코치 2기 시절(2009-2012)인 2012년 시즌 도중인 8월 11일 히로시마와의 홈 경기 도중 손 마비 증세를 호소하며 쓰러져 병원에 이송됐지만 당일 밤 8시 39분에 뇌출혈로 인해 사망했다. 향년 63세. 사망 한달 전인 2012년 7월에 심장에 제세동기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던 것이 밝혀졌다. - 스즈키 타카마사 (1973 - 1989)
-
코마츠 타츠오 (1978 - 1994)
80년대 주니치의 에이스. 요미우리의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스피드건 시대의 산물'로 불린 강속구 투수였다. -
우시지마 가즈히코 (1980 - 1986)
주니치에서 준수한 마무리로 활약했으나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데려오기 위한 4:1 트레이드로 롯데로 이적한다. 은퇴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감독을 맡았다. -
카쿠 겐지 (1981 - 1996)
대만 출신 투수. 1988년 우승에 공헌한 특급 마무리 투수였으며 커리어 전반적으로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통산 106승[2]-116세이브를 달성했다. 중국어 명은 궈위안즈. 한국식 독음은 곽원치. 선수생활 도중에 일본에 귀화했으므로 일본식 독음인 카쿠 겐지로 적는다. -
야마모토 마사 (1984 - 2015)
한국프로야구의 태동기에 데뷔해 30년간 일본프로야구 무대에서 활약한 산신령 좌완투수. - 스기모토 타다시 (1985 - 1990)
-
이마나카 신지 (1989 - 2001)
'유리의 에이스'. 혹사로 인한 부상으로 커리어를 일찍 접어야 했던 비운의 투수. - 오치아이 에이지 (1992 - 2006)
-
노구치 시게키 (1993 - 2005)
1999년 리그 우승 때 19승을 거두며 리그 MVP[3]를 차지한 좌완 에이스 투수. 평균자책점 1위 시즌 2회(1998, 2001), 최다탈삼진 1회(2001)를 차지하며 주니치의 에이스 역할을 했지만 전임 에이스 이마나카처럼 혹사와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가 빠르게 지나갔다. -
선동열 (1996 - 1999)
사사키 카즈히로, 다카쓰 신고 등과 함께 당시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나고야 각도기 - 카도쿠라 켄 (1996 - 1999)
-
카와카미 겐신 (1998 - 2008, 2012 - 2015)
최고구속은 144km로 그닥 빠른 편은 아니었지만 커터볼의 대명사라 불릴정도의 뛰어난 커터볼로 에이스가 되었다. -
이상훈 (1998 - 1999)
주니치 재적 당시 등록명은 삼손 리[4] -
이와세 히토키 (1999 - 2018)
일본프로야구 유일의 400세이브, 1000경기 등판 투수. 2000년대 내내 주니치의 불펜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팀의 최전성기를 떠받든 프랜차이즈 스타 좌완 마무리 투수였다. -
나카자토 아츠시 (2000 - 2009)
2000년 주니치에 1순위로 지명됐던 우완 강속구 투수로 구로다 히로키와 후지카와 큐지에 버금가는 강속구를 자랑하던 투수로 아마추어 시절부터 초특급 유망주였지만 2002년 스프링캠프 도중 숙소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어깨를 다친걸 시작으로 팔꿈치와 허리도 맛이 가며 이후 커리어가 꼬이기 시작, 2005년 8월에 복귀해 여전히 150km가 넘는 속구를 던지며 재기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이후에도 부상과 수술, 재활을 반복한 끝에 2009년을 끝으로 방출된다. 이후 요미우리에 입단했지만 거기서도 2010년에 2경기 등판한걸 끝으로 2011년에 또다시 방출당했고 이후 은퇴를 선언했다. - 아사쿠라 겐타 (2000 - 2015)
- 카와사키 켄지로 (2001 - 2004)
-
오카모토 신야 (2001 - 2007)
오치아이 감독 시절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 이전에 등판하는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 오츠카 아키노리 (2003)
- 다카하시 아키후미 (2004 - 2015)
- 나카타 켄이치 (2005 - 2013)
-
아사오 타쿠야 (2007 - 2018)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하게 중간계투로 시즌 MVP를 차지한(2011) 강속구 우완투수였지만 혹사의 여파로 빠르게 전성기를 날린 비운의 투수.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군 감독을 맡았던 그 오치아이 맞다. 선수시절엔 90년대 주니치 중간계투진의 핵으로 활약했다. 2022시즌 1군 투수코치로 다시 주니치로 복귀했다.
4.2. 포수
- 키마타 타츠히코 (1964 - 1982)
- 나카오 타카요시 (1981 - 1988)
- 나카무라 타케시 (1985 - 2001)
- 세리자와 유지 (1987 - 1995)
- 하세베 유타카 (1987 - 1998)
-
데이브 닐슨 (2000)
호주의 야구 영웅.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8년간 주전 선수로 뛰었으며 직전 해인 99년에 .309/.400/.554 21홈런 64타점의 빼어난 성적을 내며 호주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올스타전에 출장했던 현역 메이저리거 포수였다. 하지만 고국에 대한 애착이 강해 오프시즌마다 호주 야구리그에 참가했으며, 모국에서 열릴 예정인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 출장을 위해 메이저 계약을 거부하고 일본의 주니치로 왔다. 당연히 큰 기대를 받았지만, 18경기동안 1할 8푼을 치는 부진 끝에 8월 중 방출되었다. 이후 호주에서 뛰며 2004 아테네 올림픽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특히 야구 영웅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하에 첫 전원 프로 대표팀을 꾸려 한국에 삿포로 참사를 안겨주고 본선 금메달을 노리던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을 4강에서 박살내 야구 변방으로 여겨지던 호주가 은메달을 따는 이변에 공헌했다. 선수로서 은퇴한 뒤에는 호주 프로야구 리그와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 등의 코치 등으로 활약하며 야구 보급과 발전에 힘썼으며 그 공으로 2018년에는 훈장도 받았다. 여담으로 주니치 시절 등록명이 딩고였다.[5] - 다니시게 모토노부 (2002 - 2015)
- 오다 코헤이 (2006~2014)
4.3. 내야수
-
에토 신이치 (1959 - 1969)
주니치에서 2번의 수위타자를 차지하며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이후 이적한 롯데에서도 수위타자를 차지하며 일본 최초의 양대리그 수위타자가 된다.[6] 주니치를 떠나게 된 계기는 1969년에 감독으로 부임한 미즈하라 시게루와의 마찰 때문이었고 이 때문에 은퇴를 선언했다 은사인 노닌 와타루 감독이 있던 롯데로 이적했다. 이후 상술한대로 롯데에서도 수위타자를 차지했지만 노닌 와타루 경질 후 새로 부임한 오사와 케이지가 기동력 야구를 구상하면서 수비와 주루가 좋지 않았던 에토는 1971년을 끝으로 타이요로 트레이드 되었다. 그것도 자신의 생일이자 수위타자 타이틀이 확정됐던 10월 6일에 트레이드 통보를 받는 얄궂은 운명이었다. 은퇴 이후에는 야구체육학교 설립, 사회인야구 지도자 등으로 아마추어 쪽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이후 2003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7] 2008년에 간암으로 별세했다. 쓰러진 뒤에는 가족과 친인척 외의 다른 지인들과는 일체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타카기 모리미치 (1960 - 1980)
빠른 발과 화려한 수비, 정교한 작전수행능력을 자랑했던 명 2루수. 2020년 심근경색으로 사망. -
오시마 야스노리 (1969 - 1987)
1983년 홈런왕. 70년대 말에서 닛폰햄으로 떠나기 전까지 오랜 기간동안 준수한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입단동기는 호시노 센이치. 2021년 대장암으로 사망. -
야자와 켄이치 (1970 - 1986)
장훈의 수위타자 타이틀을 저지한 강타자 1루수. -
우노 마사루 (1977 - 1992)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유격수 홈런왕이자 유격수 단일시즌 최다홈런 기록(41홈런)보유자. 하지만 그에 반비례한 막장 수비력으로도 팬들을 즐겁게 한 예능형 선수로도 기억된다. -
켄 마카 (1982 - 1985)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밀워키 브루어스의 감독을 지낸 그 양반 맞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마카가 아카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등록명이 모카(モッカ)로 바뀐 바 있다(...) -
오치아이 히로미츠 (1987 - 1993)
前 감독, 前 단장. 3회의 트리플 크라운을 차지하며 퍼시픽리그를 평정한 뒤 4:1 트레이드로 주니치에 입단한다. 꾸준한 활약을 보이며 주니치에서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억대 연봉자가 된다.단장을 왜해서 욕을 먹나 -
타츠나미 카즈요시 (1988 - 2009)
'미스터 드래곤즈'. 유격수, 2루수, 3루수의 내야 세 포지션에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명 수비수이자 일본프로야구 최다 2루타 기록 보유자. -
타이호 야스아키 (1989 - 1997, 2001 - 2002)
대만 출신으로, 일본으로 야구유학을 왔기 때문에 드래프트 전 최종학력이 일본 학교여서 일본인 선수로 드래프트되었다. 타이호 야스아키(大豊泰昭)는 등록명. 본명은 진대풍(陳大豊, 천타펑)이다. 참고로 그의 동생 진대순(陳大順) 역시 같은 대학 출신으로 롯데 오리온즈에 드래프트 되었는데, 이쪽의 등록명은 타이준 마사히로(大順将弘)였다. 형제가 자신들의 본명을 등록명의 성으로 땄기 때문에 형제의 성이 달라진 케이스. 주니치에서 홈런왕으로 활약한 형과는 달리 이쪽은 일본프로야구 생활 2년만에 방출되어 대만 프로야구 리그로 돌아갔다. 2015년 1월,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1세. - 타네다 히토시 (1990 - 2001)
-
아라키 마사히로 (1996 - 2018)
2000년대의 주니치의 황금기를 보낸 프랜차이즈 스타로, 포지션은 2루수. -
다넬 콜스 (1996)
1996년 주니치의 알론조 파웰과 더불어 좋은 활약을 보인 용병타자. 그 해 1번타자로 자주 나와 .302/29홈런/79타점으로 매우 좋은 성적을 기록했으나, 3루수 치고 실책이 무려 20개를 기록하며 재계약에는 실패하게 된다. 그 이후 1997년 한신으로 이적했으나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며 퇴출. -
레오 고메스 (1997 - 2002)
다넬 콜스의 후임으로 들어온 용병타자. 한국인 삼총사가 활약하던 1990년대 말에 4번을 친 거포 3루수. -
모리노 마사히코 (1997 - 2017)
이혜천한테 데드볼 맞고 욕 먹은 선수. 그후 벤치클리어링이 일어났다.[8] -
이바타 히로카즈 (1998 - 2013)
2000년대 주니치 내야를 책임진 명 유격수. 2루수 아라키 마사히로와의 콤비는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2-유간으로 평가받았다. -
오마르 리나레스 (2002 - 2004)
쿠바 혁명 이 후 처음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뛴 쿠바 출신 선수. 과거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이 올림픽 2연패, 월드컵 7연패를 할 당시의 4번타자 겸 3루수로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진출 당시 나이가 35세여서인지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
타이론 우즈 (2005 - 2008)
주니치 역대 최고의 용병타자. - 아라이 료타 (2006 - 2010)
-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7 - 2008)
-
토니 블랑코 (2009 - 2012)
은퇴한 타이론 우즈의 대체자로 들어온 용병타자. 우즈 만큼의 활약은 없어도 주니치 장타력에 꽤나 큰 기여를 했다.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014 - 2015)
닛폰햄과 요미우리를 거쳐 주니치로 이적한 선수. 주니치에 있던 시절엔 대타로만 거의 출전했다. 은퇴식 당시 요미우리와의 경기에서 종료된뒤 양팀 선수단들이 그를 헹가래했다. 현재는 닛폰햄 타격코치로 재임중. - 아베 토시키 (2016~2022)
4.4. 외야수
-
나카 도시오 (1955 - 1972)
주니치 초창기의 리드오프 중견수로 1960년 도루왕, 1967년 수위타자, 베스트나인을 5회 수상하면서 1800안타 이상을 기록한 명타자. 요나미네 카나메의 후임으로 1978~1980년 감독직을 맡았으나 별로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하고 물러났다.536 -
요나미네 카나메 (1961 - 1962)
교진군에서 이적하여 여기서 은퇴. 후일 감독으로써 교진군의 세리그- 일본시리즈 V10을 저지하고 2번째 세리그 우승을 이뤄낸다. -
래리 도비 (1962)
아메리칸리그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이자 사첼 페이지와 함께 흑인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도 한 대선수였지만, 이미 노쇠화로 기량이 떨어진 뒤 찾아온 주니치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
타오 야스시 (1976 - 1984)
1982년부터 3년간 최다안타 타이틀을 차지한 당대의 안타 제조기. 또 도쿄돔 최초의 3루타를 친 선수이기도 하다.(이땐 한신 타이거스 소속) 그의 현역 당시 아직은 앳된 야구소년이었던 스즈키 이치로가 동경하던 선수라고 한다. 은퇴 후 2005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창단 감독이 되었지만..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그 해 바로 짤렸다(...) -
히라노 켄 (1978 - 1987)
전 KIA 타이거즈 타격코치. 주니치와 세이부, 롯데에서 빠른 발과 강견, 정교한 작전 플레이를 앞세운 스위치 히터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1986년엔 센트럴리그 도루왕도 1차례 석권했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2위인 451 희생타를 기록했으며 한때는 일본 최고 기록이기도 했으나 후에 카와이 마사히로에게 기록을 내줬다. -
히코노 도시카쓰 (1983 - 1998)
1988년 리그 우승 당시 타선의 리드 오프를 맡았던 선수. -
야마사키 타케시 (1987 - 2002, 2012 - 2014)
1996년에 주니치에서 홈런왕을 차지한 뒤 2007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만 39세의 나이로 43홈런을 때려[9] 양대리그 홈런왕에 오른 이색 경력의 소유자. - 이노우에 카즈키 (1990 - 2009)
-
알론조 파웰 (1992 - 1997)
1994~1996년 센트럴리그 수위타자. 그 뒤 2020년과 2021년에 주니치 코치로도 재직하게 된다. - 이종범 (1998 - 2001)
- 세키카와 코이치 (1998 - 2004)
-
구라모토 히데노리 (1999 - 2012)
등록명은 '히데노리', 주로 대주자, 대수비 요원으로 활약했으나 강견을 앞세운 빈틈없는 외야수비로 오치아이 감독 아래에서 중용받았고 팬들에게도 사랑받았던 선수였다. -
알렉스 오초아 (2003 - 2006)
강견과 장타력을 갖췄던 외국인 중견수. 2004년과 2006년 주니치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후쿠도메와 함께 골든글러브 외야진의 축을 이루었다. 2007~08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뛰다가 현역에서 은퇴했다. - 이병규 (2007 - 2009) 이병규는 주니치에서 뛰었던 한국인 선수 중 유일하게 우승했다.(2007년)
-
와다 카즈히로 (2008 - 2015)
세이부 라이온즈의 강타자였으나 후쿠도메 고스케의 메이저 진출 후 주니치에 FA로 이적했다. 2010년에는 만 38세의 나이에 리그 MVP[10]에 올랐다. - 히라타 료스케 (2006 - 2022)
5.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오츠카 아키노리 (재적 2003,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텍사스 레인저스)
- 카와카미 겐신 (재적 1998 - 2008, 2012 - 2015,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 일본 복귀 후 원소속팀 주니치 드래곤즈)
- 후쿠도메 코스케 (재적 1999 - 2007, 시카고 컵스 → 2013년 일본 복귀 시 한신 타이거스 소속 → 2021년 원소속팀 주니치로 복귀)
- 천웨이인 (재적 2004 - 2011, 볼티모어 오리올스)
[1]
데뷔시즌에 69경기 등판(44 선발), 35승 19패, 429.1이닝, 310 탈삼진, 1.70 ERA라는 정신나간 성적을 기록하며
사와무라상과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했지만, 2년간 불꽃같은 활약을 벌인 뒤 어깨가 망가졌고 결국 1965년부터 타자로 전향했음에도 얼마 활약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2]
조 스탠카,
진 바키,
궈타이위엔과 함께 4명뿐인 NPB 외국인 선수 100승 투수이다. 다만 이쪽은 다른 셋과는 달리 커리어 도중에 일본으로 귀화했고 일본 커리어도 16년이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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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같은 리그에는 신인왕 + 사와무라상을 석권한 요미우리의 20승 영건
우에하라 코지가 있었고 타자 쪽에서는
로베르토 페타지니나
마쓰이 히데키같은 거물들이 좋은 성적을 냈지만, 일본에서 리그 MVP는 높은 확률로 리그 우승팀의 선수가 가져가기에 이루어진 선정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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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한국인 선수 세 명이 활약하던 시절 주니치의 인기는
박찬호가 있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맞먹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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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고는 호주의 야생 들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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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장훈과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양대리그 수위타자를 노렸으나 아쉽게 실패로 돌아갔고,
우치카와 세이이치가 2011년 2번째 양대리그 수위타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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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은 현역 때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 술. 그래도 현역 마지막 해이자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의 현역 복귀 요청으로 활동했던 1976년 롯데 2기 시절에는 그 좋아하는 술도 끊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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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투수가 사구를 맞출경우 모자를 손으로 살짝 내렸다 올리며 사과의 메세지를 전달하는데 이혜천은 안했다. 일본어로 모자를 뜻하는 보시를 말하며 요구하자 이혜천이 뭐 이 X발놈아라 대답하며 쌍욕을 뱉어대고 점점 다가오자 분위긱가 험악해져 벤치클리어링 까지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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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 2위는 동갑인
터피 로즈였다. 42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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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아라이 타카히로 이전까지 센트럴리그 최고령 MVP 기록이다. 일본 기록은 1988년 만 40세의 나이로 44홈런을 때리며 퍼시픽리그 MVP가 된
난카이 호크스의
카도타 히로미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