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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22:11

전범재판(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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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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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재판
장르 팬픽
작가 Excelsis
웹 연재 기간 2010. 12. 29. ~ 2014.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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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세계관4. 줄거리
4.1. 프리퀄 :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4.2. 본편
4.2.1. 1~3. 짓밟힌 황금 갈기4.2.2. 4~6. 성자와 악마4.2.3. 7~16. 홀로 제국의 쌍벽4.2.4. 17~19. 그럴듯한 음모4.2.5. 20~25. 찬란의 잔해4.2.6. 26~30. 영웅이라는 이름의 제물4.2.7. 31. 거울
5. 세력6. 등장인물
6.1. 은하제국6.2. 자유행성동맹 - 자유공화국연합6.3. 기타
7. 평가8. 기타

1. 개요

은하영웅전설 2차 창작 팬픽. 2010년 12월 29일부터 2014년 4월 13일까지 총 31화가 연재되었다.

2. 상세

Q : XXXX님 소설 발견해서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은영전 팬픽을 구상 중이라 다른 분들의 작품도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마침 처음으로 참고한 게 XXXX님 작품이라 운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작에 상당히 빈약했던 민주주의 정신에 대해서 깊이 있게 다뤄지는 것 같아 감명받고 있습니다.

저는 평화시에 발생하는 정치투쟁과 내분, 반목과 분열을 다루는 소설을 구상중입니다. 그런고로 신 은하제국의 정치 구조의 약점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라인하르트의 영웅적 이미지에 열광한 민중의 지지로 만들어진 전제정'의 강점인 청렴함을 뒤집어 '친위세력의 부재'와 '민심이반에 대한 극단적 취약성'이라는 약점을 찾아내시다니 그 통찰에 놀랐습니다. 기발한 발상이라고 생각해요.

A : 은영전 팬픽을 구상하는 건 사실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원작의 스케일이 너무 큰 탓이죠. 더구나 제가 찾아본 몇 가지의 팬픽들은 사실 하나같이 제국 측의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아무리 제국이 썩었다 썩었다 해도 동맹이 훨씬 암울합니다.ㅡ,ㅡ 동맹은 라인하르트와 같은 영웅이 나온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죠.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은, 원작에서 라인하르트의 혁명이 놀랄 만큼, 어쩌면 부자연스러울 만큼 성공적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나 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주제 자체가 '만일 라인하르트가 패해 법정에 선다면?'이라는 주제였기 때문이었지만, 다시 한 번 원작을 정독하며 확실히 라인하르트의 제국 역시 완벽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즐거웠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전범재판'입니다. 원작에서의 긍정적인 면을 뒤집어보니 부정적인 면을 찾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더군요. 그런 부분을 노린 것뿐입니다.

제가 XXX님께 조언을 드릴 만큼 내공이 깊게 쌓인 것은 아니지만, 은영전은 완벽한 소설이 아니고 라인하르트의 제국 역시 완벽하고 필연적인 국가가 아닙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점이 원작과 다른 길로 가는 팬픽을 쓰시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라인하르트의 제국에는 끊임없이 위기가 닥쳐오지만 그때마다 그 자신의 능력과 행운으로 돌파하죠. 그래서 라인하르트가 영웅 소리를 듣고 이 소설이 '전설'인 겁니다. 여기서 뭔가 문제를 일으키려면 뭔가 커다란 사건이라든지 오리지널 캐릭터를 억지로 쑤셔 넣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저 그 수많은 위기 중 하나만 원작과 어긋나게 바꿔도 그 다음부터는 전혀 새로운 세계관, 예측 불가능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한 혁명은 거의 없고 반대로 혁명이 실패한 사례는 부지기수입니다. 국가가 망하고 무너진 사례들 역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XXX님께서 그런 팬픽을 구상하고 계시다면 충분히 그러한 역사적 사례를 신 은하제국에 대입하실 수 있다고 보입니다. 더구나 타나카 요시키 씨가 은영전을 쓸 때 사용한 방법 또한 그런 것이니까요.
프리퀄 이제르론 회당의 무도회 1 댓글 답변

로엔그람 왕조 은하제국이 몰락한 이후, 포로로 잡힌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자유공화국연합의[1] 재판대에 세워지고 양 웬리는 그의 변호를 맡는다는 스토리. 현실로 비유하자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나치의 주요 인사들이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받은 걸 떠올리면 된다.

엄밀히 말하면 양 웬리는 의회 측에서 국선변호인으로 선임된 몸이지만 변호사 자격증도 없고 군사경찰도 아닌 원수가 국선변호인에 선임된 것에서 알 수 있듯 민간재판이 아닌 군사재판에 분류된다. 은하제국도 자유행성동맹도 포로를 상대로 전범재판을 한 적이 없어 당연히 전용 재판소도 없었으며 부랴부랴 만든 거라 이번 군사재판에서 라인하르트가 받는 혐의는 엄밀히 말해 법의 소급 특성상 사형시키기 애매하다. 괜히 양 웬리가 모살(謀殺) 시도라 부르며 적법성을 지적한 게 아니다. 다곤 성역 회전 직후의 요식행위로 벌어진 재판을 떠올리면 된다.

대중들은 양 웬리가 변호인으로 불려나왔다는 말에 규탄에 동참하려도 참가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양 웬리가 적극적으로 변호하자 구동맹과 구제국을 가리지 않고 배신자라 불리며 신발 투척까지 당하는 등 고생한다. 아, 그러고 보니 150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아마? 하지만 이 평가는 양 웬리에게 있어서 억울한 것이, 애초에 정부가 양에게 국선변호를 명령했고 정부 차원에서도 피고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재판의 형태로 보이고자 양이 제대로 변호하는 모습을 보이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변호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재판에서 양 웬리가 한 변호는 (변호사 자격증은 없지만) 변호인으로서 제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국선변호인의 고충을 볼 수 있는 부분.

이 팬픽의 가장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팬픽에서도 잘 써먹게 되는 제국 만세(…)나 제국이 우세한 상황을 아예 배제하고 구(舊) 자유행성동맹의 군인과 정치가들이 모여서 건국한 '자유공화국연합'이라는 나라가 등장하게 만들고 그로 말미암아 우주의 판도를 뒤바꿔 민주공화주의가 승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만약에 양 웬리의 일원들이 하이네센을 탈출할 때 뷰코크를 데려왔다면?'이라는 IF 설정을 잘 활용해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의 승리와 이제르론 재탈취라는 협격으로 제국을 당황하게 만들고 나중에는 지구교 반란으로 인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제국을 멸망시킬 정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지구교는 본거지가 무너진 이후 아드리안 루빈스키의 사조직이 되어 숨어 지내는 한편 온갖 테러를 저지를 정도로 세력을 유지하는 중이며, 페잔 자치령은 라인하르트에게 점령당한 이후 루빈스키의 공작으로 경제가 붕괴되어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제국의 잔당들은 볼프강 미터마이어의 지도 아래 변방에서 농성 중,[2] 행성 오딘은 공화국군한테 점령당했다는 설정이다.

작가는 끝까지 연재하겠다고 했지만 2014년 4월 3일 31화가 발표된 이후로 연중되었다. 2017년 작가가 3년만에 블로그에 짤막한 글을 올렸지만 그와 별개로 전범재판의 재연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당 블로그에 전범재판 이전 시점을 다룬 팬픽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 외전인 '원수의 레시피'도 있으니 보고 싶으면 보자. 다만 이쪽은 마찬가지로 연중된 상태인 데다 연재량도 적다.

작중 재판 분위기는 상당히 개판. 사실 재판장 분위기는 답정너인데 양 웬리의 적극적인 변호로 분위기가 싸늘해져 그 자유공화국연합 건설과 민주주의 재건의 1등공신 양 웬리가 라인하르트와 싸잡아져서 신발세례를 받는 불상사가 벌어진다. 여기서 서술된 바에 따르면 본작의 라인하르트는 경제 파탄을 비롯한 여러 실정으로 인해 몰락한 몸이라 구 동맹령 사람들보다 구 제국령 사람들의 증오를 더 많이 받는다고 하며 신발투척도 구동맹인이 아닌 구제국민들이 한 거라고 한다. 작가는 코멘트에서 라인하르트가 저지른 악행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이며 이것도 감당을 못한다면 애초에 황제가 될 생각을 해서는 안 되었다고 라인하르트를 깠다. 이외에도 라인하르트는 전쟁을 스포츠 취급하는데 전쟁 중에는 당연히 부하들도 많이 죽을 수밖에 없으며 라인하르트에게 있어서 '인격체'는 자신, 누나, 절친뿐이라는 코멘트까지 남겼다.

3. 세계관

1. if의 시작, 마르 아데타.

원래 은하영웅전설은 신 은하제국 황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승리하는 내용입니다. 양 웬리도, 구 자유행성동맹도, 구 은하제국도 결국 라인하르트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라인하르트와 그의 로엔그람 왕조가 최후의 승리자로 남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if 놀이인 것처럼, 당연히 '사실 양 웬리가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훌륭한 떡밥은 항상 재미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자유행성동맹의 종언을 고한 '마르 아데타 회전'에서 동맹이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이라는 가정 하에 글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원작에서도 언급된 " 양 웬리가 황제를 상대하고 뷰코크가 이제르론을 탈취한다"는 가정입니다. 이때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 이후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양 웬리는 떠돌아다니다 세력을 끌어모으고 마침내 천하를 삼분한 소열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 전에서, 예를 들면 버밀리온 성역 회전에서의 승리를 가정한다면 좀 더 동맹에 힘을 실을 수 있는 선택이지만, 그렇게 되면 라인하르트에게 힘을 실어줄 수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라인하르트는 '지존의 자리에서 나락으로' 굴러 떨어져야 훨씬 극적이지요. 마르 아데타는 그런 점에서 자유행성동맹의 잔존 세력을 남겨서 뭘 꾸미기도, 용의 눈에 점 하나를 찍는 걸 끝내 실패한 제국의 몰락을 그리기도 매력적인 분기점입니다.

2. 법률상 지위

이 팬픽이 '재판'을 다루는 만큼, 각 개체의 법적 지위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실 은하제국과 자유행성동맹의 법적 지위는 대단히 복잡합니다. 우선 둘 다 서로를, 서로가 존재하는 동안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원작에서는 라인하르트가 자유행성동맹을 그 멸망 후에야 인정하는 것으로 해결하고, 또 신 은하제국의 반대세력은 극히 미약했으니 별 문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다르죠. 자유행성동맹과 그 후신 자유공화국연합은 은하연방의 비열한 찬탈자 제국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걸 인정해 버리면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거니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인류를 압제하에 놓고 폭정으로 다스리며 인권을 침해하는 제국과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구 제국의 모든 지배층은 그 죄를 물어 다 처벌해야 할까요?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죠. 그래서 연합의 지도부가 선택한 게 전 우주의 사람들을 자유공화국연합 시민이라 선언하는 겁니다. 논리가 이렇게 되지요.

<전 우주의 유일 인류정부 은하연방 - 그 적법한 후신 자유행성동맹 - 그 적법한 후신 자유공화국연합>

그래서 라인하르트를 은하제국의 최고책임자가 아니라, '사사로이 군사력을 이끌고 황제를 참칭한 내란분자' 정도로 취급하는 겁니다. 이런 동맹 시민들의 시각은 원작에서 라인하르트가 하이네센을 점령한 후에 '은하제국 황제라 자칭하는 라인하르트란 자가 법적 권리 없이 의회장 견학을 신청' 이라고 했던 것으로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실제로 은하제국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니만큼, 앞으로도 그로 인한 트러블이 자주 일어날 겁니다.

3. 자캐

원래 저는 흔히 쓰이는 팬픽의 장르 같은 건 잘 고려하지 않습니다.(빙의물, 마개조 등등......) 그래서 자캐를 거의 쓰지 않는 편이고, 모든 건 원작/공식설정의 인물을 적당히 이용해서 쓰는 편입니다. 하지만 양 웬리의 반대 입장, 즉 검사석에 쓰는 인물은 어떻게 해도 동맹군 내에서 찾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캐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자캐가 메리 수가 되는 건 바라지 않는데다, 어차피 주인공은 역시 양 웬리인지라 세세한 동인설정 같은 건 짜놓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이 팬픽 또한 은하영웅전설처럼 삼각 라이벌리를 구성하고 있는지라 자캐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에게도 어느 정도 푸쉬는 들어갈 겁니다. 그렇지만 이 캐릭터는 단순히 제가 말하고 싶은 '가치의 충돌'을 그리는 데 필요한 도구적 존재니까, 이놈이 제 손을 벗어나서 자생력을 가지는 캐릭터가 되는 건 큰 문제가 되지요. 붓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붓이 그림을 그리는 건 아니잖습니까? 이놈이 메리 수가 될 기미가 보이거든 아낌없이 채찍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제일 관대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참고로,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이라는 이름은 예수회 설립자 이그나시오스 로욜라와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의 이름에서 따온 겁니다. 로욜라는 구교의 엄격주의/복고주의적 혁신을 추구했던 사람이고, 칼라일은 영웅주의 역사가로 이름을 날린 사람입니다. (더구나 로욜라는 카톨릭, 칼라일은 칼뱅주의자) 그러나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은 복고주의도 경멸하고, 영웅주의 또한 경멸하는 사람입니다. 오베르슈타인과 죽이 잘 맞을 듯한 인물이라고 할까요? 그러면서도 성격은 로욜라의 엄격함과 칼라일의 격렬함을 동시에 가진 인간이지요. 서로 반대되는 인물의 이름을 동시에 갖고, 그 이름과 자신의 사상이 서로 정반대인 데다, 성격은 또 그 둘을 닮은 캐릭터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지금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나중에 더 진행하면서 밝힐 일입니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칼라일 이외에 다른 자캐를 추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의견 있으신 분은 댓글을 달아주시면 보고 감사히 참조하겠습니다.

4. 전투

은하영웅전설의 전투는 대단히 평면적인 전투입니다. 무대가 3차원 우주 공간인데도 그렇지요. 분명히 서력으로는 3600년 정도 된 시대인데, 전술은 1800년대 초반 그대로이지요. 더구나 거함거포주의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아무도 생산력 빵빵하고 전술의 귀재인 라인하르트를 이기고 체포하거나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물론 이 팬픽에서 전투는 과거의 회상이라던가 주된 사건에 연계되는 하나의 과정 정도로만 지나갈 존재긴 하지만 말이죠. 그래도 어떻게 자유공화국연합이 은하제국과 라인하르트, 그리고 '별들의 대해'를 격파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 정도는 준비하려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거함거포주의를 때려잡은 건 항공모함과 " 공군!"이죠. 그리고 개활지에서의 전열 중심의 전투를 타파한 건 참호전 시가전입니다. 대충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새로운 장치를 몇 가지 등장시키려고 합니다.

5. 자유공화국연합

자유공화국연합은 자유행성동맹의 후신입니다. 원래는 이제르론 요새 엘 파실, 아레스하임, 티아마트, 밴플리트, 다곤, 아스타테 성역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동맹 망명정부 비슷한 개념입니다.(극초기에는 이제르론, 엘 파실, 티아마트뿐이었습니다) 이 신흥국가의 정치적 구심점은 프란체스크 롬스키를 중심으로 한 엘 파실 혁명정부, 그리고 황 루이와 월터 아일랜즈 등의 몇몇 소장파 동맹 망명정치인들입니다. 양 웬리가 원작에서의 뷰코크 원수 대신 마르 아데타에서 라인하르트를 상대로 '시간만 끌고 있는' 동안 뷔코크 원수와 동맹군 잔존 세력은 이제르론을 탈취했고, 그 사실에 한 대 호되게 얻어맞아 전의를 상실한 황제와의 정치적 흥정을 통하여 하이네센을 내주는 대신 '민주공화주의의 존속'을 약속받은 초라한 국가로 출발했습니다. 이 작은 신흥국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작중에서 밝힐 것입니다.
Q. 결국 4와 관련하여 스파르타니언 부대와 포플런 등이 활약한다는 얘기겠군요.

A. 아닙니다. 그렇게 실제 역사를 그대로 따라해 버리면 전투를 리어레인지하는 의미가 없지요. 완전히 은영전 세계관 내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등장시킬 겁니다. 단순히 공전대 띄우고 하는 수준의 전투는 이제까지도 있어왔으니까요. 항공모함을 예로 든 건 그러한 혁신적인 개념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한 거지, 굳이 항모가 주력으로 뜬다는 것은 아닙니다.
전범재판 개략 1
1.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분명 라인하르트의 군사적 두뇌는 천재의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 정신세계는 아직도 소년의 그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초딩. 더구나 지금은 그의 곁에 아내 힐더도, 누이 안네로제도, 아들도 친구도 부하도 없습니다. 버림받은 외톨이이지요. 본작의 패왕 라인하르트 주위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누이 안네로제가, 성장기에는 친우 키르히아이스가, 그를 잃고 난 후에는 아내 힐데가르트가 그의 부족한 면을 지탱해 주었지만 여기서는 그럴 수 없지요. 생애 처음으로 완벽하게 독립, 혹은 격리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그 라인하르트의 인격적인 성장 과정이 플롯의 주요한 한 축이 될 것을 미리 스포일러하는 바입니다.

2. 이그나시오스 칼라일

유일한 주연급 오리지널 캐릭터입니다. 원래는 사관학교 출신이 아닙니다만, 제국과의 전쟁 중에 법무관으로 임관하게 되었다는 설정을 붙여봤습니다. 법정에서 이 캐릭터가 모두까기 독설을 퍼붓는 장면을 기대해 주세요. 그러고 보니 루돌프 폰 골덴바움도 법무관 출신이었다가 공적을 세워 인기를 얻었군요.(이쪽은 사관생도였지만)

3. 율리안 민츠

이 팬픽은 3인칭 시점입니다만, 사실상 율리안이 작중의 관찰자입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사건은 모두 율리안의 시각에서 진행되며, 뒤집으면 중요한 사건들은 어떻게든 모두 율리안의 시각에 포착됩니다. 이 재판에서 율리안은 엄밀하게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변호인단' 중 한 명입니다만, 변호인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래서 양 웬리가 하기에는 껄끄러운 일들, 즉 검사와 접촉한다던지 재판부와 접촉한다던지 하는 것들도 꽤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4. 오베르슈타인

오베르슈타인의 의안은 한 쪽밖에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몸도, 다른 한쪽 의안도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참고로 컴퓨터 의안은 단순히 안구로서의 기능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5. 지구교

이 팬픽이 본작 은하영웅전설과 마찬가지로 '미래에서 서술하는 과거의 이야기' 형태를 띠고 있는 만큼, 결말 중 한 가지는 분명해집니다. 지구교는 망한다는 거지요. 하지만 어떻게 망하느냐? 개인적으로 본작에서는 사실 지구교의 흉폭함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주연급들이 지구교에 의해 사망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해피엔딩이 되었고 지구교는 한때의 뻘짓으로 끝나고 말았지요. 그들을 그렇게 허무하게 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6. 자유공화국연합 의회

자유공화국연합 의회의 수장은 프란체시쿠 롬스키입니다. 자유공화국연합(이하 연합)의 입법기관이지요. 생존한 구 동맹의 정치인들은 월터 아일랜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여기 붙어 있습니다. 자유공화국연합은 행정부 중심이지만(그래서 행정부 수반인 뷔코크 주석이 국가원수지요) 동맹과 달리 입법부에도 상당한 권한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재판을 만든 것도 사실 의회의 주도이지요. 1년 6개월 후에 연합 총선거가 있을 예정입니다. 제국이 연합에 먹힌 만큼 의석 또한 대대적으로 늘어납니다. 일단 의회와 정부는 구 제국령 시민들에게 '민주주의'라는 것을 열심히 설파하고 있지요.

7.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오딘 대참극

라인하르트가 결정적으로 몰락한 사건이 바로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 또는 이제르론 회랑 최후의 전투입니다. 그 직후 오딘에서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서 힐데가르트가 참살되고 황제 일가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양과 율리안은 거기에 지구교가 연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그 점을 토대로 로이엔탈을 설득할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도 지구교는 공동의 적이니까요. 하지만 어디까지 지구교의 뿌리가 뻗어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몇 명을 빼고는요.

8. 엔딩
저는 해피엔딩 싫어합니다
2. 확실히 '컴퓨터 의안'에 단지 안구 기능만 있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적해주신 대로 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본작이 쓰여진 시기에는 컴퓨터 의안이라는 게 단지 최첨단 인공 의안을 수식하는 말이었겠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다양한 아이디어를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3. 사실 지구교가 무서운 점은 어디까지 지구교 세력이 퍼져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더구나 라인하르트의 제국은 지구교를 완전소탕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본작에서의 구 페잔과 트뤼니히트 치하의 동맹처럼 사회 중심부에 지구교 세력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4. 국방장관직은 입법부인 연합의회 소속이 아니라 행정부, 즉 자유공화국연합 정부 소속입니다. 구 동맹의 국방위원장 자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일랜즈가 의회의 일원은 아니라는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 설정오류는 아닙니다. 라인하르트가 다른 문제에 한눈 팔고 있던 사이에 자유공화국연합이 야금야금 세력을 늘려나간 겁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성계 세 개로 시작했지만 점점 세력권이 넓어지는 거지요. 자유공화국연합의 '이제르론 회랑 시대' 정도라고 할까요? 그래서 극초기에는 성계 세 개, 좀 지나면서 성계 네 개, 좀 더 지나면 성계 여섯 개가 되었지만 그동안을 몽땅 통틀어서 '자유공화국연합 건국 초기'라고 부르는 겁니다.
전범재판 개략 2 댓글 답변
Q. 그런데, 라인하르트는 그렇다 쳐도 다른 전범들, 그러니까 은하제국 문벌귀족들과 구 골덴바움 왕조는 어떻게 처리될까요? 솔직히 라인하르트보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악독한 악당들인데, 양 웬리가 말했던 것처럼 라인하르트에게 골덴바움 왕조의 죄까지 씌울 수는 없고, 그들에게 죄를 물어 처벌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솔직히 자유행성동맹과 시민들을 보면 루돌프를 엄청 욕하지만, 골덴바움 왕조의 진정한 악행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라고요. 원작에서 그 양 웬리조차도 베스터란트의 학살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으니 이건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정보를 접하지 못해서인 걸까요?

1. 구 문벌귀족들과 골덴바움 왕조의 경우, 이 팬픽에서는 이미 지구교 준동과 맞물려 라인하르트에게 대학살에 가까운 숙청을 당했습니다(4편을 참조하세요). 그러니 그들은 립슈타트 동맹의 패전 이후 한 번, 그리고 지구교 준동 때 다시 한 번 숙청당한 것이죠. 이 숙청에서는 1차 숙청 때 목숨을 부지한 귀족들도 거의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는 잔존 문벌귀족들은 그야말로 티끌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2. 골덴바움 왕조의 책임을 묻는 것은 조금 많이 복잡해집니다. 그러나 이 재판정을 연 자유공화국연합 정부의 입장만을 보자면, 라인하르트가 골덴바움 체제를 완전부정하고 전복시킨 것이 아니라 찬탈의 형태로 사실상 골덴바움 왕조를 계승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골덴바움 왕조의 무한한 악행을 모두 라인하르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아닙니다. 라인하르트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피소된 몇 가지의 혐의에만 책임을 질 수 있죠. 여기서의 책임은 법적인 책임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책임입니다. 공화국에서는 라인하르트를 처벌하는 것으로 '제국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고 깨끗이 손을 털고 싶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골덴바움의 악행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더 이상 세상에 남아있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질 주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왕조는 망했고, 문벌귀족들은 죽었으며, 황통은 끊겼죠. 그런다고 카타리나 여황제를 법정에 세울 수도 없잖습니까. 그거야말로 코미디죠.

따라서 이 팬픽에서 골덴바움 왕조에 책임을 물을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민주주의를 침해한 '제국'이라는 개념 자체에 책임을 물을 수는 있으며, 그래서 라인하르트가 법정에 선 겁니다. '제국'을 이었으니까요.

3. 자유행성동맹의 시민들이 루돌프를 욕하면서도 제국의 참혹한 실상을 모르는 것은 결국 정보가 제대로 소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리가 멀다는 것은 밀정이 활동하기는 별로 좋지 않은 환경이며, 그래서 동맹과 제국의 정보전달통로는 사실상 페잔 란트밖에 없었으니까요. 이제르론 회랑은 전장이지 정보가 오고가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의 정보통제는 상당히 효율적입니다. 실제로 베스타란트 사건도 제국에서조차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죠. 그러니 동맹에서는 그 내막을 전혀 몰랐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듯합니다. 우리의 양이 재판을 위해서 열심히 증거를 수집하고 증인들의 입을 열려고 하는 것도, 그들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Q1. 자유공화국연합의 국민들의 대략적 옛 국적별 비중은 어떻게 됩니까?

A1. 자유공화국연합은 은하계 전체를 아우르는 통일국가입니다. 은하연방의 적법한 후신을 자처하죠. 그러므로 '명목상으로는' 은하계 전체의 사람들이 모두 자유공화국연합 국민들입니다. 따라서 법적으로는 구 동맹 시민이 100억 명을 좀 넘고, 구 제국 출신 시민이 200억 명을 좀 넘습니다. 법과 실제의 차이와 그 원인은 아래에 마저 설명드립니다.

Q2. 자유공화국연합의 대략적인 의석분배는 어떻게 됩니까? 은영전의 기본설정에 의하자면 제국이 250억 동맹이 130억 페잔이 20억으로 제국계(+페잔 자치령)가 훨씬 많은데 현재 자유공화국연합이 오딘까지 장악한 것을 봐선 인구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이 구 제국(+페잔 자치령) 출신일 가능성이 높은데(물론 위의 질문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제국 쪽이 많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국민들이 캐스팅 보드를 잡게 되니 문제고, 동맹 측이 많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일 텐데 말입니다.

A2. 1년 반쯤 후에 총선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의원들과 각료들이 어떤 식으로 선거구를 구성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은하를 통일한 이상 그들을 선거구에 편입시켜야 하니까요.

그러나 선거구를 조정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유권자들을 통제하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될 인물들의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등의 수법으로 간접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자유공화국연합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트뤼니히트처럼 헌법을 문란하게 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제국 출신 국민들이 로엔그람 조에 우호적인 정치인들에게 표를 던져준다 하더라도 결격사유가 없다면 훼방 놓지 않으며,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종의 절차적 정의를 지키는 데에 대한 결벽증 비슷한 게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 제국 세력이 의회를 장악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현실적인 근거도 있습니다. 아래에서 설명드립니다.

Q3. 4화에서 자유공화국연합(57), 지구교 잔당(13), 제국 잔여세력(6) 이외에 각 성계의 연합 자치체(24)가 눈에 띄는데 이 세력은 일종의 제국(諸國) 개념이라 봐야 합니까? 혹은 하나의 국가로 보아야 합니까? 그리고 하나의 국가라면 어떤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습니까?

A3. 각 성계의 연합 자치체는 명목적으로는 자유공화국연합 하의 정치세력입니다. 단일한 정치세력은 아닙니다.

자유공화국연합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체제의 '공화국'들의 '연합'입니다. 연방국가죠. 이들 중 3분의 2는 연합 중앙정부의 행정체계가 작동하지만, 나머지 3분의 1은 지리적인 이유나 인력의 부족 등으로 자치정부만 형성하고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닿지 않는 지역들입니다. 이들은 자유공화국연합에 국방을 위임하고 헌법은 공유하나 기타 다른 영향은 받지 않습니다.

즉 자유공화국연합이 명목상으로는 전 은하를 통일했지만 실질적으로 완전히 통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연합의회에 의원을 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자유공화국연합' 국민은 합쳐서 200억을 좀 넘는 수입니다. 그러나 자유공화국연합은 사실상 동맹의 후신이므로, 구 동맹 소속이었던 성계들이 제국 소속이었던 성계들에 비해 자유공화국연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연합의회나 중앙정부에서는 대략 인구비례가 동등한 편이라고 판단해서 안심하는 겁니다.

더구나 자유공화국연합과 구 제국 출신자들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라인하르트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다수이니까요.

Q4. 본작에서 미터마이어 이외의 제국 잔여세력의 인물진은 없습니까?

A4. 답변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Q5. 각 성계의 연합 자치체와 여타 세력간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A5. 자치체들의 성향은 성계마다 모두 다양합니다.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성계도 있고, 지구교 잔재가 남아있는 성계도 있습니다. 물론 명목적으로는 모두 자유공화국연합 소속입니다만, 언제든 연합 탈퇴를 선언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Q6. 각 세력의 본거지는 어디입니까?

A6. 자유공화국연합의 본거지는 이제르론 성계 주변입니다. 정부시설들은 주변의 여러 성계에 분산되어 있지만, 평시의 연합의회와 연합중앙정부 1청사, 연합최고재판소는 엘 파실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법률 등으로 명시된 것이 아니므로 언제든지 변경 가능하며 실제로 전시에는 모든 주요정부기관들이 이제르론 요새로 이전합니다. 라인하르트가 마지막으로 침공해왔을 때 그런 일이 있었지요. 애초에 자유공화국연합은 수도라는 개념에 그리 집착하지 않습니다.

지구교 세력은 페잔의 루빈스키가 중심입니다. 물론 루빈스키가 페잔을 떠난다면 옮겨간 그곳이 중심지가 되겠지요.

미터마이어가 있는 곳은 변방의 이름 없는 작은 성계입니다. 다만 구 은하제국령 안에 있는 성계이며, 두 회랑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Q7. 현 시점에서 지구교의 총본산 지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A7. 지구의 경우 지구교 사태로 인해 분노한 라인하르트가 날려버렸습니다. 지구는 더 이상 지구교의 총본산이 아니며, 지구교 역시 사실상 루빈스키의 사조직입니다.

Q8. 제국내전기 당시에 중립 내지 친 라인하르트를 표방한 귀족들은 현재 어떠한 처지입니까? '공범'입니까? 혹은 제국의 압제에 시달린 '시민'입니까?

A8. 기본적으로 자유공화국연합은 구 제국의 모든 국민을 연합 시민으로 간주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개별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개별적인 재판을 열어 책임을 물으면 된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자유공화국연합이 은하연방과 자유행성동맹의 적법한 계보를 이은 국가임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제국은 처음부터 국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국 출신의 국민들은 제국이 무너지면서 자유공화국연합 국적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자유공화국연합의 시민이며 단지 제국이라는 불법 압제체제에 의해 국적권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북한이 우리를 대하는 관계와 흡사합니다.

Q. 지구 자체를 프리더가 베지터 행성을 날려버린 것처럼 폭파, 파괴되었다는 겁니까? 아니면 지구에 거주하는 지구교도들만이 소탕되었다는 건가요? 인류의 고향 자체를 파괴해버렸다면, 라인하르트의 죄악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지경이군요. 행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거는 은영전 역사상 그 어떤 지도자도 하지 않았던 일이니까요.

A. 지구교 대숙청 때 본거지인 지구를 소탕한 것뿐입니다.
전범재판 28. 영웅이라는 이름의 제물(3) 댓글 답변 中
제 세계관에서 어떻게 라인하르트의 신은하제국 경제가 파탄나게 되었냐고요? 그것은 일단 라인하르트가 페잔을 신제국의 수도로 결정했다는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페잔의 전 란데스헤르 아드리안 루빈스키는 페잔의 전략국부펀드인 '카우프 무역기금'을 횡령하여 잠적합니다.('찬란의 잔해'(5)) 문제는 이러한 국부펀드가 페잔의 기업들과 시민들의 출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국부펀드가 무너진 몇 달 후 결국 페잔의 기업들이 연쇄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페잔은 다른 어느 행성보다도 주민들의 상업과 금융업 의존률이 높은 곳이었으므로 당장 주민들이 대타격을 입게 되었고, 이런 주민들의 불만을 뒤에서 이용한 것이 루빈스키였습니다. 지구교 반란으로 페잔은 쑥대밭이 되었고 라인하르트는 페잔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페잔 붕괴는 제국의 경제를 두 갈래 형태로 타격했습니다. 우선 제국령의 각 성계들은 대부분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계 간의 무역이 없이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은 식량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더구나 옛 문벌대귀족들의 영지였던 곳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특용작물들 위주로 농업이 발달한 곳이 많아서, 그러한 곳들은 식량의 자급자족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본격적인 장거리무역은 아니더라도 인접한 성계들 사이의 교역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지방 교역 활동을 주로 담당한 것이 페잔 란트의 운송회사들이었습니다. 페잔인들의 명목상 국적은 은하제국이었으므로 이런 사업에 뛰어드는 것에 별 제약을 받지도 않았으며, 그렇지 않고 제국 사람들이 직접 운송회사를 만드는 경우에도 그 자금은 페잔의 자금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금들의 뿌리를 찾아가 보면 거기에는 자유금융기금과 카우프 무역기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페잔 국부펀드들의 붕괴는 연쇄적으로 제국의 지방 운송회사들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운영비용을 감내하지 못해 도산하거나 선단의 규모를 대폭 감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운송업의 마비는 고립된 행성들의 기초경제를 박살내고 맙니다.

또 다른 것은 미터마이어 가문이나 키르히아이스의 부친처럼 어느 정도 재력을 쌓은 평민들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이들이 주로 이용하는 금융서비스 역시 페잔의 자본이 지배하고 있던 것이죠. 페잔 경제와 금융이 무너진다는 것은 즉 그들의 금융자산이 무너져내린다는 의미입니다. 은행이 도산하고 제국마르크가 휴지조각이 되는 상황에서, 귀족들의 토지재산에 대비하여 주로 금융재산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 평민층들이 버틴다는 것은 무리에 가깝죠. 더구나 운송서비스가 마비되어 생필품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라면 재력을 쌓은 평민층들이 농노들보다 나을 것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인하르트의 가장 큰 지지층들이었던 평민들과 농노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라인하르트의 '공정한 재판과 공정한 조세'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조건이 맞는다면 군의 함선들을 이용하여 교역 네트워크를 회생시키고 안정을 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제국군은 지구교 반란 때문에 다른 임무에 여력을 쏟을 여유가 없었죠. 그리고 이것이 원작에서는 너무 빠르고 허망하게 퇴장한 페잔에 제가 준 무기이기도 합니다.
옛 동맹 성계 역시 많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국처럼 민간경제가 궤멸하는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은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은 역시 동맹의 산업은 제국의 그것에 비해 페잔의 침투가 적었다는 것입니다. 우선 동맹의 산업은 페잔 이전에도 독립적으로 발전해 오던 것이라 일부 귀족들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업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오던 제국에 비해서는 규모가 건실하다는 설정입니다. 따라서 귀족들이 별로 관심가지지 않는 지방성계 간 무역시장에 거의 무혈입성하다시피 할 수 있는 제국에 비해 동맹의 지역교역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레드오션에 뛰어드는 것과 가깝죠. 또한 제국마르크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제국에 비해 아무래도 화폐가 다른 동맹 시장은 페잔 자금력이 진입하기는 조금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 동맹의 민간경제는 제국에 비해 페잔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중앙정부가 막대한 차관을 진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더구나 세금을 쥐어짜서라도 돈을 마련해 페잔에게 갚는 중앙정부가 사라졌으니 더 형편이 나을 수도 있겠죠.

페잔에서 매입했던 동맹계 회사들의 주식은 별 가치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것을 매매할 동맹 주식시장도 사라졌고 페잔도 사라졌으며 이양받은 사람도 없으니까요.

자체기반이 취약한 경제가 무너지는 현상에 대한 일반론적인 접근이라고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딱히 세계금융위기와 유로존 붕괴 위기를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닙니다. 물론 전공하는 게 그쪽이라 은연중에 반영이 되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수탈적 농업과 극소수 상류층을 위한 서비스업만 극단적으로 발달한 3세계 개발도상국들을 생각하고 설정했습니다. 소위 바나나 공화국이라고 하는 곳들 말이죠.

그리고 페잔의 붕괴는, 물론 세계금융시장의 붕괴와 큰 맥락에서는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최근의 저축은행 뱅크런 사태가 더 가깝고 걸맞은 사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라인하르트 정부의 얕은 경제지식으로는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라인하르트의 책임이 아니라 제국의 경제체제 자체가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거나 그거나죠. 그리고 제가 위에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어디까지나 페잔의 '전략무기'입니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주기 위해 만든 무기죠.

자유공화국연합 역시 이러한 금융대란은 딱히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없습니다. 다만 생필품 등의 보급은 군에 의한 일시적인 배급체제를 통해 어찌어찌 해결해나가고 있는 실정이죠.

'어떻게 정치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잘 하면 된다'라고 대답하는 식의 무책임한 논리였죠. 김화백 만화도 아니고 말이죠......
전범재판에서의 제국 경제 파탄 간단정리
하이네센은 쇠락했습니다. 페잔이나 오딘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국 아래에서의 혼란을 겪었으며, 더 이상 정치적인 중심지도 아니니까요. 하이네센의 인구는 계속 유출되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제르론 회랑 주변의 대개발 붐을 노리고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죠.

자유공화국연합이 설립될 때 연합 정부와 라인하르트와의 거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즉 구 동맹령 대부분을 라인하르트에게 넘겨주되, 라인하르트는 이제르론 회랑 근처의 성계들에 공화주의자들의 국가가 존속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허가한 것이죠. 전범재판 본편을 읽어보시면 그 자세한 배경이 나옵니다.

자유공화국연합의 모체는 엘 파실 혁명정부였기 때문에, 그 정치적인 중심지 역시 하이네센에서 엘 파실로 이동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국이 흔들리면서 연합이 하이네센을 포함한 구 동맹령 대부분을 수복했을 때에도 연합은 하이네센으로 복귀하지 않고 이제르론 회랑 주변을 새로운 수도로 삼기로 결심합니다. 연합의 창설지이고, 교통의 요충지이며, 이제르론 요새가 있어 군사적으로도 방어가 훌륭하죠. 사실 은하 전체를 통괄하는 수도라면 단연 페잔이 최적임지긴 합니다. 하지만 페잔은 인외마경이 되어버렸으니까, 라인하르트처럼 그곳에 천도할 수는 없죠. 물론 이제르론 회랑은 정주행성이 없어서 상업적으로는 그닥 좋지 못한 곳이기 때문에 연합 정부는 그곳을 개발하기 위해 대규모의 자금을 투자했습니다. 이 개발이 완료되면 아마 하이네센은 경제적인 중심지라는 지위마저 잃어버리게 될 겁니다.

뭐, 하이네센의 몰락이 그리 슬프지는 않을 겁니다. 민주주의가 승리한 게 중요한 거지 하이네센이 승리한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연말기념 팬픽 그리고 또한 마음껏 푸르리라 上 작가 댓글 답변

해당 외전에 따르면 하이네센에서는 '겨울 장미'가 피는 정원이 있었는데, 엘 파실이 수도성이 된 뒤 엘 파실에도 겨울 장미 정원을 만들었고 엘 파실은 겨울이 되면 눈이 사람 키만큼 쌓일 정도의 다설(多雪) 기후임에도 이 장미만은 혹한과 눈에 개의치 않고 활짝 피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한편 이 외전에서는 양이 퇴역한 뒤 엘 파실에 지내다가 이웃집 꼬마였던 알렉스 그린우드(오리지널 캐릭터)가 양을 '신기한 옛날이야기 많이 아는 아저씨'인 줄 알고 책 읽으려고 양의 집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는데, 열다섯 살부터는 역사와 시사에 관한 토론을 하기 위해 집을 찾아오게 되었고 훗날 양을 한참 능가하는 역사학자로 성장해 후세의 역사학도들과 수험생들의 깊은 빡침(...)을 유발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해당 팬픽의 양은 중년부터는 역사학자로 살았고 전설적인 역사학자의 스승이 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해피 엔딩.[3]

4. 줄거리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부터 갈라진다. 하이네센에서 도망칠 때 양은 처음에는 자신들끼리 엘 파실로 도망치고 이제르론을 탈환할까 했지만, 생각해보니 얼마 안 가 말라죽을 것 같아서 뷰코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뷰코크와 춘우 지엔을 중심으로 '하이네센 대탈출'을 고안했고, 오리지널 캐릭터인 칼라일도 이 과정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당시에는 무명의 소장이었다고 한다) 작가 코멘트에서 월터 아일랜즈, 황 루이를 비롯한 동맹의 몇몇 정치인들이 하이네센 대탈출 당시 민간인 탈출 행렬에 합류했고[4] 뷰코크와 아일랜즈 등의 합류로 그럭저럭 괜찮은 정부를 세울 수 있게 되어 원작과 달리 롬스키가 단명하지 않고 큰 실책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탈출'이라고까지 명명된 것과 동맹의 정치인들을 비롯한 민간인들까지 탈출했다는 것, 당시 무명(無銘)의 소장이었던 칼라일이 이로 인해 이름이 알려진 것으로 보아 당시 원작보다 스케일 큰 탈출극을 벌인 것으로 추측되지만 양 모살미수사건 당시 민간인들은 자세히 모른다는 것으로 보아 아주 소문난 것도 아닌 듯. 또 헬무트 렌넨캄프의 시체를 인질로 삼아 하이네센을 탈출한 건 원작과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이후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에서 양 웬리가 정부의 부름을 받아 라인하르트를 상대하는 동안 뷰코크가 이제르론 요새를 탈취, 그 사실에 전의를 상실한 라인하르트과 거래하여 하이네센을 내주는 대신 민주공화주의의 존속을 약속받았다. '하이네센 대탈출'과 '정부의 부름을 받아'라는 구절이 상충되는데, 하이네센 대탈출의 규모를 보아 이 시점에서 동맹 정부가 완전히 유명무실해져 양 웬리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원작에서도 동맹 군부는 양 웬리를 체포할 힘도 의지도 없었고 레벨로의 정신붕괴로 군부가 알아서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을 대처하고 있었다는 걸 감안한다면 양 웬리가 하이네센에 돌아왔다고 한들 현 시점의 동맹 정부가 양을 어떻게 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을 것이다.

원작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원작에서의 라인하르트는 양이 이제르론을 먹었지만 10만척의 함대를 동원해 싸웠고 그게 깨지고서야 화평을 하려고 했다. 심지어 그 때 본인은 병이 났으니 라인하르트가 단순히 이제르론을 뺏긴 것에 쫄아서 화평한 것은 본 성격에 비춰 보면 맞지 않다. 애초에 이제르론 요새에 대해서 제국군의 수뇌부는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아서 제7차 이제르론 공방전 이후 제국군 병사가 이제르론 요새가 동맹군 손에 넘어갔다며 경악하자 오베르슈타인은 이제르론 요새는 언제든지 되찾을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고 제9차 이제르론 공방전 당시 로이엔탈은 이제르론 요새는 힘으로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면 저 요새의 주인은 대여섯 번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걸 못 뺏는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곁에 있던 렌넨캄프, 루츠 모두 이제르론 요새 공략전이 무모하다고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본작은 '라인하르트가 패배해 뉘른베르크 행이 된다'는 컨셉인 만큼 다소의 개연성 오류를 감수한 모양.

다만 작중에서 양이 '라인하르트와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겼다'라고 서술된 점, 당시 양이 정신 차린 동맹 정부에 불려나가 '시간벌이'를 하는 동안 뷰코크가 이제르론을 함락시킨 뒤 라인하르트가 전의를 상실했다는 것으로 보아 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 초반에 양 함대가 지독한 유격전을 벌여 반강제로 라인하르트를 버밀리온 성역 회전에 끌어들였듯 마르 아데타에서 라인하르트와 싸운 건 맞지만 원작처럼 마르 아데타에서 옥쇄를 벌인 건 아니고 최소한의 피해로 유격전과 지연전을 병행하며 시간을 버는 동안 뷰코크가 이제르론을 탈환하자 (일시적으로 멘탈이 나갔을) 라인하르트 군에게 영끌한 영혼의 한타를 성공시켜 원정군에게 공세종말점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면 황제가 된 직후+막 멸망시킨 페잔으로 막 천도라는 상황이 맞물린 라인하르트 군에게 있어 후퇴라는 선택지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페잔의 민심이반도 무시할 게 못 되는데 원작에서도 자유 무역 도시였던 페잔이 제국에게 멸망당하고 수도가 된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본작에서는 이후 1년도 안 되어 지구교와 루빈스키의 공작까지 합쳐져 페잔이 붕괴되는 사태를 맞이한다.

버밀리온 성역 회전에서 힐데가르트, 로이엔탈, 미터마이어가 엄연히 항명해서 하이네센을 제 마음대로 공격하고 트뤼니히트의 매국노 행각으로 라인하르트가 이긴 거지 이때 라인하르트는 엄연히 제국군이 동맹군보다 수적으로 우월했음에도 죽기 직전까지 몰렸는데, 원작과 달리 양이 동맹에 합류해서 싸운 만큼 쓸데없는 병력 공백도 없었을 테니[5] 병력도 원작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었을 거고 라인하르트가 전의를 잃어 이제르론 회랑 일대 일부를 남겨주었다고 할 정도라면 원작의 회랑 전투와 비슷하거나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라인하르트가 멘탈이 나갈 정도의 피해를 당시 양이 어떻게든 입히는데 성공했던 모양이다.

801년 말~802년 초 페잔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지구교 반란이 일어나 나이트하르트 뮐러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가 사망하고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은 실종되었으며[6] 라인하르트는 천도 2년만에 다시 오딘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라인하르트가 패배하고 공화국군에 붙잡힌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급으로 매우 중요한 게 페잔에서 일어난 이틀간의 사건이라고.

그러나 오딘 역시 지구교에게서 안전한 곳이 아니었고 옛 문벌귀족 세력들까지 다시 준동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더구나 군부에 침투한 지구교 세력이 페잔 반란에 호응하여 군사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일어나 근 1/4의 함대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라인하르트는 도박에 가까운 심정으로 마지막 전력을 끌어모았고, 그 병력으로 지구교 세력을 대토벌한 결과 간신히 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어느 정도 찾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 대가는 참혹하여 황제는 또 다시 자신의 군사력 중 1/3을 잃고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에른스트 폰 아이제나흐, 아달베르트 폰 파렌하이트 등의 제독들 또한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지구교와 옛 귀족 세력이라는 내부의 문제로 3년 전부터 발목을 잡히고 마침내 큰 피해를 입는 사이 양 웬리와 알렉산드르 뷰코크, 프란체스키 롬스키를 중심으로 한 신흥 민주공화세력은 이제르론 회랑과 요새를 끼고 상당한 힘을 쌓아올리는 데 성공했다.[7]

라인하르트가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 최후의 순간에 양 웬리와 뷰코크의 협격에 고배를 마시고 '온 우주를 손에 넣는' 원대한 야망을 이루기 일보 직전에 좌절한 순간부터 그의 패업(覇業)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물론 이제르론 회랑과 성계 네 개로 이루어진 신흥독립국이라면 당시 거의 온 우주를 지배하에 넣은 신 은하제국과는 그 세력이 비교가 안 되는 정도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 건강과 미용을 위해 식후 한 잔의 홍차'에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라인하르트가 방대한 신 영토를 안정시키느라(즉 구 동맹령의 대부분) 당장은 그 신흥세력을 짓밟을 여유가 나지 않았고, 신흥세력의 힘도 얼마 되지 않았을 뿐더러(군사력을 모두 그러모아봤자 세 개 함대를 만들 수준도 채 안 되었다), 무엇보다도 라인하르트의 성격, 혹은 긍지가 그 민주공화주의의 초라한 새싹을 완전히 짓밟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누구도 이렇게 지구교가 전 우주적인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암묵적인 평화를 얻는 대신 행성 하이네센마저 포기한 신흥 독립국의 앞날은 어찌 보면 뻔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양 웬리마저도 이 미약한 불꽃이 3년 이상을 가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3년 동안 은하제국의 젊은 황제는 전혀 그쪽에 신경을 쓸 수 없었고, 덕분에 그 동안 기른 힘으로 수없이 많은 잽을 얻어맞고 비틀거리는 제국의 심장에 마지막 칼을 꽂아넣을 수 있었던 것이다.

페잔은 한때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지만, 거듭되는 소요사태와 지구교 테러로 인하여 완전히 몰락하였다. 페잔의 몰락은 라인하르트가 라그나뢰크 작전으로 페잔을 침공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라인하르트의 페잔 강점은 페잔 독립주의와 그것을 이용한 지구교의 발흥을 낳았으며, 특히 새로운 황제가 결국 공화주의자들을 일소하지 못하고 새로운 국가의 성립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은 라인하르트의 힘에 대한 의구심으로 이어져 마침내는 페잔에서의 라인하르트의 지지율을 영에 가깝게 떨어뜨리고 페잔 지구교 대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 즉 페잔 시민들이 라인하르트를 혐오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페잔 경제의 급격한 몰락이었다.

페잔은 당시 제국과 동맹을 이어주는 무역허브뿐만 아니라 금융허브의 역할 또한 맡고 있었다. 특히 대(對)동맹 금융채권은 페잔 경제의 발전에 어마어마한 조력이 되는 것으로, 실제로 동맹이 지고 있는 차관, 민간투자를 합한 부채에 대한 이자수입만 따져도 페잔 1년 예산의 23%에 달했으니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이러한 금융구조는 페잔이 제국, 그리고 동맹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막강한 무기였으며 이 금융구조의 정점에는 페잔 란데스헤르가 총괄하고 있는 국가펀드 '페잔 란트 자유금융기금'과 '카우프 무역기금'이 있었다. 이들 국가펀드는 동맹이나 제국에 제공하는 차관의 실질적 자금줄로 변변한 군사력이 없는 페잔에게는 거의 이제르론 요새와 같은 중요한 전략무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라인하르트의 페잔 점령과 라그나뢰크 작전은, 필연적으로 국가펀드이자 사실상 란데스헤르의 사유펀드인 이들 기금들의 붕괴를 가져왔다. 우선 루빈스키가 지하로 잠적하면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카우프 무역기금은 대규모 횡령과 신용도 하락으로 인해 붕괴되었으며, 페잔 란트 자유금융기금 역시 구 동맹 차관이 동맹정부의 붕괴로 인하여 부도, 최종적으로는 펀드런이 일어남에 따라 모두 붕괴하고 말았다. 금융경제의 발달로 인해 전성기를 누리던 페잔 경제는 순식간에 그 기반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국가펀드의 붕괴는 국가펀드에 투자한 페잔의 민간기업들을 무너뜨렸고, 이는 몇백 년간 이어온 페잔 란트의 기반이 무너진 것을 뜻했다. 문제는 이러한 경제붕괴가 라인하르트의 발밑에서 보이지 않게 일어났다는 것이며, 일상경제활동의 안정화만으로는 이런 거시적인 경제붕괴를 막을 수 없었다. 실업자가 급격히 늘고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민심이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는 것을 라인하르트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버린 것이었다.

그로 인해 페잔인들의 반제국 정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고, 그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페잔에서의 대규모 테러, 반란, 폭동을 일으킨 것이 바로 지구교 세력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지구교 조직을 이용한 검은 여우 루빈스키였다. 루빈스키는 이러한 계획을 통해 라인하르트를 페잔에서 축출하는데 성공했으며, 분노한 라인하르트의 지구교 섬멸 작전은 엉뚱하게도 다른 지구교 간부들을 차도살인하는데 이용하여 잔존 지구교 조직을 모두 자신의 영향력 하에 넣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루빈스키가 그런 일들을 모두 성공시킨 원동력은 바로 발 빠르게 카우프 기금의 40%를 횡령하여 잠적한데 있었다. 란데스헤르는 언제라도 비상시를 대비하여 카우프 기금을 한 시간 이내에 모두 현실 화폐로 바꾸어 인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지구교 반란이 여러 번 있었지만 어째서 그 숱한 반란을 잘 버텨오던 제국이 유독 802년에 괴멸 위기까지 몰리게 되었는가? 후세의 역사가들은 흔히 그 유명한 "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격언을 들며, 근본적으로 라인하르트의 제국이 군정국가였기 때문에 일어난 참극이라 말한다. 신 은하제국의 고위 장성들은 대부분 공직을 겸하고 있었고, 이른바 ' 하이드리히 랑 사건' 이후로 고위 군인들이 문관직을 겸하는 경우가 더욱 심해졌다. 특히 전 우주를 떠들썩하게 했던 하이드리히 랑 사건은 기존 제국 공무원들, 특히 경찰력의 대숙청으로 이어졌고, 이 인재 공백을 메꾸기 위해 위관/영관급 장교들까지도 대거 문관직을 겸하게 되었다.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하이드리히 랑 사건은 본작 세계선의 주요한 떡밥으로 고위 관료 몇 명의 죽음으로 끝난 게 아니라 라인하르트 페잔 정부의 실무진에게 장기로 비유하자면 차 떼고 포 떼고 졸까지 다 뗀 수준의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로이엔탈의 현 처지를 보아 노이에란트 전역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8] 원작 이상의 엄청난 사고를 쳤던 걸로 보인다.

결정적인 문제는 바로 이들이 군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지구교 반란에 현직 장교들을 진압대로 투입해야 하는 불상사를 야기했고, 페잔 반란이 단순히 지구교도들의 소요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가세한 페잔 독립운동의 양상을 띠면서 수많은 장교들이 이 거대한 파도에 맞서다가 사망하게 된다. 심지어 황제 라인하르트마저 남아있는 측근들과 함께 간신히 페잔을 탈출하는데 성공했을 정도로 이 사태가 제국에게는 너무나도 큰 위협이었으며, 결국 정예 병력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유로 상당수 날려버리고 만 제국군은 쓸만한 운용 인력을 보충 받지 못한 채 서서히 침몰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자유공화국연합에 패배했다, 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중론이며 당시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처럼 '애초에 그런 전쟁광이 윗자리에 앉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하튼 미터마이어와 로이엔탈 원수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제국군과 제국을, 그리고 황제를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떠받들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패배를 모르는 질풍 볼프와 금은요동의 제독이라 해도, 이미 무너져 내리는 군대를 가지고 무엇을 해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황제의 지지기반이 점점 무너져 내리는 상태에서 라인하르트의 정신은 계속 피폐해졌고, 그래서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영토를 포기하고 세력을 굳히며 다시 힘을 비축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는데도 라인하르트는 이와 정반대인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온 병력을 그러모아 이제르론 회랑 주변의 공화주의자들을 쳐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계책이었다.

미터마이어와 로이엔탈은 패배 이후 자신이 죽더라도 라인하르트를 어떻게든 말렸어야 했다고 크게 후회했다. 그도 그럴 게 당시 로엔그람 왕조는 오딘으로 환도한 상태였으며 제국령 대부분이 지구교와 문벌귀족 잔당 토벌 등등으로 크게 혼란스러워져 영토의 상당수가 유명무실해진 상황이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오딘에서 이제르론 회랑까지 원정을 나간다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컸다. 제국 경제의 붕괴로 인한 혼란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원작 제국령 침공작전이 얼마나 까이는 자폭인지를 생각해보자. 작가는 이를 '자멸'이라 정의했는데, 사람은 궁지에 몰릴수록 도박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으며 승리를 거듭하는 것으로 이름뿐인 가난뱅이 귀족에서 우주의 정복자가 된 라인하르트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평했다. 이는 원작에서 라인하르트가 승부 드립을 치며 굳이 이제르론 공화정부에 싸움을 건 것에서 착안했다고.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후세에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라 불리게 되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직후 지구교에 의해 오딘이 초토화되며 황후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마저 혼란 중에 살해당하고 설상가상으로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 대공비와 황태자 알렉산더 지크프리트 폰 로엔그람은 어디론가 실종되었다. 하필 라인하르트와 동시에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까지 체포당해 실질적으로 제국군 중에 남은 이는 볼프강 미터마이어밖에 없었다. 그를 위시한 몇몇 장성들이 황제의 둘째 아들 오토를 데리고 변방 성계로 도주하여 간신히 은하제국의 명맥을 잇고 있었지만 그처럼 초라한 세력이 생산력마저 별 볼 일 없는 성계에서 달리 전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여하튼, 라인하르트가 어마어마한 출혈을 무릅쓰면서 지구교와 잔여 문벌귀족 세력을 먼저 정리해놓은 탓에 아이러니하게도 양 웬리와 자유공화국연합 정부는 간단하게 구 제국령과 옛 동맹령, 그리고 페잔 등지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당시의 세력비를 나눠보자면, 자유공화국연합 57, 각 성계의 연합 자치체 24, 지구교 잔당 13, 제국 잔여세력 6 정도로 세력이 나뉘어 있었다. 그 덕에 옛 은하제국의 뒷정리에 양 웬리가 들여야 한 시간은 석 달 남짓할 뿐이었다. 다만 작가의 언급에 따르면 공화국도 처지가 처지라 현 시점에서 영토 상당수는 직접 지배가 아닌 간접 지배 상황이며 현재 은하계는 온갖 군소 잔여 세력들이 판치는 중이라고 한다.

4.1. 프리퀄 :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 혹은 유사 이래 최대의 대역전극이라고까지 불리는 그 일, 이제르론 회랑 최종전은 우주력 802년 12월 23일에 발발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제국을 상대로 공화주의자들이 최종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둔 날로, 자유공화국연합이 우주를 통일한 날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마침내 은하제국이라는 것이 무너진 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수적 열세를 딛고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단순 비교로만 보아도 네 배가 넘는 제국군 함대를 상대로, 그것도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과 그의 뛰어난 용장들을 꺾고 자유공화주의자들이 어떻게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는가? 그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도회'의 넉 달 전, 우주력 802년 8월 17일로 먼저 기억의 태엽을 감아야 할 것이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신 은하제국은 구 은하제국과 달리 상당히 대중주의적인 국가였다. 대귀족-중소귀족-평민-농노로 이어지는 견고한 신분질서를 타파하고 '황제 아래에서는 누구나 평등할 뿐'이라는 자세를 취한 라인하르트의 제국은 어떤 엘리트 집단의 지지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황제 개인의 능력과 인기를 체제 유지의 주춧돌로 삼은 형태였다. 문벌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은하 통일 직전까지 간 것도 이러한 '민중의 지지'라는 원동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루돌프 폰 골덴바움의 제국보다 훨씬 건전한 라인하르트의 제국은 그 건전함 때문에 발목을 잡히고 결국은 침몰하게 된다.

어째서 그러한 민중의 지지가 결국 신 은하제국을 멸망의 길을 걷게 했는가? 라인하르트의 옥좌는 수많은 신민들의 지지 위에 놓여 있었다. 그걸 뒤집으면, 그러한 민중의 지지가 떠나가면 옥좌를 지킬 방패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황제 개인에 의존했던 신 은하제국의 체제는, 그 황제의 빛이 흐릿해지자마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그 빛을 흐릿하게 한 첫 번째 요인이 바로 지구교 문제였다.

지구교의 준동이 신 은하제국에 끼친 가장 큰 피해는 역시 황제가 새로운 수도로 정한 페잔에서의 대난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소요로 인하여 신 은하제국은 우선 수많은 양장(良將)들과 뛰어난 일꾼들을 잃었으나 다음 두 피해에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 것이었다. 첫 번째는 이 난동이 단순한 지구교의 테러가 아니라 페잔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황제 라인하르트에게 본격적으로 '침략자'라는 이미지가 씌워지게 된 것이다. 전 우주적으로 라인하르트의 인기는 이 사건, 그리고 그에 따른 무자비한 지구교 숙청을 계기로 급락하게 된다. 또 하나의 피해는 라인하르트의 패왕 혹은 승리자라는 이미지에 금이 가게 된 것이다. 민중은 젊고 위대한 개혁 정복자에게 환호했던 것이지 애송이 패배자에게 환호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골덴바움의 은하제국에서였더라면 이러한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는데, 그들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충성을 바치는 비밀경찰들과 귀족들이라는 고정된 지지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돌프 폰 골덴바움은 그러한 헌신적인 종복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선사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불만세력을 그들을 통해 억눌렀던 것이다. 하지만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 라인하르트는 그럴 수 없었고, 때문에 거듭되는 악재와 무리수들 때문에 제국 경제는 엉망이 되었으며(특히 페잔을 잃어버린 것이 컸다.) 제국군은 갈수록 몰락하는 상황을 타개하고 민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새로운 해결책이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결국 우주력 802년 8월 17일, 라인하르트는 비밀 어전회의에서 자신의 조커를 꺼내들었다. 한창 세를 불리고 있던 자유공화주의자들의 신생국 자유공화국연합을 상대로 자신과 국가의 운명을 건 도박을 붙인 것이었다.[9]

제국 수도 오딘에서의 첩보는 결정 11일 후인 8월 28일 이제르론 요새에 도착했다. 8월 24일부터 군사적인 준비가 시작되었으니, 꽤 빨리 자세한 정보가 전달된 것이다. 물론 그때에는 병력의 규모라던가 하는 구체적인 정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본적인 정보들, 즉 지휘관들의 인선이라던지 대강의 이동경로 같은 정보들은 상당히 이른 시점에 밝혀진 것이다. 더구나 라인하르트는 딱히 이 계획을 비밀스럽게 진행하지 않았다. 사실 이 원정이 군사적 승리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측면이 컸다.

첩보를 입수한 자유공화국연합 정부는 가용 전력 전부를 소집하여 방어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함과 순양함, 우주모함 등의 주전력이 3만 척이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소 7만 척 이상의 주력급 함대가 침공해 올 것이 뻔한 상황에서의 대응으로는 상당히 빈약한 대비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양 웬리와 뷔코크, 칼라일과 메르카츠 등의 자유공화국연합군 수뇌부에서는 기존의 전통적 우주함대전 교리를 버리고 뭔가 다른 방책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동맹의 군사 생산 능력은 제국보다 뒤떨어졌으며, 이는 제국의 전함들이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건조되는 것에 반해 동맹의 전함은 표준화된 설계로 대량 양산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유행성동맹군이 자유공화국연합군으로 재편된 후에도 이러한 사정은 나아지기는커녕 더욱 심각해졌었다. 무엇보다도 변방 성계 몇 개로는 제대로 된 대량 군수생산 체제를 갖추기 힘든 탓이었다. 비록 라인하르트가 근래의 사태로 수많은 정예병과 함선들을 잃었다고는 해도 아직 그에게는 발할라 성계 주변의 군수생산시설과 10만에 육박하는 함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고작해야 한 해 칠천 척의 주력함을 뽑아낼 수 있었던 자유공화국연합은 사실 그때까지의 함대전으로는 도저히 승산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자유공화국연합군 수뇌부가 기존 교리를 모두 폐기하고 새로운 대책을 찾아나선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 양 웬리는 기적을 일으키고 칼라일은 패배를 분쇄하는 지휘관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신생 공화국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점이었을까? 긴급대책회의에서 뷔코크 주석이 제시한 질문에 이그나시오스 칼라일 대장은 아주 명쾌한 답을 제시했다. "더 튼튼한 배입니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구 동맹 계열의 군함 건조는 제국에 비해 전술기동성과 생산성이 좋지만 대신 전략기동성과 생존성이 떨어졌으며, 특히 브륀힐트나 퍼시발 등의 최신예 제국군 전함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군함은 당연히 보유하지 못하였다. 물론 가장 암울한 것은 개전까지 기껏해야 석 달 정도 남았다는 것이며, 이 동안 과부하를 걸어서라도 전함을 건조해 봤자 이천 척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확실히 보다 생존성이 높은 전함이 필요하다는 것은 정론이었지만, 실현 가능성이 매우 떨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기존 함선을 개조하는 것은 신규 건조보다는 낫겠지만, 그 역시 석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 발목을 잡았다. 특히 전통적인 군함의 능력치, 즉 공-방-주의 밸런스를 맞추는 식의 개조는 무리에 가까웠다. 자유공화국연합군의 구세주가, 율리시스에서 독자적으로 열린 대책회의의 말석에서 어렵사리 입을 연 것이 바로 그때의 일이었다.

입을 연 마누엘 하를라크 소령은 테르누젠 사관학교 최후의 정규 졸업생이었다. 생도 시절의 양과는 달리 기관공학과 전투정 조종, 함선정비 등의 과목에선 항상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의 과목에서는 간신히 낙제를 면할 정도의 성적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양 웬리와 매우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전사편찬 연구가가 되는 것 외엔 관심이 없던 양 웬리 원수처럼 하를라크 소령은 의무복무 기간 후 바이코누르 설계국이나 스파이럴 설계국의 전함 설계 전문가가 되는 것을 꿈꾸어 왔지만 그 꿈은 다시는 이루어지지 못할 꿈이 되어버렸다. 2차 라그나로크 작전 당시 티아마트 성계가 제국군에 접수되면서 테르누젠에 위치한 두 설계국 역시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임관 4년 만에 소령 계급장을 단 것이겠지만, 이러한 미증유의 혼란기에는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잘 눈에 띄지 않는 유형의 사람으로, 평소에는 기함 율리시스의 핵융합로 통제를 담당하느라 거의 보이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 양 웬리에게 직구를 던진 것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물론 평소 양의 스타일대로 '자유로운' 의견개진이 보장된 회의였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그때까지 별다르게 나온 의견은 없었다). 물론 익히 알려진 것처럼, 그가 다시 입을 열자 이제 그런 사소한 것에 놀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자유공화국연합군 전 함대의 생존성을 향상시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일주일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라는 말에, 적막이 회의실을 뒤엎었다. 일주일이라니, 이 무슨 헛소리인가? 좌중은 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경악했다. 심지어는 양 웬리마저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런 말단 소령의 황당한 소리가 깨끗이 무시당하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들은 이 정도에서 끝내지 못하고 앞으로도 한참 더 놀라야 했다. 양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하를라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적들의 최신예 전함이 놀랄 만한 생존성을 지닌 것은 바로 경면장갑(鏡面裝甲)의 개념이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광자포 공격의 경우 직격이 아니라면 에너지 중화 자장을 뚫고 들어온 포격에도 거의 타격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함선에도 경면장갑을 추가하면 충분히 함선의 생존성을 향상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경면장갑...... 확실히 경면장갑을 추가한다면 생존률이 최소 다섯 배 정도는 오르겠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 함대에, 그것도 일주일 안에 경면장갑을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제국군도 최신예 함정 일부에만 적용하고 있는 신기술을 말이지."

하고 지적한 것은 무라이 중장이었다. 확실히 하를라크의 방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가까웠기에, 상식인 무라이의 지적은 평소라면 지극히 타당한 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라이의 지적도 그 때의 하를라크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영구적인 경면장갑이라면 물론 일주일은커녕 1년으로도 모자랍니다. 하지만 저는 굳이 그런 장갑까지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번의 전투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일회용 경면장갑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무라이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를라크 소령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분명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긴 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뭔가 엄청난 게 터질 것이라는 불안감, 혹은 기대가 어느새 그의 몸을 꼼짝하지 못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경면장갑은 빔을 반사시켜 쳐내기 위한 장갑입니다. 적들이 쓰는 방법처럼 특수 패널을 이어 붙여 영구적인 장갑을 만들기에는 시간도 없고 여건도 허락하지 않습니다만 어차피 저들의 카이저가 친정한다는 것은 이 한 번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의미, 아군에게나 저들에게나 그 다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단 한 번 일전을 버틸 정도의 대용품을 함체에 씌우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자 더스티 아텐보로는 대체물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지적하고, 하를라크는 "아니오, 생산은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며 등 뒤를 가리켰다. 함교의 창 너머로 비치는 그것은, 은빛을 띠고 있는 유체금속 바다의 인공행성. 바로 이제르론 요새였다.[10] 하를라크 소령의 아이디어는 어찌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다. 이제르론 요새를 방어하고 있는 유체금속층은 확실히 막대한 양으로, 얇은 막이라도 충분히 포격 정도는 몇 번 버틸 수 있을 것이었다. 바로 그 막을 함선들에 얇게 붙여서, 포격을 임시로 막아낼 정도의 임시 장갑을 두른다는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청중들을 향해 소령은 이 말로 쐐기를 박았다.

"유체금속층의 10분의 1 정도를 사용한다면, 한 다섯 번 정도의 포격은 막아낼 장갑을 모두 두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성능만 언급한 것이 아니어서, 소령의 '일주일 안에 전 함선을 강화시키겠다!'는 실행방법 역시 기가 막히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함선을 작은 이제르론 요새로 생각하는 것으로, 일종의 강한 자기장을 함선 표면에 생성하여 '금속층'을 함선에 접착한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자유행성동맹의 군함에는 그런 식의 자기장 생성기 따위는 없었지만, 없다고 굳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소행성 등지의 광석 채굴기들은 흔히 강한 자기장을 이용해 광석들을 적재하여 운송하곤 했다. 그 편이 따로 적재공간을 만들어 광석들을 싣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양을 나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채굴기에 달린 자기장 발생기들을 적절히 함체의 표면에 붙이고, 자기장을 조절한 후 이제르론 요새의 도크에 들어갔다 발생기를 켜고 그냥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유체금속층을 뚫고 나와야 하기 때문에, 그 동안 자연적으로 함선 표면에 임시장갑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장갑의 부착이 불완전할 수도 있으므로, 스파르타니안의 응급수리키트가 작동되는 식으로 자성 코팅을 함체에 도포하여 더욱 강한 장갑의 부착을 하여도 함선 한 척당 하루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소령이 아이디어를 모두 설명했을 때에는 이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런 식의 방편은 대규모 장거리 원정에서 쓰기는 당연히 무리가 있는 전법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의 임시방편으로는 이것보다 훌륭한 아이디어는 없었다. 오로지 이제르론 요새를 끼고 있는 열세한 공화주의자들이기에 나올 수 있었던 방편이었던 것이다. 올리비에 포플랭이 함재기는 어쩔 거냐 묻자 양 웬리는 10초 정도 생각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번 작전에서 함재기의 출격은 가급적이면 절대적으로 배제할 겁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알다시피 우리 전투함들의 가장 약한 부분은 바로 함재기가 수납되어 있는, 함선의 하단부입니다. 공격받으면 그대로 폭발하게 되지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소중한 병력을 잃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더구나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함재기를 내보내 전술제공권을 쥐는 것이 과연 이득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포격 대신 함재기를 내보내는 것은 원래는 공격거리의 증강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포의 사정거리보다 먼 거리로 함재기를 날려 목표를 공격하는 것이 과거 2차 대전기에 항공모함 시대가 열렸던 제일 큰 원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함재기로는 절대로 주포와 미사일의 사정거리를 넘을 수 없으며, 오히려 난전의 근접병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은 적에게 근접을 허락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됩니다. 기술에서건 숫자에서건 이길 수 없으니까요. 아까의 아이디어와는 관계없이, 철저하게 근접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처음부터의 구상이었습니다. 물론 격납고 역시 추가적으로 봉쇄하여 적의 공격에도 허무하게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격납고를 비우지는 않겠지만, 함재기의 출격은 가능하면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양 웬리의 발언은 사실 그때까지의 함대전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확실히 양의 말은 사정거리의 차이라는 측면에서는 옳은 말이었지만, 화력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가 있는 말이었다. 모든 함대전의 끝이 근접 후 함재기의 출격과 미사일 교환전으로 끝나는 이유는, 원거리에서의 포격만으로는 적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기 쉽지 않았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마치 과거 나폴레옹 시대의 전열보병 전술은 최후에는 모두 총검 돌격으로 끝났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폭탄 하나로 적의 전함을 끝장낼 수 있었던 항공모함의 전성기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양 역시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이 지금까지의 전술교리와는 전혀 다르며, 또한 들었던 예시 또한 이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조용한 어투로 설명했다. 양 웬리야말로 자신의 생각에 담긴 문제점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전술제공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생존성을 높이는 것에 제가 극단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이 싸움은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전투에서 만일 어떻게 저 카이저를 격퇴한다고 해도, 우리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유공화국연합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적을 격퇴하는 것만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승리입니다. 그래서."

하고 양은 칼라일을 쳐다봤다. 칼라일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태블릿을 이리저리 주무르더니, 회의장 중앙에 솔리비전 디스플레이를 띄우고 말을 이어받았다. 칼라일은 전술제공권은 포기하더라도 다른 쪽에서 보충이 없으면 이기기 힘들지만 스파르타니안의 제공 범위 따위는 블랙홀 너머로 날려버릴 화끈한 날개를 함대에 날아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다가 아직 완성된 시스템이 아니라고 대답한다.[11]

종래의 사고방식으로는 함선의 기동성을 높이는 방법이란 대단히 한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들의 세세한 각론은 각각 다를지 몰라도 총론은 모두 동일했다. 엔진의 출력을 높인다, 이것이 당시 엔지니어들의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확실히 제국군만 봐도 다수의 고속전함을 운용하여, 함대전의 전술기동성에서 상당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폭풍전야의 공화국군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런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바로 칼라일이 말했던 '화끈한 날개'였던 것이다. 이 날개는 공화국군의 여러 다른 면모가 그렇듯 발상 자체는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지만 웬만해서는 절대로 나오지 않을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바로 모든 함선에 기본사양으로 장착되어 있는 워프항행 엔진을 이용한 함대기동성의 극적인 증대를 꾀한 것이었다. 종전 후 민간에까지 퍼져 급속도로 초장거리 항행에서의 주류운항법으로 자리잡은 이른바 '다중동기화워프항행'이 그것이었다.

이 기술은, 그 이름을 제외하고는 칼라일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한 대로 그 자리에서 공표되지는 않았다. 다만 칼라일은 그 자리에서 몇 가지 명령을 하달했을 뿐이다. 전장 곳곳, 특히 전략적 요충지에 소형 인공위성을 몇 만 단위로 '살포'할 것과, 각 함선의 워프 엔진의 출력에 제한을 걸 것, 순양함 몇 척의 통신기능을 대폭 강화할 것, 그리고 함대를 여러 소함대 체제로 나누어 적을 이제르론 요새까지 유인하는 작전의 사전훈련명령. 토르 하머의 화력으로 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겠다는, 일종의 비대칭전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그날의 대책회의는 그것으로 마무리지어졌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날 회의에서 나왔던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은, 사흘 정도 후에 다수의 정보망을 통해 브륀힐트의 함교로 전송되었다. 라인하르트는 스크린을 보면서,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책(奇策)들임은 틀림없습니다. 확실히 이런 방법들이라면 아군도 일방적으로 저들을 몰아붙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기책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것이 전쟁입니다. 저 양 웬리가 이것만으로 대비를 마쳤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금은요동의 제국원수, 오스카 폰 로이엔탈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이 정보들은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정보들입니까?"라는 루츠 상급대장의 질문은 물론 당연한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일반적인 확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 건강과 미용을 위해 식후 한 잔의 홍차'로 대표되는 그 유명한 이제르론 요새 탈환작전, 역사를 바꾼 협격을 통해 결국 라인하르트의 은하통일이 끝내 저지된 것의 시발점은 바로 양의 가짜 전문 폭풍에 루츠가 속아 넘어간 일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보 자체는 신뢰할 만하오. 실제로 이런 조치들이 취해지고 있는 것을 여러 채널을 통해서 확인했으니까. 문제는 이런 수단들은 과연 무슨 목적을 위한 것인가, 이걸 알아내는 것이지만."

"진짜 패를 보여줘서 속임수를 쓴다는 말입니까, 과연."

슈타인메츠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양 웬리의 책략이 무서운 것은, 어느 것이 속임수고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도저히 구분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군. 그렇다면, 일단 우리가 미끼를 던져 보도록 할까. 어느 것이 진실인지 드러내지 않을 수 없도록 말이야."

황제의 얼음빛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우주력 802년 9월 19일, 이제르론 회랑 입구 주변에서 공화국군의 수송선 20여 척이 폭발했다. 폭발은 함내에 동시다발적으로 몰래 장착된 폭탄에 의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승조원 300여 명이 사망하고 수송선에 적재되어 있던 인공위성들이 모두 날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화국군 특별조사본부는 꼬박 하루를 철야한 결과 이 사건이 은하제국 밀정들에 의한 조직적인 공격행위라는 것을 밝혀냈다. 수송선들은 칼라일의 명령대로 소형 인공위성들을 '살포'하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인공위성의 배치 위치나 동원되는 수송선들, 그리고 그 항로 등은 명백한 극비로 절대로 발설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보가 어디선지 모르게 새어나간 것이었다. 공화국군의 수뇌들은 자신들의 보안체계에 어마어마한 구멍이 뚫렸음을 깨달은 것이다.

곧 '매우 강도 높은' 색출이 시작되었다. 밀정들 여럿이 잡혔고, 강도 높은 심문 끝에 그들이 대책회의에서 의논된 정보부터 시작해서 훈련계획들과 작전계획들까지 교묘하게 빼내어 로엔그람에게 보내었음이 밝혀졌다. 모든 보안시스템과 작전계획들이 바뀌었고, 공화국군의 '소함대들이 적군을 이제르론 요새까지 유인한다'는 작전훈련계획 또한 폐기되어 중규모 분함대들이 지형을 이용해 적군의 분단을 꾀하는 작전의 훈련계획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사흘 후, 또다시 이러한 정보가 몇 개의 정보채널을 통해 브륀힐트의 함교로 전해졌다. 공화국군 정보사령부는 이러한 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금발의 카이저는 브륀힐트의 함교에서 새로 들어온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다. 제국군 밀정들이 공화국의 수송선들을 폭파시킨 것은 모두 그가 던져놓은 미끼였다. 물론 수송선 몇 척이 폭발한 것 자체는 공화국군에게 그닥 큰 피해는 아니었으며 라인하르트 역시 그런 조그마한 이득만을 보려고 미끼를 던진 것은 아니었다. 라인하르트는 공화국군이 미끼를 물어, 정보가 실제로 새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공화국군은 정보가 새나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밀정들 여럿을 체포하고 보안 시스템과 작전계획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런 색출로도 밀정들을 완벽하게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이러한 정보는 바로 은백색 유선형 전함의 함교로 보고되었다.

라인하르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면서 와인 글라스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사소한 전과는 둘째치고서라도, 허를 찔린 공화주의자들이 당황하면서 자신들의 계획에 모조리 손을 대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를 기분 좋게 했다. 라인하르트 자신에게 들어오는 정보가 믿을 만하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일이었다. 양의 '철저하게 근접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발언까지를 검토하던 슈타인메츠가 스크린 구석을 흘끗 쳐다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위성을 뿌린다니, 대체 어떤 목적일까요?"

"저들의 위성에는 제플 입자 발생기와 중화자장 발생기가 달려 있다고 합니다. 용량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다수가 모인다면 꽤 넓은 범위에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체 발전기와 연산장치, 통신 모듈과 함께 소형 위성에 달려있는 것이 바로 제플 입자 발생기와 중화자장 발생기였다. 인접한 위성들이 서로 연동하여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특이한 기능은 아마 제플 입자 살포 혹은 중화자장을 동시에 생성하기 위한 목적일 터였다.

" 사르갓소 지대를 급조하려는 것이다. 확실히 그들이 생각할 만한 수법이군."

" 공성전......을 강요하겠다는 건가. 과연."

라인하르트와 제독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우주 공간에서의 회전(會戰)이라는 것은, 지상의 싸움에 비유하자면 탁 트인 평원에서의 결전과 흡사하다. 엄폐물이 없는 싸움에서는 병사들 자신들이 엄폐물이 되고 방책이 되며 성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회전의 승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대열의 견고함과 기동성, 그리고 충돌시의 수적 우위였다.

그러나 싸움터가 될 이제르론 회랑의 경우 그렇잖아도 좁고 복잡한 통로인 데다가 이제르론 요새라는 강력한 주포와 장갑을 갖춘 일종의 성채까지 있는 곳이었다. 대규모 함대가 동시다발적인 화력을 전개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따르는 전장이었으며, 어찌 보면 라인하르트가 뒤통수를 맞은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에서의 싸움보다도 더욱 수비측에게 유리한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마르 아데타의 싸움에서는 이제르론 요새라는 변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공화주의자들은 그걸로도 모자라 군데군데 위험한 장애물까지 깔아놓겠다는 것이었다. 여차하면 엄폐물로도 쓸 수 있고 기뢰로도 쓸 수 있는, 그야말로 자신들의 강점을 극대화한 포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힘의 절대적인 열세는 어쩔 수 없다.' 하고 로이엔탈은 생각했다. 물론 양 웬리는 '마술사'였으며, 뷰코크와 칼라일 또한 자신들에게 생각지도 않은 상처를 입힌 적이 있는 뛰어난 지휘관들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전력차가 너무나도 벌어지는 이 상황에서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제국군에게도 회전을 허락하지 않는 대신 자신들도 회전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킬 수는 없는 것이었다. 전략적으로 보았을 때 힘이 열세인 자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조커는 '우주가 넓다'는 것, 즉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을 선택할 수 없던 공화주의자들은 결국 최대한 할 수 있는 보강을 하는 대가로 역전의 여지를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더 수가 많고 더 부유하며 더 잘 버티는 쪽이 이긴다는 것은 상식과도 같은 일이었다. 더구나 천재는 그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양이 아무리 기적의 마술사라고 해도, 마술사는 세상을 속일 수는 있지만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는 존재였다. 하루하루 세상을 바꾸는 존재, 그의 카이저와는 달리. 저 버밀리온의 무력감을 이제 다시 양 웬리에게 선사할 차례다, 하고 로이엔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심정은 아마 다른 제국군의 장수들도, 그리고 라인하르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후세의 사가들 중에는 이미 이 시점에서 자유공화국연합의 승리가 결정된 것이라는 대담한 해석을 내리는 이들도 있다. 라인하르트에게 전달된 정보는 분명 한 점의 거짓도 속임수도 없는 깨끗한 정보였지만, 진실 그 자체가 라인하르트와 제국군을 모두 속여넘겼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인 해석이긴 하지만, 확실히 제국군 수뇌부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들을 끊임없이 검토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서도 결국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은 생각해 볼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제국군은 패배하기 전까지 자신들이 대체 어떻게 패배하게 된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어찌되었건 제국군은 우주력 802년 10월 8일, 12만 척에 가까운 대군을 이끌고 이제르론 회랑을 향해 출정했다. 라인하르트는 이동하는 중에도 주요 성계에 들러 민심의 동요를 막고 신민들을 안심시키는 행보를 빼놓지 않았다. 자유공화국연합 역시 전시 상태에 돌입하여 엘 파실 성계의 공화국 정부와 민간인들을 이제르론 요새로 피신시켰고 함선의 보강과 소형 위성의 살포, 소행성 요새화 등의 전쟁 준비를 마쳤다. 이제 시계를 우주력 802년 12월 18일, 그러니까 라인하르트의 함대가 이제르론 회랑 근처까지 육박해 들어왔던 개전 닷새 전으로 돌리자.
Q. 인공위성의 클라우드 컴퓨팅을 통한 전역 한정화 후 병력 집중을 통한 제한적 화력전...이라고 하기에는 다중 동기화 워프항행이라는 기법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비대칭전력으로의 유인 후 '극적인 기동성'을 이용한 이탈로 짐작되긴 하지만...과연? 정말 전투가 기대됩니다!!

A. 사실 '워프'가 통용되는 세계관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발상의 전환이죠. 자세한 사항은 아마 한 6화에서 7화 정도에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Q. 전화에서 칼라일이 꺼내든 카드는 꽤 참신하군요! 전범재판 18화에서 잠깐 언급되는, '단거리다중동기화워프 항행'의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여기서 나왔군요. 함선 한 척의 커다란 워프엔진으로 워프능력을 끌어들이는 것보다 함선 여러 척의 조그만 워프 엔진의 동기화를 응용한 단거리 워프라..... 민간에서도 잘 써먹힐 것 같습니다.

라인하르트 측에서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은하제국의 밀정들을 자유공화국연합군 중추부에 잘도 잠입시켜 놓았군요. 자유공화국연합군 측에서도 이러한 사태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뒤통수를 맞았을 정도로요. 게다가 수송선 테러 건으로 인해 귀중한 함선과 장병들을 잃었지요. 앞으로의 고난이 느껴집니다.

지금까지의 작전을 종합해볼 때 아무래도 자유공화국연합 측에서 일종의 참호전을 벌일 생각인 듯하네요. 그런데 정부 각처와 민간인들을 격전지가 될 예정인 이제르론 요새로 피신시키는 건 좀 아니다 싶습니다. 원래 국가적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시에는 정부와 민간인들을 후방으로 대피시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A. 자유공화국연합은 동맹과 다릅니다. 평시 수도인 엘 파실에서는 도저히 방어전을 수행할 수가 없습니다. 딱히 후퇴할 안전한 배후지대도 없습니다. 차라리 중장갑과 방어 시설이 완비되어 있는 이재르론 요새로 들어가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 4 댓글 답변

이후 연재가 중단되어 도중은 알 수 없으나, 5. 성자와 악마(3)에서 전투의 최후가 묘사된다.

은하제국군 총기함 브륀힐트는 옆구리에 광자포를 두 대 맞고 기동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다. 비단 브륀힐트만 그런 것이 아니라서 라인하르트 본인의 호위함대는 모두 항행불능 상태에 빠져 있었고, 오스카 폰 로이엔탈 코르넬리우스 루츠, 칼 로베르트 슈타인메츠의 함대 역시 더 나을 게 없던지라 도저히 라인하르트를 도우러 올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다. 개중 유일하게 항행 가능한 상태였던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제독의 함대는 포위망 안쪽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있었지만, 에드윈 피셔 대장과 더스티 아텐보로 중장(대장이 된 것은 전쟁이 종결된 후이다)의 협격에 꼼짝 못하고 본대가 처참히 얻어맞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볼프강 미터마이어는 묘사되지 않는데 라인하르트가 패배한 직후 지구교에 의해 오딘에 폭동이 일어나 황족들이 참살당하고 미터마이어가 오토를 데리고 피신한 것으로 보아 당시 오딘에 남아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슈타인메츠가 먼저 관자놀이에 블라스터를 대고 방아쇠를 당겼으며(바로 그 후에 기함이 폭발했다), 루츠와 로이엔탈 역시 비슷한 식으로 최후를 준비하려 하고 있었다. 한편 라인하르트는 평소 즐기던 와인 글라스에 독약 캡슐을 천천히 부숴놓고 있었다. 방법은 달랐지만 그들 모두 패장에게 어울리는 것은 죽음뿐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 순간 자유공화국연합군의 포화가 뚝 멎었고, 빔 다발 대신 전문 한 통이 날아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자유공화국연합군 최고사령관 양 웬리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에게 화상 회담을 제의한다. 통신망 개방을 요구한다."

라인하르트는 글라스에 와인을 한 잔 따라놓고 통신망 개방을 명령했다. 그는 어차피 양 웬리가 무슨 소리를 할지는 뻔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양은 그에게 항복을 권하거나 평화 조약을 제안할 것이 자명한 일이었지만, 항복하거나 비참하게 져서 굴욕적으로 연명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그저 자신의 최대의 숙적이자 천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호적수에게 경의와 축하를 표하고, 그의 눈앞에서 웃으며 술잔을 비우면 되는 것이었다. 문벌귀족의 수괴들이나 트뤼니히트 같은 자들처럼 비굴하고 추하게 죽지는 않으리라, 그것이 라인하르트의 속마음이었다.

그러나 정작 통신이 연결되고 스크린이 브륀힐트의 지휘석에 비쳐졌을 때 라인하르트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화면에 나타난 인물은 여전히 골덴바움 왕조 시절 군복을 입고 있던 빌리바르트 요아힘 폰 메르카츠로, 메르카츠는 라인하르트를 여전히 골덴바움 왕조 시절의 '로엔그람 원수'로 부르고 있었다. 라인하르트가 패장의 모습을 비웃으러 왔냐 따지자 메르카츠는 내가 원수를 비웃을 만큼 대단한 존재인 줄 아냐며 양 웬리가 스크린 앞에서 자결하지 못하게 먼저 만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대답한다. 라인하르트의 얼굴빛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잔을 들고 있는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라인하르트는 패장에게는 죽음밖에 없다며 그걸 말릴 자격이 있는 자는 없다고 항변했다.

"메르카츠,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나는 패장이다. 패장에게는 죽음밖에 바랄 게 없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사실, 내가 죽음을 택하는 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자는 없을 텐데. 그게 황제가 져야 할 마지막 책임이겠지. 나는 골덴바움의 떨거지들처럼 뒤에 숨어 백성들을 사지로 내모는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전장에서는 항상 진두에 섰고, 군세를 버리고 홀로 도망친 적도 없다. 그러니 마지막 또한 그러해야 하겠지 않은가. 이제 와서 경들에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도, 이미 패배한 싸움에 미련을 갖고 내 부하들의 목숨을 추태를 보일 생각도 없다. 이왕 맞을 최후, 깨끗하게 끝낼 자유 정도는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브륀힐트의 함교는 순식간에 비장감에 휩싸였다. 그들의 황제가, 주인이 목숨을 버려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승조원들은 모두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로이엔탈도, 루츠도 마찬가지여서 금은요동의 빛은 물기 어려 계속 흔들렸고, 연청색 눈동자는 어느새 연보라빛으로 바뀌어 있었으니 다른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으리라. 그러나 정작 메르카츠는 그런 동요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 비장감의 정수리에 찬물을 부어 주위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허허, 그건 어린 생각이지요, 로엔그람 경. 원수가 일개 필부라면 몰라도, 황제인 터에 그게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지 알고 있소이까? 어린 생각이라고 했소이다. 아이의 얕은 생각 말이오. 그렇지 않다면 겁쟁이의 허세라던가, 아니면 금치산자의 앞뒤 못 가리는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소이다, 허허허."

라인하르트는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부터 떨리던 손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와들와들 떨려서, 들고 있던 글라스가 떨어져 쨍그랑 하면서 깨졌다. 그가 삶을 매듭짓는 가장 깨끗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겁쟁이의 비겁한 허세라고 매도당한 것이다. 아니, 그런 매도를 당한 것은 자결이라는 선택지가 아니라 라인하르트 자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더구나 그런 악담을 입 밖으로 쏟아낸 메르카츠 본인은 라인하르트에게 조롱기나 비웃는 기색은 커녕 온화한 노현자처럼 측은하다는 표정을 내보이고 있었다. 정말로 젊은이의 치기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할아버지같이 말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브륀힐트, 그리고 포위된 제국군 함대에는 일찍이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비장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라인하르트가 독배를 들이키면, 전 함대의 모두가 따라서 옥쇄하려는 둣한 이상야릇한 감정의 과열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금까지 제국의 어떤 황제도 실정이나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신의 목숨으로 그 값을 치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아랫사람에게 떠넘기는 대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자결하려는 황제에 대한 존경심이 막다른 상황과 맞물려 비상식적인 과열 분위기를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메르카츠는 그런 이상야릇한 분위기에 순식간에 냉수를 퍼부었고, 비장감의 동요는 분노와 당황스러움이 양념으로 깔린 무거운 침묵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라인하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하라, 어째서 짐이 책임지고 자결하는 게 비겁한 짓이라는 건가."

"그야 당연히, 귀하가 목숨을 버린다고 책임까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씨."

스크린 저편에는 여전히 메르카츠가 서있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그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 아무리 봐도 군복이 어울리지 않는 검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양 웬리는 손에 찻잔을 들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사색이 된 카이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짐이 자결한다고 책임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건지."

"그야 당연한 겁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면, 마땅히 옛 질서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해지니까요. 귀하가 자결을 택한다고 그 사람의 필요성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단순히 희생양을 하나 세울 거라면 귀하의 부하 중 아무나 한 명 세우면 되겠지요. 아마 귀하가 자결을 택하신다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허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새로운 통일 국가는 옛 은하연방보다도, 자유행성동맹보다도, 심지어는 골덴바움의 구조(舊朝)보다도 못한 괴물이 되겠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뷰코크 주석을 알고 계십니까?"

"그 노장? 알고 있다."

"경이 페잔 회랑을 통해 하이네센으로 침공해 왔을 때, 뷰코크 주석 역시 경과 비슷한 처지의 패장이었소이다. 혼자만의 안위를 위해 타인들을 모른 척 할 만큼 뻔뻔한 자는 절대 아니지요. 헌데 그 사람이 어째서 그때 자결하지 않았는지 알고 있소이까?"

메르카츠가 말을 받아 이었다. 라인하르트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홀로 재판정에 서려고 했냐고 묻자 메르카츠도 지난번에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고 긍정했다. 라인하르트는 자신을 재판정에 세우는 것이 자신이 책임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결국 필요한 건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 아니냐며 굳이 그런 쓸데없는 요식행위를 해야 직성이 풀리냐고 따졌지만 양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차를 마시며 반론했다.

"다릅니다. 물론 자유공화국연합과 새로운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귀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필요한 건 귀하이지, 귀하의 시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유사 이래 새로운 질서라는 것은 항상 엣것을 파괴하면서 세워져 왔습니다. 옛 질서는 항상 '악'과 같은 것이라고 단정지어졌고, 타파해야 할 악습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당연히 그 옛 질서의 자기변론 같은 건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똑같은 일이 계속될 뿐입니다. 파괴로 파괴를 갚는 악순환, 피로 피를 씻는 지옥도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귀하의 증언을 듣고, 귀하를 민주주의의 판결대에서 심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귀하의 목숨만을 취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이번 일 또한 그저 공화주의 세력의 주도하에 이뤄진 또 한번의 파괴극일 뿐, 마찬가지로 또 피를 흘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도 아마 얼마 못 가서 그런 일이 되풀이되겠지요.

저는 항구적인 평화가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작 몇 십년 동안의 평화라도, 지금까지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더욱 귀하가 필요한 겁니다.

저는 수많은 윗사람들을 보아 왔습니다. 어떤 자들은 자신의 같잖은 명예만을 위해 부하들까지 사지에 몰아놓고, 또 어떤 자들은 삶을 지레 포기하고 스크린 앞에서 집단자살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몇천만 명을 사지로 몰아넣고 뒤에 숨어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도 있었고, 패배하자 자신이 책임질 함대와 민간인들을 버려놓고 자신만 탈출하려 한 자도 있었습니다. 귀하는 어떤 윗사람입니까, 카이저?"

결국 라인하르트는 양 웬리의 설득에 넘어가 전 함대에 정선과 무저항(그리고 자결 금지령)을 명했다.[12] 그리고 그 자신은 브륀힐트의 옆구리로 찔러 들어온 강습양륙함의 헌병 병력들에 '체포'되었다. 아마 그가 끝까지 자살을 고집하지 않게 된 것은 양 웬리의 설득만이 효과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는다고 해도 여전히 누군가가 책임지고 법정에 서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인하르트는 체포된다는 치욕에 떨며 스크린에 대고 "지금부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죽었다고 생각하라"고 대답하고 자신은 "죽었다"라고 단언하며 뻗댔다.
어차피 제국이나 동맹이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우주 유일의 정통정부를 내세우고 있으니까, 원칙상으로는 상대방 모두 자신들의 신민/시민이죠. 더구나 지금은 은하제국도 멸망한 데다가 자유공화국연합은 은하제국처럼 시민권 빼앗고 노예로 만든다던지 하는 게 없으니까, 라인하르트도 일개 자유공화국연합 시민이 된 겁니다. 단일 국가 하의 전쟁범죄 심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낳은 결과죠. 라인하르트를 '적장'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망해버린 나라니, '적국 장수' 같은 개념이 사라지는 거죠. 원작 신 영토 반란사건 때 로이엔탈이 최후에 어떤 위치에서 죽음을 맞이했는지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5. 성자와 악마(2) 작가 코멘트 中
어찌 보면 제국과 동맹(물론 자유공화국연합도)의 의식 차이가 그만큼 두드러지는 대목입니다. 제국식으로는 총책임자가 죽음으로 책임을 대신하면 '황제의 자비에 의해' 없던 일로 봉합할 수 있습니다. 황제는 법 위에 있으니까, 책임 소재를 묻는 것도 자기 의사대로 할 수 있지요. 1차 라그나뢰크 작전 때 라인하르트가 뷔코크 등을 재판정에 올리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그래서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목을 거기서 내주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동맹의 법치주의적 이념으로는 그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했다고 전쟁 책임 날아가는 게 아닙니다. 헤르만 괴링이라도 잡아다 재판정에 세워야죠. 동맹(그리고 연합)의 법치주의는 라인하르트의 목이 아니라 라인하르트를 법정에 세우는 그 자체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라인하르트는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제국 사람이니까요. 제국에선 패장에게 죽음밖에 남지 않는다는 게 상식이지요. 하지만 제국과 동맹의 상식차는 큽니다.

사실 이 편을 쓰면서도 계속 고민했습니다. 결국 라인하르트를 찌질하게 만드는 편이 되니까요. 참으로 제국이 승리하는 시나리오를 쓰는 게 반대 경우보다 백 번은 편합니다. 영웅담 쓰기 좋지요. 하지만 어떤 현실도 전설처럼 주인공 모두가 빛만 나지는 않습니다. 은하영웅전설이 말 그대로 전설이라면, 이 졸작은 현실을 그리려는 시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미 패왕 로엔그람 황제는 죽었습니다. 남은 건 순수한 인간 라인하르트입니다. 이 재판은 군사적/정치적 재능 이외에는 모두 소년 수준의 감성인 그가 황제가 아니라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황제의 관을 쓰고 빛날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도 빛나는 인간이 훨씬 더 대단한 거니까요.
6. 성자와 악마(3) 작가 코멘트 中

4.2. 본편

4.2.1. 1~3. 짓밟힌 황금 갈기

법정은 쓸데없이 넓었다. 고대의 야외 극장처럼 무대 쪽으로 들어갈수록 낮아지는 형태의 큰 방, 그 면적의 사분지 삼을 차지하고 있는 방청석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평평한 무대가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반원형인 이 방, 그 거대한 수직벽 아래에는 높게 단이 서 있고 <재판부>라고 명패가 놓여 있었으며 의자 세 개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의자의 등 뒤로는 적, 백 청의 삼색에 오망성 무늬가 들어간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재판부석의 앞쪽에는 길쭉한 탁상 두 개가 서로 마주보고 서 있었다. 육중한 목제의 사각 탁상에는 역시 의자가 몇 개씩 마련되어 있고 자리마다 마이크와 솔리비전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한쪽은 <검사석>, 또 한쪽은 <변호인석>이라고 탁자 위에 명패가 놓여 있었다. 변호인석 쪽에는 작은 자리가 하나 더 나 있었다. 이 낮고 초라한 자리에는 의자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조금 더 앞에, 무대로 치자면 관객과 가장 가까운 곳에 연단 비슷한 게 하나 서 있었다. 여기에는 의자도, 솔리비전도, 목을 축일 미네랄 워터병도 없었다. 이 법정 내에서 가장 낮은 곳, 이 법정 내의 모든 시선이 한번에 몰리는 곳이었다. 방청객들로 이미 가득 찬 법정은 잠시 잡담 소리에 소란스러웠지만, 죄수복 차림을 한 금발의 젊은이가 중무장한 경비병력들에게 끌려 들어오자 그 소리는 얼어붙은 듯한 놀라움과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이리저리 헝클어진 금발에 초췌해진 안색, 그 아래에서 행색에 어울리지 않게 싸늘한 눈빛을 뿜는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 군데군데 상했지만 아직도 깎아 조각한 듯한 아름답고 단정한 얼굴의 젊은이. 아직도 스물 대여섯이나 될까말까해 보이는 이 젊은이를 보고 방청객에서 웅성거림과 탄식과 여자들의 쑥덕쑥덕대는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재판부석에 세 명이 걸어들어오고 모든 사람들이 기립하느라 그 소리는 일순간에 멎어들었다. 재판부석 맨 가운데에 선 흰 머리의 노인이 말했다.

"우주력 803년 6월 27일[13] 우주사법재판소 전쟁범죄국 특별재판부는 피고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우주사법재판을 이에 개정한다."

얼음 바닥에 수정을 집어던져 깨는 듯한 낭랑하지만 차가운 목소리. 그 얼굴의 인상과도 어긋나지 않는 단아하나 힘있는 목소리는 어느새 방청석의 소란을 잠재우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부석 가운데에 앉은 노인 또한 보통은 아니어서, 느긋하나 뼈대 있는 목소리로 받아넘겼다. '역시 그 기개는 살아있군.'하고 노인은 맘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고 입성 역시 허름한 죄수복이며 얼굴은 초췌하고 법정 제일 낮은 곳에서 서 있지만 눈빛은 형형하게 살아 있고 또한 지금까지 한 말만 가지고도 어느새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다. 과연 모든 것의 위에 군림했던 자라는 건가, 그것도 자신의 힘으로, 하고 노인은 감탄했다. '그러나 역시 아직 어리다.' 하고, 짧은 백발의 노인은 말을 이었다.

"흠,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피고는 자신이 불리해질 수 있는 증언을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밝힙니다. 그러면 칼라일 대표검사, 모두진술을 부탁하겠소."

칼라일이라고 불린 검사석의 남자는 서른 네댓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테 굵은 안경에 짧은 검은색 머리와 턱수염이 특징적인, 언뜻 보기에는 터프한 호남으로 보이는 사나이. 그러나 입꼬리에 호쾌한 웃음을 매달고 다녀야 어울릴 법한 인상과는 반대로 그가 웃는 적은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석가면'이었을까. 사람들이 요 근래 몇 년 동안 그의 웃음을 본 건 단 한 번, 여섯 달 전에 전함 유스티니아누스의 지휘석에서 제국군 함대가 펑펑 터지고 라인하르트의 기함 브륀힐트가 기동 불능에 빠졌던 때뿐이었다. 그나마도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선 비가 흐르더라, 소리를 내서 웃고는 있는데 그게 웃음인지 울부짖음인지 모르겠더라 하고 당시 함교에 있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석가면의 사내는 피고석에 서 있는 라인하르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명백히 적의와 증오가 담긴 눈빛이었다.

칼라일은 라인하르트에게 "피고인은 인류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포괄적 침해 혐의, 구 자유행성동맹에 대한 침략 혐의, 구 페잔 자치령에 대한 무력 강제 점령 혐의, 행성 베스터란트에 대한 열핵병기 사용으로 인한 양민 학살 방조 혐의, 구 은하제국 내의 인사들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 명령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본 법정에 출두하기 전에 그 점에 대해 인지받았는가?"라 물었고, 한때 전 우주를 지배하였던 젊은이는 "그렇다고 떠들더군."이라 답했다. "피고는 이러한 공소사실에 대해 인정하는가?"라는 칼라일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무엇을 인정하라는 거지? 너희들이 내게 그런 죄목을 씌웠다는 것? 아니면 내가 그런 죄를 인정하냐는 것? 전자처럼 쓸데없는 걸 내가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후자라면, 나에게 그런 건 죄가 아니었다고 말하지."라고 답했다.

변호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답했다. 흑발에 평균 정도의 신장, 아마추어 학자 정도로 보이는 서른네댓 정도의 남자였다. 온몸에 '평범'이란 글자를 써서 붙여놓은 듯한 모습, 아주 잘 봐줘야 간신히 '미남 축에는 들 얼굴'이라 할 평범한 얼굴, 미네랄 워터 대신 놓여 있는 홍차 찻잔, 군복이 별로 어울려 보이진 않는 사람. 우주전범재판국이 실질적으로 군사재판소라는 사실을 반영하듯 법정에 선 거의 모든 배우들이 군복을 차려 입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별로 눈에 띄지는 않는 생김새, 그러나 이 재판의 피고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한 관심을 받고 있는 이였다. 그 군복 가슴의 명찰에는 <YANG>이라고 쓰여 있었다.

"재판장님, 변호측은 우선 피고인에게 이러한 식으로 사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법정이 잠시 술렁거렸다. 방청인들은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들은 것 마냥 놀라서 흠칫흠칫했다. 양 웬리, 자유행성동맹의 최연소 원수. 마술사 양, 기적의 양, 무패의 장수, 존재 자체가 기적인 자유민주주의 최고의 수호자. 수많은 미명(美名)의 꽃다발이 아깝지 않을 불세출의 명장. 일찍이 제국군 함대에 맞서 싸워 수많은 승리를 거둬 왔고 은하제국 카이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과도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이겼으며 여섯 달 전에는 라인하르트 본인을 이그나시오스 칼라일 제독과 함께 생포하여 은하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이 무대 위에서는 엉뚱하게도, 그 금발의 전 황제를 변호하는 자리에 서있었다.

"피고인이 단순한 전쟁 포로가 아니라 포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기소된 행위 자체에는 어떠한 의문점도 발견할 수 없음을 변호측은 인정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피고가 이 법정에 서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분명 구 자유행성동맹이 아니라 은하제국에서 태어났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자유행성동맹법은-그리고 물론 그 후신 자유공화국연합법 역시- 은하제국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구 은하제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했던 국가이고, 피고는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이 사실이니까요. 정리하자면, 피고는 자신의 행위가 범죄로서 성립하지 않는 환경에서 생활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고에게만 이러한 혐의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은 역시 부당합니다. 물론 피고인이 그러한 이유로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똑같은 식으로, 골덴바움 왕조의 인류에 대한 죄악까지도 피고인 한 사람에게 소급하여 묻는 것 또한 부당한 일일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법률 하에서라면, 누구든-그게 동맹인이건 제국인이건 페잔인이건-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만큼의 책임만을 질 수 있습니다. 상대가 은하제국의 황제였고 독재자였다고 해서 다른 기준이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 변호인은 피고인이 자유민주주의의 적일지는 몰라도, 자유민주주의의 죄인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피고인에 대한 기소 사항들은 적절치 못한 부분이 많다고 볼 수 있으며, 피고가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 이행이 이런 식의, 법적 모살(謨殺)의 형태를 띄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즉 피고인은 피고인의 책임이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만 그에 합당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조(前朝)의 짐이 고스란히 피고인에게 귀속되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점을 먼저 말하고자 합니다."

법정이 더욱 웅성거렸다. 만일 지금 발언하고 있는 자가 '제국 최대의 적'이 아니었다면 아마 방청석에서 욕설은 물론이고 다른 것도 날아왔으리라. 그러나 지금 그런 '루돌프 이래 자유민주주의 최대의 반역자'를 옹호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양 웬리였다. 좌중은 경악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대본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대사들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던 것이다. 분명히 이번 재판은 플롯과 결말이 모두 완벽히 짜여있는 극본과도 같은 것이어야 했다. 지금 증언대에 서있는, 한때 황제를 참칭했던 금발머리 애송이를 그저 '시민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여 처단하기 위한 막간극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은하연방 루돌프 폰 골덴바움에게 멸망한 후부터 계속 민주공화주의자들이 꿈꾸었던 것, 즉 '민주주의의 역적 카이저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처벌한다'는 것을 이루기 위한 성스러운 정화 행위면 되는 것이었다. 그게 이 재판의 목적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 연극의 무대에 서는 배우들부터 연극의 시연 일시까지 세심하게 미리 정해진 것이었다. 명목상 이 재판의 구성원은 우주사법재판소가 인선해야 했지만, 실질적인 인사권은 자유공화국연합의 의회가 '추천권'을 행사하는 형식으로 쥐고 있었다. 그 '추천'에 따라, 우선 재판부는 자유행성동맹 출신의 꿋꿋한 옛 노장들로 꾸려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현재의 정부 수반, 자유공화국연합 주석인 알렉산드르 뷰코크가 앉아있었다. 비록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유죄!'라고 망치를 두드릴 수 있는 속물 판관들과 같은 부류의 인간은 절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편이 더 나았다. 어차피 그가 자유공화국연합의 최고 지도자인 이상 그는 이 피고인을 처단하라는 명을 내릴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어차피 심리의 흐름도 판결도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하니, 그가 판결을 내린다면 그 유죄판결의 공공적 신뢰도만 높아지는 셈이었다.

그리고 법정의 한쪽, 검사석에 대표로 서는 인물은 이그나시오스 칼라일 예비역 대장이었다. 예부터 일처리가 날카롭고 공평하기 그지없다고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법무관 출신 제독, 흔히 '석가면 제독'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우주력 800년 소장 계급이었을 때 뷰코크 전 원수와 춘우 지엔 전 대장의 주도로 이루어진 '하이네센 대탈출 작전'에서 처음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이였다. 당시 자유행성동맹군 잔존 함대를 이끌고 양 웬리 함대와 연동하여 마르 아데타에서 제국군의 발목을 묶어 놓는 데 성공하고(그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뷰코크 전 원수는 이제르론 요새를 탈환했다), 남은 동맹 잔존 함대를 끌어모아 새로 만들어진 '자유공화국연합' 우주군의 제독으로 활동하여 마침내 여섯 달 전 제국령 전역의 지구교 테러와 재정 악화로 입지가 크게 약화된 황제의 함대를 격파하고 양 웬리와 함께 황제를 생포했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황제를 고발하고 처단하기 위해 법정에서 그를 몰아세우는 일에 그 명성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흠 잡을 데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적에게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뼈저리게 각인시키려면 마땅히 그가 정정당당한 조건 아래에서 싸워서 패배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그 자신마저도 납득할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래서 자유공화국연합 의회는 피고인에게 누가 봐도 파격적인 방패를 하나 쥐어 주기로 했다. 전 카이저를 변호하겠다고 한 뜨내기들은 물론 넘쳐났지만(아마 공명심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무리였을 터이다) 피고인 자신은 따로 변호사를 선임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공화국 의회는 그 누구보다 유명하면서도 뒷공론이 나오지 않을, 그리고 그러면서도 플롯을 망치지 않을 멋진 배우를 지명한다. 그들이 옛 황제의 변호인으로 추천(사실상의 지명)한 것은, 양 웬리였다.

그러므로 이 재판, 아니 연극은 마땅히 '어쩔 수 없는', 또는 '필연적인' 민주주의의 승리로 끝나야 했다. '그 양 웬리마저 제대로 변호할 수 없는 악랄한 우주 최대의 독재자'를 (사실 양 웬리가 정말로 그의 편이 되리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투사와 모든 우주의 시민을 대변하는 정당한 정부의 대표가 처단하는 장면이 최대한 드라마틱하게 연출되어야 했다. 이 법정의 방청객들과, 우주의 모든 시민들은 그 장면을 보고 다시 우주에 올바른 주권과 정의의 깃발이 세워졌음을 보면 되는 것이었다. 금발의 미청년 독재자가 의연함을 애써 유지하려고 하지만 결국 '올바른 정의'에 무릎 꿇는 모습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그리고 모두 소리 높여 "Liberty stands for freedom"을 제창하는 것. 응당 이 연극은 그렇게 흘러 가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처음부터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피고 라인하르트마저도 약간 당황한 듯한 이 와중에서 얼굴에 아무런 동요도 내비치지 않는 사람은 오직 두 명, 방청석 앞줄의 아마빛 머리의 소년과 검사석의 이그나시오스 칼라일뿐이었다. 뷰코크 재판장의 목소리가 혼돈으로 아우성 치는 법정을 꿰뚫고 울려 퍼졌다. 그 역시 당황으로 안색이 변해있었지만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수습하여 혼란을 진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명령에 정면으로 항거하는 목소리가 방청석 위쪽 구석에서 튀어나왔다.

"양 웬리! 대답하라, 당신마저 민주주의를 배신한 건가! 저런 학살자 놈에게 무슨 권리가 있단 말이냐! 저런 놈을 처단하는 게 무슨 모살이란 소리냐아아아아! 그러면서도 네놈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것인가아아아! 뻔뻔히 살아남아서 저런, 저런 학살자를...... 변호하기 위해서어어어어어! 그러고도 무스으으은...... 라인하르트으, 이 개애자아시이이익! W......."

마흔 살에 가까워 보이는 남자. 짙은 제국어 억양이 그대로 남아있는 동맹어 외침. 평범한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타오르는 적의를 담은 눈이 무대를 향해, 그 중에서도 증언대의 금발 청년을 향해 이글거렸다. 그는 방청석에서 뛰어오르듯 일어나 무대를 향해 내딛으며 외쳤다. 경비병 네 명이 그 중년 남자를 에워쌌고, 남자는 발버둥을 쳐 봤지만 별 수 없이 질질 끌려나갔다. 그런데 그 남자는 우악스레 끌려나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재판정의 소란이 완전히 정리되기에는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경비병들이 열 명 정도 더 배치되고, 방청객 몇 명을 더 끌어내고, 뷔코크 재판장이 몇 번 더 고함을 치고서야 간신히 재판을 속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 할 발언이 있소? 변호인."

"현재로서는 아까의 발언으로 족합니다."

양 웬리가 답했다.

"그렇군. 그렇다면 피고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뭔가 모두진술할 것이 있소?"

금발의 옛 패자는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딱히 없다. 변호인의 호의는 고마우나 그런 짓은 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싶군. 내가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질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말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책임을 벗고 기뻐할 소인배가 아니니까. 내 능력이 모자라 너희들에게 졌고, 그런 패자가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 그렇지만, 나는 너희들의 적이라서 포로가 된 것이다. 너희들의 죄인이라서 포로가 되었다는 소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나를 처단하더라도 죄인 따위가 아니라 적장으로 명예롭게 처단해 줬으면 좋겠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백 쌍의 눈길이 증언대에 선 금발 청년에게 집중되었다.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 포로로서, 적으로서 처형해 달라는 자. 옛 군사적 낭만주의의 허영으로 똘똘 뭉친 이른바 '무인의 긍지'라는 허상이 빚어낸 헛소리라 생각하는 이도 있었고, 모든 것을 잃고 지금 적들에게 어떻게 요리될까만을 기다리는 패배자의 체념이라는 후대 사가(史家)도 있었고, 아니면 한때 전 우주를 손에 넣었던 자로서 지금 그렇게만이라도 허장성세를 부리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라면서 나름대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양 웬리를 보면서도 추측의 나래를 펼쳤다. 역시 당대의 호적수로 맞서다 보니 '무인의 정'이 들었을 거라 나름대로 단정 짓는 이, 약자의 편에 서기 좋아한다고 알려진 양 웬리의 성품에서 그 이유를 찾는 사람, 양 역시 이 걸출한 귀재에 인재 욕심이 났을 거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옛 황제와 손잡아서 자신이 전 우주를 지배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마저 들 법했지만, 그 대상이 양 웬리였던만큼 그런 식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을 버린 동맹의 마지막 호출을 끝내 저버리지 못했고, 전 우주의 97% 정도가 은하제국의 판도 하에 놓여있었을 때도 미약한 신생 공화국 연합을 저버리지 않았던 자였기 때문이다. 비록 우주가 사분오열되어 있지만 그래도 자유공화국연합이 가장 강한 세력이 된 지금 굳이 제국군 잔당들을 등에 업으려 민주주의를 배신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양 웬리가, 그리고 피고인 라인하르트가 무슨 신념을 가지고 그런 소리를 했는지 당시에 알아차린 사람은 정말 얼마 안 되었다. 여하튼, 그 침묵을 깨뜨린 것은 재판장 오른쪽에 배석한 판사의 목소리였다.

"피고인, 일단 그런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걸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우리 역시 전지전능한 신 따위가 아니라 규칙에 얽매여 판결을 내리는 자일 뿐이니까요. 허나 저희 역시 피고인에게 부당한 트집이나 도리에 어긋나는 대우를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피고인은 어디까지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그건 피고인이 누구이던지, 어떤 사람이던지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적용되는 겁니다. 그게 일개 시민이건 아니면 '뒈져라 카이저!'의 주인공이든 말이죠.

뭐라고 해도 피고인 역시-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본 재판부는 민주주의의 명예를 걸고 피고에게 공정한 심리와 판결을 약속하는 바입니다. 물론, 자유민주주의 하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의 주체이니까요. 이런 일에 누구한테 허락을 맡아야 한다던가, 제한을 받는다던가 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더구나 당연히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는 권리를 천명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누구도 민주주의의 깃발을 들고 그걸 막을 수 없습니다. 누구한테나 말이죠, 사람이라면. 죄가 있다면 죄 지은 대로 받으면 되는 거고, 죄가 없다면 벌을 받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아까의 분위기대로라면 "시끄럽다!" 정도의 반응은 터져 나와야 할 법했으나, 이미 몇 명이 끌려나간 터라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사람들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저 인간까지 왜 저러는 건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텐보로는 그런 분위기에 개의치 않았다.

"내가 너희들 시민과 똑같은 존재라고 하려는 건가."

"물론입니다. 더구나 당신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라고 결정하는 건 당신이 아닙니다. 그걸 착각하지 마십시오."

첫 공판은 대략 이러한 식으로 마무리지어졌다. 배석 판사 더스티 아텐보로는 모두발언이 끝났다는 것과(시급한 재판까지는 아니었던지라, 첫날의 절차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중간의 소란으로 인한 시간 지체, 그리고 본격적 심리를 위한 심도 있는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들어 폐정을 요구하였고, 검사 측과 변호 측, 그리고 재판부 역시 본격적인 조사와 심문은 따로 날을 잡아 한꺼번에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공판 첫날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방청객들은 대부분 옛 황제가 궁지에 몰리는 장면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었지만 뜻밖에도 변호인과 젊은 배석 판사가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역시 "더 화려한 절망을 위해서겠지" 아니면 "어차피 판결이야 뻔하니까" 심지어는 "그 인간들은 원래부터 좀 또라이들이었어"하고 대부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론 공판 자체가 그리 길어지기 전에 아텐보로가 적절히 흐름을 끊어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그 정도에서 막은 탓도 있으리라.

그 후 뷰코크 재찬장이 폐정을 선언하기 직전에 피고인이 이렇게 말한 것 빼고는 아무 일 없이 공판이 종료되었다. 이때 라인하르트는 뷰코크에게 아까 소란 피우다 끌려나갔던 사람이 마지막에 "W"라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 요청하고, 뷰코크가 받아들이자 "고맙군."이라 대답한다. 공판이 두 시에 끝나 면회 예정 시간인 네 시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 더 남아 있는 셈이었다. 양 웬리와 율리안이[14] 무대를 빠져나와 재판소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4.2.2. 4~6. 성자와 악마

카페테리아에는 양 웬리의 아내 프레데리카 G. 양과 율리안의 애인 카테로제 폰 크로이츠가 있었다.[15] 재판 도중에 도착해서 법정 안에는 못 들어갔다고. 프레데리카는 얼마 전까지 양의 부관을 겸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물러났다고 한다. 재판소 카페테리아에는 일반적인 테이블들 말고도, 벽 사이를 움푹 판 모양의 별실들이 몇 개 있었다.

아무리 이 재판소 17층의 카페테리아가 사실은 엄중한 경비 하에 놓여진 중요인사 전용구역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안전을 완벽히 보장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웬만큼 중요한 이야기라면 내부 별실에서 하는 것이 그즈음의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비록 양 웬리 같은 몇몇 사람은 "이런 적당히 은밀해 보이는 밀실에서 나누는 환담이야말로 오히려 새어나가기 쉬운 법."이라며 투덜댔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양 웬리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수준의 것도 아닌 탓도 있었다. 어쨌건 그는 사실상 퇴역한 상태였으니까 말이다.

양 웬리는 카테로제에게 제국군 잔여 세력이 이제 반 함대 정도밖에 안 남았으며, 자체 보급이 될 만한 곳이 아니라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듣는다. 양은 현재 제국 잔여 세력이 옛날 은하제국 정통정부 급은 아니더라도 지구교 잔당보다 힘이 없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4년만에 입장이 역전된 걸 고려했을 때 후환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평한다. 6개월 전 은하제국 수뇌부가 붕괴되고 라인하르트를 비롯한 핵심 지휘관들이 전사하거나 체포된 후로 석 달 동안은 양에게 홍차 한 잔 느긋하게 즐길 틈도 없는 각박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 석 달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긴 했었지만, 큰일은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지어놓고 뒷일을 메르카츠 원수와 쇤코프 대장에게 맡길 수 있었다.

카테로제는 양 웬리에게 왜 민주주의의 적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변호를 받아들인 거냐 물었다. 양은 연합의회의 지명에 따랐다고 변명했지만 카테로제는 양 웬리는 변호를 거부한다면 모를까 맡은 이상 결코 대충 변호할 성격이 아니라서 왜 군말 없이 받아들었는지 추궁한다. 쇤코프도, 프레데리카도, 율리안도 카테로제에게 웃기만 할 뿐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한 달 전에 양 웬리가 자유공화국연합 의회에서 라인하르트를 변호할 국선 변호인으로 지명된 이래 수많은 뒷공론들이 무성했다. 사실 연합 의회가 변호인으로 양을 지명했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양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받아들인 것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양 웬리는 민주공화세력의 군사적 총사령관이자 구심점이었고, 라인하르트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숙적이었으니 그런 조치에 여러가지 뒷공론이 무성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일에 대해 이 재판을 민주공화주의의 제단에 바치는 희생제로 보는 대부분의 공화국 시민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변호인의 존재 자체까지도 라인하르트를 공격하게 하는 완벽한 무대장치." "어차피 그 금발 독재자 놈이 죽는 건 뻔하니, 최후를 더욱 화려하게 장식해줘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양 웬리의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양 웬리는 그러한 술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비민주적인 폭거를 제일 증오하는 사람이다.[16] 그가 전 카이저를 변호하겠다면 정말로 그를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설사 그가 변호해야 하는 것이 희대의 독재자이자 우주를 전횡하고 다닌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라 해도 이미 변호를 맡은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누구나 공정한 재판과 제대로 된 변호를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양과 가까운 이들, 특히 자유공화국연합 2함대(구 동맹군 13함대, 흔히 양 함대라 불렸던)이 더욱 그 점을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결국 양은 이쯤에서 항복하고 본심을 털어놓기로 했다.

"분명히 로엔그람 씨는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어. 비단 그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뿐만 아니라 루돌프 폰 골덴바움과 그 왕조의 죄악까지도 그의 책임으로 돌아가겠지. 사실 은하제국이 멸망했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야. 작은 나라들 간의 싸움이라면 이긴 쪽이 진 쪽을 병합하거나 식민지로 만들면 되는 일이지만, 이 경우에는 우주 전체의 질서를 다시 재편해야 되는 일이니까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첫 단추부터 제대로 꿰어야 탈이 나지 않아. 로엔그람 씨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야. 자유공화국연합의 일개 시민일 뿐이지. 그런데 만약 로엔그람 씨가 원하는 대로 그를 적장으로서 처형한다거나 하면 그는 일개 시민에서 다시 영웅이 되어버리고 황제가 되어버려. 불운하게 패배하여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 인류 역사상 마지막 황제, 뭐 이런 식으로. 특히 그 죽음이 이런저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거의 형태를 띨수록 더하지. 정말 ' 은하영웅전설'이 되어버리는 거지. 확실히 매력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어버리면 기껏 수천만의 사람들이 피를 흘린 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삽질이 되고 다시 또 수천만의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하겠지.

그렇기 때문에 옛날 은하연방 시절의 법까지 찾아내어서 종전 한 달 전에 이른바 '우주전쟁범죄법'을 만든 거고. 아마 롬스키 연합의회 의장이 나한테 로엔그람 씨의 변호를 맡긴 것도 아마 그런 의도였겠지. 의장은 아마 누구도, 심지어는 로엔그람 씨마저도 납득할 수 있는 재판을 바랄 거야. 흔히 떠도는 소문대로 그냥 형식적인 사형 선고를 재판이라는 옷을 씌워서 꾸민다거나 할 사람은 아니고, 무엇보다도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아마 의장은 내가 가급적이면 열심히 변호하는 모습을 보고 싶겠지. 그렇게 된다면 로엔그람 본인은 물론이고, 제국 잔여 세력들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판의 공정성과, 그로 인한 판결의 공정성, 최종적으로는 새로운 우주적 질서의 정당함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꽤 괜찮은 발상이야.[17]

하지만 결국 그것 역시 모살(謨殺)일 뿐이야. 극도로 세련된 형태의 모살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지. 우주전쟁범죄법은 일곱 달 전에 제정되었어. 그리고 로엔그람 씨가 기소된 죄목은 죄다 그 법이 만들어지기 전의 행위를 소급해서 씌워진 거지. 사실 그런 문제를 총괄하는 범우주적 기구가 없었으니까, 전쟁범죄를 처벌하려면 그런 방법밖에 없기는 하지. 하지만 그건 옳은 행위가 아냐. 개인은 그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한도 이상의 죄를 짊어질 수 없어.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지?"

"로엔그람 씨에게 루돌프 골덴바움 왕조의 죄까지 떠넘겨서 처벌하려고 하고 있지요."

"그래.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결코 롬스키 의장이 원하는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지 않아. 당장 아까 있었던 것만 보더라도, 공소사실 부를 때 로엔그람 씨가 코웃음쳤잖아? 그 일을 저지른 피고인 자신도 납득을 못하는 재판인데, 남들이 보면 어떨까? 롬스키 의장의 목표 자체는 흠잡을 데가 없다고 할 수도 있을 거야. 어쨌든 로엔그람 씨는 전쟁범죄자고, 그 책임을 져야 하니까. 하지만 의장의 방법대로라면 이루어지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냥 민주주의를 간판으로 내건 패권국일 뿐이야. 그래서는 옛 은하연방보다도 못한 게 되잖아? 이름만 민주주의를 내건 비민주적인 행위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해악을 미치는지 벌써 천 년 넘게 입증되고 있는데, 똑같은 잘못을 해서 또 똑같이 해악을 낳을 수는 없어. 민주주의의 이름을 걸고 로엔그람을 심판대 위에 올린다면, 마땅히 그 과정 역시 끝까지 민주적이어야 하지. 이게 내가 자유공화국연합 시민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씨를 변호하는 이유야."

율리안은 좀 전에 방청석에서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칼라일 검사가 죄목을 읊을 때 라인하르트가 "도대체 뭘 인정하라는 거지?"라고 비웃듯이 답했던 사실. 당시에는 단순히 새로운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는 몰락한 황제의 허세 정도로 비쳐졌던 모습이지만, 지금 듣고 보니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랐다. 분명히 라인하르트 자신도 이 재판을 결국 자신을 모살하기 위한 촌극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이 주위를 뒤덮었다. 프레데리카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카테로제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의 설명을 이해는 하지만, 어딘가 아직도 납득이 안 되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편, 율리안은 골똘히 나름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라인하르트 자신은 그의 변호인 양 웬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결국 라인하르트를 그가 그토록 바라던 '무장의 긍지에 어울리는 죽음'으로 장식해주는 대신 이 재판정에 세운 건 양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라인하르트 본인은 한 번도 변호인 면담에 제대로 협조한 적이 없었다. 양과 율리안은 벌써 몇 번이나 라인하르트를 찾았지만 그가 제대로 면회에 응한 적이 별로 없었을 뿐더러 그나마 억지로 끌려와서 면회석에 나왔던 때조차 단 한 마디밖에 들려주지 않았다. "짐은 이미 그대에게 죽었다." 하면서 의자를 뒤쪽으로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양 웬리는 그럴 때마다 한숨을 쉬면서 "어쩔 수 없지, 누가 뭐래도 결국 그를 죽인 건 나니까." 이렇게 뇌까리며, 방에 들어와 찻잔에 브랜디를 부었다. 라인하르트는 최후에 전투에서 패배하고 체포당했을 때부터 자신은 죽었다고 단언하며 뻗대고 있었기 때문.

전투가 끝나고 라인하르트가 체포되었을 당시 양 웬리의 바로 옆에서 그 모든 걸 직접 본 율리안은 라인하르트의 심정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더욱 앞으로의 일이 걱정스러웠다. 어쨌든 양은 라인하르트의 변호인이 아닌가? 라인하르트가 다시 한 번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변호는 아무 짝에도 의미 없는 헛수고가 될 것이었다. 그건 다시 전 황제를 면회하러 가야 하는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은 율리안에게 좀 전에 끌려나간 제국어 억양이 짙은 사람을 조사하고자 법정 사무관에게 갔다 와달라 부탁한다.

4.2.3. 7~16. 홀로 제국의 쌍벽

시계의 화면에는 6월 28일 오전 1시 18분이라 쓰여 있었다. 모두들 잠자리에 들어야 마땅한 시간이지만, 애석하게도 이 방의 두 사람은 아직도 잠자리는커녕 옷도 제대로 못 갈아입고 있었다. 벌써 몇 개인지 모를 홍차 티백이 축 늘어진 채 쓰레기통 주변에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고, 양 웬리와 율리안 민츠의 모습 또한 물 먹고 풀어진 티백들처럼 풀이 죽어 있어 보기에 대단히 딱했다. 어제 저녁에 율리안은 피고인 라인하르트의 말문을 열어 놓을 열쇠와 같은 정보를 찾으러 법정 사무관에게 갔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법정에서 라인하르트를 향해 고함쳤던 사내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나가버렸던 것이다.

자유공화국연합 형사절차법은 원칙적으로 '판사가 법정모독죄라 선언하지 않으면' 강제퇴정 이외의 어떠한 처벌도 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직접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다던지(만일 유치장에 수감되었다면)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사무관은 암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율리안에게 그를 방면할 때 쓴 진술서 비스무리한 종이를 한 장 주었지만, 거기 쓰인 이름과 출신지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게 곧 드러났다. 이름은 당연히 가명이었고('리버티 프리덤Liberty Freedom'이라는 어이없는 이름이었다), 출신지는 무성의하게도 '은하계'라고 쓰여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진 율리안이 사무관에게 법정에서 소란피운 자의 신원을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내보냈냐며 화를 내자 사무관은 담담하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법정모독범으로 긴급체포할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의 임무는 그저 자필 진술서를 받는 것뿐, 우리에게 신원 확인 절차나 진술서의 진위여부의 증언 같은 것들을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진술서에 어떤 내용을 쓰던 그걸 간섭할 수는 없습니다. 지구교도건 누구건, 몸에 위험물질을 휴대하지 않은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재판을 방청할 권리가 있습니다."

결국 율리안이 손에 넣은 것 중 제대로 된 정보는 그 남자의 얼굴 사진과 거주지(엘 파실이라고 되어 있었다), 자필로 쓰여진 몇 글자의 진술내용 정도였다. 진술서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씨체로 간결하게 "라인하르트, 빌어먹을 개자식"이라고 쓰여 있었다. 물론 이런 내용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율리안은 필체를 토대로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이 정도로는 라인하르트의 입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양 웬리의 오늘 면회도 평소대로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여하튼 라인하르트는 이번에도 의자를 뒤로 돌리고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실의에 빠진 두 사람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요리에 능한 건 율리안뿐이었는데 그 율리안이 밥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대신 몇 주전자의 홍차와 몇 병의 브랜디를 동무 삼아 잠도 안 자고 '그 남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추론하고 있는 중이었다.

필적은 표본이 너무 부족한 데다 원래 진본과 위본을 판별하기 위해 쓰는 거지 지문이 아니라서 무리. 얼굴은 조사를 부탁했지만 자신들의 정보망은 옛 동맹군과 제국군의 얼굴 정보 약간인데 그중에서 맞는 얼굴을 찾는 것은 힘듬. 일단 해당 인물이 제국어 억양이 강했으니 구제국 출신일 가능성이 높고 출신지를 숨기고자 '은하계'라 표기했지만 정황상 지구교도는 아님. 문벌귀족 잔당일 가능성은 있지만 자기 가명을 '리버티 프리덤'이라 쓰거나 로엔그람 왕조가 몰락한 현 상황에서 문벌귀족이라는 걸 밝힌다고 죽는 건 아니니 그럴 동기가 안 됨. 반제국 저항세력도 아님.

둘은 지금 여섯 번째의 가능성 - 지구교, 문벌귀족 잔당, 망명 공화주의자, 페잔 거상, 지하 저항세력에 가위표를 친 다음으로 - 을 검토하려고 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럭저럭 자신 있어 보였던 양 웬리의 추리는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게 없었고, 율리안 또한 뇌가 피로에 찌들어 되는 대로 내뱉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음 공판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 이러고 있었지, 아니었으면 그들은 잠을 자지도 못하면서 홍차를 곁들여 한가하게 탐정 흉내를 낼 수는 없었을 것이었다. 율리안이 양에게 라인하르트에게 원한을 가질 제국 출신자가 또 누구일까 물어보자, 양은 처음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을 입 밖에 꺼냈다. "혹시 베스터란트 출신 아닐까?"

율리안은 몇 년 전[18]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2차 암살미수사건의 범인을 떠올리고 그는 자살한 걸로 안다고 의아해하지만, 양은 고개를 저었다. 베스터란트 생존자는 한둘이 아니기에 그 암살자처럼 직접 목숨을 노리지 않더라도 그에게 저주와 욕을 퍼부어주고 싶은 사람은 꽤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율리안은 그럼 왜 굳이 출신지를 숨긴 건지 의아해하고, 양도 베스터란트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출신지를 숨길 이유는 아무것도 없으며 가명을 써야 할 이유도 없지만 라인하르트는 그를 베스터란트 출신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고 대답한다.

율리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을 쳐다봤다. 그렇지 않아도 피로에 잠긴 머릿속이 더 혼란스러워졌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그가 베스터란트 출신일 거라 생각했다고? 양 웬리의 곁에 붙어서 어제 하루 종일 지낸 율리안에게도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는데, 양은 어느새 라인하르트의 생각을 대충 읽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베스터란트 학살사건 때 라인하르트가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의 핵공격을 '묵인했다'는 것만 알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사건의 여파는 베스터란트 희생자가 라인하르트를 죽이려 한 사건으로 인해 동맹-공화국에도 알려져 있었다. 그때 라인하르트는 암살자를 무죄방면하라 말했는데, 라인하르트는 그동안 수많은 문벌귀족과 지구교도를 학살하고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베스터란트 유족만 인정을 베풀려 한 것은 단순한 은전(恩典)이 아니었으리라 추측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확실히는 모른다고. 하지만 현 시점에서 라인하르트가 거기까지 동요한 것으로 보아 그 남자가 베스터란트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가정하는 건 나쁘지 않은 추측일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 가정이 타당하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 그가 베스터란트인이든 지구교도든 문벌귀족이든 누구인지에 대해서 확증을 잡아야 하는 것이다. 가능성을 그것만으로 좁히면 위험하며 거기에만 매달리다 본 목적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요지는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입에서 진실을 듣는 것이며, 베스터란트인이라는 증명을 찾는 것 따위는 그것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라인하르트의 입을 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물증이지, 그들의 추측 따위가 아니다. 결국 그들이 새벽까지 토론해서 얻어낸 것은 하나의 그럴듯한 가정일 뿐이라는 소리였다. 율리안의 혼탁한 머릿속을 더 멍하게 만드는 사실이었다. 이 하나의 추측을 가지고 라인하르트의 입이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마 석가면 제독의 부드러운 표정을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일 터였다. 두 사람은 막막함에 빠져서 홍차만 계속 들이켰다.

긴 침묵이 흘렀다. 율리안은 이미 정신이 반쯤 뜬 상태였지만, 양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엉뚱한 질문을 날려왔다. 사실 양 역시도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다만 율리안이 말할 기력마저 잃어버린 것이라면, 양은 반쯤 꿈의 세상에 빠져들어 자신의 생각을 두서없이 입 밖에 늘어놓고 있었다.

"로엔그람 씨를 아직까지도 살아있도록 지탱하는 것이 무엇일까?

정확히 말하자면 '제정신으로' 살아있도록 지탱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피고인은 수많은 것을 잃어버렸지. 무인으로서의 긍지라는 것도, 황제라는 자리도, 자신의 제국도, 가족도, 부하도, 군대도. 심지어는 일신의 자유마저 잃어버렸어.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그렇게 수많은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쳐버려. 이성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그런데도 로엔그람 씨는 아직까지 멀쩡해. 마치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정신줄을 놓아버리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게 뭘까.

이미 쓸데없는 '무인정신' 따위의 허장성세로 그렇게 자신을 지탱할 수는 없어. 그 따위 것들은 아무 목적도 없이 사람을 속이는 헛소리일 뿐이니까. 아니, 그런 것에 좌우되는 사람이었다면 자신과 함께 수만 명의 병사들을 저승길 동무로 삼았겠지.[19] 그건 아니야. 그러면 남은 건 뭘까?"

양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어째서 제국을 뒤엎을 생각을 했는지, 어째서 전 우주를 지배할 야망을 품었는지, 어째서 그 자신이 황제가 되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째서 패배의 순간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는지.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마지막 문제는 정말 양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온 은하의 사람들에게(물론 양 웬리에게도)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아름답고 당당한 패왕이지 그렇게 쉬이 절망하여 목숨을 내다버리려 하는 나약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패배하여 사형대에 오르더라도 집행관들을 한껏 비웃으며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최후까지 자신의 행동에 한 점의 후회도 없이 행동하는 이가 모두가 아는 로엔그람 황제의 모습이었다.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후 피고인의 태도였다. 법정에서 보여준 당당함과 6개월 전 보여준 모습. 도대체 무엇이 그의 진짜 모습이란 말인가?

'피고인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를 변호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그 전에도 양이 이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무슨 실마리가 보일 듯 말 듯하며 그를 약 올린 적은 일찍이 없었다. 마술사라고도 불리는 이 국선변호인은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계속 그 문제를 가지고 머리를 썩였다. 하지만 그의 머리를 그만 쉬게 해줄 그럴듯한 답안은 밤새도록 나오지 않았다. 양 웬리의 눈은 감겨 있었지만, 농담으로라도 편안한 수면을 취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양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먼저 일어나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율리안 민츠에게 양이 한 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율리안, 로이엔탈 씨를 찾아가 보자."

흔히 신 은하제국의 쌍벽이라 하면 지금 은하제국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볼프강 미터마이어 원수와 현재 자유공화국연합 측에 수감되어 있는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를 말한다. 여기서 쌍벽이라는 칭호는 단순히 은하제국 군대의 쌍벽이 아니라 새 은하제국이란 나라를 떠받드는 쌍벽이자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개인이 무너지지 않게 떠받드는 두 기둥이란 뜻마저 내포하고 있는 칭호였다. 1년 반 전에 '제국군 3원수'의 한 자리가 의안 한 짝만 남기고 공석이 된 이상 그들이 군부의 일에만 정신을 쏟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만 사망한 것이 아니라 나이트하르트 뮐러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등의 여러 유능한 상급대장들도 저세상 사람이 되었으며, 그 밑의 실무진들은 부서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일상적인 업무가 마비될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그때 목숨을 바쳐서라도 말렸어야 했다. 그때 그런 사석만 던지지 않았어도......"
로이엔탈이 말한 '사석'은 물론 이제르론을 치는 것입니다. 사실 라인하르트의 대중적 인기는 그가 개혁자이고 서민을 위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막강한 힘을 가진 정복자이면서 화려한 전쟁영웅이기 때문에 그런 게 더 크지요. 경제적으로는 제국보다 훨씬 자유로운 페잔이나 동맹에서 라인하르트의 지배를 의외로 잘 받아들인 것도 결국은 그가 패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패왕의 명성이 약해지는 라인하르트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구나 라인하르트는 루돌프처럼 문벌귀족으로 대표되는 광신적인 지지계층을 마련해 놓지도 않았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다시 화려한 전투 한 번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재정비하려고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굳이 자유공화국연합을 정복하진 않아도 되지요. 라인하르트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였습니다.

물론 라인하르트는 천재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병력을 보았을 때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서 출병한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리 자유공화국연합이 뒤에서 힘을 기른다 해도 3년 안에 제국군(전성기 50%도 안 되지만)을 병력 수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공화국에는 간단하고 저렴하게 전투력을 늘릴 수 있는 신기술이 있었고, 정보 실무진이 붕괴된 제국군은 거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게 라인하르트가 결국 양에게 역전패를 허용하는 요인입니다.
9. 홀로 제국의 쌍벽(3) 댓글 답변 中

로이엔탈은 천장을 바라보며 뇌까렸다. 틈이라고는 없는 독방, 꺼지지도 않는 허연 불빛, 천장의 스크린, 그리고 작은 침대 하나.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고전적인 형식의 자해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놓은 감방(탄력 있는 고무 같은 벽이었다). 여기가 로이엔탈 전 제국 원수가 갇혀 있는 방이었다. 대단히 살풍경하고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으로, 오로지 수감자의 정신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나가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설계 사상에 충실한 모습의 방이었다. 문은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으로 얼핏 봐서는 벽과 구분이 가지 않는 곳이었고, 다른 하나는 옷과 음식물이 드나드는 조그만 창문 비슷한 문이었다.

그가 이 방에 갇힌 후로 큰 문이 열린 적은 딱 한 번, 그가 자해를 시도했을 때였다. 물론 벽은 전혀 딱딱하지 않은 탄성체 재질이어서 상처는커녕 아픔도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로이엔탈은 자해를 포기했고, 그 문이 다시 열린다면 아마 자신이 사형대로 끌려가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아직까지 라인하르트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벽에 금이 여기저기 생기더니 큰 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왔다. 로이엔탈은 한숨을 쉬고 자신을 처형대로 끌고 갈 간수들의 손길을 기다렸지만, 그를 보고 있는 것은 간수들의 눈이 아니었다. 양 웬리와 율리안 민츠가 로이엔탈의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라 묻는 로이엔탈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거의 실려있지 않았다. 마치 잔잔한 바다에 뜬 빙산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입니다' 라고 하려던 양은 순간 흠칫했다. 적의가 드러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가셔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도저히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로이엔탈은 양을 무정물 대하듯이 대하고 있었다.

양은 이 서먹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고 로이엔탈에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이미 그 자신도 입을 열면서 후회하고 있었다. 별일 아니라면 어째서 자신이 직접, 그것도 적진의 2인자이자 A급 전범의 독방을 찾아왔겠는가. 로이엔탈 역시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 점을 꼬집었다. 로이엔탈은 별일이 아니라면 양 제독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어디 있냐며 사형 집행 시간은 언제냐 묻고, 율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이 사람에게서 정보를 빼내는 것은, 어쩌면 자존심이 강한 전 카이저한테서 정보를 얻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양은 자신은 로이엔탈을 사형장으로 끌고 가려고 온 게 아니며, 그 이전에 로이엔탈이 사형대로 가야 할 법적 근거가 없다 대답하며 라인하르트를 변호하러 왔다 설명하지만, 로이엔탈은 질 나쁜 농담 하냐며 왜 양 제독이 마인 카이저를 변호하냐고 조롱한다. 율리안이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양 대신 말을 꺼냈지만, 카이저가 우주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으며 공화국 의회가 양 웬리를 변호인으로 지명했다는 설명을 들은 로이엔탈은 싸늘하게 코웃음칠 뿐이었다. 어차피 마인 카이저의 처형에 금가루를 뿌리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는 신랄한 지적은 애써 감방 안을 그나마 말이 좀 통하는 분위기로 만들어 보려던 율리안의 노력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감방 안은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했고, 그렇게 이야기는 순식간에 파탄지경으로 흐르는 듯했다. 그 때 양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로이엔탈 씨.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더럽고 추잡한 연극이죠."

현 자유공화국연합군 원수, 이른바 '민주공화주의의 진정한 수호자' 양 웬리가 민주공화국의 재판에 대해 말한 이야기 치고는 너무나도 험한 말이었다. 로이엔탈은 물론이고 율리안마저 그 표현의 과격함에 놀랐을 정도였다. 분명 어제 양이 이야기했던 소리였지만, 그 때는 이 정도로 과격하진 않았다. 분명히 '이런 재판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소리였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더러운 연극'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었다.

율리안의 머리가 다시 복잡해지기 시작할 무렵, 마침내 로이엔탈이 입을 떼었다. "양 원수, 귀하는 지금 내게 격장지계를 쓰려 하는 겁니까." 격장지계(激將之計)란 상대를 격동시켜, 쉽게 말해 도발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오래된 계책이다. 그러니 로이엔탈은 양에게, 혹시 일부러 과격한 언사를 쓰며 자신의 편이 된 척하며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냐, 하고 힐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생각을 말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자유공화국연합군의 총수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그런 계획을 세우는데 아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그걸 더러운 연극이라고 하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럽소만."라는 로이엔탈의 질문에 양은 한숨을 쉬었다. 로이엔탈의 말은 분명히 일리가 있었다. 그 자신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들 양을 군부의 최대 권력자이자 자유공화국연합에서 두 번째 아니면 세 번째의 권력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국방장관은 월터 아일랜즈였고 양은 그냥 그 휘하의 장성일 뿐이라고 양 자신은 항상 생각하고 있지만, 이미 온 우주의 사람들 중에서 양을 그렇게 보는 자는 그야말로 스무 명이 약간 넘을까 말까였다.

그 예로, 양은 단지 자유공화국연합군의 제2군 사령관일 뿐이었으나 사람들은 항상 그가 '자유공화국연합군 총사령관'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자유공화국의 시민들도 그러니 실제로 현직 군인이면서 동시에 관직을 겸임했던 로이엔탈에게 자신이 아무리 시빌리언 컨트롤 원칙을 위배할 생각이 없다고 해봤자 한계라고 양은 생각했다. 양은 '그런 자가 이런 결정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말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쪽이 잘못된 거겠지. 특히 로이엔탈 씨에게는 말이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믿게 만드는 것이 변호인 양 웬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양은 다시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눈 뜬 뒤로 도대체 몇 번이나 한숨을 토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한숨을 다시 되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로이엔탈 씨, 말씀대로입니다. 사실 이 재판은 그저 은하제국의 카이저를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처형하려는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덧붙일 게 있다면, 여기에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서 새로운 자유민주공화국의 성립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지요. 예, 어떤 의미에서는 정권이 바뀌면 항상 하는 반대파 숙청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항상 그 명분은 거창하지만 말입니다. 귀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갑자기 로이엔탈의 반응이 바뀌었다. 갑자기 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세운 것이었다. 한 쪽은 푸르고 한 쪽은 검은 눈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마 양의 마지막 말이 뭔가 충격을 준 듯했다. 그러더니, 그는 처음으로 양에게 그때까지 퍼붓던 조롱 이외의 반응을 보였다. 로이엔탈이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숙청 말하냐 묻자 양 웬리는 동의하며 결국 그런 숙청을 반복하려는 것이라 긍정한다. 로이엔탈은 자신도 그런 죄를 지었으니 순순히 입을 열라는 거냐 묻자 양은 반대라 대답한다.

"로엔그람 씨의 죄목 중에는, 그가 황제가 될 때 문벌귀족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는 혐의가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혐의로 로엔그람 씨를 심판한다는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똑같은 짓을 로엔그람 씨에게 하려고 하고 있지요. 있는 죄 없는 죄 다 씌워서 희생제의 제물로 바치고, 자신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 시대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라는 이름은 결코 다시 꺼내서는 안 될 악몽으로 묻어 버리고, 골덴바움 왕조로부터 시작된 은하제국의 폭정 따위는 그냥 나쁜 꿈에 지나지 않았다는 식으로 몰아가려는 겁니다.

그냥 로엔그람 씨의 목숨을 빼앗는 게 목적이라면 애초에 의회가 저를 변호인으로 지명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공정한, 어떤 의미로는 오히려 피고인 쪽에 과도한 특혜를 주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게 결국 공정한 재판이 아니고, 로엔그람 씨의 죽음이 정해진 결론인 이상 본질적으로는 똑같은 모살입니다. ' 양 웬리가 변호했는데도 결과를 바꿀 수 없을 정도의 대악당', 뭐 이런 식이 되겠지요. 더구나 이런 비정상적인 희생을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정당화하고 그걸 '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히 파렴치한 일입니다. 그런 건 자유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런 기반 위에 선 질서가 제대로 유지될 리도 없고요. 제가 바라는 건 그런 잘못된 출발을 막는 것입니다."

로이엔탈은 잠깐 침묵하다 양에게 대답했다.

"양 원수, 나는 미터마이어가 아닙니다. 그 친구는 한 번 충성을 바쳤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끝까지 지키는 남자입니다. 아마 그는 '카이저의 목숨을 구하려 노력한다'라는 조건만으로도 귀하에게 기꺼이 협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합니다.

모르겠습니까? 귀하가 말한 것은 자유공화주의의 미래입니다. 하지만 내가 꾸었던 꿈은 그것과는 다르지요. 사실 나는 당신들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이해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 사상을 위해서 내가 힘을 바쳐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물론 나는 패배자니까, 당신들이 원한다면 내 목을 걸어서 잔치를 연다거나 내 일가붙이를 모조리 찾아내서 공개처형한다거나 하더라도 어쩔 도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다릅니다. 귀하는 지금 내게 '부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강압이 아니라 말이오.

그렇다면 나는 내가 공감할 수도 없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당신에게 협력해야 한단 말입니까? 어차피 카이저의 죽음을 뒤집을 수도 없고, 우리들의 제국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우리들에게 세상을 바꿀 힘도 되돌려주지 않는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헛된 짓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양 원수?"

어째서 자신이 적들을 도와줘야 하는가. 그것도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 헛수고에. 결국 로이엔탈이 말하고 있는 것은 둘 중의 하나였다. 자신을 설득시키려면 뭔가 더 그럴듯한 미끼를 제공하라는 이야기거나, 아니면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소리거나. 만일 그가 무엇을 바라고 있다면 그걸 제공해주고 대신 정보를 끌어내도 될 터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율리안은 로이엔탈의 말이 앞의 의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양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양은 로이엔탈을 떠보기로 했다. 양은 만일 그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다시 되찾게 된다면 어쩔 거냐 묻고, 로이엔탈은 지금의 자신은 죽은 시체에 지나지 않는데 죽은 시체가 그런 힘을 가질 리 없으니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답한다.

역시나, 하고 율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끝까지 비협조적인 자세를 유지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건 아마 율리안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장 양의 낯빛도 아까보다 더 어두워진 듯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양은 포기하지 않고 한번 더 낚싯줄을 드리워 보기로 했다. 물론 그 자신도 성공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러한 말을 꺼내려고 했다. '로이엔탈 씨, 만일 귀하의 자유를 제가 보장해 드린다면 어떻겠습니까?'

플리 바게닝(Flea Bargaining). 한 마디로, 양 자신에게의 협력을 대가로 로이엔탈의 석방을 주선하겠다는 것이었다. 로이엔탈이 양에게 만족할 만한 정보를 내놓는다면 양은 그 대가로 로이엔탈을 풀어준다, 는 형태의 이른바 사법 거래라 불리는 것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재판에서라면 검사가 아니라 일개 변호사가 이러한 약속을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원칙적으로 변호사에게 증인의 형량을 조정할 권리 따위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양의 말마따나 '정상적인 재판이 아니기 때문에', 즉 검사도 판사도 변호사도 모두 자유공화국연합군의 수뇌부들인 상태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실제로 자유공화국연합 의회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라인하르트 개인의 유죄일 뿐이지, 그 부하들의 처벌은 아니었다. 사실 단순히 적국과의 싸움에서 승전한 것이 아니라 예전의 적들까지 모두 포용하여 전 인류의 국가를 꾸려야 하는 의회와 정부는 로엔그람 왕조 은하제국 상부 출신자들을 무턱대고 처형하여 일어날 극심한 반발을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넉 달 후의 새로운 총선거가 있었고, 생전 처음 투표권을 얻어보는 우주 인구 반 이상의 표를 손쉽게 얻으려면 그들의 불안감을 덜어주고 자신들의 자비로운 면을 부각시키는 편이 나았으니까 말이다.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로이엔탈이나 미터마이어가 전향하여 신생 우주통일국가에서 일하게 된다면 그건 나름대로 자유공화주의 체제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드높이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적들의 명장이 드디어 옳은 가치에 귀순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가 풀려 나온다고 해서 공화국에 해가 될 일은 의외로 거의 없었다. 바라트 강화 조약 이후, 양이 연금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와 유사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게 감시당하며 어떠한 힘도 없는 상태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혹 로이엔탈이 자결한다거나 살해당한다면 어떨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나 적어도 자유공화국연합 정부에게는 분명 산 로이엔탈보다는 죽은 로이엔탈이 훨씬 편할 것이다. 만일 로이엔탈이 다시 힘을 모아 반란을 일으킨다면? 사실 그러한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지금 로이엔탈이 그런 일을 일으킨다면, 그 때는 로이엔탈은 물론이고 나머지 제국 출신 유명인사들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터였다.

어떤 길이건 간에 공화국 의회가 로이엔탈을 가둬둔다고 나을 게 없으니, 일단 로이엔탈의 석방을 이끌어내는 것 자체가 양에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공화국 의회는 로이엔탈의 석방 대신 양이 얻는 정보를 이용하여 라인하르트의 유죄를 확실히 하고자 하겠지만 말이다.(그래서 양은 로이엔탈뿐만이 아니라 의회와도 거래를 해야 할 판이었다.) 여하튼 그런 정도는 감수해야 했기에, 의회가 어떠한 속셈을 품건 간에 양 자신도 결국 의회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차피 같은 정보라도 쓰는 사람 나름대로이니까 말이다.

'양, 너는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거지?'

자책의 소리가 양 웬리의 양심을 심하게 때렸다. 그와 동시에, 양은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꼈다. 일찍이 자신이 제일 싫어하고 혐오했던 일들, 그러니까 욥 트뤼니히트가 흔히 하던 것처럼 남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놓고 당근과 채찍을 눈앞에 들이대며 뻔한 헛소리로 꾀는 것이라던가 아니면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다른 소리를 늘어놓아 그들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고만 하는 것들을 어느새 자기 자신이 그대로 따라하려 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부끄럽게 한 것은, 로이엔탈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따졌다는 것이다. 로이엔탈이 설령 이런 거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양에게는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로이엔탈은 "거절합니다"라는 한 마디로 양 웬리라는 인간을 완전히 정신적인 심연의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었다. 양은 자신의 소신을 그렇게 팔아먹으면서까지 비참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몸에 맞지 않는 물을 마시면 체한다는 소리를 한 게 누구였더라, 양 웬리?'

결국 양은 그 생각을 로이엔탈에게 꺼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이제 양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아무 성과 없이 로이엔탈의 방을 나가며, '카이저에 대한 정보를 달라'는 원래 목적은 꺼내놓지도 못한 채 시간을 낭비했다는 걸 자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율리안은, 5분 정도 말없이 끙끙대다가 갑자기 로이엔탈에게 인사를 하고 나가는 자신의 양부를 뒤따라 나갔다.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는 것은 율리안에게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방 문을 나가면서 양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율리안은 그걸 확실히 보지 못했다.

율리안은 양에게 아까 로이엔탈에게 뭘 말하려다 몇 분간의 고민 끝에 그만두지 않았냐며, 혹시 로이엔탈과 사법거래할 생각이었냐 묻는다. 어떻게 그걸 알았냐는 듯이 양이 깜짝 놀라서 율리안을 쳐다보자, 율리안은 '당신 얼굴에 다 씌어있소.'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없이 손을 들어올렸다. 양은 방금 전보다도 더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말을 실제로 내뱉었다면 자신만 비참해졌을 테니 그런 실수를 안 해서 다행이지만 결국 단서는 다시 제로가 되었다고.

율리안은 양이 저지를 뻔했던 실수가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양의 표정을 보니 그런 걸 질문해도 대답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건 그냥 양 혼자 묻어두도록 놔두고, 다른 걸 물어보기로 했다. 사람들은 연이은 실패를 겪으면 그 표정이 암울해지는데, 특히 이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경우에 그 암울함은 도저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 평소에도 웃음이 적고 뚱한 표정을 주로 짓고 다니는 양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이상했다. 물론 표정은 죽을 상이었지만, 아까 언뜻 양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듯한 광경도 그러했고, 어딘지 모르게 희미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율리안을 자극했다. 그래서 이번엔 율리안이 양을 떠 보기로 했다. 율리안은 양에게 아무래도 단서를 잡은 것 같다고 묻고, 그제서야 양의 얼굴이 펴졌다. 그리고 갑자기 율리안에게 엉뚱한 소리를 했다. 마치 어젯밤처럼.

"율리안, 저녁에 칼라일 대장을 만나고 오면 안 될까?"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양이 엘프리데 폰 콜라우슈 펠릭스 미터마이어의 정보를 요구한 것은 로이엔탈을 설득하기 위한 거지만, 그 정보 자체를 가지고 로이엔탈의 입을 열려는 건 아니고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겠지만 그런 접근을 위해서는 어쨌든 이 정보가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 또 자신들이 얻은 데이터베이스가 신뢰할 수 있는지 알아내려는 수단이기도 한데, 실제 정보와 오딘의 데이터베이스가 다르다면 라인하르트의 변호인 이전에 연합군의 원수로서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에 들어가야 하며 이런 조작에 지구교가 관련되어 있다면 그 사실을 들어 로이엔탈을 설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유공화국연합군 3군 사령관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올해 37세가 된 그가 양 웬리와 더불어 자유공화국연합에, 그리고 전 은하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였다. 법무관으로 근무하다 하이네센 대탈출 작전 때 의외의 활약을 보여주어 신생 공화국군의 3군 제독까지 올라갔으며(뷰코크 원수 휘하의 1군은 사실상 국가원수 경호전력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공화국군 내에서 두 번째 서열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침내 양과 함께 제국 자체를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에서 실질적으로 격멸한 위대한 제독이라는 것이 온 우주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지만, 잘 살펴보면 그에 대한 정보는 딱 거기까지뿐이라는 것을 꼼꼼한 사람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람을 쉬이 사귀지 않는 양보다도 교우관계라던가 인간관계가 더 제한적이라,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내는 것 또한 매우 어려운 노릇이었다.

율리안이 칼라일의 사무실 문 앞에서 몇 분째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이는 것도 사실 이 까다롭고 다가가기 힘든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하느냐는 것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몇 년 전 지구에 잠입했을 때도, 페잔의 지구교 지부에 갔을 때도 이렇게까지 떨리고 불안하지는 않았다.[20] 그때는 적어도 적을 상대했으니 앞으로의 인간관계 따위에 골머리를 썩지 않아도 좋았지만, 지금 율리안이 대면해야 할 상대는 어찌되었건 같은 깃발 아래 선 아군이었다. 이런 사람의 방에는 어떻게 들어가야 할까, 첫마디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서 정보를 빼와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그러니까 양은 왜 이런 시련을 나한테 떠넘긴 것인가. 율리안의 머릿속에서 슬슬 아까의 좋지 않은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카린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힘들잖아, 이거.'

뜬금없이 튀어나온 칼라일 검사의 이름에 잠깐 입을 열지 못하던 율리안이 천천히 반문했다. 양은 조금씩 싱글거리면서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표정으로 율리안을 쳐다봤다. 당연히 율리안은 황당한 표정으로 양을 쳐다봤다. 칼라일이 쉽게 정보를 흘려줄 것 같지 않다고 의아해하자 양은 정정당당하게 요구할 거라 대답한다. 율리안의 표정이 아까보다도 더 이상해졌다. 대체 뭘 정정당당하게 요구한단 말인가.

율리안은 잠시 자신이 혼자서 '석가면' 칼라일 검사의 방에 들어가서 '죄송합니다만, 양 제독님이 정보를 달라고 시키셔서 그러는데 정보 좀 주시면 안 될까요?'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다 싸늘하게 무시당하고 한없이 비참해지는 상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말도 하기 전에 무시당할지도 모른다. 몇십 초 사이에 율리안의 얼굴이 점점 노래졌고, 눈에서는 생기가 사라지고 초점이 흐려졌다. 이윽고 율리안의 입에서는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율리안이 그러거나 말거나, 양은 테이블로 가서 펜과 종이를 끌어당겨 몇 글자 적기 시작했다. 그 아래에 서명을 한 양은 종이를 접어 봉투에 넣고 전용 봉랍으로 봉했다. 그리고 난 후에야 양은 율리안이 일시적인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보았다. 율리안은 아까의 별로 기분 좋지 못한 기억을 떠올리며 문에 기대어 관자놀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이 다음이 뭐였더라, 중요한데, 라고 혼자 되뇌이며 다시 기억을 정리해보려고 끙끙대었다. 분명히 양이 그 뒤에 들려준 말들은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등 뒤가 스르륵 하고 움직였다.

다음 순간, 율리안은 눈앞의 땅과 하늘이 뒤바뀌는 진기한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율리안은 문에 기대고 있었는데, 문이 갑자기 열리며 뒤로 그대로 넘어진 것이다. 그의 뒤통수가 바닥에 쿵 하고 부딪혔고, 눈 앞에서는 별들이 흩날리며 천사들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눈앞엔 빨간 머리의 천사도 보였다. 카테로제일까? 환상에서의 카테로제는 현실과는 달리 율리안에게 정말 천사와 같이 환하게 웃어주고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의 천사도 보였다. 이건.......

"내 방에 무슨 일이지? 민츠 소령."

천사들이 순간 잿빛으로 얼어붙었다 와장창 깨져나갔다. 테 굵은 안경 너머로 역시 잿빛을 띤 눈이 율리안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그나시오스 칼라일 대표 검사와의 첫 대면이 하필이면 이따위 꼴이라니. 율리안은 한 10초 정도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칼라일은 일어나라, 아니면 계속 그대로 누워있을 거냐 말하자 정신 차린 율리안은 칼라일에게 사과하고, 칼라일은 율리안에게 양이 보냈냐 묻자 율리안은 순순히 인정한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안 그래도 복잡한 율리안의 머릿속이 완전히 헝클어졌다. 가장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이 까다로운 사람과의 대면을 완전히 망쳐버린 것이다. 이제 어떤 말을 해야 이 파탄난 분위기를 수습할 수 있을까? 하고 율리안이 이리저리 생각할 때 전혀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칼라일은 율리안에게 정보가 필요해서 온 거냐면 들어주겠다며 뭔지 말해보라 말했다. 율리안이 계속 고민해오던 것은 칼라일에게 어떤 말을 해야 정보를 요구할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결국 율리안이 별과 천사를 보게 된 것도 그 생각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칼라일은 율리안이 혼자 해온 고민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 처음부터 본론을 꺼낸 것이다. 율리안에게는 일단 안도되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지독히 힘 빠지는 사실이기도 했다. 사실은 그것 말고도 율리안의 마음에 걸리는 사실이 있었지만, 지금 그 사실을 추궁했다간 간신히 잡은 기회를 그대로 놓쳐버릴 것 같았다.

물론 칼라일이 정보를 주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들어준다'고 한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일단 율리안은 더 큰 고기가 걸린 낚싯대부터 끌어당기기로 했다. 오스카 폰 로이엔탈의 친족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묻자 칼라일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칼라일은 로이엔탈에게 혈육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율리안도 알지 않냐 반문하고 율리안은 전후(戰後)에 입수한 데이터베이스에는 그렇게 나와있었다고 인정한다. 칼라일과 율리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제국의 멸망 후 입수한 제국군 수뇌부의 신상자료들에 대한 것이었다.

오딘을 점령한 공화국군은 제국군 정보사령부 건물에서 로이엔탈이며 미터마이어, 오베르슈타인을 위시한 고위 장성들의 신상정보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외에도 '그림멜스하우젠 자작의 리스트' 등의 흥미로운 정보들이 대량 발굴되어 자유공화국연합의 체제 선전에 쓰이기도 하였고, 초급 장교나 부사관들의 정보 또한 공화국군이 큰 혼란 없이 기존 제국군 세력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게 도운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공화국군 지휘부에 있어 가장 큰 소득은 역시 주요 장성들의 정보, 그것도 가족관계나 성장배경, 치정관계 등까지 기록되어 있는 골덴바움 왕조 때의 기록들이었다.

이러한 정보들은 기본적으로 민간에 공개된 '리스트'나 하급 행정실무병들에게도 열람권이 있는 장교/부사관 정보와 달리 원칙적으로는 장성급 이상만 열람할 수 있었지만, 양을 보좌하던 율리안은 예외적으로 이러한 기록들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리안이 하던 일은 바로 양에게 이러한 정보들을 보기 좋게 정리하여 넘겨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율리안은 로이엔탈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자신이 여섯 달 전에 수없이 접했고 바로 방금 전에도 양과 함께 다시 출력해서 확인한 내용, 즉 '독신, 부모 모두 사망, 형제나 후견인, 배우자 및 자녀 없음'이란 항목이었다. 분명히 칼라일의 말이 맞았다.

칼라일은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혼잣말처럼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자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달라는 거냐 이야기했다. 율리안은 잠시 속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이 세상에 없는 자들이라면 아마 로이엔탈의 양친을 이야기하는 것일 터였다. 확실히 그들에 대한 정보 또한 로이엔탈의 입을 열기 위한 의외의 돌파구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이 자신에게 이야기해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율리안은 처음으로 이 사람을 상대하면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양과 칼라일의 수수께끼 대결에서 처음으로 칼라일이 헛짚은 것이다. 마치 자기 아버지의 키가 다른 아이의 아버지보다 크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어린애같이 순진하고도 묘하게 힘 있는 안도감이 불안감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죄송합니다만, 아닙니다'고 하면 이 석가면의 남자는 어떤 당황한 반응을 보일까? 하는 짓궂은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 율리안의 안심은 너무 일렀다. 율리안보다 먼저 칼라일이 입을 연 것이다. 로이엔탈에게 숨겨진 자식이라도 있을 거냐 생각하는 거냐고. 율리안의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안도감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얼어붙었다. 칼라일은 양이 예측한 것과 똑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역시 이 사람,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율리안의 뇌리에 좀 전 양의 추론 과정이 스쳐 지나갔다.

"율리안, 아까 로이엔탈 씨가 상당히 흥미로운 소리를 했던 거 기억나지? 뭐, 지나가는 소리 비슷하게 한 거니까. 확실한 것도 아니고. 아마 로이엔탈 씨도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가능성이 높지. 그런데 아무래도 자꾸 맘에 걸린단 말이야. 그러니까, 아까 로이엔탈 씨가 한 말 있었잖아? 일가붙이를 모두 공개처형해도 어쩌고 한 부분. 율리안, 분명히 문맥만 보면 문제없는 말이지. 하지만 여섯 달 전부터 우리가 접하던 정보와는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로이엔탈 씨는 일가친척이 없다고 나온 걸로 기억나는데요? 그렇다면...... 숨겨진 가족이라도 있다는 추측이십니까? 하지만 양 제독님,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 건가요? 만일 로이엔탈 씨에게 숨겨진 가족이 있다고 해도, 그걸 빌미 삼아서 그에게 정보를 얻어내신다던가 하실 건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칼라일 검사님께 그런 정보를 얻어와야 하는 겁니까?"

"율리안, 만일 그에게 숨겨진 가족이 있다면,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그가 철저히 자기 가족의 존재를 숨겼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 분명히 골덴바움 왕조 당시의 기록뿐 아니라 신 은하제국 때의 기록도 갱신되어서 남아있었으니까, 자신에게 혈육이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숨겼다면 기록에도 그 사실이 남지 않을 수 있지.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는 정보가 더 들어와야 알겠지만. 그게 아니면......

패전 후 누가 기록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상당히 곤란해져. 우리는 그때 중요한 정보들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안도했지만, 그게 신뢰할 수 없는 정보라면? 전부 왜곡할 필요도 없어. 일부만 왜곡하면 되지. 그렇다면 우리는 그걸 눈치채기 전까지는 잘못된 정보에 속아넘어가는 셈이 되고, 눈치챈 후에도 어디까지가 믿을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으니까 거기에 매달려 힘을 낭비하게 되겠지,

제국군이 그랬다면 그렇게 많은 정보를 남겨 놓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겠지. 아마 다 파기했을 거야. 율리안 네가 옛날에 페잔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터마이어 원수가 오딘을 빠져나올 때 얼마나 급박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자료를 조작할 가능성은 더 낮다고 봐야 되지 않을까? 심지어 마린도르프 황후조차도 지키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확실히 양의 추측은 설득력이 높았다. 전 우주에 라인하르트의 패배 소식이 전송되자마자 오딘에서는 거의 옛 페잔 소요만큼의 대혼란이 일어났고, 황후 힐데가르트 폰 로엔그람(하지만 공화국에서는 그녀를 마린도르프라 칭하고 있었다)이 사망하고 황제의 장남과 누이가 실종되었으며 볼프강 미터마이어 울리히 케슬러가 간신히 둘째 황자를 데리고 도망치기까지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틀도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공화국에서 힐데가르트의 성을 로엔그람이 아니라 마린도르프라 부르는 것은 라인하르트와 힐데가르트의 황자들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공화국의 책략이다.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와 함께 실종된 첫째 아들 알렉산더 지크프리트 폰 로엔그람이나 볼프강 미터마이어와 같이 있는 둘째 아들 오토나 전부 라인하르트의 제대로 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미터마이어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들을 옹립해서 다시 제국 부흥 운동 같은 게 일어나면 시끄러워질 수 있기 때문. 그래서 공화국에서 부르는 힐데가르트의 성은 아직도 마린도르프고 알렉과 오토 황자 역시 공화국에서는 라인하르트의 아들 취급을 안 해서 '마린도르프'라 부른다. 라인하르트는 그 사실을 모르지만 안다고 해도 헛짓거리 한다고 무시할 거라고.

당시 율리안은 그저 라인하르트가 화려하게 권좌에 앉은 만큼 극도로 허망하게 무너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듣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라인하르트가 패배해서 공화국의 포로가 되었어도, 그렇게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졌다는 것은 분명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양과 율리안은 라인하르트가 패배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딘을 불태우고 제국군을 마비시켰으며 황실 일가를 죽인 자들을 지구교라 판단한다.

작가 말에 따르면 본작의 지구교는 '잔당' 따위가 아니라 여전히 현역으로 본편 도중에 지구교가 망한다는 설정이었다고 한다. 현재도 100 중 13 정도 되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며, 페잔에서는 그 라인하르트도 어쩌지 못하고 도망쳐야 할 정도로 깽판을 쳐댔다고. 본편에서의 주된 군사적 대립관계가 동맹(과 그 후신들)과 제국 사이의 대립이라면, 여기서 '현재' 주가 되는 군사적 대립관계는 공화국과 지구교로, 지금 양과 율리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라인하르트 패배 이후의 제국의 급격한 멸망(원래는 군주가 패했다고 나라가 그렇게까지 빨리 망하지는 않는 것이 정상이다)의 원인이 사실은 지구교의 개입 때문이라 판단한 것이다.

지구교, 이 조직은 도대체 어디까지 그 촉수를 뻗고 있는 것일까? 양의 가설은, 오딘에서도 지구교 세력이 뿌리 뽑히지 않은 채 남아서 라인하르트 패배 이후의 대혼란을 주도했다는 말이었다. 확실히 오딘에 상당수의 제국군이 남아있었는데도 순식간에 치안이 마비되고 혼란이 일어난 양상을 보면 배후에 뭔가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특히 양이 우려하고 있는 것은, 만일 지구교가 배후에서 그런 사태를 조종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오딘에서 제국군이 물러나고 공화국군이 행성을 접수하기까지의 공백기간 동안 제국군 정보 데이터베이스에도 조작이 가해졌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데이터베이스의 신뢰도가 낮아진다고 해서 딱히 공화국에 크게 위협이 된다거나 공화국군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함정이 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제국군 함대나 병기창, 병력배치 같은 중요한 정보는 모두 실지재조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유공화국연합군의 군인 양 웬리에게 이 정보들의 오류는 성가시지만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변호인' 양 웬리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율리안, 이 재판의 8할 정도는 이 데이터베이스에 나온 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기소도, 변호도, 증거도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이 자료를 신뢰할 수 없게 된다면 재판 자체가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겠지. 글쎄, 솔직히 지구교가 개입해서 자료를 조작했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인 가설이지만 그냥 가설일 뿐이야. 물론 그냥 사소한, 지극히 사소한 문제에 내가 너무 과민반응하는 건지도 모르고. 호사가의 과대망상 비슷한 것일 수도 있겠지. 사실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으니까. 엉뚱한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서 삽질하는 거 말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구교가 군사적 기밀도 아니고 그저 장성들 신변정보들을 조작할 이유 따위는 거의 없다는 것. 더구나 그 데이터가 이런 식의 재판에 쓰이리라 예측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니까. 그리고 그걸 조작해서 도대체 누구에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에 걸린다, 이거. 그리고 사실 우리에게는 남은 열쇠가 이것밖에 없으니까 바보짓이라도 한 번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

율리안은 그래서 칼라일에게 로이엔탈의 미심쩍은 부분에 대해서 물어보려 온 것이었다. 확실히 칼라일이 어떠한 방향으로든 정보를 준다면, 양은 그것과 원래 정보를 비교해서 재판 전략에 참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재판에서는 서로 반대편에 서지만, 같은 '군인'으로서 요구한다면 정보 제공을 거절하기란 힘들 것이라는 것이 양의 말이었다. 어찌 되었건 이러한 데이터베이스의 왜곡은 공화국군에 문제가 되는 일이므로, 같은 공화국의 군사령관의 입장에서는 협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란 논리였다.

하지만 지금 율리안의 머릿속에서는 다른 의심이 피어나고 있었다. 과연 이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그것도 자기와 양 둘이서만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맞춰내는 건 솔직히 대단하기보다는 오히려 꺼림칙한 것이었다. 분명 칼라일이 방금 전에 로이엔탈의 자식 이야기를 꺼냈을 때, 오죽하면 아주 잠깐이지만 율리안은 '혹시 이 사람 제국군 스파이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까지 해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율리안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는 망상을 멈추고 칼라일에게 대답했다.

양이 로이엔탈에게 숨겨진 가족이 있지 않나 의심한다고 실토하자, 칼라일은 대답해줄 수는 있지만 나는 양의 반대편인데 내가 왜 대답해줘야 하냐 묻고, 율리안은 일단 칼라일이 어떤 쪽이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래서 양이 준비해 둔 조커를 꺼내들기로 했다. 아직도 꺼림칙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율리안이 양 웬리가 공화국군이 오딘에서 입수한 제국군 데이터베이스가 실은 조작된 게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말하자, 처음으로 칼라일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율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왠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칼라일이 정확히 어느 부분이냐 묻자 율리안은 고위 간부들의 인적사항 부분이라 답하고, 칼라일이 그런 걸 조작한다고 좋을 게 있냐 묻자 율리안은 칼라일에게 양의 생각을 간략히 말했다. 칼라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구교가 개입되었다, 고 추측된다면 양 원수에게 답을 해줄 필요가 있겠군. 이 데이터베이스가 만약 '조작'된 것이라면 가장 타당한 추측은 역시 그쪽이다. 하지만 어디서 그 차이를 알아낸 거지? 양 원수가 이런 추측을 했다면. 그 자에게 가족이 있다는 정황증거가 있을 거라는 소리다. 그래, 분명히 데이터베이스에는 그 자한테 가족 같은 건 없다고 나오지. 하지만 양 원수는 사실 그자에게 가족이 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 데이터베이스를 신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면 분명히 양 원수가 어디에선가 모순을 찾아냈기 때문에 그런 추측을 한 거겠지. 근거도 없이 그런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니까. 어딘가?"

율리안이 오늘 오전에 자신들이 로이엔탈을 면회한 걸 아냐 묻자 칼라일은 거기서였냐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칼라일은 율리안에게 그 정도면 충분하니 정보를 주겠다며, 데이터베이스 조작 여부라면 늦어도 이틀 이내에는 모두 판명 가능할 테니 한 시간 후에 보안망으로 전달하겠다 말하고 축객령을 내린다. 율리안이 경례를 하고 돌아 나오자마자 뒤에서 문이 닫혔다. 분명히 율리안은 양이 바란 대로 정보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전혀 무언가를 얻은 기분이 아니었다. 마치 여러 시간 고생하고도 결국 빈손으로 쫒겨난 듯한 찝찝함이 그의 온몸에 축축히 퍼져 있는 느낌이었다.

율리안이 복도를 걸으면서 계속 고민했던 것은 칼라일이 갑자기 말을 끊고 정보를 떠넘기듯이 하며 자신을 내쫓은 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 정보라는 것도 어떤 내용인지 전혀 알아내지 못했고, 단지 한 시간 후에 전달할 거라는 확답 정도만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사실 율리안이 칼라일에게 제대로 얻어낸 정보는 데이터베이스 조작에 관한 조사가 이틀 안에 끝난다는 사실뿐이었다. 하지만 칼라일에게 충분한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생각보다 더 율리안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칼라일에게 역으로 정보를 빼앗겼다는 느낌이었다. 아까의 대화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로이엔탈의 면회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이야기를 딱 끊고 '정보를 주겠다'며 자신을 내보낸 것. 오늘의 그리 유쾌하지 못했던 대화 중에서도 제일 꺼림칙한 부분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21]

문 안쪽에서는 야자게 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양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돌아온 것이다. 율리안의 한숨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22] 하얀 김을 내던 야자게가 식어가는 속도는, 다시 말하면 양 웬리의 의심이 불붙는 속도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율리안은 식탁에 놓인 빵 이외에는 거의 입에 대지 않았으며, 양은 그것마저도 잊어버린 듯이 물컵을 손에 든 채 입 이외에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보안망을 통해 정보가 그의 수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런 불편한 분위기의 식사가 계속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물론 정보가 들어온다고 이 분위기가 가실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지만.

율리안은 거기서 말을 끊은 게 뭔가 숨기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양에게 말하자 양은 로이엔탈의 방을 도청했거나 감시 내역을 손에 넣었을 거라 추측한다. 자살을 막기 위해 평소에도 24시간 감시하고 있기 때문. 양은 대화 내역을 되짚어보면 굳이 너에게 듣지 않아도 어디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추측하지만 율리안은 그게 아니더라도 뭔가 꺼림칙한 예감이 들며, 제국군이나 지구교와 연관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고 토로한다. 이때 양은 자기 물컵을 손 안에서 깨버렸고, 그래서 율리안은 급히 구급상자를 가져오려고 했지만, 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확실히 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양은 율리안을 진정시키며 기다리던 게 왔다고 말한다.

한편 은하제국 섭정 겸 은하제국군 총사령관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가진 볼프강 미터마이어는 분명 몇 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십만의 군함을 부리고 수천만의 병사들 위에 선, 그야말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확실히 얼마 전만 해도 그의 직책명이 지금보다는 거창하지 않은 감이 있었음에도 수십만의 군함을 지휘하고 수천만의 병사들을 부리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은하제국 섭정'과 '제국군 총사령관'이라는, 황제 바로 아래이자 어쩌면 황제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붉은색 망토를 걸친 갈색 머리의 남자의 휘하에는 베이오울프 한 척을 빼면 행성 경비함대라고 불러주기도 민망한 폐선 몇 척과 작은 행성 두 개짜리 성계가 있을 뿐이었다. 한 때 '질풍 볼프'라고 불렸던 젊은 명장의 머리는 30대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희끗희끗했다. 그나마 이러한 변방 반란분자 수준의 세력을 가진 자들이 그래도 국가 꼴을 갖추고 최소한 내부에서 무너지지 않게 한 것은 이 반백의 원수 덕이었지만 말이다.

볼프강 미터마이어 원수는 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니, 황제를 보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 아기, 그러니까 라인하르트의 둘째 아들인 오토 폰 로엔그람을 데리고 황급히 오딘을 탈출한 이들이 만든 것이 신 은하제국의 망명 정부였던 것이다. 물론 황제라고는 하나 젖먹이 아이가 국정을 수행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미터마이어가 슬프도록 거창한 허울을 쓰게 된 것이었다.

벽에 걸린 거울을 무심코 쳐다보다가 머리카락의 절반이 하얗게 세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의 입에서 자신의 모습이 오베르슈타인처럼 변했다고 푸념했다. 확실히 마흔이 안 된 나이에 반백이라는 건 오베르슈타인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치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발터 폰 쇤코프가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버텨야 할 것인가, 어떻게 이 척박한 땅에서 최대한 오래 버틸 수 있는가, 황제는 이 절망의 구렁텅이를 극복할 명군으로 성장할 것인가, 오베르슈타인이 살아 있었다면...... 그러나 품 안에서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미터마이어는 당황하며 아내 에반젤린 미터마이어를 찾았다. 작가 말에 따르면 오베르슈타인이 페잔 참극 때 사라진 뒤 그의 가치를 깨달았지만 여전히 개인적으로는 꺼리며, 원작의 빌리바르트 요아힘 폰 메르카츠와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고.

한편 양은 출력되어 나온 전문을 읽고 있었다. 칼라일이 약속한 '정보'였다. 전문은 특수 군용 회선(그것도 사령관급의 직통 보안 회선이었다)을 통해 전달되었지만, 군대식의 전문은 아니었다. 사무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격식을 갖추고 있는 꽤 긴 글이었다. 로이엔탈에게는 옛 문벌귀족 출신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나 행방불명이며, 오딘 대붕괴 때도 행적이 추적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시 오딘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 여자의 정확한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정보국 추정에 의하면 리히텐라데 일족의 일원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었다. 양의 말대로 로이엔탈에게 가족이 있을 것이라는 그의 추측은 거의 옳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그 추측대로라면 데이터베이스의 조작 여부 역시 충분히 의심할 만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나는 그가 숙청이라는 말에 반응해서 내게 대한 태도를 바꿨던 걸로 착각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을 거다. 나는 그때 내 얘기가 먹혀들어갔다고 자만하고 있었어. 결국 반대파 숙청에 불과하다, 이 이야기가 그 사람에게도 먹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자유민주주의자의 자만일 뿐이었던 것일지도 몰라. 나는 그 사람이, 그런 일에 후회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로이엔탈 씨의 말대로 그 사람이 꾸었던 꿈은 지금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 하지만 그런다고 자신이 꾸어왔던 꿈을 부정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까 두 귀로 들으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다니...... 바보 같은 일이지. 그는 숙청이란 말에 반응한 것이 아니었어. 리히텐라데라는 것에 반응한 것이지. 그가 말했잖아? '리히텐라데 숙청 말입니까?'라고. 나는 함포를 쏴 놓고도 그게 명중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던 바보였던 거다."

양은 그제서야 로이엔탈이 왜 입을 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양은 로이엔탈과의 대화 당시에는 라인하르트 숙청이라는 말에 반응해서 태도를 바꾼 줄 알았지만, 로이엔탈은 숙청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어머니가 리히텐라데 일족이라서 리히텐라데라는 말에 반응한 것이었다.[23] 율리안의 머릿속에도 이제 대강의 얼개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처자(확실하지는 않지만)에 관련된 일이라면 반응이 바뀔 가능성도 없지는 않겠구나 하고 율리안은 생각했다. 만약 양이나 쇤코프가 카린에 관한 이야기로 자신의 입을 열게 한다면? 물론 실제로 당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자신이라면 10초도 안 돼서 입을 열 것 같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금은요동의 냉철한 제독이 그런 데에 반응할 사람일까? 라인하르트도 그렇고, 로이엔탈도 그렇고. 모두 그런 데에 덥썩 반응해서 입을 열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율리안이 품고 있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양은 벌써 율리안의 생각보다 한 발 앞서 나간 모양이었다.

"물론, 나도 그 사람이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지만 그런 사람이 우리가 묻지도 않은 처자식 이야기까지 꺼냈다. 왜일까? 그래, 생각해보면 이것밖에는 답이 나오지 않겠구나. 우리는 그 사람을 속인 거다. 왜 그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나는 처음에 그 사람이 별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한 줄 알았다. 우리가 그 말 한 마디에서 이 정도의 정보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그저 운이 좋아서, 우연으로 그런 줄 알았어.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다. 그래, 로이엔탈 씨는 의미 없이 그런 소리를 한 것도, 실수한 것도 아니었던 거야.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소리는 하지 않을 거다. 더구나 그 사람은 여태껏 그걸 숨기고 살았어. 그걸 우리에게 왜 떠벌리겠니? 다만 그 사람은 착각한 것뿐이겠지. 우리가 이미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이야."

순식간에 율리안의 등골이 싸늘해졌다. 확실히 양의 말대로라면 모든 것이 아귀가 맞는다. 분명 로이엔탈은 그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도. 그래서 양이 리히텐라데 숙청 이야기를 했을 때 그것을 자신에게 은근히 그 사실을 암시하는 말로 들었다, 고 생각하면? 이미 그렇다면, 로이엔탈은 그 이야기를 굳이 숨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묻지도 않은 처자식 이야기에 교수대 어쩌고 하는 소리까지 내뱉고 만 것이다, 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로이엔탈은 그들이 그 이야기를 하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율리안은 그런 자신의 생각을 양에게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다 듣고 난 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그를 속인 거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말이야."

속인 자신까지도 모르게 남을 속여넘겼다라, 흔한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상황에는 딱 맞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양이 한 일은 결국 로이엔탈을 속였다는 일, 즉 양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일인 것이 아닌가? 더구나 그것만으로 끝날 일 역시 아니었다. 당장 로이엔탈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작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본의와는 백만 차원 정도 떨어졌지만 무슨 변명을 하든 그를 속인 것이 된다.

율리안은 이제라도 의도치 않게 속였다고 털어놓아야 하나 묻지만, 머리로는 괜한 소리를 했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정중히 사과하는 게 나중에 괜한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는 가장 정직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일반적인 상황에 놓여있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양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듯했다. 양은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지금은 숨겨야겠다며, 대부분 이럴 경우 꼼수를 쓰면 나중에 반드시 몇 배로 곤란한 문제가 생기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율리안은 양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단순히 '곤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로이엔탈에게 플리 바게닝을 제안하지 않은 것도 단순히 그게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서라기보다는 그것이 그에게 부끄러운 일이어서였던 것처럼, 그가 겉으로 내쉬는 한숨 이상의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율리안에게는 너무나도 뻔히 보이는 일이었다. 율리안이 양에게 이제는 어떻게 할 거냐 묻자, 양은 바로 자세를 바꾸고 앉아서 생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 양을 위해 율리안은 포트에서 더운 물을 가져와 찻잔에 티백을 걸치고 홍차를 우려냈다. 어차피 변호를 하는 건 양이니까 그가 당분간은 혼자 생각하게 가만히 놔두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과연 양은 율리안이 옆에서 밀어준 찻잔을 아무 위화감 없이 입에 가져가더니 홀짝 하고 들이키고 나서 혼잣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들어도 도저히 의미를 모를 말들이었다는 것이 문제였긴 하지만 말이다. 하이네센 대탈출 이후로 양은 혼자서 생각에 빠질 때마다 의미 없는 혼잣말들을 늘어놓는 버릇이 생겼던 것이다. 마침내 길고 긴 사색을 끝내고 양은 다시 율리안에게 입을 열었다. 오늘 자신들이 알아낸 것은 데이터베이스와 실제 정보와의 차이, 로이엔탈의 가족에 대한 실마리, 로이엔탈이 왜 자신들에게 그런 말을 했는가에 대한 가능성 높은 추리 정도. 하지만 로이엔탈의 가족을 계속 파고들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며 한동안 그 문제는 다른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한다. 라인하르트를 변호하겠다고 나섰지만 양은 라인하르트가 무엇을 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변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꾸벅하더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방에 그 혼자만 남자 양은 다 식어빠진 야자게 다리를 하나 잡고 우물거리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전용 통신망을 개방하고 빠르게 몇 글자를 두드렸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와서 남은 야자게를 대충 뱃속에 채워 넣은 다음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프레데리카를 부를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귀찮아.'라는 생각으로 간단히 지워버리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한편 볼프강 미터마이어 원수의 팔에는 이제 막 울음을 그치고 다시 잠든 어린 황제가 안겨 있었다. 이 아이는 아마 자신이 꽤 많은 수의 어른들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라는 것 따위는 아마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 유아가 확실히 아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옅은 금발의 여자와, 그 옆에 항상 같이 있는 아이의 얼굴은 확실히 기억하는 듯했다. 항상 울음을 터뜨리더라도 그 얼굴만 보면 방긋 웃음을 지었으니 말이다.

아이는 요즘 뽈뽈거리며 걸어다니는데 재미를 붙였지만, 아직 말을 제대로 하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 또래 아이들에 비해 딱히 성장이 느리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고 아직까지 큰 병을 앓거나 한 적도 없었다. 안 그래도 희망을 가질 일이 거의 없는 미터마이어 원수에게 어린 황제와 아들이 별 문제 없이 자라고 있다는 건 거의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다. 미터마이어는 잠든 황제를 부인 에반젤린에게 넘겨주고, 이번에는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리는 아들을 안아 올렸다. 펠릭스 미터마이어는 아버지한테 꾸중 비슷한 것을 들은 것을 모르는 건지,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팔을 용감히 휘저으며 무언가를 연신 말하려 하고 있었다.[24]

4.2.4. 17~19. 그럴듯한 음모

양 웬리가 침대 속에서 프레데리카가 자신을 괴롭히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동안 우주사법재판소의 다른 방에서는 40대 정도의 남자와 머리가 흰 노인이 늦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자유공화국연합 정부의 최고 수뇌부, 주석 알렉산드르 뷰코크와 연합의회 의장 프란체스크 롬스키였다. 양과 율리안, 라인하르트, 칼라일 등이 땀 나게 움직이고 있는 무대를 마련한 실질적인 연출가들이었으며, 한 사람은 아예 연출가 자리뿐이 아니라 주연배우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는 거물이었던 것이다. 후일 저명한 역사가 알렉산더 그린우드[25]가 '정치적으로 최고의 조합'이라 극찬했을 정도로 신생 약소국을 일약 전 은하의 통일국가로 키우는 데 주 기둥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뷰코크 주석은 사실 그 직책이 가지는 무게감에 비하면 지금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물론 뷰코크 자신은 자신이 건국 직후에는 어마어마한 격무에 시달렸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입법부의 권한이 동맹 시절보다 훨씬 강해졌으므로(반대로 행정부의 권한은 동맹, 특히 트뤼니히트 시절보다 상당히 축소되었다) 모두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저 웃으며 넘어갈 뿐이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 아니면 얼마나 유능하게 일처리를 해왔는가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존재 자체가 곧 자유공화국연합의 정신적 방파제이자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자유공화국연합의 지도자 자리에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는 절대로 없었을 것이었다.

한편 실제로 국가의 틀을 짠 것은 옛 엘 파실 독립정부의 수장이었던 롬스키 의장이었다. 헌법의 제정, 삼권의 권한 조정과 정부의 설립, 그리고 전후 처리와 이번 라인하르트의 재판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사실 '격무에 시달렸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말이었다. 심지어는 내후년 초의 총선거 준비까지 그가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가 떠안고 있는 업무량은 라인하르트의 그것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큰 일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처리한 것이 바로 이 남자의 능력을 입증하는 증거일 것이었다. 물론 롬스키에게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없잖아 있었으며 가끔 폭주하는 것을 뷰코크와 아일랜즈 등이 말리느라 쩔쩔맬 때도 있을 정도로 급진적으로 나갈 때도 있었다. 심지어 현대의 일부 비평가들은 만일 '하이네센 대탈출'과 뷰코크 주석의 합류가 없었으면 롬스키는 1년도 안 되어 제국군이나 지구교도들에게 암살당했을 것이다, 라고 비관적으로 보기도 한다.

확실히 정부의 최고 지도자라는 면에서 롬스키는 그리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신 의회의 대표라는 직무에서는 그보다 더 그 일이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다. 어쨌든 그는 혼자가 아니었으며 엘 파실 혁명정부를 처음 일으킬 때의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라 구 동맹에서도 수위의 능력을 보였던 인재들과 직위에 걸맞은 권한, 그리고 자신의 짐을 덜어줄 조언자들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개인의 능력이란 면에서 보았을 때 처음 엘 파실에서 궐기했을 때에 비해 비교도 안 될 만큼 지도자로서 크게 성장한 것이 지금의 롬스키였다.

그 두 사람 모두 칠면조 프리카세를 우물거리느라 잠시 대화를 멈추고 있었지만, 뷰코크 주석이 브랜디 병의 마개를 하나 또 뽑아내며 롬스키에게 말을 다시 걸었다. 프레데리카의 요리 실력이 뭐 어떻길래 그리 기겁하냐 묻자 롬스키는 적어도 주석에게 드릴 요리는 아니며, 입법부와 행정부의 업무가 동시에 마비되면 곤란하다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아까 주석과 의장이 그녀를 찾아와서 몇 마디 환담을 나누었을 때, 프레데리카는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롬스키가 완곡히 거절한 것이었다.

원래 그들은 양 웬리를 만나보려 온 것이었지만 양은 조사 때문에 그들을 만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리고 물론 그들이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나 나누려고 이 늦은 시간에 만난 것은 아니었다. 뷰코크가 총선 준비가 잘 되어가냐 묻자 롬스키는 고려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이며, 옛 제국령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선거에 대해 교육하는 문제는 그런대로 진행되고 있지만 피선거권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선거는 시민들이 머리 비우고 투표장에 가서 투표함에 표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6]

공식적으로 자유공화국연합의 총선거는 자유출마와 자유투표를 보장하고 있었다. 투표에서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간에 그것을 겸허히 인정한다는 것이 연합 의회의 공식 입장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이상일 뿐이고 현실적으로는 지구교 세력이라던지 옛 제국 잔여 세력이 힘을 얻게 되는 상황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그뿐 아니라 구 동맹의 어중이떠중이들이 다시 정계로 진출하는 것은 오히려 앞의 두 경우보다 가능성은 높으면서 훨씬 더 위험한 일이었기에 이 역시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주공화주의의 적통을 자처하고 있는 연합이 대놓고 선거를 통제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롬스키가 처해있는 딜레마였다.

뷰코크는 롬스키가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어렵고 이번 재판도 그 포석이 아니냐 묻자 롬스키는 긍정하며 다른 이야기도 꺼냈다. 이러한 이야기가 그들 사이에서 계속 오갔고, 빈 브랜디 병 역시 점점 식탁에 쌓여갔다. 마침내 그들이 이야기를 마치고 롬스키 의장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이미 시계가 6월 29일의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의장은 아침에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더 오래는 있을 수 없던 것이었다. 사실 그가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도 굳이 뷰코크 주석의 방에 들어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탱크 베드를 또 빌려야겠군.' 원래 탱크 베드는 함상에서 격전을 치르는 병사들의 빠른 피로 회복을 위해 마련된 장비였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일정한 크기 이상의 군함에만 설치되는 장비이지만, 특이하게도 지상에 탱크 베드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대부분 군 출신의 인사들이 효율적인 시간 활용을 위하여 설치하는 것이었는데, 뷰코크 주석 역시 예외는 아니라서 탱크 베드만 있는 수면실을 하나 따로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은 별로 쓸 일이 없었지만 대신 롬스키 의장이나 아일랜즈 국방장관이 이 수면실을 자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가 정리되고 둘 모두 잠자리에 들기 전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뷰코크는 양이 지구교 건에 대해 보고한 걸 아냐 묻자 롬스키는 칼라일에게 데이터베이스 조작 건에 대해 듣기는 했는데 뭔 문제 있냐 묻고, 뷰코크는 지금은 그 건이 문제가 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싹이 드러났을 때 뿌리뽑는 게 낫다 조언하자 롬스키도 의회와 내각에 의심스러운 자들이 있으니 조치를 취하겠다 답한다. 뷰코크는 차라리 라인하르트의 제국이 부활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구교와 트뤼니히트의 망령이 다시 덮쳐오는 것은 결단코 사양이며 롬스키, 양, 칼라일도 지구교에게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 않았냐고 눈을 매섭게 빛내며 말했다.[27]

참고로 트뤼니히트는 해당 세계선에서 뭔 사고를 친 건지 라인하르트가 친히 처형해서 오래 전에 죽었다고 한다. 이 세계선은 노이에란트 전역이 없었지만 트뤼니히트의 원작 행보를 고려할 때 원작에서 꾸민 음모를 여기서도 꾸몄다가 도중에 적발되어 라인하르트가 반역죄로 죽인 듯. 라인하르트는 트뤼니히트를 바라트 화약 때부터 극혐하며 죽일 때만 노리고 있었으니 주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뷰코크가 말한 트뤼니히트의 망령은 버밀리온 성역 회전 당시 매국노 짓을 하려던 트뤼니히트를 물리적으로 저지하려다 지구교에게 막혀 실패한 적이 있기에 그것을 거론한 것이라고 한다.

밤새 프레데리카에게 목을 졸리고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맞으며 억지로 그녀가 만든 수프를 계속 들이키여야 했던 악몽에 시달린 양 웬리를 깨운 것은 솔리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였다(아마 그녀가 만든 요리를 '먹기 귀찮아'라고 했다는 이유에서였던 것 같았다). 눈을 떠 보니 율리안과 프레데리카, 카테로제가 응접실 비스무리한 공간의 소파에 앉아 솔리비전을 보고 있었다. 프레데리카를 보고 양은 잠깐 기겁하여 정신줄을 놓을 뻔했지만, 다행히도 현실의 프레데리카가 자신한테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떠올려내고 안도한 후 솔리비전에 눈을 돌렸다. 아침의 시사 대담 프로그램에는 롬스키 의장이 나와서 패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중 연설을 통한 여론 조작과 선동술에 극히 능했던 욥 트뤼니히트와는 달리 롬스키는 연설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대신 이러한 무대에서의 토론과 대담이란 방식을 자주 사용했다.

"......옛 지구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상적인 정치의 형태로 철인 정치라는 모형을 제시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한 인간의 지배를 전제한 철인 정치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가 없겠지요. 따라서 플라톤은 이것을 방법론적인 대안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정신적 지침으로 제시한 것이었습니다."

플라톤 이야기인가, 하고 양은 눈길을 솔리비전에서 돌렸다. 율리안은 의외로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고, 카테로제는 종류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과일을 까먹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고개를 돌린 프레데리카와 눈이 그대로 마주쳤다. 프레데리카가 일어났냐 묻자 양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다시 침대로 무너져 내렸다. 율리안과 카테로제 역시 재빨리 양에게 아침 인사를 했고, 양은 거기에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어제 너무 무리한 탓인지 안 그래도 잠이 많은 양 웬리의 정신은 맑아질 기색을 보이질 않았다. 그의 귀에는 솔리비전에서 나오는 롬스키의 대담이 흘러드는 듯 마는 듯 하고 있었다.

"의장님, 그렇다면 이러한 개념이 현대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하는 패널의 질문에 롬스키가 답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 상당히 자주 나오는 편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마치 정치가라기보다는 교사에 가까운 듯한 태도를 항상 견지하고 있었다. 양은 이 방송을 보며 율리안에게 가끔 한 말인 '의장은 트뤼니히트와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안면 근육은 졸음에 마취되어 잘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에도 철인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자들의 대부분은, 그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플라톤의 지적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대신 자신들이 곧 철인 혹은 그것에 가까운 자라고 포장하지요. 역시 실제로는 절대로 그럴 수 없음에도 말입니다.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 이런 류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자들이 백이면 백 독재자로서 민주주의를 짓밟아 왔다는 사실은......"

롬스키의 목소리마저 가물가물하게 멀어져가는 양의 정신을 맑게 한 것은 그럴싸한 수프 냄새였다. 아니, 정확히는 수프를 가지고 온 프레데리카의 얼굴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녀의 생긋 웃는 얼굴과 어젯밤 실컷 꾼 악몽이 오버랩되는 공포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여보, 아침 먹어야죠?"라는 프레데리카의 말에 양은 순식간에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쓰다 못해 온몸을 얼음덩어리 속에 파묻는 듯한 오싹함에 힘입어 아침잠을 단숨에 물리칠 수 있었다. 여기서 '먹기 귀찮아' 따위의 헛소리가 실수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기만을 빌면서 말이었다.

양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프레데리카가 아침으로 만든 수프는 별다른 저항감 없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고, 그래서 방긋방긋 웃고 있는 그녀 앞에서 수프를 남긴다던지 아니면 입 밖으로 내뿜는다던지 하는 생각하기도 싫은 불상사는 넘길 수 있었다. 더구나 간밤의 꿈이 하필 그런 찜찜한 악몽이었기 때문에 평소 식사할 때의 신조가 '대충대충'이었던 양 웬리라도 오늘만큼은 각별히 주의하여 정자세를 하고 식사에 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프의 맛이 그렇게까지 이상하지는 않았던 것은 그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었다. 물론 양 본인은 나중에 '혀가 수프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긴 했지만 말이다.

간신히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식사가 끝나고, 양이 생애 최대의 연기력을 발휘하여 싱긋 웃어 보이자 프레데리카가 방긋방긋 웃으며 그릇을 들고 자리를 떴다. 율리안과 카테로제가 열심히 보고 있는 솔리비전 영상에서는 계속 롬스키 의장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양은 지금 졸려서 그 내용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뱃속에 수프가 무사히 들어가자 다시 기껏 물리쳤던 아침잠이 되살아났던 것이다. 몰려드는 잠을 쫓아내기 위해 오늘 할 일을 떠올리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양 웬리라는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하루 일과를 잠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억지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려니 몸이 제대로 따라줄 리가 없었고, 그래서 십 분간의 사투 끝에 양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대어 앉는 것뿐이었다. 바로 이불 속으로 다시 파고들어가지 않은 것만 해도 양의 게으른 생활상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라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대사건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들은 양의 사투를 전혀 보고 있지 않았다.

솔리비전의 국영 채널에서는 롬스키와 패널들이 목례를 나누고 고풍스러운 음악이 흐르는 것으로 시사 대담 프로그램이 끝난 후 아침 뉴스의 예고가 잠깐 흘러나왔다. 자칭 신 은하제국 카이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두 번째 공판이 내일 모레로 잡혀있다는 소식, 단거리 다중 워프 항행 통제 시스템 신호법의 개정 임박, 하이네센 행성에서의 연쇄 강간 살인 사건이 벌써 다섯 건째 발생했다는 뉴스, 브랜디 생산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뉴스, 실론 행성의 대화재...... 잠깐, 어디서 뭐라고? 솔리비전으로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활활 타오르는 관목림의, 아니 차밭의 모습이 지나가고 있었다. "윽." 하는 단말마의 탄식과 함께 차분히 끓어오르는 분노가 그의 아침잠을 깨끗이 날려버렸다.[28]

검찰측이 제출한 증거의 열람 허가를 받기 위해 더스티 아텐보로를 만나러 간 양은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한때 '은하제국 정통정부'의 일원이었던 우주사법재판관의 한 사람, 레오폴트 슈마허였다. 그는 라인하르트의 신 은하제국에 쫓겨 지하로 잠적했던 사람이지만 제국의 정세가 혼란에 빠지자 페잔에서 밭을 일구던 부하들을 이끌고 엘 파실 성계 주변의 튀르키예 행성으로 농장을 옮기는 도박을 성공시켰고, 심지어는 은하제국령 출신 시민들을 대표하는 재판관 적임자를 찾던 연합의회의 눈에 들어[29] 마침내 패배한 금발 청년을 심판하는 다섯 재판관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이었다. 물론 양은 어제 아텐보로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았지만 그 '한 명'이 슈마허 재판관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텐보로는 뉴스 보면 알겠지만 브랜디는 당분간 없고 뷰코크 방에도 공급이 안 된다고 너스레를 떨자 양은 어쩔 수 없지만 기분 나쁘다고 툴툴대면서 검찰 측 증거를 물어본다. 아텐보로는 오늘 아침에 벨파레스 검사가 들고 와서 등록했지만 그걸 열람한다고 해도 제국군 제독들 수사기록과 증인신청서고, 수사기록은 양도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양에게 큰 도움이 안 될 거라 단언한다. 양이 아텐보로에게 증인으로 누가 나오냐 묻자, 아텐보로는 대답 대신 두툼한 서류 뭉치를 양에게 내밀었다.

양은 입에서 찻잔을 떼고 그 서류들을 한 장씩 넘겨 보았다. 포로로 잡힌 제국군 장성들의 취조기록, 피고인 취조기록, 증인 신청서. 두꺼운 취조기록에 비해 두 장밖에 안 되는 증인 신청서는 언뜻 보기에는 매우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특히 그곳에 씌여 있는 증인들의 이름 중 하나가 조안 레벨로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칼라일 검사는 확실히 내일 모레의 재판을 서전(序戰)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했다.[30] '인류 자유와 인권에 대한 포괄적 침해 행위'를 쟁점으로 끌고 갈 것인가, 하고 양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공판 첫날에 칼라일 대표검사가 읊은 기소 이유 목록의 가장 앞에 위치했던 죄목이었다.

양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신은 이 정도도 준비하지 못했다고 속으로 탄식하면서 서류를 넘기던 양의 손가락이 갑자기 멈췄다. 두 번째의 증인 신청서에는 낯선 사람의 사진이 출력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까지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칼 브라케를 증인으로 신청한 거냐 묻자 레오폴트 슈마허가 로엔그람의 민정상서였던 사람이라 대답한다.[31] 양은 몇 초 동안 망설이다 슈마허에게 그건 알지만 로엔그람 제국의 민정상서라면 그 제국의 수뇌부가 아니냐 물었다. 칼 브라케라는 사람에 대해 양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그 이름과 직책 정도로, 양은 그가 로엔그람 제국에서 신설된 민정부의 초대 상서로 귀족 출신이지만 개혁에 앞장섰던 사람이라는 정도의 단편적인 정보 이외에는 알지 못했다.

양이 궁금한 것은 어째서 칼라일 검사가 그런 사람을 검찰측의 증인으로 내세웠는지였다. 적어도 새로운 제국의 수뇌부였다면 검찰 측에 유리한 증인이라고는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뒤집어 말하자면 칼라일 검사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인이라면 증언대에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증인이 어떤 증언을 하던, 검찰측에서는 그걸 괜찮은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였다는 소리가 될 것이었다. 그래서 양은 홍차를 한 잔 시켰고, 검은 머리의 젊은 종업원이 가져온 홍차를 들이켰다. 그걸 보던 슈마허는 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다는 것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재판부가 변호 측에 정보를 줄 수는 없으며 벨파레스 검사가 들고 온 건 그 증인신청서뿐이라 말하자 양은 결국 공판 때 등장할 카드라 이해하고 다시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찻잔은 양 웬리의 손가락에 걸려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양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증언은 물증보다 골치 아픈 증거라 말하다[32] 슈마허와 어텐보로가 대화 상대의 이변을 깨달은 건, 즉 양이 단순히 생각을 정리하느라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10초 정도 뒤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손가락에 걸린 찻잔이 손에서 기울어져 홍차가 쏟아졌는데도 양이 눈을 뜨지 않았던 일 때문이었으며, 그러다가 고개를 털썩 떨구고 그대로 앞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사람들이 황급히 불려왔을 때 이미 양의 동공은 활짝 풀려 있었다. 호흡은 희미하게나마 유지하고 있었지만 의식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모두들 양 웬리에게 일어난 변고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어떤 남자가 찻잔을 슬쩍 챙긴 후 모습을 감추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하였다. 검은색 머리에 왜소한 체구의, 20대 초반 정도의 젊은이였다.

양이 침대에서 간신히 눈을 뜬 것은 음독 다음날 오후였다. 양 웬리가 독을 마시고 쓰러졌다는 사실은 철저한 보도통제 덕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양의 가족과 정부 수뇌부 몇 명만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편 현장에서 용의자 한 명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녀의 품 안에서 양이 마시던 찻잔이 발견되었을 뿐더러, 그 찻잔에는 빼도박도 못하게 그녀의 지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범인은 대담하게도 감시 시설의 사각지대를 노려 양을 중독시킨 후 혼란을 틈타 증거를 인멸하려다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체포당했다, 이런 내용이 용의자의 진술과 증거들을 기반으로 파악된 사실이었다.

양이 율리안에게 무슨 종류의 독이냐 묻자 율리안은 그냥 먹으면 죽지는 않지만 알코올과 같이 섭취하면 치명적인 독이 되는 강한 수면제였고 이번에는 브랜디 안 타서 살아남았다고 대답한다. 양은 브랜디를 못 구해서 자기 인생의 낙이 박탈당했다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헛웃음을 지었다. 율리안이 부주의했다고 사과하자 양은 아텐보로와 슈마허가 있는데도 꼼짝없이 당한 건 자신이 방심해서지 율리안의 잘못이 아니며 덕분에 푹 잤고 생각도 정리하기로 한다.[33][34]

뷰코크와 아텐보로, 칼라일 등의 병문안이 끝나고 프레데리카와 카테로제가 과일을 가지러 나가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양과 율리안 둘이었다. 저녁에는 롬스키 의장과 황 루이 부의장이 찾아온다고 했지만 그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양은 조금 전까지 독을 마시고 쓰러져 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게 몸놀림에 지장이 없었다. 말도 어눌하지 않았고, 감각도 멀쩡했으며, 사고 기능도 정상이었던 것이다. 율리안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말하기 주저해왔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첫 번째는 앞으로 재판의 주요 요인들에 대한 경호가 강화되고 특히 양 웬리는 경호원의 눈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 양은 숨 막히는데 안 하면 안 되냐 불평하고,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하고 율리안은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사실 24시간 경호원을 붙인다는 발상은 율리안이 해낸 것이었다. 당연히 양이 그런 숨 막히는 분위기를 싫어한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율리안 역시 양에 대한 일이라면 산전수전 다 겪은 몸이었다. 양은 독 때문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싫다고 푸념하자 율리안은 추호라도 아내 앞에서 그 말 하지 말라 경고하고, 양이 프레데리카가 이해해줄 거라 너스레를 떨자 율리안은 그 프레데리카가 호위를 맡을 거라 말하며 아예 부인에게 고충을 털어놓고 상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압박하자 양은 기겁하며 방금 대화는 우주에 존재한 적이 없던 걸로 하자고 정색했다.

율리안은 큭큭 하고 웃으면서 몇 번 더 양을 놀리다가 다시 정색하고 두 번째 이야기를 꺼냈다. 공판 일자는 원래 내일이었지만 양의 독살미수사건 때문에 변호측의 의사에 따라 공판일 변경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율리안은 역시 미룰 거냐 묻지만[35] 양은 더없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미루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몸은 괜찮고 미룰 수 있는 성격의 재판도 아니며 적어도 지금은 정보 좀 모아봐야 뭔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율리안이 내일 재판을 버리려는 거냐 묻자 양은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어차피 자신들이 모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어서 그런 걸로는 칼라일을 이길 수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적어도 우세하게 끌면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말한다.

'허세는 아니시겠죠?'하는 소리가 율리안의 목젖까지 넘쳐올랐다. 하지만 양 웬리라는 사람이 언제 아군에게 허세를 부린 적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그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막았다. 율리안은 양이 허튼 소리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지만 당장 내일 제출할 증거물 목록이 없다 묻자 양은 지금 써주는 걸 제출하면 될 거고 내일은 조안 레벨로가 증인으로 나오는 걸 보니 탐색전일 테니 자신들 쪽에서도 한 명은 그럴듯하게 구색을 맞출 수 있을 거라며 쪽지를 내밀었다.

황 루이의 이름을 본 율리안은 구색은 맞겠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증언은 안 나올 것 같다 우려하자 양은 어차피 자신들은 충분히 불리하기 때문에 차라리 황 루이 부의장처럼 공정한 사람이 낫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적대시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36] 율리안은 아무리 황 루이가 공정하다 한들 여기에 증인으로 선다는 것 자체를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는데 무슨 증언을 시킬 거냐 묻고, 양은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 직전의 개괄적인 정보를 들을 수는 있을 거고, 그만하면 탐색전에 어울리면서도 황 루이에게 부담이 아니며 그 이전에 이 사람 말고 오늘 안에 부탁할 사람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다고 롬스키 의장을 내세울 수는 없기 때문. 율리안은 확실히 황 루이도 병문안 오기로 한 것을 떠올리지만 증인이 두 사람 나오는데 다른 패는 어쩔 거냐 묻고, 양은 그 질문에 다시 질문으로 화답했다.

"'이제르론의 무도회' 때,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무기가 뭐였었지? 율리안."

"......경면장갑이었죠."[37]

두 번째 공판의 생중계는 아예 국영 채널 한 개의 편성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 우주의 사람이 사는 모든 행성과 인공구조물, 모든 통상항로의 등대위성에 이 재판 광경이 생중계로 방송되고 있었다. 전체적인 광경은 첫째 날과 분위기는 비슷했지만 더 스케일이 커진 느낌이었는데, 특히 검사석에 놓인 탁자가 길어졌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였다. 재판부석의 길이는 그대로였지만, 그곳의 의자 또한 세 개에서 다섯 개로 늘어나 있었다. 자유공화국연합의 입법부와 행정부, 사법부, 군, 그리고 구 제국령 출신 시민들을 대표하는 판사들이었다. 검사석 가운데에 앉아 있는 사람은 물론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이었으며, 그 옆에 앉아있는 두 사람은 특이하게도 모두 젊은 여성들이었다. 한 사람은 군복 차림이었고 한 사람은 법복을 입고 있었다. 변호석에는 양 웬리와 율리안 민츠가 앉아있었으며, 피고인석에는 손이 묶인 라인하르트가 앉아있었다. 이렇게 검사, 변호인, 피고인이 모두 자리를 잡은 후 재판관 다섯 명이 나란히 입장하면서 두 번째 공판이 시작되었다. 뷰코크 재판장의 목소리가 온 재판정, 그리고 모든 우주에 울려 퍼졌다.

"우주력 803년 7월 1일, 우주사법재판소 전쟁범죄국 특별재판부는 피고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우주사법재판을 이에 속개한다."

피고인의 확인, 변호인 및 검사의 출석확인, 공소사실 확인, 피고인의 권리 공고. 이러한 형식적인 절차는 별다른 이상이 없으므로 간단하고 빠르게 끝났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제출된 증거물 목록을 낭독하는 과정에서였다. 사법부 쪽의 판사 하산 일 무스카리는 조금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종이 두 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변호측이 제출한 증인 목록은 명백하게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변호인 역시 칼 브라케 씨를 증인으로 신청했습니다. 맞습니까?"

"틀림없습니다."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칼라일이 증인으로 신청한 사람은 두 사람, 조안 레벨로와 칼 브라케였다. 그리고 양 웬리 역시 두 번째 증인으로 칼 브라케를 신청한 것이었다. 재판장석 중앙에서 뷰코크 주석이 입을 열었다.

4.2.5. 20~25. 찬란의 잔해

"검사측과 변호측이 같은 증인을 세울 줄이야...... 솔직히 이런 경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소이다. 물론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되진 않겠지만 말이오. 어떻소, 무스카리 판사?"

"확실히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적어도 현 시점에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죠. 변호인, 변호인은 법률이 보장하는 바와 같이 검찰측 증인에 대한 반대신문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변호인이 심문을 반복해서 증인에게 불필요한 수고를 끼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반대신문 기회에 변호인이 주심문 역시 행할 수 있도록 재판부가 허가할 테니, 한 번에 같이 처리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증인을 심문하는데 굳이 똑같은 내용과 절차를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변호인의 반대심문 역시 충분히 증거로 인정될 수 있으며, 유도심문이 허가된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반대심문이 더 유리한 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재판부는 양이 자신이 원하는 질문을 하게끔 허가해준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분명 무스카리 판사의 주장은 합리적이었고, 양에게 불리한 점은 전혀 없었다. 대중들의 눈에는 오히려 금발 패배자에게 지나친 관용을 베푼다고까지 비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양은 잠깐 머뭇거리지도 않고 그 제안을 걷어차 버렸다.

"거부하겠습니다. 주심문은 따로 행하게 해주십시오."라는 양의 말에 무스카리 판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알겠지만, 변호 측이 재판부의 권고를 거부한 이상 변호인의 입증은 검사 측과 완전히 구분되어야 하기에 변호인의 주심문 과정에서 그 입증이 검사 측의 입증과 한 치라도 중복될 경우 재판부는 심문을 즉시 중단시키고 증인을 귀가시킬 것이며 오늘 검사가 청구한 혐의에 대한 심리 역시 그 시간부로 종료될 것이라 선언한다. 쉽게 말하자면, 양의 말을 들어주는 대신 페널티를 부과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한 치라도 똑같은 물음을 반복한다면 그대로 심문이 끝나며, 이 건에 대해서는 재기의 여지가 없다는 불리한 조건. 하지만 양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망설임 없이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였다. 양에게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칼라일과 양 모두 이의 없다고 대답했다.

공판의 첫 번째 증인으로 출두한 조안 레벨로 자유행성동맹 최고평의회 의장의 외모는 몇 년 사이 너무나도 망가져 있었다. 머리는 모두 색이 바래 희게 변했으며, 팔뚝과 발목은 바로 티가 날 정도로 앙상했고, 걸음걸이는 위태로운 것이 분명 휠체어에 의존해야 할 것만 같은 품이었다. 그러나 그런 위태로운 걸음걸이에도 휠체어는커녕 지팡이도 짚지 않고 꼿꼿이 서서 증인석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은, 필경 한 때는 동맹의 수장이었다는 마지막 자존심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뷰코크 재판장은 쇠잔한 동맹의 마지막 의장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레벨로에게 질문했다. 우선 조안 레벨로 본인이 맞는지 묻고, 생년월일의 확인이 끝나고 재판부의 질문은 잠시 멈췄다. 원래는 거주지와 직업을 물어봐야 했지만 그것은 곧 레벨로 본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초라한 현재를 자인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벨로는 직업을 잃고 임대주택에서 거주하는 몰락한 자신의 상태를 말하는데도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증인 확인절차와 선서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이 재판을 보고 있는 거의 모두가 레벨로에 대해 연민하기 시작했다. 물론 국가원수로서는 그닥 유능하지 못했고 동맹 멸망에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와 별개로 인간 레벨로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레벨로에게 호감을 가지는 상황을 충분히 즐기는 사람이 한 명 법정 안에 있었다.

"한 방 먹었군요."라고 율리안이 중얼거렸다. 칼라일 검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양은 팔짱을 끼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이 양에게 칼라일이 순식간에 좌중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고 말하자 양은 안 괜찮다 말하면서도 어차피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초반에 일방적으로 끌려간 건 이미 각오했다고 대답한다. 양은 사실 자신마저도 레벨로에게 측은함을 느낀다, 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연민을 느끼는 것은 방청인들의 그것과는 약간 다른 이유였지만 굳이 그런 소리를 지금 꺼낼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칼라일이 심문을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포문을 연 시점이라면 더욱 그랬다.

"검사측은 가급적이면 본 증인을 증언대에 소환하고 싶지 않았소. 이곳은 그의 정치적 책임을 묻는 자리도 아닐 뿐더러, 무엇보다도 현 상태의 증인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뽑아내는 것은 분명 상당히 가혹한 일이 될 테니까. 확실히." 하고 말을 잠깐 끊은 검사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더니, 한숨을 쉬고 팔짱을 끼며 푸념을 하듯이 말을 이어갔다.

"'인류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포괄적인 침해 행위'라는 혐의를 입증하는 데 어째서 쓸데없이 동맹의 마지막 수장을 소환했는가, 하는 반론이 들어올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피고인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증거는 무엇에 관한 걸까요. 학살? 천인공노할 만행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오. 독재와 철권통치? 이 역시 모든 인류라 하기에는, 당장 구 동맹과 페잔이라는 훌륭한 반례가 있지."

이 대목에서 칼라일은 팔짱을 풀고, "지난번 공판에서 변호측은 모두변론을 통해, 피고인의 행위에 대한 원죄는 결국 루돌프 폰 골덴바움에게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물론 일리 있는 말이오. 피고인이 정권을 탈취한 후 갑자기 민주공화주의를 지지하며 은하제국을 민주공화정 체제로 이행한다, 이런 걸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하며 피고인석과 변호인석을 슬쩍 훑은 후, 양팔을 들어 올리면서 선언하듯이 입을 열었다. 마치 극형을 선고하는 판관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것이 온 은하를 전쟁의 수라장 속에 밀어넣은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까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구 동맹이 그가 일으킨 전화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는 것이 명백한 이상, 그 상황을 가장 대국적인 측면에서 상세히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구 자유행성동맹 최고평의회 의장이었던 증인뿐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오. 구 동맹의 국가원수로 현재 생존해있는 사람은 증인밖에 없으니까 말이지.”

공판의 분위기는 완전히 칼라일의 손아귀에서 좌우되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분위기는 칼라일의 논리 전개에 따라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고, 방청인들은 이미 어째서 레벨로가 증인으로 나왔는지에 의문을 갖지 않고 오직 레벨로가 어떤 증언을 해서 칼라일이 라인하르트의 책임을 입증할 것인지, 그것만을 기대하는 이들이 이미 팔 할을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칼라일은 그 분위기에 쐐기를 박아, 관중들의 기대를 넘치도록 충족시키는 배우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했다. 양은 이런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반전시키고 싶었지만, 칼라일은 양이 이의를 제기할 만한 틈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심문의 시작은 양이 전혀 꼬투리를 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38]

"검찰측은 우선, 구 동맹이 피고인의 이른바 은하제국 세력에 침탈당하던 당시의 정세를 증언으로써 듣고자 한다. 증인, 증인이 자유행성동맹 최고평의회 의장으로 취임하던 때부터 마르 아데타 전투가 끝나고 아둘라 조약[39]이 맺어질 때까지 동맹이 외교적으로 처해있던 상황을 증언해 주십시오. 먼저 어째서 증인이 멸망해가는 동맹의 의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부터 듣고 싶소."

후세까지도 역사 시간마다 자유공화국연합의 학생들을 괴롭히고 있는, 그리고 동맹 역사를 연구하는 사가(史家)들에게는 구원의 단비와도 같은 사료로 길이 남게 되는 레벨로의 증언은 원래 변호인인 양 웬리가 검찰측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책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애초에 토론의 성립을 회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전체적인 배경'에 관한 증언, 그것도 상당히 가치배제적인 스탠스의 증언이라면 논파는 물론이고 이의제기마저 쉽지 않은 탓이었다. 후일 조안 레벨로가 자신의 자서전인 '고백록'에서 정리해 더욱 유명해졌던 그의 증언은 이렇게 시작된다.

레벨로는 자신이 의장이 된 것은 트뤼니히트의 매국노 짓으로 전 동맹인들의 분노를 산 상황에서 트뤼니히트 파벌에서 다시 의장을 배출할 수는 없었기에 야합의 산물로 이렇다 할 지지파벌이 없는 상태에서 의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칼라일은 레벨로의 '거래'를 보다 명확히 증언해달라 추궁했고, 레벨로는 잠시 망설이다 욥 트뤼니히트와 은하제국 정부와의 거래로 아직 일반에 정보가 흘러나가지 않은 사안인데 증언해도 괜찮겠냐 물었다. 방청석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아마 솔리비전으로 시청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그대로 욕설을 내뱉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바라트 늑약[40]의 결과로 동맹이 사실상 제국의 속령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 불평등조약의 원인은 그저 하이네센이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기 때문이라고 막연하게만 아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힘이 모자라서 패배한 상황이니, 최소한의 납득은 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의 권리가 짓밟히고 동맹이 제국의 속령으로 전락한 것이 누군가의 장난 때문이라면? 칼라일은 거래의 당사자들인 제국도 동맹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며 거래의 구체적인 내용을 묻고, 레벨로는 자신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트뤼니히트는 거래의 대가로 신변 보장과 관직을 요구했고 바라트 늑약의 체결 외에도 비공개로 최고평의회와 동맹의회, 동맹군의 모든 인사의결권을 넘겼으며 레벨로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삽시간에 법정은 노성과 욕설로 가득 찼다. 뷰코크 재판장은 몇 번 정숙을 선언하고 망치를 내려쳤지만 15초도 안 가서 포기했다.

모든 사람들이 분노에 떨며 레벨로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알레 하이네센 이후로 무슨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았던 권리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붕괴되었다는 것에 분노한 사람이 있었고, 그러한 비겁자에게 혹해 정권을 쥐어줬다는 것에 분노하는 사람이 있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행정부와 의회의 인사권은 곧 참정권의 발현이자 주권이었으므로, 늑약에서 명시된 것보다도 더 암담한 상황, 즉 이미 시민들은 주권을 상실해버린 상태였다는 것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동맹의 시민들은, 아무리 썩어도 결국 민주주의자 알레 하이네센 응웬 킴 호아의 후예였던 것이다.

양과 율리안은 이미 이 거래에 대해 대강 알고 있었지만(사실 공화국 수뇌부는 대부분 알고 있는 정보였다) 상세한 전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고, 칼라일이 그걸 무기로 공격을 했다는 것에 경악했다. 그런데 이 법정에서 가장 당황한 인물은 따로 있었다. 손이 묶인 금발의 젊은이는, 마치 자신의 누이가 눈 앞에서 끌려갔을 때와 똑같은 눈으로 레벨로를 쳐다보고 경악에 빠져, 이윽고 그 충혈된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필사적인 시선으로 허공을 긁어댔다.[41] 이 추악함을 누가 제발 부정해 달라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칼라일이 다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손에 넣은 칼라일의 조롱에는 면도날이 돋아 있었다. 트뤼니히트는 자신의 관직을 대가로 나라는 물론이고 타인의 주권까지 팔아먹었다고 욕하면서도 그건 엄밀히 말하면 트뤼니히트의 죄지 라인하르트의 죄는 아닐 수 있고 일전에 양 웬리가 말한 대로 라인하르트는 그런 걸 거래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 있다고 치면 된다고 라인하르트를 말한 뒤 그럼에도 라인하르트는 절대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며 자료를 보여주었다. 칼라일 검사는 허공 디스플레이에 도표 두 개를 띄웠다. 첫 번째의 도표에는 사람들의 이름과 사진, 소속, 그리고 그 옆에 날짜와 직책들이 나와 있었다.

첫 번째 도표는 바라트 늑약 조인 이후의 인사 결과로 트뤼니히트 파벌의 사람들이 모두 중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요직을 다 차지한 것은 아니지만 이 인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평상시라면 레벨로가 이런 인사를 단행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그럴 수 없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로 당시 법질서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임명된 베르트랍은 수뢰죄로 형을 살고 있었음에도 우주력 799년 6월 12일에 임명장이 내려지고 6월 14일에 사면되었다. 동맹 공직신분법은 수형자 신분인 자의 입각을 허용하지 않으며 임명장이 발부될 수도 없어서 평시라면 절대로 최고평의회에 입각할 수 없지만 베르트랍은 멀쩡히 부위원장에 입각하여 업무를 행했다. 즉 비정상적인 외압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인사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으며 이는 레벨로의 증언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된다.

칼라일은 손으로 허공을 그어 다른 도표의 크기를 키웠다. 그 도표의 오른쪽에, 눈에 띄게 나와 있는 사진은 놀랍게도 양 웬리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도표에서 나와있던 이름과 사진들이 왼쪽에 나열되어 있었고, 도표의 중앙에는 제국 군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사내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헬무트 렌넨캄프라는 이름이 아래에 작게 씌여 있었다. 칼라일은 도표를 보여주며 이런 비정상적인 인사가 자행된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이었는데, 이조차 주 목적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라 설명한다.[42] 레오폴트 슈마허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 헬무트 렌넨캄프 고등판무관과 동맹 정부가 양 웬리를 제거하려고 일으킨 일로 아는데 주 목적이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이냐 묻자, 칼라일은 간단히 대답했다. 증언대 아래에서는 레벨로의 앙상해진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먼저 저는, 당시 양 웬리 원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이...... 바로 저, 조안 레벨로였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당시 양 원수를 실제로 의심했었습니다. 원수의 함대, 즉 구 동맹군 13함대는 사실상 그의 사병이 아니냐, 또 양 웬리는 그 사병을 기반으로 동맹의 권좌를 찬탈하려는 것이 아니냐...... 이런 의심이었죠. 아니, 그것보다 솔직히 저는 두려웠습니다. 양 웬리가 동맹의 마지막 남은 함대를 이끌고, 저 구국군사회의의 일원들처럼 동맹 정부에 칼을 들이대지 않을지!

아니, 아니...... 더 솔직히,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제 자리, 최고평의회의 수장 자리를 빼앗지 않을지, 조안 레벨로의 목숨을 빼앗지 않을지, 그 때에 진실로 두려웠던 것은 결국 그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양 원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목숨을 빼앗고 그 부하들과 무엇보다 로젠리터, 그들을 신속히 제거하면 적어도 제 목숨이 위협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웃기는 일이었죠. 양 웬리 원수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언제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진정 그러고자 했다면 그 이전에도, 훨씬 더 좋은 틈을 타서 얼마든지 그랬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건 그 때의 제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양 웬리 원수를 팔아넘겼습니다. ......제국 고등판무관, 헬무트 렌넨캄프에게입니다. 그 자는 당시 동맹 정부를, 저를 압박하고 있었으니까요."

"증인! 어떤 식으로 압박을 가했단 거죠? 그...... 그 건에 대해서 더 자세히 증언하세요!"

질문을 던진 사람은 이실 미르함이라고 하는 여성이었다.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유공화국연합의 의회, 즉 입법부를 대표하여 이 재판의 판사로 지명된 여자였다. 옛 동맹 출신의 재판관들은 사실 이 일의 전후관계에 대해서 적어도 지금 증언이 나온 만큼은 벌써 알고 있었지만 미르함 판사는 자유공화국연합이 세워지고 난 후에 정치에 입문했고 의원이 되기 전에는 페잔에서 공익변호사로 활약했던 사람이었다. 페잔 출신이고, 여성이며, 인권변호사라는 상징성을 높이 사서 이 재판의 재판관으로 위촉이 되었지만 같이 재판부석에 앉아 있는 슈마허처럼 이런 동맹 내부의 일은 거의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재판을 방청하고 있는, 그리고 솔리비전으로 생방송을 보고 있는 수많은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에 대답하는 레벨로의 자세는, 실로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고백이었다.

"......렌넨캄프 고등판무관은, 양 웬리를 제거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따라서 양 원수를...... 책략으로 사법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최소한 은하제국의, 황제의 침공은 막을 수 있다...... 그게 아닌 것을 알면서도 저는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제 희망사항을 동맹의 운명이라고 포장하며, 민주주의...... 모든 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믿어 버렸습니다. 그런 짓을 해버린 순간 제게는 이미....... 이미 민주주의란 말을 입에 담을 자격마저도 없어졌는데 말입니다."

레벨로의 눈은 이미 붉게, 물고기 아가미보다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에 가득 찬 눈물은 언제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이 보였지만, 레벨로는 끝까지 의연하게 그것이 흘러내리는 것을 참았다. 대신 소매로 자신의 동공을 가리면서 작게 뭐라 중얼거렸지만,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그가 뭐라고 한 것인지 입 모양을 보고 읽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는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습니다......'라는 말로 보이는 그의 중얼거림을 삽시간에 정보망을 통해 퍼 날랐고, 그것이 전 우주로 퍼져나가는 데는 대략 3분도 걸리지 않았다.[43]

칼라일은 잠시 레벨로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질문을 이었다. 칼라일은 여기는 동맹 망국의 책임을 묻는 장소가 아니며 조안 레벨로를 심판하는 자리도 아니라 죄과 고백은 그쯤 하면 된다 말한 뒤, 그 전에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왜 렌넨캄프가 레벨로에게 양 웬리를 제거하라 했는지에 대한 이유로 레벨로는 렌넨캄프에게 '양 원수가 은하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사실 메르카츠 장군은 생존해 있으며, 그를 빼돌린 것은 양 웬리 원수의 은하제국을 뒤엎으려는 음모에 의한 것이다' ......라는 동맹 정치인으로 추정되는 익명 투서가 날아왔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것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메르카츠 장군이 생존해 있고 양 웬리가 빼돌렸으니 양 웬리를 제거하라는 협박을 렌넨캄프가 직접 거론했었다. 그 익명 투서는 구 동맹에서 흘러나갔다는 것 이외에는 지금도 자세히 아는 게 없으며 렌넨캄프도 그저 '당신네들의 몇몇 정치인들이 보낸 것으로 보이는 익명의 투서'라고밖에 말하지 않았다.

해당 증언을 듣던 뷰코크 주석은 왜 '익명 투서'에 그렇게 집착하냐고 도중에 끼어들었다. 분명히 이 상황에서 칼라일이 '투서'에 대한 사실만을 집중적으로 캐묻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칼라일이 쓸데없는 정보에 집착하여 고의적으로 재판을 늘어뜨리고 있다, 이렇게 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때, 일반적으로 이를 지적하여 재판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바로 변호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해당 사건의 피해자인(...) 양 웬리는 입꼬리를 이상하게 구기며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이의를 제기해서 검찰측의 입증을 끊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카드를 꺼낼 수 없었다. 양에게는 칼라일이 다음에 쓸 수가 너무나도 분명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예상대로라면 거기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즉 파멸로 가는 지름길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칼라일에게 그대로 끌려가는 것 역시 파멸로 가는 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칫하면 앞으로도 끼어들 타이밍을 완전히 놓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몰리다 재판이 끝나는 것은 칼라일이 준비해둔 함정에 뛰어드는 것보다도 더욱 절망적인 결과였다. 결국 양은 심하게 주저하고, 강하게 후회하며, 더할 바 없이 좌절하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이의 있습니다."라는 양 웬리의 발언에 칼라일은 그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불길한 침묵을 애써 뚫고 양은 어거지로 말을 풀어나가고 논리를 이어붙였다. 증언에 따르면 문제의 투서는 구 동맹 정치인들이 보낸 것으로 '추측'되는 밀서인데 검찰 측의 입증은 어디까지나 라인하르트의 유책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으로 투서가 렌넨캄프의 수단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 라인하르트는 관계가 없으며 지금 심문이 라인하르트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증명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양의 불길한 예감대로, 칼라일은 양이 예측한 것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움직였다.

"물론, 의미가 없으면 애초에 묻지도 않았을 것이며, 증명할 수 없다면 애초에 증인을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오. 이 자료를 증거로 제출합니다, 재판장님."

그리고 칼라일은 허공 디스플레이를 조작하여 새로운 문서를 하나 띄웠다. 행성 오딘 수복 당시[44]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의 집무실에서 나온 자료를 보여주었다. 해당 자료는 바라트 늑약에 관련된 자료들 중에 묻혀 있던 자료로 이 문서에는 '투서'를 보낸 자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45] 그런데 이 자료에 적혀 있는 '투서'를 보낸 자들은 종전에 언급된 은하제국의 인사권 침해로 인해 부당하게 임명된 자들의 명단과 일치했다. 양 웬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다음에 나올 말은 이미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었다. 법정이, 그리고 온 은하계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오로지 칼라일 검사의 입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양 웬리는 칼라일이 본 사건과는 상관없는 건으로 논점을 흐리고 있다고 다급히 이의제기를 했지만, 뷰코크는 칼라일이 지금 변론이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밝혔다며 양 웬리의 이의를 기각해 버렸다. 칼라일은 이 명단에 나오는 이름들은 욥 트뤼니히트와 연결고리가 있는데, 트뤼니히트는 매국노 짓으로 표면상 실각했지만 트뤼니히트가 심어놓은 사람들은 그의 실각 후에도 사실상 멸망 직전의 동맹을 주물렀다. 문제는 트뤼니히트 역시 누군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 원래 트뤼니히트가 죽기 전까지의 행적은 철저히 비밀리에 묻혀 있었지만, 그 비밀은 제국이 망한 후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다.

칼라일은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의 한쪽 의안을 꺼냈다.[46] 칼라일은 의안을 스크린을 향해 비추고 위에 살짝 튀어나온 부분을 눌렀다. 의안의 동공 부분에서 빛이 퍼져나오며, 마치 프로젝터처럼 스크린에 영상이 비추어졌다. 영상에 나온 것은 LEadis 사의 구식 운영체제 화면으로, 칼라일은 그걸 이리저리 조작해서 한 허브(hub)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경고문이 뜨며, 생체인식 인증을 요구하는 화면이 튀어나왔다. 원래 이 의안의 보안 시스템은 주인의 생체지문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이지만, 일반 시판용이라 이 의안의 보안시스템은 개인 컴퓨터 수준밖에 안 된다.

칼라일이 벨파레스 검사에게 (여군이다) 해킹을 명령하자, 벨파레스 검사는 우선 칼라일이 그랬던 것처럼 허공 스크린을 열고, 매우 평범한 군용 해킹 스크립트와 의안을 동기화한 후, 보안 코드를 뽑아내는 것과 그 코드를 의안의 인식창에 입력하는 것을 법정 안의, 그리고 전 우주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시연했다. 어떠한 속임수도 없었고 어떠한 수상한 부분도 없었다. 검사가 코드를 모두 입력하자 맥빠질 만큼 쉽게 보안이 해제되고 자료 허브가 열렸다. 칼라일은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한 동영상을 열었다. 날짜는 '제국력 490년 6월 8일'자로 되어 있는 영상이었다.

동영상은 길지 않았다. 욥 트뤼니히트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당연히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오베르슈타인 자신이었을 것이었다. 트뤼니히트는 시종일관 앞을 쳐다보면서 말했으므로. 그 내용 역시 길지 않았다. 휘하의 사람들을 시켜 양 웬리 탄핵 투서를 렌넨캄프에게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동영상이 끝났고, 칼라일은 다시 이보다 좀 뒷날짜의 다른 동영상을 열었다. 이번에는 렌넨캄프 고등판무관과 통신으로 대화하는 영상이었다. 오베르슈타인이 그에게, 양 웬리를 제거하라는 제안을 하고 있는 동영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라일은 그로부터 몇 분 뒤의 영상을 재생했다. 아주 짧은, 30초 가량의 영상이었다. 부관인 안톤 페르너 소장과의 대화가 담긴 영상 클립이었다.[47] 영상이 모두 끝났다. 칼라일은 영상을 닫고, 천천히 변호인석, 피고인석, 방청석의 순서로 주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로써 모든 요소가 모였습니다. 트뤼니히트가 '제국의 인사권에 의해 임명된' 자신의 사람들을 이용하여 양 원수를 모해한 것, 렌넨캄프가 그 밀서를 바탕으로 양 원수를 제거하려 한 것.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오베르슈타인, 즉 로엔그람 제국의 군무상서이자 2인자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 이 사실들은 모두 증거로 증명되었고, 증거의 신빙성 역시 충분합니다.

검찰측은 이 모든 일들이 동맹을 재차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바라트 늑약으로 어쨌든 구 제국과 동맹 사이에는 화평이 맺어졌지만, 실제로 제국은 전혀 그 늑약을 준수할 의도가 없었으며, 실제 의도는 동맹을 완전정복하려는 것이었다는 것이 드러났으니까. 물론 피고인이 이런 공작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던 것은 피고인이며, 무엇보다도 당시 공개방송으로 동맹을 질타하면서 동맹에 선전포고를 선언한 것 역시 피고인 자신입니다. 사실상 늑약의 파기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을 져야 했던 사람은, 피고인 본인이었는데도 말이지만.

변호인이 첫날 주장했던 바가 있소. 피고인의 전쟁범죄 행위는 골덴바움의 책임이지 그 자신의 책임으로 덮어 씌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확실히 바라트 늑약까지의 피고인의 행위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피고인에게는 그저 ' 골덴바움 왕조의 명령에 따른' 죄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바라트 늑약은 피고인과 트뤼니히트가 체결한 조약이오. 거기서부터는 골덴바움의 책임이 아니라 피고인 자신의 책임이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자신이 체결한 바라트 늑약을 무시하고, 전쟁 명분을 조작하였으며, 마침내 동맹의 완전 정복을 목표로 다시 침략한 전쟁범죄, 이것은 결코 다른 누구의 책임이 아닌, 피고인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피고인이 동맹 시민들에게 저지른 '인류의 포괄적인 권리 침해 행위'라는 것이, 검찰측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더 이상 법정은 심리를 진행할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 되었다. 한 방청객은 신발을 벗어 라인하르트의 뒤통수에 정통으로 날렸다. 동맹 시민들은 당시 동맹 정부의 처사에 분노했으며, 양 웬리를 제거하려 한 치졸한 처사에 분통했고 따라서 "그대들의 정부가, 그대들이 지지할 만한 정부인가 아닌가를 재고할 때가 되었다!"란 말로 시작되는, 옳은 이치로 조목조목 따져 대는 라인하르트의 날카로운 말들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양 웬리의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난 덕분에 가까스로 새로운 민주공화주의 국가가 세워질 수 있었다는 것에만 안도했던 시민들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것 모두가 조작된 것이었으며 라인하르트는 한낱 사기꾼에 불과했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 논리정연했던 힐난 역시 뒤로 검은 웃음을 감춘 사기극이었다고 시민들은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분노를 지금은 몰락한 금발의 애송이에게 모두 표출하는 것이었다. 법정은 무기한의 휴정에 들어갔다. 난동을 피우는 사람들이 끌려나가는 모습이 생중계로 전 우주에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변방의 성계에서 솔리비전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미터마이어 원수는 고개를 떨구고 자신이 우는지도 모르는 채로 통곡하고 있었다.
이 세계관을 이해하시려면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합니다. 세계관 내의 사람들은 독자가 아니니까요.

1. 세계관 내의 사람들에게는 제한된 정보만이 제공되고 있다.

2. 정보에 대한 개인적인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정보를 독점하고 있다.

우선 오베르슈타인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들은 원작에서의 제국 내 주요인물들인데, 거의 모두 지구교 폭동, 전쟁 등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죠. 그리고 나머지는 체포되거나 미터마이어처럼 도피했습니다. 오베르슈타인은 철저히 라인하르트의 그림자이기를 자처했으므로, 일반 제국의 국민들은 오베르슈타인이 무슨 일을 했는지 잘 모르죠. 동맹 출신의 사람들은 더합니다. 자유공화국연합의 프로파간다를 받아들일 뿐(즉 오베르슈타인은 나쁜 놈이다 정도의 선전), 적국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정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국으로서는 정보가 당연히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 하니까요. 오베르슈타인의 정보는 군부와 정계 주요 인사들만, 그것도 제한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페잔은 완전히 풍비박산났기 때문에 페잔을 통한 정보교역도 불가능한 상태죠.

그러므로 칼라일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은 현재까지는 양에게 많지 않습니다. 양이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뒤집으려면, 말씀하신 대로 오베르슈타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정보를 얻어내야 하겠지요. 더구나 검사측의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당시 군권을 포함한 제국의 모든 권한은 라인하르트가 장악하고 있었다.

두 번째, 또한 이 일을 계기로 전쟁을 선포한 것은 어디까지나 라인하르트 본인이다.

세 번째, 그러므로 라인하르트가 이 일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권한에는 책임이 따르는 당연한 원칙에 따라 라인하르트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양은 갖고 있는 증거들이 별로 없으므로, 어떻게든 이 논리의 취약한 점을 찾아 깨뜨리는 게 제일 급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양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이외에는 별 무기가 없죠.
1. 자유공화국연합은 제국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동맹 출신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우주력만 사용합니다. 제국력으로 표기된 것도 자체적으로 우주력으로 환산해서 쓰고 있습니다. 의안이야 주인 오베르슈타인이 제국 사람이니 제국력에 맞춰져 있었던 것이고요. 즉 의안은 제국제 의안입니다만 칼라일이 '771년식'이라고 하는 것은 칼라일이 동맹 출신자이기 때문입니다.

2. LEadis는 말씀하신 대로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회사입니다. 생체 소형 컴퓨터에 들어가는 운영체제를 만들죠.

3. 오베르슈타인이 의안 한 짝만 남기고 사라졌다는 것은, 제국군이 건진 오베르슈타인의 유품이 그 의안 한 짝뿐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그 의안은 제국군이 수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칼라일에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는 다음 화에 나옵니다^^

4. 렌넨캄프와 오베르슈타인의 대화, 페르너와 오베르슈타인의 대화는 원작에 그대로 나옵니다. 동맹 침공 직전까지는 원작과 동일한 루트를 타니까요. 원작의 그 부분을 읽어보시면 됩니다.

5. 레벨로는 아마 더 등장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만 미터마이어는 다릅니다. 적어도 희망찬 내일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미터마이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충격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죄책감에 가깝습니다. 자신이 말렸어야, 자신이 곁에서 지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이죠.

의안의 기록 장치는, 오베르슈타인의 일종의 비망록입니다. 자세한 것은 추후에 계속 등장할 것입니다만,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걸 메모리에 저장해두는 것이죠. 그래서 분명 자신이 살아있을 때 그 내용을 편집하고 정리했을 겁니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라인하르트에게 불리한 기록은 남겨두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도 결정적으로 라인하르트에게 해가 되는 내용은 이미 오베르슈타인 자신이 정리한 상태입니다. 베스터란트 건 같은 경우, 의안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면 검사측에서 당장 그걸로 끝내버렸겠죠.

하지만 지구교 세력에 의해 갑작스레 사망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의안이 타인에게 넘어간다는 가능성은 오베르슈타인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비상시를 대비해서 나름의 대책은 세워놨습니다만 모종의 이유로 그 대책은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추후에 나올 예정입니다만......어쨌든 오베르슈타인이 남겨놓은 정보는 사실 그 입장에서 본다면 보잘것없는 정보들입니다. 다만 그는 제국이 망한다는 것도, 황제가 '재판'을 받는다는 사실도, 그리고 자신의 한쪽 의안이 이렇게 쓰이리라는 것도 예측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특히 칼라일이 이런 결론을 끌어낼 줄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으니까요. 문제는 의안이 원래는 두 짝이라는 것입니다.

방청객 때문에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재판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하지만, '민주주의적 재판'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자유공화국연합은 절대로 방청객의 입장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나왔듯이 위험물만 소지하지 않으면 신분 검사도 하지 않습니다.

이 팬픽의 키워드, 라고 하기는 좀 우스꽝스럽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입니다. 라인하르트는 결국 불완전한 전제군주였으므로 몰락했고, 오베르슈타인의 계획도 결국 불완전했으며, 양 웬리는 그 불완전성 때문에 목숨을 건졌고 이제는 불완전한 법의 잣대로 심판대에 오른 라인하르트를 변호하죠. 태생부터가 '완벽한 영웅 라인하르트'에 반대되는, '불완전한 인간 라인하르트'를 그리고 싶어서 나온 팬픽이니까요. 그러므로 불완전한 인간 라인하르트는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가 왜 아직도 버티고 있는지는 여기서는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만, 차후에 반드시 나옵니다.

ps. 소리 역시 저장됩니다. 이 의안은 '신경동기화'라는 기술을 사용해서 두뇌와 상호작용합니다. 의안이 음성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신경동기화 기술로 인해서 청신경을 사실상의 마이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유제 유괴사건은, 최소한 법정에서는 다뤄지지 않을 듯합니다. 그 사건의 가장 큰 증인이 슈마허인데, 유감스럽게도 슈마허는 재판관이므로 절대로 재판에서 증언할 수 없습니다. 란즈베르크는 정신줄을 놔버렸으므로 역시 증언 능력이 없고요. 그러므로 칼라일이 법정에서 그 사건을 꺼내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검찰측은 그런 혐의로는 라인하르트를 기소하지 않았으니까요.

제국령 침공작전 당시의 청야작전의 총책임자는 당시 생존해 있던 프리드리히 4세라고 자유공화국연합에서는 간주합니다. 이 재판에서의 라인하르트의 책임은 프리드리히 4세가 죽고 라인하르트 자신이 제국의 실권을 잡았을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검찰측 역시 방폐작전 건으로 라인하르트를 기소하지는 않았으며 그 일을 꺼낼 일도 없을 것입니다.

지구교가 완전히 망한 게 아니라는 것이 발목을 잡습니다. 일단 루빈스키는 아직 체포되지 않고 숨어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구교 본진도 소탕되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말씀하신 정보들은 단편적이고 증거로서의 신뢰성이 확연히 떨어지는 자료들일 뿐입니다. 그 정보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검찰측은 그런 정보들을 갖고 있어도, 아드리안 루빈스키 본인을 증언대에 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재판에서 그 일을 거론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재판'이므로 그렇습니다.

루빈스키는 공화국을 적대하고 있습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는 지금은 밝히기 곤란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일단 웬만한 것들은 모두 라인하르트가 즉위하면서 치워버렸습니다. 남은 것들도 오딘 대혼란 때 거의 불타버렸고요. 애초에 동맹 시민들은 오딘에 잘 가지 않습니다만 혹여 과격파들이 가더라도 이미 부술 건 남아있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건축물들은 자유공화국연합군의 거점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3. 찬란의 재해(4) 댓글 답변 中

같은 시각 라인하르트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엘 파실에서 은하계 정반대편에 있는 페잔 성계에서는 아드리안 루빈스키가 은신처에서 와인을 마시며 재판의 중계를 보고 있었다. 법정의 재개정이 세 시간 후로 미루어졌으므로,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재판 내용을 분석하는 연합의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그가 은신한 페잔은 한때 라인하르트가 자신의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지만 거듭되는 소요사태와 지구교 테러로 인하여 지금은 완전히 몰락하여 아직도 치안이 회복되지 않은 곳이었다.

루빈스키는 이대로라면 라인하르트는 사형대에 끌려가도 할 말이 없을 거라 평하고, 그런 루빈스키의 혼잣말에 대꾸한 것은 옆에 기대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 루빈스키의 정부 도미니크 생 피에르였다. 양이라면 이 정도는 막을 수 있지 않냐 묻자 루빈스키는 이대로 라인하르트가 처형당하는 건 자신으로서 바라지 않는다며 그게 좋다고 평한다. 누구든 이겨버리면 루빈스키가 지금까지 해온 게 모두 무의미해지기에 저 연극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깨부숴서 아드리안 루빈스키의 공허함을 절반이라도 채워주겠다고.

도미니크는 루빈스키에게 감겨 들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속삭이는 듯이 루빈스키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성공한 뒤에 어쩔 거냐는 도미니크의 질문에 루빈스키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대답했고, 도미니크는 아드리안 루빈스키는 항상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인데 당신답지 않은 대답이라 조롱한다. 도미니크의 말에는 알게 모르게 뼈가 있었다. 하지만 원래 루빈스키는 호탕함을 연기하는 데 능했으며, 그래서 평소대로라면 분명히 도미니크의 말에 과연 그렇다고 맞장구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루빈스키는 웬일인지 다른 말을 했다.

루빈스키는 자신이 생각하는 건 자신의 욕망뿐이며 자신의 몸은 그것에 비하면 하찮기에 이번 일이 끝나면 이번에는 엘 파실에 크게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한 잔을 음미하는 것도 좋겠다고 비웃는다. 도미니크가 욕망을 채우려면 몸이 남아있어야 하지 않냐 묻자 몸뚱이가 견딜 수 없는 욕망이라면 한번 걸어볼 만하다 말하고 도미니크가 채울 수 있겠냐 묻자 루빈스키는 자신은 가능하다고 장담한다.[48]

"물론, 나는 가능하지. 애송이의 제국도, 멍청이의 동맹도 모두 무너뜨렸다. 밑밥도 깔아놨고, 낚싯바늘도 모두 마련해 놨지. 하이네센의 살인사건, 실론 행성의 화재, 양 웬리의 암살미수...... 그 거미줄의 실 하나하나에만 매달리던 자들이 자기들 목을 조르는 거미줄 전체를 발견했을 때, 어떤 절망에 빠질까? 그걸 보면서 비웃어주는 거다. 전 우주가 붕괴하는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면서 비웃는 거지. 하하하하하."

루빈스키는 이번에야말로 껄껄 웃으며, 도미니크를 안아들고 그녀의 입술을 자신의 혀로 열어제꼈다. 루빈스키가 직접 엘 파실에 깔아둔 인원은 백 명이 넘었다. 여덟 명은 연합의회의 의원이었고, 군부에서는 세 명의 장성들이 루빈스키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다. 한편 일반 시민으로 위장한 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지하에 잠적해서 루빈스키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특수공작조 다섯 명을 투입하여 자꾸 혼란을 만들도록 하고 있었다. 양 웬리의 찻잔에 약물을 탄 혐의로 체포된 여성은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체포된 날 밤 그 배후를 밝히지 않은 채 유치장에서 사이옥신 앰플로 자살함으로서, 결국 자유공화국연합이 배후 색출과 지구교 경계, 주요 인사의 보호에 치안수단의 대부분을 투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루빈스키가 정말로 기대를 거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다. 루빈스키는 그들은 그저 자신의 무대를 꾸미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다. 그 도구를 멋지게 활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주연배우가 둘 있었다. 한 명은 아예 잠입이라던지 하는 수단조차도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사람은 루빈스키의 명령에 복종하기는커녕 부드러운 제안에도 뻗대는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루빈스키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만나려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살인기계, 란데스헤르 직속 정보국이 키워낸 최고의 암살자였다. 엘 파실에 이미 잠입한, 그리고 양 웬리의 찻잔에 약물을 탄 진범. 검은 머리에 왜소한 체구의, 20대 초반의 젊은이. 그 자신감 없어 보이고 소심한 얼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남들의 눈에 띌 만큼 침울하거나 분위기가 어두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실력은 너무나도 확실해서, 루빈스키가 암살을 행해야 할 때는 항상 이 자를 썼다. 그리고 이 암살자를 안전하게 잠입시키기 위해, 여성 특수공작조를 대신 체포시키고 자살시키면서까지 연합의 이목을 돌렸던 것이다. 루빈스키는 천천히 알몸으로 일어나서, 최고위 보안이 유지되는 통신실로 자리를 옮겨 통신을 열었다. 루빈스키가 계획을 실행할 수 있겠냐고 암살자에게 묻자 암살자는 긍정하고, 다음 임무를 묻자 루빈스키는 '도구들' 아무와도 접선하지 말고 이번 공판이 끝난 뒤 사건이 하나 터질 테니 그 혼란을 틈타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의 방에 잠입해 그와 독대하는 상황을 만들라고 명령한다.
사이옥신을 쓴 것은 루빈스키가 배후에 지구교가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배후를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것은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입니다만......현재의 지구교 세력은 사실 지구교 깃발을 내건 루빈스키 친위대에 가깝습니다. 말씀하시는 대로 다른 지구교 고위간부들은 거의 모두 라인하르트의 지구교 사냥 때 죽었습니다. 루빈스키가 그들의 소재와 정보를 교묘하게 흘렸으니까요. 그래서 엄밀히는 실제 지구교 잔존세력과 자유공화국연합이 파악하는 지구교 세력은 다릅니다.

페잔의 검은 여우는 분명 악역이지만 그릇이 크고 대단히 매력적인 자입니다. 어이없는 몰락에 걸맞은 캐릭터는 분명 아니지요. 따라서 그에게는 마땅히 그 그릇에 걸맞은 행보와 최후를 선사하고자 합니다.

루빈스키의 수단은 쉽게 말하면 치안 혼란으로 인한 통제력 붕괴입니다. 사실 자유공화국연합은 그렇게까지 건실하지 않습니다. 이 재판도, 총선거도 모두 국가를 굳건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죠. 그래서 잘 흔들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루빈스키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24. 찬란의 잔해(5) 댓글 답변 中

한편 엘 파실에서는 어수선해졌던 법정이 모두 정리되었다. 소란을 피웠던 사람들은 모두 끌려나갔고 나머지 방청객들에게 뷰코크 재판장은 '목소리를 높이는 즉시 퇴정시키겠소!'라는 엄포를 놓았다. 조안 레벨로가 다시 증언대에 서서 양 웬리의 반대심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까와 같이 라인하르트에게 신발이 날아오거나 하진 않았지만 피고인과 그리고 변호인에 대한 눈길은 어느 때보다도 싸늘했다. 양 웬리가 입을 열었다.

"......검찰측의 주장은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하나 망각하고 있습니다. 변호측은, 검찰측의 논증이 처음부터 잘못된 전제 하에 이루어졌다는 것...... 그것을 증명하겠습니다."

물론 양에게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으며, 물러설 곳도 없었다. 양 웬리의 첫 마디를 들은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율리안과 프레데리카는 양을 믿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율리안은, 자신이 양 웬리를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쓸데없는 시간을 까먹게 만들었다는 것을 자책했다. 미터마이어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들을 족족 밟아온 사람에게 자신도 모르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49][50] 뷰코크 주석은 재판장석에서 양의 논리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사실 칼라일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루빈스키는 '호오' 하면서 시가를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는 양이 이렇게 맥없이 패배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계획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양 웬리의 반대편에 선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지만, 그 눈에서는 평소와 같이 감정이라고는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시민들은 대부분, 양 웬리가 '독재자의 변호인'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벗어던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양의 반응은 그들의 기대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양은 첫 마디를 꺼낸 후, 거의 3분 가까이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역시 그 절망적인 상황은, 제아무리 양 웬리라고 해도 선뜻 다음 말을 잇기 어렵게 만든 것이었을까? 완벽한 증거와 철벽의 논리, 패배의 가능성을 분쇄하는 남자 칼라일을 적으로 만났다는 것은(전장은 아니었지만) 꿈에도 상상하기 싫은 것이었다. 하지만 양 웬리 역시 마술사, 기적의 양 웬리였다. 비록 그 마술의 8할이 허세라 하더라도.

"......반론하겠습니다. 검찰측의 논리는, 피고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제국은 바라트 늑약을 애초부터 준수할 의지가 없었으며, 여러 사건들을 조작하여 바라트 늑약의 파기를 유도, 동맹에 대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고인은 그 제국의 최고권력자로서, 당연히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습니까?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검사. 검찰측은 아직 어떠한 것도 증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쪽의 증명에 이의가 있다면 반증하면 될 일, 그런 허세로는 아무 것도 뒤집을 수 없소만."

확실히 양의 반격은 그 근거가 거의 없었다. 법정에서의 무기는 증거, 그러므로 그 증거가 빈약한 양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허세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런 사정을 빤히 파악하고 있는 칼라일의 지적은 아플 정도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하지만 칼라일의 대꾸가 단순히 양의 허세를 지적하는 것은 아니었다. 굳이 그것만을 위해서였다면 이런 화법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양은 판단하고 있었다.

칼라일은 자연스럽게 양의 말을 맞받아치면서, 동시에 '반증'이라는 통로로 양을 유인하고 있었다. 양이 그 도발에 넘어가서 증거를 통한 공방을 펼치려는 순간 바로 그물을 던져 물량공세로 양을 침몰시키려는 것이었다. 애초에 양에게 '증거'가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양이 그물을 피한다고 해도 칼라일에게는 별 타격이 아니었다. 애초에 슬쩍 쳐놓은, 위험부담이 거의 없는 함정이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것 역시 다음 포석을 위한 유인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양에게는 그물을 피해나가는 것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잘못된 논리를 지적하는데 굳이 증거가 필요하진 않습니다. 변호측이 하려는 것은 '반증'이 아니니까요. 그저 검찰측이 자신의 주장에 스스로는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려는 것뿐입니다. 검찰측은 종래의 변론과정에서, 계속 피고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전쟁명분을 조작하여 구 동맹을 침략한 사건에 대한 '근원적 책임'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검찰측은, 그러한 이른바 '근원적 책임'이 정확히 무슨 형태의 책임인지, 그리고 그 책임에 대응되는 피고인의 행위가 무엇인지 제대로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기는커녕 검찰측 스스로가 종전에, 범죄행위에 피고인이 가담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인정하기까지 했습니다. 검찰측이 피고의 책임을 물으려면 당연히 피고인이 전쟁명분을 조작하는데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는 증거를 제시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검찰측은 오히려 그러한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렇다면 형사재판의 대원칙에 의거하여, 검찰측의 증명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in dubio pro reo. 법학계의 라틴어 격언으로 피고인의 범죄증명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합당한 근거에 의해 완전히 증명되어야 하며 검찰측은 피고인의 유죄를 증명하기 위해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는 대신 완벽한 증명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피고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양이 말하고 있는 '형사재판의 대원칙'이었다. 뷰코크 재판장이 양에게 되물었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한다...... 확실히 그렇지. 그러므로 검찰측의 증명은 완전하지 못하므로 실패했다, 이 뜻입니까."

"정확합니다. 검찰측은 이미 스스로 증명이 완벽하지 않음을,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피고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뷰코크 재판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그나시오스 칼라일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양의 의견은 일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라일에게 재반론을 요구하려던 뷰코크는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째서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가 하고 뷰코크는 의문을 가졌지만, 그 궁금증은 매우 빠르고 과격한 방법으로 풀렸다. 방청석에서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전까지의 웅성거림과는 뭔가 묘하게 다른 웅성거림이었다. 지금까지의 공판에서 방청객들이 웅성거리는 것은 거의 모두 변론에 설득되어, 변론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를 뜻하는 소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법정을 지배하는 웅성거림은 명백히 양 웬리에 대한 적의를 품은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고, 얼굴은 구겨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양과 라인하르트에게 그런 차가운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법률로 극악무도한 전범을 보호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양 웬리가 정말로 라인하르트를 변호하려는 것에 배신감을 느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재판이 독재자를 '합법적으로' 처형하기 위한 절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영웅은 그 기대를 야멸차게 배신하고, 더 나아가 여러 매체에서 흔히 묘사되는 '법조문 들먹이는 밥맛 없는 변호사'의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웅성거림은 한 남자의 선창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대원칙 따위는 개나 줘버려라, 이 배신자!"

"학살이 잘했다는 거냐, 실망이다! 양 웬리!"

"재판 집어치워라! 저런 놈한테 무슨 재판이며 무슨 법의 보호란 말이냐!"

뷰코크 재판장은 오늘 벌써 몇 번째 망치를 두드리며 정숙명령을 내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신발 몇 짝이 양의 뒤통수로 날아들었고, 더 많은 신발이 라인하르트의 머리를 맞추었다. 신발 한 짝은 애꿎게도 증언대에 서있던 레벨로의 뒤통수를 직격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다. 칼라일의 눈동자가 미동도 하지 않는 가운데 결국 재판장은 방청객 전원에게 퇴정명령을 내렸지만, 혼란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뷰코크 재판장은 절망에 빠진 채 재판을 미루고 폐정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이 방청객 난동은 루빈스키와 상관없으며 오히려 당황스러운 일이라고 한다.[51]

4.2.6. 26~30. 영웅이라는 이름의 제물

뷰코크 주석, 그러니까 재판장의 선언이 우주 전역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자유공화국연합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헌법에 명시된 공개재판의 원칙을 고수할 것이며, 재판을 방해하는 어떠한 시도에도 꿋꿋이 버텨 민주주의 정신을 관철한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조금 전의 대사태 때문에 뷰코크의 얼굴빛은 상당히 어두운 데다가 주름마저 깊어져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만은 여전히 쇠하지 않고 있었다.

벨파레스는 칼라일에게 이런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나는데도 여전히 공개재판을 하는 게 의외라 평하지만 칼라일은 커피잔을 입에 대고 한 번에 들이킨 뒤 이제 와서 재판을 비공개로 돌리면 이런 재판을 하는 의미가 없다고 대답한다. 벨파레스가 칼라일에게 다음 공판은 일주일 뒤인 7월 8일에 속개될 예정이고 다른 변경점은 없다 보고하자 칼라일은 뭔가 달라진 게 있을 줄 알았다는 감상을 남긴 뒤 증인의 변경이 허가되냐 묻자 벨파레스는 변경은 불가능하지만 추가 소환은 가능하다 대답한다.

벨파레스가 칼라일에게 아까 양 웬리의 in dubio pro reo가 합당했음에도 왜 그런 소란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묻자[52] 칼라일은 "모른다. 나는 그들이 아니다. 그들이 어째서 분노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라 대답하고, 벨파레스는 실망한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렸다. 칼라일은 "내 추측이라면 자네에게 보여줄 수는 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 말했고, 벨파레스의 대답은 없었다. 그저 잠시 후 두 사람이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 한편 건물 반대편에서는 율리안 민츠가 왜 방청객들이 그리 화냈을까 의문을 가지자 양 웬리가 완전히 퍼져서 생각하기 싫다고 궁시렁대고 있었다.

"방청객들은 자유공화국연합의 시민이야. 그리고 시민들이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고 있지. 이건 이미 재판이 아니라...... 정치야. 처음부터 그랬던 거다, 율리안. 다만 알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뿐이지. 나는...... 민주주의를 지킨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마저도 부수려 든 건지도 모르겠다."

"......그 소리 한 번만 더 하시면 열 번째입니다."

"뭐, 상관없겠지. 넋두리는 얼마든지 해도 괜찮은 거니까. 한 열 번 정도 더 하면 답이 나올 것 같구나."

율리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확실히 양의 넋두리는 모두 귀담아들을 만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것보다 더한 배신과 수렁을 버텨낸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사실 별 게 아닐 거라고 율리안은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양이 큰 난관에 부딪힌 것도 사실이며, 언제까지 저런 상태로 있도록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양과 율리안을 구원한 것이 바로 칼라일이 라인하르트를 취조하러 간다는 소식이었다. 피고인이 변호인 없이 검사의 취조를 받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율리안에게는 양의 이상한 상태를 타개할 최선의 카드였던 것이다. 더구나 잘하면 라인하르트의 입을 열게 만들 수도 있었으므로, 계속 궁시렁댔지만 어쨌든 아까보다는 훨씬 안색이 밝아진 양을 보며 율리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취조실에 들어선 두 사람은 먼저 세 명의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약간 작아 보이는 책상 한편에는 칼라일과 벨파레스가 앉아 있었고, 반대편의 등받이 없는 작은 의자에는 초췌한 라인하르트가 있었다.

칼라일이 배우가 다 모였다고 말하자 양은 피고인 취조를 왜 굳이 공판 직후에 하는 거냐 묻고, 칼라일이 통상적인 취조라면 그럴 거라고 대답하자 양은 경우에 따라서는 취조를 거부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설전을 주고받는 양은 아까의 정신이 반쯤 나가있던 얼빠진 양 웬리는 아니었다. 칼라일은 법률에 저촉되는 것은 없으며 이 자리는 피고인에게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만든 자리가 아니라 '들려주기' 위한 자리이며 변호인이 원한다면 증언을 거부시키거나 취조를 거부하고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섬뜩하게 웃었다.

칼라일은 책상 위에 휴대용 솔리비전을 꺼내어 올려놓고 전원을 켰다. 전 우주로 생중계되던 아까의 난장판 영상으로, 라인하르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필시 아까의, 신발이 뒤통수로 날아오는 참담한 기분을 되새기고 있을 터였다. 칼라일은 "네놈이 공격당하는 장면 따윈 안 나온다. 그런 걸 보여주려고 시간 낭비하는 취향은 없으니까."라고 대꾸한다. 말과는 달리, 칼라일은 '네놈이 공격당하는'이라는 부분을 유달리 또박또박 말하고 있었다. 기분이 상한 양이 끼어들었다. 양 웬리가 쓸데없이 피고인을 자극하는 발언을 삼가달라 요청하자 칼라일은 군말없이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재판 상황은 보여주지 않은 채, 방청객들만 보여주고 있었다. 욕설을 퍼붓고 물건을 던지는 혼란스러운 군중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영상에서 방청객들이 소란 피우는 부분만 편집한 것인데 흥미로운 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양 웬리는 그 영상을 다시 한 번 돌려 보았다. 방청객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것 빼고는 딱히 특이한 사실은 없었다. 신발을 벗어 던지는 남자들, 고래고래 소리 높여 날려 대는 욕설, 드물지 않게 섞여 나오는 제국어...... 40% 정도가 제국어였으며 오늘 법정에서 소란 건으로 체포된 자들 중 벌써 30여 명이 구제국 출신자일 정도였다.

라인하르트가 중간에 끼어들어 문벌귀족 잔당이 아니냐 묻자 칼라일은 고개를 흔들며 라인하르트에게는 애석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고, 양 웬리에게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신이 학살한 자들'을 다시 팔아먹을 만큼 라인하르트가 뻔뻔한 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냐고 라인하르트를 깐다. 그 말을 들은 라인하르트의 얼마 남지 않은 자제심이 폭발하면서, 칼라일에게 노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여기 나오는, 라인하르트에게 분개하는 민초들은 이런 모순을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제한된 정보 내에서 어렴풋이 느끼는 것은 가능할 겁니다. 물론 그들이 가장 분개하는 원인은, 라인하르트의 제국이 혼란 끝에 무너졌고, 자신들의 삶도 그 혼란에 말려들어 피폐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모두 민주주의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그들의 분노는 적절하지 않거나 필요 이상인 경우도 많지요. 그런 분노를 이용하려는 세력들도 있을 수 있고요. 어쨌든 라인하르트는 패배자입니다. 자신이 화려하게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줘 백성들의 인심을 샀던 군주가, 그 승리가 깨지면 더 이상 인심을 잡아둘 수 없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 27. 영웅이라는 이름의 제물(2) 댓글 답변 中

"애초에 백성들에게 기생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쓰레기들을 처단한 것이 무슨 학살이란 말이냐! 그들을 처단하지 않았으면 아직도 백성들은 노예에 지나지 않았을 터! 네놈들의 민주주의란, 힘 있는 놈들을 감싸려고 빼앗기는 자들을 방치하는 더러운 사상이었나! 농노 아이들의 눈알을 뽑고 공터에 풀어 그 애들을 총으로 사냥하는 것을 여흥으로 삼았던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 학살이라는 것이냐? 네놈들은 그 알량한 민주주의라는 것을 위해, 그런 것들의 버러지같은 목숨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라인하르트의 입에서는 구 문벌귀족들의 갖가지, 평범한 인간의 상상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악행과 추악함의 사례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다. 패전 후 처음으로 라인하르트가 격정을 토하며 짧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율리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참상들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라인하르트의 항변은 꽤나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들렸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뛰어난 재능과 최고급의 두뇌를 가진 사람의 고발이었으니까. 율리안은 힐끗 양을 쳐다보았다. 양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양이 느끼는 감정은 율리안의 그것과는 좀 다른 감정이었던 듯했다. 양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찌푸리고 있었다. 마치 '저런 소리, 말려야 하는데' 하는 식의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면 칼라일 검사의 얼굴은 어떨까? 하고 그를 쳐다본 율리안은 이번엔 자기가 당황하고 말았다. 칼라일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라인하르트의 비난에 가까운 공격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 듯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입이 열리며 라인하르트의 말허리를 끊었다. "피고인, 그렇다면 묻겠다. 네놈에게는 아홉 살과 열 살이 그렇게도 차이가 나는 것인가? 아홉 살과 열 살이 그리도 차이가 나느냐, 하고 물었다."라는 칼라일의 말에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고 율리안은 생각했다. 아마 그것은 피고인 라인하르트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이상하게도 양 웬리의 얼굴빛은 급격히 어두워졌지만, 율리안은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못했다. 어쨌건 양 웬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라인하르트가 무슨 뜻이냐 의아해하자 칼라일은 리히텐라데 일족 중 10살 이상의 남자를 모두 처형하라고 명령한 걸 거론하고, 라인하르트가 미성년자를 처형했다고 공격하는 거냐 묻자 칼라일은 비슷하다고 대답한다. 라인하르트는 그 따위 사실에 내가 타격받는 일은 없다며, 10살 미만을 죽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칼라일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똑같은 9살은 살고 10살은 죽어도 되냐며 무고한 사람을 자신의 이익 때문에 죽여댄 건 라인하르트가 말한 문벌귀족의 악행과 다를 바 없다고 대답한다.

순식간에 라인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53] 문벌귀족이 암덩어리인 것을 부정하려는 거냐 따지자 칼라일은 네 논리대로라면 다른 문벌귀족, 특히 베스터란트 학살사건을 벌인 브라운슈바이크 가문은 연좌 안 했으면서 왜 리히텐라데 가문만 연좌한 거냐고 대꾸했다. 라인하르트는 침묵했다. 칼라일은 감정이 거의 섞이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가 골덴바움의 제국에서 문벌귀족들이 저지른 짓들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리히텐라데 일가가, 적어도 브라운슈바이크나 리텐하임의 버러지들보다 더한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 원한다면 증명해보일 수도 있다. 간단하지. 그들 밑에서 착취당하던 시민들을 증인으로 세우는 것 정도는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도 리히텐라데 일족은, 비상식적인 멸족을 당했다. 심지어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잔당들에게도 내려지지 않은 병신 같은 명령으로 말이야. 무엇 때문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이 네놈에게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지. 저 립슈타트 동맹의 무뇌충들은 이미 박살났으니 더 이상 죽이고 살리고 할 가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리히텐라데는 다르지. 유제(幼帝)를 끼고 있고, 그 자신이 재상이며, 가장 강력한 기존의 경쟁자들이 사라졌다. 당연히 네놈에게는 최우선 숙청 대상이었을 터, 그래서 그를 숙청했다. 그리고 그 일족까지 멸족시켰지. 그들이 죄를 지어서 멸족시킨 것이 아니라, 네놈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몰살을.

그래서 네놈은 열 살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죽였다. 그들이 버러지였고 암덩어리였으며 인간 쓰레기였다? 솔직히 열 살 열한 살짜리 아이들이 과연 그런 흉악한 인간 쓰레기들이었을지 따져보는 문제는 뒤로 미뤄놓더라도, 네놈은 그들이 그런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을 학살한 것이 아니다. 그저 네놈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랬던 것뿐이지. 그러니 네놈도 그 문벌귀족 나부랭이들과 본질적으로 별로 다를 게 없는 인간이라고 한 것이다. 안 그런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어째서 열 살인가? 어째서 열 살이 생사의 기준이 되었는지를 묻는 거다. 내게는 퍽 이상하게 들린다. 죽이려면 갓난아기까지 죽이던가, 아니면 최소한 성인 이상만 처벌하던가 하는 것이 보통 자연스러운 일이다. 열 살이란 기준은 상당히 애매모호한 기준이지."

칼라일은 계속 '열 살'에 집착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칼라일은 본체만체하고 계속 '열 살'에 대해 캐물었다. 이상한 행동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54] 양 웬리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양이 걱정하는 것은 칼라일이 그런 사실로 청중들을 선동하는 것이었다. '어린아이까지 죽이는 악랄한 학살자'라는 이미지를 피고인이 덮어쓰는 게 문제는 아니었다. 어린아이까지 죽어나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러나 청중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분명 재판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었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을 심판하는 재판정이 아니라 그를 처형하는 도살장이 될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양은 생각했다. 그가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칼라일은 고개를 저었다.

"분명히 검사의 논증은, 물론 그 논증이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그것만으로도 피고인을 사형대로 보내버리기 충분합니다.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겁니까?"

"글쎄, 솔직히 그런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열 살인지. 아까도 말했지만 열 살이라는 나이는 참으로 애매모호한 기준이니까 말입니다. 글쎄, 이자를 마음 내키는 대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사람의 목숨을 희롱하는 미치광이 살인마로 치부해버리면 편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전범재판이라는 무대를 벌린 의미가 없습니다."

양은 율리안과 카테로제, 그리고 아내와 함께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이 재판 혹은 연극의 변호인 역을 수락한 이유도 생각했다. 어차피 전범재판이라는 것은 일종의 국제적 기만에 가까운 것이다. 혹은 요식행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재판정이 열리기도 전에 죄인과 죄상과 판결이 모두 정해져 있는 재판이 요식행위가 아닐 수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방법은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 양이 알고 있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그래서 양 웬리는 라인하르트의 변호인이 되었다. 어떻게든 이 재판을 정상적인 재판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할 수 있는 최대한 공정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래서 양 웬리는 칼라일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전범재판이 기만적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잠시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모두들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법전도 없고 법원도 수사기구도 없는데 죄인과 죄상과 판결은 미리 정해져 있는 재판이 기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기만적인 무대에서도, 이자의 모든 것을 발가벗길 수는 있습니다. 진실을 찾아내서 고발할 수는 있습니다. 이 무대에서 유일하게 작위적이지 않은 것은 그것뿐입니다. 이자가 사형을 당하든 무죄방면되든 그건 제 알 바 아닙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자의 죽음을 세상 누구보다도 바랍니다만, 그것과 제 역할이 관계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기극의 유일하게 의미있는 쓰임이라면 분명 그것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진실을. 찾아내서. 알리는 것.

저는 피고인에게 한 치의, 단 한 치의 비밀이라도 허락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캐낼 겁니다. 그것만이 이 사기극에서 유일하게 의미있는 것입니다. 피고가 저지른 모든 것들은, 이 병신 같은 군상극에서 자유로운 유일한 변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게 이 어줍잖은 연극에 제가 흔쾌히 참여한 유일한 이유입니다."

심문을 시작하기 전에 칼라일은 이 심문이 '피고인에게 들려주기 위한' 심문이라고 말했었다. 양은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이 심문은 절대로 피고인에게만 들려주기 위한 심문이 아니었다. 양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심문이었던 것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무대를 꾸미고 양 웬리를 불러낸 것도 비슷한 의도였을 것이다. 칼라일은 처음부터 양과 대결하려고 한 것이었다. 양 웬리는 침통한 얼굴을 하고 일어섰다. 칼라일 역시 이 재판을 자기 뜻대로 이용하려고 하고 있었다. 어찌 본다면 양 자신과도 그 의도가 비슷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양은 이 재판을 통해 민주주의의 주춧돌이 잘못 괴이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었고, 칼라일은 이 재판을 통해 진실을 뽑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 웬리는 그런 방식에 강한 저항감을 느꼈다. 진실이란 말처럼 무의미한 말도 세상에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낸 것을 진실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이 너무나도 미약한 주춧돌이 될 거란 사실은 양에게는 너무나도 자명해 보였다. 그래서 양 웬리는, 그것이 칼라일이 자신을 일부러 도발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확신하면서도, 입을 열어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입에서 갑작스레 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고.

칼라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에 고개를 끄덕인 건지는 칼라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비록 칼라일이 양의 항변에 고개를 끄덕였다고는 했지만, 칼라일은 실제로 양에게 동조하기 때문에 그에게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칼라일도 자신이 왜 그랬는지를 확실히 알지 못했는데, 타인이 그 이유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양은 그것을 도발로 받아들였다. 그 자리의 분위기와 오고 간 대화를 생각하면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었다. 도발당한 사람이 백이면 백 취하는 태도처럼, 양 역시 그런 태도를 취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포문을 열어제낀 것이다.

칼라일은 그가 자신의 제스처를 약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자그마한 오해를 딱히 지적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굳이 그걸 정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내심 그걸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칼라일이 기대해 마지않았던 대로였다. 양 웬리의 선공은 매서웠다. 양 웬리가 이런 공격으로 대체 피고인의 무얼 캐내려는 거냐고 항의하자 칼라일은 진실이라 대답하지 않았냐 대꾸하지만 양 웬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검찰측은 이미 모든 카드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입증할 모든 패를 말이죠. 그런데도 검찰측은 아직 무언가에 심히 굶주린 듯합니다. 피고인의 책임은 피고인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그가 어떤 인간인지, 이런 것 따위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헌데 어째서일까요. 제 눈에는 칼라일 검사께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죄상을 밝히고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그 자신을 박살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대체 무엇을 찾고 있는 겁니까? 승패가 이미 갈린 상황에서 대체 그 으뜸패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판관과 검사의 권한은 피고인이 기소된 혐의에 대해 사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가리기 위한 것이지 피고인을 발가벗겨 만천하에 전시하는 박람회를 꾸미는 것이 아닙니다. 재판정은 폭로의 기자회견장이 아닙니다.

사문회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그 사문회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습니다. 저를 그 자리에 불러서 괴롭히는 것이었죠.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도 그런 쓸데없는 자리에서 쓸데없는 질문만을 반복해서 들어야 하는 정신적인 고문을 당한 게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그 사문회의 영감들이 가장 많이 써먹었던 것이 제 시시콜콜한 약력이었습니다. 제 아내에 대한 것에서부터 개전 전에 제가 했던 짧은 연설, 심지어는 사관학교 성적이나 머리 모양까지 트집을 잡더군요. 그건 제게서 무슨 새로운 사실을 끌어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제 입에서 굴종의 말을 받아내려는 가학적인 취향일 뿐이었습니다.

이 재판은 말씀하신 대로 엉터리 희극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재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재판이라는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 이상 검찰측이 피고인의 혐의를 밝혀내는 것을 넘어 피고인을 망신 주기 위해 일하는 것은 결코 옳은 방식이 아닙니다. 그가 저지른 짓 이상의 책임을 짊어질 필요 또한 없습니다. 어째서 열 살 이상의 아이들을 죽였냐고 반복해서 묻는 것이 그의 정신세계를 헤집어놓고 죄책감을 일깨우는 것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칼라일은 한숨을 쉬었다. 양의 공격은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었지만 매서웠다. 칼라일은 검사는 피고인의 행위만 입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저질렀는가 하는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다. 율리안인가? 벨파레스일지도 모르고 양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목젖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피고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이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은하제국 유년학교에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와 함께 입학. 열 살에."

"......그래서 피고인이 열 살을 처형의 기준점으로 삼았다는 말입니까? 자신이 열 살에 은하제국 유년학교에 들어갔으니까? 비상식적입니다! 열 살에 유년학교를 들어갔다는 것과 열 살을 처형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공통점은 그 나이가 열 살이라는 것밖에 없습니다. 비약이 너무 지나칩니다!"

"네. 누가 봐도 심각한 비약입니다. 하지만 증명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피고인에게 질문하겠습니다. 간단하죠. 저도 더 이상 이런 머저리같은 일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단답형으로 대답해도 된다,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10살을 학살 기준으로 잡은 것은 네놈이 10살 때 유년학교에 들어갔기 때문인가?"

양은 칼라일이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라인하르트를 추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답형으로 물어보겠다'라는 칼라일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간단히 부정하면 간단히 끝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양은 안도하면서 자신의 의뢰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청각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쨍 하면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블래스터에 허벅다리를 꿰뚫렸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55] 라인하르트가 간신히 입을 떼어 말한 것은 단 한 마디.

"......대답하지 않겠다."

경악이 대기를 물들였다. "어째서!" 하고 양이 소리쳤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한 표정이었다. 묵비, 지금 그것보다 더 강한 긍정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어째서 대답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인정하는 셈이잖습니까!"

"그렇다면, 부정해야 하는가?"

"부정하십시오! 피고인이, 당신이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부정하지 않을 셈입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양 웬리."

"그런 머저리같은 일이 사실일 리가 있습니까!"

어느새 양은 라인하르트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었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다가, 마침내는 뒷걸음질쳐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쌌다. 어떻게든 방금 들은 진실을 부정해 보려는 참담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자신이 들은 사실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소리를 지르고 라인하르트의 멱살을 잡아 흔든 양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는 양의 뒤통수를 나직한 목소리가 두드렸다.

"변호인, 진정하시죠. 변호인이 그렇게 흥분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될 만한 건 없어 보입니다. 변호인은 제가 으뜸패를 들고 있다고 아까 그러셨죠? 다시 한 번 답변을 드리죠. 그런 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으뜸패가 들어온 것 같군요. 심문을 하기 전에, 저는 벨파레스 검사와 잠깐 잡담을 나눴습니다. 제 추측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근거나 물증 따위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 추측은, 다행히도 이번 심문으로 증명된 것 같군요. 아, 그리고 변호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가 이 자에 대해서 뭐든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신다면, 그나마 이 엉망진창인 희극을 보러 온 초라한 관객마저 실망시킬 것입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칼라일은 천천히 뒤로 돌더니 저벅저벅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벨파레스가 남아서 조서의 정리를 하고 있었다. 율리안은 그녀에게 살짝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원래 율리안은 양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양은 도저히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양은 자신의 피고인과 끝날 기약 없는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율리안이 벨파레스에게 말을 걸자 벨파레스는 무슨 일이냐고 대답했다. 그 말뿐,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벨파레스는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율리안은 이 싸늘한 여성과 어떤 식으로 대화를 진척시켜야 할지 막막했다.

물론 궁금한 점은 수도 없이 많았다. 칼라일에 관한 것, 앞으로의 재판에 대한 검찰측의 준비, 그리고 거의 드러난 점이 없는 벨파레스 자신에 대한 것까지. 하지만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역시 칼라일이 마지막에 말했던 것이었다. 벨파레스와 이야기했다는 칼라일 자신의 '추측'. 물론 벨파레스가 쉽게 그걸 알려줄 리는 만무했다. 율리안은 벨파레스에게 칼라일이 말한 '추측'에 대해 알려줄 수 있냐 물었지만 벨파레스는 포커 칠 때 상대에게 패 보여주고 치냐 대꾸했고, 율리안이 이건 포커가 아니라고 항변하자 벨파레스는 알려줄 수도 그럴 마음도 없다고 대답했다. 젠장, 하고 율리안은 욕설을 삼켰다. 하지만 그 때, 벨파레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벨파레스는 율리안에게 욕은 구제국과 구동맹을 가리지 않았지만, 신발 던지던 방청객들은 대부분 구제국의 非 문벌귀족 평민들이었고 왜 그들이 라인하르트에게 그렇게 화냈는지 알겠냐 묻는다. 율리안은 양 웬리가 이 재판은 재판이 아니라 정치라서 시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판결이 내려져야 하지만 양 웬리가 그걸 부정해서 화가 난 게 아니냐 대답하지만, 벨파레스는 그렇다면 양 웬리에게만 신발이 날아가야 했고 신발을 던진 사람은 대부분 구제국인이었는데 양 웬리의 무엇이 지독하게 마음에 안 들어서 신발까지 던졌겠냐고 부정한다.

율리안은 잘 모르겠다, 그저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상상보다 더 라인하르트를 증오하는 것 같다 토로하고 벨파레스는 동맹-공화국인인 자신들은 라인하르트를 황제로 섬긴 적도 라인하르트의 지배를 받은 적도 없으니 알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라는 힌트를 주었다. 율리안이 무슨 뜻이냐 물었지만 벨파레스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양이 라인하르트에게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율리안 역시 황급히 고개를 돌려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어째서......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한 겁니까."

"너에게 대답할 이유는 없다, 양 웬리. 애초에 멋대로 나를 변호하겠답시고 나선 건 그쪽이 아닌가. 어차피 패장에게 어울리는 건 죽음밖에 없다. 무슨 올가미를 채워서 처형하든 내 알 바 아니야. 그리고 네가 하려던 것 역시 비슷한 것 아닌가? 네가 바라는 그 민주주의라는 것, 나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겠지. 허나 그딴 건 사양하겠다. 특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양 웬리에게 이용당해서 죽는 것 따위는 결단코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너 역시 여기서 그 헛수고를 그만두는 게 나을 테니까. 은하 전체의 영웅이 뒤통수에 신발을 맞으면서까지 관음증 환자처럼 내 비밀을 캐려는 것, 부끄럽지도 않은가!"[56]

"글쎄요, 어린애들을 학살하는데 그런 시답잖은 이유밖에 대지 못하는 누구에 비하면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힘이라, 과연, 그게 이런 것이었습니까.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당신은 나를 만났을 때 그것이 싫은 사람의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되는 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습니다. 당신이 추구한 길은 결국 타인에게 그들이 싫어하는 명령을 억지로 강요하는 길이었으니까. 그때 이런 질문도 들었던 것 같군요. 민주주의가 전제주의보다 어째서 우월한가, 라고. 지금이라면 당신이라도 한 마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겠군요. 당신 같은 자가 전제권력을 휘두르는 체제의 어디가 우월하다는 거냐고 말입니다."

"닥쳐라."

"시끄럽습니다, 로엔그람 씨. 당신한테는 모욕당하지 않을 자격이 없으니까 말이죠."

"닥치라고! 네놈은 나를 죽였다! 시체를 갖고 욕보이는 게 그리도 즐거우냐, 양 웬리!"

"죽어서도 입을 놀리는 시체 따윈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시체 하니까 이런 것도 떠오르는군. 그때 이런 말을 들었던 게 기억나. 당신의 벗 살아있었다면 아마 내 시체를 대면하고 있었을 거라고 했던가? 나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확실히 당신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57]

라인하르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싸늘해져 있었다. 양 웬리의, 평소에는 전혀 보여주지 않는 이글거리는 눈빛에 전혀 꺾이지 않는 태도였다. 아이스 블루의 눈동자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무정물처럼 빛났다. 양 역시 지지 않고 이죽거렸다. 언젠가 부하들을 죽음의 길로 이끌고 들어가려던 제국군 지휘관을 상대하던 때와 마찬가지의 깊은 혐오감이 눈동자에서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58] 평생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상대의 면전에서 대놓고 이죽거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어쩌면 사문회에서의 비아냥보다도 심한-양의 공박에는 독기가 뚝뚝 돋아나고 있었다. 어느새 양 웬리는 라인하르트에게 최소한의 경어마저 생략하고 있었다.

라인하르트의 눈에서 순간 동공이 사라졌다. 흰자위만 불길하게 번뜩거리는 눈을 양이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잠시뿐, 더 이상 라인하르트의 멀쩡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라인하르트는 끔찍한 노호를 터뜨리며 의자를 박차고 튀어올라 양을 덮쳤다. 율리안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취조실 안을 관통했다. 그러나 양은 미동도 없었다. 몸은 무언가에 못박힌 것처럼 타의에 의해 행동력을 상실한 모습으로 보였고, 눈은 정반대로 저 사람이 과연 저랬나 싶을 정도로 서늘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제삼자가 보면 꽤 기묘하다고 생각할 듯한 모습이었다. 꽤 큰 책상을 타올라 미친 듯이 달려드는 라인하르트를 바로 앞에 두고서도 양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와 라인하르트의 거리가 30센티미터 정도까지 좁혀진 순간, 갑자기 라인하르트의 몸이 아래로 쑥 빠졌다. 라인하르트의 흰자위와 양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양의 시선에 비치는 것은 급속도로 낙하하는 방의 정경들, 기울어지는 천장, 그리고 가까워지는 바닥이었다. 쿵 하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취조실을 울렸다. 그리고 바닥에는 네 사람이 널부러졌다. 율리안이 양의 허리를 붙잡고 몸을 날렸고, 벨파레스가 라인하르트를 옆에서 들이받은 것이었다. 율리안이 다급히 물었지만 양은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양은 라인하르트를 제압하고 있는 벨파레스를 제지했다.[59]

"놔두시죠, 검사. 피고인을 저대로 놔두면 이야기를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안 됩니다. 그냥 두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그럼 명령하겠습니다, 아드리아나 벨파레스 대령. 피고인에게 손 대지 마십시오."

벨파레스 검사는 생각지도 않은 '명령'이란 단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확실히 양은 아직까지도 명목상으로는 현역이 맞고 명령권 역시 가지고 있었지만, 솔직히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60] 어쨌든 벨파레스는 라인하르트를 지극히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면서도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양은 벨파레스가 라인하르트를 풀어주자, 아예 주저앉아 있는 라인하르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째서지,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는데 말야. 안 그래? 로엔그람 씨. 실제로는 어쨌건 겉으로는 항상 자제하는 게 당신의 특기 아니었나?"

"......모욕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양 웬리."

"아니, 틀렸어. 당신은 모욕당한다고 이성을 잃는 자가 아니거든.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 내려져 포로가 되었을 때도, 아내가 죽었을 때도, 심지어는 재판정에 끌려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뒤통수에 신발을 맞을 때까지도. 그런데 아이들을 죽였다는 힐난에는 이제 와서 눈에 띄게 동요하고, 당신 벗의 이름이 나오자 아예 제정신을 던져버리더군. 왜일까? 여기 있는 율리안이라면 알 거다. 당신이 어째서 아직까지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내가 정말로 궁금해했다는 걸 말이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내가, 아직도 무슨 지킬 것이 남아 멀쩡한 척하는 거지? 이제 대충 보이는군."

".......시체를, 시체를 뒤적거리며 쑤시는 것이 그렇게 즐거우냐! 양 웬리, 나를 죽였으면서 이제 그 뼛가루마저 능욕하는 게 재밌는 거냐!"

"틀렸어! 왜냐면 당신은 나한테 죽은 적이 없으니까!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타오르고 있잖아! 제길, 당신도, 당신의 그 개떡같은 자존심도!"

감히 떠올려볼 수도 없던 양 웬리의 직설적이고 과격하기 짝이 없는 표현. 그러나 듣고 있던 율리안과 벨파레스는 그 사실에 놀랄 수도 없었다. 양의 막말보다 훨씬 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탓이다. 그들 눈 앞의 옛 패자(覇者)는, '자존심'이라는 말이 나오자 눈을 꼭 감고 귀를 틀어막고는, 마치 어릴 적 접시에 담긴 상추를 쳐다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를 그대로 땅바닥에 들이박았다.

"환자의 상태는 양호합니다. 타박상과 찰과상이 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뇌출혈 징후 역시 보이지 않습니다."

제길, 하고 율리안은 발길을 돌렸다. 일단 라인하르트가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다는 것 자체는 다행인 일이지만, 솔직히 그런 소소한 걸로 기분을 달래기에는 일어난 일이 너무 크고 무거웠다. 율리안이 일주일 안에 법정에 다시 설 수 있을까 우려하자 양은 "세워야지."라고 대답했다. 양은 특수 독방 바깥쪽의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지만 사실 지금 상황에서 양 웬리만큼 마음속이 복잡한 사람도 달리 없을 터였다.

"......너무 몰아세웠어. 제길, 이런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생각했어야 하는데...... 재판도 나 때문에 중단되고, 피고인도 나 때문에 자해해 버리고. 이게 무슨 꼴이냐."

"원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고맙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 내 책임이지. 더구나 이 재판은 단순히 시비를 가리기 위한 재판이 아니야. 칼라일 검사가 말했듯이, 지극히 정치적인 재판이지. 그 목적에 반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 재판의 무게감을 잊어서도 안 되었는데, 간과했어. 하지만 피고인을 몰아세운 것 자체는 후회하지 않아."

"다행이군요, 원수님. 그것까지 후회하고 계셨으면, 원수님이 변호인을 사퇴하고 대신 제가 변호석에 서야 할지도 몰랐을걸요."

"그렇게 보였니? 이런, 걱정하지 마라. 그 자리를 내팽겨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아, 그런데 원수님은 대체 어떻게 생각하신 거죠? 피고인의 그 '자존심'에 대해서요."

"그거? 아, 결국은 그거다. 피고인은 자신의 뭔가가 드러나는 게 싫은 거지. 그걸 숨기기 위해선 기꺼이 자해까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냥 단순한 명예와 자존심이었다면 다른 모욕에도 똑같이 반응했어야지. 이제야 알겠어. 우리의 피고인은, 드러나는 게 싫은 거다. 항상 되뇌이던 거룩한 힘의 논리, 자신 역시 그 논리의 부적격자라는 걸. 강한 자가 권력을 쟁취한다는 것, 빼앗고 싶으면 언제든지 도전하라는 자신감. 그 패기 역시 허장성세였다는 거지.

내 생각이지만, 우리의 피고인은 생각보다도 더 패도(覇道)에서 먼 인물인 것 같구나. 생각보다 더 타인의 이목에 구속되어 있고, 생각보다도 더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마치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한 행동, 부끄러운 행동을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래, 이를 테면...... 아까 이야기가 나왔던 그의 벗이라던가. 아니면 물론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키르히아이스' 라고 율리안은 대답하려고 했지만, 마침 독방 안에서 새어나온 소리는 그에게 짬을 주지 않았다.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와 누굴 부르는 소리 같은 게 요란하게 들렸다. 라인하르트는 침대에 누워, 마치 악몽을 꾸는 듯 손을 허공으로 의미없이 휘저으며 누군가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제국어로 "누님......"이라고 간절히 부르짖는 걸 본 양과 율리안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61]

4.2.7. 31. 거울

넓다고는 할 수 없는 서재엔 불이 꺼져 있었다. 착한 어린이들과 성실한 사회인들이 모두 침대에서 잠을 청할 시간이다. 하지만 어두컴컴한 방 안, 그 시간이 되도록 탁자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푹 수그리고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 불빛이 있었다면 무섭도록 핏발이 선 눈자위도, 헝클어진 머리도, 불안하게 진동하는 다리도 보였으리라. 그러나 어둠은 양 웬리의 모습을 그런대로 숨겨주고 있었다.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빛은 겨우 형체를 짐작케 할 뿐이었다.

"대체 어쩌란 말이지?"라고 양이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고 어둠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는 게 마치 대답이라도 들려오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칠흑의 커튼 너머에서는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착잡한 밤이었다. 양에게는 도저히 맨정신으로 잠들 수 있는 밤이 아니었다. 네 시간 정도 전의 일이었다.

"변호 방침을 바꿀까 생각중이다, 율리안."

저녁 식사의 분위기는 지극히 무겁고 답답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네 명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채 포크를 놀릴 뿐이었다. 요리는 무미건조했고 조명은 기분 나쁘게 창백했다. 식탁이라기보다는 마치 사무실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율리안은 우물거리던 파스타를 삼키고 양을 쳐다봤다. 야채를 우물거리던 카테로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율리안도 맞장구를 쳤다.

"힘들지 않을까요? 방침을 바꾼다면 증인도 증거도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할 텐데요......"

"우리의 방침이란 결국 피고인의 무실을 증명하는 거였죠. 그걸 이제 와서 바꾼다는 건 너무 무모한 일이 아닐까요?"

"상황이 이렇게 바뀐 이상 나는 피고인의 무실을 증명할 수 없게 되었어.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지만, 피고인이 스스로 말해버렸으니까...... 어거지로 말을 만드는 거야 못하겠냐마는 피고인도 검사도 그런 수단에 놀아나지 않을 테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게 있지. 내가 피고인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 것."

제기랄, 하고 율리안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확실히 라인하르트는 그에게 너무나 큰 배신을 했다. 그들이 열을 내며 그의 무실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있지만, 그 정도는 배신감의 1할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정말 치가 떨리는 일은, 그럼에도 결국 라인하르트의 손이 더러웠다는 사실이 밝혀진 탓이리라. 양이 라인하르트를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 역시 그래서였다. 물론 율리안은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그보다 더 배신감에 치를 떨어 마땅한 사람이 담담하게 참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말에 절로 가시가 돋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 재판에서도 계속 얻어맞겠군요. 검사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후리면 후리는 대로요. 휴우, 대체 뭔 짓을 했는지 짐작할 수도 없잖습니까? 피고인이 대체 몇 번이나 교수대에 올라야 될지 세기도 힘들 텐데요."

대답이 없었다. 무심코 대답하려던 율리안은 양이 포크를 완전히 놓아버린 것을 보았다.

"맞아. 그가 뭔 짓을 했는지조차...... 그것조차도 모르지. 피고인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조차 몰라. 변호인이라는 자가 말이지. 웃기는 일 아니냐, 율리안?"

양 웬리의 표정이 이상했다. 화난 얼굴도 아니고 슬픈 얼굴도 아니었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고 억지로 입가를 구겨서 짓는 미소는 괴기하기까지 했다. 뭔가 지독한 혼란이 피부를 그대로 직격한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그건 양의 책임이 아니라고, 끝까지 숨긴 건 결국 피고인이라고, 세 사람은 열심히 양을 위로했다.

"그게 내 책임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괜찮아."

그러나 양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확실히 지난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하고 양은 속으로 생각했다. 청중들이 양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던 때였다. 학살의 옹호자, 민주주의의 배신자라는 소리까지 들었으니까. 그때도 양은 계속 앉아서 넋두리를 늘어놓았었다. 그러나 그때는 적어도 변호인으로서 양의 가치관 자체가 흔들리거나 한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 재판이 '역겨운 연극' 혹은 '통제된 도살'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은 굳건했으니까 말이다. 길이 아무리 험해도 어쨌든 목적지가 명확하다면 버텨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제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제아무리 엔진이 강인해도 목적지 자체를 상실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니까. 결국 저녁 식사는 우울하고 찝찝한 분위기 속에 끝났다. 양은 저녁을 먹자마자 '혼자서 생각 좀 해봐야겠다' 하면서 서재로 틀어박혔다.

처음에 양이 생각한 것은 이 재판의 어쩔 수 없는 희극성과 기만성이었다. 사실 양 혼자서 아무리 노력해본들 그 본질을 바꾸는 건 기대하기 힘든 일이었다. 칼라일의 말대로, 이건 결말이 모두 정해진 역겨운 연극 이상의 무엇이 아니었다. 그러나 양은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뭔가 분노가 마음에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뭐지? 애초에 이런 무대였다는 거, 모르고 휘말린 게 아니다. 알면서도 뛰어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뛰어든 거지? 하고 양은 자신에게 되물었다.

"민주주의?"

아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물론 양이 이렇게 라인하르트를 변호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민주주의란 것이 한낱 허울 좋은 포장지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이름만 좋은 압제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 변호석에 서는 이유가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제 그런 설명은 더 이상 양에게 어떤 확신도 심어주지 못했다.

"......재판이 파토났지.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모두 방청객들이 파토냈어. 그들이 바로 시민들이다. 다른 게 시민이 아니라. 양 웬리, 그렇지 않아? 네가 바라는 민주주의라는 게 그런 건가? 학살자, 압제자, 정신이상자를 구하려다 뒤통수를 얻어맞고 그나마 일궈놨던 것마저 말아 먹는 그런 거. 아니야, 양 웬리? 그렇지는 않지. 그렇지는 않을 거야. 사실 그런 건 너한테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니까. 중요한 건, 다른 거지. 다른 속셈, 숨긴 속셈."

갑자기 양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느린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거울 앞이었다. 야음 사이로 간신히 들어온 희미한 빛에 비친 거울 속 양은 마치 사람 모양을 한 검댕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 검댕이 양을 향해 천천히 왼손을 들어 올리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거짓말쟁이다, 양 웬리."

이 장면을 끝으로 연재가 중단돼서 이후 전개는 불명이다.

해당 장면은 원작 양 웬리가 가진 모순 중 하나를 짚고 있다.[62] 양 웬리는 자유행성동맹이 최악의 형태로 무너져버린 것 때문에 '이상적인 전제군주'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라인하르트에게 환상을 갖고 있었고 그 때문에 원작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그의 밑에 들어갔을 거라고 몇 차례 토로하거나 사실 버밀리온 성역 회전 때 라인하르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고 독백하기도 했다. 즉 양 웬리는 사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라인하르트를 변호한 게 아니라 (원작의 버밀리온 전투가 그랬듯) 라인하르트에 대한 환상 때문에 라인하르트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라인하르트의 본성을 알게 되면서 양 웬리도 스스로의 이면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5. 세력

6. 등장인물

6.1. 은하제국

작중에서는 현재 라인하르트의 재판만 묘사되고 있지만 로이엔탈을 비롯한 여러 부하들도 동시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재판도 별개로 진행될 것으로 추측된다. 양이 로이엔탈 앞에 나타나자 '나 사형임?'이라 묻는 것과 수감 이후 독방에서 아무와도 연락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수감 이후 일단 라인하르트 개인부터 진행하고 나머지는 따로 진행할 예정으로 보인다.

6.2. 자유행성동맹 - 자유공화국연합

6.3. 기타

7. 평가

독자들 사이에서 지적되는 '라인하르트의 악행'과 '미성숙한 인격'을 깊게 파고든 외전이라 호평받았다.[75] 작가 코멘트에서도 라인하르트의 악행과 미성숙한 인격을 지적하고 있으며, 라인하르트를 재판장에 불러낸다는 컨셉을 잡은 것은 '황제 라인하르트'가 아닌 '인간 라인하르트'의 면을 묘사하고자 하기 위함으로 자기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격리되고 오로지 홀로 사고해야 하며 어린아이의 정신성을 '성장'시키기 위한 스토리였다고 한다. 정작 초반부에 연중을 먹어서 제대로 묘사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어버렸지만.

원작에서는 라인하르트가 엄청 뛰어나서 나라가 잘 나갔다고 서술한 것과 달리 현실적으로 라인하르트의 체제는 근본적으로 '친위 세력의 부재'와 '지지의 상실로 인한 힘의 상실'이라는 단점이 있으며 현실 역사에서도 혁명은 대부분은 실패하고 성공한 것은 일부뿐이기에 세계관의 그 점을 파고들면 라인하르트가 실패하는 IF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본작을 본 독자들도 본작과 다른 방법으로도 라인하르트의 체제는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은하제국과 페잔의 경제 구조 차이도 지적하고 있는데, 은하제국의 경제구조는 소위 바나나 공화국이라 불리는 제3세계 개발도상국 계통의 경제 구조지만 페잔은 무역, 금융, 서비스업 중심의 홍콩, 싱가포르 같은 계통의 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페잔을 멸망시키고 페잔으로 천도해 페잔의 경제를 운영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페잔과 제국 본토의 경제 시스템을 완전히 다르게 굴려야 한다는 뜻이 되는데, 작가의 설정상 아드리안 루빈스키의 계략에 의해 페잔에 대침체, 유로화 사태와 비슷한 상황이 터지자 라인하르트를 비롯한 제국의 경제 관료로서는 해결 불가능한 상황을 맞이하고 초인플레이션, 운송업 마비로 인해 제국 경제가 초토화되면서 평민, 농노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라인하르트의 지지를 철회하면서 라인하르트가 빠르게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작가는 제국 경제 구조의 특성상 라인하르트를 비롯한 제국 관료들은 '절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이는 동맹-공화국조차 해결 방법이 없다고. 어설프게 제국 본토처럼 계획경제 체제로 굴리려 했다면 오히려 역효과만 불렀을 것이다. 작가 설정에 따르면 페잔의 '전략무기'라고.

양 웬리가 라인하르트의 진상을 깨닫고 노발대발한 장면은 개연성이 있다는 평을 듣는데, 양은 어지간하면 침착하게 상대를 비꼬지만 제7차 이제르론 공방전 한스 디트리히 폰 젝트가 부하에게 옥쇄를 강요하자 (DNT 제외하면) 분노로 고성을 지르거나 사문회 당시 모자를 집어던지며 "못 해먹겠네, 진짜!"라고 고함을 지르는 등 은근 한 성깔한다. 작중에서도 젝트의 옥쇄 사건을 떠올렸으며 '이상적인 전제군주'인 줄 알았던 라인하르트가 실상은 루돌프와 다를 바 없는 추악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서술된다. 원작에서 양이 라인하르트를 고평가한 건 어디까지나 라인하르트의 본성을 몰랐기 때문이지 원작에서도 양이 라인하르트의 주요 악행을 알았으면 혐오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을 듣는다.

라인하르트뿐만 아니라 원작 서술에서도 지적되는 양 웬리의 모순적인 면모에 대한 자각과 고뇌가 묘사되는 등 작가가 두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음을 볼 수 있다.

8. 기타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우로부치 겐이 롤모델이며(...) 신 은하제국에는 꿈도 희망도 없고 작가 지론상 해피엔딩을 싫어한다고 한다. 다만 미터마이어가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작가의 코멘트와 양 웬리가 본편 이후 퇴역해서 역사학자로 사는 연말 외전을 보면 본편에서 사망자가 속출하는 건 아닌 걸로 보인다.

맥거핀이 된 설정이 많은데, 세계관의 설정을 보면 IF로 분기한 799년부터 803년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복잡한 사정이 있었으며 아드리안 루빈스키의 최후 등 따로 다룰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양 웬리도 본편의 회담과 다른 이유로 지구교도에게 허벅지를 관통당하거나 앤드류 포크에게 따로 노려지거나 기타 암살미수가 판쳤다고.


[1] 작중 모습을 보면 엘 파실 독립정부가 커지고 커져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작중에 양 웬리가 롬스키를 자유공화국연합 의장이라고 언급한다. [2] 그래봤자 함대 반 개에 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는 변방 성계에 자리 잡아서 지구교 잔당보다 못한 세력이다. 작중 세력비는 자유공화국연합 57 자치세력 24 지구교 13 은하제국 잔당 6. [3] 대신 율리안 민츠가 정치, 군사적 입지를 물려받았다고 하는데 원작의 율리안은 양의 요절을 계기로 양의 존재를 증언하고자 역사학자가 되었지만 양이 생존한 해당 세계선에서는 역사학자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알렉스는 세간에서는 유명하지 않지만 역사학 분야에서는 엄청나게 악명을 떨친다는 것으로 보아 학문적 성과와 별개로 글이 매우 어려운(...) 타입인 듯. [4] 도움이 될 자들을 선별해서 데려갔다고 한다. 아일랜즈는 바라트 화약과 양 모살미수사건까지 2개월의 시간차 동안 어떻게든 회복에 성공한 모양이다. [5] 원작에서는 동맹군이 양에게 병력 상상수를 파견한 채로 마르 아데타에서 싸웠는데 이들은 몇 주가 지나서야 양과 합류해서 이제르론 탈환전에서 뭘 한 게 없다. 즉 이제르론 탈환에 해당 병력은 필요없다는 소리. [6] 의안 한 짝 이외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역시 사망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작가 코멘트에도 오베르슈타인이 살아있다면 제국이 그리 무너지지 않았을 거라며 사망을 암시했다. [7] 지구교가 뭘 했길래 원수부의 주요 인사 다섯이 죽은 건지는 불명이나, 원작에서 지구교가 친 깽판을 고려할 때 정상적인 전사라기보다는 테러, 암살 등등으로 죽은 것 같다. [8] 본작 세계관의 특성상 지구교와 페잔 독립운동 문제로 인해 구 동맹령이 월경지가 되면서 제국이 오래 안 가 행정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화국이라고 구 동맹령의 전역을 석권한 건 아니며 여러 군소 세력들이 따로 존재한다고. [9] 개략 2에 따르면 은하제국이 내부 문제로 혼란스러운 사이에 구동맹이 이제르론과 엘 파실을 중심으로 연합으로 재건되어 야금야금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10]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이건 원작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의 설정을 빌려온 것으로 이 상황에서밖에 쓸 수 없는 아이디어이며, 어차피 이제르론이 거점이라 대기권 항행 능력은 없어도 되고 그렇게까지 인력이 부족한 상황도 아니라고 한다. [11]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공화국 함대의 모체는 바로 양 웬리 함대의 베테랑들이고, 공화국이 세워진 후에 딱히 병력이 소모될 일도 없어서 본진을 털린 제국군보다는 개개인의 자질로만 따지면 훨씬 낫지만 머릿수가 너무 적어 이 상황에서 병력을 잃었다가는 약화가 아니라 멸망해버리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12] 하지만 슈타인메츠는 해당 회화 전에 권총자살했으며, 직후 기함이 폭발했다는 것으로 보아 어차피 죽을 팔자였다. 원작에서도 회랑 전투에서 전사한 걸 생각한다면 아이러니한 부분. [13] 은하영웅전설 정전(正典) 마지막 에피소드인 벨제데 임시 황궁 습격사건이 우주력 801년 7월 26일로, 원작 시점보다 2년 뒤다. 따라서 양 웬리 36세,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27세이다. 원작대로라면 라인하르트가 801년에 병사해야 하지만 애초에 작품의 컨셉이 라인하르트의 재판이라 병 설정은 뺀 듯. [14] 이 시점에서는 소년이 아니라 청년이라 서술되는데 803년 6월이 배경인 본작 시점에서 율리안의 나이는 21세다. [15] 이 시점의 발터 폰 쇤코프는 대장까지 진급해서 현역으로 활동 중이며, 율리안이 프레데리카를 대령이라 부르려다 정정한 것으로 보아 퇴역 당시 대령 신분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작중에 나오는 양 함대의 주요 인사들이 원작보다 다들 계급이 한두 단계씩 높은 것으로 보아 동맹이 멸망하고 공화국이 건국된 뒤 이제르론 회랑의 무도회를 비롯한 여러 군공으로 인해 다들 진급했고 프레데리카는 대령까지 진급한 뒤에 퇴역한 것으로 보인다. [16] 해당 세계선에서도 3권 사문회 사건과 6권 모살미수사건을 겪었다. [17]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이 세계에서의 형사소송법은 재판절차나 증인 및 증거에 관한 부분이 한국의 형사소송법과는 많이 다르며, '급조된 재판'의 구현을 위해 독자적으로 설정한 법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공판이 시작되었는데도 양과 칼라일이 끊임없이 새로운 증인 및 증거를 찾아야 하는 것은 이런 설정이 적용된 예 중 하나다. [18] 원작에서는 우주력 800년 8월 29일에 해당 사건이 일어났으므로 803년이 배경인 본작에서 3년 전이다. 799년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에서 분기된 세계선이지만 해당 사건이 일어난 시간대는 같았을 가능성이 높다. [19] 아마 제7차 이제르론 공방전에서 한스 디트리히 폰 젝트가 이기적인 이유로 옥쇄 드립을 치며 부하들까지 죽음에 내몰자 양이 분노한 사건을 말하는 듯. DNT에서는 다 끝나고 차분하게 혼잣말하지만 원작에서는 노발대발하며 젝트를 작정하고 죽여버렸다. [20]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본작의 율리안은 원작과 다른 이유로 페잔의 지부교 지부에 잠입을 한 번 더 했다고 한다. [21]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칼라일은 지구교, 구 은하제국, 신 은하제국, 페잔에서 다양한 접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22]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양과 칼라일이 묵고 있는 곳은 호텔이 아니라 공화국 최고재판소 건물로 피고인, 증인, 변호인, 검사의 안전을 위해서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쓸데없는 이동을 피하고 이곳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로이엔탈 역시 판결을 받은 것이 아니라 증인이라서 이곳에 갇혀 있으며, 지금까지 전범재판의 모든 사건들은 한 건물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23] 이때 양과 율리안은 엘프리데가 로이엔탈의 숨겨진 아내라고 착각하지만, 엘프리데가 로이엔탈의 성폭력 피해자였던 것과 별개로 몇 달간 동거한 건 사실이다. [24] 작가 말에 따르면 미터마이어 부부는 도저히 비극의 주인공에 안 어울리는 사람들이라 완결까지 살아남는다고 한다. 물론 우로부치가 그것이 이들의 해피 엔딩을 보장한다는 건 아니지만. [25] 작가 외전에 밝힌 바에 따르면 양의 역사학 제자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학자라고 한다. 그만큼 후세 학자들과 학생들을 빡치게 만드는 이름이라고. [26]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전범재판 팬픽을 구상할 때 거대한 영웅들의 싸움을 벗어나는 구도를 목적으로 했으며, 시민들의 움직임, 선거, 시스템적인 권력의 작동을 그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작중에서 민주주의, 선거, 공정한 재판의 보장이 강조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27] 작가 말에 따르면 이들은 지구교에 의해 셀 수 없이 목숨을 노려졌으며 뷰코크가 말하는 건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이 셋이 동시에 살해당할 뻔한 게 아니라 각각의 사건이라고 한다. [28]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1차적으로는 자유공화국연합의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지구교의 음모가 맞다고 한다. 또 지구교 뒤에는 최소 세 명의 중요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29] 문벌귀족 출신도 신 제국 출신도 아니었을 뿐더러 은하제국 정통정부 경력 때문에 이미 구 동맹에도 낯선 이름만은 아니었다. [30] 해당 세계선은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에서 동맹 세력이 승리했다는 가정 하의 팬픽이기 때문에 록웰 패거리가 레벨로를 죽이고 라인하르트에게 아첨할 이유가 없어서 레벨로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31]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에르빈 요제프 2세와 잉여 시인을 비롯한 반 라인하르트 세력의 대부분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32] 물증은 말을 하지 못하지만 거짓말을 하지도 않기 때문. [33] 원작 양 웬리 암살사건에도 나오지만 양은 모살미수사건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불면증이 생겨서 수면제를 종종 복용하며 원작에서는 이 때문에 지구교 암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34] 다만 본작의 양은 3개월 전부터 실질적 퇴역 상태였고 제국과의 전쟁도 승리했기 때문에 과로와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불면증은 거의 다 나았을 것이다. 실제로 본편에 불면증에 대한 묘사는 없으며 오히려 잘 잔다는 묘사가 나온다. [35] 양 웬리가 쓰러져 있다 좀 전에야 일어났고, 증거와 증인 역시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36] 아마 원작 3권의 사문회 사건 당시 황 루이가 보인 공정한 태도 때문인 듯. [37]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경면장갑'은 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인데, 경면장갑은 빔 공격을 '반사'하는 속성을 갖고 있으며 여기서는 양 역시 검사측에 대응하여 칼 브라케를 증인으로 지명한 사실 자체를 의미한다. [38] 작가는 코멘트에서 라인하르트는 전쟁을 스포츠마냥 취급했기 때문에 칼라일이 라인하르트를 '전쟁광'이라 칭한 것이며 라인하르트의 '전인류에 대한 범죄'의 상당부분을 이것이라 간주한다고 밝혔다. [39]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하이네센 수도 정부청사 참사관인 부시아스 아둘라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원작에서 라인하르트에게 개긴 3인방 중 하나인 부시아스 아둘라 맞다. [40]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자유공화국연합 정부는 공식적으로 바라트 화약을 늑약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부당 조약이고, 그 과정이 적법하지 않으며, 무엇보다 해당 조약의 당사자인 동맹과 제국 모두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41] 작가 말에 따르면 라인하르트는 안네로제를 모욕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지만 칼라일은 안네로제를 모욕할 사람은 아니며 대신 ' 시스터 콤플렉스에 빠져 그따위 이유로 수많은 인명을 죽음에 몰아넣은 전쟁광'이라고 라인하르트 본인을 까서 절망에 몰아넣는다고 한다. [42] 작가 말에 따르면 칼라일은 냉정한 사람이지만 치사한 사람은 아닌데, 지적한 부분 역시 칼라일이 얻을 수 있는 효과겠지만 그런 것을 일부러 노리고 한 발언은 아니다. 현 시점에서 칼라일의 목적은 '라인하르트의 책임을 입증한다'밖에 없으며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을 언급하는 것도 그것을 위한 포석의 하나일 뿐이다. [43] 작가는 레벨로는 난세를 헤쳐나가기에는 그릇이 작은, 시대를 잘못 만난 사람이었지만 뼛속까지 글러먹은 인간은 아니라서 대중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 해당 장면을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레벨로가 이런 자학적 무리수를 두는 건 이유가 있으며 단순 멘탈붕괴를 일으켜서 포청천에 나오는 범인들마냥 자폭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44]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칼라일이 행성 오딘을 '수복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유공화국연합의 정치적인 수사이자 공식적인 입장이다. 자유공화국연합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들이 옛 은하연방의 공식적인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하연방-(동맹)-연합 이런 식으로. 은하연방은 인류가 사는 전 은하계를 통치하는 국가였으므로,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 세운 제국은 그저 연방의 영토를 '불법강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논리다. 따라서 자유공화국연합에서는 구 은하제국 영토를 다시 '되찾아왔다'고 표현하며 연방을 이었다는 정통성을 세우려는 것이다. [45]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오베르슈타인이 페잔 폭동에 휘말려 실종되는 바람에 관련 자료들을 폐기하지 못했다고 한다. [46] 우주력 771년산으로 신경 동조화를 통한 안구 기능, 별도 저장장치를 통한 촬영과 기록 기능, 지시용 레이저 발사 기능이 있다고 한다. [47] 오베르슈타인과 렌넨캄프의 대화, 페르너와의 대화는 원작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의 서술과 완전히 동일하다. 이때까지는 원작과 동일한 세계관이었기 때문. [48] 작가가 루빈스키가 아직도 뇌종양을 깨닫지 못했다고 코멘트한 것으로 보아 루빈스키는 원작보다 뇌종양 발현 시기가 늦었을 뿐 이미 뇌종양이 발현된 상태로 보이며 스토리상 그와 관련되는 사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49] 미터마이어 입장에서는 속에 열불 터질 상황인데, 원작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은 라인하르트의 소행이 아니라 오베르슈타인과 렌넨캄프가 저 맘대로 깽판친 것이었기 때문. 당시 라인하르트는 지병 때문에 몸져누워 있었고 원수부의 주요 인사들은 나중에 라첼에게 렌넨캄프가 사고쳤다는 말을 듣고 렌넨캄프 혼자 폭주한 걸로 치부했다. 미터마이어도 오베르슈타인이 흑막인 걸 몰랐으므로 재판을 보고서야 진상을 알았을 것이다. [50] 하지만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에 대한 라인하르트의 사후대처를 보면 라인하르트가 궁극적인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51] 한편 작가는 라인하르트가 당한 수모에 대해 그가 저질러놓은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이 정도도 견딜 수 없다면 '전 우주의 황제' 같은 놀이는 해서는 안 되었다고 라인하르트의 행적을 가열차게 비판했다. [52] 양 웬리가 지적한 대로 칼라일이 제시한 증거는 오베르슈타인이 양 웬리 모살을 주도했다는 증거는 되어도 라인하르트가 주도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으며 실제로 양 웬리 모살은 라인하르트 소행이 아니며 오베르슈타인 소행이라는 건 라인하르트조차 몰랐다. 문제는 구제국과 구동맹 민간인들이 그걸 알 턱이 없으며 그걸 아는 당사자들은 죽거나, 입 다물거나, 은하계 변방에 도피 중인 상황이다. [53] 작가 말에 따르면 칼라일은 라인하르트에게 원한이 있지는 않지만 라인하르트가 가진 모순 때문에 혐오한다고 한다. 하지만 제국령 침공작전 청야전술은 '작전상 어쩔 수 없었다'는 점과 동맹 잘못이라는 점에서 역공당할 수 있기에 아예 라인하르트가 생각지 못한 측면에서 공격을 가해 옳다고 믿어왔던 것을 무너뜨려 정신붕괴시키려 하는 것이라고 한다. [54] '열 살'은 라인하르트가 유년학교에 들어간 해입니다. 원작에서도 그것 때문에 열 살 이하는 살려준 거죠. 물론 제가 그걸 숨기는 건 아닙니다. 칼라일은 그걸 직접 증언받고 싶은 거죠. 그래야 증거가 되고 자기 생각대로 쓸 수 있으니까요. / 라인하르트가 열 살에 집착한 건 아닙니다. 칼라일이 집착하는 거죠. 라인하르트의 입에서 직접 그 이유를 증언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래야 증거로 쓸 수 있죠. 은하제국 출신자들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뒤져보면 라인하르트가 열 살에 유년학교를 들어갔으며, 아마 그것과 이 학살의 기준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해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독자들은 원작의 설명과 정보를 통해서 그걸 알고 있죠. 그렇지만 이들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법정에 서 있고, 법정에서는 오로지 증거가 전부이며, '추측'은 증거가 될 수 없으니까요. - 전범재판 28. 영웅이라는 이름의 제물(3) 댓글 답변 中 [55] 대립이 극한까지 흘러가서 폭발해버리면, 항상 남은 자리에는 의외의 방도가 있더군요.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양은 지구교도의 습격을 받았지만 살아남습니다. 다만 역사가 바뀌었다 보니 라인하르트와의 회담장에 가다 습격당한 것은 아니게 되죠. 이 사건은 차후에 작중에서 더 자세히 언급될 것입니다. / 본작에서 양의 허벅다리가 꿰뚫린 사건은 다른 사건입니다. 지금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겠군요. 내용 전개와 관련이 있는 사건이라서 말입니다. 그 사건의 관련자 몇 명은 이미 이 팬픽에 등장했습니다. - 29. 영웅이라는 이름의 제물(4) 댓글 답변 中 [56]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라인하르트는 계속 '무언가'가 드러나는 걸 숨기려 하고 있다고 한다. [57] 정작 원작자 타나카 요시키의 코멘트에 따르면 키르히아이스는 스토리상 2권에서 죽지 않았으면 차후 양 웬리에게 죽었을 거라고 한다. [58] DNT에서는 다 끝나고 나서 차분하게 혼잣말했지만, 원작에서는 이기적인 이유로 옥쇄 드립을 치며 부하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는 젝트를 보고 "무인의 마음이라고!? 저런 놈 때문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 거야! 그렇게 죽고 싶으면 혼자 죽으면 되지, 왜 애꿎은 병사들까지 끌어들이냐!"라고 노발대발하며 젝트를 토르 하머로 산화시켜 버렸다. [59]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라인하르트가 이렇게 쉽게 제압당한 건 이 시점에서 라인하르트의 몸이 성하지 않았고 이성을 잃고 달려든 상태라서 몸통박치기에 대응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거라고 한다. [60] 작가 코멘트에 따르면 벨파레스는 군법무관이라고 한다. 어쨌든 군사재판이라서 그렇다고. [61] 사실 라인하르트의 세계에서 인격체라고는 셋밖에 없습니다. 자신, 키르히아이스, 안네로제. 나머지는 도구, 수단, 아니면 일개 지형지물에 가깝습니다. 그 정도로 미성숙한 인간이죠. - 30. 영웅이라는 이름의 제물(5) 댓글 답변 中 [62] 나머지는 온화함-냉혹함과 자유민주주의자-엘리트주의 군벌의 면모. 원작을 보면 양 웬리가 상반된 가치관과 성격을 동시에 내포한 모순적인 인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원작 서술에서도 여러 차례 지적되며 양은 평생 자신의 모순을 자각하면서도 극복하지 못했다. [63] 이름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전부 이제르론 회랑과 그 근처에 있는 성계들로 대부분 무인성계들이다. [64] 아돌프 히틀러 연합국에 잡히지 않고 자살하자 헤르만 괴링을 대신 재판대에 내세운 것을 떠올리면 된다. [65] 예를 들어 베스터란트 학살사건에 대한 정보는 이미 지워서 없다고 한다. [66] 그럴 인간이었으면 모살미수를 겪었음에도 동맹에 돌아와 마르 아데타에서 대신 싸웠을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67] 리히텐라데 일족 멸족 관련에서 남자는 10살 이상만 죽인 것과 그 이유. 그것에 대해서 양 웬리는 그저 칼라일이 라인하르트를 압박하기 위한 엉터리 수작이라고 생각하지만 라인하르트가 실토하자 라인하르트의 멱살을 잡을 정도로 분노한다. 원작에서 이 정도로 분노한 적은 사실상 없었다. [68] 구 동맹 시민들은 제국에게 책잡히기 싫은 동맹정부가 스스로 민주주의 원칙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양 원수를 모살하려 했다고 생각했으나 재판 도중 은하제국이 비밀리에 동맹정부, 의회, 군 인사권을 장악하고 욥 트뤼니히트를 비롯한 자신들의 수족으로 채워 동맹이 화약을 깨도록 유도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당연히 동맹시민들은 그런 뒷공작을 벌여놓고는 앞에서는 뻔뻔하게 동맹정부를 규탄한 라인하르트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라인하르트와 그를 변호하던 양 웬리는 신발 세례를 받게 된다. [69] 실제로 작중 둘은 대립한다. 이 재판이 그저 재판놀음인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둘 다 목적은 다른 게, 양 웬리는 이 재판을 통해 민주주의의 주춧돌을 다시금 확고하게 놓는 게 목적이고 칼라일은 이 재판을 통해 라인하르트의 추악한 점을 다 까발려버리는 게 목적이다. 실제로 칼라일 본인은 라인하르트가 무죄방면이 되든 사형이 되든 내 알 바는 아니라고 양 웬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70] 바라트 화약이 트뤼니히트의 매국노 짓으로 인한 결과물인 것과 레벨로가 의장이 된 것이 트뤼니히트와 은하제국의 농간이라는 것을 들었다.(단 이때는 "그건 트뤼니히트만의 죄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라트 강화조약의 인사표에서 트뤼니히트 계열 인물들이 요직에 앉아있고 그 중에는 앉아있어선 안 될 사람들을 추려내어 또 한번 은하제국이 동맹을 기만했음을 강조했다. [71]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은 바라트 강화조약 이후 부당하게 자리에 앉은 자들이 양 웬리를 모함했고 이것이 트뤼니히트, 렌넨캄프, 오베르슈타인과 연결되어 있음을 밝혔다. [72] 최소한 그 브라운슈바이크마저 일족이 처형당하는 일까지는 안 겪었다. 그리고 브라운슈바이크와 비교하면 리히텐라데는 차라리 인격자라 봐야 할 것이다. [73] 자신이 복수를 다짐했을 때가 열살이라는 게 이유였다. [74] 근심거리를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전자가 옳은 대처고 양심이 좀 살아있다면 후자가 정상이다. 그 때문에 칼라일은 "왜 어중간한 열살인 거냐"라고 비판한 것. [75] 연중된 지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한국의 은하영웅전설 팬픽 중에서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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