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합 대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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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장마리 르펜 |
제2대 마린 르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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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마린 르펜 |
제4대 조르당 바르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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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민연합 대표 장 루이 마리 르펜 Jean Louis Marie Le P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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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4671><colcolor=#fff> 출생 | 1928년 6월 20일 ([age(1928-06-20)]세) |
프랑스 브르타뉴 모르비앙 라 트리니테쉬르메르 | |
약력 |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초대 국민전선 대표 (1972 ~ 2011) 국민전선 명예대표 유럽의회 의원 (1984 ~ 2003, 2004 ~ 2019) 일드프랑스 레지옹 의회 의원 (1986 ~ 1992)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레지옹 의회 의원 (1992 ~ 2000, 2010 ~ 2015) 초대 잔 위원회 대표 |
종교 | 가톨릭 |
서명 | |
소속 정당 | |
링크 | |
군사 경력 | |
복무 | 프랑스 육군 |
1953년 ~ 1955년 1956년 ~ 1957년 |
|
최종 계급 | 중위 |
참전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디엔비엔푸 전투) 수에즈 위기 알제리 전쟁 |
[clearfix]
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 마린 르펜의 아버지다.국민연합(구 국민전선)[1]의 당수였다. 점차 심각해지는 경제 위기에 절망하고 늘어나는 무슬림 이민자에 불안감을 느낀 백인 중간 계급과 빈민층의 지지[2]를 바탕으로[3]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5번이나 출마[4]했으며 200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는 좌파의 분열 덕분에 결선투표까지 진출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백인 우월주의자로서 공공연한 프랑스의 과거사 부정과 인종주의로 악명을 떨쳐 2010년에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2. 생애
사실 유년기부터 평탄한 삶과 거리가 멀었다. 어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13세부터 가업을 배울 찰나 한창 전쟁 중이었던 1942년, 즉 그가 14세였을 때 아버지의 배가 기뢰와 접촉하여 폭발하여 아버지를 잃게된다.이후 가톨릭 신자로 자라 예수회 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6세였던 1944년 독일군에 맞서 싸우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군 조직 FFI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공산주의 청년 대표였던 앙리 드 라 바시에르 대령(Henri de La Vaissière)에 의해 거절당했다.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정황상 가톨릭 신자로 자란 그가 당시 FFI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그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원망과 증오를 심어 그를 극우주의자로 만드는 나비 효과로 번졌다.
이후 파리대학교 (현 소르본대학교)법학부에 입학하여 반공주의적 법학생 협회를 1951년에 제명당하기 전까지 이끈다.
이후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알제리 전쟁에 공수부대 소속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이것 때문인지 알제리 학살이 부풀려졌다고 주장하는지라 알제리와 관계 개선에 나서는 프랑스 정부와 갈등을 빚곤 했다.
사실 문제의 앙리 드 라 바시에르는 알코올 중독인 데다 자기 성향과 맞지 않으면 칼같이 가입을 거절하면서 차별하는 성격적인 문제가 있어 여러 사람에게 원한을 샀고 결국 그에게 FFI 가입을 거절당한 구스타브 슈나이더(Gustave Schneider)라는 인물에 의해 1944년 12월 암살당했다. 그의 성격적 결함이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마저 망쳤으며 그가 자신의 차별적 성향을 쫓겨난 피해자들과 원만하게 해소하지 못함에 따라 장마리 르펜의 공산주의에 대한 원망을 해소할 가능성은 사실상 0이 되어 버렸다. 그의 극우적 행보는 결국 '앙리 드 라 바시에르 대령이 사과하지 않는다면 살아 있을 동안 그가 이득을 볼 만한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심리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를 가해자가 된 피해자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이 원망을 해소하기 전에 사망해 버렸기 때문이다.
군에서 전역한 이후 파리 팡테옹 아사스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석사 논문은 1945년 이후 프랑스의 아나키즘운동.
결국 그는 공산주의에 증오심을 품어 멸망시키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는 삶을 살게 되었으며 상습적인 폭행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시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공수부대 장교출신이라는 마초적인 이미지와 수구적인 그의 사상은 과거 프랑스의 영광을 그리워 하는 자들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3. 인종차별
동양인(정확히는 아랍인 및 서아시아인)은 가장 열등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5] 60년대부터 서유럽이 경제 호황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을 메꾸기 위해 이민을 받았는데 이 때부터 아랍인 및 튀르키예인들이 서유럽으로 유입되면서 이들에 대한 차별 의식이 생긴 것이다. 사실 중동인들도 코카소이드라서 유전적으로는 백인이고 실제로 이목구비도 백인이고 녹안, 벽안도 많지만 유럽 극우주의자들은 중동은 아시아 대륙에 있으니 아시아인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프랑스 국가대표팀을 흑인과 아랍계가 주도한다"고 주장하면서 "프랑스는 백인이 주도해야 한다"며 유럽과 호주, 뉴질랜드나 북미 백인 선수가 아닌 비백인들을 대표팀에서 빼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지단을 비롯해서 튀랑, 드사이, 비에이라, 앙리 등 다 빼잔 얘기 되시겠다. 이에 당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에메 자케에게 대놓고 공식적으로 이런 요청을 하다가 자케 감독은 귀찮은 듯이 "나는 그럴 마음이 없으니 잘난 프랑스 백인 우월주의 대표팀이나 따로 만들어 당신이 감독해 보시던가?"라고 응수했다. 199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이 비백인 출신 에이스들과 함께 자국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완벽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2002년 4월 대선에 출마하면서 "지단이냐, 르펜이냐 결정해라"라는 어그로성 슬로건을 또 내세웠다. 이에 열 받은 지단은 "르펜이 대통령이 된다면 나는 더 이상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결과적으로 국민들은 르펜 대신 지단을 선택했다.[6]
이런 앙금을 잊지 않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일찌감치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인종 탓을 하면서 "이렇게 비백인들 다수가 주전인 이상 프랑스는 다신 월드컵 결승에 못 간다"고 개드립 쳤다가 2006 독일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다시 결승에 올라가면서 다시 한 번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다시 한 번 프랑스가 내부분열 막장으로 인하여 처참하게 예선 꼴지로 탈락하면서 기세등등해졌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에선 8강이라는 나쁘진 않은 성적을 거두어서 시큰둥해지고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는 23명 중 21명이 비프랑스계이고 흑인만 15명인 역대급 이민자 대표팀을 꾸려서 20년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킬리안 음바페와 은골로 캉테, 폴 포그바 등 흑인 선수들의 활약이 지대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으며 우승 축하 여론이 넘치던 프랑스에서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체면만 줄창 구겼다.
2007년 프랑스에서 럭비 월드컵을 개최하자 국대 선수들이 모두 백인인 프랑스 럭비 대표팀이 진정한 프랑스 대표팀이라느니, 따라서 이번에 우승하면 위대한 프랑스 대표팀 진면모라느니 온갖 개드립을 또 쳤다.[7] 하지만 정작 프랑스는 자국 대회에 4강에 그치면서 되려 여론과 언론의 비웃음을 받았는데 프랑스는 럭비로도 세계적 강호라 이미 1987년, 1999년에 2번이나 럭비 월드컵 준우승도 해 봤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축구는 자국에서 열렸던 1998 프랑스 월드컵 전만 해도 월드컵 결승조차 여태 못 올라가고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 플라티니가 활약하면서 4강에 오른 게 최고 성적이던 프랑스였다. 사실 프랑스 럭비는 2011년에도 3번째 준우승을 거둬 럭비 월드컵 콩라인이다.
2011년 럭비 월드컵은 프랑스에게 아쉬운 결과였다. 자국 대회 4위에 그친 아쉬움을 열심히 뛰며 12년만에 3번째 결승에 올랐던 프랑스 럭비 대표팀은 개최국 뉴질랜드에게 눈물겨운 7-8. 1점차로 패배하여 또 준우승해야 했다. 그래도 정말 아쉬운 결과였기 때문에 '다음 대회는 우승할 것이다'라고 했고 그도 또 다시 설레발을 쳐 댔지만 2015년 대회와 2019년 대회에는 8강에서 번번히 탈락해서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2번째 우승을 차지하던 프랑스 축구대표팀에 견줘 르펜은 또 비웃음을 당해야 했다. 특히 2015년 월드컵에선 8강전에서 4년 전 결승에서 1점차로 진 뉴질랜드와 다시 만나 무려 50점차 가까운 13-62로 참패하면서 프랑스 럭비 월드컵 최다실점패라는 결과로 광탈했기 때문에 우승할 것이라던 그는 또 놀림당해야 했고 2019년 일본 럭비 월드컵에서도 이번이야말로 진정한 백인 대표팀 우승 운운했지만 웨일즈에게 덜미를 잡혀 8강에서 탈락해 버렸다. 이런 가운데 2023 럭비 월드컵을 다시 프랑스가 개최하게 되었는데도 이런 개드립을 할지 싶었는데 공식적으로 이런 말을 한 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가 알제리를 근대화시켜 줬다고 주장하며 어두운 과거사를 미화한다. 당연히 알제리를 비롯한 과거 프랑스 식민지들의 반불 감정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 인간이 입을 열 때마다 북아프리카 프랑스어권에서 사업을 하는 프랑스 기업들은 전전긍긍한다. 실제로 2007년 그의 알제리 식민지배 미화 발언으로 여러 프랑스 기업들이 타격을 받았다. 그래서 프랑스 기업들이나 그 경영자들인 우익 인사들도 입 닥치라고 분노할 지경이지만 그런다고 이 작자가 신경쓸 인물이 아니다.
2009년 선거에서도 인터넷에 알제리 국기를 가지고 혐오스럽게 테러 국가라고 상징하는 포스터를 내걸었다가 2010년 10월 1년 동안 피선거권 박탈에 벌금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프랑스 여론은 매우 긍정적이었고 우익들 사이에서도 "르펜 때문에 프랑스만 욕 먹는다"며 피선거권 박탈은 되려 관대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극단적인 백인 우월주의자들이나 반발했을 뿐이며 심지어 그의 정당이던 국민전선도 되려 그에게 "이건 자업자득이니 좀 자중하라!"고 비판했다. 노르웨이 연쇄 테러 직후에도 국민전선의 젊은 층에게도 노망이 들었냐며 자신들의 백인 우월주의를 더 욕 먹인다고(…) 반발을 많이 받았다.
아울러 홀로코스트를 사소한 사건으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의외로 유럽에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적지 않다.
2000년 초반에 인터넷 홈페이지를 열었다가 연 지 30분도 안 돼 해킹당해 프랑스 역사상 가장 최단시간에 홈페이지가 해킹된 인물로 오른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그의 얼굴에 뿔이 매달려 있다가 얼굴이 히틀러로 바뀌면서 "얘가 주장하는 게 히틀러와 다른 게 뭐니?"라고 프랑스어로 크게 떠오르며 비웃는 식의 해킹을 당했다고 한다.
4. 평가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제1차 세계 대전 때 처리되지 못한 기뢰에 의해 어부 집안으로서 같이 일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비명횡사함에 따라 생긴 트라우마를 해소하려 하였으나 그것이 부당하게 높은 위치의 공산주의자에게 부정당해 사과조차 받아내지 못해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방향으로 악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그의 행보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그의 독일군 타도 참가를 납득되지 않는 방향으로 부당하게 거절한 앙리 드 라 바시에르 대령(Henri de La Vaissière)에게 사과받지 못했고 이후에도 대령이 자신보다 일찍 사망해 영원히 사과받지 못했으니 나머지 공산주의자들이 사과하지 않는다면 같은 이유로 복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복수에 집착한 나머지 대국적으로 세계 정세를 보는 시야를 완전히 상실했다. 다양한 명분을 걸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국내 보수 및 우파에게조차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5. 선거 이력
<rowcolor=#ff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1차 득표수 (득표율) | 2차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6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센 1구 | 프랑스 협회연합 | 35,748 (7.8%) | - | 당선 (1위) | 초선 |
1958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센 3구 | 11,711 (24.14%) | 21,556 (45.17%) | 당선 (1위) | 재선 | |
1962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6,909 (14.24%) | - | 낙선 (3위) | |||
1968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파리 3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7 (5.24%) | - | 낙선 (6위) | |
1973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파리 15구 | 1,974 (5.22%) | - | 낙선 (6위) | ||
1974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190,921 (0.75%) | - | 낙선 (7위) | [8] | |
1978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파리 5구 | 2,202 (6.59%) | - | 낙선 (3위) | ||
1981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978 (4.38%) | - | 낙선 (4위) | |||
1983 | 프랑스 국민의회 보궐선거 | 모르비앙 2구 | - (12.0%) | - | 낙선 | ||
1984 | 유럽의회 선거 | 프랑스 | 2,210,334 (10.95%) | -[A] | 당선 (1번) | 초선 | |
1986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파리 | 503,082 (11.46%) | -[A] | 당선 (4번) | 3선 | |
프랑스 레지옹 선거 | 일드프랑스 | 100,933 (10.99%) | -[A] | 당선 (1번) | 초선 | ||
1988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4,375,894 (14.39%) | - | 낙선 | [12] |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부슈뒤론 8구 | 13,213 (32.83%) | 19,185 (43.57%) | 낙선 (2위) | |||
1989 | 유럽의회 선거 | 프랑스 | 2,129,668 (11.73%) | -[A] | 당선 (1번) | 재선 | |
1992 | 프랑스 레지옹 선거 |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 445,237 (23.45%) | -[A] | 당선 (2번) | 초선 | |
1993 | 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 알프마리팀 3구 | 12,602 (27.49%) | 17,458 (42.06%) | 낙선 (2위) | ||
1994 | 유럽의회 선거 | 프랑스 | 2,050,086 (10.52%) | -[A] | 당선 (1번) | 3선 | |
1995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4,570,838 (15.00%) | - | 낙선 (4위) | [16] | |
1998 | 프랑스 레지옹 선거 |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 432,514 (26.52%) | -[A] | 당선 (2번) | 재선 | |
1999 | 유럽의회 선거 | 프랑스 | 1,005,285 (5.70%) | -[A] | 당선 (1번) | 4선 | |
2002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4,804,713 (16.86%) | 5,525,032 (17.79%) | 낙선 (2위) | [19] | ||
2004 | 유럽의회 선거 | 남부 프랑스 | 336,899 (12.18%) | -[A] | 당선 (1번) | 5선 | |
2007 | 프랑스 대통령 선거 | 프랑스 | 3,834,530 (10.44%) | - | 낙선 (4위) | [21] | |
2009 | 유럽의회 선거 | 남부 프랑스 | 249,695 (8.49%) | -[A] | 당선 (1번) | 6선 | |
2010 | 프랑스 레지옹 선거 |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 67,916 (22.01%) | 86,144 (23.85%) | 당선 (3번) | 3선 | |
2014 | 유럽의회 선거 | 남부 프랑스 | 935,182 (28.18%) | -[A] | 당선 (1번) | 7선 |
6. 기타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1974년의 모습을 보면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안대나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다 의안을 끼면서 현재는 그냥 맨눈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다.심심하면 잔 다르크 동상 앞에 나타나서 잔 다르크를 팔아먹으면서 유세해서 원래 좌우 막론하고 존경받던 잔 다르크가 괜히 극우와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전락해서 이미지가 나빠졌다.[24][25]
프랑스의 유명 작가인 프랑수아즈 사강의 비행을 지적하며 그녀를 단두대 앞으로 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2010년 방일하면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해 한국과 중국 등 일제의 피해국 여론은 평판이 안드로메다로 간 지 오래다. 엄연히 제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이었던 일본을 왜 프랑스 정치인이 싸고 도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는 나치 독일에 대해서도 한결같아서 "2차대전 중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것은 땅이 55만 m2에 달하는 만큼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특별히 비인간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서슴치 않는 사람이다. 심지어 "유대인을 학살한 가스실은 2차대전 역사의 수많은 일 가운데 하나"라는 발언을 했다가 유럽 의회에서 면책 특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사실 프랑스인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인종 투쟁" 운운하는 것은 히틀러와 정확히 판박이이기 때문에 은연 중에 추축국들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2011년 2월 딸 마린 르펜에게 국민전선의 당대표를 맡기고 80대 고령의 나이를 들먹이며 당대표에서 물러났다.
노르웨이 연쇄 테러 당시 범인을 옹호하는 망언이나 하면서 진보층은 물론 보수층에서도 기가 막힌다며 비판을 받았는데 대다수 일반인들에게 ' 테러리스트를 미화하는 미친 노망난 영감'이라는 분노 어린 비난을 들었던 것은 당연하며 국민전선 측에게조차도 '경거망동한 발언으로 우리 정당을 테러 옹호 집단이라고 만든다'며 말을 삼가라는 주의를 받았다. 이렇듯 국민전선의 공식적인 반응을 보듯이 프랑스 백인 우월주의계에게도 노망 들었냐는 비난을 받았다. 우익 세력은 물론이고 같은 극우 성향 정치인에게도 비판받는 것.
기본적으로 인종 혼합을 혐오하고 서로 다른 인종간의 관계는 투쟁의 형태밖에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극우 인종주의자의 말로라고 볼 수 있다.[26] 이런 사고방식은 유럽에서는 가장 극우적인 반이민주의자들조차 공감하지 않는다. 보통 반이민을 외치는 사람들은 무슬림들이 인종적으로 유럽인과 다르니까 반이민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유럽의 세속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해서[27] 반이민을 외치는 것이다.
2015년 8월 20일, 2014년 유럽의회 입성을 통해 중도우파 코스프레에 자신감을 얻은 딸 마린 르펜에 의해 자기가 만든 당에서 영구제명당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이에 반발하여 새로운 극우 정당을 창당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홈페이지
아프리카 가봉의 독재자 오마르 봉고에게 1억 CFA 중앙아프리카 프랑(현재 환율 기준 2억 840만원) 가량의 돈을 받았다.[28] 인종차별주의자 주제에 매우 모순적인 행동이다. 1992년에는 프랑스 국민전선이 한국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문서 참조)에게 지원을 받은 게 보도되기도 했다.
만화가 김태권의 친구가 프랑스 유학 중 그와 인터뷰를 하였을 때 "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가 참으로 가관이다. 이순신 장군 덕분에 한국은 일본과의 인종 혼합을 막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그가 극단적으로 순혈주의에 집착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내뱉을 수 없는 발언이다. 선조가 적극적으로 항왜를 받아준 일을 무시하는 망언이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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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르펜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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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254671>생애 | <colbgcolor=#fff,#1f2023> 생애 및 정치 경력 | ||
역대 선거 | 201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201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2022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 | |||
관련 정치인 | 에마뉘엘 마크롱 · 니콜라 사르코지 · 프랑수아 올랑드 | |||
가족 | 아버지 장마리 르펜 · 어머니 피에레트 르펜 · 언니 마리카롤린 르펜 · 조카 마리옹 마레샬르펜 · 조카사위 빈첸초 소포 · 형부 필리프 올리비에 · 사돈 조르당 바르델라 | |||
소속 정당 | 국민연합 | |||
보수주의 | }}}}}}}}} |
[1]
장마리 르펜의 대선 득표율이 2자리수 정도 나오기는 했지만 프랑스는 모든 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적용하는 데다
유럽 대륙에서 드물게 소선거구제 위주의 선거 제도를 채택해서 국민연합은 지지율에 비해 의석이 잘 안 나오는 군소 정당이다. 2017년 총선에서 달랑 7명 당선됐는데 이게 최근 선거에서 가장 잘 나온 수준이다. 그나마 1986년 하원 총선에서 비례대표제가 잠깐이나마 시행되었을 때 35석(총의석 533석 / 득표율 9.7%)을 확보하면서 나름대로의 세를 떨쳤지만 1988년 총선에서 다시
소선거구제+
결선투표제로 복귀하는 바람에 그 세가 파탄났다.
[2]
우습게도 점점 정작 프랑스 빈민층에 이슬람 및 이민자들이 늘어나서 빈민층 지지를 따지자면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한다. 6,500만에 달하는 프랑스 인구 15% 이상이 무슬림일 정도다. 그래서 나중에 딸인
마린 르펜도 빈민층 지지를 부르짖다가 "그럼 이슬람 빈민층들이 엄청 늘었는데?"라는 말로 반박되었다.
[3]
과거 그가 어부 집안이었던 것도 그에게 설득력을 더하는 데 한 몫 했다.
[4]
1974년,
1988년,
1995년,
2002년,
2007년.
[5]
참고로 르펜을 위시한 서유럽 극우주의자들이 말하는 "동양인"은 한국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동아시아의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중동(middle-eastern)의
아랍인들을 칭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동양인 하면 생각하는 동아시아 3국의 인종은 'east-asian'이라고 별도로 분류하고 이들은 유럽권에서는 극소수이기 때문에 유럽 극우의
인종차별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며 애초에 이 셋은 모두 강대국 혹은 선진국에 해당하는 나라이기 때문에(심지어 중국과 일본은 프랑스보다 훨씬 힘이 강한 나라다) 외교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감히 대놓고 무시하지 못한다. 즉, 차별을 안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지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그냥 관심 밖이다.
[6]
그러나 이 해 르펜은 좌파의 분열을 틈타 결선까지 진출하였고 프랑스 극우는 이 시점부터 하나의 큰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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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당시 월드컵은 역시 인종주의로 악명 높았지만 동시에 표면적이긴 해도 화합으로 유명한
남아공이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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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투표 7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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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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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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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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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투표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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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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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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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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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투표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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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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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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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투표 2위, 2차 투표 2위
[A]
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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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투표 4위
[A]
비례대표제
[A]
비례대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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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태극기 집회로 인해 태극기와 무궁화의 이미지가 나빠진 것,
대진련 같은
종북 단체가
독립운동가들(주로
안중근),
소녀상을 팔아먹으면서 아무런 관련 없는
종북,
반미를 내세우는 걸 생각하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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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입장에서는 진짜배기로 억울한데 잔 다르크가 이끌던 용병 중에는 외국인 용병들도 상당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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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자면 프랑스인도 북서부는 켈트족, 북동부는 게르만족, 남부는 라틴족 계열이어서 한 핏줄로만 된 것이 아니란 점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마찬가지로, 당장 내 조상이 1백년 전은 몰라도 1천년, 1만년 전에도 여기에 살았는지, 살았다고 해도 다른 외지에서 온 사람과 피가 섞이지 않았는지 그것들을 구분할 수 없다. 그러니 순수혈통 드립 치는 사람 있으면 그냥 비웃어 주자. 실제로
미국의 어느 백인 우월주의자가 자신이 순수 100%의 백인임을 보여주겠다며 혈통 검사를 실시했는데 검사 결과는 흑인 핏줄이 20% 있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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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데 무슬림들은 세속주의 국가보다는 종교적인 국가에서 온 경우가 더 많은데 문제는 이들이 자신들이 있던 곳에서의 모든 것들을 '똑같이' 받고 싶어한다는 것에다. 그게 문제인 이유는 그냥 단순히 금주하라고 했으니 술을 안 마시겠다 정도면 모르겠는데 '우린 금주하는데 왜 우리 사는 곳에서 술 파냐'는 식으로 나오기도 하고 영국에서는 진짜로 수십 년 토박이 술집에 이민자들이 들이닥쳐 술집 단골 손님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하는 말이 '무슬림들 있는 곳에서 그런 짓을 하니 그랬다'고. 어느 정도는
기우만은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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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펜은 이것이 발표된 후 아니라고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