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4:28

유형(형벌)

1. 개요2. 사례
2.1. 한국사
2.1.1. 장형2.1.2. 험난한 길2.1.3. 유배 생활2.1.4. 기약없는 해방일2.1.5. 종류
2.2. 해외2.3. 창작물
3. 비유적 표현4. 기타

1. 개요

流刑

죄를 지은 자를 변방이나 외딴 섬같은 오지로 보내는 자유형.

오형 중 2번째로 무거운 형벌. 귀양[1] 또는 유배라고 불리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시골로 보낸 뒤 거기서 가택연금을 하는 형벌이다.

고려 시대에 중죄인은 주로 외딴 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형벌로서 관리한다기보다는 그냥 내다버리는 수준인 경우도 많아서 사실상 죽음만 기다리는 잔인한 형벌이었다. 고려 연간부터 섬 사람들을 천시한 것이 이런 죄를 짓고 유배를 온 사람의 후손으로 보는 경향 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죽지 않은 게 어디냐 싶어지지만 조선 시대에 유배형에 처해져 고생 없이 귀양살이한 사람은 거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본 문서의 유배생활 문단을 참고.

다만 유배라고 해도 중죄인 유배와 정치적 추방의 차이는 있어서, 후자는 단순 지방 연금에 가까웠다. 유배지 선정에서 그 차이가 보이는데 죽어줬으면 싶은 경우엔 험한 바닷길에 죽을 수도 있고 고의로 죽여도 증거가 없는 섬으로, 추운 데서 고생좀 하고 정신 차려서 다시 와라 싶으면 북방, 말이 많이 나오니 잠시 쉬다 와라 하고 보내는 곳이 남방, 아예 요식행위로 보냈다는 시늉만 하려면 죄인(?)의 본가나 농장같은 근거지로 보내는 식이었다.[2]

물론 고생스럽긴 하더라도 최소한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기에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이 스스로 청하기도 하는 형벌이었다.[3] 어의 또한 왕실주치의로서 왕이 승하하면 책임을 문다는 이유로 형식적으로 유배를 갔다가 몇 년 뒤 복직하는 식으로 사용되었다.[4]

역사에 기록된 최연소 유배자는 황사영 백서 사건을 일으킨 역적 황사영 알렉시오의 아들로 2살 때 유배된 황경한(黃敬憲)이다. 말 그대로 아기가 유배를 간 셈이다. 황경한은 역적의 직계 자손이라 원칙적으로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으나, 당시 너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사형 대신 평생 노비로 살게 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남은 혈육을 평생 노비로 살게 할 수 없었던 어머니 정명련 마리아가 호송관원을 매수해 황경한을 유배 도중 죽어서 수장한 것으로 처리하고 추자도 포구의 바위에 두고 가게 했는데, 마침 포구 근처에 살던 오씨 성을 쓰는 어부가 황경한을 발견하고 거두어 길렀다. 이 덕분에 황경한은 평생 평범한 어부로 살다가 제 명에 생을 마쳤고, 현대까지 그 후손들이 추자도에 살고 있다. 어부 오씨와 황경한 사이의 관계는 부모자식 사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추자도에서는 현대까지도 두 집안이 통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물론 이 황씨 집안에서는 황사영에 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본인들의 조상으로 인정하지도 않는다.[5]

2. 사례

2.1. 한국사

2.1.1. 장형

조선 시대 형법의 기본으로 삼는 명나라 법전 대명률에 따르면 거리에 관계없이 장형 100대를 치고 본다.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장 100대를 곧이곧대로 다 치면 횡문근융해증으로 인해 맞다 죽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이를 이용해서 공식적 처벌은 유배로 해놓고 실제로는 장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몽주 등이 정도전을 이렇게 제거하려고 했고, 정도전 이숭인 등을 진짜로 이렇게 죽였다.[6]

이후 귀양이 처벌보다는 숙청이 목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장형은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정확하게는 속전이라고 해서, 돈을 내고 장형을 면제받는 것이다. 원나라 시기까지는 원래 장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을 관료에게 뇌물을 줘서 치는 강도나 횟수를 조절해 약하게 맞거나 아예 면제받는 식으로 암암리에 했는데,[7] 명나라 시기가 되면 대명률에 공식적으로 속전 제도가 생기면서 사실상 장형이 벌금과 비슷하게 변질된다. 그래서 황제가 "이놈은 무조건 때려죽여라"라는 의도로 장형을 강제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유배자들은 돈을 내고 장형을 면제받았다. 대명률을 가져온 조선 역시 왕이 따로 속전을 금지 또는 제한하지 않은 이상 장형을 받았다고 몸으로 때울 필요는 없어진다. 이후 장형 선고는 사실상 국가에 내는 벌금으로 바뀐다.

2.1.2. 험난한 길

속전을 했든 안했든 장형이 집행된 다음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2,000리(800km), 2,500리(1,000km), 3,000리(1,200km)로 나누어서 유배를 보내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정신이 아득해지는 거리는 역시 대명률을 가져왔기 때문인데, 조선에서는 영토의 면적 상 도성에서부터 2,000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8] 거리를 채우기 위해서 일부러 유배길을 여러 지역을 거치는 식으로 뺑뺑이 돌아서 갔다.

만약에 지역이 A-B-C 이렇게 있고 출발지가 B이며 유배지가 C라고 했을 때 B → A → C와 같이 빙 돌아서 이동경로를 늘리는 식. 이에 세종은 거리가 딱히 안 나오는 조선의 실정에 맞게 2,000리는 600리, 2,500리는 750리, 3,000리는 900리로 대폭 수정했다. 의금부노정기에는 경기도, 강원도로도 유배를 보낼 수 있었다.[9]

흔히 사극에 나오듯이 가 끄는 함거에 실려서 편하게 가는 일은 없고, 대부분 걸어서 가게 된다.[10] 물론 유배지까지 어떻게 가는지는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라, 돈 있는 사람이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유배지 대부분이 험지인데 조선의 도로 사정에서 달구지를 타고 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소달구지로 죄수를 호송하는 건, 거열형이나 참수형이 확정된 사형수를 사형장으로 호송할 때 뿐이라고 한다.[11] 사약형일 경우 데려오는 게 아니라 찾아가는 것으로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죄수를 찾아간다. 나름 돈 있는 대감들은 당나귀를 대절해서 가기도 했는데[12] 도주를 방지하고자 며칠부터 며칠까지 중간 기착지 어느 관아에 신고를 해야하는 터라 상당히 빡세게 움직여야 했고, 험준한 곳으로의 귀양은 이런 이유로 가다가 장독 등으로 죽는 경우도 많았다. 안 그래도 이미 장형을 당해서 성치못한 몸으로 천리행군을 하는 셈이니 귀양지까지 도착하기 힘든 것은 당연지사다. 이것도 기한이 그때그때 정하는 게 아니라 다 전례에 따라 정해져 있었는데 영조는 자기에게 찍힌 상대를 유배보낼 때 임의로 이 기간을 2분의 1이나 3분의 1까지 단축해버렸다. 가뜩이나 빡센 귀양을 더 빠르게 움직이라고 강제하는 셈인데, 장까지 쳤다면 그냥 가다 죽으라는 소리... 다만 꽤 이름 있는 양반이 역적혐의가 아닌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슬려서 가는 경우는, 제자들이나 알고 지내는 관리들의 인사를 받고 기일을 늦추는 경우도 있었다. 이항복의 경우는 북청으로 가던 중에 알고 지내던 사또가 생까는 것에 분노를 표한적도 있었을 정도지만 이런 사례는 그야말로 드문 사례다. 삼정승(좌의정, 우의정, 영의정) 출신일 경우, 유배를 가더라도 땅에 발을 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가마를 타든가 빨리 움직이려면 마차를 타기도 한다. 유배 당사자 본인은 별 고생을 안 하지만 가마꾼이나 마부를 하는 하인들이 죽을 맛이다.[13]

게다가 귀양지 자체도 사람이 살기 힘들고 험준한 지역을 고르게 된다. 당장 경기도 강원도의 내륙에 귀양가는 것은 유형을 빙자한 요식행위[14]므로 논외로 할 수 있으며, 제대로 유형을 받으면 함경도 삼수 갑산[15] 등의 조선의 최북단 지역 혹은 제주도 흑산도을 비롯해 지금은 비교적 간단하게 갈 수 있는 강화 교동도[16](이쪽은 주로 왕실 인사들이 주로 가는 곳이었다), 전라남도 완도, 보길도, 추자도, 부산 가덕도, 경상남도 남해도, 거제도[17] 같은 섬으로 결정되는 일이 많았다. 또한 당시 한양에서 남으로 멀리 있으면서, 제주도로 향하는 주 기착지 역할을 했던 전라도 강진[18] 등도 주 유배지였다. 예외로 정조는 신하들과 시 짓기 게임을 즐겼는데, 제한 시간 내에 시를 못 지은 신하에게는 벌칙으로 창덕궁 부용정 연못 한가운데 있는 인공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장난을 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유배생활은 고사하고 유배지로 가는 길부터 험한지라 중죄인만 유배를 보냈고[19] 사실상 "너는 역적이니까 섬같이 살기가 힘든 곳에서 평생동안 개고생만 하다가 죽어라."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귀양살이를 보내기 전에 고문을 심하게 당하다가 그대로 죽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조선시대 제주도의 진상품 고난 문서를 보면, 왜 섬 같은 지역에서 생존하는 것이 극한으로 힘들었는지를 잘 알 수가 있다.

현대에도 몇몇 섬들은 육지에서의 정기적 물자보급선이 오지 않으면 살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 많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해적들로부터의 수탈을 막는다는 이유로 섬에 백성들을 살지 못하게 하는 공도정책을 시행하던 시대였으므로, 조선시대 때 섬에 보낸다는 것은 보내놓고 죽든 살든 왕은 신경 안 쓰고 산다는 의미이다.

2.1.3. 유배 생활

유배지에 도착한 후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택 연금이나 다름없어서, 주막이나 정해진 집과 주변 지역 이외에는 관리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바깥으론 못 나갔다. 유배지는 대부분 보낸 지역에 계속 보내는 경향이 있었고, 국가는 유배된 자들을 위한 지원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배당한 죄인의 생활비는 본인이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없으면 유배지에서 본인이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당상관 정도 되면 이를 대비하기 위해 상단을 휘하에 두는 경우도 많았다. 평소에는 그 상인들을 휘하에 두고 비호해주다가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를 가게 되면 같이 데려가서 그들이 벌어다 바친 돈으로 먹고 살게 된다.

또한 유배인을 감시하기 위해 지방민 중 형편이 조금 되는 사람을 보수주인으로 지정해서 돌봐주도록 하지만, 당연하게도 험준한 곳에서 물자가 많이 생산될 리가 없으며, 당장 먹고 사는 것과 조정으로 보낼 세금까지 생각하면 유배당하는 자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래서 유배온 사람은 자급자족조차 어렵고 험악한 환경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구걸로 연명하거나 제대로 된 의식주를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압도적이었다.

가끔 가족들이 물건을 보내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워낙 멀고 험악한 지역인지라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었다. 당장 제주도에 귀양 온 추사 김정희의 경우는 집에서 보내온 음식물의 태반이 썩어서 버렸고, 젓갈류만 그나마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젓갈을 더 보내 달라"고 했을 정도다.[20]

이것도 역적으로 몰리는 경우에는 가족, 친지, 친구 등이 대부분 사분오열되고 엄중한 처벌을 받기 때문에 제대로 지원해주기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영양가 떨어지는 음식을 먹여 죽게 만드는 사례도 있었다고 하며 쌀가루와 소금만을 개어 먹여 영양실조 상태로 죽게 한 사례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어느 정도 덕망이 있는 자가 귀양을 가거나 높으신 분이 정계의 파워게임에서 밀려서 낙향하다시피한 경우는 지방관의 배려를 받아 외출이나 식사도 제공받을 수 있다. 사실 이 경우는 중죄인 처벌이 아닌 정적 추방의 성격이기에 최소한 먹고 살 수 있게 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또 이런 사람들은 귀양 온 마을의 훈장을 맡는 경우도 있었다. 흉악범이나 파렴치범도 아니기 때문에 남보기 부끄러울 것도 없다. 귀양도 어느 정도 클라스가 있어야 보내다 보니 현지 사람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는 순기능도 있었다. 꼭 고관대작이 아니더라도 일단 벼슬이 있다는 것은 그 어려운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곧 공부에는 도가 텄다는 게 기정사실이라 자식의 과거 급제가 일생일대의 소원이지만 주변에 이렇다할 지식인이 없는 지방 양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21]

일단 유배도 종류별로 고생하는 급수가 달랐다. 가장 심한 건 대역죄인들이 받는 위리안치형이고, 가장 가벼운 유배형으로는 본인이 원하는 곳을 스스로 고르게 하는 자원부처를 들 수 있다. 이 경우면 자기나 처가의 농장이 있는 곳으로 가면 되니(웬만한 중앙 관리라면 지방에 농장 정도는 있는 경우가 많았다), 편하게 지낼 수 있다. 또한 서울에 들어오는 것만 금하고 아무데나 다닐 수 있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면 중앙 정계에서 잠깐 빠져서 머리 좀 식히거나 반성 좀 하고 오라는 것이니, 곧 복귀하는 게 기정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는 지방민이나 지방관들이 잘 대해주었다. 그것 때문에 이른바 유배 음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아무리 유배를 왔다고는 하나 유배당하기 전 매우 높은 사람이고, 그래서 얼마 못가 유배가 풀릴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들이 그 유배자에게 상당히 좋은 음식으로 대접했다. 단순히 나중에 불똥 튈까 무서워서가 아니다. 이렇게 유배 온 사람들은 일반 잡범이 아니라 정계의 거물들이고, 당연히 지역 수령하고도 직접 안면이 있거나 하나 건너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회에 중앙 정계의 유력인사와 친해지는 것은 지방민들에게 상당히 좋은 투자가 될 수 있다. 일례로 장희재의 경우는 여동생이 중전마마를 한 적이 있는 사람에 장희재 본인이 세자의 외삼촌이기까지 했으니 유배를 가서는 되려 그 곳의 지방 사또를 마치 자기 몸종부리듯 하는가 하면 유배생활을 하는 주제에 한성판윤[22]이라고 들먹거리는 우스운 짓거리를 하는가 하면 심지어 관복까지 입고 다녔다.[23]

그러나 역모에 연루되어 복귀 가능성이 없는 중죄인들은 극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혹은 정말 일반 잡범들이 유배를 온 경우가 있는데, 현지인들 중 이들을 애써 돌봐줄 사람은 당연히 없기 때문에 낯선 고장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벌어먹어야 했다. 안도환[24]이 쓴 유배 가사 "만언사(萬言詞)"에 따르면, 동네 아이들로부터 '늙다리, 꺽다리' 하는 식으로 '귀양다리'라고 놀림받는 것은 예사요,[25] 자신이 얹혀 사는 현지인에게 밥값을 못 한다고 눈치를 받자 어떤 집에 들어가 구걸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과거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노비들에게 굽실거리기까지 한다. 그렇게 얻은 보리 한 말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직접 등짐까지 져 가며 주인 집까지 가져가니, 주인이 '모처럼 밥값을 했다'면서 빈정거리고선 오늘 저녁 밥은 많이 먹으라며 밥을 퍼다 주는데, 안도환의 입장에선 당연히 빈정거림도 싫고 고봉밥( 머슴 대접이었다.)도 싫었던 모양. 결국 노끈 꼬는 일로 부업을 시작하여 겨우 입에 풀칠을 하기 시작하는 굴욕을 맛본다.

게다가 관료 출신이 정쟁에 패해 유배를 온 것이라면 역모가 아닌 한에는 어떻게든 풀려날 가능성이 제법 있지만[26] 일반 잡범은 정말로 유배 보내고 잊어버리고, 그게 유형의 목적이기도 해서 풀려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나마 풀려날 가능성이 있다면 조정에서 반포하는 사면령 정도. 강상죄와 강력 범죄에 연루된게 아니라면 보통 잡범은 안치를 당했더라도 사면해주기 때문이다.[27] 그러나 당연히 저런 사면령이 자주 내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쪽도 가능성이 희박한 건 비슷하다.
또한 훈장 수준에서 더 나아가 나름대로의 학문을 연구하고 지역의 지식인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지역의 지식인의 핵심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무오사화로 유배온 김굉필은 그 동네에 부임온 관리의 아들인 조광조의 스승이 되었고, 정약용의 경우에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목민심서까지 쓴 것이 대표적인 사례. 또한 정약전 자산어보도 유배생활 중에 썼다.

이런 식으로 귀양온 유배인들의 도움을 톡톡히 본 지역이 바로 제주도인데, 제주도로 유배 온 사람들을 제주도에서는 '귀양다리'라고 불렀고, 이들 '귀양다리' 가운데는 우암 송시열이나 추사 김정희 같은 네임드 유학자들도 많았다. 제주도가 육지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절해고도임에도 불구하고 교육 수준이 높았던 이유가 이들 덕분. 현재 제주도에서는 도 차원에서 유배인들의 행적이나 유형인들이 당시 살았던 집터를 연결하는 관광코스를 운영하고 있다. 다만 이렇게 제주도로 유배와서 누릴 거 다 누리고 첩까지 들여 사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제주 출신 소설가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서두에서 퍽 냉소적이고 비아냥 대는 어조로 이들의 유배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2.1.4. 기약없는 해방일

유형은 기본적으로 무기징역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언제 풀려날지가 아득하다. 그러니 유배를 시작한 이들 가운데 일부는 나름대로 자신이 풀려 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데 배운 것이 글쓰기라고 "풀어주세요"라고 요약할 수 있는 글 쓰기가 많았다. 이를 유배문학이라고 부른다. 단적으로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 속미인곡이 바로 이 유배문학이다. 사실 요즘에도 아직 최종 판결이 나지 않은 수감자들은 판사에게 일종의 반성문 같은 것을 제출한다. 게다가 유배된 사람들은 다 글깨나 읽었고 과거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능력도 피나게 갈고 닦았던 사람들이었으니, 상당히 잘 써진 반성문이었을 것이다.[28]

엄청 운 좋게 유형에서 풀려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임금이 바뀔때, 특히 반정으로 바뀌면 흉악범이 아닌 이상 거의 풀려났다. 연산군 당시 유형을 받았다가 중종반정으로 인해 사면받은 이들도 꽤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많지 않고, 대부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편히 산다고 해도 상실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거기다 언제 풀려날 지도 알 수 없고, 언제 사형이 떨어질지도 모르는 상태이기에, 그야말로 하루하루 칼날 위를 걸어가는 심정인지라 심적 부담도 컸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경우에는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금부도사를 만나게 되니, 심적 충격이 엄청났다. 실제로, 역모 등이나 대형 사화에 연루된 경우 처음엔 유배로 끝났지만 이후 사건이 확대되거나 추가적인 숙청이 이루어질 때 이미 유배보낸 이들을 처형하는 경우는 꽤나 많았다.

게다가 사람에 따라 언제까지 유배를 당할지 몰랐는데, 정약용은 무려 18년을 유배당하기도 하고, 윤선도처럼 4번에 걸쳐 무려 25년을 유배당하는 경우도 있었다.[29] 야사에 따르면 벽파 집권기에 정약용이 귀양간 후 시파인 김조순이 집권하게 되었는데, 가지고 있던 부채에 정약용의 시가 적혀 있었으나 그 지은이를 모르고 있어서 궁금해 하다 주변에서 "그거 귀양 가 있는 다산이 지은 시임"이라고 가르쳐주고 나서야 "아니, 귀양가 있는지 18년이나 됐단 말이냐?"이라고 놀라 귀양에서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야사에 불과하다. 유배 보내고 죽든 살든 잊어버리는 것은 위에도 써있듯이 일반 잡범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명문가 출신의 고위 관료를 유배를 보내놓고 잊어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약용이나 윤선도 급의 명문가 출신 관료가 장기간 풀려나지 못하고 유배를 당한 것은 그만큼 단단히 찍혀있었다는 뜻이지, 까먹었다는 뜻이 아니다[30]. 당장 그 사람의 친인척, 친구, 동문, 정적, 원수가 가득한 곳이 한양이다. 일례로 정약용에 비해 서얼 출신이라 신분도 떨어지고 관력도[31] 낮았던 박제가만 해도 정순왕후가 직접 석방명령을 내렸다.

2.1.5. 종류

정배(定配)·부처(付處)·안치(安置)·정속(定屬)·충군(充軍)·천사(遷徙)·사변(徙邊)·병예(屛裔)·투비(投畀) 등의 표현이 있다.

종류도 종류지만 유배지가 매우 중요하다. 부처와 안치의 경우 본향(고향)이나 자원처도 가능하다. 장형을 속전으로 면하고 고향이나 자원처로 부처를 간다면 그냥 벌금 좀 내고 쉬다 오라는걸 에둘러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절도(絶島)에 위리안치된다면 꿈도 희망도 없다.

2.2. 해외

2.2.1. 중국

중국 역시 유형을 두었다. 후한 시대에는 낙양을 기준으로 멀면 멀수록 유형의 강도가 강하다고 평가되어 일남(日南)[33]으로 유배되는 것이 유형 중에서는 최고로 무거운 형벌이었다. 낙양에서 13,400리나 떨어져 있는 데다가 당시의 일남은 고온다습에 기후가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며 더군다나 전염병까지 창궐하는 지역이었다. 해남도 역시 최고의 유배지였다. 일남과 해남도가 최고의 유배지였으며 그 다음 랭크에 있는 유배지가 회계와 돈황이다. 회계는 손권 반평을 짱박아둔 곳으로 유명하며 돈황은 이문후, 북궁백옥 등이 일진 짓을 하던 곳이다. 대에는 죄인의 유배처가 영고탑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고탑은 비록 만주족의 발상지였으나, 반대로 만주족이 중원에서 쫓겨났을 때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봉금된 곳이기도 했다. 기후도 상당히 추운데다 앞서 말한 이유 때문에 미개발지역이라 열악해서, 청대의 죄인들은 영고탑으로 유배를 갔다.

실제로 공손찬이 본인은 잘못을 하지 않았지만 상급자의 잘못에 같이 연좌되어 일남으로 유배형을 당했는데 그 당시 풍습에 따라 장례식을 먼저 치른 뒤 일남으로 출발했다. 일남 정도의 유배지로 유배를 당하는 것은 사형집행을 당하는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닌 형벌이라서 이런 곳으로 유배를 당하면 장례식 먼저 치르고 유배지로 출발했다. 그러나 공손찬은 유배지로 가고 있던 도중 죄가 사면되어 다시 요동으로 복귀했다.

일반 백성들이 유형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의 유형 대상자는 관료나 귀족이었다.

2.2.2. 일본

일본 역시 한국처럼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일본어로 유배를 일컫는 고유어로 시마나가시(島流し)가 있는데 여기서 유래한다. 또한 여기서 유래한 비유적 표현으로 큰 문제를 일으켰거나 영업 실적이 형편없거나 한 직원을 벽지나 한직으로 좌천시킨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일본의 유배형은 사농공상에서 무사를 제외한 농공상에게 주로 내려지는 징역형 성격의 형벌으로, 무단으로 섬에서 이탈했다가 체포될 경우에는 무조건 참수형에 처해졌다.

일본의 지형 특성상 유배지는 전부 본토와 멀리 이격된 바위이라 이탈하는 것 역시 결코 쉽지도 않았다. 유명한 유배지인 하치조지마는 일본 본토로부터 287km나 떨어져 있다. 육지 유배지일 경우 월담에 성공하기만 해도 이탈이 가능하지만 일본의 유배지는 도망쳐야 할 곳까지 수영을 하거나 선박에 탑승해야 한다는 답이 없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 당장 선박을 구하는 것부터가 문제고, 선박을 구해서 탈출해도 그 다음이 더 문제다.

일본 영토가 아닌 필리핀 영토인 루손 섬으로 유배를 보내기도 했지만 당시에도 루손 섬은 외국 영토였기에 사실상 유배를 빙자한 국외추방에 가깝다.

옥문도가 창작물에서 나온 대표적인 유배지이며, 유배형에 처해진 인물은 사도 섬으로 유배된 고다이고 덴노, 이즈 제도 하치조지마에 유배된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유명하다. 섬이 아닌 본토까지 범위를 넓히면 이즈 반도로 유배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 있다.

에도 시대의 여러 에서는 그곳의 범죄자를 그 번 내부의 오지나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사츠마 번에서는 류큐 제도로 자주 유배를 보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의 경우처럼 주로 사츠마의 직접지배를 받는 아마미 군도로 보내졌지만, 간접지배를 받는 류큐 왕국에 맡긴 사례도 있다고 한다. 한편 류큐 왕국에서는 오키나와섬의 죄인을 더 멀리 사키시마 제도의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2.2.3. 러시아

드넓은 나라인만큼 시베리아로도 유배형을 보냈다. 사실 러시아 제국 시대까지는 대부분의 유형은 그냥 특정 지역에서 떠나지 못하는 채로 경찰을 보호관찰을 받는 것이었고, 비교적 느슨한 형태여서 몰래 탈출해 돌아올 수도 있었다.[34] 이게 힘들고 혹독해진 건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 이후.[35] 시베리아에 수많은 굴라그가 운영되었다. 안 그래도 혹한에 격오지로 유명한 시베리아 한복판이었는데다가 감시가 여간 철저한 것이 아니었기에 시베리아 원주민 출신조차 탈출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위에 한국의 유배 생활에 대해 언급하면서 유배를 간 인사들 때문에 지역의 교육과 문화가 발달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러시아의 이 유배도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 이 유배로 보낸 사람들 때문에 시베리아 개발이 진행될 수 있었다. 특히 로마노프 왕조 말기의 경우 데카브리스트의 난처럼 차르 전제 정치에 저항하다가 유배를 온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시베리아에 정착하면서 단순한 경제, 산업 개발 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부분도 분명히 발전이 이뤄졌다. 대표적인 예가 이르쿠츠크다. 러시아릐 그 광활한 면적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러시아어 지역 방언 차이가 크지 않은 것 또한 이런 역사적 사정에 일부 기반하고 있다. 물론 이것도 제정 러시아 시기에나 통용되던 이야기.

알래스카 조약을 체결하기 전, 알래스카가 아직 러시아 영토이던 시절에는 저기 추코트카 웰렌까지 유배를 보냈었다. 알래스카 미국에게 팔린 이후에는 그 경로를 타고 미국으로 도주할 우려 때문에 웰렌으로 유배보내진 않았다.

2.2.4. 영국 영미권

영국은 19세기까지 범죄자를 호주, 북미 신대륙에 보냈다. 특히 호주의 경우 북미 식민지가 미국으로 독립하고 나서 죄수들을 못 보내게 되자, 죄수들을 호주로 계속 보내서 신대륙 개척을 죄수들의 힘으로 행한 수준이었다.

이를 두고 호주를 '죄수의 후손국'으로 비하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18-19세기 영국 사법체계는 대단히 가혹한 엄벌주의라서 살인 등의 흉악범은 닥치고 사형에 처했고 진짜로 장발장처럼 빵 한 덩이 훔친 정도로도 호주 유배형을 선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36] 보석금을 내면 유배를 면제받을 수 있었지만 가난해서 보석금을 못 내면 얄짤없이 호주행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죄도 없는데 누명쓰고 유배온 억울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니 호주인들의 조상이 범죄자라고 해서 이들이 무슨 살인범이나 강도, 강간범 같은 중범죄자였을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정말 중범죄자였다면 이미 영국 본토에서 목이 매달렸다.

범죄자들을 받는 식민지 주민들은 이런 정책을 매우 싫어했다. 자기가 사는 동네로 범죄자들이 오는 셈이기 때문이다. 훗날 미국 정치인이 되는 벤자민 프랭클린은 신문에 " 영국 정부는 더 이상 13개 식민지로 죄수들을 보내지 말라! 죄수들 때문에 식민지의 치안이 악화되고 범죄가 늘어나서 주민들이 매우 불편하다. 만약 우리가 방울뱀들을 잔뜩 모아서 영국 본토로 보내주면, 영국인들은 기분이 좋겠는가?"라는 내용의 항의문을 쓰기도 했다.[37]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는 성범죄자들이 출소하면 일명 '변태 마을'로 유배를 보낸다고 한다.

2.2.5. 프랑스

영국과 비슷하게 식민지에 범죄자들이나 반 프랑스 운동을 벌였다가 포로로 잡힌 외국 지도자들을 유배 보냈다. 대표적으로 레위니옹섬과 빠삐용이 유배당한 곳으로 유명한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이 있다. 한편 알제리에도 콩고 내전 당시 지도자였던 모이스 촘베를 유배보내기도 했다.

현대에도 유배형이 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는 일반적인 징역형이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해외영토에 있는 교도소로 보내서 유배살이를 시키는 것이다. 대개는 마약밀매범이나, 살인범같은 흉악범이 이런 유배형에 처해지는데, 영화 빠삐용이나 집으로 가는 길을 보면 유배객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알 수 있다.[38] 각각 프랑스령 기아나 마르티니크에 위치한 교도소를 배경으로 하는데, 이 두 지역은 기아나 우주센터나 일부 관광지로 개발된 해수욕장이 있는 것빼고는, 변변한 자원도 없이 프랑스 본토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연명할 만큼 낙후된 곳이라서 이런 혐오시설이 있어도 예산 더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현지인들이 오히려 감지덕지하는 상황이다.

2.2.6. 몰디브

섬이 많은 몰디브에는 21세기까지도 유배형이 있다. 민주화 시위 때 인기가 있던 총리를 외딴 섬으로 보낸 게 몰디브 유형의 대표적 사례.

2.2.7. 독일

독일에는 21세기 들어 유배형이 부활하였다. 세계 각국과 협정을 맺어 2,000명의 청소년 범죄자를 해외에서 일정 기간 생활하게 하는 식으로 부활하였다. 다만 이건 처벌보다는 교화 목적에 더 가깝다.

2.2.8. 튀르키예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동로마 제국 유구한 전통에 따라 이스탄불 근교의 섬이나 먼 지방으로 유배를 보내곤 했다. 당시에는 현대 알제리 이집트 같은 변방으로 유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인류역사상 최초로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는 헤자르펜 아흐메트 첼레비도 알라의 질서에 도전한다 이슬람학자들이 상소를 올리자 술탄이 그를 죽이기는 아쉽고, 이슬람 학자들은 달래야 해서 결국 알제리로 유배를 갔다가 풍토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된 후에도 사상범이나 정치범에 대한 유배가 이루어졌으며, 수도인 앙카라 이스탄불 이외의 지방도시로 유배를 보내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이 형을 받은 사람은 매일 거주지로 지정된 지역 내 경찰서에 신변통보를 해야 하며, 모든 여행에 있어 감시를 받았다. 튀르키예의 유명한 작가인 아지즈 네신이 이 유배형을 여러번 살았다. 1980년대 이후로는 유배형이 사실상 폐지된 상태이다.

2.3. 창작물

3. 비유적 표현

보통 공무원이나 하사급 이상 군인에게 적용되는 비 징계 문책 인사다. 공식 징계나 처벌이 아니라서 비징계 문책 인사라고 표현한 것이다. 감봉 등 공식적 징계와 같이 행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기존에 연고가 없는 곳으로 이동 시간을 최소로 주면서 보내버린다.

정상적 인사이동의 경우 휴가를 붙여서 쓰거나 처음부터 인사이동 날짜를 넉넉하게 주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문책성 인사에는 불가능하다. 음주운전같은 비위 행위가 걸려서 그 다음 후속대책으로 징계하고 인사이동시키는 경우를 말한다. 강원도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경상도 토박이가 전라도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유배를 가면 강원도로 가고, 그런 식이다. 물론 유배지를 대도시로 선정하는 경우는 없다. 말이 유배일 뿐, 즉 그냥 나가라는 의미다. 비유적으로는 한직으로 발령내는 것도 유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회사에서 해외파견을 1~5년 동안 받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도 인프라가 부실한 저개발국이나 오지로 떨어지는 경우에는 유배와 다를 게 없다. 물론 회사에서 MBA 등 유학을 보내주는 경우는 유배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국군은 일부의 출타일을 제외하고 외출이 자유롭지 않아 현역병, 예비역 사이에서 유배라는 표현이 종종 나온다. 아예 병에 대한 인권 자체가 전무하고 인식도 없던 쌍팔년도 시절은 조선의 유배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유배, 유형이라는 표현은 마이너한 편이고 보통은 노예라고 자조하는 편이다.

MBC는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과 지배정권이 불쾌해하는 구성원을 비제작부서나 신천교육대, 사회공헌실, 스케이트장에 유배시켰고, 이를 주도한 인원들은 현재 정상화위원회를 통한 징계 및 사법기관을 통한 형사처벌 절차를 밟고 있다. 정작 그들도 본인들이 불쾌해 하는 구성원들을 조명창고에 유배시키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하방이라고 표현하는데 마오쩌둥 시기에 상당수 중간관료들을 시골로 내려보내서 일을 시킨 것을 하방이라고 표현한것이 시초로, 문화대혁명 때는 고위관료들이나 홍위병들도 하방되어서 농촌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많았고 이후로도 관용어가 되어서 현재도 비징계 문책 인사나 명예퇴직을 하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과거 넥센 히어로즈( 키움 히어로즈) 선수들 사이에서는 2군으로 내려가는 것을 ' 강진으로 유배간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거긴 야구밖에는 할 게 없다. 현재는 강진 베이스볼 파크를 2군 구장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단어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원화 캠퍼스인 대학에서 1학년을 멀리 떨어진 도시의 기숙사에 강제로 살게 하는 것을 유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39] 연세대학교의 사례가 있다. 앞으로 서울대학교도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서울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지방대로 진학하는 것을 우스갯소리로 유배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고위직 검사의 경우에는 법무연수원( 법무부 소속기관) 연구위원으로 보하는 것이 사실상 유배에 해당한다.

군인의 경우 영관급이나 장성급 인사의 경우에는 원래 보직에서 해임시키고 각군 및 국방부 정책연구관 및 이에 준하는 한직으로 유배보낸다. 2017년 박찬주 대장은 갑잘 논란으로 인해 인사사령부 정책연구관으로 좌천되었다.

MBC 가요대제전에서 상암동 본사, 일산 드림센터행이 아닌 임진각 무대행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가요대제전은 연말인 매년 12월 말에 개최되는데, 한겨울 밤에 야외 무대에서 공연해야 하는 가수들이 어떤 고생을 할지는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대신 한 번 보내면 웬만하면 다신 안 보낸다고 한다. 2015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가 2018년부터 부활했긴 했는데 공연은 안 하고 가수들 대신 아나운서들을 보냈다.

핀란드인 여행 유튜버 레오 란타의 경우에는 과거 유소년 시절에 핀란드어를 거의 못해서 부모님이 2년간 핀란드로 유학을 보냈는데, 등떠밀려서 간 것에 가까워서 본인과 시청자들은 핀란드에 유배를 갔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한다.

4. 기타

tvN에서 방영하는 렛츠고 시간탐험대에서 유배생활의 체험편이 방송되었다.

고려시대의 형벌이라고 할까 정치적 처벌 중에서 귀향형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유배와는 전혀 다른 형벌이다. 이 처벌을 아주 단순하게 요약하면 고향 앞으로라고 할 수 있다. 이것도 범털과 개털이 갈린다. 범털이라고 할 수 있는 문벌귀족이나 그에 준하는 고위 관료의 경우는 '관직과 특권, 과전 등을 박탈하고 본관이 있는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형벌'이다. 현대로 치자면 파면+강제적 자숙의 의미가 붙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도 개털이 되면 이야기가 좀 달라져서, 정전 같은 것이 있다면 몰수한 다음에 향 또는 부곡이나 섬 등으로 거주지역으로 강제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향이나 부곡 등이 이후에 소멸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유배와 별도로 존재했던 귀향형은 조선시대에 가면 소멸한다. 문벌귀족을 대상으로 했던 범털식 처벌법은 말할 것도 없이 소멸.

아무래도 사람이 떠돌아 다니면서 답답하게 지내면 생각나는건 글감이요, 남는 것은 시간이라 동서고금 유배생활 중에 쓰여진 일기, 책 등이 상당히 많다. 사실 유배생활뿐 아니라 칩거 생활 중 작품들이 오늘날의 고전 저작 중 적지않은 수를 차지한다. 유명한 '군주론'도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공직에서 실질적으로 추방당한 후 쓴 것.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정조는 신하들에게 불시에 시(詩) 짓기 시험을 내서 제 시간 내에 짓지 못한 관료가 있으면 창덕궁 부용지 한가운데에 있는 조그만 섬으로 미니 유배(?)를 보냈다고 한다. 드라마 이산에도 이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1] 본디 죄를 지어 관직에서 쫓겨난 자들을 고향으로 보내는 제도였기 때문에 귀향(歸鄕)이라고 했다가 발음이 변하면서 '귀양'이 됐다고 한다. [2] 남방의 경우에는 복직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에 유배를 가서도 비교적 편안하게 생활했고, 죄를 짓지는 않았는데 정치 싸움에 밀려서 유배를 간 경우에는 복직이 불투명한데도 딱히 심하게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본 문서의 '2.1.3. 유배생활'을 참고. [3] 손침, 김경징 [4] 그런데 어사가 파직시킨 사또 또는 사또의 뒤를 봐주는 높으신 분의 파워게임에 밀리면 본인이 정치적으로 보복을 당해 유배가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어사 시절 서용보를 파직시켰다가, 훗날 해남으로 귀양을 간 정약용이 있다. [5] 황사영의 다른 직계 자손으로는 4대째 되는 손자가 징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의 아들인 황사영 알렉시오의 5대손은 도쿄에서 외국어 학원 원장으로 지내다가 사망해 일본에도 황사영 알렉시오의 후손이 살고 있다. 당연히 여기서도 본인들의 조상인 황사영에 대해서는 금기어 취급이다.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귀양가서 귀양지에서 태어난 정미수도 있다. [6] 볼기를 치는 장형임에도 허리를 때렸다고도 한다. [7] 이건 수호전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귀양을 간 지역의 노성( 교도소)에서 관영(교도소장)이 처음으로 죄인을 접견하면 “ 태조 무덕황제가 정하신 바에 따라 처음 온 죄수는 살위봉 일백 대를 맞아야 하니 준비하라”라고 명령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죄수들은 그 이전에 이미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관영과 차발(간수장)에게 은자를 뇌물로 뿌려 매 맞는 것을 면제받는다. 다만 귀양을 가기 전, 원 주무관청에서 처벌이 결정되고 출발하기 전엔 먹자를 넣고 등허리에 매를 때리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건 대놓고 뇌물로 빼기에는 눈치가 많이 보여 때리기는 한 모양. 다만 이 경우에도 매 맞을 대수를 줄여주거나 살살 때리는 형식으로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8] 북쪽 끝 함경도 경원부가 1,700리, 남쪽 끝 경상도 동래가 1,000리 정도였으며, 2,000리가 넘는 곳은 제주도 대정현 하나뿐이었다. 지금도 경부선 + 경의선으로 부산 ~ 의주 총 거리를 합쳐야 900km를 넘기는 수준이다. [9] 다만 정말 재수없으면 대명률에 나오는 FM대로 3천리형을 때려버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10] 조선시대에 잘 알려진 유배길은 삼남대로, 영남대로, 관동대로가 있었다. 드라마 용의 눈물이나 허준 등에서 역사 기록에 맞게 유배지까지 걸어가는 모습이 나온다. [11] 현대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당시에도 이 개념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 지 인조 시절 안익신의 옥사에 휘말려 수레에 타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죄수가 자기 죽을 줄 모르고 "내가 지금 어디로 귀양 가는 거냐?"고 물어 보는 모습에 사람들이 가엾게 여겼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2] 귀양을 가면서 나귀 같은 이동수단이나 식비, 의복비 등 개인 편의를 위한 모든 부대비용은 죄수 본인이 부담했다. 문제는 대명률에 따라 유배길이 기본 1,000리에서 3,000리까지 되었기에 엄청난 기한이 걸렸는데, 그 긴 기한동안 개인 편의를 사비로 충당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대개 몸으로 때웠다. 물론 아래에 언급하는 것처럼 명망 높은 고위직 관료의 경우 지방 유력자들이나 자신의 당파 유생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13] 대개 이런 사람들은 동료들이나 제자들이 각 지역에 수령으로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이런 삼정승 출신들은 애초부터 있는 집 출신들이 대다수라 인간관계가 파탄 직전이더라도 문중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였다. [14] 다만 멀다고는 해도 무조건 요식행위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는데 아무리 멀어도 고향이나 본인 농장 근처로 유배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왕이 해당 신하를 정치적 숙청 대상으로 삼아 향후 정치활동은 엄금하되 천수를 누리게 하려는 의지가 강할 때에 해당되며 이 경우 본인의 소유지에서 수입을 바탕으로 당시 기준 부유한 생활이 가능했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가 구설수에 오른 죄가 내란죄임에도 불구하고 태종의 강력한 의지로 신하 본인의 고향으로 유배를 간 이거이와 그 아들이다. [15]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바로 이 삼수와 갑산에서 나왔다. 군대 용어로 보면 강원도 양구/ 원통에 비할 정도로 춥고 길 험한 곳. 참고로 삼수군 갑산군은, 양구군 인제군보다도 1월 평균기온이 10도는 더 낮은 곳이다. 이곳을 조선시대 때는 동북면이라 칭했는데 태종 이방원 조사의의 난 등 조정에 대한 반란이 크고 작게 있어 와서, 조선 조정에서는 이 지역 전체를 천대하고 격하시켰다. 이곳으로 유배 보낸다는 것은, 다시 말해 역적이나 반란자와 동급으로 칭한다는 소리와 같은 말이었다. [16] 지금 기준으로 보면 강화도로 유배가는 것이 그리 큰 벌인가 싶을 수 있는데 조선시대만 해도 아직 기술이 부족해 괜찮은 다리를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배를 튼튼히 만들 수도 없어 뱃길이 험한 곳이면 접근성이 나락으로 떨어져 십중팔구 오지였다. [17] 현재는 완도나 가덕도, 거제도, 남해도는 사실상 육지 수준이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절해고도, 절계행으로 불렸다. [18]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도는 대체로 강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일설에 따르면 강진의 옛 이름 탐진이 제주의 옛 이름인 탐라의 유래라고 한다. [19] - - - - 의 5단계 형벌 체계에서 사형 바로 밑에 있는 것이 유배형이었다. 유배형 밑에 있는 도형은 극악한 중노역을 부과하는 징역형이었다. [20] 이걸 가지고 어느 지상파 프로그램에서는 앞뒤 부분을 싹 자르고 추사 김정희가 젓갈을 즐겨먹었다고 왜곡했다. 당연하지만 이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로 김정희는 이 즈음 상술한 먹는 문제와 더불어 재혼한 부인마저 사망하는 바람에 힘든 시절을 보내야했다. [21] 이는 영화 <자산어보>를 보면 알 수 있다. [22] 오늘날의 서울특별시장. [23] 장희재는 실제로 한성부 좌윤까지 지내긴 했고, 조선시대에는 파직당한 사람도 웬만하면 전 직함을 불러주는 게 예의였기 때문에 예전 관직을 자칭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장희재와 관련된 비행을 빼곡히 적은 숙종실록에는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24] '안조환', '안조원' 등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안도환'이 유력하다고 한다. [25] 이때, 명색이 한양의 온갖 다리[橋\]를 거닐었던 자신이 이런 수모를 겪는다며 한탄한다. 언어 유희가 들어간 셈. [26] 조선의 지배층은 대단히 좁아서, 혈연 혼맥 등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유배 보내고 잊어버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27]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뒤 내린 사면령으로 예를 들면 이렇다. "... 이달 22일 새벽 이전을 기준으로 하여 모반·대역과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를 모살해·구타·매도하였거나, 처첩이 남편을 모살했거나 노비가 주인을 모살(謀殺)했거나, 고의로 사람을 살해했거나, 염매(廉魅) ·고독(蠱毒)을 했거나, 국가의 강상에 관계되거나, 장오(贓汚)나 강·절도를 제외한 잡범의 사죄 이하 도(徒)·유·부처·안치·충군된 자는 이미 배소(配所)에 이르렀거나 아직 배소에 이르지 않았거나, 이미 발각되었거나 아직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 모두 사유(赦宥)하여 준다. 감히 유지(有旨)가 있는 이전의 일을 가지고 서로 고발할 경우에는 그 죄로 죄주겠다. ..." [28] 사실 핸드폰이나 인터넷이 있는 시대도 아니었고 유배중인 상황 상 사람을 만나는 것도 어느 정도 제약이 있으니 글쓰고 책읽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을 것이다. [29] 참고로 윤선도는 물려받은 재산이 워낙 크다 보니, 유배 기간에 맞먹을 만한 기간을 은거하며 즐겼다. [30] 정약용의 유배 기간이 길었던 이유는 별거없고, 가톨릭 신자라서 그랬을 뿐이다. 황사영 백서 사건 때문에 조선 사회에서 가톨릭 신자라면 서구 열강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는 인식이 박혀있기 때문인데, 정약용 본인도 이 사건때문에 정계에서 축출당하여 유배를 간 것이다. 그나마 정조가 총애하던 신하라는 점과 더불어 선술한 야사에도 언급되는 김조순과 친밀한 사이였던지라서, 일단 본인은 처형당하는 것을 면한 것은 물론, 18년이 지나서 여론이 잠잠해지자 바로 해배될 수 있었을 뿐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인 대신들은 정약용급 범털이 아닌 이상에야 유배지에서 평생 살게된 거면 그나마 다행이고, 보통은 그냥 처형당했다. [31] 정약용은 정3품 형조참의(현재의 1~2급)까지 역임했지만, 박제가는 최고로 올라간게 겨우 종6품 현감, 현령 정도였다. [32] 鹿角城. 짧은 나무를 비스듬하게 박거나 십자 형태로 울타리로 조성한 일종의 목책. 녹각, 녹각목, 녹각책으로도 불린다. [33] 현대 베트남 중부 지역. [34] 준비성 좀 있는 사람이라면 아예 유형 선고를 받고 출발할 때부터 탈출용 자금과 가짜 서류를 숨겨서 출발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냥 눈치 좀 보다가 슬쩍 기차역에서 가짜 서류를 제출한 뒤 기차를 타고 탈출하거나 썰매 등을 이용해 튀는 식으로 탈출은 빈번하다 못해 당연한 정도였다. [35] 스탈린 본인도 제국 시대에 시베리아로 유배형을 받은 적이 있으니 아이러니한 케이스. 상술하듯 제정 시대인지라 제법 편하게 지내서 현지 소녀를 꼬셔서 사생아까지 만들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에 보면 이 점을 들먹이며 감옥 생활이나 시베리아 유형 생활이나 여러 면을 통틀어 봐도 차라리 박해받던 제정 러시아 시절이 나았다며 증언하는 고참 볼셰비키 당원이 나온다. 그 또한 대숙청 시기 애꿎게 휘말려 루뱐카에 수감된 신세였고 이후 굴라크에 끌려가게 된다. [36] 여기서 더 나아가 판사들이 커리어를 쌓기 위해, 혹은 보석금을 뜯어내기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호주에 보내버리는 일도 종종 나타났다. [37]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저/ 서해문집 [38] 다만, 집으로 가는 길의 경우는 꽤나 과장된 면이 없지않은데, 영화에서 주인공인 전도연은 현지 프랑스인 경찰들의 가혹한 학대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단순히 마약운반책으로서의 혐의만 받던 사람인데다 프랑스의 주요 우방국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점때문에 실제 주인공은 상당히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물론, 무죄로 밝혀져 석방되기까지 대한민국 외교부 그녀를 내내 나몰라라한데다, 교도소 문서의 프랑스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교도소 시설이 엄청나게 열악했던지라, 간수들이 융숭한 대접을 해준 것과는 별개로 심리적으로는 엄청나게 압박이 심했다고 한다. [39] 일본의 경우는 민자기숙사 및 레지던스 임대료가 비싸 기숙사에 살지 않고 신칸센 정기권으로 통학하는 수요도 많아서, 시즈오카의 경우는 신칸센 정기권 금액의 1/3을 거주민에게 지원하고 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58
, 2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58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