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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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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타격의 정도2.2. 여성에 대한 장형 집행2.3. 장형을 받은 인물2.4. 매체에서의 등장
3. 장형과 유사한 형벌
3.1. 신장3.2. 난장
4. 기타

1. 개요

장형() 동아시아에서 행해지던 전근대의 형벌이다. 오형(五刑), 즉 태(笞)-장(杖)- 도(徒)- 유(流)- 사(死) 중 2번째로[1], 죄인을 나무로 만든 굵은 회초리[2]로 볼기를 치거나 의자에 묶어놓고 정강이를 치는 형벌이다. 형벌의 강도가 태형의 한단계 위이므로 매질도 더 많이 때리고 매도 더 두껍다.

2. 상세

장형은 삼국사기에 '장 100번을 쳤다'는 기사가 등장할 정도로 유서깊은 형벌로, 중국에서 율령제를 도입하면서 같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도 명나라의 형법전인 ' 대명률'을 도입하여 장형도 계속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의 장형은 최소 60회에서 최대 100회까지 집행되며, 10단위로 등급이 나뉘었다. 중앙 관리의 경우 60번은 1등급을 강등당하며, 70번은 2등급... 하는 식으로 장형으로 처벌받으면 관직에서 큰 불이익을 받았다.

비슷한 형벌인 태형이 비교적 작은[3] 형구로 횟수도 10대부터 시작하는 것과 달리 장형은 60대로 시작해, 최소 처벌도 강하고, 매도 더 굵은 것을 사용하는 형벌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극에서 묘사하는 것과 같이, 장형을 집행할 때 곤장을 사용하는 것은 오류이다.

곤장이나 치도곤은 군대나 기관에 관련된 죄인을 벌하는 특수한 형벌인 '곤형'을 집행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형구로, 곤장을 사용하는 곤형은 태-장-도-유-사로 구분되는 오형과는 별개의 형이다. 장형에 쓰이는 '장'은 기본적으로 태형에 사용되던 '태'와 같은 회초리이되 길이와 굵기만 좀 더 커진 것이다.[4] 곤장이 장보다도 훨씬 강도가 심했으며, 그래서 곤형은 도적을 토벌할 때나 군법을 어긴 자를 처벌할 때 등 일반적이지 않은 영역에서만 제한적으로만 사용하게 한 것이 원칙이다.

물론 전근대 사회의 한계로 인해 왕의 눈길이 닿기 어려운 촌동네인데다 사또 또한 비양심적이고 불량한 인물이라면 처벌이 규정보다 강해지기 일쑤였으며, 사사로운 감정으로 인해 태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 장을 쓰거나 장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신장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렇게 원칙을 어기고 형을 남용하다가 발각되어 처벌을 받은 지방관들에 대한 기록이 꽤 자주 보인다. 사극의 고증오류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는 셈. 그러나 적어도 법과 원칙이 지켜져야 할 자리(왕이 직접 참관하는 자리라던가)에서 장형을 곤장으로 올려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도형이나 유형 혹은 사형에도 병과되어 본 형을 집행하기 전에 장형을 집행했다. 기본적으로는 십자형틀[5]에 묶어서 집행하되, 천민과 악질 범죄자는 그냥 바닥에 엎어놓고 집행했다고 한다. '귀양 가는 양반들은 전부 장을 맞고 간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실제로 사대부들의 경우 속전이라 하여 돈으로 형벌을 대신하는 게 보통이었다.[6] 대역죄 급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죄목이 아닌 이상 사대부가 장형을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 실제로 형벌은 대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어 장형이나 태형을 받는 건 보통 평민과 천민들이었고 사대부나 그 아녀자들이 장형을 당하는 경우는 사화급 사건이거나 왕이 특별히 속전을 금지하고 형을 받도록 명령하는 경우[7]가 아닌 이상 없었다.

지방관아에서 잡범들 처리할 때나 쓰는 태형과는 달리 장형은 중앙에 보고가 될 정도의 중한 범죄자에게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관아에서 비공개로 처리될 때가 많은 태형과는 달리 공공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집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왕명으로 장형이 집행될 때는 주로 종루 거리에서 시행되었다.

장형은 국가나 적어도 지방정부에서 하는 공식적 형벌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집행된 것은 장형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런 경우는 모양만 비슷하게 흉내낸 것이지 그냥 폭행이다. 징역형 대신에 창고에 범죄자를 가두는 것을 집어넣는 꼴이다. 사사로이 매질하는 행위라 하여 사매질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꿇어앉힌 상태에서 남녀구분없이 웃통을 벗긴 후 등짝을 치는 방식과 바닥에 大자로 엎어놓고 볼기를 치는 방식으로 시행했고 치는 매는 대나무로 다발을 만든 걸 주로 사용했다.

2.1. 타격의 정도

강도는 엄청 셌다. 가상 매체에서야 개나 소나 당하는 가장 흔한 형벌로 나오지만, 엉덩이를 맞는 그 아픔이 어찌나 심했던지, 사람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사… 살려 으악!! 주…줍쇼 끄악! 아이고!" 하면서 하나같이 GG를 쳤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매가 심하게 아픈지라, 가장 낮은 60번만 당해도 초주검이 되고, 장 100대 수준까지 되면 사망까지 이를 수 있는 정도였다. 따라서 사형 같은 것을 집행하지 못할 때, 대신 합법적으로 사람을 저세상에 보내버릴 필요가 있을 경우 가장 빠르고 확실한 형벌로서 정치적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고려 말엔 정몽주 정도전 등 역성 혁명파를 숙청하기 위해, 유배된 정도전 등을 장형으로 죽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방원(태종)의 정몽주 살해로 실패하고, 정도전이 똑같은 방법으로 이숭인 등 정몽주 파의 인물들을 죽여 보복하였다. 참고로 이런 경우는 당연히 속전으로 깎는 걸 못하게 명시해놓는다. 숙종때에는 기사환국 당시 인현왕후의 폐비를 반대하던 문신 박태보가 심한 장형, 압슬형을 받고 진도로 유배가던 중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살아도 허리 아래로 망가져 발기부전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생겼다. 여자도 이런 식으로 불임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장형을 당하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는 대부분 골반 골절 등으로 인한 사망에 가깝고, 집행 후 옥이나 유배 중, 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사망한 경우는 대부분 근육 파괴로 인한 급성 신부전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횡문근융해증이라는 무서운 병이다. 장으로 인해 광범위하게 근육세포가 파괴되면서 세포 내에 있다 터져나온 미오글로빈이 콩팥에 과다하게 축적되어 급성 신부전이 발생하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사고 등으로 무거운 물체에 깔린 사람의 주된 사망원인 중 하나다.[8] 급성 신부전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장형 집행후 터진 상처부위의 2차 감염으로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장을 맞다가 괄약근에 힘이 풀려 대소변이 새어나와 상처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개발되지 않은 전근대였기에 세균의 감염이 빠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었을 때 보통 '장독(杖毒)이 올라 죽었다'고 말했다. 민간에서는 장독을 치료할 요법으로 푸세식 변소에서 삭히고 삭힌 똥물을 생으로 먹였다고 한다. 독은 독으로 해소시켜야 한다나.

이렇게 대미지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집행 중에 몇 대 때렸는지 까먹어서 더 많이 치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 방!" "두 방!" 외치면서 치거나,[9] 활줄에 산가지를 매달아 한 대씩 칠 때마다 옆에서 하나씩 셈한다거나.[10]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에 보통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장형을 치르게 되면 돈을 받고 장을 대신해주는 '매품팔이'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다. 흥보가 흥부 또한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것으로 돈을 벌려고 했다가 이마저도 일감을 빼앗겨 실패하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직업이다. 간혹 형리가 살살 때리는 대가로 매품의 일부를 뜯어가기도 했다.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에 따르면 이 매품팔이를 하면서 먹고사는 부부가 있었는데, 신나게 돈을 많이 번 어느 날 남편이 "오늘은 힘들어서(아파서) 그만해야겠어"라고 하는 걸 아내가 "한번만 더 해요"라고 졸라댔다. 결국 남편은 관아로 가서 장을 한 번 더 당하다가 그대로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탔고 그 후 아내는 마을에서 쫓겨나 유랑하다 아사해서 남편 곁을 따라갔다고 전해진다.

장영실 세종대왕이 탈 가마 제작을 감독했다가 그게 부서져서 책임을 지고 장형 80번에 처해진 후 파면되었다. 관련 민담이 있는데 과장이 엄청나다. 원래 이 혐의로 장영실이 장형 100번이 집행되게 되었을 때 세종대왕이 80번으로 삭감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형리들이 거절하자 세종대왕이 임금으로서 매우 파격적인 발언을 하는데 꼭 100번을 채워야만 하냐? 그럼 그중 20번을 과인이 대신해주지! 라고 말해버리는 바람에 형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결국 임금을 대상으로 장형을 집행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인지라 그냥 차라리 그 20번을 삭감해서 장영실이 80번 당하게 되었다. 이에 장영실이 자신을 위해 장형을 나눠주겠다는 세종대왕의 은혜에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이 내용에 역사적 근거 같은 건 전혀 없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가마 사고로 딱히 처벌을 원하지 않았으나 신하들의 집요한 요구로 어쩔 수 없이 형을 들어줬으며, 처음부터 100대가 아니고 장형 80대였다. 또한 장형은 속전제도 때문에 사실상 곤장을 때리는 형벌이 아니라 벌금형에 가까웠으며 암암리에 존재하던 관행이 원명교체기에 공식화되어 '대명률'에 속전제도가 정식으로 자리잡는다. 조선도 초기에 명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였고 이를 훗날 경국대전으로 완성시켰기 때문에 속전제도가 당연히 있었다. 가마 사고 당시 장영실의 나이는 못해도 환갑에 가까웠는데, 정황상 속전제도를 통해 벌금형에 처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기록에는 장형 80대와 직첩회수를 끝으로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11]

2.2. 여성에 대한 장형 집행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원칙적으로 장형은 남녀 불문하고 볼기를 내놓은 뒤에 쳤다.

본시 중국에서 송나라 때까지는 태형과 장형을 가할 때는 남녀불문하고 타격부위를 벗겨놓고 치는 게 원칙이었는데[12] 원나라에 오면서 단의결벌(單衣決罰) 이라는 원칙이 생겨 여성의 경우 간통죄가 아니면 속옷 한장 입혀놓고 집행하는 방식을 채용했고 명나라 성립 이후 대명률을 통해 완전 명문화되었다.[13] 대명률을 채택했던 조선 또한 이때부터 물볼기라는 집행 방식이 시행된다.
파일:external/www.namwontheme.or.kr/73_13988237492798_3.jpg
남원시 춘향테마파크에 있는 재현모형. 완성도 높은 신장이다.
이를 이용해 최대한 덜 아프게 하려고 편법을 쓰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연산군 때 '내한매'라는 기생이 왕이 주최한 연회에서 왕이 한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했다는 죄목으로 왕의 명으로 곤장을 맞게 되자 형리에게 뇌물을 주고 속치마로 가려진 엉덩이에 미리 모피를 깔고 맞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형조참의 민효증이 혹시 옷에 무언가를 숨겼는가 의심하고 옷을 찢어서 사실을 확인한 뒤 왕에게 직접 고하였고, 혹 떼려다 혹 붙인 격이 된 내한매는 결국 안 그래도 아픈 매를 훨씬 더 가혹하게 얻어터졌다고 전해진다. 5년 후 내한매는 중종반정을 20여 일 앞두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장 100번 후 거제도로 귀양을 가며, 반정 직후 중종이 대사면령을 내렸을 때 귀양이 풀렸을 것이 원칙이었겠지만, 더 이상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장독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14]

하지만 정약용 목민심서를 보면 이는 어디까지나 규정상이었고 힘없는 평민이나 천민들의 경우 간통죄가 아닌 다른 범죄[15]로 잡혀온 여인임에도 맨볼기를 내놓고 맞는 경우가 많았다고 비판하는 서술이 있다. 때문에 차라리 장형급 범죄는 정강이 치기로, 태형급 범죄는 종아리 치기로 대체하자는 주장까지 했다.

2.3. 장형을 받은 인물


이외에 간통 등 중죄를 저지른 여성들이 엉덩이를 까고 맞았다는 기록들이 조선왕조실록에 존재한다. #

2.4. 매체에서의 등장

사극에서 이를 연기할 때는 그나마 살살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끔찍하게 아프기 때문에 장형 부분에 책같은 걸 덧대서 충격을 줄인다고 한다. 장희빈에서 숙빈 최씨를 연기한 박예진에 따르면 보호대를 착용하더라도 상당히 아프며 실제로 방송에 나오는 분량보다 많이 찍기 때문에 작중에서 선고받은 형량보다 많은 매를 맞아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무인시대에서 정선경은 방송에서 고작 10대 남직한 매를 맞았으나 실제 촬영에서는 50대를 넘는 매를 맞느라 피멍이 들었다[16].

하지만 맨살에 맞는 장면을 직접 촬영할 경우 이러한 보호대조차 착용할 수 없다. 성인 영화인 <만청십대혹형(滿淸十代酷刑)>의 여주인공 소백채는 간통하여 남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자백을 강요받는 과정에서 신장 스무 대를 맞는데, 여성도 곤장을 맞을 때 속곳마저 탈의하여 맨살의 엉덩이에 곤장을 맞게 되어있는 청의 규정을 그대로 반영하여 보호대 없이 촬영해야 했다. 엉덩이가 노출된 뒷모습만 촬영했기에 대역을 사용할 수도 있었겠으나 소백채가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며 상를 들어 뒤를 돌아보는 장면[17]이 있었기 때문에 소백채 역의 배우 옹홍은 20대나 되는 곤장을 맨살에 직접 다 맞아야만 했다.심지어, 장형이 끝나고 푸른 멍이 든 소백채의 엉덩이가 클로즈업되기도 한다. #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타인에게 자신의 몸을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되는데 남성들로 이루어진 관아에서 하의가 벗겨진 채 볼기를 맞는 것은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고통과 수치심 속에서 아랫도리가 벗겨진 채 엉덩이를 노출하여 스무대의 매를 맞는 여주인공의 비참한 모습이 실감나게 잘 묘사되었다.

마찬가지로 중국 성인 영화 <옥보단: 관인아요>에서도 기녀 소삼이 남편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볼기를 맞는다. 역시 아랫도리를 벗은 채 맨엉덩이를 노출하고 형벌을 당했기에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고 촬영했다.

여성에 대한 물볼기의 경우는 수위 문제도 있지만, 제대로 된 이해의 문제도 있어서 한번도 고증에 맞게 재현된 사례가 없다. 예를 들어 영화 방자전의 묘사를 보면 치마를 모두 입은 상태에서 물을 끼얹었기에 고증을 따진다면 명백한 오류이며 속곳(속바지, 속속곳, 단속곳 등)만 입히고 집행하고 속치마 입히고 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식 속치마는 개화기 이후에 입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도 고증오류다. 원래는 시대에 따라 다양한 속옷[18]을 입었는데, 속바지도 상당히 많이 껴입은 탓에[19] 속치마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일단, 전근대시대 여성의 속옷이 몇 겹이나 된다는 점을 이용해서 상술한대로 치맛속에 뭘 숨겨서 맞는 꼼수가 실제로 있었는데, 드라마 최강칠우에서는 주인공인 최칠우의 양어머니와 양할머니가 관아로 끌려가서 장형에 처해지자 칠우가 급히 둘의 상태를 확인하러가는데, 죽는다는 표정으로 동헌을 나오다가 치맛속에 숨겨놓은 거적을 빼내면서 낄낄거리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고 안도하는 개그씬이 나온다.

간혹 양반집에서 종종 행해지는 장형과 비슷한 사적제재들도 나오는데, 이는 '사매질'이라고 하며 형벌에 포함되지 않기에 매의 규격이나 탈의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한국영화 <빨간앵두 3>에서는 이처럼 계집종의 맨 볼기를 때리는 장면이 잘 묘사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정도전 이색의 제자들을 숙청할 때 이들 전원을 장형을 내리고 죽을 때까지 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나온다. 작중에서는 그 중에서도 이숭인이 장형을 당하는 장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 통상적으로 알려진 엉덩이를 치는 게 아니라 등을 후려치는 것으로 나와서, 이를 보던 시청자들을 충공깽에 빠뜨렸다[20].

천문: 하늘에 묻는다 에서 안여 파손 사건으로 의금부에 끌려온 선공감 관원들이 의자에 묶여 정강이에 몽둥이를 맞는 장형을 당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불멸의 이순신 50회에서는 화약 폭발사고로 인해 포수들이 집단탈영을 시도해 주모자는 목을 베고 나머지는 각각 장 80대를 쳐서 군율의 지엄함을 세웠다.

3. 장형과 유사한 형벌

3.1. 신장

신장(訊杖)은 주로 죄인을 심문해 자백을 받아내려 할 때 사용하였다. 신장은 당연히 위력은 장보다 강했다. 일반신장 추국신장 삼성신장으로 나뉘며, 삼성신장 정도 되면 역모 사건 등 중죄에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경빈 박씨 처소의 나인들이 작서의 변 사건 때문에 체포되어, 처음에 좋게 물어봤을 때 자백을 안 해서 바로 형틀에 묶여 곤장으로 정해진 수 없이 무한정 얻어터져서 엉덩이가 완전히 터지고 찢어져서 치마가 피로 적셔져 물드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사용된 게 신장이다. 사극에서 넙적대한 형구로 엉덩이를 맞는 장면이 흔하게 나오게 된 것은 신장도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 생긴 모양은 곤장이랑 비슷하기 때문.

신장은 보통 중국에선 볼기를 치는 게 맞으나 조선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에 신장으로 정강이를 치게 되어 있었다. 형벌용이 아니라 심문 중에 집행하는 고문이었기에 죄인을 엎어놓은 상태에서는 증언을 듣기 힘들었기에 죄인을 의자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진술과 고문을 함께 시행하는데 편하기 때문이었다. 본래 1차에 30까지만 치고 한 번 고문을 하면 3일 내에 다시 시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나 역모 사건의 경우 무한정 집행이 가능했다.[21] 다만 고문을 할 때에는 심문 담당 관원이 멋대로 하지 못하고 항상 왕에게 보고해서 허락받아야 했다. 그런데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도 모든 관리들이 FM대로 고문이나 형벌을 집행했을까 라고 묻는다면 글쎄... 그러나 역모건의 경우 한양 의금부로 압송해서 심문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당대 불법 고문 형태 중 하나로 곤장의 타격면으로 엉덩이를 마찰해 피부가 벗겨지게 만드는 고문이 있었다고 하니, # 신장이 됐든 뭐가 됐든 들고 와 죄인을 엎어놓고 엉덩이를 치는 고문은 알음알음 자행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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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기록사진 중 신장 집행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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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난장

그리고 역시 도둑을 고문하는 용도로 의금부 수준에서만 진행된 형벌로 난장이라는 형벌이 존재한다. 역시 매는 신장과 같은 수준으로 보이는데, 이 형벌은 두 발을 묶은 다음에 들어올려서 고정시켜두고, 맨 발바닥을 후려친다. 역시 고문용이므로 가차가 없어서, 정약용을 난장을 일컫어서 발가락을 자르는 형벌이라고 불렀다. 이걸 맞다보면 발가락 정도는 전부 떨어져나갔던 것으로 보인다.[22]

4. 기타

민속촌이나 관아 건물등의 문화재에는 방문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형틀과 장을 모형으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 형틀이 십자가와 비슷해 보여서 그런지...
파일:909bWS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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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이 형틀에 엎드리지 않고 십자가형 마냥 바로 누워서 형을 당하는 시늉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시늉만 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선 끔찍해 보일 수밖에 없다. 형틀 위에 십자가마냥 누운 상태에서 장을 내리치면 과연 어디에 맞을까?

장형이 사형의 한 방법으로 돌변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장살형이다. 죽을 때까지 장형을 집행하거나 사람이 장형을 받다가 중간에 사망하면 장살형으로 돌변해버린다. 이숭인, 김덕령, 임경업, 김홍욱이 장살형으로 사망했으며, 조심태는 행패가 심했던 현륭원 관리인 대장을 왕명에 의한 곤장 한 번만 쳤는데 수를 써서[23] 장형을 장살형으로 변질시켰다. 물론 이에 대한 징계는 없었다. 순화군 같은 싸이코패스 살인마는 장살을 아주 즐겨썼다.

혹은 합법적인 정적 제거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다. 높으신 분들의 눈엣가시 같은 인물을 그냥 죽이자니 이목이 신경 쓰이는 탓에 사형을 장형으로 깎아주면서 인정을 베푸는 척하는데 여기엔 이미 형벌 집행인과 말을 맞춘 상태라 그냥 죽여버리는 무지막지한 집행이 진행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보면 정도전이 정권을 잡은 후 반대파인 이숭인의 장형 집행인에게 일을 잘 처리하면 공신의 말석이라도 얻을 것이라고 언질을 준다. 이후 이숭인은 등딱이 피걸레가 되다시피 해서 죽는다.[24]


[1] 마지막이 死인것만 봐도 알겠지만 뒤로 갈수록 강한 형벌이다. [2] 대두경 3분 2리(약 1 cm), 소두경 2분 2리(약 0.7 cm), 길이 3척 5촌(약 116 cm) [3] 대두경(두꺼운 쪽) 2분 7리(약 0.9 cm), 소두경(얇은 쪽) 1분 7리(약 0.56 cm), 길이 3척 5촌(약 116 cm) [4] 애초에 '장(杖)'이라는 한자가 '지팡이'를 뜻하는 한자이다. 넓적한 모양이 아니라 단면이 둥근 것을 나타내며, 더 굵어 봐야 '몽둥이'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는 한자일 뿐이다. '곤'과는 형태부터 완전히 다른 것이다. [5] 실제로는 십자형이 아니라 T자형인 경우도 사진이나 그림에서 많이 확인된다. [6] 조선 초기에는 오승포를 각각 18필, 21필, 24필, 27필, 30필을 냈으며, 점차 속전의 양이 줄어들어 정조 때 간행된 속대전에서는 면포 1필 7자, 1필 14자, 1필 21자, 1필 28자, 2필 또는 돈으로 4냥 2전, 4냥 9전, 5냥 6전, 6냥 3전, 7냥을 내게 하여 그 양을 줄였다. [7] 이를 결장(決杖)이라 한다. [8] Crush syndrome. 압궤 증후군이라고 불린다. 사고 시에 장시간 끼어있던 다리를 빼내지 않고 절단하는 것은 이로 인한 사망을 막기 위함이다. 한두시간의 경미한 경우도 만약을 대비해 링거를 통해 약액으로 유해물질을 해독하기도 한다. 태양의 후예에서 강모연이 작업반장을 구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9] 대왕세종 82회에서 장영실이 장을 맞을 때에도 그랬다. [10] 싱가포르의 경우 오늘날까지 태형을 집행하는데 그 양상이 위의 설명 등과 유사하다. 실제로 싱가포르에서 강도살인을 한 한 인도인이 징역형과 태형 60번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물론 이럴 경우에 태형은 할부로 집행한다. 의사 참관하에 울며불며 이러다 죽겠다 싶으면 치료하고 몇 달 후 상처가 아물면 나머지를 집행한다. [11] 출처 [12] 때문에 진서 형법지에는 위 명제 조예가 여성의 볼기를 노출시키는 게 좀 그랬는지 당시 사회관념상 그나마 좀 노출시켜도 괜찮을 듯한 상체를 벗겨서 채찍질을 하라는 규정을 만들라는 기록도 나온다. [13] 다만 조선에서 간통죄가 아님에도 여자가 벗고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듯이 명나라에서도 이웃 간에 사소한 다툼이 벌어지면 상대방 부녀자를 간통죄로 몰아 관가에 허위 고발한 뒤 관원을 매수하여 맨볼기를 내려치는 경우도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14] 한편 매의 눈 민효증은 이후에도 충실히 연산군 딸랑이 노릇을 하다가 중종반정 직전 꼽사리로 참여해 정국공신 3등에 녹훈된다. 사관들도 이 사람을 안 좋게 봤는지 전술한 내한매 얘기를 예로 들며 민효증은 평소 사람이 각박하고 인정머리없으며 연산군 수족 노릇하다가 반정이 일어나자 기회주의적 처신을 보내 사류가 천하게 여겼다 라고 비난했다. [15] 이 경우 장형이 아니라 태형이며, 여자는 속곳 빼고 모두 벗긴 후에 물을 끼얹고 쳤다. 이를 가리켜 물볼기라 한다. 속곳 한 겹만 남기고 쳤다고 하는데, 이때 말하는 속곳이 다리속곳인지, 단속곳인지, 속속곳인지, 속치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6] 검정 고무신 보릿고개 시련기 편을 보면 이말룡이 실직한 후에 사극에서 장형에 처해지는 역할을 맡을 알바로 취직하여 곤장을 맞는 장면이 있는데, 실수로 보호대없이 그냥 촬영에 들어간 바람에 말 그대로 혹독하게 두들겨맞고 집안에서 한동안 누워지내는 것으로 나온다. [17] 매를 맞는 도중에 고개를 돌려 매가 작렬하는 자신의 엉덩이를 본다. 아마도 본인의 엉덩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18] 삼국시대에도 하의를 부풀리기 위해 많은 속옷을 겹쳐 입었다. 한복의 풍성한 모습을 연출하려면 갖가지 속옷을 많이 껴입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푸와 유사한 모습이 연출되어야 맞다. [19] 조선시대 기준으로 다리속곳 포함 하의 네 겹(다리속곳, 속속곳, 속바지, 단속곳)에서 일곱 겹(+너른바지, 무지기치마, 대슘치마), 상의 세 겹(가슴가리개, 속적삼, 속저고리)을 껴입었다. [20] 사실 장형이든 태형이든 간에 고려시대까지는 무조건 등을 치는 식으로 집행이 되었다. 정도전에서의 묘사가 고증에 맞는 셈이다. 당연히도 이렇게 맞으면 척추가 부러지거나 내장이 손상되어 사망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정치범을 제거하기위해 선고하는 사실상의 사형이 되어버렸다. 결국 조선 초에 엄벌주의를 반대하던 세종대왕의 명령으로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큰 엉덩이를 맞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21] 역모 사건의 경우에도 하루에 1차례만 하고 다음날에 다시 1차례를 하는게 상례였지만 이것 또한 왕 마음이라 인조가 궁중에서 발생한 저주 사건에 연루된 궁녀들을 추국할 때 신장을 30 치고 바로 압슬을 가하고 다시 신장 30을 치는 식으로 하루에 3차례의 고문을 가한 적도 있다. [22] 타격으로 떨어져나간다기보단 발 뼈가 부서진 뒤 괴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23] 여러번 치는 시늉만 해서 안심시킨 뒤 갑자기 한 번 쳐서 죽였다. [24] 당시 기준으로 장형은 등짝에 가하는 게 원칙이었다. 참고로 원래 이 방법은 정몽주가 정도전 일파를 처리하려던 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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