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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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리히 에른스트 파울 호네커 Erich Ernst Paul Honeck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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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2년 8월 25일 | ||
독일 제국 자를란트 노인키르헨 | |||
사망 | 1994년 5월 29일 (향년 81세) | ||
칠레 산티아고 | |||
재임기간 | 제3대 국가평의회 의장 | ||
1976년 10월 29일 ~ 1989년 10월 18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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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공산주의자이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전 서기장, 독재자.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소속 정치인으로, 동독의 서기장 중 가장 장기 집권[1]하였으며 동독을 대표하는 최고지도자로 꼽힌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912년 8월 25일 독일 자를란트 주 노인키르헨에서 광부이자 공산주의자인 빌헬름 호네커(Wilhelm Honecker, 1881–1969)와 카롤리네 카타리나 바이덴호프(Caroline Catharina Weidenhof, 1883–1963) 부부의 4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그의 6 남매 중 첫째인 카타리나(Katharina, 1906–1925), 둘째인 빌헬름(Wilhelm, 1907–1944), 막내인 카를로베르트(Karl-Robert, 1923–1947)는 다들 요절했고 셋째인 프리다(Frieda, 1909–1974)와 다섯째 게르트루트(Gertrud, 1917–2010)만이 에리히와 함께 오래 살아남았다.공산주의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10살 생일 직후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비벨스키르헨(Wiebelskirchen) 지구 소년단에 들어갔다. 14살 때는 독일 공산당(KPD)의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으며[2] 1929년에 정식 공산당원이 되었는데 당시 그의 정식 직업은 슬레이트공이었다고 한다. 그가 공산주의에 경도된 또 하나의 이유가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거주하던 자르 지방이 프랑스의 군정 지구가 되어 프랑스군의 주둔을 경험한 탓이라는 설도 있다. 독일 공산당원이 된 이후 호네커는 1930년 8월부터 1931년 8월까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유학했다. 소련 유학은 호네커에게 큰 영향을 줬고, 그때가 18~19살 때였다.
2.2. 나치 독일 시절의 행보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정권을 장악한 뒤 공산당 등 다른 정당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불법화된 공산당 활동을 그는 이 시기에 도리어 열성적으로 시작했고 곧 나치 독일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혀 1933년에는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금방 풀려나기도 했다. 이 시기 호네커는 고향 자를란트에서 히틀러 정권에 맞서는 레지스탕스를 조직했으며, 그러다 1935년 고향 땅이 독일에 재합병되자 프랑스로 달아났다.[3] 프랑스로 달아난 이유는 다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기 위한 준비였는데, 실제로 호네커는 프랑스에 들어간지 얼마 안된 시점에 다시 인쇄기 한대를 가지고서 불법으로 베를린에 들어갔다가, 1935년 12월 결국 게슈타포에 의해 다시 체포된 뒤 반란 모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아 10년 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공산당원 중에는 제법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독일 정부로부터 수 차례의 전향 요구를 제의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제2차 세계 대전 중 수감되어 있던 수용소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던 찰나에 아슬아슬하게 이감되어 살아남는 등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하고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호네커는 나치 친위대원들이 달아난 후에야 브란덴부르크-괴르덴수용소에서 풀려났는데, 1945년 4월 27일에 수용소를 점령 후 해방시킨 소련군에게 구조받고 베를린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2.3. 전후 장기 집권
석방된 그는 곧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과 합류했는데 당시 소련군에 소속된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그들의 점령 지역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기 위해 소련 국내에서 훈련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유독일청년단(Freie Deutsche Jugend; FDJ)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 되어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단장을 지냈다.▲ FDJ 시절의 호네커. 1946년에 찍힌 사진이다.
1946년 독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동독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소련의 압력으로 통합해 신 정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을 결성하도록 막후에서 힘썼다. 1951년 6월 26일 서독의 아데나워 정부가 자유독일청년단 조직을 금지하자, 서독 청년들이 자유독일청년단 금지령에 반항했다. 1952년 5월 11일 기독교 청년조직을 포함한 대중시위가 일어나자 서독 경찰은 대중에게 총을 발포하여 두 명이 중상을 입고 21살 청년 한 명(필리프 뮐러)이 죽었는데, 이에 대해 호네커는 기만적인 아데나워 패거리를 몰락하게 함으로써 뮐러에게 복수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다. SED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성장했고 1967년에는 동독의 지도자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계자로서 주목받았다. 1971년 SED 당수와 국가평의회 의장을 겸임하게 됨으로써 그는 당과 정부를 모두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 1958년, 제5회 SED 전당대회 당시 호네커의 모습. 뒤에 있는 사람이 그의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다.
1970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에게 울브리히트 축출을 건의했고 결국 이듬해에 정치국원 13명과의 연명을 통해서 이를 관철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울브리히트의 뒤를 이어 사회주의 통일당의 제1서기로 선출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1976년 10월 29일 발터 울브리히트의 후임자였던 퇴역 육군 대장 빌리 슈토프 장군이 집권 3년만에 물러나면서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면서 당수와 국가원수를 모두 독점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4]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동독은 상대적으로 억압적인 국가 중 하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유럽의 소련 위성국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렸다. 그는 서독과의 무역 및 관광 교류를 증진시켰고[5] 그 대가로 서독의 대대적인 경제 원조를 받았고 이를 통해 1980년대에 폴란드와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등이 잇따라 외채 문제에 허덕이면서 경기침체에 시달렸을 동안 동독만큼은 외채에서 자유로울수 있었다. 호네커 시절 동독이 공산권 국가 중에서 가장 잘 살았던 것은 서독에서 엄청난 규모의 원조를 퍼주었던 부분도 컸다.
1970년대 동독의 호네커 정부는 주택·복지·오락에 막대히 투자했고, 노동시간은 주 40시간이었으며 1980년대 동독인들의 평균 월급은 1,021마르크였다. 즉, 평균 월급도 꾸준히 상승했고, 1987년 기준 절반 이상의 동독 가구가 자가용을 소유했으며, 모든 가구가 세탁기·냉장고·텔레비전을 적어도 한 대는 보유했다. 또한, 1970년대 초중반 기준 서독의 4인 가구가 순수입에서 최소 21%를 집세로 지출했지만, 동독의 4인 가구의 집세 지출은 4.4%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파트를 포함한 집들의 수준도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질적으로 향상됐다. 1970년에 이르러서 56.4%의 동독 가구가 냉장고를 소유해 28%인 서독을 웃돌았을 정도.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등 소련 지도자들과의 관계는 대체로 원만한 편이었다. 의외로 공산권 국가 지도자들끼리는 관계가 삐거덕거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소련 지도자는 물론이고 다른 공산권 국가 지도자들과 두루 원만한 편이었다. 일단 동독이 공산권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는 인식이 있어서 공산권에서도 제법 목에 힘주고 다닐 수 있었다.
독일의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 사생활 영역은 복잡한 편인데 그래도 라이벌인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를 지낸 사회민주당 출신 빌리 브란트나 게르하르트 슈뢰더보다 난잡하지는 않았다. 그는 총 세 번 결혼했고 세 번의 결혼 생활 이외에도 다른 여자와 외도하여 낳은 사생아가 있다.
▲ 베를린에서의 김일성과 호네커. 둘은 1912년생 동갑내기였고 1994년에 죽었다.
김일성과 상당히 돈독한 사이로 직접 북한에 2번 다녀왔으며, 김일성도 동독에 다녀와서 3차례 정상회담을 개최했는데 서로를 각각 유럽과 아시아의 공산주의 전초기지라고 추켜세우면서 경제, 과학, 교육 분야 협력을 확대했으며 김일성은 호네커는 자신과 동갑내기 친구라고 특별한 우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호네커는 남한의 위상이 올라가자 북한 정무원 부총리 겸 외교부장 김영남이 직접 방문해서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아 달라고 읍소함에도 정치국 회의에서 결정할 일이지 서기장의 권한 밖이라고 둘러 거절하고 끝내 참석했으며, 남한과의 수교까지 모색하였으나 이전에 동독이 붕괴되면서 무산되었다.[6]
2.4. 몰락
1980년대 말 유럽의 공산 국가들이 차례로 몰락하자 그는 나름대로 위기 의식을 갖기 시작했으나 공산주의 체제를 더는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9년 그는 매년 10월 7일에 이뤄지던 독일민주공화국 수립 기념 행사(당시에는 40주년)를 역대 가장 성대한 행사로 개최하여, 공산주의 체제가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건국 40주년 기념 행사 당시 국가인민군을 사열하는 호네커. 국방부장관 겸 동독 육군 장군 하인츠 케슬러(Heinz Keßler, 1920.01.26 - 2017.05.02)의 왼쪽에서 경례 중인 중절모 쓴 사람이다. 왼쪽에 있는 사람은 소련의 서기장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이다. 사진에선 짤렸으나 당시 북한 대표로 정무원총리 연형묵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정권 반대 시위가 끊이지 않은 데다 퍼레이드 참석차 방문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그와 회동한 자리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대열에 동참을 호소했으나 그는 거부 의사를 밝혔으며 고르바초프는 거부당한 것에 대한 반격으로 그의 축출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10월 18일 에곤 크렌츠에게 당 서기장 및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사임했다.
2.5. 말년
통일 후 일단 베를린의 소련 육군 주둔군 기지로 도피했는데 독일은 호네커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소련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자국으로 망명시켰다. 그러나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소련이 붕괴된 후 이듬해 구 공산권에 대해 부정적이던 러시아 연방의 보리스 옐친 정부의 영향으로 더는 보호받지 못하고 1992년 독일로 송환되었다. 이후 1961년 에리히 밀케, 빌리 슈토프와 함께 베를린 장벽 건설에 동의한 혐의, 1974년 서독으로 탈출하려는 동독 시민들에게 화기를 사용하여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려 서독으로 탈출하려던 동독 시민 192명을 즉결처분, 사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이 재판 자체가 국제법적으로 동서독이 서로 다른 나라였던 시절 최고지도자의 통치행위를 흡수통일 이후 책임을 물어 재판하는 것이라서 큰 논란이 되었다. 게다가 암투병으로 인해 당장 사망해도 이상치 않은 중환자를 심리적으로 옥죄는 가혹한 행위였기 때문에 그의 평판이 최악이었던 당시에도 재판 지속에 반대하는 여론이 우위를 점했다고 한다.[7]그는 1991년에 북한 망명을 타진하기도 했는데 김일성은 즉각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호네커를 북한에 데려와 편한 여생을 보내게 하라고 지시했고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고려항공 특별기까지 대기시켰지만 독일 측에선 만약 호네커가 북한이나 칠레로 망명하면 이를 비우호적 행위로 간주한다고 엄중 경고를 했고 이미 소련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러시아 측에서 망한 독재자인 호네커나 위성국 격의 독재자인 김일성의 체면 따위를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 결국 호네커의 망명이 실패하자 김일성은 크게 안타까움을 표했으며 러시아가 독일의 돈에 눈이 멀어서 옛 동지를 팔아넘겼다고 비난했다. 호네커를 태우지 못한 고려항공 특별기는 12월 17일 쓸쓸하게 평양으로 철수했다.
1992년 서독에서도 엄청난 논란이 이어지던 가운데 연방재판소의 허가 속에서 호네커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서독 검찰총장 측은 무려 800쪽에 달하는 기소내용을 제시하였고 호네커는 나치 시절 자신이 투옥되었던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92년 12월 3일 법정에 선 호네커는 "나와 내 동지들을 비롯한 범죄적 개인들"이라는 말을 거듭하면서 빈정댔고 재판부에게 "이번 재판이 패자들에 대한 승자들의 정치적 재판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이번 재판이 정치적으로 그릇된 동기가 부추긴 역사적 허위진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위해서는 장님이거나 아니면 과거에 사건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외면해야 가능할 것."이라고 훈계하고는 더 이상의 진술을 거부했다. 구 동구권 지역에서는 반나치 투사였던 호네커를 석방하라는 호네커 지지 시위가 일부 벌어지기도 하였다.
호네커의 변호인은 독일 연방의 기본법에 따라 중병에 시달리는 호네커에 대한 법적으로 보장된 보호를 요청하였다. 서독 여론은 호네커를 동독 정권 범죄의 알파요 오메가로 여겼기 때문에 이러한 변호인의 주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이었으나 연방 사법부는 변호인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호네커의 종양과 간의 상태에 대한 검진에 들어갔다. 호네커가 죽어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재판장 한스게오르크 브로이티감(Hansgeorg Bräutigam)은 아주 유명한 반공주의자로 호네커의 건강 상태와 관계없이 그를 재판에 회부하고 싶어했으나 베를린 헌법고등법원은 1993년 1월 12일 재판을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재판부는 호네커의 건강상 그에게 어떠한 실질적 처벌을 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약 호네커를 계속 재판하는 것은 동독 정권이 자국 시민들을 탄압한 것과 같은 행위가 된다고 해석하여 독일 법률에 따라서 재판을 폐기하기로 하였다.
재판을 받으며 수감 생활을 하던 1993년 암으로 인한 병 보석 처리된 뒤 반 년 후에 딸이 살고 있던 칠레로 망명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이듬해 5월 29일 수도 산티아고에서 사망했다. 호네커의 사망에 북한에선 유족에게 "조선의 통일 정책을 적극 지지 성원해 주었는데 말년에 불행하게도 타국에서 서거한 데 대해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는 내용의 조전을 보냈다. 사후에 그 회고록은 통일독일의 기성 출판사들이 출간을 거절해서 어느 듣보잡 출판사가 출판하게 되었는데 한창 통일 후유증이 흉흉했을 때라 구 동독 지역에선 꽤 팔려 출판사 입장에서 대박을 냈다고 한다.
실각 이후 그는 민주사회당(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에서 제명되었고 그와 그의 부인은 1990년에 새로 결성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여 1994년에 죽을 때까지 당원으로 머물렀다.
3. 평가
차라리 호네커 때가 좋았다. 그 시절에는 적어도 일자리가 있었고 가족들이 살 집이 있었다.
구 동독출신 노숙인[8]
구 동독출신 노숙인[8]
에리히 호네커는 자기 체제에서 생활수준이 향상한 것에 근거 있는 자부심을 느꼈다. 공급난은 여전했으며 서방에 비하면 기술력도 여전히 뒤떨어졌으나, 겉보기에 독일민주공화국은 생활수준이 꽤 높고 안정된 나라 같았다. 완전 고용이 계획적으로 실현된 데다 주거, 식품, 문화생활, 보육에 보조금이 뒷받침된다는 것을 먹고 사느라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서독이 실업률 8%로 애를 먹고 직업이 있는 사람들도 일자리 안정을 우려하는 동안, 동독 가구는 갑자기 수입을 잃는다거나 집세를 내지 못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1987년에 절반 이상의 동독 가구가 자가용을 소유했고, 모든 가구가 세탁기·냉장고·텔레비전을 적어도 한 대는 보유했다. 일반 경로로 구하기 힘든 상품은, 서독의 친척이 게넥스 상품안내서를 직접 주문해 주거나 인터숍에서 쓸 통화를 제공해 주면 얻을 수 있었다. 적재적소의 친구와 가족도 도움이 되었다. 1980년대 중반 독일민주공화국의 경제적 결점들은 이면에서 보면 위기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나, 적어도 동독인들이 느끼기에는 일상을 뒤흔드는 실존적 위협이라기 보다 은근한 위기감 정도였다.
카트야 호이어[9], 송예슬 옮김, 장벽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서해문집, 2024, 516~517쪽.
카트야 호이어[9], 송예슬 옮김, 장벽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서해문집, 2024, 516~517쪽.
에리히 호네커는 냉전 종식 이래로 현재까지 일반적으로는 독재자로 평가되며, 동독의 멸망을 막지 못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냉전 종식 당시 호네커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무능한 독재자, 망국의 지도자' 정도였다. 그러나 요즘은 그나마 철권 통치의 강도가 다른 공산권 국가들에 비해 유의미하게 약했고 국가 경영도 나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슈타지를 운영하고[10]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의 공산권 특유의 인권탄압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아시아권의 공산주의 국가들에 비해서는 인권 상태가 많이 나았다. 현재는 폴 포트, 김일성, 마오쩌둥 등 극한의 억압을 자랑하는 독재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호네커 일가의 생활 수준은 당시 서독의 중산층 정도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많다.[11] 물론 살 돈이 있어도 소비할 물품이 부족해서 오랫동안 대기만 타고 있던 대다수 동독 시민들에겐 이 정도도 엄청난 특권으로 보였겠지만 동독 시민들의 생활 수준이 의식주 걱정할 일은 없었다는 점을 보면 상대적인 차이로도 호네커는 타 독재자들보다 검소하게 살았다. 호네커가 국가원수임을 감안하면 이오시프 스탈린이나 호치민,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연상될 정도로 기이하게 사치를 꺼렸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실각 후 그간 배정받았던 주택, 가구, 일상용품 등이 압류당했고 아예 개인 계좌도 사용 정지되면서 사실상 전재산을 몰수당하였는데 업무 관련 서류나 사진, 편지 같은 사적인 물품 정도가 망명지인 칠레에 가져갈 수 있었던 전부였다고 한다.[12] 참고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제외하면 동구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억압적이긴 했어도 호화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13]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1980년 사망 직후에 남겨진 개인 재산이라곤 오래된 양복 한 벌이 전부였다.
북한에서는 '호네케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사회주의 신념이 강했던 지도자라고 고평가하며 그런 호네커의 망명을 받아주려 한 김일성, 김정일이 국제주의적 의리에 충만한 위대한 지도자라고 결국에는 김씨네 숭배에 활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막판에 한국과 수교하려고 했음에도 끝까지 그를 친우로 여겼을 만큼 사적으로 사이가 좋았던 김일성의 호네커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를, 김일성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옳다는 무오설에 입각한 북한의 주체 사상 특성상 이를 함부로 뒤집는다는 건 김정은조차 쉽게 하기 어려운 짓인 탓도 있다.
4. 매체에서
독일 통일이나 동독의 말기 모습을 다룬 영화에서 자주 보이거나 언급되는 편이다.[14]- 영화 굿바이 레닌에서 호네커가 하야하면서 호네커 초상화가 즉각 비내리는 길거리로 버려지는 모습이 나온다.
- 타인의 삶에서는 호네커와 태양 농담을 눈치 없이 그루비츠 중령 앞에서 지껄이다가 좌천당하는 불쌍한 소위가 나온다.
-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 등장하는데 시대착오적인 악랄한 독재자로 묘사된다.
- 2022년 독일 ZDF 방송국에서 몰락한 호네커와 그의 아내 마르고트가 사회주의통일당 정권 붕괴 후 통일 직전의 과도기 동안 기독교 목사 집에서 지낸 일을 소재로 호네커와 목사(Honecker und der Pastor)라는 TV 영화를 제작하였다. 에드가 젤게가 호네커 역으로 분했다.
- 아포크리파의 동독 파견 에피소드에서 언급된다. 작중 악마에 씌인 아이의 아버지가 동독인인데 호네커의 최측근이라 사상적 적국인 바티칸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5. 이야깃거리
- 그의 아내 마르고트 호네커(Margot Honecker)[15]는 동독의 교육부 장관이었고 2016년 5월 6일 사망했는데 죽을 때까지 동독 체제의 신념을 가진 채 칠레에서 사망하였다. 기사
- 1987년 서독 방문 시 고향 노인키르헨을 방문해 40년 만에 여동생 게르트루트 홉슈테터(Gertrud Hoppstädter)와 상봉하기도 했다. 노인키르헨은 이전에도 동독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 가운데 하나로, 이 곳에 한해서는 서기장 고향의 견학 명목으로 서독 방문 허가가 상대적으로 쉽게 나온 편이다. 물론 이 자체가 서독 여행을 하거나 서독에 남겨둔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동독 사람들의 뻥카임은 동독 당국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호네커 본인이 고향에 여동생을 두고 온 실향민이라서 일부러 모른 체 했고 당국에서도 그의 뜻에 따라 여행객으로 위장한 탈동자가 아닌 이상 웬만하면 여행 허가를 내주었다.
- 그의 경호원이자 집사였던 로타어 헤어초크(Lothar Herzog)의 회고에 따르면 정치국원 시절에는 술과 담배를 매우 즐겼지만 서기장으로 선출되고 나서 즉시 술담배를 모두 끊었다고 한다.
-
호네커가 호평을 받는 근거 중 하나가 그의 상대적인
성문화적 비억압성이다. 실제로 성문화는 오히려 동독이 서독보다 자유로웠다고 한다!공산주의 성진국, 사회주의 락원남녀의 성기를 모자이크 없이 드러내놓고 있거나 해수욕장을 누드 비치로 운영한 게 적절한 예시다. 서유럽은 제한된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매춘이 창궐하고 성산업이 늘어난 반면 동독에서는 1960년대에 한 여자가 3~4명의 파트너를 가지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졌다고 하며 단순히 성문화 뿐만 아니라 낙태이나 피임약 등의 문제에도 관대했다. 이 때문에 통일 당시 정작 가장 적극적인 통일 반대론자들은 바로 여성들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영상이 1987년 베를린 성립 750주년 퍼레이드 행사이다. 다른 영상으로 대체 영상에는 생략되었으나 나체주의자들이 행진하는데 호네커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장면도 볼 수 있다(...). 동양에서는 특유의 엄숙주의와 유교적 문화 때문에 성에 대한 공식적 언급이 금기시된 반면 서양에서는 어디까지나 이것을 사적인 영역으로 취급하여 "국가가 건드려서는 안 될 어떤 것"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동독의 이러한 성적, 문화적 개방성은 종주국인 소련보다 분명했던 것으로 소련은 흐루쇼프의 해동기 이후에도 공적인 성문화는 꽤 보수적인 편이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포르노물이나 성인잡지 같은 게 창간되는 일은 없었으며 서구의 성인잡지나 포로노물의 수입도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었지만 슈타지에서 포르노 비디오를 용돈벌이 목적으로 불법 제작하는 경우는 있었다. 물론지들이 뒤로 팔아먹은 거 말고 다른 루트로 밀반입했을 때는 압수, 경우에 따라선 처벌하였으며, 섹스용품 가게의 개업도 허가가 나지 않았다. -
공산주의 유머 가운데 호네커를 소재로 한 농담이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공산주의 유머/동독 문서 참조.
호네커가 모스크바에 방문했을 때, 고르바초프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일치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호네커와 함께 군사 퍼레이드를 참관한 뒤 고르바초프는 옆에 있던 어린 공산당원에게 물었다.
"너의 어머니가 누구지?"
"조국입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고?"
"바로 고르바초프 서기장 동지시죠."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니?"
"훌륭한 공산당원이 되고 싶습니다!"
이러한 소련의 모습에 호네커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불어 동독에서도 그러한 단결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고르바초프가 동독에 방문한 것이다. 호네커는 고르바초프와 함께하는 공식 행사를 마친 뒤 옆에 있던 어린 공산당원에게 질문을 했다.
"너의 어머니가 누구지?"
"조국입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고?"
"바로 호네커 서기장 동지시죠."
호네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질문을 이었다.
"그럼 너는 커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니?"
"고아가 되고 싶습니다!"[16]
호네커가 아침 일찍 집무실로 출근하였다.
창문을 열며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좋은 아침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길
"좋은 아침이에요, 친애하는 에리히!"
점심때 호네커가 다시 창문을 열고 태양에게 말하길,
"좋은 오후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러자 태양도
" 좋은 오후에요, 친애하는 에리히!"
일과 후 저녁에 호네커가 다시 창문쪽으로 가서 말하길,
"좋은 저녁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그런데 태양은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좋은 저녁이야, 친애하는 태양아... 도대체 뭐가 문제니?"
그러자 태양이 대답하길
호네커가 의전용 자동차를[18] 타고 LPG[19]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길에서 돼지가 한 마리 튀어나왔고, 운전수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해 돼지를 치어 죽이고 말았다. 화가 난 호네커는 돼지 주인에게 사과하라고 운전수를 농장으로 보냈다.
한 시간 뒤, 운전수는 잔뜩 취해 술냄새를 풍기며 돌아왔다. 호네커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운전수의 대답.
"저는 그냥 가서 '나 호네커 서기장 운전수인데, 아까 그 돼지 쳐 죽였소!'라고 했어요."
호네커가 슈타지 국장인 에리히 밀케(Erich Mielke)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호네커가 말했다.
"밀케 동무. 요즘 유행하는 유머를 들어보셨소? 나에 관한 유머들인데, 요즘은 그걸 모으는 게 취미라오."
밀케가 답했다.
"그렇습니까, 서기장 동지. 저와 취미가 비슷하시군요. 저는 그 유머를 퍼트리고 다니는 사람을 모으는 게 취미입니다." - 유난히 인지도가 없는 편인 동독 사람들 중 한국인들에게는 그나마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동독을 배경으로 하는 여러 영화들에서도 단골로 등장하고,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등장하는 데다 결정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던 독일의 통일 직전까지 집권했던 사람인 만큼 적어도 동독의 지도자 중에서는 가장 인지도 높은 사람이다.
- 브레즈네프와 입맞춤한 사진이 유명하다. 자세한 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문서 참고.
- 호네커가 김일성에게 당신이 내 부하였으면 출당시켰을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낭설이 인터넷에 퍼지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일성이 동독을 방문해서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면 사상적으로 나태해진다라고 발언한 것까지는 사실이 맞으나[20] 호네커가 김일성에게 출당 운운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서로 화기애애하게 만나서 협력 강화하는 자리에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형시킨다는 수준의 폭언인 출당시켜 버린다는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외교적으로 전혀 있을 수 없는 언어도단이다. 역으로 김일성, 김정일급 폭군들도 정상회담에서는 덕담을 하지 상대편 (그것도 우방국의!) 국가원수를 노골적으로 위협, 비난하는 미친 행위는 하지 않았다.[21]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어낸 말이 인터넷에 퍼져서 기존 정보와 결합된 문헌오염으로 보인다.
- 다른 공산주의 독재자인 김일성과 생몰년이 같다.[22]
- 1980년대 일본을 방문한 에리히 호네커는 규율과 효율성을 중시하고 개인의 출세보다 집단의 노력을 우선시하는 일본의 직장문화에 깊이 감명했다고 한다. 일본의 로봇기술을 활용하여 첨단제품을 만드는 자동화 공정에도 감탄했으며, 이에 따라 동독에서 산업 첨단화에 착수하기도 했다.
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19 - 1933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33 - 1945 | 강제 해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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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 1946 | 재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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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 - 1989 | 합당 |
|
1989 - 1990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0 - 1994 |
제명 작고 |
7. 관련 문서
[1]
공식 집권 기간은 13년에 살짝 못 미치지만 실질 집권 기간은 약 18년으로 대한민국으로 치면 박정희, 현재 독재자로 치면 에르도안, 오르반 빅토르와 집권기간이 거의 같다. 2대 정부 수반이었던
발터 울브리히트의 집권 기간(1960년 9월 12일 ~ 1973년 8월 1일)보다 불과 40일 정도 공식적인 집권일수가 길다. 호네커의 집권 기간은 국가평의회 의장 겸임을 기준으로 한다면 (1976년 10월 29일 ~ 1989년 10월 18일이다.). 둘 다 13년에서 며칠 못 미치는 기간 동안 집권했다. 하지만 울브리히트는 제1서기에서 1971년에 이미 퇴출당했으며 호네커가 1971년에 그 자리를 승계했으므로 호네커의 실질 집권기간은 18년이다.
[2]
당시 독일공산주의 청년연맹의 회원은 200명 정도였다고 한다.
[3]
참고로 1930년대까지 호네커의 고향 자를란트는 독일영토가 아니었다.
[4]
스탈린 사후 소련이 세계 각국에 요구했던 것이 당수와 국가원수 혹은 정부수반의 분리 운영이었다. 이에 따라 불가리아에서는 벌코 체르벤코프가 제1서기와 수상을 독점하다가 제1서기에서 축출되었고 헝가리에서도
라코시 마차시가 수상과 서기장을 겸임하다가 수상에서 해임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클레멘트 고트발트가 죽은 후에 서기장과 대통령을 분리하여 안토닌 노보트니가 서기장을, 안토닌 자포토츠키가 나누어서 승계해야 했고 그 중국조차도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에서 물러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만 맡았다. 하지만 흐루쇼프가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등 스탈린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이런 규제는 완화되었다.
[5]
아래에서 보듯 호네커도
이산가족이었던 게 컸다.
[6]
호네커는 1985년 서울 올림픽 경기에 참석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이때부터 남한과의 수교를 검토했던 걸로 보인다. 소련은 실제로 붕괴 직전 남한과 수교했다.
[7]
MDR의 2019년도 다큐멘터리 Honeckers letzte Reise.
[8]
비록 통일되었으나 경제력에서 서독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던 동독인들은 2등시민 취급을 받게 되었고 공산국가 특유의 복지제도도 사라지면서 구 동독 지역에서는 인구유출과 실업, 그리고 알콜과 마약 중독이 문제가 되고 있다. 해당 노숙인도 동독 시절 잘 나가던 엘리트였으나 동독 붕괴 후 자본주의 체계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였다. 한때 외교대사였던 사람은 작은 빵집으로 근근히 먹고 살고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대학교수도 공산당원이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쫒겨나 자살하는 등 동독의 엘리트들도 몰락하였는데 당시 일반 근로자들이었던 동독 시민들은 독일 빈민층으로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특이한 사례인 데다 한국에서는
남북통일이라는 이권이 걸린 문제라 주목받는 것이지 통일은 동독 출신이 더 지지한다.
# 동독 출신은 '성공적인' 통일은 아닐 수도 있지만 통일 자체가 안 하는 것보다 이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서독 출신이 세금 등의 이유로 불만이 많고 너무 동독 출신이 투덜대는 것처럼 보이며 동독 출신은 통일이 없으면 동구권 이상으로는 잘 살고 한국 수준에 비견할 수 있는 현재 정도의 경제적 풍요도 누리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9]
동독 출신 독일계 영국인 역사학자. 다만 유년기 때 통일이 되어서 동독 체제에 대한 직접 경험은 많지 않다.
[10]
슈타지같은 비밀경찰을 운영하는 것만으로 인권탄압인 것이 아니다. 그것을 운영하는 방식에 인권 탄압적 면모가 있었다는 것.
[11]
NDR의 2009년도 다큐멘터리 Erich Honecker. Ein deutscher Politiker;
ZDF의 2014년도 다큐멘터리 Geheimakte Honecker
[12]
MDR의 2019년도 다큐멘터리 Honeckers letzte Reise
[13]
아시아권 공산 독재자들은 이것에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4]
보통 슈타지 같은 관공서에 빌헬름 피크, 발터 울브리히트의 초상화와 함께 걸려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초상화를 클로즈업하면서 우리는 너희를 지켜보고 있다 이런 연출로 종종 쓰인다.
[15]
혼전성은 '파이스트(Feist)'.
[16]
다만 이 유머 같은 경우에는 온갖 바리에이션이 존재해서 뭐가 원조인지를 알 수가 없다. 1차 대전 작품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언급되는 걸 보면 호네커는 원조가 아니다.
[17]
구 동독 시절
슈타지의 반체제 인사 감시를 다루었던 독일 영화
타인의 삶에도 이 유머가 등장한다.
[18]
호네커 시절에는 국가원수용 승용차가
시트로엥 CX와
볼보 760을 개조한 리무진이었다고 한다. 이 차들은 독일 통일 후
드레스덴의 교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
동독의 국영 농업 기업인 '농업생산협동조합(Landwirtschaftliche Produktionsgenossenschaft)'
[20]
Bernd Schaefer, Weathering the Sino-Soviet Conflict: The GDR and North Korea, 1949-1989
[21]
당장
도널드 트럼프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막말을 자제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22]
단 김일성은 생일이 지나고 죽어서 향년 82세인 반면 호네커는 생일이 지나기 전에 죽어서 향년 81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