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싱가포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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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전근대
싱가포르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서기 2세기경 프톨레마이오스의 것인데, 당시에는 ' 사바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무역항이었다.[1] 3세기경 중국 기록에는 '포라중'(蒲羅中)이란 이름으로 이 지방이 언급되어 있는데, 말레이어 '풀라우 우종[2]'의 음차로 보인다.동남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하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팔렘방이 쇠락하자 팔렘방의 왕자였던 상 닐라 우타마가 현대의 싱가포르 섬 일대에 싱가푸라 왕국을 세웠고, 라자로 통치하며 100여 년 동안 싱가포르는 전성기를 누렸다.[3]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대제국인 마자파힛 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는 과정에서 싱가포르를 강탈당했으며, 당시 싱가푸라 왕국의 제5대 왕이었던 파라메스와라는 한적한 어촌인 믈라카로 급히 천도하여, 나라 이름을 싱가푸라 왕국에서 믈라카 술탄국으로 개칭했다, 이후 믈라카가 명나라의 비호 아래 동남아시아의 최대 무역항으로 성장하면서 싱가포르는 일개 어촌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이후에는 네덜란드의 영향 아래에 있는 조호르 술탄국의 영토로 있었지만 재개발되는 일은 없었고, 해적들의 소굴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어쨌든 당시 싱가포르에 독자적인 국가가 있었다는 점때문에 현대의 중국계 싱가포르인과는 혈연적인 관계는 크지 않지만 상 닐라 우타마 왕은 싱가포르 내에서 위인으로 추앙받는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싱가포르의 돌을 통해 문자가 존재했다는 추측이 있긴 하나, 아직 그 문자의 정체는 미스터리에 싸여 있다.
여튼 토마스 래플스 경이 싱가포르를 발전시키기 전만 하더라도 싱가포르는 그냥 아무런 물자도 없이, 연중 그냥 무덥기 그지 없어 해적들이나 가끔씩 피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섬이라고 생각하는게 빠르다.
1.2. 영국의 도래
그러나 1819년 동인도 회사의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 경이 1,000명밖에 안 사는 깡촌이었던 센토사 섬에 조호 왕자 한 명을 왕으로 추대함과 동시에 영국의 영향 아래에 집어넣어 버렸다. 래플스는 이후 4년 동안 싱가포르를 오지에서 어엿한 항구도시로 발전시켰고, 이를 계기로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대표적인 무역항으로서의 싱가포르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덕분에 래플스는 리콴유 초대 총리와 함께 싱가포르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가 싱가포르에 처음 상륙한 지점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석상이 세워져 있고, 싱가포르에서 흔히 볼수 있는 래플스(raffles)라는 이름은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래플스 경이 싱가포르를 밀고 개척한 이유는 싱가포르의 입지가 좋아서가 아니다. 흔히 싱가포르가 해상무역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나 싱가포르 자체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자기네들을 개발하고 물류의 유통을 최대한 편리하게 만들고 금융의 중심지로 만들어서 그렇지 말라카 해협에는 싱가포르를 대체할만한 항구들이 얼마든지 있다. 다만 그 인프라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싱가포르를 최고로 치는 것일뿐이다. 이 당시 싱가포르를 밀었던 이유는 말 그대로 싱가포르가 남들이 다 버린 땅이어서 말라카 해협의 다른 땅과 달리 싸울 필요도 어떠한 분쟁에 휘말릴 필요도, 돈을 줘야할 필요도 없는 그야말로 척박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싱가포르는 해협식민지의 일원으로서 페낭, 말라카와 함께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의 주요 거점이자 중국인 인구가 많은 곳이 되었다.
이후 자유무역을 선언하고 화교를 탄압한 네덜란드와 달리, 비교적 평등한 대우를 한 결과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다른 많은 경쟁자들이 있었고 싱가포르는 후발주자였기 때문에 방법이 없었다. 이 덕에 지위도 동인도 회사 아래의 식민지에서 대영제국의 공식적인 식민지로 상승하면서 제국의 엘리트 관료들과 트라팔가르 해전 이후 적수가 없던 대영제국 해군의 비호 또한 얻게 된다.
이 섬은 홍콩, 캐나다, 인도,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 다른 식민지들과도 연결되어 영국군의 동남아시아 최고 거점이 되었다. 이에 따라 도시 개발을 위해 싼 임금으로 청나라 사람들을 대거 고용하여 이주시켰고, 청나라 상인들도 돈벌이를 위해 이민을 가면서 원주민보다 중국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같은 시기 인도인 죄수들도 도시 개발을 위해 징발되면서 이들도 소수라고는 하지만 꽤 많은 숫자가 함께 정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각자의 핏줄을 자각했기에 다른 동남아시아 식민지와 달리 싱가포르 내엔 민족주의가 싹트지 않았다. 당시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영국과 손잡은 반면, 인도계 싱가포르인의 경우는 반영 사상이 짙었다. 말레이인은 중립적이라서 영국 식민정부에 많이 협조했다.
1.3. 일본의 점령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이 말레이 반도를 통해 공격해온 싱가포르 전투에서 영국군이 일본군에 패배[4]하면서 이 지역은 일본에게 점령당하여 화교들은 일본군에게 학살당했고[5] , 특별 세금까지 물게 되면서 화교들은 일제에 반감을 드러냈다. 싱가포르의 교육 과정에서 일본의 전쟁범죄는 주요 주제로 다루어진다. 당장 리콴유 세대에서는 친척이 부당하게 폭행당한 경험이나 학살당한 경험이 있다. 리콴유는 일본의 재무장 시도를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이 들어간 초콜릿을 먹게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1.4. 탈식민 시기
종전 후 시간이 지나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혼란스럽던 싱가포르를 영국이 공산주의를 소탕하면서 화교 학교를 공격해 영국이 화교를 공격한다는 인식이 생겨 영국에 반감을 가지게 된 싱가포르 또한 말레이시아의 한 주로서의 독립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말레이인이 다수인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이 경제 권력을 쥐고 있어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중국인이 대다수인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게는 위험한 존재였다.싱가포르는 인구 자체는 적지만 섬 하나뿐이라 나름 인구밀도가 높아서[6]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합치면 화교의 인구 수가 말레이인를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사실 싱가포르만 그런게 아니라 싱가포르보다 화교 비중이 더 높은 페낭이나 이포 등 말레이시아 북부 지역들도 있었고 당장 수도인 쿠알라룸푸르부터 중국인 인구가 많았으며 그 외에 중국인들은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고 있어 더욱 그랬다.
또한 식민지 시절 대영제국이 말레이시아를 싱가포르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말레이인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앙금이 크게 남아 있었고,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말레이계를 우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싱가포르는 대국들이 많은 동남아시아에서 혼자서 살아가기 어렵다고 보았기에 말레이시아 연방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으며, 말레이시아는 당시 동남아시아에 퍼져나가던 공산화에 두려움을 느꼈고 1948년에 말레이 공산당이 무장투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싱가포르에도 예외 없이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공산당 활동을 아예 막았다.
다른 한편 1955년에는 영국이 조건부 자치를 승인했고 1959년에 인민행동당이 창당됐다.
하지만 합병 이후 말레이계 우대 정책에 대한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고, 리콴유 싱가포르 주 총리와 싱가포르 인민행동당은 '말레이인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종이 말레이시아인이다'는 주장을 하며 연방 내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게 된다. 이들은 심지어 말레이인들의 지지 또한 얻기 시작하였고,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이에 큰 위협을 느끼게 된다.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합병할 때부터 인민행동당이 연방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싱가포르 내에서만 정치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당시 말레이인들의 생각은 중국인은 너무 똑똑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교육 수준이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 보다 좋은 경우가 많다. 미국, 영국, 유럽, 남아메리카 등에서도 동아시아계는 학습열이 높기로 유명한데, 국적이 달라도 중국계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화교들의 경우에도 이것이 똑같이 작용한다. 유입 당시 이들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자본력이 높았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와 말레이인이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한다면 곧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정치, 경제적 주도권을 모두 장악하게 될 것이고, 말레이인은 낙오될 것이라는 것이 말레이 정치인들이 갖고 있던 공포감이었다. 이는 실제로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에 공통되는 현상이다. 화교가 정치적으로 탄압받는 지역조차 경제는 화교의 수중에 있다. 오히려 경제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기에 견제 차원에서 탄압이 가해지는 측면이 있다.
말레이시아의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은 리콴유의 절친한 친구이자 독립 동지였지만 합병 이후에는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이 말레이시아의 정치를 장악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툰쿠 압둘 라만은 리콴유와 사적으로는 친하지만 공적으로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즉 연방으로 받아준 싱가포르의 화교들이 오히려 말레이시아 정부를 장악하여 말레이인을 위한 정책이 아닌 화교 또는 마오쩌둥주의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까봐 두려워했다. 반면 리콴유는 " 말레이시아의 말레이인 우대 정책을 이해하지만, 말레이시아의 정치인들의 정책은 인종 갈등만 야기시키고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런 정치적, 인종적 갈등이 계속되던 와중 결국 싱가포르에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1964년 7월 21일 2만 5천여명, 212개 단체의 말레이계 무슬림들이 예언자 무함마드 탄신일을 기념하는 행진을 하던 도중 중국계와 충돌한 것이다.
리콴유는 이에 빠르게 중앙 정부에 진압병력을 요청하고 야간 통금을 시행하여 대응했다. 사건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라작 부총리와 리콴유는 외부 세력이 개입했으며 배후에 인도네시아와 중국계 공산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11일간 지속된 시위로 건물 수백채가 불타고 36명이 사망하였으며, 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인 9월엔 중국계가 주로 주거하는 지역에서 삼륜차를 몰던 말레이인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자 또 다시 대규모 분쟁이 발생하여 13명이 죽고 103명이 다쳤다. 인종 갈등이 결국 극에 다다른 것이었다.
이에 라만은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하나는 강경파인 리콴유를 구속하여 제거한 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인을 싱가포르에 심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말을 더럽게 안 듣는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이에 라만은 후자를 선택하기로 한다.
라만은 먼저 리콴유에게 "우리가 하나의 연방에 있을 때는 적이었지만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와 다른 독립된 국가가 된 순간부터 우리는 다시 친구이자 동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싱가포르에게 연방 의회의 의석을 포기한다면 국방과 외교 분야를 제외한 완벽한 자치를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 리콴유는 이 제안을 고려하다가, 결국 싱가포르가 연방에 잔류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리콴유와 그의 정부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탈퇴하여 분리 독립하기로 한다. 1965년 중순에 이르자 완벽한 독립으로 마음을 굳힌 리콴유는 마찬가지로 연방 잔류에 회의적이었던 오른팔인 고켕스위(吳慶瑞, Goh Keng Swee)에게 권한을 부여하여 라작 부총리와의 회담장으로 보낸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분리 독립에 동의하고, 분리독립 계획이 외부로 새어 나가면 일어날 소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기밀을 유지하고 기습적으로 독립을 발표할 방법까지 전부 합의했는데,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분리 독립에 합의하고서는 마치 싱가포르가 일방적으로 분리독립을 "당하는" 것처럼 연출하기로 하였다. 싱가포르는 이 시점에 말레이 연방에 잔류할 수는 없었다. 이 상태가 계속되다가는 다른 지역들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될 뿐이었다. 리콴유가 독립을 진심으로 원했던 것은 아니고, 도시국가가 아주 불리한 여건임을 알고 있었지만, 불가피하게 홀로서기를 택한 것이다.
양측의 합의대로 1965년 8월 7일에 라만은 리콴유와 그의 정부 각료들을 불러 일방적으로 추방을 선포하였고, 8월 9일에 말레이시아 의회는 싱가포르를 축출하는 법안인 헌법 개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같은 날에 리콴유는 눈물을 흘리며 독립을 선언하는 모습을 연출하였고, 싱가포르는 자주 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이렇듯 널리 알려진 대로 중국계 인구가 많은 싱가포르가 먼저 독립을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싱가포르 역시 뜬금없이 '독립당한' 것은 아니었다.[7]
영국은 말레이시아 연방이 와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끝까지 라만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싱가포르가 축출되면서 영국 정치인들은 상당히 실망하게 된다. 반면 인도네시아는 싱가포르의 연방 축출을 대환영하였다. 당시 말레이시아와 갈등을 벌이던 인도네시아는 보르네오 섬 북부의 사라왁과 사바가 연방에 가입하는 것 자체를 상당히 불쾌해하고 있었다. 결국 저 둘은 결국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똑같이 희망하던 브루나이는 술탄의 권력 문제로 끝내 말레이 연방 가입을 거부하고 1984년에 독립국으로 홀로서기에 나선다.[8]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 연방 자체를 영국 신식민주의라고 정의내리고 있었으며, 특히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던 수카르노는 공공연하게 반서방 성향을 드러내며 사라왁, 사바에 민병대를 보내고 싱가포르에 군사적 공격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라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축출이 인도네시아의 승리, 말레이시아의 패배라고 생각하며 좌절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는 영국에서 평화적으로 독립해서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와 전쟁을 하며 독립을 이뤄냈기에 반서방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나중에 싱가포르 입장에선 터닝포인트가 될 홀로서기가 시작되었다.
1.5. 독립 이후
리콴유는 아무 것도 없는 조그만한 섬인 싱가포르가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당시에도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 물자를 대는 항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말레이시아에 속한 조호르 지역이 후방에서 받쳐줬고, 말레이시아와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그리고 말라카 해협에는 냉전의 일환으로 이념의 대립이 있어서 수월하지 않았을 뿐, 싱가포르를 대체할 수많은 항구들이 있었다.
싱가포르 자체적으로 식량이나 식수 수급은 불가능했고 배후지역인 조호르를 통해 공급받았기 때문에 조호르의 여러 항구를 잃고 싱가포르항 한 곳만 경영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이시아에서 독립하고도 그런 역할을 지속하며 국가가 존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었다.[9]
리콴유는 영국에 호의적이었고 영국과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영국과 절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인민행동당 인사들도 영국 유학파들이 많았다. 독립 이후 싱가포르는 별 무리 없이 영연방에 가입하였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인 리콴유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강제 독립을 당한 이후에는 외교 리스크 극복을 위해 소련 등 이른바 동구 공산권 국가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한 때는 싱가포르 여권으로 북한 무비자가 가능했다. 북미정상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균형외교와 별개로 북한과의 사이는 별로 좋지 않으며 북한의 화성급 ICBM은 싱가포르를 사정권에 넣고 있다.
또한 독립 초기부터 리콴유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공을 내세우면서도 공산국가처럼 1당 독재로 국가가 직접 기획/통제하는 '사회주의식 자본주의'를 창안했고, 국방 쪽에선 자신들을 지킬 국방력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과 별개로 공산당엔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서 공산주의자는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미국, 영국, 서유럽 등 다양한 국가들로 부터 무기를 수입했고, '적으로 둘러싸인 소국'이라는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스라엘로부터 무기 구입 및 군사 자문을 적극적으로 받으며 군사력을 키웠다. 그리고 영국군 기지를 반환받으면서도 동시에 셈바왕 쪽 기지 임대 연장을 허용했고, 미군 주둔 기지 설립을 허용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의 연방 축출이 인종 간 갈등에서 시작된 것을 반성하여 신생 싱가포르의 인종 갈등 문제를 없애는 것에 주력했다.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70%라 공공연하게 중국계를 우선하거나 중화권 문화를 밀어줄 경우 자칫 말레이인이나 인도계 싱가포르인들의 반발을 살 수 있어 의도적으로 중국 문화를 배제하고 다인종 다민족이 공존하는 싱가포르를 만드는 데 노력했다. 물론 현재는 표면상으로 화합으로 보이나 실은 안 보이는데선 차별이 존재한다. 다만 이를 대놓고 발언하는 경우, 싱가포르 내에서 상당한 비난에 시달린다.
헌법상 국어를 말레이어로 지정하고 할랄 푸드 인증을 적극 추진해서 원주민 말레이인을 존중해주는 한편 인종 간 소통을 위해 제1언어로 영어를 지정했고, 중국계 싱가포르인의 언어 통합을 위해 표준 중국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고 간체자를 도입하는 등 중국계 언어 통합에도 노력을 가했다. 싱가포르의 중국계들의 모어는 광동어, 객가어, 민어 등이고, 이들끼리는 의사소통이 어렵다. 오늘날 중국계 싱가포르인 내에서는 의사소통을 위해 영어, 중국어를 쓴다.
그리고 인종이 모두 모이는 교외 각 지역의 HDB[10]를 통해 중국계 싱가포르인, 인도계 싱가포르인, 말레이인의 화합을 자연스럽게 추구했다. 영어로 소통하고 HDB에 같이 살고 호커스에서 같이 식사하고 학교에서도 친구로 만나며 세 민족은 자연스럽게 이웃사촌으로 친구로 융합되었다.
그리고 인종차별에 대해 엄격한 법 집행을 실시해서 혐오 표현을 검열하고 여권 등 신분증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하며 공립학교 교사도 각 인종을 1대 1대 1로 배분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결과적으로 싱가포르는 인종 및 민족 간 통합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 싱가포르 내각 역시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미푸트라 정책 탓에 인종 갈등이 극심하고 극우주의자가 판치며 혐오 표현이 난무하는 옛 모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 등 갈등으로 몸살을 앓은 이웃 인도네시아, 민다나오 내 무슬림을 품지 못해 골칫거리가 된 필리핀 등과 비교할 때 상당히 높은 성과이다.
한편 외교적으로는 주변국에 비해 소국임을 인식하여 중국계 인구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는 중화권이 아닌 동남아시아의 일부임을 주변 국가에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신뢰를 쌓게 된다. 그리고 싱가포르는 영국, 미국 등 영어권과도 더 밀착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싱가포르는 중국과의 거리를 두기 위하여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가 중국과 수교를 맺을 때까지 일부러 수교를 맺지 않았다. 비록 중국과 싱가포르는 거리를 두었지만 중국도 싱가포르의 상황을 이해해서 이에 대해 무리한 압박을 가하지는 않았다.
당시 싱가포르는 아직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선발주자인 영국, 대만, 홍콩, 일본, 호주 등은 물론 현재는 싱가포르로 노동력을 송출하는 태국으로부터 원조를 받는 처지였다. 싱가포르 관광지인 주롱 새 공원(Jurong Bird Park)에 가면 모노레일에 타이항공 로고가 대놓고 있는데 이때 모노레일을 놔준 나라가 태국이어서 그렇다. 현재도 태국 정부는 양국 우호협력의 상징으로 이 모노레일을 예로 들며 뿌듯해한다.
독립 이후 싱가포르는 라만의 말처럼 말레이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바람이 사그라들고,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인도네시아에 수카르노에 비해 비교적 친서방적인 독재자 수하르토가 들어서면서 동남아 정세가 싱가포르에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 큰 위협 없이 살아남게 된다.[11]
한편 싱가포르는 독립하면서 도시국가가 되어버려서 리콴유의 급진적인 정책들이 바로바로 효과를 발휘하는데 최적의 환경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런 정책이 먹혀 들어가기 위해서는 국민에 대한 독재 수준의 통제가 필요한데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기 때문에 통제가 쉬워져서 오히려 리콴유 일가의 지배 하에 급속도로 사회를 통합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
독립 이후에는 한국, 홍콩등이 성장했던 방식처럼 제조업을 통하여 경제를 성장시켰으나 규모가 워낙 작은 나라라 일본. 한국등의 덩치가 있는 나라들에게 밀리기 시작하여 물류를 다루는 방향으로 경제를 성장시켰다. 물론 이 역시도 홍콩, 한국, 대만등과 경쟁을 해야했고 홍콩이야 비슷하지만 한국, 대만과는 덩치상 게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금융쪽으로 먹거리를 선회하여 세금을 없애고 좋은 기업들을 유치하는데 사활을 걸었고 이러한 적절한 경제정책의 변화는 싱가포르를 개인 소득에 있어서는 굴지의 부국으로 만들어 주었다.
독립 후에는 말레이시아와 페드라 브랑카 분쟁이라는 영토분쟁을 치른 바 있다. 섬의 실효지배 문제나 ICJ에서 영토 분쟁 판결이 난 사례 등으로 인해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참고된다. 이 섬은 포르투갈인들이 말라카를 정복할 무렵 같이 정복한 무인도로 페드라 블랑카라는 이름은 포르투갈어인데 조호르 쪽에 붙어 있었다. 싱가포르가 독립한 뒤 문제가 되었고 한때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해군이 대치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싱가포르의 실효지배가 인정되었다.
이 섬의 싱가포르 영유권이 인정된 이후 스페인 - 모로코 사이에서 2005년 페레힐 섬 문제가 터지면서 이 문제에서 또 한번 이 섬이 언급되었다. 독도 문제와도 관련있는데 실효지배가 인정받은 케이스라 일본이 이 판결을 매우 불쾌해하기도 했다.
1990년에 리콴유 총리는 고촉통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왕 노릇을 했고, 2004년부터 리콴유 전 총리의 아들 리셴룽이 취임하여 2세 통치가 시작됐으며, 2024년 로렌스 웡이 취임하였다.
[1]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바나는 아니고 그냥
우연히 이름이 같을 뿐이다.
[2]
'끝자락에 있는 섬'이라는 의미의 말레이어로 싱가포르 섬을 일컫는 다른 명칭이다.
[3]
힌두교 국가의 군주를 일컫는 말로
이슬람의
술탄과 같다.
[4]
당시에 대영 제국, 유럽이 최고라는 인식이 있던 싱가포르인에겐 충격이었다.
[5]
당시 싱가포르 인구가 100만 정도인데 일본의 숙칭 대학살 희생자는 학계에선는 5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6]
물론 인구가 500만 명 정도 수준이라 인구밀도가 체감되지는 않는다.
[7]
#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사이에서 독립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기밀에 붙여져 있다가 2015년에 싱가포르 측의 당시 문서가 공개되면서 알려졌다. 그 전에는 싱가포르 내에서도 '싱가포르는 일방적으로 쫓겨났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8]
사실 브루나이 내부에서도 연이어 말레이지역 우대정책에 대한 말레이 연방정부의 방침에 반발하는 시위가 연이어 터져 나왔고 브루나이의 술탄 역시 이를 빌미 삼아 연방의 탈퇴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고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9]
비슷한 예로 홍콩을 들 수 있다. 조차한
신계 북부 지역과 달리
홍콩 섬 및
구룡반도 그리고
신계 남부 신구룡은
영국에 할양된 땅으로 영국에 완전히 귀속된 상황이었다.
1997년 반환시기 때도
신계 북부지역만 반환할 의무가 있었고
홍콩 섬 등은 영국이 원한다면 영국령으로 존치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홍콩 섬, 구룡, 신구룡만 가지고 홍콩을 경영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홍콩 섬 등 도심지역들도 같이 반환한 것이다. 싱가포르의 경우를 홍콩에 비유하면
홍콩 섬만 독립했다고 볼 수 있다.
[10]
그 전까지 인종 별로 주거지가 철저히 나뉘었다. 중국계는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되 주로
차이나타운과 티옹바루, 탄종파가 일대 및 동부 지역인 겔랑, 카통 등에서 주로 살았고 말레이인 및 인도계는 리틀 인디아와 부기스에 주로 살았다. 중국계와 인도계는 독립 전까지 접촉조차 적었고 서로 소 닭 보듯 했을 정도로 따로 놀았다. 이래서야 인종문제가 재현될 것이 뻔해서 리콴유가 사회 통합책을 내놓게 되는데 그게 HDB로 인종들이 서로 같은 아파트에서 섞이게 만들고 주거난도 해결할 목적이었다.
[11]
사실 리콴유 본인은 수카르노보다 수하르토를 더 좋아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규모 학살 및 근거없는 독재, 부패가 주변국인 싱가포르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카르노의 몰락의 배경에 미국이 있고, 수하르토는 수카르노와는 달리 반서방적이지는 않아 싱가포르의 국가 존립에 훨씬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