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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14:13:25

사노 노리요시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 <tablebordercolor=#fefe01>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한신 타이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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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 1988년
<rowcolor=#20272c,#d3dade> 1965년 1966년 1차 1966년 2차 1967년 1968년
이시도코 미키오
(石床幹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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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무라 코이치
(西村公一)
노가미 토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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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부치 코이치
(田淵幸一)
<rowcolor=#20272c,#d3dade>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우에다 지로
(上田次朗)
타니무라 토모히로
(谷村智啓)
야마모토 카즈유키
(山本和行)
사오토메 유타카
(五月女豊)
사노 노리요시
(佐野仙好)
<rowcolor=#20272c,#d3dade>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1978년
코가 마사아키 (6)
(古賀正明)
아다치 요시오 (6)
(足立義男)
마스야마 세이쿄쿠
(益山性旭)
이토 후미타카
(伊藤文隆)
에가와 스구루 (2) (6)[1]
(江川卓)
<rowcolor=#20272c,#d3dade>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1983년
오카다 아키노부 (2)
(岡田彰布)
나카다 요시히로
(中田良弘)
겐고로마루 히로시 (1)
(源五郎丸洋)
키도 카츠히코
(木戸克彦)
나카니시 키요오키
(中西清起)
<rowcolor=#20272c,#d3dade>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시마다 아키히로 (2)
(嶋田章弘)
토오야마 쇼지 (1)
(遠山奬志)
이노마타 타카시 (1)
(猪俣隆)
노다 코지 (1)
(野田浩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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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込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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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 2018년
<rowcolor=#20272c,#d3dade>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카사이 미노루 (1)
(葛西稔)
유후네 토시로 (1)
(湯舟敏郎)
하기와라 마코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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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다치 토모지로 (1)
(安達智次郎)
야부 케이이치 (3)
(藪恵壹)
<rowcolor=#20272c,#d3dade>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야마무라 히로키
(山村宏樹)
후나키 사토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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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川球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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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바 칸이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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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嶋達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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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仁田寛和)
<rowcolor=#20272c,#d3dade>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후타가미 카즈히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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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사다 유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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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20272c,#d3dade>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요코야마 유야 (1)
(横山雄哉)
타카야마 슌 (2)
(髙山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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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山悠輔)
바바 코스케 (1) (2)
(馬場皐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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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本光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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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
<rowcolor=#20272c,#d3dade>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니시 준야 (1)
(西純矢)
사토 테루아키 (2)
(佐藤輝明)
모리키 다이치 (1)
(森木大智)
모리시타 쇼타 (1)
(森下翔太)
시모무라 카이토
(下村海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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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즈레 1라운더: 첫 지명에서 중복 지명된 선수의 교섭권 획득에 실패했을 때 차순위로 선택한 선수.
(2) 중복 지명 추첨 성공.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1993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한 제도로, 선수를 확정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4) 고교생 드래프트, (5)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2005년~2007년의 3년간은 고교 선수와, 대학&사회인 야구에서 뛰었던 선수의 지명이 분리되어 있었다.
(6) 지명 후 미입단

[1] 한신이 중복 추첨 끝에 교섭권을 획득했으나, 쿄진 입단을 희망해서 거부하였다가, 입단 직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 이른바, ' 공백의 1일' 사건. 1977년에도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즈에 지명되었으나 역시나 입단을 거부했다.
틀:한신 타이거스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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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85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1년 센트럴 리그 최다 승리타점[1]

파일:佐野仙好 9.jpg
사노 노리요시
佐野仙好 | Noriyoshi Sano
출생 1951년 8월 27일 ([age(1951-08-27)]세)
군마현 타카사키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군마현립 마에바시고교 - 주오대학
신체 174cm, 78kg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좌익수, 3루수, 1루수
프로입단 1973년 드래프트 1라운드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74~1989)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2군 육성코치 (1990)
한신 타이거스 1군 수비, 주루코치 (1994)
한신 타이거스 1군 외야수비, 주루코치 (1995)
한신 타이거스 1군 타격코치 (1996~1997)
프런트 한신 타이거스 스카우터 (1991~1993, 1998~2018)
한신 타이거스 구단 본부 특별고문 (2019~2020)

[clearfix]
1. 개요2. 프로 입단 전3. 한신 시절
3.1. 카와사키 구장 울타리 충돌 사고
4. 기타

1. 개요

한신 타이거스 소속 프로 야구선수로, 프로 데뷔 이래 한신 타이거스에서만 재적한 원클럽맨이자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축 멤버이기도 했다.

2. 프로 입단 전

마에바시 공고 2학년 시절이던 1968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에 진출하여 코시엔을 밟았지만 첫 경기에서 나라현 대표인 치벤가쿠엔 고교에게 영봉패를 당하며 한 경기만에 짐을 쌌고 2학년 여름 외엔 번번히 예선에서 탈락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코시엔 1회 진출로 끝마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주오대학으로 진학하여 토토 대학야구 리그에서 1학년부터 1번 타자를 치는 등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전 경기 출전을 완수, 리그 통산 99경기 출전, 350타수 99안타, 타율 .283 7홈런 39타점 및 베스트나인 2회 수상의 출중한 성적을 남기고 1973년 드래프트 1위로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했다.

3. 한신 시절

그런데 하필 같은 해 드래프트 6위로 입단했던 카케후 마사유키가 그대로 3루수로 정착하면서 사노는 좌익수로 옮기게 되었고, 이후 기록상으론 카케후가 사노를 압도하게 되었으나 그의 프로 생활 전반에 걸쳐 라이벌 관계가 되었다. 1977년에는 후술할 외야 펜스 충돌 사고를 겪기도 했으나 부상을 털어내고 복귀한 뒤로는 준수한 타격을 보여주며 규정타석에 미달했지만 타율 .305란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1979년엔 후지타 타이라의 부상 이탈로 1루수를 보기도 했으며, 이 해 커리어 최초로 규정타석에 도달하여 타율도 정확히 3할을 찍었다. 다만 이 시즌엔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센트럴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타자가 되는 불운도 겪었다.[2] 1981년엔 당해 제정된 최다승리타점 타이틀의 첫 수상자가 되었으며,[3] 1984년엔 커리어 2번째로 3할 타율을 달성했다.

1985년에는 주로 6번- 좌익수로 출장하며 타율 .288/OPS .775 13홈런 60타점을 기록, 당시 슬러거들이 즐비하던 한신의 일명 뉴 다이너마이트 타선[4]에서 유격수 히라타 카츠오, 포수 키도 카츠히코와 같이 하위타선에서 무시 못할 공격력을 뽐내며 상대 투수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줬으며, 21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이 결정되었던 10월 15일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메이지진구 야구장 원정 경기에선 우승을 결정짓는 동점 희생플라이[5]를 쏘아올렸다. 다만 그 해 일본시리즈에서는 3차전까지 선발 좌익수로 출전했으나 11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아무런 활약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4차전 이후론 나가사키 케이지, 요시타케 하루키에게 좌익수 자리를 내준 채 남은 시리즈 경기엔 출장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한신이 우승하면서 구단 사상 첫 일본시리즈 우승 멤버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이후 1987년까지 10+홈런을 치며 꾸준히 주전으로 뛰었으나 1988년부터 신인들의 대두로 출장기회가 급감했고, 결국 1989년을 끝으로 1549시합 출장, 타율 .273/OPS .726, 1316안타 144홈런 564타점의 기록을 남긴 채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코치 및 스카우터로 전직하여 활동을 이어가다 2020년을 끝으로 한신에서 퇴단했고, 이후엔 스카이 A 등에서 야구 해설가를 역임하기도 했다. 2023년 한신의 우승 후 나온 기사에서는 모교 마에바시 공고에서 코치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3.1. 카와사키 구장 울타리 충돌 사고

1977년 4월 29일, 타이요 훼일즈와의 카와사키 구장 원정경기에서 선수 생활은 물론 본인의 생명까지 위험했던 아찔한 사고를 겪은 바 있다.

9회 말 타이요의 공격 때 1사 1루에서 타자 시미즈 토오루가 친 타구를 사노가 잡았으나, 이 과정에서 당시 콘크리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던 카와사키 구장 외야의 좌측 펜스에 세게 부딪히면서 두개골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사노는 충돌의 여파로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공을 끝까지 잡고 있었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갔다. 그런데 사노의 상태를 살피려고 심판원, 선수단이 모여든 상황에서 타이요 측의 1루 주자 노구치 요시오[6]가 혼자 1루에서 홈까지 달려서 7-7 동점을 만들었고, 이 사건은 현재까지 희생 플라이로 1루 주자가 득점을 기록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요시다 요시오 감독은 볼데드 상황이라며 득점 인정이 안 되는 게 아니냐고 항의했으나, 심판진은 규정상 수비측 선수의 부상으로 타임을 선언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이 항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제소시합[7]으로 한다는 조건 하에 경기가 재개되었으나 시간 제한[8] 때문에 무승부가 된 채 그대로 9회에 경기가 끝나며 한신은 이길 수 있었던 경기를 무승부로 날리고 말았다. 이후 한신의 제소로 5월 12일에 해당 시합에 대한 참고위원회가 열렸으나, 상술한 대로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제소는 각하되었다.

한편 이 사고를 계기로 센트럴, 퍼시픽 양 리그는 전 구단에 외야 펜스에 고무를 두를 것을 지시했고, 이를 통해 일본 내 각 야구장들의 외야 펜스가 고무를 두른 펜스로 바뀌는 등 선수들의 편의와 안전을 고려한 시설 개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같은 해 8월 1일에 프로, 아마추어를 총괄하는 일본야구 규칙위원회가 개최되어 사노의 사례처럼 선수의 생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상이 발생했을 경우, 심판원이 타임을 선언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여담으로 KBO 리그에서도 강동우가 비슷한 사고를 데뷔 1년차부터 겪었다.

4. 기타

카케후 마사유키와는 프로 생활 내내 라이벌이었다. 그래도 둘 다 3루와 좌익에서 공생하면서 나름 족적을 남겼다.

1985년 5월 20일 코라쿠엔 구장에서의 전통의 일전에선 7회 대타로 나와서 마키하라 히로미 상대로 만루홈런을 친 적이 있었다. 이 만루포를 계기로 0-5로 지던 시합을 한신이 열심히 따라가 7-5로 역전승을 했다.

현역 시절엔 등번호 9를 달았으며, 맷 머튼을 거쳐 현재 해당 번호는 타카야마 슌이 달았다. 그러나 타카야마는 2016년 1년 신인왕 획득으로 반짝했을 뿐, 그 뒤로 주전에서 밀리더니 결국 2023년을 끝으로 타카야마는 전력외 통고와 함께 한신을 떠나게 되어 이 번호는 빈 번호가 되었다.


[1] 1981~1988년까지 양대리그에서 승리타점(결승 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에게 주던 타이틀로, 1989년부터 양대리그 모두 타이틀을 폐지, 센트럴리그에서만 특별상 형식으로 시상하다가 2000년을 끝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사노 본인이 초대 수상자였으며 이후 하라 다쓰노리, 랜디 바스 등이 이 타이틀을 정식으로 수상한 적이 있었다. 2000년 완전히 폐지 때 최후의 수상자는 에토 아키라였다. [2] 에나츠 유타카를 상대로 2루 직선타를 쳤으나 2루 주자가 귀루하지 못하면서 병살타가 되었고, 그대로 히로시마의 승리로 경기가 종료되면서 히로시마의 리그 우승이 결정되었다. [3] 15승리타점으로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 타이틀 자체는 1988년까지 양대리그에서, 이후로는 센트럴 리그만 특별상 형식으로 2000년까지 수상자를 선정했다. [4] 당시 한신 라인업은 1번에 34홈런 타자 마유미 아키노부가 들어왔고, 백스크린 3연발로 유명했던 클린업 트리오 랜디 바스 - 카케후 마사유키 - 오카다 아키노부로 구성되었다. [5] 이날 경기 전까지 한신은 매직넘버를 불과 1만 남겨놓은 상황이었는데, 이 경기를 무승부로 마치며 매직넘버를 완전히 소진시키는 데 성공했다. [6] 은퇴 후 타이요의 후신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구단 이사를 역임하며 프런트로써 90년대 후반 팀의 최전성기 구축에 큰 공헌을 했다. [7] 심판의 판정이 규정에 위반될 수 있는 경우 소속 리그에 해당 판정에 대한 심의를 요청하는 시합. 2021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8] 당시 규정상 일본프로야구 양대리그를 통틀어 경기 시간이 3시간을 넘겼을 경우, 3시간을 넘긴 시점에서의 이닝까지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다만 9회가 되기 이전 3시간을 넘겼을 경우엔 그대로 9회까지 진행하도록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