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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0:19:07

히라타 카츠오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efe01><tablebgcolor=#fefe01> 파일:한신 타이거스 엠블럼.svg 한신 타이거스
2025 시즌 코칭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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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감독 22 후지카와 큐지
1군 78 히라타 카츠오 (수석코치) · 88 안도 유야 (투수코치) · 90 쿠보타 토모유키 (투수코치)
83 시마다 무네히코 (배터리코치) · 73 미즈구치 에이지 (타격코치) · 77 이마오카 마코토 (타격코치)
81 바바 토시후미 (내야수비·주루코치) · 74 후지모토 아츠시 (내야수비·주루코치) · 96 츠츠이 소 (외야수비·주루·전력분석코치)
2군 86 와다 유타카 (2군 감독) · 85 후쿠하라 시노부 (투수코치) · 72 에구사 히로타카 (투수코치) · 89 와타나베 료 (투수코치)
87 노무라 카츠노리 (배터리코치) · 84 히다카 다케시 (배터리 코치 보좌) · 91 키타가와 히로토시 (타격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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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칭스태프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육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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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타 카츠오의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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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신 타이거스 우승 엠블럼 V2.svg
NPB 일본시리즈
우승코치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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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1985

파일:센트럴 리그 로고.svg 1984~1987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유격수 부문 골든글러브
야마시타 다이스케
( 타이요/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히라타 카츠오
( 한신 타이거스)
타츠나미 카즈요시
( 주니치 드래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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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히라타카츠오.png
<colbgcolor=#fefe01><colcolor=#000000> 한신 타이거스 No.78
히라타 카츠오
平田勝男 | Katsuo Hirata
출생 1959년 7월 31일 ([age(1959-07-31)]세)
나가사키현 마츠우라시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포지션 유격수, 2루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카이세이중 - 카이세이고교 - 메이지대학
프로입단 1981년 드래프트 2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82~1994)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1군 내야수비주루 코치 (1997~2001)
한신 타이거스 1군 수석코치 (2004~2006, 2015~2018[1], 2023~2024)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2007~2010, 2013~2014, 2019~2022, 2025~)
응원가 구 응원가[2] 신 응원가[3]
1. 개요2. 프로 입단 전3. 현역 시절4. 지도자 시절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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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신 타이거스 소속 야구선수 및 현 한신 1군 수석코치. 1980년대 한신의 주축 유격수로 활약한 원클럽맨이자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주축 멤버 중 1명이다.

2. 프로 입단 전

마츠우라시 출신으로 인접해 있는 나가사키시의 카이세이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야구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6년부터 유격수 주전 자리를 잡았고, 그 해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에 출전해 준결승전에서 오사카부의 야구명문 PL학원고등학교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아쉽게 패배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7년엔 주장을 맡아 선발 고교야구 대회에 출장하여 개막 선서를 했으나 첫 경기에서 코치현 대표인 나카무라 고교에게 패하며 1경기만에 짐을 싸야 했다. 이후 메이지대학으로 진학하여 준수한 번트 실력 등을 뽐내며 통산 83경기 출장 307타수 96안타, 타율.313, 2홈런, 39타점. 베스트 나인 4회를 기록하며 프로의 주목을 받았고, 1981년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에 2순위로 지명되며[4] 프로에 입문했다.

3. 현역 시절

데뷔 시즌인 1982년에는 겨우 10경기 출전에 그쳤다. 그러나 다음 시즌인 1983년에 주전 유격수를 맡았던 마유미 아키노부가 시즌 중간에 부상으로 이탈하며 히라타에게 기회가 찾아왔고, 기회를 잡은 히라타는 마유미의 빈 자리를 훌륭히 메꾼 데 이어 마유미가 돌아온 이후에는 주전 2루수 오카다 아키노부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오카다의 빈 자리도 훌륭하게 메꾸며 눈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내야진의 빈 자리를 꾸준히 메꾸면서 히라타는 1983 시즌에 100경기 출장(83시합 선발출장), 타율 .250 2홈런 28타점의 성적으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3년차인 1984년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찬 히라타는 이 해 128경기 출전과 함께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타석을 채웠고, 이 시즌부터 1987년까지 4년 연속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획득하며 수비의 달인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바로 다음 시즌 하위타선에 해당하는 7번 타순에서 .261의 타율에 7홈런 53타점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5] 이 시즌엔 본인의 커리어 첫 만루홈런도 기록하는 등 하위타선에서 팀의 공격을 지탱함과 동시에 뛰어난 유격수 수비와 작전수행 능력을 과시하며 한신 역사상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1988년부터 신임 감독으로 취임한 무라야마 미노루의 리빌딩 구상에 의해 와다 유타카에게 유격수 자리를 내주면서 백업으로 밀려났고[6], 이후 와다나 쿠지 테루요시가 센터 내야수로 부상하는 가운데 대타 대수비 등의 백업 멤버로 나름대로 활약하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1994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통산성적은 979시합 출장, 타율 .258/OPS .635, 633안타 23홈런 220타점이며 이외에도 희생번트 138개를 기록했다.

4. 지도자 시절

은퇴 후 마이니치 방송 해설가 및 스포니치 평론가를 거쳐서 1997년 한신에 코치로 복귀했다. 2002년엔 대학 대선배인 호시노 센이치가 감독에 취임하자 전속 운전기사 및 홍보담당을 맡기도 했으나 호시노가 사퇴하고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이 된 2005년부터 다시 코치로 복귀했고, 2군 감독을 맡았던 2010년에 2군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문제는 하필 이 시기가 33-4, Vやねん 등 여러 흑역사가 나와서..

이러한 실적 덕분에 당시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의 형편없는 지휘력을 비판하던 한신아재들이 마유미의 후임 감독으로 히라타를 지지하기도 했으나, 끝내 1군 감독에 오르지 못한 채 본인의 후배들인 와다 유타카, 카네모토 토모아키, 야노 아키히로의 취임 및 오카다 아키노부의 복귀가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한신에서 계속 코치를 역임 중에 있다.[7] 2021년엔 2군 공식전 연승 일본 신기록을 경신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또 다시 2군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23년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으로 복귀하자 1군 수석코치로 이동했고, 2군 감독에는 와다 유타카가 다시 돌아왔다.

5. 기타

6. 관련 문서



[1] 2016~2018년은 1군 주루코치도 겸직. [2] かっとばせ平田 かっとばせ平田 かっとばせ平田 それホームラン (날려버려 히라타 x3 자 홈런) / 은퇴 후에 성씨가 비슷했던 히라오 히로시에게 유용되기도 했다. [3] ああ蝶が舞い 蜂が刺す 魅せる男 平田勝男 絵になる男 頼むぞ平田 (아아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나이 히라타 카츠오 본이 되는 사나이 부탁한다 히라타) [4] 한신 타이거스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가 해당 순번에 중복으로 히라타를 지명했고 제비뽑기에서 한신이 이겨서 히라타는 한신 소속이 되었다. 히라타의 영입에 실패한 타이요는 대체 2순위로 토시바 사회인야구팀 출신의 외야수 키쿠치 쿄이치를 지명했으나 키쿠치는 6년간 42경기 7안타에 그친 채 1987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5] 당시 한신 타선은 워낙 출중한 실력을 자랑한 강타자들이 즐비했던 덕분에 1940년대 후반 타이거스의 강타선이었던 '다이너마이트 타선'에 빗대어 뉴 다이너마이트 타선이란 별명으로 불렸는데, 1번 타자 마유미 아키노부가 타율 .322 34홈런 84타점으로 공포의 1번타자라는 이명을 자랑했고 백스크린 3연발로 대표되는 랜디 바스 - 카케후 마사유키 - 오카다 아키노부가 도합 129홈런 343타점을 기록한 거포 클린업 트리오를 구성했다. 2번 타자로는 롯데 시절 1974년 일본시리즈 MVP 수상경력이 있었던 베테랑 히로타 스미오(85시합 타율 .296 5홈런 22타점 2도루)와 1982-83시즌에 2년 연속으로 외야수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한 키타무라 테루후미(114시합 타율 .262 3홈런 19타점 22도루)가 출전 기회를 나눠가면서 마유미와 바스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수행했으며 여기에 하위타선에서도 7번을 맡은 히라타를 비롯하여 6번에는 사노 노리요시가 13홈런 60타점을 기록했고, 8번 키도 카츠히코도 13홈런에 32타점으로 무시 못할 타격을 보여줬다. [6] 당시 한신은 노쇠화가 찾아온 히라타를 대체할 차기 유격수로 타구치 소의 획득에 나서려고 했으나, 타구치가 한신에 가고 싶지 않은 10가지 사유를 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터뜨리는 사상 초유의 드래프트 지명 거부 선언을 일으켜 망신을 당하는 바람에 지명 계획을 취소해 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은 당시 한신과 타구치의 모교인 간세이가쿠인대학 간의 사이가 험악했기 때문에 대학 관계자들이 타구치를 한신에 입단시키지 않기 위해 타구치에게 지명 거부를 종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2001년 FA를 선언한 타구치를 한신이 재차 영입을 시도했으나 타구치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을 선택하며 이조차도 무산되고 말았다. [7] 마유미 이래 한신 감독이 된 와다, 카네모토 토모아키, 야노 아키히로 모두 히라타 본인보다 나이가 적다. 심지어 2022년 교류전 종료 후 열린 주주총회에서도 히라타 1군 감독 승격 여론이 후순위로 밀린 채 오카다 아키노부의 감독 재취임 여론이 힘을 얻는 모습이 나왔고, 결국 2023년 오카다가 감독으로 돌아왔다. [8] 다른 후보 중에는 호시노 감독의 이름과 발음이 같은 1001(센이치)도 있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호시노 감독의 생일도 아니고 본인 생일로 번호판 숫자를 정했는지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