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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지 테루요시 久慈 照嘉, くじ てるよし / Teruyoshi Kuj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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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 1969년 4월 19일 ([age(1969-04-19)]세)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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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일본 야마나시현 코후시 |
포지션 | 2루수, 유격수 |
투타 | 우투좌타 |
학력 | 도카이대학 부속 코후 고등학교 |
프로입단 | 1991년 드래프트 2위 |
소속팀 |
일본석유(1988~1991) 한신 타이거스 (1992~1997) 주니치 드래곤즈 (1998~2002) 한신 타이거스 (2003~2005) |
지도자 |
한신 타이거스 1군 수비, 주루 코치 (2009~2013) 한신 타이거스 1군 내야수비 및 번트코치 (2016~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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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 한신 타이거스 선수 및 1군 내야수비, 번트담당 코치.2. 프로 생활 전
야마나시현 코후시 출신으로 초, 중, 고등학교를 전부 고향인 코후에서 다녔다. 코후 고등학교 시절엔 타츠나미 카즈요시와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다만,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프로에 데뷔한 타츠나미와는 달리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고 일본 석유 사회인 야구단으로 들어가서 4년간 활약하다가 1991년 드래프트를 통해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면서 프로에 데뷔했다.3. 한신 타이거스 시절
당시 극심한 암흑기에 빠져있던[1] 한신 타이거스의 주전 내야수로 급부상, 첫 시즌부터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차면서 타격에선 타율 .245, 0홈런 으로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2] 신인치고는 준수한 수비력으로 아쉬운 타격을 보완하면서 이해 한신을 리그 2위로 이끈 공로로 그 해 신인왕을 수상했다. 이 신인왕은 센트럴리그 최초의 무홈런 타자 신인왕이기도 했다.[3][4]당시 키스톤을 함께 이루던 와다 유타카, 클린업이었던 신조 츠요시[5], 히야마 신지로와 함께 4466566664라는 비밀번호를 작성하던 한신 타이거스의 암울한 시기에 나름의 빛이고 희망이었으나, 1992~1996 다섯 시즌 동안 실책은 유격수임을 감안해도 적다는 말을 못할 정도였다. 각각 17-13-11-11-18, 수비율은 .966-.975-.982-.972-.987을 기록했다. 여기에 타격에서도 아쉽기 그지 없었는데, 역대 최초 무홈런 신인왕이란 기록에서 보이듯이 통산 홈런이 단 6개에 한 시즌 최다 홈런은 겨우 3개였다.[6]
4.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1997 시즌 종료 후, 준주전 외야수던 세키카와 코이치와 함께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주니치에서는 쿠지를 주전 2루수로 쓰려고 했는데, 당시 주전이던 토리고에 유스케[7]가 탈세 혐의에 걸려 1998 시즌에 뛰지 못하게 되어서 그 대체자로 쿠지를 점찍은 것이었다. 주니치에서는 타이호 야스아키[8]와 야노 아키히로[9]가 트레이드로 건너왔다. 주니치로 간 그는 이종범을 외야로 보내고[10]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는 듯 했으나[11], 이마저도 오래는 못 갔고, 2001년 이바타 히로카즈가 포텐을 터뜨리며 유격수 주전 자리에 앉자[12] 백업으로 밀려나며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13]5. 한신 타이거스 복귀
2002시즌 종료 후 주니치에서 전력외 통보를 받았고, 2003년 한신 타이거스에 재입단해 2005 시즌까지 뛰고 은퇴했다. 통산 성적은 1199경기 811안타 6홈런 타율 .257 / 출루율 .343 / 장타율 .307 / OPS .650.6. 지도자 경력
2009년부터 13년까지 한신의 내야 수비 및 주루코치를 맡았고, 13시즌 종료 후 잠시 평론가 생활을 하다가, 2016년에 다시 한신에 코칭스탭으로 들어와 2022년까지 1군 내야수비 및 번트 담당 코치로 재직했다가, 2022 시즌 후 사임하였다. 이후 2023년 5월 고베국제대학부속고등학교 여자 연식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
이미
4466566664 이전인 1987년 구단 사상 최악인 승률 .331로 최하위를 찍으며 암흑기에 돌입했다. 이후 1989년 5위를 기록한 것 외엔 1992년 전까지 줄창 최하위만 찍어대며 66566이란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는데, 1992년의 반짝 2위가 아니었으면 윗 항목의 숫자들을 더 연장시켜 버릴 뻔했다.
[2]
그래도 그 해 센트럴리그 최다인 3루타 8개를 기록하며 그럭저럭 봐줄 만한 성적은 냈다.
[3]
이후 2009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외야수
마츠모토 테츠야가 2번째 무홈런 신인왕 수상자가 되었다. 아쉽게도 마츠모토는 신인왕 시즌 이후엔 이렇다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결국 통산 0홈런으로 선수생활을 끝마쳤다.
[4]
KBO와
퍼시픽 리그는 아직까지 무홈런 신인왕이 나온 적이 없다. 2012년
서건창과 2014년
박민우가 홈런 1개로 신인왕에 선정된 적은 있다.
[5]
쿠지와 마찬가지로 1992년 주전
외야수로 정착하여
규정타석엔 미달했지만 타율 .278, 11홈런 46타점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함께 신인왕 경쟁을 벌였으나 아쉽게 수상에 실패했다.
[6]
물론 당시만 해도
유격수의 덕목은 수비여서 타격에서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어도 용납이 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공수를 두루 갖춘 유격수인
토리타니 타카시,
사카모토 하야토가 대두한 이후부턴 유격수도 이전보단 타격을 조금 더 중시하게 되었다.
[7]
현
치바 롯데 마린즈 2군 감독
[8]
1997 시즌이
나고야 돔 입주 첫 시즌이었는데 홈런이 1/3토막이 나면서 완벽히 망했다.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팀 체질 개선을 위해 쿠지와 세키카와를 원했던 거고 그 트레이드 대상으로 지목됐다.
[9]
1991년 주니치 입단 이래 포수로서는 출전 기회가 적었다.
[10]
다만,
이종범/선수 경력에 나온 대로, 당시
호시노 센이치 주니치 감독은 일찌감치 이종범을 주전 유격수가 아니라 외야수로 분류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외야수로 전환한 이종범은 당시 주니치에 있었던
이상훈,
선동열과 함께 주니치의 1999 시즌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1]
원래는
후쿠도메 고스케를 유격수로 세우려고 했으나 후쿠도메는 그 이종범보다도 더 유격수에 안 맞아서 결국 이종범과 후쿠도메는 나란히 외야로 가게 되었다. 다만
이종범/플레이 스타일에 적힌 대로 과연 이종범의 수비가 유격수에 안 맞았느냐에 대해선 말이 많다.
[12]
이바타는 이 때부터
아라키 마사히로와 같이 아라이바 콤비를 이뤄 2013년까지 주니치의
2-유간을 지켰다.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역대 최강의 키스톤 콤비다.
[13]
여담으로 이 해 한정으로 등록명을 '테루'(テル) 딱 두 글자로 줄였던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