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7:47:00

몽타르지 공방전

몽따흐쥐 공방전에서 넘어옴

백년전쟁의 전투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제2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킹혼 전투 더플린 무어 전투 아난 전투 할리돈 힐 전투 컬블린 전투
1335~1336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침공 던바 공방전 네빌스 크로스 전투 네스빗 무어 전투 베릭 공방전
번트 캔들마스
제1기
카잔트 전투 아르네뮤이덴 해전 영국 해협 전역 캉브레 공방전 슬로이스 해전
생오메르 전투 투르네 공방전 베르주라크 전투 오베르슈 전투 에기용 공방전
1차 캉 공방전 블랑슈타크 전투 크레시 전투 랭커스터 공작의 슈보시 1차 칼레 공방전
루나롱주 전투 칼레 전투 윈첼시 해전 생장당젤리 공방전 아르드르 전투
긴 공방전 흑태자의 슈보시 브레퇴유 공방전 푸아티에 전투 자크리의 난
샤르트르 공방전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 전쟁
샹토소 전투 엔봉 공방전 반 공방전 브레스트 해전 모를레 전투
생폴드레옹 전투 라 로슈데리앙 전투 30인의 결투 모롱 전투 렌 공방전
오레 전투
제2기
브리네 전투 코르슈렐 전투 나헤라 전투 몬티엘 전투 리모주 공방전
퐁발랭 전투 라 로셸 해전 시세 전투 곤트의 존의 슈보시 와트 타일러의 난
루즈베케 전투 이프르 공방전 브레스트 공방전 마게이트 해전 오터번 전투
포르투갈 공위기
아톨레이로스 전투 리스본 공방전 알주바호타 전투 발베르데 전투
글린두르의 난
마이니드 헤드겐 전투 브린 글라스 전투 슈루즈버리 전투 스톨링 다운 전투 푸울 멜린 전투
제3기
아르플뢰르 공방전 아쟁쿠르 전투 발몽 전투 셰프드코 해전 2차 캉 공방전
루앙 공방전 보제 전투 모 공방전 크라방 전투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
베르뇌유 전투 생잠 요새 공방전 몽타르지 공방전 오를레앙 공방전 루브레 전투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 1차 파리 공방전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
콩피에뉴 공방전 안통 전투
제4기
푸앙세 공방전 라니쉬르마른 공방전 제르베로이 전투 생드니 공방전 2차 파리 공방전
2차 칼레 공방전 타르타 공방전 퐁투아즈 공방전 디에프 공방전 포미니 전투
잭 케이드의 난 블랑크포르 전투 카스티용 전투 }}}

파일:몽따흐쥐 공방전.jpg
1. 개요2. 상세

[clearfix]

1. 개요

백년전쟁 시기인 1427년 7월 15일 ~ 9월 5일,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상트르발드루아르 지방의 몽타르지 요새(Château de Montargis)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공방전.

2. 상세

1427년, 잉글랜드 및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의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은 앙주, 메인 지역을 어느정도 복속시킨 뒤 파리에서 60마일 떨어진 몽타르지로 시선을 옮겼다. 이곳은 렁 강, 베흐니쏭 강의 교차점에 자리잡은 곳으로, 운하가 잘 깔려 있어서 상업 및 무역 활동이 활발했다. 또한 루아르 강, 센 강과도 가까워끼에 프랑스 남부로의 해운 수송에도 적합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이곳을 공략하면 막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고, 아직도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대항하고 있는 도팽 샤를을 압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에게 도시를 공략하라고 명령했다.

1427년 7월 15일, 워릭 백작은 3,000 병력을 이끌고 몽타르지를 포위했다. 하지만 몽타르지 요새가 상당히 강력한 방어력을 갖췄고 운하가 사방에 깔려 있어서 포위망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기에 공략이 쉽지 않았다. 그는 포병대를 활용해 포격을 며칠간 벌였지만, 수비대와 주민들이 매일 밤 손상된 곳을 수리하고 대포로 맞대응했기 때문에 좀처럼 뚫지 못했다. 그러나 2달간 포위가 이어지면서, 도시 내에서 기근의 징조가 일기 시작했고 목재와 탄약도 고갈될 조짐을 보였다.

한편, 샤를은 몽타르지를 구하기로 결정하고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몽타르지를 구원할 병력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이에 맨앳암즈 1,600명과 라 이르, 장 포통 드 생트라유, 질 드 레 등 유수의 기사들이 모집되었다. 하지만 리슈몽은 마지막으로 남은 정예 병력을 이번 전투에서 손실할 것을 우려해 출진을 그만두려 했다. 이에 격분한 샤를은 리슈몽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25세의 젊은 귀족 장 드 뒤누아를 새 지휘관에 선임했다. 구원군은 루아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북상하여 9월 2일 몽타르지 인근에 상륙했다. 당시 점심을 먹고 있었던 잉글랜드군은 적이 나타나자 전투를 벌이기 위해 로잉 강을 도하했다.

이때 수비대가 수문을 열자, 홍수가 발생해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일부 잉글랜드군이 고립되어 수비대의 공격을 받았다. 강을 건너간 잉글랜드군 역시 프랑스 구원군의 공격을 받았고, 두 잉글랜드 군대 모두 압도되어 모든 공성 장비와 대포를 남겨두고 도주했다. 워릭은 최선을 다해 일부 병력을 수습한 뒤 파리로 귀환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500명 이상이 전사했고 600명 이상이 생포되었다. 샤를 7세는 적을 상대로 용감하게 항전한 몽타르지에 세금을 면제하는 등 갖가지 특권을 부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