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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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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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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长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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皖南古村落 - 西递、宏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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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만리장성
중국어 长城
영어 The Great Wall
프랑스어 La Grande Muraille
국가·위치
[[중국|]][[틀:국기|]][[틀:국기|]]
허베이성, 베이징시, 톈진시, 산서성,
내몽골 자치구, 섬서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간쑤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 산둥성, 허난성,
후베이성, 후난성, 쓰촨성, 칭하이성
랴오닝성, 지린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왜곡]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438
등재연도 1987년
등재기준 (ⅰ)[2], (ⅱ)[3], (ⅲ)[4], (ⅳ)[5], (ⅵ)[6]

파일: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_4.png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colbgcolor=#CCC,#666><colcolor=#000,#FFF> 명칭 한국어 만리장성
간체 长城
번체 長城
영어 Great Wall
몽골어 ᠴᠠᠭᠠᠨ ᠬᠡᠷᠡᠮ/Цагаан хэрэм
분류 고건축
(古建筑)
시대 춘추시대~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AAAAA급~AAAA급[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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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666><colcolor=#000,#FFF>일련번호 1-0101-3-054: 바다링(八达岭)[8]
1-0102-3-055: 산하이관(山海关)
1-0098-3-051: 쥐융관(居庸关)
1-0103-3-056: 자위관(嘉峪关)
3-0210-1-030: 위먼관(玉门关)
3-0058-3-006: 진산링(金山岭)
4-0032-1-032: 장성(魏长城)
4-0034-1-034: 구양 장성(固阳秦长城)
4-0132-3-054: 자징관(紫荆关)
4-0136-3-058: 주먼커우(九门口)
5-0442-3-248: 나머지
7-1972-3-008: 후산(虎山)[왜곡]
소재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톈진시, 칭하이성, 산둥성, 간쑤성, 섬서성, 내몽골 자치구, 허베이성, 산서성, 닝샤 후이족 자치구, 허난성
랴오닝성, 지린성[왜곡]
등재 1961년 ~ 2001년
차수 제1~5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파일:더 그레이트 월.jpg
<colbgcolor=#CC0000>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장성
파일:중국 금산령.jpg
진산링(金山岭) 구간의 만리장성

1. 개요2. 역사
2.1. 전국시대2.2. 진•한 시대2.3. 명•청 시대2.4. 근현대
3. 시황제와 관련된 설화4. 관광5. 보존 상태6. 축성법7. 구간
7.1. 관문7.2. 팔달령 (바다링) 장성7.3. 고북구 (구베이커우) 장성7.4. 가욕관 (자위관) 장성7.5. 둔황의 한대장성
8. 논란
8.1. 중국 동북공정 한반도 포함 시도8.2. 길이8.3. 우주에서 보인다?
9. 여담10. 대중문화에서11. 같이보기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不到长城非好汉。"

"장성에 가보지 않은 자, 사내 대장부(好漢)라 할 수 없다."
마오쩌둥
만리장성()은 중국의 대표적인 성벽으로, 흉노족이나 몽골족과 같은 북방 유목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국시대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후대 왕조에 의해 확장, 보수되어 온 인류 최대의 성곽 구조물이다.

진시황의 집권기에는 가장 강했던 북방 이민족이 흉노족이었고, 지금의 만주 땅에 있었던 숙신이나 고조선 예맥인들은 중원에 대한 적극적인 진출은 시도하지 않았으므로, 본질적인 목표는 흉노족의 남침에 대한 예방차원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후대 왕조들은 약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기타 다른 민족들의 방어에도 아주 잘 써먹었다. 사실 이민족 침략 방지가 주목적이지만 이민족의 재산인 가축이 못 넘어오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경을 넘어선 가축을 핑계로 이민족이 넘어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리장성의 북쪽 경계는 오늘날의 내몽골 자치구의 남쪽 경계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만리장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10,000보다 조금 더 길다. 10,000리는 약 4,000km이고, 만리장성의 길이는 6,350km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0,000리의 약 1.5배가 된다. 만오천리장성 중국 기준을 적용해 10,000리를 5,000km로 환산해도 12,700리 정도 된다. <가족오락관> 1006회(2004.8.7)에서 가문의 왕발 기출문제로 나왔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이 아니라 그냥 장성이라고 부른다.

한국어로는 '장성'이라 발음되며, 중국어로는 '창청'으로 발음된다. 이름을 본떠서 만든 창청자동차(长城汽车) 라는 국유자동차회사도 있다. 만리장성의 굽은 커브를 전부 펴면 그 길이는 무려 한반도를 감싸고도 남으며, 비행기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이다. 동쪽 끝은 허베이성 산해관 산하 노룡두이며, 서쪽 끝은 간쑤성 가욕관(자위관) 제1돈이다.

2. 역사

파일:external/images.chinahighlights.com/0f0dd3d7219d4141a98f9d6a.png
파일:external/www.emersonkent.com/great_wall_of_china.jpg
만리장성의 위치

2.1. 전국시대

중국 최초의 장성은 초나라가 쌓은 장성이었다. 초나라는 남방에서 광활한 영토를 영유하면서 그를 바탕으로 중원 국가들의 영토를 빼앗으며 서서히 북진했다. 그렇게 얻은 영토 중에는 현재의 허난성 남부의 영토도 있었는데, '중원'이라 불리는 하남성 일대는 그야말로 거대한 평원이었으므로, 국경으로 삼을 만한 자연 경계가 없었다. 초나라가 차지한 이 영토는 삼면으로 다른 중원 국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초나라는 이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300km가 넘는 장성으로 영토 전체를 둘러싸는 형태의 장성을 건설했다. 이것을 장성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 장성 건설은 전국시대 강대국들의 트렌드가 되었다. 전국시대 초기, 영역국가로서 재빠르게 변법에 성공한 위나라는 서쪽의 강국인 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서쪽에 장성을 쌓았다. 이 장성은 지금의 함곡관보다 훨씬 서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서안시 동쪽에 위치한 화산 북쪽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길이는 대략 60km 정도로, 진령산맥과 진북산맥을 잇는 형태로 건설했다.

제나라는 남쪽에 장성을 건설했는데, 이는 당시 강국이었던 오나라 월나라, 그리고 초나라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한나라 또한 위나라와의 접경지대에 짧은 장성을 건설했다.

한편, 조나라는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는데, 그 영토 자체가 유목과 농경의 경계지를 대부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목민족과 접촉이 많았으며, 적극적으로 이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 지역 또한 유목민족의 남하를 막을 만한 자연 지형이 없었기에 장성 건설은 필수였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 우리나라는 자연적인 만리장성이 깔린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역시 북방민족과 접해있었던 연나라는 기동성이 우수한 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을 쌓은 것으로 유명한 진나라 역시 전국시대 때부터 적극적으로 장성을 활용했다. 건국 초기 때부터 상대해온 오랑캐인 , 그리고 북방의 흉노 등의 유목민족을 상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장성 축조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내지에 위치한 나라들은 전자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북쪽에 위치한 국가들은 후자의 목적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2.2. 진•한 시대

파일:한대 장성.jpg
<colbgcolor=#CC0000> 중국 서북 돈황의 고비에 있는 만리장성 시작부의 유적으로, 한나라 시기에 건설되었다.[11]판축기법이라고 한다.]

전국시대 조나라, 연나라, 진나라 등 세 나라가 쌓은 장성을 진시황이 통일 이후 연결해 지은 것이 시초였다. 당시 주관자는 몽염이었다. 하지만 이 장성은 진나라의 붕괴와 함께 한동안 역사의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전한 세종 무황제가 한 번 더 대규모 공사를 해서 장성의 위치가 이전되었으며, 그 길이도 진나라 시절보다 길어졌다. 그 이후 후한시대까지는 잘 유지되어 왔지만 후한 말 이후의 사회 혼란과 분열이었던 위진남북조시대에 제대로 손질되지 않아 서서히 무너져 유명무실해졌다.

이후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시 완성되었다. 그래서 현재 부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의 장성을 말한다. 진대와 명대 장성은 위치도 상당히 달라서 사실상 다른 장성이다. 오늘날에도 진•한 시대에 쌓은 장성의 유적이 남아있다.

진시황이 연결해서 지은 장성은 지금의 벽돌이 아닌 흙을 이용해 지은 토성의 형태였고, 높이도 높지 않은 데다가, 지켜야 할 영역이 워낙 넓다보니 감시도 소홀해서 사람이나 말이 맘만 먹으면 쉽게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곡괭이 등으로 성벽을 허문 다음에 우르르 몰려가서 만리장성 아래를 부수면서 박살낸 적도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진나라 다음 왕조인 전한 시기만 봐도 고조 유방부터 무제 유철이 등장하기 전까지 북방의 흉노에게 관광당하기에 바빴고, 삼국시대와 서진시대를 거쳐서는 북방이 전부 5호 등의 북방 민족의 손에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도 거란족 요나라, 여진족 금나라, 몽골족 원나라 등 숱하게 황하 이북을 북방 민족에게 넘겨줬던 시기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장성의 효용성 자체에 큰 의문부호를 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정말 철옹성 같은 방어를 생각하고, 만리장성을 축조했다면 손 안 쓰고 떡 먹으려는 놀부 심보나 다름없다. 해자, 창검벽, 외곽 성벽, 이중 성벽 등등 온갖 방호시설을 두루 갖춘 성일지라도 함락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달랑 성벽 한 겹 둘러놓고 군대의 침공을 막아내겠다니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시기 만리장성의 용도가 북방 기마민족의 남침에 대한 방어선이 아니라 동•서 교역을 하는 상단을 보호하는 역참과 내몽골과 중국을 가르는 국경선으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길목을 통제하고 대규모 적의 침공을 최소 지연시키거나 최대한 방어해내는 것으로서 만리장성은 그 가치를 충분히 해냈다. 그 역할을 할 자연적인 지형이 부족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즉 만리장성의 역할은 철옹성 같은 방어요새의 구축이 아니라 경계의 구축이었다.

실제로 백등산 포위전 이후 한고조 유방과 흉노 묵돌선우 간의 협상에서 만리장성을 흉노와 한나라 간의 국경으로 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리장성이 유목민의 침공을 발견하고, 잠깐이라도 지연하는 동안 후방에서 방어를 위한 기동군을 편성하거나 거점의 요새화를 하는 등 실질적인 방어 준비를 할 수 있지만, 장성이 없으면 그럴 시간조차 못 버는 것이다. 역할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저 성이라는 단어에 매달려 비판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경계를 만드는 일은 만리장성 외에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이다. 가장 비슷한 사례로 이란 사산 왕조 중앙아시아 훈족 에프탈족, 튀르크족을 막기 위해 북동쪽 중앙아시아 방향으로 수백 km에 걸쳐 쌓았던 '고르간 장성'이 있는데, 이는 만리장성이 있는 중국을 제외하면 가장 견고한 장성이었다. 이외에 픽트족을 막기 위해 로마인들이 쌓았던 브리튼 섬의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나 코린토스 지협에 쌓은 헥사밀리온 등이 있다. 근대에도 비슷한 일이있었는데 마지노선이 대표적이다.

중국은 의외로 평야인 지역이 아주 많다. 특정 방어 거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곳만 뚫으면 중국은 영토 자체가 워낙 거대하여 허허벌판인 경우가 대다수다. 전체적으로는 산지여도 그 지역의 평야 면적이 한반도 수준이거나 전국 팔도 중 하나랑 맞먹거나 하는 수준이다. 즉 평야가 여간한 국가에 맞먹는 넓이였다. 그래서 그런 산지에 사는 사람들조차 다수가 평지에 도시 건설을 해서 평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장성이 없었다면 화북은 유목민족의 침공 및 약탈에 더 시달렸을 것임이 자명하다. 실제로 석경당 연운 16주를 거란에게 내주자 이후 수백년 동안 한족 국가들은 만주와 몽골의 이민족들에게 크게 시달리게 되었고, 이민족들은 중원에 거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가 이런 나라들로, 이들 이민족 국가들은 명나라가 세워지고 나서야 물러나게 되었지만, 명나라는 만주족 청나라에게 중국 대륙을 넘겨주고 말았다.

즉 만리장성은 유목과 농경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화북과 몽골 고원에는 지형을 이용할 수 있는 방어선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경계선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을 구분해둔 것이다. 실제로 유목민들이 돌아다니며 살았던 지역인데도 만리장성을 쌓은 다음에는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비록 마음만 먹으면 만리장성을 돌파하기는 용이했으나, 대군이 통과할 길목은 한정되어 있기 마련이었으며, 이로 인해 만리장성은 마치 강과 같은 방어능력을 보여주었다. 강가를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고 해서 무적의 방어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입장에서는 작전 지역을 우회하거나, 돌파하기 위해 방법을 찾아야 하므로 방어의 효과는 충분한 것이다.

명청교체기때 청나라는 이미 만리장성을 돌파할 수 있었으나, 만리장성을 돌파한 다음에는 보급선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사리 침공하기가 어려웠다. 보급선이 끊기면 작전 기한이 매우 제한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나라의 침공은 산해관을 통과한 다음에나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예친왕 도르곤에게 항복하여 산해관의 통제권을 청나라군에게 내어주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colbgcolor=#CC0000> 만리장성의 다큐멘터리

2.3. 명•청 시대

파일:external/www.travlang.com/great-wall-of-china_aa.jpg

명나라는 제8대 헌종 성화제의 치세때인 1473년부터 산시 일대에서 40,000여 명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485년까지 거의 960km에 달하는 토성과 망루, 요새를 건축하기에 이르렀다. 1482년에는 몽골군이 침략했다가 성벽에 막혀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가기도 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될 점은 원나라와 명나라 초기까지 변경 일대에는 만리장성이 없었다는 점이다. 예전에 진시황이 만든 장성은 오래 전에 무너졌으며, 이후 한나라와 금나라를 비롯한 여러 왕조가 장성을 다시 쌓았다. 그러나 금나라가 세운 장성들은 명나라의 북방 국경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으며,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명나라 중기부터 쌓기 시작한 장성은 서북방의 오르도스 일대에 국한되었으며, 동쪽 일대의 장성은 가정 연간인 1540년대 이후부터 축성되었다. 제11대 세종 가정제의 치세때 몽골계 튀메드부의 수장이었던 알탄 칸에 의해 베이징이 포위되는 사건( 경술의 변)이 일어난 이후, 제12대 목종 융경제가 되어서야 몽골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현재와 같은 벽돌을 이용한 장성의 형태로 굳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이 기존 한나라의 영역보다 상당히 남쪽으로 축소되었으므로, 사실상 장성을 신축해야 하는 데다가 공법의 변화까지 겹쳐서 장성의 재건설은 장기간에 걸쳐서 천천히 지속되었다. 그리고 장성의 수축은 베이징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역 지휘관의 재량에 따른 판단으로 임의적으로 수축된 것이었고, 그래서 성벽의 재료도 지역마다 달라 벽돌로 지은 곳도 있었고, 바위로 쌓은 곳, 흙벽돌로 쌓은 곳 등등이 있었다. 일부 구간은 결국 명나라가 이자성의 농민 반란으로 멸망당하는 시점인 1644년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구간은 완성되어서 상당한 방어력을 부여받았으며, 대표적인 곳이 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이었다. 실제로 명대 만리장성은 만주족인 청나라군이 돌파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멸망한 사실을 안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반란군을 토벌할 때 지원군으로 도르곤의 청나라군을 이용하기 위해 협약을 맺고, 그냥 문을 열어줘서 통과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대쯤 되면 공성기술이 상당히 발달되었으므로 설령 만리장성이 석조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양상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산해관 같은 강력한 점방어가 가능한 몇몇 지역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성벽 한 겹인지라 대군으로 밀고 오면 뚫렸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북방의 몽골까지 지배하는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만리장성의 효용가치가 없어서 베이징 근처의 일부 구간만 약간 보수하는 선에 그쳤다.

2.4. 근현대

파일:만리장성 방어전.jpg
1933년 열하사변 당시, 만리장성에 배치된 국민혁명군.

20세기에도 만리장성은 중국 현대사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제국군이 일으킨 열하사변 때 베이징을 점령하려는 일본군과 방어하려는 국민혁명군이 북경 근처의 만리장성과 산해관에서 격전을 벌인 것이다. 결국 1933년 1월 30일 산해관이 함락되었고, 만리장성 산악 지역에서도 전투가 벌어진 끝에 중국과 일본은 그해 5월 <탕구 협정>을 체결하여 휴전했다. 조약에 의거하여 만리장성 하북 구간은 일본군 관할이 되었고, 장성 남쪽 100km 지역은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었다. 따라서 베이징(당시 지명은 베이핑)은 일본군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었고, 4년 후의 중일전쟁 당시 본격적인 교전 개시 후, 불과 5일만에 베이징이 함락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만 중일전쟁이 점차 중국 중남부로 확산되며 화북 지방의 일본 주둔군의 병력수가 줄어든 틈을 타 중국공산당 휘하의 팔로군이 만리장성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기도 했다.

제2차 국공내전 초기에도 만리장성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직 양당간 휴전협정(<쌍십협정>)이 맺어져 있었던 1945년 말 국민당과 공산당은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서로 만주로 병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국민당은 산해관을 장악하고, 당연히 공산당의 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북에 있었던 공산당의 병력은 장성 밖을 넘어가 내몽골를 통과해 만주로 가기보다는 산동반도까지 이동하여 뱃길로 요동반도로 건너가 만주 내륙으로 들어갔다. 장제스는 해군사령관 천사오콴에게 이동하는 공산군이 탄 배를 격침시키라고 명령했지만, 천사오콴은 휴전협정을 깰 수 없다며 불복종했고, 결국 해군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마침내 1946년 국민당이 선공함으로써 국공내전이 재개되었다.

3. 시황제와 관련된 설화

언급되었듯이 만리장성은 단순히 한 사람, 한 왕조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건축 시도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대중매체에서는 진시황의 폭정을 언급할 때 '만리장성을 무리하게 축조하도록 했다'는 점을 강조하여 넣기 때문에 진시황에 의한 축조가 가장 유명하다. 특히나 그중에서 《 초한지》의 영향으로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설화로 '망진자호'(亡秦者胡)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시황제는 말년에 늙지 않고, 죽지 않게 만드는 불로장생초를 얻기 위해 온갖 미신을 믿고 다녔다. 그때 황해를 넘은 땅 삼신산이 있어, 수많은 선인들이 칩거하고 있으며 그곳에 불로장생의 영약이 숨겨져있다는 방술사(方術士)들의 말을 들은 진시황은 그중 한 명인 서복에게 그 영약을 찾아올 것을 명령했다. 서복은 영약을 위해서는 남녀 동자 500명과 금은보화가 필요하다고 했고, 시황제는 흔쾌히 수락했는데, 서복은 그 길로 불로장생초를 구하기 위해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이 사라진 지 3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시황제는 불안하여 노생(盧生)이라는 다른 방술사를 보내어 서복을 찾게 했는데, 노생은 삼신산 중 하나인 봉래산에서 선문고(羨門高)라는 선인을 만나
"이 책에 담긴 뜻을 해석해내면 능히 불로장생의 비결을 얻고, 천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과 함께 《천록비결》(天籙祕訣)이라는 책을 건네받았다. 노생은 《천록비결》을 진시황에게 바쳤으나 《천록비결》은 수많은 은어로 이루어져 도저히 읽을 수 없었고, 이에 진시황은 수많은 학자들을 총동원하여 《천록비결》을 해독하고자 했다. 그 뜻을 해독해내는 데는 결국 실패했으나, 천신만고 끝에 '망진자호'(亡秦者胡)라는 한 글귀를 알아낼 수 있었다. 시황제는 진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은 오랑캐(胡)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만리장성으로 북방의 오랑캐를 막고자 했으나, 胡는 오랑캐가 아니라 이세황제 호해(胡亥)를 뜻하는 것이었고, 진나라는 호해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야사이므로 실제로 이런 일이 존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며, 바리에이션도 꽤 있다. 신선이 건네준 책에서 비롯된 글귀가 아니라 단순히 점쟁이가 내려준 글귀였다는 설도 있으며, 정치적인 문제를 덮을 목적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당시 진나라의 상황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덕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12]

4.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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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팔달령 장성의 비수기 & 성수기 풍경.

중국의 상징 중 하나로써 만리장성은 연간 셀 수 없는 숫자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여행 명소이다. 특히 베이징시 근처 4개 구역이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 중 서양 사람들은 주로 거용관 코스를 선호하고 한국인들은 팔달령(바다링) 코스를 선호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유인즉 서양 관광객들은 진짜로 등산하듯 아래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며 즐기는 경우가 많고, 성질 급한 한국사람들은 케이블카로 얼른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사진 찍고 내려오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그런데 저렇게 등산하듯 올라가던 서양 관광객 중 몇 사람이 10월 말 불어닥친 이상한파와 폭설로 인해 장성 중간에서 발이 묶이는 바람에 동사하는 사고가 발생한 경우가 있다. 위에 써 있는 것처럼 일본인들도 무려 패키지 코스로 갔으면서 발이 묶여 동사한 사례가 있다.

팔달령과 같은 인기 있는 구간을 탐방할 때에는 시기를 잘 고려해야 한다. 중국의 춘절, 노동절, 국경절, 중추절 연휴와 봄 & 가을의 주말 등의 성수기에 방문한다면 유적 구경이 아닌 사람 구경을 하고 오게 될 수도 있다. 만리장성은 외국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엄청난 인기 관광지이다. 30분이면 오를 수 있는 구간도 관광객들이 몰려 정체가 일어나면 1시간이 훌쩍 넘게 걸릴 수 있다. 하지만 비수기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방문한다면 항목 상단의 사진처럼 장성을 전세 낸 듯이 여유롭게 둘러볼 수도 있다. 또한 슬라이딩카를 타게 된다면 성수기일 경우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때도 있으니 대기시간을 반드시 확인하자. 참고로 팔달령 밑에 고속철도(CRH)가 정차하는 역도 있으므로 이를 활용하면 더욱 편하게 관광할 수 있다.

만리장성은 인기 관광지이지만 여전히 2천년 이상 중화 문명의 북쪽 경계로써 중원을 수호하던 방어 시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철원 일대의 휴전선과 같은 군사 시설이었던 것이다. 즉, 단순히 누구나 방문하는, 편하고 친숙한 여행지로 생각하고 갔다가는 예상하지 못한 높이와 최대 40도에 육박하는 경사로 인해 고생할 수 있다. 특히 고소공포증이 있는 경우 어지러움을 느낄 수 있다. 넘어질 듯 강하게 부는 바람도 주의해야 한다. 대부분의 장성 구간은 산지에 형성되어 있고, 그중에서도 높은 능선을 따라 지어졌기에 대기의 이동에 있어 가장 강한 저항력이 발생한다. 특히 북서풍이 부는 겨울에 바람이 제주도 이상으로 강력함을 느낄 수 있으니 옷을 두껍게 입고 가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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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종주를 시도 중인 서양 관광객들

거리가 거리인 만큼 만리장성을 걸어서 완주하는 것은 중국 내에서도 대단하다고 보도되는 일이다. 일단 6,000km나 되는 성곽을 걷는 것이니 서너달 정도의 일정을 잡아야 한다. 건강한 사람이 하루종일 약 60km 정도를 걷는다고 할 때, 만리장성은 험준한 산성을 걷는 것이니 만큼 보통 걷는 것보다 곱절로 힘들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관광구역이야 당연히 관리가 잘 되지만,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면 관리가 되지 않아 수풀이 우거지거나 무너진 부분이 중간중간 있는데다, 몇몇은 국군 제8보병여단의 네발계단처럼 가파르고, 또 몇몇은 그냥 암벽이라 등반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거기다 식수와 식량 문제, 배설 문제, 폭염 또는 혹한 대비 등등까지 고려한다면 어지간한 등산보다 험난해서 조난 사고도 많다. 2012년에는 폭설로 인해 만리장성 등산에 오른 일본인 관광객 3명이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산악투어 상품을 만든 일본 여행회사는 2009년 일본 토무라우시산 조난 사고도 일어난 적 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여행업 등록이 취소되었다. 그저 완성된 성을 따라 계속 걷는 일만도 이러한데 그 비탈지고 긴 거리를 따라 성을 축조한 당시 사람들의 노력을 생각해보면 절로 감탄사가 나올 노릇이다.

중국의 유명한 문화유산이자 상징적 아이콘이다 보니 해외 스타들이 중국을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스타뿐만 아니라 정치인들도 곧잘 방문하며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그 가족들도 중국 방문 시 만리장성에 오른 적 있다. 저스틴 비버는 자신의 보디가드 어깨에 목마를 탄 채 등반해 논란이 있기도 했다.

지금이야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건축물이지만 1970년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방문하기 전까지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지금처럼 크지는 않았다고 한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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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가 잘 안된 장성 구간

한국 관광객들은 잘 시도하지 않긴 하지만 혹여나 팔달령-모전욕-진산령처럼 복원이 이루어진 곳이 아닌 산시성 등의 비인기 구간을 방문하게 된다면 안전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기나긴 장성을 중국 정부가 전부 관리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에 군데군데 허물어진 곳이나 아예 끊겨 절벽처럼 되어버린 곳이 적지 않다. 그러한 구간을 만난다면 원래의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것이 현명하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하단의 보존상태 문단 참조.

5. 보존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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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복원 상태의 만리장성 구간

현재 전체 장성 중, 50%는 예전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 파괴되었다고 한다. 유지보수의 중단 및 지역주민들이 집 지을 돌을 마련하느라, 혹은 관광객에게 팔려고 만리장성의 돌을 빼갔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직도 각종 개발사업으로 파괴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국가 역시 문화유산이니 보존하고 관광용으로 개발하자는 의식 자체가 생긴 것은 별로 오래되지 않았지만, 현재진행형이라면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중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하지만 장성 관리하는데 군인이나 관리인을 각 구간마다 전부 두는 것이 효율성도 떨어지고, 돈이 한두푼 드는 일도 아닌지라 관리가 잘 안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또한 현재 만리장성의 벽의 80% 정도가 훼손되어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름 낙서. 만리장성의 벽은 기본이고 케이블카의 벽과 유리 부분에 낙서가 많이 되어있다고 한다. 케이블카의 색깔이 원래 하얀색이라고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낙서를 칼로 판 후에 판 곳을 화이트 등으로 채우는 짓을 해서 복구도 힘들게 한다고 한다. 만리장성은 중국의 유산이기 전에 세계문화유산이어서 개인이 훼손 시 최소 160만 원에서 최대 800만 원의 벌금을 물게 되어있다. 그러니 낙서하면 벌금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 망신에 집안 망신이므로 절대 하지 말자. 자기 나라의 유산에 누군가 낙서하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알파벳에 히라가나&가타카나는 물론이고 한글 낙서들까지 알아본 중국인이 이를 인터넷에 올려 공론화해 중국 누리꾼 사이에서 엄청나게 욕을 먹기도 했다. 관련 기사

게다가 안 그래도 전술된 낙서와 자연적인 풍화로 성벽이 점차 소실되어 가고 있는 상황인데 지역 주민들이 집을 짓거나 묘지에 석재로 쓰려고 만리장성의 벽돌을 훔쳐가는가 하면, 심지어는 기념품으로 벽돌을 뽑아가는 관광객이나 작정하고 기념품으로 팔아먹을 목적으로 벽돌을 훔치는 장사꾼들까지 나오는 막장화로 수난을 당하고 있다. 기사 1(조선일보) 기사 2(SBS 뉴스 보도). 현지에서 만리장성 벽돌이 하나당 한화 50 위안(5천원) 선에서 팔리고 있다고 한다. 2012년 중국 국가문화유산청의 보고에 따르면 이렇게 소실된 장성의 구간만 해도 전체의 22%에 달하는 1,961km 정도나 된다고 한다. 여기에 서부 간쑤성의 구간은 모래폭풍으로 인한 침식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중국 정부에서 만리장성의 일부 구간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시멘트로 메우는 것에 대해 누리꾼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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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지역의 장성은 댐 공사 때문에 수몰된 장성도 있다고 한다. 아무리 산맥을 따라 성곽을 쌓더라도 강 주변이나 주요 평야지역을 지나가려면 장성의 위치도 낮아지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아이러니한 느낌이 없지는 않다. 중국인들은 이를 수장성이라고 부른다.

현재 예전 명·청시기의 장성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부분은 20%에 불과하다고 하며, 만리장성 중 관광지가 된 구역은 상당수 마오쩌둥이 복구공사를 진두지휘한 곳이다. 그래서 일부 베이징에 가까워서 관광지로 개발된 '포인트' 부분은 잘 정비되어 있지만 조금만 멀리 나가면 관리가 별로 안 되어 바스러져 가는 구간이 많다. 당연히 지키는 사람도 별로 없고, 만리장성의 특성상 쭈욱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장성을 따라 수십 km를 걸어다니는 걷기여행을 하는 사람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당연히 금지지만 만리장성 외곽지역의 인적이 드문 성벽 위에서 텐트치고 야영하면서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부 구간은 복구를 해도, 하필 시멘트로 복원하여 논란이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만리장성 바로 밑에 고속철도 역을 건설하기로 해 논란이 예상된다. #

6. 축성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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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팔달령 장성 구간. 바위를 자연 성벽으로 삼은 점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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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과 전돌이 혼합된 장성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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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이 바다와 만나는 노룡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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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이 하천을 지나는 구문구 구간의 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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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간쑤성 구간의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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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관 서남쪽으로 뻗은 끝자락의 장성

만리장성은 건축학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동서 6천 km에 이르는 구간을 지나는 동안 장성에는 각 지형에 맞는 건축 공법이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평지를 지날 경우 성벽은 방어력 강화를 위해 더 두껍고 높아지게 되고, 산간 지방을 지날 때에는 낮아지는 대신 재해에 견디기 위해 더욱 견고해지며, 물 위를 지날 때에는 홍예 수문이 설치된다. 또한 기후적으로도 온대 기후에서는 일반 벽돌이나 돌을 사용하지만, 건조 기후에서는 진흙을 덧바른 진흙 벽돌을 사용한다. 후자는 부하라, 히바와 같은 중앙아시아의 성벽 혹은 사마라, 페스와 같은 중동 지역의 성벽과 유사한 공법이다.

7. 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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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만리장성에 대해 중국 정부는 각각의 구간을 두어 관리한다. 그중에서도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널리 알려진 곳들을 꼽으라면 베이징 근처의 바다링(八达岭), 구베이커우 (古北口,), 스마타이 (司马台), 쥐융관(居庸关), 진산링(金山岭), 황화청 (黄花城), 젠커우(箭扣), 무톈위 (慕田峪) 장성 등이 유명하다. 그외에 수관장성이라고도 불리는 후루다오의 주먼커우(九门口), 친황다오의 자오산(角山), 논란이 많은 후산 (虎山) 장성 등이 있다.

7.1.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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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의 일부인 옌먼관(雁门关)

만리장성은 초원과 중원의 경계였지만 무조건 교류를 차단할 수는 없는법, 여러 개의 관문을 두어 상호 소통하거나 군사 원정에 활용하였다. 가욕관, 거용관, 산해관의 3대 관문 외에도 안문관, 평형관 등이 있었다. 단절되어 있긴 하지만 돈황에는 옥문관, 양관도 있다.

7.2. 팔달령 (바다링)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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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만리장성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八达岭长城

베이징 옌칭구에 위치한 장성 구간으로, 명나라 홍치제 ~ 만력제 연간에 수도 방위를 위해 벽돌을 이용하여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 여기에 더하여 20세기 말엽 대대적인 복원공사까지 이루어져 가장 완벽한 형태의 장성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베이징 시내와 직결되는 바다링 고속도로와 철도 등이 있어 교통이 용이하다. 따라서 베이징을 통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며, 특히 하늘이 맑은 가을철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베이징의 전문, 천안문 (역사박물관 앞), 숭문문로 입구에서 장성 전용 관광차를 이용하면 인당 왕복 36위안에 편하게 도달할 수 있다. 가장 저렴한 방법은 덕승문에서 5분 간격으로 있는 919번 버스를 타는 것이다. 교통카드 사용시 40% 할인 적용된다. 철도 교통으로는 베이징 베이역(북역)에서 교외 교외기차S2선을 타고 바다링창청역에 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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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링 관광 지도

팔달령 장성은 작은 관문성을 중심으로 협곡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관성(关城)이라 불렀다. 지도의 오른쪽 상단에 남쪽으로 확 꺾어지는 곳의 동쪽으로도 성벽이 일부 연장되어 있으나 중간에 바위가 있어 위험하니 가보지 않는 것이 좋다. 케이블카(왕복 60위안)가 양측 산 모두에 설치되어 있어 능선 위까지 손쉽게 이동할 수 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20명 이상의 단체라면 야간 관람을 예약하여 19-21시 동안 둘러볼 수도 있다.

연휴 기간에는 오전 10-11시와 오후 2-3시 경에 혼잡하여 그 시간대를 피하는 것이 좋다. 팔달령 구간은 만리장성 중에서도 경사가 큰 편인 곳이라 운동화를 신는 것이 좋다. 입장료는 성수기 (4월 ~ 10월)에는 성인 기준 45위안(노인, 학생은 25위안. 장애인 무료)이고 비수기(11월 ~ 3월)에는 성인 기준 40위안(노인, 학생은 20위안, 군인 및 장애인 및 어린이 무료)이다.

7.3. 고북구 (구베이커우)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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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베이커우 장성의 장엄한 풍경

명나라 대의 성벽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산세를 휘감는 모습이 용과 같다 하여 사진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에서 언급되었다. 다만 팔달령과 달리 관광지화는 되어 있지 않아 찾아가려면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또한 접근이 워낙 어렵다보니 현대에도 중장비 동원이 쉽지 않아 많은 구간이 방치된 상태이다. 따라서 방문시 안전 문제도 감안해야 한다.

7.4. 가욕관 (자위관)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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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욕관에서 서쪽으로 약 6km 가량 더 뻗어 있는 명대의 장성. 다른 장성 부분들과 달리 진흙을 다지는 중동-서역식 공법으로 지어졌다. 명대 장성의 서쪽 끝인 제1돈은 바이다 강의 절벽 위에 세워져 정말 끝자락임을 실감하게 한다.

7.5. 둔황의 한대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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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역으로의 관문이던 옥문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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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 인근의 돈대 유적

명대의 장성보다 약 300km 가량 더 서쪽으로 뻗어 있던 한대 장성의 유적. 옥문관과 양관의 두 개의 끝 지점이 있다. 장건의 서역 원정이나 서유기의 모태가 된 현장법사의 서역행이 다 이곳에서 시작되거나 끝난, 역사적인 명소이다. 실크로드의 상징물 중 하나이다.

8. 논란

8.1. 중국 동북공정 한반도 포함 시도

<colbgcolor=#CC0000> 고구려 천리장성이 만리장성이 된 경우를 다룬 KBS 역사스페셜의 영상
흉노족을 튀르크의 옛 조상들 중 하나라고 보는 튀르키예에서는 만리장성이 튀르크족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보고 있다. 이쪽에서는 만리장성을 뜻하는 Çin seddi를 상대방을 관광보냈다 혹은 따먹었다 정도의 은어로도 쓰인다. 몇몇 튀르키예의 극우 투란주의 성향의 사학자들은 흉노를 매우 강하게 과장하기 위해서 만리장성의 위치나 길이를 왜곡하는데, 심할 경우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을 연해주로 왜곡하기도 한다.

몇몇 자료에서는 진-한대의 장성에 이어 고구려 성을 장성으로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박작성 유적을 만리장성 동쪽 부분의 시작 지점으로 삼겠다는 몇몇 사학자들의 주장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허베이성 끝에 위치한 산해관이었으며, 고구려의 박작성으로 비정되는 호산산성은 장성의 동단 기점이 아니었다. 물론 고지도에는 현 요동 반도 지역에 벽돌로 쌓은 장성 대신 목책과 보를 표시하고 있어서 이를 장성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중국에서 펴낸 장성에 관련된 연구 서적을 살펴 보면 '목책은 장성으로 볼 수 없다.'고 당당히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책과 보를 중심으로 쌓은 것을 장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성의 정의를 방어 목적으로 길게 이어 쌓은 성이라 말하는데도 요동의 목책은 장성처럼 길게 이어 설치한 것이 아니라 주요 군사 지역 주변에 드문드문 설치한 것이라 이러한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잃는다. 이 주장의 요지는 여러 고지도에서도 표시되지 않는데도 '장성의 석축'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관련 조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보고서가 현재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박작성이 만리장성의 일부(!)라고 왜곡하는 것으로 보인다. # #
<colbgcolor=#CC0000> 사실 한반도까지 만리장성이 있었다는 중국의 주장을 다룬 비디오머그의 영상

또한 중국은 한반도 북부( 평양 지역)까지 만리장성이 있었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영상에서도 나오듯, 이는 북한을 합병하기 위해서 북한 유사시 중국 인민해방군이 빠르게 밀고 내려와 북한을 점령한 뒤, 한반도가 중국의 영토라는 걸 주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뉴욕 메트뮤지엄 '중국관' 역사날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국 지도' 오류 투성이 '평양까지 뻗은 만리장성' 中 동북공정이 왜곡한 세계지도 반크는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뻗어 있는 지도를 두고 '만리장성이 고무줄인가요?'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역사 왜곡을 비판하는 포스터를 제작해 SNS에서 배포한다고 밝혔다. #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왜곡 행위를 바로 잡아줄 것을 유네스코 등 국제사회에 요청한다고 밝혔다. # 유네스코 등재란에 만리장성 소재지에 지린성 랴오닝성도 포함되어 올라가있어 문제가 많다. 정작 유산에 대해 소개하는 항목에는 "허베이성에서 시작해 간쑤성에서 끝난다"라는 기존의 문구가 그대로 있어 소재지 표기와 모순되는 상황이다.

다만 현재까지 변한게 없는 걸로 보아 유네스코는 이 문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어보인다. 사실 한국에서도 크게 논란이 되지않아서 화력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다.

3월에 백두산이 창바이산으로 등재된 이후, 각 언어의 위키백과에 올라온 이미지에서 만리장성에 대한 노골적인 왜곡도 심각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스 위키백과 영어 위키백과 일본어

8.2. 길이

2012년에는 만리장성의 길이가 기존의 두 배 이상 늘어난 21,196.18km라고 발표했다. 21,196.2km이면 서울에서 뉴욕이나 토론토까지의 거리의 두 배, 서울에서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까지의 거리보다도 길다는 것이 된다. 참고로 서울에서 토론토까지는 10,700km, 뉴욕까지는 11,000km, 부에노스 아이레스까지는 19,400km, 몬테비데오까지는 19,600km다. 지구 한 바퀴가 40,075km로, 걸인 지구 둘레의 절반보다 약간 긴 수준의 거리이다. 기사를 살펴 보면 중국의 발표는 고구려나 발해 성을 장성의 일부로 왜곡한 것도 있지만 주된 것은 진나라 및 한나라, 명나라의 장성 유적뿐만 아니라 그외 기타 왕조에서 건설된 다양한 장성을 조사한 것으로 그것을 모두 합산하여 만리장성의 길이가 연장되었다는 내용이었다.

8.3. 우주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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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 위성으로 바라본 만리장성
이는 빌딩 꼭대기에서 길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보인다고 하는 말과 같다.

만리장성은 사실 길이는 길지만 폭이 좁으므로[13]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건 상식. 저 위의 사진도 줌기능으로 당겨서 본 거지, 본래 사진을 보면 그냥 안 보인다.

본래 이 말은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쓴 유명한 천문학 책인 《 코스모스》에서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이 실은 오늘날( 1980년) 지구를 선회하는 인공위성에서 식별할 수 있는 지구의 유일한 거대 (인공)지형지물이다.'
라는 문구(한국어판에서는 151P.)가 달로 와전된 경우로 보인다.

실제로는 그 이전 문헌에도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19세기~20세기 초의 기록에서도 비슷한 문구가 발견되는 것을 볼때 우주시대 이전부터 떠돌던 관용구가 과학기술 발전으로 반박된 뒤에도 계속 남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중국인 최초로 유인 우주선에 탄 양 리웨이는 지구 바깥에선 그 어느 건물도, 그 어느 것도 안 보였다고 말하면서 칼 세이건의 주장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한국에 널려있는 아파트들, 공원 운동장들조차도 만리장성보다는 폭이 넓다. 10m면 아파트 건물은 커녕 집 1채의 길이/폭과 비슷하다. 망원경으로 보더라도 아파트나 운동장보다 더 안 보이는 게 만리장성이다.

21세기 기준으로는 현재 나무위키를 읽고 있는 독자가 현재 위치해 있는 건물들은 사실상 100% 민간 위성지도에 기록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만리장성 같은 곳도 구글 지도 같은 서비스에서 얼마든지 위성 이미지를 찾아볼 수는 있다.

9. 여담


파일:675fcab5fd1d444b9ee04e41320db017.jpg
파일:nanfangchangchengfeigaoqingtupian-12892420_3.jpg
남방장성 풍경

10. 대중문화에서

각종 창작물에서는 중국의 상징 중 하나라 그런지 중국인 캐릭터들의 홈 그라운드로 많이 애용되기도 한다.

11. 같이보기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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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 본래 해당 지역에는 장성이 없지만 중국은 해당 지역에 소재한 고구려 등 다른 국가의 성을 훼손 및 개조하여 장성의 일부라고 통해 주장하고 있다. 동북공정 서북공정의 일환인 셈이다. [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 [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6]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다른 기준과 함께 적용 권장) [7] 구간에 따라 등급이 다르다. [8] 위 사진이 이 구간이다. [왜곡] [왜곡] [11]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고대 중국에는 성벽을 쌓는 방법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벽돌을 쌓아 만드는 방법이 아니었다. 흙과 건초 반죽을 번갈아가며 쌓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방식을 [12] 예시로 일제강점기 한국 소설인 태평천하의 마지막 장도 '망진자는 호야니라' 즉 망진자호라는 뜻으로 나오는데 마찬가지로 주인공인 윤직원이 자기가 가장 기대를 건 증손자가 사회주의자라는게 들켜 잡혀가는 것을 알게 되어 충격받는 장면이다. [13] 만리장성의 전체적인 길이가 5,000km ~ 6,000km 정도 되는데 폭은 고작 10m도 안 된다. [14] 정작 수나라는 기껏 만들어놓고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당시 대운하 건설을 위해 수많은 인력이 희생됐으며 건설을 주도했던 수양제가 민생 대신 온갖 사치와 폭정, 무리한 원정 등에 집착하면서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 [15] 그리스 신화에도 이와 비슷한 편지가 등장한다. 벨레로폰의 편지 문서로. [16]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로부터의 보안을 강화하려면 검문을 강화하기위해 국경에 벽을 쌓는 편이 용이할 것이다. [17] 신장 자치구는 이슬람국가로의 독립을 노리고 있고, 중 정부는 이를 테러리스트들의 분열조장으로 바라본다. [18] 축구에서는 완전 정반대 이다. [19] 보수를 10회 성공하면 소량의 국내성, 장안성 비서를 주지만 10000회 성공하면 당시에 구하기 힘들던 천풍선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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