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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묘 | 진시황릉 | ||
기타 | 반량전 · 아방궁 · 만리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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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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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0000><colcolor=#ffd700>명칭 | 한국어 | 아방궁 유지 |
간체 | 阿房宫遗址 | |
정자체 | 阿房宮遺址 | |
영어 | Site of Epang Palace | |
분류 |
고유지 (古遗址) |
|
시대 | 진 | |
일련번호 | 1-0151-1-016 | |
주소 |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시안시 웨이양구 싼차오톈타이루A15호 陕西省西安市未央区三桥天台路A15号 |
|
등재 | 1961년 | |
차수 |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 AAAAA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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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五步一樓(오보일루) 十步一閣(십보일각)
[다섯 걸음에 한 누각, 열 걸음에 한 전각이라.]
- 두목(杜牧), '아방궁부(阿房宮賦)' 중에서. 영웅주의에 크게 경도된 김동인의 소설에 꽤 자주 등장하는 문구다.
[다섯 걸음에 한 누각, 열 걸음에 한 전각이라.]
- 두목(杜牧), '아방궁부(阿房宮賦)' 중에서. 영웅주의에 크게 경도된 김동인의 소설에 꽤 자주 등장하는 문구다.
기원전 200년대에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짓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궁궐이다. 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나라가 무너지고, 그 과정에서 항우가 불태워 버렸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 아방궁은 이 궁궐의 정식 이름이 아니다. 궁궐명은 조궁(朝宮)이고 궁궐의 일부인 전전의 이름이 아방(阿房)이다[1]. 즉 조궁이나 아방전이 정확한 명칭.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조 주석에 따르면 아방(阿房)의 아는 가깝다는 뜻이고 방은 곁 방(傍) 자와 같은 뜻으로, 기존 함양궁 근방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었다. 공사 중에 임시로 이 지명을 붙여 아방궁이라고 불렀고, 미완성된 상태에서 공사가 중단되어 정식 이름이 지어지지 못한 것이다.
아방궁은 결국 궁전으로서는 제 역할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지만,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였던지 아방궁이란 명칭이 한자문화권에서 가장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상징하는 단어로 남아 있다. 보통 너무 크고 사치스럽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비유하는 편이 많으며 인생무상과 같이 삶의 덧없음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이 아방궁과 조조의 동작대를 가리켜 "천고춘추 아방궁, 만고일월 동작대"라고 부르며 허망한 인간의 권력 성쇠를 비유하기도 한다.
2. 역사
본래 진나라의 수도에는 이미 여러차례 증축한 거대한 함양궁이 존재했으며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할 때만 하더라도 함양궁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후 자신의 거대한 무덤인 진시황릉과 만리장성처럼 새로운 큰 궁궐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것이 아방궁이다. 함양궁은 증축을 거듭한 끝에 함양궁 위치의 지리적인 한계에 부딪혔다고 전해진다. 혹은 삼보황도에 따르면 혜문왕 시절 처음 아방궁을 지었는데 진시황제가 크게 증축했다고도 한다. 물론 사기에 언급된 아방의 의미를 생각하면 함양근교에 다른 궁궐을 지을 때도 임시명칭으로 아방을 돌려 쓴 것일 수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아방궁의 전전[2]은 동서로 500보(약 909미터) 남북으로 50장(약 151미터)이며 위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고 아래로는 15미터 가량의 깃발을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다만 아방궁 건축 이전과 이후의 중국의 건축사와 왕과 황제의 거대하고 사치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대명궁, 자금성, 원명원, 기타 황실 불교 사원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작은 편에 속해보일 수 있는데 전전의 크기가 위와 같을 뿐 전체적인 궁 크기와 단순 비교하면 안 된다. 진한대 궁의 배치와 전각의 형태는 후대와 상당히 다르다. 참고로 폭군이 아닌게 확실한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 진의붕과와 초한대전으로 민생이 막장일 때 새로 짓거나 증축하여 사용한 미앙궁과 장락궁이 각각 5km2와 6km2정도로 대명궁의 두 배고 황성을 포함한 자금성의 절반인데[3] 미앙궁의 전전은 넓이가 약 200 x 400m다.
그러나 진시황제 생전에 완성되지 못해 이세황제로 넘어갔고 이후 진나라에 대한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유방의 손에 함락되었다. 당시 유방이 입성 후 그 화려한 규모에 놀라고 어머아마한 규모의 궁녀와 보물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항우의 손에 떨어지자 항우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를 불태워 버리는데 3개월 간이나 불타오르고도 열흘은 더 불타올랐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즉, 아방궁이 전소되기까지 무려 100일이나 걸렸다는 이야기다.
진시황제가 건립한 만리장성이나 능묘가 실존하는 만큼 이 건물도 실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정작 아방궁지에서는 관련 유물이나 증명할 만한 고고학적 자료는 출토되지 않아 실존을 의심하는 학자도 많은 편이다. 아방궁지로 추정되는 곳에선 사기의 기록보다도 넓은 판축토대는 발견되었으나 건물이 지어진 흔적이나 화재의 흔적은 전혀 없어 기록과 맞지 않다. 기사.
이에 따라서 사실 아방궁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으며 실제로 항우가 불태운 것은 함양궁이라는 설도 있다. 사실 사기에 항우가 아방궁을 불태웠다는 기록은 없다. 아방궁을 묘사한 사기의 기록은 진시황이 공사를 시작하여 겨우 토대만 다져 놓다가 진이 망해 버렸는데 후대에 부풀려진 채 전해져 내려온 기록이 수록된 것일지도 모른다.
3. 기타
- 동아시아에서는 과하게 크고 화려한 관청을 비하하는 말로도 쓰이는 편이다. 대체로 지자체의 재정이 좋지 않거나 적자를 내고 있을 때 이런 호화청사를 지어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성남, 용인, 서울시청 등이 이런 지적을 받기도 했다. 건설비만 1600억 가까이…업무공간 50% 미만 호화 청사
- 중국은 한 술 더 떠 일개 지방 도시가 수천억~수조원의 건축비를 쏟아부어 경쟁하듯이 궁궐같은 청사를 올려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방정부들의 부채가 늘어나자 중국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들에게 호화 청사를 짓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중국, 지방정부 호화 청사 근절 선포
- 도쿄도청은 1980년대 가치로 1569억엔의 거금이 들어갔다. 도쿄도청 보수비만 9천억원"…호화청사 논란 재연
- 드라마 정도전 1화에서 언급된다. 절망한 공민왕이 노국공주를 아방궁 못지않은 곳에 쉬게 해 주어야 한다고 하자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가 "진시황의 아방궁이 백년을 갔습니까, 천년을 갔습니까? 진시황이 죽은 뒤 3년 뒤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라면서 만류하는 장면이 나온다.
- 노무현 前 대통령이 고향 봉하마을에 퇴임 후 머무를 사저를 신축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과 우파 언론들은 '아방궁' 에 빗대어서 '노방궁'이란 별칭을 만들어 비판한 적 있다. # 하지만 이는 훗날 일부 언론들에 의한 터무니없는 비난으로 밝혀졌다. # 이 사저 건물은 2024년 현재 일반에 개방되어 누구나 둘러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