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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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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대결 구도
미군 vs 소련군 }}}}}}}}}}}}
과테말라 내전
Guerra civil de Guatemala
Guatemalan Civil War
1960년 11월 13일 ~ 1996년 12월 29일
장소
과테말라 전역
원인
불평등한 토지소유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에 따른 토지개혁 무산
교전 국가 및 세력

[[과테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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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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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파일:과테말라 노동자당 당기.svg 과테말라 노동당(PGT)
파일:MR-13 깃발.svg MR-13
파일:FAR 깃발.svg FAR
파일:Ejército_Guerrillero_de_los_Pobres_(emblem).jpg EGP
파일:Organización_del_Pueblo_en_Armas_(emblem).jpg ORPA
지원 국가 및 세력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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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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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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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1962~1996)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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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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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983)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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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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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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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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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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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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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아프리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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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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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FMLN

[[니카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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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라과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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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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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1979~1990)
지휘관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미겔 이디고라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엔리케 페랄타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훌리오 멘데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카를로스 아라나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셸 라우헤루드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로메오 루카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오스카르 메히아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비니시오 세레소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라미로 데레온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알바로 아르수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롤란도 모란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루이스 투르시오스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마르코 욘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베르나르도 알바라도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로드리고 아스투리아스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리카르도 로살레스
병력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군
51,600명(1985)
45,000명(1994)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준군사조직
30만 명(1982)
50만 명(1985)
32,000명(1986)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전투원[1]
6,000명(1982)
3,000명(1994)
피해규모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군 2,500명 전사(1978~1983)
파일:미국 국기.svg 미군 28명 전사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미상
28,000명[2] / 37,000명 / 200,000명[3] 사망 또는 실종
결과
1996년 평화협정
URNG 합법화
군의 정치참여 금지
과테말라 민사경찰 창설
영향
다수의 마야인들이 피해를 입음

1. 개요2. 배경3. 1960년~1966년, 내전의 시작, 군부의 발호4. 1966년~1973년, 암살과 "실종"의 시대
4.1. 1970년대 사회운동의 활성화 및 반군의 진화
5. 1978년~1983년: 초토화작전6. 1983년~1996년: 민주주의와 평화로의 이행7. 피해8. 여담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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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과테말라 내전 1960년부터 1996년까지 과테말라 친미정부와 다양한 좌익 반군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1960년 11월 13일 소장파 좌익장교들이 이디고라스 푸엔테스 정권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패배했다. 봉기군은 과테말라 동부 산악지대로 피신, 그곳에 은거하다 1962년 반군 단체 MR-13(Movimiento Revolucionario 13 Noviembre)를 결성했다. 1970년 과테말라 정부는 카를로스 마누엘 아라나 오소리오 대령이 이끄는 제도민주당(PID)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제도혁명당 정부는 이후 12년간 부정선거로 정권을 유지했다. 1982년 3월 23일 제도민주당 정권은 다시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의 쿠데타로 엎어졌다. 70년대 내내 정권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과 농민의 수가 증가했고 적잖은 수가 정부에 맞서 반군을 조직했다.

1981년부터 과테말라군은 5년간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군은 거의 모든 사회 및 정치적 기관에 침투하여 적대 세력을 격멸하는데 성공했다. 군정보국은 정부 반대파를 살해하거나 '실종'시키는 작업을 조율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반군이 주둔한 농촌에서 농민들을 대대적으로 살육하거나 마을 전체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런 학살은 주로 마야인을 상대로 벌어졌다. 정부 반대자로 의심되는자, 귀환 난민, 비판적인 지식인과 좌익 정치인, 노조 운동가, 종교인, 언론인도 이런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당시 학살의 희생자는 최소 2만 5천명이며 정확한 수치는 아직도 모른다.[4] 실제로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합산해 10만명 이하가 사망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2009년부터 과테말라 사법부는 과테말라 내전에서 학살을 저지른 정치인과 군인들을 기소하고 있다.

2. 배경

파일:Justo_Rufino_Barrios.jpg 파일:Presidente_Jorge_Ubico_Castañeda.png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 호르헤 우비코
1871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자들은 의욕적으로 커피 생산을 늘렸다. 당시 대통령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는 1877년 일용노동자 규정(Reglamento de Jornaleros)을 제정하여 원주민 노동자들이 크리오요와 독일인 이민자로 구성된 지주들을 위해 저임금으로 일하도록 강요했다. 바리오스는 또한 원주민의 공유지를 '합법적으로' 몰수하여 근대적 소유권에 근거한 대토지 소유의 기반을 확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측근들에게 배분하여 대지주로 키워줬다. 이것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은 물론이고 라파엘 카레라의 보수주의 정권에서도 벌이지 않은 짓거리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과테말라 자유주의자들은 수출산업 활성화와 근대적 인프라 구축을 위해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이하 UFC)를 비롯한 미국 기업의 조세를 면제해주고, 공공자산을 사유하여 미국 기업에 매각했다. 1931년 집권한 호르헤 우비코 정권이 1944년 과테말라 혁명으로 붕괴되어 자유주의자의 집권이 끝났다. 뒤이은 총선에서 과테말라 최초의 민선 대통령 후안 호세 아레발로 박사가 승리하여 집권했다.과테말라 혁명이 성공한 1944년부터 CIA가 지원한 군부 쿠데타로 정부가 무너지는 1954년까지 10년의 기간을 10년의 봄이라고 부른다.
파일:Juan_jose_arevalo_bermejo_large.jpg 파일:Jacobo_Arbenz_Guzman_(oficial).jpg 파일:Carlos_Castillo_Armas_(LOC_98512008,_low-res).jpg
후안 호세 아레발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아레발로는 최저임금법, 교육예산 증액, 노동개혁 등 주로 노동과 복지분야의 사회개혁을 추진했지만 그 혜택은 대부분 중상류층에게 돌아갔을뿐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업노동자들은 받지 못했다. 아레발로는 숱한 쿠데타 위협을 모두 이겨냈고 1950년 대선에 당선된 하코보 아르벤스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아르벤스는 전임 아레발로의 진보적 개혁노선을 이어받아 강화시켰다. 그는 대대적인 인프라 건설에 착수했고 1952년 6월 17일 토지개혁 법안(900호 법령)을 통과시켰다. 아르벤스는 673에이커(272헥타르) 이상의 모든 비경작지 그리고 224에이커(91헥타르)와 672에이커 사이의 부동산 중 비경작지가 1/3 이상인 것들을 유상몰수하는 식으로 온건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토지개혁은 빠른속도로 진행되어 1954년 6월까지 인구의 1/6에 달하는 50만 명이 140만 에이커(57만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분배받았다. 그러나 보다 온건한 아레발로마저 고깝게 본 대지주와 UFC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에 당연히 경기를 일으켰다. 아르벤스의 목적은 봉건적인 과테말라를 현대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재편하는 것이었지만[5] 과두지배자들은 자기들의 권력 기반 그 자체인 대토지를 해체하려는 그의 개혁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다. 게다가 일부 농민의 자의적인 토지 점거나 지주와 농민간의 폭력 사태마저 발생했다.

UFC도 토지개혁법에 따르면 55만 에이커(22만 헥타르)에 달하는 소유지의 85%에 달하는 비경작지를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6] 문제는 아르벤스가 제안한 액수가 너무 낮았다는 것이다. 1953년 2월 28일 아르벤스 정부는 1차로 UFC 소유 비경작지 23만 4천 에이커(9만 4,700헥타르)를 수용했다. 미 국무부는 3월 25일 토지 수용에 항의하는 서한을 과테말라 측에 보냈고 6월 26일에 답변을 받았다. 아르벤스는 작년 5월 10일 UFC가 제출한 토지 가격평가 결과에 근거하여 62만 7,572달러(2023년 현재 726만 달러)를 장기채로 지불했다고 주장했다.[7] 반면에 UFC는 해당 토지의 실 가치가 1,935만 5천 달러(2023년 현재 2억 2,390만 달러)라고 주장했다. 같은해 과테말라의 GNP는 5억 5,830만 달러, 정부예산은 6,287만 5,000달러(재정적자 149만 달러), 외환보유고는 4,320만 달러였다. 즉 당시 과테말라 GNP의 3.5%, 정부예산의 30.7%, 외환보유고의 44.8%에 해당하는 액수를 요구한 것이다. 과테말라 정부 입장에선 지불하기 힘든 거액을 요구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과테말라 최대의 대지주인 UFC 입장에서 보면 지불능력도 안되면서 헐값에 몰수한다고 느낄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UFC의 입장에 동조하여 UFC가 주장한 가격에서 조금 깎아서 1,584만 5,849달러(2023년 현재 1억 8,331만 달러)를 요구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954년 2월 24일 과테말라 정부는 2차 수용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UFC 소유 비경작지 17만 3천 에이커(7만 헥타르)를 수용했고 보상액은 55만 7,542달러였다. 과테말라 정부는 또한 UFC가 차별을 받는다는 주장에 대해 UFC 소유지가 전체 수용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 미만이라며 차별은 없다고 반박했다. UFC는 CIA의 아르벤스 축출 계획을 승인하도록 본국 정부를 설득했다. 마침 CIA 국장 앨런 덜레스와 그의 형인 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둘 다 UFC 경영진과 친분이 있었다. 결국 토지개혁은 아르벤스 정부가 1954년 6월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붕괴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3. 1960년~1966년, 내전의 시작, 군부의 발호

1960년 11월 13일, 일단의 소장파 좌익 장교들이 이디고라스 푸엔테스 정권(1958~1963)에 맞서 봉기했다. 그들은 이디고라스 정권의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자기를 지지하는 장교들에 특혜를 베푸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결정적으로 피그만 침공을 위한 미국의 훈련기지 설치를 군대와 상의하지도 않고 독단으로 허용하며 게다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보상을 독점한 것이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봉기군의 병력은 장교 120, 병 3,000으로 이들은 사카파 군사기지와 대부분의 동부 군사지구를 점령하고 이디고라스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군 공군기로 위장한 미 공군 B-26의 폭격으로 기지가 파괴되었고 반군은 과테말라 동부로 후퇴했다. 1962년 이들은 봉기가 일어난 날을 기념하여 MR-13(Movimiento Revolucionario 13 Noviembre)을 결성하였다.

1960년대 반군은 주로 과테말라 동부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했다. MR-13은 1962년 2월 6일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개시했고, 이후 과테말라 노동당(PGT)[8], 4월 12일 운동(Movimiento 12 de Abril), 에드가르 이바라 게릴라전선(FGEI)과 접촉하여 1963년 2월 7일 과테말라시티의 한 건물에서 연합조직인 무장반란군(FAR)을 결성했다. MR-13과 PGT, FGEI는 동부에서 각자 자기 '전선'을 만들었는데 MR-13은 이사발과 사카파, FGEI는 시에라데라스미나스에서 활동했고, PGT는 도시게릴라로 활동했다.

한편 군부는 1963년을 기점으로 과두지배자를 위한 기구에서 새로운 지배세력 그 자체로 변모했다. 그 계기는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민중시위였다. 이디고라스를 지지하는 정당연합은 1961년 12월 총선에서 부정선거로 승리했다. 새 국회의원의 임기가 시작되는 1962년 3월 1일 과테말리시티의 학생단체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는 곧 치키물라, 후티아파, 레탈울레우, 산마르코스, 우에우에테낭고, 케찰테낭고 등 과테말라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민중도 동조 파업과 작업중단 등의 방식으로 지지했다. 19일 이디고라스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민중시위를 공산주의자가 선동한 것이라고 몰아가며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또한 몇주 내로 내각인사를 전부 군인으로 교체했다. 시위는 22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사상자 300~500여명과 피체자 1,000여명을 내고 진압되었다. 비록 정권은 지켰지만 이때 진압으로 이디고라스는 인기를 잃게 되고, 좌익은 1963년 대선에 전 대통령 아레발로를 중심으로 단일화하여 권토중래를 노렸다. 군부는 아레발로의 대선 당선 가능성에 경기를 일으켰고 결국 3월 30일 엔리케 페랄타 아수르디아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페랄타는 나라 전체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했다고 주장하면서 1963년 대선을 취소했다. 또한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새로운 국가원수로서 정부의 모든 기능을 인수받았다. 1964년에는 멕시코 제도혁명당을 모델로 삼은 어용정당 제도민주당(PID)을 창당했다. 제도민주당은 형식적 민주주의인 과테말라의 국회 내에서 우호 정당과 연립하여 상당한 의석을 차지하고 정권을 뒷받침했다.

정부군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반군 진압작전에 나섰다. 이해 2월과 3월 정부군 공군이 이사발의 MR-13 기지를 공습하였다. 이듬해 9월과 10월에는 '팔콘 작전(Operation Falcon)'을 벌여 사카파 일대의 반군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과 경찰은 미국으로부터 각각 대게릴라전 교관과 고문을 지원받았다. 11월에는 도시게릴라를 상대로 '림피에사 작전(Operation Limpieza)'을 벌여 PGT의 핵심요인을 억류, 고문하고 살해했다.

4. 1966년~1973년, 암살과 "실종"의 시대

정부는 반란 진압에 정규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그들을 보조할 처형부대(death squads)들을 대대적으로 조직하고 후원했다. 1966년 이후 2년만에 최소 19개 처형부대(death squads)가 창설되었고 이들은 좌익분자는 물론 평범한 시민과 그들의 친구, 가족들까지 탄압했다. 예를 들어 1966년 3월 3일부터 5일까지 군정보국 G-2와 사법경찰(Policía Judicial)은 수도 과테말라시티의 PGT 및 노동조합 지도자 28명을 체포했다. 그들은 모두 "실종"되었다. 정부군에 의한 "실종"자의 가족들과 대학생연합(AEU)이 진상을 밝히려고 하자 정부는 처형부대를 보내 다수의 대학생연합 회원들을 암살했다. 11월 2일에는 국토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인권이 정지되었다. 도시든 농촌이든 좌익분자 또는 그 동조자로 의심된 자들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도시에서는 사복을 착용한 중무장 병력이, 농촌에서는 제복을 착용한 육군순찰대와 군사순경(PMA)이 이런 살해와 "실종"을 주도했다. 1966년 10월 정부군은 '과테말라 작전(Operation Guatemala)'을 개시, 사카파-이사발 군사지구에 5천의 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 진압작전에 나섰다. 여기서도 처형부대는 반군이나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를 살해하도록 허가받았고 실제로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76년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1966년 10월부터 1968년 3월까지 3천~8천명의 사카파-이사발 거주 농민들이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에 살해당했다. 또다른 추산치는 훌리오 멘데스 대통령[9] 재임기(1966~1970) 사카파에서만 1만 5천명이 피살되었다고 본다. 이 작전을 주도한 아라나 오소리오 대령은 "사카파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이렇게 반정부세력을 씨가 마르도록 죽여대다보니 FAR을 위시한 동부 반군의 세력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때 반군은 마야 원주민과 농민 문제를 등한시한 나머지 활동 지역에서 현지 민간인의 협조를 얻는데도 실패했다. 반군은 가장 세력이 컸을 때도 병력이 1,790명에 불과했고 이는 과테말라 정규군과 국가경찰을 합친 병력(22,000명)의 1/10도 되지 않았다. FAR 지휘관 루이스 투르시오스, MR-13 지휘관 마르코 욘도 각각 1966년과 1970년에 전사했다. 늦어도 이 시점에서 기존의 반군은 거의 괴멸되었다.

주목할 것은 반군의 활동이 미미해진 1970년대 전반기에도 정부군의 폭력은 줄어들지 않거나 오히려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계엄령은 1968년 6월 24일 "경보령"으로 단계가 낮아졌지만 1970년 7월 집권한 제도민주당(PID)의 아라나 오소리오 대령은 그해 11월 13일 다시 계엄령을 발표하고 오후 9시부터 오전 5시까지 통금령을 내렸다(계엄령은 1972년 말에 해제됨). 정부군과 경찰은 사법절차를 완전히 무시하며 적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과테말라시티에서만 수천여 명의 좌익분자, 학생단체 및 노동조합 운동가, 일반 범죄자들이 납치당해 고문받거나 살해되었다. 국제앰네스티와 실종자 유족 단체에 따르면 1970년과 1971년 사이 7,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살해된 채 발견되거나 "실종"되었고, 1972~1973년 추가로 8,000명이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과테말라 인권위원회(Guatemalan Human Rights Commission, 이하 GHRC)는 1970년부터 1974년까지 2만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산했다.

4.1. 1970년대 사회운동의 활성화 및 반군의 진화

1970년대는 사회운동이 활발해질 뿐만 아니라 반군의 구성과 전략이 대폭 변화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 반군은 크게 4개 조직으로 나뉜다. 세력이 확연히 위축된 FAR, 1971년 중서부 고원지대에서 결성된 무장민중혁명조직(ORPA), FAR의 일부세력이 결성한 빈민게릴라군(EGP), 1978년 PGT에서 분리한 PGT 전국지도핵심파(PGT-NDN)가 그들이다. 이 시대 반군의 특징은 포코 이론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즉 거점 전략을 포기하고 베트콩을 모델로 삼았으며, 마오주의 군사전략과 유사한 '장기전' 방식을 도입했다. 또한 반군에 마야 원주민이 대거 가담하거나 아예 원주민이 반군조직을 주도하였다. ORPA의 경우 조직원의 90% 이상이 마야 원주민이었고 지역 지도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1954년 아르벤스 정부 붕괴로 인해 마야 원주민 운동이 급진화되고 정치화된 결과이자, 동시에 원주민 문제를 등한시하여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기존 반군세력의 자기반성의 결과였다.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마야 원주민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만 바라본 PGT는 1960년대에 누린 지도적 역할을 곧 상실했다. 끝으로 주요 활동 지역이 동부 산악지대에서 마야 원주민이 밀집한 서부 고원지대로 옮겨갔다. 물론 마야 원주민의 반군 참여가 완전히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반군은 원주민의 거주지에서 자기들에 반대한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학살했고, 일부 원주민은 반군의 공포통치에 못 이겨 반강제적으로 반군을 지원하거나 도왔다. 당시 반군이 벌인 학살에 대해 후일 지도부가 사과했을 정도였다.

반군이 변화한 결과 1970년대 말 이르러 반군은 1960년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기껏해야 300~500명에 불과했던 전투원의 숫자가 4천~1만2천명으로 증가했고 게다가 대규모의 지지 집단까지 거느렸다. 1981년 마야 원주민 25만에서 50만 명이 반군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추산되며, 군정보국 G-2는 EGP의 원주민 지지자만 36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주의할 점은 마야 원주민이 반군의 주요 지지층이었다고 해서 그들 대부분이 반군의 지지자거나 협조자인 것은 아니란 점이다. 원주민이 서부와 중부 고원지대에 밀집한 특성상 반군과 접촉이 잦긴 했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농사짓고 하루벌어 하루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1980년 반군은 도시와 농촌에서 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농촌에서는 농장을 점거하고 유명한 지주들을 암살했으며, 도시에서는 주요 기관에 테러를 벌이거나 정부측 요인을 암살했다. 급기야 1981년 초에는 니카라과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고 심지어 과테말라시티를 종종 습격할 정도로 성장했다. 1982년 2월 8일에는 ORPA, FAR, EGP, PGT-NDN이 모여 과테말라민족혁명연합(URNG)을 결성했다. 하지만 URNG가 결성될땐 반군이 정부군의 토벌에 다시 지리멸렬하게 되어서 별다른 군사적 활약은 없었다.

5. 1978년~1983년: 초토화작전

1978년 수립된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은 반군 진압 과정에서 마야 원주민 공동체를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이에 1980년 1월 31일 마야 원주민 농민단체가 과테말라시티의 스페인 대사관을 점거하여 이 사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대사관에 화재가 발생해 스페인 외교관 8명을 포함해 3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10] 비록 이 사건으로 정권의 이미지가 실추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탄압이 느슨해지진 않았다. 정부군에 살해된 사람의 숫자는 1979년 일평균 20~30명에서 1980년 30~40명으로 증가했다. 1980년 한해에만 5천명이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에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1년 그 숫자는 9천명으로 더 늘어났다.

1980년에 거둔 일련의 군사적 성과와 니카라과 혁명의 성공은 반군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엘살바도르 내전 발발로 남부 국경이 불안정해지자 부득이하게 정부군이 남부로 재배치되었는데 그 결과 반군은 자기 군사력이 정부군과 맞먹는다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11] 반군은 잘못된 평가를 바탕으로 1981년 초 대대적인 공세를 벌여 서부와 남부 대부분을 점령하고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를 공격하며 과테말라시티를 서서히 옥죄어 들어갔다. 여름에는 과테말라시티를 목표로 정한 공세를 계획했다. 하지만 과테말라 정부의 대응은 한발 더 빨랐다. 이해 중순 정부군은 각 여단에서 3천~5천명 규모의 전략적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고원지대의 수색 및 격멸 임무에 투입하는 "특임대(task-force) 방식"을 도입했다. 정부는 7월과 8월에 걸쳐 도시에 잠입한 ORPA 조직을 전부 적발해내 ORPA 세력을 완벽히 고자로 만들어버렸고, 9월에는 EGP 조직도 적발했다. 같은 달 반군과 민간인 사회를 분리하고 나아가 반군 진압에 투입하기 위해 친정부 민간자위순찰대(PAC)를 편성하였다. 정부는 7월과 9월 사이 ORPA와 EGP로부터 노획한 문서를 토대로 게릴라 측의 과테말라시티 공세 예정일이 1981년 11월 13일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국방참모총장 마누엘 베네딕토 루카스 가르시아[12]는 11월 10일 참모본부 회의에서 게릴라가 공세를 벌이기 전에 선수를 쳐서 먼저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게릴라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정보기관의 보고를 토대로 마누엘은 지방 도시에 파견된 병력들도 작전에 모조리 동원했다. 11월 13일 새벽 1시, 2천명 이상의 정부군이 세니사 작전(Operación Ceniza)를 개시, 수도 주변의 게릴라를 겨냥한 대대적인 토벌전에 돌입했다. 정부군의 공세는 기습의 효과를 얻었고, 반군은 과테말라시티 인근 도시와 농촌의 위치에서 일패도지했다. 공세 첫날 정부군은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가 지나가는 중부 고원지대의 치말테낭고까지 도달, 그 주변에 전개하여 게릴라 소탕전에 나섰다. 정부군은 쾌속 진격을 거듭하며 아티틀란호 주변 지역을 확보했다. 반군은 서부 고원지대 키체 주 남단의 추폴(Chupol)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이곳은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가 지나가며 또한 방어에 용이한 요지였다. 이곳의 반군은 각종 장해물을 설치하여 정부군의 진격을 늦추었으나, 정부군은 열흘간의 전투 끝에 추폴을 확보하고 막대한 물자를 노획했다.

이제 정부군이 할 일은 패잔병 소탕밖에 없었다. 세니사 작전은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작전에 투입된 정부군은 총 1만 5천명으로 이들은 EGP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키체 주를 시작으로 우에우에테낭고 주와 멕시코-과테말라 국경지대까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깊숙히 진격하였다. 이 작전은 그 이름값을 하는[13] 피눈물 없는 전면적인 초토화작전이기도 했다. 정부군은 처음부터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정부군은 학살을 피해 도망친 주민들을 "반군 지지자"로 간주했고, 그들이 뒤에 남긴 마을과 농작물에 방화하고 가축들을 도살해 생존자들의 남은 삶의 기반마저 완전히 파괴했다. 어떤 희생자들은 살해되기 직전 자기가 묻힐 집단매장지를 직접 파야 했다. 과테말라 가톨릭대주교인권사무국(ODHAG)에서 발행한 REMHI 보고서에 따르면 1981년 세니사 작전으로 살해된 사람은 1만1천명에 달했고 그들 대부분은 서부 고원지대의 원주민 농민들이었다.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의 잔혹한 토벌작전은 군부에서도 불만분자를 양산하기에 이르렀고[14] 결국 1982년 3월 23일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내쫓았다. 12년에 걸친 제도민주당 정권의 종말이었다. 리오스 몬트 정권은 집권 직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15] 4월 10일에는 "안보와 발전을 위한 국가계획안(Plan Nacional de Seguridad y Desarrollo, or PNSD)"을 발표하였다. PNSD의 목적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끝내고 주민들에게 과테말라 국민의식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정권은 문맹하고 "미성숙"한 농민과 원주민들은 국제공산주의의 유혹에 취약하다면서 그들을 과테말라 국가의 체제에 편입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 PNSD를 실현하기 위해 그 세부계획으로 빅토리아 82 작전(Operation Victoria 82), 피르메사 83 작전(Operation Firmeza 83), 소피아 작전(Operation Sofia)을 수행했다.

빅토리아 82 작전의 목표는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당시 진행되던 각종 소요사태를 "6개월 이내로"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작전의 주요 섬멸대상은 반군과 그 지지세력 또는 지지자로 의심되는 자들이었다. 즉 게릴라는 물론 그들을 지지하는 가톨릭교회, 노동조합, 결사체들이 섬멸 대상이었다. 당초 빅토리아 82는 루카스 가르시아의 무차별적인 섬멸전과 차별을 두어 심리전과 대민지원을 포함하고 반군에 대한 사면 및 주민을 위한 사회경제적 지원을 통해 반군을 민간인과 분리하여 섬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 빅토리아 82의 운용은 이전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처럼 일반적인 초토화작전에 가까웠다. 이것은 애초에 마야 원주민 마을들을 게릴라의 근거지, 그리고 마야 원주민들을 게릴라 또는 그 지지세력으로 상정하고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82 작전이 거시적 측면의 소요진압 작전이었다면, 소피아 작전은 좀 더 세부적인 측면에서 마야계 이실인 공동체(Ixil)에 대한 섬멸을 목표로 한 작전이었다. 이실인 공동체는 서부 고원지대의 교통이 불편한 고립된 지역에 있었으며 따라서 1970년대부터 EGP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과테말라 정부가 보기에 국가 체제로부터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이실인 공동체는 EGP의 근거지로 보였다. 1982년 7월 16일부터 8월 19일까지 진행된 소피아 작전은 이실인 공동체를 고립하고 원주민들을 직접 공격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작전이 끝난 뒤에도 1983년 1월까지 원주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진행되었다. 이곳의 원주민에 대한 잔혹행위가 끝난 것은 1987년이 되어서였다. REMHI 보고서에 따르면 이실인 공동체에서 8,857명이 사살되었고, 그 중 5,252명은 정규군에게, 2,270명은 친정부 민병대에 살해되었다.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사살한 것은 물론이고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하고 성노예로 전락시키거나, 또는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거나 남편에게 아내와 자식들이 강간당하는 것을 강제로 보게 하였다. 정부군은 이실인을 학살할 뿐만 아니라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여 생존자들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이실인 마을의 70~90%가 잿더미가 되었다.

피르메사 83 작전은 빅토리아 82 작전의 성과를 토대로 마야 원주민을 '국민'으로 개조하는, 다른말로 하면 '라디노화'를 수행하는 민사작전의 일환이었다. 정부는 각지에 군부대를 파견해 대민지원을 하면서 동시에 이주자와 난민을 관리하였다. 일부 난민은 남베트남의 '전략촌' 정책처럼 타지에 새로 건설된 마을에 수용되어 정부의 관리와 교육을 받았다. 정부는 또한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에서 창설된 PAC의 인원을 대대적으로 늘렸다. 리오스 몬트 정권 초기 2만 5천명이었던 PAC는 18세부터 50세까지의 남자를 대대적으로 징집하여 말기에는 70만 대군으로 급증했다. 물론 징집에 응하지 않는 자는 탄압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했다. PAC는 대게릴라전에 운용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라디노화'를 수행하는 또다른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마야인 PAC를 조직하여 마야 공동체 내부에 대게릴라 부대를 운용하고 이들을 통해 근대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였다.[16]

리오스 몬트 정권의 강력한 의지로 반군과 그 동조세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실제로 URNG는 민간인 지지자들로부터 거의 분리되어 외딴 시골로 내쫒기는 등 완전히 수세에 몰렸고 지도부는 아예 멕시코시티로 도망쳤다. 결국 군사력이 소진된 URNG는 1986년부터 정부와 협상에 나섰다. 정부군은 또한 사회의 전 분야에 침투하여 적대세력들을 절멸하고 사회 전 영역을 통제했다. 그 과정에서 마야 원주민들이 치러야 했던 대가는 극심했다. CEH의 1999년 보고서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절대다수의 학살이 서부 고원지대에서 자행되었다.

6. 1983년~1996년: 민주주의와 평화로의 이행

1983년 8월 8일 리오스 몬트 정권의 국방장관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메히아 빅토레스가 권좌에 오를 당시는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과 리오스 몬트 정권의 작전으로 반군을 민간인으로부터 분리하는데 거의 성공했을 때였다. 이 시점에서 군부는 군대의 경찰 통제, 난민 수용, PAC 확장, 재정착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과테말라 사회 전체를 군사화하여 사회의 전 영역을 통제했다. 메히아 빅토레스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민주주의로 점진적인 이행을 준비했다. 1984년 7월 1일 민주주의 헌법을 만들 제헌국회 총선이 실시되었고, 이듬해 5월 새로운 헌법이 작성되어 즉시 발효되었다. 1985년 대선에서는 과테말라 기독민주당(DCG) 후보 비니시오 세레소가 결선투표에서 68.4%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966년 이래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간인 대통령이 되었다.

1986년 1월 14일 취임한 세레소는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정지척 폭력행위의 중단 및 법치의 회복을 선언하였다. 세레소 정부는 인신보호영장과 암파로(amparo) 영장[17]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 국회에 인권위원회를 설립했으며, 1987년 인권옴부즈맨 사무소를 설치했다. 과테말라 대법원도 반부패 개혁 및 사법제도 효율성 제고에 착수했다. 세레소가 선출된 후 과테말라군은 정치 개입에서 물러나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세레소 정부의 전반기는 정치적 폭력이 확연히 줄어들고 경기가 안정되었다. 수세에 몰린 URNG도 1986년부터 무장투쟁보단 정부와의 협상에 집중했다. 세레소 정부의 후반기는 경제적 실패와 각종 사회갈등으로 얼룩졌지만 그래도 쿠데타 시도들을 이겨냈고, 1990년 5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URNG에게 이후 치러질 선거를 방해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1990년 대선에서는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가 당선되어 최초의 민선 민간인 정부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비록 메히아 빅토레스와 세레소 정부가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공을 세웠지만, 그들의 시대에도 암살과 "실종"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1991년 집권한 세라노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확립하고 고급장교의 수를 줄였다. 또한 세레소 정부 후반기 악화되던 경제문제를 해결했으며 URNG와 대화를 지속했다. 하지만 1993년 5월 25일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가 국내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일주일만에 사임하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국회는 6월 5일 인권옴부즈맨 출신의 라미로 데레온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세라노의 잔여 임기를 채우도록 했다. 데레온은 무소속이었지만 대신에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국회와 대법원을 '정화'할 야심찬 반부패개혁에 착수했다. 8월 26일 데레온은 모든 국회의원과 대법관의 사임을 촉구했다. 정부와 국회는 대립을 이어가다 1993년 11월 16일 가톨릭 교회의 중재 하에 합의에 도달하였다. 합의안 내용은 1985년 제정된 헌법의 43개 수정조항들로, 이 수정조항들은 1994년 1월 30일 국민투표를 거쳐 통과되었다.

데레온은 1월 6일 URNG와 협상을 재개했다. 그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UN과 미주기구(OAS)의 후원을 받았으며 반면에 군부가 협상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줄어들었다. 양측은 3월에 인권, 6월에 난민 정착과 역사 진상규명, 이듬해 3월에 원주민 권리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양측은 또한 사회경제 및 농업정책에 관한 협정에 상당한 진전을 이끌어냈다. 1994년 4월 3일 대법원장 에두아르도 에파미논다스 곤살레스 두본이 살해되고 이듬해 10월 5일 사만에서 군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데레온 정부는 자유선거를 치르는 데 성공했다. 1994년 8월 16일 잔여임기를 채울 새 국회가 선출되었고, 1996년 1월 7일 대선 결선에서 국민선진당(PAN) 후보 알바로 아르수가 당선되었다. 아르수 정부도 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URNG와 계속 대화했다. 3월 20일 휴전이 선언되었고 이후 여러 개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12월 12일 양측은 마드리드에서 URNG를 합법정당으로 전환하는데 합의했고, 18일 국회는 URNG 전투원을 부분적으로 사면하는 법안을 통과했다.

1996년 12월 29일 아르수 정부와 URNG가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장장 36년에 걸친 과테말라 내전이 완전히 끝났다. 1996년 평화협정은 1986년부터 시작된 정부와 반군 간의 협상의 종착역이었다. 협정 내용은 군에 독립적인 경찰 창설[18], 군 예산 삭감 및 병력 감축[19], PAC 해체[20], 사법부 개혁이었다. URNG 사령관 롤란도 모란과 과테말라 대통령 알바로 아르수는 과테말라 내전을 종식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UN 안보리는 1997년 1월 20일 과테말라에 평화협정의 적용을 감시하는 관찰단을 배치하는 내용의 1094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5월 UN 관찰단의 조회 하에 URNG의 무장해제가 완료되었다. 당시 무장해제한 URNG 병력은 약 3,000명이었다. URNG는 1999년 1월 정당을 설립하여 11월 대선에 참여했다. 그해 아르수 정부는 원주민의 인권 그리고 국가의 다문화, 다언어, 다인종 특성을 수용하는 개헌안을 의회 표결에 부쳤으나 부결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URNG는 정부에 내전 당시 군부의 인권유린과 학살의 진상규명을 강조했다. 양측의 논의 끝에 1997년 2월 CEH가 설치되었다. CEH는 마을 2천 곳을 방문하고 2만명의 증언을 청취했다. 1999년 2월까지 이어진 조사활동 끝에 그달 25일에 최종보고서 '침묵의 기억'(Guatemala: Memoria del Silencio)을 제출했다.

7. 피해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와 반군 양측 모두 학살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학살의 책임은 거의 대부분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 처형부대에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피살자와 실종자를 최소 20만 명으로 추정했지만, 20만 명이란 숫자는 단순히 통계적 외삽법으로 추정한 결과로 신뢰성에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내전 전 기간을 통틀어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합쳐 37,000명에서[21] 최대 10만명으로 추산된다. 20만이라는 숫자는 정확한 검증 없이 각종 논문이나 전문 서적에서마저 횡행하는 실정이다.[22]

정확한 피해자 추정치를 넘어서, CEH 보고서의 핵심은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는 것에 있다. 원주민을 상대로 한 학살과 초토화작전의 절반 이상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발생했다. 학살이 절정에 달한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수천여개의 마을이 파괴되었고 50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그 중 15만 명이 멕시코로 피신했다. 조사결과를 토대로 CEH 위원장 크리스티안 토무샤트(Christian Tomuschat)[23]는 정부군의 만행이 분명히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며 계획적인 전략이었다고 지적했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1980년~1989년 사이 내전으로 발생한 직접적이고 측정가능한 경제적 손실은 1990년 GDP의 121%에 달했다. 주원인(1990년 GDP의 90%)은 살해와 실종, 피란 및 정부군과 반군, 친정부 민병대의 징집으로 인한 생산의 저하였다. 사유 및 공유 재산과 인프라를 비롯한 물적 자산의 파괴로 인한 손실은 1990년 GDP의 6%였다.

8. 여담

토지를 지키겠다고 본의 아니게 내전의 단초를 제공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정작 미국 본국의 반독점법에 걸려서 이후 중남미의 철도망과 과테말라의 토지 일부를 토해내야 했다.

벤 마이켈슨이 이를 소재로 나무소녀를 썼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며 마야족에 대한 여러 억압 및 학살에 대한 내용들 나온다.

내전의 단초가 된 아르벤스 축출 쿠데타를 지켜보다가 혁명을 결심한 에르네스토 게바라라는 아르헨티나 의학도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체 게바라이다.

9. 관련 문서



[1] 동조 민간인 제외. 게릴라 특성상 전투원 또는 비전투원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민간인이 있음. 과테말라 군정보부 G-2는 원주민 최소 36만 명이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추산함. [2] 과테말라 정부군의 추산. [3] 실질적인 인구 조사 없이 그저 통계적인 계산을 바탕으로 추정한 값이라서 정확하지 않다. 본 문서 7번 '피해' 문단 참조. [4] 1994년 조직된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 이하 CEH)의 추산에 따르면 2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강제 ' 실종'되었다. 당시 학살의 93%가 정부군(민병대 포함)에 의해, 3%가 게릴라에 의해 자행되었다. 하지만 CEH의 보고서는 인구조사 자료를 잘못 인용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5] 그러다 보니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들은 아르벤스의 목적을 눈치채고 덜 급진적이라며 반발하여 연정에서 탈퇴했다. UFC의 선전과 달리 아르벤스는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6] 이 막대한 토지를 놀린 이유는 파나마병 때문이었다. 대책없이 경작지를 늘렸다가 파나나병으로 절단이 나 버리면 손을 쓸 수가 없어지기 때문에 대책이 나오기 전 까지 땅을 놀렸어야 했다. [7] 이건 UFC가 제 발등을 찍은 격인데 왜냐하면 그동안 탈세 목적으로 소유지의 가격을 낮춰서 당국에 신고했기 때문이다. [8] 공산주의 정당으로 아르벤스 정부에서 합법화되었다가 군사쿠데타 이후 다시 불법화된 상태였다. [9] 훌리오 멘데스는 1954년부터 1986년까지 이어지는 군사정부의 대통령 중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당초 과테말라의 민주주의 개혁을 이끌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멘데스는 군부의 지지를 대가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군을 진압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의 재임기에 정부군과 처형부대의 테러가 본격화되었고 그 규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했다. [10] 이 참사로 리고베르타 멘추의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스페인은 과테말라와 단교했다. 양국은 1984년 9월 22일에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 [11] 쿠바 혁명 니카라과 혁명에서 보이듯, 라틴아메리카의 좌익 혁명은 정부군이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좌익 반군에게 맥없이 패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심지어 엘살바도르 내전에서도 FMLN은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도 산살바도르 인근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과시했다. 그 영향으로 반군이든 정부군이든 반군의 실제 전력을 과대평가했다. [12] 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 대통령의 동생이다. [13] ceniza란 잿더미(ashes)를 뜻하는 스페인어다. [14] 이들은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의 군사행동과 조직적 테러가 반란의 사회적, 이념적 동기를 간과한 것이며 그 결과 민간인들을 급진화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15] 당시 과테말라 헌법은 1965년 페랄타 정권에서 제정된 것이다. 현행 헌법은 1985년 제정되었다. [16] 실제로 PAC는 인원이 가장 많았을 때 무장한 인원이 전체의 1%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구식 화기 또는 냉병기로 무장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정부의 목적은 실질 군사력 확보보단 마야 원주민에 대한 통제 강화 및 국민의식 주입 그리고 반군과 마야 원주민의 접촉을 차단하여 반군의 인력공급 자체를 말려버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고 봐야한다. [17] 독일의 헌법소원(Verfassungsbeschwerde)과 유사한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제도로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구제방법을 뜻한다. [18] 즉 경찰의 탈군사화. 과테말라 민사경찰(PNC) 창설로 이어진다. [19] 과테말라군 병력은 1996년 1월 52,875명에서 2004년 6월 15,500명으로 줄었다. [20] 1984년 130만명으로 인원 최대치에 달했지만 1994년에 이르면 3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동원해제 자체는 1996년 8월에 시작되었고 평화협정을 통해 해체를 선포했다. 그러나 다른 이름으로 남아 1999년과 2003년 선거에서 극우 정당 과테말라 공화주의전선(FRG)의 농촌 지지자 결집에 동원되기도 했다. [21] Sabino, Carlos (2008). Guatemala, la historia silenciada (1944-1989). Tomo II: El dominó que no cayó.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22] 과테말라 현지에서 오랫동안 연구해온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톨(David Stoll)은 전쟁이 최고조에 이른 1981~1982년에 과테말라 전역에서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불문하고 35,000명이 사망했고 # 내전을 통틀어는 6만~7만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게다가 1982년 리오스 몬트가 집권한 이후로는 민간인 학살이 오히려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물론 그도 리오스 몬트 정권에서 과테말라군이 반정부인사를 상대로 조직적인 학살을 벌인 것은 절대로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테말라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 있다. [23]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법학교수.